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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미술사 산수화 기출문제들 자료찾아 정리함.

AH101 2022. 7. 13.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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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은 우리나라 산으로 드물게 기이한 지질과 형세를 지닌 산으로 예로부터 선인들의 주목을 받았으며 고려 말 불교적 성지로 인식되며 국제적 명성을 얻었고 마침내 문학과 미술로 표현되기 시작하였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강산 그림은

1307년(충렬왕33) 노영이 그린<담무갈보살예배도>-고려의 태조가 금강산에 가서 배점에 올랐을 떄, 담무갈보살과 그 권속이 헌신하자 예배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그 후 태조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담무갈보살에게 예배한 곳을 배점이라 부르게 하고, 근처에 정양사를 세웠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이 그림에는 뾰족뾰족한 여러 봉우리들이 고려 시대에 유행한 이곽파 화풍으로 표현되어 있다.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골산의 날카로운 모습과 세를 강조한 이러한 표현은 조선 후기까지 이어졌다. 이 작품은 또한 금강산에 대한 불교적인 신앙을 증명해 준다는 점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금강산의 명성은 중국에까지 전해짐. 원나라에 이어 명나라에까지 전해져 명나라의 사신들이 조선에 올 때마다 금강산을 가거나 금강산 그림을 구하는 관습이 생겼다. 이러한 연유로 조선 초기까지의 금강산도는 중국사신들을 위해 그려진 것들이 많은데 1455년(단종3)에 온 중국사신들이 금강산도를 청하자 조정에서는 화원인 안귀생을 시켜 그리게 하여 처음에는 부사에게 주었으다. 그뒤 이를 안정사는 자신에게도 그려달라고 하였고, 또한 황제에게 바칠 것을 더 요구.특히 황제를 위한 그림은 사계절의 경치를 갖추기를 바랬고 조선측에서는 임금의 허락 없이 그려 줄 수 없다고 하였고, 이에 정사가 직접 청하겠다고 나섰다. 결국 황제에게 바칠 두 건은 비단에 그리고, 정사가 볼 것은 종이에다 그리라고 하는 것으로 결론이 난 적이 있었다.

   

금강산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은 고려 말경으로 고려 말과 조선 초는 그 동안 개골 또는 풍악으로 불리어 온 산이 불교의 성지로 인식되면서 금강산으로 불리기 시작한 시기였다. 이 당시의 화풍은 애석하게도 금강산도가 어떠한 형식과 양식으로 표현되었는지 알 길이 없고 다만 노영의<담무갈보살예배도>에 나타난 뾰족한 봉우리와 바위질의 산모습은 후대의 금강산도에 나타나는 표현과 비슷하며, 실제의 모습을 감안하여 그린 실경 산수화로서의 성격을 보여준다. 한편 우리나라 사람들 뿐 아니라 중국의 사신들까지 금강산에 가고 싶어하고 그 그림을 얻으려고 한 것은 불교적인 동기 때문만이 아니라 또한 이름높은 명승인 금강산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다.

 

조선조 성리학 이념의 도입과 함꼐 지식계층의 문인들이 조선건국을 주도했으며 이들은 금강산을 불교적 성산으로 보는 습속과 기복적 동기의 순례를 비판했으나 문인들이 추구한 성리학 자체가 친 자연적 성격의 학문이었고, 금강산은 장대한 기세와 변화무쌍한 경물의 산으로 곧 금강산 여행하는 풍조. 그들은 문인 특유의 산수관과 기행관을 적용하며 금강산을 다녀왔고, 여행의 경험과 견문을 문학과 회화로 표현하였다.

   

금강산 그림이 왕실차원의 특수수요에서 벗어나 일반적으로 수요되는 화목이 된 것이 조선 중기로 문인들이 애호하는 제재로 정착되면서 부터 이다. 김시, 이경윤, 이영윤, 이정, 조속 등 문인화가 또는 직업화가들이 금강산으로 여행을 하거나 금강산을 그리기 시작한것. 조선 중기 이후 금강산도는 기행사경도 같은 형식으로 표현되었다. 기행시처럼 여정에 따른 공간적 시간적 이동을 반영하는 형식과 내용으로 표현된 것이다. 또 각 장면의 소재와 구성도 기행문의 내용을 그대로 담은 듯한 성격을 드러내며 문자 그대로 시서화일치의 이상을 구현하는 예술이 되었다.

   

절파화풍의 선구자인 김지가 금강산에 다녀왔다는 기록이 1862년경의 저술에 남아있으나 김지가 16세기의 사람이므로 그 사실 여부에 대해서는 신중히 고려해야 하겠다. 그러나 그가 이경윤의 금강산행을 기념하여 꾸민 축에다 금강산도를 그렸다는 또다른 기록이 전해지기 때문에 그가 금강산에 다녀왔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겠다. 이 작품은 김지의 그림과 이 작품은 아계 이산해 및 소제 노수신의 제시가 곁들여진 시서화 합벽이었다. 현재로서는 이 합벽축이 어떠한 화풍으로 그려졌는지 알 수 없으나 조선 중기의 절파화풍을 창시하였던 두 대가와 당대를 대표하는 문인들이 모여 시서화 합벽의 금강산도를 제작한 것은 금강산도의 변천상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이제까지 알려진 조선 중기의 금강산도 또는 관동도들은 전도식과 화첩식으로 표현되었다. 예켠데 김지의 금강산도는 한 장면의 전경도축으로 꾸며졌고, 이정의 관동도는 여러 장면으로 나누어 담은 화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 중 전도식의 금강산도는 조선초 이래 꾸준히 그려져 왔으므로 이미 하나의 전형으로 확립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화첩식의 금강산도는 조선 중기에 들어와 시도된 새로운 표현 형식이었다. 이정이나 조속 같은 문인화가들이 오랫동안 전래되어 온 전도식의 표현을 거부하고 새로운 형식과 내용을 추구하기 시작한 것으로 그 결과 이들은 마치 기행문에서 그러하듯이 자신이 직접 견문한 것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 좀더 현실적인 방식을 택하였다. 이들은 자신이 돌아본 경물 중 중요한 것을 선택하여 여러 장면에 나누어 담는 화첩식의 표현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표현 형식이 이때 처음 창안된 것은 아니었다. 16세기 이전에 어떠한 지역의 경물을 여러 장면으로 표현한 예들이 있으나 금강산도의 경우 조선 중기에 들어와 비로소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18세기 전반 국토 지리에 대한 자주적 인식과 경향지역의 노소론 벌열층을 중심으로 한 서화골동 취미의 확산, 남종문인화에 대한 관심등 새로운 회화관과 화법이 대두되며 진경산수화는 그 중 금강산도는 가장 적합한 제재로 부상하게 된다. 이 시기 정선이라는 거장의 활약을 통해 금강산도의 형식과 내용, 구성이 제정비되고, 시서화 합벽으로 표현되며 새로운 문인예술로 정착되었다. 정선은 당시 유행된 산수유람의 풍조에 동참하여 좋은 경치를 찾아 유람한 것은 당시에 유행한 산수유람의 풍조에 동참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산의 형세를 파악하고 사생을 통해 그린 것은 조선 중기나 후기에 한창 유행한 화보나 고화를 임모하여 그리는 것과 전혀 다른 방법이다. 정선은 여러 작품과 문헌을 통하여 여러 번 멀리 여행한 것을 알수 있는데 우선 1712년과 1747년에 금강산을 다녀온 것으로 확인된다. 정선의 첫번째 금강산 여행은 당시 금화현감으로 가있던 이병연의 초청에 의한것으로 여행이 끝난 뒤 정선은 자신이 본 것을 30여폭의 그림으로 그려 이병연에게 주었다. 이병연은 여기에 김창흡의 제를 받고 자신도 제를 써서 <海嶽(傳神)>을 꾸몄다.

1711년 제작연대를 알수 있는 가장 이른 정선 나이 36세에 그린<신묘년 풍악도첩(辛卯年楓嶽圖帖)>은 정선이 1712년 이전에 금강산을 여행했을 가능성

<신묘년 풍악도첩중-금강내산총도> 1711

정선은 영남지역도 여행하였으며, 현재 간송미술관에는 정선의 작품으로 전칭되는 영남지역을 그린<橋南名勝帖>이 소장되어 있다. 이후 72세가 된 1747년에 금강산을 여행하고 다시 한번<海嶽傳神帖>을 그렸다.

<금강전도>1734년작

   

정선나이 60대에 이르러 개성적인 양식이 정립된것을 보여준다.

<금강전도> 종이에 담채, 1734년(59세), 호암미술관 소장. 이 기념비적 대작은 진경산수화풍의 완성을 의미한다. 겸재가 이 작품을 그린 곳이 금강산이 아니고 청하 고을이었고, 금강산에 다녀온 지 20년이 지난 시점이었다는 사실은 그가 가슴속에 담아온 금강사을 화면상에 이렇게 맘껏 재구성 할 수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런 의미에서<금강전도>를 비롯한 겸재의 진경산수는 실경의 사생화가 아니라 실경을 회화적으로 재구성한 이형사신의 미학이라고 할 수 있다.

겸재가 내연산 삼용추를 다녀온 바로 그해(1734)겨울, 생애 최고 역작 금강전도를 그림

금강전도는 이제까지의 그의 금강산 그림과 다름. 36세 <신묘년 풍악도첩>은 반 지도적 성격으로 필력이 매우 어리고 50대에 그린 고려대 박물관 소장 <금강전도> 는 필치는 원숙하지만 구도에서는 박진감이 덜하다. 그런데 이 <금강전도>는 금강산의 이미지를 극대화시키기 위해 변형과 과장, 필법의 강약, 광선의 대비를 맘껏 구사하여 보는 이의 눈과 가슴을 압도하는 드라마틱한화면을 창출해내고 있다.

특히<금강전도>는 구도에서 마치 항공 촬영을 하듯 하늘에서 부감하는 장쾌한 시각 구성으로 일만 이천 봉우리들이 도열하듯 장대하게 펼쳐져 있다. 화면 오른쪽 아래에서부터 날카로운 암봉들이 시계 반대 방향으로 치고 오르듯 줄줄이 뻗어올라 비로봉 상봉에서 마감되고, 화면 왼쪽은 아래쪽 장안사에서 시작하여 내금강 계곡을 따라 둥근 호를 그리고 있다. 그리고 부드러운 육산을 담청색으로 담아내어 화면상엔 강한 동새가 일어난다. 오른쪽 골산은 날카로운 수직준. 왼쪽의 육산은 부드러운 미점법이 주조를 이루어 부드러움과 강함이 극명한 대조를 보이며, 동시에 수직준의 골산 사이 사이에는 미점법을 은은히 가미하여 계곡을 암시하고 육산의 곳곳에는 반대로 수직준의 암봉이 밝은 광선을 받아 빛나고 있음이 두드러지느 어느새 화면이 하나로 어울림 => 수직과 수평, 선과 점, 흰색과 검은색, 밝음과 어둠, 큰 것과 작은 것 등이 대비되면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아직 금강산도가 보편적인 경향으로 자리잡은 것은 아니었다. 같은 시기에 윤두서와 조영석 등 문인화가들과 기호 남인계 이만부, 이익 등 기호남인계의 실학자들은 진경산수화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금강산도 또는 진경산수화가 일반적인 호응을 얻은 것은 18세기 중엽 이후 강세황, 심사정, 김윤겸, 정수영 등 여러 문인화가들이 진경을 그리면서부터였다. 이들은 대개 남종화법을 토대로 개성적인 화풍을 이룬 화가들이며, 금강산도를 그릴 때에도 남종화의 화의와 기법을 구사하며 사의적인 화풍을 추구하였다.

   

그후 금강산도는 18세기 말엽경 김홍도에 이르러 새로운 변화 1788년 정조의 명을 받고 선배화원인 김 응환과 함께 관동팔경과 금강산, 설악산 지역을 돌아본 뒤 그들이 본 지역의 형세를 그려 바침. 왕이 화원을 금강산에 파견하여 실경을 그려오게 한것은 드문 일이었기 때문에 주목할만한사건. 김홍도는 당시까지 그려진 것보다 훨씬 다양한 풍경과 명소를 새로운 개념의 사실적인 화법으로 그려내어 금강산도 화풍을 일신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 이전까지 금강산도의 화풍을 주도한 대표적인 인물들은 모두 문인이었는데 반하여 화원 또는 직업화가로서 금강산도를 그리는데 적극적으로 관여하여 신풍을 이룬 사람은 김홍도와 김응환이 처음이었다. 그의 진작이 분명한 간송미술관 소장의< 海山圖屛>은 (明鐘臺)(九龍浦)(비봉폭)(금란굴) (총석정) 등 내 외 해금강 지역 중 중요한 명소와 경물을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들에서 그는 이전에는 다루지 않은 명연담, 비봉폭, 금란굴 영랑호 등을 다루고 있다. 18세기 전반까지의 금강산 그림이 주로 내금강산과 관동팔경을 다루던 것에 비해 김응환과 김홍도로부터 외금강 지역과 설악산을 포함하여 30~40면 이상 되는 화첩을 꾸밀 수 있다.

대표적으로 총석정도를 들 수 있다.

김홍도는 왕명을 받들어 여러 곳을 여행하며 곳곳의 명승을 화폭에 담았다. 이 〈총석정도〉는 여행할 때 제작한 초본(草本)과 그때의 인상을 토대로 하여 나중에 제작한 것으로 《을묘년화첩》에 들어 있는 것이다.

이 화첩은 그가 50대에 들어서면서 자신감 넘치는 필치를 구사하던 때의 작품으로, 김홍도 화풍의 변천을 읽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그림에 적힌 관지(款識)에 의하면 1795년 그의 후원자인 김경림(金景林)에게 그려준 것이다. 총석이나 소나무의 묘사에서 언뜻 정선의 수직준법의 영향이 보이지만, 그와는 다른 김홍도의 필치 또한 역력하다. 총석의 왼편 물결 위에 날고 있는 두 마리 작은 물새의 표현이 재치있다.

18세기 이래 총석정도는 주로 육지에서 바다쪽을 향해 보는 시점에서 그려지며, 기둥 모양의 석주들은 화면의 왼쪽에 크게 나타나고 그 오른쪽으로 총석정이 표현되었다. 이러한 구성에서 총석과 총석정이란 소재가 크게 부각되는 장점이 있었던 반면에 총석정 위에서 보는 바다의 탁 트인 시원함이 표현되지 못하였다. 김홍도는 시점을 옮겨 총석의 석주들을 화면 앞쪽에 두고 그 뒤로 육지로 이어지는 지세를 그려서 깊은 공간과 탁 트인 시야를 토현한 것이다. 이러한 김홍도의 새로운 시도는 이후 여러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어 김하종, 정수영등 김홍도 이후 금강산도를 그린 화가들은 각기 다양한 시점을 취해 새로운 구성과 표현으로 총석정을 그려내게 된것.

간송미술관 소장의< 海山圖屛>은 이전의 금강산도에 비해 몇 가지 다른 양식적 특징을 보여 준다. 첫번쨰 특징은 이전의 진경화에 비해 대상의 모습을 세밀하게 사실적으로 묘사하려는 경향이 나타나는 점이고, 둘쨰는 공간의 깊이와 넓이 원근에 대한 관심이 뚜렷하게 부각되며 그 표현 기법이 달라진 것이며, 셋째는 화면 구성상 경물의 비중이 줄어들며 공간의 운용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이다. 넷째, 필묵의 운용이 이전의 금강산도에 비해 온건하게 절제되며 특히 묵보다 필의 표현이 강화된 것이다. 다섯째, 이 그림이 여러가지 점에서 김홍도로서는 초기적인 작품임에도 불구 이미 독특한 준법과 수지법, 석법 등 개성적인 표현이 나타나는 점이다.

   

김홍도의 금강산도가 이전의 금강산도와 전혀 다른 화풍이 된 가장 중요한 원인 중 하나는 경물에 대한 화가의 접근 방식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김홍도는 선묘를 위주로 경물의 형태를 세밀하게 묘사하였고, 때로는 선염법이나 강한 필세를 동원하여 확고한 물질감을 표현하였다. 또한 그 지역의 형세를 포괄하기 위해 다루는 공간의 규모가 커지고, 공간적 깊이와 넓이에 대한 관심이 뚜렷하게 부각되었다. 이러한 표현 성향은 경물을 입체적인 공간 속에 존재하는 대상으로 객관화시키고 눈에 보이는 대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다. 이것은 결국 서양화법에서 유래된 개념과 기법을 토대로 형성된 화풍이었다.

   

   

   

이렇듯 김홍도 <海山圖> 그린 즈음부터 새로운 성격의 화풍으로 표현되기 시작하였다. 정조년간의 진취적인 문예관과 사실적인 기풍을 반영하며 서양화법과 남종화법을 교묘히 융합시킨 김홍도의 해산도는 이 시대를 특징짓는 하나의 시대양식이었다. 그의 금강산도는 19세기 전반까지 이상적인 전범으로 여겨지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9세기에 들어오면서 진경산수화가 급속히 퇴조하며 조선말기까지의 금강산도 및 기행사경도 또한 그 질과 양에서 위축되는 경향이 있지만 때로는 당대의 신화풍과 새로운 취향을 반영하며 재창조 되었고 상류층 문인 뿐 아니라 중서민계층들 사이에도 금강산에 대한 관심과 여행이 저변화되어 금강산도와 관동팔경도에 대한 수요가 일반화되었다. 18세기 후반에는 금강산도와 관동팔경도가 집안에 흔히 그려지는 그림이 되었고, 나아가 대량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 민화로 표현되기 이르렀으며 이러한 경향은 19세기에 들어와 더욱 진전되었다. 금강산도는 19세기 이후 청조의 신문물과 학문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일부 신진문인과 그들을 추종하는 일부 중인화가들에 의해 주도된 사의적인 남종문인화풍의 유행과는 별도로 일정한 수요를 가진 전통적인 화목과 화풍으로 자리잡았다. 물론 19세기 이후의 금강산도는 18세기 처럼 첨단적 신양식을 창출하며 다른 분야에까지는 영향을 미치는 주요화목은 아니었을지언정 보수적인 취향과 예술관을 가지고 전통적인 습속을 유지한 일부 문인과 한층 여유로운 경제력과 문화적인 성향을 획득한 일부 서민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매력있는 분야로서 전래

19세기 전반금강산도의 중요작품으로는 1815년 김하종의<海山圖帖> 1825년 이풍익의 <東遊帖> 19세기 초 이의성의<海山圖帖> 淮翁 (회옹) 이라는 호를 가진 사람이그린<海山圖帖>등을 들 수 있으며 이 작품들은 모두 19세기 초엽경에 그려졌고, 모두 문인들이 그렸거나 아니면 문인들이 후원한 작품이며 20면 이상의 화펍으로 구성되었다. 또한 각 장면의 내용, 구성과 표현 성향 등이 김홍도의 금강산도 화풍을 모방하여 서로 유사한 부분이 많은 반면에 또한 제가끔 다양한 필치와 채색, 기법을 가지고 있어서 눈길을 끈다.

〈금강전도〉는 겸재가 만 58세 때인 1734년 겨울 금강산 전경을 만폭동(萬瀑洞)을 중심으로 하여 그린 것이다. 그림의 크기는 세로130.6cm, 가로 59Cm이며, 종이에 옅은 채색으로 그렸다. 현재 호암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금강전도〉는 관념 산수의 틀을 벗어버리고, 우리 나라의 산천을 소재로 하여 독창적이고 개성적인 표현 기법으로 그렸다는 점에서 한국 산수화의 신기원을 이룬 걸작이라 할 수 있다.

그림 윗부분에는 비로봉이 우뚝 서 있고 거기서 화면의 중심인 만폭동을 지나 아랫부분 끝에는 장안사의 비홍교가 보인다. 그림의 상부에는 좌측에 '金剛全圖 謙齋'라는 관서와 백문방인(白文方印)이 있고 우측에 반원형을 이룬 칠언시가 적혀 있다. 더불어 '甲寅冬題'라고 제작 시기를 밝혀 놓았다.

금강산을 그리는 전통은 이미 고려 시대부터 형성되어 조선 시대로 계승되었다. 조선 초기에도 활발하게 전개되어 금강산이 중국이나 일본의 사신들에게 주기 위하여 종종 그려지곤 하였다. 조선 중기에도 여전히 금강산도가 계속해서 그려졌음이 기록들에 의해 확인된다. 조선 후기에 들어 금강산을 소재로 한 그림을 그린 화가는 겸재 외에도 여러 사람이 있었다. 예컨대 김응환, 조정규, 엄치욱, 김홍도, 최북, 이인문 등이 이에 속하는데, 이들의 금강산 그림은 산의 전경이라기보다 이름난 명소(名所)를 중심으로 하여 그린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겸재의 〈금강전도〉는 산 전체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런데 아무리 높은 곳에 오른다 해도 한 시점(視点)에서 금강산 전체 모습을 그린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금강전도는 겸재가 금강산에 대해서 알고 있고, 또 느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을 표현한 그림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조선시대 화원제도와 시대에 따른화원들의 활동상

2010년 5월 2일 일요일

오전 1:18

<화원제도>

조선 초기부터 왕공 사대부들과 함꼐 회화의 발달에 쌍벽을 이루며 기여, 왕공 사대부 출신의 화가들이 주로 산수나 묵죽등 순수한 감상을 위한 그림의 제작에 참여하고 어진의 제작시에 감독을 맡으며, 이론적 측면에서 화원들을 선도했던 반면 화원들은 회화의 실무를 맡아 어진을 그림은 물론 궁중과 조정에서 이루어진 각종 행사를 담아 그리는 의궤도를 위시한 기록화와 지도의 제작등 일체의 실용적 목적의 그림을 그리는 일 이외에 왕공, 사대부들의 요청에 따라 기록적 성격을 띤 초상화와 계회도를 제작하기도 하고 산수, 인물, 영모, 화초 등 감상을 위한 다양한 그림들도 그렸다. 또한 중국이나 일본에 파견되는 사절단을 따라가서 그림을 통한 문화 외교에 큰 몫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화원들의 역할은 지대하였다.

화원을 양성하고 그들이 몸담아 활동하면서 국가적 회사에 임하도록 설치되었던 기구가 바로 도화서였다. 국초부터 국가적 화사를 관장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화원의 본래 이름은 도화원이었으나 1463년부터<경국대전> 이 편찬되었던 1463년사이 어느 땐가 도화서로 개칭되었는데 이는 화원의 격을 낮추어 조정한 결과로 믿어진다.

도화서의 조직과 구성은 <경국대전>의 이전(吏典), 예전(禮典), 공전(工典) 등에 의하여 밝혀진다. 도화서는 예조에 소속된 종6품 아문으로 구성원은 정직인 경관직으로서 제조1명과 종6품인 별제 2명이 있었다.

도화서의 최고 책임자인 제조는 예조판서가 겸하는 것이 상례였다.

겸관직인 제조와 별제 밑에 선화, 선회, 화사, 회사 등의 직함을 지닌 화원 5명 서반체아직 화원3명, 직책이 없는 화원 12명이 함께 소속되어 있었다. 화원 선발은 시취를 통하여 이루어졌으며 역관이나 의원처럼 잡과에는 속하지 못하였다. 이는 도화가 특수한 재능을 필요로 하는 특수분야일 뿐만 아니라 잡과에 속하는 다른 분야들에 비하여 그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낮게 인식되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화원의 시취에 관해서는<경국대전><예전> 취재조를 통하여 이해할 수 있다. 시취에 응하는자는 죽, 산수, 인물, 영모, 화초의 5과목 중 2가지를 택하여 시럼을 치게 되어 있는데 죽이1등과목, 산수를 2등, 인물과 영모를 3등, 화초를 4등 과목으로 지정하였다.

대나무를 1등 과목으로 설정했던 것은 북송대 문동, 소식 등 호주죽파의 문인화들의 영향을 받았기 떄문으로 생각되과, 산수를 2등 과목으로 했던 것은 당시 왕공 사대부들의 자연관과 풍류사상을 반영했던 것 이외에 그것이 감상화의 대중을 이룰뿐만 아니라 화가의 창의력과 화풍의 변천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장점을 지녔기 떄문으로 추측된다. 또한 초상화를 포함한 인물을 비교적 낮은 3등 과목으로 정했던 것은 낮은 등차에도 불구하고 어진 제작과 그것을 통한 가장 빠른 출세의 길이 보장되므로 화원 지망생이면 누구나 중요시하였기 떄문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4등 과목인 화초의 경우 이러한 연유에서인지 상대적으로 그 중요성이 덜 인식되었고 조선시대에는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 화원 중에 화초를 전문으로 그린 화원이나 그 방면에 일가를 이룬 화원이 거의 없었음 주목.

   

<조선 초기 화원들의 활동상>

조선초 도화원 혹은 도화서를 통하여 수 많은 유능한 화원들이 배출, 특히 조선 초기에는 세종조와 성종조를 중심으로 하여 안견, 최경, 안귀생, 배련, 석경, 이상좌등 회화사상 뚜렷한 업적을 남긴 화원들이 배출되었다.

안견: 세종조의 안평대군의 호원을 얻어 대성한 조선시대 최고의 산수화가. 조선 초기는 물론 조선 중기 화단과 무로마치 시대 대표적 수묵 산수 화가였던 슈분 일파의 화풍에 지대한 영향. 불후의 명작인 <몽유도원도>를 남김. 그는 그 이전의 전통을 광범위하게 섭렵하고 여러 대가들의 장점을 참조하여 자신의 화풍을 형성하는 토대로 삼음 곽희파와 마하파 화풍이 특히 중요하게 참조. <사시팔경도>의 편파구도, 따로따로 떨어져 있는 경물군의 구성. 넓은 수면과 안개가 펼쳐져 있어서 확대된 공간의 개념은 남송대 원체화 특히 마하파 화풍과 연관이 된다고 믿어지지만 편파구도, 경물군들이 흩어져 있으면서도 시각적 조화를 이루는 구성과 함께 안견화풍의 큰 특징을 형성한다. 또한 이러한 특징들은 안견과 그의 추종자들의 작품들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데, 안견파 화풍은 15세기는 물론 16세기에 이어져 구도가 전형적으로 편파구도 뿐 아니라 대칭구도도 유행하며 편파구도도 앞에서 살펴본<사시팔경도>처럼 무게가 주어진 쪽이 3단을 이루는 편파구도와 양팽손의<산수도> 와 16세기 일련의<소상팔경도>에서 보듯 한쪽에 근경, 중경, 원경의 3단을 이루는 편파 삼단구도로 나누어진다. 이렇듯 안견파 화풍은 16세기에 까지 변화를 겪으며 이어지며 양팽손, 김시, 이정근, 이징, 김명국 등의 화가이게도 영향을 미쳤다.

최경: 세종조에 등장. 성종조에 대성한 인물화 최대거장. 산수화의 안견과 병칭. 어진 제작의 공로로 성종에 의해 당상관에 제수되는 파격적 대우로 논란. 이는 조선 초기의 최대 하원이었던 안견이 종 6품인 선화를 거쳐 정 4품 서반체아직인 호군이 되었던 것 보다 더 파격적 성종조에 엄청난 논란 야기

안귀생, 배련: 최경과 함께 성종조에 활동한 대표적 화원

이상좌: 본래 어느 사대부 노복이었다가 그림 재주 덕에 면천. 도화서 화원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슬하에 역시 화원으로 아들을인 이숭효, 이흥효, 이정 등을 두어 대표적 화원 가문을 이룸. 남송대 화원 화풍인 마하파 화풍을 따랐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뒤에 소개하는 바와 같이 논란이 있음

이장손, 최숙창, 서문보: 15세기 말경 활약했던 화원들로 믿어진다. 이름만 전해지고 작품은 알려져 있지 않았으나 일본 나라의 야마토 분카간에서 구입한 산수화를 통해 그들이 모두 원대 고극공 계열 화풍을 수용하였음이 밝혀졌다. 이들 화풍은 모두 연운의 묘사가 두드러지고 부드럽고 습윤한 자연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점에서 서로 비슷비슷하나 분명히 개인적 차이를 나타내며 조선 초기 남종화의 한 계열인 미법산수 특히 원초 고극공 계열의 화풍을 수용하여 한국화시킴을 말해준다.

   

<조선 중기 화원들의 활동상>

조선 중기 화단에 특히 주목되는 것은 대대로 화업을 계승하는 직업적 화원들의 중인가문들이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중인을 사자관, 음양관, 의관, 역관 등 기술직 종사자를 포괄하여 넓은 의미에서는 이 밖에 서얼 및 향리, 서리, 역리 등 경외의 낮은 신분의 행정 실무자까지 이에 포함된다. 중인들은 집안끼리 서로 결혼을 하여 가업을 계승하는 경향을 강하게 띠었다. 그러나 반드시 한가지 가업만 고수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중인 기술직 중 회화를 담당하는 화원의 경우 특별한 재주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특이한 계보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이상좌-이숭효-이흥효 집안과 이명수-이정근-이정식의 집안의 예로 보아 이러한 중인 계층으로서의 화원 집안들은 16세기 후반에 그 실질적 형성이 이루어졌으며 17세기에 들어서서 본격화 되었으며, 이러한 추세가 18세기로 계승되어 큰 맥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김시-김기-김집-김식/ 이경윤-이영윤-이징

이상좌-이숭효-이흥효-이정/ 이정근-이정식-이수형-이홍규-이기룡

   

김시-<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의 저자. 김안로의 아들 그의 형인 김기와 더불어 사인화가이다. <청죽화사>가 전하고 있듯 간이당 최립의 문장과 석봉 한호의 글씨와 더불어 삼절. 산수 인물, 우마, 영모, 초충 등 여러분야에서 그림에 정묘. 타고난 화재로 도화서 별제 벼슬까지 하게됨. 뛰어난화재와 도화서 별제를 맡았던 떄문인지 그의 종손인 김식과 김집은 물론 뒤에 보듯이 이흥효, 이경윤 등 주요화가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침 절파화풍 이외에 안견파 화풍과 남송 원체계 화풍도 수용

절파계<동자견려도>: 어린 동자가 통나무 다리를 건너지 않으려고 뒷걸음 치는 나귀의 고삐를 잡아 끌고 있는 모습 주봉의 한쪽 구속에 양송(養松) 이라는 관서와 "김시계수(季綬)라는 주문방인이 있어 김시의 작품임 확인. 통나무 다리를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동자와 나귀의 안간힘은 근경에 솟아오른 한 그루의 장 송 밑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장 송 뒤에는 주봉이 비스듬히 치솟아 있는데 그 전면은 부벽준으로 대충 처리된 대담한 백면을 이루고 있다. 이 백면의 주위는 농묵의 윤필로 처리된 후 백색의 태점이 가해져 있어 강한 대조감을 유발한다. 이러한 일련의 특징들은 절파 특히 그 후기 양식과 유관한 것이라 하겠다. 이 그림은 대경 산수 인물화라 할 수 있다. 주위의 산수가 웅장한 듯 하지만 그림의 핵심은 흰 호분으로 하얗게 칠해진 옷을 입은 귀여운 동자에게 주어져 있다. 전체적인 구도 면에서 보면 좌측 종반부에 무게가 치우쳐 있고 근경에서 굽어져 오르는 해조묘의 소나무가 주봉까지 치솟아 중경의 여백을 메워주고 있다. 동자 뒤에 보이는 토파나 원산은 분명하게 정의된 전경이나 주산의 모습과는 큰 대조를 이룬다. <동자견려도>에 보이는 김시의화풍은 이경윤의 <사호위기도>, 김명국의 <설중귀로도>등으로 그 전통이 이어진다.

안견파 화풍의 잔영,한림 제설도>"만력 갑신년 가을에 양송거사가 안사확을 위해 한림 제설도를 그리다"라는 관기와 "김시계수" 라는 주문방인이 있어 김시가 그의 만년인 1584년에 그린 것을 알 수 있다. <한림 제설도>의 구도나 공간 처리 등은 안견 작품으로 전칭되는 사시팔경도의 초동이나 만동의 그것에 바탕을 두고 좀더 옆으로 확산시킨 것임을 느낄 수 있다.

<한림제설도> 에서는 좌측에 수평적 요소를 강하게 나타내고 원산에 큰 무게를 부여하여 그림 전체에 비중의 균형을 이루게 한 것이 안견 작품으로 전칭되는 사시팔경도와의 주된 차이라 하겠다. 이것은 약 반세기 전 안견파의 작례라 할 수 있는 양팽손의 <산수도> 나 일본 대원사 소장의 <소상팔경도>등과 비교시 조선 초기의 전통을 바탕으로한 또 다른 형태의 변화라 할 것이다.

김시의 소그림-절파풍 산수 배경. 매우 한국적 소 그림. 중국이나 일본의 소 그림들과는 물론 우리나라 다른 화가들의 소그림들과도 완연히 구분된다. 이러한 그의 소 그림은 그의 종손인 김식에게 가전되어 후론하듯이 더욱 한국적인 화풍으로 발전한다. 그의 가전의 소그림의 배경이 되고 있는 산수는 거의 예외없이 절파화풍이다.

   

이숭효 이흥효-이상좌의 아들 . 이정-이상좌의 손자이며 이숭효의 아들(17세기화가)

이상좌는<송하보월도><어가한면도>등 남송 마하파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고 믿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들이 그의 진필이라고 확단할 처지가 아직못되고 있어 그가 과연 화원이었던 그의 2아들과 직업화가였던 손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없다. 지금 남아있는 화적으로만 판단하면 그의 2아들과 손자는 남송원체화와는 별로 관계가 없는 듯하다. 오히려 안견파 화풍이나 그들의 활동시대에 유행했던 절파화풍과 밀접했던 듯 하다.

이숭효<어옹 귀조도>:구도 의습처리등 절파풍, 요절

이흥효<산수도>: 명종 (1545~1567)의 용안을 그리고 군직까지 받았던 화가. 김시의 필법을 좋아했다고 전해짐. 유작으로는 그가 사망한 해인 1592년에 그린<산수도>한 폭만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만력 계사년 여름 흥양에 피난 와서 병중에 그리다." 라는 관기가 그림의 좌변에 서툰 글씨로 세로로 쓰여져 있다. 이로 보아 이 <산수도>는 이흥효가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을 피해 홍양에 머무는 동안 종국에는 그를 죽음으로 이끈 병을 앓으면서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그림은 이흥효가 사망하던 해에 그린 최후의 자품일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비스듬히 솟아오린 주봉과 대각선을 그으며 멀어지는 토파와 다리, 그리고 왼편 아래에 치우친 근경이 함께 어울려 느슨한 구성을 이루고 있다. 근경의 암석에 보이는 준법, 주봉의 음영, 토파의 처리 등에는 절파의 영향이 완연하면서도 근경의 수법 등에는 여전히 전통성. 이와 같은 절파화풍의 부분적인 수용은 조카인 이정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국박에는 안견파 화풍의 영향을 여실히 반영한 그의 팔경도가 남아있어 그의 전통주의적 경향을 엿볼 수 있다.

   

이정 -17세기 나옹이정. 한편으로는 절파화풍을 수용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전대의 전통회화에 대한 강한 집착을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아직도 버리지 않고 있었다. 17세기 초엽 이상좌 할아버지, 이흥효 아버지, 이흥효 숙부 대대로 화원이었던 집안 30세의 아까운 나이에 요절. 그는 이경윤의<산수 인물첩>에 발문을 쓴바 있는 간이당 최립을 따라 시문을 공부했다. 그이 숙부 이흥효가 홍양 피난 중 그린<산수도>그림 왼쪽 상부에 나옹이라는 백문방인이 찍혀 있따. 당시 도장인지 믿어야 할 것인지 의문스러우나 화풍으로 보면 이정의 시대와 부합하고 또 구도나 기타 양식적인 면에서 그를 길러준 숙부 이흥효의<산수도> 와 대체로 상통하는 바가 있어서 그의 작품으로 간주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정의 이 <산수도>는 비단 구도나 공간처리에서 뿐만 아니라 수지법이나 산의 모양등에서도 이흥효의<산수도>와 매우 유사한 바가 있다. 또 이정과 이흥효의 이러한 구도나 공간개념, 그리고 수지법 등은 안견작으로 전해지는<사시팔경도> 중 초동에 그 전통이 소급됨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이정과 이흥효는 그들의 할아버지, 아버지인 이상좌의 마하파적 화풍과 상치된다고 볼 수 있다. 이 점은 우리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문제에 대해 재고를 하도록 하고 있다. 그것은 즉 과연 이상좌가 마하파 화풍만을 주로 그렸던 거장이라고 믿고 있는 일반적인 통념이 타당한 것이냐 하는 점이다. 이상좌가 통념대로 마하파 화풍만을 따라 그렸고 또 이흥효와 이정이 그의 가법을 충실히 따랐다고 가정한다면 지금 논하고 있는 안견파 화풍의 영향이 강한 화풍은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이상좌 화풍은 통념대로 마하파적 화풍이었으나 그의 자손들이 그것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안견 화풍을 놏아 그렸다고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흥효나 이정은 집안에서 전해 내려오는 화풍을 이어받아 논의중인 산수도를 그렸으나 다만 이상좌의 화풍에 대한 일반적인 통념이 잘못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 이상좌가 마하파적 화풍과 아울러 안견파 화풍도 따라 그렸으리라는 가능성도 포함하여 생각할 수 있다. 어쩄든 이정의<산수도> 와 그의 숙부 이흥효의 <산수도>에서 안견파의 전통이 엿보이고 있는것은 사실이다.

이정의 <산수도>는 이렇듯 그의 숙부 이흥효의<산수도>에서 안견파의 전통을 보여줌과 동시에 다른 일면으로는 절파 양식이 가미된 새로운 요소들을 보여주고 있따. 주산의 전면을 처리한 모습이나 중경의 비스듬한 언덕을 백면과 그것을 에워싼 흑면으로 구획하여 처리한 점 등은 완연한 절파적 양식이다.

국박소장<산수도첩> : 제 2엽<누각산수도>나 제3엽<한강조주도> 등은 오히려 남종화의 이정 취향이 엿보이고 있어 흥미롭다. 특히<한강조주도>의 구도는 원말 사대가의 한 사람인 예찬이나 그의 화법을 이은 명대 오파의 화가들이 즐겨 택하던 것과 비슷하다. 이 점은 그가 연행을 통하여 북경화단에 세력을 확보하기 시작한 남종화풍과 접촉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 30세의 짧은 생애를 통해 절파화풍, 안견파화풍, 남종화 계통 화풍 등 3가지 화풍을 수용.

   

허주 이징: 17세기 절파풍의 대가 이경윤의 서자로 주부를 지낸 바 있다. 그의 생년은 알려져 있으나 죽은 시기 불분명 그러나 1645년 이후까지 생존하며 활약한 것 확실. 조경의 용주집에 의하면 이징은 조선에 와서 3년간 활동했던 중국인 화가 맹영광과 가까이 지냄을 알 수 있다. 현재 전하여 지고 있는 그의 전칭작들은 대체로 2가지 화풍으로 나뉘어 진다. 그 하나는 그의 가법을 이은 것이라 믿어지는 절파풍의 화풍이며 다른 하나는 보다 전통적인 안견파 화풍을 계승하여 나름대로 발저시킨 화풍이라 하겠다.

<소상팔경도>의 일부인 듯한 국박소장 산수도 2~3점: <연사모종> 석장을 짚고 다리를 건너고 있는 승려를 그린사수도는 <소상팔경도> 중 "연사모종" 을 그린 것으로 중경의 무너질 듯한 산의 모양이나 봉우리들의 묘사에 절파화풍의 영향이 엿보이고 있으나 전체적인 구도나 공간처리, 수지법 등에는 여전히 전통적인 안견파의 영향이 뚜렷/<평사낙안? 중경의 토파에 내려 앉은 기러기 떼를 바라보는 정자 속의 선비를 묘사하고 있는 또 다른 그림. 이것도 <소상팔경도> 중의 "평사낙안" 을 그린 듯 한데 원경에 무리지어 있는 봉우리들의 각이 진 윤곽선이나 흑. 백면의 대조를 위주로 하여 다른 묘법 등은 절파풍이지만, 구도나 공간 개념은 앞의 <연사모종도> 와 마찬가지로 보다 전통적. 이 산수도들에 인물이 나타나기는 해도 그 비중은 산수가 인물을 한 무대에 불과한 전형적인 절파풍의 그림에 비하면 너무나 미미 따라서 이징은 인물보다도 대산대수식 전통적 산수에도 보다 강한 집착.

   

김명국: 국박 소장의 달마도로 유명 조선 중기에 활약한 화가 그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아서 정내교의 <화사 김명국전>남태응의 <청죽화사>등에 약간의 기록이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생몰년 역시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고 1600년경 출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본관은 안산이고 자는 천여, 호는 연담 또는 취옹이라고 했다. 도화서 화원으로 교수(종 6품)까지 지냈고, 조선 통신사의 화원으로 인조 14년(1636)과 21(1643) 두 차례에 걸쳐 일본에 다녀온 바 있다. 농담을 잘하고 호방한 성격을 지녔었다고 하며 술과 그림에 얽힌 기행에 대한 일화가 적지 않게 알려져 있다. 김명국은 우리나라 화가들 중에서 제일 거칠고 호방한 필치의 절파 화풍을 구사했던 인물이다. 그의 유작들 중에는 안견파 화풍을 보여주는 것도 물론 있지만, 대부분의 것들은 전형적인 절파풍의 그것도 후기 양식인 광태적 화풍의 작품들이다. 그의 호방한 필치는 대표작인<설중 귀려도>에서 전형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시자를 거느리고 나귀를 탄 채 먼길을 떠나는 노인과 그를 떠나보내는 아쉬움을 사립문에 기대어 달래는 사람 사이의 따뜻한 인정을 차가운 설경 속에 대조시키고 있다. 언덕이나 산기슭의 굵고 힘찬 윤곽선이나 눈덮힌 산면에 액센트를 부여하는 대담한 부벽준, 앙상하고 아무렇게나 심통스럽게 뻗친 메마른 나무들, 폭설을 내리쏟을 듯 짙고 무거운 하늘, 이러한 모든 것들은 자연의 냉혹성을 유감없이 포현해주고 있다. 인간의 석별의 정 쯤은 모두 삼켜버리고 말 듯한 이 험상궂은 자연의 풍취는 사실상 김명국의 깊은 화경을 적나라하게 말해주는 듯하다.

또한 김명국은 절파풍의 산수인물도 이외에도 달마를 비롯한 선종화를 그렸다. 이는 일본에 갔을 때 선종화가 그 곳 사람들의 취향에 맞는다는 점과 빠른 시간 안에 그려낼 수 있다는 점 떄문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만년에 이르러서는 광태적 화풍에 비하면 훨씬 부드러운 느낌의 안견파 화풍의 그림을 그렸던 것으로 보인다. 국박 소장 금니산수가 그 예이다.

김명국에 대한 평가는 당대에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것은 당시 인조 연간 지배층 문화의 경직성과 보수적 경향, 권위주의의 강화와 관련되어 있다. 당시의 화단은 왕실을 비롯한 지배층의 취향에 맞는 작품을 그린 이징이 주도해 갔고, 김명국과 같은 절파 화풍의 화가는 빛을 보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김명국은 통신사의 수행화원으로 일본에 갔을 떄는 사정이 달랐다. 김명국의 필치와 기질이 일본 화단에 잘 맞아 떨어져 인기가 높았떤것 1636년에 일본에 다녀온 후 1643년 일본의 요청으로 이기룡과 함꼐 다시 일본으로 가게 되는데, 이처럼 조선 통신사 행차에 화원이 3명 간 예와 한 화원이 두 번 간 예는 김명국이 유일하다. 김명국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그의 사후 반세기쯤 지나 1700년 무렵이면 완전히 반전되는데, 숙종 연가을 지나 영조시대에 오면서 김명국에 대한 평가는 드높아지게 되다. 이는 개성적인 것을 가치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문화 전체의 변화 속에서 나타난 평가의 전환이었다.

   

<조선후기 화원들의 활동상>

조선 후기 들어서면서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이 전대에 윤두서, 조영석, 강희언 등 일부 화가들이 이들이 닦아놓은 길을 마음껏 달림.

김홍도: 정조 시대 문예 부흥기의 난숙한 문화적 생산을 충족시킨 조선 후기 대표적인 화원화가. 그의 <무이귀도도>18세기말~19세기초가 입증하고 있듯이 산수화에서도 개성있는 하엽준과 석법 그리고 수파묘를 구사하여 그나름대로 일가를 이루었음. 그는 도석인물화와 풍속화에서 더욱 뛰어난 경지. 화원이었던 그가 도석인물화를 많이 그리게 된 것은 당시의 서민사회에 널리 퍼져 있던 도석신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믿어진다. 김홍도의 대표적 도석인물화들은 대략 30대와 40대에 제작된것으로서 그들 옷의 포현은 1776년<군선도>나 1779년작<소선도>등의 작품에서 전형적으로 볼 수 있듯이 굵고 힘차면서 투박하고 경직된, 그리고 거친 느낌을 주는 선들로 정의되어 있다. 또 이러한 인물들은 강한 바람을 등 뒤에 업고 있는 듯 옷깃이 날리며 허리가 구부러져 있다. 배경이 없는 공간속에 표현되는 이들 도석인물들은 단원의 일반인물들의 경우와 같이","을 가로 누인듯한 모습의 큰 눈을 가지고 있다. 전반적으로 김홍도는 타인과 비교되지 않는 특유의 경지를 도석인물화에서 개척하였다고 하겠다.

김홍도의 풍속화는 조선 후기의 농민이나 수공업자 등 서민들의 생활의 단면을 소재로 한 것이 많으며, 또 조선적 정취를 십분 풍겨주는 것들이다. 소극적이기는 하지만 풍속화는 김홍도 이전에도 그려졌으나 서민들의 생활상과 그들의 생업의 이모저모를 간략하면서도 한국적 해학과 정감이 넘쳐 흐르도록 그림에 담는 화단의 풍조는 김홍도에 이르러 본격적유행을 보게 된다. 그의 풍속화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중국인이나 사대부들이 아닌 조선 후기의 얼굴이 둥글넓적하고 순수한 한국인들이며, 상투를 짜고 흰 바지와 저고리를 입은 서민들이다. 정선이 진경산수화에서 중국이 아닌 한국의 산천을 소재로 삼았듯이, 김홍도는 그의 풍속화에서 한국 서민사회의 정경을 다루었던 것. 그는 초기인 30대에는 <서원아집도>의 인물화와><행려풍속도>에서처럼 전통적 개념에 따라 산수나 옥우를 배경으로 중요시하였다. 그러나 단원은 이후 배경을 생략하고 풍속장면을 부각시켜 그리는 경향으로 나아갔다. 이는 짧은시간에 빨리그려내는 수요에 부응하고 장면 자체에 집중케 하여 해학적인 박진감을 높이는 결과를 낳았따. 이는 병풍에서 화첩으로 공간이 축소된 영향이기도 했다. <풍속화첩, 국박소장 18세기 후반>의 <서당>과 <씨름><무동>에서는 뛰어난 인물 배치를 통한 능란한 구도와 함께 서사적인 구성, 순간에 포착한 역동성을 느낄 수 있다. <풍속화첩>은 원형이나 x자형의 짜임새 있는 포치와 기를 불어 넣어 표정을 살린 인물 묘사, 생명력 있는 필선 등 단원의 1회화적 역량을 최대한 발휘한 그의 대표적인 풍속화이다. 단원의 풍속화는 동시대 쌍벽을 이룬 혜원과 비교하면 더욱 그 특징이 잘 드러난다. 김홍도가 소탈하고 익살맞은 서민 생활의 단면들을 다룬 데 반해 신윤복은 남녀간의 애정 또는 춘의를 즐겨 그렸다. 화면구성에서는 단원은 철저히 배경을 생략하였지만 혜원은 반대로 주변 배경을 치밀하게 묘사하여 인물의 행동 배경과 심리를 조망하였다.

이명기와 함께 제작한 <서직수 초상>에서의 사실적인 인체와 의복 묘사는 특유의 경지를 개척하였다. 이명기와 함께 제작한 <서직수 초상에서의 사실적인 신체와 의복 묘사는 어용화사로서의 단원의 초상화 기량을 보여 준다. 또한 이 시기에 김홍도는 사대부들의 처음으로 평생도를 종종제작하여 새로운 양식 창출하였다.

그의 화풍은 이후 산수에서는 이인문, 그의 아들 김양기로 이어졌으며, 풍속화에서는 신윤복, 김득신 등 동시대와 후대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18세기 경부터 시대 정신과 경제, 사회적 여건에서 연유하며 꽃피기 시작했던 풍속화는 김홍도에 이르러 정점을 맞이 하였다. 풍속화는 정선의 진경산수와 함께 당시 조선 후기에 유행한 한국적 화풍의 한 축을 구성하였다는 데에 의의를 가진다. 김득신의 <애묘도추도: 같은 풍속화들을 보면 그는 인물들의 생김생김이나 표정은 물론 수법이나 인물, 분위기의 포착 등에서도 단원의 화풍에 토대를 두고 있으면서 그에 못지 않은 역량을 발휘했던 풍속화가임을 입증해준다.

 

신윤복: 풍속화에서 소탈하고 익살맞은 서민생활의 단면을 주로 그린 김홍도에 반하여 신윤복은 남녀간의 애정 또는 춘의를 즐겨그림 신윤복의 이러한 색정적이면서도 일면 낭만적인 그림들에는 그의 <청금상련도>에서 잘 볼 수 있듯이 한량과 기녀가 주인공으로 등장. 그는 에로틱한 장면들 이외에도 무속이나 주막의 정경 등 서민사회의 정경을 보여주는 순수한 풍소고하들도 제작하였다. 신윤복은 그의 대부분의 작품에 짤막한 찬문을 쓰고 자신의 관지와 도인을 덧붙이고 있다. 유교적 도덕 관념이 농후했던 당시에 이처럼 속된 그림들에 자기의 작품임을 떳떳이 밝히고 있는 것은 그 자신의 대담성도 있었겠지만 그러한 행위가 가능했던 사회적 추이를 시사해 주는 것으로 큰 의의를 지닌다고 하겠다. 사실상 신윤복이 활약하던 정조, 순조 연간에는 쾌락주의적 경향이 커졌을 뿐만 아니라 사치하고 유흥을 즐기는 풍조가 팽배했었다. 이와 아울러 애정이나 감정의 표현이 좀더 자유롭고 또 전에 비하여 노골화되기에 이르렀다. 신윤복의 작품들은 이러한 시대적 조류를 나타내고 있다 하겠다. 또한 김홍도와 신윤복과 같은 화원들에 의해 풍속화가 많이 제작된 것은 전에 비항 일반적으로 사대부나 서민들의 생활에 다소 여유가 생기고 그에 따른 그림의 수요가 증대된 데에 기인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경향은 일본의 에도시데 유키유에의 발달에서도 나타났던 현상으로 주목할 만하다.

신윤복의 대부분의 작품들은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낙관이 되어 있으나 연기만은 한결같이 결하고 있어 그의 화풍의 발달을 연구하는데 큰 지장이 된다. 또 그의 작품들은 배경에 산수를 그리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러한 산수들에 보이는 바위 그리는 법이나 준법, 수파묘 등에는 김홍도의 영향이 뚜렷이 엿보이지만 그의 인물들에는 독창성이 역력하다. 김홍도의 인물들과 달리 신윤복의 인물들은 얼굴이 대체로 갸름하고 눈은 꼬리가 치켜 올라가며 의문은 유연하고 세려한 선들로 정의되어 있다. 또한 그의 여인들은 미인도에서도 전형적으로 나타나 있듯이 입이 작고 어깨가 좁으며 또 당시의 유행대로 가체를 얹은 큰 머리채를 하고 있다. 그들이 입은 저고리는 춤이 짧고 소매가 좁으며, 또 치마는 좁고 짧은 저고리와는 대조적으로 바람을 안은 듯 배추포기처럼 부풀어 있다. 이러한 것들은 그의 인물들의 특색을 돋보이게 해 준다. 이처럼 신윤복의 풍속인물화는 김홍도와 더불어 쌍벽을 이룬다 하겠다. 이러한 조선 후기의 한국적 풍속화는 19세기 조선 말기에 접어들어서는 진경산수화와 마찬가지로 쇠퇴 19세기에 풍미하였떤 김정희 일파의 남종화 지상주의 앞에 이러한 풍속화는 한낱 저속한 속화로 간주.

   

   

조선시대초기 한일회화 교류

2010년 5월 2일 일요일

오전 1:19

<조선초기:임란이전> -15새가 일본 무로마치시대 수묵화와의 관계

15세기 양국간 사절 교환 빈번 일본은 조선왕조와의 교섭을 통하여 경제적 이익을 추구 + 불교 부흥에 필요한 불전이나 불구는 물론, 기타 문적 이나 서화 등의 수입에도 힘써 문화적 이익을 도모하였다. 한편 조선왕조는 고려 말 이래로 해안 지역에 자주 출몰하는 왜구의 침입을 교린정책에 따라 일본과의 외교 교섭으로 막아 보려함. 양국간 밀접한 외교 관계로 많은 화적과 더불어 화가들의 내왕 일본 수묵 산수화의 개조 교토 쇼코쿠지(相國寺)의 슈분이나 선승 레이사이도 이러한 배경아래 조선을 다녀간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일본 화단에서 크게 활약했떤 수문이나 다이코쿠지를 무대로 활동한 문청 같은 화가들은 아마도 화풍과 단편적인 기록들로 미루어 보아 조선왕조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에 정착했던 인물들로 믿어진다.

한국에서는 늦어도 이미고려시대(918~1392)부터 외국에 보내는 사절단에 화원을 딸려 보내는것이 상례였으며 이러한 경향은 조선왕조에도 계승되어 중국이나 일본에 보내는 사절단에 의원 2인 사자관2인과 함께 화원1~2명을 파견하였다.

17세기의 기록으로 임진왜란 이후. 한*일간 외교 관계가 재계되고 조선왕조의 통신사 일행은 일본내 여정 중 쇄도하는일본인으로부터의 시문증답이나 희호의 요청을 받기도 하고 액자나 축물 병풍등의 서화의 구청에 응하느라고 밤잠보차 제대로 자지 못하였는데 이러한 것은 전대의 유습이라고 보아야 할 듯하다.

일본측국왕사인 상관인이나 부관인등의 요원들은 교토 오산십찰의 선승들이었고 이들을 따라 앞에 언급한 슈분 등의 선승화가들이 종종 수행하여 양국의 문화교류나 수용에 기여 쇼코쿠지, 다이코쿠지, 난젠지, 덴류지, 사이호지등 사찰과 그곳 화승들은 큰 역할을 하였다.

<파초야우도> 조선초기 수묵화와 무로마치 수묵화의 밀접한 관계를 말해주는 가장 연대가 올라가는 작품중 하나 본래 권으로 되어 있던 것을 축으로 개장한것인데, 태종10년 경인년(1410)에 봉례사로 일본에 건너갔떤 집현전 학사 양수와 교토 오산의 시승 16인의 제찬이 있어서 제작연도를 분명히 알 수 있고 또 그 경위를 짐작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일것. 아마도 양수를 환영하여 류잔(龍山), 즉 남선사에서 개최된 오산 선승들의 시회에서 파초 위에 촉촉히 내리는 가을의 밤비를 소재로 하여 시를 짓고 화사로 하여금 그리도록 한 것으로 믿어진다. 양수의 찬시와 더불어 당시 일본작품으로 보기에는 전체적인 구도나 공간 개념, 그리고 산의 묘법 등에 있어서 한국적인 요소가 너무 현저함으로 이것이 조선 초기 회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일본 화가의 작품이냐 아니면 양수를 수행했던 조선왕조 화원의 작품이냐에 대해 논의가 있다.

대체로 안정된 대칭을 이루면서 우측으로부터 좌측 뒤편으로 후퇴하는 대각선 구도, 전경과 중경 사이를 아직 미숙하나마 수면과 운무로 채워 넓은 공간을 형성해 보려는 경향, 또 그 때문에 가라앉을 듯이 보이는 중경, 첨예한 토파와 그 주변의 특이한 수초, 주산의 뒤쪽 좌우에 대칭적으로 서 있는 윤곽뿐인 원산, 그리고 무엇보다도 흑백의 대조가 강렬한 묘법 등은 일본화에서보다 15세기부터 16세기까지의 조선왕조 회화에서 더욱 자주 볼 수 있는 특징들인 것이다. 특히 주산에 보이는 강렬한 흑백의 대조 묘법은 조선시대의 회화에서 16세기 후반까지도 일부 지속되고 있던 한국적인 특징들인것이다. 이 밖에도 <파초야우도>에 보이는 소나무와 버드나무의 처리 방법이나 묵법등에는 남송원체화의 영향이 자못 짙어서 곽희 파 화풍을 토대로한 안견파 화풍이 더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조선 초기의 화단과 관련지어 흥미로운 유의점을 제기해 준다.

(무로마치 수묵화 :슈분파)

슈분: 그는 조세쓰(如拙)에 이어 교토의 상국사(相國寺)를 근거지로 장군의 휘하에서 어용화가로 활동하면서 소위 아카데미파의 기틀을 잡아 놓은 선승화가. 그는 일본과 한국에서 문화가 한창 꽃피었던, 그리고 양국의 문화적 교섭이 빈번했던 15세기 전반을 배경으로 활약하면서 시화축의 산수화를 발전시키는데 괄목할만한 공적을 남긴화가. 1423년 내한기록. 그가 자신의 화풍을 형성함에 있어서 조선 초기 회화로부터의 영향을 수용하였으리라는 점 고려. 슈분의 작품으로 전칭되는것은 수점 남아 있으나 그의 진작으로 믿어 논란의 여자가 전혀 없는 확실한 것은 한 점도 없는 실정으로 연구에 난제 제기. 다만 그가 서울을 다녀간 이후 그렸다고 믿어지는 작품들 중에는 전경, 중경, 후경의 삼단으로 이루어지는구성, "전경과 중경사이에 깊고 넓은 공간을 두어 퍼스펙티브한 효과를 올리고 있는 점;' 등 조선 초기 회화에서 볼 수 있는 특색을 나타내고 있다.

   

   

슈분의 그러한 구도와 공간 구성 등은 그를 따른 가쿠오나 쇼케이 등의 작품들에서도 간취되어 그 전통의 맥략을 엿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가쿠오의<산수도>를 사시팔경도의 초동과 비교해 보면 편파이단구도, 확대된 공간, 근경의 언덕 모티프, 배경의 주산 형태 등 모든 면에서 상통함을 엿볼 수 있다. 역시 다른점이 있다면 가쿠오의 <산수도>는 표면 묘사에 있어서 안견파 화풍이 아닌 남송 원체화풍을 따르고 있다는 점이다. 즉 구도, 공간개념, 주요 모티프 등 크고 주요한 것은 안견파 화풍을 채택하면서도 표면 묘사만은 일본인들의 기호에 맞는 남송화풍을 따르고 절충함으로써 일본적인 수묵 산수화풍을 이룬것.

조선 초기 회화의 영향은 슈분 이외에도 소위 소가파(曾我派)화가들의 작품들에서도 짙게 엿보임.

수문(秀文): 소가파의 시조로 전해짐. 그는 상국사의 화승 슈분과 일본어에서 발음이 동일하나 다른사람으로 그의 국적에 대해서 명나라 사람이라 하기도 하고 조선인이라기도 하여 확하지 않았으나 몇 년 전에 발견된<묵축화책(墨竹畵冊)>에 의해 그가 우리 나라 사람이었으리라는 심증이 굳어지게됨.

일본 화전에 의하면 수문은 히슈에 살았떤 소가파라는 화파의 개조가 되었다고 한다. 수문의 도장이 찍혀 있는 작품들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1424년에 그려진 <묵죽화책>이라고 할 수 있다. 열장의 대나무 그림으로 구성이 된 이 화책에서는 관지의 존재로 1424년 수분이 그린 것임을 확인. <묵죽화책>에 그려진 대나무는 물론 그 밖에 바위와 언덕의 처리가 흥미로움 10폭에 담긴 다양한 양태의 대나무들은 중국 원대 묵죽화 영향의 흔적을 보여주면서도 잎이 길고 큰데 비하여 줄기는 가늘고 연약하여 조선 초기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대나무 그림들과 동일한 양식적 특색을 보여준다. 이는 1464년 명나라 사신으로 우리나라에 왔었던 김식이 우리나라의 대나무 그림들을 보고 마나 갈대와 같다고 비유했던것과 부합.

<임화정도>: 묵죽화책에 찍혀있는 장방형의도장이 날인된 작품중 하나 북송때 유명한 시인으로 매화와 학을 기르며 은둔생활을 했던 임포를 그린그림. 산언덕의 처리나 소나무의 모습, 그리고 인물과 자연의 대등성 등은 이 그림이 남송때 화원으로 활약했던 마원과 하규 일파에서 기원된 화풍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문청: 15세기 한일 회화교류와 관련 수문 못지 않은 중요한 위치 1450년대및 1460년특히 괄목할만한 활동 국박소장<누각산수도>한폭 우리나라에 남겨져 있음. 그의 산수화들은 미국보스턴 미술박물관 소장<산수도> 와 일본 마사키 미술관 소장<산수도>처럼 부분적으로는 우리 나라 조선 초기의 화풍의 영향을 보여주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일본적으로 다듬어진 마하파 양식을 따르고 있는 작품들을 들 수 있고

국박소장<누각산수도>나 일본의 다카노 씨가 소장하고 있는<연사모종도>와 <동정추월도>쌍폭 산수도의 경우처럼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 철저하게 한국적인 화풍만을 보여주는 작품도 있다. 그의 국적에 관해서는 본래 일본인이었는지 아니면 우리나라사람이었는지에 대해 의견차

국박소장 누각산수도 ->한국적화풍 커다란 산봉우리를 오른쪽 하단부에 치우쳐 그리고 그 틈에 높은 건물들을 배치하고 있다. 산의 형태나 산의 표면 처리법, 공간개념, 치아 모양의 돌기, 바늘 같은 나무들, 묵법 및 필법 상의 특징은 이 그림의 양식이 한국화된 곽희파 화풍을 따르고 있음을 말해줌 주산의 밑부분은 자세한 표현을 생략하고 있어서 마치 안개의 바다 위에 둥실 떠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산기슭은 젖고 부드러운 붓으로 규칙적으로 그어내려 둥글고 원만한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뒷부분과 희게 남아 있는 부분이 반복되어 조광효과 산 사이 굽은 계단길을 통해 다다르게 되는 절의 누각은 아무런 배경도 없는 대지 위에 분명치 않게 서 있다. 이러한 모든 특징들은 일본이나 중국 회화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한국적 특징

   

파초야우도 1410년경 비단에 수묵 필자미상

일본 개인소장

   

<죽재독서도> 의 예에서 보듯이 한편에는 고원적인 구성을

이루고 반대편에는 평원적인 구성을 전개시키는 특징을 나타

내고 있는데, 이와 같은 구성상의 특색도 조선 초기 안견파

회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슈분이 조선을 다녀간 후에

그린 작품으로 전칭되는 이 <죽재독서도>와 안견의 전칭작

인 <사시팔경도> 중의 "만춘" 을 비교해 보면 한쪽 무게가

치우쳐 있는 편파이단구도, 확대 지향적인 공간 구성, 근경에

45도 각도로 치솟은 언덕과 쌍송 등이 놀라운 정도로 흡사함을

알 수 있다. 다만 두드러진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죽재독서

도>의 준법이 남송 원체화풍을 따르고 있다는 점이다. 즉 슈

분은 구도, 공간구성, 언덕과 쌍송의 모티프 등에서 조선의

안견파 화풍을 수용하고 준법은 남송 원체화의 부벽준을 채택

하여 절충함으로써 일본적인 화풍을 창출했음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슈분이 수용했던 조선의 회화는 곧 안견파 화풍임

을 확인하게 되며 또한 슈분이 내조했던 1420년대에 안견은 이

미 상당히 영향력 있는 화가로 자리잡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임진왜란 이후 한일 회화 교류

2010년 5월 2일 일요일

오후 7:16

한, 일간의 우호적이었던 종래의 관계는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큰 손상. 전쟁 이후 일본에서는 德川幕府가 집권하게됨. 德川幕府는 조선과의 우호적인 외교관계를 재개코자 갈망하며 1607년 임진왜란 이후 최초의 통신사 파견 1868년 明治維新까지 약 2세기 반 가량 계속됨 그러나 우리나라의 마지막 통신사가 파견되었던 것은 1811년이다. 1607년~1811년까지 12차례의 통신사 파견 德川幕府의 적극적인 親朝鮮政策에 따라 17세기부터 19세기 초까지 양국간 빈번한 사신교환이 이루어짐. 이 시기에도 일본은 선진의 문화를 적극 수용코자 부단한 노력. 통신사절단내 화원이1~2명 포함. 일본측에서 한국회화에 대한 선호가 엄청나게 높았던 관계로 우리나라에서도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을 뽑아 보냈으며 일본측으로부터도 서화를 잘하는 사람을 데려다 줄것을 요청. 임란이후 모두 14명의 화원들이 파견되었으며 그들이 일본에 남긴 작품들은 여정 중에 일본인들의 적극적이고 계속적인 요청에 짧은 시간 내 그린 것들로 대부분 여행 중 바쁘고 불안정한 분위기에서 즉흥적으로 제작된 일종의 卽度畵인 경우가 많다. 대체로 대작보다는 소품들이 많고, 시간과 정성을 쏟아 그린 작품보다는 빠른 속도로 그린 손쉬운 그림들이 많이 섞여 있을 수 있따. 또한 차분한 제작 분위기와 시간을 요하는 채색화보다는 그 노력을 절약해 주는 수묵화가 주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의 미의식이 채색화보다는 수묵화를 선호했던 점과 일치하며 이 밖에 앞에 언급한 제작여건도 크게 작용했다.

   

이 밖에 일본인들의 요청을 받아 그린 그림 중 요청자인 일본인들이 선호하는 것을 그려주거나 그들이 원하는 바를 어느 정도 수용한 그림들도 포함되어있다. 김명국이나 한시각, 이성린, 김유성 등이 선종화를 일본에 남겼던 일은 기본적으로 억불숭유정책 때문에 화원들이 "선종화" 를 적극적으로 그릴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던 반면 일본에서는 그것이 크게 유행했던 것이다.

Ex)김명국<壽老人圖>: 유난히 큰 머리와 지나치게 짧은 하체, 그리고 필묵법 등에서 그의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일본적 취향을 강하게 풍겨준다.

   

일본에 파견되었던 이시대 화가들의 화풍은 대체적으로 조선 중기(약1550~약1700)의 화풍을 보여주는 것과 조선후기(약 1700~1850)의 화풍을 보여주는 것으로 남아 있는데 김명국의 여러 작품들을 위시, 조선 중기의 필묵법을 반영한 함세휘 의 <富士山圖-부사산도> 조선 중기의 묵매화풍을 좀더 과장한 박동 진등이 그 좋은 예이다. 그런데 박종진이나 함세휘는 년대적으로 조선후기의 인물이면서도 당시에 새로 유행하던 화풍(남종화풍, 진경산수화풍)등을 외면하고 조선 중기의 화풍에 아직도 매달리고 있는 보수성이 흥미로우며 이는 화원들이 문인화가들에 비하여 보수성이 강하다고하는 사실을 확인하는 동시 보수성이 강한 화원들이 진보적인 성향의 화풍을 구사하던 화원들보다 선정시에 선호되었던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1748년에 도일한 최북과 이성린, 1746년에 파견된 김유성 그리고 1811년에 대마도까지만 갔던 이의양등의 화풍은 대체로 조선 후기의 화풍을 보여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중기 화풍의 전통도 여전히 계승하고 있다.

   

당시 일본회화에 미친 영향은 일본 남화의 대가였던 池大雅(이케노 다이가)가 1764년 방일했던 김유성에게 정중히 보내어 김유성의 그림을 신업이라 생각되며 김유성에게 후지산을 중국의 동원과 거연의 화법으로 그린다면 어떠한 준법을 쓰면 좋겠는지 묻고 돌아가는 뱃길에 기분이 나면 자기에게 그림을 그려 보내주면 고맙겠다고 요청 이러한 편지로 부터 남화의 대가가 김유성을 더 없이 높이 평가하고 그로부터 배우고자하는 진지한태도와 한국화가나 회화에 대한 진실한 존경을 지니고 있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으며 일본 남화의 대가였던 당시 42세의 池大雅가 중국 南宗畵法의 발전에서 가장중요시 되는 거연과 동원의 준법에 관하여 확실히 모르고 있었던것으로 보이는점 1764년에 있어서의 남종화의 한 국면을 이해하는데 크게 참고. 또한 그의 화풍은 정선 최북, 김유성등 조선 후기 화가들과의 연관성을 드러내줌.

   

   

진경산수화에 대하여 논술하시오

2010년 5월 2일 일요일

오후 12:52

조선 후기 회화가 이룩한 업적으로서 무엇보다도 주목되는 것은 우리 나라 특유의 진경산수화와 풍속화의 창출이라 하겠다. 우리 나라에 실재하는 산천을 한국적 화풍으로 묘사한 것이 진경산수화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의 창출은 정선에 의해 이루어졌다. 정선이 언제 진경산수화를 시작하였는지는 분명히 알 수 없지만, 그의 진경산수화풍은 당시에도 파격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이 점은 그의 친구였던 조영석의 말에서도 드러난다.

조영석은 정선이 금강내외산을 출입했으며 영남지방을 편력했고 위쪽으로는 여러 승경들을 유람하여 그 특색을 파악하였다는 점과, 스스로 신격을 창출하고 우리 나라 회화의 누습을 싹 씻어버렸으니 우리 나라 산수화는 그로부터 개벽이 시작되었다고 기록하였다. 정선이 신격을 창출하고 산수화에 개벽을 이룩했다고 한 것은 결국 그의 진경산수화를 지칭한 것이 확실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실경을 그리는 산수의 전통만은 비단 정선에 이르러 처음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미 고려시대부터 유행이 되어 조선시대로 이어진것 임에 유의하지 않을 수 없다. 즉 고려시대에는 이녕의 <예성강도>와 <천수사남문도>를 그렸던 사실이 주지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 밖에도 작가는 알 수 없으나 <송도팔경도><진양산수도><금강산도> 등이 제작되었다. 또 조선 초기에 이르러서는 <한강유람도>등이 제작되었고 무엇보다도 중국 명의 사신들에게 주기 위하여 "금강산도"가 빈번하게 그려졌으며 또 일본 사신의 요구에 따라<삼각산도>를 그리게 하였던 일도 있었다. 이러한 그림들은 물론 화원들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던 것인데, 과연 어떠한 화풍으로 그려졌으며, 또 정선의 진경산수화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지금 전해지는 작품이 없어서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빈번하게 그려졌던 금강산도 같은 것들은 조선초기나 중기에 이미 어떤 정형이 있었을 것으로 유추될 뿐이다. 어쨌든 이러한 사실들은 우리나라의 실경을 그리는 화습이 일찍부터 유행하고 있었던 점을 말해준다.

현존하는 작품들과 기타의 문헌사료로 판단해 보면, 정선은 조선 후기에 있어서 남종화의 발달 뿐만 아니라 본격적인 진경산수화의 발전에 선구적이며 지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애기할 수 있다. 그는 진경산수화의 의의는 단순히 한국의 산수를 화제로 택했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러한 화제를 다룸에 있어서 독자적이며 한국적인 화풍을 형성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정선이 만년에 그렸던 것으로 인정되거나 확인되는 작품들에는 그의 개성 있는 화풍이 특히 역력하게 나타난다. 그는 전국 방방곡곡의 승경을 두루 섭렵하고 그렸지만 그 중에서도 금강산의 내, 외경을 특히 많이 그렸는데 이들 작품들은 그 구도나 필법상 두드러진 특징을 보여준다. 금강산도들의 경우에는 대개 좌측에 일종의 미점을 써서 그린 윤택한 토산을 배치하고, 좌측의 대부분의 공간에는 수직준으로 처리된 수많은 뾰족한 봉우리의 암산들을 그려 넣는 것이 상례이다. 둥글고 부드러운 토산들은 이웃의 뾰족하고 날카로운 암산들과 강한 대조를 이룬다. 정선의 금강산도들은 수많은 산봉우리들을 일정한 크기의 좁은 화면에 모두 그려 넣기 떄문에 산들의 규모는 부득이 작게 묘사되며 또한 반 조감도적으로 표현된다. 또 이러한 계통의 작품들에 보이는 수직준들은 대개가 강하고 활달하며 예리한데 반해 미점들은 부드럽고 습윤하다. 정선의 진경산수화는 신미년에(1751)제작된<인왕제색도>에 이르면 그 절정을 나타낸다. 비가 내린 후 개이고 있는 인왕산 경치가 실감나게 표현되어 있으며, 또 짜임새 있는 구도, 양감이 풍부한 암벽의 처리, 농묵으로 능란하게 처리된 소나무들, 걷히는 비구름 밖으로 돋보이는 굴곡이 심한 산봉우리, 생동하는 전체의 경관등은 정선의 화풍이 만년에 이르러 극도로 완숙해졌음을 분명히 말해준다.

정선의 진경산수화풍은 그의 손자인 정황과 제자인 심사정에게도 어느 정도 전해졌지만 그밖에 강희언, 김응환, 김홍도, 이인문, 김석신, 최북, 김윤겸, 이유성, 정충엽, 정수영등 많은 화가들에게 다소간을 막론하고 영향을 미쳐 진경산수화의 대유행을 이루게 되었다. 이들은 진경산수화와 함께 남종화풍을 수용하기도 하였는데 이 또한 정선과 마찬가지여서 서로 맥이 통한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18세기에 이처럼 진경산수화가 크게 유행하게 된 배경에는 정선의 영향 이외에 당시의 비교적 안정된 정치와 경제, 사대부층 사이에 퍼지고 있던 여행 붐, 지도 제작의 활성화 등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여행 붐은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당시에 명산승경을 유람하고 시문을 지어 기행문학을 발전시켰다. 여행을 하며 시인들은 시를 지었고 화가들은 진경산수화를 그렸던 것이다. 명산승경 중에서도 금강산은 제일의 목표였다. 이 때문에 조영석 같은 사람은 당시 금강산을 찾는 여행객에 어림하여 연간 수 천명이 넘었다고 보았다. 이러한 여행붐이 기행문학과 함꼐 오랫동안의 기념을 위하여 진경산수화의 유행을 촉진시켰다고 볼 수 있다. 조선 후기에 유행하였던 진경산수화는 조선말기에 이르러 남종화 지상주의적 경향을 강하게 띠었던 김정희파의 대두와 함께 쇠퇴하게 되었다.

   

   

산수화의 발달과 전개

2010년 4월 28일 수요일

오후 6:40

1.한국산수화의 발달

동양에서 산수화란 자연의 표현인 동시에 인간이 자연에 대해 지니고 있는 이른바 자연관의 반영.

1)삼국시대및 남북조시대의 산수화

-고구려의 산수화

한국에서 먹이나 채색을 써서 붓으로 그리는 넓은 의미에서 산수화가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다른 분야의 회화와 마찬가지로 삼국시대부터이다. 청동기시대에 이미 자연의 변화에 적응하여 농경생활을 영위하고, 또 자연현상의 일부를 선각화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곧 한국 산수화의 시원으로 볼수는 없는것. 지금까지 알려진 자료에 의거해보면 회화다운 회화가 발전된 것은 삼국 시대 중 에도 그 중엽에 해당하는 4세기경의 고구려라고 여겨짐. 물론 고구려와 한과의 문화 교섭 관계를 감안하면 이미 4세기 이전에 고구려에서 회화가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다고 생각되지만 그것을 입증하여 줄 자료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회화의 여러 분야 중에서도 산수화는 인물등 타분야에 비하여 좀 늦기는 하지만 고구려의 경우 5세기 초경 벌써 수렵도의 배경으로 묘사

산수화의 시원은 삼국시대 중엽에 해당되는 4세기 고구려에서 발생했다고 생각. 한과의 문화 교섭 관계를 감안하면 이미 4세기 이전에 고구려에서 회화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지만 입증해줄 자료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회화의 여러 분야 중 산수화는 인물 등 타분야에 비하여 좀 늦기는 하지만 고구려의 경우 5세기 초경에 수렵도의 배경으로 묘사 된것이 확인

   

   

   

덕흥리고분벽화(5세기초):영락 18년 408년의 연기/전실 동측천정에 수렵도에 기마인물과 함께 산이 묘사. 말을 달리며 활을 당겨 사냥하는 무사들의 힘찬 모습을 약간 어색한 솜씨로 묘사 넓은 판자를 굴곡지게 오려서 세워 놓은 듯한 산악의 모습. 나무의 모습들도 반원의 초록색 버섯 연상 아직 나무다운 모습을 제대로 갖추지 못함. 산의 부피나 깊이, 또는 산다운 분위기 등이 결여. 비례에 맞지 않음 산의 크기가 말과 인물에 비해 지나치게 작다. 대자연으로서의 산이 아닌 사냥을 하는 것만 나타내 주는 상징체의 표현. 인물화나 동물화에 비해 수준이 뒤져있다.

 

무용총의 수렵도(5세기말):5세기 후반경 축조된것 으로 믿어짐. 호랑이와 사슴 등의 산짐승을 사냥하는 무인들의 힘찬 모습. 달아나는 동물들의 경황없는 모습. 활을 당기는 무사들의 모습이 넓은 공간 속에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 앞의 덕흥리 고분의 벽화보다 훨씬 활달하고 사실적. 그러나 인물및 동물의 세련된 표현과 대조적으로 산과 나무들은 아직도 상징적 성격. 산들은 波狀의 굵고 가는 선들로 표현. 이 산들에도 부피나 깊이, 거리와 산다운 분위기 등이 제대로 구현되어 있지 않다. 또한 인물이나 동물들의 크기에 비해 산이 지나치게 작다. 이처럼 이 파상의 산들은 사냥이 이루어지고 있는 자연의 상징적인 표현에 지나지 않음. 그러나 산의 능선이 나타내는 파상선들은 힘찬 소용돌이의 수렵장면에 어울리게 율동적인 느낌. 가장 가까운 산은 흰색으로 그 다음의 산들은 빨강색으로, 그리고 가장 멀리 있는 산은 노랑색으로 칠해져 있어 고대 設彩의 원리를 보여줌. 수렵도 근경의 높이 솟아오른 나무 한그루, 그 뒤쪽의 가까운 산에도 3그루의 나무들은 무용총 바로 옆에 위치하고 연대도 비슷한 각저총의<수하각저도>에 그려진 나무들과 꼭 마찬가지로 하나같이 "손바닥 위에 주먹밥을 올려놓은 듯한 형상"=>중국 한대에 종종 표현되었떤것 그 영향을 고구려의 화가들이 받아들여 무용총과 각저총 등에 그린것. 한대 회화의 영향은 근경의 나무에서 뿐만 아니라 산을 포함한 전체의 수렵도에서 엿보인다. 수렵의 장면을 도식화된 산을 배경으로 묘사하는 것은 중국의 경우 이미 한대에 이루어 졌음. 고구려의 수렵도가 훨씬 활달하고 율동적.

   

강서대묘(6세기말~7세기전반): 고구려 후반 축조 추정 고분 현실남벽과 천정의 서쪽 및 동쪽의 받침에 각각 산들이 그려져 있어 고구려의 산수화 연구에 좋은 자료를 제공. 이중 천정동쪽 받침에 그려진<산악도>는 많은 참고가 되고 있다. 가운데 제일 높은 주산을, 그 좌우에는 좀더 낮은 객산, 그리고 이 산들의 사이에는 모가 난 암산들을 적당하게 배치하여 묘사. 주산과 객산들은 부드러운 능선을 지닌 삼각형의 토산으로서 여기저기에 수정기둥처럼 돋아난 암산들과 좋은 대조. 주산과 오른편 객산의 능선에는 비교적 사실적인 모습의 나무들이 서 있다. 또한 능선을 따라서는 일종의 음영법이 약간 가해져 제법 부피나 괴량감을 자아냄. 이처럼 주산과 객산의 형식을 갖춘 좌우가 안정된 삼각형의 구성을 지니고 있는 점. 이처럼 주산과 객산의 형식을 갖춘 좌우가 안정된 삼산형의 구성을 지니고 있는 점, 전대의 산들과 달리 음영에 의해 괴량간을 표현한점, 암산과 토산을 구분지어 표현하고 또 산과 산 사이의 거리감을 나타낸 점, 그리고 무엇보다 산다운 분위기를 어느정도 효율적으로 표현한 점 등이 강서대묘의 산악도가 앞의 덕흥리고분이나 무용총 산악도보다 훨씬 발전한 듯하다.

   

내리1호분: 단실로 이루어진 구조, 사신도를 4벽에 그린 점, 그 밖의 양식적 특색으로 미루어 보아 강서대묘 보다 좀 늦은 7세기 전반에 축조된 것으로 추측 산수화의 변화가 엿보임. 내리1호분 현실 동벽 천정부분의 산악과 나무의 모습은 강서대묘의 그것을 좀더 발전시켜 강서대묘의 산악과 마찬가지로 내리1호분의 산악도 주산과 객산의 형태가 갖추어진 대체로 삼산형이고 굵은 윤곽선의 약간의 음영을 지니고 있다. 다만 주산의 능선이 옆으로 길게 뻗어 좀더 여유 있는 공간감을 자아내며 능선상에 늘어선 나무들의 모습이 훨씬 변화감 있게 표현된 것이 두드러진 차이. 나무들의 곡선진 도체와 손가락을 펴서 받쳐든 듯한 나뭇잎의 표현이 이채로움. 그이점산과 나무의 모습보다 훨씬 자연스럽고 사실적 경향 나무에서 느껴지는 율동감. => 중국 육조시대 미술과 연관. 이는 진파리 1호분에서더욱 뚜렷이 나타남.

진파리1호분: 내리 1호분과 대체로 비슷한 시기에 축조되었다고 믿어짐. 현실 북벽의 현무와 그 주변의 그림들이 특히 관심. 좌우에 나지막한 언덕과 그 위에 솟아난 나무들을 배치한 후, 그 사이의 공간에 사신의 하나인 현무를, 그 왼쪽에는 인동연화와 구름이 바람에 날리고 있는 듯한 모습, 나무들의 두갈라진 동체들이 유연한 곡선을 짓고 있는 모습이나 비교적 사실적으로 묘사된 잔가지와 나뭇잎 등을 보면 내리1호분의 벽화보다도 좀더 세련되고 발전된 것임을 말해준다. =>좌우에 언덕과 나무들을 배치 그 안의 공간에 주제를 표현하는 구성이나 바람에 나부끼는 듯한 분위기의 표현등은 육조시대 미술과 관계 넬슨미술관 소장의 석관에 새겨진 석각화와의 비교를 통해 쉽게 입증.

   

==>고구려의 산수화는 5세기 한대와 6세기말부터 7세기 중엽에 걸치는 후기에는 육조의 회화와 교섭하며 발전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5세기 초에는 덕흥리 벽화고분에서 보았듯이 평면적이고 형식적인 산악과 수목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으나 5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무용총의 수렵도에서 보듯이 비록 상징적이긴 하지만 동적이고 비교적 사실성을 추구하고 있었다고 믿어진다. 이것이 6세기 말부터 7세기 전반에 걸치는 시기에 좀더 율동적이고 사실성이 강한 경향을 띠게 되었던 듯하다. 삼산형의 산악의 형태와 거기에 구현된 산과 산 사이의 거리나 공간, 그리고 산다운 분위기와 나무다운 나무의 표현 등은 이를 잘 말해준다. 이처럼 고구려의 산수화는 대체로 초기로부터 중기를 거쳐 후기로 넘어가면서 점차 발전 이러한 고구려의 산수화는 다른 미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백제와 신라에 전해져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측된다.

   

-백제의 산수화

부여 규암면 <산수문전>: 대체로 7세기 전반의 것으로 추정. 앞의 고구려 산수화들보다도 오히려 발달된 것. 그 배후에 백제 산수화의 긴 발달과정이 있었음을 시사 그러나 현재 백재의 산수화는 단 한 점도 남아 있지 않아 그 구체적인 파악이 불가능. 중앙부에는 소나무가 늘어선 삼산형의 토산을, 하부의 근경에는 수면을, 좌우변에는 풀이 나 있는 암산을, 그리고 상부에는 구름이 떠 있는 하늘을 표현. 좌우가 대체로 대칭을 이루는 균형잡힌 구도를 이룸. 산과 산 사이에는 거리와 공간이 시사. 무엇보다 산다운 분위기가 충만해 있다. 또한 근경의 오른쪽 모퉁이에는 중경의 산사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 승려의 모습이 보이고 있어 한층 대자연의 경관을 돋보이게 한다. 이처럼 이 산수문전에 표현된 산수는 매우 사실적이면서도 서정적이기까지 하다. 또한 토산과 암산의 형태상의 구분은 물론, 식물의 종류까지 구별하게 표현한 점은 이 산수문을 표현한 사람이 매우 예리한 관찰력과 능숙한 묘사력을 지니고 있었음 반증 다만 토산을 삼산형으로 도식화한 것은 이 문양이 순수회화보다는 공예품을 장식하기 위한 것이었던 데에 연유한 것으로 이해됨.

무령왕릉 발견 은제탁잔의 산수문양: 이미 6세기초 금속공예품에 도안으로 등장할 정도로 산수화가 활발히 제작되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신라의 산수화

기미년명 순흥읍내리 벽화고분 산악도:

   

   

   

-통일신라 및 발해의 산수화

   

   

2)고려시대의 산수화

고려시대의 변화: 주로 실용적인 목적의 그림이 그려졌던 통일신라시대 이전과는 달리, 고려시대에는 회화가 화원들 이외에도 왕공 사대부나 승려들에 의해 자주 그려지게 됨. 인물화 등 여러 분야의 회화와 함께 순수한 감상을 위한 산수화가 자주 그려지게 됨. /북송, 남송, 금, 원, 명 등 중국과의 회화교섭을 통해 많은 자극을 받고 자체 발전의 계기를 마련 했던 것으로 믿어짐. 대체로 고려의 전반기에는 북송과 남송의 영향을 수용하였고, 후반기에는 원대 회화의 자극을 받아들였던 것으로 추측되나 그 구체적인 양상은 자료의 부족으로 규명하기가 어렵다. 특히 고려 전반기 산수화의 양상을 밝혀주는 작품은 전혀 남아 있지 않은 실정

<성암 고서박물관소장 어제비장전 권6, 제2도>:고려 전기의 산수화가 북송의 그것과 많은 연관성이 있었음과 아울러 그 수준이 높았었음을 엿볼 수 있다. 오른쪽 가운데 위치한 정자에 앉아서 설법을 하는 고승과, 무릎을 꿇고 그의 가르침을 받고 있는 머리깎은 성려와 그의 감화를 받기 위해 먼길을 찾아오는 지팡이를 쥔 속인. 그리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길을 떠나는 승려의 모습(왼편의 산길)등을 대자연을 배경으로 묘사하였다. 그런데 이 서사적인 표현의 주인공들은 매우 작게 묘사되어 있고 그 배경을 이루는 산수는 웅장하게 표현되어 있어 오대 말에서 북송 초 사이의 산수화의 경향과 대체로 공통성을 보여 준다. 또한 여기에는 고원, 평원, 심원이 고루 갖추어져 있고, 여러 가지 모양의 산과 종류가 다른 나무들의 모습이 다양하게 표현되어 있어 고도로 발달된 산수화의 일면을 엿보게 한다. 여기에 표현된 산수는 비록 판화이기는 하지만 앞에서 살펴본 삼국시대의 초보적인 단계에 있던 상징적 표현체로서의 산수화와는 달리 매우 사실적이며 서사적인성격.. 군형을 이룬 포치, 인간이 설법하고 여행할 수 있는 넓은 공간, 대자연의 모습을 실감케 하는 다양한 표현기법들은 11세기를 전후한 고려산수화의 높은 수준=>북송대 산수화와의 교섭을 토대로 이루어졌다고 생각 . 기록을 통해 11세기 후반과 12세기 초에 걸쳐 북송의 많은 산수화들이 고려에 전래, 적지 않은 수의 고려 산수화들이 북송에 전해져 일부 소장가들의 손에 들어가 있었다.

   

늦어도 12세기 전반에는 이미 한국적인 실경산수화가 발전하고 있었다고 생각:인종대(1123~1146)의 유명한 화원 이녕이<예성강도>와<천수사 남문도>등을 그렸던 것은 좋은 예이다. 이 밖에도 필자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금강산도>,<진양산수도>,<송도팔경도>등이 기록에 전해지고 있는것을 보면 고려시대에 한국적인 실경산수가 발달했음을 짙게 시사. 그러나 이 시대의 실경산수화가 조선 후기 정선이 발전시킨 진경산수화와 직접적 연관이 있다고는 볼 수 없음. 기록상으로만 남아있기 때문에 양식상의 특징을 밝힐 수 없기 때문.

   

중국과의 교섭: 이곽파화풍, 미법산수화풍, 원대의 원체화풍등이 전래 수용되었따고 믿어짐. 남송원체화풍과 원대 남종화풍도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짐작되나 확증을 얻을 수가 없다. 이러한 화풍들 중에 이곽파화풍은 11세기 후반이나 늦어도 14세기 초에 고려에 전해졌 수용되었다고 믿어짐.

   

이곽파의 수용: 북송의 이성과곽희에 의해 형성. 곽희가 북송의 어화원에서 화명을 날리던 1070년대 고려와 북송의 외교 재개 문화적 교섭이 활발한양상. 또한 중국회화를 열심히 추구하던 당시 고려 화가들과 학자들의 양상. 당시 고려화가들에게 알려져 수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곽희의 <秋景烟嵐圖(추경연람도)>두 폭이 북송의 신종 즉위 후에 고려에 기증되었음이 새로 발견된 <畵記>에 의해 밝혀짐. 이로써 곽희 화풍이 이미 11세기에 고려에 알려지고 수용되었을 것으로 믿어짐. '또한 고려 후반기 원대 화단과의 교섭을 통해도 알려졌을것으로 믿어짐 즉 연경에 만권당을 짓고 이제현을 불러다 원대의 명유나 문인화가들과 교류케 하였던 충선왕(재위 1275~1325)을 중심으로 이곽파화풍이 또 한 차례 고려에 전해졌을 것을 추측. 충선왕의 만권당에 드나들던 대표적 문인화가중 조맹부와 주덕윤 존재. 이들을 통해 원대 이곽파화풍과 남종화풍이 고려화단에 알려져 수용되었을 가능성이 충분히 짐작됨.

이곽파화풍이 고려시대 후반기에도 계속하여 전해진 것은 고려시대에 전래되어 조선초기로 전해진 것을 모아들였다고 믿어지는 안평대군의 소장품속에 곽희그림위시 이곽파에속하는 원대화가들의 작품존재

   

<지장보살도>1307노영: 흑칠의 소병에 금니로 그림 금강산이라는 설. 배경에 뾰족뾰족한 산들의 모습은 우리나라의 금강산이나 북송대 허도녕의 산수화와 비슷 그 표면 묘사에서 이곽파화풍의 전통 감지. 비록 옻칠이 된 매끄러운 표면이기는 하나 붓을 잇대어 써서 개별적인 필선을 나타내지 않으려 한 전형적인 필법. 또한 산허리에 돋아난 치형돌기와 원산의 바늘 같은 나무들도 이곽파화풍과 유관한 것으로 믿어진다. 이러한 점들은 13~14세기에 이곽파화풍이 고려의 화단에 수용되어 유행하고 있었을 가능성을 강력히 시사. 노영의<지장보살도>에 보이는 산들로 미루어 보면 아마도 이곽파화풍 중에서도 북송대의 화풍이 오랫동안 인기가 있었지 않았을까 추측

   

미법산수화풍: 북송대의 화풍으로서 고려시대 산수화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짐작. 북송의 미불과 미우인 부자에 의해 형성되고, 후대의 중국회화에 많은 영향을 미친 이 화풍은 우리나라에서도 조선왕조 후대에 종종 그려졌는데 그 전래는 이미 고려시대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시대 남종문인화의 시원과 전개과정

2010년 5월 2일 일요일

오전 1:19

<남종과 북종의 구분>

명말 이전부터 이론적 성립의 전조 그러나 본격적 체계화는 강소성 송강 출신의 화정삼우인 동기창, 막시룡, 진계유 등에 의해 확립되었다. 원칙적 측면에서

1.화가가 학문과 교양을 갖춘 문인출신이어야 함.

2.작품의 본질은 형사에 치중한 공필계통의 것이 아닌 순수한 사의적 측면을 중시 해야한다.

3.미법산수화풍이나 동원 거연 계통의 화풍을 토대로 해야함.

북종화-점수론/남종화.돈오론: 점수론으로 특징지어지는 선종의 북종이 많은 노력을 통해 꺠달음에 이르기를 기도하듯이 회화에 있어서도 북종도 형사에 치중하고 사실성 추구에 몰두하는 공필의 것으로 보고 반면에 선종에 있어서의 남종이 돈오론을 주창하듯이 회화상의 남종도 사의적인 내면 세계의 정신적 표출에 가치를 두는 것으로 보았다고 믿어진다.

대개 만권서를 읽고 만리길을 여행함으로써 학덕과 수양을 쌓아서 인격이 높은 문인이 생활의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그저 여기로 자신의 사상이나 철학등 내면의 세계 표출을 위해 수묵과 담채를 써서 그리는 간일하고 격조 높은 사의화를 남종화로 분류한다. 남종화는 문기, 문자향, 서권기를 풍기며 속기가 없어야 한다고 볼 수 있다. 또 북종화란 화원이나 기타 직업 화가들이 외면의 형사에만 치중하여 그린 장식적이고 사의적인 공필화 계통의 그림을 지칭한다. -> 남종과 북종 사이의 현저한 차이 문인화가들에 있어서 남종이 북종보다 월등 나은 것으로 보아 남종화우월론 또는 상남폄북론 이 대두되었다.

   

동기창과 막시룡의 기록에 의거 그들이 생각했던 오대~ 북송대 이후의 남종화풍; 1. 형호, 관동, 범관 등 거비파 화풍. 2. 미불, 미우인 부자의 미법 산수화풍. 3.동원, 거연 및 그들의 영향을 받은 원말 사대가와 명대 오파화풍. 이중 거비파 화풍은 오대~북송대에 크게 풍미했으나 중국 후대의 남종화에 미친 영향은 미법산수화풍이나 동원거연 화풍에 미치지 못한다. 특히 우리나라 남종화에 관련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이 세가지 화풍 중 동원, 거연의 화풍은 기법적인 면에서 피마준법을 주로 사용하였다. 원대 이후 이들의 화풍을 토대로 일정한 구도, 공간구성, 필법, 수지법 등을 구사하여 그리는 경향이 두드러져 일종의 정형을 형성하였다. 이러한 정형은 원말 사대가, 명대 오파, 명말 동기창의 송강파, 청대의 사승화가와 사왕오윤의 정통파 화가들에게 이어지면서 변화를 거듭하였다. 그러나 명 말 이후 문인화가들만이 아니라 직업화가들 사이에서도 미법 산수화풍과 동원, 거연 계통의 정형화된 화풍을 추종하여 그리는 일이 빈번하여 명 말부터는 이처럼 정형화된 남종화풍이 중국화단을 지배하였다. 따라서 화가 출신 성분만으로 남북종을 구별짓기가 어려워 졌다.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남종화>

출신 성분이나 신분 또는 학식이나 교양과는 별 관계 없이 양식적인 면에서 미불, 미우인, 원말 사대가나 명대 오파와 그 영향을 받은 청대의 화풍을 토대로 하여 한국적으로 소화한 화풍을 지칭하는 것이 보편적. 이와 함께 일본 남화의 영향을 수용한 현대의 화풍도 남종화라고 지칭하는 경우. 그러므로 우리나라에 있어서 보편적으로 남종화는 문기를 중시하는 정신적 측면보다 화풍상의 양식적 특징에 그 구분의 근거를 두는 것이 상례이다. 즉 아무리 문인 출신이라도 미불, 미우인, 동원이나 거연 계통의 남종화풍을 수용하지 않은 경우에는 그 문인화가는 남종화가로 분류되지 않으며, 반대로 비록 화원이나 직업화가 출신이라도 그러한 화풍을 수용하였을 경우에는 비록 문인이 아니더라도 남종화가나 남종화풍으로 지칭된것.

Ex)순수한 문인 출신 화가 강희안을 남종화가로 분류하지 않고 직업화가로써 원말사대가 화풍을 수용했던 장승업을 경우에 따라 남종화가로 지칭 이처럼 우리나라에서 남종화가 반드시 문인이 그린 문인화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었다.

   

<고려시대>

중국서 남종화발달시기인 송, 원대 고려와 문화적 교섭이 긴밀하였으며 송(특히 북송)과 긴밀한 히화적 교섭이 있었다. 이러한 회화 교섭을 통해 일부 송 원대 남종 화가들의 작품이 고려에 전래되었다고 생각되며 그 중 일부는 조선 초기로 계승되었다고 믿어진다. 안평대군의 소장품 목록 참고. 그는 조선 초기 대표적 중국서화 소장가로서 그의 소장품들은 고려시대부터 우리나라에 전해져 축적된 중국회화들의 일부를 흡수한 것이라 믿어져서 주목이 되는데 그의 소장품들 중에는 동기창 일파가 대표적인 남종화가로 거명한 당대의 왕유, 북송대의 곽충서와 이공린, 그리고 문인 출신의 묵죽화가였던 소동파와 문여가의 묵죽화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를 통해서 보면 고려 후반기와 조선 초기에는 당대의 왕유는 물론 북송대의 대표적 문인화가들과 그들의 작품들이 잘 알려져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고려 후반기의 활발한 교섭을 바탕으로 수많은 화가들의 작품들이 전해졌으며, 이들일부는 안평대군의 소장품으로 들어갔다고 믿어진다. 우리나라의 남종화와 관련되어 조맹부, 주덕윤, 고극동등 원초에 북경에 활동했던 인물들로 조맹부와 주덕윤은 충선왕의 만권당에 드나들며 이제현과도 매우 가깝게 지냈던 인물들인데, 그들은 이*곽파화풍도 따라 그렸으나 동원*거연계의 남종화풍도 수용하여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그들의 남종화풍이 우리나라에 전해졌을 가능성이 적지 않으나 작품과 문헌이 영성하여 추측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고연희전칭작 <하경산수도><동경산수도>14세기경: 중국이나 일본의 회화와는 다른 필묵법, 가라앉을 듯 표현되 옥우의 표현법, 수지법, 연운과 폭포의 묘사법, 윤곽선의 특색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우리나라 그림으로 믿어진다. 특히 동경산수도에서 골이 진 계곡의 표현 등은 전 고극공필의<청산백운도>와 잘 비교되어 이 산수화쌍폭이 고극공의 영향을 받은 것임을 확실히 해준다. 또한 이 작품의 근경에 그려진 눈 덮인 한림은 이제현의<기마도강도>의 그것과 대단히 유사하여 그것이 고려시대의 작품일 가능성이 높음을 시사해준다. 고려시대에는 원말사대가의 화풍이 전해졌다는 증거는 찾아볼 수 없으며 이는 이들이 강남지방에서 활약했었고, 원대에 고려 와 강남지방과의 해상을 통한 직접적인 교섭이 끊어졌던 데에 가장 큰 부전의 원인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초기>1392~1550

고극공계의 미법산수화풍이 계속돠고 원말사대가 이후 중국남종화들이 즐겨 사용한 피마준법이 소극적으로 수용.

이장손, 최숙창, 서문보의 산수화6폭: 15세기 후반에 활약했던 화가들이라 볼수 있음. 서로의 화풍이 매우 유사. 고극공의 작품들과 비교해보면 상호연관성이 자명하나 고극공에 비하여 이들의 산은 나지막하고 반두가 없으며, 공간은 보다 확대되어 있고 연운이 더욱 적극적으로 묘사되어 있어 차이를 드러낸다. 이러한 차이들은 한국적특징.

   

<조선중기>1550~1700

절파계 화풍이 본격적 유행에도 불고 한편으로 미법산수화풍의 전통이 계속되고 전대와 달리 원말사대가의 한 사람인 황공망의 화풍과 명대 오파의 화가들이 비록 부분적이고 소극적이기는 하지만 전래되고 수용되었음이 확인

미법산수화풍의 경우 고려 말~조선초기에 수용되었던 고극공계의 화풍을 계승하다가 16세기 후반에 새로이 들어온 명대 미법산수화의 영향을 받게 된것이 아닐까 추측.

이정근<미법산수도>16세기 후반: 강한대각선구도, 근농원담의 묵법, 비에 젖은 습윤한 분위기의 성공적인 묫, 황장한 미점법등이 두드러져 보임. 근경의 옥우나 수지의 표현과 필묵법에 남종화의 영향. 조선초기에 이어 중기에도 화원에 의해 미법산수화가 수용되었음 주목. 한편 과장되게 황장한 묵법, 농담의 대조가 현저한 묵법, 까실까실한 붓질, 그리고 옥우법 등에는 명대 미법산수화의 영향이 간취.

 

17세기 전반 중국의 남종화 작품과 아울러<顧氏歷代名人畵譜>를 비롯한 화보의 전래: 중국 강소성 오현의 고번이 편찬하고 금릉의 주지번이 서문을씀. 우리나라에 는 17세기초에 이미들어왔으며 이점은 이호민이 1608년에 명에 다녀오면서 이 화보를 사 오고자 했으나 값이 비싸서 동행했던 화원을 시켜 베껴왔던 사실등을 통해 확인 이 화보는 명대 오파의 작품들을 비롯한 남종화를 주로 싣고 있어서 남종화의 소개와 보급에 크게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 조선 중기는 물론 후기와말기에도 윤두서, 강세황, 허유를 비롯한 많은 화가들이 이를 참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화보는<개자원화전><십죽제화보><당시화보>등과 함꼐 우리나라의 회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던 대표적인 화보이다.

   

이영윤<방황공망산수도>: 황공망의 산수화가 이 시대 전래되고 알려지는 단계에 그친 것이 아닌 분명하게 수용되기 시작했음이 확인. 비록 황공망의 대표작들과는 차이가 크나 반두가 있는산, 수지법 및 옥우의 표현과 필묵법, 준법 등에 남종화의 영향 뚜렷. 이 작품은 황공망의 화풍이 조선 중기에 수용되기 시작하였으며, 또 조선 후기 남종화에서 그의 화풍이 크게 참고되는 길을 닦았다고 여겨진다.

   

이정<한강조주도>: 원말 사대가 중에 예찬계 화풍도 수용되었다고 믿어짐. 이 점은 이상좌의 손자인 나옹 이정의 작품으로 전해지는<한강조주도>를 통해 확인. 한강조주도는 12폭으로 이루어진 화첩중 하나인데 이 화첩의 그림들은 대담하고 활달한 필묵법을 보여주며 조선중기에 유행한 절파계 화풍의 전통을 드러내고 있는것은 사실이나 전반적으로 병사에 치중하지 않고 과감한 생략을 통해 사의적 취향을 강하게 드러내며, 구도, 옥우법 등 부분부분에 따라 남종화의 터치가 두드러짐 특히 제2엽의<한강조주도>는 예찬 계통의 것을 따랐음을 보여줌..

   

<남종화의 정착과 유행>

남종화는 조선중기와 그이 전에 전래 수용되었으나 조선후기에 본격유행. 이 시기에는 원대와 명대의 남종화는 물론 청대의 남종화까지 전래되어 폭넓게 수용되었다. 원말 사대가, 명대의 심주, 문징명, 동기창, 청대의 정통파 화가들과 석도, 고기패, 홍인등 특히 존중. 원말 사대가중 황공망과 예찬의 화풍이 가장선호. 심주를 비롯한 오파 화가들과 청대 화가들의 화풍은 심사정, 강세황을 비롯 이 시대의 대표적 문인화가들이 수용. 특히 고기패의 지두화는 심사정, 이인문, 허유 등 조선 후기 및 말기의 화가들이 종종 수용하여 그림. 그런데 조선 후기의 남종화가들은 중국의 한 화파나 한 화가의 화풍만을 선호하기 보다는 중국 원, 명 청 역대의 대표적 남종화가들의 화풍을 널리 섭렵하는 경향

구도면에서도 조선 초기와 중기의 전통이 어느 정도 남아 있던 것은 사실이나 원말 사데ㅐ가와 오파류의 것, 특히 황공망과 예찬의 것이 선호. 기법면에서도 많은 변화 준법도 중국남종화가들이 즐겨사용하던 피마준, 절대준, 하엽준, 우모준 등이 구사됨. 이 중에서 피마준이 미점법과 함께 가장 널리 사용 나머지 준법들은 비교적 소극적 수용. 그러나 하엽준법은 40대 이후의 김홍도의 작품들과 신윤복의 산수화들에 보이고 있으나, 그 밖에는 별로 눈에 띄지 않음. 조선후기에는 남종화가 문인화가들을 중심으로 발전하기 시작했으나 많은 화원들에 의해서도 활발히 전개. 남종화는 이처럼 조선 후기의 사의적인 측면에서나 양식적인 면에서 수준 높은 발전을 이룩했을 뿐만 아니라 겸재 정선 일파의 진경산수화의 발달에 직접 기여하여 새로운 한국적 화풍의 창출을 가능케함. <고씨역대명이하보><개자원화전><당시홥><십중재화보> 등의 화보들은 조선 후기에 있어서의 남종화 보급에 진작 못지 않게 중요한 역할. 조선 후기의 남종화단에서 전개되었던 상기한 여러 경향들은 조선 말기에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계승

   

<조선 후기>

윤두서: 조선중기에 크게 유행했던 절파계화풍에 강하게 집착하면서도 풍속화 발전의 토대를 닦고 서양문물에도 관심을 보임 보수적 성향을 강하게 띠면서 새로운 것을 조심스럽게 추구

<평사낙안도>: 구도와 수지법에서 원말 사대가의 한 사람인 예찬의 영향을 보여 준다. 그러나 예찬의 절대준은 물론 피마준 등 남종화의 준법이 결여되어 있어 그의 보수적 독자성을 보여 주면서 동시에 그가 진작보다는 화보를 통해 남종화를 수용했을 가능성이 높음을 시사해줌.

해남의 후손택에 소장 <산수도><초정고목도>등==>남종화에 관심을 갖고 공부함 밝혀줌. 평사낙안도는 구도와 수지법에서 원말 사대가의 한 사람인 예찬의 영향을 보여 준다. 그러나 예찬의 절대준은 물론 피마준 등 남종화의 준법이 결여되어 있어 그의 보수적 독자성을 보여 주면서 동시에 그가 진작보다 화보를 통해 남종화를 수용했을 가능성이 높음을 시사해 준다.

   

정선: 남종화법을 수용하여 우리나라의 진경산수화의 새로운 면모를 개척. 서울 북촌에 살면서 당시의 대표적인 시인 이병연, 대표적 문인출신화가 조영석, 이하곤등과 대단히 친밀하게 지내면서 예단에 기여. 그와 이처럼 가까웠이던 친우 조영석이 남긴<관아재고>와 이하곤이 지은<두타초>의 기록을 통하여 그에 관한 구체적인 파악이 가능.

조영석은 그의<관아재고>-조영석은 정선이 미불과 동기창의 울타리에 들어섰고, 조선조300년(당시까지의 기간) 에 일찍이 그처럼 뛰어난 화가는 없었으며, 스스로 신격을 창출했고, 우리나라 회화의 루습을 싹 씻어버려 , 그로부터 산수화의 개벽이 시작되었다고 밝힘. 또한 정선이 예찬, 미불, 동기창을 공부하고 대혼점을 썼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또한 이하곤의 <두타초>에 의하면 정선은 문징명, 동기창, 황공망의 화풍을 30~40대에 꿰뚫고 있었음이 밝혀진다.

이러한 기록 종합: 정선은 북송의 미불, 원말황공망과 예찬, 명의 심주, 문징명, 동기창 등의 대표적인 중국 남종화가들의 화폭을 광범하게 섭렵하여 자아일가하였다고 하겠다. 또한 이하곤의<두타초>에 정선이 오직 그 정신만 구할뿐 형사를 추구하지 않는다고 밝힘

<인곡유거도>18세기: 한쌍의 벽오동이 서 있는 넓은 뜰을 배경으로 기와집 안에서 책을 읽는 선비를 묘사 주제와 포치, 그리고 화풍에 있어서 전형적인 남종화 분위기. 대체로<개자원화전>에 실려 있는 명대 오파의 개조 심주의<벽오청서도>와 같은 그림에서 시사를 받아 완전히 자기 나름으로 창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심주의<벽오청서도>는 후에 강세황에 의하여 방작되고 있어 <개자원화전>의 영향이 컸음을 짐작케 한다. 다만 정선의<인곡유거도>는 너무도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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