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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16 로코코미술 프랑스 샤르뎅

AH101 2012. 2. 14.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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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르댕 (Jean-Baptiste Siemon Chardin 1699 ~ 17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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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 귀족풍의 몽상적 세계가 퇴조하고 보통사람들의 에피소드를 그리기
시작한 샤르댕은 분야에서 가장 위대한 화가로 손꼽힌다.
평범한 아름다움에 대한 민감한 감수성과 공간 질서에 대한 명쾌한 감각을
보여주는 샤르댕은 풍속화가인 동시에 정물화가였다.
<
주방정물>에서 보듯이 그가 그린 대상은 꾸밈없는 일상적인 것이었으며
그는 존경에 가까운 마음으로 이를 떠받들고 있다.
그는 눈에 띄는 효과나 날카로운 비유를 추구하지 않고 가정적인 정경의 시정을
느껴 화폭에 담았으며 신중하게 구사된 색조의 미묘한 농담의 변화와 꾸밈없어
보이는 화면 구성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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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 프랑스는 얼굴을 지닌다.  화려한 대저택에서 풍요로움을 만끽하는
귀족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가 하면 잔잔한 일상에 묻혀 사는 서민들이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화가들은 귀족들의 사치와 풍요로움을 화폭에 담아 내는데
주력했다.  샤르댕은 18세기 로코코 양식의 화가이면서도 소재 면에서 다른
화가들과 엄격히 다른 세계를 추구했다.  귀족들의 호사스러움에 휩쓸려 다녔던
당대의 화가들과 달리 그는 시민계급을 대표하는 지극히 일상적인 평범함을
모티브로 한다.   샤르댕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일상성은 그의 삶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그는 아카데미 출신의 화가가 아닌, 직공의 아들이라는
삶을 살아야 했다.  그는 당시 시민사회의 모습을 고스란히 체험했고, 이를 통해
로코코의 화려함보다는 풍속화와 정물화로 자연스럽게 화풍의 변화를 가져갔다.  
당시 3계급으로 치부 당했던 시민들의 모습은 엄격한 교육과 합리적인 생활
검소한 생활 등으로 요약된다.  샤르댕은 이들의 삶을 자신의 화폭 위에 재현해
냈다.  그의 작품들은 정물화의 시초라고 있는 네덜란드 보다 단계
앞선 수준의 것들이었다.  이같은 정물화의 경험을 토대로 샤르댕은  후에
인물을 그릴 때에도 정물을 그리듯이 표현해 냄으로써생명감을 부여하기 위한
빛의 활용이 매우 원숙한 경지에 이르렀다.
샤르댕의 세계는 18세기 중엽 프랑스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당시 미술품 수집가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었던 것은 17세기 네덜란드의
풍속화와 정물화였다.  따라서 파리 살롱전에 전시된 샤르댕의 그림은 소재나
규모가 특출 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찬사를 받게 되었다.
샤르댕의 꼼꼼한 장인 정신은 다른 어떤 작품들보다도 눈에 띄었다.
화면에 쏟아 넣은 그의 조형적인 수단은 완벽에 가까웠다.  정물과 색채의
완벽한 조화, 그곳에는 아무것도 과장되지 않은 통일감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묵묵함은 그를 동시대 최고의 거장으로 만들어 놓았다.  물론 작품에 흐르는
묵묵함과 어두움이 그의 신분 이었기는 하나 이면에 흐르는 일상을 통한
따뜻한 휴머니티 또한 같은 경험적 토대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를 통해 부활한 휴머니티와 생명력은 움직이지 않는 정물들로 하여금
마치 숨을 쉬고 있는 살아 있는 표정을 부여한다.
샤르댕의 눈에 포착된 사물들은 항상 그의 손에 닿으며 정신과 하나로 합쳐진다.  
따라서 그가 그려낸 정물들은 하나 하나 독립적으로 떨어져 있는 무생물이
아니라, 겸손한 인생을 가꾸어 나갔던 샤르댕의삶 속에 자리잡았던 것이다.
정물화의 본질이 손이 닿는 물건의 촉각적인 공간이라고 이해했을
샤르댕의 정물화가 갖는 의미는 바로 사물에 대해 가족과도 같은 끈끈한
정신적 공감이다.  샤르댕은 손에 온기를 담았다.
그럼으로써 주위의 다른 어떤 것과도 바꿀 없는 소중한 것으로 이들은 자리
잡았다.  나아가 이것들은 생명성이라는 존재의 의미를 부여받았고, 내성화의
깊이를 통한 참다운 존재로 발전하게 된다.
샤르댕은 고집스러운 화가였다. 다른 어떤 사람들의 말보다도 오직 자신이
원하는 나름대로의 방식을 찾아 생각했던 것이다.
더욱이 그는 명예나 출세와 거리가 멀었다.  샤르댕은 아카데미를 거치지
않았고, 따라서 예술가로서의 직위를 얻는 일은 더욱 힘들었다.  따라서 그에겐
항상 가정적인 것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의식이 잠재되어 있었다.  참을성 있게
착실하고 열정적인 태도로 샤르댕은 그림에 몰두했다.  자연에 대한 직접적인
표현도 주저하지 않았다.  드로잉도 없이 그는 눈에 보이는 대로 자연의
생명력을 캔버스 위에 재현해 나갔다.  정성들인 그의 물감은 아름다운 광택을
발했고, 중간 톤의 색조는 점잖고 은은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특히 세밀한 관찰을 통한 섬세하기 그지없는 빛의 표현은 샤르댕 정물화의 최고
정수라 만하다.

*The Ray(홍어),1728*

샤르댕은 로코코의 경쾌함과 피상적인 터치와는 다른 소박하면서도 경건한
세계를 지향하였다.  샤르댕은 1728년에 정물과 동물화 부분의 왕립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는데, <홍어> 이때 아카데미에 출품한 작품이다.  
털을 세운 고양이와 미끈한 홍어, 그리고 도자기와 식탁보와 같은 다양한
물건들을 한데 모아놓은 것은 물론 정물화가로서의 자신의 기량을 충분히 보여
주기 위한 것이었겠다.  그러나 그가 그린 것은 세브르산 도자기나, 은식기가
아니라 검소한 중산층 가정의 부엌 한켠에서 쉽게 있는 물건들이었다.  
이러한 부엌의 가재도구와 식기들은 동시에 청교도적인 검소함과 노동을
상징한다.  샤르댕이 즐겨 다루었던 소박한 물건들과 가정의 풍경은 마치 로코코
시대 궁정과 귀족들의 지나친 향유에 대한 해독제처럼 느껴진다.

*The Buffet,1728*

*The Silver Tureen,1728*

*A "Lean Diet" with Cooking Utensils,1731*

*The Young Schoolmistress,1736*

*장터에서의 귀가,1739*

샤르댕은 일반적으로 정물화를 가장 저급한 장르로 평가하는 전통과 편견에
맞서, 젊은 시절부터 위대한 화가로서 명성을 떨쳤다.
초기 작품에 속하는 정물화가 전시된 , 1728 왕립 아카데미는 전통과
편견을 깨고 샤르댕을 회원으로 받아들였다.
작품 <장터에서의 귀가> 샤르댕의 몇몇 다른 작품들과 함께 1739
루브르 전시회에 출품되었다.  이때 그는 중산계층의 매우 통속적인 생활을
제재로 하는 독자적인 스타일을 확립하고 있었다.
1881
콩쿠르는 "샤르댕의 예술은 그가 사랑하는 자신의 세계 안에서만
창조된다. 그리고 그는 그저 자신을 감동시키는 것만을 끈질기게 그린다."라고
비평했다.   그림은 시장에서 장을 보고 부엌으로 들어와 장바구니를 정리
하려는 여인의 모습을 담담하고 편안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평범한 옷차림을 여인의 미소 얼굴, 손에는 가지고 물건들이 담긴
보따리가 들려 있고, 다른 손은 책상에 얹은 덩어리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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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 프랑스의 일반 시민들이 사는 생활의 단면이 유쾌하면서도 밝게
묘사된 작품에서 당시의 풍속을 흥미롭게 발견할 있게 된다.
작품을 포함해서 샤르댕이 루브르에 출품한 작품들은 19세기 사실주의를
앞서 예견한 듯한 자유로운 묘사가 표현되었는데, 샤르댕의 회화는 당시
아카데미 화단에서는 이탈을 것처럼 보이지만 르냉이나 쿠르베로 이어지는
프랑스로 사실주의로 절묘하게 연결되는 선구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Girl Peeling Vegetables*

*Girl with Racket and Shuttlecock, 1740*

*식전의 감사 기도, 1740*

샤르댕은 평생 정물화와 가정을 배경으로 풍속화 장르에 매진하였다.  
풍성하고 부유한 가정보다는 평범한 서민들의 일상을 담아낸 그의 장르화는
일상의 느낌을 시각적으로 가장 전달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 작품 속에서 느껴지는 온화한 정서들은 결코 의도적으로 고안된 인위적인
감정이 아니며, 화가 자신의 정직함과 통찰력, 서민에 대한 공감의 산물이다
샤르댕은 작품에서도 이제 식사 기도를 드리려는 가정의 어머니와
딸을 그렸다.  실내의 차분한 빛과 부드러운 색채 속에서 식사에 앞서 식전
기도를 드리려는 조용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세밀하게 그려진 되는
식기들과 함께 뒷벽의 선반에 놓인 변변치 않은 가재 도구들, 어머니의 수수한
옷차림은 소박한 가정의 모습 그대로이다.  어머니와 아이는 아직 어려서
낮은 의자에 앉아 있는 막내를 주시하면서, 음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릴 것을 가르치고 있다.
작품은 본래 루이 15세의 컬렉션으로 루브르 박물관에 들어왔다.
평생 로코코풍의 화려한 궁정 양식을 선호했던 루이 15세의 취향을 생각할
작품이 왕실 소장품이었던 것은 이채로운 일이다.

*흡연실,1737*

18세기 프랑스 화단에서 샤르댕의 정물화는 매우 신기하고 이단적인 존재였다.
그는 병풍이나 문에나 그렸을 소재들을 그린다고 샤르댕을 비난하던 당시
프랑스 아카데미화단에 대한 강한 저항을 보이면서 이런 주제를 끈질기게
추구했다.   그림은 테이블이 그려내는 선들이 그림 하단에 수평으로 받치고
있는 역할을 담당하면서 비교적 안정된 구도를 가지고 있다.
개봉된 담배상자에는 몇가지의 소품들이 끝부분만 드러내고 있으며
담뱃대가 담배상자 왼쪽에 살짝 걸쳐있다.  오른쪽으로는 물병과 , 유리잔
등이 배열되어 있는데, 오래된 물건들에서 만져지는 투박하고 엷은 질감의
효과를 보이는 색채혼합은 평범한 소재를 하나의 따뜻한 풍경으로 상승시키고
있다.  샤르댕의 후원자들 중에 하나인 디드로는 샤르댕의 작품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의 마술은 참으로 포착하기 어렵다.  여러 겹으로 묻힌
그림물감의 효과가 최후에 가서야 나타나기 때문이다..."

*가정교사,1938*

18세기 계몽주의 지식인들은 온화한 가르침과 격려를 통해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을 이끌어 있다고 생각하였다. 『에밀』과 같은 교육서를 썼던
루소가 대표적인 예가 되겠다. 그는 가정에서 생활을 통해 이루어지는 자녀의
양육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샤르댕은 장르화를 통해, 중산층의 노동과 함께 교육에 관한 주제를 많이
다루었다.  아이의 가정교사는 학교에 가는 것도 잊고 놀이에 몰두하고 있는
아이를 꾸짖어 타이르고 있다.  흐트러진 아이의 놀잇감은 자신의 본분을 잊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데, 보모의 정리된 바느질 바구니와 대비된다.  
그렇지만 아이의 뒤편으로 열려진 문은 보모가 손질해준 모자를 쓰고 학교에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나태함에 대한 계몽적인 경계의 메시지가 분명하다.

*비누방울,1739*

제법 크게 불어진 비누 방울을 바라보는 소년의 표정은 조심스럽다.
하지만 조바심 속에서도 서서히 입김을 불어넣는 일을 계속한다.
놀이 속에는 긴장감과 일상에 대한 뛰어난 묘사가 표현되어 있다.
샤르댕은 비누 방울을 주제로 그림을 작품 외에도 그렸으며
작품은 중에서도 조형미가 가장 뛰어난 작품이다.

*Boy Playing with Cards,1740*

*The Copper Cistern,1733*

*Still-Life with Jar of Olives,1760*

*'La Brioche' (Cake),1763*

*Self-Portrait, 1771, Paste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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