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신표현주의(新表現主義, Neo-Expressionism)
1980년대에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전개된
표현주의적
회화
경향을
말한다. 1970년대
회화의
주류를
이루었던
초연하고
내적이며
지나치게
지적이던
추상미술에
대한
반동으로
생겨났다. 형상성과
예술성에
대한
회복을
추구한
신표현주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절정을
알리는
양식이다. 특히
인간의
육체를
비롯해
알아볼
수
있는
대상을
묘사하기
시작했는데, 이
운동은
적극적인
작품판매
방식과
언론과
큐레이터들의
활발한
활동
등과
관련이
있다.
신표현주의
작품은
표면상으로
무척
다양하면서도
공통된
특성을
갖고
있다. 구성·구도에
있어서
전통적
기준을
거부하고
도시생활의
가치관을
반영하였 으며, 무언가
메시지가
있는
것
같으나
딱히
알아차릴
수
없는
애매모호함이
있다. 이상과
규범, 질서의
틀을
거부하고
자유스러운
개인의
상징
체계를
구축하려고
애쓰며
이
때문에
종교·사상에
관계없이
누구나
보편적으로
상정 할
수
있는
범세계적인
메타포를
사용한다. 색은
선명하지만
서로
어울리지
않는
배색을
이용하고
물감
외에
금속·지푸라기·깃털·말린
꽃
등
다양한
오브제를
이용하여
조형적
효과까지도
발휘한다. 때로는
부자연스러우면서
동시에
풍자를
내포하는
경우가
있다. 대표적인
신표현주의자는
독일의
안젤름
키퍼, 게오르크
바젤리츠, 미국의
줄리앙
슈나벨, 데이비드
살르, 이탈리아의
산드로
키아, 프란체스코
클레멘테
등이다.
1960년대
미국의
추상표현주의와
팝아트가
유럽을
강타하자
독일
현대미술가 들은
요셉
보이스를
중심으로
새로운
현대미술의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
후 1980년대
재현으로의
복귀를
시도한
신표현주의
회화가
급부상하면서
독일
미술은
전세계
미술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전후
미국은
잭슨
폴록이라는
추상표현주의자를
미술계의
영웅으로
만들어
냄으로써
유럽을
그
국력의
차이만큼이나
문화적
세력에서
앞지른다. 대세는
여기에
그치지
않아, 형식주의
일변도의
기성화단을
거부하는
새로운
반항세력의
대표자
앤디
워홀이 1960년대
미국미술의
명성을
또다시
화려하게
장식했다. 경제적
번영과
맞물린
이러한
미국의
일방적인
문화
주도권은
베트남
전쟁을
둘러싼
반전
학생운동과
급진적
좌익세력의
등장이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지만
미국
팝
아트의
영향력은
전유럽을, 특히
서독을
강타했다. 이러한 1960년대의
시대적
상황을
배경에
두고
독일
현대미술가들은
요셉
보이스를
중심으로
새로운
세력을
형성하기시작한다. 분단이라는
한계
속에서
미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던
서독의
전후
젊은
예술가들에게
보이스는
워홀과
함께
탈냉전시대, 다원주의
시대를
알리는
스타이자
영웅이었다. 독일미술의
재부상이라는
변화는
다른
한편
카셀
도큐멘타라는
독일의
전시 행정
및
문화정책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 보이스와
예술적
형식은
확연히
달랐으나 1980년대
서양미술계를
흥분시킨
안젤름
키퍼, 게오르그
바젤리츠 A.R. 펭크, 외르그
임멘도르프, 마르쿠스
뤼퍼츠
등
독일
신표현주의
작가들도
작품
외적인
배경에서
결정적인
혜택을
입었다. 하지만
이
독일작가들이
공유 하고
있던
문제의식, 정확히
말하자면
분단체제라는
독일만의
정치적
조건은
독일
현대미술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관건이
된다. 나치즘의
과거청산이라는
역사적
과제
위에
덧붙여
분단이라는
또
하나의
상처를
지닌
이
시대의
독일
예술가들은
전후
미국이
주도하며
일으킨
미술양식에
빚을
지면서도
이를
극복하는
것을
그들의
최대
과제로
삼았던
것이다. 독일이
통일된 1990년
이후
더욱
확고한
명성을
얻은
독일작가로는
회화작업 과
사진이미지를
교차시키는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와
지그마르
폴케(Sigmar Polke), 기념비적인
대형
사진작품의
토마스
루프 (Thomas Ruff), 사회적·정치적
이슈를
제시하는
사진작업의
아스트리트
클라인(Astrid Klein), 루돌프
본비(Rudolf Bonvie), 카타리나
지버딩 (Katharina Sieverding)이
있으며, 설치
및
개념작업에는
토마스
로허 (Thomas Locher), 한네
다보벤(Hanne Darboven), 레베카
호른 (Rebecca Horn), 로제마리
트로켈(Rose-marie Trockel) 등이
있다. 통일
이전에도
백남준과
같이
플럭서스에서
활동했던
볼프
포스텔(Wolf Vostell), 사회적
의식을
드러낸
개념
미술가
한스
하케(Hans Haacke), 회화의
형식조건에
집중하여
형태와
색채를
자유롭게
변주한
이미
크뇌벨 (Imi Knoe-bel), 색채의
표현력에
공감각적인
영역을
이루어
낸
고트하르트
그라우브너(Gotthard Graubner) 등
역량
있는
작가가
많이
있었다. 현
시점에서
가장
대표적인
작가를
고른다면 2002년
뉴욕
현대미술관 (MoMA)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가졌던, 분단시대
독일회화의
마지막
거장으로
평가받는
게르하르트
리히터를
들
수
있다. 이러한
판단의
일차적
근거는
아니지만 1981년
미국의
좌익
미술비평지
《옥토버》에
기고한
한
논문에서
독일
신표현주의자들의
재현
복귀현상이
반동적
태도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던
벤자민
부흘로는
작품의 '분석적
명료함'에
있어서
한네
다보벤, 브린키
팔레르모(Blinky Palermo), 게르하르트
리히터, 이
세
명의
독일작가에게는
중요한
미학적
평가를
내린
바
있다. 간결한
형식적
절제미를
가진
설치작업의
팔레르모는
불행하게도 34세에
요절하고, 1941년생
여성작가인
다보벤은
지난해인 2002년
카셀
도큐멘타 에서
수정
해골조각과
총 3478장의
종이작업을
전시하여
가장
주목받는
작가
중
하나가
된
바
있다.
★
게르하르
리히터(Gerhard Richter: 1932~ )★
독일
드레스덴
출생이며, 현재
쾰른에
거주한다. 드레스덴
미술학교와
뒤셀 도르프미술학교에서
공부했으며, 1950년대
동안
사진작가와
무대디자인 미술가로
일한
것을
포함해
여러가지
일을
했다. 초기에는
앙포르멜, 추상표현주의
미술에
영향을
받았고, 1962년
사진에서
나온
이미지를
그린 '사진-회화'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
리히터는
추상미술의
극히
개인적인
형태로
돌아갔다. 그는
전후시대에
지적
엄격함과 ?》關??솜씨가
결합된
세련되고
혁신적인
작품활동을
해온
대표적인
작가이다.
제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성장한
그는 1961년
당시의
서독
뒤셀도르프로
이주해
예술가의
생활을
이어간다. 그
역시
동시대
다른
독일의
예술가들처럼
전쟁의
고통과
상흔
속에서
어떻게
아우슈비츠
이래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릴
것인가를
가지고
자문하며
고뇌에
시달렸다. 이러한
고뇌는
과거
문화와의
창조적
단절을
가져왔고, 서구
사상의
근본을
이루는
인본주의적
진보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졌다. 새로운
기준을
찾고자
하는
혼돈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리히터는
이전의
미학적
틀을
탈피해
시대의
새로운
상황을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그림
그리기를
고안해
낸
것이다. 리히터
작품이
제시하는
최초의 '동요'는
사진을
보고
있다는
것과, 그것이
캔버스
천
위에
유화로
그려진
회화라는
것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으로부터
시작된다. 이것은
극사실주의
화가들의
그림처럼
붓끝의
기교로
결정되는
것이
아닌, 성공적인
유사성과
닮음
그
너머에
존재하는
사진
이미지만의
독특한
시각
현상들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이다. 예컨대
마치
누구라도
찍을
수
있는
평범한
풍경이나
초상
사진들은
초점이
맞지
않아
윤곽선이
흐려
있거나, 실수로
카메라가
흔들려
잘못
찍혀진
것
같은
이미지, 그리고
빛의
노출
과다나
노출
부족
등으로
인해, 뿌옇게
흐려진
망친
사진을
베낀
것
같기도
하며, 온전하게
그려진
그림을
잘못
촬영한
것
같기도
한
인상을
준다. 이러한
요소들은
더
이상
회화적
개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완전히
광학적, 사진적
개념에
해당하는
요소들로
리히터
회화의
사진적
요소를
설명한다. 그는
우리시대의
이미지들이
사진적
기술을
이용한
것들로서, 보다
즉각적이고 단순하며, 친근하게, 본다는
것에
대한
사진적
인식에
동의한다. 1976년이래
리히터는
추상회화를
해
오고
있다. 최초의
리히터
추상회화는
사진적
기법을
이용한다. 즉
그는
캔버스
천
위에
추상적
에스키스를
투사해
그리기
시작해, 기하학적이며
생생한
색상으로
이뤄진
추상화에
도달한다. 물질성, 밀도, 질감, 그리고
유동성
등
페인팅의
고유한
특질들을
간직한
채, 엄청난
속도로
이
추상적
회화
공간을
쓸어내며, 빛의
특수한
질감만을
살아 남게
한다. 이
과정에서
표현주의적
이미지들과
시각적
이미지들이
모두
함께
녹아들며, 두텁고
매끈한
물질의
층을
통해
비물질적
형태의
빛들이
발산하며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결과적으로
이
추상화는
다른
매체를
환기 시킨다. 바로
비디오이다. 1968년
그의
첫
번째
회색그림을
그린다. 회화와
사진의
경계에
있는
작가 로서
회색을
취한
것은
사진의
첫
번째
특성들에
익숙해지기
위한
것이다. 리히터에
따르면
회색은
아무
것도
아님을
밝히는
데
다른
어떤
색보다도
훌륭하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