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미술사 참고자료/인상주의

서양미술사36 인상주의:피사로,시슬리

AH101 2012. 2. 16. 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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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사로(Camille Pissarro:1830~1903) ★

Self-Portrait, 1873/Camille Pissarro
1883년 피사로는 자신의 아들 루시앙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림에 대한 열정,
자신의 인생관이자 동시에 예술가로서의 신념을 짧게 피력한다.
"내가 촌스럽고 침울한 성격이며, 거칠고 야생적인 면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려
무나. 나를 관대하게 바라본 사람들은 나를 좋아할 것이다. 그렇지만 슬쩍 보고
그저 지나친 사람들은 표상만을 볼뿐이지. 시간도 없이 그들은 스쳐 지나가
버린단다! 그러나 그림은 다르지, 예술은 나를 황홀케 한단다. 나의 삶이지.
그 이상에 무엇이 있겠니? 예술가들이 모든 바램이 이런 것이 아닐까 한다.
얘기가 너무 길어 졌구나.."
이 짧은 글은 피사로의 내면을 가득 채운 예술에의 열정과 예술가로서의
자부심을 확인시켜 준다. 평소 동료들부터 모세나 하나님에 비교될 정도였던
온화한 인품의 소유자였으며 동료들과 훌륭한 인간관계를 맺고 있었던 피사로
였지만 그 무엇도 예술만큼 피사로의 마음을 사로잡지는 못했던 듯하다.
전형적인 초상화 형식을 따른 이 작품은 단순한 구성을 보여주고 있으나, 작가의
훌륭한 인품을 자연스럽게 표출하고 있다. 퐁투아즈에서 세잔느와 함께 작업을
하던 시기에 그려진 작품으로, 이후의 자화상은 노년에 이르러서야 제작
되었다.

피사로는 덴마크령 서인도제도의 세인트토머스 섬[島] 출생이다.
1855년 화가를 지망하여 파리로 나왔으며, 같은 해 만국박람회의 미술전에서
코로의 작품에 감명받아 그로부터 풍경화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몇 차례 살롱에
출품하였으나 번번이 낙선하고 1870년의 프로이센-프랑스전쟁 때는 런던으로
피난하여 그곳에서 모네와 함께 J. 터너 등의 영국 풍경화를 연구하였다.
전후에는 파리 북서쪽 교외에 정주하면서 다시 질박(質朴)한 전원풍경을 연작,
1874년에 시작된 인상파그룹전(展)에 참가한 이래 매회 계속하여 출품함으로써
인상파의 최연장자가 되었다. 그의 작풍은 인상파 특유의 기법을 바탕으로 수수
하면서도 견실성을 보여 모네와 시슬리보다 한층 구성적인 면에 특색을 보였으나,
1850년대 중반경 한때 G. 슬러의 점묘법(點描法)에 끌려 밝고 섬세한 규칙적인
필법에 의한 작품도 남겼다. 만년에는 시력이 약화되었으나 최후까지 제작활동
을 계속하여 인상주의 운동과 운명을 함께 하려는 성실성을 보였다.

The Hermitage at Pontoise, 1867

Louveciennes: The Road to Versailles, 1870

The Road to Louveciennes, at the Outskirts of the Forest, 1871

Chestnut Trees at Louveciennes(루브시엔느의 밤나무), 1871-72

매우 독특한 작품으로 평가받는 이 그림은 크고 두꺼운 화폭 위에 그려져 한 번도
캔버스 틀이 보강되지 않은 상태에서 원래의 약식 테두리 틀에 끼워져 있었다.
미술관에 소장되기 전 전혀 복제되거나 전시된 바가 없다. 그러나 반 고흐가
오베르의 가셰 박사 집 첫 방문 때 "가셰 박사는 겨울눈 속의 붉은 집을 그린 아주
아름다운 피사로 그림 한 점을 가지고 있다"며 경탄했다는 사실로 이미 유명해졌다
고 봐도 좋을 것이다. 피사로의 아들, 루시앙 피사로는 "붉은 집은 피사로 가족이
살았던 곳, 루브시엔느 근방에 있었는데, 은퇴하여 혼자 외로이 은둔해 살았던
수수께끼 같은 한 노인의 소유였다"고 그림의 배경이 된 장소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확인시켜주었다. 이렇게 소재가 루브시엔느에서 취해졌을 것이라는 사실이 유력한
것으로 보아, 날짜는 적혀있지 않지만 이 작품이 1869년이나 1870년이나 1871-1872년
겨울, 피사로 가족이 오베르에 머물고 있던 시기에 그려졌을 것이라는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다.

Orchard in Bloom at Louveciennes, 1872

Entrance to the Village of Voisins, 1872

The Road to Louveciennes(루브시엔느의 길), 1872

"내 생애는 바로 인상주의의 역사와 뒤얽힌 것이었다" 라고 말한 카미유 피사로는 인상
주의자 그룹의 모든 전시회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던 유일한 화가이다.
그는 1870년대 내내 프랑스 인상주의 운동의 중심 인물로서, 완고하고 때로는 따분하며
심지어 권태로울 정도로 자연 관찰에 주력하였다. 1878년에 한 비평가는 그를 "그들
모두 중 최고의 자연주의자"라고 부르기도 했다.
1870년 독일군이 침공하자 피사로는 프랑스를 떠나 런던으로 왔고, 클로드 모네를
만난다. 거기서 그들은 콘스터블의 예술에 매혹되었고, 특히 그들 자신의 회화적 탐구와
아주 유사한 터너의 "눈과 얼음의 효과"에 사로잡힌다.
그들은 이 놀라운 효과가 흰색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적당한 거리를 두고 보면
원하는 결과를 생겨나게 하는 수많은 서로 포개어진 다양한 터치들에 의해 얻어진 것이라
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피사로는 서리가 내린 풍경이나 눈 덮인 풍경을 즐겨 다루었다.
파리 서쪽에 있는 작은 마을 루브시엔느의 길을 그린 이 그림에서도 잔설이 남아 있는 길
에 오후의 짧은 햇빛이 드는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길 오른쪽의 양지와 왼쪽의 음지는
전통적인 원근법 구도 속에서 완벽한 대칭을 이루며, 한적한 시골길의 안정감과 고요함을
적절히 표현하고 있다.

Hoarfrost(햐얀 서리), 1873

이 작품은 1874년 제1회 인상주의전에서 선보인 작품이다. 바르비종파와 밀레의 진정한
후계자인 피사로는 시골 생활에 깊게 매료되었다. 화면 위로 점차 상승하는 원근법을
씀으로써 화면에 하늘을 작게 담아 상대적으로 서리가 내린 겨울 들판이 전경에 가득
차도록 하였다. 수평선이 가로지르는 간결한 구성은 이 시골 풍경에 없어서는 안 될
견고함을 부여한다. 나무들의 비스듬한 그림자가 서리가 덮인 밭고랑을 가로지르고 있다.
거칠고 마른 붓질이 겨울의 혹독한 추위를 잘 살려내고 있다.

The Railway Bridge at Pontoise, 1873

Bouquet Of Flowers, 1873

Pond at Montfoucault (Mayenne), 1874

Garden of Les Mathurins at Pontoise, 1876

The Rainbow, 1877

La Cote des Boeufs, the Hermitage, 1877

Red Roofs, 1877

이 그림에서 마을의 정경은 단지 풍경화라는 범주에 들게 하는 구실일 뿐이다.
견고하고 단순한 구성을 위해 마을 풍경 대신 지붕의 붉은 색채가 주요한 모티브가
되었다. 늦가을에서 겨울로 접어드는 계절, 이미 나무들은 잎을 모두 떨구고 완연한
겨울 빛을 띠고 있다. 마을 둔덕과 들판에 군데군데 남아 있는 마지막 녹음들,
그리고 깊은 흙 빛, 이 풍부한 색조들은 붉은 지붕 색과 어우러져 서정적인 분위기
를 더한다. 두텁게 발라진 풍부한 색조들이 그림의 단순한 기본 구조를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겨울의 정취를 살려내고 있다.

Vegetable Garden and Trees in Blossom, Spring, Pontoise

(퐁투아즈의 봄), 1877

1871년 6월 피사로는 런던에서 프랑스로 돌아와 루브시엔느를 다시 찾는다.
그리고 1872년 퐁트와즈에 정착해서 1884년까지 그 곳에 거주했다. 이 무렵 피사로는
시골의 자연과 농촌생활을 그리는 화가로서 확고하게 자리잡는다. 이 점에 있어서
그는 밀레의 전통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세계는 밀레의 낭만주의적 감상
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피사로는 물이나 물위에서 반사하는 빛보다는 땅이나 경작지,
들과 언덕, 마을과 과수원, 집과 나무들에 관심을 갖는다. 그의 작품에서 자연은 인간
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고 있다. 그는 성실하고도 사실적으로, 매일매일 일하고 있는
농부들과 시골 시장들을 묘사한다. 거목을 화면 한가운데 배치한 대담한 구성을 보이는
이 작품은 정확한 삼각형의 나무 형태로 짜여져 있다. 나무 뒤로는 하늘색의 파란 지붕
의 건물이 있고, 화면 아래 수평으로 깔린 초록색의 채마밭은 묵직한 색감으로 그림에
안정감을 부여한다. 봄의 분위기는 흰색의 작은 꽃봉오리들로 확연하게 드러나고 있다.
에밀 졸라가 말했듯이 그의 그림 속에서 "우리는 대지의 심원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A Fair at the Hermitage near Pontoise, c.1878

Portrait of Madame Pissarro Sewing near a Window, 1878-79

Cottage at Pontoise in the Snow(눈덮인 퐁트와즈 사육장), 1879

피사로는 1879년을 퐁트와즈에서 보냈는데 생활이 몹시 비참했다고 한다.
그러나 퐁트와즈의 평화로운 풍경을 그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화면에 채색하는 피사로의
붓의 움직임이 새의 깃털처럼 부드럽고 가볍게 느껴진다.

Landscape at Chaponval, 1880

Peasant Girl Drinking her Coffee, 1881

Peasant Girl with a Straw Hat, 1881

The Shepherdess(Young Peasant Girl with a Stick), 1881

Girl Washing Plates, 1882

The Pork Butcher, 1883

Apple-Picking, 1886

View from my Window, Eragny, 1886-88

Woman Hanging Laundry(빨래 너는 여인), 1887

1884년 지조르 근처의 에라니에 정착하면서 피사로의 예술은 체계화되고 보다 단순한
경향으로 흐르게 된다. 바로 그 해에 그는 자신도 참가했던 앙데팡당전에 출품된 쇠라
의 <아니에르에서 목욕하는 여자>에 감탄하여, 1886년 마침내 신인상주의로 전향한다.
그는 신인상주의를 인상주의의 연속선상에서, 과학적이고도 합리적인 체계 위에 근거한
것이라 생각한다. 여덟 번째이자 마지막 인상주의자 전시회에서 피사로는 쇠라, 시냑과
나란히 분할묘법의 미학에 따라서 그려진 작품을 전시함으로써, 이 미학을 열렬히 선전
하는 예술가로 나타난다. 이후 약 4년간 성실하게 신인상주의를 실행했으나 그의 방법
은 쇠라나 시냑의 것에 비하면 유연한 것이었으며, 참신하고 자연스러운 시각을 결코
잃지 않았다. 밀레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이 그림은 터치로 볼 때는 쇠라나 모네의 후기
작품을 연상시킨다. 점묘법의 실험이기도 했던 이 작품은 온화한 색조의 조화와 밝은
햇살의 표현 등을 통해, 일상의 한 장면을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풀밭 위에 앉아 있는 왼쪽의 어린아이의 머리는 금빛으로 빛나고 있고, 완만한 대각선
으로 화면을 가로지르는 길은 깨끗하게 빨아 널은 침대보처럼 포근함을 준다.
모든 날카로운 선이 제거된 동글동글한 오브제들은 화가의 삶에 대한 애정과 어린 시절
의 향수를 일러주고 있다.

Woman in an Orchard. Spring Sunshine in a Field, Eragny

포도밭의 여인, 에라니 초원의 봄 볕, 1887

1884년 퐁투아즈 지역을 떠난 피사로는 그 근방의 에라니 쉬르 엡트에 정착하였다.
그는 그 곳에서 생을 마칠 때까지 여생을 보냈다. 피사로는 1885년경부터 쇠라와
시냑을 알게 되면서 작은 색 점을 캔버스에 점을 찍듯 그린 점묘법을 시도하게 된다.
이는 팔레트에서 색을 섞는 대신에 캔버스에 순색의 작은 색점들을 캔버스에 바로
바르면, 눈의 망막에서 색의 혼합을 감지하는 것이었다.
이 작품은 신인상주의의 원리를 수용한 이후, 피사로 작품의 변화된 화풍을 보여주고
있다. 피사로는 포도밭의 풀밭과 나뭇잎들에 순색을 그대로 병치시켜 발랐다.
자연스럽고 묵직한 색감으로 서정적인 풍경화를 보여주었던 그의 화풍은 작은 붓터치
들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생동감 있는 화면으로 변화하였다. 1889년 이후 피사로는
다시 예전의 화풍으로 돌아가 1990년부터는 파리나 루앙의 길을 깊은 투시로 묘사한다.

Apple Picking at Eragny-sur-Epte, 1888

Hyde Park, London, 1890

Sunset at St. Charles, Eragny, 1891

Haymakers Resting, 1891

Two Young Peasant Women, 1892

Kew, the Path to the Main Conservatory, 1892

Woman with Green Scarf, 1893

Washerwomen, Eragny-sur-Epte, 1895

Girl Sewing, 1895

The Boieldiieu Bridge at Rouen, Setting Sun, Foggy Weather, 1896

Boulevard Montmartre: Morning, Grey Weather, 1897


1897년의 겨울과 봄, 피사로는 "파리의 거리들"이라는 제목으로 일련의 거리 풍경을
그려낸다. 이 연작은 그의 이름을 점묘주의와 연관짓던 비평가들의 주목을 받게 된다.
피사로는 러시아 호텔의 객실을 빌려서 창밖의 풍경을 스케치한 후, 에라니에 있는
화실에서 그림을 완성하였다. 동일한 풍경을 하루 중 다른 시간, 다른 날씨에서 각각
묘사하여 같은 관점에서 13개의 서로 다른 그림을 그려냈다.
이 작품에서 화가는 우울한 날의 몽환적 분위기, 복합적인 색채와 다양한 색조를 효과
적으로 전달한다. 화가는 빠른 붓놀림에 의하여 숨가쁘고 역동적인 도시의 삶을 설득력
있게 포착하고 있으며, 근대 도시의 이미지를 잘 드러낸다.
이러한 도시적 풍경은 피사로 작품의 중요한 모티브를 형성한다.

Boulevard Montmartre: Night, 1897

Boulevard Montmartre: Rainy Weather, Afternoon, 1897

Avenue de l'Opera: Morning Sunshine, 1898

The Old Market at Rouen and the Rue de l'Epicerie, 1898

The Artist's Garden at Eragny, 1898

The Church of St. Jacques at Dieppe, 1901

The Fair at Dieppe. Sunny Morning(La foire a Dieppe. Matin, soleil), 1901

A Pont-Neuf, 1902

Quay of Malaquais in the Sunny Afternoon (Quai Malaquais apres midi, soleil), 1903

Farm at Montfoucault



★ 시슬리(Alfred Sisley: 1839~1899) ★

Portrait of Alfred Sisley by Renoir

부유한 영국계 부모는 그에게 상업을 가르칠 생각이었으나 시슬리는 취미로 그림을 시작
했고 1862년에 샤를 글레르의 화실에서 클로드 모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장
프레데리크 바지유와 사귀게 되었다. 1870년에 일어난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으로 가족이
재정 파탄에 빠지게 되어 잠시 런던에 피신해 있어야 했다.
그는 이런 위기상황에서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의 여생은 가난과의 끊임없는 투쟁
이었으나 죽은 직후 재능을 널리 인정받기 시작하여 그림값이 크게 올랐다.
시슬리는 주로 풍경화를 그렸으며 그의 작품은 부드럽게 조화를 이룬 색조가 두드러져
다른 작품들과 뚜렷이 구별된다. 초기에 코로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절제되고 섬세한
색은 코로의 은빛 색조를 반영하고 있다. 설경을 다룬 그림들이 인상적이다.
즉흥적인 필치를 보여주는 뛰어난 작품들은 그가 모네와 가깝게 교제하고 있었던 1872~
80년에 파리 근교의 말리·루브시엔·부지발·세브르·생클루·뫼동 등지에서 제작한
것들이다.

The St. Martin Canal, 1870

시슬리 작품으로는 유일하게 가셰 박사가 구입했던 이 작품은 1870년의 살롱에 전시
되었던 작품이다. 블랑슈 드 베쟁이 발간한 살롱 출품작을 설명한 소책자, 『1870년
살롱 산책』이라는 책에서도 특별한 언급된 바 없는 이 작품은 비평가들의 주목을 전혀
받지 못했다. 이 그림이 자주 논평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 국립 미술관에
소장되면서 시슬리가 이 작품을 계기로 현대적인 소재, 근대화된 도시 모습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는 평가를 받게 되면서 부터이다.
생 마탱 지역을 잘 알고 있는 마리 테레즈 로레이는 시슬리가 실제 모습을 어느 정도
자유롭게 변화시켜 그렸음을 시사했다. 아마도 화폭 전면 가득하게 운하의 모습을
그리고자 실제 풍경을 변형시켰을 것으로 짐작된다.

Early Snow at Louveciennes, 1870-71

Bridge at Villeneuve-la-Garenne, 1872

Autumn: Banks of the Seine near Bougival, 1873

Garden Path in Louveciennes(Chemin de l'Etarche), 1873

The Machine at Marly, 1873

The Lesson, 1874

Regatta at Hampton Court, 1874

Meadow, 1875

Sand on the Quayside, Port Marly, 1875

Flood at Port-Marly, 1876

시슬리는 1874년부터 1877년까지 마를리 -르-르에 체류하였다. 그 곳은 센 강 주변에
가까이 위치하여 종종 강물이 불어 마을 전체가 잠기곤 하였다. 화가는 도시 풍경 속
에서 전혀 예기치 못했던 물난리를 놓치지 않았으며, 빛의 대비와 반사를 연습할 좋은
기회로 삼은 듯하다. 포르-마를리의 홍수라는 같은 소재를 가지고 두 작품을 그렸는데,
약간 다른 각도에서 그려진 또 다른 작품은 밝은 날에 그려진 것이다.
이 작품은 비교적 흐린 날에 그려진 것으로, 하늘은 잿빛으로 물들어 있다.
왼편에 물에 잠긴 집에서 볼 수 있는 주홍색, 크림색, 푸른색의 경쾌한 색조가 회색빛
하늘과 단절된 느낌을 자아낸다. 홍수와 물을 소재로 그린 작품들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인 이 작품은 카몽도 백작의 기증으로 루브르에 소장되고 있다.

The Flood on the Road to Saint-Germain, 1876

Snow at Louveciennes(루브시엔느 설경), 1878

영국인 부모를 둔 시슬리는 평생을 파리 인근에서 보냈다. 하지만 1857년부터 1861년
까지는 런던에 머물렀고, 1874년에도 영국에 있었다. 거의 풍경화만을 그린 그는 특히
영국 화가들 특유의 자발적인 터치와 수채화 기법의 자유스러움이 눈에 띠는 작품들을
남겼다.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던 시슬리는 남 프랑스의 강렬한 태양 아래 있는
그대로 드러난 자연보다는, 은밀하고 베일에 싸인 부드러운 자연을 선호했다.
이러한 성품과 취향은 그대로 그의 화폭에 반영되었다. 그의 그림은 홍수로 물살이
사나운 센 강의 묘사에서조차 한가로운 뱃놀이 장면으로 착각할 정도로 차분하고 정적인
분위기가 특징적이다. <루브시엔느의 설경>은 전통적인 원근법에 근거해 거리감이 느껴
지는 사실주의적인 공간감을 연출하고 있지만 붓 터치는 이미 인상주의 기법을 쓰고 있다.
소실점에 위치한 불명확하게 개략적으로 묘사된 인물은 어떠한 서술적 기능도 가지지
않는 시각적인 요소일 뿐이다. 인물은 이야기를 하려고 작품 속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
단지 하얗게 쌓인 눈의 인상을 시각적으로 부각시키고 있을 뿐이다.
거의 청색 빛을 띄는 흰 눈이 모든 사물들을 뒤덮고 있다. 하늘과 배경의 풍경은 그
자체로 광원의 역할을 하고 있다.

Station at Sevres, 1879

The Chemin de By through Woods at Roches-Courtaut,

St. Martin's Summer, 1880

Provencher's Mill at Moret, 1883

The Tugboat, 1883

A Farmyard near Sablons, 1885

Moret-sur-Loing, 1891

View in Moret(rue des Fosses), 1892

The Canal du Loing at Moret, 1892

1889년 11월 시슬리는 모레-쉬르-루엥에 정착하였다. 조그만 마을의 정감 어린 풍경은
시슬리를 곧 사로 잡았고, 시슬리는 생의 마지막 20여 년 동안 종종 루엥을 따라 셍-
맘메의 센 강가를 그렸다. 셍-맘메는 루엥과 센 강이 힙류하던 곳이다.
1884년 3월 7일 시슬리는 뒤랑-뤼엘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보냈다.
"나는 다시 작업을 시작했네. 강가에서 진행 중인 몇 점의 캔버스가 있다네."
화가는 운하가 곡선을 그리는 장소에 자리를 잡았고 밑둥이 드러난 포플러 숲을 따라
흐르는 강을 보았다. 모티브를 다루는 이러한 방식은 수평선에서 사라지는 휘어진 도로와
함께 펼쳐진 전경에 주목하도록 한다.
이 그림을 완성한 후, 시슬리는 자신이 이 그림에서 강조하고 싶었던 부분에 대하여
비평가 타베르니에게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고 한다.
"하늘은 배경으로 존재 할 수밖에 없습니다. ... 내가 이 그림에서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이 점입니다. 나는 화폭에서 배경이 아니라, 풍경에 중요성을 부여하기 때문입니다."

The Church at Moret, 1894

The Banks of the Seine: Wind Blowing, 1894

Bristol Channel from Penarth, Evening, 18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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