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미술사 참고자료

조선일보 서양미술사 기고글 정리

AH101 2022. 7. 13. 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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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지금 고대 이집트 미술품을 모은 '파라오와 미라'전이 열리고 있다. 이 전시에서 목은 없어지고 몸체만 남은 아주 작은 조각을 보았다. 이 조각은 기원전 14세기 중엽에 재위한 신왕국 18왕조의 파라오 아크나톤의 '샵티'(지하세계에서 파라오 대신 노동을 하는 입상)였다. 이 조각의 앞에는 아크나톤을 의미하는 '카르투슈'가 새겨져 있다. '카르투슈'란 왕이나 왕조를 의미하는 상형문자를 보호하기 위해 둘러싼 끈 모양의 테두리를 말한다.

   

아크나톤의 원래 이름은 아멘호테프 4세였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불룩한 배와 가슴, 부푼 눈두덩, 두꺼운 입술과 비죽 튀어나온 턱을 가진 이상 골격의 소유자였다. 여러 설이 있지만 순수한 왕실의 혈통을 유지하기 위해 근친결혼을 하던 이집트 왕가에서 나타난 일종의 유전병으로 추정된다.

   

그는 그때까지 평온하게 살아오던 이집트에서 과격한 종교 개혁을 단행했다. 가장 강력한 태양신 '아몬 레' 대신 유일한 신 '아텐'을 섬기고, 사람과 동물이 뒤섞인 모양으로 표현되던 신의 모습을 태양 원반으로 표시했으며, 아텐을 숭배하는 많은 신전을 세웠다. 자신의 이름을 아텐에게 복종한다는 뜻의 아크나톤으로 바꾼 그는 수도도 테베에서 아마르나라는 새로운 도시로 옮겼다. 새로운 변화는 아마르나 시기의 미술에도 보인다. 엄격하고 부동적인 모습의 인물들은 유연한 곡선과 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표현되었고 파라오 가족의 단란한 일상생활 같은 모습도 미술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단한 파격이었다.

   

변화는 얼마 지속되지 못했다. 아크나톤이 죽자 그동안 권력을 잃어버렸던 사제들은 다시 수도를 테베로 옮겼고, 모든 기록과 미술에서 아크나톤의 이름을 지워버리거나 파괴해버려 그의 이름이 역사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근대의 고고학자들은 아마르나를 발굴하면서 유물들을 찾아냈다.

   

그중의 하나가 현재 베를린의 이집트 박물관에 있는 유명한 네페르티티 두상이다. 아크나톤의 왕비였던 이 네페르티티 두상은 이집트 특유의 형식미와 아마르나 양식의 섬세한 곡선이 아름답게 혼합되어 있는 최고 걸작품이다. 국립 중앙박물관 전시에서 본 아크나톤의 '샵티' 역시 역사의 파괴에서 용하게 남아 있는 조각상이다.

   

원본 위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5/05/2009050500883.html>

   

   

   

02]반 고흐와 고갱

2010년 3월 23일 화요일

오전 3:31

   

생애가 작품만큼 관심을 갖게 하는 예술가들이 있다. 며칠 전 신문에 화가 빈센트 반 고흐(1853~1890)의 귀를 자른 것은 반 고흐 자신이 아니라 동료화가 폴 고갱(1848~ 1903)이었다는 주장이 실렸다. 남부 프랑스의 아를에서 1888년 10월부터 두달을 함께 지내던 반 고흐와 고갱이 격한 언쟁을 벌였고, 반 고흐가 면도칼로 고갱을 위협하자 고갱이 박차고 떠나버렸으며,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반 고흐가 자신의 귓불을 면도칼로 잘랐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반 고흐를 이렇게 격분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네덜란드에 있던 반 고흐가 화상(畵商)을 하는 동생 테오를 찾아 파리로 온 것은 1886년이었다. 같은 해 그는 이곳에서 5세 연상인 고갱을 만났다. 증권 브로커로 일하다가 35세에 화가가 된 고갱은 인상주의를 벗어나려는 젊은 화가들의 리더 격이었다. 얼마 후 반 고흐는 아를로 떠나면서 고갱을 초대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공동생활은 점점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기질 차이도 있었지만 미술에 대한 생각이 달랐기 때문이다.

   

고갱은 숙련된 소묘 화가인 앵그르와 드가를 좋아했고, 반 고흐는 고갱이 싫어하는 농민 화가 밀레를 좋아했다. 고갱은 구상을 미리 하고 기억과 상상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리라고 충고했지만, 반 고흐는 눈앞에 펼쳐지는 자연의 물리적 세계와의 감정적 교류에서 영감을 받는 화가였다. 이런 차이는 언쟁으로 이어졌고, 결국 귓불을 자르는 반 고흐의 첫 번째 발작을 촉발했던 것이다.

   

   

고갱과 같이 지낼 때 반 고흐는 자신의 의자와 고갱의 의자를 한쌍의 그림으로 그렸다. 반 고흐 자신의 의자에는 그가 늘 애용하던 서민적인 파이프가 놓여 있고, 고갱의 의자에는 지성과 상상력을 상징하는 책과 촛불이 있다. 자신의 의자는 거친 직선을 교차시켜 투박하게 묘사한 반면, 고갱의 의자는 장식적인 곡선과 풍부한 색채로 표현했다. 의자 주인의 존재가 보이지는 않지만 느껴지는 이 그림들은 단순한 정물화를 넘어 신비감마저 느끼게 한다.

   

 빈센트 반 고흐가 그린 '고갱의 의자'(왼쪽) 와'빈센트의 의자'.

   

원본 위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5/12/2009051201805.html>

   

   

   

03] 라파엘의 매력

2010년 3월 23일 화요일

오전 3:34

   

 '그란두카의 성모', 1505 년경.

미국 유학 시절 르네상스 미술을 가르치던 교수가 라파엘(1483~1520)의 작품은 나이가 들어야 좋아진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요즈음 그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와 더불어 16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의 전성기를 이뤘던 라파엘은 나이는 가장 어렸지만 당시에는 그들과 동등하게 인기를 누렸다.

   

그런데 강렬하고 신비로운 이미지를 창조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신과 같은 인체를 조각한 미켈란젤로는 현대에 와서도 대중적 지명도를 누리고 있는 반면, 라파엘은 전문가들 사이에서만 주로 거론되는 것처럼 보인다. 작품을 새롭게 창조하기보다는 다른 대가들의 작품에서 자신이 필요한 요소를 수용하고 종합했던 그의 탁월한 능력이 현대인에게는 높이 평가되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1504년, 미술의 중심지였던 피렌체에 온 젊은 라파엘은 성모자(聖母子)상을 많이 그렸다. 성모자상에서 라파엘이 기본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내용은 종교적인 이야기보다는 인간 문화의 근본인 다정한 모성애의 표현이었다. 이것은 바로 르네상스 정신인 인본주의의 반영이기도 했다. 단순하고 평안하면서도 지적이었던 그의 작품은 1508년에 로마로 가면서 장대한 양식으로 변한다.

   

라파엘이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주문으로 바티칸에 있는 교황의 서재에 '아테네 학당'을 그리는 작업을 맡았을 때 그의 나이는 불과 26세였다. 그의 최대 걸작으로 평가되는 이 그림은 중앙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중심으로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철학자·과학자·예술가들이 서로 담소를 나누거나 토론을 하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그리스 문명에 대한 르네상스인의 '오마주'와 같은 의미를 갖는다. 그려진 인물 하나하나가 모두 위엄 있고 설득력 있는 동작으로 각자의 믿음과 학설을 전달하고 있다. 그림 속의 고전적 건축과 인물들은 르네상스의 이상인 완벽한 균형과 조화의 미를 보여준다. 강렬하고 개성적인 작품보다는 지성적이고 균형과 조화를 이룬 미술 앞에서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보면 이제야 라파엘의 미술이 이해가 되는 듯하다.

   

원본 위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5/19/2009051901721.html>

   

   

   

04] 법정에 선 미술품

2010년 3월 23일 화요일

오전 3:32

   

미술가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어디까지 권리를 주장할 수 있을까? 뉴욕 맨해튼의 연방플라자 앞에 세워졌다가 철거된 리처드 세라(1939~)의 조각 '기울어진 호()'는 이 문제를 생각하게 한다. 세라는 1979년 미국 정부 총무처로부터 야외조각을 위촉받아 2년 후 약 36m 길이에 3.6m 높이의 거대한 조각을 완성했다. 활 모양으로 휘어져 서 있는 이 작품은 친()환경 재료인 코르텐 스틸로 만들었지만 외관상으로는 녹이 슨 것같이 보였다.

   

작품이 설치된 후 연방건물 직원들 사이에서 이 조각이 시야를 가리고 보기 흉하며, 먼 길을 돌아가게 하기 때문에 작품을 옮겨야 한다는 요구가 나오기 시작했다. 또 공공장소에 설치되는 미술은 작품 중심보다는 관람자 우선이 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세라는 자신의 조각은 설치 장소를 고려해 제작한 것이므로 장소를 옮기는 것은 작품을 파괴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항변했다. 재판까지 간 이 사건에서 법원은 작품의 통제권이 전적으로 소유자, 즉 총무처에 있다는 판결을 내렸고, 1989년 이 작품은 철거됐다.

   

 베로네제의 '레비의 집에서 열린 향연'.

세라는 적어도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기회는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반()종교개혁이 한창이던 16세기 중반 이탈리아에서는 종교화의 적절성이 종교재판에서 일방적인 판결을 받는 일이 많았다. 베네치아 화가 파올로 베로네제(1528~1588)는 1573년 재판에 회부됐으나 현명하게 대처한 경우다. 남아 있는 재판 기록을 보면, 재판관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의 만찬'을 그린 것처럼 보이는 그의 그림에 왜 어릿광대, 코피를 흘리는 사람, 그리고 루터의 종교개혁 후 이단으로 여겨지는 독일인이 등장하는지 물었다.

   

베로네제는 자신도 작품을 자기 마음대로 구성하는 시인이나 궁정익살꾼(이들은 화가보다 사회적 위상이 높았다)처럼 자격을 갖췄고,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그려 넣었다고 답변했다. 결국 그는 3개월 안에 자신의 비용으로 그림 내용을 바꾸라는 판결을 받았다. 베로네제는 이에 불복하고 그림을 고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종교화로 보이지 않게 그림 제목을 '레비의 집에서 열린 향연'으로 바꿔 버렸다.

   

원본 위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5/26/2009052601969.html>

   

   

   

05] 홀바인의 초상화

2010년 3월 23일 화요일

오전 3:33

   

초상화가 실제 인물과 똑같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아부일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적어도 인상주의 이전까지는 화가들이 인물을 이상화해 그리는 것이 상식이었기 때문이다. 16세기에 활약했던 독일의 한스 홀바인(1497~1543)은 자신이 파악한 인물의 단점을 훌륭하게 보완해 그려 의뢰인을 만족시키는 데 탁월한 능력이 있었던 초상화가였다. 

   

바젤에서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의 초상을 그린 후 그의 소개로 영국으로 간 홀바인은 헨리 8세의 대법관이던 토머스 모어의 초상화를 그렸다. 이런 인연으로 영국에 머물게 된 그는 곧 헨리 8세(재위 1509~ 1547)의 궁정화가가 되었다.

   

알려진 바와 같이 헨리 8세는 6번이나 결혼을 했다. 첫번째 왕비 아라곤의 캐서린과 이혼하고 두번째 왕비인 앤 볼린을 처형했던 헨리 8세는 세번째 왕비 제인 시무어가 죽자 또다시 새로운 신붓감을 찾고 있었다. 교황 세력에 맞서고자 한 그는 외국 신부를 맞이하는 편이 유리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홀바인을 브뤼셀에 보내 남편을 여읜 지 얼마 되지 않은 덴마크 공주 크리스티나를 그려 오게 하였다.

   

 덴마크의 크리스티나(왼쪽)와 클리브즈의 앤.

이 초상화에서 크리스티나는 수줍은 듯이 약간 돌아선 채 보는 사람을 응시하고 있다. 보석이나 장식이 전혀 없는 검은색 상복은 오히려 지적이면서 단아한 얼굴을 돋보이게 하고 매혹적인 눈은 이 여성에 대해 더 알고 싶게 한다. 정략결혼이기는 했지만 아름다운 여성을 좋아했던 헨리 8세는 이 초상화에 끌려 크리스티나와 결혼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헨리 8세의 경력을 알고 있던 이 똑똑한 미망인은 그와 결혼할 마음이 없었다.

   

헨리 8세는 다시 홀바인을 네덜란드에 보내 또 다른 신붓감인 클리브즈 공작의 딸 앤을 그려오라고 했다. 앤은 외모가 평범했다. 앤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홀바인은 화려한 의상과 아름다운 보석들로 치장한 모습으로 그렸다. 헨리 8세는 그림을 보고 마음에 들어 결혼하기로 했다. 그러나 앤이 영국에 도착한 날 실제 모습을 보고 크게 실망한 그는 곧 이혼했다. 뛰어난 화가가 그린 초상화가 얼마나 인물을 미화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사례다.

   

원본 위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6/02/2009060201760.html>

   

   

   

06] 미술가의 교육

2010년 3월 23일 화요일

오전 3:35

   

나의 이메일 이름은 첸니니다. 이메일을 계정할 때 마침 중세 이탈리아의 화가 첸니노 첸니니(Cennino Cennini·1370?~1440?)에 대한 책을 읽고 있어서였다. 작품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첸니니가 오늘날까지 기억되는 이유는〈일 리브로 델라르테(미술의 책)〉를 썼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익힌 기술을 다른 미술가에게 전수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밝혔다. 화가가 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13년의 훈련이 필요하다고 한 그는 모든 미술의 기본은 드로잉이며, 도제 첫 일 년 동안 매일 종이나 패널에 펜·초크·목탄·붓으로 연습하라고 충고했다.

   

르네상스에 들어오면 화가의 훈련은 기술단련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론과 지식, 과학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그러나 드로잉에 대한 강조는 여전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1452~1519)는 관찰력과 상상력을 키우려면 항상 스케치 북을 가지고 다니라고 권장했다. 1563년 아카데미아 델 디세뇨가 세워져 처음으로 미술을 체계적으로 가르친 이후 유럽 미술 아카데미의 기본과정은 인체와 석고 드로잉으로 이루어졌다. 이토록 드로잉을 강조한 이유는 서양회화가 주로 역사·종교·신화를 주제로 하는, 기본적으로 인물을 그리는 미술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보는 사람이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의 얼굴표현, 동작, 운동감에서 감정을 읽고 주제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했다.

   

 15세기 초 첸니니의 제단화.

19세기 중반부터 이에 대한 반발이 시작되었다. 미술가들은 그림을 그리는 데는 하나의 방법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다른 미술가들과 구별되는 독창적인 양식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바로 모더니즘 미술가들이다. 그러나 모더니즘 미술이 중요시한 창의력과 자기표현 중심의 실기 교육이 지나치게 엘리트적인 미술가를 양산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최근 폴 게티 재단에서 미술가 지망생들에게 성()·인종 등 다양한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인문 교양 프로그램을 지원하기 시작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우리나라 모 대학의 미대 입학시험에 실기가 없어진다고 한다. 우리 시대의 훌륭한 미술가를 키우기 위한 바람직한 교육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된다.

   

원본 위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6/09/2009060901937.html>

   

   

   

07] 한국전 참전 기념물

2010년 3월 23일 화요일

오전 3:32

   

6·25를 기념하는 기념물은 우리나라는 물론이지만 유엔군으로 참전했던 나라에서도 상당수 발견할 수 있다. 그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이 미국 워싱턴 DC의 내셔널 몰에 있는 '한국전참전용사기념물'이다. 1995년에 완성된 이 기념물은 순찰 나온 미군 19명이 서로 주의를 환기시키며 한발 한발 나가고 있는 모습이다.

   

이들에게 모두 비옷을 입힌 이유는 많은 군인이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북한에서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혹한과 비바람이었다고 회고했기 때문이다. 조각상들 앞에는 원형의 '기억의 연못'이 있고 거기에는 "자유는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라는 구절이 적혀 있다. 또 옆에는 길이 50m의 검은 화강암 벽에 컴퓨터 그래픽으로 처리한 2400명의 육·해·공군, 군목, 간호사들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미국 워싱턴 DC의 '한국전참전용사기념물'.

이 기념물 건립은 1982년 내셔널 몰에 세워진 '월남전참전용사기념물'에 자극을 받아 추진되었다. 월남전기념물은 70m에 달하는 두개의 검은 화강석이 125도 각도로 V자 형태로 마주치는 단순한 추상 형태였다. 검은 화강석에는 사망한 군인 5만8007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승리보다는 죽은 병사를 기억하게 하는 이 기념비의 참신함에 대해 미술계에서는 찬사를 보냈지만, 검은색은 슬픔과 수치를 상징하므로 참전 군인을 모욕하는 것이라는 비난도 거셌다.

   

월남전기념물에 대한 논쟁은 한국전기념물에도 영향을 줬다. 한국전기념물 건립위원회는 참전 군인들의 의견을 잘 반영하고 생생한 전투장면을 사실적으로 재현하기를 원했다. 아주 뛰어난 사실성을 보여주는 기술적인 훌륭함은 실제 전투에 참여한 병사들의 긴장과 피곤을 매우 인상적으로 전달한다. 이 기념물이 전쟁을 더 이상 승리와 패배로 이해하고 있지 않다는 점은 중요하다. 기념물이 영웅적인 전투나 행위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개념에서도 벗어났다. 그보다는 자유와 민주주의의 수호라는 명분 아래 헌신한 평범한 군인들이 중심이 되었다는 점에서 기념물 역사에 중요한 획을 그은 조형물이다.

   

원본 위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6/16/2009061601689.html>

   

   

   

08] 베르메르의 위작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라는 영화가 있다. 스칼렛 요한슨과 콜린 퍼스가 주연한 이 영화는 17세기 네덜란드 델프트에서 활약한 화가 베르메르가 그린 그림을 주제로 한 픽션이다. 19세기 중엽에야 진지한 연구가 시작된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생애는 영화와는 달리 아직 확실하지 않은 부분이 많다. 그동안 베르메르가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이유는 그가 화가이면서 화상(畵商)이어서 작품을 많이 제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베르메르는 창문이 있고 지도나 그림이 걸려 있는 방에서 여성의 일과나 남녀가 음악을 연주하는 장면들을 즐겨 그렸다. 차갑고 섬세한 빛의 흐름은 물체의 구조와 색채의 변화를 미묘하게 포착한다. 친밀한 공간 속의 인물들은 세속의 일상에서 벗어나 꿈과 같이 조용하고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준다. 대부분 소품이지만 완벽한 질서와 시각적 화음은 그를 17세기 네덜란드의 대표적인 화가로 인정받게 하였다.

   

 베르메르의 '물 주전자를 쥐 고 있는 여인'

현재 알려진 베르메르의 작품은 36점이다. 미술사학자들은 그의 작품이 더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희망을 이용한 사람이 바로 한 반 미게렌이었다. 사실 묘사에 탁월했던 이 화가는 20세기 초 추상미술이 대세가 되자 재능을 인정받지 못했다. 그는 베르메르의 물감과 터치를 연구했다. 그런 다음 17세기 무명화가의 그림을 사서 물감을 벗겨내고 그 위에 베르메르처럼 그리고 사인을 했다. 저명한 미술사학자들이 모두 속아 넘어가 이 위작들은 대가들의 작품과 나란히 미술관에 걸리게 되었다. 그러나 결국 그는 고백을 하고 말았는데, 위조작품 한 점이 히틀러의 오른팔이었던 괴링의 손에 들어가는 바람에 국보급 작품을 적에게 팔았다는 반역 혐의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위작은 고대부터 존재했다. 미술 작품의 가격이 천문학적으로 뛰어오른 오늘날에는 전문적인 위조자가 더 많아졌다고 한다. 유명한 미술사학자이자 뛰어난 감식가였던 막스 프리드먼은 90세가 넘어 눈이 어두워졌어도 작품 앞에 서면 직감으로 진품인지 아닌지 알았다고 한다. 그와 같은 학자들의 전설은 끝나고 만 것일까?

   

원본 위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6/23/2009062301703.html>

   

   

   

09] 르 코르뷔지에의 성당

   


대영박물관에
소장된 파르테논 신전의 대리석 조각들이 그리스에서 재차 반환요구를 하면서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이 조각상들은 19세기에 영국의 외교관 엘긴이 그리스에서 영국으로 가져간 것인데, 그런 연유로 일명 '엘긴 마블'이라고 불린다. 그리스 미술 전성기에 지어진 파르테논 신전(기원전 447~438년)은 아테네가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이긴 후 수호신 아테네 여신에게 바친 신전이다.

   

파르테논은 '군신(軍臣) 아테네 여신의 방'이라는 뜻이다. 국가의 힘과 이상을 대내외에 알리고자 했던 이 신전은 아크로폴리스(높은 도시라는 의미)에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지은 하얀 대리석의 장엄한 건축이다. 명확한 구조와 완벽한 균형 및 비례를 보이는 이 신전은 아테네인이 믿었던 조화로운 우주적 질서를 반영한다.

   

 '노트르담 뒤 오'성당.

파르테논 신전은 이후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대표적인 인물은 스위스 태생의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1887~1965)이다. 그는 젊었을 때 파르테논 신전을 보고 '파르테논은 드라마'라고 노트에 썼다. 르 코르뷔지에가 1955년에 프랑스 서부의 작은 도시 롱샹에 지은 '노트르담 뒤 오' 성당은 파르테논에 대한 그의 반응이다. 초록색 잔디의 높은 언덕 위에 서있는 이 성당은 파란 하늘을 등지고 하얀 실루엣을 드러내며 파르테논을 연상시킨다.

   

롱샹의 이 성당은 지금까지 있었던 어떤 종교적 건물과도 다르다. 약 300명 정도의 신도들이 앉을 수 있는 이 작은 성당은 건축이라기보다는 조각과 같다. 벽과 지붕은 모두 기울어진 선이나 곡선으로 되어 있다. 외부의 모습은 마치 성곽이나 보트를 연상시키고, 천장이 곡선으로 내려앉은 내부는 동굴에서 예배를 보는 듯한 은밀한 느낌을 준다.

   

천장과 벽 사이에는 약 10㎝ 정도 간격이 있어 그 사이로 들어오는 빛이 신비스럽게 실내를 밝힌다. 무엇보다 각각 크기가 다른 창문의 현대적 스테인드글라스의 아름다움은 극적인 감명을 불러일으킨다. 시각적이고, 감정적이면서 명상적인 롱샹의 성당은 현대 종교건축의 또 다른 드라마다.

   

원본 위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6/30/2009063001694.html>

   

   

   

10] 뭉크의 '절규'

   

블록버스터 미술 전시에 관객이 몰리는 것을 보면 미술도 많이 대중화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전시뿐 아니라 인쇄매체나 인터넷에서 쉽게 미술작품을 접하게 되면서 몇몇 유명 작품들은 대중문화에 편입되어 변형되거나 새로운 의미를 얻기도 한다. 이런 작품 중에 노르웨이 화가 에드바르 뭉크(1863~1944)의 '절규'가 있다.

   

이 작품의 배경은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의 해변가다. 노을이 지는 저녁에 다리 위를 걸어가던 한 인물이 갑자기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비명을 지른다. 실제로 비명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메아리처럼 배경의 풍경 속으로 퍼져가면서 화면 전체를 울리듯 시각화되었다. 뭉크는 어느 날 두 명의 친구와 함께 걷다가 갑자기 하늘이 핏빛으로 변했고, 자연으로 이어지는 무한한 절규를 느꼈던 경험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뭉크의 '절규'.

세기말 인간의 신경쇠약적인 불안과 고독을 표현하는 이 그림의 해골과 같은 얼굴은 강한 충격을 준다. 그는 인상주의 그림들처럼 독서를 하는 여성을 그리기보다는 느끼고 고통받고 숨을 쉬고 사랑을 하는 사람들을 그리겠다고 말했다. 직접적이고 강렬하게 인간의 내면세계를 노출시킨 뭉크의 그림들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뭉크의 전시회가 열린 곳곳에서 그의 작품들이 철거되는 소동이 일어났다.

   

한때 과격하게 여겨졌던 이 작품은 20세기 후반에 오면서 친밀한 대중적 '아이콘'이 되었다. 사람들은 절규의 이미지를 자유롭게 해석하기 시작했다. 1994년 노르웨이 국립미술관에서 이 작품이 도난당했을 때 낙태반대 운동을 벌이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훔쳤다고 하면서 '절규'는 죽어가는 태아의 소리 없는 비명이라고 주장했다.

   

'절규'의 이미지는 가면으로도 만들어져 핼러윈 파티에 단골로 등장하기도 하고, 학자금이 없어 비명을 지르는 학생들의 이미지로도 쓰였다. 가장 유머러스한 것은 40세로 중년을 맞이한 사람에게 보내는 생일카드에 사용된 경우다. 이 세상에 유일무이한 작품이라는 원작의 신비는 사라지고, '절규'는 오늘날 일상의 이미지가 되었다.

   

원본 위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7/08/2009070800111.html>

   

   

   

11] 여성 화가 아르테미시아

   

올해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양혜규 작가가 우리나라를 대표해 전시를 하고 있다. 이제 '여류 화가'라는 호칭이 촌스럽게 느껴질 만큼, 여성 미술가들이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활약하는 세상이 됐다. 서양에서 여성 화가를 기록한 최초의 문헌은 로마의 대()플리니우스가 쓴 대백과전서 '박물지'이다. 이 책에는 고대 그리스에서 활약했던 4명의 여성 화가 이름이 언급되어 있다.

   

중세에는 수녀들이 그림을 그리기도 했고, 르네상스 시대에는 소포니스바 안귀솔라와 같은 몇몇 여성 화가들이 있었으나 초상화나 정물화와 같이 제한된 주제를 그렸다. 여성 화가가 극소수였던 가장 큰 이유는 미술의 기본적인 훈련이었던 누드모델을 그리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드물지만 활약상이 보이는 여성 화가는 아버지나 남편이 화가라서 그들에게 배우거나 화실에서 작업할 수 있었던 경우였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

남성들과 비교해 손색없이 걸출했던 첫 번째 여성 화가는 17세기 이탈리아에서 활약한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1593~1653)이다. 그 역시 화가였던 아버지에게서 기초 훈련을 받았으나 원근법 교습을 위해 아버지는 딸을 친구인 아고스티노 타시에게 보내는 실수를 범했다. 아르테미시아는 타시에게 강간을 당했고 이 사건에 대한 재판이 열렸으며 심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아르테미시아가 그린 인물들은 대부분 구약에 나오는 강인한 여성이다. 재판 직후에 그린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1612)는 유대 여성 유디트가 적장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칼로 베는 장면이다. 극적인 광선과 고통에 일그러진 홀로페르네스의 생생한 얼굴 표정은 아르테미지아가 이 그림을 통해 심리적인 복수를 하고 있다는 해석을 낳기도 한다. 그 후 그는 역사화나 종교화와 같은 대작을 그리면서 이름을 날렸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기록은 당시에는 별로 많지 않았다. 1970년대 이후 미술사학계에서 여성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재발견된 아르테미시아는 페미니스트들에게 전설적인 존재로 떠오르고 있다.

   

원본 위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7/14/2009071401777.html>

   

   

   

12] 최후의 심판

   

인간의 가장 오래된 관심사의 하나는 사후세계이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죽은 사람의 관에 사후세계의 안내서인 '사자(死者)의 서()'를 넣어주었는데, 여기에는 죽은 사람이 심판을 받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죽은 사람의 심장과 새의 깃털을 저울에 달아 깃털보다 무거우면 영원한 내세를 누리지 못하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집트 미술에는 지옥의 장면이 표현되지는 않았다.

   

지옥 장면이 많이 그려진 것은 기독교 미술이다. 중세의 성당에는 신자들이 드나드는 서쪽 문 위의 팀파눔(입구 위의 반원형의 공간)에 흔히 '최후의 심판'이 조각되었다. 대부분 문맹이던 당시의 신자들에게 사후의 심판을 상기시키기 위해서였다. 프랑스 오텅에 있는 12세기 생 라자르 성당의 팀파눔 조각에는 지옥에 떨어진 저주받은 혼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는 장면이 나온다. 대천사 미카엘은 악마가 모르게 저울 밑에 살짝 손을 대어 죄를 가볍게 해주고 있다. 일종의 부정행위이지만 지옥으로 가는 사람을 한 사람이라도 더 막으려는 노력이다.

   

 시스티나 성당의 벽에 그려진 '최후의 심판'

미술가들이 지옥장면을 묘사할 때에는 성인(聖人)을 그릴 때보다 제약을 덜 받았다. 지옥 장면을 가장 자유롭게 상상한 화가는 아마 플랑드르의 보슈(1453~1516)일 것이다. 그의 작품 '쾌락의 정원'에는 세속에서 육체적인 즐거움에 빠져 있던 인간들이 괴물이 지배하는 어두운 지옥에 떨어진 장면이 나온다. 보슈는 놀랍게도 온갖 벌을 받는 인간들 속에 자신의 자화상을 그려 넣었다.

   

미켈란젤로(1475~1564)는 한 수 위였다. 시스티나 성당의 벽에 '최후의 심판'을 그리면서 그는 이 벽화의 아랫부분에 지옥으로 떨어지는 영혼들을 묘사했다. 그림을 본 추기경 비아지오 체세나가 누드 인물들이 너무 난잡하다고 비난했다. 미켈란젤로는 온몸을 뱀이 칭칭 감는 벌을 받고 있는 지하의 사신(邪神) 미노스에 추기경의 얼굴을 그려 넣었다. 게다가 사람들이 드나드는 문 바로 위쪽으로 눈에 잘 띄는 위치였다. 추기경이 교황에게 불평하자 교황은 지옥은 자신의 영역 밖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답했다고 한다.

   

원본 위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7/21/2009072101601.html>

   

   

   

13] 화상(畵商) 빌헬름 우데

   

최근에 프랑스의 '나이브 아트' 화가 세라핀 루이(1864~1941)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세라핀'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나이브 아트'란 미술가로서의 정식 교육을 받지 않은 화가들의 작품을 말한다. 이들의 그림은 서투르고 소박하지만 훈련받지 않은 화가에게서 찾을 수 있는 순수함 때문에 현대에 와서 관심을 끌게 되었다. 세라핀 루이는 상리스에서 하녀로 일하면서 집에 돌아오면 주변에서 흔히 보는 꽃이나 과일, 나무를 그렸던 화가였다. 그러던 어느 날 상리스에 잠깐 와 있던 화상 빌헬름 우데의 눈에 띄어 1927년부터는 주요 화랑에서 전시를 하게 되었고 점점 유명해졌다. 정밀하게 그린 과일과 나무들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강렬하고 신기(神技)를 느끼게 한다.

   

세라핀을 발굴한 우데는 독일인으로 일찍이 무명이었던 피카소의 작품을 사들였고 피카소도 그의 초상을 큐비즘 양식으로 그린 바 있다. 그러나 우데의 열정은 무엇보다도 '나이브 아트'에 있었다. 그가 열정적으로 후원하고 단행본까지 쓴 앙리 루소(1844~1910) 역시 또 다른 '나이브 아트' 화가였다. 약 14년간 세관원으로 일하다 그만두고 중년의 나이에 아마추어 화가가 된 루소는 원래 앵그르처럼 아카데믹한 화가가 되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잠자는 집시〉 같은 그림은 어느 아카데믹한 화가도 그릴 수 없었던 꿈과 같은 요술적인 세계를 보여준다. 원근법과 신체 묘사는 서투르지만 이상하게 모두 앞으로 향하는 사자의 갈기나 집시의 옷 등은 아주 정교하게 그려져 있다. 적막한 사막에서 사자가 잠이 든 집시에게 다가가는 장면은 숨을 죽인 듯한 긴장감을 주지만 이들을 비춰주는 둥근 달이 뜬 밤의 풍경은 말할 수 없이 매혹적이고 신비스럽다.

   

우리나라에서도 백화점이나 미술관, 또는 대학교에서 운영하는 일반인을 위한 미술 실기 강좌에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고 한다. 화가의 꿈을 키우고 있는 재능 있는 숨은 이들을 발굴할 한국의 우데는 어디에 있을까.

   

 앙리 루소의 '잠자는 집시'.

   

원본 위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7/28/2009072801588.html>

   

   

   

14] 이제키아스의 항아리 그림

   

 아킬레스와 펜테실레아.

고대 그리스에는 걸출한 화가가 많았으나 전해오는 작품이 거의 없다. 그 대신 그리스 회화를 엿볼 수 있게 하는 것은 현재까지 수천 점이 남아 있는 항아리 그림들이다. 그리스인들은 술이나 물, 또는 기름 등을 담아두는 용도로 사용하던 항아리에 그림을 그려 넣었다. 항아리 그림에는 적색 표면에 검은색의 인물이 그려 있는 흑색상(黑色像)과, 흑색 표면에 적색 인물이 그려진 적색상(赤色像)이 있다. 적색상이 더 후기에 만들어진 항아리들이다.

   

항아리에 그림을 그리는 화공(畵工)은 벽화를 그리던 화가보다 사회적 위상이 낮았다. 그래도 화공이나 도공(陶工) 중에는 자신의 이름을 항아리에 적어놓은 경우가 있었다. 아테네의 가장 탁월한 화공이자 도공이었던 이제키아스는 자신이 만든 항아리에 마치 항아리가 말하는 것처럼 "이제키아스가 저를 그렸습니다" "이제키아스가 저를 만들었습니다"라고 썼다. 자기 직업과 작업에 대한 자신감을 느끼게 한다.

   

이제키아스의 유명한 흑색상 '아킬레스와 펜테실레아'는 기원전 525년에 제작된 항아리 그림으로 호머의 '일리아드' 중 한 장면이다. 그리스 연합군의 장군인 아킬레스는 긴 창으로 무릎을 꿇고 넘어진 아마존의 여왕 펜테실레아의 목을 겨누고 있다. 펜테실레아는 트로이를 위해 싸우고 있었다. 압박을 가하는 아킬레스의 강한 대각선과 표범의 가죽 옷을 입은 펜테실레아의 작은 대각선은 서로 평행이 되는 구도를 이룬다.

   

펜테실레아의 투구가 벗겨지면서 얼굴이 드러나는데, 바로 이때 아킬레스는 이 아름다운 여왕을 보고 사랑에 빠지게 된다. 펜테실레아 역시 죽는 순간 아킬레스의 눈에서 사랑을 읽는다. 검은 투구 속에서 번뜩이는 아킬레스의 눈과 순간적으로 머리를 돌려 아킬레스를 마주 보는 펜테실레아의 흰 얼굴은 극적인 대조를 이룬다. 그러나 모든 것은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여왕은 목에서 피를 뿜으며 죽고 아킬레스는 슬픔에 빠지고 만다. 사랑과 죽음이 교차하는 찰나의 긴박한 장면이 작은 항아리 그림 속에 응축되어 있다.

   

원본 위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8/04/2009080401525.html>

   

   

   

15] 랭브르 형제의 호화 기도서

   

 '베리 공작의 호화로운 기도서'.

중세에 가장 많이 남아 있는 미술의 종류는 채식(彩飾)필사본이다. 채식필사본이란 인쇄술이 나오기 전, 글을 펜으로 직접 쓰고 그림으로 장식한 책을 의미한다. 필사본은 고대에서부터 존재했으나 그 어느 시대의 필사본도 중세 필사본의 아름다운 서체와 그림을 따라가지 못한다. 성경이나 복음서, 찬송가의 구절이 쓰인 중세의 필사본은 처음에는 주로 수도원에서 성직자들을 위해 제작되었으나 13세기에 와서는 세속인들을 위해 도시의 공방에서도 만들었다.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가장 인기 있던 채식필사본은 하루에 여러 번 시간에 맞추어 기도할 때 사용하는 기도서였다. 기도서는 특히 북유럽 귀족들의 소지품이 되었고 성경책보다 더 잘 팔렸다고 한다.

   

기도서 중 가장 아름다운 채식필사본 가운데 하나는 15세기에 플랑드르 출신 랭브르 형제가 공동으로 제작한 '베리 공작의 호화로운 기도서'이다. 프랑스 왕 샤를 5세의 동생이었던 베리 공작은 농민에게 혹독한 세금을 물리고 허영에 찬 사람이었지만 진귀하고 아름다운 물건을 수집하던 소장가였다. 랭브르 형제(폴, 에르망, 장)가 베리 공작을 위해 만든 기도서에는 1년, 각 12달에 적합한 귀족의 행사나 계절에 따른 농민들의 노동을 번갈아 그렸다. 가로 14cm, 세로 22cm짜리 그림들이다.

   

2월의 겨울 풍경은 서양미술에서 최초로 그려진 설경(雪景)이다. 이 매혹적인 그림에는 한가로운 겨울 농가의 모습이 나타난다. 저 멀리 농부가 당나귀를 끌며 마을에 가고, 숲에는 나무를 하는 나무꾼이 있으며, 그 옆에는 한 여자가 손을 호호 불면서 집으로 가고 있다. 우리 속에는 양들이 들어가 있고 새들은 모이를 쪼아먹는다. 굴뚝에서 연기가 솔솔 나오는 오두막집에는 여자들이 치마를 걷어 올리고 불을 쬐고 있다. 인간, 동물, 그리고 자연이 어우러지는 농민들의 일상을 묘사한 그림이 종교적인 기도서에 등장했다는 것은 프랑스에도 뒤늦게 르네상스가 오고 있음을 알려준다.

   

원본 위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8/11/2009081101635.html>

   

   

   

16] 쿠르베와 휘슬러

   

19세기 파리는 미술의 중심지였다. 특히 매년 열리던 '르 살롱' 전시회는 국가가 주관하는 전시회로 여기서 두각을 나타낸다는 것은 성공의 지름길이었다. 살롱전은 미술평론이 본격적인 분야로 발전하던 이 시기에 평론계가 주목하는 행사였다. 문인이나 기자, 학자 등 다양한 배경을 가진 평론가들이 살롱전 출품작에 대해 평을 썼다.

   

오늘날과 비교하면 당시의 비평은 더 가차없었다. 미술의 개념이나 양식이 급격히 변화하던 당시, 마네나 세잔은 그들의 선구적인 면을 알아보지 못한 평론가들의 악평 때문에 실의에 빠지기도 했다. 쿠르베는 자신의 작품을 제외시킨 데 대한 반발로 1855년 만국박람회가 열리던 장소 바로 앞에 가건물을 짓고 자신의 작품 27점을 전시하는 시위를 하기도 했다.

   

 '검은색과 황금색의 녹턴: 떨어지는 불꽃'

미국 태생으로 런던에서 활약하던 휘슬러는 더 강경했다. 그는 1877년 런던의 그로스브너 갤러리에서 '검은색과 황금색의 녹턴: 떨어지는 불꽃'이라는 작품을 전시했다. 젖은 화면 위에 물감이 착색되어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섬세한 이 그림은 런던 야경의 황홀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이 그림은 회화란 더 이상 이야기를 보여주거나 사실대로 묘사할 필요 없이, 색채와 형태의 추상적 가치 그 자체로 존재한다는 휘슬러의 믿음을 반영한다.

   

이 개념은 당시 영국에서는 새로운 것이었다. 평론가 존 러스킨은 사람들의 얼굴에 물감 냄비를 내던진 것 같은 그림의 가격이 200기니나 된다는 것은 어처구니가 없다고 악평을 썼다. 휘슬러는 명예훼손으로 소송을 걸었다. 재판관이 이틀밖에 걸리지 않은 그림을 200기니나 받을 수 있느냐고 묻자 휘슬러는 200기니는 자신이 일생에 걸쳐 배운 지식에 대한 가격이라고 반박했다.

   

휘슬러는 승소했지만 손해배상으로 겨우 1파징(1/4 페니)을 받았을 뿐 소송비용 때문에 결국 파산하고 말았다. 그러나 관습적인 방법에 반발하고 자유로운 예술 표현과 권리를 주장했던 휘슬러나 쿠르베는 그 이후의 아방가르드 미술가들에게 선구적인 모델이 되었다.

   

원본 위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8/18/2009081801957.html>

   

   

   

17] 우사인 볼트와 제우스

   

100m를 9초 58로 주파해 세계 신기록을 세운 육상선수 우사인 볼트가 경기 후 번개를 쏘는 모습을 연출했다. 볼트라는 이름 때문에 '천둥번개'(thunderbolt)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그에게 걸맞은 세러모니였다. 화살을 쏘는 듯한 그의 자세를 보면서 번개 또는 벼락으로 상징되는 고대 그리스의 제우스신()의 조각이 떠올랐다.

   

현재 아테네 고고학박물관에 전시된 기원전 460년경의 제우스신 조각은 볼트와는 달리 침착하게 왼팔을 앞으로 뻗어 목표물을 겨냥하고 오른손에는 (현재는 없어졌지만) 번개를 들고 막 던지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손에 쥔 것이 번개가 아니고 삼지창이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렇다면 이 조각은 바다의 신 포세이돈일 수도 있다. 그러나 대체로 제우스라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진다.

   

 현재 아테네 고고학박물관에 전시된 기원전 460년경의 제우스신 조각

2m에 달하는 이 장엄한 조각의 당당하고 균형 잡힌 몸은 고대 그리스인들의 신체에 대한 매혹과 열정을 잘 보여준다. 이전의 조각들에서는 움직임의 표현이 자유롭지 못했던 데 비해, 잠시 멈춰 선 듯한 이 조각은 체중이 오른발에서 왼발로 자연스럽게 이동된다. 발 밑에 종이 한 장을 집어넣어 보면 오른발의 앞부분과 왼발의 뒤꿈치만이 바닥에 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압권은 집중적인 힘을 느끼게 하는 강렬한 얼굴표정으로, 신 중의 신이라는 제우스의 위엄을 느끼게 한다.

   

제우스 상은 현존하는 고대 그리스의 몇 안 되는 청동상이라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비싼 청동은 조각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재료였지만 전쟁이 나면 무기를 만들기 위해 녹여지곤 해, 남아 있는 조각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유명한 미론의 '원반 던지는 사람'도 청동 원작은 없어지고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로마시대의 모작이다. 다행스럽게도 제우스 상은 1926년에 지중해의 케이프 아르테미시온에서 침몰된 배에서 기적적으로 발견되었다. 기원전 2세기경 배에 실려 다른 도시로 운송되던 중 침몰하여 바다 속에 약 2000년간 잠겨 있다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원본 위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8/25/2009082502030.html>

   

   

   

18] 메디치와 록펠러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은 역사상 가장 유명한 미술 수집가였다. 15세기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의 은행을 운영하면서 정치적인 세력을 키웠던 메디치 가문은 조반니 비치 메디치에서부터 그의 아들 코지모, 손자 피에로, 증손자 로렌조 대공(大公), 그리고 후일 교황 레오 10세가 된 로렌조의 아들 조반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미술가를 후원했다.

   

특히 로렌조 대공이 어린 미켈란젤로의 재능을 높이 사 함께 식사를 하고 고대 미술품 컬렉션을 공부할 수 있게 배려한 것은 유명하다. 동기가 당시 고리대금업이었던 은행업에 대한 오명을 씻고자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려는 것이었다고 하지만 이들의 후원은 피렌체를 문화와 예술의 중심으로 만들었다. 메디치 소장품은 오늘날 우피치 미술관의 주요 컬렉션으로 남아 있다.

   

 우피치 미술관.

여러 대에 걸친 미술 후원으로 메디치에 비교될 만한 현대의 컬렉터는 록펠러 가문이다. 스탠더드 석유회사를 창업한 록펠러 1세 역시 악덕 자본가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1913년에 록펠러 재단을 세우고 미술품 수집과 박애사업을 시작했다. 이후 록펠러 2세와 그 자녀들까지 삼대에 걸친 미술과 문화 후원이 미국 각 분야에 미친 영향은 대단한 것이었다.

   

록펠러 2세의 부인 애비는 안목이 탁월했던 여성이었다. 미국에 변변한 현대미술관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1929년 근대미술관(MoMA로 알려짐)을 창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애비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초대 관장이었던 미술사학자 앨프리드 바는 회화·조각뿐 아니라 디자인·사진·영화·건축 등 다양한 분야의 컬렉션을 시작함으로써 오늘날 굴지의 미술관으로 성장할 기초를 닦았다.

   

록펠러 3세들의 경우, 큰아들 존은 아시아미술에 관심을 가지면서 1000만달러에 달하는 자신의 수집품을 아시아 소사이어티에 기증했으며, 데이비드는 체이스맨해튼 은행을 이끌어가면서 기업의 예술 후원에 앞장섰다. 언젠가 우리나라에서도 돈 많은 컬렉터 수준을 넘어서는 예술 후원자들이 많이 나와 그들에 대한 글을 쓸 수 있었으면 한다. 

   

원본 위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9/01/2009090101836.html>

   

   

   

19] 러시아 혁명과 말레비치

   

 검은 사각형과 빨간 사각형.

공산주의와 아방가르드 미술운동? 분명 어울리지 않는 한 쌍이다. 그러나 1917년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 이후 혁명정부와 아방가르드 미술가들은 몇 년간 협력관계에 있었다. 이들이 서로 의기투합한 부분은 기존 질서를 무시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점에서였다. 미술가들은 공산주의 정부야말로 자신들이 꿈꾸던 유토피아가 실현된 것으로 생각했고, 혁명정부는 미술가들이 추구하는 새로운 재료와 소재, 산업체 구조물에 대한 관심, 과학과 미술의 결합이 미래를 약속하는 자신들의 구호와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혁명을 지지한 말레비치(1878~1935)는 러시아 아방가르드 운동의 주요 화가다. 1915년 그의 작품은 유럽에서 한창 유행하던 추상미술의 영향을 받아 자연이나 외부 세계와 완전히 절연한 비대상(非對象) 회화가 되었다. 화면은 기본적으로 사각형으로 구성된다. '검은 사각형과 빨간 사각형'에서 보듯 단순한 정사각형, 사각형을 교차해 만든 십자가 형태, 또는 여러 개의 사각형이 서로의 관계에 의해 역동적이고 긴장된 상태가 되는 추상 작품이었다.

   

무한한 우주적 공간과 에너지가 함축된 그의 화면은 유토피아를 나타낸다. 말레비치를 비롯한 러시아 아방가르드 미술가들의 미술은 그때까지만 해도 후진적으로 보이던 러시아 미술을 단숨에 유럽 어느 나라의 미술보다 실험적이고 독창적인 것으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1924년 레닌이 죽자 실험미술에 대한 정부의 태도는 변하기 시작했다. 미술은 노동자의 기준에 맞추어야 하며 이젤 회화는 부르주아 회화라고 주장하는 정부에 대해 미술이란 기본적으로 개인의 표현이라고 생각한 말레비치는 마찰을 빚기 시작했다. 입지가 점점 좁아지자 그는 구상(具象)미술로 돌아왔다. 그러면서도 말레비치는 추상 회화를 계속 그렸고 예전에 그린 것처럼 연대를 속여 적어 넣었다. 1932년 스탈린은 소위 프롤레타리아 미술인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를 공식적으로 선언하였고, 2년 후에 말레비치는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무덤에는 그의 작품에 걸맞게 사각형의 묘비가 서 있다.

   

원본 위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9/08/2009090801880.html>

   

   

   

20] 밀레의 신화

   

초등학교 시절 교실에는 늘 밀레의 '만종'이나 '이삭줍기'의 복사본이 걸려 있었다. 4학년 국어 교과서에는 위인(偉人)의 예로 밀레의 생애에 대한 이야기가 실리기도 했다. 화가 밀레가 진실한 그림을 그리기 위해 파리를 떠나 농촌(바르비종)에 가 어렵게 생활하면서 참된 농민의 모습을 그렸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농민 화가 밀레에 대한 이야기가 각색된 위인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밀레는 교육을 잘 받은 부농의 아들이었고 바르비종에서도 하녀를 둘 정도였으며, 파리를 떠난 이유도 단순히 농민을 그리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은 이미 밝혀진 바 있다. 잘못된 밀레의 신화는 그의 친구이자 화상이었던 상시에가 밀레의 전기(傳記)를 미화시켜 펴냈기 때문이다.

   

 이삭줍기

밀레가 살아 있던 19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그의 그림은 논란의 대상이었다. 우람하고 거친 농민의 이미지인 '씨 뿌리는 사람'은 농민의 사회적 힘을 강조하고 억압된 농민을 대변하는 것으로 비쳤다. '이삭줍기'도 배경에 추수 낟가리를 쌓아두고 있는 부농과 혹시 남은 이삭이라도 주워가려고 허리를 굽힌 빈농의 세 여인은 사회 계급의 대비로 해석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보는 사람에 따라서 이 그림은 단지 계절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고 자연에서 일하는 인간의 고귀한 노동을 상기시키는 작품으로 읽힐 수도 있다. 사실 이것이 밀레의 인기가 최고조에 달했던 미국에서 밀레의 그림을 보았던 방식이다.

   

청교도 정신이 뿌리 깊은 개척민이었던 미국인들에게 땀 흘리고 일하는 밀레의 농민상은 도덕적 우월성과 인간의 미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미국에서 밀레는 성인화가와 같은 존경을 받게 되었고 그의 그림의 복사본은 교회, 학교 그리고 각 가정에 걸릴 정도로 대중적 우상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밀레가 대중적 인기를 누린 것은 이런 맥락에서였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미술은 사회비판적 미술이 아니라 근대화되어 가던 우리 사회에 농촌에 대한 향수를 느끼게 해준 전원미술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원본 위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9/15/2009091502065.html>

   

   

   

21] 원근법

   

길 양쪽에 늘어선 전봇대는 멀어질수록 점점 작아지고 마지막에는 한 점에서 만나게 된다는 선 원근법(또는 일점 원근법)을 우리 세대는 초등학교 미술시간에 배웠다. 원거리의 색채를 근거리의 색채보다 흐릿하게 그림으로써 거리감을 나타내는 방법도 있지만 대개 원근법이라면 선 원근법을 의미한다.

   

과학적인 원근법을 처음 발명한 사람은 초기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건축가이자 조각가였던 브루넬레스키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원근법을 미술가의 기본 훈련으로 일반화한 사람은 인문주의자이며 과학자, 건축가, 시인이기도 했던 '만능인' 알베르티다. 알베르티는 그의 저서 '회화론'(1435년)에서 피렌체를 방문했을 때 본 브루넬레스키의 원근법에 대해 썼다.

   

 산 로마노의 전투.

미술가가 한자리에서 자신의 시야에 들어오는 자연의 모습을 기하학적 체계로 정리해 인물, 건축과 풍경이 조화롭게 배열된 공간의 재현을 가능하게 한 원근법은 새로운 기술적 발명이었다. 원근법은 미술과 수학의 결합이었고, 시각의 과학을 대변하는 도구로 받아들여졌다. 또 미술가들은 더 이상 장인적인 기술을 배우는 데에 만족하지 않고 자연을 관찰하고 지적인 공부를 해야 한다는 인식을 하게 된다. 1430년대부터는 실험적 미술가들은 앞을 다투어 자신의 작품에 원근법을 적용하기 시작했다.

   

우첼로(1397~1475)는 원근법에 '미친' 화가였다. 그는 잠을 자면서 "원근법은 정말 사랑스러워"라고 잠꼬대를 했는데 부인은 원근법을 우첼로의 애인 이름으로 오해했다고 한다. 그가 그린 '산 로마노의 전투'는 시에나와 피렌체의 전투를 그린 장면이다. 중앙의 백마를 탄 장군의 육각형 모자, 바닥에 떨어진 무기, 갑옷, 쓰러진 병사들은 모두 원근법에 맞춰 정확한 자리에 그려졌다. 결과적으로 이 그림은 장식적이면서 매혹적이지만 치열함보다는 모든 형태가 원근법 구조에 의해 통제되고 동결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우첼로가 왜 자신을 예술가보다는 수학자로 불러 달라고 했는지 이해가 되는 것 같다. 

   

원본 위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9/22/2009092201714.html>

   

   

   

22] 통치자의 이미지

   

인류가 남긴 미술품 중에 가장 오래전부터 제작되어 온 종류의 하나는 통치자의 이미지다. 통치자의 조각이나 초상화는 실재 인물의 대신이었고, 그 주변에서는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 했다. 통치자의 모습은 인물을 충실히 옮기는 것 이상으로 사람들이 우러러볼 수 있는 권위와 위엄을 갖추는 것이 기본이었다.

   

고대에는 대체로 백성을 보호하는 용감한 영웅의 모습으로 나타났는데, 특히 기마상은 권위와 용맹함을 보여주는 이상적인 통치자의 이미지로 많이 제작되었다. 가장 유명한 예가 로마에 있는, 쓰러진 적을 밟고 있는 말 위에 침착하게 앉아 축복을 내리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기마상이다.

   

근대에 와서 정치적 이미지 확보에 미술의 중요성을 일찍이 인식한 인물은 나폴레옹이었다. 그는 당대 최고의 화가 다비드에게 '알프스를 넘어가는 나폴레옹'(1800~1801년)을 그리게 했다. 

   

 알프스를 넘어가는 나폴레옹.

그는 화가에게 얼굴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전체 이미지의 느낌이 중요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나폴레옹은 사납게 날뛰는 말 위에서도 침착하게 한 손을 들어 위를 가리키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전진을 명령하는 것이지만 미래를 향한 제스처이기도 하다. 앞에 있는 돌에는 그의 이름 보나파르트와 함께 고대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과 중세의 샤를마뉴 대제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자신을 이 영웅적인 인물들과 동일시하려는 의도이다. 사실 나폴레옹은 이러한 늠름한 모습으로 알프스를 넘어가지 않았다. 노새를 탔다는 것이 정설이다.

   

통치자를 영웅적인 모습으로 선전하려는 시도는 현대에 와서는 대부분 사라져 버렸다. 또 정치적 지도자들의 모습이 늘 텔레비전이나 언론에 보도되면서 이들에 대한 경외감도 없어져 버렸다. 이들은 오히려 자연스럽고 친근한 이미지로 알려지기를 원한다. 한때 우리나라에서 모든 대선 후보들이 어린애를 안고 찍은 사진을 선거 포스터에 사용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통치자의 이미지는 사실 여부를 떠나 그 시대가 요구했던 이상적인 통치자라고 보아도 될 것 같다.

   

원본 위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9/29/2009092901846.html>

   

   

   

23] 로댕의 '청동시대'

   

 청동시대

휴머니즘(人本主義)에 바탕을 둔 서양미술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인간이었다. 인간은 늘 자신의 모습을 미술로 재창조하고자 하는 욕망을 느껴왔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완벽한 인간의 신체에서 신성(神性)을 찾았다. 중세에는 신체의 미보다는 정신적인 미를 추구했지만, 이상적인 인간형을 찾으려는 미술가의 추구는 르네상스 이후 다시 계속되었다. 적어도 19세기 조각가 로댕(1840~1917)이 나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1877년 37세의 젊은 조각가 로댕은 파리의 전시회에 '청동시대'를 출품했다. 이 작품은 그때까지 보았던 조각과는 판연하게 달랐다. 한 손을 머리에 올리고 서 있는 평범한 얼굴의 이 청년상은 그리스 조각과 같은 이상화된 인체가 아니라 실제 사람과 같았기 때문이다. 표면의 생생한 촉감이나 광선에 녹아드는 듯한 음영의 대비 등 세심한 표현은 특정한 한 개인을 느끼게 한다. 이 조각은 평범한 인물이더라도 아름답고 생명력 넘치는 표현이 가능함을 보여주었다.

   

이 때문에 로댕은 인체를 흙으로 빚고 청동으로 주조한 것이 아니라, 실제 모델에서 직접 본을 떴다는 혐의를 받았다. 로댕은 공식적으로 항의를 했고, 모델로 쓴 벨기에 출신 군인의 누드 사진을 제시했다. 작품과 사진이 분명히 다른 것을 본 조각가 협회는 이 혐의가 잘못된 것임을 밝혔다. 떠들썩했던 이 사건은 무명의 청년 조각가 로댕을 일약 유명인으로 만들었고 이후 그에게는 작품 주문이 밀려들었다.

   

'청동시대'가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던 또 하나의 이유는 이 조각이 신화나 역사적인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로댕은 '청동시대'라는 제목을, 작품을 완성한 후에 붙였다. 그는 원래 이 작품은 한 청년이 깊은 잠에서 깨어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고 설명했는데, 서서히 의식을 회복하는 모습은 인류의 시작을 상징하는 듯이 보인다. 다윈의 '진화론'이 큰 반향을 일으키던 당시 인간의 근원에 대한 관심이 이 조각에도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원본 위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10/06/2009100601773.html>

   

   

   

24] 유화의 탄생

   

16세기의 베네치아 르네상스 미술은 감각적이고 화려한 색채의 회화로 잘 알려져 있다. 지적인 분위기의 로마나 피렌체와는 달리 속세적인 취향을 가졌던 이 향락의 도시에서는 다른 어느 곳보다 유화가 발전했다. 그 이유의 하나는 유화의 고급안료들이 동방 무역의 중심지인 베네치아를 통해 주로 수입되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예수 그리스도와 마리아의 의상에 많이 사용된 짙은 파란색 '울트라마린'은 가장 비싼 안료였다. 이 안료는 주로 아프가니스탄에서 생산되는 '라피즈 라즐리'라는 원석에서 추출되는데, 기착지인 베네치아에서는 다른 도시보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으로 살 수 있었다. 벨리니나 티치아노 같은 화가들이 사치스러운 비단, 반짝이는 보석, 아름다운 태피스트리 등을 풍부하고 신선한 색채로 구사한 것은 이런 고급 안료를 풍부하게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티치아노 작'페자로 가족과 마돈나'.

안료를 기름에 개어 사용하는 유화는 15세기 유럽에서는 새로 개발된 일종의 '하이테크'였다. 그때까지 프레스코 기법으로 그리던 벽화를 제외한 대부분의 그림들은 템페라 기법을 사용했는데, 템페라란 안료를 계란 노른자와 물에 개어 그리는 방식이었다. 템페라는 정밀하고 선명한 색채 구사가 가능했지만 아주 작은 붓으로 그려야 했다. 그러므로 소품 위주였고 한번 잘못 칠하면 고치기도 어려웠다. 이에 반해 마음대로 색을 섞을 수 있고, 잘못 그리면 마른 뒤 고칠 수 있으며, 광택과 깊은 맛을 주는 유화 물감은 곧 화가들이 가장 즐겨 쓰는 회화 재료가 되었다. 미술의 변화에 재료나 기법의 혁신이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그 후 400년이 지난 19세기의 산업혁명은 유화기법에 또 다른 변화를 가져왔다. 공장에서 알루미늄 튜브에 담은 물감을 생산해냈기 때문이다. 다양하고 강렬한 색채의 물감들도 새로 개발되었다. 이제 화가들은 더 이상 화실에서 안료를 빻고 섞을 필요가 없었다. 이후 야외에서 간편한 화구로 그림을 그렸던 인상주의 화가들은 이런 재료의 발전과 더불어 등장한 새로운 세대였다.

   

원본 위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10/13/2009101301800.html>

   

   

   

25] 도나텔로

   

 도나텔로가 젊었을 때 제작한 청동 '다윗'상.

수많은 미술가들이 역사 속에 나타났다 사라졌지만 그중에서도 정말 특별한 미술가들이 있다. 이들은 만년에 시대를 초월하는 경지에 도달한 미술가들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렘브란트, 모네, 클레가 이 명단에 들어간다. 또 한 명을 추가한다면 르네상스 초기에 활약했던 조각가 도나텔로다.

   

도나텔로(1386~1466)가 젊었을 때 제작한 청동 '다윗'상은 고대 이후 처음 등장한, 실제 사람 크기의 누드상이다. 균형 있는 신체의 비례나 자세에서 이 조각은 그리스 로마 조각의 부활을 알린다. 이 '다윗'상은 특이한 점이 있다. 우선 완전하게 성숙하지 않은 신체를 가진 소년 상이다. 몸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으면서 월계수가 장식된 양치기의 모자와 장화를 신고 있다. 그는 초연한 모습으로 발밑에 있는 머리가 잘린 골리앗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 작품의 아름다움은 무엇보다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흐르는 듯이 부드럽고 유연한 청동의 표면에서 온다. 마치 손에 만져질 듯이 감각적인 이 어린 소년의 조각은 동성애자라는 소문이 있었던 도나텔로의 성향 때문이라는 등 여러 가지 해석을 낳았다. 어쩌면 이 장면은 골리앗을 물리친 어린 다윗이 자신의 생기와 아름다움을 처음으로 발견한 모습일 수도, 또는 인간의 능력을 재발견한 르네상스인을 상징할 수도 있다.

   

그로부터 한참 후, 그의 나이 69세에 도나텔로는 '막달라 마리아'를 제작했다. 채색 목조상인 이 조각은 '다윗'을 제작했던 같은 조각가의 작품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판연히 다르다. 신체의 찬미는 사라지고 누더기 같은 가죽을 걸친 막달라 마리아의 퀭한 눈과 움푹 파인 볼, 마른 팔다리는 노년의 신체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손을 모아 기도하는 손과 눈은 인간의 고뇌를 아는 사람만의 영혼을 느끼게 한다. '다윗'이 르네상스 시대를 대변하는 작품이라면 '막달라 마리아'는 그 시대를 초월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원본 위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10/20/2009102001778.html>

   

   

   

26] 1900년 파리 박람회

   

1900년 10월, 19세의 피카소는 바르셀로나에서 기차를 타고파리의 오르세 역에 도착했다. 그의 이 첫 번째 파리 여행은 그해 최대의 행사였던 파리 만국박람회를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1851년 런던에서 시작된 만국박람회는 거의 격년마다 유럽과 미국의 도시에서 열린 커다란 볼거리였다. 특히 1900년 파리 박람회는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이하여 인류가 이루어낸 과학의 발전과 인간의 진보, 그리고 미래에 대한 신념을 실제 눈으로 확인하고 만끽하게 한 행사로, 관람객 수가 약 5000만명에 달했다.

   

박람회는 주로 새로 발명한 기계나 산업 제품 전시가 주된 목적이었지만 미술관 전시는 박람회의 품격을 높여주는 아주 중요한 아이템이었다. 파리 박람회 기간에 그랑 팔레에서는 1889년부터 1900년까지의 10여년을 총망라하는 '프랑스 미술의 10년전'과 지난 100년간의 미술의 성과를 종합하는 '프랑스 미술의 100년전'이 열렸다. 평론가 로제 마르크스가 기획한 '100년전'에는 드센 비난에도 불구하고 당시 아방가르드로 취급되던 드가, 모네, 세잔, 고갱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피카소가 처음으로 세잔, 드가의 작품을 본 것도 바로 파리 박람회에서였다. 미술가들 사이에서는 식민지 전시관과 트로카데로 궁에 전시된 오세아니아와 아프리카 조각들이 새로운 관심사로 떠올랐고 이후 현대미술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일본은 미술관 전시에 참여한 유일한 동양 국가였다. 그때까지 박람회에서 주로 섬세한 공예품으로 서구인들을 매혹시키고 '자포니즘' 붐을 일으켰던 일본은 1900년 파리박람회에서는 뜻밖에도 전통회화와 자국의 근대 서양화를 대거 전시했다. 이것은 장식적인 공예품만으로 일본문화를 이해하던 서구인들을 놀라게 했다. 일본은 이제 서양문화를 받아들이면서도 서구와 대등하게 근대화된 국가라는 자신감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국제적인 전시에서 미술이 순수한 미적 감상의 차원을 떠나 한 나라를 대변하는 이미지로서 정치 외교적 의미를 가질 수 있음을 일본은 이미 파악하였던 것이다. 

   

원본 위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10/27/2009102701708.html>

   

   

   

27] 도미에의 풍자화

   

인간의 어리석음이나 악덕을 신랄하고 재치 있게 그려 보여주는 풍자화의 전통은 고대로부터 이어져 왔다. 그 주된 대상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 또는 정치인들이었다. 화산재 속에 파묻혔다가 발굴된 고대 폼페이 유적에서도 그 시대 정치인과 연관된 정치 풍자화가 발견되었고, 중세에도 인간의 탐욕과 욕망, 그리고 나태를 시각 매체를 통해 풍자하는 전통은 이어졌다. 그러나 정치적 풍자 미술이 확고하게 자리잡은 것은 신문과 잡지 등 인쇄 매체가 널리 보급되는 근대기에 들어서였다. 18세기 말의 대혁명 이후 크고 작은 혁명이 잇따르면서 정치적 진통을 겪고 있던 프랑스에서 최고의 풍자화가는 오노레 도미에(1808~1879)였다.

   

1830년 개혁을 원하던 진보주의자들의 기대와 달리 루이 필립이 왕위에 오르자 도미에는 주간지 '라 카리카튀르'의 12월 3일자에 '가르강튀아 같은 필립'이라는 제목의 정치 삽화를 실었다. 루이 필립은 16세기 소설의 주인공인, 식욕이 왕성했던 거인 왕 가르강튀아처럼 뚱뚱한 거인으로 그려졌다.

   

 '가르강튀아 같은 필립'

그는 굶주리고 가난한 사람들이 바치는 돈과 경사로로 올라오는 뇌물을 마구 집어삼키고 있다. 그의 머리는 서양 배와 같이 생겼는데, 프랑스에서 돌대가리를 의미한다고 한다. 경사대 아래에는 떨어지는 돈을 주우려는, 잘 차려입은 사람들이 모여 있고 배경에는 루이 필립에게 아부하는 사람들이 그를 찬양하고 있다. 프랑스 당국은 왕을 모독하고 정부에 대한 혐오감을 부추긴 죄로 도미에에게 6개월 감옥 형을 선고하였다. '라 카리카튀르'지도 1835년에 폐간되고 말았다.

   

도미에는 그 후 일간지 '르 샤리바리'에 삽화를 게재하기 시작했는데 검열이 심해지면서 정치 풍자보다는 파리의 소시민들 생활의 단편에 대한 사회적 또는 문화적 풍자화를 그렸고, 파리 시민들은 그의 풍자화를 보고 재미있어 했다. 생전에 미술가로 인정받지 못했지만 몇 개의 구불구불한 선만으로 인물의 표정과 움직임을 확실하게 표현할 수 있었던 그의 석판화들은 오늘날 미술사에서 독자적인 위치를 확보하고 있다. 

   

원본 위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11/03/2009110303394.html>

   

   

   

28]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상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피에타'는 죽은 그리스도를 안고 슬퍼하는 마리아를 표현한 작품을 말한다. 24세에 첫 피에타 상을 제작한 미켈란젤로에게 죽은 그리스도의 이미지는 늘 그의 상상력을 사로잡았고, 8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바로 6일 전까지도 네 번째 피에타 상을 제작하고 있었다. 여러 피에타 상 중 가장 강렬하고 감정적인 작품은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진, 피렌체 성당에 있는 피에타 상(1548~1555)이다.

   

피렌체 피에타는 십자가에서 내려진 그리스도와 그를 뒤에서 부축하는 아리마테아의 요셉(니코메데스라는 설도 있음), 양옆에 있는 성모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 등으로 이루어진 군상이다. 비애감을 주면서도 안정적이었던 초기의 피에타와는 달리 그리스도의 자세는 각이 진 지그재그의 형태를 띠고 있어서 보는 사람이 불편한 정도로 긴장감을 주며, 고통과 고난의 표현이 강렬하게 전달된다.

   

미켈란젤로는 8년 동안 이 작품에 매달리다 어느 날 갑자기 망치로 그리스도의 왼쪽 다리를 부수기 시작했다. 제자들의 만류로 중단되었지만 이 피에타는 결국 미완성으로 남게 되었다. 작품을 파괴하고자 했던 그의 강한 분노, 그리고 다시 손을 대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그동안 많은 추측이 있었다. 당대의 기록가 바자리는 하인 우르비노가 빨리 끝내라고 재촉했으며, 대리석 자체에 흠집이 있음을 발견하는 등, 여러 가지가 미켈란젤로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현대에 와서는 그리스도의 다리가 마리아의 무릎 위에 늘어뜨려져 있어 본의 아닌 오해를 살 수 있었기 때문이라거나, 작업이 잘 진행이 되지 않자 파괴적인 마지막 손질로써 그 작업에서 자신을 해방시키려 했다는 등의 여러 가지 해석이 내려지기도 했다. 이 외에도 많은 미완성 작품들이 남아 있기 때문에 어쩌면 미켈란젤로 자신은 미완성 작품을 하나의 완성작으로 간주했을지도 모른다는 시각도 나왔다. 예술가의 내면세계와 창작과정을 들여다보는 것은 정말 어려운 작업이다.

   

원본 위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11/10/2009111001804.html>

   

   

   

29] 독립문과 개선문

   

서울의 서대문에 있는 독립문이 112년 만에 일반에게 공개됐다. 자주독립의 시대적 열망을 나타내는 독립문은 1897년, 무악재를 넘어 서울 도성으로 들어오는 중국 사신들을 맞이하던 영은문 자리에 세워졌다. 독립협회가 기금을 모아 완공한 독립문은 서재필이 가지고 있던 화첩 중에서 파리의 개선문을 모델로, 그 규모를 축소하되 모양만은 똑같이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파리의 개선문은 또 고대 로마의 개선문을 모델로 하였다. 로마제국 시대에는 로마에만 약 60개 이상의 개선문이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티투스 황제의 개선문을 비롯해 3개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전쟁에 이기고 돌아오는 로마의 군사들이 지나갔던 개선문은 사각형의 형태로 중앙에 아치(arch) 형태의 열린 공간이 있고 양쪽에 넓은 벽이 있는 단순하면서도 장엄한 형태였다.

   

 파리 개선문.

근대에 들어와 고대 로마의 이상주의와 덕목은 고전에 대한 동경과 더불어 유럽에서 신()고전주의를 탄생시켰고, 고대 로마를 모델로 하는 건축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에트왈 개선문으로 알려진 파리의 개선문은 나폴레옹이 아우스터리츠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면서 로마제국의 영광을 계승하는 황제로서의 이미지를 보이기 위해 구상한 구조물이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실각과 더불어 공사가 중단되었다가 20여년이 지난 1836년에야 완공될 수 있었다. 이때부터 개선문은 프랑스의 모든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는 국가적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이 당당하면서도 아름다운 파리의 개선문은 로마의 개선문보다 더 유명해졌고 프랑스의 아이콘이 되었다.

   

프랑스 정부는 1989년 파리 서쪽의 신도시인 라데팡스에 새로운 개선문 '라 그랑드 아르슈'를 세웠다. 단순한 큐브 형태의 이 거대한 흰색의 개선문은 콩코르드 광장과 에트왈 개선문을 일직선으로 연결하는 지점에 서 있다. 중앙의 가로 세로 약 100m의 열린 공간은 미래를 향한 창을 상징한다고 한다. 전통을 계승할 뿐 아니라 새롭게 발전시킨 또 하나의 역작이 아닐 수 없다.

   

원본 위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11/17/2009111702020.html>

   

   

   

30]보치오니와 미래주의

   

공간에서의 연속성의 특이한 형태.

20세기 초 유럽은 도시가 커지고 기계와 통신이 발달하면서 급속한 사회 변화를 겪고 있었다. 아방가르드 미술가들에게 기존의 낡은 가치관과 미술은 파괴해야 할 대상이었다. "미술관을 불태워라!", "미()는 투쟁을 통해서만 존재한다." 격렬한 이 문구들은 이탈리아의 시인 마리네티가 1909년에 쓴 '미래주의' 예술운동의 선언문에 나온다. 마리네티는 고대 로마와 르네상스와 같은 영광스러운 과거의 회고에만 젖어 있던 이탈리아에서 혁신을 촉구했다. 타성과 안이함에 젖은 부르주아 문화를 혐오한 미래주의자들은 도시를 가장 현대적 삶의 상징으로 보았고, 속도와 에너지, 운동감을 도시적 특성으로 이해했다. 새로운 세계의 상징인 테크놀로지는 미래의 가능성을 시사했다.

   

움베르토 보치오니(1882~1916)는 미래주의를 대표하는 화가이자 조각가였다. 그가 1913년에 제작한 '공간에서의 연속성의 특이한 형태'는 빠르게 걷고 있는 인물의 조각이다. 평범한 주제이지만 그의 관심은 인물의 사실적인 모습이 아니라 역동감과 근육의 작용에 있었다. 이 작품은 힘차게 전진하는 인물의 움직임을 나타내는데, 신체 내부에서 발사되는 힘으로 인해 이동하기 직전과 직후의 동작의 연속성이 주변의 공간과 환경 속에 침투해나가는 모습을 전달한다. 팽창된 힘으로 인해 인체는 고정된 윤곽선을 버리고 유동적으로 돌출하거나 파이고 마치 화염과 같은 가벼움으로 변형되었다. 인간과 기계 그리고 에너지가 혼합된 이 조각은 당시 아방가르드 미술가들이 꿈꾸었던 미래의 수퍼맨이었다.

   

기존 사회를 공격하고 예술을 통해 대중을 변화시키려 했던 이들은 '미래주의의 저녁'이라는 공연을 하면서 관객들에게 야유를 받으면 받을수록 성공이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관객이 살아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전쟁이 세계를 더 순수하게 만들 것이라고 믿었던 이들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지체 없이 참전했다. 보치오니는 34세의 젊은 나이로 전사하고 말았고 그들이 꿈꾸었던 새로운 세계는 결국 오지 않았다.

   

원본 위치 <http://art.chosun.com/site/data/html_dir/2009/12/09/2009120900959.html>

   

   

   

31] 오리엔탈리즘 회화

   

 노예시장.

서양미술은 기본적으로 인본주의(人本主義)에 바탕을 둔 이성과 완벽함 그리고 형식을 중요시했다. 그러나 19세기 초반 일부 미술가들은 누가 더 고전에 가까이 접근하는가에 따라 우열을 가르던 평가방법에 반발하였다. 틀에 박힌 형식에서 벗어나 상상력을 발휘하고, 극적이며 새로운 미술을 찬미한 사람들은 바로 낭만주의 미술가들이었다.

   

낭만주의가 대두되면서 타인종의 모습과 삶이 미술작품에 등장하게 된다. 특히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을 갈 때 동행한 학자들이 보고 수집한 자료들이 24권의 책으로 간행되면서 동방, 즉 오리엔트로 부르던 근동(近東)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오리엔탈리즘'의 붐을 일으켰다. 대부분의 화가들은 알제리,터키모로코튀니지 등을 방문하고 쓴 여행기나 시, 소설을 읽고 이국적 공간과 삶을 상상해서 그렸지만 들라크루아 같은 화가들은 직접 모로코를 다녀오기도 했다.

   

오리엔탈리즘 회화에서 인기가 있었던 주제는 동물의 사냥, 학살 장면 그리고 뭇 남성 화가들의 상상을 자극하는 하렘의 모습들이었다. 들라크루아는 '알제리의 여인'에서, 앵그르는 '오달리스크'에서 하렘의 장면을 그렸다. 제롬은 근동 여성을 매매하는 '노예시장' 같은 주제를 잘 그렸다. 고전적이나 우의적인 틀에서 벗어나 남성들의 시선 속에서 매매의 대상이 된 관능적인 여성의 누드는 마치 공공장소에 노출된 에로티시즘의 전시 같아 보인다. 그리고 이런 그림들은 이국 여성에 대한 성적 환상을 부추겼다.

   

19세기 프랑스 미술의 오리엔탈리즘은 궁극적으로 서구인들의 의식 속에 투사된 동방의 모습이었다. 이들 회화에서 동방은 관능적이고, 나태하며, 야만스럽고 미개한 장소로 표상되었다. 이국적 동방에 대한 환상은 20세기에도 계속되어 무용가 니진스키, 화가 마티스에 의해 탐구되었다. 이러한 서구의 왜곡된 시선에 비판이 제기된 것은 에드워드 사이드의 저서 '오리엔탈리즘'이 출간된 1970년대 후반으로 근동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원본 위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12/01/2009120101624.html>

   

   

   

32] '수태고지'와 '방문'

   

인간이 만든 가장 경이로운 건축물의 하나는 고딕 성당이다. 하늘을 찌르듯 치솟아 올라가는 고딕 성당의 높이와 규모는 기하학을 바탕으로 하는 중세 건축가들의 새로운 공법이 뒷받침되어 가능했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신비로운 광선과 높은 천장, 광대한 실내 공간은 무지와 박해, 그리고 전쟁이 일상사였던 당시에 인간들이 천국을 동경하던 정신적 갈망을 상징한다.

   

고딕 성당이 가장 번성했던 곳은 프랑스였다. 프랑스에서는 1180년에서부터 1290년까지 약 80여개의 성당이 지어졌다고 한다. 주로 도시에 지어진 이 성당들은 수도원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것이기도 했지만 교회 또는 성직자의 부와 권력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수태고지'(왼쪽)와'방문'.

파리 동북부에 위치한 랭스(Reims)시에 있는 랭스대성당(1220~1269)은 고딕 성당건축의 정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수십 년에 걸쳐서 완성된 이 성당은 그때까지 지어진 성당들보다 높고(81m), 길며, 벽면의 면적을 줄여 창을 훨씬 많이 내었다. 이 성당의 압권은 전면(파사드)에 빈틈없이 장식된 수많은 조각이다.

   

특히 사람들이 드나드는 서쪽 문 옆에는 유명한 '수태고지(受胎告知)'와 '방문'의 조각이 있다.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아기 그리스도의 탄생을 예고하는 '수태고지', 마리아가 세례 요한의 어머니가 될 사촌 엘리자베스를 방문하고 서로의 임신사실을 알리는 '방문'은 마치 서로 대화를 나누듯 마주 보게 배치되었다.

   

그런데 같은 장소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작 솜씨는 각각 달라 여러 조각가가 한두 점씩 맡아 작업했을 것으로 보인다. 작은 머리와 긴 다리, 날씬한 몸을 가진 우아한 천사, 그보다 좀 더 단순하게 표현된 마리아에 비해 '방문'의 마리아와 엘리자베스는 조용하고 점잖으며 무게감이 있다. '방문'의 조각들은 고대 로마 조각을 연상시켜 이미 고전에 대한 관심이 시작되었음을 보인다. 

   

원본 위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12/08/2009120801635.html>

   

   

   

33] 카라바조

   

바커스.

포도 덩굴로 머리를 장식한 인물이 베개에 몸을 기대고 포도주 잔을 내밀고 있는 이 그림은 1600년 전후에 활약한 이탈리아의 화가 카라바조(1571~1610)의 작품으로, 그림 속 인물은 주신(酒神) 바커스다. 신화적 주제라기보다 거의 일상생활 속의 한 장면을 그린 것 같은 이 그림에서 바커스의 발그레한 뺨과 부드럽고 매끄러운 얼굴은 여성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근육적인 팔의 표현에서 남성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양성(兩性)적인 바커스는 비스듬히 앉아 마치 술과 과일을 권하는 듯, 관람자를 그림 속으로 끌어들인다. 관람자는 유혹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위험을 감지한다. 술은 물론이지만 시간이 가면 썩는 과일 역시 일시적 쾌락의 상징으로, 어떤 것들은 이미 누렇게 변해 있다. 이 그림의 의미는 아직도 확실하지 않지만 양성애자(兩性愛者)로 알려진 카라바조의 성 정체성과 관련된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카라바조는 종교화도 다수 제작했다. 그는 종교화에서도 성인(聖人)을 일상생활 속의 지저분하고 평범한 서민같이 그려 물의를 일으켰다. 초인적인 위엄을 느끼게 했던 그 이전의 성인의 표현과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한 명암 대조와 세밀한 사실주의, 그리고 극적인 순간을 포착하여 그린 카라바조의 화면은 새로운 종교화의 탄생을 알려주었다. 이와 같은 종교화의 혁신성은 그를 따르는 많은 추종자를 낳았다. 그러나 난폭한 성격을 다스리지 못했던 카라바조는 번번이 싸움과 논쟁을 벌였고, 한번은 상대방을 죽이기까지 해 여러 도시로 피해 다녔다.

   

시대의 풍운아였던 카라바조는 생애 말기에 골리앗의 머리를 베어 치켜들어 앞으로 내밀고 있는 '다윗'을 그렸다. 화면 앞에 하이라이트로 훤하게 드러난 골리앗의 얼굴은 놀랍게도 피폐한 카라바조 자신의 자화상이다. 자화상을 자기 고백으로 본다면, 참수된 골리앗으로 자신을 그린 카라바조가 이 그림에서 반영하려고 한 것은 자기혐오였을까? 이후 얼마 되지 않아 그는 3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원본 위치 <http://art.chosun.com/site/data/html_dir/2009/12/17/2009121701378.html>

   

   

   

34] 무카의 포스터

   

JOB 담배 광고 포스터.

1870년대에 이르러 파리는 크게 변하고 있었다. 큰 도로가 닦이고 여러 곳에 시민을 위한 광장과 공원이 마련되었다. 새로 개발된 재료인 강철과 유리, 콘크리트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파리는 대도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파리의 거리를 더욱 화려하게 만들어 준 것은 곳곳에 붙은 포스터였다. 다색석판 인쇄기술이 발달하면서 대담한 색채와 윤곽선을 강조한 포스터는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아방가르드 미술가들도 사회적 고립에서 벗어나 예술성과 상업성을 복합할 수 있는 포스터 제작을 시도하면서 미술을 생활 속에 끌어들이려 하였다. 처음에는 문학잡지나 연예가 광고의 중심이었던 포스터는 곧 상품 선전이나 공연 광고 등으로 영역을 확장했다.

   

여성의 이미지가 포스터에 크게 등장하게 된 것도 이 무렵부터다. 체코에서 온 무카(Alphonse Mucha)는 당대 최고의 여배우 사라 베르나르의 포스터를 6년간 도맡아 제작하여 주목을 받았다. 약간 벌린 입술, 창백한 피부, 현란한 의상으로 위험스럽지만 신비한 관능미를 드러내는 베르나르의 포스터는 당시 유행하던 팜므 파탈(femme fatale)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팜므 파탈은 매력적이면서 남성을 파괴로 몰고 가는 여인을 뜻하며, 대표적 인물로 살로메, 유디트, 메데아가 있다. 이들은 미술뿐 아니라 문학, 오페라의 주제로도 인기를 끌었다. 팜므 파탈 이미지에서 중요한 표현은 길고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이었다. 머리카락은 유혹과 타락을 의미하고 여성이 남성을 지배하는 힘의 상징이 되었다.

   

무카가 제작한 JOB 담배의 광고 포스터에서 숱이 많은 긴 머리카락과 반쯤 감은 눈, 입을 살짝 벌리고 손에 담배를 쥔 여성은 유혹적이면서 도전적이다. 대중화된 팜므 파탈의 이미지는 이후 1930년대 유명했던 마를레네 디트리히나 그레타 가르보와 같이 요염하면서도 신비스럽고 또 냉담해 보이는 영화배우들의 사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원본 위치 <http://art.chosun.com/site/data/html_dir/2009/12/28/2009122800602.html>

   

   

   

35] 이집트의 셀케트 여신

   

 셀케트 여신.

20세기 고고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발굴은 1922년 영국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에 의한 이집트의 파라오 투탕카멘의 무덤이다. 기원전 14세기에 태어난 투탕카멘은 9세에 왕위에 올라 18세에 죽은 왕으로, 무덤이 발견되지 않았다면 이름조차 기억 못 했을 어린 왕이었다. 나일강 서쪽 '왕의 계곡'에서 발견된 이 무덤은 대부분 이미 도굴된 다른 파라오들의 무덤과는 달리 밀봉 이후 아무도 묘실(墓室)과 보고(寶庫)에 침입한 적이 없어 세계적인 관심을 끌었다. 들어가는 문을 처음 연 카터는 당시를 이렇게 기록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안 보였다…. 그러나 점점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면서 방안의 것들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상한 동물들, 조각과 금…. 어디에나 황금이 번쩍이고 있었다."

   

파라오의 시신은 세 겹의 관 속에 있었는데 맨 안쪽 관의 순금만 해도 약 114kg에 달한다는 사실은 고대 이집트 무덤에 왜 도굴꾼이 들끓었는지 이해가 된다. 투탕카멘의 무덤에서는 이 외에도 약 5000여 점의 전차(戰車), 아름다운 가구, 장신구와 공예품, 조각 등이 발견되어 당시 이집트 왕실의 호화로움을 보여준다.

   

가장 눈길을 끄는 조각은 셀케트(selket) 여신상이다. 약 90㎝ 높이의 이 여신상은 도금된 네모난 상자의 면에 두 손을 벌려 보호하는 자세로 서 있는데, 그 상자 안에는 파라오의 신체 내부의 장기를 담아둔 항아리가 들어 있다. 전갈의 머리 장식을 한 셀케트 여신은 죽은 자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이 여신상의 표현에서 특이한 점은 거의 모든 이집트 조각이 정면 부동상인 데 비해 고개를 약간 옆으로 돌리고 서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왼쪽과 오른쪽 높이를 조금씩 다르게 처리한 겉옷과 더불어 좌우대칭의 딱딱함을 훨씬 부드럽게 만들어준다. 몸에 딱 달라붙은 옷 역시 굴곡 있는 신체를 그대로 드러내 보인다. 품위를 가지면서 섬세하고 고혹적인 이 여신상은 약 3300년 전의 이집트 공예가들이 얼마나 뛰어난 기술과 감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짐작하게 한다.

   

원본 위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12/29/2009122901282.html>

   

   

   

36] 모네의 수련

   

많은 관객을 보장하는 전시는 세 가지가 있다고 한다. 인상주의 미술전, 이집트 미술전, 그리고 공룡 전시다. 인상주의 미술이 이처럼 세계적으로 인기가 있는 이유는 서양의 문화를 잘 모르면 감상하기 어려운 역사화나 종교화를 벗어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카페나 야외에서 여가를 즐기는 사람들의 일상이나 풍경화는 이해하기 쉬웠고, 순수한 시각경험을 광선으로 대체한 색채는 신선하게 보였다.

   

 수련

모네(1840~1926)는 인상주의의 대표적인 화가다. 처음에는 다른 인상주의 화가들처럼 파리의 대로(大路)나 기차역 등 근대적 도시의 삶을 그리던 모네는 1883년 즈음 이들과 멀어지면서 자연으로 돌아갔다. 파리에서 80km 떨어진 지베르니에 이사한 지 몇 년 만에 연못과 정원이 딸린 집을 사고 정착한 모네는 정원에 수련, 아이리스, 살구나무 등을 심는 등 많은 시간과 노력을 조경에 투자했다.

   

86세에 죽을 때까지 43년을 지베르니에서 보내면서 그는 약 250점의 그림을 그렸는데, 그중 가장 많은 작품이 수련 그림이었다. 원래 광선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물의 풍경을 그리기를 좋아하던 모네는 연못 주변에 이젤을 여러 개 세워놓고 하루에도 여러 번 순간마다 변화하는 색채를 관찰하여 화폭에 옮겼다. 그의 수련 작품은 지상의 풍경, 물에 반영된 바깥세상, 그리고 수면 위에 핀 수련이 한 화면에 나타나는 무한한 공간이 되었고 마치 소우주(小宇宙)를 연상하게 한다.

   

그는 나이를 먹으면서 시력이 나빠지자 연못에 점점 더 가까이 가, 위에서 내려다보며 그렸고, 그 결과 수면 자체가 화면이 되었다. 미세하고 섬세한 색채조화와 광선에 녹아드는 형태 등이 보이는 화면은 마치 색채의 교향악과 같은 조화와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점점 더 대작으로 발전하면서 그의 그림은 이제 자연의 모습을 보여주기보다는 거의 색채 추상이 되었다. 모네의 수련은 그림이 어떤 사상이나 주제를 표현하지 않더라도 시각적인 센세이션 자체만으로도 우리를 충분히 감동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원본 위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1/05/2010010501746.html>

   

   

   

37] 나치, 소련, 그리고 피카소

   

1937년, 유럽은 독재와 억압의 불안한 정치적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다. 독일은 히틀러의 나치 정권이,이탈리아는 무솔리니가, 소련은 스탈린이 정권을 잡았으며 스페인은 공화정부가 프랑코 군대의 공격을 받고 내전 중이었다. 이런 가운데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정식명칭은 '근대적 삶의 미술과 기술의 만국박람회'였다)는 평화스러운 공존과 상호 협조의 슬로건을 내걸었으나 '평화'와는 동떨어진 유럽 열강의 문화 정치판이 되어버렸다.

   

1937년 파리 만국박람회. 왼쪽이 독일, 오른쪽이 소련관이다.

가장 극적인 대치는 서로 마주보게 위치한 소련관과 독일관이었다. 소련의 최고 건축가 보리스 이오판의 건축물 위에는 새로운 영웅으로 등장한, 높이가 6층 건물 정도의 공장 노동자와 집단농장 소녀가 낫과 망치를 들고 전진하는 강철 조각이 세워졌다. 독일관의 건축가이자 히틀러의 수석 참모였던 알베르트 슈피어는 그의 회고록 '제3제국의 중심'에서 소련관의 스케치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소련의 조각이 독일에 대한 침범의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았다. 이에 대해 그가 세운 수직으로 곧게 올라간 직사각형 건축은 소련의 전진을 저지하는 것처럼 보였다. 건물 꼭대기에서는 나치를 상징하는 스와스티카 위에 앉은 독수리가 소련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 두 국가관 사이에 에펠탑이 보였다.

   

스페인관에서는 이와는 반대로 정치적 분노와 항거가 표현되고 있었다. 프랑코를 지원하는 히틀러의 독일 비행기들이 그에 반대하는 바스크의 작은 도시 게르니카에 폭탄을 퍼부은 사건에 대해, 분개한 피카소가 그린 가로 8m 정도의 대작 '게르니카'가 전시되었기 때문이다. 죽거나 죽어가는 사람들과 동물들이 엉켜 있는 참담한 이 작품을 보고 나치 장교는 피카소에게 "당신이 했느냐"고 물었다. 피카소는 "아니오, 당신들이 한 것이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1937년의 만국박람회는 유럽에서 열린 마지막 박람회가 되었다. 2년 후 대부분의 국가는 전대미문의 처참한 살상으로 기억되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끌려들어 갔다.

   

원본 위치 <http://art.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1/19/2010011900581.html>

   

   

   

38] 벨리니와 청화백자

   

동서의 교류는 오래전부터 다양한 통로로 이루어졌다.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원정(遠征)이나 십자군 운동으로, 또는 마르코 폴로의 중국 체류와 같이 개인에 의해서도 이루어졌다. 이런 교류는 동양과 서양뿐 아니라 서양과 이슬람, 이슬람과 동양의 문화가 서로 섞이는 계기가 되었다. 서양이나 이슬람 문화권에서 인기가 있었던 중국의 무역품은 주로 비단·카펫·보석·향료·금속공예 등이었지만 그중 단연 인기가 있었던 것은 도자기였다. 현재 이스탄불의 톱카피 궁전에 소장된 수많은 중국 도자기는 바로 이것을 증명한다.

   

수입된 중국도자는 종종 당시의 서양 회화에서도 나타난다. 그 예가 르네상스 시대의 베네치아 화가 조반니 벨리니의 '신들의 향연(饗宴)'(1514년)이다.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가 '달력(Fasti)'에서 묘사한 신들의 향연을 그린 이 그림은 오후의 따뜻한 햇볕 속에서 한가롭게 소풍을 즐기는 올림포스의 신들을 보여준다. 제우스 신과 헤라 여신을 중심으로 헤르메스, 바커스 신 등이 있으며 이미 술에 취한 사티로스, 술 주전자를 가져오는 요정들이 자리를 함께하고 있다.

   

신들의 향연(부분도).

벨리니가 왜 신들을 당대 베네치아의 농부들처럼 보이게 그렸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이들이 사용하는 술잔과 사발을 보면 값비싼 중국의 청화백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청화백자는 베네치아로 수입된 중국의 도자일 수도 있지만, 벨리니의 동생으로 역시 화가였던 잰틸레가 술탄 메흐멧 2세의 초청으로 1479~80년까지 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탄불)에 있었던 사실을 상기하면 콘스탄티노플에서 온 것일 수도 있다.

   

유럽의 동쪽 항구로 동방무역의 중심지였던 물의 도시 베네치아는 지적이고 엄격한 이상을 강조하던 피렌체나 로마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많은 이국적인 물품들이 수입되던 이곳은 화려한 것을 좋아하고, 술 마시고 노래하며 인생을 즐기는 감각적인 쾌락의 도시였다. 반짝이는 피부와 무르익은 색채의 의상이 신선한 벨리니의 그림에서도 이런 그들의 인생철학이 나타난다.

   

원본 위치 <http://art.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1/26/2010012600552.html>

   

   

   

39] 암굴의 성모

   

암굴의 성모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미술이 전성기를 누린 시기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미켈란젤로·라파엘로가 같이 활약했던 1500년에서 약 20년간이다. 이 세 미술가가 이루어낸 독창적이고 지적이면서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미술 작품들은 이 짧은 기간을 가장 감동적인 시기로 기억하게 만든다. 가장 나이가 많았던 인물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1452~1519)였다.

   

레오나르도는 화가, 조각가, 미술이론가였을 뿐 아니라 과학자, 엔지니어이기도 했던 만능인이었다. 그는 베로키오의 공방에서 미술을 배웠는데 베로키오가 레오나르도가 그린 천사에 감명을 받고 붓을 꺾고 조각에만 전념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레오나르도는 미술은 기술보다는 과학과 정신의 작업이라고 생각했고, 관찰력과 상상력을 키우기 위해 끊임없이 주변의 사물들을 스케치할 것을 권장했다.

   

그가 30대 초반에 그린 '암굴의 성모' (1480년대)에서 기이하게 생기고 비죽비죽 튀어나온 돌들로 묘사된 환상적인 동굴은 그의 지질학적 지식이 바탕이 된 것이다. 어두운 암굴 속에 마리아를 정점으로 왼쪽에 세례 요한 그리고 오른쪽에 천사와 아기 예수가 안정된 삼각형 구도로 구성된다. 이들은 신체적으로는 서로 떨어져 있지만 시선과 손길로 심리적으로 연결되고 있다.

   

사실적이면서도 이상적인 모습의 마리아는 마치 영혼이 말하듯 신비스럽고 아름답다. 그는 오른손으로 세례 요한을 보호하듯 감싸고 있으면서 왼손을 천사 쪽으로 뻗는다. 섬세하고 강렬한 얼굴의 천사는 시선을 관람자 쪽으로 약간 돌리고 있다. 아기 예수는 세례 요한에게 축복을 의미하는 손동작을 하고 세례 요한은 이를 기도하듯이 받아들인다. 각 인물은 선으로 정확하게 묘사되지 않고 마치 베일 속에서 형태가 서서히 드러나는 듯하다. 인물과 풍경을 전체적으로 감싸주는 것은 깊은 어두움 속에 스며드는 광선이다. 자연스러우면서도 평범하지 않은 성가족의 모습, 균형 잡힌 구도와 조화로 절묘하게 그려진 이 그림은 르네상스 미술의 전성기가 시작되었음을 알려준다.

   

원본 위치 <http://art.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2/01/2010020100687.html>

   

   

   

40] 인간가족

   

관람객을 끌고자 하는 블록버스터전이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심심치 않게 열리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처럼 전시가 많지 않았던 1950년대에 이미 국내에서 30만명이라는 관객을 끌어모은 전시가 있었다. 바로 1957년 4월 경복궁미술관에서 열렸던 '인간가족전'이다. 이 전시는 본래 뉴욕 근대미술관의 사진부 부장이었던 에드워드 스타이켄이 1955년 근대미술관의 개관 25주년을 기념하여 기획한 전시였다. 스타이켄은 인간의 탄생·사랑·가족·장례 등 다양한 인종의 희로애락을 주제로 약 68개국의 나라에서 찍은 500여점의 리얼리즘 작품들을 모아 전시했다. 인간은 한가족이라는 이 주제는 2차대전과 그 후의 미국과 소련의 냉전을 경험하던 당시 사람들에게 정치적인 현실보다는 인간에 대한 신뢰와 순수성을 깨닫게 하는 전시였다.

   

인간가족展

이 '인간가족전'을 돋보이게 했던 큰 요인은 전시 디스플레이였다. 스타이켄과 전시 디자이너 폴 루돌프는 작가 개인의 시각보다 전시의 주제에 맞춰 작품을 선정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목적에 따라 사진을 잘라내거나 확대하고, 극적인 조명과 투명한 벽면 설치 등으로 그때까지 보지 못하던 획기적인 전시를 선보였다.

   

예술적 가치보다는 대중적 미디어로서의 사진의 역할이 강조된 이 전시는 뉴욕에서만 25만의 관객이 보러 왔고, 미국 공보처의 후원으로 87개국을 순회하면서 800만이라는 경이적인 관람객 수를 기록하였다. 대중적으로 성공한 이 전시에 대해 전문가들의 시각은 달랐다. 롤랑 바르트는 감상적인 전시로 정치적인 현실을 외면하게 한다고 비난했다. 가장 많이 제기된 비판은 미술관이 예술적이거나 실험적인 작품을 외면하고 대중성을 우선했다는 점이었다. 미술관 전시의 대중성과 예술성의 균형에 대한 논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원본 위치 <http://art.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2/11/2010021100571.html>

   

   

   

41] 허드슨 강 풍경

   

서양의 풍경화는 역사화, 종교화 같은 인물 중심의 그림과 달리 진지한 미술로 오랫동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풍경화는 대체로 인물의 배경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졌고, 풍경화만을 그리는 화가는 화가들의 서열에서 한참 아래에 있었다. 19세기에 이르러 풍경화가들은 비로소 전성기를 맞이했다. 자연을 지성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자연에서 영감을 받았던 낭만주의 화가들 덕분에 풍경화는 새로운 관심사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자연의 변화무쌍함과 풍요로움에 반응을 보이면서 영국에서는 터너, 컨스터블과 같은 화가가 배출되었고, 독일에서는 프리드리히를 비롯한 일련의 풍경화가들이 활약하였다. 19세기에 풍경화가 발달하기 시작한 또 다른 나라는 신생국가 미국이었다. 주로 미국의 동북부 허드슨 강 계곡 주변을 그리던 풍경화가들은 허드슨 강 화파로 불렸다.

   

'옥스보우 풍경'(1836년).

허드슨 강 화파의 리더는 토머스 콜(1801~1848)이었다. 영국 태생이었던 콜은 1819년, 18세에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역사화도 그렸지만 가장 인기가 있었던 것은 그의 풍경화였다. 콜이 그린 풍경에서는 유럽의 풍경화와 달리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야생의 느낌이 강하게 드러난다. '옥스보우 풍경'(1836년)은 매사추세츠 주의 홀리오크 산 주변의 코네티컷 강 풍경을 내려다본 장면이었다. 왼쪽에는 폭풍우를 동반한 험악한 검은 구름이 지나가고 있고 오른쪽에는 인간이 경작한 밭과 집들이 보인다. 콜은 나무 사이의 공간, 작은 골짜기, 수풀, 강둑 등 지형적인 묘사를 아주 세밀하게 하였다.

   

이런 세부의 표현에도 불구하고 이 풍경화에서는 무엇보다도 광활한 대지와 그 대지를 비춰주는 광선이 중요하다. 콜의 풍경화는 인간이 웅장한 자연을 발견하고 그 아름다움에 대한 경이로움과 숭엄함에 압도되면서도 그 속에서 위협받지 않고 공존하는 낙천적인 정신을 읽게 한다. 이것이 아마도 19세기 미국인의 개척정신이 아니었을까?

   

   

원본 위치 <http://art.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2/11/2010021100572.html>

   

   

   

42] 플래퍼

   

1927년 매클루어 잡지 표지 에 등장한 플래퍼. 나중에 우표로 만들어졌다.

여성의 의상은 신체에 쓰인 언어와 같다. 의상과 외모 그리고 행동에서 여성이 적극적으로 자신을 변화 또는 표현하려고 한 시기는 19세기 말 근대화시기로, 경제적 사회적으로 독립적인 인격체를 추구하면서부터였다. 이 무렵 변화하던 여성의 이미지를 잘 포착했던 미국의 삽화가는 찰스 다나 깁슨이었다. 그는 꼭 끼는 의상과 코르셋을 벗어던지고 자유롭고 남자와 같은 재킷을 입기 시작한 여성을 라이프지에 그렸는데 이 이미지가 그 후 신문이나 잡지에서 인기를 얻으면서 '깁슨 걸'로 불렸다. '깁슨 걸'은 독립적이고 매력적이면서 야망을 가진 활동적인 여성으로서 당시 가장 선망하는 여성의 전형이 되었다.

   

도도하면서도 정숙했던 '깁슨 걸'은 1920년대에 보다 자유분방한 '플래퍼 (flapper)'로 바뀌게 된다. 미국의 황금시대였던 20년대의 풍요로움 속에서 플래퍼는 짧은 드레스를 입고 단발머리를 하고 스타킹을 말아 내린 옷차림을 하고, 술·담배를 하고 춤추기 좋아하며, 성적으로 개방적인 사고와 차림을 한 젊은 여성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플래퍼는 조선일보 1927년 6월 26일자에 다음과 같이 소개되었다. "…단발한 묘령의 미인을 플래퍼로 불렀다…묘령의 여자가 의복, 화장 등 외화(外華)에만 주의하고 인생 생활을 살 책임을 조금도 돌아보지 아니한다는 말이다."

   

1960년대에 중고등학교를 다닌 사람들은 교복 치마를 짧게 입고 머리 모양도 남과 다르게 해 눈에 띄게 하고 다니는 여학생들을 '후랏바'라는 속어로 부르던 것을 기억할지 모르겠다. 이 말이 바로 첨단의 유행을 좇고 소비적이며, '보이시'한 외모와 신체로 정의된 플래퍼를 일본식 발음으로 부른 것이라는 것을 최근에 알게 되었다. 요즈음 젊은 가수들의 옷차림이나 춤이 지나치게 선정적임을 걱정하는 보도가 심심치 않게 언론에 나오고 있다. 1920년대의 플래퍼의 기억을 떠오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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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네덜란드 정물화

   


17세기 유럽에서 네덜란드의 위치는 특별했다. 스페인으로부터 1648년에 독립한 네덜란드는 주로 칼뱅교인 신교(新敎)의 나라였고,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해운 무역국가였을 뿐 아니라 국제 중계무역의 중심이었다. 암스테르담과 같은 도시들은 번창했고 도시의 부유한 중산층은 미술의 주요 고객이었다. 이 나라에서는 이미 전문적인 화상이 등장하면서 화가들의 그림을 받아 고객에게 팔아주는 근대적인 유통구조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중산층이 주로 구매한 그림은 어려운 역사화보다는 알기 쉽고 보기 좋은 정물화·초상화·풍경화 등 일상생활의 한 장면을 그린 것이었다.

   

 클라스의'정물'.

당시 중산층이 선호하던 정물화 중에는 아주 정밀하게 그린 식사 후의 식탁 그림들이 많았다. 클라스(Pieter Claesz· 1596~1661)가 그린 '정물'(1643)에서 화려한 은주전자와 접시, 고급 유리잔 등이 놓여 있는 식탁은 보통 가정집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접시 위에는 가재요리, 빵, 또 당시에는 매우 비싼 과일이었던 레몬 등이 어지럽게 남아 있어 마치 누군가 먹다 중간에 급히 떠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얼핏 보면 무질서하게 흐트러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그림은 다양한 형태와 질감을 고려한 배치, 계산된 구성으로 심사숙고하여 그렸음을 알 수 있다. 빛을 통해 세밀하게 관찰하여 생생하게 그린 정물들을 하나하나 보는 것은 눈을 매우 즐겁게 만든다.

   

이 정물들은 그냥 묘사된 것이 아니라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예를 들어 남아서 상해가는 음식들, 반쯤 채워진 유리잔, 옆에 놓여 있는 시계 등은 무상(無常)함과 일시성, 또는 죽음을 상징한다. 아름다운 겉모습과는 달리 먹어보면 신맛이 나는 레몬 역시 성()을 시사하는 과일로, 흔히 매춘부의 집 그림에 등장한다. 이렇게 매혹적인 그림을 즐기면서도 네덜란드 사람들은 죽음이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올 수도 있다는 인생의 덧없음을 늘 상기했던 것이다.

   

원본 위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2/23/2010022302231.html>

   

   

   

44] 페르세폴리스

   

메소포타미아 문명으로 불리는 고대 근동은 수많은 나라가 발흥하고 사라졌지만 그 중 가장 광대한 지역을 통치하고 제국으로 군림했던 나라는 현재의 이란에 위치했던 페르시아 제국이었다. 페르시아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다리우스 1세(기원전 521~486 재위)와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 때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의 세 대륙에 걸쳐 영토를 확장하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다리우스는 왕위에 오르면서 "나는 다리우스다. 위대한 왕, 왕 중 왕, 모든 나라의 왕, 이 지구의 왕이다"라고 선언했다고 한다.

   

페르시아의 도시라는 의미의 페르세폴리스는 다리우스가 그의 권위와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이란 남부 파르스에 지은 장엄한 궁전으로, 약 460x274m 규모로 높이 12m의 단 위에 세워졌다. 다리우스는 좀 더 아름다운 궁을 완성하고자 페르시아 제국 곳곳에서 많은 예술가들을 동원하고 값비싼 수입 재료들을 사용했고, 그 결과 궁전에서는 다양한 문화의 혼합이 이루어졌다. 60여 년에 걸친 이 공사로 다리우스 1세는 알현실의 완성만을 보고 죽었고 크세르크세스 1세에 의해 리셉션 홀 등이 완성되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부분은 약 18m 높이의 기둥이 72개가 있는 알현실로 향하는 층계 벽면에 얕은 부조로 조각된 외국 사신들의 행렬 모습이다. 엄숙하게 걷고 있는 이들은 거의 비슷한 자세를 하고 있으나 옷차림이나 손에 든 선물 등으로 에티오피아, 아랍, 이집트, 스키타이, 그리스 등지에서 온 사신임을 알아볼 수 있다. 왕을 알현하는 의식은 일 년에 한 번 있는 '춘분(春分)' 축제의 하나였다. 이 축제가 끝난 후에 왕은 다시 수사에 있는 수도로 돌아가고 다음 해 봄이 오기까지 페르세폴리스 궁은 비어 있었다. 기원전 330년,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를 함락시키고 페르세폴리스를 불태웠으나 완전히 소실되지는 않았다. 현재 남아 있는 모습만으로도 2000여 년 전의 그 장엄했던 모습을 상상하고도 남게 한다.

   

원본 위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3/02/2010030201914.html>

   

   

   

45] 사랑의 정원

   

흔히 바로크 시대로 불리는 17세기에 활약했던 미술가 중 가장 국제적인 명성을 떨치면서 부와 명예를 한 손에 쥔 화가는 아마 플랑드르의 루벤스(1577~1640)였을 것이다. 아무리 평범한 장면이라도 루벤스는 극적인 요소를 가미하여 역동적이고 감동적인 장면으로 만들어내는 재능을 가졌다. 특유의 따뜻하고 감각적인 색채를 사용한 그의 회화작품들을 보는 사람들은 그림의 장면을 실제 경험하는 것 같은 감동을 받는다. 그는 무려 2000여 점의 회화작품을 남겼는데 주문이 넘쳐 상당수는 그의 드로잉과 유화 밑그림을 바탕으로 조수들이 완성시켰다. 조수들이 그린 작품들도 루벤스의 마지막 몇 번의 붓 터치로 그 특유의 분위기가 살아났다고 한다. 학식이 높고 사교적이면서 점잖았던 그에게는 프랑스의 루이 13세와 스페인의 펠리페 4세 등을 포함한 많은 유력자들의 후원이 있었다.

   

 '사랑의 정원'.

루벤스는 첫 부인 이사벨라가 죽은 후, 53세가 되던 1630년에 16세의 어린 엘렌과 재혼했다. 그 후에 그린 '사랑의 정원'(1632~34)은 당시 그가 지닌 낙천적인 인생관과 즐거움을 표현한 자전적인 그림으로 보인다. 이 장면은 루벤스의 저택에 모인 그의 친구들의 사교적인 모임이지만 공중에는 사랑의 신 큐피드들이 떼 지어 날아다니고, 비너스 여신 조각의 분수에서는 물이 뿜어져 나온다. 가장 왼쪽의 남자는 수줍어하는 여성을 설득하고, 중앙에 모여 있는 여성들은 즐거운 행복감에 빠져 있으며, 가장 오른쪽에는 이런 과정과 경험을 통해 인생의 지혜를 얻은 남녀가 층계를 내려오고 있다.

   

여러번 관능적이고 풍만한 모습으로 루벤스의 그림에 등장했던 엘렌은 이 그림에서도 어느 한 여인의 모델로 나타난 것은 틀림없다. 아마도 이 그림은 루벤스가 어린 부인을 맞이하여 사랑의 여러 단계로 인도하는 과정을 나타낸 내용으로 해석된다. 풍요로운 자연 속에서 남녀의 사랑과 인생의 즐거움 또는 쾌락의 표현은 서양미술에서 언제나 주요 주제의 하나였다.

   

원본 위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3/09/2010030901821.html>

   

   

   

46] 전시(展示)의 정치학

   

1986년에 개관한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은 원래 화려한 보자르 양식의 기차역을 개조한 건물이다. 이 미술관 건립이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퐁피두 대통령 때부터로, 프랑스 미술의 최고봉이었던 19세기 미술품을 전시하려는 목적이었다. 문제는 19세기 미술관 전시의 기점을 언제부터로 보는가였다. 퐁피두 대통령은 1860년대 이후 인상주의 미술의 전시관으로 만들기를 바랐고, 지스카르 데스탱 대통령은 1830년 혁명을 그린 들라크루아의 '바리케이드를 넘어가는 자유'부터 시작하기를 원했다. 미술관이 완공되고 전시를 준비하면서 논쟁은 절정에 달했다. 1981년 사회주의 정권을 창출한 미테랑 대통령이 미술관 위원회의 부위원장으로 임명한 역사학자 르베류는 노동자 봉기가 일어났던 1848년과 그 이후에 등장한 사실주의 미술이야말로 19세기 미술사의 전환점이 되었다고 주장하면서 관장과 학예실의 반대를 물리치고 자신의 안을 관철시켰다.

 오르세 미술관

미술관 1층에는 쿠르베, 밀레 등의 사실주의 회화가 전시되었고 일반인에게 가장 잘 알려진 인상주의나 후기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은 3층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2층에는 그동안 미술사에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아카데미적인 살롱 회화들이 전시되었다. 이에 대해 미국의 뉴욕타임스는 아래층에서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위층부터 보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기사를 싣기도 했다. 르베류는 미술품은 역사적 자료와 함께 전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드가의 회화 '다리미질하는 사람'을 당시 사용하던 다리미와 같이 전시하고자 했으나 미술전시는 역사 교과서가 아니라는 반발에 부딪혀 결국 실현하지는 못했다.

   

현재도 이 골격을 대부분 그대로 유지하는 오르세 미술관은 공예품, 가구, 건축모형 등을 상당수 전시하고 있다. 전시를 둘러싼 정치적 이념 논쟁을 모르는 대부분의 관람자들에게 이 미술관 전시는 일목요연하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술 활동이 당대의 사회나 삶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으며 미술사의 흐름을 보는 다양한 시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원본 위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3/16/2010031602055.html>

   

   

   

47 리베라와 록펠러

2010년 4월 18일 일요일

오전 3:11

   

▲ 리베라 작 '우리들의 빵'

20세기 초 멕시코에서 있었던 벽화운동은 현대미술의 소외 지역이었던 라틴 아메리카의 미술을 처음으로 주목하게 한 운동이었다. 1910년 혁명 이후 사회주의 노선을 걷고 있던 멕시코 정부는 일반인들이 쉽게 볼 수 있는 벽화 운동을 통해 혁명의 의미뿐 아니라 멕시코의 전통과 역사, 그리고 자부심을 고취시키고자 했다.

   

벽화 운동을 주도한 화가는 리베라(1886~1957)였다. 원래 프랑스에서 미술공부를 했던 리베라는 귀국 후 유럽의 미술 양식을 버리고 멕시코의 고대 미술과 민속미술을 복합한 사실주의 양식으로 문교부 청사, 국립예비교 등의 벽화를 그렸다. 그는 시케이로스와 오로스코와 같이 미술가들의 '연맹'을 조직하고, 모두 똑같은 시간을 작업하고 똑같은 액수의 돈을 받는 협동작업을 시도했다. 그러나 1924년에 우익 정권이 들어서자 돈 낭비라고 비난하던 보수파들의 반대가 거세지면서 25년에 연맹은 해체되고 말았다.

   

리베라의 명성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어서 1930년대부터는 미국에서 의뢰가 줄을 이었다. 1932~33년에 그린 디트로이트 벽화는 그가 농업국가 멕시코에서는 볼 수 없었던 미국의 풍요에 압도된 것처럼 거대한 기계와 새로운 산업문명을 미래의 해답으로 여기는 것처럼 보인다.

   

록펠러 2세 역시 리베라의 그림에 관심을 가지고 1933년 뉴욕의 록펠러 센터에 벽화를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작업이 진행되던 중 록펠러는 벽화 속에서 레닌의 얼굴을 발견하였다. 그는 자신의 건물에 레닌의 얼굴이 그려질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일반 노동자의 얼굴로 바꾸어줄 것을 요청했으나 리베라는 이를 거부했다. 록펠러는 리베라에게 모든 비용을 지불한 후 그가 건물에 들어오는 것을 금지했다. 그리고 6개월 후에는 그의 벽화를 전부 지워버렸다.

   

이 사건 후 리베라의 활동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주도했던 멕시코 벽화 운동의 정신은 오늘날까지 계속된다. 멕시코 이민자들이 많은 캘리포니아 지역에서는 무명화가들이 그린 밝고 희망에 찬 벽화들이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원본 위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3/23/2010032302251.html>

   

   

   

48 헤게소 묘비

2010년 4월 18일 일요일

오전 3:10

   

오늘날과 같이 순수 미술과 생활 미술, 공예의 구별이 없었던 고대 그리스에서 조각가들은 아름다운 신과 인간의 조각뿐 아니라 분수 조각, 방패, 가구 등도 제작했다. 특히 수요가 많았던 것은 무덤 앞에 세우는 기념상이나 묘비였다. 물론 묘비 조각은 대부분 이름 없는 평범한 조각가들의 차지였지만 아테네의 묘비는 그리스 전역에 수출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처음에는 주로 좁고 높은 수직적인 돌에 죽은 사람의 모습만을 부조로 새기던 묘비는 점점 옆으로 넓어져 네모난 형태에 여러 사람을 함께 조각하게 되었다.

   

그리스 미술의 전성기인 기원전 약 410~400년에 제작된 '헤게소 비'는 아테네 시외에 있는 디필론 묘지에서 1870년에 발견되었다. 윗부분에는 프록세나스의 헤게소라고 씌어 있어 묘비의 주인공 헤게소가 프록세나스의 부인이나 딸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박공과 양쪽에 기둥이 있는 이 묘비는 마치 실내 공간같이 연출되었는데 헤게소는 의자에 앉아 하녀가 들고 있는 보석상자에서 자신이 생전에 사용하던 목걸이를 꺼내 보고 있다. 중앙에 있는 목걸이를 내려다보며 생전의 행복했던 시절을 회상하는 두 여인은 엄숙하고 절제되면서도 우수에 싸인 분위기를 준다.

   

헤게소 비는 두 여인의 시선이 목걸이에서 만나는데 이 부분이 전체 구성의 중심이다. 보석상자로 이어지는 팔들과 휘어진 의자의 조화로운 형태는 조각가의 탁월한 균형감각을 보여준다. 부드럽고 얇은 옷은 마치 젖은 것처럼 몸에 들러붙어 여성의 몸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 늘어지고 겹쳐지면서 깊이감을 주는 옷 주름 처리의 섬세함과 투명함은 그리스 전성기 조각의 본질을 보여준다.

   

이 묘비에서 사후세계에 대한 관심은 찾을 수 없다. 고대 이집트나 기독교 미술에 죽은 후 심판받는 모습이나 천국 또는 지옥의 장면들이 많이 나타나는 데 비해, 그리스 미술에는 이러한 장면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리스인들은 현세와 살아 있는 사람들의 기억을 더 중요시했기 때문이다.

   

원본 위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3/30/2010033002077.html>

   

   

   

49] 고야의 전쟁

   

미술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주제들 중에 전쟁미술이 있다. 적을 물리치는 장면이나 승리를 재현하는 전쟁화나 전쟁조각은 국가의 영광을 과시하거나 애국심을 고취하는 중요한 미술이었다. 격렬한 움직임과 흥분, 공포를 동반하는 전쟁미술은 또한 미술가들이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주제이기도 했다. 대부분 전쟁의 승리에 초점이 맞추어지던 전쟁미술이 전쟁의 폐해나 희생자 또는 피해자를 부각시키기 시작했던 것은 19세기의 근대기에 들어서였다.

   

화가 고야(1746~1828)가 활약했던 이 무렵의 스페인은 무능한 왕과 부패한 정부, 그리고 스페인을 점령한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혼란에 빠져 있었다. 인간의 잔인함과 야만성, 공포를 직접 목격했던 고야는 프랑스군이 물러간 후인 1814년에 '5월 3일의 처형'을 그렸다. 1808년 마드리드에서 있었던 시민들의 궐기, 그 이후의 검거와 학살 장면을 그린 이 그림에서 고야는 얼굴이 보이지 않는 폭력 집단과, 용감했지만 공포에 사로잡힌 피해자들을 대조시켰다. 계몽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은 고야가 이 그림을 그릴 때만 해도 그는 인간이 나아질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이 학살의 장면을 묵묵히 지켜보는 어둠 속에 있는 성당은 희망과 구원을 상징한다.

   

▲ 5월 3일의 처형.

고야의 말기 작품에서는 희망이 사라져버렸다. 중병으로 귀가 거의 들리지 않았던 그는 자기만의 세계에 칩거하면서 상상 속의 악령들에 사로잡혔다. 74세가 된 1820년부터 3년 동안 그는 악마와 악몽이 지배하는 17점의 음산한 그림들을 그려 자신의 집에 걸었는데, 그 어두운 분위기 때문에 이 그림들은 나중에 '블랙 페인팅'으로 불렸다. 신화에 등장하는, 자신의 아들을 삼키는 농업의 신 '새턴' 그림을 식당에 걸었다고 하니 당시 그의 집을 방문했던 사람들의 충격은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사후 50년 후에야 비로소 공개된 이 그림들은 사실 그가 살던 시대의 정치와 사회의 광기, 위선과 부정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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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미켈란젤로의 프레스코

2010년 4월 16일 금요일

오후 12:31

   

근대 이전의 회화에서 가장 중요한 매체는 벽화 기법인 프레스코였다. 성당이나 궁전의 천장 또는 벽의 방대한 면적에 그리는 프레스코는 회벽이 완전히 마르기 전, 그 표면에 안료를 직접 바르는 방법을 말한다. 천장화의 경우 사다리 위에서 머리를 젖히고 팔을 올려 작업을 해야 했고, 하루 작업량이 한정되어 완성하기까지는 몇 달 또는 몇 년이 걸리는 수도 있었다. 또 일단 채색한 후에는 수정할 수가 없기 때문에 전체 계획을 철저히 세워 그리지 않으면 안 되는, 기술적으로 매우 어려운 작업이다. 그러므로 프레스코는 대가들만이 할 수 있는 작업으로 알려져 왔다.

프레스코화는 오랜 시간 노출되면 먼지가 쌓이고 겉에 칠한 유약 때문에 시커멓게 변색하거나 회벽이 갈라지므로 보수 및 보존 작업이 필요하게 된다. 1989년에 선명한 색채가 새롭게 드러난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1508~1512)는 9년에 걸쳐 컴퓨터 프로그램과 같은 첨단 과학 기술을 바탕으로 세심하게 물감이 칠해진 바로 위까지의 먼지를 제거하고 보존처리를 한 결과였다. 조각가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미켈란젤로는 원래 이 작업을 하기 싫어했다고 한다. 그러나 교황 율리우스 2세는 그를 닦달해 면적이 14×39m나 되는 천장화를 그리게 했고, 계속 불평하는 미켈란젤로를 지팡이로 때리기도 했다. 결국 미켈란젤로는 4년에 걸쳐 구약의 창세기편을 거대한 회화의 세계로 완성시켰다. 유명한 '아담의 창조'<사진>는 거의 마지막에 그려진 그림이었다.

   

이 천장화의 보존 작업을 통해 학자들은 새로운 사실들을 알아냈다. 기존의 생각과는 달리 미켈란젤로는 누워서 천장화를 그리지 않았으며, 밝은 색채를 잘 구사했고, 여러 부분을 즉흥적으로 바꾸었다는 점 등이다. 학자들은 또 어쩔 수 없이 천장화를 그리던 미켈란젤로가 어느 순간부터 작업을 즐기기 시작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아마도 이것은 사실인 것 같다. 왜냐하면 그는 23년 후 이 예배당의 또 다른 거대한 벽화 '최후의 심판'을 기꺼이 맡았기 때문이다.

   

원본 위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4/12/2010041202105.html>

   

   

   

51] 동서미술 수집

2010년 5월 2일 일요일

오전 9:15

   

19세기 후반 서양의 화가들에게 일본 미술은 새로운 관심거리였다. 1854년 일본이 서양에 문호를 개방하면서 유럽에 일본 공예품들이 대거 소개되었고, 그 섬세한 표현과 뛰어난 기술은 곧 화랑가뿐 아니라 백화점에서도 팔릴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평론가 필립 뷔르티는 이러한 열기에 '자포니즘'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화가들은 에도시대의 채색목판화인 우키요에(浮世畵)에 매료되었다. 그 시작은 화가 브라크몽이 1856년에 일본 수출 도자기를 싸고 있는 호쿠사이(北齊)의 목판화를 발견하면서였다. 그 목판화들은 주로 게이샤나 연극인, 또는 서민들의 일상생활 장면을 그렸는데 강렬하고 평면적인 색채, 단순화된 윤곽선, 그리고 특이한 시각은 화가들의 관심을 끌었고 휘슬러·반 고흐·마네·모네·드가와 같은 당대의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동생 테오와 함께 400여점의 우키요에를 수집했던 반 고흐는 히로시게(��)의 목판화를 그대로 모사한 그림에서 한문을 옮기려고 애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서양에서 일본 미술이 붐을 일으키고 있을 때 일본에서도 서양 미술 작품이 수집되었다. 19세기 말에 서양회화를 소장했던 인물 중에는 외국여행의 기회가 많았던 고위직 관리들이 있었는데 이토 히로부미도 그 중의 하나였다. 또한 서양미술관 설립을 꿈꾸고 미술품을 수집한 대표적인 인물은 가와사키 조선소의 사장이었던 마쓰가다 고지로였다.

   

그는 제1차대전 동안 선박 제조의 특수경기를 바탕으로 이룬 재력으로 유럽에서 무려 2000여점의 작품을 수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모두 일본으로 들여오기 전, 2차대전이 나면서 파리의 로댕 미술관에 맡겨두었던 그의 소장품들은 적국 재산으로 몰수당했고 런던에 있던 300점은 화재로 소실되고 말았다. 나중에 프랑스 정부가 작품들을 반환하기는 하였지만 몇몇 유명한 작품은 결국 돌아오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도쿄 우에노에 위치한 국립서양미술관이 바로 마쓰가다의 소장품을 기반으로 창설된 미술관이다.

   

원본 위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4/20/2010042002392.html>

   

   

   

52] 미술가의 사회적 지위

2010년 5월 2일 일요일

오전 9:14

   

20세기 초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드랭은 친구 마티스를 데리고 부모에게 갔다. 화업을 반대했던 그의 부모는 마티스의 학식과 점잖은 모습을 보자 그만 허락을 하고 말았다. 아들이 화가가 되겠다는 것은 대부분의 부모에게는 그리 탐탁한 일이 아니었다. 미술가에 대한 낮은 사회적 인식은 고대부터 내려오는데, 그 주된 이유는 손으로 하는 작업은 미천한 노동자들이나 하는 일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중세 말기에 설립된 대학에서도 음악과 시는 가르쳤지만 미술은 고차원적인 것을 이해하게 인도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배제되었다. 화가나 조각가가 되려면 장인(匠人)에게 도제교육을 받아야 했고, 길드에 가입해야 했는데 이것은 일종의 노동조합과 같은 조직이었다.

   

중세의 길드는 노동환경을 조성하고, 지나친 경쟁을 관리하며, 과부를 위한 연금제도를 실시하고, 도제들의 숙소문제 등을 도와주었지만 가장 중요한 일은 작업 수준을 맞추고 가격을 통제하는 것이었다. 길드가 화가들의 독창력 발휘에 방해가 되었다는 설과 그렇지 않았다는 설이 있지만 미술가들이 이들의 독점에서 벗어나려고 한 것은 사실이었다. 이탈리아 건축가 브루넬레스키는 길드 회비를 내지 않고 버티다가 투옥되기도 하였다.

미술가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미켈란젤로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 같은 천재적인 작가들이 등장한 르네상스부터였다. 새로 설립된 미술아카데미에서 고전, 해부학 등을 정식으로 배운 미술가들은 장인계급에서, 그리고 길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19세기에 와서도 미술가들은 규범과 질서에 얽매이지 않는 '보헤미안'이라는 사회적 편견은 남아 있었다. 쿠르베와 같은 화가는 '안녕하세요, 쿠르베씨'(사진·1854년)에서 노동자 셔츠에 배낭을 멘 차림으로 오만하게 인사하는 모습으로 자신을 그려 이런 인식을 부추겼다. 오늘날에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피카소는 유명인사가 되어 일거수일투족이 주목을 받았고, 칸딘스키·클레·몬드리안의 지성은 많은 사람들의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원본 위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4/27/2010042702517.html>

   

   

   

53] 아메리칸 고딕

2010년 5월 11일 화요일

오후 1:27

   

20세기 초, 미국 미술은 유럽 미술을 추종하는 경향이 컸다. 미술학도들은 파리로 유학을 갔고, 최신 미술의 흐름인 추상미술을 받아들였다. 1913년에는 뉴욕의 렉싱턴 가에 있는 군() 무기 창고에서 '아모리 쇼'라는 국제현대미술전람회가 열렸는데 유럽의 미술 작품 1600점을 전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중에는 피카소·마티스를 비롯한 그 당시의 가장 실험적인 미술가들의 작품이 포함되었다. 이 전시는 미국 미술이 국제적으로 뒤떨어져 있음을 깨닫게 하였지만, 그 난해함에 대한 적대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고, 외국인들의 음모라는 설도 제기되었다.

   

1920년대 말부터 불어닥친 경제공황은 유럽미술 추종의 흐름을 바꾸어놓았다. 미국 사회의 관심은 국내로 돌아왔고 국수주의적인 경향도 나타났다. 미술계에서는 외국의 영향에서 벗어나 미국적인 경험을 그리려는 '지역주의' 미술운동이 일어났다. 도시 인구가 처음으로 농촌 인구를 능가하게 된 이 시기에 토머스 하트 벤튼과 그랜트 우드 같은 미술가들은 산업화와 자본주의가 많은 문제를 안고 있으며, 테크놀로지는 비인간화를 촉진한다고 보았다. 이들이 미국 정신의 본고장으로 생각한 곳은 중서부의 시골과 소도시였다.

   

아이오와주에 살던 우드의 '아메리칸 고딕'(1930년)은 유럽의 난해한 추상미술에 싫증을 느끼던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 중서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고딕식 뾰족한 지붕의 농가를 배경으로 시골 사람들이 서 있는 이 그림은 아주 세밀하게 묘사되었다. 이 아이오와의 남녀는 완고하게 보이지만, 단순하고 정직하며 근본적으로 착한 사람들로, 화가의 여동생과 치과의사였던 여동생의 남편이다. 처음에 이 그림은 시골사람들을 풍자한 그림으로 비난받았지만 지금은 중서부 미국인의 이미지를 가장 잘 대변하는, 인기 있는 그림으로 남아 있다. 제2차대전 이후 다시 추상미술이 도래하였고 지역주의 작품들은 편협하고 보수적인 것으로 여겨졌으나 아직도 미국적 미술의 본질은 사실주의에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54] 클레의 트위터

2010년 6월 3일 목요일

오후 1:53

   

피카소는 화가 파울 클레(1879~1940)를 '파스칼-나폴레옹'이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나폴레옹과 같은 작은 체구에 파스칼과 같은 지성을 갖춘 화가라는 의미였다. 대부분 소품인 클레의 작품은 이해하기 쉬운 것도 있으나 다양한 영역을 자유롭게 왕래하던 다면성 때문에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것도 많다. 이런 이유에서 그는 현대미술을 다 이해한 후에 연구해야 할 화가라고도 한다.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이면서 식물학·광물학·해부학·인류학에 대한 광범위한 지식과 심오한 지성을 갖춘 클레는 이미지들을 화폭에 자유자재로 창조해 내었다. 기본적으로 세계를 순수하게 보고자 했던 그는 눈부신 과학기술의 발전, 현대화와 더불어 발발한 1차세계대전, 그리고 나치의 파시즘을 겪으면서 예술가로서 이상론자와 회의론자의 양면적인 사고를 갖게 되었다. 그의 이미지와 주제는 유머와 재치를 보여주는 동시에 전쟁의 재난과 사회 부조리에 대한 경험과 악몽, 그리고 어리석고 약한 인간을 은유하기도 한다.

   

1922년에 펜과 수채화로 제작한 '지저귀는 기계'로 알려진 작품은 원래 제목이 '트위터하는 기계'였다. 이 작품에 그려진 기계는 가는 철사로 서투르게 만들어진 새의 머리가 아래에 연결된 대를 돌리면 지저귀게 되어 있다. 살아 있는 생명체인 새를 기계로 만든 이 작품은 기계 새들이 아무리 지저귀더라도 살아 있는 새보다 더 잘 울 수는 없다는 사실을 환기시킴으로써 기계 장치를 쓸모없는 것으로 만든다. 바로 기계 시대에 대한 인간의 맹목적인 믿음을 풍자한 것이다. 또 기계 새들의 지저귐에 끌려서 작품에 다가가면 그 아래에 설치된 네모난 덫에 걸려 죽음을 의미한다는 해석도 있다.

   

요즈음 트위터가 인기다. 마치 새가 지저귀듯이 짧게 의견이나 정보를 서로 교환하는 것이라 한다. 20세기 전반에 기계시대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클레가 21세기 초 전자시대에 업그레이드된 트위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해진다.

   

   

   

2010년 6월 3일 목요일

오후 1:53

   

 

 


55] 그랜드 투어

 

   

   

56] 놀데의 조선방문

2010년 6월 3일 목요일

오후 1:53

   

19세기 후반은 유럽이 비서구(非西歐) 지역으로 영토를 넓히면서 식민지를 개척했던 제국주의의 시대였다. 유럽의 박물관들이 아프리카, 아시아, 오세아니아 지역의 부족미술이나 민속품을 수집하고 전시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서구 미술가들에게는 이들 지역의 미술에 보이는 원시성이 근원적인 인간의 감성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였다. 피카소나 마티스를 비롯한 미술가들은 특히 아프리카 조각에 보이는 이질적이고 강렬한 표현을 작품에 도입하기 시작했다.

   

화가 에밀 놀데(1867~1956) 역시 원시미술의 본질적인 형태와 자유분방한 표현에 이끌렸다. 북부 독일 출신이었던 놀데는 원래 이름이 한센이었으나 자신이 태어난 고장의 이름을 따서 놀데라고 바꿨다. 그는 그 지역의 농부나 어부에 대해 깊은 애착을 지녔으며 인종과 지역은 서로 공존함으로써 의미를 갖는다고 믿었다. 이 시기에 그린 그의 작품들은 열정적이고 강렬한 원색으로 그리스도와 제자들을 거칠고 투박한 농부나 어부들처럼 그리는 과격한 종교화였다. 1912년에 그는 '선교사'라는 작품을 제작했는데 무릎을 꿇고 있는 아프리카 여인 앞에, 마치 가면을 쓴 듯이 서 있는 선교사의 표현에는 그가 베를린의 민족학 박물관에서 보았던, 조선시대 장승의 모티브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국 지역에 대한 호기심에 찬 놀데는 1913년 가을에 베를린을 출발, 기차로 모스크바, 몽골을 거쳐 뉴기니로 향하는 여정 중에 조선에 왔다. 짧은 여정이었지만 조선 방문에서 받은 호감은 그의 자서전에 짧게 언급되어 있고 몇 점의 인물 드로잉도 남아 있다. 그러나 그의 말년은 불행하였다. 1936년 나치는 놀데의 작품을 반()독일적, 퇴폐적인 미술로 선언하며 작품을 압류했다. 자신을 독일적인 화가로 여기고 나치 당원으로 가입까지 했던 놀데였지만 표현주의를 위험한 예술로 생각한 나치의 억압은 피할 수가 없었다. 그는 미술 활동을 금지당했지만 틈틈이 수채화를 그렸고, 이 작품들은 현대의 수채화 중에 가장 탁월한 작품들로 꼽힌다.

   

   

   

   

2010년 6월 3일 목요일

오후 1:52

   

57] 폼페이의 비의(秘儀)

아이슬란드의 화산재 때문에 유럽 공항들이 한동안 패쇄되었다. 화산재로 인한 이런 파동은 역사상 가장 유명한 화산 폭발의 하나였던 이탈리아의 베수비오 산을 떠올리게 한다. AD 79년 8월 24일, 나폴리 만 연안에 위치한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면서 분출해 낸 뜨거운 가스와 화산재, 그리고 화산암은 이 일대의 도시인 폼페이와 에르콜라노를 완전히 뒤덮어버렸고 약 2000명이 사망했다. 그 후 1600여년 동안 잊혔던 폼페이는 1748년에 우연히 우물을 파다 유물들이 나오면서 다시 세계적인 관심을 모았고 현재 옛 도시의 4분의 3 정도가 발굴되었다.

   

인구 약 2만 정도였던 폼페이는 특별히 중요한 도시는 아니었지만 로마 귀족들의 정원이 딸린 별장이나 부유층의 빌라들이 많은 곳이었다. 이 가옥들에는 아름다운 정원이나 풍경, 또는 도시를 벽화로 그려, 집안에서도 신선한 야외 광선과 대기를 접하는 듯한 착각을 느끼게 했다. 대부분의 고대회화들이 거의 다 없어져 버린 반면, 이 벽화들은 화산재 더미 밑에서 오히려 보존이 잘 되었고, 오늘날에도 로마시대 회화의 뛰어난 수준에 감탄하게 한다.

   

폼페이 시 외곽에 있었던 '비의(秘儀)의 집'(약 기원전 50년)에는 벽화들이 거의 파손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집주인이 누구였고 누가 그렸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1.6m 높이의 네 벽 전체에 여러 장면으로, 마치 무대 위에 있는 인물들처럼 그려진 방이 발견되었다. 이 벽화는 당시 법으로 금지되었던 주신(酒神) 바쿠스 의식의 입회식을 묘사하고 있다.

   

바쿠스 추종 신앙은 가장 비교(秘敎)적인 종교였는데, 포도경작이 주산업이었던 이곳에서 막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강렬한 빨간색을 배경으로 결혼을 앞둔 순결한 젊은 여성의 화장 장면, 의식의 하나인 매질 등, 술의 신일 뿐 아니라 쾌락과 다산(多産)의 신이기도 했던 바쿠스와의 신비스러운 결합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그린 이 벽화는 로마인들의 비밀스러운 종교의식을 엿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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