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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도자사 기출문제 정리 모음 개인적으로 이거면 충분

AH101 2022. 7. 13. 2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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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전기)조선시대 전기 분원과 도자의 제작양상에 관해 논술하시오.

전기의 시기: 1468년(분원설치)/1592(임진왜란 발발)

분원설치: 건국이후 왕실에 필요한 자기양증가

<경국대전>에 명시된 바와 같이 사옹원은 법적,제도적으로 보장된 가운데 왕실자기를 전

문적으로 제작하는 관요인 분원을 설치/이유: 조선 왕실이 국내외로 사용할 최고급 백자 대량

필요. 세종연간 조선백자는 명조공용, 명 사신 접대용으로 그 수요가 늠. 금은기 부족했던 태종

-세종 연간에는 자기가 금은기 대용품으로 사용. 세조 연간에도 왕실에서 청화 백자를 본격적

으로 쓰기 시작. 태종~세조 조에 걸쳐 왕실용 일상기, 의기 대명, 조공용 기명등에 사용될

백자 수요 크게 증가

분원 설치이후 변한점: 왕실에 상납하는 자기의 성격변화(공납자기->진상자기=상품백자)

분청사기 쇠퇴: 지방 여러가마에서 분원 관요 진상백자 모방하려함

인화분청, 귀얄분청->일정기간제작. 철회분청->번성기 이미 쇠퇴기에 접어든

태토와 유약이 매우 조잡. 전기 2기가 시작되는 16세기 중엽부터 분청사기와

상감백자 등은 사라지고 순 백자와 청화백자가 주류.

분원자기의 유출과 사기장인의 도망: 연산군대 부터 관장이 크게 부족, 왕실 자기제작 곤란.

연산군(1494~1505)&중종(1506~1544)연간 관영수공업체제 흔들림->분원자기 외부유출 사용한 사

례 기록에 등장. 유출 사건에 사옹원 운영에 간여했던 종친들 연루

10년에 한번씩 가마이전: 연료문제 이러한 상황은 숙종 연간까지도 지속/분원 가마에서 도자기를 구울

때 사용하는 연료는 시장으로 지정된 광주 6개면과 양근 1개면에서 조달. 가마는 바로 이 떌감처

안에 위치. 이후 숙종 이후 분원을 재정비하는 과정에서 분원을 고정시키고 떌감을 외부에서

사오는 방식으로 바뀜

가마의 이원화: 중, 하품vs상품백자 청화백자와 같은 고급자기와 왕실 전용백자는 품질 유지를 위해 갑발

등에 넣어 정성을 다해 번조.

대표적 가마터: 경기도 광주 번천리, 도수리, 우산리, 무갑리

성종연간: 분원자기생산 안정화.사치풍조. 중국에서부터 들여오는 청화백자 수요 증가. 분원 청화백자

생산도 증가. 분원에서의 청화백자 생산도 초기에 비해 늘어났으며 수요층도 확대. ==>왕실이나

서울의 사대부가뿐만 아니라 지방에까지 분원 백자를 향유하고자 하는 사람이 확산됨 반증

   

도자의 양식: 조선 전기는 상감백자와 순백자, 음 양각백자. 청화백자가 유행하던 시기 분원가마터를 조

사해보면 백자 중에는 상감백자가 가장먼저 유행 이후 순백자, 철화백자, 청화백자가 그 뒤를

이은 것으로 보인다.

백자: 고려에서 제작되던 연질백자는 15세기까지만 생산되었으며 이후 원, 명 초기의 영향을 받은 경질 백자가 주.조선 전기 백자에 나타나는 대표적인 기형으로는 대접, 병, 항아리, 묘지석 등이 있다. 대접이나 완은 고려 청자와 달리 구연부가 밖으로 벌어진 것이 대부분이며, 굽은 높고 밖으로 벌어지거나 낮고 수직으로 뻗은 두 종류로 구분된다. 접시는 구연부가 밖으로 벌어진것이 대부분인데 청화 백자 보상당초문 접시가 대표적인 예이다. 잔의 경우 특이하게 양옆에 귀가 붙은 형태가 있는데 1466년 (세조12)진양군영인정씨묘지석과 동반출토된 태일전(太一殿)명 상감백자 잔탁을 들 수 있다. 이 밖에 고족배와 합, 각배 등이 있다.

상감백자: 15세기말~16세기초 점차 소멸. 고려 청자, 분청사기 사용된 상감기법에 연원

청화백자: 초기의 청화백자 문양장식은 한국식과 중국식으로 구분되어 중국 자기는 송죽매가 병렬되거나 혼재되어 중경에 배치된데 비해, 조선 청화백자는 한두 소재를 부각시켜 근경에 배치하고 표현이 절제 되고 회화적이다. 청료가 귀했던 시기인 만큼 이 시기의 청화백자 수요층에 대한 제재는 엄격해서 <경국대전>형전 금제조에 세조 13년(1467)"청화백자 사용 금지법" 제정=======>(변화)

전기 성종조에 중국에서 청료 개발 그 영향으로 청화백자와 청료가 사무역, 밀무역 등의 비공식적 교류를 통해 다량 수입, 다양한 계층에서 널리 사용. 국내 제작 기술 역시 우수했지만 국내에서 청료가 생산되지 않아 여전히 청화백자는 귀하였다. 이에 청화 백자 무역 금지와 사용금지령이 공표되기도. 초기에 중국 도자기를 모방했던 조선 자기의 문양은 전기에 이르러 한국적인 정서가 깃든 격조 있는 회화풍으로 바뀌었다. 당초문이 빈틈없이 꽉 들어차던 기면은 매화가지 위에 앉아있는 새, 나무 아래 들국화 등 한국적인 화조화로 장식되었다. (홍치2년명청화백호, 백자청화매조문호)또한 보조문양 없이 매화절지의 주 문양만을 충분한 여백을 두고 표현 한 점도 전기의 특징. 16세기 전반 중종대에는 회회청을 들여오지 못하여 청화백자 제작이 어렵게 되었다.

홍치이년명 백자청화송죽문호(1489)

백자청화매조문호,15세기,국보170호

철화백자: 순백자와 청화백자에 비해 소량으로 생산. 초기에는 보조제를 제대로 정제하지 않아서인지 안료가 휘발하여 색상이 제대로 발현되지 않은 경우도 있었으며, 색상에 대한 선호도가 청화에 비해 낮았기 때문.

15세기 제작 분원자기굽-內用, 見樣./, , , 글자를 한글자씩 음각한것 발견. 궁중에서 사용한다는 뜻인 "내용"과 왕실 공예품의 견본이라는 "견양"은 각각 대전에서 사용하던 것임을 의미, . . , 은 경복궁 내 창고를 지칭

좀 더 늦은시기-, , 명도 발견: 은 별번 즉 원래 진상할 기명 이외 왕실의 행사있을 떄 별도로 제작하는 그릇에 표기/좌, 우명은 좌우로 나누어 분원을 관리했다는 <용재총화>의 기록으로 보아 분원 가마를 좌우 두 부류로 나눈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

------------------------------------------------------------------------------------------------------------------2001후기)조선시대 후기 도자사의 제 양상에 관해 논술하시오.

후기의 시기:1752년(영조28)~1884(고종21)현재의 분원리로 이전하여 고정된 1752년부터 민영화되는 고종 20년까지 약 130년간의 기간

전대의 도자관련 여러 조항들:

분원고정론의 논의: 숙종23년(1779)에 대두. 분원을 원료의 운송이나 제작에 편리한 강변으로 옮겨 고정시키자는것.

남종면 분원리에 영구 정착 1752년 가마를 옮기는 비용 절감. 강을 이용하여 도자의 재료가 되는 백토와 떌감, 그리고 완성된 자기를 운반하기에 유리한 상황이 갖추어져 1884년 가마 운영이 민영화될 떄까지 안정적인 요업체계를 유지 더욱 다양한 도자를 제작할 수 있는 변화의 시대를 열게됨. 그러나 여러가지 대내외적 민영화의 길을 걷게됨

   

도자의 양식:

후기 전반부- 대개 금사리 계통의 것과 유사하나 후반부의 제품은 보다 대중화되어 가며 또한 순백자보다는 청화백자가 양적으로 많아지고 무늬도 민화풍으로 서민화되어 가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구하기 어려웠던 고가의 청화안료의 구득이 상당히 용이해지고 있는데 아마도 국내에서 많이 생산되었든가 아니면 서양으로부터 저렴한 청화안료의 수입이 비교적 자유로왔던 것이 아닌가 생각

18세기후기(중기의 전반부): 18세기 후기에는 중기의 여운이 많이 남아 있는 유색은 영청을 띠며 푸른 기가 도는 것이 특징. 무늬는 간결한 국란, 문자, 칠보, 산수, 초화등의 무늬가 그려지며 필치는 크고 굵어지는 경향을 보이면서 민화풍의 분위기가 나타나고, 떄로는 청화, 진사, 철화 등을 섞어 다채로운 무늬를 나타낸 예도 있다. 항아리 동부 중심에는 난 계통의 초화무늬와 여기에 매조, 화분과 파초무늬가 조합되어 복잡한 새로운 무늬로 등장한다. 또는 넓어진 능화형 안에 초화무늬, 산수인물무늬 등의 무늬가 그려지기도 한다. 이밖에 어깨에 시문된 보조무늬인 여의두 무늬가 커지고 병이나 항아리 하부에는 연판무늬가 시문되며 때로는 항아리의 아래에서부터 3분의 2되는 곳에 여의두 무늬가 한줄 돌려져 문양포치에 어색함이 나타난다. 진사백자등장-> 그릇 표현 전체를 진사로 무늬를 나타낸 몇몇의 예외는 있으나 진사는 예부터 필요한 부분에만 조금 쓰이던 안료이다. 진사자기가 대량으로 제작되지는 않았지만 18세기에 들어와 진사백자의 제작이 늘어나고 있는점 주목. 무늬는 연화무늬, 포도무늬, 대나무무늬, 호랑이무늬, 송학무늬등 이것은 당시 특수한 시대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

 

   

   

   

   

후기 후반부인 19세기-청화백자 무늬는 전성기를 맞지만 격조가 떨어지고 구성의 묘가 없이 복잡한 무늬가 그려지는 그릇들이 많아진다. 때로는 무늬가 단순화되어 자유분방한 새로운 무늬로 변하고 있다. 단순생략 과정에서는 기하무늬가 나타나기도 하며 무늬의 소재로는 초화, 십장생, 문자, 봉황, 학, 남중문인화풍의 산수, 신선, 포도, 파초, 연어 등 매우 다양한 내용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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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후기)한국의 청자 발생 및 편년 문제를 서술하시오., 쟁점과 이설이 있으면 그 점도 구체적으로 언급하시오.

고려청자의 발생 문제는 일제강점기의 학자들로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논쟁거리로서 대체적인 발생배경으로는 통일신라 경질토기에 나타나는 회유기술등의 내적인 기술 수준 상승, 나말여초 장보고로 대표되는 중국과의 활발한 해상교역과 그에 따른 중국 도자기 기술의 전래, 당시 중국 월주 청자의 영향, 선종 승려들과 지배층의 차문화 수요에 따른 도자 수요 증가 등이 거론되고 있다.

지금까지의 연구 방향은 가장 오래된 절대편년자료인 <순화4년>명 항아리를 청자의 초보적 단계로 보는 실증적 연구방법과 해무리굽 양식을 포함하는 초기 청자의 제반 현상에 초점을 맞추고 한국보다 먼저 청자를 완성한 중국 기술이 언제 전해졌는가 하는 전파와 수용의 관점에서 본 양식 비교를 통한 연구 방법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먼저 실증적 연구 방법에 대해 살펴보면<순화4년> 명항아리라는 절대편년자료를 바탕으로 10세기 후반 발생설을 주장한다. 유약과 태토가 조잡하기 때문에 이것을 발생기 수준을 나타내는 초보적 청자로 본 것이다. 그러나 이 견해는 태조묘당의 제기로 사용되기 위해서는 청자라는 신소재가 충분한 숙련기간을 거쳐, 당시의 안목을 기준으로 우수한 재질이라 판단되는 수준에 이르렀을 떄 비로소 채택되었을 것이라는 상식적인 문제가 고려되지 않은 문제점이 있다. 또한 최근에 발견된 새로운 자료의 등장과 함께 설득력을 잃고 있다.

이러한 한계점 때문에 중국과의 비교 연구에 초점을 맞추는 양식사적 방법론에 관심이 기울어지고 있다. 초기 연구는 주로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월주요와 강진 청자요지군의 출토품이 유사하다는 점을 토대로 10세기 후반설, 장보고가 활동하던 당시의 중국, 한국, 일본의 관계 속에서 해무리굽 청자 발생이 일본보다 늦게 나타날 수 없다고 보아 9세기 전반설 등이 제기되었다.

보다 최근의 견해들을 정리해 보면 9세기 전반설, 9세기 후반설, 10세기 후반설 등이 제기되고있다.

9세기전반설:

-김재열: 김재열은 용인 서리 출토 유물을 토대로 해무리굽 형식보다 앞서는 선해무리굽의 형태의 청자가 존재한다고봄. 해무리굽보다 이른 시기의 청자와 백자는 굽의 접지면이 좁고 내저원각이 없으며 포개어 군 예가 많다는 등의 특징을 언급. 그렇다면 용인 서리 최하층위의 도편 성격은 내저원각이 없고 접지면이 좁은 청자로서 이들을 우리나라 최초의 자기로 봄. 이러한 종류의 가마는 시흥방산동, 봉천 원산리 또한 해무리굽 양식은 당대 자기 특징의 하나이고 8~9세기로 비정, 일본에서도 9세기 후반에 시유토기에 해무리굽완의 영향이 반영되고 있는 점 등을 고려한다면 한국에서 백자 해무리굽 발생시기는 늦어도 9세기 말이여야 하며 최하층의 고식청자(혹은 선해무리굽완류)는 1m이상 퇴적되어 있어 제작시기가 길었을 것으로 보고 선해무리굽완의 고식청자는 9세기 전반 장보고의 해상활동과 통일신라 후기 선종의 유입과 함께 음다풍습의 유행등을 배경으로 청자 발생 9세기 전반 주장

-최건: 해무리굽 완이 성행하는

 

   

   

   

   

   

   

   

   

   

2002전기*후기

1.청화백자의 시원과 전개양상에 대해 논술하시오.

백자.-순백색 바탕흙 위에 투명한 유약을 씌워서 번조한 자기를 말함 동양에서 백자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575년경 하남성(河南省) 안양현(安陽顯) 북제(北齊)시대 (武平6년: 575년) 비교적 깨긋한 백자편 출토. 범수묘의 발견으로 6세기 후반경 이미 만들어 지기 시작함이 확인

당대는 백자의 발달기로서 하북성(河北省) 형요(邢窯)가 북방 백자 생산 가마중 대표생산지로 부각. 당나라 시기에는 백자에 대한 요구가 늘어나 정선된 바탕흙이 아닌 기면에는 화장토를 입히고 소성하는 풍조도 생김.

수, 당시대에는 하남성 공현(鞏縣)지방에서 정선된 순백자가 최초로 생산되었다.

정요백자의 출현과 발달-10c후반경 정요백자가 북망에서 만들어 짐(977년 화북 중국 정지사 탑기 밑부분에서 양질의 백자가 출토) 이후 12세기 후반 크림색의 질좋은 백자를 생산. 13~14세기에는 청백자가 출현하였다.

청백자:(13~14세기 출현)

   

   

   

   

   

   

   

   

   

   

   

   

   

   

원대(1271~1368)-1320년경 경질백자 탄생. 이러한 백자를 토대로 1351년경 청화백자를 만들었을 것으로 생각. 요주요, 여요, 남송 관요 등으로 대표되는 송 대의 청자 문화권에서 원대는 백자를 선호 이는 유학을 정치이념으로 받아들여 사치를 금하고 절약, 소비를 줄였던 풍조 때문에 자연스럽게 색도 무색에 가까운 백색을 숭상한것. 그러나 14세기 전반 양질의 백자생산을 토대로 한 1351년의 청화백자의 대량 생산은 초반기의 이념과 대치되는 것으로 이는 무역품으로 팔아먹기 위한 것이었다.

1323년경 신안앞바다-그 제작시대가 지대통보(至大通寶) 전( )에 의한 1310년의 상한과 지치(至治)3년명목간(木簡)에 의한 1323년의 하한년도가 밝혀짐. 그런데 여기에서 중국 청화백자가 한 점도 없다는 점을 들 수 있고 그로 인해 청화백자의 본격적인 제작 시기는 14세기 중기 이후라고 보게 된것

영파에서 출발하여 일본으로 가는 도중 난파. 중국도자기(약 60%가 용천요청자/대부분 경덕진요계의 백자 30%/나머지 건요, 길주요),한국도자기(고려청자 7점).일본도자기 4점.

1351년 1929년 영국 David중국 예술 기금회소장 지정(至正11년-1351년)의 연호가 적힌 "청화 용문 상이병" 현 대영박물관 소장 약 60cm의 대형자기, 청화백자의 가장 연대가 내려가는 예

지정형: 페르시아 수입청화안료사용. 망간소량, 철분 =>청화발색이 농염 처액이 진한부분은 흑색의 반점/중국산 청색안료:망간 성분 , 철분 =>청화 발색이 회색및이 나며 흑색의 반점이 없다. 이렇듯 청화의 사용으로 회화적 문양이 본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감상용 도자기가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명대: 명 초기 정치 불안정으로 전반적인 도자 생산 상황이 좇지 않음. 1425년 명사 윤봉이 우리나라에 백자요구(15세기 전반 조선 백자의 수준을 반영하는 동시에 명의 상황 반증)

선덕시대 다시 청화백자 경덕진서 부흥: 영락시대부터 청화백자의 장식이 산뜻하고 간략화 되면서 서서히 중국인의 전통적인 심성과 부합되면서 중국자기의 주류가 되었다. 자기의 기벽은 얇고 유색이 부드러우며 문양장식은 화조와 과실 위주이고 그림은 산뜻하고 자연스럽고 명쾌하다. 이 때부터 관요에서 생산된 자기는 황제의 연호를 써넣기 시작했으며 전서로 "永樂年製"로 썼으나 극히 적은 수에 불과하다. 선덕 시기의 청화백자는 비교적 무게가 있어 보이며 기벽이 두껍다. 유색은 청색을 띠며, 그림은 세련되고 힘이 있고 호방하다. 용맹하고 신성해 보이는 다섯 발가락을 가진 용문양이 많이 보이며, 화훼, 봉황, 사자, 해수, 인물, 원앙문 등이 보인다. 본격적으로 그릇의 밑바닥에 해서(楷書)로 황제 연호를 "大明宣德年製" 로 썼다.

   

우리나라로의 전래: 청화백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시기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으나 고려말기에 들어왔을 가능성이 있다. 고려말기록 <효종실록>에 의하면 태종이 왕세자로 국자박사로 있을 떄 성균관에서 중국 청화백자잔으로 술을 마심(1380년대)/그 후의 청화자기 유입기록은 세종조에 집중

세종즉위년(1418)유구에서(당시유구는 명에 예속/세종5년(1423)일본에서 중국 청화백자와 청자를 조공품으로 받친기록.그외에도 명에서 선덕제가 즉위하여 명 황실로부터 세련된 청화백자가 전래된것으로 보임. 상당수의 중국그릇이 수입, 전래, 진상, 하사 등의 방법으로 국내에 유입되어 청화백자 생산에 자극을 주었다.그리하여 1463년 이후 세조는 국내산 회청의 개발을 서둘렀고 또 광주 관요를 중심으로 백자와 청화백자의 본격적 제작되었을것.

   

청화백자는 청화의 안료를 중국으로부터 고가로 수입하여 사용하였으므로 국가의 재정이 곤란하여 수입이 어려울때는 그 제작의 양도 격감하고 있다. 특히 임진란과 호란 전후기에 이러한 현상이 뚜렷하다. 또한 그 무늬는 조선시대 회화의 변천에 따라 시대적인 특징을 보인다. 이러한 특징은 화원이 그림을 담당했기 때문이며, 조선후기로 내려올수록 그릇과 무늬는 대중화되어 가는 경향이 짙어 특히 무늬에서는 전문화가의 필치가 사라지고 대개가 서민화 혹은 민화화하고 있어 청화백자 사용층이 보다 대중화되어 확대되어 갔음을 알 수 있다.

   

   

원대도자의 특징: 기형이 대체적으로 크고 풍만하며

큰쟁반, 큰대접, 편항아리(이슬람 문화의 영향)

큰항아리, 매병, 호로병, 고족배, 잔탁

기면에 층을 나누고 전체를 장식하는 것 문양 장식이 간단한 송대와 당대 자기형태와 많이 달라진점임

인물고사, 동물문, 물고기, 곤충과 당초문 등의 식물문이 꽃잎이 둥글고 대칭을 이루며 도식화되어 있다.

용문양이 본격적으로 제작되었고 왕과 관련된 상층민용으로 제작.

   

   

2004전기*후기

   

2005전기*후기

1.분청사기의 기원과 특징 및 변천

<분청사기의 기원>

분장회청사기의 준말. 퇴락해 가던 14세기 상감청자의 뒤를 이어 발생 15세기 초 조선왕조의 기반이 튼튼히 닦여진 시기와 떄를 같이하여 퇴락해 가던 상감청자가 일변하여 새롭게 서서히 탈바꿈한것. 세종대에 기법이 다양하여 그 발전기 15세기 후반 이후 경기도 광주 일대에 백자 생산의 관요가 국가에 의해 운영됨으로써 분청사기는 16세기 중반 이후에는 생산이 거의 끝난다. 그러므로 14세기 중엽 발생으로부터 16세기 중엽경까지 약 200여 년간 생산. 우리나라 도자기 중 가장 순박하고 민예적인 성격. 양식상 12세기 중엽 발생한 고려상감청자에 그 연원을 두고 있으며 13세기 후반 이후, 원 나라와는 일가관계에 놓여 밀접한 유대가 이루어지므로 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현상이 일어난다. 상감 기법은 조잡, 해이해지고 능화형 안에 무늬가 그려지며 대접 안바닥에는 간지가 새겨진다. 그뿐아니라 화금 청자와 같은 소수 수요층을 위한 화금 기법등도 고안 사용되었다. 이러한 여러가지 요소들이 분청사기 발생에 영향을 주었다.

조선왕조는 14세기 중엽 이후 새로이 등장한 지방 향리와 평민 층으로부터 성장한 신진사대부가 주축이 되어 조선왕조가 성립 . 훈민정음창제, 천문관측기의 발명등 맥성을 위한 "민본"을 전제로 한 독창적인 민족문화의 계발과 창달. <농사직설>과 <향약집성방>등의 편찬. 우리에게 맞는 농사법을 찾고자 함과 우리의 산천에 나는 약초등을 조사하여 우리나라 사람의 질병은 우리나라의 약으로써 고치고자함. 민족적인 자각과 기층문화를 포용하고자하는 성격이 15세기 문화의 특색.

분청사기는 토산공물로서 중앙에 상납되었기 때문에 특히 관사명이 들어 있는 것이 많고 특히 관사명이 새겨 있는 그릇은 왕실 및 관아에서 주로 사용. 또한 전국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는 생산지. 고려말 조선 초에 걸쳐 정치의 불안, 관기의 문란, 신분층의 와해, 새로운 지배세력의 성장, 왜적의 침입 등으로 관요의 기능이 마비되었고 이들 기술자들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퇴락한 상감청자를 제작하기에 이르른것.

   

<초기,발생기 약1360년~1420년경)

초기제1기: 태동기 상감청자 쇠퇴기, 분청사기 태동기, 고려의 쇠운과 함께 고려청자는 퇴락일로. 태토가 조잡해지고 기벽이 두껍고 투박하며 암록색을 띤다. 운학무늬 의 경우 구름무늬가 빗방울무늬로 변형되어 고려 상감청자의 전통을 유지. 대접의 경우 포류수금무늬, 연당초무늬 같은 무늬가 생략되고 몇 줄의 선만 돌려 민무늬의 경향을 보이기도 . 매병에 있어서는 굴곡이 심한 기형의 변화와 더불어 어깨에 간략한 자무늬, 연판무늬 등이 상감될 뿐이다. 고려말기의 기형, 무늬 등이 정형을 잃었지만 그대로 분청사기로 연결된다. 전남 강진군 대구면 미산과 당전 부락일대에 분포되어 있는 14세기 말 청자가마터가 이 시기에 속한다.

   

   

초기제 2기: 초기 후반 약 30년간 조선왕조의 기반이 다져지는 시기이므로 분청사기에서도 새로운 방향이 모색. 퇴화된 상감청자의 무늬가 그대로 이어지는 한편 기형, 무늬 , 유태가 재정비되어 조선적인 무늬 형태로 변모하기 시작. 또한 고려 상감기법에서 간혹 채택되던 인화기법이 대접의 중심무늬로 등장하기 시작하는 인화기법의 발생기.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는 자료가 분청상감공안명연당초무늬대접과 분청인화공안부명국화무늬대접이다. 전자는 청자상감정릉명 연당초무늬대접에 근원을 둔 연당초무늬의 변형도니 상황이고, 후자는 성긴 국화무늬의 발생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1420년은 공안부가 폐지되는 해일 뿐 아니라 대접무늬에서도 뚜렷이 한 획을 그을 수 있기 때문에 초기와 중기를 여기서 구분. 그러므로 이 시기에 속하는 그릇의 무늬는 퇴화된 연당초무늬, 풀무늬, 중권무늬, 빗방울무늬, 성긴 인화무늬가 많다. 부수적인 무늬로는 여의두 무늬, 연판무늬, 자무늬, 방사성파상무늬 등이 사용된다. 기형은 대접의 경우 안으로 휜 투박한 모양이 주종을 이루며 대마디 굽의 특징을 보인다. 제작 방법은 태토 빚음 받침에 포개어 제작했으며 유약은 청자유 계통의 투명유이지만 태토가 짙은 회흑색을 띠고 있어 유조는 여전히 암록색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편년자료로 최운해 무덤출토 분청상감파도무늬완(1404년), 등이 있음.

   

   

   

<중기, 발전기 약 1420년경~약 1480년경>

분청사기 발전기 1480년 전후가 되면 상감 기법은 자취를 감추고 인화 기법도 쇠미해지는 반면 귀얄 기법이 크게 유행한다.

중기 제 1기: 세종 치세년간에 해당 조선 전기 문화의 융성시기. 도자공예에서도 기법상의 다양한 발전을 보여 상감, 인화, 박지 음각 등에서 참신하게 변모한 양상. 혹은 새로운 기법이 고안되기도. 태토는 정선되어 밝아지며 유약은 잡물이 없이 투명해져 분청사기의 특징이 유감없이 발휘되며 또한 조선백자의 생산이 뚜렷해짐. 이와 같이 중기 제1기는 무늬와 기법이 다양하게 발전 세련되며 고려적인 전통에서 조선적인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 기법은 상감과 인화기법이 많으며, 인화 기법은 대접의 경우 내측면에 듬성듬성한 시문에서부터 점차 발전하여 기면 전체를 가득히 채워 무늬구도가 세련된다. 인화 기법에 사용되는 단독무늬 도장에는 국화무늬, 톱니바퀴형 원무늬, 육각판무늬 등이 있으며 또한 집단연권무늬가 그릇 전체에 압인되어 민화무늬의 새로운 특징이 정착되는 시기이다. 상감 기법의 연당초무늬는 변형하여 활달한 새로운 무늬로 변모한다. 한편으로 대접 외면에는 청자상감정릉명연당초무늬에 연원을 둔 당초무늬와 이중원권내 국화무늬를 네 곳에 배치하는 무늬의 구도는 퇴화되지만 다시금 고려상감청자의 무늬가 소생하기도 한다. 이밖에도 변형된 운학무늬가 상감되어 고려청자의 새로운 환원기를 맞이한 듯하며 이떄의 유조는 고려청자와 구별할 수 없다. 충남 공주군 의당면 가산리와 중흥리가마터로부터 물고기 무늬가 상감 혹은 인화기법으로 시문되며 또한 전북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 가마터로부터는 면상감의 모란무늬, 모란당초무늬의 편병과 큰항아리가 출토되어 분청사기의 새로운 면을 보인다.

편년자료로는 정소공주무덤출토 분청상감초화무늬네귀항아리와 분청인화집단연권무늬네항아리(1424), 분청박지연어무늬고봉화상뼈항아리(1430)등

   

   

   

   

청자상감정릉명 연당초무늬대접(왼편)

청자상감덕천명연버들무늬병

분청상감의성고명병등

청자상감정릉명 연당초무늬 대접의 내면무늬인 연당초무늬는 초기 분청사기 대접의 변천과정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며 청자상감덕천명연버들무늬병과 분청상감의성고명병은 기형, 거친 태토, 간략한 자 무늬와 연판무늬, 황색을 띤 회청의 유약 등의 특징들은 청자상감의 쇠퇴와 분청사기 발생의 과도기적 양상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2006전기*후기

1)이제까지 발굴된 한국의 도자 가마터를 요점적으로 정리 서술하되 도자사의 추이와 연결하여 설명하시오.,

1.전남 영암구림리, 전북 보령진죽리-청자 발생 문제와 연결되는 8~9세기 통일신라시대 가마터

2,청자 가마터 강진 사당리 가마터에 대한 조사와 발굴 일제 시대 잘못된 인식에서 출발 . 청자에 대한 관심을 1910년대부터 일본인들의 골동취미에 의해 개성의 왕릉 도굴을 비롯 강진일대 지표조사가 실시되면서 고조 그 결과 왕릉은 물론이요 가마터 역시 훼손이 심하여 강진뿐만 아니라 부안 유천리 일대가 도굴되어 파편산일 다행히 유천리 도편의 일부는 그후 이화여대박물관 소장. 이들이 정리되어 1983년에 특별전이 개최되기도.

3.녹청자 관련<인청경서동가마터, 해남진산리 가마터>

인천경서동 가마의 경우 1965년~66년 국박과 인천시립박물관이 함께 발굴함으로써 알려진 조질의 녹청자가마터이다. 발굴 당시에는 토기제작에서 청자로 넘어오는 과도기의 가마터로 보았으나 82년~84년 대규모 녹청자 가마터들이 해남군 산이면 진산리에서 지표조사되었고 또 진산리 제품을 실은 배를 완도 어두리 앞바다에서 인양발굴함으로써 녹청자에 대한 생각이새로이 정리 인천 경서동이나 해남 진산리 녹청자들은 11세기경의 생산품이라는 의견이 제시되었고 이 결과, 우리나라 청자의 생산은 강진을 중심으로 한 양질의 청자와 해남 진산리나 인천 경서동을 중심으로 한 조질녹청자의 두 종류의 생산품이 공존했음을 파악. 진산리 제 17호로 명명된 녹청자가마터 91년도 발굴 보고서에 의거 10세기말~11세기 전반이라는 연대 추정

4.초기청자관련<용인서리고려백자가마터, 고창용계리 청자가마터, 경기도 시흥시 방산동가마터, 봉천원산리가마터, 강진 대구면 용운리 가마터> 이들 가마터의 공통된 특징은 무수한 원통 M자형 갑발로 거대한 퇴적층이 이루어져 있고 도편의 대부분 민무늬 이며 해무리굽 양식의 완, 얇은 내화토 받침이 특징. 유색은 암록색, 황갈색, 녹갈색 등을 띠며 유빙렬이 없다. 밖으로 벌어진 대접, 접시 완, 항아리등 생활용기의 기종이 다양하게 보임.

-용인서리 고려백자가마터: 1084~88년까지 3차에 걸쳐발굴. 모두 3차의 가마가 축조 최초의 가마는 벽돌가마요, 최후의 가마는 진흙가마로 그 길이가 약 84m에 달함. 4개층위를 확인한 6m의 자연퇴적층의 존재는 청자의 시원문제로부터 백자의 자체변화의 모습까지 알려줌. 즉 선해무리굽->해무리굽->퇴화해무리굽->윤형굽으로의 굽형태의 변화과정을 밝혀주었다.

   

   

   

-고창용계리가마터: 1983년 영광 원자력 발전소의 상수원 취수댐걸설을 위해 원광대학교 박물관 발굴. 발굴당시 가마와 관계있는 건물터 주변에서 태평임술(太平壬戌二年)명(1022)평와편의 발견으로 대체로 1022년전후 활동했으리라는 정보. 접시, 꽃모양접시, 대접, 큰사발, 병항아리, 주전자, 등잔 등다양한 기종

출토. 해무리굽의 완굽이 특징. 뚜껑있는완, 편병, 유병등은 안압지 풀토의 토기 기형가 비슷하며 잔받침, 주전자, 향로등은 11세기 후반~12세기 기형의 선구적인 것으로 주목 민무늬의 무늬 , 음각과 양각기법이 모두 있으며 음각기법으로는 구름무늬, 연판무늬,앵무무늬, 초화무늬 수목무늬등이 양각기법으로는 연판무늬가 있다. 아직 비색청자의 유조가 아닌 회청색, 녹청색, 녹갈색등의 유조

   

   

   

-경기도 시흥시 방산동 가마터: 벽돌가마터 진흙가마로 진행하지 않고 벽돌가마에서 자기제작 중단. 또한 청자 퇴적층이 간층없이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토기현들의 퇴적위에 존재했다는 점 확인 용인서리의 최초 가마가 벽돌가마였으므로 최초의 서리가마는 방산동 가마와 거의 같은 시기일 것이며 오히려 방산동 가마가 조금 앞설 것이라는 점.

   

   

-봉천원산리 가마터

   

   

2007전기*후기

1)분청사기의 종류와 지역적 특성에 대해 서술하시오.

< 분청사기의 지역별 특색-경기도, 충청도(제1군)/전라남,북도(제2군)/경상남,북도(제3군)>

(경기도, 충청도)-1군

15세기 전반 연당초무늬의 상감기법과 육각판무늬, 국화무늬 같은 인화기법이 중심이다. 15세기 후반 경기도 광주 같은 지방은 관요가 성립됨에 따라 분청사기의 제조는 끝이 나고 백자 생산의 중심이 되므로 귀얄과 담금분장과 같은 과정을 거치지 않고 있다.

충남 공주군 반표면 학봉리에서는 청화백자의 영향에서인지 철화기법의 분청사기라는 독특한 지방양식으로 발전한다. 그러나 16세기가 되면 회백자에 백토분을 입힌 도편이 남양주군 별내면 청학리와 과천군 문원리 등지에서 채집되고 있어 지방에서의 백자이행 양상의 한 단면을 알 수 있다. 서울의 우이동과 도봉동에는 14세기말~15세기, 이를테면 전기 제2기에 속하는 가마터가 존재하는데 이들은 분청사기의 특질을 갖추기 이전의 가마터이다. 이와 같은 성격의 가마터는 전국에서 발견되며 이는 고려 말기 청자 가마터가 전국으로 확산된 현상과 상통한다. 충청도 공주와 연기 지방의 중기 제1기에 속하는 분청사기 가마터 근방에는 대단위 백자 가마터가 좀처럼 발견되지 않아 이러한 현상은 15세기 전반에 이 지방에서는 아직 백자의 생산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말한다. 대체로 15세기 후반~16세기 전반으로 추정되는 학봉리 철화분청 가마터에서는 백자 도편이 많이 수집되므로 15세기 후반 광주 관요의 백자 생산의 영향이 서서히 지방으로 확산되어 갔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사기막리의 분청사기의 성격도 인화분청에서 바로 백자화해 간 15세기 후반의 가마터가 있다. 이와 같이 경기도와 충청도의 분청사기의 성격은 전라도 지방에서 크게 유행한 귀얄이나 담금분장의 성행 없이 대체로 15세기 후반 이후 백자로 이행해 간다.

(전라남, 북도)-2군

다른 어느 지역에서보다 가장 뛰어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예컨대, 15세기에는 박지 기법과 음각기법에서 특이한 발전을 하며 15세기 후반~16세기에는 귀얄 기법과 백토가 두껍게 입혀진 담금분장 기법에서 아름다운 묘미를 살리고 있다. 15세기 전반에서 후반을 걸쳐서 활동한 전북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 가마터는 양이나 내용에 있어서 학봉리 가마터와 쌍벽을 이루는 개성있는 지역 특색을 보이는 가마터이다. 편병, 큰항아리와 같은 기형이라든지, 물고기, 모란, 모란당초, 연화 등과 같은 무늬, 그리고 면상감, 인화, 박지, 음각, 귀얄 기법 등은 제 2군을 대표하며 면상감 기법에서 특히 특징이 두드러진다. 전남 고흥군 두원면 운대리의 분청사기 가마터는 15세기 후반~16세기 전반에 활동한 가마터로서 담금분장기법에서 개성있는 지역적 특색을 보인다. 전북 고창군 아산면 용계리와 부안면 수동리 가마터에서는<내섬(內贍)>명 도편이 수집되며<내섬>명 그릇은 전라도 지방에서만 제작되고 있어 제 2군의 특징으로 꼽힌다. 광주 충효동 분청사기 가마터는 특히 각종의 명문이 수십종 발굴된 바 있어 제 2군의 지방적 특색을 또한 보인다.

(경상남, 북도)-3군

인화기법을 새로운 경지로 발전시킨다. 특히 집단연권무늬의 그릇은 동일 무늬의 반복으로 인해 현대 추상미술을 연상시키는 것이 있다. 인화 기법의 그릇은 당시 상품 그릇으로 주로 중앙관아에 상납했고 따라서 <인수부><장흥고>의 관청 이름뿐만 아니라 생산지 이름도 같이 새겨 상납하고 있다. 상납 그릇의 생산지 이름이 경상도 지방이 많다는 점이 제 3군의 제일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는 양질의 태토가 경상도 지방에서 많이 산출되는 데도 기인한다.

   

<분청사기의 종류-상감, 인화, 박지, 음각, 철화, 귀얄, 담금기법>

(상감기법)

고려상감기법의 연속 무늬의 음각선에 백토나 자토를 넣어 유약을 씌워 번조하는것. 분청상감기법에는 선상감과 면상감이 있는데 특히 면상감에서 특징을 보인다. 면상감은 박지 기법으로 이행된다. 선상감은 처음에는 고려 상감무늬를 답습하다가 1420년대 이후에는 조선적인 무늬로 신선하게 변한다. 분청상감 기법은 조선백자에 영향을 주어 상감백자가 약간 제작되나 15세기 후반 이후로는 상감 기법은 도자 무늬로서 크게 이용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도자기에 적용된 상감 기법은 12세기 중엽에 발생하여 15세기 중엽경까지 애용되었던 한국 독자적인 도자 무늬 기법으로 발전되었음은 이미 언급한 바이다. 무늬로는 연당초무늬, 연꽃무늬, 버드나무무늬, 모란당초무늬, 모란무늬, 초화무늬, 갈대무늬, 물고기무늬, 어룡무늬, 파도무늬, 돌림무늬 등이 있으며 때로는 이들이 도식화되거나 변형되어 새로운 무늬의 경지를 나타낸다. 분청상감 기법의 그릇에는 유색과 태토가 고려청자상감 그릇과 구별하기에 매우 모호한 것이 많다.

(인화무늬_

인화 기법은 원하는 무늬를 새긴 도장을 가지고 그릇 표면에 질서 정연히 찍은 후 백토를 넣어 무늬를 나타낸 기법으로 넓은 의미로는 상감기법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도장을 찍는 기법은 통일신라시대 뼈항아리에 많이 사용되었고 고려상감청자에도 일부 사용되나 표면 장식무늬로서 특색을 십분 발휘한 것은 단연 분청사기에서이다. 모든 종류의 기형에 응용되며 처음에는 대접의 내면에 국화무늬, 육각판무늬, 삼원무늬와 같은 도장이 한 줄 또는 두 줄 정도로 단독으로 듬성듬성 압인되다가 차츰 전체를 메워 나가며 한편으로는 집단화된 국화무늬, 연권무늬, 빗방울 무늬 등이 그릇 전체를 뺵뺵히 찍혀 그릇은 전체가 하얗게 백토분장되어 인화 기법은 절정에 이른다. 그릇 아가리나 굽 주위에 부수적으로 시문되는 종속무늬로는 풀잎무늬 당초무늬, 여의두무늬, 연판무늬, 자무늬, 빗방울무늬, 잎무늬 등이 있다. 가마터를 조사하면 듬성듬성 인화된 초기 인화분청 파편이 청자상감의 여운이 짙은 파편과 함꼐 출토되는 것이 보통이다. 대체로 분청인화 기법은 15세기 초에 발생하여 1420년경에는 무늬 구도가 안정되고 15세기 중엽경에는 세련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인화 기법은 모든 분청사기 가마터에서 발견된다.

특히 인화분청 그릇 중에는 관사 일므, 생산지 이름, 도공 이름을 압인 혹은 상감 기법으로 새긴 것이 있어 제작 시기, 생산지간의 특색 비교등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준다. 예컨대 공안부, 경승부, 인녕부, 인수부, 덕녕부, 내섬시, 내자시, 예빈시, 장흥고 등의 관사일므,고령, 합천, 경주, 언양, 안동, 상주, 군위, 성주, 금산, 경산, 밀양, 창원 울산, 양산, 진주, 진해, 김해, 의흥, 예안, 삼척, 해주, 무안 등의 지방 이름이 있는데 경상도 지방이름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것이 특색이다.

이밖에 , , , . 와 같은 과낫이름의 약자. , , , ,, 의 지명의 약자. 李金, , , 良金, 와 같은 도공이름. 기타 公衙,(공아), (공), 光上(광상), 光公(광공) 과 같은 관아와의 관계를 나타내는 여러 가지 명문이 있다.

(박지기법)

박지 기법은 상감과 인화 기법과는 달리, 먼저 그릇 전체 혹은 일부에 백토로 분장한 후 시문하고자 하는 무늬를 음각으로 그리고 백토가 남아 있는 무늬 이외의 배경을 긁어내어 무늬의 백색과 회색의 바탕이 대조되게 하는 기법을 말한다. 백색과 바탕색과의 대비를 더욱 강조하기 위해 긁어낸 바탕에 철채를 가하여 흑갈색을 띠게 한 기법도 있다. 박지 기법은 세종떄에 이미 세련되며 모란무늬, 모란당초무늬, 연꽃무늬, 연화당초무늬, 잎무늬, 물고기무늬 등에서 생동감이 넘치는 활달한 무늬를 나타내는 분청사기의 정수를 보여 준다. 박지 기법의 도편이 발견되는 가마터로는 전남고흥군 두원면 운대리, 광주 직할시 충효동, 전북 부안군 보안면 운대리 등이다.

(음각기법)

음각 기법은 박지 기법과 함께 사용되는 경우가 많으며 무늬가 간소화될 때 주로 많이 사용된다. 이 기법은 기면을 백토분장한 후 원하는 무늬를 선조하면 회색의 바탕색이 무늬선으로 나타나며 고려자기의 음각 기법과 같다. 회화적인 사실 표현에서부터 추상화된 무늬에 이르기까지 능숙한 필치를 보이며 모란무늬, 모란당초무늬 연꽃무늬, 연당초무늬, 물고기무늬, 잎무늬, 버드나무무늬, 인물무늬, 가옥무늬 등 다양한 무늬소재를 보인다. 꽃무늬가 많기 때문에 일명 조화무늬 혹은 조화 기법이라고도 한다.

(철화기법)

철화 기법은 백토분장한 후에 철분이 많이 포함된 안료로 그림을 그리면 흑갈색 혹은 흑색으로 나타난다. 이 기법은 긁어내거나 선조하는 것이 아니고 붓으로 무늬를 그리기 때문에 회화성이 높다. 무늬는 도식적인 것, 추상적인 것, 희화적인 익살스러운 것 등 서민들의 익살과 해학적인 분위기가 나타나 현대인의 감각과도 잘 영합된다. 대개 15세기 후반~16세기 전반에 걸쳐서 충남 곶우군 반포면 학봉리 일대에서 제작된 독특한 기법 중의 하나이다. 당시 관요인 경기도 광주에서는 중앙의 화원이 파견되어 청화백자가 활발히 제작되고 있었기 때문에 상호 영향관계가 주목된다.

(귀얄 기법)

귀얄이라는 도구를 써서 백토를 바르는 것으로 귀얄 자국이 운동감 있게 남아 있어 또다른 효과를 보인다. 대체로 포개어 구워 대량 생산한 막사기에 많이 있다. 박지, 음각, 철화 기법에는 기본적으로 귀얄을 사용하여 백토를 분장하며 귀얄 자국만 남는 순수한 귀얄 기법은 대개 분청사기의 쇠퇴 과정에서 많이 사용하였고 표면이 백자화되어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담금분장기법)

백토 물에 그릇을 덤벙 담가 백토 분장하는 법이다. 귀얄과 같은 자국이 없으므로 표면이 차분하다. 백토가 두껍게 씌워지면 표면이 완전히 백자화하여 역시 분청사기 말기에 많이 보인다. 대접 경우에는 굽다리를 잡고 거꾸로 담그기 때문에 굽 언저리에 백토가 묻지 않고 흘러내린 자국만이 있어 백토분장의 또다른 추상성을 보인다.

   

   

2008전기*후기

1.고려청자와 중국도자기의 관련성을 서술하시오.

월주요청자의 영향으로 청자 발생 이후 북송대 여요, 요주요, 남송관요, 경덕진요 등의 새로운 조형기법이 이때 영향

1.초기(908~1095)-월주요청자:청자의 발생은 절강성에 위치했던 오월국과의 교섭을 주시

월주요는 춘추시대 의 영역인 절강성을 중심으로 동한시대부터 청자를 구웠던 요군을 말한다. 850년경 만들어져 무역도자로써 수출이 되었으며 이러한 월주요무역자기는 안압지, 황룡사, 미륵사, 부소산성, 완도 등에서서도 출토되고 있다. 고려청자의 발생에 있어서 월주요 청자의 유입으로 이루어졌음은 주지의 사실이며 현재 그 시기는 9세기 말~10세기전반으로 논의되고 있다. 월주요 청자의 영향은 먼저

1)가마구조-벽돌가마:서남부지방의 전축요 계열 가마들 시흥방산동 가마, 봉천원산리가마, 용인서리, 등의 가마들 원통형 m자형 갑발을 사용하며 대부분 민무늬이며, 해무리굽 양식 완, 내화토 받침이 특징, 유색은 암록색, 황갈색, 녹갈색을 띤다.

2)해무리굽완-중국에서는

3)기형-화형완,발 ,주자,잔탁--> 당말 오대의 기형들 한국 초기청자가마터에서 비슷한 양상으로 출토

4)문양-

고려의 초기 청자는 소문청자였다. 이것은 중국 월주요 당말-오대의 청자에서도 보이는 특징으로 청자 발달 초기에는 거의 문양이 없는 素文시대였다. 중국에서는 10세기후반 오대말-북송초 월주청자에서 가는 음각기법으로 새긴 연판문과 당초문 형식의 식물문과 파도어문, 용문, 쌍나비문,쌍앵무문등이 등장한다.

5)요도구-갑발, 갑발받침,도침

   

요주요청자: 요주요는 섬서성 동천시 황보진에 위치하며 당대부터 원말 명초를 거쳐 요업을 계속하였던 중국 고대의 저명한 요자아운대 하나이다. 당대에서 오대에 해당하는 기간은 월주요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송대 이후로는 특징적인 압출양각 기법등을 통하여 하나의 계를 이룰만큼 세력 확장. 올리브 그린색을 띄는 청자가 특징적으로 도범의 사용으로 대량생산에 까지 이어졌다. 고려청자의 경우 북방청자의 영향을 받아서 만들어졌으며 문양에 있어서도 선조 음각 등에서 요주요 청자같은 장식적 문양이 12세기경 출현 또한 강진용운리, 붕나 유천리, 대전 구완동 등지의 가마터에서 압출양각청자출토. 거란의 침입 후 공식적으로 단절되었던 고려와 송은 11세기 후반에 국교가 정상화되면서 양국의 공식관계가 활성화되는 1071~1126년 사이에 고려는 송을 중화로 인식하면서 그 분화를 받아들였고, 예종과 인종의 "화풍" 에 대한 흠모는 고려로 하여금 송의 선진문물 수용과 유교 이념에 입각한 체제 정비를 본격화하는데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11세기 말 중국 내에서 가장 광범하게 확산되고 있었던 요주요계 압출양각 기법의 급속한 국내 전래에 중요한 계기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임.

1)원상감기법

2)양인각기법과문양-고려 중기 청자에 보이는 압출양각기법

3)청자화판형접시

4)청자화형완

5)청자향로

6)과형병

그러나 요주요 가마구조는 석탄을 땔감으로 사용하는 만두요 구조이다. 따라서 요주요로부터 축요법은 영향 받은 바 없고 제자기법만 일부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다.

여요: 11세기 말부터 12세기 북송과의 교섭으로 이루어졌다.

1)고려도경의기록-12세기초 북송 여요를 모방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2)사각받침=>인종장릉출토 사각받침(사당리출토).

3)화형잔

그러나 여요청자의 경우 우리나라에 수출된 예가 발견되지 않으므로 考古圖,宣和博古圖등을 모방한게 아닌가 생각된다.

   

   

   

2009전기*후기

1)17세기 조선시대 백자의 특징과 성격에 대하여 서술하시오.

조선은 임진왜란(1592)으로 전 국토가 황폐해지고 국력이 소진된 상태에서 재건을 위해 노력하던 중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등으로 다시 혼란에 빠졌다. 병자호란 직후에는 인조15년(1637)분원에서 자기 번조가 일시 중단되어 왕실도자기도 부족한 실정이었다. 또한 효종, 현종시기에는 전에 없는 가뭄과 흉년, 전염병 등으로 국가는 안팎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전쟁외에도 분원에서 자기 번조가 어려웠던 또 다른 이유는 장인들이 작업장에서 이탈했기 때문이다. 분원 설치 당시 <經國大典> 工典에 사기장이 1,140명인데 인조 3년(1625)에는 821명만 남은 사실만으로도 그 심각성이 드러난다. 이렇듯 전쟁과 재해로 인한 어려움 그리고 분원경영의 내부적인 병폐로 인해 도자제작에도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이에 대한 분원의 새로운 변화와 정비를 위한 노력이 시도된다. 그 변화의 시도로서 숙종 23년1697년 분원의 경공장에 대해 사기장이 번갈아 입역하는 分三番立役制에서 通三燔立役制인 비계약직 임금노동자로 변화한 것인데, 다시말해 공인들에 대해 이전의 부역제에서 임금을주는 고용제로 변화한 것이다. (분삼번입역제는 장인을 셋으로 나누어 교대로 입역하던 것이고, 통삼번입역제는 일시적인 기거를 위해 분원에 머문 것이 아니라 분원 주위에 마을을 형성하여 기거하는 전속 장인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이로써 관요는 수준높은 전속장인을 거느리고 고급의 원료를 사용하여 우수한 백자를 생산하게 되는 등 기술제작과 양식에 있어 큰 변화의 계기가 된다.) 그럼에도 분원에서의 도자유출과 사번이 빈번하여 영조는 고급 자기인 갑기가 왕실 이외의 수요처로 유출되는 것을 방지하고 분원장인의 생활보장을 위해 화전세를 거두었다. (1727)

도자 양식적 측면에서도 임진왜란 이후 도자양식의 번반적인 변화는 불가피하였다. 백자는 그릇의 형태와 유약, 장식 등에서 이전과는 다른 특징을 보인다. 청화안료를 구하기 어려워 이를 대신한 철화백자가 주로 제작되었으며 색도 회백색을 보이는 백자가 주류를 이룬다. 대접과 접시 등 일상생활용 그릇이 주로 제작되었으며, 그릇의 종류도 이전만큼 다양하지 못하다. 이러한 상황은 17세기 후반까지도 여전히 지속되었으며, 전국각지에서는 대부분 질이 다소 좋지 못한 순백자와 철화백자가 제작되었다.

광주시 탄벌동(1606~1612), 도척면 상림리(163`~1640), 초월면 선동리(1640~1649), 광주시 송정동(1649~1659), 실촌면 유사리(1661~1664), 실촌면 신대리(1665~1677), 초월면 지월리(1677~1680년대), 도척면 궁평리(1680~1717년이전), 퇴촌면 관음리(1680~1717년 이전), 실촌면 오향리(1717~1720년 이전), 남종면 금사리(1721~1751)로 이동하면서 운영되었다.

임란직후 질적 쇠퇴와 사옹원 분원의 제작을 정비하고자 한 노력으로 역삼각형굽 그릇의 밑면에 음각으로 "*+干支"의 간지가 등장 1604~1630년까지로 조질백자의 경우 오목굽에 모래빚음눈이 사라지게 된다. 양질, 조질 모두 회백색 유조에 태토에 잡물이 많은 현상이 두드러 지며 전체적으로 질이 떨어진 모습이다.

1631~1680년경은 "* +干支+숫자" 로 명문의 내용이 바뀌고 조질백자의 경우 오목굽에 굵은 모래받침을 사용한다. 철화의 사용이 빈번해지고 소량의 청화를 사용한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선동리, 송정동 등지에서는 다양한 굽이 등장하면서 질을 향상시키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 선동리 요지(1640~1649)""자가 청료로 쓰여진 청화백자편이 출토된바 17세기 전반기말부터 청화백자 소량이나마 번조된것. 또한 선동리 가마터의 수집된 자료에 따르면 접시의 굽은 4종류로 v자형의 높은굽과 낮은곱, u자형의 넓은 굽, 안으로 파진 오목굽 등이 있다. )

1680년경부터 1751년까지로 명문의 내용이 "*+기타"로 바뀌며, 백자의 질이 전반적으로 향상된다. 양질백자의 경우 흙모래받침을 사용한 순백색의 백자가 늘어나고, 조질백자의 오목굽에 굵은 모래받침은 그 제작량이 감소하게 된다. 이렇게 질의 향상과 함꼐 청화백자의 제작이 늘어나고 명문은 점차 사라지게 되는것.

17세기 후반에는 국립 중앙박물관 소장 백자청화난초문각병에서 보듯 간결하게 그려진 난초와 대나무 문양은 청화 안료를 소량 사용한 듯 옅은 청색을 띤다. 치밀한 백토에 엷은 청색을 머금은 투명한 백자유 문양으로 보면 한쪽에는 각진 면에 걸쳐 대나무가 사선으로 쭉 뻗어 올라간 대담한 구도가 두드러지며, 반대쪽에는 난초 잎과 꽃이 거의 좌우대칭으로 표현된 문양이 안정적이다. 이렇게 한쪽엔 힘차게 뻗은 동적인 대나무를, 반대쪽에는 차분하고 정적인 난초를 대조적으로 배치한 발상이 독특하다. 대나무, 난초와 같은 문양장식은 중기 백자에 애용 경기도 광주 송정리 요지(1649~1659)에서도 대나무, 난초등의 초화문이 그려진 청화백자편들이 수습되었다.

17세기는 철화백자의 전성기답게 철화문양이 다채롭게 시문 그중 대표적으로 시문된 것은, 종속문으로 주로 쓰인 당초문을 비롯해서 운룡문, 각종 꽃과 호랑이와 사슴 등 동물을 그린 화훼* 영모문, 매죽문과 같은 사군자류의 문양이다. 운룡문이 시문된 대표적인 자기로는 17세기 초기 작품인 국립중앙박물관소장 철화백자 운룡문항아리를 들 수 있다. 이 항아리에는 종속문으로 위쪽에 당초와 연판문을, 아래쪽에 삼각문과 당초문을 시문하였다. 용은 약간 굴곡진 목 부분과 직선에 가까운 몸통을 지니고 있으며 발톱은 세 개이다. 조선 전기에는 촘촘하던 비늘이 넓은 부채꼴 형태로 성글게 시문되었고, 입이 짧고 머리가 우스꽝스러운 모양이다. 용은 전체적으로 신비함과 위엄이 느껴지기보다는 약간 어설픈 모습으로 그려졌으며, 철화로 바뀐 시문 상황에 익숙지 않은 탓인지 선이 중간중간 끊어지거나 채색이 고르지 못하다.

   

   

2)고려시대 백자에 대하여 서술하시오.

중국에서는

백자.-순백색 바탕흙 위에 투명한 유약을 씌워서 번조한 자기를 말함 동양에서 백자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575년경 하남성(河南省) 안양현(安陽顯) 북제(北齊)시대 (武平6년: 575년) 비교적 깨긋한 백자편 출토. 범수묘의 발견으로 6세기 후반경 이미 만들어 지기 시작함이 확인

당대는 백자의 발달기로서 하북성(河北省) 형요(邢窯)가 북방 백자 생산 가마중 대표생산지로 부각. 당나라 시기에는 백자에 대한 요구가 늘어나 정선된 바탕흙이 아닌 기면에는 화장토를 입히고 소성하는 풍조도 생김.

수, 당시대에는 하남성 공현(鞏縣)지방에서 정선된 순백자가 최초로 생산되었다.

정요백자의 출현과 발달-10c후반경 정요백자가 북망에서 만들어 짐(977년 화북 중국 정지사 탑기 밑부분에서 양질의 백자가 출토) 이후 12세기 후반 크림색의 질좋은 백자를 생산. 13~14세기에는 청백자가 출현하였다.

6세기 중엽 이후 우리나라는 중국으로부터 전래품 혹은 무역품의 성격으로 이미 중국 백자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실제로도 사용하고 있었다. 그 예로는 백제 무녕왕릉 출토의 완, 경북 의성 출토의 당 형주요 백자병, 안압지 출토의 형주요 백자완과 정요대접, 황룡사지 목탑지 심초석 밑에서 출토된 백자 작은항아리,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대중12년명(858)토기편과 동일층으로부터 나온 중국자기 등이 있다.

고려시대 백자는 대체적으로 청자의 발생과 거의 동시대로서 대체로 10세기 전반경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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