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미술사 참고자료/낭만주의

서양미술사22 낭만주의 제리코, 들라크루아

AH101 2012. 2. 20.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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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리코(Jean Louis Theodore Gericault: 1791~1824)

1791
프랑스 루앙에서 출생하였다. 19세기 프랑스의 대표적인 화가로
낭만주의 회화의 창시자이다. 1808 파리에서 C.베르네의 문하에 들어갔으나
2
P.N.게랭의 제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아카데믹한 정통에 불만이
있었고, 동시대인으로서는 C.I.H.그로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으며, P.P.
루벤스에게 매료되었다. 1816 이탈리아에 가서 고대의 작품과 르네상스의
화가들을 연구하고, 미켈란젤로의 영향을 크게 받아 귀국 대작
《메두사호() 뗏목》(1819) 그려 일약 유명해졌다.
작품은 젊은 F.V.E.들라크루아를 감격하게 하였고, 들라크루아에 의한
낭만주의 확립의 위대한 도화선이 되었다. 메두사호의 구조된 선원들에게
실정을 듣고 뗏목을 만들게 하는 실감을 살린 그림은 격렬한 동세(動勢)
강한 명암과 색채효과 극적인 정경을 표현한 박진감에 있어 때까지의
회화에서는 없던 극적 요소로 가득 있다.
1820
영국으로 건너간 영국의 풍경을 수많은 석판화로 묘사하고, 말을
좋아하고 빨리 달리는 동물의 속도를 좋아하여 동작을 예리하게 묘사하였다.
작품으로서는 유화는 얼마 되지 않으나 그리스 독립전쟁·노예제 반대
시국적인 것을 주제로 소묘에 뛰어났고 석판화를 참다운 예술품으로 끌어
올린 공로자이기도 하다.
1822
런던에서 돌아와 얼마 동안 가슴을 앓다가 33세로 파리에서 죽었다.

*An Officer of the Imperial Horse Guards Charging(왕실 근위대의 장교),1812*

*전쟁터를 떠나는 부상병,1814*

*에프손의 경마,1821*

*The Raft of the Medusa,1819*

그림은 배가 침몰한 뗏목을 타고 죽음과 굶주림 속에서 바다를 표류
하다가 구조되는 선원들을 그린 작품이다.
프랑스 메두사호는 1816 세네갈 해상에서 파선을 뗏목에 사람들을
태워 바다로 내보냈는데, 결국 선원과 승객 149 15명이 기적적으로
살아남게 되는 일이 벌어진다. 무자격 선장이 운행을 탓에 일어나게
사건은 굶주림, 병마, 갈증, 악천후를 겪으며 사람들의 비상한 관심과
동정을 일으켰다. 제리코는 작품을 그리기 위해 파선의 몸체를 연구하고
실제로 목수를 시켜 뗏목을 만들게까지 했다. 또한 살아남기 위해 동료의
살을 먹은 이야기며, 죽어 가는 사람을 묘사하기 위해 제리코는
병원에서 시체와 병자의 모습을 관찰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림을 보면 흐린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고, 돛을 배는 강풍과 높은
파도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다. 터번을 남자는 사람들이 떠내려가지
않도록 붙들어매고 있으며, 뗏목 여기저기에는 시체들이 흩어져 있다.
멀리 보이는 수평선에 돛대로 보이는 물체가 나타나자 물통에 올라가 옷을
흔들며 구원의 요청하는 사람들이 보이며, 환자들도 이에 일어나려 애쓰는
장면들이 보인다. 제리코는 그림에서 메두사호의 뗏목에 사람들이
표류 끝에 구조를 받게 되는 순간의 환희를 담으려고 했다.
거대한 캔버스에 담긴 작품은 대각선이 서로 교차하는 동적인 구도를
가지고 있으며, 각각의 인물들의 동작 또한 개성적이며 다양하다.
1819
살롱을 발칵 뒤집어놨던 작품은 호평과 동시에 정치적인 입장에
따라 악평을 함께 받으면서 제리코는 우울증에 걸렸다고 한다.
<
메두사의 뗏목> 후에 들라크루아의 낭만주의 미술을 절정에 이끌게
만드는 촉매 역할을 하는 위대한 작품이다.

*Portrait of a Kleptomaniac, 1820*

*Man with Delusions of Military Command, 1819-22*

*The Woman with Gambling Mania,1822*

1824 제리코는 33살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였다. 그는 생의 마지막
시기인 1822년에서 1823 정신과 의사이자 친구인 조르주의 부탁으로
미친 사람들을 화폭에 담았다. 당시 정신 의학계에선 미친 사람들은 얼굴 모습
골상학에 있어서 특정한 유형을 보여준다고 믿었기 때문에, 환자들의 얼굴을
초상화로 남겼다.
작품은 시기에 그려진 것으로 도박에 편집증을 갖고 있는 여인을 그린
것이다. 여인은 자의식을 드러내는 대신,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다.
제리코는 초점을 잃고 멍한 눈으로 정면을 응시하는 여인의 모습에서 정상인과
다른 광인(狂人)들의 심리적 불안과 망상까지 포착하고 있다.
제리코는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들, 도박과 술로 황폐해진 삶을 추스르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차가운 시선으로 비하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따뜻한 연민의
시선으로 그려냈다.

*Madwoman*

들라크르와(Ferdinand Victor Delacroix: 1798~1863)


프랑스의 화가이며 샤랑트현() 모리스 출생이다.
명문가 외교관의 아들로 명석하며 정열적인 상상력을 타고났다.
16
세에 고전파 화가인 P.N.게랭에게 그림을 배웠고, 1816 관립미술
학교에 입학하였다. 이때부터 루브르미술관에 다니면서 P.P.루벤스
P.
베로네제 등의 그림을 모사하였고, T.제리코의 작품에 매료되어 현실묘사
에도 노력하였다. 1819 제리코가 발표한 《메두사호() 뗏목:
Raft of the Meduse
》은 그에게 낭만주의를 수립하는 결정적인 감격과
영향을 주었다. 그리하여 22 최초의 낭만주의 회화인 《단테의 작은 배》
발표하였다. 여기에서 엿볼 있는 극적인 표현은 다비드풍() 고전
주의에 대한 도전이라고 있다.
계속하여 24년에는 그리스의 독립전쟁에서 취재한 《키오스섬의 학살》을
발표하여 '회화의 학살'이라는 혹평을 받기도 하였지만, 힘찬 율동과 격정적
표현은 그의 낭만주의를 더욱 확립시켰다.
더욱이 이때 살롱의 똑같은 방안에 진열된 영국의 J.콘스터블의 풍경화의 밝은
색조에서 자극을 받고, 자기의 작품을 밝게 새로 칠하여 한층 강렬한 효과를
나타냈다. 다음해 런던에서 R.P.보닝턴, J.P.로런스 등과 사귀는 동안 더욱더
빛깔의 명도와 심도를 증가시켰다. , 자신과 낭만주의 회화의 성숙기를
맞이한 것이다.
수년 간의 작품 중에서 《사르다나파르의 죽음》(27)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31) 대작이다. 후에도 계속 진전하여 1832 모르네
백작을 수반으로 하는 외교사절단을 수행한 모로코 여행을 통해, 근동 지방의
강한 색채와 풍속에서 깊은 감동을 받고, 그의 예술에 대한 새로운 눈을 뜨는
동시에 후의 낭만주의 회화에서의 동방취미 풍속화의 기반을 닦았다.
명작 《알제리의 여인들》은 여행에서 얻은 훌륭한 성과였다.
뿐만 아니라 이때를 중심으로 초기에 있었던 외면적인 격렬한 맛이 점차
내면화되었다. 작품으로는 이상에서 말한 대표작 이외에 초상화, 성서에서
제재를 택한 , 말이나 사자 등의 동물을 그린 것도 많다.
더욱이 문학적·음악적인 정서도 풍부하여 셰익스피어, 바이런, 괴테 등의 작품을
일찍부터 가까이하였고, 음악가 F.리스트와 당시의 여성 문학가이던 G.상드와도
친하였다.

이와 같은 풍부한 재능과 환경은, 그에게 회화작품 외에도 오늘날 미술사상
(
美術史上) 귀중한 문헌으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는 뛰어난 예술론이나 일기
등을 집필하게 하였다.
그의 예술형성에 전술(前述) 화가 이외에도 16세기 베네치아파 화가인
미켈란젤로나 고야도 영향을 주었으며, 한편으로 자신의 영향은 후의
낭만주의 회화를 물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E.드가와 A.르누아르에게 직접
연결되는 점도 많다.
후반기에는 교회와 파리의 공공건축물을 위한 대벽화 장식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국회 하원의 《국왕의 방》, 국회 하원도서관, 국회 상원도서관
파리시청의 《평화의 방》, 루브르궁전의 《아폴로의 방》등을 잇달아 그렸고
만년에는 동판화와 석판화 제작에도 뛰어난 솜씨를 보였는데, 흑백의 대조가
강조되고 한층 환상적으로 표현하는 기교로써 《파우스트 석판화집》
《햄릿 석판화집》등의 걸작을 남겼다.

*앉아 있는 누드, 로즈 ,181720*

들라크루아는 나부를 주제로 많은 작품들을 그리지는 않았으나
<
앉아 있는 누드, 로즈 > 비롯한 점의 누드화를 남겼다.
작품은 25 그린 나부 습작 중에서 가장 치밀하고 정확하게
그려진 작품으로, 입체감있는 인체의 표현이 사실감있게 그려졌다.
그림의 실제 모델은 "로즈" 알려져 있다.
받침대 위에 자연스러운 포즈로 앉아있는 여인의 자세는 고전주의
경향을 탈피한 흔적이 엿보인다. 들라크루아는 실제 모델이 주는
인상이나 느낌을 건강한 육체의 아름다움을 통해서 솔직하게 표현
하였다. 배경은 당시 신고전주의자들의 작품처럼 매끈한 것이 아니라
물감의 농도를 달리해서 칠해졌는데, 고르지 않은 느낌이 독특하다.
이는 모델의 모습을 더욱 강하게 부각시키는 효과와 함께 단조로운 화면
구성을 깨고자 하는 화가의 의도로 비쳐진다.

*The Barque of Dante,1822*

*Orphan Girl at the Cemetery,1824*

*키오스 섬의 학살,1824*

작품은 1824 번째로 살롱에 입선하였는데, 당시 같은 살롱에
출품했던 앵그르의 <루이 13세의 서원> 매우 대조적인 화풍을 보여
주면서 논란을 일으켰다. 당시 프랑스 화단은 앵그르가 이끄는 고전주의
계열과 들라크루아가 이끄는 낭만주의 계열이 팽팽히 맞서고 있었다.
그림은 그리스의 키오스 섬이 터키 군의 습격을 받아 민가는 모두
태워지고, 남자는 살육 당했으며, 여자들은 약탈 당하거나 죽임을 당하게
되는 사건을 다루고 있다. 들라크루아는 잔인한 사건에 대한 경계심과
분노를 담아 그리스를 구원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그림을 완성하게
되었다. 그림 전면에는 지쳐서 누워버린 키오스 사람들을 체념과 고통
고뇌가 뒤섞인 표정으로 묘사하고 있다. 또한 여자를 납치해가려는 터키
기마병들의 잔인한 장면을 화면 왼쪽에 담아, 처참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사실감을 부여하였다. 이들 뒤로 불타오르는 민가와 전투로 피폐해진 황량한
들판이 펼쳐져 있으며, 검붉은 바다와 황혼이 지는 짙은 저녁 노을이 보여주는
우울함과 적막함이 그림의 주제를 더욱 효과적으로 받쳐주고 있다.
죽은 여인의 젖을 물고 있는 아기와 여인들의 공포 섞인 울부짖음, 눈을 뜨고
죽은 이의 멍한 표정을 묘사하면서, 들라크루아는 학살의 비참함과 공포
비인간적인 죽음을 불타오르는 듯한 강렬한 색채를 사용해 더욱 생동감 있는
주제로 재현해 내었다.

*The Death of Sardanapal,1827*

작품은 사르다나팔의 비참한 최후를 다루었으며, 환상적인 이국 정서
사랑과 비극이 어우러지는 흥미로운 그림이다.
기원전 7세기경 앗시리아의 왕인 사르다나팔은 적에게 포위되어 2
정도를 궁전에 갇혀 살게 되었다. 적들이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궁전에
쳐들어오기 전에 사르다나팔은 그의 애첩들과 애마를 모두 죽이고, 그가
가지고 있던 보물들을 군데에 모아 불태운다.
그리고 스스로도 속에 타죽게 되는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그림은 이러한 이야기를 들라크루아만의 상상력을 발휘하여 환상적으로
재현해내고 있다. 사르다나팔 왕이 기대어 누워 있는 붉은 융단 침대
주위에는 관능적인 나체의 여인들이 살해당하는 광란의 장면이 펼쳐지고
있다. 코끼리 머리 장식은 붉은 빛의 피로 물들어 있으며, 방바닥에 온갖
보물들이 어질어 있는 화면 왼쪽에는 흑인 노예가 백마를 끌고 안으로 들어
오려 하고 있다. 그림은 오른쪽 아래에서 왼쪽 위로 펼쳐지는 대각선 구도
속으로 격정과 죽음에 대한 고통을 미켈란젤로의 형식미로 표현했으며
루벤스의 영향을 받은 강렬한 색조를 통해 시각적인 자극을 불러 일으키는
효과를 내고 있다. 광란의 장면을 지켜보는 사르다나팔의 우울함과
더불어 죽음에 몸을 뒤트는 여인의 풍만한 관능미는 에로티즘과 공포를
동시에 느끼게 만들면서, 사르다나팔의 이야기를 뛰어난 환상미로
표현하고 있다.

*Liberty Leading the People,1830*

그림이 완성되었던 1830, 7 28일에는 프랑스에서 7 혁명이
일어났다. 7 혁명은 3 동안 계속 되고, 8 3일에 이르러 필립이 국왕에
즉위하였다. 이런 사건으로 인해 자유에 대한 프랑스 시민들의 열망은 증폭
었으며, 들라크루아는 이러한 열망을 화폭에 그려내려는 강렬한 열정을 품게
되면서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라는 작품을 완성하게 된다.
그림의 주제는 제목이 말해주는 그대로 "민중을 이끌어 가는 "자유의
여신" 말하고 있다. 혁명에 관한 정치적 관심에서가 아니라, 해방되어 가는
"
자유" 대한 공감이 그림에서는 사실적이며, 역동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혁명이 만드는 풍경을 전면에 담으면서도 근본적인 핵심은 "자유의 여신"
있는데, 그녀를 프랑스 삼색기를 손에 들고 전진하는 모습으로 표현한
것에서도 나타나 있다. 반쯤 흘러내린 사이로 보이는 여신의 풍만한
가슴은 관능적인 육체미라기보다는 강렬한 의지를 지닌 건강미를 먼저
생각나게 한다. 뒤편에는 귀족으로 보이는 남자가 총을 들고 결연한 자세로
뒤따르고 있으며, 어린 소년도 권총을 들고 환희의 소리를 지르는 표정에서는
혁명이 가져다주는 흥분과 희망 등을 엿볼 수가 있다. 한편 죽은 이들이 바닥에
어지럽게 널려 있고, 후면으로 피어 오르는 안개와 전체적으로 어둡고 무거운
색채를 배경으로 삼아 밝게 빛나는 여신과 강렬한 대비 효과를 일으키고 있는데
이는 혁명의 숭고함과 신성함을 더욱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하얀 양말을 신은 나부,1830*

화면의 대각선상으로 누워있는 여인은 침대 위에서 나른한 표정으로
양말만 걸친 채로 묘사되었다. 밝은 광선이 가슴으로부터 전신을 감싸고
하얀 침대 시트의 반사로 인해 모델의 모습은 강하게 부각되는데, 빨간 커튼이
만들어내는 화려하고 강렬한 배경으로, 관능적이고 아름다운 나부의 몸은
한결 돋보인다. 그림 전경을 향해 튀어나올 듯한 다리에 신겨있는 하얀
양말은 그림의 중요한 액센트가 되는데, 그것은 그림의 모델의 신분이
평범한 여인은 아닐 거라는 추측과 더불어 관능미를 불러일으킨다.
대범한 붓터치와 간결한 선처리로 표현되어 있으면서도 빨강과 짙은 녹색의
배합이 절묘하게 결합되어 뛰어난 색채 효과를 내고 있는 작품이
매끄럽게 흐르는 여인의 몸을 통해 새로운 낭만주의의 정신을 이어가려는
화가의 열정이 드러나 있다.

*Algerian Women in Their Apartments,1834*

*Self-Portrait,1837*

*Fanatics of Tangier,1837-38*

*프레드릭 쇼팽의 초상,1838*

*The Entry of the Crusaders into Constantinople,1840*

*제니 귀유의 초상, 1840*

*Pieta,1850*

*Heliodorus Driven from the Temple,1854-61*

*Arab Saddling his Horse,1855*

*Odalisque, 1857*

*The Abduction of Rebecca,1858*

*Arab Horses Fighting in a Stable,1860*

*Arabs Skirmishing in the Mountains,18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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