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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 약술문제들 정리

AH101 2022. 7. 13. 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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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e Rodin 로댕

   

로댕 조각의 전통성과 현대성을 구체적인 작품을 예로 들어 논하시오. <2005 후기>

19세기 조각사에서 가장 빛나는 작가는 로댕(Auguste Rodin, 1840-1917)이었다. 로댕은 전통을 종합하면서 혁신을 이룬 조각가로 20세기 현대조각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 하였다.당시 회화는 아카데믹한 회화의 급진적 변화와 전개가 이루어졌지만, 조각에 있어서는 매체자체의 제한이 크기 때문에 회화의 진전에 비해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것에서 급격한 변화를 이끌어낸 사람이 로댕이다.

로댕은 문학적 상징적 주제를 사실주의적인 인체의 표정과 동작을 통한 극적이고 감정에 충만한 인물로 표현하였고, 궁극적으로는 19세기의 사조인 낭만주의와 사실주의, 상징주의, 그리고 표현주의의 영역을 두루 거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광선에 녹아드는 듯한 표면효과와 음영의 대비는 인상주의자들의 관심과도 일치한다. 인상주의의 회화가 일으킨 변혁을 잘 알고 있었고 순간적 변화와 움직임, 빛과 색채변화의 포착을 조각으로 실현하는 것에 큰 역할을 하였다.

로댕의 전통성과 현대성을 구체적인 작품을 통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청동시대>는 로뎅의 이름을 알린 작품이다. 콘트라포스토의 자세나 인체의 비례는 그가 이탈리아에서 보았던 미켈란젤로의 <다윗>이나 <죽어가는 노예>의 영향으로 고전조각에서 유래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창과 같은 소도구도 갖고 있지도 않고, 이상화되지도 않은 채 피부의 생생한 촉감이나 얼굴에서 생명력 넘치는 평범한 인간을 느낄 수 있으며, 모델링을 통한 명암효과를 최대한으로 살려 인상주의 화가들과 동질성을 보여주는 점 등은 전통성에서 탈피한 화가의 현대성이라 할 수 있다.

원래 파리장식미술학교의 정문으로 주문받은 <지옥의 문>은 단테 「신곡」의 지옥편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원래는 우주는 구획되어 있다고 생각했던 중세의 개념을 반영하여 문을 네모 형태의 패널의 연속으로 만들 예정이었다. 이는 기베르티의 <천국의 문>의 전통을 이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구획이 없어진 문은 파도가 치는 듯 유동적 표현과 인물의 dynamic한 표현과 인물이 바닥에서 돌출된 정도는 거의 환조에 가까워 전형적 부조의 개념에서 벗어났다. 지옥의 문에서 파생된 <생각하는 사람>은 인간의 비극적 운명에 대해 사색하는 사람의 근육은 에너지와 율동감이 과장되어 매우 표현적이다. 또한 <키스>는 인간의 세속적 애욕이 주재이다. 의도적으로 거친 대리석을 미완성으로 남겨 둔 것은 미켈란젤로의 미완성 작품으로부터 받은 영향이지만 한편으로는 각 부분이 완성되지 않아도 오히려 그것이 표현적 요소로서의 가능성을 가질 수 있다는 시사는 곧 현대조각의 새로운 한 면을 열어주게 되었다.

공공조각의 대표적인 작품인 <칼레의 시민>은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 전쟁 시 영국이 칼레시를 포위한 것에 대해 용감한 6명의 시민의 영웅적 행위를 소재로 하고 있다. 이 작품은 격렬한 비난을 샀고 결국 거절당하게 되었다. 기존 공공조각의 기념비적이고 용감한 영웅상은 유대감이 없고 포기, 좌절, 공포, 불안 등의 굉장히 인간적인 감정을 표출하는 인물들로 표현되었으며, 기존의 공공조각이 높은 단에 위치하는 것에 반해 ground level로 조각되어 전통적인 영웅상과 반대되었다.

이러한 그의 조각의 원천은 르네상스, 고딕, 바로크의 전통에서부터 시작되었으나, 조각의 표면은 그자체로서 중요한 표현적 요소가 되었으며, 신체의 일부분만으로 충분한 완성작품이 될 수 있다든지, 미완성 형태의 작품 요소로서의 가능성 발전, 나아가 조각이 사회적 기능을 갖기 이전에 작가의 개인적 표현매체라는 그의 미학은 현대조각의 새로운 개념이 되었다. 감정적인 그의 조각은 정신적으로는 고딕에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다.

   

   

   

2010년 4월 18일 일요일

오전 3:02

   

Hellenism 미술

<2008 전기 簡>

   

알렉산더 대왕의 사후인 기원전 4세기 말에 이르면 그리스 문화는 지중해 전역으로 스며들고 문화의 선도지인 아테네와는 멀리 떨어진 각 지역에 문화 중심지가 성장하고 있었다. 이때에 북쪽에서는 마케도니아라는 강력한 세력이 새로이 등장하였으며, 알렉산더에 이르러 페르시아제국 전체를 정복하고, 다뉴브강에서 나일강까지, 지중해에서 인도 너머에까지 그리스의 세력권을 확장시켰다. 알렉산더 대왕에 의한 제국의 건설은 그리스 미술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리스 미술은 이 제국이 건설됨에 따라 몇 개의 작은 도시 국가를 벗어나 세계의 절반에 해당되는 지역의 조형 언어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이 후기 시대의 미술은 그리스 미술이라고 부르지 않고 알렉산더 대왕의 후계자들이 동방의 나라에 건설한 제국의 이름을 따서 헬레니즘 미술이라고 부른다.

이 제국의 수도들이었던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시리아의 안티오크, 소아시아의 페르가몬 등은 그리스 본토에서 미술가들에게 요구했던 것과는 상이한 요구를 하였다. 그들은 기원전 4세기의 자연주의에 대한 매혹을 고전기 조각의 이상화된 영웅상과는 동떨어진 주제로까지 확장하여 술 취한 사티로스, 노파, 어부 등 시대를 초월하여 다양한 분위기를 갖는 인물들을 대상으로 삼았다. 헬레니즘 양식은 유연하고 생동감이 있으며 불규칙적이고 때로는 비대칭적이다. 이들 조각들은 움직임의 표현에서나 자세, 몸짓, 얼굴 표정을 통해 생생한 감정을 보여주기 위해, 기술적인 극치를 최대한으로 보여주고 있다. 건축에서는 이전 도리아 양식이나 이오니아 양식의 평이함과 우아함에서 벗어나 기원전 3세기 초에 고안된 코린트양식이 유행하였으며, 일반적으로 건물 전체에 더 많은 화려한 장식물을 입혔다.

헬레니즘 양식의 대표적인 예는 기원전 160년경에 새워진 페르가몬의 거대한 제우스 신전이다. 이 제단의 프리즈에 표현된 <신들과 거인들의 전투>에서는 초기 그리스 조각의 조화미와 세련미를 찾아볼 수 없으며, 대신 강력하고 드라마틱한 효과를 느낄 수 있다. 모든 형상마다 격렬한 몸짓과 나부끼는 옷주름이 충만하며, 거의 환조의 형태로 되어 제단의 계단으로 흘러넘치기도 한다. 또한 1506년에 발견된 <라오콘, 기원전 175-150년경>은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드》에 나오는 라오콘이 포세이돈이 보낸 바닷뱀들에게 공격당하는 모습을 표현하였다. 뒤틀리고 변형된 인물들의 역동적인 자태나 라오콘의 몸에서 보여 지는 과장된 근육표현, 파토스가 승화되는 얼굴표정 등은 긴장이 극대화된 표현으로써 가장 절정의 극적인 모습을 형상화 하였다.

헬레니즘 시대의 미술은 미술이 오래전부터 유지해왔던 주술적 종교적 연관성을 거의 상실하였다. 모뉴멘털한 조각은 더 이상 엄격한 종교의식을 위해 헌납되지 않았고, 귀족이나 왕조의 영광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점차 궁정을 장식하는 데 이용되었다. 미술가들은 기술 자체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모든 움직임, 표정, 긴장 등을 담고 있는 극적인 상태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표현해내느냐 하는 문제는 한 all술가의 솜씨를 시험하는 가장 적합한 과제가 되었다.

   

   

   

   

Minimalism

미니멀리즘 <2005 후기 2007 전기 2008 전기 簡>

   

몇몇 사람들에게 무의미한 속박처럼 보이는 전통으로부터 예술을 해방시키기 위한 시도로서 미술가들은 예술의 군더더기를 벗겨내 그 본질만을 남겼다. 미니멀리즘은 조각부분에 특히 두드러지며, 구성주의와 말레비치의 절대주의에 그 기원을 둔다. 미니멀리즘은 60년대 후반 프랭크 스텔라(Frank Stella)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하드-에지 미니멀 아트 화가의 원형이었는데 추상표현주의의 에너지가 충만한 행위적 미술을 은근히 비판하였다. 그의 같은 중심을 지나는 기하학적인 도형과 가는 선으로 패턴화 된, 일군의 엄격하고 금욕적인 흑색 회화를 통해 추상주의에 있어 결정적인 의미를 지니는 개성주의는 완전히 제거되었다.

이처럼 추상표현주의의 과도한 표현과 팝 아트의 대중성에 반발하여 작가의 의지와 창조성을 배제시키고, 전통회화의 illusion과 narrative를 없애, 작품자체의 물질성만을 중요시 여겼다. 이는 스텔라가 말한 "What you see is what you see."라는 것에서 잘 나타나 있듯이 회화가 가진 모든 요소가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 최소화 된 것을 말한다. 따라서 미니멀리즘은 매우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를 띠고, 단일한 색을 가지며, 기계적 방식으로 제작된 특징을 보인다.

또한 기존의 전통적인 작품들(모나리자)은 작품의 의미가 그 안에 내제되어 스스로 완결된 존재로써 그것이 어디에 있건 그것의 의미는 변하지 않았지만, 미니멀리즘 미술은 시공간에 구애를 받으며, 작품의 의미는 외부에 존재하는 특징을 지닌다. Tony Smith<Die, 1962>라는 작품에서 (일루전과 서사적 요소 배제) 전통적인 기단을 무시하고 바닥에 놓음으로써 실제공간과 유리된 초월적 공간이 아닌 우리들과 같은 공간을 점유하는 것으로 바꾸어 놓았다. Robert Morris는 3개의 똑같은 L형의 빔을 서로 다르게 배치한 작품을 제작하였는데, 관람자는 그것이 똑같은 형태임을 알지만, 그것이 놓은 곳에서 그것들을 우리가 지각할 때의 느낌은 너무도 다르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이는 로잘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가 '현상학적인 지각'이라 부른 것으로 작품의 의미는 맥락에 따라 환경에 따라 달라짐을 알 수 있다. 이는 Donald Judd<무제, 1967>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이러한 작품들은 점점 대형화되어 상상할 수 없는 스케일로 변화하여 공공미술에 많이 이용되었다.

미니멀리즘은 미국에서는 추상미술의 뒤를 잇는 것이 되었지만 한편으로 유럽에서는 미니멀리즘이 미국의 제국주의적 성향, 산업주의적 영향을 거대한 스케일로 장악하고 있다고 하는 비판의 목소리가 거세다.

   

   

   

   

   

   

   

   

   

   

Conceptual Art

   

1960년대 말아서 70년대 초의 미술계는 "회화는 죽었다."라는 구호로 가득했다. 개념미술가라고 자칭하는 그룹의 작가들에게 있어 회화뿐 아니라 조각도 이미 한물 간 유산에 불과했다. 조셉 코주스 (Joseph Kosuth)는 "진짜 미술품이란 역사적인 호기심거리에 불과하다"고 단언했다. 개념미술은 미술작품의 물질화에 대한 의문이며, '미술의 비물질화'를 표방하는 사조의 일부분이다. 간단히 말해 창의적인 아이디어야말로 미술의 기본을 이루는 요소로서 이 아이디어에 고무 받아 실제의 미술작품을 만드는 작업은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의미이다. 개념미술은 마르셀 뒤샹이 미술에 있어 중요한 것은 미술품 그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만드는 아이디어라고 본 점, 그림을 만드는 것은 관람객이라고 하면서 관람객의 참여를 기대한 것에 의해 이미 예견되었다.

미술은 독창적 개념에 있는 것이지 실제의 작품 속에 있는 것은 아니다. 미니멀리스트들이 그들의 작품 속에서 이미지, 개성, 감정, 메시지, 수공예적 성격을 제거해버렸다면, 개념미술가들은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미술작품 형식을 추방해버렸던 것이다. 개념미술은 예술가의 사상을 강조하는 사조는 어떤 것이든 속하는데, 따라서 언어가 재료가 될 수 있고, 몸을 재료로도 쓸 수 있다. 조셉 코주스는 <의자 Ⅰ과 Ⅲ, 1965>에서 의자가 존재하는 방식을 의자, 의자의 사진, 의자의 사전적 정의로 표현하여 언어가 미술의 중요한 수단이 되었음을 알려준다. 또한 한스 하케(Hans Haacke)는 <응축입방체, 1963-65>에서 작품이 주변의 자연적 물리적 환경변화에 따라 변하여, 작품의 의미는 외부에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또한 <Metro Mobilitan>에서는 메트로폴리탄과 모빌사의 전시후원의 가려진 진실을 폭로하며, 미술작품의 의미는 정치와 권력이 만들어 주는 것이라 주장한다.

   

   

   

   

Pop art

*Pop art <2003 후기 簡> *팝아트의 주요화가와 그 특징을 설명하시오. <2001 전기>

*1910년대 입체주의 미술가들과 60년대 팝아트 미술가들이 어떻게 생활 속에서 발견되는 재료들을 미술에 도입하여 사용했는지 그 차이 및 공통점에 대해서 논술하시오. <1999>

1960년대 초기에 미국에서 발달하여 미국 화단을 지배했던 구상 회화의 한 경향이다. 팝 pop이라는 명칭은 '대중적', popular에서 유래하였으며 일상생활에 범람하는 기성 이미지인 대중적 이미지에서 제재를 취했던 미술의 경향을 일컫는다. 팝 아트가 급속히 일반화된 것은 1962년 뉴욕의 시드니 제니스 화랑에서 열렸던 뉴리얼리스트전 이후의 일이나 영국에서는 이미 10여 년 전부터 그 전조가 된 미술가들의 활동이 있었다. 1950년대 초부터 해밀턴, 파올로치 등의 젊은 작가들이 모여서 대중 사회의 문화, 예술, 매스 미디어와 같은 문제들을 토론하고 전시회를 개최함으로써 팝아트라는 명칭을 얻게 된 것이다. 영국의 팝아트는 초기부터 사회 비판으로서 사회와 예술을 접목시키고자 했던 젊은 예술가들에 의해 전개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팝 아트는 1950년대 초기의 미국화단을 휩쓸었던 추상표현주의의 애매하고 환원적인 형태와 주관적인 미학에 대한 반동의 결과로 나타나게 되었다.

60년대에 접어들면서 미국사회는 대량생산과 매스미디어의 발전에 의한 소비문화와 대중문화의 시대가 도래 하였다. 상품은 광고를 통해 비쳐지는 이미지가 모든 것을 결정하게 되었다. 이전까지 미술이 유일한 이미지이자 작품이었지만, 이제는 이러한 이미지와 상품의 홍수 속에서 미술이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미국의 팝아트는 이러한 현대의 테크놀로지 문명에 대한 낙관주의를 기조로 하고 있다. 미국 팝 아트의 가장 직접적인 선조는 라우센버그와 제스퍼 존스를 들 수 있다. 그들은 회화의 마지막 종착지 같던 추상표현주의를 넘어 앞으로 나아갈 길을 제시하였다. 그들은 다시 재현으로 되돌아갔다. 라우센버그는 일상생활에서 흔히 발견되는 물체, 이를테면 콜라병, 자동차 타이어, 침대 등을 이용하여 컴바인 페인팅을 창안함으로써 팝 아트의 기틀을 마련했다. 제스퍼 존스는 라우센버그의 정열적이고 혼란스러운 제작법과 반대되는 차갑게 계산된 그림을 그렸다. 누구나 알아볼 수 있지만 눈여겨보지 않는 것들을 대상으로 삼아 표현함으로써 이미지와 실재사이의 경계를 불분명하게 만들었다. 그들의 현대적이고 평범하며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이미지를 사용하는 특징은 팝아트에 영향을 주었다.

<모노그램, 1955-59>/ <성조기, 1598>

미국의 팝 아트는 흔히 발견되는 일상의 이미지나 물체를 미술 작품으로 전환시켰는데 이 점은 다다적인 방식이다. 그러나 다다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팝 아트가 세련된 고도의 기술에 의해 '일상'을 미술의 영역으로 또는 사회의 체계 속으로 끌어들였으며 풍자적이거나 무정부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또 화면에 나타난 이미지는 구상적이지만 회화 체계 자체는 추상성이 높다. 팝 아트는 추상표현주의에 반발하는 반대운동이긴 하지만 추상표현주의로부터 무한히 확장된 의미를 지닌 미술의 가능성과 '전면 회화'인 거대한 크기의 작품이 자아내는 효과의 의미를 물려받았다.

앤디 워홀(Andy Warhol)은 팝아트를 대표하는 작가일 뿐 아니라 대중매체가 만들어낸 60년대 당시 미국사회의 슈퍼스타(Celebrity)였다. 그는 미술의 전통적인 가치, 독창성에 대한 개념에 강한 의문을 제기하였다. 따라서 그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아이콘(코카콜라 등의 상품, 마릴린 먼로 등의 유명인), 비극적인 사건 등을 소재로 삼아 작업방식도 그의 팩토리에서 실크스크린과 같은 대량생산 방식으로 제작하였다. 이는 자본주의 세계를 반영하는 것으로 소비중심주의, 물질중심주의를 비난하기 보다는 동조하고 찬양하였다. <100개의 캠벨 수프 깡통, 1962>, <골드 마릴린 먼로, 1962>

로이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stein)은 당시 대중문화를 반영하는 통속적 만화(특히 로맨스/ 전쟁)만화에서 발취한 것들을 거대하게 확대시킨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디테일을 삭제하여 원작을 단순하고 크게 그렸으며, 면은 색이 분할되어 점으로 찍은 인쇄기법인 ben day-dot을 사용하여 표현하였다. <Whaam!, 1963>

제임스 로젠퀴스트(James Rosenquist)는 거대한 팝 그림들 속에 비개성적이고 일반화된 광고판 제작 기법을 사용하여 이미지를 분해하고 분해된 이러한 파편들을 무질서하게 늘어놓았다. 전쟁과 핵폭탄, 대량살상, 헤어드라이기, 파스타 등의 무과난 이미지들이 섞여있는데 이는 충격적이고 공포스러운 일들이 이미지화 되어 계속적으로 노출되어 무감각해지는 내성화를 드러내고 있다. <대통령 선거, 1960>, <F-111, 1965>

클레스 올덴버그(Claes Oldenburg)는 우리에게 친숙한 사물들을 삼차원적이고 거대하게 확대시키고 재질도 변형시킨 작품을 만들었다. 따라서 그는 관객들의 무감한 상태에 경각심을 불러일으켜 "사물의 힘을 되돌려 준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는 공공조각도 많이 제작하였다. <부드러운 변기, 1966>, <표범의자, 1963>

미국의 팝아트는 뉴욕뿐만 아니라 서부에서도 독자적인 전개를 보여, 뉴욕 팝과 함께 켈리포니아 팝이 2대 조류를 이룬다.

   

   

Surrealism

초현실주의 미술운동<2005 전기 2006 전기 簡 >

다다와 초현실주의 미술운동을 간략히 설명하면서 그 공통점과 차이점을 설명하시오. <2002 전기>

초현실주의는 다다의 직접적인 계승자이다. 1차 대전 이후 합리성과 이성에 대한 반발과 저항이 일어났고 초현실주의는 합리성에 반하는 비합리성과 의식에 반하는 무의식적 세계를 체계적으로 탐구하였다. 제 1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이듬해인 1919년부터 제 2차 세계대전 발발 직후까지 약 20년 동안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과 미국에서 널리 유행한 초현실주의는 원래 문학에서 출발한 예술사조로서 그 대부는 시인 앙드레 브루통이었다. 초현실주의는 미술, 문학 운동을 넘어선 삶의 방식이자 철학적 견해의 표현이었다.

1924년 브루통이 '제 1차 초현실주의 선언'을 함으로써 공식적인 시작을 알리게 된다. 그는 다다의 허무적이고 파괴적인 특질을 개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다의 여러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비교적 조리 있는 철학을 지닌 운동을 창조하였다. 그는 현실의 상위(sur)에 존재하는 현실이 또 하나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초현실주의는 현실의 위에 있는 초월적인 현실이 있다는 믿음에 기반 한다."고 하며, 초현실도 엄연한 현실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꿈과 무의식의 세계를 탐구하는 것에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학적 사고가 결합되었다. 초현실주의는 프로이트의 자유연상법과 꿈의 분석에 기저를 두었기 때문에 시인과 화가들은 무의식의 이미지를 자극하기 위해 자동기술법(Automatism: 의식적인 통제를 거치지 않은 창조행위)을 사용하였다.

이탈리아 화가인 키리코(Chirico)는 공식적으로 초현실주의 작가는 아니지만 초현실주의의 선구자의 역할을 하였다. 초현실주의자들은 그의 작품들에서 거의 단정적인 꿈의 이미지에 대한 언어를 발견하였는데 몇몇 미술가에게는 이것은 거의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초기부터 이 운동에는 다다에 속한 예술가들인 막스 에른스트(Marc Ernst)와 아르프가 속해 있었다. 이들은 미로, 달리, 마그리트와 같은 자체 내의 중요한 예술가들을 길러냈다. 그러나 다른 주요 예술가들도 공식적으로는 이 운동에 가담하지 않았지만, 초현실주의적이라고 분류할 수 있는 이미지들을 탐구하기 시작하였다. 초현실주의는 1920년대와 30년대에 유럽에서 가장 두드러진 아방가르드 예술이었다.

일반적으로 초현실주의자들은 오토마티즘 원리를 중요시하였으나 단일한 양식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크게 나누어 보면 두 가지 형태가 있는데, 첫째는 구상을 기반으로 하여, 일반적으로 현실의 상황에서 멀리 벗어나 병치, 전환, 치환 또는 변화를 시킨 자연형태의 정확한 형태에 의존한 사실주의 양식이 있다.(달리, 마그리트) 둘째는, 추상을 기반으로, 자연에서 발견되는 형태들을 구체적으로 지시하지 않는 이미지와 무의식 내에서 탄생된 형태들을 지향하는 우연, 즉흥적 화법의 양식이 있다.(미로, 에른스트)

르네 마그리트(Rene Magritte)는 정확하고 단조로운 산문적 묘사를 하는 아카데믹하고 자연주의적이며 재현적인 기법에서는 완벽하였다. 그는 크기에 대한 모순을 놀랍게 이용하고, 중력의 법칙을 부정하며, 잘라서 이젤에다가 옮겨 놓을 수 있는 물질들로 하늘을 채우는 등, 불합리한 것들을 조합해서 충격과 불안을 일으켜 전통적인 기대감을 가장 능숙하게 실망시킨 화가였다. 그의 낯설음은 일상생활의 대상들을 사용함으로써 더욱 고조된다.

<이미지의 배반, 1928-29>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도 마그리트와 마찬가지로 비현실적 주제들이 마치 실제인 듯이 보이는 19세기 아카데미의 자연주의 기법을 적용시키는 것이었다. <기억의 영속, 1931>

호안 미로(Joan Miro)의 전매특허인 환상적인 형태들은 항상 실제 대상을 의미한다. 그는 해, 달, 동물 같은 자연의 사물들을 특유의 생물과 같은 형태의 기호로 표현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형태들은 점차적으로 사실과 환상이 결합된 아메바 같은 둥글고 작은 덩어리와 '생물형태적(Biomorph)'인 형태로 단순화 되었다. <달을 향해 짓는 개, 1926>

주로 독학을 했던 이브 탕기(Yves Tanguy)는 부르통의 소개로 초현실주의에 동참하였다. 그는 자신만의 생동감 있고 독창적인 이미지를 발견하고 발전시켜서, 정신의 환각적 상태를 실현시켰다. 탕기의 이미지는 종종 바다 속의 풍경처럼 그때까지의 과학으로는 알려져 있지 않았던 아메바 같은 생물체를 닮은 듯한 것들이 깔려 있는 영원한 해저를 암시한다.

초현실주의는 파리에서 탄생하였고 제 2차 세계 대전 때까지 파리를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나 빠르게 국제적인 운동으로 확산되어 갔다. 1938년 파리 전시회에는 14개국이 참가하였다. 초현실주의는 문학과 시각 예술 양쪽에서 중요한 운동이었다. 제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조직된 운동이 해체되고, 그 추진력이 고갈되었다 할지라도, 초현실주의의 정신과 방법들은 계속 발전하여 많은 나라들의 개개 미술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Venetian school

베니스 화파의 특징<2001 전기>

   

베네치아 화파는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르네상스 시대에 활약한 화가들 및 그들의 미술을 말한다. 유럽의 동쪽 항구로 동방무역의 중심지였던 물의 도시 베네치아는 지적이고 엄격한 이상을 강조하던 피렌체나 로마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베네치아 미술의 가장 큰 특징은 빛에 의한 '색채'이다. 엄격하고 완벽한 소묘를 추구한 중부 이탈리아 화풍과는 베네치아에서는 색채가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이곳은 무역으로 돈을 번 부유한 후원자들이 많아서 지성미 보다는 화려함을 강조하는 그림이 곽광을 받았다. 또한 많은 이국적인 물품들이 수입되던 이곳은 화려한 것을 좋아하고, 술 마시고 노래하며 인생을 즐기는 감각적인 쾌락의 도시였다. 따라서 베네치아 화풍에서는 도색적이며 세속적인 주제를 표현하는 것이 특징이다. 초기 르네상스 시대, 즉 15세기의 베네치아 화단은 벨리니 가문이 주도하였다. 자코포 벨리니(Jacopo Bellini)는 젠틸레 다 파브리아노의 제자로, 그의 양식은 국제 고딕양식의 다소 뻣뻣하지만 화려한 양식을 보여주었다. 그의 영향은 젠틸레 벨리니, 지오반니 벨리니에게로 이어지게 된다. 젠틸레 벨리니(Gentile Bellini, 1431-1516)는 한때,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의 술탄 메흐멧 2세의 궁정에서 궁정화가로 일했으며, 형식적이고 정적인 그림을 그렸다. 지오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는 오랜 생애동안 지속적인 작품활동을 하였으며 창의력이 풍부하고 당대의 변화하는 풍조를 민감하게 수용하였다. 그의 화풍은 논리적인 공간과 비례를 추구하는 피렌체의 양식과 플랑드르의 세밀한 화풍을 이어받았다. 그의 작품<성모와 성인들, 1505>에서는 정교하게 구현된 원근법과 부드럽고 다채로운 색채들이 강렬한 인상을 준다. 벨리니의 후기 걸작들을 가능케 해준 것은 유화기법의 유연성과 광택이었다. 예를 들어 <성 프란체스코의 법열, 1470-80>은 풍요로운 색채와 초자연적인 광선의 효과를 보여준다. 또한 이전보다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 풍경과 인물의 결합은 이후 지오르지오네와 티치아노가 이루게 될 융합을 예견하고 있다. 그는 대단히 바쁜 공방의 우두머리였는데, 그의 공방에서는 친퀘첸토의 유명한 베네치아 거장인 지오르지오네와 티치아노를 배출했다.

지오르지오네(Giorgione, 1478?-1510)는 벨리니가 하지 못했던 일, 즉 풍경과 인물을 하나의 신비로운 전체로 통합시켰으며 인간과 자연사이에 새로운 조화를 성취하였다. 그는 진작으로 여겨지는 작품도 겨우 다섯 점 밖에 되지 않으며, 이들 그림들은 수수께끼와 같은 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의 확실한 진작인 <폭풍우, 1506>는 화면 전체에 스며있는 빛과 공기에 의해서 풍경과 인물이 하나의 전체로 융합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예전과 달리 풍경은 그림의 진정한 주제가 되고 있다.

친퀘첸토의 베네치아는 호사스러움이 극에 달했지만 한편으론 쇠퇴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하지만 미술은 여전히 활기를 띠어 16세기 중엽에 이르러는 회화의 주도권이 피렌체와 로마를 거쳐 베네치아로 넘겨졌고, 당시 베네치아 회화의 독보적 존재는 티치아노(Titian/Tiziano, 1485?-1576)였다. 그는 색채에 의해 입체감을 표현하는 베네치아 미술의 특징과 함께 바로크로 계승되는 역동성을 함께 보여주었다. 그의 작품 <페사로 마돈나, 1519-26>에서는 혁신적인 구도로 성모를 비대칭적으로 배치하였지만, 색채를 이용해 통일성을 회복하였다. <성모의 승천, 1516-18>에서는 다채로운 인물들의 역동적인 동세를 통한 극적인 율동감, 빛나는 색채 등이 나타나 바로크 미술을 예견하고 있다. 그는 또한 초상화로 가장 큰 인기를 끌었는데, 그의 초상화는 후기로 갈수록 보다 대담하고 자유로운 양식으로 발전했다. <젊은 영국인, 1540년경>에서 보다시피 세밀한 입체감의 묘사는 눈에 띠지 않으나 엄숙하고 존엄한 모습을 한 초상화 그렸다.

cf) <우르비노의 비너스, 1538년경> 관능적이고 세속적인 베니스 특유의 분위기를 잘 나타내며 촉각적인 표현이 특징이다.

<유로파의 강탈, 1562> 스페인 펠리페 2세를 위해 제작한 7점의 신화화 중 하나로 직각 삼각형의 구도를 지니고 있으며 특히 공간과 대기에 대한 환성적인 묘사와 찬란한 색채감을 보여준다.

   

16세기 후반 베네치아 화파의 대가는 틴토레토(Tintoretto, 1518-94)였다. 그는 티치아노의 형태와 색채에 있어서의 단순한 아름다움을 거부했다. 그는 사람들이 극적인 긴장감을 느낄 수 있도록 사물을 새로운 관점에서보고자 했으며, 과거의 전설과 신화를 표현하는 새로운 방법을 탐구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표현의 격렬함과 자유로움, '미완성인 채로 두는' 처리법이 특징이다. <성 마르코의 유해 발견, 1562년경>에서는 성 마르코의 유해를 알렉산드리아에서 베네치아로 옮겨왔던 이야기 중의 한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데, 극단적으로 대조되는 빛과 어둠, 원경과 근경, 조화가 결여된 몸짓은 극적인 긴장감을 유발한다.

틴토레토의 경쟁자였던 사람은 파올로 베로네제(Paolo Veronese, 1528~88)였다. 그는 틴토레토와 달리 티치아노의 초기 작품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 베로네제는 감각의 기쁨과 베네치아 문화생활의 고상함을 찬양하는 풍요한 축제그림(pageant painting)들로 유명하다. 그는 위대한 초상화가이기도 했으며 마음이나 정신의 활동보다는 오히려 모델들의 풍만한 육체와 모피, 실크 등으로 감싸여 있는 귀족 신분의 물질적 화려함을 전달하였다. 그의 작품<레비가의 향연, 1573>에는 편안하고 충분히 알기 쉬운 장관 속에 풍부한 세부들을 조직해 낸 점이 그의 작품의 특징이자 업적이다.

   

베네치아 화파가 부각되었던 마지막 시기는 18세기였다. 지오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Giovanni Battista Tiepolo, 1696~1770), 프란체스코 구아르디(Francesco Guardi, 1712-93)

국제적 명성을 지닌 뛰어난 화가들이 이 시기에 여러 명 배출되었다.

   

   

   

   

   

대지미술 Earth work <2009 후기 簡>

   

대지미술은 기하학적이고 구조적인 관심과는 대조를 이루지만 전통적인 방법과 형식을 거부하고자 하는 점에서는 개념미술, 미니멀과 공통된다. 대지미술은 풍경, 대지, 지구 그 자체를 강조하는 경향이다. 이들은 종종 미술관이나 화랑에서 전시할 수 없는 종류의 작품을 제작했는데,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미술 오브제나 작품을 만들지 않고 바위, 토지, 잔디, 눈과 같은 물질로 작업한다. 그들의 작품은 근본적으로 익명적이고 비영구적이다.

대지미술에서 가장 유명하고 두드러진 미술가인 크리스토(Christo)는 기념비적인 공공건물인 베른 미술관을 마치 거대한 소포처럼 플라스틱 막으로 포장한 포장 설치작업으로 국제적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그는 북부 캘리포니아의 두 지방을 가로지르는 40킬로미터의 나일론 울타리<길게 뻗은 울타리, 1972-76>을 세웠고, 마천루를 포장하는가 하면, 오스트레일리아 해안의 100만 평방피트를 포장하였다. 그에게 있어 이러한 작품들의 포장을 세우는 기술, 주변 풍경과 주변사람들에게 끼친 충경, 환경적 사회적 영향과 같은 것들은 전체의 개념에서 중요한 요소들이다.

또한 전형적 지구미술가인 로버트 스미손(Robert Smithson)은 부패, 화석화에 반대되는 지칠 줄 모르는 자연의 무한한 풍요로움을 주제로 담을 수 있는 장소를 선택하여, 자연 풍경을 원재료로 삼았다. <나선형의 둑, 1970>에서 불도저를 동원해 수십 톤의 흙을 옮겨놓는 거대한 작업을 지휘했다. 단순한 형태와 분명한 상징은 방대한 규모로 실현되면서 새로운 의미를 같게 되었지만 스미손은 특히 변화라는 주제(이 방파제는 즉시 부식되기 시작했다)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라파엘 전파

Pre-Raphaelites <2001 후기 簡>

   

1848년경, 가브리엘 로제티를 필두로 젊은 아티스트들이 모여서 만든 화파이다. 그들은 르네상스의 라파엘의 회화적 혁신 이후, 아카데미 미술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타락했다고 보고, 라파엘이 만들어 놓은 세련되게 다듬어놓은 형식 그 이전으로 돌아가기를 동경한다는 의미로 라파엘 전파라고 이름 하였다. 라파엘은 1520년에 죽었기 때문에 1500년 이전의 초기 르네상스, 중세를 도덕적인 미술로 생각하고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고자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영국의 미술을 개혁하고자 했던 모임이다.

과거에 대한 집착, 종교적인 동경, 현재에 대한 혐오는 낭만만주의적 성격을 띤다. 산업혁명으로 인해 물질에 사람들이 집착하고 물질화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당대의 사회를 혐오하였고, 당시 아카데미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값싼 부르주아들의 취향이며, 이러한 것들은 너무 관습적이고 정형화되어 더 이상 아무 자극도 주지 못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한 물질 사회에서 도피하여 과거의 영광스러운 곳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다.

그들의 작품은 센티멘털하고 도덕성을 중시하며, 상징적인 그들의 화풍은 확실하지 않고 애매모호한 것이 또한 특징이다. 그들의 작품에는 모든 디테일에 상징이 들어나 굉장히 상징적이며, 그들은 세부를 성실히 묘사하는 것이 화가가 가질 수 있는 도적적인 자세라고 생각하여 모든 부분을 아주 세밀하고 정확하게 그린 것이 특징이다. 그들은 사실주의자들의 장르화도 그리지만 주로 추구했던 주제는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성경, 영국 극작가들의 소설과 같은 전통적인 주제를 따르고 있다.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는 종교적 감성에서 시작하여 점점 개인적 상징, 탐미주의로 나가갔고 이 때문에 라파엘 전파와 갈라서게 되었다. 그의 대표적 작품으로는 <수태고지, 150>가 있다. 존 밀레는 그의 대표적 작품인 <요셉의 집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 1850>에서 세부를 정확히 그리는 중세적 특징과 일상모습과 그 세부에 모든 종교적 상징을 부여하였다.

브라운은 공식적으로 라파엘 전파에 합류했던 사람은 아니나 주요멤버들이 그를 스승으로 여겼다. 대표적 작품으로는 <영국이여 안녕, 1855>, <노동, 1855>이 있다.

헌트는 일관적으로 종교와 관련한 주제를 그렸다. 대표적 작품으로는 <깨어나는 양심, 1852-54>, <고용된 양치기, 1852>가 있다.

사실상 이들은 당시 일반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었고, 그렇게까지 성공한 운동을 하지는 못했다. 감상적이고 센티멘털한 느낌이 강하여 당대 사회와 많이 유리된 느낌이 있었다.

   

   

   

미술과 공예운동

미술과 공예운동의 성립배경과 주요 특징.<2002 전기 簡>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에 의한 변화와 근대화라는 것은 19세기에 가장 많은 영향을 주었다. 영국은 1851년 최초로 '만국박람회'를 개최했다. 만국박람회는 산업혁명에 의한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새로운 산업제품을 전시할 뿐 아니라 이를 통해 자국의 대외적 과시, 각국의 정치, 외교, 문화를 대변하는 장이 되었다. 당시 영국은 자신들이 자랑하던 섬유제품을 전시하여, 과시를 하려고 했었는데, 실제로 박람회에 출품한 섬유제품들은 디자인이 서툴렀다. 이는 기계에 의해 모든 것이 표준화되어 빠른 시간 내에 효과적으로 대량생산하는 방식으로는 필연적인 결과였다. 따라서 박람회가 끝난 다음에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점을 약점으로 생각하였다. 이를 주도했던 사람은 앨버트 공으로, 그는 미술과 문화에 관심을 가지면서 디자인이야말로 경제를 살린다고 보았다.

이러한 배경으로 디자인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이때에 나왔던 움직임의 하나가 미술과 공예운동이었다. 중심인물은 철학자이자 평론가였던 존 러스킨, 윌리엄 모리스였다. 이들은 도시가 엔진소리와 공장으로 가득 차있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하였고, 산업제품을 굉장히 혐오하였다. 인간을 살려놓을 수 있는 것은 다시 중세로 돌아가는 것이고, 수공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산업화에 대한 과격한 비판을 하게 된다.

모리스는 산업화에 밀려서 장인적인 솜씨와 수공이 파괴되고 있다고 생각했으므로, 수공, 중세의 장인체제를 통경하였다. 미술이란 것이 그 동안 대중과 멀어져서 그들과 유리된 존재였다고 생각하고, 예술가의 역할은 사람의 사회적, 문화적 환경을 바꾸어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건축, 실내장식, 벽지, 가구, 카펫, 책의 삽화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들을 아름다운 디자인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존 러스킨은 기본적으로 도덕주의자였는데 미술작품은 도덕적인 의지의 결과여야 하는데, 기계로 만든 산업제품은 도덕과 양심이 없기 때문에 혐오하였다. 그는 기계와 당대의 제도자체가 인간의 삶을 점점 더 추하게 만든다고 생각하였다.

1. 디자인이라는 것은 실용적이고, 사람들이 금방 사용할 수 있고, 그래서 사람들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수공예야 말로 대체무기라고 생각했다.

2. 건축가, 디자이너, 화가, 조각가가 평등한 관계를 위해 협동하는 Total design개념을 내세웠다. 모든 것이 하나가 되는 토털 디자인으로 형태는 단순하고 견고한 형태, 재료도 굉장히 기본적인 재료를 사용하여 자연에 영감을 받은 디자인을 많이 했다. 윌리엄 모리스의 디자인은 꽃과 새 등 자연에서 모티프를 따서 정교하고 풍요로운 디자인을 많이 하였다. 이렇듯 미술과 공예운동은 디자인사의 시작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내세웠던 수공 디자인 제품들은 너무 비싸서 일반대중들은 도무지 사고 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중에 아르누보 운동에서는 기계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러한 운동은 이후 아르누보 운동을 비롯하여 회화 뿐 아니라 건축, 가구 등 이른바 토탈 디자인에 폭넓은 영향을 미쳤다.

   

   

   

   

바우하우스

바우하우스는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에 의해서 1919년에 바이마르에 설립되었다. 1919년 창립 선언문의 서두에서는 "시각미술이라는 범주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작품행위의 최종목적은 완전한 건축이다. 미술은 결코 전문 직업이 아니다. 미술가와 장인 사이에는 근본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다." 고 주장하였다. 그들에게 영감을 준 것은 반 데 벨데의 예술에 있어서의 종합화와 순수한 형식의 주장, 윌리엄 모리스의 미술과 공예운동의 이론이었다. 또한 중세 시대의 길드제도에서도 영향을 받았다. 바우하우스에 영향을 준 선각자들과는 달리 바우하우스는 기계문명 시대의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열렬히 환영하였을 뿐 아니라, 이를 구조적으로, 이론적으로, 미학적으로 충분히 이용하였다.

바우하우스는 6개월 기초과정부터 시작하며, 각 과정은 기본이론을 가르치는 담임과 근대적 의미의 장인의 지도하에 이루어졌다. 학생들은 중세 시대의 도제와 거의 다름없었고, 이론과 실습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었다. 바우하우스에서 가르쳤던 칸딘스키의 『점, 선, 면』등과 같던 교재는 전 세계 미술 교재의 고전이 되었다. 교육과정은 계속해서 바뀌고 보강되어졌다. 시행착오가 거듭되던 초기에는 이론 쪽으로는 형식론, 재료학, 과학 및 수공예적이고 기숙적인 숙련에 치중되었다. 그러나 1923년부터 모든 예술적인 원리들을 하나로 통일시켜주는 분야로서의 건축적인 측면이 두드러지게 강조되기 시작하였다. 바우하우스의 영향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분야는 가구, 도자기, 직물 등의 건축과 공업 및 실내디자인 분야였다. 단순하고 기능적인 디자인에 대한 기본적인 원칙이 수립됨과 아울려, 새로운 기술과 재료를 이용하기 시작하였으며 플라스틱과 같은 대량 생산방식도 이용하였다.

그로피우스의 천재성 가운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각국에서 뛰어난 교수진을 불러 모아 강단에 서게 한 점이었다. 잇텐, 파이닝거, 칸딘스키, 파울 클레 등의 뛰어난 교수진에도 불구하고, 바우하우스는 학생 중에서 이렇다 할 화가나 조각가를 배출하지 못했고, 자유롭게 회화나 조각을 제작할 기회마저 줄어들어갔다. 그로피우스와 모흘리-나기는 1928년에 바우하우스를 떠난 후 새로운 책임자의 지도아래 보다 기능주의적인 성격으로 변모하였다. 바우하우스는 나치에 의해 어쩔 수 없이 1933년 강제 폐쇄되는 운명을 맞게 되었다.

그러나 바우하우스가 이루어낸 디자인론, 미술과 산업 사이의 관계, 형식론 및 교수 방법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반대로 바우하우스에 몸 담았던 일원들이 나치의 압제를 피해 외국으로 뿔뿔이 흩어짐에 따라 서방세계, 특히 미국에 널리 전파되는 기회를 맞게 되었다.

   

   

베르니니: 성 테레사의 무아지경

17세기 이탈리아 조각가 베르니니의 <성 테레사의 무아지경>에 나타나는 바로크 양식의 특성에 대해 논하시오.<2000>

   

<성 테레사의 法悅>은 로마의 산타 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성당의 코르나로 예배당을 장식하기 위해 베르니니가 만든 제단이다. 이 예배당은 베네치아 출신의 교황 코르나로의 주문에 의해 1645년부터 1652년 까지 7년간의 노력 끝에 완성되었다. <성 테레사의 法悅>은 베르니니가 직접 제작한 것으로 비범한 재능을 지닌 그의 다양한 능력이 완벽하게 구현되었다. 이 제단은 스페인의 성 테레사에게 봉헌된 것이다.

성 테레사는 16세기의 수녀로 그녀가 본 신비스러운 환영을 글로 쓴 유명한 책을 남겼다. 그 책에서 그녀는 천상의 환희를 느낀 순간을 이야기하면서 주님의 한 천사가 황금으로 된 뜨거운 화살로 자기 심장을 꿰뚫자 아픔과 함께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희열로 충만됨을 느꼈다고 한다. 베르니니가 표현하고자 한 것이 바로 이 순간의 광경이다. 성녀는 구름을 타고 황금빛 햇살의 형태로 위로부터 쏟아지는 빛줄기를 향해서 하늘로 올라간다. 천사는 공손하게 그녀에게 다가서고 있으며 성녀는 기절한 채 황홀감 속에 빠져 있다. 배치된 방법이 교묘해서 이들은 제단이 제공하는 틀 속에 아무런 받침도 없이 떠 있는 것처럼 보이며, 위쪽의 보이지 않는 창으로부터 광선을 받고 있는 듯이 보인다.

바로크 양식의 최고의 걸작으로 인정받는 이 작품은 어떤 작품보다도 바로크 양식의 특성을 잘 대변하고 있다. 바로크 미술은 고대 미술의 권위를 인정하지만, 보다 많은 다양성과 인상적인 효과를 살리기 위해 보다 극적인 효과를 드러내는 것이 특징이다. 이 작품의 모든 요소들은 극적인 효과를 나타내는 외적인 수단을 통해 神性을 드러내려는 베르니니 예술의 경향이자 바로크 양식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반쯤 감긴 눈꺼풀 밑에 초점을 잃은 채 머리는 뒤로 젖혀지고 입은 반쯤 열린 황홀경에 빠진 인물의 표현은 그녀의 고통스런 환희의 강렬함을 똑같이 경험하는 옷주름의 찬란한 파동에 의해 강조되고 있다. 특히, 베르니니의 옷주름의 처리 방법은 아주 새로운 것이다. 즉, 고전적인 방식인 품위 있는 옷주름으로 흘러내리게 하지 않고 흥분과 움직임의 효과를 보다 강조하기 위해서 옷자락이 몸부림을 치듯 펄펄 날리게 표현했다.

또한, 조각과 회화가 서로 공존의 상태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조각과 회화사이의 선명한 구별을 하지 못하는 점 또한 바로크 미술의 특징이다. 조각과 회화는 건축과 결합해서 무대와 같은 복합적인 환각을 형성시키고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은 그것이 놓여진 장소까지 포함해서 고려해야만 올바른 감상을 할 수 있다.

<성 테레사의 법열>을 포함한 코르나로 예배당의 다양한 요소들은 훌륭한 조화를 이루며 결합되어 조각가로서의 베르니니의 생애에 최상의 종합체가 되었으며 한 세기 반 동안 세계적인 경탄을 자아냈다. 그 후로 엄격한 신고전주의의 교리 때문에 이 작품은 바로크적인 과장된 표현의 가장 터무니없는 예로서 악명 높고 의심스런 작품이 되었다가 20세기 인들의 안목에 맞추어 재평가되고 당당하게 복권되었다.

   

   

   

샤르트르 성당의 고딕적 특징 <2009년 후기 簡>

   

파리에서 남서쪽으로 약 90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 있는 샤르트르 대성당은 11294년에 있었던 화재 이후 새로 재건축되었다. 이 성당은 노트르담 성당의 5랑식-이중복도구조를 그대로 이어받아 전체규모를 조금 더 확대시킨 모습을 하고 있다. 샤르트르 성당은 무엇보다 전성기 고딕건축의 문을 연 건축물로써 큰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겠다.

12세기 로마네스크 양식의 뒤를 이어 13세기에 등장한 고딕양식은 세계 건축사상 유래가 없을 정도로 높이 솟구친 내부를 가진 혁신적인 구조물을 만들어 내였다. 이러한 건축물을 건설하는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늑골궁륭(Libbed-vault)'과 '공중부벽(Flying-buttress)', 그리고 '첨두아치(Pointed-arch)'의 발명 덕분이었다. 이 덕분에 건축가들은 작은 창문이 달린 육중한 벽을 가진 로마네스크의 '전투적 교회'와는 달리, 커다란 스테인드 글라스를 설치한 창을 통해 밝은 빛이 들어오게 해 내부를 환하게 밝힐 수 있었고, 신랑의 높이를 더욱 높여 위로 상승하려는 수직성을 강화시킬 수 있었다.

전성기 고딕의 문을 연 건축물로써 샤르트르가 갖는 중요한 의미는 천장이 직사각형 4분 볼트로 처리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초기와 전성기 고딕을 나누는 기준이 된다. 기존 정사각형 6분 볼트보다 직사각형 4분 볼트는 기둥간 거리를 넓힐 수 있는 성질을 지녔다. 이는 창문을 설치할 수 있는 면이 더욱 확대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빛이 더욱 많이 들어와 실내를 더욱 넓어 보이게 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또한 장미창문이 기존 신랑의 정면의 중앙 뿐 아니라 신랑의 측면에도 설치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샤르트르 성당은 고딕양식의 건축 중에 스테인드 글라스를 가장 많이 사용하였고, 스테인드 글라스의 설치로 화려함과 아름다움은 극에 달하게 되었다. 요한계시록에 나와 있는 천상의 예루살렘의 광경이 하늘로부터 지상으로 내려오게 된 것이다.

고딕양식은 건축물의 구조 뿐 아니라 성당 외부 벽에 있는 조각들에서도 어김없이 나타난다. 샤르트르 성당의 대표적인 고딕 조각상은 서쪽현관과 북쪽현관에 있다. 서쪽 현관의 문설주에 부착된 조상들은 좁은 기둥의 몸체에 맞추기 위해 길게 늘어나 있으며 옷의 선도 몸체와 마찬가지로 가늘고 직선적이어서 사실적인 흔적은 거의 없다. 이에 반해 북쪽 현관에 있는 성상들은 하나하나 살아있는 듯이 묘사되어 있다. 왼쪽부터 멜기세덱, 아브라함, 이삭, 모세 등을 묘사하고 있는데, 조각상들은 성인들의 개별적인 특징을 분명하게 표시하고 있으며, 원주로부터 강하게 돌출되어 있고, 신체의 구조가 옷주름의 아래로 보이는 사실적인 표현을 하고 있다. 결국 이 두 고딕조각의 차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고딕양식이 하나의 형상을 더욱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점진적 경향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하나의 형상을 실감나게 묘사하기 위해 오래도록 잊혀져왔던 고전예술의 전통을 따르게 된 것이다.

   

   

   

서양 외광풍경화의 전통: 인상주의까지의 전개과정

서양 풍경화의 변천과 전개 과정을 서술하시오.< 2006 후기>

외광파(plein air painting) <2005 전기 簡>

   

서양의 풍경화는 근본적으로 관념적인 자연의 모습이며 실제의 경관을 그린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는 모습은 19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보기 어려웠으며, 대부분의 풍경화는 스튜디오에서 창작되었다. 이 전통은 19세기 후반에 인상주의가 대두하면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자연에서의 실경을 담은 외광풍경화는 인상주의에서 절정을 이루고 이후 자연의 외적인 형상에 만족하지 않고 내적인 면을 파고들어 추상화 되었다.

풍경을 그린 그림은 고대 이집트나 미노스의 벽화에서부터 그리스의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시대에 그려지지만 단순히 인물의 배경으로, 도식적인 모습을 띤다. 기독교사상이 유럽사회를 지배한 중시에는 정신세계가 중요시되었다. 그들에게 있어 자연이란 미지의 세계이고 두려운 대상이었고, 따라서 회화에서 풍경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고딕 후기에 들어서면 자연에 대한 관심이 일기 시작하여 풍경화는 주제 자체가 풍경을 요구하는 작품에서 장식적이고 도식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며, 꽃이나 나무들이 종교적인 상징성을 갖는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중세 후기의 랭부르 형제의 <베리 공의 호화로운 기도서, 1409-15>는 중세의 상징성에서 탈피해 계절에 따라 변화는 경치를 사실적으로 관찰하고 그렸다. 채색필사본에 부분적으로 그려진 풍경화인 얀 반 아이크의<예수의 세례, 15초>는 플랑드르 특유의 사실적 풍경화를 시도하고 있다.

르네상스 시대로 접어들면 과학이 발달로 자연에 대한 호기심이 유발되어 자연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옮기려 하였다. 고전주의 전통이 강했던 피렌체의 회화는 이상화된 상상의 풍경을 추구하였으며, 이와는 달리 베네치아에서는 벨리니, 지오르지오네, 티치아노를 중심으로 목가적이며 시적 분위기를 보여주는 편안하고 무르익은 풍경화가 발달한다. 북유럽의 르네상스회화는 극히 세부적 묘사에 치중하는 사실주의 경향을 보여 왔으며, 자연과 좀 더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는 특징을 보였다. 콘라드 비츠의 <기적적인 물고기의 낚음, 1444>은 지형적인 사실성을 보여주는 최초의 풍경화 이다. 15세기 말 알브레히트 뒤러는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여행한 기억을 수채화로 생생히 묘사하였다. <숲속의 연못> 16세기 말에는 가톨릭 세력의 감소로 종교화가 줄어들고 회화의 주제가 세속화 되었다. 브뤼겔은 계절에 따른 인간의 활동을 다루어 자연에 좀더 밀착되는 자연관은 엿보게 한다. <숲속의 사냥꾼, 1565>

17세기에 풍경화는 괄목할 만한 발전을 하게 된다.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는 고전주의가 정착되고 상상적이며 이상화된 풍경화가 계승되면서 특색 있는 화풍이 형성되었다. 고전적 풍경화의 전형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이탈리아의 안니발레 카라치의 고전성과 베네치아 화파의 시적인 분위기를 살리면서 새로운 풍경화의 방향을 제시한 회가는 니콜라 푸생이었다. 그의 풍경화는 엄격하고 정확하여 이전의 전통보다 더 고전적 풍경화를 창조했다. <포키온의 매장, 1648> 푸생과 같은 시기 로마에 거주하던 또 한명의 프랑스 화가 클로드 로랭은 푸생과 달리 야외에서 자연의 여러 변화를 관찰해 그려, 신선한 광선으로 공간을 깊숙하고 부드럽게 감싸면서 북유럽의 사실주의와 조화되고 있다. 그의 풍경은 17세기 네널란드에 영향을 주었을 뿐 아니라 '그림과 같은(picturesque)'이란 단어로 수식되는 풍경화의 대명사가 되어, 18-19세기 영국 풍경화 발달에 큰 영향을 주었다. <실비아의 사슴을 죽이는 아스카니우스, 1682> 프랑스에서는 루벤스가 과장되고 외향적인 전형적 바로크 양식을 보여주는 풍경화를 그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실경을 바탕으로 풍경화를 독자적으로 발전시킨 나라는 네덜란드였다. 당시의 두터운 중산계층은 미술품 구입에 열성적이었고, 그들은 고전적 그림보다 자신의 실내에 걸어놓고 즐길 수 있는 조그마한 정물화, 초상화, 풍경화를 선호하였다. 따라서 야콥 반 로이스탈, 얀 반 호이엔 등과 같은 많은 풍경화가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시각적인 관찰 및 경험을 기초로 사실에 충실하고 미화하지 않은 풍경화를 그렸으며, 화면의 절반이상을 차지하는 하늘을 강조하고 시점을 낮게 잡아 지평선을 강조하였다. 그들에게 풍경화는 실제 풍경에 근접한 평범한 모습이라는 사고에서 이들은 로랭과는 달랐다. 야콥 반 로이스달<오버빈의 모래언덕에서 본 하를렘의 정경, 1670?>

18세기 이탈리아에는 유럽 각국에서 그랜드 투어 붐이 일어나면서 '베두테(vedute)'라는 유명 도시 및 유적을 사실 그대로 세밀하게 그린 풍경화가 탄생하였고, 폼베이와 헤라클레니움의 발굴은 고전주의를 부활시켰다. 로마에는 프랑스 아카데미 분원이 설치되었고 로마를 무대로 하여 화가들 사이에 외광스케치가 널리 퍼지게 되었다. 당시 영국에서는 자연에 관심을 보이는 낭만주의가 회화에도 파급되어, 18세기 중반부터 풍경화 붐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특히 수채화에서 괄목할 만한 발전을 거듭해 19세기 중반에는 전성기를 맞게 된다. 그랜드 투어의 붐으로 여행에 관심이 국내여행의 붐을 일으켰고, 가보지 못한 지방의 경치를 그림으로 감상하는 '그림여행(voyage pittoresque)'종류의 책과 풍경화가 팔리게 되고 수채화가 생생한 하나의 작품으로 제작되었다. 리처드 윌슨은 로랭의 영향으로 광선이 스며드는 전원풍의 그림을 그렸고, 토마스 게인즈버러도 초기에는 네덜란드의 사실주의적 경향을 보이는 풍경을 그렸으나, 후기에는 상상적이고 낭만적인 풍경으로 전환하게 된다.

19세기 초반에 영국의 풍경화는 이들에 의해 확고한 전통을 수립하게 되면서 자연서 느끼는 비장감, 숭고미 등을 보여주는 종류와, 그림과도 같은 아름답고 감상적인 종류의 두가지 새로운 미학을 형성하게 된다. 수채화가 일반에까지 인기를 끌게 되고 회화의 한 분류로 인정되면서 존 컨스터블, 윌리엄 터너와 같이 우수한, 풍경만을 전문으로 그리는 화가를 배출하게 되었다. 이들은 프랑스 화가들과 자주 교류했고, 자연과의 좀더 긴밀하고 직접적인 접촉을 권장하면서 네덜란드의 사실적인 풍경화 지식 및 수채화 기법을 가르쳐 주게 된다. 이 때 가장 중요한 교량 역할을 한 화가는 보닝턴이었는데, 자연의 변화하는 순간적인 인상을 수채화로 화면에 빨리 기록하는 방법을 소개해 주었다. 또한 존 컨스터블은 아카데믹 교육을 받은 젊은 프랑스 화가들에게 붓질의 자유스러움과 표면의 생동감이, 안정감 있는 회화 구성 체계와 동시에 복합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증명해주었고, 자연에 나가 직접 유화로 스케치하는 방법도 흥미를 끌었다.

프랑스에서 외광풍경화의 전통은 1830년대 바르비종화파에 의해 정착되었다. 여기서 그림을 그리던 화가는 카미유 코로, 테오도르 루소, 장-프랑수아 밀레, 도비니 등이 있었다. 이들은 아직까지도 스튜디오에 돌아와서 작품을 완성하는 태도에서는 벗어나지 못했지만, 이들 작품에서부터 이전과 같은 '완성된 작품'과 '스케치와의 경계선이 모호해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바르비종파의 도비니는 자연주의와 인상주의를 연결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는 스케치뿐 아니라 하나의 작품과정 전체를 야외에서 완성하였을 뿐 아니라, 수면에서 교차하는 빛을 잡기 위해 강에 띄운 배 위에서 제작하기도 하였는데, 후기의 테크닉과 정신은 초기 인상주의자들과 상당히 가까웠다.

거칠고 깎아지른 절벽과 훌륭한 구름의 형태, 바다를 찾아 노르망디 해안 일대에 몰려든 생-시메옹 화파가 있다. 이는 위에, 이자베이, 용킨드, 외젠 부뎅으로 이들은 인상주의의 선구자들로 불리운다. 용킨트는 같은 장소에서 순간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분위기 들을 포착하여 인상파들처럼 생생하게 광선과 대기의 순간적인 효과를 화면에 기록하고 있다. 외광풍경화의 전통이 완전하게 자리 잡은 것은 부댕에 의해서이다. 그의 가벼운 소품들, 특히 그의 해변가 그림들은 바르비종의 화풍을 따른 것이었는데 거기에 색채의 생동감이 더해져 인상주의적 효과를 낳고 있다. 용킨트, 부댕, 코로, 루소 등이 닦아 놓은 외광풍경화의 실습은 곧이어 모네, 르느와르, 피사로 등 인상파 화가들에 의해 절정에 이른다. 이들은 처음으로 야외에 이젤을 놓고 그 자리에서 완성하였다. 그러나 인상주의가 끝나감과 동시에 이후의 화가들은 자연에 대해 느끼는 주관적인 감정표현에 주력하게 되며, 이것은 19세기 말 이후 미술의 주관화추상화 그리고 표현주의적인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하게 하는 주원인이 된다. 따라서 외광풍경화는 하나의 미술전통속에 자리를 잡게 되며 그 위에 뻗어간 20세기 새로운 미술은 내면풍경화로서 또 다른 전개를 하게 되는 것이다. 부댕,<트루빌의 비치, 1868>

   

외광파

외광파(plein air painting) <2005 전기 簡>

외광파는 특정한 유파를 가리키는 경우엔 인상주의가 이에 해당되나, 보다 폭넓은 개념으로서, 인상파의 수법에 의하지 않더라도 실외의 공기와 자연 광선에 의한 회화적 효과를 표현하기 위하여 야외에서 그리는 화가들을 가리킨다. 이 운동이 일어난 것은 19세기 후반으로 그때까지 유럽의 화가들은 대부분 광선이 적은 아틀리에에서 그렸고, 야외에서 모티브를 취재하더라도 아틀리에에서 마지막으로 손질을 가해 완성하는 것이 통례였다. 색채는 다갈색의 나뭇가지, 녹색의 나뭇잎 등 이렇게 고정된 색채개념에 지배되어 어두운 화면을 지니며, 야외광선에 비친 변화하는 색채의 아름다움을 포착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한 대상의 고유색을 신봉하는 고정관념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는데 19세기 사질주의 사조가 일어나면서 자연관찰이 정밀하고도 객관적이 된 결과 야외의 밝은 빛의 효과를 의식하게 되니 이것을 실제로 나타내기 위해서 직접 야외에서 제작하는 방법을 택하게 되었다.

19세기의 영국 화가 컨스터블과 터너는 아틀리에에서 야외로 나와 자연광선에 의한 풍경의 변화하는 양태를 밝은 색을 써서 직접 그리기 시작하여 외광파의 선구자가 되었고, 이는 아직까지 역사화와 같은 관학적인 그림이 발달했던 프랑스의 많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이탈리아에서는 19세기 중기 마키아이오리파의 화가들이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인상주의 화가들에 선행하여 바르비종파의 화가들과 노르망디 해안에 모인 생-시메옹 화파들이 있었고, 이들은 모두 인상주의의 선구자로서 이후 인상주의의 태동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다.

특히 바르비종파의 도비니는 자연주의와 인상주의를 연결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의 후기의 테크닉과 정신은 초기 인상주의자들과 상당히 가까웠다. 그는 스케치뿐 아니라 하나의 작품과정 전체를 야외에서 완성하였을 뿐 아니라, 수면에서 교차하는 빛을 잡기 위해 강에 띄운 배 위에서 제작했는데, 이러한 제작 태도가 후에 마네, 피사로, 시슬리, 모네 등 인상주의의 화가들에 의해 채용되었다. 또한 생-시메옹 화파 중의 외젠 부댕과 용킨드는 인상주의의 주도적인 선구자가 되었는데, 이들의 가벼운 소품들 특히 해변 가 그림들은 바르비종 화풍을 따랐으나, 거기에 색채의 생동감이 더해져 인상주의적 효과를 낳고 있다. 그리고 색채분해와 여러 가지 색채의 병치(竝置)에 의해 태양빛에 비친 색채현상을 묘사하려고 한 마네, 훗날 그의 영향을 받고 이 파 특유의 화법을 끌어내는 데 성공한 모네, 피사로, 시슬레 등이 있으며 그들에 의해 정점에 달하였다.

   

   

   

러시아 아방가르드 미술

러시아 아방가르드 미술운동 <1999 전기 2006전기 簡>

서양미술사에서 '아방가르드'미술 운동을 하나 예로 들어 설명하고 '아방가르드'의 개념을 정의할 것.<2005 전기>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러시아 사회는 봉건 제국에서 '민중을 위한 공화국'이 되었다. 그 이전의 러시아는 수세기 동안 문화적 영감을 유럽에서 받아왔다. 러시아 미술에 남긴 가장 큰 업적은 (비잔틴 전통에 뿌리를 둔) 성상화(Icon)였다. 하지만 19세기에는 주로 사실주의, 상징주의, 아르누보같은 서구의 양식을 기초로 하면서도 러시아의 특성을 살린 다양한 작품으이 문화적 중심지에서 전개되고 있었다. 혁명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결성된 '예술세계'라는 그룹은 농민들의 토속미술 전통에 아주 가까운 경향을 띠고 있었다. 점차 후기인상주의 화가들의 실험적 작품들이 모스크바로 들어왔고, 1908년 전시회에는 후기인상주의 뿐만 아니라 나비파와 야수파까지 포함되었다.

혁명적인 러시아 추상 운동을 이끌었던 두 선구자는 생생하고 강렬한 선과 과감하고 표현적인 평면적 패턴들을 사용했던 나비파와 야수파의 기법에 흥미를 가지고, 러시아 민속미술의 기법과 작품세계에 이를 접합시켰단 바로 미카일 라리오노프(Mikhail Larionov)와 그의 파트너 나탈리아 곤차로바(Natalia Goncharova)였다. 이들이 루브키(lubki: 대중적 목판화)와 그라피티에서 영감을 받아 이룩한 직접적이고 거친 표현은 독일 표현주의 운동조차도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이들은 1911년에서 17년 사이에 러시아에서 급속히 진행됐던 구상에서 비구상으로의 발전 중 한 단계를 말하는 것으로 모스크바를 유럽 아방가르드 미술의 중심지로 부상시켜 주었다.

이후 모스크바의 추상운동은 말레비치와 타틀린에 의해 계속되었다. 레닌은 아방가르드적인 예술사조에 관대했다. 그는 아방가르드 미술을 통해 새로운 시각적 매체를 개발함으로써 거의가 문맹인 대중들에게 자신의 사상을 전파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스탈린이 이러한 예술을 금지시키기 전까지, 이 모험심 넘치는 화가들은 미술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혁명을 이끄는 아방가르드 세력이었다. 카시미르 말레비치(Kasimir Malevich)는 그의 작품에서 시간이 갈수록 기하학적 경향이 매우 급속히 증가되어 1915년에는 최초로 기하학적 요소들로만 구성된 절대주의 작품을 전시하였다. 그의 기하학적 형태들은 복합했는데 그 이후 복잡성으로부터 극단적인 단순성과 순수함으로 나아가, 1917년에서 18년 사이에는 순수한 본질만 남는 상태까지 진전시킨 <흰색 위의 흰색, 1918>역작을 제작하였다. 그가 이룬 비대상으로의 발전은 몬드리안과는 달리 실제 자연의 형태로부터 추상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관념적인 기초로부터 추출된 것이었다. 이는 전통적인 회화에서 보이는 회화와 무관한 것들을 제거하기 위해 회화를 최소화 시켜 회화의 가장 궁극적인 본질로 나아간 것이다.

블라디미르 타틀린(Vladimir Tatlin)은 말레비치의 절대주의에 제일 먼저 동참했으나 절대주의를 버리고 보다 엄격한 구성주의적 개념을 추구하게 되었다. 구성주의는 종합적 입체주의로부터 출발하였다. 그는 파리로 가서 피카소의 3차원적 구조에 적용된 콜라주 기법의 실험을 보게 된다. 실생활에 사용되는 매체로 그 특성에 잘 맞는 형태를 만들어서 공간속에 구조를 만들어 내는 것이 그가 생각하는 조각이었다. 그는 러시아로 돌아와서 전통적 조각의 틀이나 대좌의 개념을 내던진 부조 구성물을 만들게 되는데, 매체자체의 특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제작과정이 쉽게 유추 가능한 그의 작품은 러시아 구성주의를 잘 나타내준다. 그의 작품인 <제3 인터네셔널 기념물>은 모스크바에 한가운데 세워질 예정이었으나 실행되지 못했다. 유리와 철골로 된 이 개방된 구조물은 인류 사회가 점진적으로 상승하면서 진보하고 있음을 연속적인 나선형을 통해 상징화하고 있다. 1920년 이후 그의 구성주의가 실생활을 위한 사회주의적 디자인을 하는 생산주의와 합쳐지게 되자, 미술은 유물론적으고 기능적인 목적을 위하여 생활에 적용되었고, 자신들의 작품을 통해 과학기술의 진보에 의한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고 믿었던 그들의 꿈은 깨지고 말았다.

   

아방가르드

   

아방가르드는 전위, 선두, 선구 등의 뜻으로 프랑스의 군사 용어인 전위(부대의 전초로서 선발된 소수 정예부대)에서 나온 말이다. 정치적 의미로 오늘날에는 좌익과 같은 말로 특히 예술상으로는 인습적인 권위와 전통에 대한 반항, 혁명적인 예술 정신의 기치를 내걸고 행동하는 예술 운동을 말한다. 문화적인 혁신자들의 어떤 신조를 나타내기 위한 특정의 주의나 형식을 가리키는 용어라기보다는 신시대의 급진적인 예술 정신 전반에 걸쳐서 사용되는 말이지만 특히 제 1차 세계대전, 후의 추상주의와 초현실주의를 중심으로 한 조형 활동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이들 활동의 배후에는 기계 문명의 발달과 무의식 세계의 규명, 원시 예술의 발굴, 사회의식의 확대 등 신시대적인 여러 가지 요인이 내포되어 있다. 또한 이 말은 반자연주의라는 점에서 동시대의 문학, 연극, 영화 등의 분야에 있어서도 그 실험적, 혁명적인 행위에 대해서 쓰여 진다.

칸딘스키는 그의 저서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관하여>에서 미술가들은 좀 더 위대한 정신성을 향해 인류를 고양시키는 삼각형의 최고 정점에 있다고 하였고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아방가르드 미술을 대중문화와는 거리가 먼 필연적으로 엘리트주의적인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몇몇 저술가들은 단지 미술의 전통적인 형식뿐만 아니라 미술이 존재하는 제도적 상황에도 적극적으로 도전하는 현대 미술에만 이 용어가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아카데미의 성립과 발전

19세기 프랑스 미술의 아카데미즘 또는 아카데미즘의 역사적 기원과 성격에 대해서 논하시오.<1999>

고대 아테네 플라톤의 Academia에서부터 시작된 이 의미는 르네상스기에 이르러 신플라톤주의가 유행하면서 철학이나 문학 모임에 적용되기 시작했다. 미술을 인문학의 영역으로 정당화시키려는 알베르티나 레오나르도의 미술이론은 16세기 후반기에 본격적인 미술 아카데미의 시작을 알렸고, 이는 지오르지오 바자리(Giorgio Vasari, 1511-74)와 토스카나의 대공 코지모 데 메디치(Cosimo de'Medici)가 이미 존재하던 콩파니아 디 루카(Compania di Luca)를 개혁해 설립한 아카데미아 델 디세뇨(Academia del Disegno)라고 할 수 있다. Disegno 라는 용어는 그대로 번역하면 디자인(design)이지만 여기서는 회화, 조각, 건축을 이루는 구상, 드로잉, 창조력 등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단어로 이해해야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철저한 이론 교육에 중점을 두었던 아카데미아 델 디세뇨의 교육과정은 국가적인 후원을 업고 미술가들이 장인의 위치에서 벗어나 전문인으로서 자신들의 분야를 관장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즉, 아카데미아 회원이라는 것은 미술가들에게 사회적 신분상승을 의미하는 것으로 더 이상 주문을 받아 작업을 하는 장인이 아니라 지적인 진실을 추구하는 자유인으로서의 입지를 확인시켜주는 하나의 증거였다.

이후 로마, 파리, 런던 등지에도 미술 아카데미가 설립되는데 특히 프랑스에서는 1648년 왕립 회화조각 아카데미(Academie Royale de Peinture et de Sculpture)가 설립됨으로써 최고의 권위를 누리게 되었다. 이는 왕실의 직속기관이었으며 원장은 왕에게 복속되어 있었다. 그림의 주문과 전시는 아카데미가 관정하였고 당시 가장 강력한 주문자였던 왕과 귀족의 주문을 받기 위해선 화가로서 아카데미의 멤버가 되는 것이 매우 중요해졌다. 당시 가장 중요한 미술전시회는 salon展으로 2년에 한번 루브르에서 열렸다. 당시 상류층 지식인들은 살롱전의 작품에 대해 비평문을 쓰고 팜플렛으로 발간하여 여론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살롱의 영향력은 상상이상으로 강력하였다.

이 아카데미에서는 르네상스시기부터 이어져 온 전통인 기하학과 비례에 의한 명확한 공간을 강조하였고 미술의 장르들을 위계질서로 나누어 도덕적인 교훈을 줄 수 있는 역사화를 가장 고상한 주제로 여기는 교육을 지속해 나아갔다. 그러나 길드의 규제로부터 미술가들을 자유롭게 하려는 이탈리아의 아카데미와는 달리 프랑스의 아카데미는 루이 14세와 재상 콜베르의 주도 下에 절대국가의 중앙중심주의와 연결되어 문화를 통제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드러난다. 프랑스 아카데미의 이상적인 양식은 르네상스의 고전주의를 기본으로 하였다. Nicolas Poussin의 양식은 로얄 아카데미의 모본으로 여겨졌고 후에 Ingres를 아카데미양식의 정점으로 보아, 학생들은 모두 이 양식으로 작품을 제작하게 되었다. 점차 아카데미는 획일화된 예술, 공식화된 미술이라고 인식되었고 아카데미 미술가들은 사회적 지위와 부를 얻은 대신 독립성과 창의성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프랑스의 아카데미는 프랑스 대혁명 이후 에콜 데 보자르(Ecole des Beaux-Arts)로 바뀌었고 아카데미의 아성은 흔들리게 되었다. 회화, 조각, 건축과 같은 순수미술 중심의 아카데미는 그 후 수공예, 응용미술이 다시 미술의 중심으로 들어오면서 과거와 같은 교육을 지속시킬 수 있는 의미를 잃어버렸다. 19세기 중반 이후 미술후원자들이 국가, 교회 중심에서 개인이나 화랑 등으로 바뀌면서 미술작품의 유통은 자유경제체제로 바뀌었다. 이제 화가들은 아카데믹한 교육에 반발하면서 다른 화가들과 구별되는 독창적인 양식을 추구하게 되었고,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아카데미, 아카데미시즘은 고루하거나 보수적 양식의 부정적인 의미로 인식되기까지 했다.

 

지금은 이런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 자체가 희소하겠지만, 혹시라도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준학예사시험(근데 이걸 왜 보나요?), 국립박물관시험 등에 응시하시는 분들께 도움이 될까 싶어 올립니다. 

 

꿈을 갖고 준비하는 당신에게 행운을 빕니다. 

그리고 영광과는 너무 다른 현실에 너무 실망하지 말기를 한편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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