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딜롱 르동(Odilon Redon: 1840~1916) ★
Self-Portrait, 1880/Oil
오딜롱
르동(Odilon Redon: 1840~1916)은
프랑스
보르도
출생으로
병약과
고독
속에
음악과
시, 철학과
미술을
사랑하는
내성적
성격의
소년으로
자랐다.
그는
상징주의
회화의
가장
대표적
인물이며
창시자라
할
수
있으며, 19세기
낭만주의와 20세기
초현실주의를
직접적으로
연결
시킨
꿈의
화가이다.
18세
때
파리에서
장
레옹
제롬에게
그림을
배우다가
다시
고향에
돌아가
식물학자 A. 그라보에게서
자연의
신비와
나아가
동서의
문학과
철학에
관하여
많은
일깨움을
받았다. 이어 1863년
동판화가
로돌프
브레댕을
알게
되면서
감화를
받고
극히
환상적인
에칭과
소묘
제작을
시작하였다.
특히
일본
목판화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작품
경향은
인상파의
외면적
현실
묘사에
동조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한
보이는
것의
논리'를
사용하려는
환상적, 상징적
경향의
것으로,
일종의
쉬르레알리즘(Surrealism:초현실주의)의
선구적
입장에
서는
것이었다.
또한
그의
작품
세계는
꿈의
특성을
지니기도
하는
무정형의
유동하며
변하는
색채로부터
창조된
꿈의
세계였다. 그는
자주
자연을
연구함으로써
주제들을
찾았고, 때로는
현미경을
통해
자연
대상을
관찰하였는데
작업을
진행하면서
그것들은
아름답고
거대한
환상적인
것으로
변형시켰다. 초기에서
중기에
걸친
판화와
소묘에
의한
흑백의
표현
세계로부터 50세
무렵을
경계로
파스텔이나
유채에
의한
화려한
색채
표현으로
옮겼다. 만년에는
그림에서
괴기한
것의
모습은
사라지고
상징의
깊이에
있어서
꽃과
소녀를
주제로
한
것이
두드러졌다.
칼리방, 1870년대/종이에
목탄
1880년
색채를
쓰기
전까지, 이른바 "검은색" 시대로
칭하는 1870년대
르동은
형이상학적인
자신의
열망을
표현하면서
문학적이고, 환상적인
주제를
목탄으로
그렸다. 칼리방은
르낭(Renan)의
희곡
『서민(Caliban)』의
주인공으로서
본래는
윌리엄
세익스피어의『태풍(The Tempest)』의
주인공
페로스페로
(Prespero)에서
빌어
왔다. 르동은
종종
칼리방을
영감의
주요한
원천으로
삼아
이
작품을
비롯 <잠자고
있는
칼리방(Caliban Asleep)>과
같은
작품에서도
소재로
다루었다. 다윈의
진화론과
생물의
돌연변이와
동시대
과학적
이론들을
잘
알고
있던
르동은
이상한
잡종
생물, 혹은
변형된
식물
이미지를
통해서
엘리자베스여왕
시대
황금
문학을
야만과
환상으로
해석하였다.
이
작품은
오르세
미술관에
르동의
아들
아리와
수잔느
르동의
기증으로
소장
되었다.
Beatrice(베아트리체), 1885
Mystery
Les yeux clos (Closed Eyes감은
눈), 1890
르동은
사람
얼굴에
곤충, 꽃
등이
결합된
기괴한
이미지들을
비롯하여
상징주의
문학에서
빌어온
환상적인
주제들을
그렸다.
1880년대부터
주목받기
시작한
그의
작품은
대부분
흑백의
석판화와
목판화, 에칭
작품이었다. 1895년경부터 1900년
사이에는
흑백
대조가
두드러졌던
판화들
대신에
밝은
색채의
파스텔, 수채화
등을
시도, 보다
밝고
유쾌한
화풍으로
변화
하였다. 1890년에
그려진
이
그림은
그러한
작품
세계의
전환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감은
눈"의
주제는
같은
해인 1890년에
검은
색의
석판화로
다루어진
바
있다. 이
작품에서는
연보라
빛
색채와
빛으로
환상적인
분위기를
더하였다.
르동은
이
작품을
위해
부인
카미유에게
미켈란젤로의 <빈사의
노예> 처럼
두
눈을
감고
머리를
어깨
쪽으로
기울인
자세를
취하도록
요구했다고
한다.
1888년 5월의
일기는
이
작품의
영감을 <빈사의
노예>에서
얻었음을
짐작케
한다. "노예의
감은
눈
아래에
얼마나
고결한
의식적인
행동이
있는가! 그는
잠들어
있다. 대리석
이마
아래
근심스러운
꿈을
꾸고
있다. 감동적이고
사색적인
세계에
우리의
근심스러운
꿈을
놓아둔다." 화폭
전면에
드리운
수평선
너머에서
눈을
감은
얼굴이
크게
형상화되어
나타난다. 르동은
환상적인
세계를
불러
일으
키기
위해, 매끈한
사실적인
재현과는
상당히
다른
양식을
보여준다.
대범한
붓질로
그려진
어렴풋한
이미지는
감은
두
눈의
인물을
통해
보이지
않는
꿈의
세계를
연상시키고
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법칙에
따라
있음직
하지
않은
것을
살아
있게
만드는
것이
자신의
창조력이라고
공언한
그의
예술관을
여실히
보여준다.
Michelangelo/Slave(Dying:빈사의
노예),1513
The Druidess, 1893
Phaethon
Mystical Knight(Oedipus and the Sphinx), 1894
Sita, c.1893
잠자고
있는
칼리방, 1895∼1900
이
작품은 1870년대
르동이
목탄화로
그렸던 <칼리방>을
다시
그린
것이다.
상징주의
문학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던
르동은
이
작품의
주제
역시
세익스피어의
희곡
『태풍(The Tempest)』에서
빌어왔다. 르동은 1890년대
이후부터
파스텔
색조를
쓰기
시작하였는데, 이전의 <칼리방>이
보여주었던
검은색의
압도적인
분위기와는
달리
몽환적인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꿈과
환상, 자연의
신비한
힘,
중세의
전설에
나오는
공기의
요정, 아리엘의
세계가
표현되어
있다.
The Flame(Goddess of Fire), 1896
Portrait of Ari Redon, 1898
The Fall of Icarus
Woman with a Yellow Bodice, 1899
Pegasus, 1900
이집트로의
피신, 1900
1890년대는
상징주의
물결이
문학, 음악, 미술
등
예술계
전반을
지배하던
시기이다.
또한
여러
예술
장르들이
고유의
경계를
넘어
상호
침투하고
영향을
주고받던
때이기도
하다. 회화에서는
대상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것을
넘어서, 생각을
상징적으로
표현
하는
주관적인
그림을
지향하였다. 르동은
종교적이고
신비적인
소재들을
즐겨
그렸는
데, 기독교, 그리스와
로마
신화는
물론이고
불교와
이신론의
느낌을
주는
주제까지
화폭에
담았다. 그는
이러한
비가시적인
관념적
세계를
표현하기
위하여
정확하게
묘사하기
보다는
암시에
주의를
기울였다. 작품마다
주제는
다양하게
변조되었지만,
르동
작품을
특징짓는
고풍스러움은
일관되게
나타난다.
이
작품에서도
제목이
아니라면, 화면
왼쪽
하단에
있는
인물들을
성
가족이라
확인
하기
힘들만큼
형상들은
암시될
뿐이다. 넓고
두텁게
칠해진
색면들이
화면에
우위를
점하며
사실적인
형태
묘사는
고의적으로
무시되었다. 성령의
인도를
상징하는
빛만이
그들이
성
가족임을
알려준다. 빛과
어두움의
대조, 환상적인
색채
등이
신비로운
분위기
초현실적인
세계로
이끌고
있다.
Ophelia, 1900~1905
Madame Arthur Fontaine, 1901
Two Young Girls Among Flowers, 1902~12
Flowers,1903
Flowers, 1903
Vase of Flowers
Portrait of Paul Gauguin, 1903~05
Le Bouddha(The Buddha부처), 1905
1895년
이후
파스텔은
르동
작품의
주요한
매체가
되었다.
그러나
이
그림에서처럼
색조가
좀더
밝고
낙관적인
분위기로
바뀐
것은 1900년
이후로서, 그때부터
캔버스는
매우
다채로운
색채로
풍성해졌다.
르동의
다른
작품들도
그렇지만, 이
작품의
부처라는
주제
역시
여러
차례
흑백
판화로
다룬바
있었다. 부처는 1895년부터 1896년까지
두
점의
석판화에서
다루었는데, 아마도
플로베르의 {성
안토니의
유혹}에
영감을
받은
듯하다.
그
작품들에서
부처는
환상적인
인물로, 뱀의
몸을
가진
망령에
사로잡힌
점성사로
표현되었다. 1900년에는
평화로운
색조의
울림이
가득한
파스텔화로 <부처의
죽음>을
보여주었다. 1904년에는
보다
큰
장식
패널에 <젊은
시절의
부처>를
그렸다. 당시
그는
보르도의
컬렉터인
가브리엘
프리조에게
쓴
편지에서
르동
자신이
인도에서
다시
환생하고
싶다고
할
정도로
불교에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이
작품에
영감을
불어넣은
것은
오히려
인도의
영향
보다는
오히려
일본
미술인
듯하다. 이
그림에
나타난
부처는
가슴에
금빛
장식을
두르고, 오른손에는
석장을
쥐고
있는
지장보살이다. 극락의
가운데는
상상의
꽃이
피어나
있으며,
르동의
다른
석판화들에
등장하는
잎이
없는
거의
벌거벗은
나무가
이
그림에도
그려져
있다. 이
소박한
나무의
이미지는
천상의
분위기를
떠올릴법한
배경의
현란하고
화려한
색채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대조적인
분위기는
지장보살
의
화려한
다채색의
법의와
움직임
없는
보살의
묵상
자세, 내리깔고
있는
두
눈에서
다시
한번
환기된다. 이
파스텔화는
르동의
작품들
중에서도
완성도가
높은
작품에
속하는
것으로
르동이
파스텔이란
매체를
얼마나
능숙하게
쓰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
그림에
나타난
그의
파스텔
테크닉은
드가의
파스텔
기법에
필적할
만하다.
The Chariot of Apollo, 1905~14
The Chariot of Apollo, 1905~14
Red Boat with a Blue Sail(푸른
돛을
단
빨간
배), 1906~07
Stained Glass Window(Allegory), 1908
Homage to Leonardo da Vinci, 1908
Saint Sebastian, 1910
Portrait of Violette Heymann, 1910
Tystnad, 1911
La coquille (조개껍질The Seashell), 1912
이
화려한
파스텔
작품의
모델로
쓰였던
조개는
화가의
아들인
아리
르동이
정성껏
보관했었고, 1905년에
이사한
르동의
집
파리의
바그람가 129번지
아파트의
거실에
오랫동안
장식되어
있었다. 바닷가가
고향인
르동
부인
또한
조개에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르동은
미완성으로
남은
유화
작품을
통해
그
조개를
재현해
내려고
끊임없이
시도했다. 그는
비율을
조정하지
않고
원래
크기
그대로, 검은색
으로
그
모티브를
중앙에
뚜렷이
그려
넣었다. 분홍빛과
오묘한
색조의
진주빛
조개는
애매하게
융합된
공간
구성
속에서
그
아름다운이
더욱
돋보인다.
이
작품
이외 <비너스의
탄생>을
비롯해
다수의
작품에서
등장하는
조개는
르동에게
특별한
조형
모티브로
쓰였다.
Profile and Flowers, 1912
★
뭉크(Edvard Munch: 1863~1944) ★
Self Portrait with a Burning Cigarette, 1895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1863~1944)는
노르웨이의
뢰텐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크리스티아니아(지금의
오슬로
시)의
하층
계급
사람들
사이에서
일하는
의사로, 뭉크는
일찍부터
인간에게
닥치는
여러
가지
불행, 특히
병과
죽음에
짓눌려
있었다. 그뿐
아니라
그
불행은
그에게도
덮쳐왔다. 어머니는
그가
다섯
살
때
세상을
떠났고
또
한
살
위의
누나도
그가
열네
살
때
갑자기
죽고
말았다.
소년
시절의
이러한
불행이
다감한
예술가의
자질을
타고난
뭉크의
마음에
어떠한
상흔을
남겼을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뭉크는
나중에 "나의
요람을
지켜보고
있던
것은
병과
광기와
죽음의
검은
천사들의
무리였다. 그들은
그
후에도
줄곧
나의
생활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고
말했는데, 이러한
어두운
운명이
그대로
그의
예술을
키우는
힘이
되었던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일찍부터
회화에
흥미를
품고
있던
뭉크는
우선
노르웨이의
국립공예학교에
다니며
예술가로서의
수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당시
크리스티아니아에는
예술가
크로그를
중심으로
하는
보헤미안
그룹이
있어서
영국이나
대륙의
세기말
예술가들의
반속적
(反俗的) 예술
지상주의의
세례를
듬뿍
받고
있었다.
가정적인
비극에
이어
이
보헤미안
동료들과의
교우는
뭉크의
그뒤
예술
활동의
방향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1889년, 에펠탑이
세워지고
만국박람회가
열리던
해에
뭉크는
파리로
와서
이듬해까지
몇
달
동안을
세느
강가에서
지냈다.
이때
당시
아카데미파의
대가인
보나의
아틀리에에
다니며
공부하기도
했지만
그와
동시에
피사로, 쇠라, 로트렉, 고흐, 고갱
등의
작품을
만나며
당시의
이른바
최신
회화
활동에도
접했다. 이것도 1890년대
그의 '세기말적' 양식을
기르는
데
소용이
되었던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렇게
하여 1890년대부터 1900년대에
걸쳐
뭉크의
가장
풍성한
활동의
시기가
준비된다. 뭉크는
실증주의적
낙관론의
허위성을
드러내면서
인간
존재의
고독감
에서
오는
고뇌에
찬
비명을
묘사했다. 1894년쯤부터
그는
판화에
강한
흥미를
갖게
되어 <절규>를
포함한
자신의
많은
작품을
직접
판화로
만들었는데, 생명의
신비에
대한
불안과
깊은
통찰로
가득
찬
그의
작품은
그
후
유럽
예술, 예컨대
독일
표현주의(작가의
주관적
감정과
반응을
우선하는
예술
사조) 운동
등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05년에
그는
정신당애를
일으켰고
회복하는
데 3년이
걸렸다.
뭉크는
다시
그림을
시작했으나
이전의
표현력을
완전히
회복하지는
못했다.
1909년
오슬로
대학의
의뢰로
대규모
장식벽화를
제작하기
시작할
무렵부터
뭉크
의
작품은
초기의
날카로운
긴장감과
전율을
잃고
점차
생기를
잃어갔다.
그
후부터
색채가
밝아지고, 문학적, 심리적인
정감이
두드러졌다.
1937년
나치스는
독일에
있는
그의
모든
작품을
퇴폐예술이라
하여
몰수해
버렸다.
뭉크는 1944년
제2차
세계대전
말기까지
살았지만, 그야말로
누구보다도 '세기말'
의
시대를
대표하는
예술가였다.
Ashes
Sister Inger, 1892
당시 29세
때
잠시
귀국하여 9월에
오슬로의
토스톨프고렌에서
두
번째
개인전을
갖게
되는데, 이때
발표한
초기의
대표작이다.
<검은
색과
자주색의
하모니>라는
제목으로
출품되었던
초상화로서
정면을
응시
하고
있는
눈에서
외부로부터
내면
세계를
투영하려는
의지를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정면성에
의한
시선의
초점은
뭉크
세계의
특색이기도
하다.
인물의
표현을
정교하게
나타내고
있는
듯
하면서도
특징적인
것
외에
불필요한
요소는
생략하였고, 간결한
형태와
조화를
갖춘
색채는
조형적
균형을
이루고
있다.
구도적인
면에서
좌우
대칭으로
이루어진
형태는
강인하면서도
엄숙한
고전적
조화를
이루고
있는데, 인물
하단부에
바닥을
가로지르는
수평선과의
관계는
화면의
긴장을
강하게
느끼게
하면서
순수한
감동을
더
한층
주고
있다.
Melancholy, 1891
Evening on Karl Johan Street, 1892
Death in the Sickroom, 1893
그의
작품은
문학적이기는
하나
문학적이면서도
동시에
반사실적
성향이
뭉크
예술의
기본
요소인
것이다. 그는
그
자신의
개인적
일들을
비유적으로
재현하였으며, 개인적
체험을
근본으로하여
승화시켜
환원화된
창조력을
보였다.
여기에서의
내용이
뭉크
자신의
가족의
죽음을
겪은
체험을
바탕으로하여
나타낸
것인
지는
불확실하나, 과거
가정
내에
있었던
병과
죽음에
대한
불행적인
기억을
상기시켰
다고
할
수
있겠다. 병실
내의
무력감(無力感)이
가득
차게
톤을
이루고
있으며,
인간
개개인
표정은
실의에
찬
가운데
슬픔
기원, 상념의
모습들을
강한
형태로서
요약
시켜
주관성있게
나타내고
있다. 찾아든
흑의(黑衣)의
천사였던
것처럼
이를
적절히
표현한
작례(作例)라
하겠다.
The Scream(절규), 1893
미술관의
작품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를
차분하게
하고
안심시켜
준다.
전쟁이나
순교와
같은
피비린내
나는
장면을
그린
것이나
악마나
지옥
같은
무서운
주제를
다룬
것일지라도
일단
전람회나
미술관에
진열되면
마치
우리
속의
맹수처럼
얌전해져
버린다. 그러나
아주
드물게, 어디에
있더라도
보는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작품이
있다. 뭉크의 <절규>는
그러한
보기
드문
작품
가운데
하나다.
뭉크
자신의
다른
작품들을
제외하면, 이것만큼
불안에
차
있고
보는
사람마저
불안을
느끼게
하는
그림이란
오랜
서구
미술의
역사에서도
그
예가
드물다.
다리
위에서
두
손으로
귀를
누르고
겁에
질린듯이
몸을
꼬는
이
인물은
필사적으로
무언가
도움을
청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에게
대체
무엇을
해주어야
할지를
모른다. 이
그림을
대하면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전파에
닿기라도
한
듯이
두려움과
전율을
느낄
뿐이다. 그려진
모티프
자체는
특별히
이상하지도
기묘하지도
않다.
노을이
비낀
하늘와
멀리
펼쳐진
북유럽의
만(灣)을
배경으로, 화면에는
평범한
다리
한
개가
비스듬히
그려져
있다. 다리
위
저쪽에는
두
남자
하나가
멍한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리고
두
손으로
귀를
누르고
있다.
이
남자가
대체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에
놀랐는지
화면에
그것을
설명해
줄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그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불안에
떨고
있다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명백하다. 그리고
우리는
무엇이
그를
그렇게
두렵게
하는지를
이해
하려고
하기
전에
우리
자신이
그
남자의, 다시
말해
뭉크
자신의
불안에
휘말리고
있다. 많은
환상작가들이
그러하듯이
뭉크도
자기의
환상
세계를
키우기
위해
친숙한
현실의
뒷받침이
필요했다. 환상이란
반드시
언제나
현실에서
벗어남을
의미하는
것
은
아니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뜻밖의
심연처럼
뻥
뚫린
불길한
다른
세계가
얼굴을
내밀
때
거기에서
두려운
환상
세계가
형성된다. 적어도
뭉크는
그랬다.
이 <절규>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그것은
뭉크
자신의
현실의
체험을
바탕으로
그려졌다. 나중에
뭉크는
이
작품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두
친구와
함께
길을
걷고
있었다. 마침
석양
무렵이었는데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나는
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것을
느꼈다. 나는
죽은
듯이
기진맥진
해서
가만히
서
있었다. 파란
피오르드(협만)와
마을
위로
불과
피의
혀가
너울거리며
돌아다녔다. 친구들은
먼저
가
버리고
나만
뒤에
남아
있었다. 그때
무엇인지도
모르
는
공포에
떨면서, 나는
자연의
큰
절규를
들었다...."
사실
뭉크의
이
작품은
그가
말하는
기억
속의
정경을
충실하게
그리고
있다.
배경에는
크게
물결처럼
일렁이는
파란
피오르드와
물
위에
떠
있는
몇
척의
배가
보인다. 그
위에 '불과
피의
색'으로
물든
노을
진
하늘이
거대한
깃발처럼
뒤척이며
펼쳐져
있다. 그
하늘의
불길한
빛을
받아, 앞쪽의
다리
난간도
빨강과
노랑으로
물들
어
있다. 멀리
끝없이
이어질
것처럼
보이는
이
다리
위, 화면
왼쪽
끝에
잠자코
저쪽
으로
사라져가는
두
사람의
그림자가
뭉크가
말한
두
친구일까.
귀를
누르고
있는
중앙의
주인공을
빼면
이
두
인물만이
이
화면에
등장하는
살아
있는
존재다. 그러나
마치
고대의
선상처럼
곧게
선
채
말없이
걸어가는
그
뒷모습은
일체의
말
걸기를
거부하는
차가움을
품고
있다. 남겨진
주인공은
여기에서
완전히
고독하다.
그때
뭉크의
몸을
꿰뚫을
듯
들려온
것이
자연의
큰
절규였다. 그
절규가
얼마나
깊은
두려움과
충격을
주었는지를
우리는
버드나무처럼
흔들리은
이
인물의
자세와
표정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이때, 그리스
이후
서구
미술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자연은
설명
하기
어려운
공포를
주는
존재로
인간
앞에
등장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절규>에서
자연은
결코
광포하게
날뛰고
있지
안다. 멀리
만에
떠
있는
배는
조는
듯이
고요한
물
위를
떠돈다. 하늘은
밝게
노을에
물들어
있다.
그것은
아마도
노르웨이의
오래된
도시에서는
지극히
평밤하고
흔한
풍경임에
틀림없고,
거기에는
인간에게
해를
입히려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럼에도
뭉크는
그
평화로운
자연
앞에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불안을
느꼈다.
우리는 <절규>를
대할
때
뭉크의
그
불안과
전율을
분명히
느낄
수
있다.
대체
뭉크가
느낀
불안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굳이
말하자면
뭉크자신의
마음속에
있던
불안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1890년대
뭉크의
작품들을
보면
설명하기
어려운
불안감이
흐르고
있음을
알게
된다.
<절규>의
주제는
처음에
우리가
느꼈던
대로 '불안'이며
더구나
그것은 1890년대
뭉크의
중심
모티프의
하나였음을
말해
준다고
하겠다.
The Voice(소리-여름밤), 1893
본래는 <여름밤의
꿈>이란
제목의
작품으로서
사랑의
연작
중
한
작품이다.
뭉크는
간혹
자연
속에
인물을
상징화
시킴으로써
자연에
대해
공명(共鳴)하는
한편,
인간의
심리적이고
정신적
경험을
시각화하려
하였다.
여기서
표현된
여인은
체념한
여인으로서, 고독과
슬픔에
찬
모습으로서의
삶을
갈망하는
상(像)인
것이다. 바다를
배경으로
하여
달
기둥이
자주
등장
되어지
는데
이것은
달에서
해로
음(陰)에서
양(陽)으로
변화하여
이미지를
변화시킨다.
동경(憧憬)과
고독, 불안에
차
있는
여인이
소나무
앞에
우뚝
서
있는
것이
멀리서
보트놀이
하는
남녀의
행복의
소리를
듣고
있는
듯하다.
수직적인
나무와
수평선의
바다
구성은
여인을
친근성
있으면서도
더욱
돋보이게
하여
준다. 독특한
기법에
의한
좀
색다른
개성있는
작품이다.
Madonna, 1893∼94
뭉크는
여자를
세
가지
상으로
보았는데, 하나는
꿈꾸는
여인, 또
한편으로는
삶을
갈망하는
여인, 또
체념하는
여인이었던
것이다.
이 <마돈나>에
나타난
여인에
대하여 '몸을
바치는
여자-성모의
고통스런
아름다움에
싸인다.' 라고
쓰기도
하고, '모든
세계의
움직임이
정지하는
순간, 너의
얼굴은
지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포함하고
있다. 익어가는
과일처럼
새빨간
너의
입술은
고통
때문이기
도
한
것처럼
달싹
벌어진다. 그것은
시체의
미소이다. 바야흐로
삶이
죽음에게
손을
내민다. 죽어서
사라진
무수한
세대와
미래의
세대와의
사이에
인연이
맺어진다.' 라고
기술하고
있다. 뭉크의
나이 30세이던 1893년 12월, 베를린에서 <생의
프리즈>
연작, <흡혈귀>, <절규>, <입맞춤>, <질투> 등의
연작을
발표하였는데, 중심이
된
것은
이 <마돈나>였다.
The Vampire, 1893~94
이
작품은
뭉크의
노이로제
증세가
점점
심해져
감을
보여주고
있다.
에곤
실레의
강렬한
작품에
필적할
정도로
불안감이
베어나오는
이
작품에서
뭉크는
남녀
관계에
있어서
자신의
문제를
공개적으로
드러낸다.
원래 <사랑과
고통>이라고도
불렸던
이
작품은
사랑과
고통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특별히
남자에게
있어서
여자의
이중성을
보이고
있으며,
남자를
끌어안은
여자는
남자의
개성을
파괴하는
이중성을
가진
존재로
표현되고
있다.
젊은
시절
프랑스
유학
전에
깊게
사랑했으나, 자유분방한
기질로
뭉크에게
상처를
준
여인에
대한
기억이
이
작품을
만들게
하였다.
Anxiety(불안), 1894
뭉크의
분열증
증세는 1890년
도라
라우젠과의
연애로
고민과
알콜에
의해
더욱
심화
되어지면서
신경
쇠약
상태가
한때
계속
되어지기도
하는데, 공허한
듯
하면서도
무엇의
의미를
찾으려는
기묘한
눈을
크게
뜨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검은
옷의
군상(群像)의
표정은
뭉크의
자주
다루어진
주제이기도
하다.
이러한
정면성(正面性)에
대하여
혹간
말하기를
분열병
심리에서의
표현성, 친화성
(親和性)이라고
강조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나
뭉크의
근원적인
위문이나
불안이
이와
같은
일련의
작품을
창작토록
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
저녁놀을
배경으로
하여
나타난
산과
들에서의
곡선적
효과는
불안한
감정을
더욱
강하
게
느끼도록
한다. 유화에서
뿐만
아니라
목판화에서도
동일한
내용의
표현을
많이
남기고
있다.
Red and White, 1894
Puberty(사춘기), 1894
이
작품은
뭉크의
내면을
보여주는
주요한
작품으로, <절규>를
그린
다음
해에
그린
작품이다. 침대
가에
걸터앉은
맨몸의
소녀가
머리카락을
길게
뒤로
늘어뜨리고
두
손을
무릎
사이에
끼운
채
역시
겁내는
듯한
눈으로
똑바로
앞을
보는
모습을
그렸다.
관객
쪽을
곧장
쏘아보는
그녀의
크게
뜬
눈에는 <절규>의
인물과
마찬가지로
무어라
고
설명하기
어려운
불안이
깃들여
있다. 그녀의
오른쪽
뒤
벽에는
등불에
비친
그녀의
그림자가
불길한
마물(魔物)처럼
검게
흔들거리고
있는데, 위험하는
듯한
그
검은
그림자가
없더라도
그녀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녀가
무언가
마음속의
불안
을
필사적으로
견디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녀는
대체
무엇을
겁내고
있을까.
그녀의
얼굴에는
아직
어린
티가
남아
있지만
몸은
이미
어른의
세계로
들어서
있다.
그
바싹
마른
상반신이나
가느다란
팔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가슴이나
허리는
소녀라기
보다
한
사람의
여성에
가깝다. 자신이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몸이
어느새
어른의
세계로
들어서
버린
것. 이제까지와는
다른
미지의
세계가
자기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
한마디로
말해서
아이에서
어른의
세계로
옮겨가는
것. 말할
것도
없이
바로
그것이
그녀를
두렵게
하는
것이다. 소녀가
성장하여
한
사람의
여자가
되는
것은
말하자면
자연의
과정이다. 그런데
그
평범한
자연의
과정이
이
소녀에게는
말할
수
없는
신비
와
불안에
찬
일이
된다. <절규>의
인물이
주위의
자연에서
견디기
어려운
불안을
느꼈듯이 <사춘기>의
소녀는
자기
내부의
자연에
겁을
내고
있다.
그렇다면
뭉크는
여기에서도
지국히
일반적인
자연의
변화에, 즉
생성하고
발전하는
것에
불안을
느꼈던
셈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
생명
자체에
대한
불안이다.
사실
이
시대의
뭉크는
죽음과
이웃한
생명, 사랑과
배반, 남자와
여자, 생명의
신비
등에
몰두하고
있어서
여러
가지
형태로
생명의
본질의
문제를
다루었다.
그리고
그
모든
작품의
바탕에, 우리들
보는
사람까지
불안하게
만들고
마는
설명하기
어려운
두려움이
일관해서
흐르고
있다. 그것은
조금
넓은
역사의
시야에서
본다면
뭉크
혼자만이
아니라 19세기
말의
많은
예민한
젊은이들에게
공통된
현상이었다.
Jealousy, 1895
The Dead Mother, 1899-1900
Spring, 1899
Girls on a Bridge, 1899~1900
강렬한
색채의
처리와
빛, 명암
관계를
조화있으면서도
대담하게
나타낸
것은
상당히
명쾌한
느낌을
주며, 뭉크의
작품들
중에서
보기
드물
정도의
선명한
색
감각을
발휘
하고
있다. 원근법을
강조하였으며
비스듬히
놓여진
다리와
난간에
나란히
서
있는
소녀는
단순화의
형태를
보여
주며, 동감(動感)과
리듬을
화면에
도입시켜
구성하고
있다. 뭉크는
자연을
주관적
분위기에
의한
반영으로
보았으며, 낭만적인
자연
속의
인간의
무의미를
투영하려
했다. 곡선적인
요소를
강조하면서도
필세는
간명(簡明)한
것이
특징이다. 이
작품
외에도
판화로도
표현시키고
있는데, 구도는
거의
같으나,
좌우가
완전히
반대로
된
동판화 <선창의
소녀(1903 년)>와
같은
제명으로
된
목판화
(1920년)가
있다. 뭉크는
판화를
유화에
필적(匹敵)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중요시
하였다.
The Dance of Life, 1899~1900
사랑과
죽음을
주제로
한
연작을
통하여
예술적
생명성을
나타내려
노력하였는데,
1894년
스톡홀름에서,1895년
베를린에서
사랑
연작을
발표한
후 1902년
베를린
분리파
전시회에
출품한
일련의
작품을
통해 <생의
프리즈>연작으로
확대되어
발전
한다. 이
작품
역시
사랑과
죽음을
바탕으로
그의
체험적
심성(心性)을
표현한
것으로
내부적
사고 (思考)에서
생겨난
것이다. 뭉크는
여자를
세
가지
상(像)으로
보았는데
꿈꾸는
여인, 삶을
갈망하는
여인, 체념하는
여인의
상으로서
여기에서
표현되어진
여인들을
통해
생명의
기쁨과
슬픔을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
매월 6월 23일마다
개최되는
하지제(夏至祭)의
무도회에서
느낀
것을
시도한
것으로써
인물의
대담한
배치, 색채의
강렬함, 해안선을
통해
나타난
강직함은
생명감이
충만하다.
이
작품은
뭉크의
작품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보이고
있으며
뭉크의
인생관을
응축시키고
있다. 여름
밤의
해변에서
사람들이
춤을
추고
있는데, 왼쪽의
흰색
옷의
여인은
인생의
가능성과
기대를
상징하고, 가운데서
춤을
추고
있는
사람들은
사랑의
기쁨을
나누며, 무표정하게
굳은
얼굴로
서
있는
검은
옷의
여자는
지나간
과거를
되돌
아
보고
있다.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느끼는
감흥이라
하겠다.
Four Girls at Asgardstrand, 1902
Girl on a Bridge, 1905
뭉크는
고독과
절박한
심정을
거칠게
표현한 <절규>로
가장
유명하지만, 차분한
작품들도
그
작품만큼이나
흥미롭다. 수정처럼
맑은
빛에
모든
색채들이
더욱
선명해
지는
북유럽의
빛은
여름은
덧없음을
표현하기에
적합하다.
이
작품의
밝게
정지된
순간은
여름, 아름다움, 젊음, 충만한
인생이
획획
사라져가는
것들임을
일깨우고
있다.
Self Portrait with a Wine Bottle, 1906
마라의
죽음, 1907
9년의
세월이
걸려
완성된
이
작품은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처럼
역사적
사건을
위해
그린
것은
아니다. 사랑과
죽음, 여자와
죄
그리고
죽음을
주제로
한
것일
뿐이다.
가운데
서있는
암살자는
그의
애인
튤라
라르슨을
죽은
남자는
뭉크
자신을
모델로
하였다. 뭉크는
자신과
애인의
관계를
그림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였다.
Death of Marat,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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