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미술사 참고자료/후기인상주의

서양미술사41 후기인상주의: 툴루즈 로트렉

AH101 2012. 2. 16. 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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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뚤루즈 로트렉(Henri de Toulouse rautrec: 1864~1901) ★

앙리 드 뚤루즈 로트렉은 프랑스의 알비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의 친구였던 화가 R.프랭스토에게서 처음으로 그림을 배운 뒤 1882년
부터는 파리에서 코르몽(본명 F.A.Piwstre)의 지도를 받으면서 개성있는 소묘화가
로서의 독자적인 자질을 키워나갔다. 로트렉은 전통적인 의미의 화단에서 부각된
화가가 아니었다. 그의 기이한 행동과 스캔들, 또 환락가의 풍경을 소재로 해 그려냈던
그는 '퇴폐화가'라는 비난의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현대의 광고 전단지와
다양한 디자인의 포스터가 발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화가가 로트렉이다.
어떤 유파나 예술 사조를 따르지는 않았지만, 그는 인간의 삶을 예술로 녹여 내려는
의지가 확고한 화가였다.

로트렉은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12세에 당한 비운의 추락사고로 그의 키는 일생
152cm에 그쳤다. 곱추를 연상시키는 치명적인 신체적 장애를 치료하면서 그림을
배운 뒤 그는 스물 두살이 되던 해 집을 떠난다. 이 무렵 고흐, 고갱 등과 알게 되었고
드가의 예술에 끌리기도 하였다. 파리의 환락가 몽마르트르에 아틀리에를 차리고,
그 후 13년 동안 술집·매음굴·뮤직홀 등의 정경을 소재로 삼아 정력적으로 작품 제작을
하였다. 처음에 풍자적인 화풍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유화와 더불어 석판화도
차차 높은 평가를 받았다. 89년부터는 앙데팡당전(展)에 출품하였고 최초의 개인전은
93년에 파리에서 열었다. 그의 소묘는 날카롭고 박력 있는 표현으로 근대 소묘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런 소묘의 힘에 바탕을 둔 유화는 어두우면서도 신선하고
아름다운 색조와 독자적인 작풍으로인생에 대한 그의 통찰과 깊은 우수를 공감하게
한다. 태양을 찾아 헤맸던 친구 고흐와 달리 앉은뱅이 로트렉은 항상 앉은 채로 자신의
주위를 둘러볼 수밖에 없었다. 로트렉은 자신의 시야에 들어온 도시의 일상을 그렸다.
타락과 퇴폐, 그리고 이에 대한 폭로, 그래서 로트렉의 작품은 우아하고 경건한 세계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풍자의 세계를 조명한다. 그의 예술 세계에서는
고흐나 고갱처럼 현실 세계에 대한 갈등과 좌절 또한 없다.
그는 현실을 소화해 내기 위해 내면적인 갈등과 방황을 일삼았던 작가가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을 세상에 내던짐으로써, 있는 그대로의 비극을 사랑함으로써 자신의 내면
을 예술 세계로 정화시킨 화가였다.

몽마르트의 물랭루즈는 로트렉의 전속 작업장이나 다름없었다. 파리의 뒷골목을 배회
하는 매춘부와 공연 예술가, 광대 등을 그는 우울한 화폭에 담아 냈다. 물론 그의 삶이
그 환락의 뒷골목에 도취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어둡고 그늘진 사회의 일면을 냉철하고
이성적인 눈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로트렉의 눈길은 어디까지나 방관자적인 입장에서의
비판이었다. 신흥 부르주아 세력에서 밀려난 그의 시선은 언제나 서글픈 눈길로 세상을
바라보게 했다. 인기 배우들의 허식과 무지, 술집 손님들의 성격을 그는 예리한 눈으로
꿰뚫어 보았다. 로트렉에게 중요한 것은 '이상'이 아니라 '진실'이었다.
그 진실을 행하기 위해 그는 어둠의 시대를 날카롭게 조명했다. 단순한 풍속화가의 차원
을 넘어서 그는 화가로서 시대의 증인이 되고자 했다. 그는 어떤 유파에도 부합하지 않으
며 개성있고, 독창적인 자신의 예술 세계를 구축해 나가며 당대의 사회상을 정확하게
묘사해 냈다. 살아 있는 삶, 인간의 모습이 그에겐 작품의 주된 소재였다.
하지만 로트렉의 작품은 날카로운 풍자만을 대변하지는 않는다. 그는 풍자의 비극을 넘어
있는 그대로의 진실까지도 포용한다. 로트렉은 인간을 누구보다도 사랑한 화가였다.
뒷골목의 추악함까지도 사랑할 줄 아는 화가 로트렉은 비극을 초월한 영원의 생명력을
작품에 부여했다.

로트렉은 시대에 부합된 예술사의 주의 주장에 무관심한 작가였다. 또한 예술에 대한
논의나 비평을 누구보다도 싫어했다. 따라서 그의 작품은 조형적인 예술 형식의 창조
를 위해 대상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상을 진지하게 표현해 내기 위해 조형적인
형식미를 창출해냈다. 현실에 대해 냉철한 직관력을 갖고 있었던 로트렉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에 주력했다. 관찰된 대상은 예술이라는 장르를 핑계삼아 어떤 식으로
든 미화되거나 이상화되지 않았다. 그의 작품 소재가 일상적인 것이기는 했지만 그는
구체적인 대상들을 작품화했다. 특히 기법이나 양식적인 면에서 로트렉은 천재적인
소묘가였다. 물론 그의 데생은 기존의 그것과는 개념이 다르다. 대상이 지닌 본래의 선
을 그는 과감하게 과장하거나 생략함으로써 독특한 개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움직이는 대상을 신속하게 화면안에 고정시키는 재능 또한 천부적이었다.
이 같은 재능을 뒷받침 해주는 그의 힘은 정확하고 개성적인 선에 있다.
실루엣으로 표현된 인물의 개성을 표현하는 것까지도 그는 면이 아니라 윤곽선에 의해
드러냈다. 그의 색채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이다. 그는 기존의 어떤 유파들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고유의 색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채색석판화로 만들어진 로트렉의 포스터
작품은 그의 작품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흔히 '거리의 예술'로 불리고 있는 현대 포스터의 기원을 바로 로트렉에게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로트렉에 의해 포스터는 새로운 예술의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그는 채색석판화에 대한 관심으로 포스터를 제작했으며 결국 그에 의해서 예술 작품
으로 인정을 받게 된다. 밤의 환락가를 그리는 '퇴폐적인 화가'라는 불명예가 늘상
수식어처럼 따라다녔지만 로트렉은 석판화와 디자인의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작품을
탄생시키며 각광받은 화가였다.

30대 이후 알코올중독으로 정신착란을 일으켜 99년에는 3개월 동안 병원에 입원하였다.
입원 중에는 물론 퇴원 후에도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그림 그리기를 계속하였으나, 끝내
말로메의 별장에서 요양을 하던 중 37세로 생애를 마쳤다. 그의 어머니는 아틀리에에
남겨진 아들의 작품을 전부 챙겨 고향인 알비시(市)에 기증하였고, 1922년 알비시에
로트렉미술관이 개관되었다.

Self-Portrait of Toulouse Lautrec, 1882/83

시대에 어떤 유파나 예술 사조를 따르지는 않았지만, 인간의 삶을 예술로 녹여 내려는
의지가 확고한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Henri de Toulouse Lautrec: 1864~1901)
이란 화가가 있었다. 로트렉은 전통적인 의미의 화단에서 부각된 화가는 아니었다.
그의 기이한 행동과 스캔들, 또 환락가의 풍경을 소재로 해 그려냈던 그는 '퇴폐화가'
라는 비난의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그는 미술가로서 길지않은 기간 동안
인상주의로부터 이탈한 사실이 표현주의로 가는 촉진제 역할을 했고, 다른 한편으로
이미지, 문자, 색채의 효과적인 결합이 광고라는 새로운 미술장르를 낳게 했다.

로트렉은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12세에 당한 비운의 추락사고로 그의 키는 일생
152cm에 그쳤다. 곱추를 연상시키는 치명적인 신체적 장애를 치료하면서 그림을 배운
뒤 그는 스물 두살이 되던 해 집을 떠나 파리의 환락가 몽마르트르에 아틀리에를 차리
고, 그 후 13년 동안 술집, 매음굴, 뮤직홀 등의 정경을 소재로 삼아 정력적으로 작품
제작을 하였다. 처음에 풍자적인 화풍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유화와 더불어
석판화도 차차 높은 평가를 받았다. 1889년부터는 앙데팡당전(展)에 출품하였고 최초의
개인전은 1893년에 파리에서 열었다. 그의 소묘는 날카롭고 박력 있는 표현으로 근대
소묘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런 소묘의 힘에 바탕을 둔 유화는 어두우면서
도 신선하고 아름다운 색조와 독자적인 작풍으로 인생에 대한 그의 통찰과 깊은 우수를
공감하게 한다. 태양을 찾아 헤맸던 친구 고흐와 달리 앉은뱅이 로트렉은 항상 앉은
채로 자신의 주위를 둘러볼 수밖에 없었다. 로트렉은 자신의 시야에 들어온 도시의
일상을 그렸다. 타락과 퇴폐, 그리고 이에 대한 폭로, 그래서 로트렉의 작품은 우아
하고 경건한 세계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풍자의 세계를 조명한다.
그의 예술 세계에서는 고흐나 고갱처럼 현실 세계에 대한 갈등과 좌절 또한 없다.
그는 현실을 소화해 내기 위해 내면적인 갈등과 방황을 일삼았던 작가가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을 세상에 내던짐으로써, 있는 그대로의 비극을 사랑함으로써 자신의 내면을
예술 세계로 정화시킨 화가였다.

긴 의자에 앉은 여자

1882년 한때 로트렉은 보나르의 문하에 들어가서 철저히 아카데믹한 교육을 받았는데,
그 무렵 그의 화풍을 잘 전해 주는 작품의 하나이다. 긴 의자의 중심에 앉은 검정
스타킹의 나부, 오른쪽 다리를 왼쪽 다리 밑으로 넣고 오른손은 왼쪽 무릎에 놓고
왼손의 인지는 가볍게 입에 대는 변화나 하얀 피부를 돋보이게 하는 검정 스타킹의
색 대비와 함께 포즈에서 약간 인위적인 느낌이 들고 습작적인 냄새가 짙은 작품이다.
이 작품을 통해 로트렉의 인물에 대한 관심과 수업기의 철저한 작품을 볼 수 있다.

A Laborer at Celeyran, 1882

Portrait of Comtesse Adele-Zoe de Toulouse-Lautrec(The Artist's Mother), 1883

간소한 아침 식사를 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그린 것인데 화면 전체에 퍼져 있는 투명한
색조의 분위기는 마네나 인상파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17세의 로트렉이 소묘의 충분한 정확성을 유감없이 나타내고 얇은듯 한 터치의 중복에
인물 처리는 부드러운 양감을 조성하고 있다. 하루를 시작하는 창밖에 아침 안개를
떨어내는 앞집의 벽을 통한 배경 처리는 항상 따뜻한 애정과 신화를 잃지 않는 어머니
의 사랑처럼 깔려 있다.

고흐의 초상

코르몽의 기름 냄새 풍기는 화실 생활에서 개성이 강한 고호와 로트렉이 신뢰와 우정을
나누며 자신들의 작품에 열의를 보일 때가 22세 되던 1886년 가을무렵이다.
4년 후 브류셀에서 2인전을 갖기도 한 두 사람의 우정은 흔치 않은 경우였지만 강한
자아의 세계로 몰입하는 그들 사이의 우정은 시간적으로 그렇게 길지는 않았다.
파리의 바라든지 카페 한쪽 구석에 자리한 고흐의 개성있는 옆얼굴을 짧은 시간에
그릴 수 있는 파스텔을 이용한 재치를 보였다.
반 고흐의 까칠까칠하고 긴장된 표정을 일련의 사선으로 그린 진귀한 수법에 관심을
보인 반 고흐가 아우 테오에게 사도록 권유한 기념작이기도 하다.

"A Montrouge" - Rosa La Rouge, 1886-87

젊은 아가씨의 초상, 1886-1887

로트렉 백작 부인, 1887

녹청색을 주조로 한 실내, 46세의 로트렉의 어머니는 호탕한 남편과 결혼 생활이 결코
행복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혼자만의 시간이 많았기도 했지만 독서는
그녀의 생활에서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여 단순한 취미 이상의 것을 독서에서 추구
하였다. 인상파 기법이 요소요소에 나타나는 이 작품은 화면 전체의 좌측에 쏠린
듯한 인물의 위치에서나 잘린 책 부분은 보는 이로 하여금 창으로부터 비친 역광을
무시한 얼굴 처리처럼 아쉬움이 있기도 하다.

페르낭도 서커스의 여자 곡마사, 1888

1880년 초 프랭스토를 따라 페르난도 서커스장에 구경갔던 로트렉은 곧바로 서커스에
열중하게 되었다. 서커스장은 당시 인상파 화가와 당대의 삽화가들에게 한창 인기
였다. 로트렉이 그린 최초의 야심적인 대형 작품인 위 작품을 보며 벨기에의 화가 테오
반 리셀베르는 이렇게 말했다.
"이 작은 난쟁이는 결코 형편없다고 할 수 없다. ...한 번도 전시회를 갖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는 아주 재미있는 것들을 그린다. 페르난도 서커스장, 창녀 및 기타 등등."
이 작품에서 로트렉은 인물들이 구석에 잘려 나가는 화면 구성으로 원형 서커스장을
묘사했다. 중앙에 전속력으로 달리는 얼룩얼룩한 말의 등위에 여자 곡마사가 앉아 있고,
연기주임의 긴 채찍이 말에 살짝 닿아 있다. 연초록색 옷을 입은 여자 곡마사의 모델은
쉬잔 발라동이다. 물랭 루즈의 창설자인 조제프 올레는 이 그림을 복도에 걸어두기 위해
구입했다. 이 그림은 서커스를 주제로 제작될 연작들의 시작을 의미했으며 로트렉은 이
분야에서 모두가 인정하는 대가가 되었다.

Portrait of Suzanne Valadon, 1888

Lili Grenier in a Kimono, 1888

물랭 드 라 갈레트에서,1889

앞에 놓인 포개진 접시들이 쓰러질 듯 뒤뚱거리는 소란한 홀의 정경이다.
물랭 루즈에 빼앗기기 전에는 물랭 드 라 갈레트는 파리장의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던
댄스홀이며, 소재를 찾는 화가들이 자주 드나들게 되었다.
동적인 군중들의 처리에 비해 앞의 인물들은 많이 정리되어 표정의 대조를 볼 수 있다.

물랭 루즈의 춤, 1890

춤추는 무희와 그 무희에 빠져 있는 신사들의 모습을 로트렉은 물랭 루즈의 한 구석에
앉아서 조용히 응시하고 있다. 화려한 조명 아래에서 술과 쾌락에 취한 사람들 속에는
어떤 도덕이나 위선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본능을 쫓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 고독 또한 인간의 한 모습으로 그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Desire Dihau Reading a Newspaper in the Garden, 1890

Portrait of Honorine Platzer(Woman with Gloves), 1891

Girl in a Fur, Mademoiselle Jeanne Fontaine, 1891

Moulin Rouge-La Goulue(물랭 루주의 포스터), 1891/석판화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중앙에서 옆얼굴을 보이면서 한쪽 다리를 번쩍 들고 춤추는 무용수
의 거꾸로 핀 꽃과 같은 치마의 흰색이다. 빨강, 파랑, 노랑, 검정 등 화려한 색채를
뿌려 놓은 화면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이곳만은 대담하게도 종이 색깔 그대로이고
아무 색도 쓰이지 않았다. 그러나 주위가 어둡기 때문에, 물결치듯 힘차게 나부끼는
그 윤곽선은 그것과 대조적으로 검은 색으로만 이루어진 그림자 그림처럼 배경을 차지
하고 있는 많은 관객의 눈앞에 화려하게 펼쳐진 치마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커다란 깃털 장식이 달린 모자를 쓴 부인이나 실크해트를 쓴 신사들로 이루어진 이
뒷줄의 관중은 얼른 보기에 한 줄로 나란히 뒤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른쪽의
몇 사람이 앞으로 나와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실은 무용수 주위를 빙 둘러싸고
있으며 우리도 물론 그 관객 속의 한 사람이다. 앞쪽에는 실크해트를 쓴 남자 무용수가
마치 술 취한 사람처럼 등을 비틀고 손을 흔들면서 춤추는 모습이 역광을 받아 실루엣
으로 떠오른다. 그리고 하면 왼쪽에는 또 다른 무용수의 노란색 치맛자락이 크게 펄럭
거리고 있다. 이 화면에서 알 수 있는 한, 관객에 둘러싸인 무대에는 적어도 세 사람의
무용수가 힘차고 신나게 춤을 추고 있다. 그런데 1891년의 파리에 살던 사람이라면 여기
에서 4인 1조의 화려한 무용이 펼쳐지고 있다는 것을 금세 알아챘을 것이다.
그리고 중앙의 다리를 든 무용수가 '라 굴뤼(먹보)'라는 별명을 가진 당대 제일의 인기
인이고, 또 앞쪽의 술 취한 듯한 남자는 놀랄 만큼 유연한 신체 때문에 '뼈 없는 발랑탱'
이라고 불리던 유명한 무용수라는 것을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했을 것이다. 이 두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물랭 루주'의 카드릴(네 사람이 한 조가 되어 추는 춤)은 당시 파리에서
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그 이름대로, 네 개의 큰 날개에 붉은 색 조명을 달고 밤새 돌아가는 풍차를 간판으로
내건 물랭 루주는 19세기 말 파리의 이른바 밤의 세계의 상징이었다.
샤를 지들러로부터 물랭 루즈의 포스터 디자인을 의뢰받은 로트렉은 발랭탱 드 데조세로
알려진 에티엔 르노댕이라는 기묘한 인물과 함께 춤을 추는 라 굴뤼를 그렸다.
곧 파리 전역에 퍼진 로트렉의 포스터는 인상적인 색채와 날카로운 실루엣으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일본 판화의 영향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이 작품을 통해 로트렉은 대중
의 눈에 깊이 각인되었다. 수집가들은 벽에 붙은 포스터를 떼어 가지려고 혈안이 되었다.
수집가들이 이 작품처럼 높게 평가한 포스터는 이전에 없었다. 포스터 작가 또는 석판
화가로서의 로트렉의 화려한 데뷔를 장식하기에 알맞은 기념비적인 작품이었다.

Justine Dieuhl, 1891

Louis Pascal, 1891

A La Mie(아 라 미에),1891

빽빽이 들어 찬 주변의 줄무늬와 터치는 언뜻 두 사람과 어질어진 테이블 위의 병이나
컵들이 서로 다른 두 사람의 시선처럼 초점을 잃고 있다.
어떤 희망을 놓쳐 버린 카페의 우수라고나 할까. 친구인 모리스 기베르와 술집 여자를
모델로 한 뒷골목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표정이다.
세기말의 특이한 권태감을 나타낸 작품으로 로트렉 개인의 인간에 대한 심리 추구일
뿐만 아니라, 시대의 분위기를 잘 전해주는 작품이며, 후에 젊은 화가들에게 상당한
감명을 준 작품이다. 길고 짧은 선의 활달함이 언뜻 평면 처리된 전체 화면을 커버하
고 있다.

The Beginning of the Quadrille at the Moulin Rouge, 1892

Ambassadeurs: Aristide Bruant(대사: 아리스띠드 브뤼앙), 1892

채색 석판화 포스터
아리스티드 브뤼앙(1851-1925)은 당시 몽마르트르의 인기 가수인 동시에 작사와 작곡도
잘했다. 1885년에 카바레 밀리통을 개장했으며 이 무렵부터 로트렉과 친했는데, 당시
갓스물이 된 로트렉을 처음으로 창녀의 세계로 유인한 것도 그였으며 말하자면 악우
(惡友)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로트렉은 그를 위해 꽤 많은 데생과 유화를 남겼는데, 화가
로트렉의 그리고 또한 가수 브뤼앙의 진미를 가장 잘 나타낸 것은 이작품을 포함 한 4점의
석판 포스터일 것이다. 그것들은 차양이 넓은 모자에 다크 블루의 망토 게다가 주홍색
머플러를 각각 평탄한 색면으로 분할하고 단순 명쾌한 화면 구성으로 완성한 작품이다.

Queen of Joy, 1892

At the Moulin Rouge: Two Women Waltzing, 1892

La Goulue Arriving at the Moulin Rouge with Two Women

두 여인과 함께 물랭 루즈에 도착한 라 굴뤼, 1892

이 그림은 라 몸 프로마주와 여동생의 팔짱을 끼고 물랭 루즈로 들어서는 라 굴뤼의
모습을 담고 있다. 본명이 루이즈 베버인 라 굴뤼는 프랑스와 독일의 접경 지역인
알사스 지방 출신이었다. 그녀는 물랭 드 라 갈레트에서 일하기 전에는 세탁부 생활과
페르난도 서커스 단원 생활을 했다. 라 굴뤼는 물랭 드 라 갈레트에서 르누아르를
만나기도 했다. 그녀는 '자연주의 카드리유'라 불리는 자신만의 독특한 춤을 유행시켰다.
캉캉 춤에 근원을 두고 있는 이 춤은 다리를 머리 위에 두어야 하며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다리를 최대한 벌리며 끝을 맺었다. 브뤼앙의 카바레 근처에 있는 엘리제 몽마르트
르에서 라 굴뤼를 알게 된 로트렉은 그녀가 활동을 그만둘 때까지 8년 동안 가까이에서
그녀를 지켜 보았다. 퇴락의 길을 걷게 되면서 그녀는 가건물의 서커스장에나 출연하게
되는데, 1895년 로트렉은 오늘날 널리 알려진 두 점의 패널화로 이 가건물을 장식해 주었
다. "당신 그림에서 내 엉덩이를 보니 정말 아름답군요,"라고 속삭여 주던 여인, 라 굴뤼.
이 여인의 매력에 사로잡힌 로트렉은 라 굴뤼의 모습을 담은 유화, 포스터, 석판화를 열
점 가량 제작했으며, 오늘날 그 중 대다수의 작품이 로트렉의 대표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물랭 루즈에서,1892

물랭 루즈의 한구석에서 대화하는 몇 사람을 그려 놓았다.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왼쪽 끝에 있는 붉은 수염을 기른 노인은 비평가 에두 아르 뒤자
르댕이고 그 오른쪽은 스페인의 댄서 라마카로나, 이어서 사진 작가인 세스코, 실업가이
며 로트렉의 친구였던 모리스 기베르 이다. 그 뒤쪽에서 붉은 머리를 손질하면서 돌아서
있는 여인은 라 굴뤼, 그 왼쪽에 둘이서 나란히 걷는 사람이 로트렉과 그의 사촌 동생
타비에드 셀레이랑인데, 사촌이 키가 크기 때문에 키가 작은 로트렉과의 배치가 아주
유머러스하다. 오른쪽 끝의 '녹색과 황색의 칸델라'라는 평을 받는 네리 양의 얼굴은
특수한 조명 효과 때문에 가면을 보는 것 같은 특이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르누아르가 물랭 드 라 가레트의 무희들과 파리의 여러 중하층계급의 유흥장소를 그린 지
불과 몇 년 되지 않아 툴루즈 로트렉은 매우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인상주의 그림에서
보이던 빛나는 삶의 기쁨은 사라지고 대신 인공조명 아래 여성의 창백한 피부에서 보듯
억지스럽고 불안장하며 숨겨진 그 무엇을 드러내게 된다. 이 작품에는 마네의 후기 작품
에서 보이던 귀족적인 우울한 정서와 함께 도미에와 드가의 드로잉에서 받은 영향이 로트
렉의 독특한 암시와 결합되어 나타난다.

Dancing Jane Avril(춤추는 잔 아브릴), 1892

준비된 유화용 두꺼운 종이 위에 간결한 선으로 다리를 들어올려 보이는 동적 움직임이
한결 시각의 변화를 가져온다. 검정선으로 그린 후에 밝은 흰색으로 양감을 처리하고
중간 톤으로 애조를 띤 한 색조로 주변을 감쌌다.
뒷면의 정겨운 표정의 여인들은 장소의 분위기를 확인해 주는 듯.
주변 여인들 중에서도 세련된 취미와 섬세한 감정을 가졌고 보기 드물게 예술을 이해한
잔 아브릴. 이탈리아 귀족과 창녀 사이에 태어난 쇠잔한 인생을 안은 그녀의 많은 고뇌
를 공감했던 로트렉은 기회만 있으면 화폭에 담았다.

Portrait of Madame de Gortzikoff, 1893

Jane Avril, 1893

Le Divan Japonais, 1893/석판화

In Bed, 1893

물랭가의 살롱에서, 1894

툴루즈 로트렉의 영향으로 파리 물랭가 매음굴의 붉은색 소파는 19세기 후반 회화의
전형적인 요소가 되었다. 이 작품은 같은 장소를 배경으로 한 모파상의 소설을
떠올리게 한다. 매춘부들이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가구로 치장되고 조명을 환하게 밝힌
방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로트렉은 이 여성들을 과장하거나 우스꽝스럽게 풍자하
기보다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개인들의 삶은 겉으로 드러났다가 잠시 밝게 빛날
뿐 곧 사라진다. 화가는 이 여성들의 불안하고 나른하고 지루해하거나 지친 분위기를
얼굴과 옷, 자세, 몸짓 등을 통해 암시하고 있다.

Rue des Moulins: The Medical Inspection, 1894

La Revue Blanche, 1895/석판화

Clowness Cha-u-Kao(물랭 루즈의 챠우카오), 1895

물랭 루즈(붉은 풍차) 시리즈를 수없이 제작하던 31세 때의 로트렉은 밤의 세계에 익숙
해졌고, 여기 중국풍의 이름을 지닌 댄서 카오 양의 유채나 데생, 석판화를 다수 남겼다.
샤 위 카오의 팔을 낀 가브리엘의 옆 모습은 분장한 채 무대를 내려온 우수에 젖은
샤 위 카오를 돋보이게 한다. 뒤의 많은 군중 속에 가브리엘의 시선과는 정반대로 자신
의 자화상을 집어 넣어 화면의 더욱 연장된 느낌을 시도함을 볼 수 있다.

The Lady Clown Cha-U-Kao, 1895

Study for "Elles"(Woman in a Corset), 1896

La Toilette(화장하는 여인), 1896

상반신을 벗어버린 채 관람자에게 등을 보이고 있는 여자, 그 아름다움이나 미모를
그리는 다른 작가와는 달리 화폭에 꽉 찬, 등을 보이는 한 모델을 통하여 인간의
내면을 생각하게 한다. 로트렉의 자유롭지만 날카로운 솜씨를 보여준다.
로트렉이 여성을 모델로 한 것 중에 1890년을 경계로 화가를 위해 포즈를 취한 평범한
초상 중심인데 반해, 후반엔 여성 특유의 사생활에서 얻은 특이한 포즈들이 중심을
이루는 대조를 보인다. 지극히 평범한 포즈이지만 드가를 연상케하는 대담한 구도가
보이지 않는 얼굴에서 긴 여운을 남긴다.
이 작품은 공감과 동정심을 갖고 매춘부를 그린 초상화 연작 <그녀들>의 일부다.

At the Cafe: The Customer and the Anemic Cashier, c.1898-1899

Jane Avril Leaving the Moulin Rouge, 1899

1890년 로트렉은 '라 멜리니트(강력 폭약)'로 불리는 잔 아브릴과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아브릴은 유복한 이탈리아 이주민과 화류계 여인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로 병약해 보일
정도로 섬세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엄청난 정력의 소유자로
멜리니트라는 화약과 같은 폭발력을 지닌 여성이었다. 아브릴은 젊은 시절 우연히 사귄
한 의과 대학생의 도움으로 뷜리에 무도장의 관객들 앞에서 춤을 추었고, 스무 살에
물랭 루즈에 데뷔했다. 아브릴은 비평가들에게 '춤의 화신'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그녀는 곧 로트렉의 가장 대표적인 모델 중 하나가 되었다.
로트렉은 그녀가 춤을 추는 모습 뿐만 아니라, 모피 목도리에 아름다운 외투를 걸치고
물랭 루즈로 들어서는 모습도 그렸다. 아브릴은 교양을 갖춘 여성이었으며, 시인인 폴
포르, 레옹 디에르, 스테판 말라르메, 폴 베를렌, 소설가인 조리 카를 위스망스 등과
교제를 하였다. 1896년 입센의 "페르귄트"를 무대로 올린 연극에 출연하기도 했다.
로트렉이 죽은 후 아브릴은 연극에 전념하다가 언론인이자 데생가인 모르스 비에와 결혼
하여 화려한 부르주아의 삶을 향유했으나, 말년에는 비참한 가난 속에서 생을 마쳤다.

Private Room at the Rat Mort, 1899

The Milliner, 1900

The Opera "Messaline" at Bordeaux, 1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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