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미술사 참고자료/로댕

서양미술사48 로댕

AH101 2012. 2. 16.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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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근대 조각의 거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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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 회화가 주제와 양식에서 전통에 대한 반란을 거듭하며 탈바꿈을 하는
동안 조각은 고전주의 양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영웅들의 이상적 모습의 형상화를 통해 이전의 전통을 답습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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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 조각사에서 가장 빛나는 작가는 로댕이었다. 뛰어난 상상력과 폭넓은
주제로 엄청난 작업량을 보여준 로댕은 뛰어난 상상력과 폭넓은 주제로 작업
하여 문학적, 상징적 주제를 사실주의적 인체의 표정과 동작을 통한 극적이고
감정에 충만한 인물로 표현하였고, 낭만주의와 사실주의, 상징주의, 표현주의
영역을 두루 거치고 있다. 또한 광선에 녹아드는 듯한 표면효과와 음영의
대비는 인상파 경향과도 유사하다. 이러한 조형성의 강조는 새로운 조각의
방향을 제시하여 후대의 조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로댕은 전통을 파괴한 혁신적인 작가라기보다는 전통을 종합하면서 혁신을
이룬 20세기 현대조각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동적인 조각보다는 정적인 조각을 선호한 마이욜은 표면의 터치를 배제하여
광선이 표면에 고르게 퍼지는 효과를 창출하였다.
거의 대부분이 여인상들인 마이욜의 조각은 인체 조각의 풍요로움과 따뜻함
고상함과 당당함을 창출하였다.

로댕(Francois Auguste Rene Rodin: 1840~1917)


1840
11 12 파리에서 출생하였다. 근대조각의 시조로 일컬어진다.
하급관리의 아들로 14 국립공예실기학교에 입학, 조각가로서의 기초를
닦았다. 1857년부터 3년간 국립미술전문학교 입학시험에 응시했지만
낙방하였다. 1861년에는 아버지가 퇴직하였기 때문에 생활비를 벌기 위해
갖가지 부업을 하면서 야간 제작에 몰두하였다. 1862 누이의 사망에
충격받고 수도원에 들어갔으나, 에마르 신부의 설득으로 작업장에 돌아왔다.
1864
살롱에 처음으로 출품한 《코가 망그러진 사나이》는 생생한
사실적인 묘사가 심사위원들에게 거부감을 주어 낙선했다.

시기부터 생활을 위한 건축 장식업에 종사하다가, 1870 프로이센
-
프랑스 전쟁에 참가한 제대하여 벨기에의 브뤼셀로 떠났다.
이곳에서 7년간 건축장식 직공으로 일하면서 유럽 각지와 이탈리아를
여행하였다. 특히 1875년의 이탈리아 여행은 로댕의 예술 전개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1878 파리에 돌아와 벨기에 체재 제작한
《청동시대(靑銅時代)》를 출품하였다. 이것은 작품이 지닌 사실적
박진감으로 인하여, 살아 있는 모델에서 직접 석고형을 것이 아니냐는
근거없는 비난을 받으면서 세간의 주목을 끌었다.
《청동시대》는 로댕예술의 출발점이며, 그의 사실적 표현의 완성이라고
있는 걸작이었다. 1880년에 작품은 재인식되어 살롱에서 3등상을
받고 국가에서 매입하였다. 이와 동시에 로댕은 미술국 차관 체르케로부터
장식미술관의 현관 장식품 창작을 의뢰받았다. 그의 조각은 이때부터
《청동시대》의 사실적 표현에 만족하지 않고 내면적인 깊이가 가미된 생명력
넘치는 표현으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장식미술관을 위한 대작의 모티프를
단테의 《신곡(神曲) 〈지옥편〉에서 얻은 영감에 두고 거작 《지옥의 문》
(1880
1900) 제작에 착수하였다. 한편 이러한 사상 속에서 그의 명성의
중핵을 이루는 갖가지 작품, 《생각하는 사람》 《아담과 이브》 《칼레의
시민》(1884) 《발자크상()(1898) 등을 통해 다채롭고 정력적인 활동을
하였다. 그는 이탈리아 르네상스나 중세 프랑스 조각으로부터 많은 자극과
감화를 받았으나, 그가 추구한 웅대한 예술성과 기량은 18세기 이래 오랫동안
건축의 장식물에 지나지 않던 조각에 생명과 감정을 불어넣어, 예술의 자율성을
부여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훌륭하게 성취시켜 회화의 인상파와 더불어
근대조각의 전개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이후의 조각계는 직간접으로 모두 로댕을 출발점으로 시작되었다고
있다. 사망 그의 주거 전재산은 만년의 작업장이었던 파리의 호텔 비롱에
그의 미술관을 개설한다는 조건으로 국가에 기증되었다. 1916 국립로댕
미술관이 발족되어 조각의 대표작은 물론 데생·수채화 등도 전시되고 있다.
미국의 필라델피아미술관에도 로댕미술관이 부설되어 있다.
로댕의 작품 가운데 《세 그림자》 《이브 흉상》 《영원한 청춘》 등은
호암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코가 부러진 사나이, 1864,브론즈*

작품이 만들어진 때는 로댕이 생계를 이어가기가 매우 어려운 때였다.
모델을 구할 돈이 없어 이웃집에 사는 비비라는 노인의 얼굴에서 착상을
얻었다. 그러나 난방시설이 없는 작업실이 너무 추워 비비의 머리를 빚은
점토가 갈라졌으며, 두개골은 깨지고 간신히 얼굴만 지탱하게 되었다.
그래서 코가 깨진 이런 얼굴의 형태가 탄생했다. 1864 살롱에 출품하여
아름답지 못하다는 이유로 낙선하였다.

*꽃장식의 모자를 소녀,1865, 테라코타*

장미와 백합 다발, 그리고 나뭇잎 장이 소녀의 모자를 장식하고 있으며
소녀가 두른 스카프는 리본으로 묶여 있다. 테라코타로 제작된 상은 아직
앳된 소녀티를 벗지 않은 고운 얼굴을 소박하게 표현하고 있다.
1865
년에 제작된 작품은 로댕의 초기 작품에 속하는 것으로 로댕의
원숙기에 보여지는 남성적인 역동성보다는 유려한 , 부드러운 모델링이
돋보인다. 살아 있는 사람의 숨결과 인상이 그대로 느껴지는 수작이다.
작품의 실제 모델은 마리 로즈 뵈레로서, 평생 로댕 곁을 지켰던 그의
부인이다. 로댕과 마리 로즈 뵈레는 평생을 동거하였으나, 로즈가 죽던
해에야 정식으로 결혼한 부부가 되었다. 작품이 제작될 무렵 로댕은
처음으로 살롱에서 입선하여 정신적으로 고무되어 있었다. 또한 살롱의
성공과 함께 흉상들의 주문으로 재정 형편도 점차 안정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한 생활의 안정은 작품 속에서 여유와 평화스러운 분위기로 표출
되었다. 젊은 로댕이 그의 부인을 처음 만났을 무렵의 설레임이
엿보이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청동시대, 187576, 브론즈*

1875 이탈리아에서 미켈란젤로에게서 깊은 감명을 받은 로댕이 귀국
제작한 것으로 완벽한 사실성으로 브뤼셀에서 전시를 모델의 몸에서
직접 본을 떠서 만들었다는 비난을 받았다.
파리의 살롱에 출품하였을 때도 똑같은 의혹을 받아 낙선하게 되자, 로댕이
모델을 데려가서 작품이 모델보다 크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작품은 자연주의에서 새롭고 차원 높은 질서를 찾았음을 보여준다.

*세례 요한, 187880, 청동*

작품은 로댕의 화실에 모델이 되겠다고 찾아왔던 농부 세자르 피냐텔리를
보고 영감을 받아 제작한 작품이다. 피냐텔리는 전혀 모델 경력이 없었던
농부였지만, 로댕은 꾸밈없는 그의 자연스러운 자세가 오히려 마음에 들어
그를 모델로 삼았다고 술회하기도 하였다. 작품은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
청동 시대>, <걷고 있는 남자> 등의 작품과 함께 로댕의 인체 해부학에
대한 진지한 탐구를 보여준다. 그는 과거의 거장들이 과장되게 근육을 묘사
하였던 것과 달리 사실성에 기초한 조각을 제작, 동시대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조각 분야의 리얼리즘을 선도하였다.

*지옥문, 18801917, 브론즈*

지옥문은 높이 7.57m,너비 4m 되는 부조의 청동문인데 186명의 인물들이
지옥의 형벌을 받으며, 고뇌하고 몸부림치는 장면이 새겨져있다.
프랑스 정부에서는 장식미술관을 세울 예정으로 미술관의 현관이 거대한
청동문의 제작을 8000프랑으로 계약하고 단테의 신곡을 나타내는 부조로
청동문 제작을 위촉했다. 작품의 제작기간은 원래 3년으로 예정되었으나
결국 평생을 매달리게 되었다. <생각하는 사람> <키스> <다나이드>
<
우골리노> < 망령> <아담> <이브> 등은 지옥문에서 나온 작품이며
로댕의 1880 이후의 작품은 직접, 간접적으로 모두 지옥문과 관련이 있다.

*생각하는 사람, 1880, 브론즈, 지옥문 부분*

지옥문에 등장하는 많은 작품 가장 중심적인 존재인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발아래 펼쳐진 구원받을 없는 지옥의 영혼들을 내려다보며
인간의 숙명에 대해 끝없는 명상에 잠겨있다. 모습은 미켈란젤로의
<
최후의 심판> 그리스도, 시스티나 성당의 <예레미아 >, 메디치 분묘의
<
로렌초 > 비교가 되며, 카르포의 <우골리노>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
생각하는 사람> 로댕이 가장 아끼는 작품이었다.

*우골리노, 지옥문의 부분*

*키스(=입맞춤),1886, 브론즈, 지옥문 부분*

*이브, 1881, 청동*

서양의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 원죄의 근원인 이브는 인류의 어머니
이며, 동시에 인류를 괴롭히는 모든 불행의 씨앗이다. 이런 이유로 <이브>
<
지옥의 > 묘사되어 있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있다.
전체적으로 미켈란젤로의 영향을 받은 작품은 부끄러움과 회한을 나타내는
모습이 민감하게 드러나면서, 조각과 짝을 이루는 <아담>보다 더욱
독창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로댕은 조각을 하는 것보다 조각의 원형을
만드는 것이 뛰어났는데, 작품도 처음엔 석고로 만들었다가 나중에
청동으로 주조한 것이다. 로댕은 표면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서 이러한 제작
과정을 선호했다. 작품은 미완성으로 남아 있는데, 작품의 모델이었던
여인이 자신의 임신 사실을 로댕에게 숨긴 작업에 들어갔고, 로댕은
여인의 몸이 조금씩 변형되는 것을 참고하며 계속 작업을 수정했으나 결국
중단하고 만다.

*벨로나, 1881, 청동*

*허무한 사랑, 1881,청동*

*다나이드, 1885, 대리석*

*신의 , 1896, 대리석*

*발자크 , 1897, 브론즈*

*영원한 우상, 1889, 석고*

로댕은 1885년부터 조수로 받아들였던 카미유 클로델과 열렬한 사랑에
빠졌다. 이때부터 1893 사람이 결별할 때까지 로댕은 자신의 작품
속에 사랑에 빠진 남녀를 자주 등장시켰다.
작품을 비롯하여 당시 제작된 많은 작품들 - <입맞춤>, <파올로와
프란체스카>, <나는 아름답다>, <허무한 사랑>- 모두 사랑의 고통과
상실감 등을 표현하고 있어, 카미유와 금지된 사랑에 빠졌던 작가 자신의
감정을 엿볼 있다. 남자는 여자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여자는 수줍음
으로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있다. 남녀의 대담한 자세에서 느껴지는 관능성과
인체 묘사에서 느껴지는 격렬한 에너지와 긴장감이 한데 얽혀 있다.
작품은 전체적인 구도와 육감적인 묘사 등에서 카미유 클로델의 사쿤달라(1888) 매우 흡사하여, 논란이 일기도 하였다.
로댕과 클로델 사람이 가깝게 작업하면서 서로 자연스럽게 영향을 주고
받았음에는 틀림없지만, 작품은 로댕이 클로델의 아이디어를 가져온 것이
아닐까 의구심이 들만큼 클로델의 작품과 너무나 흡사하기 때문이다.

*칼레의 시민, 1889, 브론즈*

*신의 전령, 이리스, 189091, 청동*

* 망령, 1902, 브론즈*

*파올로와 프란체스카, 1905, 대리석*

단테의 {신곡} 5곡에서 베르길리우스와 단테는 육욕의 죄를 지은
사람들이 바람 속에 절규하는 지옥의 번째 장을 통과한다.
곳에서 단테는 비극의 연인인 파올로 말라테스타와 프란체스카
리미니를 만난다. 시동생과 형수의 사이로 금지된 사랑에 빠졌던
연인이 프란체스카의 남편에 의해 살해, 지옥에 떨어진 것이다.
단테는 연인들이 지옥에서 구름에 밀려 떠다니는 것으로 묘사하였는데
로댕은 이들을 매우 아름답게 시각화하였다. 무서운 공포 속에서 그들은
눈을 감은 서로를 부여잡고 있다.
로댕은 대리석의 매끄러운 부분과 거친 부분을 대조시켰는데, 이때 마치
미완성으로 남겨 놓은 효과를 내고자 대리석 표면을 다루는 방식에 특히
주의를 기울였다. 우툴두툴하게 거칠게 의도적으로 깎인 대리석 덩어리는
자체로도 추상적인 느낌을 자아낼 뿐만 아니라 표면에 반사되는 빛의
효과도 다양하게 연출한다. 로댕은 시기대리석 표면을 다루는 방식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작품에서도 인물들은 아주 작은 부분만을
구성하고 있을 대리석 덩어리 자체에 비중을 두고 있다.
미완성 상태를 고의적으로 의도, 거칠게 마무리한 돌덩어리는 그의 후기
작품의 특징이다. 로댕은 <입맞춤> 비롯하여 포옹하고 있는 남녀를
묘사하는 다른 작품들에서도 주제를 종종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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