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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27 사실주의: 쿠르베

AH101 2012. 2. 16. 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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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사실주의(寫實主義: Realism Art)

사실주의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855 쿠르베(Gustave
Courbet, 1814~1877)
당시의 주목받지 못한 자신의 작품들을 모아
개최한 개인전에 '레알리슴'이라는 이름을 부여한 때부터였다.
현실을 주관적으로 변형·왜곡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충실하게 반영하고자
하는 예술가의 태도를 보였다.

미술에서 사실주의는 미술사의 유파, 그리고 예술철학적 관점에서 특정한
세계관에 대해 말할 사용되는 미술비평 또는 미술사적 용어이다.
미술사조로서의 사실주의는 일반적으로 19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나타난
유파를 일컫는 것으로서 G.쿠르베와 H.도미에, F.밀레 등의 화가들이 지향
했던 태도와 기법을 의미한다.
쿠르베는 그의 그림에 나오는 농부들과 노동자들의 추한 꼴과 중산층
부인들의 뚱뚱하고 저속한 모습으로 기존 사회에 대하여 항의했으며
밀레(Jean-Francois Milet, 1814~75) 육체노동의 찬양을 그리며
화면에서 귀족을 밀어내고 농부들을 서사시의 새로운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도미에(Honore Daumier, 1808~79) 부르죠아지의 우둔하고
몰인정한 면을 그리며, 부르조아지의 정치와 법률과 오락을 비웃고
부르조아적 관습과 예절의 뒤에 숨겨진 모든 위선을 폭로한다.
여기서 주제의 선택이 예술적인 배려보다 "사회적" 배려에 의해 결정되었음은
사실이다. 이때는 풍경화 조차도 기존 사회의 문화에 대한 반항의 하나가
되었다. 낭만파 풍경화는 아직도 하나의 독립된 세계이었기에 일상생활과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고집할 필요가 없는 어떤 비현실적이고 이상적인 대상을
그린 것이다. 쿠르베는 자신의 이러한 태도에 대해 사회주의적이라는 당시
미술계의 비평에 맞서 "나는 혁명의 열렬한 지지자이자 공화주의자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리얼리스트이다"라는 말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리얼리즘은 이러저런 방식으로 그려야 한다는 기법이나 방식으로부터
세계관으로 표명되었으며, 이런 경향은 예술을 인종·시대·환경의 측면에서
고찰하고자 역사가 H.텐과 소설가 졸라에게서 발견할 있는 경향이다.
쿠르베에게서 발견할 있는 리얼리즘 정신이 구현된 작품으로 2
세계대전 폭격으로 소실되었으나 리얼리즘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알려지고
있는 《돌깨는 사람들》과 이듬해에 그려진 《오르낭의 매장》일 것이다.
특히 《오르낭의 매장》에서 그는 매장의 세속적인 의미를 강조하여 풍경을
사회공동체에 내재하는 하나의 사건으로 부각시켰다.
매장되는 사람은 누구라도 상관없으며 따라서 죽은 자의 영혼이 어떻게 되든
내세와 어떤 관계를 가지든 상관없다. 매장되고 있는 장소, 그리고 매장에
참여하고 있는 공동체의 성격만이 그림의 요점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회적·회화적 리얼리즘이다. 쿠르베와 더불어 리얼리스트로 분류할 있는
동시대의 화가는 도미에와 밀레이며 쿠르베의 회화를 통해 확인한 바와 같이
리얼리즘은 당대의 현실에 대한 정직한 기록이자 현실의 규명(糾明)이며
세계관의 반영이라는 점을 확인할 있다.

이에 반해 사실주의 화가들의 (프랑스 Barbizon) 풍경은 숲속의 빈터나
수풀 언저리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친숙하며 너무나 가기 쉽고 갖기 쉽기 때문에
현대의 도시인에게는 하나의 경고와 책망이 되지 않을 없는 것이다.
이러한 하잘 없는 주제의 선택에서 우리는 쿠르베, 밀레, 도미에 등의 인물
선택에서 것과 같은 민주적 정신의 표현을 본다. 그러나 사실주의는 얼마
가지않아 낭만주의의 풍경화 못지않게 인습적이 된다. 그것은 인상주의의
대두와 관련된다. 사실주의는 무엇을 그릴 것인가를 가지고 고민했지만
그리는 방법상, 기교상에 있어서는 고전의 것을 답습했다는 반성이 있었던
것이다. 뒤를 이은 인상주의는 무엇을 그릴 것인가 보다는 그리는 방법상의
혁신을 이룩하였다. 그것에 몰두하여 후기로 갈수록 방법의 연구에 치중하게
되었다. 이후 정치적, 사회적 현실과의 관계는 자연히 멀어지며 동시에 인간적
관계도 멀어지며 남는 것은 오로지 예술 자체인 것이다.
이제 예술가는 감식가를 위한 예술(화랑 미술) 하며 민중은 이상 예술을
이해할 수도 없고 관심도 갖지않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현실을 충실하게 반영하고자 하는 태도는 19세기 이전에도
있었으며 사례를 구석기시대 원시동굴벽화로부터 북유럽 르네상스 시대의
J.
아이크와 알브레히트 뒤러, 17세기의 카라바조, 베르메르, 렘브란트
D.
벨라스케스 그리고 F.고야 등에게서 발견할 있다.
그러나 미술사적 맥락에서 사실주의는 19세기 언어적 산물로서 1821년에
샹플뢰리에 의해 제안되어 19세기 중엽에 하나의 예술운동을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당시 사실주의는 예전의 미메시스(mimesis:모방)이라는 용어를
대체하여 예술의 실재에 대한 의존성을 표현하는 것으로 사용되었으나
일반적인 개념으로 정립됨에 따라 미메시스만큼이나 애매한 것이
되었다. 사실주의가 이론적 용어로 분류되는가 하면 마르크스주의에서
보여지듯 실천적 의미로 통용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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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에 들어 추상과 다른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재현적인 경향에 대해
'
사실주의'라는 명칭을 부여하는 경향이 많다.
그런 만큼 사실주의는 해석하기에 따라 매우 다의적이며, 극단적 사례를
미술적 사실주의라는 서로 모순관계에 있는 언어가 결합된 명칭을 통해
확인할 있다. 이런 점이 사실주의에 대한 정확한 개념 정의를 가로막고 있는
장애요소이다. 그러나 관학주의와 고전주의 낭만주의가 지배하던 19세기
프랑스에서 객관적인 현실의 충실한 재현이란 과제를 수행하고자 사실주의는
당시 미술과 비교해볼 전위적인 성격을 드러낸다.
그들은 시대에 적합한 것은 당시대의 현실 속에서 취해져야 한다고 믿었으며
그러한 믿음의 이면에는 자연과학 기술의 발달에 의한 자연과 사회현실에
대한 관심의 고조, 계몽주의 사상의 파급, 프랑스 대혁명을 통한 민주주의
사회의 도래와 실증주의 철학의 확산, 산업혁명, 마르크스·엥겔스에 의한 과학적
사회주의로의 발전이란 사회적 배경과 조건이 작용하였다.
이미 1820년대부터 프랑스 예술계에서 언급되던 사실주의를 자신의 회화에
채택한 쿠르베는 J.A.앵그르와의 천사(天使) 논쟁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천명한 일화로도 유명하다. 고상하고 우아하며 교훈적이어야 한다는 당시의
지배적인 미적 규범과 상반되는 노동자, 평범한 사람들을 그리는 것에 대한
앵그르의 불만에 맞서 쿠르베는 "나에게 천사를 보여주면 나는 그것을 그릴
있다"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이것은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은 결코 그리지
않겠다는 태도이며, 밑바탕에는 19세기 프랑스의 '과학주의적 태도' 깔려
있다. 이런 점에서 쿠르베는 '미술에 있어서 토마스' 같은 존재라고
있다. 말하자면 토마스의 의심과 같은 맥락에서 쿠르베의 태도는
실증주의와 상응할 뿐만 아니라 E.졸라나 콩쿠르 형제의 예술이론에서 발견할
있는 '과학주의' 연관을 맺고 있으며 그것이야말로 근대정신의 발현이다.

사실주의는 정치적 상황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당시의 사회는 1848년의 정치적 상황을 경험한 세대로 이루어졌다.
프랑스 혁명의 실패, 6 봉기(1848623~26일까지 파리의 노동자들이
국민 공장 해체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여 일어난 사건) 진압, 나폴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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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의 집권 , 모든 이상과 모든 유토피아가 실패하고 사람들은 오직
사실에만 집착하고자 하였다. 사실주의의 이러한 역사적 근원은 낭만주의적
성격을 띈다. 낭만주의식 현실로부터의 도피를 거부하고 사실 묘사에 있어서
철저한 정직성을 요구한 , 개관성과 사회적 단결을 보장하는 길로서 개성의
배제와 무감각성을 추구한 , 현실을 인식하고 묘사하는데 그치지않고 그것을
개조하려는 자세로서의 행동주의 그리고 소재의 선택과 감상자 층의 선택에
있어서 대중적인 경향, 이러한 특징들이 사실주의의 정치적 근원과 관련된
것이다. 이에 사실주의적 태도를 취한 세력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사회적
편견들을 미학적 논쟁의 전개로써 은폐하고자 했으며, 이는 오늘날의 현실과
상응한다. 그들이 주장하기를 사실주의는 모든 이상과 윤리를 배제하고 갖은
추악하고 비천한 , 병적이고 음란한 것에 탐닉하여 현실을 무분별하고
맹목적인 것으로 모방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이 정말로 꺼린 것은
사실주의가 현실을 얼마나 모방했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어떤 현실을 모방
했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들은 사실주의가 고전주의와 낭만주의가 이루어
놓은 가치관을 파괴하며, 수많은 혁명과 사회적 혼란에도 불구하고 1850
까지 거의 변함없이 심미적 이상만을 추구하던 작가들을 배격하고 새로운
인간과 새로운 사회질서를 위해 투쟁하는 무기로써 사용됨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주의는 합리적 질서 위에서 대상을 명확히 표현하기 위해서 극단적인
형식화나 데포르마숑을 행하지 않는 예술사조이다.
대상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그러나 미술사적으로 , 사실주의는 의미가 다양하여 명확하고 일관된
정의를 내리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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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사실주의가 흔히 낭만주의 이상주의와 대립된 개념이었던
비해, 20세기의 사실주의는 추상적이란 말과 대립된 개념으로 쓰인다.
역사적으로 사실주의는 자연의 존중과 관찰이 주요한 과제였으므로
이런 점에서는 자연주의와 엄밀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리 주관을
피하고 대상의 엄격한 객관화를 추구한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작가의 개성이
반영되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에 리얼리스틱한 표현이라 해서 자연이라는
패턴의 단순한 반복만이라고는 없다.
사실주의는 시대, 작가에 따라서 독자적인 개념으로 받아 들여졌다.
이를테면 구석기 시대 동굴의 벽화, 헬레니즘의 조각, 아이크 형제, 뒤러
벨라스케스, 고야등의 작품에서 사실주의의 여러 면모를 있다.
역사적 유파로서의 사실주의는 19세기 중반부터 후반에 걸쳐 낭만주의
이상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에 확대되었는데
발생에는 부르주아의 대두, 과학의 발전, 기독교의 권위 추락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도미에의 시니컬한 사실주의는 쿠르베의 이상화 공상화를
배제함으로써 사실주의의 정점을 이루었다.
독일에서는 라이플, 벨기에에서는 뫼니에등의 작품에서 리얼리스틱한 생활
묘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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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에 들어오면서 사실주의는 변질되어 이념과 기법이라는 양극으로
분열된다. 19세기 후반에 발명된 사진이란 새로운 기술의 급속한 보급으로
사실주의가 추구해 대상의 객관적이고 엄밀한 재현은 이상 예술가들에게
매력을 주지 못했다. 그리하여 계속되는 전쟁과 혁명의 와중에서 화가는
사회와 인간에게 눈을 돌리고 진부한 외관만의 묘사를 초월하여 새로운
현실상을 그림으로써 이념과 기법으로 분극된 사실주의는 서로 교차하면서
유파를 초월한 미술의 저류를 형성해 왔다. 한편 눈에 보이는 세계를 그리는
기법으로서의 사실주의는 독일, 멕시코, 미국, 소련등지에서 각각 독자적인
전개를 보이고 있다.
독일의 사실주의는 오토 딕스, 게오르게 그로츠, 막스 베크만 , 케테 콜비츠
등으로 대표된다. 멕시코에서는 1912 혁명에 뒤이어 일어난 내전에 참가
했던 시케이로스, 리베라, 오로츠코등의 화가들이 식민지 시대의 아카데미즘에
반기를 들고 멕시코적 사실주의인 이른바 '멕시코 르네상스' 확립했다.
미국에서는 1930년대 뉴딜 정책하에 실업 구제를 위해 민중 생활 묘사나 벽화
제작에 미술가들이 동원되어 미국 풍경화파란 일련의 사실주의 경향이
일어났다. 이러한 경향과는 달리 1950년대 말과 1960년대 초부터
리얼리즘이란 표현이 쓰이기 시작했다. 이것은 주로 추상표현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아트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실주의에 대한 새로운 접근으로
있다. 여기에서 사실주의는 반추상적이란 개념은 물론, 전통적인
기존의 예술 사조에 대한 가치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한 말로 쓰인다.

예술이 인간과의 관계에서 발생하였으므로 인간을 위하여 수단시 됨은 학문이
수단시 됨과 같이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이것을 수준의 저하로 보거나 정치, 사회의 예속으로 본다면 예술은 이상
인간과의 관계를 끊고 작가 개인의 유희로 그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사실주의가 나름대로 인간의 삶에 복무하려 했으나, 정치적 여건
, 민중을 배반한 부르조아지의(민중과 더불어 민주를 위하여 싸웠으나
자신들의 이익을 철저히 옹호했음) 정치적 영향력이 극대화 됨과 동시에 예술은
부르조아지가 편승한 사회질서 체제로 흡수되어 하나의 상품가치로 전락해
버린 것과 같다. 그러나 언제인가 민중의 힘이 강대해진다면 예술은 옛날
귀족에 시민계급(부르조아) 복무했듯이 민중에 복무할 있으리라는 것은
혼자만의 상상일 있겠으나 오늘날의 미술이 사회 현실과 멀어져 있음은
안타까운 일이라 여겨진다. 여하튼 당시 사실주의가 오늘날에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음은 형식적 측면보다는 정신적 측면이라 있다.
그리고 사실주의는 역사의 기간에 끊임없이 민중의 삶에 기반을 두면서
이어져 왔으나 사실주의가 역사의 주인이 시기는 낭만주의와 인상주의의
중간기라 있다. 결국 사실주의는 이후의 사조인 인상주의에서도
명맥이 없어지지 않고 정신은 살아 계속 이어졌고, 오늘날에도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Gustave Courbert/Self-Portrait(Man with a Pipe), 1848-49


쿠르베(Gustave Courbert, 1819~1877)

프랑스 화가로 스위스 국경 가까운 프랑스 프랑슈콩테주 오르낭 출생.
1840
아버지의 권유로 법률연구를 위해 파리로 나왔으나
얼마 화가를 지망하여 화숙(畵塾) 다니며 회화습작에 몰두하는 한편
루브르미술관에서 에스파냐와 네덜란드파의 거장들의 작품을 열심히
공부하였다. 1844 살롱에 출품하여 입선을 하고, 1849 《오르낭의
매장》에서는 이색적 화재를 인정받았으나 1850년의 《오르낭의 장례식》은
화단의 평론을 양분하는 물의를 일으켰다.
지나치게 실경(實景) 묘사에 치우친 불경스런 희화(戱畵)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은 《돌 깨는 사람들》(1849), 1855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한 노작 《화가의 아틀리에》에 이르러 더욱 두드러졌다.
작품의 출품을 거절당하자 몽테뉴가에 손수 가옥(假屋) 짓고 입구에
'
사실주의'라는 간판을 걸고서, 작품을 비롯한 40 점의 자작품을
전시하여 자신의 예술상 입장을 도전적으로 표명하였다.
, 《센강변의 처녀들》(1856) 외에 많은 수렵도, 거치른 바다풍경
나부(裸婦) 등을 제작하였으나 1871 파리코뮌 , 나폴레옹 1 동상의
파괴책임으로 투옥되었다가 석방 스위스로 망명하여 객사하였다.
그의 견고한 마티에르와 스케일이 명쾌한 구성의 사실적 작풍은 19세기
후반의 젊은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보다 근본적으로는 당시의 고전주의와 같은 이상화나 낭만주의적인
공상표현을 일체 배격하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묘사할' 것을 주장한
그의 사상적 입장은, 회화의 주제를 눈에 보이는 것에만 한정 혁신하고
일상 생활에 대한 관찰의 밀도를 촉구한 점에서 미술사상 가장 의의를
남긴 것이다.

Self-Portrait(Courbet with a Black Dog), 1844(Signed 1842)

The Desperate Man (The Man Made by Fear), 1843-44

The Hammock, 1844

1845
살롱에서 낙선한 작품으로 원제는 <처녀의 > 이었다.
달아 해먹에 누워 잠자고 있는 부르주아 소녀를 그린 것으로, 소녀의 포즈는 S 형으로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있다. 극히 일상적인 모티브이면서 소녀의 모습에선 어딘가 모르게
신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과 비슷한 고전적인 취미를 보여준다. 숲과 인물이 자아 내는 신비
로운 분위기가 현실의 실감을 벗어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행복한 연인들>에서 보이는
젊은 날의 쿠르베의 정감이 여기서도 두드러지게 드러나고 있다.

줄리엣 쿠르베의 초상, 1844

1844
년에 제작, 이듬해인 45 살롱에 출품했으나 낙선된 작품이다.
모델인 줄리엣은 쿠르베의 누이동생 막내로, 그녀는 오빠를 누구보다도 존경했는데
쿠르베의 사후에는 그의 불명예에 대한 일체의 자료를 소각할 정도로 세심한 관심을 보여주
기도 했다. 1844년이라면 쿠르베는 음영이 짙은 초상화를 그리고 있었던 시기인데, 작품
에서는 그런 요소를 발견할 없다. 밝고 명랑한 분위기가 화면을 지배하고 있다.
달걀형의 얼굴과 다문 , 그리고 맑은 눈이 총명한 여인의 이미지를 한결 부각시키는데,
사각형의 칼라와 둥근 등의자의 , 여기에 어울리는 배경의 커튼과 카네이션의 선이 한결
장식적인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베를리오즈의 초상 , 1844-55

보들레르 초상, 1848

쿠르베가 시인 보들레르를 만난 것은 1846년경이다. 작품은 그로부터 2 후에 제작된
것으로 사상적으로나 생활에 있어 사람이 가장 밀착되어 있을 때의 것이기도 하다.
'2
혁명' 적극적으로 참가하고 새로운 시대에 어울리는 전위적 예술의 모험을 거듭하던
'
악의 ' 시인 보들레르의 젊은 날의 초상이기도 하다.
무렵 보들레르는 일정한 숙소가 없이 떠돌아 다녔는데, 쿠르베의 화실도 많이 이용했을
것으로 보이며, 그런 어느 날의 모습을 붙잡은 것일 것이다.
인물이나 기물이 침착한 톤으로 처리되고 있으면서 동시에 양감(量感) 넘친 표현을 보여
주는 쿠르베의 당당한 리얼리즘의 방향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Stonebreakers, 1849(돌깨는 사람들)

쿠르베에게 사실주의란 회화적 진실을 표현하는 수단이자 정치적 반항을 드러내는 수단
이었다. 서민들의 삶의 현장을 생생히 묘사한 그의 역작 <돌깨는 사람들> 2 대전 당시
폭격으로 망실되어 현재는 사진만 남아 있는 작품이다.
아깝게 사라져 버리긴 했지만, 사실주의자 쿠르베의 면모가 드러난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그림은 모자를 노인이 뙤약볕 아래서 무릎을 꿇은 도끼로 힘겹게 돌을 깨고 있다.
조끼는 낡아 너덜너덜하고 양말은 구멍이 있다. 뒤에 있는 소년은 학교에 다녀야
나이에 찢어진 셔츠와 멜빵도 하나밖에 남지 않은 바지를 입고 무거운 짐을 한쪽 다리로
받치고 있다. 쿠르베는 두사람을 자신의 고향인 오르낭 근처 메지에레 마을로 마차를
몰고 가다가 발견했다고 한다. 돌을 깨뜨려 건축이나 도로 포장에 쓰이는 작은 돌로
만드는 일은 당시 농사로는 생계가 어려운 최하층 농민들이 주로 하던 일이었다.
그들의 힘겨운 노동에 릴은 인상을 받은 쿠르베는 그들을 화실로 불러 그림의 모델로
서게 했다. 그림의 모델들은 자신과 관련이 없는 일을 위해 자세를 취한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해오던 일을 위해 자세를 취한 것이다.
그만큼 그림에서는 현실과 투쟁하는 가난한 서민의 모습이 생생히 되살아 난다.

밀레도 서민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렸지만 쿠르베는 종교적, 경건성이라든가 낭만주의적
으로 그리지 않았다. 가난한 사람들의 삶과 정서를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드러냄으로써
당시 미술계의 격렬한 찬반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쿠르베의 친구인 사회주의자 P.J. 프루동은 작품을 자본주의와 잠재적 탐욕을 저주한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고전주의를 지지하던 비평가들이 이처럼 정치의식이 뚜럿한
그림을 좋아할 만무했다. 비평가는 다음과같이 비꼬았다.
"
어떤 예술가도 이렇게 대단한 거장의 솜씨로 예술을 빈민굴에 처넣을 없을 것이다."
그러자 쿠르베는 다음과 같이 응수했다고 한다.
"
아무렴, 예술은 빈민굴에 처넣어져야 하는 것이지."
지금까지의 미술이 지배 계층을 즐겁게 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면, 이제부터는 서민들
목소리가 가감없이 반영되는 통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쿠르베의 생각이었다.

A Burial at Ornans(오르낭의 매장), 1849-50

1885
살롱의 심사위원들은 당대의 어떤 화가들보다도 쿠르베의 실력을 인정했다.
하지만 유독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작품 <오르낭의 매장> <화가의 아틀리에>만이
낙선되었다. 이에 분노한 쿠르베는 결국 별도의 임시 전시장을 만들었고, 그곳을 '리얼리즘
'이라 이름 붙이며 반발하고 나섰다. 사실주의라는 명칭은 쿠르베의 이름을 지칭하
대명사가 되었다. 쿠르베는 네덜란드를 여행하면서 렘브란트와 할스의 작품 연구를 통해
카라바조풍의 색채 처리와 빛과 그림자의 표현 방법을 익혔고 그것을 작품에 반영시
키고 있다. 그림은 쥐라 산중의 오르낭 마을에서 있었던 장례식 장면을 모티브로 해서,
시골에서 있었던 우연적인 사건을 역사화로 대치시켜 묘사한 것이다.
처음에 작품의 이름을 <오르낭에 있었던 매장의 역사화>라고 했는데 시골 마을의 평범한
장례식을 '역사화'라고 부른 것은 당시의 예술에 대한 비판을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다.
작품에서 역사화가 가지는 역사적 사건이라든지 인물의 영웅성은 찾아 없으며,
단지 종교적 의미를 초월한 삶과 죽음의 의미가 화폭에 담겨 있을 뿐이다.
쿠르베는 장례식이 지닌 의미를 관념적인 묘사가 아니라, 자기 중심의 사실적이고 누구에게
닥칠 있는 인간적인 현실로 나타내고 있다.
대작을 완성하기 위해 작가는 친구, 가족, 고향 사람들을 사람씩 아틀리에로 불렀고,
검은 색을 주로 상복과 흰색, 빨간색 등의 의복을 수직의 십자가와 대응시키게 그려
나갔다. 반아카데미즘을 표명한 작품은 추악한 장면을 소재로 택했다는 이유로, 1850
1851
살롱에서 격렬한 비난과 함께 사실주의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
돌깨는 사람들>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오르낭의 매장> 또한 사실주의자 쿠르베의 면모
드러난 걸작이다. 작품은 오르낭의 고향집 다락방에서 제작한 대작으로, 이를테면
사실주의의 선언서 같은 작품이다. 원제가 "군중도, 오르낭에서의 매장에 대한 역사적 평가"
작품은 평범한 시골 사람들의 일상을 위대한 역사화 형식으로 그렸다는 점에서 당시
미술 애호가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길이가 6미터가 넘는 그림은 크기만으로도 관객
들에게 뭔가 위대하고 거창한 혹은 이상적인 이야기를 전해주리라 지레 짐작하게 했다.
역사화라는 것이 전부 종교적 신화적 혹은 역사적 영웅들의 활약상을 그린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림을 마주한 당시의 프랑스 관객들은 자신이 알고 있거나 기릴 만한 영웅이
그림에 사람도 등장하지 않을 아니라, 내용 자체가 평범한 촌부들의 평범한 일상사
라는 것을 알고는 분노를 금치 못했다. 죽은 사람이 뭔가 위대한 일을 하다 죽었다든지,
죽은 영혼이 하늘로 들려 올라가 신의 영광을 찬미한다든지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
죽었으니 묻고 슬퍼한다는 평범한 내용이었기에 관객들은 엄청난 배신감을 느꼈던 것이다.
이렇게 현실을 냉철하게 묘사하면서 쿠르베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사실주의란 다른
무엇이 아니다. 오로지 이상을 거부하는 것일 뿐이다." 죽음이라는 자연적 현상과 그것을
슬퍼하는 사회적 현상을 넘어 이상화 신비화하거나 도덕적 교훈으로부터 찾는 것은 현실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방해가 된다는 것이 쿠르베의 생각이었다. 촌부의 죽음이 영웅의 죽음
보다 못하다고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에게 화가란 정직하게 자신이
경험한 사실을 그리는 것이였다. 이처럼 전통적인 관념의 예술가가 아니라 냉정한 해부학자
시선으로 사실을 표현한 까닭에, 그가 죽은 <오르낭의 매장> 루브르 박물관에 들어
"<매장> 루브르에 들이는 것은 모든 미학에 대한 부정" 이라는 격렬한 반발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미술사가들은 쿠르베의 그런 태도를 자기 시대의 진실을 표현하기 위해 애쓴,
진실로 근대적인 투쟁으로 보고 있다.

The Peasants of Flagey Returning from the Fair, Ornans, 1850-55

The Young Ladies of the Village, 1851-52

도시에서 여인들이 소를 돌보고 있는 시골 소녀들에게 자선금을 주고 있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그림 속의 여인들은 쿠르베의 누이들이며, 배경은 쿠르베의 고향인 프랑슈콩테주
오르낭 근처의 작은 마을이다. 쿠르베가 작품을 제작할 당시에 유럽은 대부분 농촌사회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농촌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문맹이었고 심한 빈곤에 시달렸다.
쿠르베는 작품을 통해 나름대로 사회성 있는 발언을 시도하려고 하였다.
여인의 삶을 주로 그린 쿠르베의 일련의 작업 초기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미역감는 여인들, 1853

1853
살롱에 출품된 쿠르베의 작품 가운데 가장 많은 비난을 받은 작품이다.
전시회장을 방문한 나폴레옹 3세까지도 작품 앞에서는 충격을 금치 못하고 승마용 채찍으
화면을 내리쳤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들라크르아 역시 얼굴을 찡그리며 분노하기는 마찬
가지였지만, 그의 힘찬 양감에 대해서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루벤스를 연상시키는 풍만한 육체의 여인은, 아름다운 인체를 통해서 정신 적인 이상을 표현
한다는 이상주의적 누드와는 거리가 강인한 육체의 힘을 엿보여 준다.
등을 보이고 있는 누드의 여인이 물에서 올라오고 있으며, 하녀인 듯한 오른쪽 숲에 앉아
있는 여인이 무언가 말을 받으면서 차비를 서두르는 모습이다.
누드의 여인이든 오른손과, 아래 여인의 손의 표정이 돋보이는데, 현실적인 누드의 여인
비해, 아래 여인의 포즈는 다분히 신화화에서 엿볼 있는 극적인 동작을 취하고 있다.

The Sleeping Spinner, 1853

The Houses of the Chateau D'Ornans, 1853

The Meeting(Bonjour, Monsieur Courbet), 1854

만남(안녕하세요,쿠르베 선생)

쿠르베가 그림 도구를 짊어지고 파리에서 남프랑스의 몽펠리에라는 곳에 당도한 참인데,
지방 은행가 알프레드 브뤼야스가 개를 끌고 나가서 쿠르베를 맞이하고 있는 장면이다.
은행가인 브뤼야스는 쿠르베에게는 후원자이며 은인이기 때문에 먼저 인사를 건네야
사람은 쿠르베 쪽임에도 불구하고 쿠르베가 도리어 거만을 떨며 브뤼야스의 인사를 흘려 듣고
있는 형세이다. 라파엘전파의 사실주의는 쿠르베의 사실주의와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그들의 작품이 대개 자연의 외면적인 인상과 피상적인 면을 보이며 사실과는 무관한 감수성을
드러냈던 반면, 쿠르베의 작품은 라파엘전파와 같은 과거에 대한 동경 같은 것은 철저히 배제
하며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만을 묘사했다.
작품 역시 쿠르베의 '있는 것을 그대로 그린다.' 사실주의를 드러내고 있으며, 화가
자신을 보는 태도를 표현하고 있다.

화가는 화구가 담긴 상자를 짊어지고 시골길을 뚜벅뚜벅 걷고 있으며, 그의 앞에 몽켈리에
미술 애호가이자 쿠르베의 열렬한 후원자인 알프레드 브뤼야스와 그의 하인이 마중 나와
인사를 하고 있다. 작품은 먼지 나는 길과 길옆의 , 그림의 소재로 걸맞지
않아 보이는 것들을 묘사하며, 극적인 미화를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일상을 그리고 있다.
우아한 포즈도, 미끈한 선도, 인상적인 색채도 없지만, 꾸밈없는 구도를 특징적으로 드러내며
전통적이고 상투적 수법의 능숙한 조작과 인습에 대한 반발을 고무시키고 있다.

The Painter's Studio(화가의 아틀리에), 1854-55

이데올로기적이고 도덕적인 의미로 가득 있는 자화상은 미술가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담은 선언서가 되었다. 쿠르베는 풍경을 담은 이젤 앞에 있다.
옆에는 순수함과 청순함을 상징하는 누드모델과 흰고양이, 어린이가 있다.
쿠르베는 좌우 대칭을 이루는 그룹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오른편에는 그의 친척, 친구,
학생들이 있고 왼편에는 일상에서 흔히 있는 인물들이 있다. 그룹은 각각 승자
패자, 부자와 빈자 사이의 끊임없는 갈등을 나타낸다. 화면 중심에 있는 화가는 이러한
현실의 해석자이자 중재자이다.

작품은 1855 1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됐지만, 너무 크다는 이유로 입선조차 하지
못했다. 이에 대항하는 의미에서 쿠르베는 몽테뉴 가에 자비로 가건물을 짓고, '사실주의'
이름으로 자작 44점을 전시하는 한편, 사실주의 선언을 담은 프로그램을 판매한다.
"
나의 7 동안의 예술적 생애를 요약하는 사실적 우화"라는 부재를 달고 있는 <화가의 아틀
리에> 쿠르베 스스로의 주장에 따르면, 상상력을 통해 하나의 화폭에 그의 생애 동안 받은
모든 영향들을 담으려 작품이다.
무대처럼 펼쳐지는 화면의 중심에 고향 마을인 오르낭을 그리는 자신의 모습을 놓고 있으며,
쪽에는 동물들을 배치하고, 오른편에는 누드 모델을 놓고 있다.
또한 계속해서 사회주의 저널리스트인 프루동, 소설가 샹플레리, 시인 보들레르 같은 그의
정신적 지주들과 미술 애호가 브뤼야스 부부를 등장시키고 있다.
화면의 왼쪽에는 개괄적인 형태로 사회의 갖가지 상태에 있는 온갖 사람들을 사실적으로 나타
내고 있다. 쿠르베는 샹플레리에게 편지를 통해 왼쪽에 있는 이들은 '죽음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고, 오른쪽에 있는 이들은 '생명을 먹고사는 사람들'이라며, "나의 대의에 공감하고,
나의 애상을 지지하며, 나의 행동을 지원하는 모든 사람들" 그린 것이라고 말했다.
작가 자신과 주변 세계와의 대조를 강조하기 위해서 중심부의 인물은 밝고 선명한 햇볕
으로 조명되고, 배경과 측면에 있는 인물들은 중간 톤의 어둠으로 베일을 씌우고 있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The Grain Sifters(보리를 까부르는 여인들), 1854-55

여인은 열심히 보리를 까불고 있고, 여인은 일일이 손으로 낱알을 가려내고 있다.
오른편에는 소년이 뒤주인 듯한 나무통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평범한 농가의 실내 정경을 붙잡은 것이다. 곡식을 가득 넣은 자루들이 벽에 기대 세워져
있고 구석 구석에 그릇들이 널려 있다. 쿠르베는 현실을 즉사(卽寫)하면서도 가끔 고전
이나 민중 판화 같은데서 발상을 얻거나 구도를 원용해 오고 있는데, 작품의 발상이나
구도 역시 다분히 벨라스케즈의 <직녀들> 연상케 하는 바가 많다.
아마도 그는 일하는 여성들의 모습을 통해 보이지 않는 유락(遊樂) 여성들을 대비시켜
사회적인 의미를 강조하려고 것인지도 모른다.

Mere Gregoire, 1855

The Young Ladies on the Banks of the Seine (Summer), 1856-57

세느 강변의 아가씨들
1857
쿠르베는 작품을 살롱에 출품하였으나 그림 여자들의 표정이나 자태가 음란
하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도덕적 비난은 인상주의 화가인 마네의
<
풀밭 위의 점심>으로 이저지는 전조이며 동시에 인상주의 화가들이 즐겨 다룬 행락적 정경의
시초이기도 하다. 파리 세느 강변의 나무 그늘 풀밭 위에 2명의 여인이 누워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여인은 엎드린 자세로 눈을 감고 낮잠을 자는 듯하며, 다른 여인은
상체를 약간 세우고 비스듬히 누워 강쪽을 바라보고 있다.
강가에 매어 있는 보트로 미루어 근처에 데이트 상대인 남자들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어
여인의 모습은 더욱 에로틱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쿠르베는 작품에 대해 오래 전부터 구상하고 있었던 듯하며, 1850 경에 그린 모자를
처녀들의 모습을 다룬 일련의 습작도 이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The Quarry, 1857

The Fox in the Snow, 1860

The Trellis, 1862

Basket of Flowers, 1863

Portrait of P.J. Proudhon in 1853, 1865

1865
1월에 프루동이 사망하자, 쿠르베는 1853 그와 처음 알게 때의 모습을 재현시켰다.
화면 중의 1853년이란 작품의 제작 연대가 아니고 이처럼 사람이 처음 만났을 무렵의
연대이다. 쿠르베는 같은 고향 출신인 사상가 프루동과는 상당한 친교를 유지했을 뿐만
아니라 한때 프루동의 무정부주의적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傾倒) 적도 있다. 아마도
초상은 화가 자신에게 여러 모로 정신적 영향을 사상가에 대한 교분을 영원히 기념
하기 위해 제작된 것임이 분명하다. 1865 살롱에 출품되어 졸렬하고 못생겼다는 혹평을
받았으나 쿠르베의 치열한 사실 정신은 의외로 인물들을 통해 강하게 전달되고 있다.

The Woman in a Podoscaphe, 1865

1815
쿠르베는 노르망디 해안 투르빌에서 한때를 보냈는데, 작품은 그때 알게
지방 부호의 부인을 모델로 것이다. 11 17일자 편지에 '나는 투르빌에서 포토스
가프라고 부르는 작은 배로 해상을 저어가는 부인의 새로운 타블로를 시작했다.' 구절이
있다. 해수욕을 비롯한 해안에서의 놀이는 1825년경부터 프랑스에서 유행을 보았다고 하는데,
인상파 시대의 많은 해안과 해안에서의 놀이를 소재로 작품도 이런 시대적 취향에 이르렀
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쿠르베에게는 다소 어색한 소재이며 인물의 처리도 어딘가
모르게 부자연스런 데가 있다. 단순한 소재에의 신기로움만이 있다고 할까.

The Girl with the Seagulls, Trouville, 1865

Portrait of Jo, The Beautiful Irish Girl, 1865

Portrait of Countess Karoly, 1865

The Shelter of the Roe Deer at the Stream of Plaisir-Fontaine, Doubs., 1866

사슴의 은신처
1866
살롱에 출품되어 호평을 받았던 작품이다. 1865 겨울 쿠르베는 마리의 사슴을
빌어다가 숲속에 은신처를 만들어 주고 몰래 숨어들어가서는 사슴이 놀라 도망가지 않도록
조심 조심하면서 그렸다고 한다. 하루 작업이 끝나면 숲속에 캔버스를 감추어 두었다가
다음날 와서 그림을 계속했다고 한다. 다소 인용적인 제작 방법에도 불구하고 숲속에
사는 동물의 생태가 정확하게 포착되어 있으며, 흐르는 물의 투명함과 유동감, 숲속의
습기 같은 분위기가 실감있게 포착되고 있어 쿠르베의 사실적 방법의 극치를 보는 느낌이다.
무슨 소리에 뛰어갈 같은, 사슴의 약간 치켜든 뒷다리가 사실감을 더해 준다.

The Sleepers, 1866

The Rest During the Harvest Season, 1867

, 1868

쿠르베의 누드는 마네의 <올랭피아> <풀밭 위의 식사> 마찬가지로 당시의 관습적인
아카데미 화풍에 대한 일대 반항이었다. 여인의 육체는 고대로부터 모든 화가와 조각가들의
계속되는 주제였으나, 신화와 성경 속의 상징적인 의미로만 표현되어 왔다.
쿠르베의 <> 나타나는 여인은 보는 이들로부터 멀어져 가는 느낌을 주는 것과는 달리,
투명하고 밝은 육체와 깊이를 간직한 넓은 둔부를 통해 훨씬 사실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쿠르베에게 있어 누드는 한번도 그의 붓끝에서 떠난 적이 없는 장르였으며, 작품은 그의
누드에 대한 관심을 대표하고 있다. 쿠르베의 작품은 미술에 있어 사물의 재현이라는
고전적인 문제에 천착함으로써 아카데미 화풍에 대한 단순한 반대로서의 사실주의를 넘어
서고 있다. <>에서의 여인의 포즈는 레인란텔 같은 초기의 누드 사진가들에게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나부

The Cliff at Etretat After the Storm, 1869-70

폭풍이 지나간 후의 에트르타 절벽

1870
살롱에 출품된 영불(英佛) 해협에 자리한 에트르타를 소재로 작품이다.
쿠르베는 1869년에 이곳에 머문 적이 있는데 아마도 작품은 이때 그려졌을 것으로 보인다.
이곳도 또한 인상파 화가들이 즐겨 찾아온 곳이기도 한데, 모네도 같은 모티브의 절벽 풍경을
여러 그리고 있다. 그러나 모네가 풍경을 완전히 빛에 용해된 같은 일루젼(illusion)
한데 비해, 쿠르베는 대상 하나하나에 명확한 물체감을 구사하고 있다.
인상파와 사상주의의 상위(相違) 실감있게 보여 준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물빛, 그리고
맑은 하늘 투명한 빛과 대기감은 대상을 파고드는 화가의 치밀한 눈을 측정하게 한다.

파도

1860
년부터 70년경까지 쿠르베는 옹플뢰르, 르아브르 영불 해협을 모티브로 작품을
많이 그렸는데, 장의 파도 그림도 그려진 것이다. 당시 해안에는 많은 화가들이
몰려들어 해안 풍경을 그렸는데 이들을 가리켜 '상시메온파'라고 불렀다.
쿠르베는 속에서도 가장 활동적이었으나, 단순한 절벽이나 바다의 풍경을 다루는 화가는
아니었다. 그는 정면에서 바다의 존재에 육박해 들어가려고 했으며, 어떤 감상적인 표현이나
잔재주를 부리려고 하지는 않았다. 팔레트 나이프로 물감을 두껍게 칠해 올리는 기법을 통해
순간의 자연의 모습을 물질로써 영원화하려고 하였다.

시용의

파리 코뮌 방돔 기념탑 파괴 사건에 연루되어 3 월간의 옥살이를 하고 쿠르베는
출옥 후에도 막대한 배상금을 물지 않으면 안되었다.
스위스로 망명한 그는 번이나 거처를 옮긴 최후로 레망 호반의 뚜르 펠스에 정착
하였다. 호반에 있는 시용의 성과 알프스 산을 소재로 많은 작품도 무렵에 제작된
것이다. 그러나 건강이 나빠 제자들에 의한 도움으로 제작해 냈기 때문에 상당수의 작품이
제자들의 손에 의해 이루어지기도 했다. 쿠르베의 친구였던 브론돈 박사는 쿠르베 자신의
작품과 제자들것으로 의심이 되는 작품을 일일이 구분하였는데, 작품은 쿠르베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생트 펠라지에서의 자화상

쿠르베는 많은 자화상을 그렸으며, 특히 젊은 날의 자화상은 자신을 내세우는 자만심과
다분히 연극적 제스처까지 보여준 있다. 중년이 되면서 비만해지자, 자신을 모델로
그림은 중단하고 대신 사진사에 의뢰해서 여러 가지 포즈로 자신을 찍게 적이 있다.
작품은 실로 수년만에 다시 그려진 자화상으로, 특히 감옥 속의 그것이라는 점에서
기념적인 의미까지 띠고 있다. 방돔 기념주 파괴의 책임을 지고 6개월간 감옥살이의 판결
받은 그는 실제 3개월밖에 감옥에 있지 않고 병으로 가석방되었는데, 자화상은
때의 일을 기록하기 위한 것이 틀림없을 같다.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약간 초췌한
모습은 당시의 쿠르베의 심경과 상황을 묘출해 놓고 있다.

"Courbet in vinculis faciebat."(송어), 1871

1871
년에 제작된 특이한 작품은 취리히의 쿤스트하우스에 소장되어 있는데, 라틴어로
"
족쇄에 채워진 쿠르베가 만듦" 뜻하는 문구가 서명되어 있다.
낚싯바늘에 잡힌 거대한 송어의 이면에는 화가가 남긴 자화상 가장 나중에 제작된 것이다.
정치적, 도덕적 이유로 투옥되고 스위스로 추방당했던 쿠르베는 원래 살던 물에서 끌려나와
꼼짝 못하고 괴로워하며 흘리는 물고기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다.
이러한 배경지식을 모른다 하더라도 헐떡거리는 고기에 공감하는 표현 방식과 회갈색의 무겁
어두운, 흙을 연상시키는 쿠르베의 전형적인 색채는 작품이 걸작임을 한눈에
있게 해준다.

Plage de Normandie, Gustave Courbet, 1872-18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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