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미술사 참고자료/초현실주의

서양미술사65 초현실주의: 마그리뜨

AH101 2012. 2. 16.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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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미술사 - 65(초현실주의: 마그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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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혹적인 환상의 세계 - 현실과 환상의 이분법:
르네 마그리트(Rene Magritte: 1898~1967)


현대 예술의 가장 특징은 "대상성" 파괴된다는 있다.
이제 그림은 현실에 있는 어떤 것의 "재현"이기를 그친다.
? 파울 클레(1879~1940, 스위스 표현주의 화가로 추상 회화의
시조, 클레는 선을 사용하여 사물의 형태를 그렸으며, 마티스가
화려한 색채의 마술사라면 클레는 선을 자유롭게 이용한 선의 작가라
있다.) "현실이 끔찍해질수록 예술은 더욱더 추상적으로
된다." 했다. 또한 움베르토 에코는 "혼란스럽고 다가치적이며
다의적인 작품의 세계, 카오스모스(chaosmos: chaos+cosmos)
추구하는 오늘날의 예술 작품은 현대 사회의 세계관과 가치관의
중심을 잃어버린 오늘날의 혼란스런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현대 사회의 위기의 반영으로 있으며, 긍정적
측면에서는 자신의 삶과 인식의 도식을 혁신하는 데로 열려 있고
자기 능력의 발전과 지평의 확대에 대해 생산적인 새로운 인간 유형
가능성도 발견할 있다." 했다.
때문일까? 어쨌든 이제 예술은 "아름다운 가상"이기를 포기한다.
헤겔의 예언대로 이념과 물질이 행복한 조화를 이루고 있던 고전적
예술은 수명을 다하고 전혀 새로운 현대 예술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대상성의 파괴는 형태와 색채의 해방을 가져온다. 이제 형태와 색채
대상을 재현할 의무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이 유희하게 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중요한 재현 대상과 얼마나 닮았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형태 자체가 지닌 아름다움이다. 예술의 과제는 이상
자연을 정확히 재현하는게 아니라 문제는 색조의 아름다움을 창조
하기 위해 화구통 속의 내용물(물감) 어떻게 조합하느냐다.
그래서 재현을 포기한 현대 예술엔 내용이나 주제가 있을 없다.
다만 색과 형태라는 형식 요소 자체가 가진 아름다움, 미적 정보
있을 뿐이다. 이제 현대 예술을 보고 "저게 그린거냐" 물으면
실례가 되는 때문이다. 알겠는가?!

-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 2" 에서 -


마그리트는 벨기에의 레시느에서 태어났다. 1925년경 초현실주의로
전환한 , 파리에서 앙드레 브르통을 비롯한 초현실주의 화가들과
교분을 가졌다. 다른 초현실주의자들의 작품이 주로 꿈이나 무의식을
주제로 삼은 반해, 언뜻 보기에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마그리트의
작품은 실은 철저하게 논리적이고 철학적인 근거 위에 있다.
실제로 그는 철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자신이 작품을 통해 철학을
한다고 믿었다. 또한 마그리트도 에셔처럼 이율배반이라는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마그리트의 작품은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확실하게 믿고 있는 대상들
그것들의 이름과 의미와 기능에 있어서 관계는 실제로 우리가
믿고 있는 것보다 훨씬 미약하다라는 인식 위에 기초하고 있다.
마그리트가 그의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것은 본질적인 가치를
가진 현실의 여러 다른 조직체를 시적인 은유의 방법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마그리트의 목적은 정신의 자유를 위한 필요 조건으로 현실
신성하고 체계 잡힌 질서를 반박하는 계시적이고 비평적인 예술
창작에 있다. 비록 다른 초현실주의 작가들의 시도와는 뚜렷이 구별
되는 차이점이 있으나 초현실주의 운동과 동일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1927 파리에서 앙드레 브르통을 만나기 이전부터 초현실
주의 경향의 작품 활동을 하였다. 벨기에 화가에게 결정적인 영향
미친 작품들은 20년대 초에 알게된 키리코의 작품으로 파리 초현실
주의 예술의 중심은 무엇보다도 문필가인 브르통, 아라공, 에르와르,
아르투르에 의해서 구성되어졌고, 중심적 내용은 꿈과 욕망의
세계를 해방시킴으로써 예술과 삶을 새롭게 하는 것이었으며 이를
위해 "자동기술법" 채택하였다. 초현실주의 회화는 시인들에
의해서 여러 실험을 통하여 개척된 길을 따라갔다. 모든 화가들은
그들의 회화작업이 중요한 원천으로서 프로이드적 무의식의 세계를
충실히 반영하였다. 그러나 마그리트의 다른 초현실주의자들과는
달리 꿈과 욕망이 그의 회화의 기원이 아니었으며 일상 현실에 대한
내용의 역전을 통해 낯설은 현실을 지성적으로 모색하였다.

마그리트의 회화는 친숙한 대상들과 재현된 대상들 사이에 비정상적
관계를 이룩하면서 객관적인 방법에 의한 세부묘사에 따라 재현
되며 마그리트의 이미지는 마치 은유와 같은 기능을 한다.
은유는 시적인 본성을 지니며 이미지들은 가끔 불안정하지만 달리,
에른스트와 다른 초현실주의자의 이미지처럼 무섭게 소름끼치는 것은
아니었다. 마그리트의 회화는 어떠한 비극적 파토스도 현실과 신비
사이의 경계없는 연속에 의해 와해시키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그가 생계를 꾸려 나가기 위해 제작한 광고 그림에서
처럼 방관자로서 느끼는 중성적인 형태로 재현되어 현력의 부재와
관련된다. 마그리트 회화의 개념적 특성을 더욱 강화시키며 그림에
나타나는 대상에 대한 무관심성은 마르셀 뒤샹의 레디메이드와
마그리트의 작품에 보이는 명백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성격을 근접시키고 있다. 그의 그림에 나타나는 차가운 회색조의
단조로움 안에는 사물들과 우리 사이의 연계성의 존재와 부재에 대한
모든 암시의 힘이 뿌리내리고 있는데, 이는 20세기 예술에 있어서
명백하게 나타나는 회화적 사조보다 개념적 사조에 더욱 가까이 접근
하고 있는지성적인 전략 가운데 하나이다.

*지오르지오 키리코(Giorgio de Chirico: 18888~1978), "사랑의 노래", 1914*

*Melancholy and Mystery of a Street, 1914*

그리스 태생이며 이탈리아 화가인 지오르지오 키리코는 뮌헨에서
화가로서의 발을 내딛었는데 그곳에서 F.W. 니체, A. 쇼펜하우어
등의 독일철학과 A. 뵈클린의 낭만주의적 회화의 영향을 받았다.
아놀드 뵈클린으로부터는 많은 영향을 받았다. 아놀드 뵈클린의 그림
짙게 깔린 죽음의 그림자가 그의 그림에서는 불길한 예감이 팽배한
광장의 그림자에 고스란히 배어 있는 같다.
앙드레 브르통은 그의 그림이 '치유될 없는 불안감' 쌓여 있다고
하였다. 그의 그림들은 형이상회화라는 명칭하에 미술사에 흔적을
남기고 있다. 사물이 순간적인 형상에서 깊은 가치를 나타내는, 일종
형이상적 회화표현으로 나아갔다. 1911~1915 파리에 머무르며
피카소 등과 사귀었고 입체파의 영향도 받았으나, 그의 본질적인 구상
화면의 몽환적 구성을 향한 것이었다.
《어느 가을날 오후의 수수께끼》 《아침의 명상》 《거리의 우울과
신비》 1910년대 전반의 일련의 작품에서, 그리스·로마를 연상
시키는 고전적인 대리석상, 음영이 짙은 투시적 건물, 기계적인 형식
들이 얼키고 설킨 근대도시의 단편적 정경 이러한 연관성 없는
대상물을 주관적으로 끼워맞춰 몽환적인 고독의 세계를 재구성
하였으며, 초현실주의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들 일련의 작품의
영향으로 스콜라 메타피지카(Schola Metaphysica:形而上派)라는
새로운 파가 그를 선구자로 하여 형성되었으며, 미래파 이후의
이탈리아화단을 풍미하였다.

키리코는 매우 환상적인 느낌을 주는 그림들을 그렸지만,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사물들은 우리가 완벽하게 알아볼 있는 지극히
현세적이고 일상적인 것들이다. , 등장하는 사물 자체가 우리
에게 혼란을 주는 것은 아니다. 그림에도 우리에게 친숙한 사물들
보인다. 아폴로상의 머리, 외과의사의 수술용 장갑, , 기차가
지나가는 모습, 르네상스식의 건축물... 각각 보았을때는 특별할
것도 없는 사물들이지만, 그들의 기묘한 조합이 그들을 낯설고 환상적
이게 한다. 또한 사물의 비정상적인 크기는 사물 자체의 친숙성을
오히려 낯설게 한다. 담벼락(?) 걸려있는 아폴로 상과 장갑은 건물
비교할 비정상적으로 크게 그려져 있다. 그리고 이들이
장면속에 묘사되어 있는지도 알수 없다.
키리코의 이런 그림들은 상징주의자 로트레아몽의 싯구를
떠오르게 한다. "수술대 위에서의 재봉틀과 우산의 우연한 만남처럼
기이한 아름다움..." 낯익은 대상이라도 그것이 놓여있는 본래의
일상적인 맥락에서 벗어나 뜻하지 않은 장소에 놓여 있을 경우,
우리는 매우 낯설면서도 환상적인 느낌을 갖게 된다.
이런 기법을 초현실주의자들이 매우 좋아 했었는데, 전문용어로는
전치 혹은 데페이즈망(depaysement)이라고 한다.

*The Window, 1925*

*Woman Bathing, 1925*

*The Menaced Assassin(위협적인 암살자), 1926*

*The Difficult Crossing, 1926*

*The Forest, 1926*

*The Man of the Sea, 1926*

*Attempting the Impossible(불가능한 것을 시도),1928*

*The False Mirror, 1928*

지각이 이루어진 순간에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은 구별되지 않는다.
마그리트의 작품 세계의 주제는 메르로-퐁티(1908-1961, 프랑스의
몸의 철학, 지각의 현상학 철학자) 철학과 완전히 일치한다.
퐁티는 마그리트를 몰랐을까?

*The Treachery of Images(이미지의 배반), 1928-1929*

도대체 파이프를 그려놓고 파이프가 아니라니!
마그리트의 <이미지의 배반>이라는 작업에는 그림속에 "Ceci n'est
pas une pipe.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언어가 들어가 있다.
누가 봐도 명백히 파이프 그림인데, 마그리트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라고 하고 있다. 언어는 매우 정확하고 명료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지극히 단순하고 한정된 것이다. 현실은 그보다 훨씬 모순적
이고 복합적이다. 이처럼 그림과 글이 만나면서 회화와 언어 양자에
대한 기존의 사고를 흔들어 놓은 역할을 있다는 것이다.
파이프가 아니면 이건 뭐지? 하지만 이것은 파이프가 명백하니까
그럼 말이 틀린 건가? 우린 밑의 문장의 '이것' 위의 파이프를
지칭한다고 쉽게 생각한 것일까... 르네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이것이 지칭한 것은 파이프가 아닌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것은
르네 자신만이 있는 일인 것이지만 말이다. 그림은 철학과
관련해서 해석할 수도 있다. "세계 존재" 하이데거가 제시한 개념
인데, 모든 존재는 존재가 처한 시간과 공간 내에서 특정한 사회적
의미를 가진다는 뜻이다.

*Threatening Weather(불안한 날씨), 1931~32*

구름을 밀쳐 내고 하늘에 떠있는 방해물들인 세가지 오브제의 부조화
스러운 결합은 그림을 푸는 열쇠가 된다.

*La condition humaine 1(인간 조건 1), 1933*

나는 캔버스에 의해 가려진 풍경의 부분을 정확하게 묘사한 그림을
창문 앞에 두었다. 그래서 그림 안에서 표혀된 나무는 시야를 가려서 밖의
나무를 감추고 있었다. 말하자면 나무는 그림 안의 방의 내부와 실제 풍경의
외부 모두에서 감상자의 마음 속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세상이 단지 정신적 표현으로서 우리 내부에서 경험되는
것일지라도 우리는 세상을 외부의 것으로 여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현재
발생하고 있는 일을 과거에 놓는다. 그리하여 시간과 공간은 일상의 경험이
고려하는 하나의 정제되지 않은 의미를 상실한다. - 마그리트

그림을 보라. 창가에 놓인 이젤 위에 다시 그림이 얹혀 있다.
속을 보라. 나무가 보인다. 나무는 아주 애매한 위치에 있다.
나무는 밖의 세계에 "실재"하는 나무일 수도 있다. 아니, 어쩌면
캔버스에 그려진 "재현"일지도 모른다. 나무는 그림 "" 있는가
"
" 있는가? 전자라고 생각하면 관념론자이고, 후자면 실재론자다.
철학의 영원한 주제는 주관과 객관의 문제다. 현대 미학도 바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철학자들의 노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인간의 조건, 1934*

창문 앞에 이젤이 있는 그림 초기 작품의 예이다.
그림 속에 포함된 풍경 부분과 창을 통하여 보이는 풍경 사이의
가벼운 부조화는 - 창문 턱에서 특히 보인다 - <빛의 제국>에서의
밤과 낮의 부드러운 융합에서 얻어지는 경종을 울리는 듯한 당혹감과
비견할 만한 효과를 거두고 있다.

*The Rape, 1934*

*Homage to Mack Sennett, 1934*

*Le Mode Rouge(The Red Model), 1935*

*Collective Imvention(공동의 발명), 1935*

바닷가에 상체는 물고기, 하체가 사람인 생명체가 쓰러져 있다.
인어공주와는 반대의 경우다. 인어공주는 바다에서 육지를 원했고
그래서 상체가 사람이며, 작품의 물고기는 육지에서 바다를
원했기에 상체가 물고기이다. 바다를 원했다는건 자연을 원했다는
것이며, 자연을 원했다는건 바다=자연=본질=존재자 지향을 말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의지와 절대자의 의지가 공동으로 작용해서
현실의 자기 모습이 그림 물고기의 모습이라고 말하고 있다.

*The Human Condition, 1935*

* Clairvoyance (Self-Portrait), 1936*

새의 알을 보며 새를 그리고 있다. 헤르만 헷세의 아프락사스를 향해
날아가는 새도 알을 깨고 나오고, 트리나 포올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
알리는 작품에서도 애벌레를 벗고 나비가 된다. 아프락사스를 향해
날아가는 새나 트리나 포올러스의 작품속 나비 모두 인간을 상징하듯
천리안이라는 마그리트의 작품속 알과 새는 모두 인간을 상징한다.
자고있는 =범인, 날고있는 =거듭난 인간, 애벌레=범인, 나비=거듭
인간, 마그리트는 천리안이라는 작품을 통해서 자신의 작품의
성격을 우리에게 시사한다. , =현실속에서..(미래의현실=
초현실) 그리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천리안이라고 생각했다.
영적으로 엄밀히 말하면 인간이란 생명의 가능성은 있으나 죽은 상태
라고 있다. 가능성으로서의 존재이며 자고있는 상태인 (인간)
들에게 깨어있는 결과로서의 (자유와 생명) 보여주고자 하는 작품
그린 성자 분이 바로 마그리트인 것이다.
마그리트는 혼자 있을때 가끔 성직자의 제복을 입기도 했다고 한다.

*Time Transfixed(고정된 시간), 1939*

*여름, 1939*

문에 의한 공간적 중재는 구름을 지나가게 뿐만 아니라 바다의
이미지와 색깔로 전염되면서 하늘을 문밖에 슬쩍 보이게 하는 시적
중재로 전환되고 있다.

*구름, 1939*

그림 자체가 마치 창문처럼 이해되는 그림에서 산이 많은 풍경
밖으로 나와 있는 구름은 이젤이 있는 실내 공간에까지 확산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효과는 그림과 감상자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은유로서
사용되었다.

*불의 계단, 1939*

마그리트는 이미지 않에서 신비한 암시를 담고 최초로 불을 발견
했을 때의 감정을 재창조하고 있다. 마그리트는 그림이 "작은 두개의
돌조각을 충돌시켜 불을 만들어낸 선인류가 가졌을 동일한 감정을
경험해 있는 특권을 나에게 수여하였다."라고 말하였다.
이런 시적 감정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서 화가는 종이와 타지 않는
대상들을 화염 속에 제시하고 있다.

*Homesickness, 1940*

*La Therapeute, 1941*

*내면의 응시, 1942*

마그리트의 그림에서 변형이 완성에 도달될 있다는 복합적 의미를
나타내는 좋은 예이다. 나뭇가지와 나뭇잎새의 잎막과의 유사성은
나무, 가지, 나뭇잎과 같은 대상들의자연스러운 과나계 속에서 창출
된다. 나무가 아니라 하나의 나뭇잎으로 표현되어 더욱 호소력
있는데 새들과 나뭇잎, 그리고 실내 상황의 비례관계로 인해 화면에
모호함을 증가시키고 있다.

*보물섬, 1942~43*

대개의 경우에 응축은 전이를 매개로 해서 일어난다. 그림은
마그리트가 좋아하는 중첩된 이미지다. 여기서 이미지의 "응축"
나뭇잎의 유선형이 새의 몸통으로 "전이"되는 통해서 일어나고
있다. 마그리트의 그림에서는 , 나무, 그리고 나뭇잎들이 항상 관련
되어 나타난다. 작품에서 새들은 나뭇잎으로 변형되었고 넓은
대양에 있는 상상의 섬과 가지가 무성한 나뭇잎에 신비적 성격을
부여하고 있다.

*•The Sea of Flames, 1945-46*

*장롱속의 철학, 1947*

감추어져야 어떤 신체의 특징을 표현하고 있는 장롱 속의 옷이란
주제는 이미 10년전에 제작되었던 <마크 세네트의 기억>이라는 작품
에서도 나타난다. 마그리트는 발과 신발의 결합에 대해서 "괴물 같은
관습적인 힘이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나타내는 증거물이다"라고
말하였다. 작품에서는 괴기스럽고 해학적인 괴물로 다루어지고
있는데, 결코 다른 초현실주의 작가의 표현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위협
스럽지는 않다.

*기억(Memory), 1948*

마그리트가 이런 주제로 그린 초기 작품들 하나이다.
관자놀이를 다친 고전적 조각상의 머리는 조르지오 카리코의
<
사랑의 노래> 참조하였으며, 부차적으로 로트레아몽의 <말도로르
노래> 참조하였다. 그가 참조한 두작품은 초현실주의의
신비적 요소가 강한 작품들이다.

*The Art of Conversation(대화의 기술), 1950*

마그리트의 그림 모두가 근대적 인간관에 대한 부정이지만, 특징을 특히
드러내는 그림 가운데 하나가 <대화의 기술>(1950)이다. 하늘과 사이에
거석구조가 놓여있고 앞에 작은 사람이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 거석의 아랫부분 가운데께 'REVE'라는 글자가 보인다.
프랑스어로 꿈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거석무더기는 꿈의 구조물이다.
무의식의 구조물이다. 비록 앞의 신사가 아무리 명민한 논리에 기반해
대화를 나눈다 해도 이성을 둘러싼 거대한 구조, 나아가 환경 전체는 무의식
지배를 받고 있다. 그것이 사람의 이성과 논리를 포괄하고 있다.
인간은 인간의식의 자유로운 행위로 생각하고 말하는 같으나, 사실은 그를
둘러싼 '타자(무의식이나 광기는 서구문화에서 타자로서 배척 받아왔다)'
구조, 구조의 법칙을 따라 사고하고 진술하는 존재임을 그림은 폭로한다.
인간은 이상 자유로운 주체로서의 인간이 아닌 것이다.

*Perspective I, 1950*

*Perspective II - Manet's Balcony, 1950*

*The Ignorant Fairy, 1950*

*Personal Values(개인적 가치), 1951-52*

대부분의 초현실주의자처럼 마그리트도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읽었고
초현실의 창조를 부르주아적 현실에 대한 거부와 결부시켰다.
그가 창조한 초현실은 어떠한 원리 위에 지어진 걸까? 프로이트가
말하는 "응축" "전이". 화면에는 화장대(혹은 탁자) 침실이
하나로 응축되어 있다. 하지만 그뿐인가? 벽이 푸른 하늘로 바뀌면
안과 밖도 하나로 응축된다.

*Golconde 1953 *

*L'Empire des Lumieres(빛의 제국), 1954*

마그리트가 제목으로 그린 여러 작품들 몇몇 작품들에서는
그림에 표현된 장면이 호수 주변에 위치되어 있어 속에 반사된
가로등 불빛이 전체 화면의 평범한 효과를 더욱 강화시킨다.
"
빛의 제국" 밤과 낮이 동시에 병치된 작품이기에 마그리트가
아인쉬타인과 대담을 가진바 있다하여 상대성 이론을 거론하면서
해설을 하거나 철학적으로 그림을 해석하려고 하는 학자들이 대부분
이다. 그러나 마그리트는 현실을 넘는 현실 , 초현실(참현실)
그리는 화가이며 철학적 관념을 설명하기 위하여 상징을 도구로 하여
작품을 그리는 화가가 아니라는 것이다. 마그리트는 신자이며 그의
거의 모든 작품은 신앙과 체험 그리고 영적 깨우침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작품 빛의 제국의 설명은 간단하다. 사람이 사는 세상은 높은 건물
이라야 대개 100m이내일 것이다. 인간이란 진정한 자기(절대아)
자기 아닌 자기 속에 갇혀서 시간과 공간 속에 던져진 모순적 존재
이니까 사람이 지배하며 사는 지상 100m이내는 모두 밤이라고
있다. 사람이 살지 않는 이상의 공간은 낮이라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빛의 제국"이라는 작품은 물리적인 빛과 어둠의
개념이 아니고 선과 악의 개념으로서의 빛과 어둠을 말하는 것이기에
낮과 밤의 병치된 상태를 동일한 화면에 그리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거대한 선의 제국을 드러내며 악의 제국인 인간세상의 초라함을
드러내고자 하는 심리가 작품의 제작 동기가 되며 또한 바른 해설
이다.

*The Schoolmaster, 1954*

*Souvenir of a Journey III, 1955*

*유클리드의 산책, 1955*

창문에서 멀리 바라보이는 정경을 이젤 위의 그림으로 대치하는
효과는 이미 알려진 방법이다. 작품에서는 원추형의 탑과 이름
모를 사람이 산책하고 있는 원근법으로 표현된 곧게 뻗은 도로의
표현에 의해 시각적인 모호함을 집약하고 있다.

*El ramillete perfecto(레디 메이드 부케), 1956*

사물을 낯설게 하는 방법 하나인 '패러독스'. 양립할 없는 개의
사물이 그림 안에 사이좋게 들어가 있는 것을 말한다. 그림에서
패러독스는 어디에 있는가? 남자는 지금 '가을' 숲을 지나고 있다.
그러나 여자는 보티첼리의 <프리마베라()> 나오는 '' 여신이다.

*완성된 정의, 1958*

고대 호미관 의상으르 입은 인물은 해리 토르치너이다. 그는 변호사
이자 마그리트의 친구였고 마그리트 작품의 연구자이자 소장가였다.
머리 위에 있는 기구는 인물이 여행하고 있음으로 암시하고 있다.

*야간 보초병의 , 1959*

*아름다운 세계, 1960*

마그리트는 작품과 같은 해에 제작한 < 지오콘다> 매우 유사한
방법으로 화면 위에 덧붙여진 듯한 장면을 그림 속에서 만들어 내고
있다. 개의 연속된 커튼 하나는 구름낀 하늘을 반사하고 있는데
풍경을 경계 지우면서 깊이감을 나타내고 있다.
풍경의 내용과 커튼 주위를 둘러싼 창문에 해당하는 부분들이 혼돈된
그림에 나타난다.

*표절, 1960*

그림속의 장면은 방의 ""인가, 아니면 ""인가? 어느 쪽으로
대답할 수가 없다. 여기서 "" "" 겹처 있으니까.
메를로-퐁티에 따르면, 그림 속의 애매한 세계가 바로 우리가 사는
세계의 진정한 모습이라는 거다. 정말일까?

*기적의 나라, 1960*

화분들은 식물체로서의 특성과 함께 창문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데 화분을 통하여 나무가 있는 풍경이 보인다.
작품은 시각적 평면 위에 은유에 의한 전이가 이루어진 명백한
예가 되고 있다.

*The Waterfall, 1961*

가지 존재(그림 속의 그림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나뭇잎의 존재)
공간 규칙이 서로 다르다. 그러나 이들은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공간 규칙은 중요한 문제가 된다. 이는 속에서 보는 것과 밖에
보는 것을 동시에 그린다는 생각이다. 마그리트는 폭포가 확실
하게 흐르는 회화에 대한 생각을 나타내려고 그림의 제목을 폭포
라고 하였다. 메를로-퐁티는 지각을 사물의 상이 신체 속에서 반복
되는 것으로 본다. 말하자면 지각이 이루어질 , 사물의 "외적인"
가시성은 신체 속에 들어와 "내적인" 가시성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가능한 것은 사물들이 속에 그들의 내적 등가물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사물은 속에 그들의 현존에 관한 "육화
(
肉化) 공식" 새겨놓고 있다. 그래서 세잔은 "자연은 내면에
있다" 말했다.

*Castle in the Pyrenees(피레네 산맥에 있는 ), 1961*

바다와 거대한 헬멧 형태의 바위는 딱딱함, 유연함, 정적, 동적, 무거움
가벼움의 대립을 통해 긴장을 야기시킨다.
마그리트는 그의 고유한 조형 언어로 사용하기 위하여 대립 요소들
그림 안에서 부각시킨다.

*가슴, 1961*

그림은 일련의 복잡한 변화의 결과를 나타내고 있다.
무질서하게 쌓여진 벽돌 모양의 거대한 건축용 사각석은 기능과
관련하여 집들로 변형되었다. 동시에 같은 모양의 규칙적인 집들의
배열은 산더미처럼 산적된 집들의 임의성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아른하임의 영토, 1962*

작품에 대하여 마그리트는 "에드가 알란 포우가 무척 좋아할
예술가적 상상력을 현실화하였다"라고 말하였다. 마그리트의 말에
의하면 산은 " 날개를 펼친 새의 형태 안에서 정확한 형태를 발견
하고 있다." 전경에 보이는 창문 난간 위에 있는 둥지와 안의
알들과의 관계에서 산의 변이가 분명해진다. 감상자로 하여금 마치
밖을 내다보는것처럼 느끼게 하는 환상적인 창문과 같은 역할을 하는
그림들은 마그리트 작품에서 지속적으로 보이는 주제이다.

*거대한 탁자,1962*

*위대한 가족, 1963*

넓은 하늘 안에 하늘을 가로지르며 날고 있는 새라고 시인 앙리 미쇼는
그림에 관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는 실재하는 것과 부재하는
사이의 상호 경계선을 표현한 좋은 예들 하나이다.
거대한 새가 해변(이쪽세상) 향해 날아 오른다. 마그리트의 작품
에서 새와 알은 자주 등장한다. 새는 알과 병립하는 개념으로서 새가
결과(인류의 완성)라면 알은 과정(인류의 역사)이라고 있다.
인류에게 역사라는 시간이 허용된 것은 인간이라는 알이, 새가 되기
위해 허용된 시간이라는, 시간론적 역사관을 작품은 보여준다.
이쪽 세상의 새들과 다가오는 거대한(집단) 새가 합해지면 대가족이
되겠지.. 그래서 제목이 대가족이다. 지금은 거대한 저쪽의 새가
이쪽을 향해 날아오는 시기이므로 모두 자기라는 알에서 깨어나야
한다는 내용이 작품에 있어 마그리트의 의도가 되겠다.
그러나 알에서 깨어난 새도 절대자를 향해 나는 법에 익숙지 않고
또한 실존의 무대는 여전히 이곳이기에 새와 식물이 합해지거나
물고기와 사람이 합해져 해변에 쓰러져 있는 작품들이 등장하게 된다.

*확대경, 1963*

작품은 마그리트가 대상에 의문을 가지고 문제화시키므로 해서
것들을 다루고 있는 명확한 작품이다. 작품에서는 보충적
이고 다른 공간 사이에 위치한 창문의 중재적인 조건에 대한 문제
다루고 있다.

*Le fils de l'homme(The Son of Man), 1964*

마그리트는 개의 다른 대상들, 그러나 형태적으로 비슷한 대상
사이에 있는 상호 교체성의 관념을 암시하고 있다. 그림의 시적 영역
에서 머리와 사과는 서로 비숫한 대안물로서 중첩되어 표현되었다.
<
관념> 또는 <삶의 예술> 같은 다른 여러 그림에서 상호교체의
기법이 완성되었는데 그림에서는 사과와 태양의 표면이 그림
에서 머리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작품 화면을 보면, 중절모를 신사가 있고 푸른 사과가 얼굴 앞에
있다. 푸른 과일만을 바라보게 되겠지. 마그리트 그림에서 사과는
사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공이 첨가되지 않은 천연의 양식"=
"
영혼의 양식" 의미한다. 사람 안에서 선악의 싸움인 대전쟁이
일어난다는 것이 작품의 의미이다. 지극히 단순한 의미이지만
니이체의 말처럼 시적 감상이란 광기와 같은 것이다. 광기 속에서는
감동의 크기가 다르게 전달되어 오기도 하므로 작품이 시시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겠다.

*The Great War, 1964*

*L'Homme au Chapeau Melon*

*이것은 사과가 아니다, 1964*

*The Blank Check(백지 위임장), 1965*

나무기둥 사이의 나뭇잎들의 부분은 뜻하지 않게 나무의 기둥과
말을 나타내는데 말의 궁둥이와 왼쪽 다리는 또한 말이 지나가고 있는
나무들과 공간적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
그림 속에 공간이 있다. 하지만 저런 공간은 있을 없다. 그렇지만
분명히 공간은 있다. 저건 잔인한 공간이다. 에셔와 마찬가지로
마그리트도 3차원 공간의 파괴를 주제로 그림을 남겼다.

*The Two Mysteries, 1966*

<이미지의 반역> < 개의 미스터리>, 그림은 모두 담배파이프를
소재로 하고 있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글귀가 첨가돼 있다.
전자는 그것으로 끝이고, 후자는 이젤 위에 얹힌 그림으로 모습을 표현한
남은 공간 왼쪽 윗부분에 커다란 담배파이프를 하나 그려 넣어 마무리
했다. 그림들은 르네상스 이후 서양미술의 중요한 전통 가지를 깨뜨리고
있다. 그림과 글이 함께 들어가지 않는 전통을 깨뜨렸고, 닮게 그려진 것은
모델과 같은 것이라는 암묵적 합의를 깨뜨렸다. 깨뜨림의 전략 아래는 물론
파이프 그림과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장의 불일치가 있다.
진정 이것은 파이프인가, 아닌가? 우리가 그림의 파이프를 보며 실제 파이프를
자동적으로 연상하는 것은 그것이 기원이라는 관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기원이 존재하는 세계는 자연히 기원을 중심으로 위계질서를 갖는다.
근대에서는 기원의 종국이 인간이었다. 하지만 그림의 파이프가 실제 파이프와
닮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진짜 파이프가 아니다. 그것으로 담배를 피울 수는 없다.
부분을 인정한다면 실제 파이프와 그림의 파이프는 다른 것이다.
그것들은 닮았지만 다르다. 사실 사물들 자체는 서로 기원을 주장하지 않는다.
평등하다. 이렇듯 기원이 무너지면 위계가 무너지고 그러면 결국 인간도 무너진다.

*다정한 진실, 1966*

이미 그려진 그림 위에 다시 그림을 표현하고 있는 다른 방식으로
제작된 작품은 일반적으로 굳어진 시각의 성격에 대한 계속되는
작가의 고찰을 반영한다.

*L'art de vivre(The art of living, 살아있는 예술), 1967 *

작품은 마그리트가 세상을 떠난 해에 그린 작품으로서 걸작
하나이다. 양복을 빠져 나와(인간의 의식의 감옥을 빠져 나와) 온몸의
육체가 머리로(육적인 감각이 영적 이성으로 통제 가능하게 )
변하여 공중에 떠있는 상태(완전 해탈의 상태) 그린 것이다.
상태가 살아있는 진정한 예술이라는 것이다. 미술 음악 문학은
도구가 필요하다. 도구가 없다면 예술도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살아있는 예술은 행위로 이웃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니까
이웃의 얼굴(이성) 직접 그리는 것이다. 美的 理性 상호 충돌과
폭발하는 듯한 행복! 그것이 바로 천국인 것이다. 이러한 천국의
행복을 감지한 마그리트는 같은 해인 1967년에 3 사과를 그리게
된다. 빨강 노랑 파랑=성부, 성자, 성령, 모든 발랄한 행복의 색을
창조 있는 삼원색의 사과=작품 제목이 young love 이니까..
젊은 하느님을 마그리트는 발견하게 된다.

*아름다운 현실*

사과와 테이블 사이의 관계는 비례나 상대적인 위치, 바다 또는
하늘을 배경으로 하여 공기중에 떠있는 듯한 장소 설정 등에서 완전히
도치되어 나타난다. 식탁 위에 있는 먹을 있는 과일로서의 사과에
대한 일반적인 상식은 위와 같은 표현을 통하여 엉뚱하고 파괴적인
역전을 맞이하게 된다.

*마지막 절규, 1967*

일상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서로 연관된 오브제의 중복은 감추어진
비밀의 급박성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드러내는 직유법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Le sihcle des lumihres(좋은 관계), 1967*

개의 전이된 요소들은 하늘에 감추어진 미묘한 우주의 자취인
우의적인 새로운 의미로 융합되기 위해 아이러니하게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얼굴과 맞지 않는 기구라는 사물은 안구라는 새로운
대상의 의미로 융해되고 있는데 이는 하나의 사물이 다른 이름으로
대치되는 마그리트의 창작 원칙 하나이다.

진중권은 마그리트의 작품 세계를 크게 가지 주제로 나눈다.

1.
인간의 조건: 예술을 하나의 소통 체계로 간주한다. 예술적 정보
(
의미 정보와 미적 정보) 발신자는 예술가이며, 예술적 정보가
수신자의 머리에 도달하면 예술적 소통은 완수된다.
예술가는 사물을 어떻게 표현하는 것일까? 세잔은 "자연(원초적 지각
세계=직관) 내면에 있다." 말했다. 메를로-퐁티는 모든 회화는
우리 신체 속에서 일어나는 비밀스럽고 열광적인 사물의 발생을
탐구하는 것이다. 또한 베네데토 크로체(Benedetto Croce: 1866~
1952,
이탈리아 철학자, 크로체는 자신의 철학을 '정신의 철학'이라고
불렀으며, 모든 현실에 내재(內在)하는 정신에는 예술과 논리라는
이론적 활동과, 경제와 윤리라는 실천적 활동이 있다고 보고, 이들
가지 활동은 서로 밀접한 연관성을 갖는다고 생각하였다. 보편적인
것과 개별적인 , 관념적인 것과 구체적인 , 이론적인 것과 실천적
것이 근저(根底)에서 결합되어 있다는 생각에서, 역사는 현실에
대한 철학적 인식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며, 철학은 역사 속에서 생겨나
조건지어지고 가꾸어진다는 역사주의가 나온다는 것이다. 역사를
움직이는 것으로서 윤리와 자유가 강조됨으로써 그의 철학은 강한
실천적 색채를 띠게 된다. ) 예술 작품은 우리 눈앞에 있는 물리적
대상이 아니라, 그건 예술가의 머리속에 있다. 예술은 관조 활동,
일종의 인식이다. 그러므로 예술=직관=표현==언어이다.
현대 예술은 이상 외부세계에서 줄발하지 않는다. 그것의 출발점
예술가의 내면이다. 현대 예술은 내면의 직관을 밖으로 표현하는
데서 성립한다.

2.
말과 사물: 우리의 진리 기준들은 악순환에 빠져 있다. 합리적인
방법으론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없다. 에셔의 그림에서도
보지 않았던가. 대응설도 합의설도 정합설도 우리의 진술이 사물의
참모습과 일치하는지 보장해주지 못한다. 어떻게 하면 "이상한
고리"에서 빠져나올 있을까? 하이데거는 사물이 "고리"
깨뜨리면서 우리에게 직접 자신의 참모습을 드러내는 경우가 있다고
말한다. 신비스런 일이 벌어지는 곳이 바로 언어, 그리고 예술이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니까. 하이데거가 염두에 두는 물론 철학적/
과학적 언어가 아니다. 사물의 참모습을 드러내는 시적(詩的)
언어다. ? 아마 시어가 칼리그랩적이기 때문이리라.
사물을 가리키는 데는 가지 방식이 있다. "이름 붙이기" "그리기"
. 칼리그램에선 둘이 하나가 된다. 여기서 언어는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동시에, 사물의 모습을 보여준다. 마그리트도 칼리그램을
좋아했다. 하지만 그의 목적은 다른 있다. 그의 그림에선 언어의
존재는 가출해버렸다! (ex: "이미지의 배반", "이것은 사과가 아니다")

3.
사물의 교훈: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에 따르면 우린 친숙한 사물엔
주목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것들은 무의식중에 흘러가버리는
"
죽은 사물"이다. 죽은 사물을 "되살릴" 수는 없을까? 하이데거는
예술 작품이 그걸 있다고 보았다. 예술은 사물의 참모습을
드러냄으로써 망각된 존재를 일깨워준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도
예술로 죽은 사물을 부활시키려 했다. 하지만 거기엔 어떤 특별한
방법이 필요하다. 낯설게 하기! 사물을 낯설게 만들 비로소 우리는
거개에 주목하게 된다. 이때 죽었던 사물들은 찬란하게 부활한다.
그냥 보고 지나쳤던 사물들이 실은 얼마나 오묘하고 신비한 존재인가!
하지만 마그리트는 달리처럼 일부러 기괴한 형상을 창조하지 않는다.
그가 소재로 사용하는 것들은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있는 일상적
사물들이다. 난로, 과일 쟁반, 나무, 사과, 유리잔, 구두....
우리가 흔히 보는 일장적 사물들을 "낯설게 "으로써, 그는 특유의
초현실주의적 효과를 얻어낸다. 여기엔 가지 방법이 있다.
(1)
고립 - 어떤 사물을 원래 있던 환경에서 떼어내 엉뚱한 곳에 갖다
놓는걸 말한다.
(2)
변경 - 이는 사물이 가진 성질 가운데 하나를 바꾸는 것이다.
무거운 바위에서 중력을 제거한다든지...
(3)
잡종화 - 가령 물고기의 상체에 사람의 하체를 결합한다든지
또는 () 나무 밑둥을 결합하는 것이다.
(4)
크기의 변화 - 사물의 크기만 바꾸어놓아도 놀라운 효과를 얻을
있다.
(5)
이상한 만남 - 평소엔 만날 없는 사물을 나란히 붙여 놓는
거다.
(6)
이미지의 중첩 - 사물을 하나의 이미지로 응축하는 거다.
프로이트는 응축을 꿈의 경제성과 연결했다. 동일한 길이 안에
되도록 많은 정보를 담는 방법이라는 거다. 카프카의 작품엔 적어도
가지 이상의 의미가 응축되어 있다. 조이스가 여러 나라 말을
조합하여 새로운 말을 만들어낼 , 단어는 수많은 뉘앙스와 이미지
응축이 일어나는 축이 된다. 이는 물론 작품이 가진 정보량을
엄청나게 증가시킨다.(ex: "붉은 모델")
(7)
패러독스(이율배반)- 양립할 없는 개의 사물이 그림
안에 사이좋게 들어가 있는 것을 말한다.
에셔와 마그리트는 모두 인간 사유의 패러독스를 작품에 담으려 했다.
하지만 역설적인 상화을 만들어내는 데에 사람은 서로 다른 방법
사용했다. 대개 에셔의 패러독스는 "통사론적" 규칙을 깨는 데서
비롯된다. 문장에 비유하자면, 애초에 문법 타체가 틀린 그림이다.
하지만 마그리트의 패러독스는 대개 "의미론적" 차원의 것이다.
말하자면 문법적으로는 맞지만 의미가 이상하다는 얘기다.
가령 "물고기는 다리가 둘이다." 문장은 문법적으로는 올바르지만
현실에선 이상한 의미를 갖는다. 에셔의 패러독스는 인간 사유의
문법, 논리를 깨는데 있다. 사유의 "형식" 들어 있는 패러독스
셈이다. 반면 마그리트의 패러독스는 사유의 내용, 의미를
깨는 있다. 사유의 "내용" 가진 패러독스인 셈이다.
에셔는 수학과 논리학과 같은 형식 체게에 관심이 있었고, 마그리트는
철학, 특히 실재론과 관념론의 대립에 관심이 있었다. 사람의 작품
세계의 차이는 여기서 비롯되었을 거다. 어쨌든 사유의 형식에서든
내용에서든, 우리는 어쩔 없이 이상한 패러독스에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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