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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송식의 옛그림 읽기 20회 전체

AH101 2022. 7. 13. 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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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송식01 전선의 <왕희지관아도>

   

시공 초월하여 전해지는 "떳떳한 마음"
  [조송식의옛그림읽기] 전선의 <왕희지관아도>
[태윤미] 2006-06-29 오후 6:16:14 
▲ 전선(錢選), <왕희지관아도(王羲之觀鵝圖)>, 두루마리 종이에 먹과 채색, 원, 23.2×92.7㎠,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옛그림 읽기가 새로운 필자를 맞았습니다. [조송식의 옛그림 읽기]는 중국 고전회화를 중심으로 옛그림의 아름다움을 전합니다. / 편집자
   
사람에게서 향기가 피어오른다. 찐하지는 않지만 은은하게, 그러나 아주 멀리까지 온다. 시공을 뛰어넘어 700여년의 뒤에도 그 향기를 맡을 수 있다. 향기는 우리가 가질 수 없는 사람됨, 바로 삶의 지조에서 나온 것임을 느낌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맹자는 "떳떳한 생업이 없어도 떳떳한 마음이 있는 無恒産,有恒心" 자를 선비라고 했다. 이것은 참으로 지당한 말 같다. 그러나 우리같이 보통 사람에게는 얼마나 이루기 어려운 일인가. IMF를 겪으면서 많은 사람이 직장을 잃고 또는 일거리를 잃고 거리에 폐인으로 전락하였는가를 목격하였다. "떳떳한 생업이 없는" 것이 얼마나 비인간적인 상황으로 몰고 가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최근에 와서 느끼는 것이지만 보통 사람에게 "떳떳한 생업이 있다"고 하더라도 "떳떳한 마음을 갖는 것"이 오히려 물욕과 인욕의 탐닉이 넘치는 요즘 시대에 더 어렵다고 생각한다. "떳떳한 생업이 있는 有恒産" 자가 시시각각 권위적이고 탐욕적으로 변하는것을 주위에서 흔히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이 압박하여 오면 내면에서 소리치며 절규한다. 그립다. 참사람이 그립다. 은은히 피어오르는 인간적 향기가 그리워진다. 김정희의 <세한도>처럼, 옆에 있을 때에는 모르지만, 없을 때에 그 사람의 존재가 더욱 드러나는, 향기로 치면 가까이에서는 강하지 않지만 먼 거리에서까지 은은히 맡을 수 있는 난의 향기가 그리워진다.
   
이러한 그리움을 채워주는 작품이 있다. 이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그 떳떳한 사람됨이 느껴지는데, 원나라 초기 유민화가 전선이 그린 <왕희지관아도>가 그것이다.
   
유민화가란 나라를 빼앗긴 그 울분을 그림에 의탁하여 절규한 화가들을 말한다. 중국 역사에서 나라의 일부를 이민족에게 빼앗긴 적은 있지만 이렇게 나라 전체를 넘겨 준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만큼 문화적으로 자존심이 강한 중국인에게는 굴욕적이었다. 정사초, 공개, 전선과 같은 유민화가는 이 울분을 그림으로 표현하였다. 정사초는 <노근난>에서 이민족에 의해 유린된 자신들의 삶을 뿌리가 뽑힌 난초에 비유하였고, 공개는 <수마도>에서 주인을 잃은 천리마가 황궁을 뛰쳐나와 수척한 모습으로 황량한 들판에 서있는 것을 그림으로써 자신의 차지를 표현하였다. 이들이 난초와 말로서 비유적이면서 직접적으로 저항을 하였다고 한다면, 전선은 중국전통문화에 몰입하여 이를 새롭게 창조함으로써 문화적 우월을 지키려는 의지를 통해 저항하였다. <왕희지관아도>가 바로 이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공개(龔開), <수마도(瘦馬圖)>, 두루마리 종이에 수묵, 원, 30×57㎠, 오오사카 시립미술관
전선은 당시 '오흥(吳興) 지방의 뛰어난 8명의 선비' 중 한사람으로 학식이 있는 인재였다. 조맹부나 허형이 원나라 왕조에 복속하여 관리가 된 것과 달리 일생동안 자연에 은거하여 그림을 그리면서 중국의 문화적 자존심을 지킨 인물이다. 그가 이민족이 지배하는 이 현실을 거부하였던 것이 그의 작품에서 조형적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작품에서 이 현실, 이 공간, 이 시간, 이 문화에 대해 일체 부정하고 시간적으로 과거에 머물면서 현실과 일정한 거리감을 취하고 있다. 즉 그는 한편으로 자연에 은거하고 다른 한편으로 작품을 통해 과거에 은거하면서, 현실을 강하게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脩竹林間爽致多, 蘭亭坦腹意如何.
爲書道德遺方士, 留得風流一愛鵝.
긴 대나무 숲 사이 상큼한 정취가 감돌고, 난정에서 자유로운 삶 그 뜻이 어떠할까.
도덕경을 써 도사에게 주고, 풍류가 남아 한결같이 거위를 사랑하네.
제목과 위 제발에서 보듯이 전선은 과거 동진시대 왕희지의 고사를 작품 소재로 삼았다. 왕희지가 거위를 좋아한 나머지 도사에게 도덕경을 글씨로 써 주고 도사가 기르는 거위를 얻었다는 고사를 그렸다. 화법으로는 몽고족이 지배한 원나라 이전 중국인의 전통 화법이 모두 종합적으로 구사되었다. 먼저 작품 전체에서 눈에 띠는 것은 구도다. 왕희지가 숲이 우거진 정자에 서 있는 것을 남송시대 마하화풍의 변각구도에 따라 왼쪽 모서리에 안치시켰으며, 왕희지의 먼 시선에 의해 근경과 원경을 서로 조화롭게 하면서 원경의 빈 공간을 회화적으로 풀어가도록 하였다. 다음으로 강조되는 것이 청록산수다. 이 청록산수는 위진남북조시대에서 일어나 성당(盛唐) 이사훈과 이소도에 의해 크게 성행되었던 과거의 산수화 화법으로 청색과 녹색이 위주로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나무를 그리는 방식 역시 과거 오대(五代)의 동원이나 거연이 사용한 화법과, 북송시대 이성과 곽희가 사용한 해조묘법을 사용하여 복고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무엇보다 사물을 비현실적으로 묘사한 것이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왕희지를 머리가 크고 하반신이 작게 그린 것도 그렇고, 근경에 있는 세 그루의 나무줄기가 거리관계를 무시하고 서로 얽혀 있는 것도 현실성이 없다. 또한 중경에 일렬로 서있는 나무숲에서 나무뿌리가 뒷나무보다 앞에 있으면서 줄기는 그 뒤로 기울어져 있고, 중경의 나뭇잎은 근경 나무를 밀치고 앞으로 나오고 있다. 이 나무들 사이에 현실적인 거리감이 없는 것이다. 또 한 가운데에 나무로 차단된 정자 지붕에서 서로 떨어져 있는 양쪽 치미의 묘사는 서로 한 건물과 관련이 없는 듯 현실적 사실관계를 형성하지 않았다.
   
나는 이 그림의 백미는 기법의 치졸함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미 앞에서 말한 비현실적 사물묘사와 함께, 어설프고 서툴게 그린 기법은 작가의 의도를 분명하게 해 준다. 이는 의도적인 유치함으로서 현실과 일정하게 거리를 두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문화의 특징인 "현실적이고 기교적인" '금공(今工)'에 대응해서 "옛스럽고 서툰" '고졸(古拙)'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명나라 말기 동기창이 말하였듯이, 이것은 기교 중에 최고의 기교이다. 일반적으로 문인화의 기교는 세 단계를 거친다. 처음은 기교가 미숙하고 치졸한 단계, 다음은 기교가 넘치는 완숙한 단계, 이어서 인위적인 완숙한 기교를 하나하나 제거하면서 다시 순박함으로 돌아가는 치졸한 단계이다. 마지막의 치졸함은 처음의 미숙한 상태가 아니라 인위적인 완숙함을 지나 이를 '덜어내는' 의도적인 선택으로 기교의 기교이니, 최고의 기교가 아니겠는가. 이 작품에서 바위와 나무 및 인물뿐만 아니라 원경에 중첩된 산의 묘사가 '고졸'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정사초(鄭思肖), <노근난도(露根蘭圖)>, 두루마리 종이에 수묵, 원(1306년), 25.7×42.4㎠,
오오사카 시립미술관
과거 전통 양식에로의 복고, 묘사의 비현실성, 반기교적 취향 등은 전선이 현실에 대해 부정하면서 자연에 은거함과 더불어 조형적으로 취한 것이기 때문에 전선의 삶의 양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이 시공을 초월하여 보는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이 아니겠는가. 쿠빌라이칸이 칭키스칸이나 오고타이칸과 달리 직접 중국 대륙을 통치하면서 중국인에게 유화적인 정책으로 선회하였다고 하더라도 이민족의 통치에 대한 근본적인 상황이 바뀐 것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돈과 권력에 굴복하였지만, 전선은 일관된 마음을 유지하였다.
   
변하지 않는 마음, 상황이 어떻게 변하여도 하나로 향하는 마음, 이것이 조형에 투영되어 은은히 울리고 있다. 이 작품 안에는 바로 전선이란 인간이 있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떳떳한 생업이 있든' '없든' '떳떳한 마음이 있는' 선비의 모습, 누구나 지향하지만 하기 힘든 참인간의 모습, 특히 아니면 말고 하는 식이 넘치는 세상에서 더욱 그리워지는 모습, 그 향기가 시간을 넘어 잔잔히 울려온다. 오늘날 주변에서 볼 수 없어 허전하기 때문에 더욱 그리워지는지 모르겠다.
   
이 그림 앞에서는 왠지 자꾸 차를 마시고 싶다. 차 맛을 간직한 작품이다. 간결하고 담백함, 겉은 밋밋하여도 속으로 깊은 맛을 간직한 것, 사실 삶에서 현실과 치열한 고민과 분노를 지니면서 힘써 평정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만이 이 천진평담(天眞平淡)의 맛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편집자 주
해조묘법 : 나무 그리는 방법 중의 하나로, 나뭇가지를 마치 게 발톱처럼 날카롭게 묘사하는 기법이다. 잎이 다 떨어져 앙상한 가지나 죽은 가지를 그릴 때 사용된다. 북송대의 이성(李成)과 곽희(郭熙)의 화풍인 이곽파 화풍에서 주로 사용되었으며, 우리 나라에서는 조선 초기 안견파 화풍에서 볼 수 있다.  

   

원본 위치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321hanna&logNo=120035264604&categoryNo=17&parentCategoryNo=17&viewDate=&currentPage=3&postListTopCurrentPage=&isAfterWrite=true&userTopListOpen=true&userTopListCount=5&userTopListManageOpen=false&userTopListCurrentPage=3>

   

   

   

조송식02 조맹부의 <이양도>

2009년 12월 5일 토요일

오전 6:05

   

   

원나라 화가 조맹부가 양을 그린 이유
  
조맹부의 <이양도>
          
▲ 조맹부(趙孟頫), 《이양도(二羊圖)》, 두루마리 종이에 수묵, 원, 25.2×48.4㎠, 미국 프리어 갤러리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 칸은 새로운 중국을 통치하기 위해 한족 지식인이 필요했다. 그는 32인의 학자를 초빙하였는데, 원나라 유학자 허형이 그 중 하나였다. 그는 부름에 응하여 북경으로 가던 중 그의 친구 유인에게 들렸다. 유인은 "한번 초빙을 받고 바로 이러한 것은 너무 빠르지 않습니까"고 묻자, 허형은 "이렇게 하지 않으면 도가 행해지지 않습니다"고 했다. 후에 유인 역시 쿠빌라이 칸의 초빙을 받았지만 이에 응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그 이유를 묻자 "이렇게 하지 않으면 도가 높아지지 않습니다"고 답변하였다. 허형과 유인 두 철학자 모두 '도'를 거론하였지만, 한 사람은 쓰임에 역점을 두었고 다른 한 사람은 존엄성에 무게를 두었다. '도'의 의미를 천착할 필요없이 오늘날 말로 쉽게 표현하면, 허형은 이민족 통치를 받아들여 이에 합류하였고 유인은 이를 거절하고 저항한 것이다. 허형은 도덕적으로 지탄받아야 할 것이다.
최근에 와서 일단 역사적 평가를 보류하고 당시 현실에서 볼 때 어떤 실천이 그 자신들에게 편하였을까 반문하곤 한다. 문화적 자긍심과 명분을 내세우는 한족 사대부들이 취할 수 있는 태도는 이민족에 대한 저항으로서 자연에 은거하면서 도의 존엄성을 강조하는 것일 수 있다. 당시 많은 사대부는 이에 따랐다. 그렇다면 허형은 왜 자신에 대한 모멸감을 무릅쓰고 이민족 조정의 관리가 되려고 결심하였을까. 그의 현실적 태도는 무엇일까. 자신의 선택과 역사적 평가는 왜 다르며, 이 두 요인을 어떻게 균형있게 수용하여 평가해야 할까. 이러한 물음을 떠올릴 때마다 첨예하게 대립되어 나타나는 영역이 예술인데, 중국에서는 예술과 정치, 예술과 도덕에 관해 일관되게 논의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 중 가장 많이 다루어지는 것이 원나라 화가 조맹부의 예술세계이다.
조맹부 역시 허형처럼 원나라 조정의 관리가 되었다. 다만 조맹부는 송나라 태조의 세 번째 아들인 진왕(秦王) 덕방(德芳)의 후예로 모든 사대부들의 사표가 되어야 할 존재였지만, 쿠빌라이 칸의 부름에 응하여 한림원학사승지(翰林院學士承旨)까지 올랐다는 것이 다르다. 당연히 이러한 행위는 송나라 유민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유민화가 정사초는 조맹부와 절교를 하여 여러 번 방문하여도 끝내 만나주지 않았다. 차라리 많은 유민의 뜻에 부응하여 지조를 지키며 자연에 은거하였으면 오히려 마음이 편했을 것을, 조맹부는 왜 그렇게 어려운 길을 걸었을까.
   
   
조맹부(趙孟頫), <작화추색도(鵲華秋色圖)>, 종이에 채색, 원(1295년), 28.4×93.2㎠,
대북 고궁박물원.
조맹부는 산수, 고목수석, 대나무, 말 등을 잘 그렸다. 특히 <작화추색도>와 같은 산수화는 복고와 창신을 통해 중국회화사에서 새로운 전환을 일으켰던 그림이다. 그러나 그의 출사와 관련되어 스스로 항변하고 후대에 비판받아 왔던 것은 말 그림을 통해서가 아닐까 한다. <인기도> <욕마도>에서 보는 것처럼 그의 말 그림에는 두 가지 특색이 있다. 하나는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다는 것이고, 또하나는 말이 살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후 미술비평가에게 그의 출사와 관련되어 비판받아 왔는데, 당나라 한간의 <조야백>과 원대 유민화가 공개의 <수마도>와 비교하여 감상하면 그 의미가 잘 통한다.
전통적으로 중국의 말에는 완전히 상반되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중국 사대부 자신을 상징하는 것이다. 주나라 백락(伯樂)이 천리마를 분별하여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임금이 사대부 능력을 인정하여 백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에 비유된다. 백락이 천리마를 만나고 임금이 명신을 만나는 것은 사실상 '천재일우'에 해당하지만, 임금이나 사대부 누구나 바라는 것이다. '개원의 치'라고 불리는 당나라 현종 시대에 천자 마구간에 있는 명마를 그린 <조야백>은 이러한 상황을 표현한 것이다. 천리마의 골격이 풍만한 살집 안에 감춰져 있고 그 기상이 밖으로 표출되었다.
   
전 한간(韓幹), <조야백도(照夜白圖)>, 당, 종이에 채색, 30.8×33.5㎠, 뉴욕 메트로폴
리탄미술관.
   
그러나 원나라는 군주가 없는 이민족의 통치 시대이다. 자신의 능력을 인정할 수 있는 명군을 잃어버렸다. 당시 사대부들은 이민족 통치를 부정하고 각각 흩어져 은거하였는데, 이러한 모습을 말에 의탁하여 표현한 것이 원나라 유민화가 공개의 <수마도>이다. 천자 마구간에서 뛰쳐나와 황량한 들판에서 수척한 모습으로 외롭게 서 있는 천리마가 바로 그들 자신의 처지가 아니겠는가. 이에 공개는 스스로 다음과 같이 제발을 적었다.
   
한결같이 구름을 따라 하늘의 관문에서 내려와,
단지 선조의 천자 마구간 열두 칸을 채웠지.
지금은 누가 준마의 기골을 애달파 하리,
석양이 비친 물가의 그림자 산처럼 고요하구나.
   
一從雲霧降天關,空盡先朝十二閑,
今日有雖憐駿骨,夕陽沙岸影如山.
   
청나라 경학자 완원(阮元)은 일반적인 말은 갈비뼈가 10개 남짓인데 이 말은 15개가 그려져 천리마임을 확증하였다. 원나라말기 4대화가 예찬은 이 그림을 보고 원나라 유민화가로서 나라를 잃은 것에 대한 화사(畵思)와 시정(詩情)이 넘쳐난다고 하였다.
   
   
공개(龔開), <수마도(瘦馬圖)>, 두루마리 종이에 수묵, 원, 30×57㎠, 오오사카 시립미
술관.
말의 또다른 의미는 북방 오랑캐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중국의 역사는 북방 유목민족과의 투쟁을 통해 전개되었는데, 유목민족의 침입을 경계할 때 "변방의 말이 살찔 때 목초가 없어진다"고 노래하곤 하였다.
이 두 의미에서 조맹부의 말 그림은 후대 어떻게 평가되었을까. 조맹부는 "한간의 작품 3권을 얻어 비로소 그 뜻을 얻어서" 그렸던 <인기도>에서 "스스로 당나라 사람에 부끄럽지 않다고 말하였지만" 명나라 담경봉은 "정교하여, 당나라 화가의 온후하고 옛스러운 맛이 없다"고 비판하였다. 정교(精巧)는 고졸(古拙)과 다르게 현실을 따르는 미학적 개념이다. 이는 그가 원나라 왕조에 복직한 현실적 달콤함을 빗댄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조맹부의 말 그림은 송나라를 멸망시켜 공을 세운 변방의 말을 임모한 것이며 그림에 나오는 관리의 고급스런 관복은 조맹부의 입조임을 풍자한 것으로, <삼국지>에 나오는 유비의 말 적려(赤廬)가 곤경에 빠진 주인을 구해낸 것과 같은 정신이 없는가라고 반문하였다. 명나라 서발(徐勃)이 "천자의 마구간 열두 마리의 진실로 뛰어난 종자, 한갓 북풍을 향해 슬피 우네"라고 시를 지은 것은 조맹부의 말 그림과 공개의 <수마도>를 대비시켜 그의 회절을 역설적으로 노래한 것이다.
여기에서 조맹부의 생각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는 "행동의 실천이 마음과 다름을 거듭 탄식하면서", "지나간 일은 이미 어떻게 말할 수 없고, 다만 충직으로 원나라 황실에 보답하련다"고 자책하기도 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행위에 대한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였다. 그는 <이양도>를 그려 자신을 변호하였다. 한 마리는 곧바른 자세로 서있고 다른 한 마리는 고개를 쑥이며 풀을 뜯고 있는데, 아주 사실적으로 섬세하게 그렸다. 조맹부는 스스로 다음과 같은 제문을 썼다.
   
나는 말을 그린 적은 있어도 양을 그린 적은 없었다. 중신이라는 사람이 (양의) 그림을 요구하기 때문에, 나는 고의로 장난삼아 그렸다. (이 그림은) 비록 옛사람(의 경지)에 꼭 들어맞을 수 없다 하더라도, 상당히 기운에 있어서는 성취한 바가 있다.
余嘗畵馬, 未嘗畵羊, 因仲信求畵, 余故戱爲寫生, 雖不能逼近古人, 頗於氣韻有得.
   
여기에서 말을 그렸다는 것은 지조의 지킴을 말하며, 양을 그린 것은 자기희생을 의미한다. '중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외부의 요구에 의해 자신이 시대의 희생이 되었다고 강변하는 것 같다.
원나라를 통치한 몽고족이 어떤 민족인가. 고려에 침입하여 많은 문화재를 파괴하였듯이, 세계문화사에서 문화파괴주의자 반달족에 버금가는 민족이 아닌가. 한족의 뛰어난 문화가 몽고족에 의해 파괴되고 있는 상황에서 조맹부는 자신의 자존심을 버리고 한 몸 희생을 통해 한족의 정신을 구원하려고 한 것이다. 그래서 "옛사람(의 경지)에 꼭 들어맞을 수 없다 하더라도, 상당히 기운에 있어서는 성취한 바가 있다"고 자부하면서 작품에서 오로지 "고의(古意)"를 강조하였다. <인기도>의 제발에서 "그림은 어렵지만 그림을 이해하는 것은 더 어렵다"고 말한 것을 보면, 이러한 고의(古意)의 추구는 누구에게 알리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스스로 위안을 삼은 것으로 보인다.
   
   
조맹부(趙孟頫), <인기도(人騎圖)>, 종이에 채색, 원(1296), 30×52㎠, 북경 고궁박물원.
   
그의 <조량도>를 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알 수 있다. 말의 갈기는 곧바로 세워져 있고, 꼬리는 뒤돌려져 있으며, 마부는 소매를 들어 얼굴을 가리고 그 옷은 바람에 날리고 있다. 이 네 가지의 움직임은 모두 오른쪽 방향으로 쏠려있다. 그런데 말의 형상은 바로 공개의 <수마도>에 나오는 천리마를 연상시키지 않는가. 황량한 들판에서 삭풍으로부터 보호하여 안정시키려는 인물의 의지적인 얼굴 표정이 인상적이다. 회화적으로 조맹부 이후 많은 화가들이 그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그가 지키고자한 한족의 문화정신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조맹부(趙孟頫), <조량도(調良圖)>, 화첩 종이에 수묵, 원, 22.7×49㎠, 대북 고궁박
물원.
나는 조맹부의 예술을 음미해 본다. 그의 내면적인 의지를 생각하자니 그가 결과적으로 원나라의 이민족 통치를 인정하게 된 것을 뿌리칠 수 없다. 그렇다고 그의 도덕적 지조의 회절만으로 평가하자니, 남모르게 노력한 자기희생을 외면하기 어렵다. 어느 정도 이 두 가지 요인을 적절하게 고려하여 평가하려고 하지만, 단 한 가지가 강하게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 오늘날 현실적으로는 권력과 물질적 풍요를 쫓으면서 화폭 앞에서는 '기운'이니 '고의'이니 '인격'이니 '도덕'이니 하며 고고한 '척'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합리화하는 빌미를 제공하고 있지 않은가. 오늘날 젊은 동양화가에게 너무나 많은 상처를 주고 있는 것이다.

   

원본 위치 <http://blog.daum.net/_blog/hdn/ArticleContentsView.do?blogid=03NEW&articleno=9411887&looping=0&longOpen=>

   

   

   

조송식03 육조 고개지의 <여사잠도>

2009년 12월 5일 토요일

오전 6:16

   

   

예교의 교훈을 넘어서는 그림의 힘
  
[옛그림읽기] 동진시대 고개지의 <여사잠도>

   

   

▲ 고개지, <여사잠도>(권), 비단에 채색, 25 × 349㎝, 영국런던대영박물관.

옛 그림을 나 혼자 즐겨보는 경우는 별문제가 없겠지만, 남에게 소개하거나 설명할 경우 난처한 상황에 봉착하는 작품들이 더러 있다. 그 요인을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그중 많은 경우가 과거와 현재간의 인간이나 자연에 대한 해석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지금 소개하려는 고개지의 <여사잠도(女史箴圖)>도 이러한 부류에 속한다. 이는 여성에 대한 교훈적 내용을 그린 것인데, "안으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유순함을 숭상하는" 그 시대의 여인이 사회적인 활동과 지위가 다른 오늘날 어떻게 결부되어 설명될 수 있을까.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하는 것은 사실이다. 다만 고개지가 <여사잠도>에서 그린 여성은 단순히 도덕적 예교에 속박된 것이 아니라, 어느 시대든 통용될 수 있는 당당한 여인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내용적으로 동일시할 수 없지만 예술형상으로 나타난 여인의 모습들은 바로 화가로서 고개지의 뛰어남을 설명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여사잠도>는 서진(西晉)시대(266-316) 장화(張華, 232-300)의 「여사잠」을 그린 것이다. 동양예술에서 상투적으로 보이는 교훈적 내용인 것 같지만, 여기에는 혜제(惠帝)의 황후 가후(賈后)가 나라를 멸망시킨 잔혹한 행위를 비판하고 있다. 그래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정감으로 흐르게 한다. 삼국을 통일한 무제(武帝) 사마의(司馬懿)가 죽고 혜제가 왕위에 오르자 무제 사마의(司馬懿)의 외척 양씨(楊氏) 세력과 혜제의 외척인 가씨 세력이 서로 파벌투쟁을 벌였다. 여기에서 가후를 중심으로 한 가씨 세력은 종실 제왕을 끌어들여 태부 양준(楊駿)을 죽이고 전횡하게 되었다. 장화는 이 때 가씨 세력에 의해 등용된 인물이지만 나라가 망하는 상황을 지켜보면서「여사잠」을 지었던 것이다. 결국 가후의 탐욕에 의해 '8왕의 난'으로 이어졌고, 그 틈을 타 북방 이민족이 침입하자 북쪽을 넘겨주고 남쪽 양자강을 건너 지금 남경에 수도를 세워 동진(東晋, 317-420)으로 이어졌다.

고개지가 살았던 동진 역시 불안한 정국임은 서진과 마찬가지였다. 비록 여러 전쟁의 승리로 옛 땅의 수복에 대한 희망은 차있었어도, 왕돈(王敦)을 비롯한 여러 귀족들은 내부적으로 반란을 일으켰고, 다른 한편으로 서진 시대에 젖어 있었던 사치와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희망과 좌절이 반복되면 인간의 감정은 혼란의 상황에 이르도록 원인을 제공하였던 한 인물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고개지는 이러한 분위기에서 <여사잠도>를 그린 것이다. <여사잠도>에도 평범한 교훈적 내용 이면에 가후에 대한 증오가 함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읽어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보아서 느끼는

   

   

<여사잠도>의 네 번째 장면.

   

도덕적 교훈을 강조한 그림의 작용은 한나라 이후 계속되어 왔던 것이다. 남조시대 사혁(謝赫) 역시 『고화품록』에서 "그림이란 것은 도덕적 교훈을 밝히는" 것이라고 하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여사잠도>는 도덕적 교훈에 가후에 대한 애증(愛憎)이 함께 결부되어 있다는 것이 위진남북조의 시대적 정신을 반영한다. 감정이 주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여사잠도>는 읽어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보아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감정으로 전달된다. 위진시대 조식(曹植)의 「화찬서(畵贊序)」은 이를 예견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은 삼황오제를 볼 때 누구라도 우러러 존경하지 않는 자가 없으며,

(하주의) 마지막 괴팍한 군주(을 그린 작품)을 보면 어느 누구도 슬퍼하고 원망하지 않은 사람이 없으며,

나라를 찬탈한 신하나 나라를 빼앗은 후계자들(을 그린 모습)을 보면, 어느 누구도 이를 갈지 않은 사람이 없다.

절개가 높고 오묘한 선비(의 모습)을 보면, 어느 누구도 밥을 먹는 것을 잊(을 정도로 발분망식 하)지 않음이 없다.

충신과 전쟁에서 나라를 위해 죽은 신하를 보면 어느 누구도 절개를 높이지 않은 사람이 없고,

추방된 신하나 쫓겨난 아들을 보면 어느 누구도 탄식하지 않음이 없다.

음탕한 남자와 질투 많은 부녀를 보면 눈을 홀기지 않음이 없으며,

아름다운 왕비와 유순한 황후를 보면 어느 누구도 아름답고 귀하게 생각하지 않음이 없다.

   

<여사잠도>는 1900년 의화단 사건 때 10개국으로 구성된 서양연합군이 베이징으로 쳐들어와 원명원(圓明園)을 불사르고 약탈하여 간 것으로 현재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원래는 열두 장면인데, 현재는 앞의 세 장면이 없어지고 아홉 장면만이 있다. 고개지의 원작이 아니고 당말 모본이라 추정하고 있지만, 고개지의 예술세계를 찾아보기에 충분하다는 데에는 이설이 없다. <여사잠도>는 「여사잠」의 내용에 따라 시를 쓰고 그림으로 그린 것으로, 그의 <낙신부도>와 같이 연환화(連還畵)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극적인 순간으로 상황을 압축 시킨 그림은 시보다 절실하고 긴장감을 놓을 수 없게 한다.

   

극적 압축, 시보다 절실하다

   

   

<여사잠도>의 여섯 번째 장면

현존의 <여사잠도>는 내용이나 분위기상 크게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여섯 번째 산수화가 등장하는 장면을 전후로 하여 앞의 네 번째, 다섯 번째 장면이 하나가 되고, 뒤로 일곱 번째, 여덟 번째, 아홉 번째, 열 번째 장면이 다른 하나가 되어 공통의 성격을 지닌다. 다음으로 열 한 번째 장면과 마지막 열두 번째 장면이 각각 독립된 내용으로 되어 있다.

앞부분의 네 번째 장면은 "풍첩여(馮婕妤)가 맨몸으로 검은 곰을 막는" 고사이고 다섯 번째 장면은 "사소한 것을 막고 먼 것을 생각하는" 반첩여(班婕妤)의 행위를 그렸다. 이들은 후한의 『열녀전』에 실려 있을 정도로 유명한 열녀인데, 풍첩여와 반첩여를 그린 모습은 도덕적으로 독립된 인물로서 어떠한 협박과 위협에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의젓하다. 풍첩여의 모습을 보자.

   

(한나라 원제가 호랑이 울타리를 갈 때) 흑곰이 감람나무를 잡고 덤비려 하니 풍처여가 앞으로 나가 몸으로 막았다.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죽음을 알고도 겁내지 않았도다.

   

玄熊攀欖, 馮媛趨進, 夫豈無畏, 知死不怯.

   

이에 대한 고사는 『한서(漢書)』「외척전(外戚傳)」에 나온다. 풍첩여는 서한 원제(元帝) 유석(劉奭)의 빈첩(嬪妾)이었다. 건소(建昭) 연간(기원전 38~34년)에 원제가 사람들을 이끌고 궁궐 동산에 가 사나운 동물의 연기를 보았는데, 갑자기 한 마리 흑곰이 뛰쳐나와 가람나무를 잡고 올라와 원제를 덮치려고 하였다. 이 때 빈첩들은 무서워하면서 피했지만 풍첩여만이 의젓이 앞으로 나아가 몸으로 곰을 막자 두 무사가 그 틈을 타서 흑곰을 창으로 질러 죽였다. 원제는 목숨을 구한 후 풍첩여에게 어째서 몸으로 흑곰을 막았느냐고 물으니, 그녀는 곰은 사람을 보면 주춤하기 때문에 제가 몸으로 흑곰을 막은 것은 폐하를 구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하였다.

<여사잠도>의 이 장면에서 고개지의 뛰어난 예술적 구상을 즐겨보자. 이 장면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앞부분에는 질겁하여 얼굴빛이 변한 원제가 앉아 있고 그 뒤로 두 빈첩이 숨어 떨고 있다. 가운데에는 풍첩여가 태연하게 앞으로 나가 곰을 막자 옆에 두 무사가 그 틈을 타 곰을 찔러 죽이지만, 약간 겁에 질린 모습으로 뒷걸음질 치고 있다. 이러한 모습에 비하면 풍첩여의 모습은 너무나 당당하고 의젓하다. 따라서 고개지는 풍첩여를 기리는 의미에서 독립된 공간에 당당한 모습의 풍첩여를 단독으로 그려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풍첩여, 반첩여의 당당함이 주는 긴장

   

   

<여사잠도>의 아홉 번째 장면.

다섯 번째 반첩여의 고사를 그린 장면에서도 이러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는 "(한나라 성제의) 반첩여는 기쁨을 나누며 마차를 함께 타는 것을 사양하였네. 어찌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사소한 것을 막고 먼 것을 생각해서이지.斑女有辭, 割歡同輦, 夫豈不懷, 防微慮遠."를 도해하였다. 뒤에 떨어져서 가는 반첩여, 가마에 타고 창을 통해 뒤의 반첩여를 바라보고 있는 성제(成帝), 가마를 짊어진 가마꾼의 모습이 서로 기묘하게 대비를 이룬다. 안달하여 애처롭게 보이는 성제의 얼굴에 비해 반첩여는 아랑곳하지 않고 의젓하면서 곧바르게 서서 앞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오히려 냉정하기까지 하다. 가마꾼은 다소 힘들어 하는 것 같으면서도 오히려 흥겹게 장난기 있는 모습을 하고 있으니, 아마도 이 두 관계를 즐기는 듯이다. 그것은 반첩여의 인격적 독립을 강조하는 것이 된다. 

<여사잠도>에서 어떠한 장면보다 가장 상징성이 뛰어난 것이 여섯 번째 장면이다.

   

도가 융성하면 쇠미하지 않음이 없고, 사물이 성대하면 쇠퇴하지 않음이 없다. 해가 중천에 오르면 기울고, 달이 차면 작아진다.

높은 것은 먼지가 쌓여 이루어지고, 쇠퇴하는 것은 기틀에 놀란 듯하다.

   

道罔隆而不殺,物無盛而不衰,日中則仄,月滿則微,崇猶塵積,替若駭機.

   

모든 것에는 성대함이 있으면 쇠퇴함이 있는데, 성대함은 오랜 시간으로 이루어지지만 쇠퇴함은 순간적으로 일어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가파른 산의 형세와 무릎을 꿇고 꿩을 향해 익살을 조준하는 모습으로 대비시켜 놓았다. 당말 장언원이 남조시대 산수화의 경향을 말하면서 "사람이 산보다 크게 그렸다"고 하였으니, 이에 부합한다. 하늘에는 일상과 월상을 그리고, 붉은 색을 칠한 일상에는 삼족오를 그렸으며, 월상에는 그 형상이 분명하지 않지만 아마도 두껍비가 그려졌을 것 같다.

그런데 회화사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이 산수 형상이다. 자세히 보면 산의 형세가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 계곡과 나무,  구름, 공간의 깊이와 비례 등이 사실적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직 개념적인 수준의 묘사에 머물었던 시대의 산수화치고 너무나 뛰어나다. 산수화가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렀던 당말의 모본이라 이를 반영한 것일까. 암튼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인물과 산의 대비를 통해 고개지가 나타내고자했던 것이다. 높은 산은 "먼지가 쌓이듯" 아주 미세한 것이 오랫동안 축적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여기에서는 독립적 인격을 형성한 풍첩여와 반첩여의 의젓한 모습에 비유된다. 그리고 활궁으로 조준된 산새는 "기틀에 놀란 듯"한데, 상황에 따라 반응하는 모습이다. 다음의 장면들에서 나오는 여인들의 모습을 예시하고 있다. 마음을 닦지 않고 몸치장에 신경을 쓴다든가(일곱 번째 장면), 말을 잘못하면 부부 사이라도 서로 의심을 한다든가(여덟 번째 장면), 뒤에서 남을 헐뜯지 말고 자신을 남 앞에서 자랑하지 말라든가(아홉 번째 장면), 사랑을 독차지 하지 말라(열 번째 장면)는 것에 나오는 여인의 상들을 말하는 것이다. 모두 주변 상황의 영향을 받아 순간적으로 감정적 반응을 일으키는 모습을 그렸다. 여기에서는 아홉 번째 장면을 감상하도록 하자.

   

말을 조심스럽게 해라, 영욕이 여기에서 비롯한다.

은밀한 곳에서 말하지 마라,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신령스럽게도 듣는다.

속삭이듯 말하지 마라,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귀신같이 듣는다.

너의 영광을 자랑하지 마라. 천도는 꽉 찬 것을 싫어한다.

너의 귀함을 자랑하지 마라, 성대한 것을 성대하게 하는 사람은 추락한다.

소성(『시경』「소성」편에 첩이 본처가 조금도 질투하지 않은 것을 고맙게 지은 시)을 본받고 그들이 이루는 바를 본받아라.

누리(부부의 화합과 자손의 번성에 비유)를 본받으면, 너의 종족이 번성한다.

   

出其言如微, 而榮辱由玆. 勿謂幽昧, 靈鑒無象. 勿謂玄漠, 神聽無響. 無矜爾榮,

天道惡盈, 無恃爾貴, 隆隆者墜, 鑒於小星, 式彼攸遂, 比心螽斯, 則繁爾類.

   

혜제의 황후 가후에게는 자식이 없어 혜제는 궁인 사씨(謝氏)와 사이에서 태어난 황자 휼()을 태자로 책봉하려 했으나, 원강(元康) 9년(299)에 가후가 태자를 금룡성(金龍城)에 유폐하고 살해하였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팔왕의 난'이 일어난 것이었다. 결국 나라를 망하게 한 요인은 가정의 불화라 할 수 있다. 고개지는 이를 오히려 화목한 가정으로 묘사하였다. 삼각형 구도 한 가운데에 한 어린이가 놀이를 하고 있다. 오른쪽에는 혜제와 가후에 비유되는 황제와 황후가 이를 바라보고 있으며, 마주 편에는 빈첩 둘 중 한 여인이 품에 아기를 앉고 있고 다른 한 여인이 놀이하는 어린이를 조심스럽게 부축하고 있다. 아마도 어머니인 듯하다. 인물들의 표정과 동작, 그리고 그들 상호관계에서 나오는 심리적 변화 및 회화적 공간 깊이, 선묘 표현이 뛰어난 작품이다.

   

다가오지 않는 미래 앞에서 속살거리는

   

   

<여사잠도>의 열한 번째 장면과 열두 번째 장면

작품의 흐름은 열한 번째 장면에서 다시 변한다. 지금까지는 둘 이상 인물 중에서 여인을 묘사하였다면, 여기에서는 한 여인이 정좌하여 고개를 약간 숙이고 생각에 잠긴 단독상으로 그려졌다. "그러므로 공경하고 삼가하는 가운데 복이 생겨나고, 바르고 공경하면서 스스로 생각하는 가운데 영광이 드러남을 기약할 수 있다고 말한다.故曰翼翼矜矜, 福所以興, 靖恭自思, 榮顯所期 "를 묘사한 것인 만큼 내면적인 고요한 성찰을 요구하기 때문에 당연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분위기가 심각하고 무거운 것은 앞에서 전개된 모든 내용들이 함축되고 있기 때문이다. 현존의 <여사잠도>에서는 없어졌지만 장화의 「여사잠」 처음에는 태초부터 시작하고 있다. 즉 태초에 조화가 일어나 음과 양으로 나누어지고 기의 작용으로 만물이 형성되었으며, 복희가 하늘과 사람을 다스리면서 부부와 군신의 도가 이루었는데, 여인의 덕은 유순함을 숭상하는 것이니, 안으로 아름다움을 간직해야 바르고 길하다고 하였다. 태초에서 현재까지의 모든 시간을 한 순간에 응축하고 있으니 무겁지 않은가.

마지막으로 열두 번째 장면을 보자 여기에서 고개지 자신의 철학을 엿볼 수 있다. 이 장면은 "여자들은 이것을 경계해야 하니, 감히 모든 여자에게 알린다.女史斯箴 敢告庶姬."를 그린 것이다. 나 자신이 화가가 되어 그린다면 어떻게 그렸을까 반문해 보고 나서 고개지의 위대함을 더 알게 되었다. 여기에는 과거와 현재, 미래의 시간적 전개를 기묘하게 풀이하고 있다. 한 여인이 지금까지 전개되어 온 그림의 내용과 등을 지고 기록을 한다. 현재는 과거의 연속이지만, 그렇다고 과거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우리의 삶은 미래로 이어지는 현재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고개지는 현재의 여인을 과거와 등을 지게하고 미래로 향하게 하였다. 앞의 두 여인은 이 그림을 보게 될 미래의 여인이다. 그래서 비교적 거리를 두고 두 여인을 그렸다.

그런데 두 여인은 교훈적 훈계를 정중하게 경청하는 것이 아니라 속삭이는 사적인 모습으로 그려졌다. 다가오지 않은 현실에는 구체적인 감정을 느낄 수 없는 것일까. 일이란 겪고 난 뒤의 감정을 말하는 것인가. 천 칠백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교훈이 깊으니, 예술의 힘은 대단하다고 반문해본다.

   

원본 위치 <http://blog.daum.net/_blog/hdn/ArticleContentsView.do?blogid=03NEW&articleno=10269177&looping=0&longOpen=>

   

   

   

조송식04 고개지(顧愷之)의 <낙신부도(洛神賦圖)>

2009년 12월 5일 토요일

오전 6:06

   

조식(曹植)의 지극한 사랑을 공유하다

[옛그림읽기] 동진시대 고개지(顧愷之)의 <낙신부도(洛神賦圖)>

   

[조송식 _ 조선대 미대 교수]

   

   

▲ 전 고개지, <낙신부도(洛神賦圖)>(권, 송 모본)부분, 비단에 채색, 27.1×572.8㎝, 북경 고궁박물원

  오랫동안 동양의 그림을 감상하는 데 장애가 되어왔던 것이 있다. 동양의 그림은 정신적이고 추상적이며 신비스럽다고 규정한 '동양주의'로서 이는 사실과 거리가 먼 생각이다. 국내 유력한 미술월간지가 2000년 초 21세기 한국화의 가능성에 대해 소개한 적이 있었는데, 여기에 참석한 대부분의 한국화가들이 동양화의 특징을 정신적이라고 한 것을 본 적이 있다. 가끔 한국화 학생들에게 동양화의 특징에 대해 물어보면, 많은 학생들이 정신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답변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여러 모로 생각하게 하는 점이다. 사실에 가깝게 말한다면 동양의 그림은 현실주의적이고 구체적이며, 경험적인 감정을 표현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동양화가 그만큼 삶을 그리고 시대를 반영한다고 강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지금으로부터 1600년 전 동양화의 감상화로서 길을 열었던 동진시대(344~424) 고개지(顧愷之, 약 344~406)의 <낙신부도>을 통해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고개지가 생존하였던 동진시대는 '예술의 자각' 또는 '예술을 위한 예술'의 시대라고 일컬어진다. 이전에는 예술 특히 그림은 종교나 정치, 철학에 종속되어 그 내용을 설명하는 도구적인 작용을 했던 반면에, 이제는 이러한 관계에서 벗어나 독립적으로 자율적인 가치를 추구하게 되었다. 그림은 더 이상 '읽는 것'이 아니라 '보고 느끼는 것'이 된 것이다.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위진남북조시대(220~589)가 갖는 시대적 의미, 즉 '심정(深情)'에 대한 가치 회복 때문이었다. 한(漢)나라는 이성의 시대로서 모든 사회적, 정치적 가치가 도덕적 규범을 따랐기 때문에, 감성 역시 이성의 규제를 받아 자율적 가치를 이루지 못하였다. 그 결과 예술도 도덕적 규범이 앞서게 되어 "읽는 그림"이었다. 감정이 독립적인 영역을 획득한 동진시대에 사랑을 소재로 하는 작품이 나오게 된 것도 시대적 요구라 할 수 있다.

  고개지의 <낙신부도>는 조조(曹操)의 아들 조식의 <낙신부>를 그림으로 그렸던 것이다. 조식이 황초 4년(223) 궁궐에 왔다 다시 돌아가는 도중 낙수를 지날 때의 감회를 지은 것인데, 내용은 낙수(洛水)의 신과 서로 만나 사랑하고 그리워하지만 사람과 신 사이에는 길이 다르기 때문에 이룰 수 없어 슬픔을 금할 수 없음을 묘사하였다. 겉으로 보면 공상적으로 보일 지라도, 이것이 저술되게 된 조식 개인과 주변의 상황을 생각한다면 구체적인 감정을 갖고 생생하게 전달될 것이다. 조식의 사랑에 대해 연민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이후에 명제(明帝,323~325)가 <낙신부>라 고쳤지만, 이 시의 원래 제목은 <감견부(感甄賦, 견일녀에 감흥하여 지은 시)>였다.

   조식은 견일녀(甄逸女)라는 여인을 흠모하였다. 태조 조조가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알고서도 오히려 견일녀를 조식의 형인 조비(曹丕)에게 시집보냈기 때문에 마침내 이루지 못하였다. 조식은 이 이후로 마음이 편치 않아 견일녀를 밤낮 생각하면서 잠도 못자고 먹지도 못하였다. 그런데 행복해야 할 견일녀가 곽후(郭后)에게 참언을 당해 죽게 되었다. 조조는 비로소 자신이 한 일에 대해 후회하면서 황초 4년(223)에 조식을 궁궐로 불렀다. 태자 조비(曹丕)를 연회에 머물게 하고 은밀히 조식에게  견후(甄后)의 옥과 금으로 장식한 베개를 주자, 조식은 자기도 모르게 억누를 수 없는 눈물을 흘렸다.

   

말을 쉬게 하는 장면

  조식은 궁궐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 낙수(洛水) 주변에서 쉬면서 견일녀를 생각하였다. 그 때 홀연히 허공에서 한 여자가 와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저는 본디 그대에게 마음이 있었는데, 그 마음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이 베개는 제가 집에서 시집올 때 가져온 것입니다. 전에 조비에게 주었지만 지금 그대에게 주게 되었으니 이 기쁜 감정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곽후에게 참언을 당해 지금 이렇게 피발을 한 모습으로 다시 그대를 뵙는 것이 부끄럽습니다." 그녀는 말을 마치고 마침내 사라져 버렸다. 조식은 슬픔을 스스로 이길 수 없어 마침내 시를 지었다는 것이다.

  이 <낙신부>의 주제는 사랑이다. 감정을 주제로 하였다는 것이 바로 시대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렇다면 고개지는 이러한 시를 "읽는" 것이 아니라 "보고 느끼는" 그림으로 어떻게 옮겼을까. 먼저 <낙신부도>와 같이 사건이나 시간의 전개에 따라 그리는 형식의 그림을 연환화(連還畵)라고 하는데, 이는 서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위진남북조 돈황석굴에 많은 예를 볼 수 있다. 이러한 형식은 '읽는' 그림으로 더 적절하게 보일 수 있지만, 고개지는 이러한 연환화의 장면 장면에는 중국전통회화의 특징인 극적인 묘사방식, 즉 한 장면에 전후의 사건과 시간이 응집하게 하여 전체의 내용을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게끔 하였다.

   

신하의 부축을 받으며 낙수를 거니는 장면

  위 그림은 <낙신부도>의 앞 부분에 해당한다. 첫 번째 장면은 조식이 궁궐에서 나와 슬픔을 억누를 수 없어 몰아 피로에 지친 말을 쉬게 하는 것이다. 뒤로 업어져 허공에 다리를 매달고 신음을 하고 있는 말의 모습은 얼마나 말을 절박하게 몰았는지 설명해 준다. 두 번째 장면은 말에서 내린 조식이 낙심하여 신하들의 부축을 받고 낙수 주변을 거니는 모습이다. 여기에서 새로운 회화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아직 산수화가 본격적으로 성행되지 않았지만 산수와 나무가 소재로 등장한다. 산과 나무 및 바위가 현실적인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고졸스럽게 묘사되었는데, 이는 자연미의 대상으로 그려진 것이 아니라 인물의 내면적인 심리와 관련되어 있어 보인다. 즉 조식의 슬픈 감정과 그 분위기에 젖어 있는 주변 인물의 정서를 반영하여 나무 가지가 아래로 드리워져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고개지를 산수화의 효시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 산수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그의 저서 <화운대산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조식 앞에 나타나 배회하는 낙신의 모습

위의 장면은 낙수를 거닐고 있는 조식에 나타나 배회하는 낙신(洛神)의 모습이다. 조식의 <낙신부>에서 그 눈부신 모습을 여러 은유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그 모습은  놀란 기러기처럼 나부끼고, 자유로운 용처럼 어여쁘며,

가을 국화처럼 빛나고, 봄 소나무처럼 무성하다.

(또한) 경쾌한 구름이 달을 가린 듯 흐릿하며,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 흰)눈을 말리는 듯 산들산들 하다.

멀리서 바라보니 태양이 아침놀에서 떠오르는 듯 하얗고,

가까이 다가가 관찰하니 연꽃이 밝은 물결에서 나온 듯 밝다.

살찌고 여윈 것이 적절하고, 길고 짧은 것이 법도에 들어맞는다.

어깨는 깎아 만든 듯 하고, 허리는 묶은 비단과 같다.

목을 길게 세운 모습에는 흰 바탕에 이슬이 보인 듯 하여,

연지와 분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구나.

구름과 같이 머리는 높이 아득하고, 긴 눈썹은 미세하게 굽어져 있으며, 붉은 입술은 밖으로 환하고 빛나고, 하얀 이빨은 안에서 선명하게 보인다.

맑은 눈동자는 옆으로 비껴 또렷하고, 보조개는 광대뼈 밑에 있다.

아름다운 자태는 어여쁘면서 세속적이지 않고, 행동거지는 조용하며 몸은 우아하다.

느긋한 감정과 여유 있는 자태, 어떠한 수식의 말보다 아름답다.

기이한 복장은 세상에 보이지 않게 드물고,

골격과 모습은 (신선의) 그림에 합치된다.

맑고 깨끗한 비단 옷 펼치며, 옥과 같은 푸르고 화려한 패옥을 꽂고,

금과 비취의 머리 장식을 머리에 이고,

밝은 진주를 꿰어 몸을 빛냈다.

멀리 유람할 아름다운 신발을 신고,

안개같이 고운 비단의 경쾌한 옷자락을 끌고,

난초의 울창한 향기를 몸에 지니면서,

산모퉁이에서 배회한다.

   

  고개지 작품에 그려진 여인의 모습과 이 문장을 서로 비교하면, 고개지가 얼마나 여인에 대한 회화적 감수성이 깊은가를 말해준다. 낙신의 모습은 부끄러워하면서도 대담하게 유혹하는 듯한 자태를 취하고 있다. 뒤를 향해 돌아보는 모습에서는 육감적이면서 우아함을 잃지 않으려는 정신적 긴장감이 균형 잡혀 있다. 조식을 향해 아래로 내려다보는 시선, 긴 목선, 아담하게 꺾어진 어깨, 비단결의 옷 주름을 통해 보이는 가슴과 허리, 엉덩이의 삼곡(三曲), 조식을 향해 나부끼는 옷자락 등이, 그 자태가 도발적이지만 은유적으로 표현한 기러기, 용, 국화, 소나무, 구름, 바람, 태양, 연꽃의 묘사와 함께 우아한 격조를 잃지 않는다. 물론 곱고 가늘게 면밀히 이어지는 고개지의 독특한 묘법, 즉 봄누에가 실을 품어내는 듯한 춘잠토사(春蠶吐絲)묘법이 이러한 여인의 모습을 회화적 세계로 이끌어 가고 있다.

   

마차를 타고 뒤를 돌아보는 조식

   

  위 장면은 <낙신부도>의 마지막 장면이다. 조식은 낙수를 건너는 동안 낙신과 사랑을 나누었지만, 이룰 수 없는 신과 인간의 사랑이었기에 강을 건너 이별하고 연연하다가 마차를 타고 가는 모습이다. <낙신부>에서는 이 마지막 부분을 "마부에게 말을 몰게 하여 나는 장차 집으로 돌아가련다. 말고삐를 잡고 채찍을 들었지만, 길게 한숨쉬며 배회하면서 돌아갈 수 없구나."라고 적고 있다. 뒤로 향한 조식의 얼굴표정에서 아쉬움을 넘어 무표정함까지 보인다. 오히려 말을 몰면서 시선을 조식에게 향하면서 그의 눈치를 보고 애달파하는 신하들의 표정이 안쓰럽다. 이렇게 작품 전체에 흐르는 것은 사물의 객관적 묘사보다 인물의 정신이나 심리라 할 수 있는데, 후대 당나라 장회관이 고개지는 '신(神)'을 잘 그렸다고 한 것이 무엇을 말함인지 알게 하는 것이다.  

  조식이야 사랑의 아픔을 간직하여 슬프면서 아름다운 시를 지을 수 있었다면, 고개지는 어떻게 사랑의 감정이 깃든 형상을 표현할 수 있었을까. 이를 엿보게 하는 고개지의 일화가 전해진다. 고개지는 이웃집 여인을 짝사랑하다가 마음의 고통을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그 여인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벽에 걸어놓고 자신과 같은 고통을 느끼도록 그림의 여인 가슴에 못을 박았다. 그러자 다음날 그 여인이 와서 고통을 하소연하였다고 한다. 좀 비현실적이고 잔인한 행동이지만, 이 일화는 고개지의 여성에 대한 강렬한 열망과 아픔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그리움과 고통 속에 있었기에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그릴 수 있지 않았을까.

  나는 예술에서 이렇게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감동을 많은 사람에게 주는 표현의 강도는 예술가의 현실에 대한 경험의 폭이나 양보다도 깊이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낙신부도>에서 여인의 모습이 왜 그렇게 아름다우면서 애절하게 묘사되었는가를 설명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감상자 역시 이와 같은 경험의 깊이를 가져야만 진정으로 그림을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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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송식05 수나라 전자건의 <유춘도>

2009년 12월 5일 토요일

오전 6:07

   

   

누어 자유롭게 노닐다
  
[옛그림읽기] 수나라 전자건의 <유춘도>
   
   
   
▲ 작자미상, <고사도(高士圖)>, 15세기, 종이에 수묵 채색, 34.1×51.7㎝, 워시턴DC 프리어 미술관.
오늘날 미술관이나 화랑에 가면 벽에 걸려 있는 산수화를 흔히 볼 수 있다. 언제나 경험하는 것인데, 그림 밖 가장자리에 딱딱한 틀을 씌운 산수화를 보고 있자면 몸이 뻣뻣하게 굳어가면서 피곤해져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다. 산수화가 오늘날 우리의 삶이나 자연과 괴리되어 흡인력이 없어서 그러하기도 하겠지만, 오늘 우리가 산수화를 보는 방식이 달라졌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서양의 풍경화는 서 있는 위치에서 창을 통해 보는 경치에 비유된다. 액자는 창틀과 같은 역할을 한다. 이에 반해 산수화는 정신이 몸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노닐기 위해 확장된 공간을 지향한다. 당연히 산수화를 감상할 때 <고사도>에서처럼 정신을 육신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자세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를 누어서 노니는 것 즉 "와유(臥遊)"라 한다. 오늘날 어떻게 보면 신선놀음한다고 비아냥거릴 수 있지만, 이러한 감상 방식에는 그 나름대로 진지한 철학적인 물음이 담겨 있다. 아무튼 산수화를 서양의 풍경화 감상하듯 하니 얼마나 산수화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것인가. 당연히 부담스럽지 않겠는가.
산수화의 본질이란 무엇일까. 어떻게 그려졌고 '와유'란 감상방식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 1600여 년간 지속된 중국산수화의 본질을 한 말로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하겠지만, 산수화의 출발점에로 거슬러 올라가 생각해 보는 것도 한 방편일 것이다. 현존하는 작품에서 가장 이른 산수화 중 하나인 수나라 전자건의 <유춘도>가 여기에 해당한다고 본다.
전자건은 북제, 북주, 수 등 삼대에 걸쳐 활동하였다. 그의 산수화풍은 당나라 이사훈 이소도 부자에 의해 계승되어 완성되었다는 것을 상기하면, 그는 주로 수나라에서 활동하면서 위진남북조시대의 산수화를 계승하여 당나라로 이어주는 과도기의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할 수 있다. 위진남북조시대의 산수화라는 것은 청록산수, 즉 청색과 녹색 안료를 위주로 하여 그린 채색 산수화를 말하기도 하지만,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남조시대 유송의 산수화이론가 종병(宗炳)의 와유 산수 이념의 구현을 의미한다.
   
   
전자건, <유춘도>, 수, 비단에 채색, 43×80.5㎝, 북경고궁박물원
   
이 작품이 과연 전자건이 그린 것인지에 대해서는 오늘날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북송시대 말기 황제 휘종이 수금체(瘦金體, 가늘고 힘찬 철선)로 쓴 "전자건유춘도(展子虔遊春圖)"라는 제목이 있는데, 정작 휘종의 소장품을 기록한 『선화화보』에는 이 작품이 없기 때문이다. 이미 청나라 초기 미술이론가 장축은 이에 대해 강한 의문을 품었었다. 현대 중국미술사학자 우홍 역시 당나라 초기 작품을 임모한 송나라 모본이라고 생각하였다. 진위문제가 어떻게 주장이 되든 그려진 화풍이나 이념으로 보아 위진남북조 종병 이래의 산수화풍을 계승하면서 당나라로 이어주는 산수화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종병의 산수화 이념이 무엇이기래 누워서 노닐어야 하는가. 종병은 그의 저서 『화산수서』에서 산수를 그리게 된 이유를 밝히고 있다. 종병은 산수화가이기 이전에 불교 수행자였다. 그는 육체에 대한 정신(=부처)의 자유를 주장하였고, 이를 위해 실천하였다. 육체는 시공간에 한정되어 있지만, 정신은 시작과 끝이 없고 헤아림과 한정이 없는 무한함을 본체로 한다. 그러나 무한한 정신은 인연에 의해 유한한 육체에 깃들게 됨으로써 육체의 작용을 받아 불완전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당연히 정신을 육체의 구속에서 벗어나 무한함으로 되돌리는 것이  종병의 수행이었다.
종병은 수행의 방편으로서 불교에 심취하였다. 다만 정신(=부처)의 상징인 산수를 유람하면서 이를 통해 해탈하고자 하였다. 특히 혜원 스님이 이끄는 산수불교의 서방결사(西方結社)에 참여하였던 것이다. 종병은 젊어서부터 유명한 산을 마음껏 유람하고 음미하였다. 부처의 상징인 산수에 감응하여 자신의 육체에 구속되어 있는 정신(=부처)을 일깨어 자유롭게 활성화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어느덧 나이가 들고 병이 들어서 더 이상 산수를 유람할 수 없게 되었다. 부처의 구원을 받아 해탈하고자 하지만 육신의 불완전함 때문에 이룰 수 없게 되었으니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종병은 과거에 노닐었던 산을 벽에 그려 놓고 방안에서 이를 감상하면서 자신의 영혼을 해방시키고자 하였다. 그가 산수화를 보면서 창신(暢神)만이 할 뿐이라고 한 것은 그에게서 산수화의 의미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와유' 즉 "방안에서 누워서 산수화를 보고 노닌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확장되어 산수화를 감상하는 방식이 되었다. 산수화야말로 정신을 육체의 작용에서 벗어나게 하고 또한 육체의 한정된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정신을 초월하게 하여 무한한 세계로 자유롭게 뻗어 나가게 하는 방편인 것이다.
   
작자미상, <기상호악도>, 8세기,비
판 위에 그림, 가죽에 채색, 40.6×
16.5㎝, 나라(奈良) 쇼소인(正倉院)
그렇다면 종병과 그의 스승 혜원은 산수의 어떤 특징을 가지고 부처를 상징한다고 하였을까. 정신(=부처)의 본체는 절대자유의 세계이다. 공간적으로 헤아리거나 한정할 수 없는 무한함이며, 시간적으로 시작과 끝이 없는 영원함이다. 이러한 세계를 산수가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산에 올라가 아득히 조망하면 시선이 멀리 무한한 공간으로 향하게 되니, 산에서 헤아리거나 한정할 수 없는 공간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시작과 끝이 없는 시간을 산에서 느끼기 위해서는 특별한 감각이 필요하다. 산 정상에서 아래를 내려볼 때 잠시라도 망념에 빠지는 순간이 있는데, 아마도 이 때 산과 자신이 일체화되어 영원한 시간 속에 있는 것이 아닐까.
종병은 공자가 태산에 올라 노나라를 보고 작다고 한 것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무한한 불법 세계에 대해 공자가 살고 있는 현공간이 대비되고, 태초부터 있어 왔고 지금도 존재하고 앞으로도 존재할 태산에 대해 현시간인 노나라가 대비되어 자연스럽게 일어난 탄식이라는 것이다. 공자가 산수를 좋아한 것도 불법세계의 무한함과 영원함을 체득한 성인이기 때문이라고 한 그의 주장은 한편으로 이해가 간다.
종병이 산수화에서 표현하고자 한 것은 분명해진다. 불법 세계의 영원함과 무한함인 것이다. 이는 오늘날에도 회화적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인데, 산수화가 막 시작되는 종병의 시대에서 어떻게 가능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아마 오늘날 산수화와 같이 완성된 형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리라. 정신을 자유롭게 하는 '창신(暢神)'에 있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상당히 관념적인 묘사에 머무르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러나 이후 산수화의 발전은 종병이 주장하는 창신을 조형적으로 완성하는 과정이었다. 이런 과정 속에 있는 것이 바로 전자건의 <유춘도>이다.
<유춘도>는 제목에 따르면 봄에 나들이 가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왼쪽 아래  하인을 대동한 남자는 강가에서 멀리 바라다보면서 깊은 생각에 잠기었고, 사공이 노를 저으며 움직이는 배 안에서는 서 있는 남자의 지적에 따라 두 여인들이 앉아서 봄 경치를 감상하고 있다. 한 여인은 크게 그리고 다른 한 여인은 작게 그린 것을 봐서 주인과 하인의 관계로 보인다. 왼쪽 언덕에서는 말을 타고 산 속으로 향하고 있다. 그 앞으로 홍교와 암자 및 사찰이 있고 그 뒤로 중첩된 산이 고졸하게 묘사되었다. 겨울을 지내었던 나무 가지는 강경하지만 그 끝에 곱게 피어 있는 꽃과 시간적인 대조를 이루면서 생명의 기운을 드러내고 있다. 뿌리를 통해 끌어올려진 땅의 생명이 하늘의 기와 조화하여 탄생시킨 푸른 나뭇잎 역시 봄을 상징하기에 충분하다.
무엇보다도 종병의 창신(暢神)과 결부하여 강조되는 조형은 광활한 공간에서 펼쳐지는 아득함에 있다. 부감법으로 펼쳐진 공간은 정신의 본체인 무한함과 영원함으로 향하는 조형적인 표현인 것이다. 장언원이 "지척의 작은 화면에 천리의 아득한 경치를 표현하였다."는 것이 이를 말하는 것인가. 이는 8세기경 당나라 영향을 받아 그린 일본 나라시대의 <기상호악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흰 코끼리 위에서 연주하는 사람들 뒤로 계곡을 따라 광활하고 요원한 공간이 펼쳐진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산수화를 감상하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종병처럼 누어 노닐면서 정신을 자유롭게 하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있겠는가.
   
오늘날 나는 가끔 나 자신에 대해 반문하곤 한다. 너무 주변적인 것에 집착하여 정신을 피폐시키고 있지 않냐고. 나의 정신을 한번쯤 본래의 세계로 되돌려 자유롭게 노닐게 해 줘야 하지 않을까. 요즘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고 시끄러운 세상이 있을까만은 잠시라도 벗어나면 오히려 불안해지니 나 스스로에게 연민의 정이 간다. 마음이 넉넉해졌으면 좋겠다. 산수화를 누어서 노닐다가 잠이 들어 장자처럼 호접몽을 꾸게 되면 금상첨화일 것이고, 안평대군처럼 꿈속에서 친한 벗 몇몇과 도화원에 들어가 노닐어도 더 바랄 것이 없겠다. 꿈속에 또 꿈이런가.
   
   
작자미상, <잠자는 사람>, 명대 초, 화첩, 비단에 수묵채색,
25.4×29.21㎝,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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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송식06 북송 휘종의 <서학도>와 <엽매산금도>

2009년 12월 5일 토요일

오전 6:08

   

   

차라리 화가로만 남았더라면
  
[옛그림읽기] 북송 휘종의 <서학도>와 <엽매산금도>
   
   
   
   
▲ 휘종, <서학도>(부분), 1127년, 비단에 채색, 51×138.2㎝, 요녕성박물원
작년 연말을 거쳐 새해로 들어오면서 막연히 가졌던 희망은 다시 차가운 현실과 부딪쳤다. 하루하루의 지나감이 특히 별다를 것이 없지만 그래도 하루를 경계로 새로운 기운을 바랜 것은 그만큼 답답한 심정을 드러냈던 것인지 모르겠다. 어느 신문에서 작년 한 해를 "밀운불우(密雲不雨, 구름은 잔득 끼고 비는 오지 않는다)"라는 고사성어 넉 자로 요약했듯이 이 시대의 불확실성과 답답한 심정은 누구나 느끼고 있는 것 같다. 새해에서도 황금돼지의 희망과 달리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들려오는 것이 달갑지 않다. 이런 시대적 느낌과 연관되는 그림이 없을까. 작품으로 거론될 수 있는 것은 딱히 떠오르지 않지만 그에 맞는 화가는 다가온다. 아니 이 화가의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그 화가에 대한 느낌이 오늘날 우리의 실정과 유사하게 연상하도록 했는지도 모르겠다. 왕이면서 화가인 북송시대 휘종(徽宗)을 두고 하는 말이다.
휘종(徽宗, 1082~1135)은 두 가지 모습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나라를 멸망으로 이끈 무능하고 치욕적인 왕, 다른 하나는 중국 역대에서 보기 드문 위대한 화가 중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전자를 거론하여 그를 무시하자니 후자의 업적이 안타깝고, 후자만을 다루자니 나라와 시대에 너무 무책임하여 답답한 심정을 갖게 된다. 당연히 이 양자를 종합하여 생각하게 되는데, 후대 역사에서는 왕이 그림을 그리며 정사를 소홀히 할 때면 이를 제지하면서 언제나 교훈으로 들었던 왕이었다. 오늘날 전해지는 그의 초상화는 왕안석의 신법을 받아들여 나라를 강건하게 하고자 했던 아버지 신종(神宗)의 강직하고 의지적인 모습과 달리 너무 부드럽고 감성적이며 연약하게 보인다. 심하게 말하면 주변인의 말을 잘 믿고 자신의 세계에 폐쇄되어 순응하면서 응석받이로 행동하는 모습으로 다가온다. 당시 숨 막히게 돌아갔던 국내외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역학관계를 생각할 때 그 한복판에 있는 왕의 모습과는 너무나 다르다.
   
작자미상, <휘종>(부분), <신종>, 송, 비단에 채색, 188.2×106.7㎝, 55.8×46.9㎝,
대북고궁박물원
   
이 그림은 휘종의 <서학도(瑞鶴圖)>로 1112년 정월 16일에 그린 것이다. 그가 왕위에 오른 지 2년 후이며, 금(金)에 굴욕적인 침략을 받아 왕위를 흠종(欽宗)에게 내주고 피신하였던 해(1125년)로부터 13년 전이기도 하다. 작품 옆에 자신의 서체인 수금체(瘦金體, 가늘고 쇠처럼 깐깐한 글씨)로 이 작품을 그리게 된 연유를 기록하고 있다. 저녁에 갑자기 상서러운 구름이 피어올라 선덕문(宣德門, 궁궐대문)을 비추자 많은 사람들이 쳐다보았더니 수십 마리의 학이 하늘에서 울면서 날아들었다. 두 학은 치미 끝에 대치하며 매우 한가하고 평온하게 앉아 있고, 나머지 학들은 하늘을 비상하면서 음악의 연주에 맞춰 춤추곤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쳐다보면서 감탄하였는데, 학들은 오랫동안 시간이 지나도 흩어지지 않고 줄을 지어 돌아 날다가 서북 모서리에서 흩어졌다고 한다. 휘종은 이 상서러운 징조에 감응하여 그림을 그리고 아울러 이 사실을 기록하면서 다음과 같이 시를 썼다.
   
맑은 새벽 지붕 끝 아름다운 무지개구름이 피어오르고,
학(仙禽)이 상서로운 징조를 알리면서 홀연히 짝지어 왔네.
자유스러운 모습, 원래 신선 사는 곳(에서 신선의) 배필인데
짝 지어 와서 천년의 영원한 모습을 보이는구나.
푸른 난새가 보배로운 누각에 머무니,
어찌 붉은 기러기가 세상에 모인 것과 같을까.
배회하며 울다가 궁궐에 내려와서
(태평성대를) 동경하는 많은 사람에게 알리는구나.
   
淸曉觚稜拂彩霓, 仙禽告瑞忽來儀. 飄飄元是三山侶, 兩兩還呈千歲姿.
似擬碧鸞捿寶閣, 豈同赤雁集天地. 徘徊嘹唳當丹闕, 故使憧憧庶俗知.
   
왕위에 오른 지 2년 후의 일이니 아직 그에게서 왕으로서의 정치적 포부를 느낄 수 있는데, 그가 왕위에 오를 때의 상황을 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갈 수 있다. 휘종은 신종의 11번 째 아들이며 철종(哲宗)의 동생이었다. 철종에게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휘종이 원치 않게 왕위에 올랐다. 그런데 신종, 철종으로 이어지는 역사는 당쟁의 연속이었다. 신종 때에는 개혁정치로 인해 사마광이나 구양수, 소식과 같은 구법당이 정치에서 물러났고, 그의 형 철종 때에는 초기에 신종의 모친 고(高)태후가 섭정함으로써 그녀의 미움을 샀던 왕안석을 중심으로 한 신법당이 물러나고 그 자리를 구법당이 대신하였다. 그러나 이후 철종이 친정함에 따라 선친인 신종의 업을 계승하면서 신법당을 다시 옹립하였다. 이 와중에 신법당과 구법당, 개혁파와 보수파 대립이 되풀이 되었는데, 휘종이 왕위에 오르자 휘종의 모친인 신종의 황후 향(向)씨를 중심으로 당쟁의 폐해에서 벗어나 좌우의 대립을 해소하고 중립 정치를 행하려고 하였다. 휘종은 역사적으로 무능한 임금으로 낙인 찍혔지만 처음 왕위에 올랐을 때 그 또한 임금으로서 이상이 없었겠는가. 이 시에서 모든 사람의 선망에 맞게 이상적 정치를 향한 그의 동경을 엿 볼 수 있다.
   
휘종, <엽매산금도>, 송, 비단에 채색,
83.3×53.3㎝, 대북고궁박물원
그러나 그의 뚜렷한 정치적 행적은 살필 수 없고 미술사적으로 남긴 큰 족적만이 있을 뿐이다. 그는 북송초기에 설치된 산만한 화원제도를 정비하여 한림도화원을 만들어 화원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면서 새로운 미적 이념을 제시하였다. 이 이념은 세 가지 즉, 자연에 대한 세밀하고 직접적인 관찰에 근거를 둔 사실주의, 전통화법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 그림에서 '시의(詩意)'의 강조로 요약할 수 있다. <서학도>는 내용적으로 볼 때 위에서 언급한 휘종의 기록과 일치한다. 다만 양식적으로 보면 얼핏 보아서 장식적인 요소가 강해 보인다. 기와와 처마 밑 두공 등을 '계필(界筆)'로 그린 궁궐의 모습, 치미 위에 서 있는 두 마리의 학을 중심으로 하늘에서 대칭적으로 나는 열여덟 마리의 학들, 아래에서 뭉게뭉게 피어올라 지붕에 이르러 지붕과 함께 전체 작품에서 하늘과 둘로 나누는 구조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좀더 음미하면 건물의 구조적 법칙의 정확성, 면밀한 관찰을 통해 얻어진 학의 모습과 움직임, 그리고 학과 구름, 선덕문과의 관계에 이상적인 정치를 의탁한 '시의(詩意)'를 엿보기에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이와 달리 왕으로서가 아니라 나약하고 섬세하면서 여린 감성에 젖은 한 인간의 모습을 살필 수 있는 작품으로 <엽매산금도(獵梅山禽圖)>를 들 수 있다. 한 겨울 매화 가지에 꽃이 피고 백두조(白頭鳥) 두 마리가 나뭇가지 끝에 다정하게 앉아 있는 장면을 그렸다. 왼쪽 아래 휘종 자신이 쓴 제시가 이 그림을 감상하는 데 도움을 준다. 특히 시, 서, 화 삼절(三絶)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작품이다. 서예는 그의 수금체가 갖는 조형미를 통해 알 수 있지만, 문학과 그림과의 관계, 즉 휘종이 주장하는 그림에서의 '시의'를 엿보는 것은 묘사된 형상과 시의 내용을 아울러 생각하여 음미해야 하는데, 이는 그야말로 중국화를 감상하는 별미라 할 수 있다.
   
산새는 뛰어난 자태를 자랑하고
매화꽃은 가벼움과 부드러움을 가지고 논다.
이미 그림 같은 약속이 있었건만
세월은 흰 머리를 가리키네.
   
山禽矜逸態, 梅粉弄輕柔.
已有丹靑約, 千秋指白頭.
   
나무줄기는 크게 아래에서 대각선으로 오른쪽으로 뻗어다가 다시 왼쪽으로 향하고 중간에서 다시 두 가지로 갈라지는데, 이는 화면을 크게 셋으로 나누었다가 다시 작은 여러 면으로 분할하고 있다. 화면이 크고 작은 다양한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한 면이 아니라 사물을 둘러싸고 있는 무한한 공간으로서 모든 존재의 생성과 소멸을 안고 있는 무(無)이자 공(空)으로 드러난다. 무한한 공간과 유한한 존재의 대비, 유한한 존재에서도 막 피어오른 매화의 생명감과 백두조로 상징되는 세월의 흐름과의 대비는 작품 전체에 묘한 정서를 유발하고 있다.
백두조와 매화꽃을 그린 것은 너무나 시적이다. 백두조 두 마리는 안정감 있는 단단한 줄기가 아니라 가늘고 여린 나무 가지 끝에 다정하게 앉아 있다. 이는 마치 자신의 뛰어난 자태를 자랑하는 것이기도 하다. 매화꽃이 백두조 무게에 내려앉은 나뭇가지에 따라 살짝 반동하여 움직이는 것을 주체적으로 가벼움과 부드러움을 과시하는 것으로 받아 풀이하였다. 실오라기 같은 정조가 흐른다. 이 우주, 이 세상 한 구석에서 산새와 매화꽃은 생명으로 가득한 자연을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이 텅 공간 속에서 사라지려는 존재이다. 현상(色)을 통해 본체(空)가 드러나니 우리의 존재를 왜소하고 무의미하게 한다. 
휘종의 제화시를 분석하면 이 그림의 의미를 분명히 이해할 수 있다. 첫째와 둘째 구절은 그림에서 사물의 묘사를 언급하고 있다. 이는 시의 셋째와 넷째 구절에서 자기 의도를 표현하기 위해서이다. 시에서 자기의 뜻을 표현하기 위해 먼저 사물을 빌려 감정을 일으키는 방식인 흥(興)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휘종이 이 그림을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은 바로 시의 셋째 넷째 구절에 담긴 것처럼 "그림과 같이 약속"하였던 백년해로였지만 이미 세월이 다 지나갔음을 안타깝게 여기는 무상함이라 할 수 있다. 위진남북조 유협은 『문심조룡』에서 흥은 "숨겨져 있으며" "표현된 것은 여기에 있는데 이해되는 것은 저기에 있다"고 하였으니, '여기'에 표현된 것은 형상적 묘사이고 '저기'에서 얻어지는 것은 인생무상이란 깨달음인 것이다. 동양회화의 본질로서 "상외지미(象外之味)" 즉 형상 너머의 맛이란 바로 이러한 깨달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휘종, <청금도>, 1102경,
비단에 채색, 147.2×51.3㎝,
북경고궁박물원
휘종이 왕위에 오르고 이상세계에 대한 꿈을 품고 있었지만 <서금도>를 그린 1년 후 환관 동관(童貫)과 결탁한 신법당 채경(蔡京)이 3번째 재상에 오르자 전혀 다른 정치적 형세로 움직였다. 그런대로 중도 세력에 의해 이루어진 균형은 깨지고 급속히 좌파의 정권으로 기울었다. 특히 노련한 채경은 휘종의 감수성을 자극하면서 정권을 전횡하였다. 지금 현존하는 휘종의 <청금도>를 보면 휘종의 응석받이와 채경의 무뢰함을 읽을 수 있다. 작품은 휘종 자신이 큰 노송 아래에서 두 신하를 앞에 두고 거문고를 연주하는 것이다. 나무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부감법으로 그려졌는데, 큰 나무 가지가 아래로 기울면서 자연스레 삼각형의 공간이 형성되었다. 그곳에서 휘종은 영원을 상징하는 수석을 마주하면서 현이 없는 거문고를 연주하고 있다. 휘종은 도교를 독실하게 믿고 스스로 도군황제(道君皇帝)라고 부르면서 평상시 도복을 입었다고 한다.
   
양식적으로 보면 위에 거론된 특징들이 고스란히 나타난다. 나무줄기와 잎, 인물, 정원석 및 탁자 등은 사실적인 묘사로 이루어졌다. 배경이 간결하고 묘사가 명확한 것은 당나라 염립본, 장훤, 주장 등이 제작한 궁정회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아울러 작품 전체에서는 고요하면서도 긴장감이 느껴지며 형상 밖의 맛을 음미하는 시의가 넘친다.
두 신하 중 붉은 옷을 입은 사람이 바로 채경이다. 작품 위에 오른쪽 "청금도(聽琴圖)"라고 휘종 자신이 수금체로 쓴 제목 옆에 제시를 쓴 사람이기도 하다. 제시 아래에는 "신하 채경이 삼가 쓴다"라고 하였지만 "우러러 엿보고 아래로 살펴보며 정을 품은 나그네, 무현의 연주를 들으며 한번 재주를 자랑한다."라고 쓰면서 감히 임금의 그림 위에 자신의 재주를 뽐내고 있으니, 이는 계씨(季氏)의 팔일무(八佾舞)보다 심하다고 할 수 있지 않는가.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가 분수 넘게 참람하면 그 세계는 끝이 보일 수밖에 없다. 북송은 금의 재침으로 1127년 멸망하고 휘종은 포로로 끌려가 황량한 땅에서 죽었다. 채경은 자신의 권력을 영속하려고 자신의 아들 채유(蔡攸)를 추천하였지만 이 역시 그 아들에 의해 권좌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휘종이 화가로서만 남았더라면 그의 그림을 감상하는 마음이 차라리 편하였을 것이다. 
   
*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현존하는 휘종의 작품은 "왕이 그리고 글을 쓰다.御製幷書"라고 써 있어도 한림도화원 화가의 그림에 자신의 글을 쓴 것이라고 하고 있다.
   
* 계씨(季氏)의 팔일무(八佾舞) : 천자는 8일무, 제후는 6일무, 대부는 4일무, 사는 2일무로 춤을 춘다. 춘추시대 계씨는 대부임에도 천자의 팔일무를 추게 하였다.『논어』「팔일(八佾)」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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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송식07 북송 후기 곽희(郭熙)의 <조춘도(早春圖)>

2009년 12월 5일 토요일

오전 6:08

   

   

이른 봄 경치에 예악(禮樂) 정신을 담다
  
[옛그림 읽기] 북송 후기 곽희(郭熙)의 <조춘도(早春圖)>
   
   
   
   
▲ 곽희, <조춘도>, 비단에 담채, 북송(1072), 158×108㎝, 대북 고궁박물원
오늘날 한 폭의 전통산수화를 감상할 때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산수란 것은 풍경이나 경치처럼 시각적으로 보고 즐길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여기에는 복잡한 정치적 사회적 철학적 기제가 깔려 있다. 따라서 전통산수화를 감상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세계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다. 동양화론에서는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달아 손으로 나타낸다"는 창작과정을 흔히 언급하였다. 이는 전통 산수화를 이해하는 한 길이 될 것이다. 물론 고금의 모든 작품이 눈으로 본 세계를 자기 나름대로 이해하여 그린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눈으로 보는 자연, 마음으로 이해하는 가치관, 그리고 손에 의한 예술적 표현이 서로 어떻게 어우러져 있느냐에 따라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전통산수화에서는 자연 자체가 아니라 가치관의 투영이 특히 중요하다. 산수화에 인간의 정이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금년에도 봄이 왔다. 뚜벅 뚜벅 망설임 없이 힘차게 왔다. 봄은 밖에서 오는 것뿐 아니라 안에서도 온다. 이는 서로 감응하여 우리의 세계를 활발하게 한다. 이러한 봄을 그린 가장 대표적인 작품으로 북송시대(960-1127) 곽희의 <조춘도>를 거론한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한 겨울에서 새로운 생명이 싹트는 과정을 그린 것인데, 온 자연이 봄기운에 의해 용트림 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도대체 여기에 무슨 인간과 사회의 가치관이 들어가 있단 말인가. 이를 위해 잠시 자연의 변화를 음과 양으로 해석한『주역』으로 들어가 보자. 『주역』에서 봄은 음의 기운 속에서 양이 생성하는 것으로 푼다. <조춘도>는 인간과 자연의 상황 범주를 정한 『주역』의 64괘 중 '복괘(復卦)'의 연속으로 이해할 수 있다.
'복괘'는 곤괘와 진괘가 합쳐진 것으로 곤괘가 위에 있고 진괘가 아래에 놓여 있다. 6효(六爻)로 보면 아래에 양이 새롭게 형성하여 위에 쌓인 음을 밀어내면서 올라오는 양의 생성을 말하는 것이고, 형상으로 보면 땅 아래 양의 생명이 움트는 것이다. 아직 양은 땅 밑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밖으로 왕성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이 시기에는 겉으로 온 세상이 고요하다. 괘의 순서를 놓고 보면 '복괘(復卦)'는 '박괘(剝卦)' 다음에 있다. '박괘'는 복괘와 반대로 음의 기운이 왕성한 상태를 이룬다. 즉 간괘와 곤괘로 되어 있는데, 맨 위 여섯 번째 효가 양이고 그 아래 다섯 개의 효가 음으로 되어 있으니, 음의 기운이 극한에 이르고 양이 소멸하는 것을 말한다. 복괘는 박괘에서 양이 소멸되어 되었다가 다시 생성하기 때문에 양을 중심으로 하여 복(復 ; 돌아오다)이라 한 것이다. 여기에서 만물이 생성 소멸하는 "천지의 마음을 볼 수 있다."
   
오른쪽 아래 부분. 도연명의 <도화원기>
내용을 도해한 듯 나룻배를 탄 어부의 시
선이 물줄기를 따라 선경(仙境)으로 향한다.
그런데 이 『주역』은 자연 현상에 인간의 규범을 대비하여 자연과 인간의 일치를 추구한다. 특히 양과 음은 군자와 소인에 비유하였다. 따라서 복괘에서 천지의 마음이란 인간의 규범으로서 소인의 무리에 쫓긴 군자가 다시 기세를 형성하여 뻗어가면서 그들의 세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물론 복괘에서는 양의 기운이 미약하지만 장차 벗의 도움을 받아(朋來, 양의 축적) 만물이 번성하여 형통하게 될 것이다. 자연에서 형통함은 여름의 덕이지만, 사회에서는 군자 세계의 도래를 의미한다. 자연 속에 인간 세계가 투영되어 있다.
북송 시대 11세기에 활동하였던 화원화가 곽희의 <조춘도>에서는 이러한 자연과 인간과 예술을 함께 감상할 수 있다. 곽희는 우리에게 생소할지 모르지만 안견의 <몽유도원도>가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이곽파(李郭派) 화풍에서 '곽'이 바로 곽희를 말한다. 조선 초기 안평대군의 소장품 222점을 기록한 신숙주의 『화기』에서 곽희의 작품이 16점이나 있으니 조선 초기에 그의 영향을 가름할 수 있다. 스승 이성(李成)과 함께 북송시대 화북산수(華北山水)를 집대성하여 각각 성을 따서 '이곽'파라고 불렀다. 이는 북쪽 겨울 나뭇가지를 그리는 해조묘법(蟹爪描法), 구름처럼 산을 그리는 운두준(雲頭皴)으로 특징을 이룬다. <조춘도>는 제목과 같이 이른 봄을 그렸다. 복괘가 음력 11월에 해당하니까 이 <조춘도>는 봄기운이 땅위로 솟아오르고 사람들이 힘차게 활동하는 것을 봐서 시간이 지나 음력 1,2월에 해당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는 양이 확장하는 과정이며 군자세계의 도래를 암시한다.
<조춘도>는 작품 가장자리에 1072년에 그린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이 시기는 신종(神宗,1068-1085)이 왕안석을 등용하여 한창 나라를 개혁하려는 기운이 왕성하였을 때였다. 왕안석은 1072년을 전후로 한창 신법을 시행하고 있었다. 신종이 곽희의 작품을 특히 애호하여 궁궐 벽화와 병풍을 그리도록 하였던 것은 신종이 꿈꾼 이상적 세계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소식도 곽희의 그림을 좋아하였다는 것이다. 소식은 이 당시에 왕안석을 비판하다가 지방관으로 전전하였고 이후 투옥되어 유배를 갔었다. 그러나 신종이 죽고 철종이 왕위에 오르자 구법당이 정권을 잡았는데, 소식 역시 중앙정부에 등용되어 한림원 학사로 지내면서 궁궐의 곽희 그림을 보고 시를 지어 노래하였다. 막말로 정치인은 똑같다고 할 수 있듯, 곽희의 그림은 우리와 같이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라 왕족이나 고관관료들의 입장에서 즐겨 감상하던 것이 분명하다. 오늘날 <조춘도>를 실감나게 감상할 수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 같다.
북송 사대부에게는 현실적인 실천 태도에 두 가지 방향이 있었다. 나라에 도가 있으면 나가서 적극적으로 품은 뜻을 베풀고, 나라에 도가 없으면 정치에서 물러나 은거하였다. 현실에 대한 해석은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서 자의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권력을 가지면 나라에 도가 있는 것이고 자신이 유배를 가면 도가 없는 것일까. 암튼 나라에 도가 있고 없는 것에 따라 자연을 읽는 것이 다르다. <조춘도>는 나라에 도가 있을 때 바라본 이상적 자연을 그린 것이라 할 수 있다.
   
왼쪽 아래 부분. 평범한 인간세계를 그렸다.
곽희는 그의 작업과정을 정리해서 "자연에서 느끼는 깊은 맛"이라는 의미의 『임천고치(林泉高致)』를 저술하였는데, 여기에서 산수를 그리는 이유를 명확하게 말하였다. "자신의 한 몸만을 위한 자연에 대한 욕구"를 추구하고 싶지만, "임금과 어버이에 대한 충과 효" 때문에 현실에서 자연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산수를 그린다는 것이다. 자연은 인간 현실에서 벗어나면 날수록 좋은 소재가 된다. "갈 만한 곳(可行)"이나 "바라볼 만한 곳(可望)"보다 "노닐 만한 곳(可遊)"이나 "살만 한 곳(可居)"이 더 좋은 소재가 된다고 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 마디로 "자신의 한 몸만을 위한 자연에 대한 욕구"를 충족할 만한 "노닐 만한 곳"이나 "살 만한 곳"은 어디일까. 당연히 동양에서는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신선의 세계이다.
   
무릉도원은 인간세상을 초월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주변 자연 속에 있다. 우연히 찾았거나 꿈을 통해 들어갔어도, 저 산 속 어디엔가 있는 것이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찾으려고 했지만 이루지 못하였을 뿐이다. 이 세계가 곽희의 그림 속으로 들어왔다. 궁궐에서 정사를 보면서 잠시나마 신선의 세계에서 노닐거나 살아본다. 소식은 곽희의 <추산평원(秋山平遠)>를 보고 "흰 물결 푸른 산봉우리, 인간세상이 아니네."라고 노래하였고, <조춘도> 위에 청나라 건륭황제가 쓴 제발에는 "신선이 사는 건물, 가장 높은 곳에 있네."라고 탄식하였다. <조춘도> 오른쪽 아래 물가에는 도연명의 <도화원기> 내용을 도해한 듯 나룻배를 탄 어부의 시선이 물줄기를 따라 선경(仙境)으로 향한다. 이와 달리 왼쪽 아래 강가의 어부 모습이나, 왼쪽 끝 언덕에서 길을 따라 등짐을 지고 올라가는 사람, 중경 언덕 사이로 나무다리를 지나가는 짐꾼 등의 평범한 인간세계가 근경의 중앙 언덕을 경계로 대비를 이루고 있다. 궁궐에서 보면 이러한 평범한 인간세계도 선경으로 보일까.  
곽희는 이 선경을 마치 직접 노니는 것처럼 실재감이 감돌도록 그리려고 하였다. 서양화처럼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면 오히려 쉽겠는데, 산수화는 그 안에서 노닐면서 입체적으로 경험을 해야 하기 때문에 얼마나 어렵겠는가. 우선, <조춘도>에서 산이나 나무, 바위 등을 보고 있노라면 사실적으로 정밀하게 묘사한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런데 산은 거리와 방향에 따라 각각 다르게 보인다. 산의 형세를 교묘하게 중첩시키면서 뒤틀리게 하고, 나무와 바위를 삼면이 보이도록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부감법으로 그린 것은 아마도 보는 사람의 경험을 확충하기 위한 것 같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보는 순간이라도 감상자는 이 산 속에 있어야 한다. 서양화의 원근법으로 그려서는 안된다. 그 풍경은 아무리 잘 그려도 나 밖에 있는 세계에 불과하다. 노니는 곳이 아니라 바라보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곽희는 다시점(多視點)인 삼원법(三遠法)을 사용하였다. 산 아래에서 산 위를 우러러보는 고원(高遠)은 원경의 중첩된 산을 그린 것이고, 산 앞에서 산 뒤를 엿보는 심원(深遠)은 중경 골짜기의 깊이를 드러내는 것이며, 가까운 산에서 먼 산을 바라보는 평원(平遠)은 근경에서 중경을 지나 원경으로 이어지면서 펼쳐지는 것을 말한다. 이 삼원이 종합된 <조춘도>는 보는 사람을 산 속에 있게 한다.
   
위쪽 중앙 부분. 먼 큰 산(主山)은 뭇 산(客山)의
주인으로서 당당하게 있다.
여기에 머무는 것만이 아니다. 몸이 선경(仙境)에 있으면 정신도 자유로워야 한다. 곽희는 바라보는 삼원의 시선에 의지하여 정신의 해방을 유도하였다. 즉 "산 아래에서 산 위를 우러러 보는" 것에 의지하여 정신을 무안한 높이로 향하게 하고, "산 앞에서 산 뒤를 엿보는" 것에 의지하여 무한한 깊이로 향하게 하며, "가까운 산에서 먼 산을 바라보는" 것에 의지하여 광활하고 유원한 무한 공간으로 뻗어나가게 한다. 정신의 실체는 시공간의 제약이 없는 무시, 무종, 무한, 무량의 자유라고 믿었다. 그러니 궁궐에서 <조춘도>를 보고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당연히 그 속에 들어가 마음껏 노닐면서 정신을 자유롭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참으로 묘하게 이렇게 노닐고 있노라면 반전이 일어난다. 어느새 사대부가 정치적으로 규범지은 질서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예기』를 편찬한 주자(朱子)의 제자 진호(陳澔)가 서문에서 "예란 자연의 절문"이라고 하였다. 인간의 도덕적 규범은 자연의 조리나 질서에서 나왔다고 하였으나 인간의 오만은 역으로 인위적 관념으로 자연을 규정한다. <조춘도>에서 구도나 산과 나무의 배치가 이에 일조를 하고 있다.
이 그림을 전제적으로 볼 때 가장 눈에 들어오는 특징은 도식화된 구도이다. 이곽파를 거비파(巨碑派)라고 달리 부르듯, 작품 한 가운데에서 위로부터 산세가 대각선으로 서로 교차되면서 아래로 내려와 S자형의 기세를 형성하고 있다. 이는 중앙에 큰 비석처럼 우뚝 솟아 있으면서 좌우 대칭을 이루게 한다. 물론 산세나 필치에 변화가 많고, 먹의 변조가 다양하여 의식될 정도는 아니지만. 먼 큰 산(主山)은 뭇 산(客山)의 주인으로서 당당하게 있다. 언덕과 숲, 골짜기는 이를 중심으로 멀거나 가까워지고, 크거나 작아지고 있다. 그 형상은 임금이 남면하고 여러 제후들이 조회하는 것 같다. 그리고 보니 뭇 산세들이 눕거나 걸터앉거나 등을 돌려 큰 산에게 오만하게 굴지 않는다. 근경의 큰 나무 역시 정정하여 뭇 나무의 표상이 되고 있다. 등나무나 풀, 나무들은 이에 고무되면서 의지하였다. 그 기세가 군자가 시대를 얻어 뭇 소인을 지휘하는 것 같으니, 바로 복괘에서 양(陽)의 형통함을 말한 것이 아니겠는가.
   
아래 중앙부분. 큰 나무는 시대를 얻어 소인을 지휘
하는 듯 하다.
마지막으로 <조춘도>의 또다른 의미를 생각해보자. <조춘도>는 중국미술사에서 언제나 소개되는 작품이다. 그만큼 중국회화를 대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특정한 매력이 있어서 그럴 것이다. 잠시 동안이라도 신선의 세계에 의탁하여 몸과 정신을 자유롭게 하는 것과 구도와 배치에서의 유교적 규범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 이것은 바로 전통적인 예악(禮樂)사상의 구현이 아닐까. 예악은 유교에서 이상적인 통치술이다. 예(禮)는 사회적인 규범을 말하고, 악(樂)은 자연적인 발로를 말한다. 사회적 규범인 예는 질서를 가져다주지만 지나치면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고, 이와 반대로 악은 자발적인 표출로서 생명감을 강조하지만 지나치면 황량함으로 흐르게 된다. 따라서 예가 구속을, 악이 방종을 지양하기 위해서 각각 서로를 필요로 한다. 예와 악은 둘이면서 하나인 것이다. 통치술로서 예악은 북송시대 사대부에게 이상적 인격의 균형으로 자리 잡았다. 즉 "자신의 한 몸만을 위한 자연에 대한 욕구"를 지향하는 자연적 자아와 "임금과 어버이에 대한 충효"를 실현하려는 사회적 자아의 균형이다. 결국 <조춘도>는 한 시대의 규범이 아니라 동양의 보편성이 조형적으로 구현되어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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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송식08 북송 문동의 <묵죽도>

2009년 12월 5일 토요일

오전 6:11

   

   

현실을 살아가는 의지
  
[옛그림읽기] 문동의 <묵죽도>
   
   
  

▲ 문동, <묵죽도>(軸), 비단에 수묵, 131.6 × 105.4㎝, 臺北古宮博物院

젊어서 지하철 차창에 비친 나의 모습들이 떠오른다. 어깨는 늘어지고 얼굴은 무표정하게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 부조리한 현실에 맞부딪혀 삶의 무게에 억눌려져 있었다. 언제나 어렵고 무서운 순간들이었다. 나를 버리고 현실에 따르자니 서글프고, 현실을 외면하고 고집만 부리자니 그만큼 외롭고 힘들었다. 현실과 나, 이 두 세계를 해쳐나갈 지혜가 없을까. 그 당시에는 세월이 빨리 흘러가면 자연히 무뎌지면서 벗어나리라 생각하였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도 언제나 마주치는 절실한 문제일 줄이야. 다만 아슬아슬한 삶을 자주 음미하되, 역사에서 지혜를 품었던 선인의 모습을 보고 스스로 위안을 삼는 것이 다행스러울 뿐이다. 북송시대 묵죽화가 문동(文同, 1018-1079)의 <묵죽도>는 시대와 삶이 달라도 부조리한 현실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보여준다. 

문동은 소식(1037-1101), 미불(1053-1108)과 더불어 직업화가와 달리 관직에 있으면서 예술을 생활화한 문인화가로서 묵죽화가로 이름이 났다. 묵죽화는 문동 이전 당나라 때 이미 성행하였지만, 문동이 묵죽화를 대변하는 것처럼 언급되는 것은 중국회화사에서 그가 이룩한 삶과 예술의 경지 때문이었다. 그의 묵죽화는 대나무와 일체화된 삶에서 비롯되었다. '묵군당(墨君堂)', '죽오(竹塢)', '상균정(霜筠亭)', '차군암(此君庵)'과 같이 대나무를 상징하는 집을 지어 "아침에 대나무와 함께 노닐고 저녁에 대나무와 벗이 되었으며, 대나무 사이에서 음식을 먹고 대나무 그늘에서 누어 쉬면서", "하루라도 대나무가 없어서는 안되었다." 문동은 굴원이 난초를, 도연명이 국화를 좋아하였지만 "소쇄한 대나무의 자태를 그리는 것은 어느 누구도 나보다 뛰어나지 않다"고 자부할 정도였다. 어떤 학자가 문동에게 대나무는 '임'과 같은 존재라고 하였는데, 참으로 생각하게 하는 표현이다. 그러나 어느 '임'을 이처럼 대할 수 있을까.

문동의 <묵죽도>를 보면 일상적인 대나무 그림과 다르다. 이것을 "거꾸로 자란 대나무(倒垂竹)"라고 달리 말하는데, 대나무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면서 S형으로 휘었다. 어찌 이런 대나무가 있을까. 그는 또한 '구부러진 대나무(紆竹)', '눕혀진 대나무(偃竹)'와 같이 특이한 대나무 그림을 잘 그렸는데, 의심스럽지만 북송 시대의 회화정신에 충실하여 "대나무의 변화된 모습을 관찰하여" 사실적으로 그린 것이다. 우리의 일상경험으로 볼 때 너무 과장과 왜곡으로 비현실적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사실적인 모습을 그렸음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들은 있다.

문동은 1072년 한 겨울 능주(陵州)의 태수로 있을 때 관청 뒤 절벽에서 바위에 짓눌려 기이하게 자란 대나무 형태를 보고 「우죽기(紆竹記)」를 기록하고 이를 그렸다. 소식은 이 <우죽도>의 모본을 얻어 바위에 새겨 많은 사람들이 감상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작품은  지금 전해지지 않지만 아마 위에서 본 <묵죽도>와 거의 비슷한 형상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와 관련되어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문동의 영향을 받은 원나라 오진(吳鎭)의 <묵죽도>이다. 이는 문동의 <묵죽도>와 비슷한 구도와 모양 및 기법으로 그려졌다. 오진이 작품 아래 부분에 쓴 제발에서 이 대나무가 사실적 모습에 근거하여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지난 날 전당의 오산에 갔을 때 현묘관 방장 뒤 연못 절벽에 대나무 한 그루가 굽었다가 위로 향하고 있었다. 식재도인(이간)이 그 모습을 병풍 위에 그렸는데 지금 작품이 남아 있다. 옛날 노닐 때 그렸던 생각을 기억하면서 이를 완성하여 불노에게 보여주고 옛날 노닐면서 보았던 것을 전하려고 한다.

   

昔遊錢塘吳山之陽,玄妙觀方丈後池上絶壁,有竹一枝,俯而仰.息齋道人寫其眞于屛上,至今遺墨在焉.憶舊遊筆想而成,以示佛奴,以廣遊目云.

   

S자형으로 굽은 대나무 줄기는 차지하더라도, 대나무 잎과 마디, 그 형세가 대나무의 생동성을 보여준다. 특히 농묵과 담묵으로 대나무 잎을 그려 거리감을 표현한 것은 문동에서 시작되어 후대에 영향을 끼친 사실적인 표현법이다. 자세히 보면 대나무 줄기와 잎, 마디 등이 빠른 속도로 일시에 그려졌음을 알 수 있지만, 전체적으로 언뜻 보면 오히려 사실적인 성실함에 근거하여 차분하게 느껴진다. <묵죽도>의 매력 중 하나이다.

   

북송시대 회화는 사실주의와 이상주의의 조화라고 말해진다. 문동의 이상주의는 <묵죽도>에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문동은 "사물에 의탁하고 흥취를 깃들였으니(託物寓興)", 이상주의는 <묵죽도>에 의탁한 문동의 뜻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이 뜻은 우회적으로 문동과 아주 절실한 소식의 문장에서 알 수 있다. 소식은 문동의 그림을 "시로 다할 수 없어 넘쳐서 글씨가 되고 이것이 변하여 그림이 되었다."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시는 마음이 외물에 반응하여 밖으로 울리는 것이다. 시보다 글씨가, 글씨보다는 그림이 더 조형적이고 구체적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인 그림으로 표현해야 할 문동의 마음이 무엇이었을까. 이는 문동의 <묵죽도>를 이해하는 단서가 될 터인데, 대나무가 갖는 보편적인 덕보다도 그림으로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될 절박한 시대상황과의 상응관계에서 말해질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동양회화의 본질 하나를 알 수 있다. 동양화는 자기의 절박한 구체적인 상황과의 대화인 것이다. 

   

   

오진, <묵죽도>, 화첩, 종이에 수묵, 1350년,  40.3 × 52㎝, 臺北古宮博物院

문동이 <우죽도>와 <언죽도>를 그릴 당시는 어떤 상황이었을까. 문동은 오랫동안 지방에서 근무하다 1070년에 수도로 올라 왔다. 그러나 일년이 안되어서 한 계급 강등되는 수모를 당하였다. 이듬해 능주(陵州)의 지방관으로 부임하면서 수도를 떠났고, 1075년에는 양주(洋州)의 태수로 부임하였다. 1078년에 다시 수도로 올라왔지만, 수도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여 지방관으로 부임하기를 간청하였고, 이듬해 호주(湖州)로 부임하러 가다가 도중에 진주(陳州)의 관사에서 병으로 죽었다. 이 때가 향년 62세였다. <우죽도>는 능주(陵州)에서, <언죽도>는 양주(洋州)에 있을 때 대나무 실제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 두 대나무 그림을 그렸던 1070년대의 북송(北宋)은 구법당과 신법당이 서로 대립한 가운데 왕안석이 신법당을 이끌고 정치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신법(新法)을 행하고 있었다. 그는 심정적으로 구법당에 속하면서도 구법당과 신법당 어느 쪽에 속하여 싸우지 않았다. 그가 지방관으로 부임하기를 요구한 것도 이러한 투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고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려고 했던 것이다.

소식은 문동을 "도를 지키면서 권세를 잊고, 의를 행하면서 이익을 잊었으며, 덕을 닦으면서 명성을 잊었다. 옳지 않은 것을 행하는 것은 제후의 나라를 준다할지라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남을 미워한 적이 없고 남이 그를 미워한 적도 없었다."고 표현하였는데, 이는 너무나 점잖은 표현이다. 정작 문동은 자신을 '우죽(紆竹)'에 비유하여 시대환경에 대항하여 자신의 삶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구법당과 신법당 사이에서 외롭게 지탱하였던 문동의 삶이야말로 절벽의 바위틈에서 줄기 하나로 아슬아슬하게 자라난 우죽(紆竹)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적절한 환경을 얻어 그 생명을 다하지 못하고" "힘차게 가지를 뻗어 그 본성을 다하지 못한" '우죽'은 뜻을 펼칠 수 없는 시대에서의 문동 자신이지 않을까. 심지어 "도와 일으켜 지탱하게 하려고" 하여도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서도 생명이 위로 솟고 있으니, '우죽'은 차별적인 '임'이라기보다 일체가 된 하나, 바로 자신이라고 해야 더 적절하지 않을까. 이것은 조용한 몸부림이다.

세상이 무겁다 하더라도, 세상이 힘들다 할지라도, 어디 세상을 부정할 수 있겠는가. 세상을 받아들이되 그렇다고 나의 생명을 죽인다면 어찌 또 나의 삶이라 할 수 있겠는가. 세상에서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생명을 온전히 하는 것은 살아가는 지혜라 할 수 있다. 문동의 <묵죽도>에서 외부의 압력에 형태가 S자형으로 뒤틀려 있어도 대나무 끝이 다시 위로 곧바로 향하고 있는 것이 이를 반영한다. 문동은 '언죽'에 대해 "이 대나무는 단지 몇 척일 뿐이지만, 만 척의 기세가 있다."고 하였는데 <묵조도>에도 적용된다. <묵죽도>에서 "맑고 아득하며(淸而遠)" 소쇄(瀟灑)한 분위기에서 힘이 넘치는 것도 이 때문인 것 같다. 하기야 "토끼가 튀는 순간 솔개가 덮치는 듯한" 문동의 심적 기운으로 그린 것이니 당연하지 않을까. 이러한 생명력이 바로 문동이 표현하고자 하는 이상주의라 할 수 있다.

여기서 하나 더 생각해야 하는 것이 문동의 죽음에 대한 소식의 울부짖음이다. 문동은 1079년 정월 20일에 호주로 부임하러 가다가 진주에서 병사하였고, 소식은 그 해 4월에 호주태수로 부임하였다. 서로 만날 수 있었을 뻔한 시간이 단절되어 영영 이별의 고리가 되었으니, 운명도 참으로 기구하다. 원대 오진이 '호주죽파(湖州竹派)'라고 한 것도 이를 위안한 것인가. 소식은 7월 7일에 문동이 양주에서 원당곡(篔谷)의 '언죽'을 그려 보내준 <언죽도>를 햇빛에 말리다가 그 그림을 보고 대성통곡하였다. 백아(伯牙)가 종자기(鍾子期)가 죽자 거문고 줄을 끊어버렸던 절망감 때문일까. 앞으로 다가올 운명에 맞부딪혀 언죽의 의미를 새롭게 환기시켰기 때문일까. 소식은 바로 7월 28일에 조정비방의 죄로 체포되어 긴긴 유배를 가게 되었다. 문동의 <우죽도> 모본을 돌에 새겨 죽은 친구의 절개를 생각하면서 "굽어지되 휘지 않은 것이 대체로 이와 같구나."라고 탄식하였던 것은 소식이 앞으로의 역경에서 살아가야할 의지를 역설하는 것 같다.

문동과 소식을 말하면, 시간이 훨씬 지나 이역 고려 후기 무신정권에서 대나무 그림을 서로 주고받으면서 시를 지어 한 시대를 지냈던 정홍진(丁鴻進)과 이규보(李奎報)가 떠오른다. 이규보는 시로서 정홍진에게 대나무 그림을 구하면서 그를 문동에게 비유하면서 "그 속에 만 척의 기세가 있어 구름 밖에 멀리멀리 뻗쳤다."고 찬양하면, 정홍진은 이 시에 화답함과 동시에 그림을 그려 전달하였다. 이규보는 다시 이 시에 화답함과 함께 그림을 노래하곤 하면서 은연중에 자신을 소식에 비유하곤 하였던 것이다. 대나무 그림의 의미와 역할은 중국보다 더 인간적이고 흥겨운데, 아쉽게도 이규보의 시는 전하여도 정홍진의 대나무 그림은 전하지 않는다.

글은 그림을 설명하는 데 그친다. 어찌 문동의 <묵죽도> 의미를 다 전달할 수 있으랴. 통발은 물고기를 낚기 위한 방편일 뿐, 고기를 낚았으면 통발을 버리자고 다짐한다. 하루하루 삶의 고달픔 속에서 자신의 생명을 음미하고 그 적극적인 힘을 향유하기 위해 그냥 <묵죽도>를 묵묵히 바라보았으면 한다. 무슨 말이 필요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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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송식09 북송 말기 왕희맹의 <천리강산도>

2009년 12월 5일 토요일

오전 6:11

   

   

젊은 마음이 담은 천지의 큰 아름다움
  
[옛그림읽기] 북송 말기 왕희맹의 <천리강산도>
   
   
   
▲ 왕희맹, <천리강산도>(권), 비단에 채색, 51.3×1188cm, 북경고궁박물원
오늘날 동양의 전통회화를 보면 의아스러운 점들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많은 명작들이 나이가 들어 그렸다는 것이다. 하기야 동양화가 '노경(老境)'을 그리기 때문에 인생의 체험과 이해의 깊이가 배어나니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이에 따라 동양회화론에서 흔히 만나는 '수묵' '평담' '우연' '자연' '소쇄'와 같은 말은 발산보다 함축을, 패기보다 여유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무기력하고 자폐적인 병폐로 몰아갈 수 있는 한계도 가지고 있다. 초기 젊어서 그린 힘찬 작품에 관심이 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에 상응하게 뛰어난 작품을 만나기 쉽지가 않은데, 이런 와중에 유독 젊음이 넘치는 작품을 간혹 발견한다. 객기가 넘쳐 과시적이라 할 수 있겠지만, 오히려 포부와 야심을 내세우되 철저하게 자기 완벽성에 이르려는 종교적인 기질을 엿 볼 수 있다. 사실 순수란 완벽함에 대한 지향이 아니겠는가. 북송 말기 왕희맹이 그린 <강산천리도>가 그 중 하나라 생각한다.
현대미술사학자 중 한사람은 이 작품을 조백구의 <강산추색도>, 조백숙의 <만송금궐도>와 함께 송대 청록산수 중 걸작으로 뽑고 있지만, 아쉽게도 기록을 남기길 좋아했던 중국인 고대 문헌에는 왕희맹에 관한 것이 없다. 오직 이 <천리강산도>만이 세상에 전할 뿐이다. 여기에도 화가의 서명이 없어서 그마저 잊어질 뻔하였다. 다행히 북종 말기 휘종 때 권력을 남용한 재상 채경(蔡京)이 작품 끝에 다음과 같은 놀라운 사실을 기록해 놓았다.
   
정화 3년(1113년) 윤 4월 1일에 (휘종이) 하사하다. 왕희맹은 나이가 18세이다. 앞서 한림도화원의 생도가 되어 궁궐의 서고에 들어와 종종 그림을 (그려) 받쳤지만 아주 뛰어나지는 않았다. 임금이 그 재능이 가르칠만하다는 것을 알고 마침내 그를 가르치면서 직접 화법을 전수하였다. (왕희맹이) 반년이 안 되어 마침내 이 작품을 그려 올리자 임금이 기뻐하고 나에게 하사하였다. 나는 천하의 선비가 그것을 만들어야 할 뿐이라고 말하련다.
   
政和三年閏四月一日賜. 希孟年十八歲, 昔在畵學爲生徒, 召入禁中書庫, 數以畵獻, 未甚工. 上知其性可敎, 遂誨諭之, 親授其法, 不逾半載, 乃以此圖進, 上嘉之, 因以賜臣, 京謂天下士在作之而已.
   
길이가 10미터가 넘는 대작 <천리강산도>를 왕희맹이 18세 때 그렸다고 하니 놀라울 뿐이다. 젊어서 그렸다고 작품이 단조로운 것이 아니다. 나이에 맞지 않게 넓고 깊은 맛을 간직하고 있다. <천리강산도> 끝에 따로 제발을 쓴 원나라 태학사 김부광(金溥光)은 15세부터 이 작품을 얻어 백 번 넘게 감상하였는데, 여전히 볼 때마다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다고 찬탄하였다. 그 만큼 함축미가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먼저 선명한 색채와 웅위하고 요원한 구상이 단도직입적으로 압도한다. 김부광은 왕희맹 전후로 활동한 왕진경(王晉卿)이나 조천리(趙千里)도 이 경지에 이르지 못한다고 단정하면서 "단연 영원히 독보적이고, 하늘의 뭇별 속에 외롭게 있는 달"과 같은 존재라 하였다. 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를 한 것이다. 이 작품은 휘종이 지도하였고 또 만족하였던 것을 보아서 그의 회화이념이 구현되었던 것이라 할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이를 성취한 것은 왕희맹 자신임을 부정할 수 없다.
   
   
왕희맹, <천리강산도>(권), 부분
김부광도 말하였듯이 이 작품의 특징은 선명한 색채와 웅위하고 요원한 산세들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천리강산도>를 언뜻 볼 때 청색과 녹색을 위주로 한 색채 표현이 시각적으로 먼저 강한 인상을 주고 있다. 이러한 작품을 청록산수라고 하는데, 전통산수화에서 수묵산수와 더불어 이대 양식을 이루는 것이다. 이 전통은 위진남북조 시대를 거쳐 당나라 이사훈 이소도 부자에 이르러 절정에 이르렀지만, 그 이후 오대 형호(荊浩)와 북송시대 이성(李成) 곽희(郭熙)로 이어지면서 수묵산수가 발전하면서 점차로 쇠퇴하였다. 그러나 휘종은 한림도화원을 설치하여 화원을 직접 가르치고 회화적 이념을 제시하면서 그 중 하나로 전통화법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도록 하였다. 휘종이 전통적인 청록산수를 왕희맹에게 몸소 가르쳐 새로운 경지에 이르도록 한 것이다.
청록산수는 먼 산을 군청 계열로 앞쪽의 주산(主山)을 녹청 계열로 채색하는 것이 일반적인 방법이다. 그러나 <천리강산도>에서는 자석(赭石)이나 주사(朱砂)와 같은 붉은 안료로 바탕색을 수십 번 덧칠하여 깊은 맛을 우려낸 뒤, 섬세하고 예리한 필치로 산의 형상을 그리고 산 정상을 석청과 석록으로 고르게 칠하였다. 시각적으로는 산기슭과 언덕, 토파 등에 칠한 붉은 색이 강렬한 청녹색과 서로 조화를 이룬다. 특히 바탕색은 땅 밑에서 상서로운 광채를 발산하면서 신성한 땅을 상징하는 것 같다. "의미 있는 형식"은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또 다른  특징인 "웅위하고 요원한" 산세들에도 회화사적 맥락이 내재되어 있다. "웅위하고 요원한" 것은 고원법과 평원법을 달리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숭고한 산세와 아득한 산의 전개 사이에는 요원한 계곡의 깊이가 표출되어 심원법도 강조되고 있으니 북송시대 곽희의 <조춘도>에서 보이는 삼원법이 모두 구현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비록 휘종은 곽희의 산수를 싫어했지만 곽희가 배운 이성(李成)을 최고의 산수화가로 꼽았기 때문에 화북산수의 영향은 여전히 이어졌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러한 것에 새로운 요소가 발견된다. 그것은 작품 형식에서 기인하는 면도 있다. 화북산수가 주로 산의 숭고한 기세를 강조하다보니 수직적인 구도를 주로 사용하고 이를 담을 수 있는 걸개그림 형식으로 주로 많이 그려졌다. 그런데 보시다시피 <천리강산도>는 10미터가 넘는 두루마리 그림이어서 자연적으로 횡으로 전개되는 자연의 전개가 강조되었다. 작품은 전체적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전개되는데, 산맥이 끝나면 근원을 알 수 없는 무한한 강과 만나고 강 너머에서 산의 기세가 이를 연결하되, 무한한 경계로 확장되면서 전개된다.
이와 더불어 나무, 언덕, 강가의 토파 등을 표현한 것이 평온하고 안정감 있는 강남산수를 보여주고 있다. 강남산수는 오대 때 남당의 동원이 강남의 실경을 바탕으로 그린 것으로 산수화에서 화북산수와 짝을 이루는 이대 양식이다. 북송 시대로 오면서 화북산수의 일방적인 성행에 따라 쇠미해졌지만, 휘종 때 미불이 중심이 되어 전국적인 서화를 수집하여 『선화화보』를 편찬하자, 강남산수를 새롭게 재인식할 수 있었다. 미불은 동원의 그림을 "평담천진(平澹天眞)"이 많다고 극찬을 할 정도였으니, 이러한 분위기 때문인지 이 작품에서 강남산수의 평담천진스러운 자연의 전개를 볼 수 있다. 
<천리강산도>에서 강남산수와 화북산수의 통일은 작품 구성에서 소(疏)와 밀(密)의 관계로 이어진다. 강남산수가 나무와 강, 바다로 이어지는 것이 느슨하고 아득한 여유를 갖는데, 이는 소(疏)에 해당한다. 이어서 화북산수에서처럼 산세가 중첩되어 험준하게 솟은 밀집된 경관이 나오는데, 이는 밀(密)이 된다. 결국 <천리강산도>는 강남산수와 화북산수가 소와 밀로서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작품 전체에 변화를 주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조백구, <강산추색도>(권), 비단에 채색, 56.6×323.2cm, 북경고궁박물원
여기에서 또 한번 비약하여 강남산수와 화북산수의 조화를 중국 전 국토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중국 국토에서 양자강을 경계로 그 이남을 강남이라 하고 이를 그린 것이 강산산수이며 그 이북을 화북이라 하며 그 실경을 그린 것이 화북산수이기 때문에, 강남산수와 화북산수의 조화는 바로 중국 전국토를 상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은 단순히 전국토를 묘사한 것이 아니라, 화려한 조형적 색감으로 볼 때 환상적인 이상적인 세계를 상징한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것도 휘종이 심취하였던 선경(仙境)으로 말이다. 어떻게 보면 휘종이 이 작품을 보고 가상하게 여겼다는 것이 바로 자신의 국토를 이상화시켜 보인 갸륵한 생각 때문인지 모르겠다. 누구보다 휘종의 마음을 잘 읽는 간신 채경(蔡京)이 이러한 의도를 알아채서 이제는 "천하의 선비가 그것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련다"고 신하들의 실천을 강조하였으니, 이는 재상으로서도 할 수 있는 말이지만 임금의 환심을 사기에 너무나 적절한 말이다.
우리는 이 작품을 천천히 그리고 구체적으로 분석하여 보면서 마지막으로 다시 전체를 관조하게 될 것이다. 간혹 우리 마음이 담아내기에 너무 큰 것처럼 보이기도 하겠지만, 나도 모르게 무한한 자연의 경계가 직감적으로 들어오면서 자득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어떻게 18세 나이로 이렇게 웅위한 세계를 마음에 담을 수 있었을까. 놀라움을 금치 못할 뿐이다. 장자에서 말하는 '천지의 큰 아름다움(天地之大美)'이 연상된다.
   
가을이 되자 수많은 하천이 황하로 흘러들어 물이 넘쳐 그 경계가 아득하였다. 황하를 지키는 신 하백(河伯)이 이를 보고 기뻐하면서 천하의 미가 모두 여기에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황하가 흘러 바다에 이르자 하백은 더 큰 세계의 무한함을 보고 탄식하였다. 장자의 미학은 이처럼 시공을 초월하여 무한히 펼쳐지는 것을 천지의 대미(大美)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광활한 경계는 자신의 경험과 이해를 통해 주관적인 마음에 의해 규정된다. 그래서 <천리강산도>에서 표현된 '천지의 큰 아름다움(天地之大美)'을 감탄하기도 하지만, 이처럼 광활하고 무한하게 전개되는 경계를 그릴 수 있었던 젊은이의 마음 폭에 더 놀라는 것이다. 참으로 여기에 어디 하찮은 인간적 관심이 스며들어갈 수 있겠는가. 
여기서 <천리강산도>나 청록산수의 외로움을 달래나 볼까 한다. 그렇게 휘종의 이상을 시각화 하여 청록산수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지만, 북종 말기 휘종 때 당시 유전하는 역대 서화를 모아 화가전과 작품목록을 기록한 『선화화보』에는 그에 대한 어떠한 기록이나 작품이 실려 있지 않았으니, 얼마나 외로웠을까. 그와 같이 화려하고 섬세한 기교로 그린 작품들을 "현란하게 눈을 빼앗는 것으로써 세상에 자랑하는" '남을 위한 그림'으로 매도하였으니, 얼마나 서러웠을까. 중국 산수화의 흐름을 남종화와 북종화로 나누면서, 수묵화가 많은 남종화를 선종(禪宗)에서 한번에 초월하여 곧바로 부처의 경지에 들어가는 돈오(頓悟)에 비유한 것과 달리, 청록산수가 위주가 되는 북종화를 수련방식이 너무 금욕적이고 고통스러우며 긴 시간을 들여 수행을 쌓아야 비로소 보살이 되는 것에 비유하여 무시하였으니, 아마도 섭섭함을 금치 못하였을 것 같다.
   
성실하게 묘사하여 세상에 충실하게 다가가려 했지만 오히려 "사람이 사물에 의해 가려지면 세속과 교제하게 되고, 사람이 사물에 의해서 주제를 당하게 된다면 마음은 수고롭게 된다. 새기 듯 그림을 그리는 것에 마음을 수고롭게 하면 스스로 훼손되고, 필묵에 세속적인 것에 의해 가려지면 스스로 구속된다"고 비하하였으니, 해도 너무하는 것이 아닌가. 그 고통을 어찌 감당하였을까. 심지어 "세밀하고 조심스럽게 하여 조물주의 심부름꾼이 되어" "수명이 단축될 수 있다"고까지 할 정도이니, 이쯤 되면 막 다루는 것인데, 그 서글픔을 어찌 이루다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왕희맹이 다시 살아난다 해도 아마도 이런 편견에 무심하였을 것이다. 한번 웃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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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송식10 원나라 황공망의 <부춘산거도>

2009년 12월 5일 토요일

오전 6:12

   

흥을 타서 오고, 흥이 끝나 돌아가다
  
[옛그림읽기] 원나라 황공망의 <부춘산거도>

   

   

▲ 황공망, <부춘산거도>(卷) 부분 1, 2, 3, 元, 종이에 수묵, 33×639.9㎝, 臺北古宮博物院.

예전에 한 미술사학자가 그림을 소개하면서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한 적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즐겨 사용하면서 '아는' 것을 충족시켜주는 미술서적들이 다수 출판되곤 하였고 책 제목으로도 나왔다. 이상스럽게도 동양화의 경우 알면 알수록 뭔가 작품과 자꾸 멀어진다는 생각이 드는데, 왜 그럴까. 혹시나 '안다'는 말이 그림을 올바르게 감상하는 데 벽을 만들어 놓는 것이 아닐까. 물론 작품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가지 사실은 그림을 감상하는 데 도움을 주지만, 이는 외적인 것일 뿐 내적인 즐거움의 경계로 들어가기 어렵게 하는 것 같다. 하기야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니", 아는 것은 즐기는 것에서 두 단계나 떨어져 있지 않은가. 결국 즐거움으로 이루어진 그림의 감상 역시 자신의 즐거움으로 들어가야 한다.

북송시대 소식이 시원(試院)에서 갑자기 흥이 일어나 대나무를 그리려고 할 때 마침 책상에 먹이 없어 손에 쥔 주필(朱筆)로 그렸다. 어떤 이가 이를 보고 세상에 주죽(朱竹)도 있는가라고 묻자, 소식은 그렇다면 세상에 묵죽(墨竹)이 있는가라고 되물었다고 한다. 이것은 대나무의 예이고 산수화인 경우는 명대말기 동기창이 "그림에 흥을 의탁하고 즐기는 것은 황공망에서 시작하여 이 유파를 열어 놓았다."고 하였으니, 좀 더 시간이 지나 원대 말기에 와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겠다. 동기창은 황공망의 <부춘산거도(富春山居圖)>를 화선실(畵禪室)에 수장하면서 자신이 남종화의 시조로 세웠던 왕유의 <설강도(雪江圖)>와 함께 서로 배치하고 "나의 스승이요, 나의 스승이요"라고 외쳤다. 그의 영향을 받은 청초 남종정통파화로 인해 청나라에는 "집집마다 자구(子久, 황공망의 자)요, 가옥마다 대치(大癡, 황공망의 호)다"고 할 정도였다. 심지어 조선 말기 김정희가 그의 제자 운림산방 허유(許維)의 호를 황공망의 대치(大癡)에 상응해서 소치(小癡)라고 하였으니, 그 명성을 가히 알 수 있게 한다.

그는 "어려서 큰 뜻을 품은" 신동이었지만 젊어서 하급관리로 지냈고, 그것도 상관 장려(張閭)가 죄를 짓자 함께 연루되어 투옥되었다. 출옥한 뒤에 도교의 전진교(全眞敎)에 투신하고 주로 강소성이나 절강성의 우산(虞山)부춘산 및 소주항주 일대를 유랑하면서 점을 치며 생계를 하였다. 가난하고 하급관료였던 그에게 여문환(姚文奐)고영(顧瑛)과 같은 고급관료, 왕봉(王逢)도종의(陶宗儀)와 같은 문인 은사, 금월암(金月巖)장삼풍(張三豊)냉겸(冷謙)장우(張雨)와 같은 고사들이 많았던 것을 보아, 그는 단순한 화가가 아니라 주위 사람을 끌어당기는 인간적인 매력이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여기에는 그의 재능과 학식, 인격이 내포되어 있다. 원나라 문장가 대표원(戴表元)이 「황대치상찬(黃大癡像讚)」에서 그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몸에는 백년을 걱정하는 마음이 있고, 가정에는 사소한 즐거움이 없었다. 대체로 기개는 연나라의 조나라 자객 형가와 같았고, 그 광달함은 진송시대 취객과 같았다. 비바람이 불면 문을 닫고 노래를 읊조리며 자유롭게 지내면서 붓을 잡고 글을 쓰고자 하였으며, 또한 장차 공자와 맹자의 학문을 하려고 하였다. 이것이 어찌 평범한 화가이겠는가.

   

身有百世之, 家無擔石之樂. 蓋其俠似燕趙劍客, 其達似晉宋酒徒, 至于風雨塞門, 呻吟盤

欲援筆而著書, 又將爲齊魯之學, 此豈尋常畵史也哉.

   

   

황공망, <섬계방대도>(軸), 元, 종이에 수묵,

75.5×56㎝, 雲南省博物館

그렇다면 "흥을 의탁하고 즐기는 것"과 황공망의 작품에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황공망이 전진교에 입문하여 자유롭게 유람하면서 산에 은거한 자신의 정신세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품이 있다. 81세에 그린 <섬계방대도(剡溪訪戴圖)>가 그것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동진시대 왕휘지(王徽之)가 대규(戴逵)를 방문한 유명한 일화를 그렸다. 서성(書聖) 왕희지 아들 왕휘지는 산음(山陰)에서 은거하다가 겨울 어느 날 대설이 내리고 막 개인 밤, 홀연히 친구 대규가 그리워져 마침내 몇 밤을 거쳐 배를 타고 찾아갔다. 그러나 배가 대규 집 앞에 이르자 도리어 만나지 않고 되돌아갔다.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묻자 "흥을 타서 왔고, 흥이 끝나 돌아갔는데, 어찌 반드시 대규를 만날 필요가 있느냐"고 반문하였다고 한다. <섬계방대도(剡溪訪戴圖)>는 구속되지 않고 자유로운 왕휘지의 성격과 초연한 태도를 그린 것이지만, 사실은 고인에 대한 흠모인 동시에 이에 의탁한 황공망 자신의 자유로운 마음을 그린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흥을 타서 왔고, 흥이 끝나 돌아가는" 것을 황공망이 회화적으로 완벽하게 구사한 것이 <부춘산거도>이다. 82세 때 그린 것인데, 황공망의 제발에는 이 작품을 소유하게 된 친구이자 도사인 정무용(鄭無用)과의 관계, 제작 과정 및 작품 마무리 등 작품을 둘러싸고 있었던 여러 사연을 기록하고 있다. 당연히 이는 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지정 7년(1347), 나는 부춘산으로 돌아가 기거하였는데, 도사 정무용과 함께 갔다. 한가한 날 남루에서 붓을 잡아 이 작품을 그렸다. 흥이 이르면, 나도 모르게 움직여 이와 같이 구도를 잡고 화폭을 이어 만들어 그려나갔다. 3,4년간 열람하여 보니 (아직까지) 완전히 갖추지 않았는데, 대개 (내가) 산속에 있다가도 구름처럼 밖으로 노닐었기 때문에 그러하였다. 지금은 다만 (이 작품을) 가방에 넣고 (다니면서) 아침저녁으로 시간이 그리고 있는데, 무용사가 이 작품을 교묘하게 가져가거나 함부로 빼앗아가는 사람이 있을까 지나치게 걱정하여 먼저 두루마리 끝에 기록하여 그 성취의 어려움을 알게 하기를 바랬다. 지정 10년(1350)에 …… 대치학인이 운간 하씨의 지지당에서 쓰다.

   

至正七年(1347), 僕歸富春山居, 無用師偕往. 暇日於南樓援筆寫成此卷. 興之所至, 不覺亹亹, 布置如許, 逐旋塡箚(札), 閱三四載, 未得完備, 盖因留在山中, 而雲遊在外故爾. 今特取回行李中, 早晩得暇, 當爲著筆, 無用過慮, 有巧取豪者, 卑先識卷末, 庶使知其成就之亂也. 十年(1350)……  大癡學人書于雲間夏氏知止堂.

   

<부춘산거도>는 1347년에 시작하여 1350년에 도사 정무용(鄭無用)의 재촉에 의해 마무리 하였으니 만 4년에 걸쳐 그린 작품이다. 청초 사왕오운(四王吳惲) 중 한 사람인 왕원기(王原祁)는 이보다 더 7년에 걸쳐 그렸다고 하였다. 사실관계를 떠나 그만큼 신중하면서 힘들게 그렸다는 것을 말한 것 같다. 제발 중에 "화폭을 이어 만들어 그려나갔다.(逐旋塡箚)"는 것은 새로운 형식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전에는 주로 비단에 많이 그려졌지만 원대에는 화선지에 그린 것이 일반화되었다. 화선지를 이어서 계속 그려나가면서 오랜 시간을 두고 가필을 하였던 흔적들이 보인다. 아마 정무용이 재촉하지 않았다면 더 오랫동안 그려 길이도 훨씬 길었을 것이며 그것도 미완성 상태로 남아 있을 것이 분명하다. 하기야 지금도 작품 앞부분과 뒷부분에 먼 산을 대충 그리고 빠르게 칠을 한 것을 보면 미완성으로 보이긴 한다.

<부춘산거도>는 황공망 자신이 말년에 은거한 실경을 그린 것이다. 하지만 그는 <추산초은도(秋山招隱圖)>에서 1347년 이전에 이미 부춘산에 집을 짓고 봄과 가을에 향을 피우고 차를 다리며 노닐거나 쉬었는데 "자신의 세계가 세속에 있는지 모를" 정도여서 그 집을 '소통천(小洞天, 작은 신선의 집)'으로 하였다고 제발을 쓰고 있으니, 부춘산은 실제이면서 이상화된 곳이기도 하다. 문제는 실제와 이상을 이어주는 구체적인 상황을 어떻게 설정하고 있는가이다. 이상은 공허하고 현실은 세속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를 역사에서 찾았다. 부춘산은 후한 때 은자 엄광(嚴光)이 은거하였던 곳이어서 그에게 현실이면서 이상이었고 또한 역사적인 인물과 영적 교감을 하는 구체적인 장소성을 갖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엄광은 광무제 유수(劉秀)와 어릴 적 함께 뛰놀고 공부한 사이였다. 그러나 광무제가 제위에 오르자 산으로 숨었다. 광무제가 찾아서 조정으로 부르자, 광무제를 예전 친구사이처럼 대하면서 어떠한 예를 갖추지 않았다. 또한 광무제와 함께 밤새 이야기를 나누다 함께 잠에 들면서 광무제의 배 위에 다리를 걸친 채 태연히 자기도 했다. 바깥세상의 규범이나 시선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광무제가 벼슬을 내리려고 하자 부춘산(富春山)에 들어가 낚시하면서 은거해 버렸다.

   

살도자, <엄릉조대도>>(軸),

1339년, 종이에 수묵, 26.7×

31.8㎝, 臺北古宮博物院 

황공망과 동시대 살았던 살도자(薩都刺)가 1339년에 그린 <엄릉조대도(嚴陵釣臺圖)>가 현재 전한다. 이는 황공망의 친구이기도 한 도사 냉겸(冷謙)과 엄릉을 유람한 후에 그린 것인데, 엄릉조대(嚴陵釣臺)는 엄광이 낚시질 하던 곳을 가리킨다. 위 제발에 "엄릉(엄광이 은거하던 곳)의 조대에는 자취가 없고, 언덕 위 정자에는 은자의 이름만 있구나.釣竿臺上無形迹, 丘壑亭中有隱名"라고 노래하였다. <엄릉조대도(嚴陵釣臺圖)>에서 오른쪽 언덕 위 조대가 적적하게 보이고 왼쪽 아래 어부가 낚시하는 모습이 있다. 이는 황공망의 <부춘산거도>에서도 보이는 것이어서 아마도 원대 말기에 지식인들 사이에 널리 애호된 정신적 안식처였던 것 같다.

그렇다면 "흥을 타서 왔고, 흥이 끝나 돌아가는" 것을 <부춘산거도>에서 어떻게 회화적으로 구현하고 있을까. 이는 작업 태도와 구도 및 필선에 주안점을 둘 수 있다. 황공망은 흥이 이르자 단번에 전체 구도를 잡고 계속해서 그려나갔다. 흥이 끝나면 무리하게 계속 그린 것이 아니라 밖으로 자유롭게 여행하다가 다시 흥이 일어나면 고치고 더해 그렸던 것이다. 이른바 "흥을 타서 왔고, 흥이 끝나 돌아가는" 것의 연속이었다. 이것은 구도와 필선에 반영되어 나타난다. 구도에서 낮은 언덕과 모래섬, 그리고 나무가 횡으로 느슨하게 이어지는 소(疏)와, 중첩된 산과 무거운 바위와 언덕이 빽빽하게 모여 있는 밀(密)이 서로 긴밀하게 유기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다. 황공망은 자신의 화론서 「사산수결(寫山水訣)」에서 북송시대 곽희와 다른 삼원법을 언급하였다. 아래에서부터 끝없이 연결되는 평원, 근경 너머 빈 공간이 열리면서 서로 대치하는 활원(闊遠), 그리고 산 너머 먼 경치를 고원(高遠)이라 하였는데, 이 삼원이 시선의 자연스런 전개에 따라 화면 구성에서의 밀(密)소(疏)와 잘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 작품의 백미는 약동하는 필선에 있다. 흥에 따른 마음의 움직임이 필선을 통해 잘 드러난다. 필선은 즉흥적이면서 침착하게 흐른다. 의도된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변화에 반응하여" 그려나가 자연스럽다. 여기에 긴 작업과정에 따라 옅은 먹 위에 짙은 먹을 쓰고 젖은 붓질 위에 다시 마른 붓질을 더함으로써 필치에 풍부한 질감과 표면의 강렬한 촉감이 잘 나타난다. 그는 산수의 법이 사(寫)자와 같다고 하였는데, 산수화는 형상을 묘(描)하는 것이 아니라 필선을 통해 자신의 자유로운 마음이 유동하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역설하는 것 같다. "무한한 오묘함이 수렴되는" 필묵의 움직임에 황공망의 자유정신을 느낄 수 있지 않은가. 명대의 대문호 왕세정(王世貞)은 산수화의 흐름을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여기에서 황공망에 와서 새롭게 변하였다는 것은 이를 말하는 것일 것이다.

   

산수화는 당나라 이사훈이소도에 와서 변하였고, 오대 형호와 관동, 동원과 거연에 와서 또 변하였으며, 북송대 이성과 범관에서 또 다시 변하였다. 남송 때 유송년이당마원하규에 와서 또 변하였고, 원나라 황공망과 왕몽에 와서 또 한번 변하였다.

   

<부춘산거도>가 후대 일반인에게 친숙하게 다가간 것은 작품의 흥망성쇠와 작품 진위에 대한 논쟁 때문인지 모르겠다. 이 작품은 정무용 이후 어느 곳으로 유전하였는지 알 수 없지만, 명대 성화(成化) 연간에 오파 영수 심주(沈周)가 소장하게 되었다. 이는 다시 홍치 원년(1487)에 번절추(樊節推)가 소장하였고, 융경(隆慶) 4년(1570)에는 담지윤(談志尹) 수중에 흘러들어갔다. 그 이후 안국(安國)의 후예 안소방(安紹方)의 손을 거쳐 만역 24년(1596)에 동기창이 구입하였다. 동기창은 일천 금에 오정지(吾正志)에게 저당 잡혔고, 오정지 사후에는 셋째 아들 오홍유(吳洪裕)에게 돌아갔다. 오홍유는 이 작품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임종 때 자신과 함께 화장하도록 하였다. 조카 오정도(吳貞度)가 옆에서 지켜보다가 안타까워서 다른 작품으로 바꾸어버렸지만 이미 앞부분이 타버려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 상태였다. 이 이후 이 두 부분의 작품은 각각 다른 길을 걷었다. 앞부분은 <잉산도(剩山圖)>라고 부르게 되면서 명나라 말기 오기정(吳其貞)이 수장하였다가 지금 중국 절강성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우리가 보고 있는 <부춘산거도>는 이와 다른 부분으로 청나라 건륭 때 안기(安岐)를 거쳐 건륭 황제가 소장하게 되었고, 지금 대만 고궁박물원에 소장되어 있다. 현대미술사학자인 한 사람이 "황씨 자손들"이 두 그림이 합치된 완전한 것을 감상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하였는데, 중국인에게 이 작품의 존재를 가름할 수 있는 말이다.

참으로 흥미로운 것은 현재 대만 고궁박물원에는 황공망의 <부춘산거도>에 두 종류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는 정무용이 소장한 것으로 이를 <무용사권>이라 부르고, 다른 하나는 자명(子明)이 소장한 것으로 <자명권>이라 부른다. <자명권>은 <무용사권>보다 1년 앞서 황궁으로 들어가 건륭황제의 애호를 받아 여기에는 무려 53개나 되는 건륭의 제발이 있다. 과연 어느 것이 진품인가. 고궁박물원 연구원들은 운필이 소심한 <자명권>보다 필묵이 자연스럽고 소박한 <무용사권>에 손을 들어 주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현대 동양철학자 서복관(徐復觀) 선생은 고궁박물원 측의 독선을 공격하면서 건륭황제의 권위를 아울러 강조하고 <자명권>이 진품이라고 주장하였다. 집착이나 시비가 붙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지만, 결국 일이란 전문가의 권위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

   

   

황공망, <잉산도>, 元, 종이에 수묵,  浙江省博物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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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송식11 명대 심주의 <야좌도>

2009년 12월 5일 토요일

오전 6:15

   

   

가을은 은미하고 낯설게 온다
  
[옛그림읽기] 명대 심주의 <야좌도>
    
   
   
▲ 심주, <야좌도>, 1492년, 종이에 담채, 84.8×21.8cm, 대북 고궁미술원
참으로 무더웠다. 왜 그리 짜증나고 밖이 시끄러웠는지 모르겠다. 유난히 이번 여름에는 마음이 밖으로 열려 사물에 의해 움직여지고 육신이 이를 쫓아 고달팠던 것 같다. 어제는 비바람이 몰아쳐 잠에서 깨어나 멀뚱멀뚱 밖을 쳐다보았다. 비바람이 몰아친다. 우뢰 같기도 하고, 괴성 같기도 하고, 신음 소리 같기도 한 바람이 밖에서 음산하게 들리는데, 창틈으로 살짝 들어와 살을 스치고 맴돌아가는 감촉은 왜 그렇게 낯설게 느껴지는가. 나도 모르게 가을이 "어찌하여 왔는가"라고 탄식한다. 아울러 북송시대 구양수의 「추성부」를 떠 올리고, 명대 문인화가 심주의 <야좌도>를 회상하면서 그 내용과 상황이 바로 이것인가라고 반문해 본다.
「추성부」는 구양수가 가을이 되어 고요히 서재에 앉아서 책을 읽다가 바깥에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를 듣고 감흥이 일어 쓴 글이다. 은미하고 낯설게 다가온 가을에 대한 단상이 절실하고 감동적이어서 이후 그림으로 많이 그려졌다. 우리에겐 정선의 <인곡유거>나 김홍도가 61세에 그린 <추성부도>를 통해 이미 친숙해져 있다. 이 그림들에서 창을 통해 서재에서 책을 덮고 바람소리에 귀기울이며 생각에 잠긴 모습이 보인다. 집 주위에는 뒤틀리거나 휘어지거나 꺾어져 있는 나무 모습을 실감나게 표현하여 바람을 형용하고 있다. 시가 화제(畵題)가 되었지만, 그림은 다시 시를 떠올리면서 형상적 사유를 강화시킨다. <인곡유거>가 "산천이 적적하고 고요한" 가을을 그린 것이라면, <추성부도>는 "만물이 이미 늙어서 슬퍼하고 상심하는" "살륙(夷)"의 가을을 그린 것 같다. 두 작품 다 이지적인 중국 그림보다 감성적이고 섬세한 정조가 흐른다.
심주의 <야좌도>는 심사정의 <방심석전산수도>와 비슷한 구도와 화풍으로 그려졌는데, 정선이나 김홍도와는 다른 맛을 느낄 수 있다. 이것 역시 구양수의 「추성부」를 따라  66세가 되던 해 가을에 그린 것이다. 다만 작품 상단에 「추성부」 대신 자신이 밤을 지새워 새벽을 맞이하면서 가을이 온 것에 대한 여러 생각과 깨달음을 기록하고, 하단에 그 과정 속에 있는 자신을 그렸다. 얼핏 보면 작품에서 글이 있는 상단과 그림이 있는 하단이 각각 반씩 차지하면서 글이 그림 감상에 장애가 되는 듯하다. 그러나 그림을 보다가 글을 읽고 글을 읽다가 다시 그림을 보면, "그림 속에 시가 있고" "시 속에 그림이 있어서" 어느덧 하나가 되어 더 큰 형상세계에서 노닐게 됨을 느낄 것이다.
원래 그림과 글은 한 몸이었다가 "그림은 형태를 전달하기 위해서, 글은 뜻을 전하기 위해서" 서로 분화되었었다. 서양 근대 레싱이 문학과 그림을 각각 분리시켜 이와 유사한 견해를 제시하였다. 그림이 선과 색채를 통해 공간 속에 정지된 형태를 묘사하기 때문에 사물의 운동과 변화 및 플롯을 다루기 부적절한 반면에, 시는 언어와 소리를 통해 시간적으로 지속되는 동작을 서술하기 때문에 정지된 물체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기 적절하지 못하다고 하였다. 위진시대 문학가 육기(陸機)가 "사물을 기술하는 것으로는 말보다 큰 것이 없고, 형태를 보존시키는 것으로는 그림보다 좋은 것이 없다"고 한 것과 상통한 면이 있다.
서양에서는 그림과 시가 두 갈레로 길을 달리하여 전개되었다면, 동양에서는 문인화에서 다시 하나로 뭉쳤다. 다만 시간적이면서 공간적인 서예가 여기에 함께 한다. 동양에서 시,서,화 삼절(三絶)을 가장 이상적인 것으로 생각하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본다. 서예를 통해 공간예술인 그림과 시간예술인 시가 하나로 연결되는 것이다. 아마도 <야좌도>는 시,서,화 삼절의 절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심사정, <방심석전산수>, 1758년,
종이에 담채, 129.4×61.2cm, 국립
광주박물관
'야좌'란 말은 밤을 지새운다는 의미이다. 구양수의 「추성부」가 책을 읽다가 밖의 소리에 놀라 생각에 잠긴 것인 반면에, 「야좌기」는 가을밤 잠에서 깨어나 다시 잠을 청하였지만 오히려 정신이 명료해져 이리저리 뒤척이며 새벽을 맞이하다가 마침내 마음의 평정을 얻었음을 노래한 것이다. 사실 이 글 이면에 심주가 잠 못 이루는 근심이 있었다. 그는 생애동안 벼슬하지 않았다. 다만 고향 소주 북쪽 교외 상성리에서 명예직으로서 세금 징수와 수송을 책임지는 양장(糧長)을 맡았다. 의무감과 부담감만이 가중되는 자리라, 이에 따라 관리와 농민 사이에서 갈등도 많았을 것 같다. 특히 흉년인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였을 것이다. 때마침 <야좌도>가 그려진 그해에 홍수가 나 흉년이 들었다. 그의 「주효부가(周孝婦歌)」에서 농민에 대한 아픔을 유추해서 충분히 생각할 수 있으리라.
이는 주옥(周玉)이란 사내에게 시집온 왕(王)부인 이야기다. 그녀는 지아비가 죽은 후 가난한 집안 살림에도 시어머니를 지극히 모셨다. 그런데 오흥 일대에 홍수가 나 가옥과 논밭이 파괴되었고 설상가상 기근까지 들었다. 왕부인은 기동이 불편하신 시어머니를 등에 업고 음식을 구걸하러 다녔다. 간신히 얻은 음식은 깨끗한 부분은 시어머니에게 드리고 자신은 지저분한 음식을 먹었다. 이러한 모습을 보고 시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면서 내가 살면 얼마나 살겠는가, 그러니 나를 버리고 앞일을 도모하도록 하라고 하자, 왕부인은 자기가 살아 있는 한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다짐하면서 서로 손을 맞잡고 울었다고 한다. 이러한 소문을 들은 심주는 두 명의 하인을 데리고 가서 보았다. 시어머니든 며느리든 모두 혈색이 없을 정도여서, 그야말로 측은지심이 들었다. 심주 자신도 홍수 피해로 "문장을 팔아" 살아야 할 어려운 처지임에도 달마다 곡식 두 말씩 나누어 주었다. 오흥의 홍수는 해마다 일어나는 현상이지만 이 해의 참상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주효부가(周孝婦歌)」는 심주의 인간적인 면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대홍수로 인한 가산 경영의 어려움, 교활하고 잔악한 관리, 파탄에 빠진 서민 사이에서 심주의 갈등과 괴로움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심주는 가을을 맞아 자신에로 돌아와 마음의 평정을 찾았다. 작품을 보면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밤을 지새우는 자신의 모습에서 평정을 얻고 새벽을 맞는 순간을 묘사하여 그 긴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새벽안개가 자욱한 계곡에 나무로 둘러싸인 가옥이 보인다. 특히 근경 언덕 위 두 나무를 왼쪽으로 가로눕게 한 것은 보는 사람의 시선을 작품 가운데 가옥으로 집중하게 한다. 가옥 안에는 책상다리를 하고 허공을 쳐다보는 심주 자신이 있다. 우리는 이 심주 모습에 의탁하여 주위를 보고 느끼고 들을 수 있다. 바람 소리, 물소리, 개소리, 북소리, 종소리, 촉촉하게 스며드는 안개, 살을 감도는 한기 등등. 그리고 이쯤해서 자연스럽게 상단 문장을 읽게 된다.
   
서늘한 밤, 잠에 깊이 들었다가,  /  한 밤에 깨었다. / 정신이 또렷하여 다시 잠을 잘 수가 없어, / 바로 옷을 입고 일어나 앉았다. / 등불 하나와 환하게 마주하다 / 책상 위에 몇 권의 책이 있어서 / 아무거나 책 한 권을 잡아 읽었지만, / 이내 지루해져, / 책을 놓고 손을 잡고 단정히 앉았다.
오랫동안 온 비가 새로 개여, / 달의 모습이 담담하게 창문을 비추고, / 사방에서 들리는 것이 고요하다. / 맑고 밝게 깨여 있는 시간이 길어지니 / 점점 들리는 것이 있었다. 
   
대나무를 어루만지며 우렁차게 울어대는 / 바람소리를 들으니, / 사람들이 홀로 자립하여 굽히지 않는 뜻을 일으키게 한다. 
사납게 으르렁거리는 / 개짓는 소리를 들으니, / 사람들이 사악함을 막고 왜구를 방어하는 뜻을 일어나게 한다. 
   
또한 크고 작은 북소리를 들었다. / 작은 소리가 은은하면서 멀리 가는 것이 / 연연하면서 끊어지지 않는데, / 근심하고 괴로워하여 마음이 편치 않은 생각을 일으킨다.
관청에서 치는 북소리가 매우 가깝게 들렸다. / 세 번 치는 것에서 시작하여 네 번, 다섯 번에 이르면서 / 점점 소리가 급해져 새벽으로 향한다.
이윽고 동북쪽에서 종소리가 났다. / 종은 비가 개였기 때문에 / 소리가 매우 맑고 뛰어났다. / 그것을 들으니, / 또한 새벽을 기다리면서 일어나 행동하려는 생각을 / 그칠 수가 없었다.
나는 성격이 밤을 지새우는 것을 좋아한다. / 매번 등불 아래에서 책을 펼치면서 / 그것을 반복하고 이경에 이르는 것이 / 이미 일상화되었다.
그런데 사람이 떠드는 소리가 사라지지 않고 / 또 마음이 문자 사이에 놓여 있어서, / 밖이 고요하고 마음이 평정해진 적이 없었다.
오늘 저녁에는 모든 소리와 모습을 / 고요함과 마음으로 얻으니, / 사람의 마음과 정신을 깨끗이 하고 / 이처럼 뜻을 일으킬 수 있었다.
다른 때에도 이 소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고, / 사람의 눈과 귀에 접촉되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 / 형체가 사물에 의해 부려지고, / 마음의 정취가 그것에 따르게 되어, / 귀 밝음이 종과 북의 큰 소리에 잠기었고, / 눈 밝음이 화려한 외형에 가려졌다. / 이래서, 사물이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적었고 / 해치는 것이 많았다.
오늘의 소리와 모습이 저 때와 다르지 않은데, / 일단 귀와 눈에 들어오자, / 뚜렷이 나와 오묘하게 합치되었다. / 그 큰소리와 화려한 모습인 것이 / 비로소 내가 정진하고 수련하는 바탕이 되지 않음이 없고, / 사물이 사람을 부리는 것을 멈추었다.
소리가 끊어지고 모습이 사라지니, / 나의 뜻이 가득히 특별하게 존재하게 되었다. / 이른바 뜻이란 것이 / 과연 안이냐, 밖이냐. / 사물에 있는 것이냐, 사물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냐. / 이것은 반드시 분별해야 한다.
아하, 나는 여기에서 분별하였다. / 밤을 지새우면서 깨닫는 힘이 크도다. / 후에 마음을 가지런히 하여 홀로 앉아
밝은 등불 아래 긴장하면서 / 사물의 이치와 마음의 오묘함을 구해 / 자신을 닦고 사물에 응하는 바탕으로 삼는다면 / 장차 반드시 얻는 것이 있을 것이다.
밤을 새우는 글을 쓰다. 
   
홍치 임자년(1492) 가을 칠월 십육일.
   
   
   
   
정선, <인곡유거도>, 종이에 담채, 27.3×27.5cm, 간송미술관
   
   
송대 장순민(張舜民)이 "시는 형태 없는 그림이며, 그림은 형태 있는 시"라고 했던가. <야좌도>에서 시와 그림의 경계가 없어져 서로 왕래하기 시작한다. 자연히 이 글을 읽고 나면, 다시 그림으로 돌아가 심주 내면으로 들어가서, 밤을 지새우는 긴 과정을 따라 노닐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점차적으로 밖으로 되돌아 나온다. 심주 자신의 모습으로, 가옥으로, 나무로, 개울로, 언덕으로, 숲으로, 자욱한 안개로, 계곡의 공간으로, 병풍처럼 서있는 산으로, 그리고 확장하여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대기로 흐른다. 안과 밖의 경계가 무너졌다. 내가 자연인가, 자연이 바로 나인가. 심주가 "이른바 뜻이란 것이 과연 안이냐, 밖이냐. 사물에 있는 것이냐, 사물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냐"고 회의하는 것은 당연한 것 같다. 
심주의 예술세계는 원말사대화가의 화풍을 계승하고 있다. 심주가 살고 있는 시대는 이들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고, 또 오흥이란 지역이 지리적으로 황공망이 활동한 소주의 상숙(常熟), 오진의 절강 가흥(嘉興), 예찬의 무석(無錫), 왕몽의 호주(湖州) 등과 가까웠기 때문이다. 비록 명대 초기 '문자의 난'이나 '정난(靖難)의 역(役)'을 통해 지식인이 탄압되었어도, 몇몇 화가에 의해 그 화통이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원말 4대가의 화풍에 머문 것뿐만 아니라 이에 근거하는 오대 동원과 거연이나 북송 미불에로 거슬러 올라가 독창적인 경지를 개척하였다. 이러한 것은 1480년 54세 이후에 나타나게 되는데, 66세에 그려진 <야좌도>는 완숙한 경지에 접어든 시기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참으로 회화적으로나 문학적으로나 뛰어난 작품이다. 
암튼, 가을이 왔다. 지금 밖에서는 대선이니 스캔들이니 횡령이니 직권남용이니 권력누수이니 시끄럽기만 하다. 귀와 눈이 밖으로 열려 외부에 휩쓸려서 마음이 해치기 쉬운 계절이기도 하다. 잠시나마 자신으로 돌아와 평정을 찾으면서 노니는 여유를 갖는 것이 어떨까. <야좌도>를 감상하는 것도 좋은 방편이라 생각한다. 아울러 「야좌기」를 그 저술의 토대가 된 구양수의 「추성부」와 비교해서 읽어보면 더 감칠맛날 것이다. 
   
   
   
김홍도, <추성부도>, 종이에 담채, 214×56cm, 호암미술관
   
   
추성부
   
구양자가 바야흐로 밤에 책을 읽는데, / 서남쪽으로부터 어떤 소리가 들려와 / 섬뜩 놀라 그 소리에 귀를 기울려보고 말하였다. / "이상도 하구나!" / 처음에는 빗소리 같더니 소슬한 바람 소리 같다가, / 문득 기운차게 뛰어올라 물결 부닥치는 소리 같으니, / 마치 파도가 밤중에 놀라고 / 느닷없이 비바람이 들이닥치는 듯하여, / 그것이 물건에 부딪힘에 / 쨍그랑쨍그랑 하며 / 쇠붙이가 모두 우는 듯하고, / 또 마치 적을 향하는 병사들이 / 재갈을 물고 질주하는 것과 같아서, / 호령도 들리지 아니하고 / 다만 사람과 말이 가는 소리만 들린다.
내 동자에게 말하기를 / "이것이 무슨 소리인가? / 너 가서 이를 보고 오너라"라고 하니, / 동자가 말하였다. / "별과 달은 희고 밝고 / 은하수는 하늘에 있는데, / 사방에 사람 소리는 없고, / 소리는 나뭇가지 사이에 있습니다." / 나는 말하였다. / "아! 슬프도다! / 이것이 가을 소리로다. / 어찌하여 왔는가?"
대개 저 가을의 모습은 / 그 색깔은 참담하여 / 안개 흩어지고 구름 걷히고, / 그 모양은 청명하여 / 하늘은 높고 햇빛은 찬란하고, / 그 기운은 살을 에듯 차가워서 / 사람의 살과 뼈를 찌르고, / 그 뜻은 몹시 쓸쓸하여 / 산천이 적적하고 고요하다.
그러므로 그 소리는 / 몹시 처절하며 / 울부짖듯 세차게 일어나 / 무성한 풀은 우거져 녹음을 다투며, / 아름다운 나무 파랗게 우거져 볼만 하더니, / 풀은 가을의 스침에 색이 변하고 / 나무는 가을을 만나 잎이 떨어지니, / 꺾여 시들고 영락하는 까닭은 / 가을 기운이 너무 매운 때문인 것이다.
대체로 가을은 형관(刑官)이라. / 시절에 있어서는 음기(陰氣)요, / 또한 무기의 형상이다. / 오행으로는 금(金)이니, / 이것을 천지의 기운이라 하니, / 항상 쌀쌀하게 말려 죽이는 것이 본심이다. / 하늘이 만물에 있어서, / 봄에는 생장하고 가을에는 열매 맺는다. / 그러므로 그것이 음악에 있어서는 / 상성(商聲)이 서쪽의 음악을 주관하고,
이칙(夷則)은 칠월의 음율이 되는 것이다. / 상(商)은 상하게 하는 것이다. / 만물이 이미 늙어서 슬퍼하고 상심하는 것이고, / 이(夷)는 살육(殺戮)이라, / 만물이 성할 때를 지나면 마땅히 죽게 되는 것이다.
슬프다! / 초목은 감정이 없지만 / 때가 되면 나부껴 떨어진다 하니, / 사람은 동물이니 / 오직 만물의 영장이다. / 온 근심이 그 마음에 느껴지며, / 모든 일이 그 몸을 수고롭게 하여 / 마음속에 움직이는 것이 있으면 / 반드시 그 정신이 움직이게 되니, / 그런데 하물며 그 힘이 미치지 못하는 바를 생각하고, / 그 지혜로 할 수 없는 바를 근심하니, / 반질반질한 붉은 것이 고목이 되고, / 새까맣게 검은 것이 허옇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 어찌하여 금석의 재질도 아닌 것으로 / 초목과 더불어 번영함을 다투고자 하는가? / 생각건대 누가 이것을 손상케 하든 / 또한 어찌 가을의 소리를 두고 한스럽다 하겠는가? / 동자는 대답도 안하고 / 머리를 떨어뜨린 채 잠을 자니, / 다만 상방 벽에서 / 벌레 소리만이 직직거리며 / 나의 탄식하는 소리를 더해주는 듯 하여라.
   
(이장우, 우재호, 박세욱이 옮긴 『고문진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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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송식12 명나라 심주의 <중추상월도>

2009년 12월 5일 토요일

오전 6:06

   

   

옛 사람도 지금 저 달을 보았다
  
[옛그림읽기] 명나라 심주의 <중추상월도>
   
  

▲ 심주, <중추상월도>권, 지본담채, 30.5×134.5㎝, 보스톤미술관.

어렸을 적엔 달을 그냥 보았던 같다. 달빛에 젖어 마냥 즐거웠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 보는 저 달은 왜 그리 밝고 또 내 마음은 왜 이리 복잡할까. 생각이 많아서일 것이다. 다행히 고향의 부모님이나 묵은 친구들도 저 달을 보고 있으리라 생각하면 한층 위안이 되며 따스해 진다.

옛날 중국 신화에서는 저 달은 항아(嫦娥)가 도망간 곳이었다. 요임금이 통치하던 시절 열 개의 태양이 한꺼번에 떠올라 인간에게 대재앙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 항아는 아홉 개의 태양을 화살로 쏘아 떨어뜨려 인류를 구원한 영웅 예(羿)의 부인이었는데, 남편 예가 서왕모(西王母)에게서 얻어 간직하고 있던 불사약을 몰래 훔쳐 월궁(月宮)으로 달아나 신선이 되었다. 이후에 항아는 탐욕 때문에 추악한 두껍비로 변하였다고도 하고, 예쁜 자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지만 그 삶이 너무나 적막하여 흐느끼고 있다고 한다. 시인들은 주로 후자를 노래했다. 당나라 시인 이상은(李商隱)은 <항아>라는 시에서 항아는 영약을 훔친 것을 후회하며 밤마다 푸른 하늘에서 남편의 품을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린다고 하였다.

동양예술의 특징 중 하나는 저 달을 보며 느끼는 감정과 같다. 신선과 같이 불로장생을 그리워하면서도 홀연히 우리 주변 소중한 사람 곁으로 다가가고, 영원한 시간의 흐름을 노래하면서도 지금 이 순간으로 되돌아온다. 어느 하나로 쏠리거나 항아처럼 영원한 삶에서 현실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삶에서 영원과 순간이 긴장을 이루고 있는 것, 이것이야말로 동양예술의 정수라 감히 말할 수 있다. 다가오는 추석의 보름달과 심주의 <중추상월도>를 아울러 감상하며 이를 음미하면 좋을 것 같다. 

      

심주(沈周, 1428-1509)는 심사정의 <방심석전산수도>나 강세황의 <벽오청서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조선후기 화단에 큰 영향을 미친 명대 문인화의 영수이다. 명나라 초기에는 원말 4대가가 활동하였던 강소성 지역이 주원장의 최대 정적이었던 장사성을 옹호하였다고 하여 탄압을 받았고, 자신의 결점 때문에 일으킨 주원장의 '문자의 옥'과 조카 건문제를 폐위시키고 왕권을 장악한 영락제의 '정난(靖難)의 변'으로 지식인들이 제거되었다. 이로 인해 자신의 세계를 표현하는 문인화풍이 쇠미해진 반면에, 황제와 귀족의 취향과 궁궐 장식에 어울리는 명대원체화풍이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로부터 백여 년이 지나 경제가 활성화되고 지식인의 활동이 왕성해진 강소성 소주 오흥을 중심으로 이 지역에서 이어지고 있던 원말 4대가의 화풍을 계승하며 오파(吳派)를 형성하였는데, 심주는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당연히 그의 작품에는 황공망, 예찬, 오진, 왕몽 등 원말사대가와 이들에 의해 계승되었던 오대(五代) 동원과 거연의 화풍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 명대 말기 비평가 이일화(李日華)가 중년에 황공망을, 말년에는 오진을 스승으로 배웠다고 한 것에서 그의 화풍을 알 수 있다.

그는 시, 서, 화 3절의 대가로서 그의 작품에 글씨와 시가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 매력적이다. 대표작 중 하나인 <야좌도>는 중국회화사에서 시, 서, 화 3절이 절정에 이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왕유처럼 "그림에 시가 있고, 시에 그림이 있다"라는 평을 받고 있듯 그의 작품에는 시와 그림의 관계가 잘 나타나고 있는데, <책장도>나 이 <중추상월도>가 그 하나이다. 

<중추상월도>는 심주가 60세 되던 해, 추석 하루 전인 14일에 친구를 불러 놓고 달을 감상한 것이다. 15일 보름날이 아니라 그 하루 전이라는 데에 흥미롭다. 보름에는 달을 너도나도 다 보기 때문에 오염되어서, 친구와의 깊은 정을 소중히 여겨 추석 하루 전에 모였다고 한다. 그리움은 속기(俗氣)와 섞일 수 없는 것이다. 심주는 이 작품 뒤에 달을 보는 감회를 시로 적어 놓았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이 작품을 감상하는 데 도움을 준다.

   

   

심주, <책장도>축, 지본묵화, 159×72.5㎝

대북고궁미술원.

어린 시절 보름달을 마음껏 보았어도

보는 것이 보통 때와 다르지 않았지.

 나이가 들어서 소중해져 쉽게 보지 못해

 매번 깊은 술잔을 마시며 좋은 시절 그리워한다.

 늙은이는 앞으로 얼마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

 진실로 세월은 머물게 할 수 없구나.

 옛날이나 지금, 사람은 바뀌고 달은 그대로여도

 옛날 달과 지금 사람, 아득히 멀리 있다.

 젊은이는 앞길이 아득하여 이를 알지 못해

 해마다 보름달 보면서 기뻐하지만

 늙은이가 눈으로 달을 보는 것은 (젊은이와) 같아도,

 느낌이 가슴에 가득 찬 것이 다만 그러할 뿐이다.

 오늘 밤은 14일, 이미 달이 가득 차

 일곱 친구 다투어 감상하면서 지려고 하지 않는구나.

 동쪽바람이 구름을 밀치니 경쾌한 물결이 일어나

 갑자기 하늘의 찌꺼기를 쓸어 낸다.

 뜬구름은 우리를 기피하고자 하지만

 항아리에 술이 있어 또한 스스로 즐겁다.

 서암은 더구나 나의 옛 친구

 술에 바로 음악은 있어도 시끄러운 손님은 없다.

 돌아가며 이백의 <술을 마시며 달에게 묻는다>의 시구를 부르며

 백발이 청춘을 속임을 스스로 느낀다.

 청춘과 백발은 함께 미치지 못하지만

 또한 술의 물결을 거둬 내며 달과 함께 마신다.

 서암과 나는 나이가 육십

 더욱 보름달에 물으며 사십 년 전으로 돌아간다.

   

사실 이 그림과 시는 정서적으로 나에게 다가오지 않는다. 하물며 나이 어린 후배들에게는 더 그럴 것이다. 죽음을 의식하는 노인이 하루하루 시간의 소중함을 의식하면서 뒤를 돌이키며 느끼는 감정이 앞이 구만리 같은 젊은이와 어찌 같겠는가. 다만 인생은 강물과 같이 흘러가버리기 때문에 인생을 소중하게 여기라는 것은 누구나 해마다 새로운 의미로 다가와 느끼는 것이다. 또한 같이하는 친구가 있어서 더불어 달을 본다면, 이 순간은 영원한 시간이 응축되어 스스로 초탈하게 되니 이 또한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이 그림의 백미는 극적인 구도와 절제된 필치에 있다. 구도에서는 일반적인 통설과 달리 남송 원체화풍의 변각구도 영향이 엿보인다. 한 쪽 모서리 오두막집에는 친구와 달을 보며 술을 마시고 있고, 나머지 부분은 강과 하늘이 이어진 여백으로 이루어졌다. 작품의 감상은 그려진 부분(實)에서 점차로 그려지지 않은 여백(虛)으로 옮겨가는데, 사람들의 시선이나 먹의 점차적인 변화, 나무줄기나 가지의 여백으로 향한 움직임 등이 이에 일조를 한다. 감상하는 사람은 자연스레 대자연과 동화되어 간다. 이는 남송 마원의 <고사관록도>나 <춘경행음도>, <월야상매도>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다만 마원은 부벽준이나 타지묘법을 통해 기교적인 완숙함으로 처리한 것과 달리, 심주는 피마준이나 동원의 수지법, 서예적인 필선, 중첩된 먹 등으로 화면 전체가 은은하게 다가오게 하고 있다.

   

   

마원, <월야상매도(月夜賞梅圖>, 비단에 채색, 25.1×26.7cm,

메트로폴리탄미술관.

특히 오른쪽 아래 그려진 부분(實)과 대각선으로 왼쪽 위부분에 둥글게 그려놓은 달 및 그 옆의 붉은 도장은 대각선적으로 서로 힘의 균형을 이루면서 극적인 긴장감을 갖고 가운데 여백을 풍부한 자기 공간으로 환원시킨다. 부연한다면 감정이 무한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다시 유한으로 되돌아와 우리의 삶의 의미를 음미하게 하는 것이다. 어디 달을 보며 40여 년의 세월로 되돌아가는 감회일 뿐이겠는가. 아마도 우리 모두가 경험한 만남, 이별, 사랑 등등 인생을 살면서 느끼는 소중한 순간들이 의미화되어 미학적으로 다가오지는 않을까. 가운데 빈 공간은 보는 이의 인생에서 경험한 감성으로 채워지면서 이 작품을 개인적 세계로 이끌고 있다.

무엇보다 술자리 옆에 상징적으로 그려놓은 학은 영원한 것으로 향하게 한다. 그러나 그것은 미래의 불로장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친구와 더불어 달을 감상하는 이 순간을 감성적으로 영원하게 음미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구도의 단순함, 묘사의 절제, 먹의 은은함, 여백의 넉넉함 등에 의한 '담백'함에 도움을 받지만, 좀 더 중요한 것은 이 작품 밑에 흐르는 정서의 자연스러움, 내감각화된 세월에 대한 느낌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심주가 매년 달을 보는 것이 새롭다고 하였듯이, 나에게 이 작품은 언제나 새롭게 다가온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바로 나의 삶이라고 하면서 이를 다시 돌이켜 보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아름다운 세상을 보게 해 주신 부모님께, 내 삶을 의미있게 하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감사하곤 한다. 특히 묵은 친구들은 멀리 떨어져 말이 없어도 언제나 의지가 되고 믿음이 있다. 자주 생각할 수 없지만, 특별한 날 오랜만에 친구와 더불어 이 심주의 <중추상월도>와 달을 보며 소중한 삶을 생각해 보는 것이 어떨까.

마지막으로 우리도 심주와 그 친구들이 저 달을 보며 노래했던 당나라 시선(詩仙) 이백의 <술을 마시며 달에게 묻는다>를 함께 감상한다면, 이 삶의 순간이 더 깊게 되지 않을까 한다. 옆에 술이 있으면 더 좋을 것이다.

   

 술 마시며 달에 물어본다(把酒問月)

   

 푸른 하늘에 달이 있은 지 언제부터냐고

 나는 지금 술잔을 멈추고 한번 물어본다.

 사람이 보름달에 올라갈 수 없어도

 달은 흘러가면서 사람을 따라 온다.

 나르는 거울 같이 환하게 신선의 궁궐 문을 비추니

 푸른 안개 사라지고 밝은 광채 일어난다.

 다만 밤에 바다에서 떠오르는 것을 볼 뿐

 어찌 새벽에 구름 사이로 사라짐을 알겠는가.

 옥토끼가 불사약 찧는 동안, 가을이 되었다 다시 봄이 되는데

 항아는 외롭게 살면서 누구와 지내고 있는가.

 지금의 사람은 옛날 달을 보지 못하지만

 지금의 달은 옛 사람을 비추었을 것이다.

 옛 사람 지금사람, 흐르는 물과 같아도

 똑같이 보름달 보는 것이 이와 같겠지.

 원컨대 노래 부르며 술 마실 때

 달빛이 오랫동안 금 술통을 비추어 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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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 주

   

부벽준 : 산수화에서 도끼로 찍은 듯한 자국을 남겨 표현하는 동양화 준법으로 붓자국의 크기에 따라 대부벽준과 소부벽준으로 나뉜다. 준법이란 동양 회화에서 돌이나 산의 굴곡과 나뭇가지를 표현하기 위해 붓을 쓰는 방법으로 부벽준 외에 피마준·우점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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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송식13 명말 동기창의 <완련초당도(婉孌草堂圖)>

2009년 12월 5일 토요일

오전 6:20

   

   

화가의 인격과 산수화는 별개이지만
  
[조송식의 옛그림 읽기] 명말 동기창의 <완련초당도(婉孌草堂圖)>

   

   

▲ 동기창, <완련초당도>, 1597년, 종이에 수묵, 111.3 × 36.8㎝, 개인소장.

옛 그림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평온해진다. 특히 전통 산수화가 선경(仙境)을 그린 것이 많아서 그런지 "꺼진 재(死災)"나 "마른 가지(枯木)"처럼 현실적 감정을 잠재우며 담백하게 된다. 그러나 욕구로 얼룩진 현실적 삶과 대조하여 보면 너무나 멀리 떨어진 세계로만 보인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묻는다. 이러한 그림을 그린 화가들은 어떤 사람일까. 과연 현실을 초월하여 사는 사람일까, 살려는 사람일까. 인격적으로는 완전할까. 그들의 현실적인 모습은 어떠할까.

이는 현대미학에서 예술가의 의도나 인격과 작품 사이의 상관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사실 작품은 화가에 의해 창작되지만, 일단 완성되면 화가를 떠나 독립적인 문맥에서 평가되고 감상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동양회화에서는 오래전부터 "회사후소(繪事後素)"를 말하면서 작품을 그리기 전에 인격의 수양을 강조하기도 하고, 또한 작품의 기운생동이 화가의 인격의 고하에 관련된다고 주장하여왔기 때문에, 이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작품과 화가의 인격을 자연스럽게 연결시켜버린다. 그러나 그림은 그림이고 사람은 사람일 뿐이다. 그림을 통해 사람까지 미화시키는 오류를 동양회화에서는 자주 일어났고, 지금도 일어난다.

이러저런 생각 속에 명나라 말기 동기창이 그린 <완련초당도(婉孌草堂圖)>가 머리에 떠올랐다. 이 그림은 그가 43세에 되던 1597년 10월에 그의 친구 진계유(陳繼儒, 1558-1639)의  은둔처 완련초당을 방문하여 그려주었던 것이다. 진계유는 그 해 11월에 이 그림을 가지고 동기창의 집에 가서 그림을 보며 우의를 다졌다. 완련초당에는 『황정내경경(黃庭內景經)』의 "세상 사 번잡스럽고 걸레같이 냄새가 나는데, 어찌 산에 올라 나의 책을 읽지 않는가."라는 문장을 쓴 동기창의 글씨가 걸려 있었고, 진계유는 동기창의 문집인 『용대집(容臺集)』에 서문을 썼으니, 두 사람과의 관계만 놓고 보면 그들의 우정이 참 부럽기만 하다.

진계유는 동기창보다 3살이 적다. 그는 어릴 때부터 수재여서 왕세정(王世貞)이나 왕석작(王錫爵) 등에게 귀여움을 독차지 하였으며, 강남 일대의 문사들이 다투어 그와 친구가 되고자 할 정도로 명성이 자자하였다. 그러나 과거에는 운이 없었다. 동기창과 함께 1585년 남경 향시에서 지원하였지만 둘 다 떨어졌다. 이후 이들의 인생길은 확연하게 갈렸다.

동기창은 충격을 극복하여 1588년 향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북경 회사에 합격함으로써 진사가 되어 관리의 길로 나갔지만, 진계유는 다음해인 1586년에 공개적으로 과거를 포기하고 은둔하였다. 과거를 통한 출세는 사소한 경쟁으로 인생을 병들게 하기 때문에 그로부터 벗어나 보다 근본적인 생명의 가치를 추구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는 서진(西晉)시대 유명한 정치가이자 시인인 육기(陸機)와 육운(陸雲) 형제가 독서하던 소곤산(小昆山) 독서대(讀書臺)에서 책을 읽거나 저술활동을 하였다. 1597년에는 초당을 짓고 육기의 시구절을 따 '완련초당'이라 불렀는데, <완련초당도>는 동기창이 이를 방문하여 그린 것이다. 동기창과 진계유는 <완련초당도>를 감상하면서 어떤 대화를 하였을까. 동기창은 다음과 같이 그림에 제발을 썼다.

   

"이 해 동지날, 진계유가 이 작품을 가지고 나의 서재로 와 채색하도록 요구하였다. 마침 북송 이성의 <연만소사도>와 곽희의 <계산추제도>권을 구입하였다. (이를 보고) 서로 감탄하면서 오랫동안 감상하였다. 동기창이 적다.

   

是歲長至日, 仲醇携過齋頭設色. 適得李營丘靑綠煙彎蕭寺圖及郭河陽谿山秋霽卷, 互相咄咄, 歎賞永日. 其昌記."

   

"이성과 곽희의 작품을 보면서 다시 채색할 겨를이 없었다. 북송 미불이 '당나라 태종의 작품을 보니 사람의 기를 뺏게 한다고 하였는데, 진실로 그러하다. 동기창이 또 쓰다.

   

 以觀李郭畵, 不復假設色. 米元章云, 對唐文皇跡, 令人氣奪, 良然. 玄宰又記."

   

명목적으로는 <완연초당도>에 채색하기 위한 것이지만, 실제적으로 그들의 만남은 고화에 대한 감상과 의견 교환인 듯하다. 마침 동기창이 수집한 북송시대 이성의 <연만소사도>와 곽희의 <계산추제도>가 있어서 이를 함께 감상하기 위함인 것 같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우정이 참으로 아름답지만, 뭔가 좀 이상하다. 한 사람은 "산중재상(山中宰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조복산인(朝服山人)"으로 불려지고 있었다. '재상'이란 현실에 대한 집착을 풍기고, '산인'이란 관리로서 책임을 방기하는 듯한 냄새가 나지 않은가. 아마도 현실적으로 그렇게 떳떳하지 않는 사람들끼리의 만남일 수 있다.

동기창에 대한 부정적 인격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정치와 세상일에 초연한 채 고서화를 탐닉하고 작품에서 속기(俗氣)를 혐오하며 고고한 사기(士氣)를 강조하였지만 말이다. 민중이 폭동을 일으켜 동기창의 집을 불사른 1616년의 '민초동환(民抄董宦)'이 그것이다. 같은 마을 생원(生員) 육조방(陸兆芳)의 노비에게 녹영(綠英)이라는 아름다운 딸이 있었다. 녹영에 마음을 둔 동기창은 부모의 위세를 등에 얻고 온갖 악행을 저지르던 차남 동조상(董祖常)으로 하여금 납치하도록 하였다. 이에 육조방은 분노하였지만, 마을 유지의 중재로 이 일은 일단 봉합되었다. 그러나 이후 녹영이 모친을 뵈러 갔다가 돌아오지 않자, 동조상은 하인을 시켜 다짜고짜 육조방의 집을 부수어 버렸다. 이러한 만행은 <흑백전(黑白傳)>이란 노래로 불리며 퍼져나갔다. 동기창은 이를 조사하여 범창(范昶)이라는 생원이 관련되어 있음을 알아내고 그를 협박하자, 범창은 근심 끝에 울분을 참지 못하고 죽었다. 범창의 부인과 가족들이 동기창의 집 문 앞에 가서 통곡하자, 동조상과 하인들은 오히려 범창 부인과 여자들을 발가벗겨 모욕을 주고 피가 낭자하도록 매질했다. 마침내 분노한 민중들이 폭동을 일으켜 그의 집을 습격해 불을 질렀고, 동기창은 결국 고향을 떠나 소주로 피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진계유 역시 그렇게 순수한 인물이 아니었던 것 같다. 『명사』「은일전」에 실려 있는 것처럼 은자의 이미지가 있었지만, 권문세가의 문하를 출입하며 금품을 구걸하는 세속적인 인물의 이미지도 있었다. 6살 난 어린이에게 놀림을 당한 정도였으니 그냥 스쳐 지나칠 정도의 모습만이 아닌 것이다. 일설에는 본래의 감성을 진솔하게 표현하도록 강조한 공안파(公安派) 중 한 사람인 탕현조(湯顯祖,1550-1616)가 왕석작(王錫爵)의 집을 방문하였는데, 마침 그곳에 있던 진계유를 보고 "이 사람이 누구인가"라고 물었더니 "산인"이라고 대답하자, "산인이라면 어찌하여 산에 가지 않는가?"라고 놀렸다고 한다.

진계유의 저술활동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가난한 학자, 나이든 승려나 도사들 중에서 생활고에 지치고 추위에 떠는 이들을 시켜 책을 만들어 유포함으로써 자신의 학문적 공명에 힘썼다. 오늘날 말로 한다면 학문적 착취를 일삼았던 것이다. 수많은 그림의 요청에 부응하기 위해 대필을 서슴지 않으면서 부를 축적한 동기창과 일맥상통한 면이 있으니, 그들의 만남은 유유상종이라 할 수 있는가.

암튼 <완련초당도>를 감상하고 있자면, 이 두 사람의 인간됨이 아우러져 복잡한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인간성이 어떠하든 간에 <완련초당도>만 놓고 보면 이는 동기창 자신뿐만 아니라 중국산수화에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그의 작품세계는 크게 3기로 발전하였다. 처음 22세 그림을 배워 42세 전후까지 고화를 많이 보고 힘써 학습하였던 시기, 43세에서 50세 전후까지 그의 개성적인 화풍이 형성하였던 시기, 그리고 그 이후 예술이 집대성되었던 시기이다. <완련초당도>는 43세 되던 해 그려졌으니 그의 개성적인 화풍이 형성되는 시초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완련초당도>에 나타난 그의 기념비적 화풍이란 무엇을 말함인가. 알다시피 동기창은 중국의 산수화의 특징과 흐름을 남종화와 북종화로 나누고 분석하였다. 이는 이론적인 것뿐만 아니라 그의 창작에 관련 문제이기도 했다. 그는 남종화의 계보 중 시조를 당나라 왕유로 설정하고 그의 작품세계를 그가 추구해야 할 이상적 경지로 삼았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은 물론이고 당시 동기창 시대에도 왕유의 진품이 전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왕유의 양식은 어떤 것이고 그의 작품세계는 무엇인가. 동기창은 이를 어떻게 확정하였을까.

   

   

전 왕유, <강산설제도>(부분), 비단에 수묵, 28.4 × 171.5㎝.

   

동기창은 왕유의 진품에 가까운 작품으로 당시 남경(南京) 풍몽정(馮夢禎)이 소장한 <강산설제도>와 항주 고렴(高濂)이 소장한, 북송시대 곽충서의 <망천도> 임모본을 들었다. 이미 1595년에 7월에 풍몽정이 <강선설제도>를 소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을 시켜 빌려 감상하였다. 사흘 동안 깨끗이 재계하고 보니 "준법을 하고 선염을 하였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이는 심증에 지나지 않았다. "아마 전생에 내가 왕유의 집에 들어가서 직접 그 자유롭고 호방한 경치를 보았기 때문에 거기에서 맺은 인연으로 깨달게 되었다."고 한 것처럼 구체적이지 못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가 1596년 장사에 지절사로 가게 되자 도중에 항주를 방문하여 <망천도> 임모본을 감상하면서 이를 확인하려고 하였다. 곽충서의 <망천도>가 비록 북송시대에 임모한 것이지만 왕유와 시대가 그리 멀지 않기 때문에 왕유의 작품 양식의 원형을 비교적 가깝게 보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곽충서, <임왕유망천도>, 비단에 채색, 33.4 × 487.7㎝, 메트로폴리탄미술관.

그러나 아는 것과 창작은 달랐다. 아는 것은 안(內)의 일이지만 창작은 밖(外)으로의 일이다. 안과 밖이 일체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아는 것이 완전하여 몸에 체득되어야만 하였다. 여기까진 이르지 못한 모양이다. 마침 다음 해인 1597년에 남창(南昌)의 향시 감독관으로 파견되어 가야 했고 또 송강에 진계유가 완련초당을 건립하여 이를 방문해야 했는데, 동기창은 자신의 예술세계를 확립하기 위해 이를 이용하였다. 그래서 남창에 내려가 9월에 임무를 마치자 바로 송강에 가지 않고 우회적으로 돌아 항주에 들러 다시 <망천도> 임모본을 보았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확신이 섰던 것인가. 동기창은 완련초당을 방문하여 바로 왕유의 화법을 근거하여 <완련초당도>를 그렸던 것이다. 

   

동기창, <연오팔경도책> 중 <구봉초은>, 1596년, 비

단에 수묵채색, 26.1 × 24.8㎝, 상해박물관.

<완련초당도>는 두 가지 특성을 지닌다. 하나는 실경을 그렸고, 다른 하나는 왕유의 화법을 재해석하였다는 것이다. 이 두 관계를 <완련초당도>와 비교하여 살펴볼 수 있는 것으로 1596년에 그린 <연오팔경도(燕吳八景圖)책> 중 하나인 <구봉초은(九峰招隱)>가 있다. <연오팔경도책>은 친구 양언리(楊彦履)가 남쪽 고향으로 돌아갈 때 특별히 북경과 송강 두 지역의 경치를 그려 주어 서로의 각별한 정을 표현한 것이다. 그 중 <구봉초은>은 동기창이 "진계유가 구봉 깊은 곳에 살면서 (옛날) 세 은자의 뛰어난 정신을 계승하였다. 양언리는 돌아가 당연히 이곳을 방문해야 하는데, 이 그림은 그것을 나타낸 것이다. 陳道醇居九峰深處, 續三高之勝韻, 彦履歸當訪之, 此圖所以志也."라고 적었듯이 진계유가 은거한 소곤산을 그렸다. <완련초당도>와 불과 1년의 간격이 있음에도 형상과 화법이 매우 다르다. 동기창의 작품세계에서 <구봉초은>은 1기에, <완련초당도>은 2기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22세에서 42세까지 1기에서는 동기창의 작품 세계는 크게 두 번 변한다. 먼저 처음 고정의(顧正誼)에게서 그림을 배웠을 때에는 원대 사대가, 그 중 황공망의 화풍을 좋아하였고, 1589년 진사가 되고 한림원서길사(翰林院庶吉士)에 임명된 이후에는 북쪽에 흩어져 있는 송나라 작품을 수집하면서 이에 심취하였다. 송대 산수화가 사실주의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이의 영향을 받은 <구봉초은> 역시 실경을 충실하게 그렸다고 할 수 있다. <완련초당도>와 비교하여 보면 서로 비슷하기는 하지만 많이 다름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완련초당도>의 새로운 회화적 세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화법으로 보아도 두 작품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구봉초은>은 산의 형상이나 수지법(樹枝法), 강가의 모래섬 필치 등이 원대 산수화에서 익히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완련초당도>는 왕유의 화법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실천으로 옮겨놓은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완련초당도>에서 근경의 언덕과 나무들이 왕유의 <강산설제도>에서 오른쪽 근경의 언덕과 나무와 유사하고, 왼쪽 중경에서 괴이하게 중첩된 언덕은 오른쪽 근경에 밀집된 바위의 형상과 비슷한 것이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다만 <완련초당도>에서 바위와 산의 선염과 준법을 변용하여 그렸다. 윤곽을 통해 산과 바위의 형상을 분명히 하되, 각각을 방향이나 각도를 엇비슷하게 놓여 변화를 주었다. 이것을 다시 밝고 어두움을 대비시켜 요철의 형상을 만들고 직준(直皴)으로 깊이를 표현하였다. 이러한 것은 산수의 기세 표현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강산설제도> 부분. <완련초당도> 왼쪽 중경에 괴이하게 중첩

된 산, 바위와 비슷하다.

이 그림에서 특히 강조되어야 할 것은 화면의 조화로운 구획이다. 이전에 문징명을 추종하는 화가들의 제작방식은 한 쪽에서 그려나가면서 이를 중첩시켜 전체를 이루도록 하였는데, 이와 달리 동기창은 분(分)과 합(合)을 강조하였다. 화면을 논리적으로 분리하고 이를 적절하게 통합하여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도록 한 것이다. 예를 들어 <완련초당도>에서 화면을 크게 근경의 언덕과 나무, 왼쪽 중경과 원경의 산, 오른쪽으로 독서대와 완련초당, 그리고 뒤에 가파르게 세워진 절벽 등 네 부분으로 나누고, 각 부분 사이에 작은 언덕이나 바위, 모래섬을 적절하게 배치하여 전체가 서로 이어지도록 하였다. 대상의 묘사보다 조형의 유기적 통일에 더 역점을 둔 것으로, 이는 근대적 형식미 추구와 상응하는 것이다.

이처럼 <완련초당도>는 동기창과 진계유에 대한 일화가 복잡하게 얽혀져 있기도 하지만, 회화사적으로도 복잡하게 해석되기도 한다. 그런데 그림은 화가의 인격과 별개로 감상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자꾸 동기창과 진계유의 모순된 인격이 이 그림에 겹쳐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아마도 우리 주변에 이러한 사람들이 자주 목격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림이 사람을 합리화해선 안될 것이다.

   

*지난 2006년 6월부터 지낸된 <조송식의 옛그림 읽기>가  이번 30회를 끝으로 마감된다. 일반에서 많이 접하지 못한 우리 옛 그림을 통해  소박하면서도 해학이 담긴 이야기를 풀어주셨던 필자분과 <옛그림 일기>를  관심있게 지켜봐준 독자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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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송식14 명 헌종 주견심 <일단화기도>, <세조가조도>

2009년 12월 5일 토요일

오전 6:17

   

   

조화가 조화를 불러 밝고 어질게
  
[옛그림읽기] 명 헌종 주견심 <일단화기도>, <세조가조도>

   

   

▲ 주견심, <일단화기도>(軸), 종이에 채색, 48.7×36cm, 고궁박물원

대통령 선거가 끝났다. 나라의 축제 중 축제이지만, 이렇게 국민들의 외면을 받은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모든 출마자들이 한결같이 국민을 거론하였는데, 그 만큼 국민이 더 멀어져 갔으니 말이다. 다음의 관심은 미래의 방향에 쏠리고 있다. 국민이 원하는 것이야 잘 살고 좋은 세상을 맞이하는 것인데, 정치에서는 진보이니 보수이니 중도이니 하면서 국민들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그러니 이를 하나로 융합하는 것도 대통령이 갖는 의무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마침 이런 바람에 적절한 그림이 생각이 났다. 명나라 헌종 주견심의 <일단화기도(一團和氣圖)>와 <세조가조도(歲朝佳兆圖)>가 그것이다.

<일단화기도(一團和氣圖)>는 동진시대 불가의 혜원, 유가의 도연명, 도가의 육수정 세 사람을 하나의 원형으로 합쳐 그려 놓은 것이다. 헌종이 즉위한 해 그린 것으로서 상당히 정치적 의미를 갖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프랑스 신고전주의 다비드가 그린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에 비유될 수 있겠다. 둘 다 정치적 상징성이 강한 작품이지만 서로에는 차이가 있다. 다비드의 작품은 나폴레옹이 자신의 영광과 제위장면을 한층 돋보이게 할 목적으로 신고전주의 화가 다비드에게 영광스러움과 위대함을 그리도록 한 것에 반해, 주견심은 자신이 왕위에 오른 해에 당시 정치적인 현실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직접 그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고전주의의 엄격함이나 극적 긴장감, 위풍당한 사실적인 모습과는 달리 표현적이며 희화적이다. 현대미술사조에서 보면 근대 입체파 작품과 유사할 수도 있다. 당연히 중국전통 인물화에서도 보기 드물게 특이하다. 주견심은 <일단화기도(一團和氣圖)>를 어떤 의도로 그렸을까. 다행이 그는 이 그림의 의미를 알 수 있게 작품에 다음과 같은 제발을 썼다.

   

진나라 도연명은 유가의 뛰어난 학자이고, 육수정 또한 은거하면서 도를 배우는 훌륭한 사람이며, 혜원 스님은 불가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임을 나는 들었다. 혜원 스님은 여산에 살면서 손님을 전송할 때 호계를 넘지 않았다. 하루는 도연명과 육수정 두 사람이 방문하여 더불어 이야기하면서 도가 합치되어 자기도 모르게 전송하면서 호계를 넘어버려 (그들은) 이로 인해 서로 크게 웃었다. 세상에서는 (이를) 삼소라 전하는데, 이것을 그리는 것이 어찌 하나의 조화로운 기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겠는가. 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제발을 적었다. 아아!  세상 사람들이 태어나면 똑같이 하늘을 이고 땅을 밟으면서 이미 조화의 기를 품고 부여받는데, 어찌 서로 다르다고 하는가. 오직 지식만을 연마하여 스스로 사사롭게 사용하고, 몸을 경계로 서로를 시기하니, (서로가) 가깝기로는 한 문호에서 나왔는데  멀리 세상 끝에 있는 것 같구나. 위대하다, 현인들이여. 멀리 높게 보고 말하는 것이 품위가 있으니, 아래로 굽어보아도 부끄러움이 없는구나. 세 사람이 합하여 하나가 되어 둘 아닌 한 마음에 이르렀고, 서로의 옳고 그름을 잊어버리며 하나의 조화로운 기운을 왕성하게 하였다. 아, 조화가 조화를 불러 그 부류를 밝고 어질게 하니, 이것으로 일을 같이 하면 일이 반드시 이루어지고, 이것으로써 힘을 쏟으면 공적이 반드시 이루어진다. (그러나 지금은) 어찌 이러한 사람이 없어 나를 도와 정치를 왕성하게 할 수 없는가. 그림을 펼치고 보면서 나의 뜻을 개술하면서 부족하나마 붓을 들어 마음을 표현하니, 풍습을 경계하고 세상을 독려하려고 한다. 성화 원년(1465) 6월 초하루. 

   

朕聞晉陶淵明乃儒門之秀, 陸修靜亦隱居學道之良, 而惠遠法師則釋氏之翹楚也. 法師居廬山, 送客不過虎溪. 一日陶陸二人訪之, 與語道合, 不覺送過虎溪, 因相與大笑. 世傳爲三笑, 圖此豈非一團和氣所自邪, 試揮彩筆題識其上. 嗟世人之有生, 幷戴天而履地, 旣均稟以同賦, 何彼殊而此異, 惟鑿智以自私, 外形骸而相忌, 雖近在于一門, 乃遠同于四裔, 偉哉達人, 遐觀高視, 談笑有儀, 俯視不愧, 合三人以爲一, 達一心之無二, 忘彼此之是非, 藹一團之和氣. 噫, 和以召和, 明良其類, 以此同事, 事必成, 以此達功, 功必備, 豈無斯人, 輔予盛治. 披圖以觀, 有槪予志, 聊援筆以寫懷, 庶以警俗而勵世. 成化元年六月初一日.

   

   

피카소, <도라마르>, 캔버스에 유화, 92×65

cm, 파키소미술관, 파리

<일단화기도(一團和氣圖)>는 위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동진시대 불교의 혜원, 도교의 육수정, 유가의 도연명이 서로 합심하여 자득한 "호계삼소(虎溪三笑)"를 그린 것이다. 아마도 주견심은 유불도라는 종교가 다른 세 사람이 하나로 합쳤다면 다른 사람들 또한 하나로 뭉칠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만큼 당시 정치적인 상황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서 자기 갈 길을 찾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주견심과 그의 아들 주후탱이 통치하는 성화연간(1465~1487)과 홍치연간(1487~1505)은 사회, 경제, 문화에서 새로운 변화들이 일어났다. 명나라 건국 이후 지식인의 불신과 탄압은 근 백여 년간 문화의 암흑기를 이루었지만, 성화홍치연간에 이르러서 강남을 중심으로 경제가 활성화되고 자본주의가 싹트고 있었으며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학술과 예술이 진흥되고 있었던 것이다. 회화에서 심주를 중심으로 한 문인화인 오파(吳派)가 형성된 것도 이 시기였다.

그러나 궁정의 내부적인 상황은 그렇게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이미 권력은 황제도 재상도 아닌 환관에게로 돌아가 있었다. 주견심의 부친 영종(英宗)이 북송 휘종이 금에 의해 사로잡혀간 것 같은 역사적인 수모 "토목의 변(土木之變)"을 당하였는데, 이는 환관 왕진(王振)의 전횡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당시 북쪽 몽고족이 강대해지면서 국경을 침입하자 왕진은 영종이 친히 정벌하도록 종용하였다. 영종은 군사 50만을 대동하고 출동하였지만 토목보(土木堡)에서 참패를 당하고 몽고족에 사로잡혔으며, 이윽고 나라의 운명까지 위태롭게 만들었다. 북경에서는 수도를 남경으로 옮기자는 주화파(主和派)와 적극적으로 방어하여 극복하자는 주전파(主戰派)가 서로 대립하였는데, 다행히 주전파인 명재상 우겸(于謙)이 영종의 동생 주기옥(朱祁鈺)을 황제로 옹립하고, 왕진 일탕을 응징하면서 몽고족의 북경 침입을 물리쳐 승리로 이끌어 내었다.

그러나 상왕(上王)에 머물면서 다시는 왕위에 오르지 않겠다 다짐하면서 되돌아왔던 영종은 다시 왕위에 대한 야욕을 드러내었다. 경제(景帝) 주기옥이 후사가 없고 마침 병이 위급하자, 이를 틈타 주화파 서정(徐程)이 환관 조길상(曹吉祥), 무장 석형(石亨)과 결탁하여 정변을 일으켜 영종을 다시 황제로 옹립하였다. 이를 "탈문의 변(奪門之變)"이라 한다. 이로 인해 우겸 등 항전파가 처형을 당하면서 민심이 흉흉하게 되었다. 이를 계획한 세 사람이 끝이 안 좋았고 또 영종이 죽었어도 이러한 상황은 지속되고 있었다.

헌종은 왕위에 오르면서 신하와 백성을 단결하고 아울러 황실을 굳건히 해야 할 필요가 있었는데, <일단화기도(一團和氣圖)>는 이러한 의지를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제발에서 "조화가 조화를 불러 그 부류를 밝고 어질게 하니, 이것으로 일을 같이 하면 일이 반드시 이루어지고, 이것으로써 힘을 쏟으면 공적이 반드시 이루어진다. (그러나 지금은) 어찌 이러한 사람이 없어 나를 도와 정치를 왕성하게 할 수 없는가"라 고 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러한 것을 의도하였다면 "호계삼소"는 이에 맞는 적절한 소재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이러한 정치적 상징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를 위한 표현방식에서 더욱 흥미를 끌고 있다. 하나의 원형 안에 인물을 정성스럽게 그리고, 옷 주름이 당시 명대 궁정화가나 절파화가들이 사용한 정두서미(釘頭鼠尾)법으로 그려 힘이 넘치며 유연한 것도 매력적이지만, 특히 우리의 시선은 얼굴의 표현으로 향한다. 세 인물을 각각 그리되 한 얼굴로 새롭게 만들었다. 도연명과 육수정을 서로 마주보는 측면의 얼굴로 그리고, 혜원스님의 얼굴은 이 두 얼굴을 각각 합쳐 하나의 정면의 모습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입체파적인 조형이라고 할까. 피카소의 <도라 마르>의 얼굴과 비교하면 유사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다만 피카소의 작품은 하나의 얼굴에서 다른 시점에서 본 측면을 서로 종합하여 정면의 얼굴로 평면화시킨 것이다. 이러한 차이에도 약 500여 년 간격을 두고 두 그림이 유사한 표현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참고도판(도철문)

그런데 <일단화기도(一團和氣圖)>에서의 조형은 주견심이 독창적으로 창안한 것이라기보다 이미 중국 고대에서 친숙해져 왔던 것이다. 대표적인 것으로 상대(商代) 청동기에 새겨진 도철문(饕餮文)을 들 수 있다. 도철문은 적에게 가공할 위협을 주면서 적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게 하는 상상적 동물이다. 측면의 모습을 서로 대칭적으로 하나로 모아 정면 얼굴을 형상화하였다. 이마, 코, 눈, 뿔, 귀, 아래턱, 몸체, 다리, 발톱 등을 단순화시켰지만 일일이 그 형상을 알아볼 수 있다. 그러나 두 측면의 모습이 통합된 전체의 모습은 괴이한 동물의 정면모습으로 보인다. 특히 두 눈과 이마, 코, 입, 귀로 이루어진 얼굴은 가공할 모습니다. 그렇다면 주견심은 이러한 조형을 의식적으로 본받은 것인가, 아니면 역사적으로 내면화된 중국인의 원형이 그를 통해 표출된 것인가. 흥미를 끄는 것이 많다.

   

이 그림을 그리고 난 이후 주견심의 정치 형태는 어떠하였을까. "어찌 이러한 사람이 없어 나를 도와 정치를 왕성하게 할 수 없는가"라고 해서 그런지 자신의 아버지 영종처럼 환관에 의한 정보정치를 강화하였다. 홍무제의 금의위(錦衣衛), 영락제의 동창(東廠)에다 이를 견제하기 위해 또다시 서창(西廠)을 만들고 여기에 환관 왕직(王直)을 수장으로 하였던 것이다. 그는 도교의 무의(無爲)의 정치를 핑계로 일체 정치를 방임하고 재위 24년간 궁궐 안을 헤매 다니며 쾌락을 찾기 바빴다. 조회를 거의 보지 않았기 때문에 임금은 신하를 모르고 신하는 임금을 모르는 것은 당연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환관 왕직(汪直)이 권력을 전횡하였고 기세가 조야를 경도하였다. "사대부 또한 머리를 수그리고 왕직을 섬겼고 감히 그에 대항하지 못하였으며", "세상 사람들은 다만 왕태감이 있음을 알지 황제가 있음을 몰랐다."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영종이 환관 왕진에게 빠져서 벗어나지 못한 것과 달리, 헌종은 왕직으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래서 신하와 백성들에게 원성이 높았던 왕직과 그 일당을 물리치기 위해 35세인 1481년에 <세조가조도>를 그렸던 것이다. 이는 중국에서 흔히 보이는 악귀를 물리치는 종규를 그린 것이다. 당나라 현종이 악성 학질에 걸렸을 때 종규가 꿈에 나타나서 치료해 주자 현종은 이를 오도자에게 그리게 하였는데, 이로부터 새해가 되면 종규를 그려 악귀를 몰아낼 수 있도록 기원하였다. 시대에 따라 여러 종규가 그려졌지만, 악귀의 해석에 따라 작품의 의미가 달라진다. 가령 원나라 초기 유민화가 공개가 그린 <중산출유도(中山出遊圖)>는 이민족인 몽고족을 물리치는 것으로 해석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주견심, <세조가조도>(卷), 종이에 채색,

598.7×35.5cm, 고궁박물원

그는 이 작품에다 "모든 일이 마음먹은 대로 되길. 한 줄기 봄이 돌아오니 따뜻한 기운이 뒤따르고,  만 리에 걸쳐 일어나 상서로운 변화는 밝은 시대에 걸맞네. 오늘날의 아름다운 징조를 그리니, 해마다 뜻대로 되어 모든 일이 잘되기를 바라네. 柏如意. 一脈春回暖氣隨, 風雲萬里値明時. 畵圖今日來佳兆, 如意年年百事宜"라고 썼다. 종규를 그린 용필이 강건하고 힘이 넘친다. 또한 <일단화기도(一團和氣圖)>에서처럼 절파화가*들이 많이 사용한 정두서미묘**를 사용하고 있다.

종규는 두 눈을 크게 뜬 채로 앞으로 향하고 표정은 엄숙하고 얼굴에는 의지가 차 있으며, 손에는 "여의"를 들고 있다. 악귀는 두 손으로 측백나무 가지와 감 두 개를 담고 있는 쟁반을 받치고 종규를 따르며, 앞 허공에는 박쥐 한 마리가 날고 있다. 지물 "여의(如意)"는 글자 그대로 "마음먹은 대로"이고, 측백나무인 백(柏)과 감나무 시()는 백(百)과 사(事)와 음이 같으며, 박쥐는 복을 상징한다. 따라서 이 작품은 "모든 일이 마음먹은 대로 되어서 복을 가져다준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이 그림은 일상적인 길상화를 넘어서 <일단화기도(一團和氣圖)>와 같이 정치적 의미가 담겨져 있다. 이 그림이 그려진 1481년에 주견심은 모종의 결단을 단행하였던 것이다. 그는 왕직을 선부(宣府)로 보내 외적을 방어하도록 하였다. 외적이 돌아간 뒤에는 여러 장군들을 다시 조정에 불렀지만 왕직은 그대로 머물게 하였다. 다음 해에는 왕직을 강등시켜 대동(大同)의 수비진을 맡도록 이동시켜 권력에서 멀어지게 하였고 그 도당들 또한 제거하였다. <세조가조도>처럼 된 것이다.  

작품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렸든 그 사람의 행적이 어떠하였든가를 아는 것은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 작품은 그것으로부터 벗어남으로써 우리의 상황에 따라 재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두고 있다. 모든 것이 하나로 조화를 이루고, 일상의 악귀를 제거하여 안녕을 바라는 것은 누구나의 소원이 아니겠는가. 선거로 인해 분파로 만들어놓은 것을 다시 하나로 응집시키고, 살림살이가 나아지도록 경제를 활력적으로 되살리는 것이 국민들의 소망일 것이다. 새 대통령이 국민을 통합하고 경제를 살리게 다고 하니, 주견심의 <세조가조도(歲朝佳兆圖)>와 <일단화기도(一團和氣圖)>처럼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편집자 주

   

* 절파화가 - 중국 명대(明代)에 발생한 회화상의 한 파로, 절파의 절(浙)은 중국의 저장(浙江)을 지칭한 것이다.

* 정두서미묘 - 기필(起筆)을 못대가리처럼 세게 하고 서서히 쥐 꼬리와 같이 가늘게 선을 긋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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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송식15 문징명의 <관산적설도>

2009년 12월 5일 토요일

오전 6:18

   

   

인생의 참자리로 찾아가는 길
  
[옛그림읽기] 문징명의 <관산적설도>

   

   

▲ 문징명, <관산적설도>(권)(1,2,3,4,5,6), 종이에 수묵 채색, 1532년, 25.3 × 445.2㎝, 臺北古宮博物院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그냥 세상이 하얗다. 땅과 산과 하늘의 경계가 없어지고 모두 하나가 되었다. 밖으로 나가 발자국을 찍으면 이내 눈이 덮여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고 다시 하얗게 되었다. 더욱이 세모와 제야에 걸쳐 눈이 내려 모든 것을 지어버려 하나로 만들었다. 참으로 묘한 생각이 들면서 마치 화가가 흰 화면을 담담하게 마주하는 듯하다. 눈에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생각까지도 하나하나 지어버려 망념에 이르렀다가 다시 새로운 모습들이 부유한다. 이 순간을 즐기자. 잠시 라디오나 TV 등 세상에로의 연결을 끊어놓자. 들리는 것이라곤 폭설이니, 교통이 정체되었다느니, 농작물 관리에 주의를 기우려야 하느니, 출근길에 빙판길을 조심해야 하느니 하는 잔소리뿐이다. 일상에 절실한 문제이긴 하지만 이 순간에는 머리를 혼란스럽게 하고 짜증만 나게 할 뿐이다. 그러니 세상에서 들려오는 소식을 단절하고 흥을 일으킬 수 있게 옛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어떨까. 그림 속 설경으로 들어가 고요히 앉거나 거닐면서 상상의 무한으로 소요해 보자.

옛날부터 동양에서는 눈을 그린 작품이 많았다. 그 중 하나로 일본 에도시대 안도 히로시게의 작품이 떠오른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 필요한 작품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뒷모습을 보게 하여 쓸쓸해진다. 일본의 미학에서 "모노 아와레", 사물의 쓸쓸한 정감을 감돌게 한다고 찬양되고 있긴 하지만, 작품의 좋고 나쁨을 떠나서 인간의 비애가 스며든다. 자연에서 움추려드는 인간의 나약한 모습보다 대자연을 경탄하고 신비한 깊이를 음미할 수 있는 작품이 이 순간에 더 잘 어울릴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명대 오파의 영수 문징명(文徵明, 1470-1559)의 작품이 여기에 속하지 않을까. 문징명은 <설경산수도> <계산심설도> <한산풍설도> <설만군봉도> <설귀도> 등과 같이 제법 많은 설경 그림을 그렸다. 이중에서 지금 이 순간에 가장 매력을 끄는 것은 59세에 시작하여 63세까지 5년에 걸쳐 그렸던 <관산적설도(關山積雪圖)>라 할 수 있다.

문징명의 작품은 산 속 높은 암자에서 혼자 자연을 내려다보면서 관조하거나, 친구들과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한다거나, 산 속을 거닐면서 물소리를 듣는다거나, 시상에 잠겨 시구를 다듬는 모습이거나, 혼자 배를 타고 생각에 잠기는 광경들로 이루어진 것이 보통의 모습이다. 주로 한정된 공간에서 구성되었다. 62세(1531년)에 그린 <한림청설도(寒林晴雪圖)>도 이러한 화풍으로 그려졌다. 이 작품은 48세의 <계산심설도(溪山深雪圖)>와 거의 똑같이 그린 것이기도 하다.

근경의 누각에는 창 안으로 선비가 앉아 밖을 내다보면서 설경에 몰입하고 있다. 중경에는 나무가 울창하게 그려져 있고, 그 가운데로 낭떠러지 계곡 길이 굽이굽이 산 속 깊은 곳으로 향하고 있다. 원경에는 산이 중첩되어 하늘로 이어진다. 양식적으로 중경의 나무들을 너무 과장되게 묘사하여 근경의 누각이 상대적으로 외소하게 보인다. 이 작품을 감상하는 데에는 위에 써진 왕총(王寵)의 시가 일조를 한다.

   

가파른 계곡은 하늘에 걸려 있고,

산들은 옥으로 된 병풍을 펼쳐놓은 듯하다.

도인이 높은 집 안에 앉아

그윽하게 무형의 세계로 노닐구나.

모든 형상은 태고의 세계에 젖어 있고,

외로운 소나무는 절로 푸르네.

구름과 함께 끝없이 바라보니,

누가 은미하게 드러남이 적다고 하리오.

   

絶壑掛銀漢, 群山開玉屛. 道人坐高館, 玄覽游無形, 萬象涵太古, 孤松能自靑,同雲望不極, 誰識小微呈."

   

눈이 덮인 모습을 태초의 세계로 연결시켰다. 그 속에서 홀로 푸르며 제 색을 내는 소나무는 아마도 왕총이 자신의 스승인 문징명을 기리는 것일 것이다. 눈 오는 날 산에 올라가면 제일 눈에 뛰는 것이 아름드리 소나무에 눈 덮인 모습이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문징명은 이를 강조하여 그린 것 같고, 이를 본 왕총은 스승의 덕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관산적설도(關山積雪圖)>는 이와 달리 특이한 방식으로 그려졌다. 어떤 연유로 무엇을 그린 것일까. 명대 오파의 작품에는 자신의 제발을 통해 미학적으로 시, 서, 화 삼절의 묘미를 구현하고 있는데, 제발의 내용을 통해 제작하게 된 연유뿐만 아니라 자신의 흥취를 전달하곤 한다. 문징명은 이 작품 마지막에 다음과 같은 글을 적었다.

    

   

문징명, <한림청설도>(軸),

종이에 수묵 채색, 115 × 36.2㎝,

中國上海博物院

옛날의 뛰어난 사람들은 종종 그림을 그리기 좋아 하면서 산수를 그려 스스로 즐겼다. 그러나 설경을 많이 그린 사람들은 대체로 이것을 빌려서 고고하고 세속을 초월하려는 뜻을 의탁하고자 했을 뿐이다. 예를 들어 왕유의 <설계도>, 이성의 <만산비설도>, 이당의 <운산누각도>, 염차평의 <한암적설도>, 곽충서의 <설제강행도>, 조맹부의 <원안와설도>, 황공망의 <구봉설제도>, 왕몽의 <검각도> 등은 고금으로 유명하여 사람들 입에 회자되고 있는데, 나는 다행스럽게도 그것을 보았다. 매번 그것은 본받아 모방하고자 하였지만 스스로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지난 번 무자년(1528) 겨울, 왕총과 절에 머물었는데, 날리는 눈발이 몇 척이나 되고 온 산봉우리는 푸른색을 잃었으며 온갖 나무가 쓰러졌다. 왕총은 좋은 종이를 내어 그림을 부탁하자, 흥을 타고 붓을 움직여 <관산적설도>를 그렸다. 한 순간에 그 실마리를 풀 수 없었다. 후에 그것을 가지고 돌아가 그렸다가 쉬었다가 반복하여 5년이 지나서야 완성되었다. 다만 용필이 졸렬하고 고인들 작품의 만의 하나도 따를 수 없었다. 그러나 맑고 깨끗한 것에 마음을 의탁하고자 하는 뜻은 감히 스스로 뒤질 수 없다. 인하여 날짜를 기입하여 돌려주었다.

   

古之高士逸士, 往往喜弄筆, 作山水以自娛. 然多寫雪景者, 蓋欲假此以寄其孤高拔俗之意耳. 若王摩詰之雪谿圖, 李成之萬山飛雪圖, 李唐之雪山樓閣, 閻次平之寒巖積雪, 郭忠恕之雪霽江行, 趙松雪之袁安臥雪, 黃大癡之九峰雪霽, 王叔明之劍閣圖, 皆著名今昔, 膾炙人口, 余幸皆及見之. 每欲效倣, 自歉不能下筆. 曩於戊子冬, 同履吉寓於楞伽僧舍, 値飛雪幾尺, 千峰失翠, 萬木僵仆. 履吉出佳紙索圖, 乘興演毫, 演作關山積雪, 一時不能就緖. 嗣後携歸, 或作或輟, 五易寒暑而成, 但用筆拙劣, 不能追蹤古人之萬一, 然寄情明潔之意, 當不自減也, 因識歲月以歸之.

   

<관산적설도>에는 문징명 자신 외에 육사도(陸師道,1515-1588)의 제발이 하나 더 있다. 이 두 글을 통해서 단순하게 본다면, <관산적설도>는 겨울 눈 오는 날 절에 머물면서 그 감흥을 그린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자년(1528)은 문징명이 북경에서 관리를 그만 두고 낙향한 다음 해이고, 왕총이나 육사도는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었다. 이러한 것과 왕유나 이성 등 고인의 작품과 관련하여 생각하면 이 작품의 풍부한 의미를 엿 볼 수 있지 않을 것이다. 이를 위해 무자년 전후의 문징명 생애를 잠시 둘러보자.

아버지 문림(文林)은 8세에 어머니를 잃은 문징명을 자신의 친구들에게 학문과 예술을 배우도록 하였다. 그림은 심주(沈周), 글씨는 이응정(李應禎), 문장은 오관(吳寬) 등 당시 최고의 권위자에게 배운 문징명은 축윤명(祝允明), 당인(唐寅), 서정경(徐禎卿)과 더불어 '오중4재자(吳中四才子)'라고 일컬었지만, 과거에는 운이 없었다. '오중4재자' 중 세 사람은 일찍이 과거에 급제를 하였지만, 문징명은 24세에 남경의 향시에 떨어진 후 모두 14차례에 걸쳐 시도하였어도 결국 합격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는 53세에 이충사(李充嗣)의 추천으로 그 해 세공생(歲貢生)으로 선발되어 비로소 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세공생이란 여러 번 향시에 떨어진 사람 중에서 우수한 자를 독학(督學, 그 지역의 교육부 장관)이 선정하여 중앙에 천거하는 특례 제도였다. 암튼, 문징명은 북경에 가서 형식적으로 이부(吏部)의 시험을 거쳐 한림원대조(翰林院待詔)가 되어 『무종실록(武宗實錄)』편찬에 참여하였다.

문징명에게 한림원의 생활은 그리 평탄하지만 않았던 것 같다. 동료 중 양신(楊愼), 황좌(黃佐), 설혜(薛蕙) 등과 서로 경모하면서 우애를 다졌지만, 다른 한편으로 동료 중에서는 그가 세공생 출신이고 화가로서 이름난 것을 거론하며 한림원은 화원이 아닌데 화가가 어떻게 들어왔느냐는 등 매도를 당하였던 것 같다. 특히 그가 관리 생활에 염증을 느끼게 한 것은 『무종실록(武宗實錄)』 편찬을 둘러싸고 대례의(大禮儀)의 논쟁이 일어난 조정의 분위기에 더 기인했는지도 모른다.

무종 주후조(朱厚照)에게 자식이 없어 방계인 주후총(朱厚)으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하게 하였는데, 이가 세종 가정제(嘉靖帝)였다. 세종은 효도의 입장에서 친 부모를 황제와 황후로 대우하여 제사를 지내겠다고 주장하였다. 이렇게 되자 이것은 무종과 무종의 아버지 헌종까지도 황제로서의 대우를 받을 수 없을뿐더러 이러한 선례가 없었다는 이유로 거세게 반대하는 세력이 일어나 서로 대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세종을 황위에 추대한 공로로 정권을 잡았던 양정화(楊廷和)는 이 대례의(大禮儀) 논쟁으로 황제의 뜻을 거슬러 파직되었고 장총(張)이 내각수보(內閣首輔)가 되었는데, 장총은 아버지 문림(文林)과 인연이 있었다는 이유로 그를 관직을 높여 포섭하려고 하였다. 문림이 온주(溫州)에서 병사하였을 때 그 지역 관리들이 조의금 수 백량을 모아 주자, 이를 청렴결백한 아버지의 정신을 손상시키는 일이라고 사양하여 받지 않았던 문징명이고 보면, 이는 오히려 관직에 회의를 느껴 낙향하고자 하는 마음을 더 일으켰을 것이다. 3년간 관직 생활에서 3번이나 사직을 청한 후 그는 비로소 1527년 봄 58세 나이로 고향 소주로 돌아왔다.

   

구영, <검각도>(軸), 비단에

채색, 295.4 × 101.9㎝, 中國

上海博物院

낙향한 소주에는 변화가 일어났다. '오중4재자' 중 당인이 이미 1523년 문징명이 북경으로 올라가던 해 54세로, 축윤명이 낙향하기 한 해 전 1526년 67세로, 서정경이 이보다 15년 앞서 35세로 죽고, 문징명 혼자 남게 되었다. 문징명이 왕총과 육사도 외, 진순(陳淳), 육치(陸治), 왕곡상(王穀祥), 팽년(彭年) 등과 함께 나이를 초월한 우정을 나누면서 소주에서 문예의 중심을 이루게 된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여기에서 다시 <관산적설도>를 음미하여 보자. 이 작품은 4미터가 넘는 대작으로 산과 강이 중첩되고 이어지면서 전개되고 있다. 그 가운데 아슬아슬한 외길이 처음부터 시작하여 작품 끝 성곽에로 향하고 있고, 그 위로 나그네가 여행을 하고 있다. 진사도는 이 위태롭고 험난한 경관은 사천성 아미산을 지나 성도(成都)로 가는 길이라고 말하였듯이, 촉도(蜀道)나 검각(劍閣)을 그린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더 나아가 이백의 「행로난(行路難)」에서 "인생길 어려워라, 인생길 어려워라, 갈림길 많거니와 지금 그 길이 어디인가."라고 노래한 것을 도해한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아마도 인생의 어려운 길을 상징하는 듯하다. 다만 이 작품에서는 구체적으로 길의 방향이 묘사되어 있어 희망을 암시하기도 한다.

이 작품이 북경의 관직 생활을 그만두고 낙향한 다음 해인 1528년에 시작하여 5년에 걸쳐 1532년에 그렸던 것이 흥미롭다. 아마도 낙향한 이후 그의 구체적인 인생길을 묘사한 것일 게다. 세상의 혼탁을 예견했던 것일까. 이후 나라는 환관 엄숭(嚴嵩)의 전횡으로 더욱 병들어 갔으니 말이다. 문징명은 옛 사람들이 "고고하고 세속을 초월하는 뜻(其孤高拔俗之意)"을 의탁한 설경을 통해 세속과 떨어져 자신의 인생길을 찾아가는 것이 아닐까. 그가 왕유, 이성, 이당, 염차평, 곽충서, 조맹부, 황공망, 왕몽의 작품을 보고 임모하다가 이룰 수 없었던 것은 그러한 인생의 경지에 아직 들어서 있지 않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산수화가 자연의 실경을 그리는 것이라기보다 화가 내면 경지를 자연을 통해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관산적설도>는 눈이 오는 자연의 모습에 흥취를 느껴 그렸다 할지라도 바로 자신의 마음의 비춤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작품은 옛 대가의 만의 하나라도 쫓아갈 수 없었지만, "맑고 깨끗한 것에 마음을 의탁하고자 하는 뜻은 감히 스스로 뒤질 수 없다."고 장담한 것이 바로 이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이 <관산적설도>를 찬찬히 살펴보면 새로운 매력들이 다가온다. 그것은 제발에서 말한 것처럼 왕유, 이성, 이당, 염차평, 곽충서, 조맹부, 황공망, 왕몽 등 여러 화가들 작품의 특성들이 하나로 묶여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우선 이 그림은 길을 따라 먼 길을 가고 있는데, 주인공을 강조하기 위해 홍색을 칠하여 쉽게 눈에 띠게 하였다. 그 사이로는 여러 화가들의 작품을 연상시키는 장면들이 나온다. <관산적설도>(1)는 왕몽의 <검각도>를 염두에 둔 듯 위태롭고 꾸불꾸불한 길에 다리가 연결되어 있고 그 위로 주인공인 듯 사람이 말을 타고 내려온다. 검각은 장안에서 사천 촉 지역으로 들어가는 험난한 지형을 말한다. 일찍이 "촉도난(蜀道難)"과 같은 악부 가사가 있었고, 이백도 이를 따라 지은 <촉도난>에서 "아아, 위태롭고 아득하도다. 촉 땅으로 가는 길이 험난하니, 하늘에 오르는 것보다 어렵도다."로 시작하고 있다. 그 지형의 위태로움을 잘 말해주고 있다. 현존하는 구영(仇英)의 <검각도>와 비교하여 보면 그 위태로움과 험준함이 떨어질지 모르지만 시상(詩想)은 오히려 더 넘친다.

<관산적설도>(2)에서는 말을 타고 길을 내려오다 중간 강가에 마을이 나타나고 있다. 언뜻 왕유의 <설계도>의 한 장면처럼 보인다. 다시 언 강을 건너 <관산적설도>(4) 왼쪽 가장자리에 나무로 둘러싸인 가옥 안에는 붉은 복장한 한 인물이 앉아 있다. 아마도 '원안와설(袁安臥雪)'을 의탁한 것일 것이다. 원안은 동한 시대 은자였다. 하루는 낙양에 오랫동안 눈이 내려 깊게 쌓였다. 낙양의 수령이 사정을 알아보기 위해 순시하여 보니 집집마다 눈을 치어 길을 내고 생계를 모색하고 있었는데, 원안의 집에 이르자 눈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원안이 이미 죽은 줄 알고 들어가 보니 원안은 뻣뻣이 침상에 누워 바로 굶어 죽을 지경이었다. 수령이 왜 나가서 생명을 구하지 않느냐고 묻자, 원안은 이렇게 오랫동안 눈이 내리면 모든 사람이 얼어 굶어 죽을 것인데 내가 왜 사람들을 힘들게 하겠느냐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붉은 옷을 입고 앉아 있는 인물은 말을 타고 가는 인물과 동일인일 것일 터인데, 그렇다면 주인공인 문징명이 여행에서 쉬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문징명이 직접 원안을 방문한 것일지도 모른다. 작품의 장면 장면에서 이러한 이야기가 꼬리를 물고 있다.  

   

   

안도 히로시게, <토오카이도오 오십삼차> 중 <캄바라>, 판화, 종이에 니시키에, 에도시대,

25.6 × 37.8㎝, 일본개인소장

마지막으로 하나 더 생각해 볼 문제는 문징명과 왕충의 관계이다. 둘 사이에는 14세 이상 나이가 차이가 남에도 서로 아름다운 우정을 쌓았다. 왕총은 문징명의 흥의 기미를 알아서 재빨리 흥을 풀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고, 문징명은 그 흥을 마음껏 풀어 즐겼으니, 서로를 알아주는 우정은 백아(伯牙)와 종자기(鍾子期)에 비견할 수 있지 않을까. 이 두 사람의 관계는 당시에도 부러워하였던 것 같다. 진사도는 제발에서 "문징명은 왕총과 나이를 초월한 우정을 맺어 서로 의기가 투합하였으니 진실로 금이나 바위처럼 변하지 않고 향초처럼 향기가 나는 사귐이라 할 만하며", 맑고 깨끗한 것에 마음을 의탁하고자 하는 "두 사람의 맑은 지조가 수 척이나 되는 그림에서 은은히 약동한다."고 찬양하고 있으니 말이다. 작품의 내면적 가치를 아니 진사도 역시 이 우정에 참여할 만하지 않은가.

명나라의 운명이 쇠퇴하여 가는 가운데, 강남 소주에서는 예술을 통해 아름다운 인간적인 세계가 열려 있었다. 아름답다는 것은 후배는 선배를 존경하고 선배는 후배를 아끼는 정이 넘치는 세계를 말함이다. 나 홀로 다시 생각에 잠기면서 그냥 웃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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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송식16 청대 초기 석도의 <인병득한도>

2009년 12월 5일 토요일

오전 6:09

   

   

병으로 평정을 얻고 복을 누리다
  
[옛그림이야기] 청대 초기 석도의 <인병득한도>

   

   

   

   

▲ 석도, <인병득한도>, 열장 중 여섯 번째, 종이에 수묵담채, 1701년(61세), 24.2×18.7㎝, 미국 프리스톤대학 미술관

문장과 그림,

복 받은 사람만이 누릴 수 있지.

최근에 내 글씨와 그림이 시장에 흘러들어가

물고기 눈알이 진주와 섞여

스스로 흥취가 떨어짐을 느꼈다.

사람의 집 벽에 걸어 놓고자 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이 일을 내 감히 하지 않을 뿐이라.

지금 조용히 머물면서 일이 없어

또한 이 종이를 빌려 대충 그리면서 웃는다.

안목 있는 사람이 당연히 따로 고귀하게 감상해야 할 것이다.

1701년 2월, 병으로 인해 한가함을 얻어 붓 가는 대로 그렸다.

   

   

우리는 곧잘 쉬고 싶다는 말을 한다. 이 세상 울타리에서 잠시라도 벗어나서 고요하게 쉬고 싶어 한다. 읽고 싶은 책을 읽을 수 있고, 가고 싶은 곳을 갈 수도 있고, 그리운 사람을 만나면서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는 여유를 갖고자 한다. 그런데 이것이 어렵다. 특히 인생을 살수록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복잡한 사회적 관계에 놓이기 때문에 이를 벗어나기 더 어렵다.

이럴 때 문득 쉽게 떠올리는 생각이 있다. 병이 났으면, 어디 다쳤으면 한다. 실제로 일어나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혼자 조용히 있고 싶어 하는 것이다. 왜 병이 났으면 할까. 사람들은 병에 상당히 관대하다. 병이 나면 "푹 쉬라"든가, "몸조리 잘하라"든가 하면서 잠시 벗어나는 것을 사회적으로 허용한다.

   

겨울, 봄을 기대하는 마음처럼

   

실제로 병이 나면 고통스럽지만, 사회적인 모든 고리에서 벗어나 혼자 있을 수 있다. 병이 회복될 즈음에는 정신이 맑아지고 마음이 평온해진다. 아마 병에 대한 낭만은 사회로 새롭게 접근하려는 태도 때문인지 모른다. 겨울 봄을 기대하는 마음처럼 병은 자신의 절대적 고독의 실존 속에서 우리를 많은 사유의 고리로 연결 짓게 한다. 삶에서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 진실한 공간은 어디인가, 나에게 그리운 소중한 사람이 누구인가 등 인생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여기에서 마음에 새롭게 떠오르는 세계는 일상의 군더더기 감정이 제거되어 순수한 정감으로 만나는 곳이다. 일생에서 가장 의미 있는 순간일 수도 있다. 우리는 이러한 순수함 때문에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그 소중함을 음미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평온의 순간을 아무나 즐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그 소중한 순간을 향수하기도 전에 그냥 흘려버린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이 소중한 순간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을 부러워한다. 석도에게는 이러한 순간을 즐기는 것이 바로 그림이었다. 석도가 "문장과 그림은 복 받은 사람만이 누릴 수 있다"고 한 것은 이 때문이 아니겠는가.

   

석도, <병기후작산수도>, 열장 중

여섯 번째, 종이에 수묵담채, 1671

년(31세), 95.3×48.3㎝, 일본 기메미

술관

<인병득한도>는 1701년 석도가 61세 때 "병으로 평온을 얻자 붓 가는 대로 그린 것"으로 총 10작품으로 된 화책(畵冊)이다. 10작품 모두 전체 분위기가 차분하고 고요하다. 구도는 간단하고, 필치는 가늘며, 먹은 온아하다. 특히 담채를 사용하여 전체적으로 담백한 느낌을 자아낸다. 이 모든 특색은 석도의 평온한 마음을 조형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석도는 병이 잦았던 모양이다. 이 작품과 달리 30여 년 전에도 병에서 회복된 후 그린 산수화가 있다. 1671년 32세 때 그린 <병기후작산수도(病起後作山水圖)>가 그것이다. 여기에서도 병에서 회복한 순간의 기분을 산수로 환원시켜 놓았다. 석도는 이 작품에 다음과 같은 글을 적었다. "성품이 여리고 병이 많아, 몇 차례 붓을 묻고 벼루를 불태웠으며 육신의 욕구를 억눌렀지만, 깨달음을 얻을 수 없었다. (병이 난 뒤에) 한적하게 친구 집을 방문하여 간혹 예찬, 황공망, 심주, 동기창의 작품을 보았는데, 날이 가도 눈에 아른거려 여러 날 동안 발분망식하면서 음미하였다." 이 글로만 보면 석도 자신이 주체적으로 자연을 관조하면서 그렸다기보다 이전 시대 화가들의 산수화를 음미한 것이 투영된 피동적인 산수라 할 수 있다.

석도는 활동연대에 따라 선성(宣城)시대(1670-1679), 남경(南京)시대(1680-1693), 양주(揚州)시대(1694-1707)로 나눌 수 있는데, 이 작품은 선성시대 작품으로 아직 완숙기에 이르지 않았을 때여서 그렇게 생각이 드는지 모르겠다. 양주시대에서처럼 함축적이며 시정이 넘치는 것이 아니라 작품 전체가 여백 없이 꽉차있다. 아직 화면을 구성하면서 채워 넣어야 한다는 소박한 생각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자신의 암자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의 모습을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묘사하였다. 먼 산세, 물줄기와 언덕,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짙게 깔린 안개 등이 서로 연결되고 있지만, 다소 산만하고 답답한 느낌이 든다.

   

찰라적 삶과 절대적 공의 대비가 만드는 극적 긴장

   

그런데 <인병득한도>에서는 이와 다르게 한 차원 높은 경지를 보여준다. 젊어서 채우려 했던 것을 하나하나 덜어내고 또한 사물을 최소한으로 묘사하여 많은 공간을 여백으로 남겨 놓았다. 여백은 빈 화면이 아니다. 마음에서 자신을 덜어내야 밖의 사물을 받아들일 수 있듯, 화면에서 대상의 묘사를 지양해야 회화적 공간에 화가의 세계를 담을 수 있다. 묘사와 회화적 공간, 화가의 심적 세계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인병득한도>에서는 각각 그려진 소재와 묘사와 화가의 정감이 서로 어우러져 있다.

<인병득한도(6/10)>에서 양 절벽 사이로 배를 타고 가는 장면은 너무나 극적이다. 단순한 구도에, 작품 앞부분은 잡목이 바람에 흔들리고, 위 부분은 안개가 자욱하면서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게 한다. 한 가운데 절벽 사이로 배를 타고 천천히 그리고 사색에 잠긴 모습으로 약간 경사진 방향으로 내려온다. 노를 젓고 있지만 사실은 물의 흐름에 맡긴 듯하다. 최소한의 의지도 자연에 맡긴 것이다. 그야말로 '이순(耳順)'에 맞는 그림이다.

<인병득한도(1/10)>는 산 정상에서 햇빛을 받으며 생각에 잠긴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이는 석도 자신의 자화상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산은 석도의 내면을 반영하는 황산이다. 황산은 석도가 젊었을 때 자주 올라갔고, 매청(梅淸,1623-1697), 매경(梅庚,1640-1715), 대본효(戴本孝,1621-1691) 등과 함께 '황산파(黃山派)'를 형성할 정도 친근한 산이다. 이후에 석도는 당시 올라간 친구들을 마음에 두고 그리워하면서 황산을 그렸다. 석도의 대표작 중 하나로서 1699년(59세)에 그린 <황산도권(黃山圖卷)>도 30여 년 전 황산에 올라간 것을 회상하면서 그린 것이다.

   

   

석도, <인병득한도>, 열장 중 첫 번째, 종이에 수묵담

채, 1701년(61세), 24.2×18.7㎝, 미국 프리스톤대학

미술관

그만큼 석도에게 황산은 그냥 자연이 아니라 자신의 인성을 결정한 공간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은 석도 나이가 61세, 이미 그 시대의 친구는 거의 죽고 없어졌다. 혼자 꾸부리고 앉아 생각에 잠긴 석도 모습은 한편으로 모든 것을 귀찮게 여기는 듯하다. 그러나 태양의 빛을 쬐기 위해 알렉산더 대왕에게 그늘을 치워달라는 디오게네스의 장면이 떠올려지는 것은 무엇일까. 아니 그보다 북송의 대문호 소식이 관청에 출근하여 업무를 보는 것보다 밖에 앉아서 햇빛을 쬐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한 자연주의적 모습에 더 잘 어울릴 수 있다. 너무나 평온하고 정적이 감돈다. 그 주위로 우주의 광활함을 짊어지고 있는 석도 자신의 모습은 외로움을 갖는 나약한 존재가 아니라 절대적인 공(空)으로 스며들어 우주와 하나가 되려는 숭고한 존재이다.

이와 더불어 이 작품들에서는 묘한 긴장감이 감돈다. 물론 이것은 작품에 그려진 대상에서 오는 것일 수 있다. 가파른 낭떠러지, 절벽 사이로 흐르는 강, 절벽 위에 위태롭게 서있는 나무, 불안정한 언덕 위에 있는 집 등에서 일어나는 것일 수 있고, 그려진 부분(實)과 남겨진 여백(虛)과의 균형, 대상 상호간의 조화에서 나올 수 있다. 아니 억제된 단순한 구도와 조심스럽고 절제된 묘필에서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작품 전체에서 단순하고 평온하면서 또한 긴장감이 느껴지는 것은 인생과의 관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라고 단정해 본다. 병으로 인한 평온과 일상적 삶의 번잡함 사이에서 나오는, 아니면 순간적인 우리 삶과 절대적인 존재인 공(空)의 대비에서 오는 극적인 긴장감이라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爲己之學, 爲人之學

   

<인병득한도>를 감상하면서 또 다른 맛은 그 제발을 통해 석도의 심경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위에서 인용한 제발에서 석도 자신의 그림에 대한 태도를 읽을 수 있다. 동양에는 두 가지 학문이 있다. 하나는 '자기를 위하는 학문(爲己之學)'이고, 다른 하나는 '남을 위하는 학문(爲人之學)'이다. 자기를 위하는 학문은 자기에게서 얻고자 하는 것으로서 인격의 완성에 이르는 것이고, 남을 위하는 학문은 남에게 알려져 입신양명하려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권력이나 재력을 얻어 남에게 과시하는 학문을 선호하지만, 과거 전통사회에서는 무엇보다 자신에게서 문제를 찾아 인간적으로 완성에 이르는 학문을 선호하였다. 당연히 이에 상응해서 그림에도 자기를 위한 그림과 남을 위한 그림 두 종류가 있다. 자기를 위한 그림은 자신을 그림을 통해 즐기는 것이고, 남을 위한 그림은 그림을 전문적으로 그려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는 동양회화사의 큰 줄기를 이룬다.

석도의 작품은 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하고 즐기는 것이었다. 물론 이것을 친구와 더불어 할 수 있으면 더욱 좋은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소중한 경험과 감정이 상업화되어 남을 위한 그림과 뒤섞여 자신이 평가될 때 석도는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맥이 빠지면서 "흥취를 잃었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작품이 시장에 유통되어 상업화될 수 있을지언정, 그 진실한 감정마저 흥정될 수 있을까. 석도의 작품은 자신을 그리거나 친구를 그리워하며 그린 것으로서 남을 위해 "그림 그리는 일을 감히 하지 않았다."

그러나 궁극적인 문제는 자신을 속일 수 없다는 데에 있었다. 그림 그리는 일이 전생에서 짊어지고 온 업이었기에, 마음에서 일어나는 자신을 표현하여 스스로 즐기는 것까지 속일 수 없었다. 그래서 석도는 '병중득한'을 통해 우러나오는 진실한 순간들을 그림으로 즐기면서도, 자신의 작품이 시장에 유통되어 상품으로 전락된 것을 상기하면서 스스로 웃고 있는 것이다. "안목 있는 사람이 당연히 따로 고귀하게 감상해야 할 것이"라고 당부한 것은 그의 최소한의 자존심일 것이다.

   

   

석도, <황산도권>(부분), 종이에 수묵채색, 1699년(59세), 28×181.9㎝, 미국 프리스톤대학

미술관

   

   

시간을 정지시켜 내 곁에 머물게 하고 싶은 순간

   

나는 <인병득한도>를 감상하면서 한편으로 석도가 "문장과 그림은 복 받은 사람만이 누릴 수 있다"고 한 것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본다. 우리는 하루하루 살아간다. 그 시간도 이내 흘러 가버린다. 세상은 변하며 정지된 것이 없다. 그래서 "과거는 지나갔고 현재는 잡히지 않으며 미래는 아직 다가오지 않았다."고 하면서 우리 현실에 실재가 없다고 강변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우리는 영원한 순간을 만나려고 하고 또 만나는 경우가 드물게 있다. 일상생활에서 순간적으로 낯설고 고요한 정적인 순간이 스쳐온다. 자신도 모르게 그 자리에 서서 한참 응시하다보면 친숙한 시공간에서 벗어나 다른 절대적인 공(空)의 세계에 있는 듯하다. 물론 이것을 의식는 순간 그것은 이미 사라지고 자신이 다시 일상의 평범한 모습으로 옮겨와 있는 것을 느낄 것이다. 도화지에 그려놓은 모습을 가위로 오려내듯이 시간의 흐름에서 그 순간을 정지시켜 내 곁에 머물게 할 수는 없을까.

아마도 화가가 붓을 드는 하나의 이유인지 모르겠다. 많은 사람 중에는 그 소중한 순간을 만나도 느낄 수 없고, 또한 느낀다고 하더라도 즐길 수 있는 경우가 드물다. 혹시 있다고 하더라도 일상에서 깊고 풍부하게 누릴 수 없다. 석도는 이를 즐길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가. 다만 석도는 기억 속에서 있는 소중한 순간을 영원히 담고자 한 것이었다. 공자는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고 하였다. 아는 것, 좋아하는 것, 즐기는 것을 석도에 적용하여 생각해본다. 또한 동양예술에서 말하는 일상에서의 즐거움의 경지 즉 "예에서 노는 것(遊於藝)"이 바로 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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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송식17 청나라 초기 석도의 <동파시서시의책>

2009년 12월 5일 토요일

오전 6:08

   

   

참 자리로 돌아가려는 겨울의 덕
  
[옛그림읽기] 청나라 초기 석도의 <동파시서시의책>
   
   
   
   
▲ 석도, <동파시서시의책(東坡時序詩意冊)>중 둘, 종이에 수묵담채, 20.3×27.5cm, 오사카시립미술관
한 해가 가고 새 해가 오려고 한다. 분위기가 들떠 있다가도 이내 차분해지고, 침체되어 있다가도 다시 온기가 싹튼다. 이것은 연말연초에 갖는 감정이기도 하지만 겨울이기에 더 절실하게 다가오는 것이기도 하다. 겨울은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계절이다. 지나간 시간에서 우리는 새롭게 움터(元) 왕성하게 활동하면서(亨) 사건과 사건 속에 많은 감정을 얽혀 놓았다. 자기 자리로 가기 위해서는 참과 거짓을 분별해서 군더더기 정을 덜어내야 하는데, 이것도 정이라고 어찌 마음이 쓰리고 아프지 않겠는가. 칼날같이 잔인한(利) 가을을 지나 자신의 참 자리로 돌아가려는(貞) 겨울의 덕이 그래서 우리를 들떠 있게 하다가도 고요하게 하고 어둡게 하면서도 밝게 하는 것 같다.
연말연초가 되면 이러한 구체적인 감정을 떠오르게 하는 작품들이 있다. 청나라 유민화가 중 한사람인 석도(石濤,1642~1707)의 작품이다. 석도는 도올 김용옥이 그의『석도화론』에서 왕필(王弼,226~249), 승조(僧肇,384~414)와 함께 역대 중국의 3대 천재 중 한 사람으로 추앙하고 그 화론서인 『고과화상화어록』의 철학적 내용을 심오하게 풀어 대중에게 소개함으로써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좀더 석도에 관심을 갖게 되면 미학자로서의 엄밀함이 아니라 화가로서의 풍부함이 다가오게 되어 그의 작품을 진지하게 음미하게 한다. 석도의 진면목은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석도에 끌리게 하는 것은 그의 작품에 비춰진 한 인간으로서의 고독과 그리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스님으로서 절대적 고독에 대한 구도자의 자세일 수 있지만, 네 살 때 환관의 등에 업혀 궁궐을 빠져나와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스님이 될 수밖에 없었던 운명에서 나오는 인간으로서의 정에 대한 갈망처럼 보인다. 이것이 자연스레 그에게 연민을 품으면서 한 인간으로서 사랑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그의 그리움은 무엇일까. 이것은 그의 <동파시서시의책(東坡時序詩意冊)>에서 엿볼 수 있는데, 가족과 사람에 대한 정(情)의 그리움이라 할 수 있다. 이 화책은 석도가 북송시대 대문호 소식이 계절에 따라 지은 시를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전체 12작품 중 네 작품이 새해에 대한 소식의 시를 그린 것이기 때문에 연말연초에 즐겨보게 된다. 특히 소식이 태어난 촉 지역에서는 제야에 잠을 자지 않고 새해를 맞는 습관이 있어 소식의 시에 고향과 가족을 그리워하는 애틋한 정이 스며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이 화책에는 조선 말기 추사 김정희의 스승이면서 소동파를 우상시하였던 청대 중기 옹방강의 제발(1798년)과 초팽령(初彭齡)의 감정도장이 있어 석도의 진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석도가 언제 그렸는지는 간기가 없어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현대미술사학자 푸선(傅申)은 작품의 양식적 특징으로 보아 대략 1701년 초에 그린 것으로 보았다. 일반적으로 석도가 1707년 향년 66세로 생을 마감하였다고 보고 있기 때문에 그의 나이 60세경에 그린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화책은 석도뿐만 아니라 소식의 인간됨을 함께 읽을 수 있어서 좋다.
<동파시서시의책(東坡時序詩意冊)>에 실린 작품 중 예술적으로는 두 번째 작품을 좋아한다. 이는 소식이 42세 되는 1077년 정월 초하루에 지은 시로 "제야에 눈이 많이 와서 유주(州)에 머물렀다. 새해 아침에 일직 개여 마침내 길을 떠났는데 도중에 눈이 다시 왔다."라고 제목이 달려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소식은 이 때 밀주(密州)태수에서 서주(徐州) 태수로 임명되어 부임하는 도중 큰 눈을 만나 유주(州)에 머물렀다. 다음날 눈이 개여 일찍 떠났지만 도중에 청주(靑州)에서 눈이 왔었다. 이 작품은 그곳에서의 정경을 그린 것이다.
내를 따라 있는 길에 눈 덮인 큰 소나무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말을 타고 가고 있다. 눈이 쌓여 온 천지가 하얀 가운데 앞 사람은 삿갓을 쓰고 고개를 약간 숙이며 어깨를 늘어트려 제야에 마신 술에 여전히 취한 것 같다. 뒷말이 고개를 하늘로 치켜세우면서 잠결을 떨쳐내자 탄 사람은 긴장하여 자세를 바로세우고 있다. 앞과 뒤의 사람과 말에 각각 엇갈리게 붉은 색을 칠한 것도 말과 사람의 형상과 함께 너무 대조적이다. 갈필로 간략하게 핵심만을 그려놓았지만 구체적인 현장감이 생동하고 있다.
   
   
석도,<동파시서시의책(東坡時序詩意冊)>중 하나, 종이에 수묵담채, 20.3×27.5cm, 오사
카시립미술관
   
그러나 연말연초에 여러 가지 생각하게 하는 것은 첫 번째 작품이다. 이것은 <소동파가 소자유가 년말정초에 궁궐에서 숙직을 하고 재계하면서 보낸 시에 답한 시(東坡和子由元日省宿致齋三首)>를 그린 것으로, 이 시는 소식이 원우(元祐) 3년(1088) 53세 정월 초하루에 썼다. 소식과 소철 형제는 각각 지방관으로서 강호에 있다가 이 해(1088년)에 오랜만에 수도에 상경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도 소식은 한림원에 있었고, 동생 소철은 궁궐에서 숙직임무를 맡아 외출이 금지되어 있어 안타깝게도 서로 만나지 못하였던 것이다. 동생 소철이 연하장 대신 시를 지어 형에게 보내자, 소식은 이것에 대해 화답시를 지었다. 따라서 석도 작품 위에 소식의 시 3편은 이 작품을 감상하는데 도움을 준다.
   
강호에 떠돌아다닌 것이 운명이겠는가,
궁궐에서 서로 바라볼 수 있는 것 또한 우연이겠지.
어찌 새 해에 서로 만나 보지 못하는가,
이 몸, 죄를 지어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는구나.
   
江湖流落豈關天, 禁城相望亦偶然. 等是新年未相見, 此身應坐不歸田.
   
오 십 셋 흰 머리에 창백한 얼굴
집사람이 멀리서 봄옷을 입어라 보냈구나.
조정에서 돌아온 (소철의) 두 소매에 뛰어난 향기가 가득하고
(하사받은) 머리 위의 은번을 보고 (소철의 아들) 아함은 웃네.
   
白髮蒼顔五十三, 家人遙遣試春衫. 朝回兩袖天香滿, 頭上銀幡笑阿咸.
   
당시에 밤 달을 밝고 동풍과 같이 달려가
앉아서 과거장을 보고 취옹(구양수)에 사로잡혔네.
(지금) 백발이 되었지만 제자들이 몇이나 있는가.
오히려 새로운 시 구절로 아이와 장난치네.
   
當年踏月走東風, 坐看春闈鎖醉翁. 白髮門生幾人在, 却將新句調兒童.
   
이 시를 그린 석도의 작품에서 근경 언덕 넘어 집 안에 그려진 두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다르게 감상될 수 있을 것이다. 시 내용으로 보아 이 두 사람은 첫째 시에서 소식과 소철일 수 있고, 둘째 시에서 소철과 그 아들 아함(阿咸)일 수 있으며, 셋째 시에서 소식과 인사하러 방문한 문인 제자일 수 있다. 어느 것이든 가족과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넘치고 있지만, 그림에서의 전체적인 표현으로 보면 석도가 의도한 것은 소식과 소철이라고 보는 것이 더 좋을지 모르겠다.
그림은 전체적인 구도로 볼 때 두 개의 대각선 방향으로 서로 엇갈려 전개되는데, 이는 소식과 소철의 엇갈린 운명을 상징하는 것 같다. 하나는 오른쪽 중간에서 왼쪽 아래로 쏠리는 것이다. 근경의 언덕이 오른 쪽에서 왼쪽으로 내려오면서 사라지고, 그 위에 짙은 먹으로 그려진 나무 역시 같은 방향으로 경사를 타고 기울고 있다. 근경의 언덕이 끝날 쯤 중경에서는 큰 바위로 그 흐름을 이으면서 약간 우뚝 세워 균형을 바로 잡아놓았다. 다른 하나는 이와 반대로 왼쪽 중간에서 오른쪽 위로 향하는 것이다. 원경의 산세가 점차적으로 작아지면서 멀리 바다와 접하고, 다시 하늘로 이어진다. 이것은 점차적으로 옅게 되는 먹의 변화와, 평원의 풀을 그린 필치 방향에 의해 효과를 극대화 하고 있다. 이렇게 서로 엇갈린 구도의 배치에서 오른쪽 중간쯤 빈 공간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아래에는 오두막집을 그리고 그 안에 두 사람을 그렸다. 그리고 집 밖에 안개가 자욱하게 깔리면서 이 역시 집 너머 바다로, 하늘로 이어진다.
   
석도, <금릉회고책(金陵懷古冊)>중 하나, 종이에 수묵
담채, 23.8×19.2cm, 프린스톤대학부속미술관
전체적인 분위기는 이 해에서 저 해로 넘어가는 시간적 연속을 염두에 두고 그린 것 같다. 해는 그리지 않았지만, 왼쪽 아래에서 오른쪽 위로 가면서 밝아지는 분위기는 밤새 정을 나누면서 새 해를 맞이하는 정경을 표현하고 있는 듯하다. 하기야 왕안석의 신법을 반대하여 오랫동안 지방관으로 전전하다가 마침내 투옥되어 서로 만나지 못했고,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다시 등용되었어도 서로 다른 길을 걷다가 궁궐에서조차 만날 수 없었으니, 이 또한 운명인가 우연인가. 만약에 만났다면 그 제야의 밤은 너무나 길었을 것이고, 이 그림에서처럼 이 해에서 저 해로 오랫동안 이어졌을 것이다.
우리는 소식의 두 시에서 바쁘고 굴곡진 인간사와 정을 엿볼 수 있다. 오늘날 우리의 삶도 이와 다르다고 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살기 위한 몸부림으로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가는 해에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 웃고 서로를 치켜세우며 서로에게 의미를 주며 분발시키지만, 오히려 그만큼 마음 깊숙이 그리운 정이 싹트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번잡하고 시끄러운 일상에서 참 자리, 참 모습, 참 정으로 돌아가려는 것은 겨울 속의 새해가 가져다주는 매력일 것이다. 소식과 소철처럼 우리 역시 비록 만나지 못하여도 제야를 맞이하여 마음으로 지나간 일과 다가올 일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 좋을 것 같다.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으면 또다른 인간의 모습이 떠오른다. 소식의 인간사와 정을 그린 석도 자신의 모습이다. 삼백 여 년이 지나 우리의 일상적 삶을 지켜보면서 그 소중함을 인식시켜주는 것 같은데, 그와 그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은 너무나 고적하고 외로워 보인다. 아아, 쓸쓸하고 외로워 그리 인간의 참 그리움을 그린 것인가, 아니면 따스한 품이 있어 그리 쓰리고 외로워 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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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송식18 석도의 <여산관폭도>

2009년 12월 5일 토요일

오전 6:09

   

   

   

자연적 숭고, 도덕적 숭고, 문화적 숭고
  
[옛그림읽기] 석도의 <여산관폭도>
   
   
   
  

   

▲ 석도, <여산관폭도>(軸), 비단에 담채, 209.7 × 62.2㎝, 1690년 후반, 京都 泉屋博物館

요사이 산에 사람이 많이 보인다. 언뜻 살펴보니, 계절 따라 온 사람도 있겠지만, 마음 따라 온 경우도 있어 보인다. 개중에는 속이 상해서 풀려고 오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죄를 짓고 피하기 위해 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건강을 위해 오는 사람도 있고, 여가를 즐기기 위해 경제적 이유 때문에 오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산에서 수양하기 위해 오는 사람도 있는 반면에 산이 있어서 그냥 산에 가는 무심의 경우도 있을 것이다. 다들 의도는 다르지만 한결같이 산으로 가는 것은 같다. 산은 언제나 그 자리(止)에서 모든 것을 포용하고(厚) 있다.

『논어』에 "지식인은 물을 좋아 하고, 어진 이는 산을 좋아한다. 지식인은 활동적이고, 어진 이는 고요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주자는 이에 대해서 지식인과 물의 활동성, 어진 이와 산의 후덕함이 서로 감응하여 일어나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는 한편으로 『사서혹문』에서 자칫 산을 고요하고 물을 활동적인 것으로 각각 고착시켜 인식하는 위험이 있다고 경고하였다. 산은 고요하지만 그 속에 활동이 내포되어 있고 물은 활동적이지만 그 안에 고요함이 있으니, 이 둘을 상호 종합하여 각각 인식하도록 한 것이다. 물론 주자는 산이 위치적으로 정지하여 있지만 그 안에는 만물이 성장하고 날씨가 오묘하게 변화하는 활동성이 있음을 생각하라는 것이다.

이는 산 자체의 덕을 두고 하는 말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산을 찾고 산이 받아주는 상호관계에서는 달리 생각이 든다. 산이 언제나 그 자리에서(靜) 다른 마음으로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일일이 응대하는 모습(動)으로 해석해 본다. 사람들이 각각의 마음으로 왔지만 산에서 느끼는 정취가, 표현을 달리 하여도 거의 같음은 이 때문인지 모르겠다. 사람이 산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인가. 아니면 산이 우리 내면 깊숙이 일상에 가려진 산의 모습, 신성을 일깨워 주어서 그런가.

그러나 산을 찾으면 현실적으로 난관에 봉착한다. 정작 산으로 가면 만나는 것은 많은 사람들과 모텔, 음식점, 차량들이다. 비우러 갔다가 오히려 속기를 채우고 돌아온다. 그렇다면 이를 피할 방편이 없을까. 집에서 조용히 정좌하여 그리운 벗 몇몇과 산수화 한 폭을 감상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조선 후기 안인일(安仁一, 1736~1806)이 <금강산도>를 감상한 일이 떠오른다. 그는 금강산을 유람하고 싶어 했지만 음식점, 여관, 사람의 행렬로 가득 차 금강산이 무릉도원이 아닌 속세 마을로 변하여 유람할 마음을 접었었다. 그러나 내면의 욕구를 피할 수 없어 마지못해 그림으로 감상하였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명산 앞은 별 차이가 없는 것 같다.

오늘날 현대 산수화에서 자연이 가볍게 처리되는 것과 달리, 옛날 산수화에서는 산수가 무겁되 자유롭게 음미되도록 한다. 산에서 바라보는 그 경관은 극단적으로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산 정상에서 인간 세상을 바라보는 것과, 산언덕에서 산 정상 너머 끝없는 세계로 비상하는 것이다. 양주팔괴의 한 사람인 고기패(高其佩)의 <고령독립도(高嶺獨立圖)>가 전자에, 석도의 <여산관폭도(廬山觀瀑圖)>가 후자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 두 작품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산에서 인간세상을 내려다보면서 그 왜소함을 자각하고 아울러 자신이 담고 온 문제를 털어내는 한편, 이를 근거로 해서 대자연의 숭고 앞에서 끝없는 자유를 지향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속기를 덜어내야 산의 신성을 받을 수 있다. 석도의 <여산관폭도>를 소개하면서 고기패의 <고령독립도>를 언급하는 것은, <여산관폭도>를 감상하기 위해 인간 세상에 대한 구체적인 감정을 하나하나 털어내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고기패, <고령독립도>(軸), 종이에 수

묵, 70.5 × 38.5㎝, 北京古宮博物院

<여산관폭도>는 석도에게서 보기 드물게 상당히 큰 작품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좋아 하는 작품이지만, 제작연도가 없어서 구체적으로 언제 그린 것인지 알 수 없다. 현대미술사학자 중에는 석도가 북경에 체류하였을 때(1690-1692, 49세~51세) 그렸다고 하고, 좀 더 늦은 50세 후반 양주에 체류하였을 때 그렸다고도 한다. 작품 위에는 당나라 시선(詩仙) 이백의 <여산요>와 석도 자신의 글이 써 있다.석도의 글에 의하면, 이 작품은 이백의 <여산요>를 읽고 어릴 적에 노닐었던 여산의 모습과 관련시켜 자신의 화법으로 그렸다고 한다. 북송시대 곽희(郭熙) 작품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어디까지는 자신의 화법으로 그렸다고 강변하였다. 찬찬히 <여산관폭도>를 감상하면 설득력이 있다.

이백의 <여산요>는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부분에서는 옛 초나라 광인 접여(接輿)에 비유하여 황학루(黃鶴樓)를 떠나 신선의 여정에 오르고 있다. 황학루는 옛날 비문위(費文褘)가 신선이 되어 항상 황학을 타고 와서 노닐었고, 신선 자안(子安)이 학을 타고 지나갔다는 곳이다. 당나라 최호(崔顥)는 <황학루>를 짓고 "옛 사람 이미 황학을 타고 떠나고/ 이 땅에는 부질없이 황학루만 남았구나"고 탄식하였다. 이백은 황학루에 와서 이 시를 읽고 더 이상 노래할 것이 없다고 하여 금릉(金陵)으로 가서 <봉황대>를 지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백은 신선을 찾아 나서는 여정을 이 황학루에서 출발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부분에서는 여산의 웅위한 장관을 노래하고 있다. 셋째 부분에서는 이백이 일찍이 환단을 먹고 신선이 되어, 땅 끝 천제(天帝) 옥경(玉京)이 거처하는 곳에 도달하고, 여기서 고대의 신선 여오(盧敖)를 만나 천상의 세계에서 노닐었으면 하는 바람을 기술하였다.

<여산관폭도>는 이백이 노래한 여산의 아름다움을 자신의 기억과 더불어 충실하게 그렸다. 작품 위 중앙에는 "한 쌍의 궁궐문과 같은 석문산 앞에 향로봉과 쌍검봉(雙劍峰)이 열려 있다." 그 옆 오른쪽에는 "아홉 겹의 병풍모양 산이 구름 비단처럼 펼쳐지며," "새가 날아서도 가지 못하는 오나라의 먼 하늘"로 이어진다. "바람 따라 경관을 변하게 하는" "만 리의 노란 구름"이 세 층으로 그려졌는데, 위층과 중간층 사이에 "향로봉의 폭포를 멀리서 마주볼" 수 있게 배치하였다. "높은 산에 올라 천지 사이를 바라보니, 큰 강이 아득히 흘러 돌아오지 않는다"고 한 것은 그려지지 않았지만, 여산의 산세나 폭포의 물줄기를 통해서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이 시 구절은 심리적으로 작품의 무한한 공간 확장에 일조를 한다.

근경 언덕에는 이러한 장관을 당당하게 마주한 사람이 있다. 뒷짐 지고 웅위한 여산에서 내려오는 폭포와 아득히 중첩되어 펼쳐진 산맥을 바라보고 있다. 이는 바위에 무심코 앉아 있는 사람과 대조를 이룬다. 석도는 40여 년 전 20세를 전후로 해서 법형 갈도(渴濤)와 함께 여산을 방문하였다. 제발에서 "옛 유람을 회상하며" 그렸다는 것이 이를 말한다면, 작품에서 두 사람은 석도와 갈도라 할 수 있다. 석도가 젊어서 여산을 과연 이백의 <여산요>처럼 보았는지 모르겠지만, 작품에 석도 개인의 경험과 대문호 이백의 웅위한 기상이 잘 어우러져 있다. 석도는 이백의 황학루가 아니라 과거로 돌아가 갈도와 함께 한 시간에서 신선의 여정을 출발하고 있는데, 이는 석도의 인간적인 정을 알게 하는 것이다.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 1818년, 함부르크 미술관

언뜻 작품을 감상하면, 서양 낭만주의 미학에서 나오는 자연의 숭고를 느끼게 한다. 특히 프리드리히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는 석도의 <여산관포도>와 동일한 시선으로 그려져 좋은 비교가 된다. 그런데 자연이 갖는 예측불가의 힘, 광활한 공간, 경이 등은 오히려 이를 바라보는 방랑자에 의해 가려 있다. <여산관폭도>에서처럼 자연의 폭과 깊이, 그리고 하늘로 솟아오르는 숭고가 약하다.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에서는 자연이 원근법의 시각적 깊이에 따라 전개된 반면에, <여산관폭도>에서는 정신이 자유롭게 노닐 수 있게 자연이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근경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보는 부감법으로, 원경은 이와 반대로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고원법으로 그렸는데, 이것은 바라보는 시점의 상호 시각(視角) 차이로 인해 공간을 무한케 한다.

<여산관폭도>을 감상하고 있으면 점차적으로 근경에서 왜소하게 서 있는 석도의 모습으로 중심이 이동한다. 그리고 그것은 무한히 큰 모습으로 확장되어, 여산의 웅위한 장관과 서로 힘의 균형을 이룬다. 왜 그럴까. 아마도 도덕적 숭고 때문이리라. 우리는 산에 올라가서 호연지기를 기른다고 한다. 이 호연지기는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축적된 것을 밖으로 내뿜는 것이다. 맹자는 호연지기와 함께 숭고에 해당하는 대(大)를 말하였는데, 이 작품에서 도덕적 숭고를 느끼게 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좋은 예다.

맹자는 도덕적인 의지를 선(善)이라 하고, 이것이 축적되어 안에서 꽉 차 외형으로 드러나는 것을 미(美)라 하였으며, 이 미가 밖으로 끝없이 발산하는 것을 대(大)라고 하였다. 더 나아가 이 숭고인 대(大)가 외부 자연과 동화하는 것을 성(聖)이라 하고, 인지로 알 수 없는 경지를 신(神)이라고 하였다. 간단하게 말하면 도덕적인 의지가 밖으로 확장되어 뻗어나가는 것을 숭고라 한 것이다. 왜 <여산관폭도>에서 웅위한 여산의 장관이 근경에서 조그마한 석도 형상과 심리적으로 균형을 유지하는가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점이다. 석도의 도덕적 내면이 객관화된 여산이 바로 석도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석도가 여산이고 여산이 바로 석도 자신이다. 마지막으로는 다시 근경의 사람 모습에서 시작하여 여산의 웅위한 장관으로 되돌아가 자유를 향해 비상한다.

   

심주, <장려원조도(杖黎遠眺圖)>, 종이에 수묵, 38.7 × 60.2㎝, 넬슨 아트킨스 미술관

<여산관폭도>에는 자연적 숭고, 도덕적 숭고 외에 또 다른 힘이 압도한다. 나는 이것을 문화적 숭고라 부르고 싶다. <여산관폭도>에 축적된 회화사적 조형이 압도하여 밀려온다. 우선은 전체적으로 볼 때, 작품 한가운데 당당하게 서있는 여산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펼쳐진 전경은 북송시대 거비파산수를 연상시킨다. 이는 석도 자신이 제발에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근경에서 석도가 원경의 여산을 바로보고 있는 광경은 이전 여러 시대에서 시도되었다. 손쉬운 예로 남송시대 마원의 <고산관록도>나 <춘경행음도>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명대 오파의 영수인 심주의 <장려원조도(杖黎遠眺圖)>나 장풍의 <관풍도>도 이에 해당한다. <여산관폭도>의 중경에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솟아오른 바위산은 명대 절파 대진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데, 작품에서 험준한 기세를 강조하고 있다. 다만 그 준법(皴法)이 <장려원조도>에서 근경과 중경의 언덕과 절벽을 표현한 피마준의 변형으로 보인다. 다만 좀더 강약비수의 변화가 많은 서예적 필선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원나라 문인화가들이 즐겨 사용하는 필법이다. 또한 세 층으로 이루어진 구름의 표현이 인상적이다. 이는 당나라 청록산수에서 그려진 것을 연상시킬 정도로 고식(古式)으로 표현되어 있다.

   

장풍, <관풍도>(축), 종이에

담채, 1660, 가로 45㎝, 일본

야마토문화관

그렇다면 이 <여산관폭도>에는 산수화가 성행하게 된 당나라로부터, 북송, 남송, 원나라, 명나라로 이어지는 표현양식이 다 집대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어디는 누구의 방식이고, 어떤 부분은 어느 시대 양식이라고 일일이 지적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본다. 설령 문제가 된다고 하더라도 이는 "어떤 화가가 나에게 다가온 것이지, 내가 일부로 어떤 화가가 된 것이 아니다." "옛 작품의 무엇을 배운들 변화시켜" "나의 법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석도의 작품에는 "자신이 존재한다." 이러한 개성이 직관적으로 전달되면서, 이 안에 축적된 과거 모든 산수화양식들이 이 작품을 시간적으로 숭고케 하는 것이다.

산에 올라가 자연의 웅위한 숭고를 느끼면서, 다른 한편으로 이를 초월하여 무한한 세계로 자유를 실현하는 주체의 도덕적 숭고를 음미하는 것은 실제 자연에서 현실적 위험에서 벗어나 있다면 일어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림을 보면서 문화적 숭고를 음미하면서 현실을 초월하여 문화적 공간으로 유희하는 것은 산수화를 보는 또 다른 매력이라고 감히 주장한다. 그러고 보니 명나라 말기 동기창이 "경치로 보면 그림이 자연만 못하지만, 필묵으로 논하면 자연이 그림만 못하다."고 한 것이 새롭게 이해된다. 산수화에서는 인간이 축적한 문화를 필묵을 통해 무한정하게 음미할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산에 올라 하나하나 덜어낸 구체적인 개인감정이 대비되면 더 달콤할 수도 있다.

암튼, 이러한 설명을 뒤로 하고 이백의 <여산요>를 노래로 부르면서 석도의 <여산관포도>를 다시 감상하여 보자.

   

   

나는 본디 초나라의 광인

봉황의 노래로 공자를 비웃는다.

손에는 신선 지팡이를 잡고

아침에 황학루를 떠났다.

높은 산으로 신선을 찾아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유명한 산에 들어가 노닐기를

일생동안 좋아하였다.

여산은 남두(남쪽 하늘에 있는 斗모양의 6개의 별) 옆에

우뚝 솟아나고

아홉 겹의 병풍모양 산

구름 비단처럼 펼쳐졌다.

맑은 호수에 떨어진 그림자

맑은 눈썹처럼 빛나고

금궐(天帝의 거처) 앞에는

두 산봉우리가 열려 있다.

은하수가 내려앉은

세 돌다리

향로봉의 폭포를

아득히 바라본다.

구불구불한 절벽과 높이 솟은 산봉우리가

푸른 하늘을 찌르고

푸른 그림자와 붉은 안개가

아침 해에 비치는데

새가 날아도 이르지 못하는

오나라의 먼 하늘이로다.

높은 곳에 올라

천지 사이를 바라보니

큰 강은 아득히 흘러

다시 돌아오지 않는구다.

만 리로 뻗은 노란 구름

바람 따라 경관이 변하고

흰 물결이 아홉 갈래로 나뉘어

설산으로 흐른다.

여산이 좋아 노래하니

여산에 의해 흥이 절로 일어난다.

한가롭게 석경(여산의 동쪽에 있는 둥근 바위) 바라보며

나의 마음을 맑게 하니

사령운의 발자취에

푸른 이끼가 매끄럽다.

아침에 환단을 복용하니

세상 감정 없어지고

금심(단전)을 세 번 쌓으니

도가 비로소 이루어졌다.

아름다운 구름 속에서

멀리 보이는 선인

손에 부용꽃을 잡고

옥경(땅 절벽에 있는 천제의 거처)에 조회한다.

먼저 구헤 상에서

간만(선인의 이름)을 기약하면서

원컨대, 여오(선인의 이름)를 만나

태청(천상계)에서 노닐고자 한다.

   

원본 위치 <http://blog.daum.net/_blog/hdn/ArticleContentsView.do?blogid=03NEW&articleno=9411887&looping=0&longOpen=>

   

   

   

   

   

   

조송식19 청대 정섭의 <쌍송도(雙松圖)>

2009년 12월 5일 토요일

오전 6:19

   

   

험한 세상의 동인은 진실해야 한다
  
[옛그림읽기] 청대 정섭의 <쌍송도(雙松圖)>

   

   

▲ 조지백, <雙松圖>(軸), 1329년, 비단에 수묵, 132.1 × 57.4㎝, 臺灣古宮博物館.

춥다. 계절이 겨울이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앞이 꽉 막혀 장차 닥쳐올 험난함 때문인지 모른다. 압박하여 오는 것이 숨이 막힐 것 같다. 그러나 다행스런 면도 있다. 고통과 좌절이 클수록 내면 깊이에서 소리 없이 움직이는 것이 있다. 자연에서든 인생에서든 겨울은 걸어왔던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다. 고요히 지난 행적을 돌이키면 그 속에서 거짓들이 하나하나 벗겨지고 참 모습들이 떠오른다. 지금 이 순간에 그 본질이 변해서가 아니라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소중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소중하기 때문에 절실하고, 절실하기 때문에 "더불어 하고자" 하는 마음이 싹튼다. 이는 인생의 겨울을 헤쳐 나갈 동인(同人)이 아니겠는가. 동인의 모습에서 따스한 기운이 스며들고 밝은 빛이 몽롱하게 비친다.

왜 한 겨울 추위에서 따듯한 온기가 스며 나오고, 인생의 험난한 길에서 더불어 할 수 있는 동인(同人)을 얻게 될까. 우선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논의한 『주역』의 '동인'괘에서 실마리를 풀어보도록 하자. 괘의 순서에서 동인괘은 '비(否)'괘 뒤에 놓여 있다. 비괘는 "천상지하(天上地下)", 즉 하늘이 위에 있고 땅이 아래에 있는 모양이다. 자연에서는 성질이 다른 음과 양 두 요소가 서로 교류하면서 만물을 생성하고 변화시키는데, 하늘과 땅이 단절되어 서로 교류하지 못하니, 얼마나 자연의 기운이 막혀있음을 말하는가. 이는 또한 자연에서 규범을 찾았던 세상사에서의 험난함이나 곤경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주역>에서는 이 곤경의 극복을 혼자보다 사람과 '더불어' 하는 것으로 풀었다. '비'괘 다음에 '더불어' 하는 '동인(同人)'괘가 놓인 것이다. 그러나 아무나와 '더불어'하는 것이 아니다. 동인괘는 하늘아래 불이 있는 "천상화하(天上火下)"로 불이 위로 향해 하늘과 함께 하고, 육이(六二) 음과 구오(九五) 양이 중정(中正)에서 서로 '더불어' 하고 있다. 따라서 서로 같은 뜻을 가진 사람이 정도에 따라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사사로운 이익이나 정에 얽히게 되면 이것은 한갓 소인의 모임에 지나지 않아 파당을 일삼는 것으로 흐를 뿐이다. 정도의 '동인'이어야 미래의 풍성한 결실에 이를 수 있기 때문에, '동인'괘 다음에 '대유(大有)'괘를 설정하였다. 대유는 '성대하고 풍요로운 것(盛大豊有)'을 의미한다.

나는 비괘, 동인괘, 대유괘로 이어지는 것을 자연에서 겨울, 봄, 여름으로 흐르는 기운으로 대비시켜보았다. 한 겨울 깊은 곳에서 봄기운이 싹트듯 인생의 고난 속에 동인의 모습이 다가오는 것이다. 삶의 진실과 희망을 표현하는 동양의 예술에서 봄과 동인을 추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자연의 현상을 인간의 가치에 대비하거나 반대로 인간의 가치를 자연현상으로 풀이하는 비덕(比德)설로 귀결되기도 한다. 조선말기 김정희의 <세한도>처럼 자신의 동인을 겨울 소나무에 비유하여 표현하는 것을 예로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 소나무인가. 알고 있다시피 이는『논어』에 "한 겨울이 되어야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나중에 시든다는 것을 안다."에 근거한다. 소나무는 봄에도 푸르고 여름에도 푸르고 가을에도 푸른데, 어디 겨울에만 푸르겠는가. 하지만 봄, 여름, 가을에는 거의 모든 나무가 푸러 소나무의 존재가 그 사이에 묻혀 드러나지 않지만, 겨울이 되어 주변의 나무가 시들게 되면 비로소 소나무의 참모습이 부각되는 것이다. 소나무의 덕이란 언제나 그 자리에서 변하지 않는 모습에서 나온다.

   

   

김정희, <세한도>(두루마리), 종이에 수묵, 23.7 × 108.2㎝, 한국 개인소장.

   

김정희는 왕족으로서 권력과 학문을 동시에 장악하였으니, 언제나 그 주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그러나 55세에 제주도로 귀양을 간 뒤에는 그 많은 사람들이 권력과 이익을 쫓아 등을 돌리게 되었다. 인생의 겨울을 맞이한 것이다. 소나무처럼 언제나 변하지 않고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 중 하나가 제자 이상적이었다. 아마도 이상적을 생각하면서 가슴 속에서 온기를 느꼈을 것이다. <세한도>에서 이 둘을 형상한 쌍송(雙松)은 인간적인 동인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었겠는가. 그런데 신분적 위계가 엄격하였던 조선시대에서 왕손으로서 자신을 낮추어 중인(中人)에게 다가간 것은 오만의 극치인가, 인간적인 평등인가. 후대에 김정희를 신격한 것은 아마도 후자 때문일 것이다. 

중국에서도 <세한도>와 같이 쌍송을 소재로 하는 그림이 많다. 특히 원대 이민족이 중국을 지배했던 시대의 겨울에서 <쌍송도>가 많이 그려졌다. 이간(李衎, 1245-1320)의 <쌍송도>를 시작으로 조맹부의 <쌍송평원도>, 조지백(曹知白, 1272-1355)의 <쌍송도> 등이 쌍송을 주제로 그린 것이고, 작품의 근경에 쌍송을 주된 소재로 삼은 것으로 조맹부의 <중강첩장(重江疊嶂>, 오진의 <동정어은(洞庭漁隱)>, 당체의 <상포귀어도(霜浦歸漁圖)> 등이 있다. 이 중 원대 이곽파(李郭派) 중 한 사람인 조지백의 <쌍송도>를 보자. 이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은 "멀리 석말백선(石末伯善)에게 보내어 서로 그리워하는 생각을 의탁하고자 한다."라고 제발에서 말한 것처럼 58세인 1329년에 거란족 출신으로 송의 정벌에 공적으로 작위를 이어받은 (石末良輔)의 아들 석말백선(石末伯善)을 위해 그린 것이다.

평원이 전개된 근경에 두 소나무가 쭉 뻗어 있다. 우리에게 소나무의 모습이 어색하게 보이는 것은 두 시점이 종합되어 그려졌기 때문이다. 나무줄기는 아래에서 위로 시선이 향하면서 그려졌고, 나무 가지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부감법으로 그려졌다. 두 소나무 가지는 서로 얽혀 있으면서 이성이 즐겨 그린 찬침법(鑽鍼法)으로 세밀하게 솔잎 하나하나 그린 것에 비해, 겨울에 잎이 떨어진 앙상한 나뭇가지를 해조묘법으로 그려 서로 대비를 이룬다. 두 소나무의 우둑 서 있고 또 서로 의지하는 모습은 어려운 시대에서 독립적인 인격을 지니면서 서로 더불어 하는 동인의 모습이 상징적으로 그렸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가운데 김정희의 <세한도>와 가장 가까운 의미를 갖는 것으로 청대 정섭의 <쌍송도>를 들 수 있겠다. 실제로 김정희는 정섭의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쌍송도> 위에는 정섭의 독특한 서체인 '육분반서'로 이 그림이 그려진 이유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건륭 2년 정사년(1737)에 처음으로 동학 숙옹 선생과 교류하였는데, (그는) 순박하고 인정이 많으며 성실하고 참되었으며 고의(古意)가 넘쳤다. 낭떠러지 언덕에 있는 소나무와 측백나무를 많은 꽃이 따라가지 못하는 것과 같았다. 이후 십여 년이 지나 다시 만났는데 옛날 그대로였다. 3년 후에 다시 만났을 때에도 옛날 그대로였다. 이것이 어찌 소나무와 측백나무의 바탕이 천성에 근본하여, 봄여름에는 화려함을 다투지 않고, 가을겨울에는 바로 시들지 않는 것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쌍송도>를 그려 받쳤다. 나는 지극히 그릇이 못되지만, 또한 은밀히 소나무 반열에 기대어 두 노인이 서로 좋아하고 의지하고자 그것에 의지하여 하나의 증표로 삼고자 한다. 또 어린 대나무를 그 사이에 그려 뿌리가 (공의 집안의) 단단하고 위가 무성한 뜻으로 삼는 것이며, (이는) 공의 자손이 대대로 번성하면서 모두 어질고 현명한 것은 대체로 공의 순박하고 인정이 많으며 성실하고 참된 인격의 보답으로 반드시 그렇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건륭 23년(1758), 때는 무인년 3월 2일, 판교 서재에서 정섭이 그리고 쓰다.

   

乾隆二年丁巳, 始得接交于肅翁同學老長兄, 見其朴茂忠實, 綽有古意, 如松柏之在崖(巖)阿, 衆芳不及也. 後十餘年再會如古. 又三年復會, 亦如古. 豈非松柏之質本于性生, 春夏無所爭榮, 秋冬亦不久其搖落耶. 因畵雙松圖奉贈. 弟至不材, 亦竊附松之列, 以爲二老人者相好相倚, 藉之一證也. 又畵小竹襯貼其間, 作竹苞松茂之意, 以見公子孫承承繩繩, 皆賢人哲士, 蓋朴茂忠實之報有必然者. 乾隆二十三年, 歲在戊寅三月二日, 板橋제, 鄭燮畵幷題.

   

이 그림은 정섭이 66세 되던 1758년 3월 숙옹(肅翁)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그린 것인데, 다분히 상투적인 제작방식에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김정희처럼 이상적의 구체적인 언행에 대한 언급이 없어서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제발에 나온 대로 숙옹을 만난 연도를 따라 정섭의 환경을 생각하면 언제나 변함이 없는 숙옹의 인간적 모습이 나온다. 먼저 처음 만난 1737년은 정섭이 전 해에 북경에 열린 회시(會試)에 2갑 88등으로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지만 언제 관리로 임명될지 몰라 양주로 내려와 머물고 있을 때였다. 뜻은 품었으나 실행할 수 있는 길이 모호한 가운데 양주에서 여러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위안을 얻고 있었다.

두 번째 만남은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후였다. 정섭은 신군왕(郡王) 윤희(允禧)의 도움으로 1742년 50세로 범현(范縣)의 현감으로 지냈다가 1746년 유현으로 옮겨 산동지역에 든 기근을 극복하기 위해 구휼정책에 힘쓰고 있었다. 그로부터 3년 후 다시 만났을 때에도 여전희 백성들의 빈곤을 구휼하고 있었고 또한 아들이 병으로 요절한 아픔이 가속된 시기였다. 두 번째와 세 번째의 만남은 정섭은 관직에 있었지만 여유롭게 대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이 그림을 그리게 된 시대(1758)는 정섭은 관직을 사직하고 양주로 돌아와 직업적인 화가의 길을 걷고 있었다. 여유롭게 만날 수 있었지만 자신의 환경이 바뀐 것이었다.

   

정섭, <雙松圖>(軸), 1758년, 종이에 수묵,

203 × 102㎝, 山東省博物館.

이렇게 보면 정섭이 숙옹과 만났을 때에는 여러 인생의 부침을 거듭한 시기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숙옹은 정섭을 언제나 "옛날 그대로(如古)" 만났다. 이는 "봄과 여름에는 그 화려함을 다투지 않고, 가을과 겨울에는 바로 시들지 않는" 소나무의 덕에 비유될 만한 것이다. 그래서 정섭은 소나무 두 그루를 그려 자신과 숙옹이 서로 의지하는 모습을 형용하였던 것이다.

밑으로 내려앉은 절벽에 소나무 두 그루가 앞뒤에서 약간 거리를 두고 위로 솟아 있다. 절벽은 나무의 크기로 보아 그 힘을 지탱할 수 있을지 위태로움을 느끼게 한다. 나무 가지가 서로 무성하게 얽혀 있지만, 앞 나무는 짙은 먹으로, 뒤 나무는 옅은 먹을 사용하여 서로의 거리감과 차이를 표현하였다. 솔잎은 가늘고 힘찬 짧은 필치로 자세하게 그렸는데, 이는 줄기의 완만하고 부드러운 필치와 대조를 이룬다. 강함과 부드러움, 빠름과 느림, 빽빽함과 소원함 등이 서로 대립되면서도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또한 숙옹의 후손을 상징한 대나무를 중간 중간에 바위에 그렸다. 정섭이 소나무보다 대나무나 난초를 즐겨 그려서 그런지 대나무의 획은 빠르고 완숙한 경지를 느끼게 한다. 참으로 매력적인 것은 시간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앞에서 소나무 줄기와 솔잎의 표현에서도 그렇고, 소나무와 대나무의 필법 차이에서도 그러하다. 소나무가 오랜 시간 속에 성장한 것이라면, 대나무는 빠르고 무성하게 성장한 모습인 것이다. 이것이 필묵의 묘미로 표현되어 작품의 의미를 깊게 하고 있다.

그런데 이 <쌍송도>는 좋은 의미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상하면 할수록 식상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소나무 두 그루만 그려 '세한'의 의미를 강조하였으면 <세한도>처럼 두고두고 감상하면서 감정의 깊이를 음미할 수 있을 터인데 말이다. 심지어 자손의 번영을 상징하는 대나무까지 첨가하여 그리니, 많은 것을 설명하여 작품의 암축적인 의미를 떨어트려 버렸다. 또한 감정이 서로의 진솔함에서 시작되었어도 두 사람을 너머 숙옹의 후손에까지 이어져 버렸는데, 이는 감정이 한쪽으로 쏠려 균형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 아닌가. 왜 그렇게 되었을까. 아무래도 이 시기에는 정섭이 관직을 사직하고 양주로 물러나 직업화가로 활동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많은 그림 주문에 일일이 응대할 수 없었다. 오죽하면 이 다음해에 졸공화상(拙公和尙)의 권유로 그림의 가격표를 제정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이런 사이에 자신도 모르게 나를 위한 그림이 아니라 남을 위한 그림을 그리게 되었지 않았을까.

어려운 시대에 더불어 할 수 있는 동인이 필요하되, 명분이 분명하고 정도에 입각하여야 한다. 단지 주변적인 감정에 치우칠 경우 이는 '군자의 당'이 아니라 '소인의 당'이 되고 마는 것이다. 참으로 흥미로운 사실은 이를 바탕으로 그린 그림에도 감정을 사사롭게 흘렀느냐, 아니면 절제되어 있느냐에 따라 다가오는 매력이 다르다는 것이다. 나는 정섭의 <쌍송도>가 <세한도>에 비해 감정의 균형을 잃고 사적으로 흐르게 되었다고 생각해 본다. 이는 오늘날 예술과 사회와의 문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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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송식20 청 정섭의 <난득호도>와 <묵죽도>

2009년 12월 5일 토요일

오전 6:17

   

   

백성들의 울음소리 외면하기 어려워
  
[옛그림읽기] 정섭의 <난득호도>와 <묵죽도>

   

   

▲ 정섭, <난득호도>, 1751년, 45×100cm, 坊市工藝美術硏究所所藏

외면하기 어렵다

총명하기도 어렵고, 외면하기도 어렵네.

총명하면서 외면하기는 더 어렵다네.

한 발짝 내밟고, 한 걸음 물러서면

바로 마음 편안하지.

후대의 복 받기를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네.

건륭 신미년(1751) 가을 9월 19일 판교가 쓰다.

   

難得糊塗

聰明難, 糊塗難, 由聰明而轉入糊塗更難.

放一着, 退一步, 當下心安, 非圖後來福報也.

乾隆辛未秋九月十有九日 板橋識

   

우리는 뭔가 알려고 하면서 총명해지려고 한다. 어려서부터 교육을 통해 자연의 이치나 세상살이를 배우는 것도 이러한 의지에서 나오는 것일 수 있는데, 아마도 우리가 잘살고 싶은 욕망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총명은 출세, 명예, 부귀로 치달리기 쉽고, 잘사는 것은 연민, 아량, 관용, 더불어 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으니, 살다가 보면 총명한 것과 잘사는 것은 서로 일치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우리는 총명해지는 것은 배워 익숙하지만, 잘사는 것은 달리 배우지 못했지 않은가. 남을 연민하는 것 자체가 낯설고 심지어 부끄럽기까지 하니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일치는 우리뿐만 아니라 과거의 선인에게도 쉽지 않았던 것 같다. 언제나 자기 갈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순수의 본질을 찾으려 했던 예술가에게는 번뇌와 자책이 가득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총명과 잘사는 것이 함께 이루어질 수 없다면 최소한 양심의 울림은 있어야 감동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아마도 청나라 중기 정섭(鄭燮, 1693-1765)의 <난득호도>와 <묵죽도>에서 이러한 것을 엿볼 수 있을 것 같다. 오늘날 문화 권력과 자본의 폭력과 기만이 넘치는 사회에서 은은한 향기로 다가온다.

   

정섭, <묵죽도>, 종이에 수묵,

서비홍기념관소장

정섭은 청나라 중기 양주팔괴(楊州八怪) 중 한 사람이다. 건륭시대 양주에서는 염상들이 부유한 재력을 바탕으로 적극적으로 예술가를 후원하였기 때문에 많은 예술가들이 각지에서 모여들었다. 이들은 대체적으로 과거의 학업에 좌절한 끝에 전업하여 문학결사에 출입한 독서인이면서 그림만으로 생활을 영위하는 직업화가의 성격도 강하였다. 이들 중 대표적인 여덟 화가를 가리켜 양주팔괴(楊州八怪)라고 하는데, 오늘날 '개성주의화가'로 부르고 있다.

이 명칭은 당시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100여년이 지나 광서(光緖)연간에 왕윤(王鋆)이 저술한 『양주화원록(楊州畵苑錄)』에서 처음 나타난다. 왕윤은 양주팔괴라는 말을 맑고 명랑한 이미지와는 다르게 괴팍스럽고 현학적이며, "아무렇게 묘사한 그림에 엉터리 시를 쓰고 우쭐 하는" 비꼬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왕윤의 의미가 어떠하던 간에 양주팔괴(楊州八怪)의 '괴'는 '광(狂)'이나 '일(逸)'과 같이 기존의 생활양식이나 화법에서의 벗어남을 가리키기 때문에, 중국에서 일찍이 없었던 아름다운 작품을 남긴 양주팔괴를 '자유인'이라 불러도 좋을 것 같다.

정섭은 건륭원년(1736) 44세 늦은 나이에 진사가 되었고, 1742년 50세에 범현(范縣)의 현령으로 관직을 시작하여 1746년 54세에 산동성 유현(縣)의 현령으로 7년간 재직하였다. 그는 진사가 되기 이전 30세부터 10년간 양주에서 생활하였고, 진사가 되고 나서도 관직에 바로 등용되지 못하자 다시 양주에서 머물러 활동하였으며, 마지막으로 유현의 현령을 사직하고 1765년 73세로 외롭게 죽을 때까지 또다시 양주에 머물었으니, 양주는 정섭에게 서화를 팔아 살 수 있는 경제적 토대이면서 정신적 안식처가 되기 충분한 곳이었다.

이 <난득호도>는 정섭이 59세 되던 해인 1751년에 쓴 그의 좌우명으로 유주의 현령에 부임하고 있었던 시기의 작품이다. 그렇다면 정섭은 이 작품을 왜 썼을까. 그리고 그 의미는 무엇일까.

정섭이 1746년 범현에서 유현의 현령으로 승진하여 부임했을 때에는 유현은 어려운 상황의 연속이었다. 몇 년 동안 가뭄이 들어 밤낮으로 걱정하면서 기우제를 드리자 정성이 하늘을 감동했는지 비가 내렸는데, 이 비가 멈추지 않고 홍수로 범람해 버렸다. 백성들은 살기 위해 처자식을 버리고 외지로 도망갔으니 위정자로서 예술적 감성이 넘치는 정섭이 얼마나 마음아파하면서 자책하였겠는가. 그는 유명한 「사귀행(思歸行)」과 「도황행(逃荒行)」에서 그 참담한 상황을 노래하였다.

   

…… 소와 말이 먼저 재앙을 입었으며, 사람도 먹는 사람이 열에 셋이네. 어찌 가축 먹일 것을 생각하겠는가.…… 

열흘에 아이 하나 팔고, 닷 세만에 부인을 파니, 내일은 이 한 몸 보내 아득하게 먼 길을 떠나네. …… 몸은 편하나 마음은 도리어 아픈데, 남쪽 하늘 아득히 언제나 갈까. 만사는 말할 수 없으니, 바람 맞으며 눈물을 흘리네.

   

이와 함께 대나무 소리조차 백성의 신음소리로 듣고 그렸던 <묵죽도>에서도 고민하는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이 작품 오른 쪽 아래 육분반서(六分半書)로 된 제발에서 대나무의 의미를 설명해주고 있다.

   

관아에 누어 듣는 소소한 대나무 소리

백성들의 고통에 찬 울음소리인 듯하구나.

나 비록 일개 하급관리에 지나지 않지만

가지 하나 잎 하나에 모두 감정이 서려 있네.

   

衙齋臥聽蕭蕭竹

疑是民間疾苦聲

些小吾曹州縣吏

一枝一葉總關情

   

어디 대나무에서 백성들의 울음소리가 났겠는가. 명나라 중기 오파 문징명(文懲明)은 <청죽도(聽竹圖)>에서 "누가 대나무에서 소리가 난다고 하는가, 나로부터 듣는 소리임을 알아야 하네." "나는 나고, 대나무 또한 대나무일 뿐이네"라고 했듯, 백성의 울음소리는 정섭의 마음에서 나는 소리이다. 그만큼 정섭은 한시라도 백성의 고통을 잊지 않았음을 말하는 것이 다.

대나무 두 줄기가 가늘고 힘차게 위로 뻗어 있고, 줄기에는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대나무 잎이 중첩되어 나부끼고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아래에는 잎이 다 떨어진 작은 대나무 두 줄기가 뻗어 있다. 그는 대나무를 그리면서 옛 법에 빠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자기의 독선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조형적으로 보면 송대 문동과 소식, 원대의 오진, 명대의 서위, 청대 석도의 대나무를 본받으면서 버릴 것은 버리고 얻을 것은 얻어 자기의 세계를 이룩한 것이다. 그리고 보니 위의 <묵죽도>는 기존의 전통적인 묵죽화와 비슷하면서도 다르게 느껴지는 것이 이 때문인가.

   

   

정섭, <윤격육분반서폭(潤格六分半書)>, 1759년, 28×70cm, 坊市工藝美術硏究所所藏

암튼, 정섭은 어려운 백성을 위해 상부에 허가 없이 관창(官倉)을 열어 구휼하였다. 이는 많은 백성을 구하기도 하였지만, 도리어 상부 관리의 노여움을 사 관직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1753년 연말에 사직하였으니, 그의 <난득호도>는 사직하기 한 해전에 한편으로 한창 백성들을 구휼하고 다른 한편으로 「사귀행(思歸行)」을 지어 고향에 돌아가려는 마음이 절실하게 스며들 때 쓴 것이다.

<난득호도>에서 '총명'과 '외면'은 현실적인 관리로서 백성들에 대한 마음의 갈등이라 할 수 있겠다. 백성을 위해 관직이 있는 것이지만, 관직에 오른 관리는 백성의 실정과 유리된 채 움직이는 경우가 많다. 관리가 되어 백성을 위하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백성의 고통을 외면하기 어찌 어렵겠는가. 그만큼 역설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정섭 자신은 적자지심으로 외면할 수 없음을 강변하는 것이다. 그래서 "총명하면서 외면하기는 더 어렵다."고 한 것이 아닌가. 관리의 길로 나아갔다가 백성에게로 되돌아오는 것은 관리의 길을 포기할지라도 마음은 오히려 편한 것이다. 이는 후래의 복을 기대한 것이 아니라 바로 백성에 대한 연민의 발로인 것이다. 더불어 하는 마음, 미적인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난득호도>의 작품에서 글씨가 가져다주는 조형성은 바로 정섭의 인생길에서 갈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글자가 기우러졌다가도 바르고, 갑자기 커졌다가도 작아지고, 획이 길어졌다가도 작아지고, 빨라졌다가도 느리고, 굵어졌다가도 가늘어지고, 간격이 느슨하였다가도 조밀해지고 있다. 여러 글자를 중복하여 써도 똑같이 쓴 것이 없다. 가령 <난득호도>의 37자 본문에서 '난(難)'은 네 번 사용하였지만 모두 다르게 섰다. 전체적으로 보면, 넘어지려고 하다가 주춤주춤하면서 위태롭게 걸어가는 모양이다. 인생길을 걷는 자신의 모습인 것이다. "거리에 늘어놓은 못생긴 돌"이라든가 이치에 어긋났다고 비난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아슬아슬한 인생길에서 또 다른 그의 큰 모습을 볼 수 있었듯이, 자세히 보면 한 획 한 획이 변화무쌍하면서도 법도가 있고 질서가 있다. 구조적으로 기세적으로 획과 획, 글자와 글자, 항과 항, 그리고 전체와의 관계가 긴밀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자세히 보고 있으면, 글자가 전서와 예서 같은데 해서, 행서, 초서 기운이 엿보인다. 그의 글씨는 예서와 해서, 행서, 초서가 분명하게 구별되지 않은 일종의 잡체서(雜體書)로서, 그 스스로 "육분반서(六分半書)"라 하였는데, 이를 말하는 것인가. 한나라 예서의 팔분서(八分書)는 글자에서 전서 기운이 80%가 차지한다고 한 데에서 유래한 말이다. 그의 육분반서는 이 팔분서에 일분 반 부족하다는 것으로 겸손과 자조적인 의미도 들어가 있다. 근간이 되는 전서와 예서체에서 보이는 진한시대 금석의 강직하고 힘찬 기운은 바로 깐깐한 그의 인격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제백석, <부도옹>, 1953년,

116×41.5cm, 베이징중국미술관

정섭이 사직하고 양주로 돌아갔을 때 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그의 친구이자 역시 양주팔괴의 한 사람인 이선(李鮮)이 "삼절 시, 서, 화. 한 관리가 돌아왔네."라고 맞이하였으니, 글씨와 그림을 그려 생계를 유지하였어도 흥겨웠을 것은 틀림없다. 어쩔 수 없이 사직한 결과로 얻은 행복이라도 이는 백성의 아픔을 외면한 것이 아닌가. 이에 대한 태도는 어떠했을까. 정섭은 자기 결벽성을 보여주고 있다. 서화의 제작을 한편으로 철저하게 직업화한 것이다. <윤격팔분서폭(潤格六分書幅)>에서 이러한 것을 볼 수 있다.

   

큰 족자는 6냥, 반폭 족자는 4냥, 작은 것은 2냥이다. 족자와 대련은 한 쌍에 1냥, 부채 그림과 두방(신년에 써 붙이는 마름모꼴 정방형의 서화)은 각각 반냥씩이다. 선물이나 음식을 가져오는 것은 돈을 가져오는 것만 못하다. 손님이 주는 것이 꼭 내게 필요하지 않은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현금으로 준다면 마음이 매우 기쁘니 글씨와 그림이 모두 좋게 될 것이다. 선물은 시장에 팔아야 하고, 외상이나 부족한 돈은 장부에 기입하기 귀찮을 뿐이다. 게다가 내 나이가 많아 쉽게 피곤해지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과 잡담을 나눌 수가 없다.

대나무를 그리는 것이 대나무를 심어 파는 돈보다 많다. 여섯 자짜리 그림 하나가 3000냥이나 되니 말이다. 옛 친구나 인연으로 접근하여도 이는 가을바람이 내 귀를 스치는  것일 뿐이다.

   

大幅六兩, 中幅四兩, 小幅二兩, 書條對聯一兩, 扇子斗方五錢, 凡送禮物食物, 總不如白銀爲妙, 皆公所送, 未必弟之所好也. 若送現銀, 則中心喜樂, 書畵皆佳. 禮物旣屬糾纏, 欠尤恐賴賬, 年老神倦, 不能陪諸子作無益語言也.

畵竹多於買竹錢, 紙高六尺價三千. 任渠話舊論交接, 只當秋風過耳邊.

乾隆己卯, 拙公和尙屬書謝客, 板橋鄭燮.

   

자신의 작품에 가격을 정해 놓았다. 물론 이것은 양주에서 많은 고객이 밀려와 쉴 수 없었고 또한 고객들 중에는 괴팍한 사람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고 있었을 때, 마침 방문한 옛 친구 졸공화상(拙公和尙)이 이를 듣고 조언하여 지은 것이다. 원나라 때 유민화가 중 전선이 나라가 망하자 책임감 때문에 사대부로서 누릴 수 있는 혜택을 져버리고 은거하였는데, 자신의 이러한 행위를 진(秦)나라 귀족 소평(召平)이 나라가 망하자 스스로 평민이 되어 오이를 심어 팔아 살았던 것에 비유하여 <추과도(秋瓜圖)>를 그렸다. 정섭의 직업적 태도가 이를 연상시키는 것을 무슨 이유인가. 돈을 거론하는 것은 전통적인 사대부로서 있을 수 없는 행위이다. 그만큼 백성과 책임있는 사대부 지위에서 철저하게 자신을 분리시켜 놓은 것이다. 속물이라는 생각보다 의연하게 다가오니, 그의 양심적 균형을 엿보기에 충분하다.

지금 이렇게 정섭의 글씨와 그림을 감상하면, 정반대의 관리 모습이 떠오른다. 그것은 중국 근대화가 제백석(齊白石)의 <부도옹(不倒翁)>이다. 우리말로 오뚝이를 말함인데, 우유부단하고 기회적인 관리상을 풍자한 것이다.

   

아이들이 갖고 노는 오뚝이 영리해

넘어져도 부축 없이 재빨리 일어나네.

머리에는 눈썹과 나란한 오사모

간도 쓸개도 없지만 관직에 올랐네.

   

能供兒戱此翁乖

打倒休扶快起來

頭上齊眉紗帽黑

雖無肝膽有官階

   

앞 두 구절은 일반적인 오뚝이 모습을 형용하였고, 뒤 두 구절은 비유된 고관대작의 모습을 형용한 것으로서 그림의 내용이 된다. 필치로 사실적으로 그린 것이 아니라, 먹의 번짐으로 간결하게 그렸다. 웅크리고 뒤돌아 앉아 있는 모습이 옹졸하기까지 하다. 오사모는 어설프게 약간 기우러졌고, 고관의 관복은 몸에 어울리지 않게 크다. 저 얼굴의 표정을 봐라. 눈썹은 처져 있고, 콧수염이 빼족 나와 있으며, 눈 주변을 하얗게 칠해 놓았다. 주변의 상황을 살피는 소인배가 아닌가.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사람 사는 세상이라 정섭이나 부도옹과 같은 관리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정섭은 보이지 않고 부도옹과 같은 관리나 정치가, 예술가만 보이니, 슬프다. 그럼에도 옳고 그름에 대해 무감각해지고 더불어 하는 마음이 사라지는 우리 모습들이 더 슬프다.

출처: https://dolhan.tistory.com/entry/조송식의-옛그림-읽기 [BLUR: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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