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미술사 참고자료/추상표현주의

서양미술사71 추상표현주의 - 칸딘스키

AH101 2012. 2. 16.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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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미술사 - 71(추상표현주의: 칸딘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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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 ★

Improvisation 12(Rider)

20세기 초, 유럽은 산업혁명 이후 장미빛 미래를 꿈꾸며 도약을 준비한다. 1914년에 일어
난 제1차 세계대전은 유럽의 꿈을 무참히 깨뜨리고 말았다. 이 시기에 즈음하여 미술계에는
추상적인 패턴의 작품들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특히 바실리 칸딘스키는 추상화를
통한 회화의 혁명을 주도하며 20세기 미술의 새로운 장을 여는 거목으로 서 있었다.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1866-1944)는 러시아 모스크바 출신의
프랑스의 화가로 1939년 프랑스에 귀화하였다. 모스크바의 명석한 법률가이자 러시아
민속 문화를 공부하던 칸딘스키는 법학 교수가 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돌연 30세에 법학
을 포기하고 뮌헨으로 옮겨와 미술을 공부하면서 동료학생이자 자신보다 13살 어린 파울
클레(Paul Klee)와 오랜 우정을 쌓기 시작했다. 칸딘스키는 20세기 가장 혁명적인 미술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다. 그의 초기 회화는 러시아에서 내려오던 전설을 시적이고 마술
적으로 그려냈다. 그러나 1908년 42세 되던 해 뮌헨을 떠나 무르나우의 산촌 마을에
머물며 풍경을 그리면서부터 그의 미술에 중요한 전환점이 찾아온다.
자연의 이미지는 곧 격렬하게 상충하는 색채와 형태의 조각과 선들로 분해되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추상화되어 갔다. 칸딘스키는 시각적인 표현과 아울러 이론을 글로 남기기
시작했다. 칸딘스키는 많은 전위파 예술가들과 어울렸다. 1911년에는 프란츠 마르크
(Franz Marc), 아우그스트 마케(August Macke) 등의 동료들과 함께 '청기사파'를 결성
했다. 이들은 <청기사>라는 잡지를 통해 추상표현주의를 유럽에서 가장 흥미로운 운동
으로 발전시켰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칸딘스키는 러시아로 돌아가 혁명에
열렬히 참여했고 모스크바 미술 아카데미의 교수로 임명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마르크와 마케 둘 다 목숨을 잃었다. 칸딘스키의 화풍은 블라디미르 타틀린(Vladimir Tatlin:1885~1953)과 알렉산드르 로트첸코(Alexandre Rodchenko:1891~
1956)의 구성주의(구축주의:Constructivism) 운동에 크게 영향을 받아 다시 한번
극적으로 변모했다. 1922년 칸딘스키는 독일로 돌아와 클레의 초청으로 바이마르
(Weimar)와 데사우(Dessau)의 바우하우스(Bauhaus:1919~1923년 독일에
있었던 조형예술학교로 기능적이고 합목적적인 새로운 미를 추구하였다.)에서 연구
하게 된다. 그는 색채에 대한 실험을 계속했고 이즈음부터 기하학적인 양식을 보여
주었다. 1926년 바우하우스와의 관계가 끝난 후 그는 <점, 선, 면>이라는 미술이론
과 미학에서 중요한 논문을 발행했다. 만년에 파리 근교의 뇌이쉬르센(Neuilly-sur-
Seine)으로 이주한 뒤 1944년 그곳에서 사망했다.

1896년 교수직을 포기하고 뮌헨으로 이주하면서 본격적인 그림 그리기에 몰입했던 어느
날, 외출을 하고 집에 돌아온 칸딘스키는 선명함과 강렬함으로 격정적인 감동의 순간을
접했다. 바로 거꾸로 세워진 자신의 그림을 바라본 순간이었다. 무슨 그림인지 도저히
알아 볼 수 없었지만 칸딘스키는 이를 통해 추상화를 탄생시키는 영감을 얻게 되었다.
칸딘스키는 자신의 회화에 음악성을 부여했다. 20세기 초의 현대시와 미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공헌을 한 바그너의 오페라 이론으로부터 총체 예술에 대한 생각을 받아들여
공감각의 원리로 발전시켰다. 공감각이란 이미지와 음 또는 냄새와 맛과 같이 서로 다른
영역의 감각을 함께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심지어는 '색상은 건반이고 정신은 피아노,
화가는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영혼을 울리는 손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는 음악이 화음만으로 청중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것처럼 회화에서도 색채나 선만으로
대상을 표현해 내는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색조와
형태의 배치는 음악적 요소들이 함께 어우러져 영혼을 감동시키는 것이다.
그는 색의 상호작용과 기하학적인 경향을 파악하고 궁극적으로는 색채에 음악적 감정을
부여하고자 했다. 작품에 명시되어 있는 <즉흥>, <음향>과 같은 음악적 용어가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1910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던 1914년까지
칸딘스키의 작품 세계는 절정을 이루게 된다. 구상적인 작품에서 비구상으로의 전환을
꾀하면서 그는 당대의 신미술가협회와 결별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칸딘스키는
음악가 친구들과 우정을 더욱 돈독히 하며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회화를 크게 구상과 비구상으로 나누어 볼 때 구상은 구체적인 사물이나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것, 그리고 그릴 대상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것인 반면에 구체적인 대상을 그리지
않거나, 혹은 대상이 없는 그림을 그리거나 하는 화가의 주관적인 감정에 의지해서 완성
되는 회화를 추상화라고 한다. 추상화는 화가의 주관적인 예술 활동이므로 결국 그림을
이해하기보다 화가를 이해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칸딘스키는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방법에 나름대로 원칙을 두고 즉흥(Improvisation)
이나 구성(Composition), 인상(Impression) 등으로 회화를 구분하기도 했다.
특정 대상이나 자연의 모습을 화폭에서 완전히 제거한 화가였다. 이같은 실물 주제의
포기를 정당화하며 회화의 자율성을 부르짖었다. 그는 무형의 주제로부터 예술에 대한
생각을 나름대로 정립하며 공감각의 원리로 발전시켜 나갔다.
1933년 그의 작품을 퇴폐 예술이라고 낙인찍은 나치주의로 인해 독일을 떠나 파리에
정착한 이후 칸딘스키는 유럽의 추상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만년의 칸딘스키는
자유롭고 조용한 작품 제작의 시간에 또 다시 몰입한다. 기하학적인 구성을 포기하고
부드러운 곡선과 유기체의 형태를 만들어 나간 것이다. 그는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인식의 사물을 대신해 신비적이고 환상적인 이미지들을 화폭 위에 펼쳤다.
무의식으로 느껴지는 내면의 상황, 비록 형태는 없지만 그는 캔버스 위에 피인지 물감
인지 구분조차 안되는 불길한 얼룩
을 그려 넣기도 하고, 선의 움직임을 통해 격정적이고 흥분된 느낌을 살리기도 했다.
이제 그의 작품에는 더 이상 어떤 형상이나 사물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보는 이들에게 자신의 그림을 이해시키려 하기보다 상징적인 물음표를 하나씩
더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Portrait of Gabriele Munter, 1905

1902년 베를린에서 청기사 일원인 가브리엘 뮌터(1877~1962)를 만난 칸딘스키는
이미 결혼을 했던 상태였다. 하지만 예술적 동반자로 시작된 그들의 만남은 후에는 그
이상을 넘게 된다. 로뎅과 카미유 클로델처럼 그들의 결합도 서로에게 예술적 상승
효과를 가져다 주는 자극과도 같은 것이었다. 15년간을 함께 했던 이들의 동행은
쉽지 않은 시기에 개척자로 살아야 하는 서로에게 힘과 의지가 되어 주었다.

Riding Couple, 1906-07

Colorful Life, 1907

로마네스크 시대의 스테인드 글라스를 연상시키는 그림이다. 러시아의 민속예술에
영향을 받은 칸딘스키의 초기 작품들은 위와 같은 단순하고도 현란한 색채의 향현을
보여주고 있다. 크고 작은 점들의 장식성과 강렬한 원색의 대비는 작가의 대담하고
특이한 실험정신을 엿보이게 한다.

The Blue Mountain, 1908/09
대담하게 설정한 구도는 종래의 구도론을 떠나 우리에게 중량 감 마저 느끼게 한다.
좌우의 균형을 맞춘 큰 나무는 하늘을 덮듯 큰 면적으로 처리하고, 그 사이 중앙에
피라밋 형의 푸른 산이 원형으로 그려져 있는 독특한 구도이다.
아래쪽에는 원경으로 그려져 있는 푸른 산을 앞에 두고 하늘을 향하여 질주하는
군마(軍馬)의 약동적인 형태가 인상적이다.
크고 작은 수많은 점들로 그려진 이른바 색점묘법(色點描法)의 기법은 화면을 장식
적인 세계로 이끌어가는 한편, 강렬한 원색의 대비는 포비즘의 영향을 받은 듯하나,
러시아의 민속 예술의 연상과 실현으로 보아야 할 듯하다. 아무튼 끝없는 실험의
연속으로 보아야 할 작가의 태도는 대담하고 특이한 구도에서 충분히 읽을 수가
있다.

Improvisation III-Picture with a Yellow Wall, 1909

Cemetery & Vicarage in Kochel, 1909

Grungasse in Murnau, 1909

작가들이 생활 환경의 대상물이나 일상 생활에서 얻어진 체험들을 작품 모티브로 사용하는
예는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무르나우는 뮌헨의 남쪽, 알프스의 산들로
둘러 싸인 아름다운 마을이다. 무르나우에서 제작된 작품들은 자연의 외관이 눈에 띄게
주관적으로 처리되어 표현주의적인 화풍으로 대담한 전환을 시도했다.
형태의 단순화, 선명한 색상의 대비, 폭넓고 개성 있는 터치, 이미 칸딘스키는 대상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기 보다는 주관을 강하게 나타내는 것을 지향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주관적인 '안으로의 응시'는 억제하기 어려운 욕구 때문인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충동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 필연성' 때문에 생긴 것으로써 늘 검증되고
있다.

Murnau-View with Railway and Castle, 1909

Interior(My Dining Room), 1909

화려한 분홍색의 축제 같다. 당시 칸딘스키는 그의 예술적 동반자였던 가브리엘 뮌터와
독일 뮌헨 근처의 무르나우에 집 한채를 장만하면서 그린 그림이다. 그는 당시 행복하고
화려했던 자신의 감정을 과감한 색채로 표현하였다.

Church in Murnau, 1910

제목을 보지 않으면 교회라고 전혀 연상되지 않을 만큼 지극히 단순화 되고 추상화된
그림이다. 칸딘스키가 살고 있던 지방 무르나우에 있던 교회를 그린 것이다.
화려한 색채와 형태를 무시한 구성이 이채롭다. 이 작품을 그린 때는 풍경화에서 추상화
로 그의 작품 경향이 옮겨지고 있던 시기였다. 이렇게 추상화로 옮겨지는 그의 예술로
인해 그는 동맹 관계에 있던 많은 친구들을 잃게 되기도 했다.

Improvisation 19, 1911

칸딘스키는 모스크바 궁전 극장에서 바그너(Richard Wagner) 오페라 '로엔그린
(Lohengrin)'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은 바 있다. '바이올린의, 베이스의, 관악기의 깊은
울림, 나의 마음속에 나의 모든 빛깔을 보았다. 그것은 나의 눈앞에 있었다. 야성적이며,
거의 미친 것 같은 선이 눈앞에 그려졌다. 바그너가 '나의 시간'을 음악적으로 그렸다고
하는 표현을 나는 감히 사용하지 않겠다. 그러나 분명한 일은 예술이란 것은 내가 상상
하고 있었던 것보다 더 힘찬 것이며, 회화는 음악이 갖고 있는 것과 같은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일이었다.' 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칸딘스키는 예술의 이론이나, 제명에 음악과
관련이 있는 말을 잘 사용했는데 즉흥도 그 중의 하나이다.
<즉흥> 시리즈에서 칸딘스키는 내부에서 솟아나오는 감흥을 자유롭게 화면에 정착시키
려 했다.

All Saints I, 1911

Composition IV, 1911

Composition V, 1911

<즉흥Improvisation> 시리즈, <인상Impression> 시리즈와 아울러 <구성Compo-
sition> 시리즈도 칸딘스키에겐 중요한 계통적 작품군(作品群) 이다.
<즉흥Improvisation>은 내적 필연성이 무의식적·우발적·음악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상태이며, <인상Impression>은 대상을 평면적으로 용해하여 새로운 표현의 전개를,
<구성>은 1910년 최초로 발표한 이래 죽음에 이를 때까지 10점이 제작된 연작은 칸딘스키 예술의 중핵을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작품군이다.
이 작품은 칸딘스키의 추상적 표현주의가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작품이다.
무엇인가를 연상케 하며 여러 가지의 자유롭고 유기적인 형태가 떠돌아 다니기도 하고,
어떤 운동성을 나타내기도 하는 형태시(形態詩) 또는 드라마를 전개하고 있다.
칸딘스키의 조형언어가 유감없이 표현된 역작이라고 하겠다.

Cossacks, 1910/11

Improvisation 28, 1912

Black Spot I, 1912

적극적으로 추상표현주의를 전개해 나간 칸딘스키는 이 시기에 매우 중요한 작품들을
많이 제작했다. 불규칙한 선과 형태, 색채가 서로 응집하기도 하고 교감하기도 한다.
작가의 내적인 감흥이 자유롭게 펼쳐지고 있다. 그림을 보는 관객에게도 작가만큼
자유롭게 느끼고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칸딘스키는 제공하고 있다.

Last Judgement, 1912

Composition VI, 1913

Composition VII, 1913

Flood Improvisation, 1913

S

mall Pleasures, 1913

Fragment 2 for Composition VII, 1913

I

mprovisation 30(Cannons), 1913

<즉흥Improvisation> 시리즈는 1909년에 시작하여 13년 말까지의 사이에 34점의
작품을 제작하였다. 대단한 열성에 의한 작업량이다. 선과 면의 유기적이고 유동적인
교차에 있어서 전체가 가장 생생하게 잘 짜여져 있다. 색채가 다양하며 미세한 변화를
보이고 있는 것도 주목할 만 하다. 화면 여러 군데에 자유로운 곡선들은 주위의 형태들을
용해시켜 응결된 응집력을 구축하면서, 그 사이에 강하고 다양한 색으로 메워 가는 비교적
섬세한 작업의 하나이다. '대포'라는 부제가 붙어 오른쪽 아래편에 대포의 형상이 보이기
는 하나, 화면 전체의 구성상 빌려온 것인지 제 1차 세계 대전의 시대적 상황, 긴장과 불안
한 심리 상태를 나타낸 것인지 보는 사람의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다.

Improvisation 31(Sea Battle), 1913

이 시기에 칸딘스키는 음악적 제목을 즉흥, 인상, 구성 등 자신의 작품에 붙였다.
이 시기에는 즉흥 시리즈를 제작하였는데, 작품에 즉흥이라는 제목과 함께 번호를 주었다.
칸딘스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소리를 재료로 하는 음악이 가장 순수한 추상이라고 생각
했고, 미술에서도 음악과 같은 순수한 표현성이 성취되길 바랐다.

Painting with White Border, 1913

Landscape with Church, 1913

Ravine Improvisation, 1914

Fugue(푸가), 1914

'청기사'시대 말기의 대작이다. 조형 요소 중에서 가장 감각적인 것은 색채라고 할 수
있다. 보는 순간에 마음을 움직이고 갖가지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조형의 매력을 주는 것
은 뭐라고 해도 색채이다. 색채는 다른 조형 요소보다 생명적·본능적인 것이며, 천부나,
체질 또는 생활 감정에 더욱 직결되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렇듯 칸딘스키는 무대상
(無對象)의 추상에서도 색채 화가라고 불릴 만큼 색채의 구사에 노력함을 엿볼 수가 있다.
크고 작은 여러 모양의 곡선들이 색조와 복합적으로 뒤섞여 공간 속에 한데 어울려 음악적
인 리듬과 멜로디를 울리게 하는 장대한 심포니를 듣는 듯하다. 중앙에는 흰색의 내밀한
도식적인 선과 조그마한 여러 형태를 가지면서 노란 색조의 커다란 운동은 화면을 긴장과
리듬으로 이끌고 있다.

Moscow I, 1916

In Gray, 1919

Red Oval, 1920

꺼질 줄 모르는 전쟁과 미래에의 불확실한 전망은 칸딘스키의 예술에 대한 열정을
식히고 있었다. 1915년과 1921년 사이에는 다른 창작기와 비교해서 극소수의 작품
만이 제작되었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 후, 소련 정부는 예술 부문에도 변혁을 하려고
혁신적인 예술가를 적극적으로 등용했다. 1918년에 소련 정부의 미술 행정위원이 된
칸딘스키는 그 전부터 열망하고 있던 종합 예술의 실현을 기대하여, 창립 주창자로서
교육자의 능력을 발휘하여 중앙 또는 지방 미술관을 정비하는 일에 힘쓰는 한편,
모스크바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등 크게 노력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제작된 이 작품은
점차 도식화되어 가는 과정으로 훗날 독자적인 상징적 기호성이 하나 둘씩 얼굴을
내밀고 있다.

Untitled, 1920

Red Spot II, 1921

Small Worlds II, 1922

그가 붙인 제목처럼 강인함과 연약함으로 표현되는 큰 원과 작은 원, 적은 수의 선과
색이 자유롭게 배치되어 있다. 유난히 적은 수를 사용하고 무채색과 흐릿한 터치를
보여주는 이 작품은 그의 다른 작품에 비해 매우 단순하고 정적이다. 작은 세계라
명명한대로 정치적인 이유로 러시아에서 베를린으로 옮겨야 하는 작가의 서글픔과
우울한 정신 세계가 보여진다.

Untitled, 1922

Unjuried Art Show Mural B, 1922

Transverse Line, 1923

Composition VIII, 1923

구성 시리즈는 몇 년마다 한 번씩 그려진 것으로 칸딘스키의 화풍이 어떻게 변하는지 알
수 있다. 서서히 형성되는 그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다.
작품 위에 하나의 원이나 선을 올려놓은 것이나 색채를 결정하는 것은 계산이 아니라
칸딘스키의 감각에 따른 것이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작업을 작곡이라고 표현하였다.

Black and Violet, 1923

On White II, 1923

Orange, 1923

Contrasting Sounds, 1924

Y

ellow, Red, Blue, 1925

니나 부인이 분류한 원의 시대(1925년-1928년)의 초기 작품이다. 노랑을 주조로 한
바탕 위에 빨강과 파랑이 간결하게 자리잡은 위에 직선, 곡선, 원 등이 여러 가지 형태로서
각기 다른 성격을 가지면서 기하학적인 요소가 강한 왼쪽 부분과 오른쪽의 유기적이고
불규칙한 현장의 연출로 화면은 성격이 다른 형태들로 양분되고 있는 듯하다.
이렇게 대립되고 있는 것들과 총체적인 통합으로서의 노력이 강조되고 있다.
'대립과 모순-이것이 우리들의 하모니인 것이다. 이러한 하모니에 바탕을 둔 콤포지션이
색채와 뎃생의 결합임은 말할 나위도없다. 다만 그때 이들 색채와 데생은 각각 독립하면
서 게다가 내적 필연성에 따라 꺼내어지며, 그리하여 그곳에 탄생하는 공통의 생명 속에
하나의 전체를 형성한다. 즉 회화라고 부르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다.'라고 칸딘스키는
썼다.

In the Blue, 1925

Several Circles, 1926

칸딘스키는 '그 많은 기하학적 형태 중에서도 유독 원을 선택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다. '원은 첫째, 가장 겸양하는 형태이면서 어디까지나 자기 주장
도 하고 둘째, 간결한 반면 무한히 변화하며 셋째, 안정되어 있음과 동시에 불안정하기도
하고 넷째, 무수한 긴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원은 최대한으로 대립하는 것의 종합이며,
이는 구심성과 원심성을 하나의 형태로, 더욱이 균형을 유지하며, 통일되고 있다.
세 가지의 기본적인 형태(삼각형, 정방형, 원) 중에서 원은 4차원에의 가장 명료한 지표이
기도 하다.' 이렇게 원에 대한 조형 연구의 연속으로서 큰 원 안에 다수의 대(大)·소(小)
원을 그리는 시도이다. 원이 우주적 요소를 띠고 마치 위성처럼 무한 공간을 떠오르고
있다.

Softened Construction, 1927

1926년에 <점, 선, 면>을 출판하여 60세를 맞이한 칸딘스키는 바우하우스에 부교장
으로서 그로피우스를 보좌하였다. 이 작품은 마치 우리 나라 민화(民話)를 보는 듯한
도식적 요소를 느낄 수 있다. 한참 의욕적인 제작에 몰입할 때 종이와 수채와 잉크에
의해 이 시기의 특색인 원을 화면에 구성시켜 가면서 곡선적인 형태와 예각적인 직선
으로써 대조적인 형태를 공간에 떠 올려 조형적인 음악을 생각케 하는 심리적인 조화의
세계를 생성시키고 있다. 간결하고 정리된 화면은 추상을 초탈하고 생명적 형태만이
그려져 있다. 또한 화면 가득히 운무법(뿌리는 기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특이한 방법
이나, 이것은 끝없는 조형 언어의 실험적 연구로 받아 들여진다.

The Great Gate of Kiev, 1928

Fixed Flight, 1932

Succession(연속), 1935

칸딘스키는 음악을 회화에 이입하려는 노력은 계속 되었다. 이 작품은 마치 오선지 위의
음표를 보는 듯하다. 형태와 색이 만들어 내는 도형적인 형상이 수평선을 따라 리드미컬
하게 울려 퍼져 자유롭고 명확한 윤곽으로 그려져 있어 자유 분방하고 태평스러우며,
생생한 생명감을 느끼게 하는 한편 전체는 어떤 질서 속에 멋지게 통일되어 있다.

Two Green Points, 1935

Dominant Curve, 1936

Composition IX, 1936

Capricious Forms, 1937

Composition X, 1939

Sky Blue, 1940

푸른색의 공간에 여러 가지 유기적인 형태가 난무하고 있다. 첫 눈에 민족적인 요소가
대단히 진한 형태이며, 추상을 벗어나 생명의 원초적 형태 같은 것에 가까워지고 있다.
젊은 시절에 민족학 조사단에 참가하여 북쪽 지방을 여행하였을 때부터 기회가 있을 때
마다 흥미를 가진 민예품이나 이콘, 장식무늬 공예품에서 영향을 받아, 오랜 시간 형태
연구를 통하여 칸딘스키의 내부에서 자라난 형태일 것이다. 그것을 상징적인 기호로써
배열해 놓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칸딘스키는 하나의 코스모폴리탄 이었지만 이국에서
항상 고향을 그리워하며 고독한 노년을 보내며 자신의 유년시절을 회상하면서 이러한
동화적 세계에 탐닉 되었을 것이다.

Around the Circle, 1940

Tempered Elan,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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