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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24 자연주의: 밀레

AH101 2012. 2. 16. 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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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자연주의(自然主義 : Naturalism Art)

자연주의 미술이란?:

1)
일반적으로는 예술을 자연의 충실한 모방으로 삼으려는 제작태도를 의미한다.

2)
미술에서의 자연주의란 대상의 양식화하거나 관념적 표현을 거부하고 관찰한
그대로를 충실하게 재현하려는 예술제작 태도로 자연을 표현하려는 뜻에서
사실주의와 대립하게 되었다.

3)
대상으로 삼는 자연 자체가 존재의 가치가 있는 것이기에 자연의 재현 역시
가치가 있다. 경우 자연의 재현은 반드시 자연의 이상화를 뜻하지 않으며
선악미추는 중요하지 않다. 또한 서정적이고 깨끗하고 산뜻한 전원풍경을 주로
그렸던 자연주의는 현실에 대한 목적론적 설명을 거부하고 현실을 선입견없이
실험적으로 관찰하는 방법을 예술에 적용한다. 이것은 이상주의에 대한 반발로
나타났으며, 낭만주의에 의해 조장된 개인적 감정의 득세에 의해 촉발되었다.
상상력에 의존했던 낭만주의에 반하여 실재하는 자연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
아름다움 전원과 농민의 생활을 화폭에 담아 자연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화파로,
근대 풍경화의 시초가 되었다.

4)
자연주의 경향은 사실주의와의 관계가 복잡하며, 17세기 이탈리아의 벨로리로,
카라바지오의 후계자인 만프레디, J.리베라, 바란탄, 혼트홀스트 등에서 비롯
되었지만 17세기 볼로냐파나 앵그르의 예술에 적용될 대립적인 의미를 가졌다.
그러나 19세기후반 미술비평가 J.A.카스타냐리는 1860년부터 70년대 풍속화의
중요성에 주목하여(또한 졸라에 따라서 사실주의의 발전적 주체, 특히 현대생활의
이면의 표현) 파스티안 르파주와 J. 베로로 대표되는 도시생활의 새로운 풍속과
정경, 마네에 의해 이루어진 환락가의묘사 등에 자연주의라 하였다.

일반적으로는 미술에 있어서 이러한 경향은 19세기 후반 프랑스의 화가 쿠르베의
등의 영향으로 나타난 사실주의의 새로운 경향으로 지칭한다.
또한 쿠르베의 사실주의 이전의 코로, 밀레 등의 보다 미화된 사실묘사를 그냥
자연주의 회화라고 하고 있다.
그리고 1820년대 영국 풍경화가들도 이런 범위에 든다.

5)
영국의 풍경화나 바르비종의 화풍은 자연을 조금도 미화하거나 이상화하지 않고
자연에 깊은 애정을 갖고 속에 젖어들어 미묘한 , 맑은 공기가 가득찬 정취
있는 풍경화로 자연주의를 표현했다.

자연주의 미술의 배경

1) 19
세기 근대미술의 특징은 산업혁명과 시민혁명 이후 유럽세계에 퍼진 자유주의
사상과 왕권의 붕괴로 예술가들의 자유로운 개성과 주관을 표현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2)
낭만주의 이후의 미술은 점차 각자의 개성을 중요시해서 각자에게 독특한 화법이
명료하게 나타나 보이는 경향으로 발전하여 갔다.

3) 19
세기 초에 일어났던 프랑스 대혁명의 정열과 나폴레옹의 영웅주의는 사회의 변혁
발전에 크게 작용하였으나 거듭되는 반혁명과 급속도로 신장하는 시민사회의
안정으로 열기가 식어가면서 점차 현실 관찰과 자연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4)
이제는 지난 날에서와 같은 교회나 궁정의 주문에 의해서 그들의 지배적인 취향의
비위에 맞추지 않더라도 작가는 일반시민의 보다 개방적인 취향에 따라 작품을
제작할 있게 되었다. 이러한 자유로운 창작은 근대에 와서야 어느 정도 가능해
일이며, 이러한 추세는 나중에 그대로 20세기에도 직결되는 것이다.

5) 19
세기에 있어서 문예상의 주창자 에밀졸라는 실증적, 과학적인 방법과 성과를
원용해서 현실의 객관적인 재현을 목표로 해서 특히 사회의 비참한 면에 예리한
관찰의 눈을 돌렸다. 미술에 있어서도 이러한 경향이 나타났다.

6)
들라크루아 출현 이후, 프랑스 화단은 고전파와 낭만파의 화가들이 각자 대리적인
화풍으로 각각 활동을 하고 있었으며, 그들은 시대를 지도할 만한 존재는 아니
었다. 이러한 풍조속에서 들라크르아와 병행해서 참신한 기풍을 가져오게
무리의 풍경 화가들이 있다. 17세기의 푸생 이래 프랑스에서도 풍경화의 소지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것이 19세기 초두의 신고전주의에 의해 잠시 중단되
었던 하였지만, 들라크루아의 정열과 자연세계에 대한 싱싱한 감각의 각성과
영국의 풍경화에서 받은 자극은 낭만주의풍의 풍경화로 다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영국 풍경화에서 가장 많은 영향을 받고 거기에서부터 프랑스의 새로운
풍경화를 창시한 것은 바르비종파라고 하는 화가들에서이다.

영국의 풍경화

1)
오랜 동안 북유럽 17세기의 프랑드르풍의 풍속화나 풍경화의 화풍을 수용하여 왔던
영국은 19세기 초두에 와서 뛰어난 몇몇 풍경화가를 배출시켰다.

2)
이런 기운은 유럽 전체 시대적 분위기가 벌써 교회나 궁정을 위한 회화가 아니라
그림을 그림으로써 즐기는 근대적인 추세가 팽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의 Ecole De Barbizon

1)
영국의 풍경화 작품이 1820년대의 중엽부터 프랑스인에게 주목되기 시작하였다.

2) 1830
년경부터 파리근교 퐁텐블로 어귀에 있는 작은 마을 바르비종에서 유래되었
으며, 1830년파 또는 퐁텐블로파라고도 한다.
주요한 화가로는 밀레, 루소, 코로, 뒤프레, 디아즈 라페냐, 트루아용, 도니비
등이며 자연에 대한 로맨틱한 감정과 서정적인 화취가 그룹의 특색이었다.

3)
특히 콘스터블의 <건초실은 마차> 파리의 살롱에 출품되었을때 들라크루아가
밝은 자연묘사에 감동해서 자기의 <키오스섬의 학살> 배경을 고쳐 그렸다는 이야
기는 유명하다.

4)
영국 풍경화에 보다 직접적인 감명과 영향을 받아 그들 자신이 직접 자연 속에
돌입해서 새로운 자연주의 회화를 일으킨 무리의 화가들이 바르비종파 화가들이다.

5)
그들은 현실 자연의 아름다움과 깊이를 몸소 체험함과 동시에 도시의 소음을 떠나서
조용한 시골에 살며 거기에서 전원풍경을 그리며 숲이나 강변의 사계절 마다의 변화
풍경을 그렸다.

6)
종래 프랑스 풍경화 작품에 비교한다면 그들이 갖는 새로운 의의는 현실의 풍경에
대한 깊은 관찰과 인정미 있는 온화한 표현법이었다.

7)
이미 다비드나 들라크루아, 앵그르에서 싹트기 시작한 현실 직시 경향은 1830년대
바르비종에 모인 풍경화가 로소, 코로 등에 의해 한층 명확해졌다.
이전의 화가들이 역사화나 신화화에서 풍경화의 위치를 한낱 부수적인 배경 처리
다루어 오던 것을 이들은 자연에 보다 접근하였고, 사랑과 관찰로서 풍경을 주제로
그렸다. 이러한 태도는 인상파의 근대적 시각을 형성하는데 기초가 되었다.
루소의 자연에 대한 사랑에는 아직 낭만파적인 열정이 있었고 코로는 정숙과 서정을
담고 있었다. 이들 바르비종에 모인 화가들 중에는 농민의 화가 밀레가 있다.
그는 사실파 화가 도미에와 더불어 서민화가이다. 밀레는 농촌을 도미에는 도회지의
생리를 공감과 직감에 의해 그렸다.

밀레(Jean Franiois Millet :1814~1875)

밀레(Jean Francois Millet:1814~1875) 프랑스 노르망디 그레빌 출생으로
1833
1836 셰르부르에서 그림공부를 하다가 1837 장학금을 얻어 파리로 진출하여
P.
들라로슈의 제자가 되었다. 루브르미술관에서 푸생, 샤르댕 등의 영향을 받았으나
도미에의 작품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1848
살롱에 출품한 《곡식을 키질하는 사람》(루브르미술관 소장) 농민생활을
그리는 최초의 계기가 되었다. 1849 파리 교외의 바르비종으로 이사하여, 농사를 지으
면서 대지와 맺어져 있는 농민생활의 모습과 주변의 자연풍경을 그렸다.
시절에 T. 루소, C. 코로 등과 친교를 맺고, 빈곤과 싸우면서 진지한 태도로 농민생활
에서 취재한 일련의 작품을 제작하여 독특한 시적(詩的) 정감과 우수에 분위기가 감도
작풍을 확립, 바르비종파() 대표적 화가가 되었다.
그러나 다른 바르비종파 화가들과는 달리 풍경보다는 오히려 농민생활을 많이 그렸다.
그런 가운데 어딘지 모르게 풍기는 종교적 정감이 감도는 서정성으로 친애감을 자아내고
오늘날까지 유럽 회화사상 유명한 화가 사람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만년에는 사회적으로도 인정받아 화가로서의 영광을 누렸으며, 1868 프랑스의 최고훈장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Vert Vert, the Nun's Parrot, 1839

Louise Antoinette Feuardent(파르당 부인의 초상), 1841


1837
고향 세르브르의 장학금을 받아 파리로 나온 밀레는 들라로시의 아틀리
에에서 지도를 받는 한편, 루브르를 자주 방문하면서 주로 미켈란젤로와 푸생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고전 작품을 연구했다. 그가 처음으로 살롱에 입선한 것이
1840
년이니까 파리에 나온 3 후가 되는 셈이다. 시기 밀레의 작품은 주로
초상화와 신화(神話) 테마로 그림들이었으며, 검은 색을 주조로 하면서 백색
효과를 살리는, 전통적인 수법을 주로 사용하고 있었다. 작품은 고향 셀브르
돌아와 주문받은 초상화 가운데 하나로, 검은 색을 기조로 하면서 뉘앙스가 풍부
수법을 사용, 인물 내면의 섬세한 움직임을 파악하려는 태도를 나타내 보이고
있다.

Portrait d'Armand Ono, 1843

루크르트와 부인의 초상


주지하다시피 밀레는 노르망디의 한촌(寒村)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만년
(
晩年) 명성을 얻을 때까지 누구보다도 많은 고생을 하였다. 특히 청년 시절은
빈한의 연속이었다. 번째 부인인 포리느오노가 죽은 것도 병약(病弱) 때문이
었다. 그래서 초기의 초상화들에서 없는 우수가 화면을 덮고 있음을 엿볼
있다. 초상은 아내 포리느오노의 언니, 아니면 동생을 그린 것인데, 초기 밀레의
초상화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촉촉한 눈을 보이고 있다.
단정한 자세와 화면에 들어 차는 구도의 밀도는 초기 밀레의 초상화가로서의
뛰어난 일면을 유감없이 나타내고 있다.

외제니 카노비유 부인의 초상


번째 부인 포리느오노가 죽었을 이들 부부가 아사(餓死) 직전에 있었다는
것은 너무도 알려진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초기의 초상화에는 짙은 술픔의 그림
자가 화면을 덮고 있다. 초상화의 여인도 슬픈 눈을 하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검은 옷에 화려한 레이스는 어딘가 모르게 정숙한 품격을 자아내게 하는데, 앞으
포개어진 손과 얼굴을 연결하는 목걸이 선이 눈길을 끈다. 어두운 배경에
인물의 얼굴만은 부각시키는 고전적인 수법을 사용하고 있는데, 엄격한 데생에
의한 인물의 포착은 초상화가로서의 그의 단단한 기법을 말해 주고 있다.

海軍士官 초상


역시 밀레 초기의 작품을 대표하는 초상화 중의 하나로, 첫째 부인과 사별하고
재혼한 밀레가 1845 잠깐 동안 르아브르란 프랑스 북쪽에 위치한 항구에
머문 적이 있는데, 초상은 당시에 그렸던 주문화 가운데 하나다. 때는
밀레의 명성도 점차 상승되고 있었기 때문에 지방의 부호나 미술 애호가, 해군
사관, 선장들에게서 많은 주문이 쇄도해 왔다. 파르당 부인의 초상과 같이, 검은
제복을 입고 양팔을 사관의 표정은 밀레의 더욱 자신 있는 수법의 원숙을 통해
생동감을 더해 주고 있다. 인물과 배경의 부드러운 조화라든지, 검은 빛깔과
황금빛의 장식과의 격조있는 대비 등은 인물의 성격과 함께 화면의 짜임새를 더욱
돋우어 주고 있는 보인다.

젊은 여인, 1844-45


1845
년경 밀레는 목가적인 연인들을 테마로 점의 작품을 그렸다.
작품도 그러한 목가적(牧歌的) 분위기를 띠고 있는 그림이다.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여인의 모습은 현실보다는 신화에 가깝다.
무언가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입과 반쯤 눈의 꿈꾸는 듯한 표정이 더욱 그런
분위기를 나타낸다. 초기의 초상화에서 있는 단정하고도 엄격한 수법을
없고, 터치가 즉흥적이면서 다소 거칠게 나타나 있다.
일련의 누드화에서도 그렇지만, 밀레의 눈은 호색적(好色的)이지 않다.
그가 나중에 로코코 화가들을 특히 호색적인 면에서 비판하고 있음도 이를 뒷받침
하고 있다.

The Sower

어린 양치기


밀레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농가에서 자랐을 아니라, 화가로서 명성을 얻기
시작할 무렵 농가에 들어가 생애를 농민 화가로서 보냈다. 깊숙한 농민 생활의
체험은 그의 그림을 더욱 생생하게 만들고 있는데, 멀리서 바라보는 객관적인 입장
아니라 언제나 모티브 깊숙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몸으로부터 우러
나온 자연스러움이 그림 속에 배여 있다. 어린 양치기의 모습과 양떼의 조화는 순진
이미지의 동일성에서 밀레의 화인(畵因) 자극한 것이 분명하다.
풀을 뜯고 있는 양들의 모습과 지팡이에 기댄 어린 양치기의 땅과의 밀착된 관계가
돋보인다.

Woodworking, c.1850-1852

Frau beim Brotbacken, 1854

The Gleaners(이삭 줍기), 1857


<
만종, The Angelus> 더불어 밀레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그림에는
극적인 사건이나 일화적인 요소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추수가 진행되는
편편한 들판에서 묵묵히 일하고 있는 명의 여인이 있을 뿐이다.
그들은 아름답지도 우아하지도 않으며, 그림 속에는 전원적 목가 같은 것은 전혀
없다. 제목부터 그리고 인물들의 익명성을 넘어서, 단지 노동하는 사람들의 개인
세계를 강조하고 있다. 동일한 주제를 다룬 브로통의 1859 작품은 풍속
형태로 그림 전체가 이삭 줍는 여인들의 흥겨움과 질펀함으로 술렁이고 있으나,
이와는 달리 밀레는 강건하며 간략한 노동하는 여인의 육체로 힘을 집중시킨다.
이는 마치 조각처럼 각인된 육체가 가난을 대변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작품은 1857 살롱전에 출품되어 비평계에 일대 파문을 일으켰다.
자연주의의 옹호자인 카스타나리는 "빈곤에 대한 성실한 탐구와 결코 허위나 과장
아닌, 자연에 대해서 일찍이 호메로스나 베르길리우스가 발견했던 것과도 같은
위대한 구절들 가운데 하나"라며 칭송하였다. 반면 보수적 비평가들은 "누더기를
걸친 허수아비들"이라는 논조로 인물들에게 "빈곤을 관장하는 여신들"이란
이름을 헌정한다. 이에 대해 밀레는 "나는 평생을 두고 들밖에 보지 못했으므로
그것을 솔직하게 그렸을 뿐이다" 라고 말한다. 비스듬한 모습 속에 가려진 피곤한
얼굴, 노동으로 굽은 , 전혀 꾸밈없는 그저 실용적인 작업복, 이렇게 세부적인
까지 놓치지 않은 밀레의 섬세한 감성과 화법이, 풍요로운 도시 풍경에 가려졌던
농경을 하나의 당당한 현실로 만들어 놓는다.

The Angelus(만종), 1857-59


농민 화가로 널리 알려진 밀레의 작품은 이발소의 벽은 물론이고 티셔츠나 쟁반
등으로 널리 복제되면서 대중에게 가장 친근한 작품이 되었다. 그러나 모순되게도
작품이 누리는 대중적 인기만큼 이면에는 알려지지 않은 작품의 진면목, 혹은
신화화된 밀레가 가리어져 있다. 하루의 일과를 끝낸 농부 부부가 황혼이 지기
시작한 전원을 배경으로 삼종기도를 드리고 있다. 들판에 굳건하게 있는 이들
부부의 모습은 마치 인간과 대지가 하나된 듯하다. 오른쪽 뒤로 성당의 첨탑에서
울려 퍼지는 저녁 종소리는 빛으로 변해 저녁 하늘을 환히 비추고 있다.
자연의 질서에 따라 일하며 가난하고 피곤한 삶을 감사하는 이들 부부의 기도는
하나의 경건 자체를 나타낸다. 자신은 결코 농부가 아니었지만, 유년시절을 농촌
에서 보냈던 밀레는 순박한 농민의 이미지를 빌어 전원의 순수함에 대한 향수를
표현하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밀레에 대한 모든 신화는 그를 거의 성자처럼 묘사
알프레드 상시에(Alfred Sensier) 후원자가 전기『밀레의 생애와 작품』
에서 비롯된 것이다. 밀레가 산업 사회의 도래와 함께 농촌으로 돌아온 것은 사실
이었지만, 그가 빈농으로 태어나 농촌에 대한 애정으로 평생을 가난 속에서도 농부
들과 함께 하였다는 이야기는 과장된 사실이다. 밀레 자신이 당시 유행했던 푸르동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하여 노동자의 현실을 고발하고자 것은 더욱이 아니었
. 그는 노동을 하늘의 섭리로 알고 묵묵히 일하는 농민들의 모습을 통해 도시와
상반되는 전원의 가치를 종교적 색채로 그려낸 것이다. 작품은 근대화를 거치면
전원 생활을 그리는 세계 각국의 애호가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미국인을 비롯한 여러 명의 소장가를 거치다가 1890 프랑스인 쇼샤르(Alfred
Chauchard)
다시 사들여 프랑스 정부에 기증,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Portrait of Marineoffiziers, The 2nd third of 19th century

건초를 묶는 사람들, 1857

소와 농부, 1859


<
이삭 줍기>, <만종>, <양치는 소녀> 등에서 있는 지평선을 배경으로
구도이다. 화면 3분의 2 해당되는 대지와 3분의 1 해당되는 하늘 부분의 안정
구도에서 인간과 대지와의 밀착된 관계를 엿보여 주고 있다.
작품에서도 <만종>이나 <양치는 소녀> 같이 황혼녘의 풍경을 붙잡은
이다. 역광(逆光) 받은 소와 여인의 모습이 더욱 견고한 양감(量感) 보여 주고
있다. <이삭 줍기>에서와 같이 가난한 농부의 모습이 역력하다.
1859
살롱에 출품하여 찬사를 받았으나, 한편으로 살롱 평을 보들레르
밀레가 그리는 농민은 너무도 비참하게 묘사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The Sheep Meadow, Moonligh(달밤의 목장), 1861


달밤에 양떼가 들어오는 목장의 장면이다. 달은 지평선에 떠오르고 은은한
빛은 대지로 번져 가는데, 목장으로 들어오는 양떼와 몰잇꾼의 검은 실루엣이
환영처럼 떠오른다. 밤의 야외 정경은 다소 특별한 소재라고 있다.
밀레는 이같은 모티브로 다룬 개의 작품을 제작하였는데, 하나는 1856년의
것이고, 하나는 1861년작인 작품이다. 작품을 비교해 보면 전작은 인물
이나 동물이 하나하나 분명한 윤곽을 드러내고 있는, 그의 태반의 작품에서와 같은
견고한 조형성을 보여주는 반면, 후자의 작품은 달밤의 은은한 분위기가 화면
전체를 덮고 있어 더욱 시적(詩的) 느낌을 주고 있다.

Shepherdess with her Flock, 1864

거위를 지키는 소녀


역시 농가의 장면을 모티브로 작품이다. 쪽에 개울이 있고, 개울로
통하는 길이 화면 중심으로 있다. 거위 떼들이 개울로 몰려들고 있으며 오른쪽
언덕배기엔 소녀가 이를 지켜보고 있다. 화면은 밀레가 즐겨 사용하고 있는
3
분의 2 해당하는 위치에 지평선을 설정하고, 아래쪽에 대상물들을 배치하였다.
밀레는 거위를 모티브로 작품을 여러 그렸는데, 파스텔로 속사(速寫) 것도
있다. 그는 파스텔 그림들을 그날의 식량을 얻기 위해서 팔았다.
작품은 1867 살롱에 출품된 것으로 점차 무르익어가는 시골 생활의 일면을
보여 주고 있다. 하늘로 머리를 치켜들고 있는 , 물에 노는 , 물가에서 쉬고
있는 , 소리를 지르면서 물로 뒤뚱뒤뚱 걸어오는 , 각양의 표정이 흥미롭게
포착되고 있다.

돼지를 잡는 사람들


돼지를 잡기 위해 사람의 남정네가 입에 끈을 묶어 잡아당기고 있고, 남정네
뒤에서 돼지를 떠다밀고 있다. 나오지 않으려고 버티고 있는 돼지를 향해 먹이
쏟고 있는 여인네, 그리고 저쪽으로 이를 지켜보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엿보인
. 돼지를 향해 집중되고 있는 시선과 장면을 지켜보고 있는 하나의 , 화가
눈이 합쳐져 화면의 중심이 강해지고 있다. 밀레는 작품을 1867년에 시작,
완성까지 상당한 시간을 보냈는데 그만큼 힘을 쏟은 작품임을 시사한다.
미국인 화가 빌라이트가 그의 처와 같이 바르비종을 방문, 찬사를 아끼지 않자,
밀레는 즉석에서, '부인 이것은 하나의 드라마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극적인 순간임이 분명하다.

Spring(Daphnis and Chloe:다프니스와 클로에), 1865


롱고스 작으로 전해지는 유명한 그리스의 전원 시적(田園 詩的) 소설 '다프니스
클로에'에서 취재된 그림으로, 코르마르의 은행가 토마의 의뢰에 의해서 제작된
것이다. 사계(四季) 나타낸 3(, 가을, 겨울) 타블로와 1(여름) 친정화
가운데 <> 해당하는 작품이다. 농민화가로서의 밀레에게는 다소 특이한 신화
주제의 그림이라고 있을 듯하다. 초기 파리시대의 신화적 소재의 그림에서
엿볼 없는 인물이나 배경이 고전적인 완벽함을 보여 주고 있다.
밀레는 작품에 상당한 애착을 갖고 있었던 같은데, 후에 장의 소품으로
남기고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섬세한 필치와 아름다운 색채가 보석처럼 빛나고
있다.

키질하는 농부, 1866


'
나의 강령은 노동입니다.'라는 말과 함께 농민화가로 널리 알려진 밀레는 <키질
하는 농부> 농민화가로서의 첫발을 내딛었다. 주제는 1848 살롱전에 출품
, 로드뤼 롤랭이 작품을 사면서 밀레에게 최초의 성공을 가져다주었다.
1848
2 혁명 이후 2공화국 하에서, 새로운 사상의 영향으로 인해 당시까
역사화가 주종을 이루던 회화의 장르에 일대 변혁이 일어났다. 컨스터블의 주장
따라 새로운 눈으로 자연을 보기 위해 무리의 화가들이 바르비종이라는 프랑
스의 마을에 모여들었고, 이들 가운데 사람이었던 밀레는 농부들의 생활상을
있는 그대로 그리고자 했다. 밀레의 그림에 나오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희미한 윤곽
선으로 묘사되어 때론 백치 같다는 인상을 주기도 하고, 때론 노동에 지친 피곤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동시에 그의 그림에는 성스러운 침묵과 빛에 대한 향수가
스며들어 있다. 그림에서 역시 이런 특징들이 드러난다. 노동으로 굵어진 우람
손에서 노동자들의 현실을 엿볼 있고, 깊고 어두운 배경은 안에 인물을
배치함으로써 반복되는 노동의 단조로움을 보여주고 있다. 묵묵히 키질을 하는
인물에서 풍겨 나오는 모습은 단일한 해석을 거부하는데, 다의성은 <만종>이나
<
이삭 줍기> 거치면서 점점 종교적 색채를 띠게 된다. 1948 살롱전에 출품
했던 <키질하는 농부> 현재 소실되었고, 작품은 186668 같은 주제로
그려진 작품이다.

나뭇꾼


<
키질하는 사람> 비슷한 구도의, 나무를 패는 모습을 붙잡은 작품이다.
산속이 배경으로 등장하고 화면 가운데 나뭇꾼이 배치된다. 나뭇꾼의 앞과 뒤쪽
주변에 나무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산속에서 만난 평범한 나뭇꾼의 생활의
단면을 붙잡은 것으로, 쿠르베를 연상시키는, 보이는 것만을 그린다는 리얼리스
트의 태도가 역력하다. 나뭇꾼과 배경과의 관계, 원경의 숲과 쪽의 정경과의
관계에서 보여주는 명암의 강한 대비가 단순한 정경을 드라마틱하게 만든다.
수평과 수직의 구성적 배려가 미묘하게 느껴지는 밀레의 독특한 시각이 있다.

잣는 여자, 1868-69

, 입을 벌려요


작품의 원제는 쪼아 먹다 [bwcquter]에서 나온 명사 'La becquee'이다.
어미새가 새끼새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는 장면에서 힌트를 얻은 , 그러한 정경을
인간 세계로 가져 왔다. 마치 어미새가 새끼새에게 주둥이로 먹이를 먹여 주듯이,
어머니는 아이에게 무언가를 숟가락으로 먹이고 있다. 자매인 어린이가 나란
앉아 있고 어머니는 가운데 막내인 듯한 어린애에게 숟가락을 건네고 있다.
왼쪽 아이는 자기 차례가 것을 대기하고 있는 자세이고, 오른쪽 아이는 언니
답게 ', 먹어.'하고 말하고 있는 하다. 부모와 자식간의 정애(情愛) 실감있게
묘출되고 있다. 밀레 자신의 가족이 모델이었을 것이다.

세탁하는 농부


어두운 실내에서 빨래통에 물을 붓고 있는 시골 아낙네의 모습을 붙잡고 있다.
어떻게 보면 너무나 단조로와서 모티브로서도 선뜻 선택하기가 어렵게 보이는데도,
밀레는 이를 드라마틱하게 처리하고 있다. 전체가 단순하면서도 명암에 의한 대상
견고한 형태와 볼륨이 모뉴멘탈(monumental:기념비적인) 효과를 거두고
있다. 이같은 조각적 조형은 고전주의가 즐겨 사용한 대상의 파악이나, 밀레는
고전주의가 목적이 아니었다. 그는 평범한 시골 아낙네의 일하는 모습에서 숭고한
어떤 것을 각인(刻印)하려고 하였을 뿐이다. 따라서 시류적(時流的) 고전주의와
발상에서부터 () 달리 한다.

Spring, 1868-73


계절의 순환에 대한 밀레의 관심은 대단한 것이었다. 이전에도 밀레는 알프레드
페이도를 위해 사계의 번째 연작들을 제작했고, 보다 자연주의적인 구상으로
1868
1874 사이에 제작한 그림들 역시 사계를 주제로 하고 있다.
마지막 사계의 경우 작품들 전체를 크게 부분으로 나누어, 자연이 인간과
대화를 나누는 일련의 내용들을 엮고 있다.
<
>에서는 폭풍의 어둠 속에서 떠오르는 자연의 부활을 찬양하며, <가을>에서는
구름이 몰려오는 회색 하늘 밑으로 양떼가 지나가고, 풍경의 충만함 속에서 사람은
자연과 사투를 벌이는 하나의 미미한 존재로 축소된다. 반면에 <여름> 자욱한
먼지와 열기 속에서 바쁘게 움직이며 타작을 하는 사라센 사람들의 무리에 활기를
부여하고, 미완으로 남은 <겨울>에서는 벌목하는 여인들의 행렬을 보여줌으로써,
인간에게 착취당하면서 인간에게 전적으로 순응하는 자연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연작들은 사계의 순환을 압축해 놓았지만, 밀레의 작품 전체에는 언제나
사계의 순환이 담겨 있다. 비록 사계의 순환이 본격적으로 다루어 것은 아니나,
그래도 <여름, 이삭 줍는 여인들>이나 <까마귀가 있는 겨울> 몇몇 작품들의
제목을 통해 화가가 직접 절기들을 언급하고 있다. 17세기의 네덜란드 화가인
로이스달을 연상시키는 그림은 밀레의 묵직하고 고요한 서정성이, 만년에 접어
들면서 밝고 환상적인 서정성으로 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무지개, 폭풍 뒤의 햇살, 형광에 가까운 빛을 발하는 나뭇잎들, 비밀을 간직한
속으로 나있는 . 밀레의 말년 작들은 공통적으로 색조가 밝아지고 다채로워
지는데, 이는 아마도 모네의 초기 작품에서 영향을 받은 듯하다.

우유를 휘젓는 여인, 1870


1847
년경부터 다루어온 소재인데, 파스텔화는 70년에 제작된 것이다.
농가의 생활 단면을 아무런 꾸밈없이 극히 담담하면서도 솔직하게 붙잡고 있다.
이런 그림은 화가가 방안에 들어와 모델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는 스스럼 없는
시각을 느끼게 되는데, 밀레의 농민 화가로서의 뛰어난 점도 이런 소박성에 있음
분명하다. 화면에 있어서 별다른 구도적 배려도 찾을 없다. 화면 가운데
통을 앞에 두고 우유를 젓고 있는 시골 여인의 약간 거친 표정이 일하는 사람의
건강한 야성미(野性美) 대치된다. 우유를 휘젓고 있는 막대기는 이상하게도
<
어린 양치기> 밭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쟁기와 연결되는, 대지에서 솟아오른
듯한 상징적인 의미를 드러내주고 있다.

The Bouquet of Daisies, 1871-74, Pastel


밀레 말년의 특이한 작품이다. 무렵 밀레는 병상에 있으면서 잠깐 본격적인
유화작업을 쉬고 가벼운 스케치나 파스텔 화를 주로 그렸는데, 작품도 중의
하나이다. 아마 병상에 누워 바라보는 어디쯤인가 있는 정경을 포착했을
이다. 두꺼운 나무 창틀이 화면을 수직과 수평으로 육중하게 분절(分節) 주고
있고, 화면 중심에는 화병이 가득히 들어차 있다. 화면 오른쪽으로 이쪽을 보고
있는 소녀의 표정이 어두운 배경에서 이상한 요괴스러움을 풍겨주고 있다.
소녀의 앞에 바느질 도구들이 놓여 있는 것을 보면 잠시 바느질을 쉬고 있는 순간
듯하다. 경쾌한 파스텔의 무드가 효과적이다.

The Church of Greville, 1871-74


고향인 그리쉬에 머무는 동안 밀레는 그가 어린 시절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시골
성당을 그리기 시작했다. 생생한 붓놀림과 초록, 파랑, 옅은 갈색으로 이뤄진
그림의 선명한 색채는 낮은 담벼락 밑의 양들에게로 다가가는 목동을 통해 어릴
평안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동시에 오랜 세월 동안 변함없이 곳에 버티고
있는 성당을 통해 굳건함을 느끼게 해준다. 밀레의 열렬한 추종자였던 고흐는
밀레의 그림에서 어린 시절의 평온함을 그리워했다. 고흐 역시 죽기 며칠
오베르 쉬르 오아즈 성당을 그렸다. 하지만 고흐의 성당이 하늘의 모든 신비를 교회
안으로 받아들이려는 욕망과 갈증으로 가득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던 반면, 밀레
성당은 훨씬 평온하고 관조적이다. 밀레는 1871 4, 1870년의 프로이센-
프랑스 전쟁 직후부터 머물고 있던 그리쉬에서 자신의 후원자였던 알프레드 상시에
에게 편지를 보냈다. 상시에는 밀레가 혐오했던 파리 코뮌을 피해 바르비종으로
그를 피신시켰다. 1874 완성된 그림은 같은 해에 열린 인상주의 전시회의
영향으로 강렬한 채색과 점을 이용한 채색도 눈에 띤다.

Bucheron preparant des Fagots

Femme Etandant Sonligne

A Shepherdess and Her Fl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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