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미술사 참고자료/팝아트

서양 미술사 - 78(팝 아트: 앤디 워홀, 조지 시걸)

AH101 2012. 2. 17. 01:04
반응형

   

서양 미술사 - 78( 아트: 앤디 워홀, 조지 시걸)


앤디 워홀(Andy Warhol: 1928~1987)


1928
8 6 필라델피아에서 출생하였다.  피츠버그의 카네기공과대학을
졸업하고, 1952년경부터 뉴욕에서 상업 디자이너로 활약하다가 화가가 되었다.  
1962
시드니 재니스화랑에서 열린 '뉴리얼리스트전()' 출품하여 주목을
끌기 시작하고 만화의 , 신문보도 사진의 장면, 영화배우의 브로
마이드 매스미디어의 매체를 실크스크린으로 캔버스에 전사(轉寫) 확대하는
수법으로 현대의 대량소비문화를 찬미하는 동시에 비판하여 이름을 떨쳤다.
1963
년부터는 《슬립》 《엠파이어》 실험영화 제작에 힘쓰고 상업영화에
손대는가 하면 소설도 출판하는 다방면으로 활약하여 1960년대 미국 예술계
대표하는 존재가 되었다.  한국에서는 1994 9, 호암갤러리에서 그의
팝아트전이 개최되었다.  주요저서에 1970년대의 조망》 등이 있다.

미국의 아트의 대표라면 앤디 워홀을 있는데, 그는 실크스크린이라는
대량 복제가 가능한 인쇄 방법을 이용하여 반복적 이미지를 보여준다.  
이는 광고의 속성을 차용한 것으로 현대의 대중 문화에 걸맞는 예술 형태를
보여주는 것이다.  워홀은 대중적 이미지 아니라 공포의 이미지도 사용
하는데, 예를 들어 영화 배우와 같은 유명인들, , 코카콜라병, 또는 전기의자
자동차 충돌 장면, 폭풍의 현장 등을 캔버스 위에 반복적으로 묘사하여 거의
임의적인 색채를 첨가함으로써 미묘한 효과를 보여준다.

워홀의 작품은 대량 생산품을 새롭게 바라보게 하며 끔직한 장면이나 유명인들
대한 반응을 마비시키는 등의 결과를 초래한다.  그는 대중적 속물주의를
정착시켰다.  특히 동어반복적 표현을 통한 작품의 유일무이성 부정, 오리지낼
리티의 부정 등은 후에 추상미술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나는 원래 상업미술가
시작했는데 이제 사업미술가로 마무리 하고싶다.  사업과 연관된 것은 가장
매력적인 예술이다"라고 했을 정도로 미술은 심오한 정신의 산물이라기 보다는
오락적, 일상적 '상품'으로 취급하여 미술의 새장을 열었다.

피카소가 20세기 미술에 있어 프로메테우스였다면, 선전가·장난꾸러기·벼락
출세자였던 워홀은 그리스 신화의 목신인 판이었다.  
아트는 엄청난 상업성을 위해 미국미술의 정신성을 포기한 장르다.
1960
년대 워홀은 헐리우드의 요부들과 켐벨 수프 깡통 이미지의 야한 실크
스크린 작품들로 미술계를 뒤흔들었다.  그것은 밝고 조약한 색채 그리고
전세계는 생산된 제품일 이라는 그의 차가운 메시지때문이다.  
모든 것이 판매를 위한 생산라인 이미지로 격하 있다면, 마릴린·엘비스·
브릴로는 모두 현금으로 전환 가능하다는 것이다.  워홀은 미술은 물론 록밴드를
지원하기도하고, 잡지 <인터뷰> 창간하기도 했으며, TV 카메오 출연하기도
하는 다양한 활동을 펼치며 당대의 번쩍이는 네온사인 역할을 했다.
사후에도 네온사인은 쉽게 빛을 잃지 않았고 , 그의 명성은 미술계를 떠돌았다.

*A Boy for Meg, 1962*

*Beethoven*

*Birth of Venus (after Botticelli)*

*Butterfly*

*코카콜라병, 1962*

*Campbell's Soup Can*

*Campbell's Tomato Juice*

*Elvis, 1962*

다소 신비롭고 환상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3개의 이미지를 겹쳐서 나타
내었다.  스타의 화려한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서다.
그는 자신이 그리고 있는 인물을 좋아했으며 자신도 그러한 스타가 되길
꿈꾸었다고 한다.  가장 대중적인 이미지를 작품 속에 부각시켜 눈길을 끌고
다시 이미지들을 냉담하고 무미 건조하게 하여 거리감을 만드는 것이다.  
거리감 속에서의 자유로운 해석은 감상자의 몫이다.

* Five Deaths Eleven Times in Orange *

*Flower*

*Goethe*

*Jackie*

*Lenin*

*Mao #91*

*Marilyn, 1962*

*Four Marilyn Monroes*

*Liz, 1965*

마릴린 먼로와 마찬가지로 리즈 또한 워홀이 사랑한 스타이다.
그녀의 눈두덩과 입술에 더해진 워홀의 거친 처리 방식에 주목해 본다.  
평평하고 야한 색채로 이루어진 표현에 대해 그는 "나는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녀는 아름다우며, 색채도 아름다울 뿐이다." 라고 말하였다.  
단순히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이기에 작품화 했다는 것이다.

*Ingrid Bergman, Herself*

*신사와 숙녀들, 1975*

아홉 명의 신사와 숙녀의 이미지를 단순화 시키고 변형시켜서 나열한 작품이다.  
이는 워홀이 사용하는 표현법으로 이미지들을 단편적이고 무감각하게 반복
나열함으로써 이미지 나름대로의 개성을 제거하였다.  그리고 나서 인식되는
새로운 의미들을 감상자에게 보여주는 듯하면서 감추어 버리는 것이 워홀의
전략인 것이다.

*Mickey Mouse*

2 대전 전부터 미국인에게 매우 친숙하였고,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생쥐라
칭해지는 미키 마우스 이미지이다.  당시 워홀은 신화라는 제목으로 파손
위기에 처한 고전 작품들을 시리즈로 제작하였다.
비너스의 탄생이나 최후의 만찬 시리즈와 같이 제작한 것으로 보아 워홀은
미국인에게 미키 마우스는 다빈치의 작품 만큼이나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던 같다.

*Red Race Riot*

*Self-portrait*

*Troy Diptych*

*슈퍼맨, 1981*

워홀은 뽀빠이나 미키 마우스 그리고 슈퍼맨과 같이 미국인들이 열광하는
지극히 대중적인 소재를 이용하여 작품을 제작하곤 했다.
이를 통해 전통적인 미술에 대한 개념을 극복하고자 것이다.
또한 어떻게 해서든지 여느 그림과는 다른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그래야 대중에게 어필할 있다는 그의 신념을 표현한 것이다. <>

*제인 폰다, 1982*

마릴린 먼로나 엘리자베스 테일러, 엘비스 프레슬리 그리고 제인 폰다와
같은 헐리우드 스타들도 그의 작품 주인공이 되었다.
또한 지극히 대중적인 소재로, 지극히 대중적인 작품을 제작하여 지극히
대중적인 인기를 끌기 위함이었다.  인기는 부와 명예로 연결될 있으니까.

*브룩클린 다리, 1983*

자유의 여신상과 함께 뉴욕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는 부룩클린 다리이다.  
다리의 특징을 좌우의 양방향에서 잡아 실크 스크린으로 제작한 연작
시리즈 하나 이다.  강렬한 단색을 사용해서 저녁놀로 인해 생긴 그림자
실루엣처럼 보이고 있다.  워홀은 인기를 위해 지극히 미국적인 소재로
미국민들의 호응을 꾀하였고, 대중은 그의 의도에 충분히 답해주었다.

*도날드 기념식, 1985*

미키 마우스와 함께 유명한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캐릭터다.
빗자루를 들고 행진을 하는 도날드 덕의 모습이 4 거울에 비취고 있는
처럼 그려졌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거울 도날드들은 가운데 도날드가
반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다른 도날드처럼 그려져 있다.

*사과, 1985*

너무나 유명한 매킨토시 컴퓨터의 로고다.  몇몇 미술인이나 디자이너들이
이용하는 브랜드지만 반쯤 베어먹은 사과는 누구에게나 익숙한 상징이다.

*그레이스 켈리, 1987*

1954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고, 1950년대 미국 영화계의 별이었던
여배우다.   모나코의 왕과 결혼하여 금세기 최고의 얼짱 왕자들이 탄생
되게 주역이다.  1982, 좁고 작은 나라 모나코에서 교통사고로 사망
했지만, 여전히 미국인들에게는 그들의 조국이 탄생시킨 나라의 왕비로
기억되고 있다.

*달에서의 걸음, 1987*

1969 아폴로 11호에서 내린 루이 암스트롱이 달에 미국의 국기를 꽂고
인류로서는 처음으로 첫걸음을 내딛었던 순간이다.
"
나에게는 작은 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거대한 진보이다" 말도 유명하다.  
장면도 미국인들의 가슴 속에 깊이 박혀 그들에게 자신들의 존재감을
느낄 있게 하는 사건이었다.

*베토벤, 1987*

미국의 음악가는 아니지만 베토벤 역시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고 있는 작곡가
이다.  그의 인생 만큼이나 격정적이고, 어두운 그의 음악을 많은 이들은
사랑하고 있다.  워홀은 작품을 제작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신의 인생은 끝이 나지만 명성만큼은 베토벤처럼 오래도록 지속되길
바랬을 것이다.

★죠지 시걸(George Segal: 1924~2000)


미국 뉴욕 출생의 조각가이다.  쿠퍼 유니언, 뉴욕대학교 등에서 수학하고
1950
년대까지 회화에 전념하였으나, A.카프로를 만나 해프닝(happening:
非演劇的·脫領域的 연극형식) 공간적 공연을 계기로 석고에 의한 인체상을
제작하기 시작하였다.  현실의 인체에서 직접 본떠, 주형(鑄型)으로 실물과
닮은 모조품을 만들어 일상생활 속에 있는 환경적 오브제와 함께 전시
하였다.  1960년대 초에 주목을 대중미술의 일익을 담당하였으며
대도시 대중의 군상(群像) 표현한 환경조각은 미국 풍경의 회화와 연계
되는 독자적 작품으로 평가된다.  순백한 석고상과 환경적 장치는 차츰
규모가 커지고, 1970년대 이후에는 색채를 가한 인체상도 제작하였다.

1960
년대 팝아트의 중심이었던 시걸은 실물크기의 석고조소 제작으로
유명하다.  특히 그는 로이 리히텐스타인이나 앤디 와홀이 광고, 잡지, 만화
등에서 영감을 받은 것과는 달리 일상의 하찮은 것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작업을 했다.  그는 미술가. 비평가 모두가 인정하는 20세기 최고의 조형
조소가, 환경미술가였다.
그의 형태들은 인체를 거의 변형시키지 않고 석고로 본뜬 것이다.
그의 작품은 지하철에서 앉아 졸거나, 매니큐어를 칠하거나, 록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일상적인 생활 중의 포즈를 제작하였다.
시걸 작품의 요점은 매우 간결하며, 유령과 같이 하얀 석고상과 주변을 둘러싼
환경이 선명한 대비를 하고 있다.  그는 일부 작품을 실제의 사람 몸에서
석고로 직접 뜨기도 하는데, 이들 작품은 영혼이 없는 유령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또한 석고물에 적신 무명 천조각으로 실물 모형을 감싸는 그의 제작법
조각에 거친 질감을 주고 표면의 세부를 생략함으로써 신비감과 고립감을
높여준다.  시걸의 인물들은 신비적이면서 고독함에 쌓여 있으며, 영혼이 빠져
나간 우리들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저녁식사, 1964~6*

*커튼, 1974*

*러시 아워(Rush Hour), 1983, 청동*

조지 시걸은 60년대 이래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해온 팝아트 계열의 환경
조각가로서 실제 인물을 석고형으로 떠서 생활에서 일어나는 평범한 상황을
재현하는 작업으로 유명해졌다.  70년대에는 신체의 일부분으로 가상적인
움직임을 표현하는 부조작품을 제작하였고, 80년대 들어서는 영역을 확장시켜
야외조각도 제작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을 통해 시걸은 사회에서 소외된
비극적 일상을 표현하며 산업사회에 도사린 소외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1990
년대에는 동일한 맥락하에서 사진작업을 하고 있다.
<
러시 아워> 출근하는 여섯 사람의 군상으로 일상의 무게를 재현한 작품이다.  
조각대 위의 전통적인 조각과 달리 작품은 실물크기로 제작되어 바닥에
직접 놓임으로써 현실감을 주며 작가의 주변인을 모델로 하여 사실감을 강조
하였다.  한편 작품표면 파티나의 풍부한 질감은 마치 추상표현주의 계열의
회화작품을 보듯 처리되어 있다.  한발을 내딛고 걷는 사람의 모습은 이집트
미술 이래 미술사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인물상의 자세로, 미술사에 대한
시걸의 관심을 엿볼 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