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미술사 참고자료/자연주의-사실주의

서양미술사25 자연주의: 코로, 루소

AH101 2012. 2. 16. 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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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ridge at Nantes, by Jean-Baptiste Camille Corot

낭만주의 이후의 미술은 점차 각자의 개성을 중요시해서 각자에게 독특한 화법이 명료하
게 나타나 보이는 경향으로 발전하여 갔다. 이제는 지난 날에서와 같은 교회나 궁정의
주문에 의해서 그들의 지배적인 취향의 비위에 맞추지 않더라도 작가는 일반시민의 보다
개방적인 취향에 따라 작품을 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자유로운 창작은 근대에
와서야 어느 정도 가능해진 일이며 이런 추세는 나중에 그대로 20세기에로 직결되는 것
이었다. 자연주의(自然主義: Naturalism)란 자연대상을 양식화하거나 그 관념적
표현을 행하지 않고 보는 그대로를 충실하게 재현하려는 예술제작 태도로 자연의 재현에
는 자연미의 탐구와 존중이 들어 있고 자연을 표현하는 뜻에서 사실주의와 대립하게
되었다. 일반적으로는 쿠르베의 사실주의 이전의 코로, 밀레 등의 보다 미화된 사실묘사
를 자연주의 회화라고 하고 있다. 낭만주의풍의 풍경화 이후 영국 풍경화로부터 자극을
받아 프랑스 자연주의 화파인 바르비종파(Ecole de Barbizon)의 풍경화가 시작되
었고, 자연에 동화되어 자연이 갖는 미묘한 빛, 맑은 공기가 가득찬 정취있는 풍경화를
낳았다.

바르비종파는 19세기 중엽에 활동한 프랑스 화가의 집단을 말한다.
자연주의를 지향하는 유럽 미술운동의 한 갈래로서, 프랑스 풍경화에 사실주의를 확립시
키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바르비종파 화가들은 자연에서 위안을 찾는 낭만주의 운동에
자극을 받았으면서도, 풍경을 단순히 우화나 역사적 서술을 위한 배경으로만 이용한
고전주의의 진부한 전통만이 아니라 이미 기반을 굳힌 낭만파 풍경화의 감상적인 통속성
에도 등을 돌렸다. 바르비종파 화가들은 사실주의적 관점에서, 그리고 그 자체를 위해
풍경을 그렸다. 그들은 17세기의 프랑스와 네덜란드 화가들의 작품 및 같은 시대의 영국
풍경화가들의 작품을 미술의 토대로 삼았다. 이런 작품들은 모두 섬세한 관찰력과 자연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 주제에 접근했다. 바르비종파라는 이름은 파리 근처 퐁텐블로 숲속에
있는 작은 마을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이 유파의 지도자인 테오도르 루소와 장 프랑수아
밀레는 파리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한 데다 가난에 쫓겨, 1846년과 1849년에 각각 파리를
떠나 이 마을에 정착했다. 많은 풍경화가와 동물화가들이 그들을 따라 이 마을로 몰려들
었는데, 일부는 바르비종에 정착했고 나머지는 이따금 들르곤 했다.

바르비종파 화가들은 제각기 독특한 표현 양식과 특별한 관심사를 갖고 있었다.
바르비종파의 기원을 이룬 테오도르 루소는 그 차분하고 묵직하게 대지에 뿌리 박은 듯한
작품으로 자연의 냉혹한 섭리를 나타내었고, 루소를 따라 이 마을에 온 밀레는 그 동안의
파리 생활과 노르망디에서의 극빈생활 속에서 지친 화업을 이 곳에서 완성, 경검한 농민
생활을 그렸다. 종종 이곳에 체류하며 그들과 함께 숲이나 풍경화를 감미롭게 그린
디아즈(1808-76)나 시정에 넘친 풍경을 그린 뒤프레(1811-89)도 있으나, 이들과는 달리
이탈리아에 수차례 유학해서 그 고전적인 연구를 바탕으로 하여 우아한 표현속에 자연관
찰을 착실히 담아 그 대기와 빛을 윤이나게 그린 코로는 부모의 유산 덕분에 여유있는
생활을 하며 가끔 바르비종 근처에서 그렸고, 밀레와 이 파의 다른 가난한 화가들을 경제
적으로 돕기도 하였다. 이들은 현실 자연의 아름다움과 깊이를 몸소 체험함과 동시에
도시의 소음을 떠나서 조용한 시골에 살며 거기에서 전원풍경을 그리며 숲이나 강변의
사계절마다의 변화와 그 풍경을 그렸다. 종래 프랑스 풍경화 작품에 비교한다면 그들이
갖는 새로운 의의는 현실의 풍경에 대한 깊은 관찰과 인정미 있는 온화한 표현법이었다.
그 이전의 화가들이 역사화나 신화화에서 풍경화의 위치를 한낱 부수적인 배경처리로
다루어 오던 것을 이들은 자연에 보다 접근하였고, 사랑과 관찰로서 풍경을 주제로 그렸다.
루소의 자연에 대한 사랑에는 아직 낭만파적인 열정이 있었고, 코로는 정숙과 서정을
담고 있었다. 농민의 화가 밀레는 사실파 화가 도미에와 더불어 밀레는 농촌을 도미에는
도회지의 생리를 공감과 직감에 의해 그렸다. 이러한 태도는 인상파의 근대적 시각을
형성하는데 기초가 되었으며, 그들은 하나의 유파로서 순수하고 객관적인 풍경화를 프랑스
의 정통 장르로 확립하는 데 이바지했다.

★ 코로(Jean-Baptiste Camille Corot:1796~1875) ★

Self-Portrait with Palette in Hand, 1834

프랑스 파리 출생으로 처음에는 상업에 종사하였으나 1822년부터 미샤롱과 베르탱에게
사사하여 그림을 공부하였다. 1825년부터 2년간 동경하던 이탈리아에 유학, 자연과
고전 작품을 스승으로 한 정확한 색가(色價)에 의한 섬세한 화풍을 발전시켜, 1827년
살롱에 등장하였다. 그 후 프랑스에 살면서 파리 교외의 바르비종을 비롯한 여러 곳을
찾아 다니면서 많은 뛰어난 풍경화를 남겼다. 코로의 작품은 은회색의 부드러운 채조
(彩調)를 쓰면서 우아한 정경을 드높여 주어, 단순한 풍경에도 시와 음악을 부여할 수
있었다는 점이 큰 특색이다. 동시에 착실한 관찰자로서 자연을 감싸주는 대기와 광선의
효과에도 민감하여, 빛의 처리면에서 훗날 인상파 화가의 선구자적 존재였다.

Honfleur-The Old Wharf, 1825

Rome:The Forum Seen from the Farnese Gardens(파네스 정원 풍경), 1826

The Augustan Bridge at Narni, 1826

Chartres Cathedral, 1830

Honfleur-Calvary on the Cote de Grace, 1830

Fontainebleau, 'The Raging One', 1830

A Farm in the Nievre, 1831

View of Genoa from the Promenade of Acqua Sola, 1834

Hagar in the Wilderness, 1835

Geneva-View of Part of the City, 1835

Venise, La Piazzetta, 1835

Ville d'Avray- The Pond and the Cabassud House, 1835-40

Diana Surprised at Her Bath, 1836

A View near Volterra, 1838

Portrait of Mme. Legois, 1838

Portrait of Laurent-Denis Sennegon, 1842

Gardens of the Villa d'Este at Tivoli, 1843

Genzano-Goatherd and Village, 1843

A Windmill in Montmartre, 1845

Forest of Fontainebleau, 1846

Morning, the Dance of the Nymphs, 1850

물가의 버드나무, 1855

1855년에 그려진 이 그림은 코로가 즐겨 그렸던 <물가의 나무> 연작 중에서도 가장 뛰어
난 작품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소몰이 소년인지, 혹은 어른인지 너무 작게 그려져 알아
볼 수 없는 사람들이 한적한 물가로 소를 몰고 나온 듯하다. 소들은 풀밭에 자유롭게
풀려져 있으며, 세 사람은 큰 버드나무 아래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코로의 화폭에는 인물들과 동물들이 작게 그려지는 대신에 자연이 우위를 점하고 있다.
이는 같은 바르비종파 화가로서 전원을 배경으로 인물들에 초점을 맞추었던 밀레의 그림
과 비교할 만하다. 화면의 오른쪽과 상단은 마치 불어오는 미풍을 위한 공간처럼 비워져
있다. 버드나무의 유연하고 가녀린 가지들은 구름처럼 가볍다. 화폭에 얇은 회색 베일을
드리운 듯 화면은 뿌옇고 흐릿하다. 이 작품 역시 1850년 이후 후기 작품의 전형적인
특징인 몽롱하고 시적인 화풍을 보여주고 있다. 코로는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수면을
하얀 물감으로 채색하고, 물가에 어린 인물의 그림자는 정확한 묘사를 생략한 채 그 인상
만을 그려냈다. 그는 끝내 형태와 사실적인 묘사를 버리지 않았으나 태양 광선, 바람,
수면의 일렁임 등 미세한 자연의 울림에 주목한 그의 작품은 이미 인상주의의 도래를
예측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코로는 사실주의나 인상주의를 거론할 때마다 '선구자'의
위치에 자리한다. 고전의 낭만적인 자연관에서 탈피, 자연을 직접적으로 관찰했던 그의
작품이 사실주의와 인상주의로 넘어가는 중요한 지점에 자리하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들은 현재 루브르 박물관과 오르세 미술관에 나뉘어 전시되고 있다.

A Road Near Arras, 1858

La Toilette(Landscape with Figures), 1859

Orpheus Leading Eurydice from the Underworld, 1861

유리디케를 이끄는 오르페우스

Souvenier de Mortefontaine(모르트퐁텐느의 추억), Salon of 1864

코로는 바르비종파 화가의 한 명으로서, 아틀리에를 벗어나 야외에서 직접 그림을 그리면
서 자연과 교감을 나누고자 하였다. 코로와 그의 동료들로부터 시작된 이러한 근대
풍경화는 낭만적인 자연관을 거부하고 자연을 직접 관찰하여, 사실주의와 인상주의로
나가는 길을 열었다. 파리 북동쪽의 작은 마을 모르트퐁텐느는 주위의 호수와 숲,
그리고 18세기경에 세워진 성과 더불어 마을 자체가 한 폭의 풍경화를 연상시키는
시정이 넘치는 곳이었다. 이 작품에서 코로는 정오의 태양이 떠오르기 전, 아침 시간
호수에 산책 나온 소녀들을 담고 있다. 새벽 안개가 채 걷히지 않은 뿌연 대기 속에
녹회색의 나뭇잎들의 조화가 서정적인 분위기를 더한다. 키 작은 풀 숲 사이로 보이는
작은 흰 꽃들은 고요한 정경 속에 예기치 못했던 생기를 부여한다.
이는 인상주의자들이 야외에서 포착했던 빛나는 작은 색점들, 자발성을 예감하게 한다.
이 작품은 전기 작품에서 보여줬던 명확한 명암 표현에서 벗어나, 몽롱함과 낭만적인
분위기로 특징 짓는 후기 작품에 속한다. 호수와 숲, 빛과 같은 전형적인 요소를 서정적
으로 재현한 것이 특징으로, 1860년대 비슷한 풍경화들 중 미학적으로 가장 완성도가
높은 유명한 작품이다.

The Letter, 1865

The Woman with a Pearl

Young Woman with a Mandolin, 1865

Jeune Femme au Puits, 1865-70

Agostina, 1866

Church at Marissol, 1866

코로가 그린 마리셀 교회는 그가 이탈리아에서 만나 사귀었던 화가 친구 바댕을 만나러
가곤 하는 보베 근교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금도 그 자리에 남아있는 마리셀 교회는 테랭
둑위 언덕에 요새처럼 세워져 있다. 1866년 봄의 계절에 9일 동안 아침마다 교회를 보며
그림의 모티브를 잡는 작업을 수행했던 코로는, 나무들이 줄을 지어 만들어내는 원근법의
효과와 물빛이 반사하는 빛의 효과를 결합하여 뛰어난 풍경화 <보베 교외에 있는 마리셀
교회>라는 작품을 완성하게 되었다.
코로는 일생동안 화가로서 누리는 명예로운 삶을 살았는데, 1867년 살롱에 전시되었던 이
작품은 빅토리아 여왕의 찬사를 받았고, 그녀는 리차드라고 불리는 재단사에게서 4천프랑
의 금액에 해당하는 돈을 지불하고 그 그림을 구입하게 되었다.

Ville d'Avray, 1867-70

Woman Reading in a Landscape , 1869

Interrupted Reading, 1870

Fishing with Nets(투망), 1871

코로 특유의 고전적인 기품이 서려 있는 작품으로, 강가에서 한가로이 그물 낚시를 하는
사람을 그리고 있다. 작품이 제작된 1871년 프랑스 사회는 보불 전쟁과 파리 코뮌으로
혁명 후 최대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이 그림은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한가로운 강가의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객관적인 시각이든, 혹은 비판
이든지 간에 이 작품 속에서 사회적 현실에 대한 발언을 찾기는 힘들다.
바람에 가볍게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햇빛이 비추는 풍경은 더 없이 평화롭다.
전경에 낚시를 하고 있는 인물은 신화 속의 인물로서 작품 속에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중심이 아니며, 그저 한낱 미미한 존재로 묘사되었을 뿐이다. 코로의 모든 작품에서
그렇듯이 인물은 풍경의 한 요소이며, 독립된 인간으로서의 중요성은 생각할 수 없다.
이 작품을 비롯해 코로의 모든 작품들은 사회 현실을 담았던 쿠르베나 도미에의 작품
과는 달리 자연과의 내밀한 교감을 그리고 있다. 그는 주로 은빛이 도는 녹회색을
사용하여 서정적인 느낌을 나타냈는데, 후기에는 이 작품처럼 주로 단색조의 풍경화를
그렸다.

Arleux-du-Nord, the Drocourt Mill, on the Sensee, 1871

The Sin-le-Noble Road near Douai, 1873

Woman in Blue, 1874

Gypsy with a Mandolin, 1874

The Mill of Saint-Nicolas-les-Arraz, 1874

성 니콜라 레즈 아라스 방앗간
당시는 그림을 야외에서 그린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틀리에라는 말은 단순한 작업실 이상의 의미를 지녔던 것이다. 풍경이 인물화나 역사화
의 단순한 배경에서 그 자체로 독립된 장르로 인정받으면서, 빛은 심상치 않은 중요성을
부여받게 되었고, 이는 이어 빛 자체가 아니라 빛의 순간적인 움직임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게 된다. 인상주의는 바로 이 빛과 사물의 관계에 대한 전면적인 재인식에 다름
아니었다. 빛 자체는 어떤 경우에도 화폭에 담을 수가 없다.
빛은 말 그대로 눈부신 것이다. 인간은 사물에 비쳐 사물의 모습과 색을 간직한 채 반사
되어 나오는 두 번째 빛만을 감지할 수 있을 뿐이다.
인상주의 선구자로 코로를 꼽을 수 있다면, 이는 그의 풍경화들이 위의 특성을 최초로
본격적으로 회화에서 실험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작은 점들로 이루어진 빛들은 가늘게
진동하고 있으며, 이는 사물의 견고함에 대한 이의 제기이면서 동시에 감각의 신빙성에
대한 회의이기도 하다. 코로의 작품에 어른거리는 멜랑콜리는 이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기하학적 단순화를 지향해 가는 세기말의 작풍은 낭만주의에 깊이 물든 그와는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그의 풍경화들은 눈에 보이는 사물이 전부가 아님을 선언한 것이다.
코로는 일찍이 "우리를 감동시킨 첫 번째 인상을 잃어버리지 말라"고 말했다.
모네의 말이기도 한 이 선언은 물과 빛에 예민했던 모든 인상주의자들의 신조이기도 했다.
온화하고 밝은 채색과 영롱하기조차한 빛의 떨림에도 불구하고, 그의 그림에는 과거에
대한 그리움이 짙게 베어 있다. 빛으로 가득한 기억 속에서 코로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와 물 흐르는 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그의 그림에는 소리가 있는 것이다.

Venise-Gondole sur Le Grand Canal

Ville-D'avray - Paysanne Et Son Enfant Entre Deux Arbres Au Bord De L'etang



★ 루소(Theodore Rousseau:1812~1867) ★



프랑스 파리에서 재봉사의 아들로 태어난 루소는 14세 때부터 친척인 생마르탱의 지도를
받는 한편, 혼자 다른 사람들의 작품을 베끼는 방법으로 그림을 공부했다.
1820년대에 들어서는 자연을 직접 관찰하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이는 당시로
서는 새로운 시도였다. 그의 스승은 신고전주의 전통에 속해 있었지만, 루소는 17세기
네덜란드 풍경화가들과 같은 시대에 살았던 리처드 파르크 보닝턴이나 존 컨스터블
같은 영국 화가들의 작품을 광범위하게 연구하여 자신의 화풍을 계발했다.
그의 초기 풍경화는 자연을 거칠고 난폭한 힘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프랑스의
저명한 낭만파 화가와 작가들의 찬사를 받았다. 1831년부터 루소는 프랑스 살롱전에
정기적으로 작품을 출품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836년 심사위원들은 <소테의 급습,
1834>를 낙선시켰고, 그 후 7년 동안 그의 출품작은 모두 퇴짜를 맞았다.
그러나 살롱의 가혹한 견제에도 불구하고 그의 명성은 계속 높아졌다.
루소는 1833년 처음으로 퐁텐블로 지역을 찾아갔고, 10년 뒤에는 바르비종이라는 마을
에 정착하여 밀레, 뒤프레, 디아스 등 풍경화가들과 함께 그림을 그렸다.
1848년 혁명이 일어나자 프랑스 살롱은 좀더 자유로운 분위기가 되었고, 루소는 마침내
프랑스의 주요 풍경화가로서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의 작품들은 1855년 국제
박람회에서 전시되었으며, 1867년 박람회의 미술부문 심사위원장이 되었다.

Market in Normandy, detail, 1830s

Under the Birches, 1842-43

Sunset Near Arbonne, c.1845-1848

Der kleine Fischer, c.1848-1849

The Forest of Fontainebleau, Morning, 1850

Oak Trees in the Gorge of Apremont, 1850-52

The Edge of the Woods at Monts-Girard, Fontainebleau Forest, 1854

The Village of Becquigny, 1857-64

Springtime, 1860

Chaumiere a Barbizon

Coucher de Soleil

Forest at Fontaineble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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