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미술사 참고자료/초현실주의

서양미술사64 초현실주의: 막스 에른스트, 호앙 미로

AH101 2012. 2. 16. 22:13
반응형

   

서양 미술사 - 64(초현실주의: 막스 에른스트, 호안 미로)

- Download #1 : ernst3.jpg (50.9 KB), Download : 0

- Download #2 : ernst1.jpg (30.1 KB), Download : 0

   

   


막스 에른스트(Max Ernst:1891~1976)

독일 초현실주의 화가이자 조각가 막스 에른스트(MaxErnst:1891~1976)
쾰른 근처의 브륄(Bruehl)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정신의학을 전공하기
위해 본에 있는 대학에 들어가 철학을 배웠는데 그것은 그가 나중에 화가가 되었
철학적인 깊이가 있는 그림을 많이 그리는데 바탕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때문에 그를 '철학파 화가'라고 부르기도 한다. 에른스트가 화가로
전향한 것은 매우 흥미롭다. 근교에 정신병 환자를 위한 요양소가 있었는데
그가 실습강의를 들으러 갔다 환자들이 그린 그림이나 조각들을 보고 매우
감동을 받아 결국 정신의학을 저버리고 미치광이 못지 않은 환상적인 작품을
그리는 화가가 되기로 결심, 독학하다시피 하여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1919 쾰른에서 J. 아르프(Jean Arp:1886~1966) 등과 잡지《통풍기
(
通風機)》에 의해 다다이즘을 일으켰고, 1922~1942 파리에 거주하면서
최초의 꼴라쥬전을 열었으며(1920), 1924 이후로는 초현실주의에 적극
가담하였다. 에른스트는 잠재의식을 화면에 정착시키는 오토마티즘을 원용
하였지만, 프로타주(Frottage) 고안하여 새로운 환상회화 영역을 개척하
였다. 1941 2 세계대전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뉴욕에 살면서
활발한 제작을 하였다. 그는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부족의 미술과 인디언의
신화, 에스키모의 원시 미술 등에서 영감을 얻어 원시적 성향을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미국 체류 현대미술 수집가인 페기 구겐하임(Peggy
Guggenheim:1898~1979)
결혼하였으며, 1951 베네치아 비엔날레
에서 대상을 받아 대가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수상으로 상업주의에 굴복
하였다는 이유로 정통파 초현실주의 그룹에서 제명 당하였다.

당시 초현실주의 운동에 참여한 화가는 많았지만 에른스트가 없었다면 초현실
주의 미술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훗날 많은 평론가들은 말한다.
에른스트는 자신의 의식의 본질적인 특성을 분명히 '보고' 있었으며 꼴라쥬,
프로타주는 이를 실행에 옮긴, 자신의 성향에 의해 성취될 있었던 발견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의 꼴라쥬 작품들과, 꼴라쥬로부터 시작된 작품 전체는
아주 다양한 영역들에서 끌어온 삽화들에 질문을 던지고 그것을 변형시키는
과정에서 나온 것들이다. 꼴라쥬는 큐비스트들에게는 하나의 기법, 형식적
방법이었지만 에른스트에게 있어 꼴라쥬는 도상학적 요소였다.
그의 꼴라쥬 작품들이 주는 매력은 거의 인위적으로 보이지 않은 만큼 조심스런
조작을 통해, 우리가 현실에서 전혀 눈치채지도 못하고 묵묵히 더불어 살아가는
진부한 일상의 세계를 인위적인 인과관계에 따라 장악하려는 기도들로부터
벗어나게 하는데서 오는 것이다. 프로타주 또한 마찬가지이다. 에른스트는
문지르는 대상의 구도가 구조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회화적 대상에 종속
함으로써 프로타주는 객관성을 가지게 된다고 했다. 실재의 평면은 존재
한다. 회화적 대상과 무관한 어떤 것에 한번도 표현된 적이 없는 회화적 대상과
조우한다. 이러한 초현실적 주제와 새로운 기법간의 모순이 있다.
에른스트는 언제나 이미 존재하고 있던 질료에서 영감을 얻어 출발하여, 그것을
사고 속에서 오랫동안 숙성시킨 다음, 다시 새롭게 변형시킨다. 이때 결정적인
것은, 작품을 구성하는 요소들 사이에 그가 의도적으로 설정해 놓은 거리이다.

거대한 비전의 세계를 창조해 사람, 바로 에른스트가 초현실주의를 상징하는
인물로 평가받게 것은 무엇보다도 이러한 거부의 정신을 통해서이다.
초현실주의 운동에 관여했던 예술가들이나, 초현실주의의 원칙들을 그대로 작품
베껴내고 있는 어떤 예술가도 에른스트만큼 독자적이고 정의내리기 힘든
작품을 만들어낸 사람은 없었다. 1918 전쟁에서 돌아온 막스 에른스트는
자신이 서야 곳을 '회화를 넘어선' 자리로 설정한다. 해방기에 나타난
초기 작품들은 모두 기존의 스타일과 작업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것이었다.
그의 작품들은 서로 비교할 있는 지속적인 특성을 전혀 보이지 않고 있어서,
우리는 작품들 속에서 이후 그가 표명하게 거부의 원칙들의 근거를 찾아볼
수도 있다. 미술관이나 평단이 그에게 공공연히 드러낼 적대감-'나는 비평가들
기쁘게 재간을 갖지 못했다.'- 그가 오십년 넘게 기존의 예술적 규범들
이나 이데올로기에 대해 얼마나 높은 거부의 장벽을 쌓고 지내었나 하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우리의 20세기는 아주 뒤늦게야 그가 해낸 거대한 공적,
순수한 창조 작업과 마찬가지로 우연한 대상들을 일정한 거리화를 통해
냉소적으로 변형시켜 효과를 얻어내는 작업 역시 예술적인 방식일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양자 사이의 길을 놓은 공적에 대해 가치를 인정하게
된다.

에른스트는 미리 어떤 결과를 염두에 두고 작품을 만들어내지는 않았다.
여기서 예술가적 심성이라기보다는 존재 방식으로서의 심성(비예술가적 심성),
예술의 발전이라는 한정된 시점에 머무르지 않고, 빈약과 반성적 회귀를
통해 스스로를 완성해 나가는 존재 방식을 엿볼 있다. 에른스트의 작품들은
모두 자체 문제 제기적인 주제들을 담고 있다. 그의 작품 속에 표현된 자연
우주는, 그것이 재현된 방식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예술가가 내용에 가한
변형을 통해서 현실적인 효과와 비현실적인 효과를 동시에 성취해 낸다.
그렇다고 에른스트가 자신이 선택한 주제를 변형시키는 방식에 있어 스타일적
측면에서만 매달리거나 변형, 혹은 변형을 통해 나타나는 표현성에 치중
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의 작품들은 상상 속에서 배양된 주제들이 기법
이라는 형식과 만나게 되는 일종의 집중의 장소이다. 기법화 과정에서 드러
나는 전통과 개혁 사이의 거리는 실상 실재와 그것의 재현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에 대해 다시 보는 작업이라고 있다.
바로 점에 에른스트의 혁명성이 있다.

Aquis Submersus, 1919

Hat in Hand, Hat on Head, 1919

Little Machine Constructed by Minimax Dadamax in Person, 1919-1920

The Hat Makes the Man(모자는 인간을 만든다), 1920

카탈로그에서 잘라낸 여러 가지 모자 그림들을 병렬시켜 제작하였다.
연필 잉크, 수채화 물감을 사용하여 꼴라쥬로 완성하였다.

Untitled, 1920

Katharina Ondulata, 1920

The Elephant Celebes, 1921

Woman with Umbrella, 1921

A Friends' Reunion, 1922

Oedipus Rex, 1922

Ubu Imperator, 1923

The Equivocal Woman(also known as The Teetering Woman), 1923

Men Shall Know Nothing of This, 1923

인간은 아무것도 모르리라

에른스트가 철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이런 그림이 태어날 있었을 것이다.
그림은 각기 관계가 없는 물체의 이미지가 합쳐져 있어서 수수께끼와도
같다. 그는 그림에 대하여 '손이 땅을 감추고 운동으로 땅은 섹스로서의
중요성을 띤다.' 말했는데 일상생활에서 보는 것이 난데없는 뜻을 가진다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Pieta or Revolution, 1923

At the First Clear World, 1923

에른스트가 시도한 작업은 묶은 책자들을 잘라 여러 가지로 구성하여 공상적인
하나의 형을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같은 사물의 시적인 재해석은 다다의
기본 이념을 지속한 것으로 '무관계한 개의 내용을 무관계한 하나의 화면에
같이 부착함에 의해 강렬한 시적 경이' 일으킨다는 꼴라쥬의 테크닉으로서의
쉬르레알리즘의 중요한 방법으로 발전되고 있다. 뚫려진 판자와 , 이상한
식물, 도마뱀 같은 곤충이 화면 속에 공존하고 있는 작품은 어떤 불안한
드라마가 연출될 같은 기묘한 감정을 자아내게 한다. 화면 왼쪽 판자에 붙어
있는 도마뱀과 가운데 뚫려진 창을 통해 나와 있는 여인의 손이 끈과 구슬에
의해 미묘하게 연결되어 있다. 손가락 사이에 끼어 있는 구슬과 도마뱀 꼬리
연결된 줄이 무언가 예기치 않은 사태를 빚어낼 같은 예감을 주는데,
개의 이상한 식물도 기묘한 장면을 효과있게 연출해 주고 있다.

Saint Cecilia(Invisible Piano), 1923

Two Children are Threatened by a Nightingale, 1924

나이팅게일에게 위협 당하는 아이

작품은 분명 회화인데 그림 실제 사물이 부착되어 있다. 나무로 집과
형태가 보인다. 이렇게 미술작품에 실제 사물을 부착하는 방법을 앗상블라쥬
(assemblage)
라고 한다. 이런 요소들을 사용함으로써 그림과 액자틀의 경계
아주 모호해지는 것을 있는데, 에른스트는 그림틀에 작품의 제목을
적어 놓고 있다. 2명의 어린이가 나이팅게일에 놀랐다. 제목은 에른스트가
그림을 그리기 며칠 전에 읽은 시에서 따온 것이다. 그림을 그리기도 전에 제목
결정해 놓았다는 것은 다소 이례적인 일이다. 왼쪽 중단에 보일듯한 조그마한
새가 어떻게 아이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을지, 현실적으로는 쉽게 이해할
없는 비합리적인 공포이다. 그리고 지붕 위의 아이를 안고 달아나는 인물은 누구
일까? 초현실주의 미술의 목표는 인간성의 진정한 근원인 환상, , 상상 등을
열어 보이는 것이다. 외견상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는 꿈과 현실의 상태들을
일종의 절대적 현실로 용해시킨 것이 말하자면 극대화된 현실세계요, 초현실
(super-reality)
이라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초현실주의자들은 미술이 질서정연
하고 합리적인 문화양식에 대항하도록 하였으며, 인간의 무의식 속에 잠재해
있는 광기, , 환상, 욕정, 컴플렉스들을 해방함으로써 정신의 완전한 자유를
얻고자 하였다. 이러한 실천에 있어서 초현실주의자들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던
것은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입문>이다.

The Beautiful Season, 1925

The Virgin Spanking the Christ Child before Three Witnesses, 1926

The Kiss(Le Baiser), 1927

Forest and Dove, 1927

Forest(), 1927

에른스트는 자주 숲을 그렸는데, 숲은 매우 빽빽하게 채워져 있고 불길하기
까지 것이었다. 태양이 위에 비치지만 숲속까지 파고들어 가지는 않았다.
때때로 그가 그리는 도시들도 이렇게 보인다. 그림들은 미묘할 정도로 소름
끼치게 하며, 우리가 그것들을 탐색하려고 하면 할수록 그만큼 악몽이 되고
만다. 에른스트에게 숲은 상상을 위한 완전한 장소로 혹은 사람이 죽음의
위험에 놓여 있는 장소로 묘사되고 있다. 에른스트가 숲에 처음 들어갔을 때는
환상과 공포가 뒤섞이는 감정을 느꼈다. 첫눈에 그림들은 장식 정도의 흥미를
끌지만, 점점 음산한 속성을 분명히 드러낸다. 에른스트의 숲은 독일의 낭만
주의 화가 프리드리히 작품에서처럼 상징으로 가득차 있지만, 에른스트의 상징
물은 전래적인 것이 아니어서 분석하기가 쉽지 않다. 상징물은 에른스트
자신의 상상에서 나온 것이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맞출 것인가에 대한
여부가 우리들에게 맡겨져 있다는 어려움이 있다.

Fishbone Forest, 1927

Snow Flowers, 1929

The Postman Cheval, 1932

The Entire City, 1935-37

L'Ange du Foyeur ou le Triomphe du Surrealisme, 1937

The Robing of the Bride, 1939

그림은 데칼코마니아(decalcomania), 전사법을 사용한 그림이다.
종이에 물감을 바른 , 접었다가 펴게 되면 이미지가 중첩되거나 2배로
늘어나 처음에 내가 그렸던 것과는 아주 다른 그림이 되곤 하는데 이것이
데칼코마니아의 가장 쉽고 흔한 방법이다. 이런 방법을 사용하게 되면
작가가 의도하지 않은 우연적인 이미지가 생겨나게 된다. 이미지에서
작가는 전혀 새로운 형상을 연상해 내었다. 에른스트의 작품 가운데에는
나체의 여인과 다른 동물이나 새의 형태가 복합되어 있는 기묘한 이미지의
형상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신부로 보이는 가운데 여인 역시 올빼미 머리를
가진 나체로 등장하고 있다. 나체와 거대한 망토, 그리고 불길한 새의 결합이
자아내는 화면 분위기는 조만간 어떤 사태가 일어날 것만 같은 예감을 자아
내게 한다. 여기서도 엉뚱한 물체끼리의 우연적인 만남을 통해 경이를 만들어
내는 쉬르레알리즘의 미학을 엿볼 있다. 미세한 화면의 질감과 특이한
영상이 더욱 콜라주의 효과를 높이고 있다.

The Antipope, 1941-1942

The Eye of Silence, 1943/44

Vox Angelica, 1945

Design In Nature, 1947

Capricorn, 1948/Bronze Sculpture

The Garden of France, 1962


호안 미로(Joan Miro: 1893~1983)

Self-Portrait, 1919

1893 스페인 카탈루냐(Catalonia) 지방 바르셀로나(Barcelona)에서 출생한
호안 미로(Joan Miro:1893~1983) 상업학교를 나와 사무원으로
일하다 부모의 반대에도 미술학교에 입학하였다. 처음에는 야수파의 영향을 받았
으며 피카소를 알고부터는 풍경화와 인물화를 그렸다. 파리에서 입체파적인 작품을
내기도 했으나 초현실주의적 작품을 주로 그렸다. 미로의 초기 작품들은 20세기
초반 바르셀로나의 조셉 달마우 화랑 주변에서 계속적으로 전시된 프랑스 현대 회화
새로운 사조들-후기인상주의, 입체주의, 야수파- 영향을 받아 제작되었다.
청년 시기에는 어떠한 아카데미즘적인 운동도 알지 못하였고 고전 작품도 전혀 알지
못했다. 미로는 화가로서의 길을 고전 미술보다는 초기 아방가르드 사조 중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요소들을 배우면서 시작하였다. 고전적인 화법을 익히고 있던
1919
파리로 와서는 1924 경에 초현실주의자들과 알게 되면서 작품에 환상적
요소가 등장하게 된다. 클레와 칸딘스키의 영향을 받은 그의 예술은 구상의 수법
에서 떨어져 나와 많은 기호들의 세계 속에서 전개되었다. 기호들에서 선이나 색채는
어린 시절의 상징들과 직접적인 서정성을 나타낸다. 그림을 그릴 창작의 재료
에서 느끼는 감동에서 시작하여 정열속에서 작업을 이루어 나아갔다. 예를 들어 한참
작업에 몰두하다가도 때때로 한달 동안 캔버스에 손도 안대고 내버려둔다.
어느날 다시 캔버스를 꺼내고 냉정하게 장인처럼 작업을 시작한다. 호안 미로를 단순
초현실주의자로서만 한정해서 설명할 없는 이유는 그가 초현실회화의 중요한
기법인 자동기술법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그의 그림은 무의식이나 꿈의 내용을 기술한
것이 아니라 고전적인 재현화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었기 때문이다.
초현실주의가 막을 내린 1940 이후에도 계속해서 자신의 기법을 고수해 나가면서
자신만의 사조를 완성해 나아갔다.

"
기차는 멈추지 않는다."
미로는 쓰레기더미에서 문구가 적혀진 녹술고 오래된 철도 표지판을 발견했고,
문구를 자신의 계획으로 삼아 작업실 벽에 걸어놓았다. 카탈루냐 화가의 삶과 작품
특징짓는 것은 멈추지 않는 창작력과 생명력으로 충만한 다채로운 이미지를 만드는
탁월한 능력이다. 다양한 미술의 흐름과 아방가르드 운동, 특히 초현실주의와 교류했지
, 미로는 독자적인 경향의 작가로 남았다. 1919년에 카탈루냐를 떠나 파리로 미로
그곳에 오랜 기간 머무르면서 같은 스페인 출신인 피카소, 다다이스트인 트리스탄
차라, 1921년에는 초현실주의를 포함한 다양한 아방가르드 운동의 일원들과 교류하게
되었다. 시기 그의 작품은 초상과 시골의 풍경 구상적인 주제를 다루었지만 점차
추상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미로는 본능과 기억, 잠재의식의
심연을 파악하려는 불안정하면서도 쾌활한 파편들을 독창적으로 조합해 나갔다.
2 세계대전과 스페인 내전의 엄청난 비극에서 자극받은 미로는 오려내기와 꼴라쥬
같은 새로운 스타일과 재료들을 실험한다. 흥미로우면서도 시적인 <성좌:Constella-
tion>
연작은 극적인 단계를 거친 시작되었다. 미로의 전시는 미국에서 엄청난 성공
거두었다. 그의 자유롭고 창조적인 스타일은 뉴욕 화파의 화가들, 특히 잭슨 폴록에게
강한 영향을 주었다. 1950년대에 조각, 거리미술, 대형 장식 작업에 집중하던 미로는
<
파랑> 연작을 계기로 다시 회화작업으로 돌아왔다. 1976년에는 미로 재단이 바르셀로
나에 설립되었다. 이곳의 훌륭한 컬렉션은 20세기의 위대한 미술가의 정열적이고 다양한
창조력을 보여준다.

Still-Life with a Rose, 1916

North-South, 1917

그림에 잡지의 제목을 사용하는 것은 미로가 입체주의 작가인 피카소와 브라크의 초기
작품에서 차용한 것이다. 미로가 프랑스 잡지의 이름을 제목으로 사용한 <노르드-수드>
화면의 몇몇 부분에서 들로네의 태양의 표면들을 연상시키는 폭발하는 듯한 색상과
두꺼운 붓질을 통해 야수파적 경향을 드러낸 작품이다. 또한 정물들의 표현은 세잔느
영향을 받았으며 그림 속의 제목이나 글자의 사용은 피카소, 조르주 브라크와 후안
그리스의 입체주의 회화의 영향을 나타낸다.

The Village of Prades, 1917

Portrait of E.C. Ricart, 1917

모델 E. C. 리카르트는 미로가 가리의 교실에서 알게 젊은 화가로서 바르셀로나 시대
아주 가깝게 지낸 친구이다. 시기에 미로는 리카르트의 초상화뿐만 아니라,
외에도 친구들을 모델로 여러 점의 초상화를 남기고 있다. 초상화는 중의 하나
이다. 당시 피레네 산맥 저쪽 파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가지 경향에서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을 작품에서 엿볼 있다. 얼굴의 처리에서 입체파의 영향을 있으며,
배경의 우끼요에는 실제의 화면에 붙인 것으로서 빠삐에 꼴레(붙이는 ) 영향이 보이
, 콘트라스트가 강한 원색들이어서 야수파의 영향을 받고 있다.
좌상의 파레트는 훗날 미로의 기호와 같다. 전체적으로 화면은 장식적인 시각 효과를
강하게 나타내고 있다. 그의 초상화 연작 중에서 이색적인 작품이다.

Portrait of Juanita Obrador, 1918

Still-Life with Coffee Mill, 1918

Vegetable Garden with Donkey, 1918

Montroig, Village & Church, 1919

The Farm(농원), 1921-1922

미로의 작품에서 주도적인 내용은 마치 나무가 뿌리를 통하여 대지에서 에너지를 취하듯이
초자연적 힘과의 연관성에 있다. 비록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났지만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고향인 타라고나의 코르누데야에 자주 방문하였고, 그의 가족이 구입한 농장이 있는 몬트
로이그와 어머니가 태어난 곳인 마요르카 역시 자주 방문하였다.
화가의 상상력에 영향을 이상화된 전원의 세계의 섬세한 묘사 때문에 그는 자주 세밀
화가로 분류된다. 1918년과 1924 사이의 연작 그림은 시골 농장의 모습이 힘있게
분출되고 있다. 풍경과 다양한 대상들에서 대지의 신비한 에너지가 단조롭고 강한 빛과
함께 나타나고 있다. <농원> 그가 파리 여행에서 돌아와서 그린 그림으로 1924
그의 초현실주의 시기가 시작되기 바로 전에 제작한 작품들 절정을 이루는 그림이다.

Nude with Mirror, 1919

The Carbide Lamp, 1922/23

Catalan Landscape:The Hunter, 1923-24

피레네 산맥 너머 남프랑스와 접근하고 있는 지방은 스페인을 대표하는 미로와 달리의
출생지이다. 카탈루냐 사람이라 칭할 유별나게 독립심이 강하고 이곳 특유의 풍토
환경이 복합되어, 사람의 반문명적이며 초현실주의자를 낳고 있는 것이다.
같은 카탈루냐 풍경이지만 <농장>과는 다른 카다란 비약을 엿볼 있다.
그림을 비교해서 <농장>에서는 눈에 보이는 외부적인 대상에 충실하였다면
<
카탈루냐 풍경>에서는 흡사 매미가 허물을 벗듯 껍질을 벗어 내던지고 이면의 세계를
나타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미로의 시선에 비친 풍경은 엑스선을 투과한 육체
같이 변모하고 미로의 내적 환상에 의해서 역조명되고 있다.
가지 색채로 나누어진 화면은 하늘과 땅을 암시한다. 오른쪽 하단 모서리의 글자
'sard'
작품 아랫부분의 가는 뼈를 드러낸 정어리를 지칭하고 있다.

The Tilled Field(경작된 토지), 1923/24

The Harlequin's Carnival, 1924-25

1924
파우 가르가요가 미로에게 양도한 파리 블로메 거리의 작업장에 살고 있을
미로는 시인 앙드레 부르통 주변에서 초현실주의의 그룹을 형성하게 다다적 경험을
화가와 시인들의 그룹과 교류를 갖기 시작하였다. 미로는 결코 전형적인 초현실주의자는
아니었다. 예술적 재료로서 꿈과 무의식의 세계를 합법화한 초현실주의가 그에게 제공해
예술적 가능성의 힘과 세밀화 시기 동안 내재해 있던 민속적이고 마술적인 요소들을
종합하면서 그는 자신만의 독특한 회화적 표현방법을 자유롭게 사용했다.
<
농원> 단순하게 번안한 작품인 <경작된 토지> <카탈루냐의 풍경> 이어 <어릿
광대의 사육제> 작품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발전된 새로운 경향으로의 전환을 보여주고
있다. 상상과 무의식의 세계는 그림의 목적이 아니다. 미로에게 있어서는 그림 안에 자신
기억과 살아 있는 경험을 표현하기 위한 회화적 중재로서의 도구이다.

파리 피에르 화랑에서 개최된 초현실주의 전시에 출품한 작품이다. 기묘한 모습들은
그가 초현실주의적인 분위기에 얼마나 크게 경도 되었는지 보여준다. 배경은 창문과
테이블이 있는 실내 정경이지만 방안을 가득 메우고 있는 형상들은 연체동물과 같은
기이한 모습들을 하고 있다. 환상적인 축제에서는 이상하게 생긴 개체들이 화가의
빼곡하게 들어가 기쁨으로 가득한 춤을 추고 있다. 그림 중앙에서는 할리퀸 꼭두각시
인형이 기타 반주를 하는 중이다. 흡사 현미경을 들여다보는 듯이 여러 가지 미생물들과
같은 유기체들이 둥둥 떠다니거나 바닥에 놓여 있다. 미로가 초현실주의 시기에 그린
그림으로, 구상에서 추상으로 가는 과도기의 작품이다. 미로의 이러한 오브제들은 1928
년에 그린 <네덜란드 실내 1>에서 다시 한번 반복된다.

Person Throwing a Stone at a Bird, 1926

1926
년의 여름에서 다음 해인 1927년에 걸쳐 미로는 몽리치에 돌아와 카탈루냐의
자연과 미로의 꿈이 여기에서 새롭게 융합되어 일련의 '꿈의 풍경' 시리즈를
그리고 있다. 작품은 '꿈의 풍경' 비교적 초기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거대한 발을
가진 사나이( 발은 미로가 대지와의 연계성을 잃지 않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임) 단순화 되어진 새에게 하얀 돌을 던지고 있다. 혹과 같은 육지의 개의 돌출
부는 빨갛게 칠해져 있는 데서도 있듯이 몽리치의 바위를 나타내고 있는 듯하다.
남자의 손은 하나의 선으로 되어 돌이 날아간 흔적이 하늘을 깁고 있다.
미로는 도시의 밀실적인 환각과 대자연에 묻혀서 보는 꿈과의 개의 세계를 왕복하고
있다.

Dog Barking at the Moon, 1926

Nude, 1926

누드라고 말하나 하얀 인어와 같은 입상이다. 종횡의 점선은 조형적인 요소로 있는 것과
동시에 누드의 해부를 나타내고 있는듯 하다.인간을 물고기나 야채나 과일 등으로 구성
하고 있는 것이 여러가지 상상을 불러 일으키는 요소이기도 하다.

Landscape(The Hare, 풍경 산토끼), 1927

[Person Throwing a Stone at a Bird]
등과 비슷한 계열에 속하는 작품으로, 화면을
대담하게 양분하여 오렌지색의 하늘과 포도주색을 지면으로 독특한 구도이다.
무대는 대부분의 경우 대자연이나 광막한 우주를 나타내고 있다.
시기에 미로의 작품에 등장되는 주인공은 동물로서 토끼, , , , ,
다양하다. 좌측 중앙의 점선으로 되어 있는 부분은 하늘과 땅이 겹치는 지평선을
중심으로, 꼬리를 길게 나선형을 그으면서 떨어지고 있는 혜성을 나타내고 있는 싶다.
혜성을 바라보는 토끼의 눈알이 빙빙 돌면서 현기증을 느끼는 듯한 표정이야말로 유머
러스하며, 웃음을 절로 자아내게 한다. 작품은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으면서도 그것
극도로 요약된 상태의 문학적 테마를 무리없이 소화시키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들게
한다.

Dutch Interior I, 1928

1928
년과 1929 사이 미로는 17세기의 네덜란드 실내를 그린 거장들의 그림에서
감명을 받아 많은 작품을 제작하였다. ( 작품은 H.M. 소르그의 <루트를 타는 사람>
영향을 받았다.) 짜여진 구성위에 독창적인 인물과 모티브는 형상적인 상형문자로 변형
되었다. 미로는 이런 식으로 꿈의 언어를 실제적으로 변형시키고 엄격하게 회화적 세계로
인도하기 위하여 사용하였다.

Dutch Interior II, 1928

미로는 1928 두주간에 걸쳐 네덜란드에 여행했다. 여기에서 각지의 미술관을 두루
돌아 기회를 가졌다. 특히 그에게 흥미를 갖게 것은 페르메르를 위시한 17세기의
화가들로서 손에 닿을 듯하게 친밀하게 그려진 실내화 들이었다. 그림엽서들을
사가지고 와서 그것을 가지고 그린 그림이 <네덜란드의 실내>이다.
작품은 3장의 연작 번째의 그림이다. 카탈루냐의 <꿈의 풍경> 연작 다음의
것으로 이것을 네덜란드의 <꿈의 실내>라고 있겠다. <새에 돌을 던지는 사람>
카탈루냐의 작렬하는 태양 밑에서 전개되는 환상의 그림들이었다면, 이것은 네덜란드
부드러운 광선이 스며드는 따뜻함을 느끼게 하는 실내화이다.

The Potato, 1928

Portrait of Mrs Mills in 1750 (after Constable), 1929

1750 밀즈 부인의 초상

초상화는 레이놀즈의 제자인 조지 잉글허트의 작품을 근거로 같은 제목의 미로
작품으로 사치스럽게 옷을 입고 많은 보석으로 치장한 18세기 귀부인이 사랑의 편지
읽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여인은 미로의 조형세계에 있어 지속적인 조형언어
하나로, 작품에서는 우스꽝스러운 패러디의 어조로 표현되었다.

Peinture Collage(꼴라쥬에 의한 그림), 1933

초현실주의적 회화 표현에 동화된 미로는 인간의 형상의 독특한 도상을 창조하였다.
1929
년부터 1938년까지 계속되는 색깔과 형태의 구성으로 이루어지는 연작 그림에서
확실하고 자유로운 선들이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또한 그는 꼴라쥬 작업을 통해
캔버스 위에 옮겨 표현하기 위한 새로운 형태를 제시하였다. 아마도 스페인 내전(1936)
조짐이 있었던 동안의 주변 분위기가 화가의 정신 상태를 매우 혼란스럽게
하였는지 시기 그림의 배경은 대부분 어두운 색으로 칠해졌다.
제목이 의미하듯이 미로는 구성을 위해 이전의 꼴라쥬 기법을 사용하였는데, 이런 과정
에서 회화적 표면 위에 형태의 배치를 생각했다.

The Circus, 1934

Swallow/Love, 1934

Personages in the Presence of a Metamorphosis, 1936

Man and Woman in Front of a Pile of Excrement, 1936

배설물의 산을 앞에 남녀

작품은 동판 위에 유채 물감으로 그려져 있다. 1935년에서 36년에 걸쳐 미로는 6
점을 동판에, 6점을 템파라로 메소나이트판에 일련의 그로테스크한 인물상의 시리즈를
그렸다. 형상의 왜곡과 강렬하고 고뇌에 색조의 구성은 세밀하고 조심스러운 초기
작품과 대조를 이룬다. 이러한 패러독스는 미로의 조형 언어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많이
보이는데 특히 결정적 시기의 대표적 작품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Help Spain(스페인을 구하자), 1937

스페인 내란(1936) 게르니카 마을이 폭격되었다는 뉴스에 접한 피카소는 분격하고,
고국에 대한 애정을 누를 없어 화폭에 담은 것이 유명한 <게르니카>이다.
<
스페인을 구하자> 미로의 컬러 스텐슬에 의한 포스터이다. 의연금 모집을 위해
제작된 것으로서, 노동자가 주먹을 굳게 쥐고 눈을 부라리면서 무언가 소리로 호소
하고 있는 듯한 인물은 치졸한 거칠게 그려져 있다. 정치적인 자세를 직접적으로
나타내지 않았던 미로로서는 진귀한 정치적 참가 작품이다. 포스터의 아래 부분에
다음과 같이 씌여져 있다. [현재의 싸움에 있어서 나는 프랑코측의 시대 착오적인
폭력을, 반대측에는 창조적이지 못한 원동력을 갖고 스페인을 격동 속으로 몰아가는
인민을 본다. 힘은 세계를 놀라게 하고 있다.]

Still-Life with Old Shoe, 1937

Head of a Woman, 1938

A Dew Drop Falling from a Bird's Wing Wakes Rosalie,

who Has Been Asleep in the Shadow of a Spider's Web, 1939

새의 날개에서 떨어진 방울의 이슬이 거미줄 그늘에서

잠자는 로잘리의 눈을 뜨게 한다

1939
7, 미로는 다시 노르망디로 다음 5월까지 체재하면서 정치적인 제작
활동을 계속한다. 가운데 10 가까운 올이 굵은 마포에 그린 작품이 있다.
작품도 가운데 점이다. 우선 길게 붙여진 명제에서 초현실주의 시를 읽는
같은 느낌이 든다. 꺼칠 꺼칠한 마포에 그림으로써 선은 더욱 힘차게 나타나고, 칠해
색은 화면에 차분히 밀착됨으로써 심도를 더해 주고 있다. 평소 그가 즐겨 그리던
동물이 기호화 되고, 특유의 포름으로 나타나 화면 전체를 메우고 있는 것이
이채롭다. 미로가 노르망디 해변의 조그마한 마을에 머물면서 성숙됨을 보여 준다.
표현에 있어서 선이나 색채는 힘차고 명쾌함을 더해 갔던 것이다. 이러한 요소가
후에 나타나기 시작한 <성좌Constellation> 시리즈를 이루는 결정이라 하겠다.

Painting

작품은 굵은 올의 캔버스에 밑칠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린 작품이다. 이러한 기법
원래 마포가 갖고 있는 재질감을 그대로 살리면서 그것을 작품에 이미지 화한다는
데서 흔히 쓰는 기법이다. 미로의 작품에서는 어울리는 재료의 선택이라 하겠다.
까만 선으로 그려진 윤곽은 더욱 명확하고 힘차서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다. 빨강, 노랑,
하얀 색들은 원색 그대로 면에 빈틈없이 칠해져 방법론적 의미에서는 어떤 작품보다
이지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들판에 한가롭게 노니는 , 연못 속에 두려움 없이 헤엄
치고 있는 물고기, 얼굴에 웃음을 한껏 머금고 자연을 바라보는 평화로운 아이, 모두
꿈속에서 보는 듯한 목가적인 풍경이다. 작품 처리에서 보여 딱딱한 기법과 환상
적인 이미지가 하모니를 이루어 하나의 전원 교향곡의 세계로 이끈다.

밤의

1939
년의 여름, 미로는 노르망디 지방으로 전화(戰火) 피해서 피난하였다.
평소에는 파리의 시인이나 예술가의 피서지로 알려져 있는 이곳에서도 미로는 붓을
멈추지 않고 제작에 몰두한다. 작품도 미로에 의한 여체의 변모극의 하나이다.
미로의 데포르마숑에는 언제나 커다란 자연에의 합체를 암시하는 미소와 우아함을
갖고 있다. 여체에는 물고기나 나무 열매를 닮은 유방과, 어린아이들의 낙서 같은
데서 있는 섹스가 그려져 있다. 에로티시즘은 호색적이라기보다는 자연물
과의 합일감을 준다. 그러므로 여체가 안에 물고기, , 바위나 태양을 갖고 있는
소우주이다. 윗부분의 검정 새의 표정과 포름에서 폭력의 접근이라는 어두운 그림자
드리우고 있는 것이 마치 다가오고 있는 전쟁 시대를 암시하고 있는 듯하다.

The Nightingale's Song at Midnight..., 1940

The Morning Star, 1940

Personages in the Night Guided by the Phosphorescent Tracks of Snails, 1940

The Poetess, 1940

아름다운 새가 연인들에게 미지의 사실을 누설한다, 1941

미로는 1939년에 그의 가족과 함께 프랑스 북서 지방 노르망디의 조그마한 해변 마을인
바른느빌에 정착하나 독일 군대의 진군 때문에 다음해 스페인으로 돌아가게 된다.
적대적 현실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그의 욕망과 지중해에서 쉽게 있는 분위기와
아주 다른 노르망디의 빛과 풍경과의 만남은 1939년에서 1941 사이에 보통 <성좌>
라고 부르는 23개의 작은 크기로 그려진 작품에 조형적으로 아주 표현되어 나타난다.
연작은 우아하고 인간적이며, 전쟁의 야만적인 폭력에 반대하는 감동적인 사랑 노래
순수한 서정성을 보여준다. 별이 총총한 하늘이 엉켜져 있는 선들과 , 우의적 인물,
, 동물들을 암시하는 작은 색깔의 상형문자로 표현되었다. 이것은 두껍고 긁혀진 종이
위에 완성된 <성좌> 연작의 생동감 있고 질감 있는 화면을 더욱 활기 있게 만드는
모티브이다. 우주의 이미지는 화가를 확장되고 상상력이 풍부한 넓은 공간으로 인도한다.
아무리 작품 크기가 작아도 미로는 그것을 캔버스 작품처럼 보이게 했으며, 1941
이후 <성좌> 여러 다른 작품에서 보편적인 그림 구성의 체계로 더욱 발전한다.

Nocturne, 1940

Ciphers & Constellations in Love with a Woman, 1941

Women Encircled by the Flight of a Bird, 1941

Snob Party at the Princess's, 1944

The Bullfight, 1945

The Red Sun Gnaws at the Spider, 1948

붉은 태양이 거미를 문다

1942
미로가 바로셀로나로 돌아왔을 스페인 내전과 2 세계대전의 격동적인
시기는 막을 내린다. 1941 뉴욕 전시를 시작으로 그는 화가로서 자신의 양식을 확립해
가고 20년대부터 형성되고 지속되어 개인적 조형 언어 안에서 회화적 글쓰기도 확고
하게 방향을 잡게 된다. <성좌> 그림의 모든 공간에 형상과 배경을 융합하면서 통일된
화면을 만들어내기 위하여 이용된 작품이다. 1945년부터 미로풍의 기호들은 개성적인
어휘로서 작품에 체계적으로 자리잡는다. 시기의 회화는 화면의 질감과 색채를 융합
하여 아름다운 형상과 배경을 일치시킴으로써 회화적 공간, 자율적인 회화 공간을
정의하고 있다.

Painting, 1950

작품을 통하여 자유롭고 화려한 삶을 노래한 미로의 세계를 본다. 캔버스에 물감을
흘린다거나 스며들게 하면서 한편으로 석고를 발라 거기에 토막된 새끼를 붙이는
자연의 드라마를 느끼게 한다. 미로의 손이 닿은 물체는 생명의 입김을 불어넣은 ,
새끼도 여기에서는 곤충과 같이 꿈틀꿈틀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여러가지 풍부한 표정을 가진 인물들, 새까만 그림자, 문양화된 의복 모두 미로가
즐겨 그리는 세계의 요소이며 우주인 것이다. 1930 대부터 미로는 꼴라쥬를 만들어
왔으나, 거기에는 에른스트류의 고뇌는 보이지 않는다. 미로에게 있어서 물체는 모두
물감과 동화하여 기호로 되어 버리고 만다. 여기에서 보여 물감을 흘리거나 스며
들게 하는 기법들이 50년대에 개화한 [앙포르멜] 먼저 구사하고 있는 감이 든다.

The Dog Barking Awakens the Cock, 1952

종달새를 쫓는 빨간 원판, 1953

Ladders Cross the Blue Sky in a Wheel of Fire, 1953

Dawn Perfumed by a Shower of Gold, 1954

고블랭 타피스리 밑그림

1955
년경부터 미로가 제작에 손대기 시작한 도기, 판화, 조각 등이 모두 다른 사람의
도움과 공동 작업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데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들은 모두 불이나
의해 만들어지고 있고, 여기에는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우연성을 배제할 없으며,
미로는 오히려 이러한 우연성을 높이 사서 작품에 도입하고 있다.
<
고블랭직(프랑스 직물의 일종) 타피스리(장식융단)> 또한 짜는 사람과의 공동 작업을
전제로 한다는 일치한다. 미로는 1934년에 타피스리를 제작하기 위한 밑그림을 그리
있다. 타피스리 작품은 1960년대 후반에 것이기는 하나, 작품 내용을 보면
훨씬 이전에 밑그림은 만들어진 것으로 보여진다. 회화 작품이 타피스리로 짜여졌을
어떠한 효과를 나타낼 있는가에 대해 보여 주고 있는 작품이라 하겠다.

Bleu I, 1961

1961
번째의 미국 여행과 파리의 '메트화랑' 뉴욕의 '피에르 마티스 화랑'에서
전시회를 마치고 미로는 '청색 시리즈' 제작한다.
시기는 앞서 형성된 과거의 조형언어를 심오하게 하고 정제하는 기간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그는 그림들을 선으로 그리고 형성하고, 구성하고 색칠할 예술가에 의해
도달된 자유로움을 반영하고 있다. 그의 추상적 형상은 너무나 개성적이어서 누구나
알아볼 있는 특징을 가지게 되었다. 독특한 단순성에도 불구하고 미로는 사물의
운동과 정지상태를 기호로 설명하고 있는데 예를 들면 진행되는 것은 하나의 선으로써
재현하였다. 선은 일반적으로 가는 선으로 표현되며 안에서 또는 괄호 안에서
정지된다. 최소한의 기호는 마치 에너지의 분출을 막는 하나의 장벽으로 자주 사용
된다.

The Skiing Lesson, 1966

The Lark's Wing, Encircled with Golden Blue, Rejoins the Heart of

the Poppy Sleeping on a Diamond-Studded Meadow, 1967

금빛 후광의 푸른 종달새가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초원 위의

잠자는 아마폴라(양귀비꽃) 심장에 도착했다

미로의 확고한 예술 세계는-그의 지속적인 모색에 의해서 발견된 열려 있는 여러 다른
경로에 대한 확실성-60년대 중반 그의 표현적인 회화기법을 최소한으로 하여 완성한 연작
작품에 나타나 있다. 당시 미로는 그의 신비적 의식(본성) 가장 깊은 곳으로 함몰
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다음 글에서 확인할 있다.
"
나는 자연의 절대적인 내면으로 도피하였다. 나는 나의 얼룩들이 허공의 매력적인 부름에
열려 있기를 바랐다... 나는 비어 있음에, 완전한 공허에 관심을 가졌다."
밝고 진하며, 진동하는 색채의 도그마 안에서 분실되어 버린 태양의 표면, 비행하는 새의
유연한 흔적, 별의 섬세한 선들은 즐거운 내적 성찰을 설명하기 위한 충분한 회화적 장치
였다. 보통 후앙 미로를 초현실주의자로 분류하지만, 미로는 꿈을 그리지도 않았고 또한
초현실주의자들이 무의식을 이성에 의한 통제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자동 기술법
(automatisme)
사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작품 속의 이미지들은 미로 특유의 기호
로서, 시적 발상을 구술하는 어법으로 정제되어 있다.

Daybreak Tagesanbruch(하루의 시작), 1968

미로의 후기 작품들은 풍족한 검은색과 계속되는 점적들, 드리핑 기법을 통한 회화적 표현
들이 마음에 걸릴 없이 풍부하게 나타나며 60년대 이후에 전시된 작품들은 상승하는
리듬감이 돋보인다. 미로는 화가로서 세계적으로 높이 평가되고 유명해졌다.
그의 독창적 예술성과 제작의 즉흥성은 모방할 없는 것이었다. 그의 그림들은 항상
암시하는 대지, 하늘, 여자나 새와 같은 주제들은 이미 20세기의 고전이 되었고, 여러
회화적 방법, 구성의 단순성과 안정된 선이 매우 강렬한 원색에 의해 표현되었다.
이러한 미로의 독창성은 광고, 그래픽 디자인과 같은 다른 분야에도 영향을 주며 자신의
후기 작품의 제작에서도 위와 같은 방법이 사용된다.

Woman at Night, 1970

Les Agulles del Pastor, 1973

Montroig 3, 1974

인물, 1978

미로의 만년의 작품이다. 강직한 필촉과 힘차게 그어진 선으로 태양은 더욱 붉게 불탄다.
작품은 전후(戰後) 액션 페인팅을 연상케하고 있다. 일찍이 그가 즐겨 써오던
이라든가 외의 많은 기호들로 이루어졌던 <성좌> 시리즈가 지워져 없어지면서 보다
직접적인 손의 움직임을 통해 대담한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작품에서는 그가 지금까지 캔버스를 통하여 시도하였던 여러 가지 방법이 종합적으로
결집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힘차게 내리그은 굵은 , 바르고 뭉개고 뿌리는 ,
이렇듯 대담한 시도가 일찍이 그의 작품에서는 없었던 사건들이다.
이러한 작품이 나타나기까지 그에게는 73 동안에 길고 이미지 수렵의 과정이
있었음을 쉽게 보아 넘겨서는 된다.

Lunar Bird, 1944-1946/Bronze Sculpture

The Hirshhorn Sculpture Gardens

호안 미로는 회화의 영역에서 자신의 조형언어를 형성해 갔지만 조각, 세라믹, 태피스
트리와 같은 인접 분야의 작품 제작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이전의 작품에서도 여러
예들을 찾아 있지만 이러한 여러 장르에 대한 그의 열성적인 헌신은 1940년대부터
토대를 굳건히 하고 있다. 그의 특징적인 조형언어가 확고해지고 회화적 작업과 다른
여러 응용 미술 분야를 실험한다. 1915년부터 정기적으로 작은 규모의 작품 뿐만 아니라
규모의 작품까지 활기있게 제작하였다. 도기화에서부터 거대한 장식적 벽화에 이르기
까지 공동 제작된 이러한 작품들은 실험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세라믹 작품과 비슷한
조각에서도 다다와 초현실주의의 전통을 따른 그의 예술성을 보여준다.
일상적인 오브제를 융합시키면서 공간과 양감에 아주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미로는 젊은 시절의 열정으로 모든 응용 미술의 작품제작에 임하였다.
그의 목적은 화가로서 획득된 명성 속에 안주하거나 세속적 유혹에 빠지지 않고 자신만
독특한 조형언어의 지평을 확장하는 것이었다.

Oiseau (Bird), 1968-81/Bronze Sculpture

Personage, 1970/Bronze Sculpture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