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미술사 참고자료/르네상스 - 독일

서양미술사10 북유럽 독일 르네상스 뒤러

AH101 2012. 2. 14.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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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르네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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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 북유럽의 르네상스는 진정한 개화를 한다. 북유럽 르네상스 미술은 사실풍의 북유럽 미술에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을 가미한 신예술이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장점을 흡수하여 북유럽 르네상스 미술을 완성한 인물은 독일의 알베르트 뒤러와 한스 홀바인이었다. 뒤러와 홀바인은 조화와 균형이라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장점들과 독일의 민족적 특징들을 결합하여 사실적인 북유럽 르네상스 미술을 구축하는데 성공하였다.

알베르히트 뒤러(Albrecht Durer: 1471~1528)

남부 독일 뉘른베르크 출신의 알브레히트 뒤러는 독일 르네상스 회화의 완성자이다. 당시의 뉘른베르크는 목판 인쇄술에 있어서 선구적인 위치에 있었으며, 그에 따른 활발한 출판업으로 도시 경제가 풍요로운 상황이었다. 당시 뉘른베르크에는 모든 사람들이 일을 하고, 자기 집을 가졌고, 여유로운 문화생활도 즐길 있었다고 한다. 뒤러는 금은세공업자였던 아버지를 따라 11세부터 금은 세공기술을 익혔다. 하지만 자신의 길이 아니라 생각하고 15세때부터 본격적인 화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뒤러는 스승을 능가하는 재능을 가진데다가 풍요로운 경제 상황이 예술가들에게 제공해주는 부로 인해 금새 유명한 동판화가가 되었다.

렘브란트, 피카소와 함께 3 판화가라 불리는 뒤러는 평생 100여점의 동판과 200여점의 목판화를 남겼다. 그의 그림에서도 느껴지듯이 완벽주의자였던 뒤러는 판을 제작한 찍는 종이의 선택과정은 물론 인쇄과정과 판매까지 관여를 했다. 당시 사회는 길드라는 철저한 분업제도가 시행되고 있었다. 당시에 판화의 모든 제작과정을 화가가 주관한다는 것은 상당한 파격이자 도전이라할 있었다. 뒤러는 13 처음으로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한 이후 3점의 작품을 남겼는데, 너무나 뛰어난 솜씨로 인해 자화상의 화가로 불리기도 한다. 그는 서양미술사 최초의 유화이며 당시에는 함부로 그릴 없었던 정면 자화상을 감히 그리기도 했다. 당시의 정면 포즈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는 성화에서나 보일 있는 것이었다. 이런 발상은 예술가의 창조성을 창조주와 같은 맥락으로 해석하고자 함이다. 새로운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예술가의 능력은 신이 가지고 있는 창조력과 비견할 만하다. 이러한 예술가에 대한 새로운 인식으로 북유럽에도 이탈리아에서와 같은 르네상스가 시작되게 되었다.

   

그가 그린 자화상 아니라 여러 인물화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우울하거나 슬픈 기분 혹은 같은 성격까지도 나타나 있는데, 이는 뒤러가 얼마나 인물들을 관찰하고 연구했는지 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예술 철학을 담은 이론서를 내기도 지적인 화가였다. 어떤 이는 뒤러를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비견할 만한 과학적인 탐구정신의
소유자라 평하기도 한다.

1500
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가장의 역할을 담당해야 했던 뒤러는 부담 때문이었는지 점점 몸이 쇠약해졌다. 게다가 당시 유럽은 흑사병이 유행이었기 때문에 뒤러는 흑사병을 피해 번의 여행을 해야만 했다. 덕분에 병은 깊어졌디. 그에게는 깊은 우울증이 있었다. 이런 정서 때문인지 그의 그림들은 다소 신비적이면서도 우울한 경향이 있다.

   

벨기에로 여행을 하던 50세의 뒤러는 고래가 해안에 떠밀려 왔다는소문을 듣고 네덜란드의 해안가로 달려갔다. 하지만 고래는 뒤러가 도착하기 전에 다시 바다로 돌아갔고, 뒤러는 고래도 보지 못한 말라리아에 걸리고 말았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뒤러는 의뢰도 없는 마지막 작품을 그렸다. 그리스도의 제자 4명을 그린 < 사도> 뉘른베르크 시에 기증하면서 그는 "나에 대한 기념물로 공공장소에 전시하고 이방인의 손에 들어가지 않게 해야 한다" 말했다. 뒤러의 신앙철학과 인간에 대한 탐구정신이 결집된 작품은 현재 독일 뮌헨의 박물관에서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뒤러는 근사한 외모에 모피 옷을 즐겨 입는 멋쟁이였다. 사치만 부리는 아니라 그림도 곧잘 그렸다. 베네치아에 갔을 그의 붓놀림을 벨리니가 화들짝 놀랐고, 네덜란드를 방문했을 때는 황제에 버금가는 국빈 예우를 받았다. 당시 화가로는 드물게 부와 명예를 누린 셈이다. 당대의 예술가, 인문학자와 교류했고 나중에는 황제가 초상화 그려달라고 뉘른베르크까지 찾아와 모델을 정도였다. 뒤러가 올라가서 그림을 그릴 있도록 합스부르크 황제 막시밀리아누스가 사다리를 붙들고 시중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Portrait of Barbara Dürer, 1490*

*엉겅퀴를 들고 있는 자화상(Self-Portait at 22),1493*

알브레히트 뒤러도 일찍이 자화상을 제작하였다. 르네상스 시기 화가들의 지위 상승의 노력과 발맞추어, 화가가 그린 자화상의 이면에는 그저 장인으로 인식되었던 화가의 개성과 자율성을 발현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 그림은 뒤러가 그린 여러 자화상 최초의 것으로, 뉘른베르크에 정착하기 독일을 여행하던 때인 22 무렵에 그린 것이다. 그림에서 나타나는 뒤러 자신의 자세는 분명 중요한 알레고리를 띠고 있다. 그것은 그의 약혼자 아그네스 프라이와의 약혼과 관련된 부부 서약의 상징이기도 하고, 그리스도의 고통에 대한 상징이기도 하다.

   

뒤러가 지닌 지적인 관심과 분방한 상상력은 다양한 기법과 주제들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데도 공헌을 했는데, 그런 시도는 1493 제작된 작품 외에 1500년에 제작된 <자화상> 통해서도 있다. 작품은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엄숙한 자세, 그리스도와 닮은 이상화된 용모를 보여주면서, 여느 통속적인 자화상의 영역을 훨씬 뛰어넘는 권위와 자신감을 나타내고 있다. 화면 왼쪽에서 쏟아지는 빛의 음영은 오른쪽으로 몸을 살짝 비튼 뒤러의 어깨를 밝게 채색한다. 바로 후기 고딕 양식의 전통을 그대로 북부 독일로 전해준 기법이 작품에서도 시도되고 있는 것이다. 중성적인 외모와 꽃을 포즈, 약간은 긴장된 얼굴 표정 등은 혼인 서약의 신성함을 나타내고 있다.

   

*The Wire-drawing Mill,1489(수채화)*

*비탄에 젖은 예수(Christ as the Man of Sorrows),1493*

*Virgin and Child before an Archway, 1495*

*마리아의 일곱 비애,149697*

*Willow Mill,1496-98(수채화)*

*Portrait of a Young Fürleger with Loose Hair, 1497*

*Portrait of a Young Fürleger with Her Hair Done Up, 1497*

*70세의 뒤러 부친의 초상,1497*

*자화상(Self-Portrait at 26), 1498*

*Portrait of Elsbeth Tucher,1499*

*Portrait of Oswolt Krel, 1499*

*자화상(Self-Portrait at 28), 1500*

자화상은 뒤러의 마지막 자화상으로 가장 완성도가 높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뜬 그림 뒤러는 오만한 표정 이상의 신성함을 보여주고 있다. 신과 자신을 같은 선상에 놓고 동일시 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뒤러의 눈은 정말 앞에 서서 감상자를 꿰뚫어 보고 있는 듯하다. 이는 인물의 내적 성찰을 말하고 싶어하는 뒤러의 의도이다.

*Lamentations Over the Dead Christ,1500~03*

*아담과 이브,1504,동판화*

*Adoration of the Magi, 1504*

*Portrait of a Young Venetian Woman,1505 *

*Feast of the Rose Garlands, 1506*

*Madonna with the Siskin, 1506*

*아담과 이브,1507*

아담과 이브, 두개의 작품을 모아 하나로 만들었다. 거의 실물 크기로 그려진 것으로 아름다움과 순수, 에로틱함이 모두 묻어나는 작품이다. 아담은 지식의 가지를 손에 이브를 향하고 있고, 이브는 뱀이 주는 사과를 받아 들고 아담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사람은 배경인 나무를 통해 공간으로 연결되고 있다. 작품에는 이상적인 인체 비례를 연구한 뒤러의 끊임없는 노력이 나타나 있다.

*The Martyrdom of the Ten Thousand,1508*

*Adoration of the Trinity,1511*

*Madonna and Child,1512*

*Emperor Charlemagne, 1512*

*기사, 죽음과 악마,1513,동판화*

뒤러의 3 동판화 하나인 작품은 그의 윤리의식을 상징화 것이다. 특히 마틴 루터의 영향으로 중세신앙을 잇는 듯한 그의 경건한 신앙이 나타나 있다. 기사를 유혹하는 죽음의 신과 악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위풍당당하게
가고 있는 기사를 다소 신비적으로 그려냈다.

*미카엘 올가너트의 초상(Portrait of Michael Wolgemut),1516*

*Apostle Philip,1516*

*동정녀, 아기와 안네,1519*

*Emperor Maximilian I, 1519*

*Portrait of Hieronymus Holzschuher,1526*

*The Four Holy Men.1526 *

뒤러의 마지막 작품으로 종교개혁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보여주고 있다. 등장인물은 왼쪽부터 요한, 베드로, 마가, 바울 이다. 뒤러는 그림 밑에 다음과 같이 적어 놓았다. "세상의 지배자들은 인간의 욕망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착각해선 안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을 더하거나 빼선 안되며, 그를 위해선 성인의 충고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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