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사공부

브리태니커 표제어 미국사

AH101 2012. 2. 13.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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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國史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아메리카 대륙에 있는 미국의 역사.

   

최초의 주민

   

17세기 북아메리카의 영국 식민지

미국(1822~54)

미국(1854~61)

현재 미국의 아메리카 영토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항해 이전에도 여러 번 발견되었다. 1492년에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했을 때, 이 대륙에는 약 2만~3만 5,000년 전 아시아에서 베링 해협을 거쳐 북아메리카로 건너온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유럽인이 처음 나타났을 무렵 원주민(신대륙을 동인도라고 믿은 탐험가들은 이들 원주민을 인디언이라고 불렀음)들은 이미 신대륙의 모든 지역에 널리 퍼져 자리를 잡고 있었다.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당시의 다른 지역 문화를 기준으로 보면 확고한 유적을 전혀 남기지 않았지만, 남서부의 인디언 마을과 미시시피 강 유역의 거대한 둔덕들은 분명 유럽의 제국주의 열강들이 도착하기 이전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콜럼버스가 도착했을 무렵,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오늘날 미국에 해당하는 지역에는 약 150만 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추산되는데, 이 숫자는 학자에 따라 매우 다양하다. 일반적으로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유럽에서 신대륙으로 이주한 백인들에게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할 수 있다. 인디언의 식량과 향신료, 수공예품, 농사방법, 전쟁기술, 어휘, 풍부한 민속, 그리고 혈통의 교류는 인디언이 유럽 정복자들에게 이바지한 것 가운데 좀더 명백하고 일반적인 공헌에 속한다. 백인들이 서부로 이동하면서 백인들의 팽창주의에 인디언들이 저항함으로써 빚어진 갈등은 오랫동안 잔인하게 계속되었으며, 이 충돌은 미국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대목의 하나를 이룬다.

식민지건설

1776년에 미국을 구성한 최초의 13개 영국 식민지는 북아메리카에 제국을 건설하려는 유럽 열강의 수많은 시도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다 (→ 색인 : 식민주의). 모든 식민집단은 땅을 차지했고, 대부분 토착 인디언들한테서 생존기술을 배웠다. 그러나 기술을 가르쳐준 인디언들은 대개 백인에게 동화되거나, 우세한 유럽 무기를 당해내지 못하고 쫓겨났다. 스페인인들은 1513년에 이미 플로리다에 상륙했고, 1540년에는 뉴멕시코에 도착했다. 네덜란드의 서인도회사는 1624년에 포르트오라녜(지금의 뉴욕 주 올버니)에 뉴네덜란드를 건설했다. 프랑스인들은 1673년에 광대한 미시시피 강 유역을 탐험하기 시작했고 러시아인들은 1741년에 알래스카에 도착했다.

버지니아

모든 식민지 이주자들 가운데 가장 큰 성공을 거둔 것은 영국인이었다. 1607년에 영국인들이 세운 제임스타운은 북아메리카 최초의 항구적인 영국인 정착지로서, 버지니아 식민지의 토대가 되었다. 영국으로부터 2차례 특허장을 얻어내 설립된 이 식민지는 설립 후원자인 버지니아회사의 입장에서 보면 그다지 좋은 투자대상이 못 되었는데, 그 이유는 주로 초기 식민지 이주자들의 게으름과 만성적인 자본 부족 때문이었다. 이주자들은 먹고 사는 데 필요한 일조차 하려 들지 않았고, 자본 부족으로 인해 식민지개척에 나선 사람들에게 보급품을 충분히 공급할 수 없었다. 1612년에는 3번째 특허장이 나와 자본을 모으기 위해 복권을 발행할 수 있게 되었고, 식민지인들은 품종개량을 통해 담배를 경제성 있는 작물로 만들었다. 같은 무렵에 도입되어 시행된 새로운 윤리 규준은 실험단계에 있는 버지니아 식민지에 질서를 가져다주었지만, 새로운 개척자를 끌어들이는 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후에 이루어진 개혁으로는 새로운 정착민에게 50에이커의 땅을 주고(버지니아 식민지까지 오는 배삯을 지불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도착하자마자,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7년 동안 식민지를 위해 봉사한 뒤에), 1619년에 식민지 주민의 투표로 선출되는 하원을 창설한 것 따위를 들 수 있다. 1619년 네덜란드 선박 1척이 최초의 아프리카 노예를 실어왔고 이로써 시작된 노예제도는 나중에 대농장농업의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은 전염병, 인디언과의 전쟁 및 내부 분쟁 등에 시달리는 버지니아회사를 지탱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1624년에 결국 식민지는 영국 왕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한동안 불안정한 시기를 거친 뒤 식민지 하원의 역할은 상당히 늘어났다. 영국 왕은 또한 담배 재배와 수출에 진력하겠다는 버지니아 식민지 주민들의 결정을 마지못해 묵인했다. 1630년에 이르자 버지니아 식민지는 비록 번창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왕의 특별보조금을 받지 않고도 살아 남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이기 시작했다.

매사추세츠

매사추세츠에 플리머스를 건설한 개척자들은 국왕으로부터 식민지 특허장을 받지 못했지만, 버지니아와 마찬가지로 이윤을 추구하는 후원자들의 개인적인 투자에 식민지 재정을 의존하고 있었다. 이 정착촌의 핵심은 영국 교회에서 벗어나고자 네덜란드 레이덴으로 망명해 소규모 집단을 이루고 살다가 신대륙으로 건너온 영국 청교도, 즉 필그림(Pilgrim:순례자)들이었다. 이주 첫 해인 1620년에 개척자의 거의 절반이 병에 걸려 죽었다. 영국 투자자들의 지원은 갈수록 줄어들었지만, 이주 첫 해의 고비를 넘긴 뒤부터 식민지 주민들의 건강과 경제상황은 날로 좋아졌다. 필그림들은 곧 주위에 사는 인디언들과 평화조약을 맺어, 방어보다는 경제발전에 대부분의 시간을 쏟을 수 있게 되었고 불과 5년 만에 식민지는 자급자족 경제를 이룩했다.

필그림들은 플리머스에서는 줄곧 소수집단이었지만, 이주한 뒤 40년 동안 식민지 통치구조를 거의 지배했다. 필그림들 가운데 성인 남자는 그들이 타고 온 '메이플라워'호에서 내리기 전에 이 새로운 모험의 지도자들이 만든 법률과 포고령을 지키겠다고 약속하는 서약서에 서명해야 했다. 이 메이플라워 서약은 미국 역사에서 민주주의 발전의 중요한 단계로 해석되었지만, 다수에 대한 통제권은 여전히 윌리엄 브래드퍼드를 비롯해 이 서약서를 기초한 필그림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플리머스 주민들이 교회와 시정(市政) 문제에서 점차 스스로 주장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1660년 이후였다. 1691년 플리머스가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에 병합되었을 때쯤, 플리머스 정착민들은 이미 조용하고 질서있는 생활로 유명해져 있었다.

매사추세츠 만에 정착한 청교도들은 플리머스에 정착한 필그림들과 마찬가지로 주로 본국의 종교적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해 건너온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필그림들과는 달리 영국국교회에서 '분리'하기를 바란 것이 아니라, 교회 내부에서 몸소 모범을 보여 교회를 개혁하고 싶어했다. 매사추세츠 만 개척사업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식민지를 신대륙에서 종교적 관용의 전초기지로 만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들은 오히려 식민지를 '황야의 시온 산'으로 만들어, 즉시 교정을 받아야 할 배교자들에게 순결과 정통신앙의 본보기로 삼고자 했다. 식민지의 세속 정부도 이와 비슷한 권위주의 정신을 가졌다. 매사추세츠베이 식민지의 초대 총독인 존 윈스럽 같은 사람은 자신의 의무가 사회 구성원들을 직접 대표하는 대리인 노릇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조치가 사회 전체에 가장 이로운가를 독자적으로 결정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매사추세츠베이 식민지는 이처럼 권위주의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곳에서는 다른 식민지에서 찾아볼 수 없는 공동체 정신이 발전했다.

코네티컷· 로드아일랜드· 뉴햄프셔

그러나 많은 뉴잉글랜드 정착민들은 매사추세츠의 지배집단이 강요하는 정통신앙에 따라 살기를 거부했고, 이런 불만의 부산물로 코네티컷(1635)과 로드아일랜드(1636)가 건설되었다. 뉴햄프셔와 메인의 정착민들도 역시 초기에는 매사추세츠 식민지 정부의 지배를 받았다. 뉴햄프셔는 1692년에 매사추세츠에서 영원히 떨어져 나갔지만, 메인은 1820년까지 매사추세츠의 관할권 안에 남아 있었다.

메릴랜드

버지니아 북쪽에 있는 메릴랜드는 영국 식민지 가운데 한 사람의 영주(領主 proprietary)가 지배한 최초의 땅이었다 (→ 색인 : 영주식민지). 볼티모어 경 조지 캘버트는 숱한 식민지 설립 계획에 투자하다가, 1632년에 국왕으로부터 땅을 하사받았으며 영국 법률에 어긋나는 짓을 하지 않는 한, 식민지의 무역·정치 체제를 통제할 수 있었다. 메릴랜드 식민지는 적어도 2가지 목적을 가지고 건설되었다. 가톨릭교도인 볼티모어 경은 가톨릭교도들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식민지 건설을 꿈꾸었을 뿐만 아니라, 식민지가 되도록 많은 이익을 자신에게 가져다주기를 열망했다. 그의 토지정책은 소수파인 가톨릭교도에게 유리한 것이었다. 캘버트 가문은 신교도인 윌리엄 3세와 메리 여왕이 영국을 다스리던 시기에 잠시 식민지 소유권을 잃었지만, 가톨릭 신앙을 버리고 영국국교회에 귀의한 뒤 소유권을 되찾았다.

캐롤라이나

영국 왕은 1629년에 이미 캐롤라이나 지역에 대해 식민지 설립 특허를 부여했지만, 8명의 영주가 이 지역을 실제로 식민화하기 시작한 것은 1663년에 이르러서였다. 이 식민지가 상당한 성장을 이룩하기까지는 다시 50년이 걸렸다. 캐롤라이나는 두 부분으로 성장했다. 북부지역은 지형이 험한 해안선 때문에 유럽이나 카리브 해와 무역이 거의 막혀 있었던 만큼 거기서는 중소 규모의 농장이 발전했고, 카리브 해나 유럽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남부지역은 쌀을, 그리고 나중에는 인디고를 생산해 세계 시장에 수출했다. 1729년 캐롤라이나는 노스캐롤라이나사우스캐롤라이나라는 2개의 왕령(王領) 식민지로 바뀌었는데, 이것은 주로 영주들이 긴급한 방어문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뉴욕· 뉴저지· 델라웨어

영국은 1664년에 뉴네덜란드 식민지(지금의 뉴욕·뉴저지·델라웨어 주로 이루어진 지역)를 빼앗았다. 이 지역은 찰스 2세의 동생인 요크 공 제임스의 이름을 따서 뉴욕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요크 공의 영주 식민지가 되었다. 식민지에서 경제적 이익을 얻으려는 요크 공의 노력은 인디언과 외국인 침입자들, 그리고 식민지 주민들의 탈세 때문에 대부분 좌절되었다. 요크 공이 영국 왕위에 오르자, 뉴욕의 지위는 영주 식민지에서 왕령 식민지로 바뀌었다. 그후 뉴욕이 뉴잉글랜드의 식민지들과 통합되자, 이미 지배귀족들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던 주민들은 마침내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으로 통합은 무효가 되었지만, 국왕의 지배는 더욱 엄격해졌다.

펜실베이니아

펜실베이니아는 어느 정도는 설립자인 윌리엄 의 관대한 정책 덕분에, 북아메리카의 모든 식민지 가운데 가장 다양하고 활기차며 번영하는 식민지로 성장했다. 양심의 자유와 평화주의를 옹호하는 퀘이커 교도이자 휘그당원인 윌리엄 펜은 찰스 2세에게 돈을 빌려주었는데, 1681년 찰스 2세한테서 상환금 대신 델라웨어 강 연안의 땅을 하사받았다. 그는 기본권 헌장을 여러 번 제정하려고 했지만 반대에 부딪혀 번번이 좌절하다가, 1701년 마침내 대의재정부를 수립하고 모든 신교도에게 종교적 관용의 원칙을 보장하는 기본권 헌장을 발표하는 데 성공했다. 이 지역의 땅은 비옥했고 식민지 정부가 관대한 토지정책을 시행했기 때문에, 펜실베이니아로 들어오는 이민의 수는 18세기 내내 높은 수준을 유지했다. 그러나 땅에 굶주린 유럽 이주민이 계속 들어오자, 초기에 윌리엄 펜이 마련한 평화적인 인디언 정책은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유럽 이주민들의 '경제적 기회'는 그들보다 먼저 땅을 차지한 인디언 주민들을 몰아내거나 때로는 완전히 몰살하는 데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조지아

13번째 식민지는 1732년 제임스 오글소프와 영국 젠트리 계급의 부유한 사회사업가들이 세운 조지아였다. 오글소프의 계획은 빚을 갚지 못해 감옥에 갇힌 채무자들을 조지아로 이송해 이들의 힘으로 식민지를 개척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죄수들이 유익한 노동을 함으로써 사회에 복귀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식민지 소유자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로 조지아에 정착한 사람들(그들 모두가 가난한 채무자들은 아니었음)은 매우 억압적인 사회·경제 체제에 부딪혔다. 재산과 상속 및 개인 행동에 관한 규제는 진취적인 성향을 가진 일부 정착민들과 영주들 사이에 상당한 긴장을 초래했다. 게다가 경제는 식민지 투자가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영주들의 정책에 대한 항의가 거세지자, 1752년 영국 왕은 이 식민지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했다. 그후 개척자들이 반대한 많은 제약들, 특히 노예제를 금지하는 규정 등이 폐지되었다.

불만과 반란

아메리카 식민지들은 여러 면에서 유럽 국가들과 격리되어 있었지만, 그럼에도 외국의 외교적·군사적 압력을 끊임없이 받고 있었다. 특히 스페인·프랑스는 북아메리카 본토에서 교역량과 영토를 늘리기 위해, 여기서 영국 세력이 약해지는 조짐만 보이면 즉시 그 기회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항상 가까이에 머물면서 호시탐탐 때를 노리고 있었다. 미국인들이 프렌치-인디언 전쟁이라고 부르는 '제국을 위한 대전'은 유럽의 주요열강들이 1세기에 걸쳐 벌여온 전쟁의 연속에 불과했다.

1763년 영국인들은 북아메리카에서 프랑스인들을 쫓아내는 데 성공한 뒤, 식민지 주민들의 반감을 불러일으킨 많은 정책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식민지인들이 애팔래치아 산맥 서부에 정착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식민지에 세금을 부과하는 법안이 통과되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인지세법(1765)과 차조례(1773)이었다. 세입을 늘리기 위한 이런 조치들과 대체로 식민지를 착취하는 중상주의 정책은 식민지 주민을 괴롭혔고, 이들은 본국의 조치에 반대해 그것을 타도하기 위해 단결하기 시작했다. 이런 행동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이른바 ' 보스턴 차 사건'으로, 이것은 1773년 12월 16일 보스턴의 일부 주민들이 인디언으로 가장해 보스턴 항에 정박중인 배에 올라가 1만 파운드 상당의 차를 바다에 내버린 사건이다. 식민지 정부에 대한 영국 의회의 간섭이 날로 심해지자, 저항은 집단행동으로 타나기 시작했다. 식민지들은 서로 의견을 교환한 뒤, 마침내 대륙회의를 구성하기에 이르렀다. 제1차 대륙회의는 1774년 9월에 필라델피아에서 열렸다. 이 회의의 목적은 식민지의 모든 불만을 진정시키고 한때 본국과 식민지 사이에 존재했던 화합을 되찾도록 영국 정부에 압력을 가하는 것이었다. 대륙회의는 식민지의 단결을 이루었지만, 그 밑에는 불만이 쌓여 있었다.

한편 영국은 제국의 법규를 식민지에 강요하기 위해 주둔군을 늘렸고(이 주둔비용의 일부는 식민지 주민한테 강제로 부과되었음), 1775년 봄 마침내 전투가 벌어졌다.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제2차 대륙회의는 군대를 모집하고, 조지 워싱턴을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조지 워싱턴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처음에는 이 분쟁을 국가로서는 독자적인 주체성을 추구하는 독립전쟁이 아니라 내전으로 여겼다. 그러나 1776년 1월에 토머스 페인〈상식 Common Sense〉이라는 소책자를 출판하자, 갑자기 독립이 대륙회의의 의제가 되었다. 대륙회의는 1776년 7월 4일에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이 선언서는 토머스 제퍼슨이 기초를 마련한 다음 회의를 거쳐 수정·완성된 것이었다. 대륙회의는 새 나라를 통치하기 위한 연합헌장도 제정했다.

미국 혁명이라고도 불리는 독립전쟁은 1778년 초까지만 해도 대영제국 내부의 갈등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1778년에 프랑스, 1779년에는 스페인, 1780년에 네덜란드가 식민지 편에 가담해 영국과 맞서면서부터 이 싸움은 국제 전쟁이 되었다. 처음부터 해군력은 전쟁의 경과를 결정하는 데 매우 중요했다. 영국은 막강한 해군력 덕분에 유연한 전략을 구사해 아메리카에 파견한 비교적 적은 수의 병력을 보완할 수 있었고, 프랑스는 해군력을 이용해 1781년 10월 19일에 버지니아의 요크타운에서 영국군의 마지막 항복을 받아낼 수 있었다.

아메리카 공화국

북아메리카에서 있었던 양측의 군사적 성패는 1782년에 체결된 미·영 예비조약에 반영되었고, 이 예비조약은 이듬해에 조인된 파리 평화조약에 포함되었다. 협상에 참여한 미국 대표는 벤저민 프랭클린, 존 애덤스를 포함한 4명이었다. 이 조약에 따라 미국의 국경은 서쪽으로 미시시피 강까지 확대되었다(스페인령 플로리다 제외). 1777년에 제정되어 1781년에 비준된 연합헌장은 중앙정부의 권한을 상당히 제약하고 있었기 때문에, 성장하는 나라를 다스리기에는 부적당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하여 1787년 새 헌법이 제정되어 1788년에 비준을 받았고, 1789년에 발효되었다. 조지 워싱턴이 초대 대통령이 되었는데, 냉정하고 분별있는 그의 판단력은 나라의 진로와 정부 운영의 선례를 확립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새 헌법이 발효되자마자 나라는 급속히 발전하기 시작했다. 4개 주가 연방에 새로 가입했고, 1803년에는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이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를 사들임으로써 미국 영토는 2배로 늘어났다 (→ 색인 : 루이지애나 매입). 이리하여 나중에 ' 명백한 운명'이라 불리게 된 서부개척이 시작되었다.

신생 미국은 19세기초 유럽 전역을 휩쓴 나폴레옹 전쟁 때 외교문제를 놓고 첫번째 위기에 부딪혔다. 제퍼슨은 중립정책을 썼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미국 무역을 엄격히 제한하고, 새로운 규칙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미국 선박을 압류했다. 과거의 종주국이었던 영국의 이같은 약탈행위는 미국인들의 반감을 불러일으켰고, 제퍼슨의 후임자인 제임스 매디슨은 1812년 마침내 영국에 맞서서 전쟁을 선포했다. 미국의 정치적·경제적 혼란을 생각하면, 이 나라가 2년 동안 휘청거리면서도 전쟁을 치르는 데 성공하고, 결국 대서양과 5대호 및 샘플레인 호에서 벌어진 중요한 해전을 승리로 이끈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었다. 육지에서는 영국 특공대가 워싱턴 D. C.의 공공건물들을 불태웠고, 매디슨 대통령은 수도에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장기적인 관점에서 뜻깊은 전투는 벨기에 겐트에서 평화조약이 조인된 지 2주일 뒤인 1815년 1월에 앤드루 잭슨이 뉴올리언스에서 거둔 승리뿐이었다(→ 색인 : 겐트 조약, 뉴올리언스 전투). 이 전투 덕분에 잭슨의 정치적 명성은 갑자기 높아졌다. 종종 제2차 미국 독립전쟁이라고도 하는 1812년 전쟁의 결과는 역사의 한 시대가 끝났음을 나타냈다. 이 전쟁은 대영제국과 영국인에 대한 해묵은 원한과 고통을 누그러뜨리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영국에 대한 불안에서 벗어나자, 미국인들은 이제 자유롭게 서쪽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서부로의 팽창과 지역갈등

복잡한 감정의 시대

여러 면에서 영국과 벌인 전쟁은 민족주의(nationalism) 시대가 온 것을 알려주었다. 전국 규모의 정당 차원에서는 정치적 경쟁의 기세가 약해졌다. 존 마셜 대법원장이 이끄는 대법원의 결정은 주 정부의 권한을 줄이는 대신 연방의회와 중앙정부의 권한을 강화해, 민족주의를 조장했다. 먼로 독트린(1823)은 미국이 유럽 문제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며 미국에 대한 유럽의 간섭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렇게 전국적 통합의 조짐이 나타나고 국민적 일체감이 높아졌음에도 그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가는 움직임도 그에 못지않게 존재했다. 미국이 서쪽으로 팽창함에 따라, 노예제도 및 신설 준주에 노예제도를 확대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급속히 산업화하고 있는 북부와 대농장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남부 사이에 긴장이 높아졌다. 남부는 연방정부에 비해 강력한 주권(洲權)을 옹호했다. 켄터키 주와 버지니아 주는 1798년에 이미 연방법을 무효화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했다. 또 1832년에는 새로 제정된 보호관세법을 사우스캐롤라이나 주가 무효라고 주장하면서 거부함에 따라 위기가 발생했고, 잭슨 대통령은 무력을 동원하겠다고 위협했다. 잭슨의 단호함은 민족주의자들을 만족시켰지만, 남부 사람들은 연방 내부에서 소수파인 자신들의 지위를 더욱 뚜렷이 인식하게 되었다.

이른바 잭슨 민주주의 시대는 미국 정치의 전환점으로 널리 인용된다. 애팔래치아 산맥 서부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대통령이 된 잭슨은 미국의 정치적 무게 중심에 변화가 일어난 것을 상징했다. 잭슨이 대통령으로 선출되기 몇 년 전에, 재산에 대한 제한 등 그동안 투표권을 제한했던 여러 가지 제약이 완화되고 6개 주가 연방에 새로 가입함으로써 유권자 수가 크게 늘어났다. 잭슨은 유권자 대중에게 직접 호소해 대통령직에 오른 최초의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정치적 훈련보다는 폭넓은 경험에서 나온 실용주의와 타고난 지성을 특징으로 하는 그의 통치방식은 19세기말까지 대통령 지망생들의 본보기가 되었다.

국가적 고통의 증대

남북전쟁 이전에 미국은 1세대 동안 거의 끊임없는 정치적 위기를 겪었다. 문제가 발생한 근본적인 요인은 19세기초의 미국이 국민 국가(nation)가 아니라 지역국가(country)였다는 사실이다. 교육·교통·보건·공공질서에 관한 정부의 주요기능은 주나 지방 차원에서 수행되었다. 나라를 한데 묶어주고 있는 것은 워싱턴 정부에 대한 느슨한 충성심, 교회와 정당 같은 소수의 전국적인 조직, 그리고 이른바 건국의 아버지들에 대한 공통된 기억뿐이었다. 느슨하게 조직된 이 사회 내부에서는 모든 계층·주·지방·집단들이 각기 매우 자유롭게 소신대로 행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기술과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국가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은 차츰 꾸준하고 긴밀한 접촉을 갖게 되었다. 교통의 발전(처음에는 운하, 다음에는 유료도로, 그리고 특히 철도)은 고립 상태를 무너뜨렸고, 시골 젊은이가 도시로 나가거나 뉴햄프셔의 농부가 아이오와로 이주하는 것을 촉진시켰다. 인쇄술이 발전함에 따라 값싼 신문을 발행할 수 있게 되었고, 전신체계가 발전함에 따라 지역에 따른 지적 편견의 장벽이 무너졌을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나라 전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거의 동시에 알 수 있게 되었다. 철도망이 늘어나게 되면서 철도는 중앙의 관리와 통제를 받아야 했으며, 미국 최초의 진정한 '대기업'이라 할 수 있는 전국 규모의 철도회사들이 나타나 철도 운행에 질서와 안정을 기여했다.

1800년대초만 해도 사회는 대체로 농촌적이고 느릿하며 지역적으로 분산되어 있었으나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분주하게 움직이는 전국적인 질서로 통합됨에 따라 많은 미국인들은 이러한 변화를 급진적이고도 고통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였고, 이러한 변화에 저항하는 경우도 많았다. 때로는 변화에 대한 적개심이 변화를 주도하는 사람들에 대한 폭력적 공격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특히 새로 이민온 사람들이 미국을 변화시키는 힘의 화신으로 생각되었고, 이때문에 1840년대에는 미국 전역에서 이민배척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의 열기가 절정에 이른 것은 1840년대에 이주해온 수많은 아일랜드 이민과 독일 이민이 투표권을 얻은 1850년대였다. 1854년 이민에 반대하는 한편 이민 대다수가 속해 있는 로마 가톨릭 교회에도 반대하는 이른바 부지당(不知黨)이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등장해 변화에 대한 저항을 강력하게 뒷받침하기도 했다.

지역주의와 남북전쟁

미국 사회의 민족주의 경향에 대한 적개심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났지만, 그중 지속적인 것은 지역적 충성심에 대한 강조였다. 뉴잉글랜드와 서부는 뚜렷한 대립관계를 나타냈지만, 그때까지 가장 두드러지고 고립된 지역은 남부였다. 남부지역은 독특한 기후, 면화·담배·사탕수수 같은 주요작물을 생산하기 위해 고안된 대농장제도, 그리고 특히 흑인노예제의 고수 때문에 미국의 다른 지역과 두드러진 대조를 보이고 있었다 (→ 색인 : 인종주의).

미국은 노예문제에 대한 타협안, 특히 1820년의 미주리 타협1850년의 타협으로 반세기가 넘도록 연방의 통합을 유지했지만, 1860년 연방의 준주(準州)에서 노예제의 금지를 분명히 옹호하는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 에이브러햄 링컨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사우스캐롤라이나 주가 연방에서 탈퇴했다 (→ 색인 : 연방탈퇴). 이듬해 봄에는 연방을 탈퇴한 남부의 11개 주가 ' 남부연합'(Confederate States of America)을 구성했다.

링컨은 주 정부의 연방 탈퇴권을 부인했다.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의 섬터 요새에 지원부대를 파견하겠다는 그의 결정은 남부연합을 자극해, 마침내 1861년 4월 12일 남북전쟁의 첫번째 포성이 울려퍼졌다. 그후 4년 동안 북부와 남부는 전쟁에 휘말렸다. 에이브러햄 링컨 정부와 남부연합의 대통령인 제퍼슨 데이비스 정부가 추진한 정책은 노예제도에 대해서조차도 놀랄 만큼 비슷했다. 남부연합 헌법은 연방헌법과 여러 모로 비슷했지만 흑인노예제를 분명히 보장했다. 링컨 행정부는 노예제 폐지론자들의 압력을 받으면서도, 노예해방 조치가 델라웨어·메릴랜드·켄터키·미주리 등 연방에 남아 있는 4개의 노예주의 충성을 저버릴 우려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독특한 제도'에 손대기를 망설였다. 그러나 전쟁의 압력 때문에 링컨 정부와 데이비스 정부는 차츰 노예제를 폐지하는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링컨은 흑인을 해방하면 유럽의 여론이 북부의 대의명분에 유리한 쪽으로 기울 것이며, 남부가 농장에서 작물을 생산할 노동력을 빼앗기는 대신 북군이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는 신병을 늘릴 수 있으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처음에 링컨은 반란을 일으킨 주들이 1863년 1월 1일까지 연방에 복귀하지 않으면 그 지역의 모든 노예를 해방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남부연합이 끝까지 고집을 부리자, 그는 약속한 최종선언을 발표했다. 링컨은 이 노예해방령의 합헌성을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에, 헌법 수정 조항으로 노예제를 폐지할 것을 의회에 촉구했다. 그러나 이런 조치는 1865년 1월 31일에 이루어졌고, 실제 비준은 전쟁이 끝난 뒤에야 이루어졌다.

한편 남부연합도 훨씬 속도가 느리기는 했지만, 역시 불가피하게 노예 해방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남부는 병력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기 때문에, 로버트 E. 장군을 비롯한 많은 군인들은 흑인 징집을 요구하게 되었다. 마침내 1865년 3월에 남부연합 의회는 흑인연대 창설을 정식으로 승인했다. 이로써 소수의 흑인이 군대에 징집되었지만, 남부의 항복이 눈앞에 다가왔기 때문에 실제로 전투에 참여한 흑인은 한 사람도 없었다. 유럽의 원조를 얻기 위해 뒤늦게 외교 사절을 보낸 데이비스 정부는 남부연합을 외교적으로 승인해주면 그 대가로 노예를 해방하겠다고 약속함으로써(1865. 3), 노예제를 폐지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을 또다른 방식으로 보여주었다. 이 제안은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했지만, 이것은 전쟁이 끝날 때쯤에는 북부·남부에서 모두 노예제가 소멸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는 또 하나의 증거이다.

북부는 인력과 공업 생산능력, 무기 생산 및 철도에서 훨씬 유리했지만, 남부연합이 반드시 패배할 운명이었던 것은 아니다. 남군은 그들의 영토 안에서 싸우는 이점이 있었으며, 그들의 군사적 전통은 1860년 이전의 미국 역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5,600㎞에 이르는 남부연합의 긴 해안선은 봉쇄하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제퍼슨 데이비스 대통령은 외국의 결정적인 원조와 개입을 기대했다. 끝으로 회색 군복을 입은 남군 병사들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강력한 목적, 즉 가정과 백인의 지배권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었다. 따라서 남부의 대의명분은 성공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역사상 북부에 못지 않은 강적과 맞서서 독립을 얻었던 나라들이 여럿 있다. 기본전략면에서 데이비스는 이따금 북부 영토를 '약탈하는' 침략만 허용했을 뿐, 고집스럽게 수비에만 집착했다. 그러나 링컨 행정부가 유능한 장군들을 찾아내어 북부의 우세한 자원과 함께 남부에 투입하기 전에 재빨리 북부 영토로 진격해 들어가 조기에 대공세를 벌였더라면, 승리는 남부의 것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반면에 링컨은 반란을 진압하고 연방정부의 권위를 재확립하기 위해, 푸른 군복을 입은 북군에게 남부의 주요지역에 침입해 점령하고 계속 지키라고 지시해야 했다. 그의 전략은 원칙적으로 윈필드 스콧 장군의 이른바 ' 애너콘다' 계획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이 계획은 북부의 육군과 해군이 미시시피 강으로 밀고 내려가 남부의 숨통을 조르고, 남부의 해안을 봉쇄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1865년 4월 9일에 버지니아 주의 애퍼매턱스 코트하우스에서 리 장군이 북군 사령관 율리시스 S. 그랜트 장군에게 항복함으로써 전쟁이 사실상 끝날 때까지 무자비한 전투를 4년 동안 끊임없이 치러야 했고, 엄청난 인명 희생과 파괴를 감수해야 했다. 남부에 대해 관용을 배풀려는 링컨의 계획은 남부가 항복한 지 1주일도 채 지나기 전에 그가 암살당함으로써 중단되었고, 공화당 급진파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의회는 독자적으로 마련한 응징적 성격의 재건 계획에 착수했다. 그리하여 수립된 새로운 체제는 남부 흑인의 민권을 보호하는 한편 지나치게 가혹해 여러 가지 폐단을 낳았다. 이 체제는 1877년에 연방군(북군)이 남부에서 철수하면서 막을 내렸고, 북군이 철수하자마자 남부에 널리 퍼진 인종차별주의는 거의 100년 동안 지속되었다.

국가의 재통합

남북전쟁 이후의 미국을 특징짓는 것은 지속적인 서부 진출, 산업화도시화의 진전, 외국 이민의 대량 유입, 그리고 세계적인 강대국으로의 부상 등이다. 토지 소유욕에 자극받은 서부 진출은 한때 멕시코와 미국을 전쟁으로 몰아넣었고, 인디언들이 미국과의 조약을 통해 차지했던 땅에서 그들을 쫓아내 생활환경이 훨씬 열악한 이른바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끊임없이 몰아넣었다. 남북전쟁이 끝난 뒤 골드러시가 일어나자, 금광을 찾아 모여든 사람들에게 생필품과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광산촌이 생겨났고, 이러한 열기는 인디언의 영토권을 더욱 심하게 짓밟았다. 미국 영토는 서쪽으로 계속 팽창하고 있었지만, 개척지와 미개척지 사이의 경계에 해당되는 변경은 과거의 상징이 되었다. 미래의 경향을 보다 정확히 예언해준 것은 사람들이 농촌에서 도시로 물려든 이농현상이었다. 이무렵의 인구 통계를 보면, 미국의 농촌세력이 쇠퇴하기 시작하고 갑자기 커진 공업단지에 바탕을 둔 사회가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부에서 광산과 목재를 비롯한 천연자원이 개발되기 시작하자 좀더 나은 운송수단이 필요해졌고, 서부의 금광·은광은 투자에 필요한 새로운 자본을 동부에 공급해주었다. 베서머 제련법과 평로법(平爐法) 등 강철제조법의 발전을 비롯한 기술적 진보로 생산량은 늘어나고 생산비는 줄어들었다. 가정 난방과 조명에서뿐만 아니라 산업에도 석유가 쓰이게 된 것은 이 시대에 나타나서 비약적으로 성장한 새로운 산업의 기반이 되었다. 19세기말경에는 펜실베이니아 서부, 오하이오 동부, 5대호 연안, 앨라배마 북부에 강철산업이 확고한 기반을 잡았다. 중서부지방에서는 정육업·식료품가공업 같은 농업관련 산업이 발달했다. 그리고 한때 뉴잉글랜드를 중심으로 발달한 직물산업은 버지니아에서 조지아를 거쳐 앨라배마에 이르는 이른바 피드몬트 고원지역으로 확대되었다. 이같은 산업의 지리적 분산은 미국이 산업국가로 전환하는 데 하나의 동력이 되었다. 이와 동시에 서로 경쟁하는 회사들이 하나의 큰 단위로 통합되어 관련산업 전체를 지배하는 경향이 나타났는데, 이런 경향은 정부를 자극해 법인에 대한 규제 강화를 유발했다. 산업이 팽창하자 사용자와 노동자 사이의 긴장이 차츰 높아졌고, 전국 규모의 노동조합이 등장하게 되었다.

급속히 성장하는 공업단지에 필요한 인력은 대부분 유럽과 아시아에서 탄압·학살·기아를 피해 미국으로 달아난 이민들이 공급해주었는데, 이런 이민의 수는 1900~14년에만 해도 1,300만 명이 넘었다. 이민들은 미국의 도로·철도·공장을 건설하는 일에 참여했지만, 미국 사회에 동화하는 속도는 매우 느렸다. 그들 대다수가 살고 있는 대도시의 소수민족 거주구역은 빈민굴과 열악한 생활환경으로 악명을 떨치게 되었다. 미국 사회에 차츰 동화한 이민들은 소수민족 거주구역을 떠났고, 미국에 새로 도착한 이민들이 그 지역을 대신 차지했다.

한편 개혁운동의 물결이 각 지방에서 일어나 전국을 휩쓸었다. 농업경제를 보호하고 지방 정부의 통제권을 강력한 정치조직에서 박탈하는 한편 빈민가의 참상과 싸우는 데 목적을 둔 이러한 개혁운동은 거의 순식간에 주 전체로 퍼졌으며, 특히 중서부지방에서 가장 활발했다. 1901년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의 암살로 대통령 자리에 오른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이 혁신주의를 연방 차원으로 끌어올려, 대기업과 강력한 노동조합의 활동을 모두 제한하는 법률을 제정했다.

세계적 강국으로의 등장

기업가들은 미국이 외국, 특히 라틴아메리카에 개입할 것을 촉구했다. 쿠바가 1895년 스페인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미국은 쿠바에 공감했을 뿐만 아니라 이해관계도 갖고 있었다. 허스트 계열과 퓰리처 계열의 신문들은 미국의 개입에 찬성하는 선전활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했으며, 결국 미국과 스페인 사이에 단기간의 전쟁이 일어났다(1898) (→ 색인 : 미국-스페인 전쟁). 이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은 광범위한 영토( 필리핀· · 푸에르토리코)를 얻었을 뿐 아니라 세계적인 명성도 얻게 되었다. 명성은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중립을 공약했고, 미국인 대다수도 참전에 반대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 전쟁 바깥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미국이 1917년에 참전한 것은 연합국의 승리를 가져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승리없는 평화' 구상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전후 평화를 위해 그가 제창한 국제연맹 안()과 14개 조항의 대부분은 베르사유 조약(1919)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미국 상원은 이 조약을 비준하거나 국제연맹에 가입하기를 거부했고, 고립주의 시대가 다시 시작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10년 동안은 미국에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이 시기는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지배한 시대였는데, 이 윤리는 술의 제조·판매·소비를 금지한 1919년의 금주법에도 여실히 나타나 있었다. 이와 함께 변화에 맞서 전통적 가치와 제도를 보존하려는 근본주의 운동이 일어났으며, 이 운동은 테네시 주의 생물 교사인 존 T. 스콥스에 대한 재판을 낳았다 (→ 색인 : 스콥스 재판). 스콥스는 진화론을 가르치는 것을 금지한 남부 법률을 어겼다는 이유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보수주의에 대한 반동 역시 '떠들썩한 20년대'의 또다른 일면이었으며, 1933년에 금주법이 폐지될 때까지 밀주사업은 번창했다. 한편 '말괄량이'로 불린 여성들은 남성과 동등한 대우를 요구했고, 여성참정권운동을 전개해 1920년에 참정권을 획득했다.

무엇보다도 이 10년은 번영의 시대였다. 그러나 이 번영은 주식시장이 무너지고 대공황이 시작된 1929년 10월에 갑자기 끝났다. 지나치게 높은 주가가 초래한 주식시장 붕괴는 전국적인 실업과 낮은 임금을 강요했다. 미국 역사에서 분수령을 이루는 이 사건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시대의 도래를 알렸다. 연방정부가 경제·사회 정책에 강력히 개입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그의 뉴딜 정책은 미국에 변혁을 가져왔지만, 경제가 완전한 회복기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제2차 세계대전 직전 군수품이 대량으로 생산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1941년 12월 7일에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하자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었다 (→ 색인 : 진주만 공격). 미국과 연합국(특히 영국·소련)이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주로 미국의 생산 설비가 적의 공격을 받을 염려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1945년 연합국이 추축국(독일·이탈리아·일본)에 승리를 거두면서 미국은 서방 세계의 지도국이 되어 유럽과 일본의 재건에 깊이 관여했지만, 공산주의의 확산을 둘러싸고 소련과는 냉전상태에 들어갔다. 냉전은 1980년대말까지 미소 관계를 줄곧 어둡게 만들었다. 소련의 부추김을 받은 북한남한을 침공하자 미국은 한국전쟁(1950~53)에 개입하게 되었고, 월남에서 일어난 공산주의자들의 반란은 미국을 베트남 전쟁(1961~73)에 끌어들였다.

1960년대는 미국의 대중생활에 두드러진 변화가 일어난 시대였다. 1963년 미국 역사상 가장 젊은 대통령인 존 F. 케네디가 암살되자, 이상주의 시대는 곧 끝나고 광범위한 냉소주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과격한 행동기준을 정당화한 '반()문화'는 1920년대 이후 일어난 가장 큰 사회변화를 특징짓는 말이 되었다. 그러나 사회발전을 위한 헌신은 계속되었고,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마틴 루터 목사가 이끈 민권운동이었다. 민권운동가들은 행진과 시위를 통해 흑인에 대한 주 정부와 지방 정부의 인종분리정책에 관심을 환기시키고, 법정에서 이러한 정책의 파기를 촉진했다. 1968년에 킹 목사가 암살된 것은 미국 사회를 괴롭히고 있는 혼란이 어느 정도인가를 측정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척도였다. 1960년대말경 베트남 전쟁은 미국의 도덕적·정신적 위기를 초래했다. 월남에 대한 대중의 지지는 차츰 줄어들고, 미국이 이 전쟁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졌다. 반전시위는 1968년에 시카고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격렬한 충돌이 일어난 것을 비롯해 1970년대초까지 대규모로 계속되었다. 이 전쟁이 끝나자 곧바로 워터게이트 사건(1973~74)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리처드 닉슨)의 사임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 시기에 미국은 어수선한 사건들과는 대조적인 2가지 업적을 이룩했다. 미국의 우주탐험기술은 1969년에 인간을 달에 착륙시켰고, 1949년부터 단절되었던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관계가 1972년에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뀌었다. 1970년대말에 이르러 미국은 경제문제(높은 인플레와 실업)에 시달렸고, 이러한 현실은 1980년에 보수적인 공화당 후보 로널드 레이건이 대통령에 선출되고 4년 뒤에 재선되는 데 이바지했다. 레이건의 예산정책은 1980년부터 미국을 채권국에서 세계 최대의 채무국으로 바꾸어놓았지만, 레이건 정부의 부통령을 지낸 조지 부시는 1988년에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경제 침체, 부랑민 증가, 에이즈 만연, 그리고 급상승하는 건강관리비용 같은 쟁점들이 전국적인 관심을 모았으며, 해외에서 일어난 사건들, 특히 이라크의 쿠웨이트 점령을 끝내기 위해 미국의 주도로 광범위한 군사동맹이 형성되고(1990~91), 동유럽과 소련에서 공산주의가 무너지는(1989~91) 사건 등은 세계 정치가 새로운 형태로 구성되기 시작했음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연간 1,500억 달러가 넘는 무역적자에다 그에 버금가는 재정적자를 경험하면서 미국에서는 경제문제가 가장 큰 문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1992년 11월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미국민들은 내정을 소홀히 하고 외치에만 역점을 둔 부시 행정부에 책임을 물어 민주당 출신의 아칸소 주지사 빌 클린턴을 새로운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1993년 1월에 발족된 클린턴 행정부는 경제회복을 최우선 과제로 내걸고 일본과 유럽 각국을 향해 시장개방 압력의 포문을 열었다. 1990년 전반기에 미국 정부가 처한 최대 과제는 증세와 무역수지 반전을 통한 무역 및 재정의 쌍둥이 적자를 조속히 회복하는 일이다.

1998년 빌 클린턴은 성()추문 사건으로 인해 미국 대통령으로는 사상 2번째로 하원에서 탄핵되었으나 이듬해 상원에서 탄핵안이 부결되었다. 같은 해인 1999년 파나마 운하의 관할권이 파나마로 넘어갔다. 2000년 대통령 선거에서 조지 W. 부시는 맞수인 앨 고어보다 전국 득표수가 뒤졌지만 선거인단 득표수에서 앞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는 1888년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2001년, 9월 11일 미국 역사상 최악의 테러 공격으로 세계무역센터와 펜타곤의 일부가 파괴된 후,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을 공격했다. 탈레반 정부가 테러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는 우사마 이븐 라딘의 인도를 거절하고 그에게 은신처를 제공한다는 이유였다. 또한 미국과 영국은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부가 테러리스트들을 지원하고 생화학무기 및 핵무기를 보유·개발한다고 비난했다. 결국 2003년 미국과 영국은 이라크를 침공하고 사담 후세인 정부를 무너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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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cropaedia 글

참고문헌

전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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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he Era of Theodore Roosevelt, 1900-1912 : George E. Mowry, Harper & Row, 1958
  • The Response to Industrialism, 1885-1914 : Samuel P. Hays, 1957
  • Woodrow Wilson and the Progressive Era, 1910-1917 : Arthur S. Link, Harper & Row, 1954
  • Origins of the New South, 1877-1913 : C. Vann Woodward, Louisiana State Univ. Press, 1951
    1920-현대
  • 1929 미국대공황 : F. L. 알렌, 신범수 역, 고려원, 1992
  • 현대 미국의 성립 : C. N. 데글러, 이보형 외 역, 일조각, 1991
  • 21세기 미국파워 : 조제프 S. 나이, 박노웅 역, 한국경제신문사, 1991
  • 미국현대사 : F. 프라이델 외, 박무성 역, 문조사, 1985
  • 미국민주주의의 딜레머 : E. 맥카시, 황의방 역, 현암사, 1980
  • 미국 정치와 사회 :, 유종해·김세진 공역, 박영사, 1976
  • 미국평론(1970-71) : 고광림, 일조각, 1972
  • 1960년대의 미국 소고 〈역사학보〉 94·95 : 이보형, 역사학회, 1982
  • 뉴딜정책과 미국자본주의 〈미국학논집〉 1 : 김종현, 한국아메리카학회, 1969
  • American, Russia and the Cold War, 1945-1975 : Walter LaFeber, John Wiley & Sons, 1976
  • America in the Twentieth Century, 3rd ed. : Frank Freidel, 1970
  • Republican Ascendancy, 1921-1933 : Jone D. Hicks, Harper & Row, 1960
  • The Perils of Prosperity, 1914-1932 : William E. Leuchtenburg, Chicago Univ. Press, 1958
  • The Price of Power:America Since 1945 : Herbert Agar,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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