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미술사 참고자료/에꼴 드 파리

서양미술사69 에꼴 드 파리 : 위트릴로 마리 로랑생 카임 수틴

AH101 2012. 2. 16.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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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미술사 - 69(에꼴 파리: 위트릴로, 마리 로랑생, 카임 수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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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urch of Le Sacre-Coeur, from rue Saint-Rustique/Maurice Utrillo


★ 모리스 위트릴로(Maurice Utrillo:1883~1955) ★


프랑스 파리 몽마르트르 출생으로 샤반느, 로트레크, 르누아르, 드가 등의 모델이었으며
여류화가인 수잔 발라동(Suzanne Valadon:1865∼1938)의 사생아로 태어나 1891
년 스페인의 미술평론가 미겔 위트릴로의 양자로 입적되어 위트릴로라는 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림을 시작하였을 때 서명에는 모리스 발라동이라 썼으며, 모리스
위트릴로라 서명하게 된 뒤에도 발라동을 뜻하는 'V'자를 서명 끝에 덧붙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술을 몹시 좋아하였으며, 1901년에는 알코올중독으로 쇠약해져 요양
소로 보내졌다. 이듬해 의사의 충고에 따라 어머니는 술을 끊게 하기 위해 그에게 강제로
그림을 그리게 하였다. 그 뒤 그는 파리 교외나 몽마르트르 거리를 독자적 화법으로
그렸다. 1903∼1907년까지는 <Montmany몽마니시대>라 하여, 당시 그가 살았던
파리 교외 몽마니 풍경 등을 단숨에 그리는 기법을 이용하여 짙고 거칠며 어두운 분위기
로 표현하였으며 인상파의 영향을 받았다. 다음은<백색시대>로서, 흰 건물에 열중하여
채료에 회반죽을 섞어 벽의 감촉을 표현하였다. 음주와 난행과 싸우면서 제작한 이 시절
의 작품은 오래된 파리의 거리 묘사에 흰색을 많이 사용하여 미묘한 해조(諧調)를 통하여
우수에 찬 시정(詩情)을 발휘하였다. 집집마다 엷은 때가 묻은 희끄무레한 벽, 어둠침침
한 파장(罷場)의 거리, 인적이 없는 거리, 쇠살문이 닫혀 있는 호텔, 교회 등 시정이 풍부
한 그림을 그렸다. 1907∼14년의 이 <백색시대>야말로 모리스 위트릴로의 창조력이
절정에 이른 시대이다. 음주벽은 여전하였으나 걸작품의 대부분이 이 시기에 그려졌다.
그 뒤 <다색시대>가 이어져 광택이 나는 색채를 썼으며 특히 녹색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쇠퇴의 시대가 시작되고 있었다. 말년의 25년 동안 건강이 회복되었고
명예까지 얻어 1935년에는 벨기에 수집가인 미망인(Lucie Valore)과 결혼하여 신앙심
두터운 평화로운 가정을 이루며 생활도 안정되었으나 그의 작품에서 이전의 긴장도는
사라졌다. 그는 몽마르트르 거리를 조용하고 평화롭게 묘사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View of Montmagny, 1903

모리스 위트릴로는 몽마르트르에서 태어나 몽마르트르에서 자랐고 몽마르트르를 그리다
가 죽었다. 그리고 몽마르트르에 묻혔다. 말하자면 순종 몽마르트르의 화가이다.
어쩌다가 세상에 태어난 사생아인 그는 슬픔과 고독이란 처절한 아픔을 이겨 내지 못하고
14세부터 술을 마셨으며 18세 때에는 알콜 중독을 치료하기 위해 병원 신세를 지는 숙명
적인 주정뱅이가 된다. 이 그림은 그의 23세 때 작품인데 비록 붓 놀림이 딱딱하여 유니
크한 맛은 적으나 비교적 견고한 구성, 색채의 발랄한 콘트라스트에 신경을 쓴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외광 처리 등 인상파풍의 묘법이 산견(散見)되는 위트릴로의 초기를 아는
데 중요한 작품이다.

코탱의 골목

<백색시대>의 위트릴로 작품 가운데서 대표적인 것으로 꼽히는 그림이다.
건물, 돌계단, 가느다란 좁은 길 등이 모두 직선으로 그려져 정연한 구도를 느끼게 하고,
인상적인 흰 벽면들이 통일되어 안정감을 부여했다. 집집마다의 창엔 덧문이 닫혀져
백색의 세계를 한층 정적(靜寂)하게 한다. 돌계단을 오르는 4, 5명의 인적, 그리고 그
상단에 보이는 푸른 나무와 노란 꽃이 광물적인 화면에 식물적인 싱싱한 맛을 환기시켜
주고 있다. 고수(孤愁)-견디기 어려운 위트릴로의 아픔이 이렇게 쓸쓸한 골목길의 정경
을 그리게 한 영감이었는지도 모른다. 깊고 외로운 시정이 물씬 풍기는 애절한 시심마저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생 드니 운하

'술집에 가면 틀림없이 위트릴로를 만날 수 있었다. 카운터 옆에 서 있거나 그렇잖으면
벌써 고주망태가 되어 문밖의 시궁창에 드러누워 가끔 "샹"하고 소리를 지르고 있다.
사람들은 매정하게도 그를 쫓아냈고 그는 쓰러져서 신음하며, 또 울었다.' 위트릴로
평전을 쓴 칼코의 묘사인데, 이런 주정뱅이가 언제 어떻게 그림을 그렸을까?
한 번 묻고 싶은 심정이다. 이 그림은 <백색시대>가 개막될 무렵의 작품인데, 전면의
탁한 수로와 후면의 흐린 하늘, 그리고 우뚝 솟아 있는 굴뚝, 오랜 세월 풍광과 먼지에
찌든 회색 벽돌이 희미한 외광을 받아 아주 고요하게 빛나고 있다. 필촉이 놀라울 정도
로 화면에 정착되고 색채의 배합 또한 긴밀하게 서로 반향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몽마르트르 풍경

위트릴로는 몽마르트르의 풍경을 수백 점 그렸다. 이 그림은 그의 <백색시대> 때의 것
이며, 몽마르트르의 풍경 중에서 뛰어난 작품에 속한다. 몽마르트르 술집에서 그의 고동
이 숨쉬고 몽마르트르 거리에는 그의 체취가 담겨져 있다. 예의 땀에 찌든 벽, 직선으로
구축된 건물, 납색 하늘이 그의 체취를 물씬하게 풍기는데 원경으로 이어지는 납색 하늘
이 너무도 서정적이다. 이 근처를 몽스니 거리라고 부르며, 이 근처에 위트릴로가 살았던
코르토가가 있다. 광각(廣角) 렌즈를 사용한 듯한 조망이 수평선적 구도를 살리고, 화면
좌우의 푸른 수목들과 절묘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위트릴로 풍경 가운데서 아름다움의
정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Renoirs Garden, 1909-1910

La Rue des Abbesses, 1910

Notre-Dame de Clignantcourt, 1912

생 마르리트 교회

<두유 마을의 교회>와 함께 위트릴로의 서민성이 표출된 작품이다. 교회 즉 '신의 집'
에 끌리는 그의 무의식적이면서도 어쩔 수 없는 갈망은 그를 기도를 올리기 위해서만
찾아 드는 보잘 것 없는 교회까지도 주저 없이 그리는 습성으로 변환시켰다.
오히려 이러한 교회 그림에 가장 위트릴로적인 분위기가 충만했던 것은 어떻게 보면
필연적인 것이기도 하다. 이 화면에서 풍기는 정숙감과 경건한 뉘앙스는 건물의 초라
한 겉모양과는 정반대의 짙은 농도와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두유 마을의 교회>에서 느끼는 양괴감은 적지만 서정시적인 아름다움과 선에 의해
형성된 포름의 특질이 종각에 매달린 까만 종처럼, 무한한 공감대를 명쾌하게 형성한
위트릴로의 수작 중의 하나이다.

두유 마을의 교회

위트릴로가 그린 많은 교회 작품 중에서 뛰어난 작품이다. 짙은 납색 하늘 아래 우뚝
선 교회, 웅장하지는 않지만 중량감이 있고 어떠한 세파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양괴감이 화면에 가득 차 있다. 한없이 깊은 흰색과 그 흰색 속에서 튀어나온 약간의
황색과 녹색이 미묘하게 융합되어 태산같이 과묵한 이미지를 낳고 있다.
그는 교회를 그리는 자체를 신앙의 표백이나 기도의 연장으로 생각했다. 교회를 이렇
게까지 깊숙하고 풍요하게, 침묵의 정취로써 포착한 작품이 다른 화가의 그림에는
없는 것으로 기억된다. 위트릴로의 청정한 내적 생명과 화가로서의 무르익은 솜씨가
훌륭하게 합일한 작품이다. 두유 마을에 있는 이 교회는 무명의 교회이다.
여기서도 위트릴로의 서민성을 읽을 수 있다.

몽마르트르 생 피에르 교회

생 마그리트 교회가 <백색시대> 때의 작품인데 비해 <생 피에르 교회>는 <다색
시대>의 작품이다. 위트릴로는 이 그림 외에도 생 피에르 교회를 그린 <생 피에르
교회와 사크레쿠르>를 그렸는데 이 그림은 세밀한 필치에 산뜻하고 깨끗하며
평면적이긴 하지만 서민적인 정감이 부족한게 흠이다. 생 피에르 교회는 파리의
수많은 교회 중에서 세 번째로 오래된 교회이며 1938년에는 그의 모친 발라동의
장례식이 거행된 곳이기도 하다. 위트릴로가 이 그림을 제작할 때는 어느 정도
대중화되었고, 동시에 그의 생활에도 여유가 생겼으며, 반면에 알콜에 빠지는 등
의 행동 거지를 감시 받기 시작했던 시기였다.

아스니에르 마을의 거리

위트릴로는 시슬리의 작품을 좋아했고 시슬리의 작풍 (作風)을 본뜨려고 노력한 게
사실이다. '나도 시슬리 처럼 그릴 수 있을까?'는 그가 24세 때 고백한 말인데,
아스니에르 마을의 거리에서 시슬리의 정지된 상태에 가까운 조용하고 차분한 뉘앙
스를 찾아볼 수 있다. <코탱의 골목>에서 보여 준 직선에 의한 구성을 이 그림에서
도 시도했는데 직선에 의한 구성은 위트릴로의 <백색시대>를 특징 지운 묘법의
하나이기도 하다. 대기를 축축이 머금은 하늘과 길, 일체의 소음이 사라진 한낮의
거리, 긴박 감 마저 느낄 수 있는 대낮의 시정(詩情)이 그의 환각적인 흰색에 의해
더욱 돋보이는 작품이다.

미미 팽송의 집

몽마니 거리는 위트릴로의 생활과 예술의 고향이며, 미미 팽송은 바로 몽마니 거리
에 있는 그의 단골집이다. 이 장소, 이 구도를 그의 화집에서 여러 점 보았는데, 이
화면에 나오는 거리와 건물과 굴뚝은 그가 술에 취했을 때 중얼거린 즉 대화의 상대
였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위트릴로에게 이 거리를 그리도록 요구했고, 그때마다
순진한 그는 이러한 요청을 거절하지 못했고 그래서 그림을 양산하기에 이르렀다.
섬세한 시정과 은밀한 고독감이 숨쉬고 위트릴로 특유의 긴장감과 짜릿한 맛이
감돌며 흰색의 풍요로움과 밀도 짙은 애수가 강렬하게 공감하는 작품이다.

Le Lapin Agile(라팽 아질), 1913

'라팽 아질'은 민첩한 토끼라는 뜻이다. 사크레 쾨르의 뒤쪽이 되는 생 방상 거리의
한 모퉁이에 위치한 유명한 카페인데 풍경 화가인 앙드레 질이 그린 '토끼 간판'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다. 부서진 창문, 깨어진 유리창, 얼룩진 벽 등이 위트
릴로 특유의 체취를 풍겨 주고 아름다운 나무 숲에 둘러싸인 건물만이 농회색 하늘
아래 화창한 여름철을 시사해 주고 있다. 이 카페에는 피카소, 브라크, 그리스 등이
자주 얼굴을 나타내 한때는 인상파들의 카페 게르브와 대적인 존재였으나, 이 화면
에서는 그러한 흥청거림은 거의 없고 조용한 시골집처럼 보인다. 위트릴로란 이름
과 몽마르트르를 사랑하는 노스탈지와 그밖에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명작으로
평가되고 있는 작품이다.

Paris Street, 1914

Street Scene, 1925

피에르풍 성

화면 상단에 가득 찬 당당한 성과 그 밑에 있는 기숙사 같은 건물의 석회색 벽이 멋진
대비를 이루고, 성 밑에 있는 무성한 수목들은 이 두 가지 요소를 연결하는 울타리
역할을 하고 있다. 다채로운 색채 또한 개성과 톤을 갖고 결합되어 있는데 이러한
구도와 색깔의 대비는 그가 <백색시대> 때 즐겨 쓴 일종의 '위트릴로 양식'이다.
드높은 하늘을 꿰뚫는 높은 성의 망루는 위트릴로가 꿈꾸고 지향한 마음의 고향이
었을 것이다. 저주받은 화가, 매만 맞고 사는 화가였던 그가 그림 엽서를 보고 그린
작품이지만 이 작품 속에는 그의 숨결과 체취와 순정이 담겨져 있다. 여기에 그려진
꽉 닫힌 창문처럼 그의 마음의 문도 닫혔는데 이 문을 누가 열어 줄 수 있을까?
이 문을 열어 준 것은 그림이었고 이 안타까움 속에서 위트릴로의 예술은 찬란한
빛을 발휘했다.

Notre-Dame de Paris(노트르담), 1929

위트릴로의 변화를 실감있게 관조할 수 있는 작품이다. 그는 1913년의 개인전
에서 대성공을 거두고 일약 대중화 된다. 이때까지 그림 1점에 2프랑 하던 것이
수 백프랑으로 오르고, 술집에서도 그를 천대하지 않게 된다. 말하자면 파리 화단
의 인기 작가가 된 셈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와 때를 같이하여 <백색시대>가
막을 내리고 <다색시대>로 접어든다. 그의 화면에는 밝음과 다채로움이 등장하고
정신적인 긴장감이 완만해져 간다. 부드럽고 선명하며 평면적이기는 하나 끊고
맺는 박진감이 사라져 갔다. <노트르담>은 이와 같은 변화의 과정을 볼 수 있는
좋은 본보기 작품이다. 위트릴로적인 분위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무엇인가
있어야 할 것이 없는 것 같은 그림이다.

道化師 찰리 메이어

위트릴로로서는 보기 드문 인물화인데 초상이라기보다는 희화(戱畵)에 가까운
외잡스러운 맛을 풍기는 작품이다. 피에로로 분장한 모델이 갖고 있는 성격 때문
인지 모르겠으나, 색채가 소박하지도 않으며, 세련미도 없는 치졸함을 면치 못했고
또한 위트릴로 답지 않은게 특색이다. 노화한 치열(齒列)의 묘사, 큰 눈, 붉은 수염
과 눈썹, 벌렁코, 빈정대는 듯한 표정의 강조는 그리기를 강요당하는 당시의 자신에
대한 빈정댐으로 비유될 수 있다. 위트릴로는 멀리서 본 엉덩이가 큰 여인을 제외
하고는 1939년에 그린 아내의 초상화 3점, 1920년에 그린 스케치풍의 친구 초상
화와 이 그림 등 인물화는 모두 5점만을 그렸을 뿐이다.

로뱅송의 선술집

위트릴로의 36세 때 작품인데 화면 전체가 밝고 아름다우며 특히 그의 그림에서
보기 힘든 선명한 녹색의 향연을 표출시킨 것이 이색적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 해 르프톨 화랑이 리보드 콜렉션 작품으로 위트릴로의 개인전을 가져 대성공을
거두자 일약 유명해지고 그림 값도 올라가 그를 재평가하는 사람까지 생겼는데 이
그림은 이러한 우쭐한 기분에서 그려진 것으로 추측된다. 이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고요와 평정은 대상에 대한 그의 마음속의 대화라기보다 표피적인 관찰 즉 시각
체험에 의한 대상의 재현으로 보여지며 이러한 경향은 이 시기의 그의 예술에 이미
하나의 양식으로 굳혀져 갔다. 위트릴로의 다른 세계로의 이행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포와시 거리

1942년 위트릴로 59세 때의 작품이다. 사람들은 위트릴로와 모딜리아니를 '저주
받은 화가'라고 부른다. 술과 방탕이 극한에 이르렀던 <백의시대>를 지나, 만년에
이르러서의 거의 광적인 신앙심 등은 어쩌면 몽마르트르를 사랑한 위트릴로의
숙명이기도 하다. 다작, 똑같은 모티브의 반복, 똑같은 색채 등등... 그의 작품을
해석하기란 여간 지루한 작업이 아니다. 미술 평론가들은 그의 50대 이후의
작품을 무기력하고 혼이 빠진 그림이라고 혹평하며, 숫제 작품으로 취급하는 것
조차 기피한다. 이러한 선입견이 아니더라도 이 그림을 보면 어딘지 맥이 빠진
듯하다. 그리고 그리다만 미완성의 작품 같은 느낌도 든다. 생기나 활기가 전혀
없는 공허한 그림이고 공허한 거리이다.

Flowers, 1946

Windmills of Montmartre, 1949

Bridge and Church

The Sewing Lesson



★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1883~1956) ★

Marie Laurencin photographed by Carl Van Vechten, 1949

프랑스 파리 출생으로 평범한 중류 가정에서 태어나, 윙바르의 회화연구소에서 소묘
(素描)를 배웠다. 처음에는 툴루즈 로트레크와 마네의 작품에서 감화를 받았다.
그러나 브라크와 피카소 등과 알게 되고 아폴리네르와 살몽 등의 시인들과도 접하며
큐비즘 운동이 일어나는 와중에서 가장 첨단적인 예술론에 촉발되면서 자랐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큐비스트는 되지 못하고, 형태와 색채의 단순화와 양식화 속에
자기의 진로를 개척하여 감각적이며 유연하고 독특한 화풍을 만들어냈다.
1912년의 첫 개인전에서 인정을 받아 파리 화단에서의 지위를 확보하고, 1920년
로마의 개인전에서도 새로운 여류화가로서 성공했다.

그녀는 우아하고 약간은 우울한 여성을 그린 섬세한 수채화로 유명하다.
흑인예술이나 페르시아의 세밀화에 영향을 받아 점차 자유로운 화풍 속에서 여성
다운 섬세한 관능을 표현하게 되었다. 소박하고 유연한 묘법(描法)과 담홍, 담청,
회백색의 유려하고 감미로운 색채 배합이 특징이며, 즐겨 꿈꾸는 듯한 소녀상을
테마로 하여 환상적, 감상적인 작품을 남겼다. 그녀는 또 양탄자와 벽지의 무늬
를 고안하거나, 책의 삽화, 석판화, 발레의 무대장치를 그리거나 복식(服飾) 도안
도 하여 현대 일류의 여류화가로서 다채로운 활동을 했다.

그녀는 화가란 당연히 남성이고 '여성 화가'는 희귀한 예외적 존재였던 시절에
살았다. 그녀의 예술 세계가 남성 화가들의 세계와 같은 척도로 평가될 수 없다
해서 그녀의 재능이 절하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감정, 삶의 방식, 그리고 재능
에서 그녀는 독특한 인물이었고 그녀의 예술 세계는 시대를 초월하여 독창적인
것이었다.

Artemis, c.1908

Bacchante, 1911

Women in the Woods, 1913

Untitled, c.1918

Woman with a Dog

Bouquet, 1922

Mademoiselle Coco Chanel, 1923

Les Biches, 1923

Portrait of a Little Girl(Little Girl with a Dog)

Valentine, 1924

The Kiss, 1927

써머셋 모옴(1874~1965)의 소장품이었던 작품이다. 모옴은 남프랑스 비에라에
있는 별장을 장식하기 위하여 몇 점의 로랑셍의 그림을 구입하였다.
그는 1934년 런던에서 있었던 로랑셍의 전람회 카타로그의 서문을 썼다.

Mother and child, 1928

Young Girl with a Dove, 1928

   

   

   

   

Le Trio en Concert ou Jeunes Filles au Luth

Jeune femme au chapeau et la rose, 1932

Helene, 1936

Blue Ribbon, 1938

Young Girl with a Guitar

Mme Domenica Paul

Peri, 1940

"Jeune femme au chien" or "la Mari?"

Portrait of the Baroness gourgaud

Juene fille au collier de perles, 1947

A Group of Artists/Apollinaire, Laurencin, Picasso,

Fernande Olivier, and Picasso's dog, Frika

Woman with Mandolin, 1940

Conversation

Trois Jeunes Filles



★ 카임 수틴(Chaim Soutine:1894~1943) ★

Self-Portrait, 1918

리투아니아 민크스 근교의 스밀로비치 출생으로 가난한 유대인 재봉사의 아들로 태어나
극빈한 소년시절을 보냈으나 일찍이 화재(畵才)를 나타냈고 1910년 고학으로 빌나의
미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 후 그의 재능을 아낀 의사의 원조로 파리의 미술학교에
다니게 되었으며 파리에서 거처로 삼은 곳은 방랑 미술가 라 뤼슈의 집합처로 그 곳
에서 A. 모딜리아니와 M. 샤갈 등과 우정을 다졌다.
1919년부터 3년간은 남프랑스의 세르에 체류하였는데, 그 곳 남국의 빛과 색채는
M. 블라맹크에 심취하여 있던 그의 작품에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다.
그는 일련의 풍경화를 그리는 동안 주황색·녹색·노란색과 같은 선명하고 강렬한 색채
와 대상을 강하게 왜곡시키는 주관적 표현을 개발하였다.
1922년 파리로 돌아왔으며 이듬해 미국의 대수집가인 번즈(Alfred Barnes) 박사에
의하여 약 100점의 그림이 팔렸다. 그 후로 에콜 드 파리의 유력한 사람으로 화단의
인정을 받았으나 여전히 수육(獸肉)이나 미친 여인 등을 주제로 삼았으며, 격정과
환각을 충만시켜 박해받는 인간이 품은 고독한 영혼의 절규라고 할 수 있는 표정을
무너뜨리지 않았다. 만년에는 파리를 떠나 지방에서 생활하였으며, 불우한 가운데
절망과 빈곤의 생애를 마쳤다. 수틴은 에콜 드 파리의 표현주의 화가들 가운데 가장
급진적이며 뛰어난 영감을 지닌 인물이었다. 지극히 개성적인 그의 화풍은 두터운
채색, 격정적인 필치, 발작하는 듯한 구성상의 리듬, 혼란스러운 심리학적 내용이
특색을 이루는데, 이런 점은 20세기 초 표현주의의 주류와 긴밀한 연관이 있다.

Nature Morte au Faisan, 1918

The Man in Prayer, 1921

Farm Girl, 1922

Woman in Red

The Little Pastry Cook

The Village

Still Life with Fish, Eggs and Lemons, 1923

Portrait of Sculptor Miestchaninoff, 1923

Landscape of Cagnes, 1923-24

Nature Morte a la Raie, 1924

The Communicant, 1925

Carcass of Beef, 1925

The Pastry Chef, 1927

Portrait of a Boy(The Servant), 1928

Portrait of Madame Castaing, 1928

Small Place in the Town, 1929

Seated Choirboy, 1930

Naked Woman, 1933

Profile of a Woman, 1937

Chartres Cathedral, 1933

Returning from School, 1939

Windy Day in Auxerre, 1939

Young Girl at the Fence,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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