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미술사 참고자료/에꼴 드 파리

서양미술사68 에꼴 드 파리 - 앙리 루소

AH101 2012. 2. 16. 2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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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미술사 - 68(에꼴 파리: 앙리 루소)

   


앙리 루소(Henri Rousseau: 1844~1910)

자화상(Self-portrait of the Artist with a Lamp), 1903

19
세기 말부터 20세기에 걸쳐 미술은 여러 유파가 흥망성쇠의 역사를 거쳐왔다.
어지러운 흐름 속에서 어떠한 유파에도 속하지 않고, 시대와 무관하게 자기 세계에
들어앉아 일요화가(日曜畵家) 문외화가(門外畵家)라는 멸시적인 호칭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고독한 길을 걸어온 예술가들이 있다.
프랑스의 앙리 루소, 앙드레 보샹, 카미유 봉부아, 벨기에의 레온 그레프, 그리스의
데오필로스, 프랑스 여류 화가인 S.루이스, 미국 여류화가 G.마모제 화가들을
총칭하여 나이브 아티스트(Naive Artise), 또는 소박파(素朴派, Naive Art)
라고 부른다. 명칭은 다만 편의적인 것에 지나지 않고, 화가들 사이에 어떤
공통된 장이 있어서, 유파로서의 형체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고전적이고 아카데믹한 기법을 무시하고 원시적인 방법으로 밝은 색채를 써서, 일상적
풍경 등의 주제를 순진하게 표현하였다. 작가들의 순진함과 즉흥성, 독립성 등이
소박파 미술의 특성이다. 이들은 각기 어떤 직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대부분 정규 미술
교육을 받지 못하였다. 따라서 미술의 양식문제에 구애되지 않는, 자연과 현실의 시각
적인 대상에 대하여 경건할 만큼 소박한 태도로써 건강한 리얼리즘을 예술의 기초로
삼았다는 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들은 현대미술의 문외한이며 아웃사이더라고
있다. 그러나 일찍이 1900년대의 큐비즘(입체파) 발상에 흑인 조각의 소박성이
영향을 끼친 바와 같이, 나이브 아트도 역시 현대미술의 저류에서 건전한 이미지의
보급원(補給源) 이룬다고 있다.

앙리 루소(Henri Rousseau:1844-1910) 프랑스 마옌현() 라발 ,
가난한 함석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파리 세관에 세관원으로 근무하면서 독학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선량한 일요화가로 알려져 두아니에(Le Douanier:
세관원) 애칭을 얻게 되었다. 그의 나이 42, 1886 후기 인상파 전람회에 작품
<
사육제의 > 등을 출품하면서 화가의 인생을 출발하였다. 그의 작품은 사실과
환상을 교차시킨 독특한 것이어서 초기에는 사람들의 조소를 받았다. 그러나 1891
경부터 이국적인 정서를 주제로 다룬 《경악(驚愕: 숲속의 폭풍)(1891), 《잠자는
집시 여자》(1897), 《뱀을 부리는 여인》(1907), 《시인의 영감》(1909) 창의에
넘치는 풍경화, 인물화를 그렸다. 이들 작품에는 순진무구한 정신에 의해서 포착한
소박한 영상이 참신한 조형질서에 따라 감동적으로 나타나 있어 현대의 원시적 예술의
아버지라 불릴 있는 하나의 전형(典型) 엿볼 있다. 1905 경부터 피카소,
아폴리네르, 우데 등이 그의 작품에 주목하여 평가하기 시작하였으나, 그에 대한 실질적
평가는 그의 사후에 이루어졌다.

도식적인 기성의 권위를 거부하는 새로운 물결, 물결에 편승하여 일어난 수많은
사조, 이즘의 홍수, 이론의 난류, 유파의 격랑이 예견되는 대전환기에 루소는 푸른 꿈의
이미지에 소박이라는 색다른 옷을 입고 홀연히 나타나, 고향을 그리워하는 원시 회귀의
인간 본능을 자극했다. 루소의 회화 언어는 시대의 시대 감각의 과녁을 맞춘 위대한
환상의 화살이고, 그의 발언은 고향을 찾는 실향민들의 전설적인 외침이며 그의 표현
양식은 시인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처럼 이미지의 밀림이라고 말할 있다.

A Carnival Evening(사육제의 ), 1886

루소의 초기 작품 중의 하나이면서 1886 앙데팡당 전에 출품한 작품이다.
하늘에 휘영청 달빛은 밝고, 검은 나무의 그림자는 사방을 감싸며 조용한 밤의
분위기가 흐른다. 카니발에 나가면서 입던 무복(舞服) 그대로 입은 젊은 연인은
손을 잡고 깊은 연정을 나눈다. 화면 전체가 검푸른 청색과 검은 색으로 메워져 있으나
달빛과 남자의 유니크한 옷은 우리에게 청아(淸雅) 감정을 준다.
아마 여자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루소의 애인인지도 모른다.
지나간 나날의 정겨웠던 회고록이 화면에서 스며 나오는 하다.

Rendezvous in the Forest, 1889

자화상(Myself, Portrait-Landscape), 1890

제목의 뜻은 자화상 배경에 풍경이 보인다는 뜻이다. 그림은 1890년에 그린
으로 루소 나이 44 때이고 아직 세관직원으로 재직하고 있을 이지만, 그는 화가
로서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그렸다. 배경은 1889 만국박람회 때의 파리 풍경
이다. 세느 강변에 만국기를 배가 있고 에펠 탑이 멀리 보인다. 하늘에는 오색의
구름이 춤을 추듯 흐르고 기구도 있다. 손에 들고 있는 팔레트에는 죽은 애처
크레망스와 조세핀느의 이름이 있으니 애환이 교차된다고나 할까.
새로운 과학의 경이와 더불어 이국적 풍물이 공존하는 만국박람회는 현실과 꿈을
낳게하는 루소의 회화 세계와 서로 공통되는 점이 많았다.

Surprise!(밀림의 폭풍), 1891

루소가 이국 풍경 시리즈에서 처음 그린것은 1891년의 작품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이국적인 식물들도 보면 보통 우리 주위에서 있는 것과
차이가 없다. 어떤 연구자의 조사에 따르면, 그것들은 모두 프랑스에서 있는
식물들이며 열대식물이 아니라고 한다. 루소의 상상력의 산물이며, 단지
장의 잎을 공들여 그려 놓은 루소의 특이한 화법이 전체에 기묘하기까지 비현실적
분위기를 주고 있을 뿐이다.

War, or Discord on Horseback, 1894

Portrait of a Woman, 1895

Portrait of a Woman, 1895-97

The Sleeping Gypsy(잠자는 집시 여자), 1897

회화의 역사에는 때로 기적이라고 수밖에 없는 이상한 일이 일어나곤 하다.
양식의 발견이라든가 시대의 동향 과는 전혀 무관하게, 생각지도 못한 걸작이 마치
다른 별에서 것처럼 갑자기 우리 눈앞에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1897
파리의 앙데팡당전에 출품되었던 앙리 루소의 《잠자는 집시 여자》가 그런
경우다. 물론 현재의 시점에서 되돌아보면 당시의 흐름 속에서 루소의 위치를 역사적
으로 규정할 없는 것은 아니다. 미술사학자들은 루소를 '소박파'라고 분류하고,
나아가 《잠자는 집시 여자》에게 직접 힌트를 주었으리라 생각되는 선례까지 찾아
냈다. 그러나 그림 앞에 서면 그러한 종류의 설명은 전혀 무력하게 여겨진다.
우리는 꿈이라고도 현실이라고도 없는 괴상한 세계로 끌려 들어가고 평소의
일상적 감각은 완전히 침묵해 버린다. 뛰어난 예술 작품이라는 것은 많든 적든 보는
사람에게 그러한 효과를 주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림에서 받는 인상은 너무나
현실에서 떨어져 있고 더구나 이상할 만큼 생생하다.
그림 앞에 멈춰 서서 마력에 빠진 후에는 주위의 현실 세계 쪽이 오히려 덧없어
보일 정도다.

장면은 창백한 달빛에 비친, 지구상의 어디인지도 없는 사막이다.
배경 역시 창백하게 빛나는 깊은 호수(강인지도 모른다) 보이고, 너머에 어떤
인간도 일찍이 오른 적이 없을것 같은 이상한 위용을 보이는 산맥이 솟아 있다.
얼른 보기에 인간의 세계로부터 떨어진 두려울 만큼 씁쓸한 장소다.
아마도 뒤에 텍쥐페리의 어린 왕자가 내려온 곳이 이런 사막이었을 것이다.
사막의 모래 위에, 지팡이를 손에 짚시 여자가 만돌린을 옆에 놓고 조용히
자고 있다. 그녀의 옷에는 빨강, 파랑, 노랑, 녹색, 주황 모든 화려한 색의 줄무늬
있는데 달빛을 받아 마치 무지개처럼 밝게 빛난다. 그녀의 튼튼한 오른팔은
빛나는 줄무늬를 가로지르며 위에 놓였고, 손에는 소중한 지팡이를 쥐었으며,
다른 팔은 마치 달빛에 녹아 버린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머리맡에는 악기 외에 질항아리가 하나 놓여 있다. (루소 자신의 설명에 따르면
항아리에는 집시 여자가 마실 물이 들어 있다고 한다.) 고요하게 잠자는 집시
여자 뒤쪽에서 갑자기 사자 마리가 나타난다. 달빛에 갈기와 눈을 금색으로 번쩍
이면서 사자는 꼬리를 집시 여자 쪽으로 얼굴을 들이밀고 냄새를 맡고 있는
, 그러나 별로 해를 입히려는 같지는 않다.
어쨌든 얼굴 바로 옆에 맹수가 있는데도, 집시 여자는 불안한 기색도 없이 편안하게
자고 있다. 루소는 현실에서 있을 없는 이러한 정경을 세부까지 꼼꼼히 그리는
소박한 화풍으로, 더구나 아주 대담한 구도로 재현하고 있다.
대체 루소는 이그림을 그리면서 무엇을 꿈꾸었을까.

그려진 내용이 신비적일 뿐만 아니가 작품 자체도 이상한 길을 걸었다.
1897
앙데팡당전에 출품되었는 그림은 대부분의 사람들로부터 심한 조소와
비난을 받았다. 어떤 비평가는 일부러 이상한 그림을 그려서 주목을 받으려 하는
안이한 작태라고까지 말했다. 그러나 무슨 말을 듣더라도 루소 자신은 작품에
깊은 애착과 상당한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루소의 고향인 라발 시의 문서 자료에는
루소가 1989년에 시의 시장에게 보낸 편지가 남아 있는데, 루소는 거기에서
그림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1,800프랑이나 2,000프랑에 라발 시에서 그림을
사들이지 않겠느냐고 부탁하고 있다. 당시 루소는 두번 아내가 조세핀 누리
사귀게 되어 여러 가지로 돈이 필요했을 것은 분명한데, 그러나 '기념하기 위하여'
고향 마을에서 사주었으면 좋겠다고 요청한 것을 보면 스스로 그림에 상당히 만족
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어찌 됐든 작품에 대한 라발 시장의 의견은
루소의 생각과는 같지 않았다. 지금이라면 세계의 어떤 미술관이라도 기뻐서 펄쩍
루소의 요청에 대하여, 라발 시는 공식적으로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작품은 행방을 없게 되었다.
당시 루소의 대작을 사려고 하는 괴짜는 없었을 것이므로, 라발 시가 사들이지 않았
다면 당연히 작품은 루소의 손에 있었겠지만 적어도 그후 《잠자는 집시 여자》에
관한 증언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세기가 바뀌고 큐비즘 세대의 화가들이나
아폴리네르와 같은 시인들이 루소에게 깊은 경의를 바치게 후에도 아무도 작품
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1910 루소가 세상을 떠났을 《잠자는
집시 여자》는 아틀리에에 있지 않았다. 우리는 20세기 초의 20 동안 그녀가
어디에 있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잠자는 집시 여자》가 다시 홀연히 나타난 것은 1 세계대전이 끝난 후의 일이다.
그것이 어디에서 나타났는지에 관한 기록도 없다. 내력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1897 앙데팡당전에서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루소의 작품이 아니라 가짜가
아닐까 하고 의심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그림이 다시 세상에
나왔을 미국의 수집가 쿠인이 사들였다는 것뿐이다.
쿠인이 1924년에 세상을 떠나자 그의 수집품의 일부가 경매에 나왔다.
그때 《잠자는 집시 여자》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시인인 콕토는 경매 목록에 실린
서문에서, 경매품 전체의 '태풍의 눈이며 세상에서 보기 드문' 작품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작품은 회화의 개념을 넘어 솟아올라 있으며 회화 자체
존재를 위험하게 한다... 여기 있는 것은 말하자면 시적 회화로, 이야기와 정반대
되는 것이다. 우리 앞에 있는 것은 그려진 시이며, 시적인 대상이며, 직관적 지식과
성실함이 낳은 기적이다... 아마도 사자와 강은 잠자는 여자의 꿈에 나온 것이리라.
어떤 세부도 결코 잊지 않는 화가가 잠자는 사람 발치의 모래 위에 발자국을 하나
그리지 않은 것은 분명 의미 없는 일이 아니다. 집시 여자는 거기로 것이 아니
. 그녀는 거기 있는 것이다. 아니, 그녀는 거기 있는 것도 아니다. 그녀는 인간
있는 어떤 장소에도 있지 않다. 그녀는 시의 비밀스러운 영혼이며 신앙 행위이며
사랑의 증거다..." 콕토가 지적한 대로 작품에 그려진 것은 '인간이 있는 어떤
장소'에도 없다. 그것은 루소의 상상력이 낳은 환상의 세계다. 사막과 맹수와 집시
여자라는 조합은 어딘가 열대지방을 떠올리게 하는데, 그것은 현실의 어느 나라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가 알고 있는 일상 세계와 다르다는 비현실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루소의 후기 작품에 종종 등장하는 이러한 이국 풍경은
많든 적든 간에 콕토가 말하는 '그려진 '.

Portrait of the Artist's Second Wife with a Lamp, 1903

Scout Attacked by a Tiger(Eclaireur attaque par un tigre), 1904

Woman Walking in an Exotic Forest, 1905

Liberty Inviting Artists to Take Part in the 22nd Exhibition of
the Societe des Artistes Independants, 1905-6
(22
번째 앙데팡당전에 초대된 작가들)

Portrait of Pierre Loti, 1905-06

'
로티의 결혼'등으로 알려진 소설가의 초상은 1891년에 그린 것이다.
당시 로티가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추천되던 해였다. 이러한 뉴스에 접한 루소
유명인의 앨범 안에 있는 로티의 사진을 찾아 그림을 그렸던 것으로 보인다.
일개의 평범한 세관 2 직원으로서 보는 로티의 세계는 하늘을 우러러보는 것과 같은
꿈의 세계였을 것이다. 루소가 밀림을 테마로 그리기 시작한 것은 1891년부터인데
로티의 작품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로티의 얼굴은 루소의 다른 초상화와 달리 매우 견고한 조형성을 띠고 있으며, 앞의
고양이는 로티가 좋아하는 동물이었다고 한다. 단순한 선과 배색으로 명쾌한 인상을
주는 그림이다.

The Merry Jesters, 1906

루소가 그린 열대 원시림은 환상의 낙원이요, 꿈의 결정이다.
그러나 꿈은 공상에서 생긴 것이 아니고 현실을 보고 형성되었다고 한다.
밀림에서 그려진 나무와 꽃은 파리 식물원에서의 관찰로 출발한 것이다.
'
온실에 들어와 이국의 색다른 식물을 보고 있으면, 나는 꿈을 꾸고 있는 같습
니다.'라고 루소는 평론가 아르세르 알렉산드르에게 말한 적이 있다.
식물원은 그가 가장 좋아했던 장소 중의 하나이다. 루소는 식물원에 자주 들러 식물
많이 보고 연구하였으나, 화면에 그려진 식물 모양은 실제와 같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림 안에 있는 괴물들이나 새들 역시 현실에서 없는 동물로서
루소의 공상 속에서 생각했던 것을 캔버스에 옮겨 놓았다고 있다.

The Flamingoes, 1907

The Repast of the Lion, 1907

The Snake Charmer(뱀을 부리는 여인), 1907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에 있는 《뱀을 부리는 여인》등도 대표적인 예다.
큰잎이 울창하게 우거진 밀림 가장자이에서, 여기에서도 역시 창백한 달빛을 받으면
신비스러운 이향(異鄕) 여자가 피리를 불어 뱀을 꼬이고 있다. 뒤쪽에는 희게
빛나는 강물이 있고 여자의 모습이 역광으로 잡혀서 눈만이 괴상하게 빛나는것도
《잠자는 집시 여자》와 같다. 이러한 이국 풍경은 모두 비현실적인 세계를 그리고
있지만 표현이 너무나 생생한 박력을 지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루소가 실제로
체험한 세계가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작품은 밀림의 환상을 그린 작품 중에서도
가장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 작품으로 루소의 친구 도로네가 자기 어머니의 부탁
으로 루소에게 부탁한 작품이다. 루소는 이따금 도로네 집에 들렀는데, 어느날 도로네
부인으로부터 인도 여행담을 들었다. 이야기를 듣고 인도의 풍속적인 땅꾼이 구상
되었으리라고 생각된다.

The Representatives of Foreign Powers Coming to Greet
the Republic as a Sign of Peace, 1907

속의 산책

장미빛 옷을 입은 소녀

1961
어느 여성이 작품은 1907 자신의 나이 8 때의 초상화라고 말한 것과
같이 기법적인 면에서 루소의 초기 작품인 같다.
가령 후기에 그린 <부뤼마 >이나, <시인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에서 보는 것과
같이 루소는 인물을 평면적으로 그렸다. 그러나 작품의 머리나 얼굴은 터치가
많고 의복의 부드러운 감이나 입체감을 나타내려고 것이 루소의 초기 작품에 틀림
없다. 이후 루소는 만년에 가까워 갈수록 화면을 편편하게 색면으로 장식하듯 그려
나간 것이 특색이었다. 초상화 배경에는 흔히 나뭇가지나 잎을 그려 넣는다.
이것 역시 후기 것은 나뭇잎 등이 크고 윤곽이 뚜렷하여 도안화(圖案化) 듯하나,
초기 작품은 애매한 사생풍(寫生風)으로 그렸다.

인형을 가진 어린이

인형을 아이가 화면 가득히 당당한 모습으로 있다. 어린이 생일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그려진 것이 아닐까. 그에게 이와 비슷한 어린이의 초상이 있는데
모두가 어린이 얼굴로 그려지지 않고 어른스러웠다.
루소 자신이 동심적인 세계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어린이를 어린이로 대하지 않고
자기와 대등한 위치에서 보고 있어 이러한 표정을 그린 것이 아닐까.
아름 꺾은 꽃을 옷자락에 담고 있는 어린이의 허벅지와 복슬복슬한 볼은 매우
우량아이면서 강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짙은 풀밭에 빨간 꽃과 꽃이 청순한
동심 세계와도 같이 맑고 깨끗하게 보인다.

Exotic Landscape, 1908

Fight Between a Tiger and a Buffalo, 1908

알포르의 풍차

루소의 풍경화에는 습작이 많이 남겨져 있다. 루소는 많은 습작을 기초로 하여 화실
에서 많은 작품을 제작하였다. 이러한 면으로 루소는 쇠라와 같이 인상파 이래
버려져 있던 화실의 전통을 고수한 작가라고 있다. 루소의 습작을 보면 사물들은
색채의 덩어리로 표현되어 인상파라기보다 야수파에 가까웠다. 대충 그려진 습작
들을 보면 루소는 잎사귀 하나하나 꼼꼼히 그려 나가는 과정에서 자기의 이미지를 부각
하여 나가는 습작과는 전혀 다른 화면을 만들어 낸다. 그림의 숲은 어둡고 섬세
하여 고전파적인 화풍에 가깝고, 상대적으로 건물의 붉은 지붕과 벽의 흰색은 매우 강한
대조를 이루어 루소적인 특색을 나타내 주는 작품이다.

비행선(애국호) 풍경

루소는 당시 좋지 못한 소재로 취급되어 있는 근대적인 현실을 재빨리 자기 풍경화
안에 도입한 화가였다. 그는 1890년에 그린 < 자신, 초상: 풍경>에서 에펠 탑을
그리고, 이후 비행선이나 복엽 비행기(複葉飛行機) 파리 하늘에 나는 것을 보고
그것 역시 자기 풍경화 안에 그려 넣었다. 움직이는 , 나는 , 진기한 것에 대하여
그는 어린이들과 같이 호기심이 많았고, 원근법이나 기교면에서도 다분히 동화적이며
물체의 단순화, 사물의 위치 벌써 실경(實景)과는 멀어진 창작적인 내용인 것으로
보아 루소는 이미 이채파(異彩派)들이 추구한 예술 활동을 먼저 하고 있었다.
후일 이채파 화가들 중에서도 에펠 , 풋볼 시합, 비행기 등을 그렸다.

시골 결혼식

아는 사람의 결혼식 혹은 루소 자신의 결혼의 정경을 묘사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는 과거 사진 등을 참조하여 가족들의 모습을 그려 나갔는데 그림 역시 여기에
속할 가능성이 많다. 신부는 첫째 부인 크레망스이고 우측 배후가 자신의 모습
이고, 그와 같이 있는 여성이 두번 부인 조세핀느인 같다. 조세핀느도
그림이 그려지기 2 전에 세상을 떠나 아마 옛날 사진을 꺼내어 새롭게 조세핀느
첨가하여 그린 같다. 좌우 나뭇가지가 만들어 삼각형 안에 인물을 배치한
고전적인 구도이다. 신부와 조부모의 표정은 종교화 안에 있는 인물과 같이 위엄있어
보인다. ··청록을 주조로 인물들로 지나친 통일감을 주고 있으나, 전면에
있는 검은 개의 유머러스한 모양이 화면을 부드럽게 주고 있다.

주니에 아저씨 마차

그림을 그릴 루소는 몽파르나스에서 가까운 페레루가 부근에 화실을 빌어 혼자
지내고 있었다. 번째 부인도 이미 세상을 떠나 근처 야채상을 하는 주니에씨
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 주니에씨가 말을 것을 계기로 마차에 주니에
일가를 그리게 되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물감이 많이 묻은 사진이 지금도
남아 있다. 모자를 사람은 루소 자신이다. 그림은 시골 결혼식에 이어 루소
그린 초상화 걸작에 속한다. 그림에서 루소로서는 처음으로 옆에서
구도를 택했는데, 사진을 보고 그린 데서 어쩔 없었던 같다. 그러나 여기에
그려진 인물들도 주니에씨 사람만 제외하고는 전부 전면에서 얼굴이다.

시인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

시인 아폴리네르와 당시 그의 연인이었던 마리 로랑상의 초상화이다.
그림은 시인 아폴리네르가 루소의 궁핍한 생활을 돕기 위해 주문한 것인데, 시인은
5
프랑을 지불했다고도 하고 3 프랑을 지불했다고도 하여 확실치는 않다.
입체파 화가와 이론가들 사이를 요정(妖精)처럼 다니던 마리 로랑상이 영감을 주는
시신(詩神) 모델로 등장 아폴리네르에게 영감을 주는 장면인데, 때의 루소는
벌써 원숙기에 도달하고 있다. 화면은 밝고 맑아 루소의 정신 세계의 흐름을 결정지어
주는 기념비적인 그림이라 하겠다.

The Football Players, 1908

슬로우 비디오를 보고 있는 듯한 완만한 동작과 팔자수염을 선수들의 표정이 유머
러스하다. 그림 역시 정면에서 구도로, 앞에 넓은 면적을 깔고 삼면의 공간은
누런 나뭇잎 하나하나를 열심히 그려놓은 만추(晩秋) 어느 공원 풍경인 같다.
그림은 풋볼을 하는 것이라고 그렸는데, 핸드볼을 하고 있는 같아 정확히
없다. 루소로서는 풋볼을 하든 핸드볼을 하든 상관이 없고, 다만 사람들의 운동감에
흥미를 갖고 루소 독자적인 풍경화 시스템 안에 넣어버린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작품은 비행선이나, 복엽 비행기(複葉飛行機) 그려 넣은
작품과 계열에 속한다고 있으며, 근대적 현실에 뜨기 시작한 루소의 정신
세계의 일면을 말해 주는 같다.

클르 공원의 나무들

<
풋볼을 하고 있는 사람들> 순수한 풍경화는 아니지만 < 클르 공원의 나무들>
같은 구도이다. 전경에서 안으로 뻗은 넓은 길과 양편의 줄지은 나무들의 평행 수직선
리듬과, 점점이 찍어 그린 잎의 표현은 한결같이 <풋볼을 하고 있는 사람들> 그림과
동일하며, 제작 연도도 대략 같은 시기인 같다.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은 소인국에서 나오는 사람처럼 왜소하고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며, 루소적인 스타일이 강하게 풍기는 작품이다.

Portrait of Joseph Brummer, 1909

Bouquet of Flowers with an Ivy Branch, 1909

르동이나 고갱이 그린 꽃은 현실의 꽃인데도 신비스러운 분위기가 감돌지만 루소의
꽃은 꽃의 윤곽이 명확하고 평면적이어서 장식적인 느낌을 준다.
그림은 정면에서 보고 그린 것인데 테이블의 수평선과 초록색 바탕의 커튼의
수직선이 기하학적으로 단순화되어 있지만 초록색과 분홍색, 빨간색 등의 선명한
색의 대비도 일종의 신선감을 주는 그림이다. 꽃병 앞에 놓인 담쟁이 덩굴은 빨간
테이블 색과 조화될 뿐만 아니라 직선이 많은 구도를 부드럽게 주고 있다.

The Dream(야드비가의 ), 1910

루소가 죽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1910 앙데팡당전에 출품한 《야드비가의 꿈》역시
열대 정글 풍경을 그린 그림인데, 자신이 적절하게 이름을 붙였듯이 정글이나 열대는
그에게도 꿈의 세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꿈은 그에게 일상의 현실 이상으로
생생한 현실성을 갖는 꿈이었다. 《야드비가의 꿈》에 관해서 어느 비평가가 루소
에게 정글 한가운데에 이런 근사한 의자가 놓여 있는지를 물었더니 루소는 당장
비평가에게 편지를 보내 '그것은 여자가 의자 위에서 자고 있다가 밀림으로
옮겨진 꿈을 꾸고 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화면 가득 정성 들여 그린 꽃이나 동물이나 피리를 부는 토인 여자 등은 모두
소녀 야드비가의 꿈에 나타난 이미지라는 것이다. 콕토는 위에 인용한 문장에서 사자
강이 집시 여자의 꿈에 나온 것이라고 쓰면서 어쩌면 일화를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야기를 모른 시인의 날카로운 직관으로 루소의 작품의 본질을 알아낸
것일까.

역사의 흐름 속에서 루소의 자리를 매기려 한다면 바로 '꿈의 세계의 창조자'로서
르동(Odilon Redon: 1840~1916, 상징주의)이나 고갱이나 뭉크 등과 함께 세기말
반자연주의적 경향의 대표적 화가였다고 말해야 것이다.
루소는 비교적 늦게 회화에 전념하게 되었고 아폴리네르나 피카소 큐비즘 화가들과
친했기 때문에 어쩐지 20세기 화가처럼 생각되기 쉽지만, 나이로 보자면 인상파 시대에
속한다. 그러나 그는 인상파 화가들처럼 눈에 보이는 자연을 재현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모네들과 동시대 사람인 르동이 인상파의 지나친 감상주의를 못마땅해 하며
'
눈에 보이지 않은 영혼의 밑바닥의 세계' 추구하는 길로 나아갔듯이, 루소도 꿈의
세계가 현실 세계에 비해 적어도 동등하거나 현실 이상의 충실한 내용을 지니고 있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 루소의 경우는 마치 밀림 속의 의자 위에 드러누운
소녀 야드비가에게 그러했듯이 꿈과 현실은 구별되지 않는 것이었다고 말해야 것이다.
그가 초상화를 그릴 모델의 얼굴 부분의 치수를 재서 그것을 고스란히 화면에
재현하려고 했던 시실은 널리 알려져 있는데, 루소는 그럴 정도로 현실에 접근하려고
하면서도 현실을 완전히 꿈의 세계로 변모시켜 버렸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소박파'
내지 '현대의 프리머티브파'라고 불리는 화가들의 특징이라고 있다.

예컨대 《잠자는 집시 여자》에서는 사자의 갈기 , 《뱀을 부리는 여인》
이나《야드비가의 꿈》에서는 울창한 나뭇잎 장이 정성껏 그려져 있다.
보통의 시각으로는 이렇게 세세한 부분까지 보일 리가 없다. 실제로 그렇게 보이지 않을
것을 열심히 그리는 것은 사자나 정글이 바로 화가의 상상력이 만들어 환영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꿈속에서 우리는 어떤 세부라도 극명하게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든 꿈을 꾼다. 그러나 보통 꿈의 세계는 날이 새면서 사라지고 다시 돌아
오지 않는다. 단지 루소를 비롯하여 극소수의 선택된 사람들이 자기의 꿈에 영속적인
조형성을 주어 우리의 세계를 한층 풍부하게 해주었다.

Bouquet of Flowers, 1910

루소는 꽃을 테마로 상당히 많은 그림을 남겨 놓았으나 거의 모두 동일한 수법이다.
단순한 구도에 단일한 배경 중앙부에 빽빽이 꽃아 놓은 꽃으로써 거의가 공통적이다.
루소의 꽃은 르동의 꽃과 매우 대조적이다. 르동의 그림에서는 테이블이나 배경이
보랏빛 안개에 묻혀 버리기도 하고 꽃은 공간에 엷게 부상하듯 그린 반해 루소는
배경과 테이블 명확한 면에 한정하는 공간은 매우 가볍고 인공적이다.
루소는 풍경화에 있어서는 공간 표현에 많은 힘을 기울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흥미를
이끌게 하였으나 그림에 있어서의 공간은 단순화되고 배경은 단지 막을 내린
차단되었다. 꽃들도 꽃잎이나 잎맥까지 자세히 그렸으나 현실과는 다른 창작에 의한
꽃이다. 역시 루소적인 초현실감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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