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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90 행위예술

AH101 2012. 2. 17. 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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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미술사 - 90(행위예술)

   


32.
행위예술(行爲藝術, Performance: 1970년대)


개념미술의 관념 등을 보다 구체적으로 육체 자체를 통하여 실행하는
예술이다. 1960년대 중반 이후 특히 뉴욕을 중심으로, 형식주의 모더니즘에
대한 반발의 분위기가 팽배해졌다. , 클레멘트 그린버그나 마이클 프리드적인
모더니즘론에 대한 대항의 논리를 구축하려는 일련의 움직임들이 그것이었다.
모더니즘 미술이란 " 개별예술이 매체적 자기정의를 향해 점진적으로 환원되어
과정" 이라고 규정한 그린버그의 주장과, " 예술작품은 일상의 사물과는
존재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작품의 질과 가치개념은 개별예술 안에서만 가능하며
나아가 예술작품의 평가는 현실의 시간 (현존성presence)에서가 아니라
비시간적인, 영원하고도 총체적인 현시성(presentness) 속에서 찾아져야
한다는 프리드의 이론을 주축으로 하고있는 형식주의 미학이다.
이러한 모더니즘론을 극복하기 위하여 작가들이 취한 전략은 1960년대 후반에
들어서 다양하게 나타났다. 개별장르의 구분을 고의적으로 위반한다든가
모티브의 무의미한 단순 반복을 통하여 합리적/상관적인 작업에 대항한다든가
(
미니멀리즘), 작품을 아이디어나 제안의 형태로 -물질화(De-materialism)
하여 작품을 " 구매단위인 상품의 위상" 으로부터 건져내는 (개념미술)
등은 바로 모더니즘의 자기환원/자기정화의 원리를 넘어려서는 미니멀 작가들과
개념미술가들의 공통된 노력들이었다. 이들 미니멀/개념 미술작가들은 다음
세대의 작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게된다. , 막강했던 모더니즘론에 대한
컴플렉스를 제거하고 < 문화적 감옥> 미술관의 문을 활짝 열어 제칠 있는
계기를 마련해 것이다. 미술관을 벗어난 그들의 ''현장'' 바로 자연(대지)
그들의 신체(행위)였다. 실행·연기·연주 등의 어학사전적 의미에서 있듯이
이야기체 미술, 거리작업, 신체미술 등으로 다양하게 불린 70년대의 행위예술인
퍼포먼스는 그들의 예술적 매체로서 자신의 신체와 여기서 비롯되는 행위를
사용한다. , 예술가 자신이 자기작품의 주체인 동시에 대상이 된다.
회화·조각 등이 전통적인 장르개념으로는 충족할 없는 표현욕구를 퍼포먼스는
작가가 언제 어디서라도 원하는 시간만큼 직접 청중과 접촉하면서 자신들의
작품(행위) 보여줄 있기 때문에 비평가나 큐레이터/화상의 개입 없이
수용자들에게 보다 즉각적으로 접촉할 있게 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퍼포먼스는 미술을 사치품에서 시각적 소통 아이디어와 행위의 전달 수단
으로 전환시키는 기여를 했으며 결국 예술범주의 확장이라는 -(예술) 장르간
경계 허물기라는- 탈모더니즘의 특징을 보여주었다.

인간의 원초적인 표현욕망을 연극적으로 표출한다는 차원에서 역사적으로
기원을 원시종합예술(ballad dance)로까지 소급할 있으며 20세기 예술
에서 전조를 미래주의나 다다이즘, 초현실주의에서 발견할 있으나
1950
년대 말에 해프닝이라는 이름으로 본격적으로 시도되었다.
1970
년대의 퍼포먼스 아트 이전에 등장한 행위미술로는1950년대말, 특히
아트의 운동과 연관을 맺어 전개되었던 해프닝Happening (올덴버그와 앨런
캐프로우) 있다. (올덴버그; " 해프닝은 움직이는 오브제를 사용하는 한가지
방법이며, 나는 사람들을 자체로서 그리고 움직이는 오브제로서 작품속에
포함시키기 위해 해프닝을 이용한다" , 앨런 캐프로우; < 해프닝의성격정의 6
가지> 중에서, " 해프닝은 일회적이어야한다" ." 해프닝은 일정한 시간과 공간
에서 발달되는 우연한 사건들의 콜라주처럼 전개되어야 한다" ) 해프닝에 이어
1960
년대 이후이 많이 등장한 행위미술을 일컬어 사건이나 행사 등의 의미
로서의 "이벤트Event" 있다. (해프닝이나 이벤트에 비해 1970년대 이후에
주로 불리워진 " 퍼포먼스" 인간의 신체적 행위에 의한 표현을 중시하는 면이
있으나 용어가 크게 구별되지 않고 혼용되는 것이 보통이다.)
퍼포먼스는 관객의 참여를 중시하여서, 관객없이는 이들의 작업/행위는 완성
되지 않는다. 또한 즉흥성과 우연성을 적용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즉흥성과
우연성은 완전히 무계획적인 상태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의 퍼포먼스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많은 준비와 치밀한 계획이 요구
되어진다.) 해프닝의 선구적 사례로서 1954 J.케이지가 가졌던 4 33초》
전위음악연주회를 있는데 연주회는 4 33 동안 아무 연주도
하지 않은 공연장에 모인 청중들의 소음을 채집하는 것으로 끝난 행사로서
그가 62년에 나타나는 '플럭서스(Fuluxus)' 영향을 미친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플럭서스란 흐름, 끊임없는 변화, 운동을 의미하는 중세라틴어로서
J.
매키우나스에 의해 조직된 행위예술 단체인데 요셉 보이스, 백남준(白南準),
백남준과 함께 비디오 첼로를 협연했던 S.무어맨 등이 운동에 참가했었다.
해프닝은 연극의 형태로서 극장보다는 야외나 극장 이외의 장소에서 시연되며,
미리 기획된 연기나 즉흥적인 연기로 이루어지는데, 59년에 시도된 A. 카프로의
해프닝이 이러한 예술의 출발점이었다고 있으며 Y. 클라인은 60 《인체
측정술》이란 이벤트를 연출한 있고 70년대 이후 많은 작가들이 행위예술을
시도하여 이제 행위예술은 장르의 경계를 뛰어넘는 가장 보편적인 예술의 하나로
통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요셉 보이스는 예술과 삶의 격차를 철저하게 좁혀감
으로써 인간성을 회복하고자 했다. 보이스의 작업의 주된 재료는 지방과 펠트
천과 구리 등이었는데(특히, 지방과 펠트천의 사용은 보이스의 2 대전 당시의
사고에서 기인한다. 그는 비행기사고로 의식을 잃었었는데 타타르인들이 그들의
민간요법대로 -온몸에 지방을 바르고 이를 펠트천으로 감쌈- 그를 낫게한 )
이는 일상의 맥락에서 쓰이는 각각의 재료들을 미술적 맥락으로 끌여 들여와
기의의 전도와 문명비판 등의 의미로서 작용한다. 대표작으로 < 지방의자>
(
의자와 지방의 일상적 의미의 전도와 지방의 유동과정이 주제) < 코요테>
(
아메리카 원주민을 식민화한 서구인에 대한 비판), < 어떻게 죽은 토끼에게
그림을 설명할 것인가> (전통 미술과 미술제도를 비판) 등이 있다.
한편 백남준은 간결하고 극적인 유머에 매료된 연예인처럼 " 꼴라주 기법이 유화
물감을 대신 했듯이 브라운관이 캔버스를 대신할 것이다" 라고 말한 있다.
유명한 작품으로는, 여성 첼리스트 샬롯 무어맨과의 센세이셔널한 퍼포먼스로
(
무어맨이 전라로 연주)체포까지 되었던, < 오페라 섹스트로닉> < 살아있는
조각을 위한 브래지어> 등이 있다. 이외 영국의 퍼포먼스 작가로 길버트와
죠지가 유명하다. 그들의 가장 알려진 퍼포먼스인 1971년의 < 노래하는
조각> 에서 그들은 손과 얼굴에 금속성 페이트칠을 다음에 영국식 복장과
헤어스타일로 꾸민 테이블 위에 올라서서, 그들의 작품 이름대로 마침 태엽
인형처럼 움직이면서 입속에서 가사를 웅얼거렸다. 이후에 그들은 커다란
크기의 스테인드글라스 작업(성화적인 형태) 통해 문명비판이나 동성애적인
주제를 담아내기도 했다.

대지미술과 퍼포먼스 간에는 외형상 차이가 있는 듯하지만, 사실 70년대에
이들 작가들은 공통의 목표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미술관의 문을 열고 그곳에
자연과 일상을 데려오는 , 혹은 미술관의 벽을 허물고 일상 속의 사람들과
만나는 일이었다. 격리된 공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이미 제도화되어 버린
미술계의 기재들에 반항하는 , 그래서 제도와 모더니즘적 담론 자체를 바꾸어
버리는 일이 바로 그것이었다.

한국에서는 1967 청년작가연립전을 계기로 최초의 해프닝이 시도되었고
1970
년에 김구림(金丘林) 한강변에서 《현상에서 흔적으로》라는 이벤트를
발표한 있다. 정찬승 ·정강자 ·이건용 등의 미술가와 무세중(巫世衆)
등의 행위예술가에 의해 퍼포먼스가 활발하게 발표되었으며 초기에 해프닝 ·
이벤트 등의 용어로 시도되던 퍼포먼스는 90년대 들어 탈장르현상과 맞물려
주로 젊은 작가들에 의해 빈번하게 시연(試演)되는 추세이다.

제니 안토니(Janine Antion: 1964~ )

Bahama
에서 출생, 뉴욕에서 산다. 신체가 가진 복합적 역할과 가능성을
타진하며 감각적 영역이 시간예술의 힘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작업하는
사람들중 한명인 제니 안토니는, 머리채로 페인팅을 하거나 600파운드나
되는 육면체 고형유지의 귀퉁이를 이로 뜯어내었다.

길버트와 조지(Gilbert & George)

길버트 프뢰슈(Gilbert Proesch: 1943~) 이탈리아의 돌로미텐
Dolomiten
에서 태어났고, 그보다 한살 많은 조지 패스무어(George
Passmore:1942~)
영국의 디본Devon에서 태어났으며, 영국의 2인조로
구성된 작가 그룹 <길버트&조지> 1967 런던 세인트마틴 미술학교 시절
이래 30년이 넘는 세월을 공동작업자로, 때로는 애정의 동반자로 지내왔다.
1977
"살아있는 조각"으로 유명해졌는데 고정된 자세, 껍데기 느낌의
불안한 인간과 물질로서의 신체가 교차하는 자리를 표현하였다.
초기 퍼포먼스에서부터 영상작업, 전성기의 사진작업에 이르기까지 길버트
&
조지가 가장 애용하는 도구는 그들의 몸이다. 예컨대 1960년대 초기작
이자 대표작 하나인 '노래하는 조각'에서는 골드브론즈 물감을 몸에 발라
살아있는 조각처럼 분장하고 오랫동안 작품받침대 위에 서서 노래 부르는
퍼포먼스를 선보였고 1972 발표한 흑백영상작품 '젊은 예술가의 초상'
미니멀리즘 예술영화를 패러디하기 위해 거의 움직이지 않는 자세로 촬영
하기도 했는데 같은 연출속에 경직된 예술에 대한 풍자를 읽을 있다.
길버트&조지의 작품 속에 자신들이 스스로가 작품이 되어 등장한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있다. 쌍의 작가로서 둘은 항상 현실의
삶과 연관이 있는 주제를 연결시켜서 자신들을 나타냈다. 성과 죽음
젊은이와 노인, 열망, 두려움, 희망 . 몇몇의 예외를 제외하고, 둘은
대부분 여러장의 사진으로 구성된 작품속에서 그들이 바라보는 세계관의 중심
소재로 등장한다. 그들은 스스로를 살아있는 조각이라고 표현했으며
그렇기에 그들은 스스로의 현존상태를 구체화하려고 시도한다.
그들은 1960년대말, 그들이 작업을 시작할 때부터 그들의 삶을 작품과 같게
하려고 노력했으며, 그들의 작품은 그들의 삶과 동일시하려고 시도했다.
사이이 개인 특성은 그들 작품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이고, 각기 다른
세계관은 작품 내용을 결정하는데에 있어서 빼놓을 없는 자극의 역할을
한다. 평상시에도 그들의 작품 속처럼 둘은 대부분 영국식 정장을 모습
으로 나타난다. 이와같이 회색양복을 입고 나타나는 그들은 그로인해
그들의 사생활을 보호하는듯이보인다. 퍼포먼스나 영상작업에서 보였던
의도적인 신체의 경직성은 일련의 사진작업에서도 이어진다. 길버트 & 조지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자리잡은 회색양복은 딱딱하게 굳은 현대인의 가면처럼
보인다. 이와 정반대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나섰을때의
그들은 무방비상태로 관객앞에 노출되면서 더욱 불안하고 왜소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사진속에서 인간의 온갖 욕망과 불안, 대립이 스며있는 지점을
예리하게 잡아내는 그들의 작업에는 1986 영국의 권위있는 미술상인
터너상이 수여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1990년대 말의 '근원적 Funda-
mental Pictures'
연작들에서 그들의 몸은 기념비적 규모로 크게 부풀려진
신체 일부나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체세포, , 오줌, 대변과 같은 물질에
파묻혀 미미한 존재로 보인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과 현실세계에서
미미한 존재로 대접받는 것들의 위상이 전도될 때의 시각적 자극은 걸리버가
거인국에 떨어졌을 받았을 내적 충격만큼 강렬하다.
길버트 & 조지의 최근작업은 화면을 검은 격자로 분할하는 기존방식과
비슷하게 진행되지만, 지금까지처럼 이미지를 분할하는 것과 다르게 도표와
기호 속에 붉은색과 노란색, 검은색을 장식적으로 배열하는 새로운 구성도
눈에 띈다.

*Gilbert and George Dress-U-Up , 1999*

*Dream, 1984*

로리 앤더슨(Laurie Anderson: 1947~ )


시카고에서 태어나고 뉴욕에서 활동한다. 작품으로는 '이동하는 미국인'
유명하며, 음악적 요소 ,음성변조, 음향 등을 녹음해서 대중에게 배포한다.
대중전위예술, 전략적 방법으로 대중을 끌어들여 대중성을 차용하였다.
남장, 음악, 퍼포먼스 역사성을 이해하였다.

머스 커밍 (Merth Kernningham)


제스퍼 존스가 무대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뒤샹의 "Large Glass" 사용함).
무용의 동작에 있어서 우연성을 도입시켰다.단순한 동작을 반복한다.

이건용(1942~)


1970
년대 이후의 행위예술과 개념미술을 이끌어온 한국미술의 선구자이며
한국미술사에서 이벤트, 설치, 개념미술의 도입과 발전에 중추적 역할을 해온
작가이다. 특히 자신이 주도한 AG그룹과 ST그룹의 활동을 통해, 진취적 사고와
논리를 통해 개념미술의 이론적 틀을 마련하였다. '논리적 이벤트'라고 명명된
그의 행위예술은 한국 행위예술의 모태가 되고 있는 , '신체드로잉 시리즈'
대표적인 예이다. '신체드로잉 시리즈' 예술행위의 원초적 조건에 가해지는
신체의 개입을 분석, 시각화한 지극히 논리적인 퍼포먼스 작업이다.
1970~1980
년대 그의 개념적 작업이 비트겐슈타인의 영향을 받은 분석 철학적
경향을 띤다면, 1980년대말 이후 그는 사회적 현실로 관심을 돌려 시사적이고
소통적인 작업을 선보인다. 텍스트와 잡지 등을 혼용하여 변화하는 패러다임에
초점을 맞춘 그의 '구조조정' 예로 이를 통해 그의 아방가르드 작가 정신이
변화 확대되는 모습을 감지할 있다.
이건용은 한국 현대미술사에 있어 70년대라는 매우 특이한 시기를 대표하는
작가이다. 그는 한국 현대미술의 주류를 항상 비켜왔으면서 그럼에도 그것의
가장 핵심적인 위치에서 90년대와의 연결고리를 만들고 있다. 그가 위치하는
곳은 미술과 관련된 대부분의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있는 곳이면서 모더니즘의
지적 유산과 현대미술의 본질에 대한 이론적 접근을 위해서는 우회할 없는
곳이다. 이건용은 70년대 초의 한국 현대미술에 처음으로 개념미술을 통해
현대미술의 실존적 조건에 대한 노력은 70년대 전반에 걸쳐 전시, 텍스트
이벤트, 퍼포먼스, 토론 등의 다양한 형태로 지속되었다.
또한 당시 행위미술의 장르인 '이벤트' 등의 형식적 실험을 시작하면서 그는
처음으로 이전의 창작적 실험들에 결여되어 있다고 여겨지던 예술적 '행위'
논리적 조건을 강조하였다. 그는 그러한 논리의 바탕을 당대의 미술 이론뿐만이
아니라 언어철학 또는 동양의 사상적 토대 위에서 찾으려 하였으며 이를 자신의
작품들 속에 구체화하였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70년대 말부터 시작되는
'
참여미술', '민중미술' 후기 모더니즘의 전환기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이루어져 오고 있다.

* 71_12, 1971*

*1975_S.T_2, 1975 *

*신체드로잉_76_1, 1976 *

*장소의 논리_79, 1979*

*독속의 文化_89, 1989*

*망각의 (), 1989*

*누가 독을 매달았나90_1, 1990*

*누가 독을 매달았나90_2, 1990*

*잡음_96, 1996*

*구조조정(밥그릇건너가기), 1998*

*신체항_2000, 2000*

정강자(1942~)

1968 , 홍익대 서양화과를 졸업한 25살의 정강자는 상반신을 드러낸
팬티차림으로 몸에 투명한 풍선을 두르고 '투명풍선과 누드'라는 해프닝을
벌였다. 해프닝은 명동의 음악감상실 세시봉에서 이뤄졌고, 당시 세시봉은
전위적인 옷차림의 예술가들이 자주 모여 기행奇行 벌였기 때문에 명소가
되었는데, 강국진, 정찬승 등과 의기투합한 정강자가 과감하게 옷을 벗기에 이른
것이다. 정찬승과 강국진을 비롯한 관객들은 열심히 정강자의 벗은 봄에 투명
풍선을 붙여나갔다. 작품은 소음과 환경적인 요소를 관객 참여와 함께
작품의 일부로 받아들인 것으로 해프닝의 본령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해프닝으로 정강자는 일약스타가 되었다.
정강자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실험예술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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