서양미술사 참고자료/자연주의-사실주의

서양미술사28 사실주의:도미에

AH101 2012. 2. 16. 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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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미에(Daumier, Honore Victorin, 1808~1879) ★

Andre-Marie-Jean-Jacques Dupin(Dupin the Elder), 1832

Colored Unfired Clay

프랑스의 화가, 판화가인 도미에(Honore Victorin Daumier:1808~1879)는 5세 때
유리직공이며 시인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파리로 이주하였다.
어려서부터 공증인 사무실의 급사나 서점 점원 일을 하며 고생하였으나, 화가를 지망
하여 석판화 기술을 습득하였다. 1830년 《카리카튀르》지 창간에 즈음하여, 이 잡지의
만화 기고가로 화단에 데뷔, 1832년 국왕 루이 필리프를 공격하는 정치만화를 기고하여
투옥되었다. 1835년 언론탄압에 의한 이 잡지의 발행금지 후에는 사회·풍속 만화로 전환
하여, 주로 《샤리바리》 지상에서 활약하였는데, 분노와 고통을 호소하는 민중의 진정
한 모습을 때로는 휴머니스틱하게, 때로는 풍자적인 유머를 담아 그렸다.
그 후 40년간 귀족과 부르주아지의 생태를 풍자하였다.
그의 석판화 제작량은 통산 4,000점에 이르고, 이 밖에 목판화가 있다.
40세경부터는 서민의 일상생활을 주제로 한 유화나 수채화 연작을 시도 날카로운 성격
묘사와 명암대조를 교묘히 융합시킨 이색적인 화풍으로 《세탁하는 여인》《3등열차》
《관극(觀劇)》《돈키호테》 등 걸작을 남겼다.
석판화의 대표작은 《로베르 마케르》이다. 그의 유화나 수채화는 그가 죽을 때까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 죽기 1년 전인 1878년에야 첫 개인전을 열었으나 거의 주목을
끌지 못하였다. 게다가 만년에는 거의 실명 상태로 친구가 제공한 발몽두아의 조그만
집에 살다가 일생을 마쳤다.

도미에는 혁명의 수단으로서 그림을 그려낸 혁명 화가였다.
나이 40에 이르러 사회정의가 실현되었다고 믿기까지 그는 혁명의 무기로서 풍자만화
그리기에 전마한 독특한 경력을 가졌다. 1848년부터는 풍자만화에서 손을 떼고 순수
회화 세계를 파고들며 자신의 미학이랄까, 사상을 사회참여에서 순수 쪽으로 전향했다.
이즈음 그는 신문의 풍자만화 연재를 그만두고 새로운 기법 연구에 몰두했다.
얼굴과 몸이 주변의 빛에 둘러싸여 대상과 주변 환경이 하나로 어울리는 인상주의 기법을
발견해 낸 그는 그런 미학원리를 쫓아 수많은 석판화를 제작했다.
그러나 신문사들은 그의 새로운 기법에 아무런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지만, 개의치 않고
인상주의에 전념했다. 천재는 천재만이 알아보는 법이다.
천재시인 보들레르는 모든 미술사가들이 외면하던 도미에 그림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
보고는 그를 옹호하는 평론을 썼다. 그것은 도미에 생전에 출판된 유일한 평론으로
기록된다. 그 평론 속에서 시민의 도미에를 아끼는 마음이 숭배에 가깝다는 사실을 숨기
지 않았다. 그를 숭배한 천재들이 두 사람 더 나타났다.
프랑스 인상파의 대부가 된 마네와 모네다. 그 인연으로 도미에 작품의 인상주의적 가치
를 첫눈에 알아본 두 천재에 의해 인상주의 회화가 완성될 수 있다.
그럼에도 왜 서양미술사는 도미에를 인상주의의 선구자 또는 아버지로 부르지 않을까?

마흔살이 될 무렵 파리에서 풍자만화가로 명성을 떨치며 이미 4천점의 석판화와 4천5백
여 점의 삽화를 그렸던 도미에는 좌익계 인사와 교류하며 당시 국왕 루이 필립을 풍자
만화로 두 차례에 걸쳐 맹공격했다. 그 바람에 1832년 두달간 투오되었고 정신병원에
넉달간 감금되기도 했다. 석방된 이듬해에도 풍자만화를 통해 권력과 돈을 가진 기득권자
들을 끊이없이 비판하고 견제했다. 인상주의 기법을 창시하면서 현실 참여 열정이 식은
듯 했지만 그것은 잠깐 동안의 휴지기에 불과했다. 1850년부터 풍자화에 다시 손을 대
며 인상주의 기법을 담은 석판화를 통해 기득권과의 투쟁을 죽는 날까지 계속했다.
제국 정부가 주는 훈장을 거부한 그는 62세의 나이가 된 1870년에 좌익계 파리 코뮌의
일원이 되기도 했다. 그런 투쟁 의지 탓에 인상주의 기법을 창안해 놓고서도 그 새로운
미학에 입각한 새로운 회화에 정진할 틈조차 내지 못했다. 풍자성격의 석판화를 수천점
제작했음에도 정작 인상파 기법의 회화는 몇점 그려내지 못한 것이다. 타계하고 나서
도미에는 서양미술사에서는 잊혀진 이름이 되었고, 사회사를 열거하는 역사학자들에
의해 예술가 도미에가 아니라 공화주의자 도미에로 찬양된 까닭이 거기에 있었다.

Charles Philipon(샤를 필리퐁:1800-1861), 1832∼33

ournalist and Director of the Mag

샤를 필리퐁은 우스꽝스러운 풍자화로 당대의 미술가들 사이에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그는 오베르 출판사를 차려 1831년 <라 카리카튀르>를 창간했다.
도미에는 <라 카리카튀르>지에 루이필립왕을 풍자한 <가르강튀아-대식가>를 게재하
여 벌금 500프랑을 선고 받은 적이 있다. 도미에는 캐리커처적인 조각을 즐겨 만든다.
해학적인 표현으로 인물의 내면을 표현했다.

Guizot or the Bore(귀조), 1833

도미에는 보수당의 지도적인 대의원들을 작은 몸집에 큰 머리를 강조하는 회화적 양식의
작은 테라코타로 45점을 만들었다. 그 중 37점이 남아 1925년 청동으로 떴다.
도미에가 빚은 인물상들은 대상의 핵심적인 요소들을 간추려 담은 영락없는 그들의 참
모습이다. 귀조(Guizot)는 청동으로 뜬 것도 남겨져 있는데 권태로운 사람으로 표현된
것이다. 한편 얼굴 곳곳의 주름과 안면 경련들을 강조하기 위해서 도미에는 대조적인
윤곽, 야윈 볼, 움푹한 눈 등의 표현을 종종 사용하였다.
이 작품에 묘사된 기욤 귀조(1797∼1874)는 하원의원을 지내다가 후에 7년 동안 각료
회의의 의장을 맡았던 정치가이다. 귀조의 얼굴은 풍자적인 묘사로 흉하게 일그러지거나
과도하게 과장되진 않았다. 고의적으로 무표정한 얼굴로 만들긴 했으나, 무료함이나,
권태로운 분위기를 전달하지는 않는다.

Baron Jacques-Antoine-Adrien Delort, 1833

Rue Transnonain, 15 April 1834, Lithograph(석판화)

The Past, the Present, the Future Plate 349, La Caricature, no. 166, 9 January 1834

Lithograph on heavy white paper; first state of two

Mr Daumier, your series...is...charming, Plate 78 of the Caricaturana series, 1838

Lithograph on heavy white paper

Leaving School, c.1847-48

Wandering Saltimbanques(방랑자), 1847/50

The Burden(The Laundress), 1850-1853

The Wrestler, c.1852-53

The Print Collector, 1857-63

The Uprising(반란), 1860

The Laundress(빨래하는 아낙네), 1860-61

도미에는 판화가이자 풍자화가로서 당대의 정치 현실을 비판하고 은유하는 작품들을
남겼다. 그는 언제나 동시대의 현실,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특히 함께 그
시대를 살아가는 소시민들의 일상 생활을 종종 소재로 택하였다.
오르세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 작품은 방금 강가에서 빨래를 끝내고 제방을 오르는
여인과 아이를 그린 것이다. 한쪽 팔로 빨래 더미를 가득 안은 어머니는 혹시나 아이가
계단을 헛디딜까 아이의 손을 잡고 천천히 계단을 오르고 있는 중이다.
도미에의 세심한 관찰력은 아직 키가 작아 계단을 오르기 힘든 아이가 다리를 한껏 올려
계단을 오르는 순간을 정확하게 포착하도록 하였다.
멀리 환하게 빛나는 건물들을 뒤로한 채, 역광을 받아 어둡게 처리된 인물들은 얼굴의
윤곽이 생략되어 그려졌다. 특정한 인물을 나타내지 않는 이러한 익명성은 오히려 당시
도시의 노동자 계층의 여성, 그 고단한 삶을 대표하는 것이기도 하다.
도미에는 당시 산업화의 그늘에 가려진 도시 노동자들, 소외된 여성들의 모습에 따뜻한
시선을 보냈다. 그러나 그의 그림들은 결코 서민들의 모습을 미화시키거나 왜곡시키지
않았다. 그러한 리얼리티가 지닌 힘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의 작품에 공감하도록
한다.

The Etching Amateurs, c.1860-63

At the Theater(The Melodrama), 1860-64

The Two Lawyers, 1862-64

도미에는 늘 돈 걱정을 하며 장래를 생각하지 않는 환경에서 자랐고 일생동안 그런 신세
를 면치 못했다. 아마도 도미에는 빚쟁이의 등살에 자주 법원에 불려갔을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의 작품에는 집달리 판사 서기와 변호사 주변에 있는 거간 꾼 들은 별로 나오지
않는다. 그의 눈에 자주 띄었던 사람은 변호사였다.1830년과 1860년 사이에 그는 이와
같은 주제의 그림을 자주 그렸다.

3등 열차, 1862

도미에는 철도에서 풍부한 영감을 얻어 1855년 경 부터 그의 작품에 철도의 소재를 활용
하기 시작했다. 소묘의 정확성이 뛰어나다. 객차의 창문을 통해 빛이 들어온다.
오른 쪽 승객들은 으스름 속에 앉아 있다. 그림의 중심에 있는 늙은 여인은 몸을 곧추세
워 조금 굳어져있다. 그와 대조적으로 왼쪽의 품에 아이를 안은 여인은 매우 느긋해
보인다.

Crispin and Scapin, 1863-65

The Spectators, c.1863-65

The Chess Players, 1863-67

Three Amateur Musicians, c.1864-65

A Criminal Case, c.1865

Clown Playing a Drum, 1865-67

Don Quixote and Sancho Panza, 1866-68

A Man Reading in a Garden, 1866-68

Watercolor over black chalk, with pen and ink, wash, and Conte crayon on wove paper

The Artist, c.1868-70

Artist in front of His Canvas, 1870-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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