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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63 초현실주의: 키리코

AH101 2012. 2. 16.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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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미술사 - 63(초현실주의: 지오르지오 키리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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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초현실주의(超現實主義, Surrealism) - 꿈과 무의식의 세계, 환상의 세계

Love Song, 1914/Giorgio de Chirico

이 작품은 데 키리코가 초현실주의 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예로 르네 마그리트는 이 작품을 개작한 1925년의 작품을
보고 나서 자신의 회화 양식을 결정하게 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후에 1929년에 <기억>이라는 제목의 작품을 통해서 이 작품에 대해
경의를 표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은 유럽인들에게 커다란 마음의 상처를 주며 사람들은 이러한
현실에 반(反)한 다른 세상을 탐구하는 계기를 맞게된다.
초현실주의(超現實主義:Surrealism)는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인
다다이즘 시기부터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까지 약 20년간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전위적인 문학예술 운동으로 그 기본을 형성하는 많은 요소들은 이미
1924년 이전의 다다(Dada) 시기에 존재해 왔다. 초현실주의는 기성세대의 윤리,
종교, 정치, 사회 등 광범위한 가치관에 일대 전환을 꾀하여 자유로운 정신을 구가
하고자 했던 정신적 경향이었다. 초현실주의가 기성의 가치관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는 점과 성(性)에 대한 개방적인 접근 방식을
취했다는 점, 반(反)기독교적 사고, 기발한 조형적 개념을 표현하였다는 점 등은
다다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초현실주의는 기성의 가치인 이성이 파괴된
후에 스스로 일어나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려는 야심적 태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초현실주의는 현실로부터의 도피, 삶의 회피 등으로 규정 되어지고,
초현실 세계를 그리려 하였으며, 질서, 윤리 규범과 정형화된 예술 등으로부터 도피
하여 허무적인 다다이즘에서 오히려 한 발 더 나아가 무의식 세계, 꿈의 세계, 혹은
오토마티즘(Automatism: 정신분석학적 입장에서는 어떤 이성적 기재의 과정없이,
혹은 체계적인 의식이 개입되지 않은 무의식만의 임의적인 활동)의 세계를 추구하던
사조이다. 초현실주의는 근본적으로 경험의 경계를 넘어서려고 애썼으며 현실을
본능적이고 잠재적인 꿈의 경험과 융합시켜서 논리적이며 실재하는 현실, 그 자체를
바라보는 시각을 확장시켜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현실에 도달하려 했다.
프로이드(Freud)의 리비도(Libido), 혼돈된 꿈의 상태, 에로티시즘 등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것도 우리가 살고 있는 기존의 현실 세계에 초현실적인 세계를 결합함
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려는 열망에서였다. 초현실주의자들은 인간에게는
이성뿐만 아니라 野性도 있으며 선(善) 뿐만 아니라 악(惡)도 있다는 것, 눈을 뜨고
지내는 현실뿐만 아니라 자신도 알 수 없는 곳을 배회하는 꿈의 세계도 엄연히 존재
한다는 등 인간 내면의 속성을 직시하였다.

초현실주의는 인간, 사회질서, 윤리, 예술까지 부정하는 허무적인 다다이즘의 개념을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과 헤겔의 변증법을 토대로 인간의 무의식 혹은 잠재 의식에
의한 상상의 세계와 결부시켜 예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시도했다.
또한 다다(Dada)가 시도했던 것처럼 기존 예술을 파괴하는데 중점을 두기 보다는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의 영향을 받아, 무의식의 세계 내지는 꿈의 세계의 표현을 지향
하는 무의식적인 정신을 탐구하고 설명하는데 관심을 두었다.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견해가 너무 오랫동안 전면에 나서 있었다고 생각했던 초현실주의자들은 상상력을
해방시켜 사람들의 과학적인 면보다는 시적인 면들을 더 의식할 수 있도록 만들자고
주장했던 것이다. 무의식이 프로이드의 이성의 통제를 뛰어 넘어 잠재된 충동과
상상의 세계를 해방시킨다는 학설을 원용하여 자동기술법(Automatism)에 의한
문지르기라는 프로타주(Frottage) 기법(막스 에른스트), 데칼코마(Decalcomania:
전사법이라고 하며 그림물감을 칠하여, 그것을 반으로 접거나 그 종이 위에 다른
종이를 덮어서 문지르면 생기는 그림), 마그리트의 데뻬이즈망(Displacement:하나
의 사물이 본래 있어야 할 위치에서 전혀 다른 곳으로의 자리 바꿈을 말하며, 이것은
두 실재를 맞부딪치게 해 놓음으로써 정신계의 유추적 형태를 깨뜨리고, 상상력을
해방시켜 인간의 의식을 무한히 확대시키고자 하는데 목적을 둔다.), 꼴라(Collage),
초현실주의 오브제(달리) 등 다양한 기법을 개발했다. 이 예술 운동은 1924년에
시작되어 3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초현실주의라는 용어는 1917년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1880~1918)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는 처음에 쉬르나튀랄리슴
(超自然主義)이라는 명칭을 생각했으나, 철학 용어로 오해받을 것을 염려하여
초현실주의로 고쳤다고 한다. 시인이자 비평가인 앙드레 브르통(Andre
Breton:1896~1966)은 1924년 10월 정식으로 <초현실주의자 혁명> 지를
통해 <초현실주의 선언 I>을 발표한다. 브르통은 '초현실주의여, 친애하는 상상력
이여, 우리는 너를 얼마나 좋아했는가! 우리를 열광시키는 단 하나의 말, 그것은
자유가 아닌가!'하고 말하면서 상상력과 과거의 인습과 의식에서 벗어나려는 인간의
자유를 강조하고 있다. 초현실주의 선언과 함께 초현실주의 미술은 막스 에른스트
(Max Ernst:1891~1976)를 비롯하여 마송(Andre Masson:1896~1987)과
호안 미로(Joan Miro:1893~1983)가 참여하면서 활발히 전개된다.

초현실주의 미술은 다다이즘 뿐만 아니라 15세기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Hierony-
mus Bosch), 프란시스코 고야 등 전 시대의 화가들과 오딜롱 르동, 지오르지오
데 키리코, 마르크 샤갈 등 동시대 화가들의 환상적이고 기괴한 이미지의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예술작품이 인간 심리의 탐구와 그 표현을 촉구하는 수단임을
강조하면서, 방법론적 연구와 실험을 매우 중시하였다. 그러나 브르통은 초현실
주의 원리에 충실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1929년 12월 15일 브르통은
<제2의 초현실주의 선언>을 발표한다. 이것은 초현실주의를 단순한 예술사조로
발전시키기보다 정치, 사회의 연결된 혁명으로 전개되길 바랬다.
이제 예술은 작품 제작이나 미의 자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각되지 못한 것과
예술의 미개척 분야를 밝히고 정치적, 사회적 혁명사상을 예술가들이 추구해야
한다는 선언이었다. 그러나 점차 초현실주의 미술가들은 이러한 선언과 별개로
자신들의 독자적 성격을 갖고 초현실주의 작품을 제작하면서 초현실주의 운동과
거리를 두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바로 직전인 1938년 1월 파리의 보자르 화랑에서 대규모 '초현실
주의 국제전'이 열린다. 이것은 마지막 초현실주의 전시였다. 마치 초현실주의
미술의 종언을 예고한 듯 이 전시는 기존의 미술과 전혀 다른 무질서와 몽상적
환상의 축제로 이루어진다. '초현실주의 국제전'은 전쟁이 임박했을 무렵인 1938년
유럽의 분위기와 너무 흡사한 기괴함과 공포를 느끼게 하는 전시였다.
초현실주의 화가나 조각가들은 이성이나 객관성에 의한 현실을 부정하면서 삶을
바탕으로 한 비이성적인 것과 주관적인 자세를 요구하였다. 더 나아가 이들은
꿈이나 환상보다 상상력에 의해 초현실 세계를 그렸던 것이다.
1966년 앙드레 브르통의 죽음으로 초현실주의는 막을 내린다.

Selfportrait width Palete, 1960

그리스 태생인 이탈리아 화가인 지오르지오 데 키리코는 아테네의
미술학교에 다닌 후 뮌헨에서 화가로서의 첫 발을 내딛었다.
그곳에서 F.W. 니체, A. 쇼펜하우어 등의 독일 철학과 A. 뵈클린(Arnold
Bocklin:1827~1901, 스위스 출신의 상징주의 화가)의 낭만주의적 회화의
영향을 받아 환상적인 예술을 지향하였다.
A. 뵈클린의 그림에 짙게 깔린 죽음의 그림자가 그의 그림에서는 불길한 예감이
팽배한 광장의 그림자에 고스란히 배어 있는 것 같다. 앙드레 브르통은 그의
그림이 '치유될 수 없는 불안감'에 쌓여 있다고 하였다.
그의 그림들은 형이상회화(形而上繪畵:Pittura Metafisica)라는
명칭하에 미술사에 흔적을 남기고 있다.
이는 데 키리코가 추구하던 수법, 즉 공허한 도시 풍경, 마네킹, 기묘하게 비뚤어
져 보이는 원근법, 명확하나 기묘한 기하학적 형태 등에 의한 철학적·명상적 풍경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수법으로 미래파의 동적인 경향에 대립하여 신비
적인 내면세계의 표현을 시도하였다. 데 키리코는 1910년 이미 독자적인 회화
정신이 형성되었으며, 사물이 순간적인 형상에서 깊은 가치를 나타내는, 일종의
형이상적 회화표현으로 나아갔다. 1911~1915년 파리에 머무르며 피카소 등과
사귀었고 입체파의 영향도 받았으나, 그의 본질적인 구상은 화면의 몽환적 구성을
향한 것이었다. <어느 가을날 오후의 수수께끼>, <아침의 명상>, <거리의 우울
과 신비> 등 1910년대 전반 일련의 작품에서, 그리스·로마를 연상시키는 고전적
인 대리석상, 음영이 짙은 투시적 건물, 기계적인 형식들이 얼키고 설킨 근대 도시
의 단편적 정경 등 이러한 연관성 없는 대상물을 주관적으로 끼워맞춰 몽환적인
고독의 세계를 재구성하였으며 초현실주의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들 일련의 작품의 영향으로 스콜라 메타피지카(Schola Meta-physica:
形而上派)
라는 새로운 파가 그를 선구자로 하여 형성되었으며, 미래파 이후
의 이탈리아 화단을 풍미하였다. 1933년부터는 고전적 작풍으로 돌아가 차차
신선미를 잃었으나 화단의 장로로서 존경받았다.

데 키리코는 매우 환상적인 느낌을 주는 그림들을 그렸지만,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사물들은 우리가 완벽하게 알아볼 수 있는 지극히 현세적이고 일상적인 것들이다.
즉, 등장하는 사물 그 자체가 우리에게 혼란을 주는 것은 아니다. 그의 그림에서는
우리에게 친숙한 사물들이 보인다. 아폴로 상의 머리, 외과의사의 수술용 장갑, 공,
기차가 지나가는 모습, 르네상스식의 건축물 등등, 각각 보았을 때는 별 특별할 것도
없는 사물들이지만, 그들의 기묘한 조합이 그들을 낯설고 환상적이게 한다.
또한 사물의 비정상적인 크기는 사물 자체의 친숙성을 오히려 낯설게 한다.
담벼락(?)에 걸려있는 아폴로 상과 장갑은 건물과 비교할 때 비정상적으로 크게
그려져 있다. 그리고 이들이 왜 한 장면속에 묘사되어 있는지도 알수 없다.
데 키리코의 이런 그림들은 상징주의자 로트레아몽의 싯구를 떠오르게 한다.
'수술대 위에서의 재봉틀과 우산의 우연한 만남처럼 기이한 아름다움...' 낯익은
대상이라도 그것이 놓여있는 본래의 일상적인 맥락에서 벗어나 뜻하지 않은 장소
에 놓여 있을 경우, 우리는 매우 낯설면서도 환상적인 느낌을 갖게 된다.
이런 기법을 초현실주의자들이 매우 좋아 했었는데, 전문용어로는 전치 또는
데뻬이즈망(Displacement)이라고 한다.

The Nostalgia of the Infinite, 1911

The Uncertainty of the Poet, 1913

Ariadne, 1913

Le Cerveau de l'Enfant(The Child's Brain)

The Conquest of the Philosopher, 1914

Christ and the Storm, detail, 1914

The Red Tower, 1913

이 작품을 소유하고 있던 아폴리네르는 그것을 파리의 살롱 도톤에 전시될 수
있도록 하였다. 총탄이 박힌 탑과 기마상은 달리의 1935년 작품 <죽음의 기사>를
떠오르게 하며, 이는 데 키리코가 초현실주의 작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The Anxious Journey-Paris, spring-summer, 1913

Melancholy and Mystery of a Street(거리의 신비와 우울), 1914

니체는 이탈리아 도시들을 여행하면서 '토리노에서 모든 것은 환영이며 정확하게
기하학적인 광장 너머로 우리는 무한한 것에 대한 향수를 읽을 수 있다.라고 쓴 바
있다. 어린 시절 독일 철학자의 저서를 읽었던 데 키리코는 그 구절을 이러한 광경
으로 묘사한 듯이 보인다. 원근법을 길게 늘여 사용함으로써 작품 전체에 우울한
장막이 드리워진다.

Torino printaniere, 1914

The Enigma of a Day, 1914

Montparnasse Station(The Melancholy of Departure), 1914

아마도 데 키리코 작품의 형이상학적인 특성인 관람자를 혼란스럽고 당황하게
만드는 요소들은 작가가 의도적으로 약간씩 모순되게 재현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얼어붙은 듯한 기차의 움직임은 바람이 불지도 않는데 펄럭이는 깃발과
대조를 이루며, 또한 노란 비탈길이 상승하는 듯한 장면은 현실적인 원근법으로는
불가능하다. 이 시기의 다른 작품에도 자주 등장하는 바나나 다발은 유령의 도시
같은 풍경 속에 오염되지 않은 자연을 의미하는 이국적인 요소로 등장한다.

The Double Dream of Spring, 1915

The Prophet, 1915

The Vexations of the Thinker, 1915

The Amusements of a Young Girl, 1915

The Melancholy of Departure, 1916

Andromache, 1916

Metaphysical Interior with Biscuits, 1916

The Disturbing Muses(불안하게 하는 뮤즈들), 1916

Hector and Andromache(Ettore a Andromaca), 1917

The Faithful Servitor, 1916 or 1917

Metaphysic Interior, 1917

Interior of Factory I

The Great Metaphysician, 1917

Plaza de Italia con estatua ecuestre, 1936

Portrait of Isa with Head of Minerva, 1944

Bathers(with Red Drape in the Landscape), 1945

Selfportrait, 1953

Florentine Still Life(Balcone a Firenze)

The Swimming Naiads, 1955

Naturaleza muerta evangelica, 1956

The Red Glove, 1958

Metaphysical Interior with Anatomical Nude, 1968

The Remorse of Orestes, 1969

Orpheus the Wearied Troubador, 1970

Mysterious Women, 1970

Sun on an Easel, 1972

Sun on An Easel, 1973

Fruit with a Bust of Apollo, 1973

The Anniversary of the Prince, 1973

The Maseks, 1973

The Mystery of Manhattan, 1973

Tears of Love(Hector and Andromache), 1974

New York 1936-37 (picture by Irving Pe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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