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미술사 참고자료/야수파와 입체파

서양미술사50 야수파

AH101 2012. 2. 16. 21:53
반응형

   

Download #1 : matisse3.jpg (42.0 KB), Download : 0

- Download #2 : matisse1.jpg (43.0 KB), Download : 0

   

   


21.
야수파(野獸派, Fauvisme)

Self-Portrait, 1906/Henri Matisse

야수파(Fauvism) 20세기가 시작되고 나서 현대미술의 번째 장을 미술
운동이다. 1899 앙리 마티스를 중심으로 일기 시작한 운동은 화가의 주관이 강조
되며, 색채의 해방이라는 슬로건에 맞게 자유분방한 붓터치와 색채의 자율성을 추구하여,
강렬한 원색의 과감한 사용을 통해 외부 세계에 대한 감성을 표현하였다.
입체파가 형태의 자율성을 주장하였다면 야수파는 임의의 선택에 의한 색채를 통해 작가
감정을 표출하면서 화면 전체의 장식적 효과를 나타내고 추상으로 나가는 본격적인
시도로서, 색채의 추상성을 선도하고 있다.

주정적(主情的) 경향을 대표하는 야수파 운동은 엄밀한 의미에서 강령과 이념을
가지고 출발한 유파라기보다 인상파나 신인상파의 타성적인 화풍에 반기를 젊은
작가들의 일시적인 만남에서 형성되었다. 통설로는 당시 미술평론가 루이 복셀이
1905
살롱 도톤(Salon d'Automne) 출품되었던 마르케의 15세기풍의 청동
조각을 보고 "마치 야수(포브) 우리에 갇혀 있는 듯한 도나텔로(르네상스 초기의
이탈리아 조각가) 같다"라고 평한 데서 포비슴(Fauvism)이라는 명칭이 생겼다 한다.
그러나 마티스 부인과 복셀 등의 증언이 모두 달라 유래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1905 《일뤼스트라시옹》지() 11 호에 당시 살롱 도톤의 회장을 야수의
조교사에 비유한 풍자화가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이해 가을에는 '포브'라는
명칭이 사용되었음을 있다.

운동의 동인은 국립미술학교 구스타브 모로의 문하생이었던 앙리 마티스, 알베르
마르케, 조르주 루오, 앙리 망갱 등과 보나-엘의 교실에 있었던 라울 뒤피, 그리고
모리스 블라맹크, 앙드레 드랭, 키스 동겐, 장퓌이 에밀 프리에즈 이었으며
큐비즘 창시자의 사람인 조르주 브라크도 1907 살롱 도톤에서 이들과 관계를
가졌다. 이들 가운데 마티스가 지도적 역할을 했으며, 새로운 회화를 지향하는 같은
세대의 공감을 얻었다. 특히 1901 베르넴 화랑에서 개최된 고흐전과 모로의
자유로운 회화 교육은 야수파 운동의 계기가 되었다. 이들의 제작 태도에는
마티스와 마르케가 같은 모델, 같은 모티프를 동시에 그린 것과 같은 공통점이 많았다.
야수파의 자연발생적인 집단의 형성과 그들의 주정적인 체질은 같은 시대에 나타난
입체파의 주지적인 경향과 대립하였다. 마티스는 1908 《그랑드 레뷔》지에
야수파의 논리적 주장을 펴고 있었으나 때는 이미 집단이 해체된 뒤였다.

1905
년부터 1908년까지의 작품을 보면, 이들은 아카데미즘에 대항하며 인상파 이후
새로운 시각과 기법을 추진하기 위해 순색(純色) 구사하고 빨강·노랑·초록·파랑
등의 원색을 굵은 필촉을 사용하여 병렬적으로 화면에 펼쳐 대담한 개성의 해방을 시도
하였다. 새로운 색의 결합에 대한 기본적인 의도 때문에 이를테면 공기·수목 등에 붉은
색을 사용하는 전통적인 사실주의의 색채 체계를 완전히 파괴했으며 명암·양감 등도
파기하였다. 격렬한 정신의 표현과 강렬한 색채는 고흐의 작품에서 강한 영향을 받았
으나 그림이 대상으로부터 독립된 색과 형에 의한 하나의 조형질서임을 확인시킨 점에서
고갱과 나비파의 회화관에 연결되어 있다. 순수한 색채의 고양(高揚) 기초를
야수파 운동은 결국 외계질서를 그대로 화면에 재현하려는 것이 아니라, 화폭을 자기
해방의 장소로 생각한 색과 형의 자율적인 세계를 창조하려 등에서 20세기
최초의 예술적 혁명이었다. 명확한 이론이나 목표를 갖지 않으면서도 포괄적이고 오히
개성적인 자아 표출에 공통점을 가지는 야수파 운동은 1905년부터 1907년에 이루
어졌고 1908 경부터 이들은 각자의 방향을 독자적으로 전개시켜 나갔다.

Self-Portrait, 1918

1869 프랑스 동북쪽에 있는 카토 칸브레지 지방의 중류층 가정에서 태어난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1869~1954)
뒤늦게 예술가로서 출발한다.
그는 파리에서 동안 법률을 공부한 법률 사무실의 서기가 된다. 그러던 그는
1890
맹장 수술을 받고 요양생활을 하는데, 회복의 따분함을 잊게 하기 위해
어머니가 선물한 물감 상자가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되었다.
마티스가 미술 학교에서 구스타브 모로를 알게 되고, 모로의 도움으로 1895 화가로서
꿈을 이루게 된다. 1905 인상주의가 잃어버린 구성의 단단함을 그림에 복귀시키
려던 세잔의 영향과 고갱, 고흐의 영향을 받는다. 마티스는 시냑의 분할주의 영향을
계기로 야수파로 가는 정점을 맞이하게 되어 색채가 선으로부터 인위적으로 분리되면서
그림은 상이한 두개의 구성이 중첩된 것처럼 보이게 된다.
1907
년과 1909 사이의 회화 수업에서 그는 학생들에게 색채를 선택하는데 있어서
대상과 그림과의 관계를 생각하기 보다는 '그림 안에서의 색채 간의 관계' 주목해
한다고 권유했다.

야수주의 시기는 마티스 생애에서 아주 잠깐에 불과하지만, 시기의 주관적이고
자율적인 색채의 확립은 야수주의 시기 이후 장식적이고 단순화 되어가는 색채의 길로
접어들도록 해주었다. 1907 이후 마티스의 그림은 야수주의 시기의 거친 터치와
명암이 사라지고 끊임없는 새로운 화법의 실험 결과로 마티스는 마침내 '회화에 있어서
필요치 않은 요소는 해로운 '이라는 신념 아래 단순성을 향해 나아가는데, 이것은
마티스의 야수파적 실험이 야기한 '방법의 순수성' 더욱 단순화된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한편 마티스의 조각은 그의 그림을 통해 있듯이 초기부터 회화와의 연관성을 보여
주며, 시기에 많이 제작된다. 마티스가 처음 조각에 손을 때의 의도는 회화를
위한 보완 정도로 생각했으나 점차 보다 많은 시간과 노력을 조각을 위해서 할애하게
되었다. 마티스는 자기가 만든 소품의 조각상을 회화에 등장시키며 회화에 등장한 소상
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아름다운 장식의 구실을 하고 있다. 그러한 예로 1907년에 제작된
청동 조각상 <잠자는 나부> <푸른 나부>(1906) 변조한 작품으로 <조각과 페르시아
꽃병 >(1908)이라는 작품과, <금붕어가 있는 실내> (1912)에서 등장하며, 1908년에
제작된 청동 조각상 < 흑인 여자> <과일과 청동>(1910) 에서 자연스럽게 장식의
구실을 하고 있다. 알제리와 모로코 여행을 그린 작품들의 주제와 형식을 표현한 오달
리스크와 그가 점차 관심을 갖게 되는 도자기, 직품, 벽지 등의 반복적인 디자인에서
나타난다.

마티스 말년의 가장 주목할 만한 작업은 색종이 꼴라주일 것이다.
직접 색을 오리는 방법은 가위로 소묘를 하는것을 가능하게 하였으며, 선과 색채, 윤곽
선과 표면을 하나로 결합시켰다. 죽기 십년 전부터 백내장 장애로 인해 이젤 위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던 마티스는 대신에 가위를, 튜브 대신에 색종이를
사용해 콜라주의 회화 요소로서 평면적 성격을 부활시켰다.
1947
년과 1951 사이, 방스(Vence)성당의 건축설계와 실내장식은 마티스 예술의
귀결점이라 불리우는 것으로 십자가, 제단,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십자가 안치소, 법의
방스 성당의 모든 것은 마티스에 의해 디자인되었다. 방스 성당은 마티스에게
생애의 완성을 의미하였다.

The Dinner Table, 1897

*자화상, 1901*

1899년에 스승 모로가 죽고, 다음 해에 미술 학교를 그만 두고 카리에르의
화숙 (畵塾) 다니면서, 그림을 그리면서 드랑과 비에트와 가까워진다.
그리고 화상 보라르로부터 세잔의 작품 < 浴女> 사서 간직한 것도 이때이다.
그가 31살이 되던 해의 작품으로, 정기(精氣) 넘치는 자화상이다.
명쾌한 필치와 색채의 미묘한 뉘앙스, 명암의 적절한 배분 종래의 고전에서 배운
화법에서 차츰 탈피하고, 단순하고 명쾌한 색면에 의하여 화면을 구성하는
마티스의 조형적 의지가 향하고 있는 방향을 납득할 있게 하고 있다.
얼굴의 처리는 코를 중심으로 좌우로 나눠 명암의 표현 의도에서가 아니라, 색채
자체의 가치를 발현한 하다. 상체의 하얀 셔츠 위에 여러 가지색 터치를 것은
색채 자체의 언어를 암시한 것으로 보인다.

*사치 평온 쾌락*

1900 이후 마티스는 지중해안의 밝은 광선에 강하게 끌리고 있었다.
신인상파의 지도자 시냑이 있는 트로페와, 스페인의 국경 지대에 가까운
지중해안의 마을 코리우르에 드랑과 함께 체재한 마티스는 그의 화면 색채에
있어 눈부시게 명쾌한 혁명을 가져오는 계가가 이루어졌다. 많은 포비즘의
회화는 인상파적인 전통을 이어 받아 현실 세계의 환희를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다. 작품은 1904 트로페에서의 스케치를 바탕으로하여 제작한
신인상파의 점묘 화법을 활용한 것으로, 그의 작품 발전에 있어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는 유명한 수작이다. 풍경에 인물을 배치한 구도는 시냑이나 크로스의
작품, 세잔의 <水浴圖>, 혹은 샤반느의 <행복한 나라> 등에서 영향을
받았으리라고 지적되고 있다.

*A Glimpse of Notre Dame in the Late Afternoon, 1902*

Carmelina, 1903

Open Window, Collioure, 1905

Woman with Hat, 1905

*Portrait of Andre Derain, 1905*

마티스가 드랑을 최초로 알게 것은 국립 미술 학교를 그만두고 그가 서른
살이 되던 (1899) 아카데미 카리에르에 나가면서였다.
1905
여름을 스페인의 국경지대의 지중해안에 있는 어촌 코리우르에서
함께 지내면서 포비즘의 꽃을 피우고 많은 작품을 제작했다.
그들은 거기서 서로의 초상도 그렸는데, 마티스는 작품에서 드랑을 젊고
생기 넘치는 동료로 표현하였다. 초상에서 그는 그늘 부분에도 어두운
색을 넣지 않고 동일 색가(色價) 대립되는 색을 놓아사물의 명암이 아닌
색과 색의 관계를 형성하는 색채적 구성으로서의 색면으로 표현했다.
배경의 색도 이등분되어, 그것은 주황, 노랑, 빨강의 주제가 가지고 있는
색과의 대비적 효과로서의 보색 관계를 형성하려는 것이다.

*Green Stripe (Madame Matisse), 1905*

마티스는 1905 <모자를 여인> <> 살롱 도똔느에 출품하고
이어서 작품은 전시 기간 중에 그렸다. 출품했던 작품들은 색채의
향연이라고 있을 만큼, 자발적이고 다채로운 초기의 포비즘적 경향인데
이로써 당시 포비스트들이 살롱에 첫인정을 받는 기회도 주어졌다.
그러나 작품은, 상당히 억제된 수법으로 화면을 구축적으로 완성하고 있다.
강렬하고 화려한 색채를 교묘한 밸런스에 의하여 구사한 작품에 있어서
마티스는 그가 단지 감각적인 색채가 아니라, 색채에 의하여 건실한 화면을
구성하는 화가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색채의 단순하고 평탄한 색면에
얼굴은 중앙의 녹색 가르마를 중심으로 양쪽을 구분하고, 경쾌한 터치에
의하여 단숨에 완성한 듯한 생생함을 지니고 있다.
그림이 완성되었을 비평가는 물론이고 부인까지도 불쾌함을 느꼈던
작품이며, 마티스는 심리적인 주관으로 색을 표현하고 있다.
그림을 사람들이 마티스에게 '부인을 아름답게 그리지 않았나?'라고
묻자 그는 '나는 작품을 통해서 아름다운 부인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림을 그렸을뿐이라고' 말했다.

*Le bonheur de vivre (The Joy of Life),1905~06*

작품은 마티스가 완성한 그림 가운데 통찰력과 영향력이 가장 뛰어난
작품이었다. 원래의 구상은 전해 1905 여름 콜리우르에서
자연을 연구하던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듯하다.
공간 구성으로는 대각선보다 전면을 강조하고 있으며, 공간 비율은 훨씬
대담하고도 자유롭게 다루어졌고, 분위기를 자아내기 위해서 모자이크와
스타카토식으로 조각난 붓질에 주력하기보다는 평면적인 색면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마티스의 예술은 양식과 주제의 조화를 이룩했고, 그에 따라
장식적인 양식의 대작을 만들 있는 미술가로서의 독자적인 지위를
확립했다. 거기에는 벌써 건축적 조형에의 열망이 비치고 있다.
그때까지 시도했던 작품 가운데서 비교할 없으리만큼 컸던 화폭(세로
1.7m,
가로 2.3m) 구도는 균형과 명쾌한 기법의 본보기였다.
그리고 농밀한 색채는 억제되어 전통적이고 목가적이라는 거룩한 주제에
대한 예술가의 정서적 반응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것은 지성에 의해 누그러진
정서이기도 하다. 작품은 구도는 단순하면서도 윤택하고, 차분한
분위기는 그의 스승 귀스타브 모로의 고뇌에 차고 불확실한 환상들을
바로잡아 주는 듯하다. 한편 일련의 통일된 몸짓으로 그에 앞서 여러 동안
그의 작품 속에 도사리고 있던 내적인 긴장과 갈등을 풀어준다.
역설적이게도 여기서 핵심이 되는 것은 작품이 보기 드문 크기였다는데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삶의 기쁨을 계기로 작품의 크기만으로도 인물의
장식적인 자태를 표현할 가능성이 열렸다.

*The Red Madras Headress (Mme Matisse: Madras Rouge), 1907*

The Blue Nude(Souvenir of Biskra), 1907

Le luxe (I), 1907

*The Girl with Green Eyes, 1908*

1908 이후의 마티스 작품은 필요없는 세부 묘사를 완전히 벗어나서
볼륨이나 명암의 표현에 마음을 쓰지 않는 단순한 수단에 의한 표현에
정진한다. 화려한 , 호화로운 것을 추구하려고 , 마티스는 멈출 줄을
모르는 관능(官能) 기쁨에 빠진다. 그것이 틀림없는 하모니에 이를 때까지
계속된다. 지극히 관능적이고, 동시에 조금의 틈도 없는 구성이 마티스라는
화가의 특성을 이루게 된다.
작품도 그러한 그의 특성을 나타내는 작품으로, 인물을 중심으로
얼굴과 배경을 형성하고 있는 위쪽 화면과 아래의 화면이 양분되고
아래쪽은 오른쪽과 왼쪽을 나누어 호방한 색으로 처리하고 있다.
얼핏 보면 조형 요소를 무시한 앞에 있는 인물의 주제와 배경이 서로
맞싸우는 시끄러운 화면 같으나, 그의 '장식' '표현'이라는 2 요소의
결합을 나타내어 주고 있다.

*Harmony in Red/La desserte, 1908*

1907년에서 8년에 걸쳐 마티스는 여러 가지 평면적이고 장식적인
스타일을 시도하면서, <빨간 조화> 작품에서 포브의 스타일에
최종적인 고별을 했다. 그것은 3 차원의 실내 공간을 표현한 것임에도
화면의 거리감은 부정되고 벽고 탁자도 실내의 바닥도, 모두 동일의 평면
위에 놓여 있다. 탁자 위에만 있어야 식탁보의 무늬가 그대로 벽지의
무늬로 연속되고, 색채도 음영이나 명암은 거부한 색종이를 발라 놓은
단순한 평면으로 되어 있다. 이런 일은 19세기적인 미학으로 보면
하나의 혼란으로 보이겠지만, 평면적인 이론에서 말한다면 훌륭하게
통일된 명쾌한 화면이라고 있다.
작품은 처음에 <초록의 조화>였으나, <파라의 조화> 변경되고
다음 해에 다시 <빨간 조화> 되었다.

Greta Moll, 1908

Bathers by a River, 1909, 1913, and 1916

* Dance (I), 1909*

마티스의 작품 속에서 색채는 춤을 춘다. 마치 무한한 생명을 갈구하는
힘찬 몸짓으로 춤을 추고 있는 사람들. 그림은 모스크바에 있는 저택의
계단을 장식하기 위해 그려진 것으로 활기 있는 생명감이 넘치는 대작이다.
그의 <음악>이라는 작품과 함께 러시아의 무역상인 시츄키의 의뢰에 의하여
그려졌다. 모스크바에 있는 저택의 계단을 장식하기 위하여 그려진
으로서, 활기 있는 리듬과 생명감이 넘치는 대작이다. 극도로 단순화된 푸른
하늘과 언덕의 초록으로 색면 대비를 이룬 배경 속에 다섯 명의 춤추는
댄서들이 손을 마주 잡은 형태는, 생명적인 무한을 갈망하는 암시적 무희로서
화면에는 유동하는 활기로 있다. 그것들은 마치 아라베스크 무늬로 화면
전체를 꿰뚫는 어떤 생명적 통일의 리듬을 시각화하고 있다.
색채는 단지 세가지로, 격렬함과 풍부함을 가지고 있어, 마티스 자신이 '나의
파랑과 빨강과 녹색의 조화는 충분히 스펙트르와 등가(等價) 것을 만들어
낸다.'라고 말할 정도이다.

Still Life with Blue Tablecloth, 1909

*Music, 1910*

위의 그림 <> 함께 원래 벽화로 제작된 그림들은 상당히 스케일이
작품이다. 얼핏 보았을 이것들은 아주 쉬운 그림처럼 보인다.
주제도, 기법도 너무 단순해 보인다. 그런데 단순한 그림들이 우리를
춤과 음악이 시작된 옛날로 데려가 주는 같지 않는가?
혹은 춤과 음악이라는 본능적이고 순수한 행위를 다시금 일깨워 주는
같지 않는가? 우리를 어떤 단일하고 근원적인 경험으로 인도한다는 점에서
마티스의 <> <음악> 원시주의적이다.

*Conversation, 1910*

잠옷차림의 마티스와 실내복을 입고 있는 아내가 마주보고 있는 장면을 그린
일종의 자화상이다. 여기서 지배적인 것으로 보이는 남편은 높은 위치에
그리고 뻗은 그림밖으로 까지 솟아 있는 반면, 낮은 위치의 아내는
의자안에 자루같은 가운에 휩싸여서 매우 수동적으로 보인다.
밖에 있는 배경과도 일치해 남편은 나무와 아내는 연못과 매치된다.
곧게 뻗은 나무에 비해 3개의 연못은 모두 잘린채 보인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난간의 곡선이 no라고 얘기하고 있다.
마치 부부가 서로에게 no라고 하듯이. 결국 대화이지만, 서로가 거부하고
있는 대화이다. 매우 강하며 익살스러우며 진지한 그림이다.

*The Red Studio, 1911*

마티스의 화실 풍경이다. 온통 빨간색인 것은 순전히 회화적인 효과를 위한
것이다. 앞서 <붉은 조화> 생각날 것이다.
거기서와 마찬가지로 그림에서도 어디까지가 벽인지 바닥인지 얼핏 봐서는
수가 없다. 물론 방의 3차원적 구조와 식탁의 존재를 암시하는 어렴풋한
선이 있어서 방의 구조를 알아보는 것이 어렵진 않다. 벽에는 온통 마티스의
그림이 있다. 조각도 더러 보인다. 마티스는 자신의 그림에 나오는 것과 비슷한
인물들을 조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아래의 조각을 보라. 마티스의 화실 오른쪽
구석에 있는 청동 조각처럼 보이지 않는가?
식탁위엔 도자화도 보인다. 이런 모든 대상들이 마치 하나의 붉은 평면 위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마티스는 이런 순수한 공간의 유희를 즐기고 있는 것이다.

*The Painter's Family, 1911*

*마닐라 쇼올을 걸친 마티스 부인, 1911*

마티스는 1906년경부터 번에 걸친 아프리카 여행에서 아라베스크
무늬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고, 차츰 그의 내면 속에 근동취미(近東趣味)
엑조티시즘을 크게 자극하였고, 그것이 색채의 단순화를 통하여 장식성을
달성하게 된다. 작품도 그러한 장식적인 무늬의 호화로운 쇼올을 화면
중앙에 클로즈업시키고, 단순한 배경 처리를 했다. 누구에게나 주어져 있는
색채가 마티스의 손에서는 놀랄 만큼 맑은 해조를 가진 울림으로 변해
버리는 것이다. 그는 색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
색채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그것이 무엇보다도 표현에 쓸모 있게 되는
것이다. 나는 아무런 선입견을 갖지 않고 색을 캔버스에 놓아 간다.'
마티스 부인의 그림자가 위에 얼마나 맑은 청색으로 놓이고 있으며
그것으로 인하여 화면을 얼마나 투명하게, 화려하게 하고 있는지
있는 작품이다.

*Seated Riffian (Le Rifain assis), 1913*

*검은 배경의 독서하는 여인(Reader on a Black Background), 1914*

1914년경부터 마티스가 종종 써오던 검정색이, 작품에 와서 가장
풍부하게 검정색의 가치를 발휘하고 있다. 화면 전체를 검정색으로
채우고, 여기 저기에 필요로 하는 형태와 색을 알맞게 배분하여 정말
격조 있는 회화적 효과를 이루는데 성공하고 있다.
중앙에 초록, 보라, 노랑색들이 검정과 흰색이라는 무채색과 절묘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왼편 아래쪽에 독서하는 여인의 아름다운 주홍색을
중심으로 금빛 노랑과 분홍색은, 대담하게 평면화된 담백한 형체와 함께
호화로우면서도 우아한 맛을 준다. 완전히 평면화된 화면이면서도 거울에
비친 여인의 모습이 그려져 공간의 깊이를 느끼게 마티스의 회화적인
기량에 다시 놀라게 되는 작품이다. 추상적인 공간 구성과 설득력
있는 구상적 주제와 멋진 화합이다.

The Music Lesson(La lecon de musique), 1917

My Room at the Beau-Rivage, 1918

Plaster Torso and Bouquet of Flowers, 1919

*Woman Before an Aquarium, 1921~23*

*Odalisque with Red Culottes, 1921*

앙리에트 다리카레르가 오달리스크를 위한 모델이었다. 책임감이나
결과를 생각하지 않는, 욕망의 대상일 뿐인 여인의 이미지는 일종의
신비감을 불러 일으킨다.

*Odalisque with Magnolias, 1923/24*

*모르풍의 가리개와 젊은 여인들. 1922*

작품은 호화스러운 장식의 극치이다. 그의 화가노트에서 말한 '균형과
순수함과 조용함의 예술' 마티스는 작품에서 달성한 듯한 느낌이다.
부자집 실내를 야하지도 않고 부담감도 주지 않는 안정되고 편안한
분위기로 만들고 있다. 화려한 실내의 분위기에 맞추어 부드러운 흰색
드레스를 입은 여인의 느슨한 화제는 서로의 행복한 로맨스라도
이야기하는 듯하다. 배경에 있는 모르풍의 가리개는 마티스가
1912
년에서 13년에 걸쳐 체재한 모로코의 항구 도시 탄지르에서 사온
것이 아닌지. 마티스는 탄지르의 화려한 색채와 이국 정서에 1세기
전의 들라크로아처럼 매혹 되었다. 그의 오달리스크를 주제로 작품과
함께 작품에서도 모로코 체험의 여운을 나타내고 있다.

*Decorative Figure on an Ornamental Ground, 1926*

작품은 니이스에서 지중해적인 밝은 광선과 색에 도취하여 그린
'
평안과 우아의 예술' 위한 그의 작풍(作風) 이루는 그림이다.
여인의 몸매는 직각이 서로 교차하는 직선을 중심으로, 견고하고 힘찬
형태로 그리고,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화면은, 그가 좋아하는 장식적 요소를
가득 채워 호화스럽고 사치한 조용함이 있는 기념적인 아름다움을 이루어
놓았다. 작품에 있어 그는 확실히 새로운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힘과 장대(壯大)함의 세계에 새로운 창이 활짝 열린 것처럼 눈부신 광경을
이룬다. 바닥에 놓인 카페트의 비스듬히 그어진 직선의 연속은, 벽에 장식된
꽃무늬와 아라베스크의 선과 충돌되는 듯하지만, 대조가 한층 마티스가
노리는 장식적 효과를 더해 주고, 더욱 힘있는 화면 효과를 이루게 하고 있다.

Odalisques, 1928

Large Reclining Nude / The Pink Nude, 1935

*Femme au manteau violet (Woman in a Purple Coat), 1937*

화면이 강한 생명력에 넘치는 리듬으로 가득 있다. 역시 작품에서도
마티스가 만년에 집념적으로 다루던 조형 요소와 제재가 모두 총합되어 있다.
그것은 꽃과 화려한 미녀, 그리고 오달리스크 즐겨 택해 제재들을
직선과 곡선, 점들을 익히 써온 아름다운 색들에 의하여 그림속에 총합적
으로 다루어, 창조적인 작품을 만들어 놓았다. 마티스가 간직하고 있던
생명에의 외경심을 경건한 자세로 찬탄한 것이 그의 만년의 작품에 간결하게
또는 힘차게 표현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은 감동적이다.
작품에 있어서도 여인의 육체를 흐르는 생명적인 율동감 그리고 지금
피면서 꽂힌 듯한 싱싱한 꽃들, 그것을 받치고 있는 리드미컬한 형의 꽃병
등이 화면에서 생기 발랄하게 생명의 찬가를 부르는 , 싱그럽고 향기롭다.

*Two Dancers (Study for Rouge et Noir), 1938*

*La Musique,1939*

작품은 마티스의 작품 중에서 가장 음악적 대위법(對位法)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제목을 <음악>이라고 했고, 화면에 악보와
기타를 그려 넣은 것은, 연주하며 그것을 즐기는 음악적 주제를 취하기 위한
설정이기는 하지만, 마티스가 작품에서 의도하고 있는 것은 화면에서
연주하고 있는 음악적 설명이 아니라, 초록, 파랑, 빨강, 노랑, 검정색에 의한
그리고 유동적인 곡선 형태와 딱딱한 직선 형태와의 대립을 통한 대비적인
하모니를 화면에 연출하여선명한 음색을 통한 불협화음의 음악적 분위기를
실현하려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화면에는 가냘픔과 연약함이 전연 없다.
더구나 푸른 옷의 기타를 여인의 데포르마숑은 그녀를 의자에서 일으켜 지금
춤을 추게 하려는 , 다리는 춤추는 다리 모양으로 공중에 떠서
움직이는 듯하다. 건강미가 화면에 가득하다.

*루마니아풍의 블라우스, 1940*

얼핏 보면 왼편으로 쏠려 불안한 느낌을 주는 포즈를 그린 같으나, 그러한
포즈가 화면에 긴장감을 조성하고 있다. 아마 의자에 걸터앉은 자세를 그리면서
의자의 등받이를 생략함으로써 느껴지는 불안감일 것이다.
오히려 풍선 같은 블라우스의 부풀음과 함께, 불안감은 유머러스한 맛을 주기도
한다. 블라우스에 그려진 무늬의 인상은마치 여인의 청순한 심성과도 같이 여리고
깨끗하다. 작품은 마티스의 부인상 하나의 정점을 이루는 것으로, 작가는
그림에 압도적인 단순.명쾌를 주입하고, 통일감있는 장식적 평면성을 강조하고
있다. 색조에 있어서도 많은 여러 가지의 색을 쓰면서도 단순하게 느껴지도록
배려했고, 블라우스의 부풀은 어깨나 소매를 처리하는 선은 아주 경쾌한 맛을 준다.
작품을 경지에 가져오기 위하여 마티스는 15점의 습작을 거쳤다.

*The Lute, 1943*

*Icarus (Jazz),1943~44*

서커스나 환상적인 주제들과 관련된 <재즈> 위한 삽화들은 이후의 종이
오려 붙이기 작업들의 구성과 주제에 영향을 준다.
작업은 마티스가 "주제보다는 모리스 드니의 경구인 회화란 분명한 질서로
배열된 색채들로 덮혀진 하나의 평면"이라는 주장에 충실함을 보여주고 있다.
마티스는 작업들에서 장식적인 것의 의미와 그림의 자율성의 이상을
엄격하게 완성하고 있다.

*Circus*

*Destiny*

*The Knife Thrower*

Polynesia, The Sea, 1946

*Two Girls in a Yellow and Red Interior (Deux fillettes, fond jaune et rouge), 1947*

*Interior with an Egyptian Curtain, 1948*

편의 섬세하고 웅장한 교향곡을 듣는, 여러 악기들이 아름답게 노래하고
있는 것과도 같은 작품이다. 투명하여 속에서 빛이 비쳐 나오는 같은
검정색의 바탕에서 꽃불과도 같은 무늬들이 소용돌이치고, 창문에는 가득히
정원을 메운 남불(南佛) 소철나무가 힘껏 생명을 다하여 약동하고 있다.
그러한 평면적인 화면 아래에 원근법이 알맞게 표현된 탁자가 그려져
공간의 깊이를 느끼도록 함으로써 입체와 평면이 서로 도와 단조로움을 면하게
하고 있다. 마티스가 즐겨 써오던 검정색이 작품에서도 아주 효과적으로
성공하고 있다. 테이블 위의 석류 접시 아래의 검정, 오른쪽 커튼의 바탕색
으로서의 검정, 창문 아래위의 벽색으로서의 검정은 모두 동일색이지만, 거기에
놓여진 주변의 유채색에 따라 각각 다른 검정으로 느끼게 작용하고 있다.

*붉은 室內, 1948*

말년에 와서 마티스는 화면 전체의 색을 가지 색으로 통일하여 칠하고
거기에 데생을 하듯 사물의 형태를 그려 넣어 필요한 변화를 주는 수법을
쓰는 작품들을 많이 남기고 있다.
작품도 바로 앞에 소개한 작품 <이집트풍의 커튼이 있는 실내> 같은 해의
작품으로, 검정색의 효과를 빨강으로 바꾸었다.
빨강이 주조가 실내 풍경으로, 테이블이나 의자, 벽이 모두 타는 듯한 빨강
속에 삼켜져 버리고, 마티스의 관능과 정서의 순수한 표현으로 화하고 있다.
뒤쪽 왼편에는 그림 같은 창이 그려져 있고, 오른편에는 자신의 작품
<
파인애플> 창보다 약간 크게 걸려 있다.
그는 종종 자기의 작품을 화면에 등장시켜 새로운 작품 속에서 색다른 어울림을
나타내고 있다. 말년의 그의 작품은 모두 이처럼 커다란 자유 속에서 해방된
조형을 즐긴 흔적을 남기고 있다.

*Blue Nude (IV) Nu bleu (IV), 1952*

슬픔, 1952

마티스의 만년의 작업 중에 그의 색채적 천재성을 자유 분방한 감각과
함께 발휘하게 하여준 것이 <색종이 그림> 시리즈다.
그는 이전부터 유화 제작의 준비 단계에서 포름이나 색을 연구하기 위하여
색종이를 잘라 붙여 보는 일을 해왔으나, 1941년에 병을 앓으면서 침대
위에서 대신 가위를 들고 많은 걸작을 남기게 되었다.
처음에 그는 <재즈> 시리즈의 서커스의 정경을 나타낸 20점의 잘라 붙인
색종이 그림을 만들었는데, 작품은 작업의 절정을 이루는 기념비적
대작이라 있다. 어떤 의미로는 유화보다 순수하게 울려퍼지는 색과
형태의 교환(交歡) 느끼게 하는 이런 방식이 마티스의 이념에 더욱 밀접
하게 맞았는지 모른다.
작품은 농후한 설화를 아라베스크적 색과 형의 드라마로 꾸민 실로 감탄할
걸작이라고 해야 것이다.

*The Snail (L'escargot), 1953*

Portrait of Henri Matisse 1933 May 20

Photographer: Carl Van Vechten

병마로 쇠약해진 노년의 마티스. 하지만 그는 화가로서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기법으로 자신의 예술에 활기를 더했다.
새로운 기법이 바로 종이를 오려 붙이는 기법이었다. 종이 오려 붙이기
기법이란 캔버스에 물감을 칠해서 그림을 그리는 대신 채색된종이로 형태를
만들어서 붙이는 기법을 말한다.

1.
우선 종이에 원하는 색을 칠한다. 마티스는 밝고 선명하고 강렬한
원색을 주로 사용했으므로 종이에도 밝은 채도의 색을 평평하게 칠했다.
물론 미리 어떤 형태의 그림을 그릴 것인가를 생각했을 것이다.
당시 마티스는 '과슈'라고 하는 물감으로 채색했는데, 과슈는 수채화의
일종으로 색조가 선명하고 유화와 같은 윤기가 없어 부드러운 느낌을 주었다.
주로 원색을 사용했던 마티스는 과슈로 강렬하고 선명한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표현해 냈다.

2.
흰종이에 원하는 색을 칠한 후에는 가위로형태를 오린다.
마티스는 이렇게 직접 가위로 형태를 오려 붙이는 작업을 "가위로 하는 소묘"
라고 표현했다. 기법은 그가 1943 재즈라는 책에 삽입할 삽화를
제작하기 위해 사용했지만 기법을 처음으로 사용한 것은 <>이라는
작품을 제작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마티스는 <> 제작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색채 효과를 시험할 목적으로 종이 오려 붙이기 기법을 처음으로 시작
했으나 기법?1943 이후에서야 일반화되어 자체가 독창적인 작품을
창조하는데 사용되었다.

3.
정교한 실루엣으로 그린 형태에 풀을 칠한 후에 붙인다.
비교적 간단한 작업은 작품이 완성된 후에도 즉흥적이라는 특징을 갖게
되는데, 이러한 즉흥성은 사전에 치밀하게 고려된 형태와 색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종이 오려붙이기 기법은 야수차가 지향하던 빛나고 신선한 색채감으로
이어지게 된다. 결국 이것을 통해 마티스는 평면적이고 체계적인 회화 양식
이라는 예술적 이상을 완성해 나갔다.

마티스는 '가위는 연필보다 한층 감각적' 이라고 말하면서 색종이 그림 작업을
계속 했다. 그는 생에 대한 종교적 감정을 나타내기 위해 이와 같은 대작을
제작했는데, 작품은 그랜드 오르간 음악에서 느낄 있는 울림을 자아낸다.
1940
년대부터 계속해 그의 색종이 그림은 기존의 오브제를 화면에 도입한
꼴라쥬와는 다른 단색 과슈를 칠한 종이에서 스스로의 이미지를 오려내어
그것을 풀로 붙여 구성하는 형식이다. 당초 <달팽이> '현실에 뿌리박은
추상적 패널'이라고 이름 붙여 있었다. 색종이의 배열이 휘도는 모양으로
움직여 나가게 하여 달팽이의 껍질을 연상케 하고, 운동은 연속적이 아니라
쉬었다가 움직이고 움직이다가 쉬는 영원한 반복을 상징하는 듯하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