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미술사11 르네상스 네덜란드 한스홀바인

   

한스 홀바인(Hans Holbein the Younger: 14971543)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출생.  아버지인 화가 한스 홀바인에게 그림을
배웠다.  스위스 바젤에서 동생 암브로지우스와 함께 학교를 다녔다.
1515
년부터 26년까지 바젤에 체재, 이탈리아·영국 등지를 여행하면서
초상화를 그렸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A. 만테냐의 영향을 받아 독특하고
명쾌한 고전적 화풍의 기초를 구축하였으며 투철한 사실적인 관찰과 뛰어난
기교로 의상의 재질감까지 교묘하게 나타내었다.  32 이후 헨리 8세의
궁정화가로서 활동하며 ·왕비들의 초상화를 그렸다.

북유럽에서는 성상제작을 금지한 종교개혁의 확산으로 그림의 주문이
줄어들고, 화가들은 생계의 위협을 느끼게 되어, 이제 화가들은 종교화가
아닌 다른 장르를 찾아야했으며 이러한 변화는 16세기 북유럽의 미술세계를
바꾸어 놓았다.  아버지부터 종교화 화가였던 한스 홀바인이 초상화가가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스위스의 바젤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홀바인은 곳에서 책의 삽화를 그리기도 하였는데 중엔 카톨릭 교회의
타락을 맹렬히 비판한 에라스무스(Erasmus) 『우상 예찬』(1509)
있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에라스무스의 초상> 여러 제작하였는데
1523년에 제작한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 사실적인 얼굴묘사와
모피코트의 질감묘사 북유럽 회화의 방식을 전수 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초상화의 중요 요인은 배경의 기둥이나 책꽂이 선반에 적용한
이탈리아의 고전주의와 함께 어울려 품위 있고 침착하며 정확한 초상화로
완성되었다.  1520년대의 종교개혁으로 그림의 수요가 급격히 줄어들자
홀바인은 그림 주문을 찾아 영국에 가게 된다.  1526 에라스무스의 편지를
들고 영국에 건너 그는 곳에서 역시 에라스무스의 소개로 캔터베리
주교, 토마스 모어(Thomas More) 인문학자들의 초상화를 그렸으며,
그림들은 초상화가로서의 그의 명성을 높였다.  1532년부터 영국에 정착한
그는 1536 영국 헨리 8(Henry ) 초상화가가 되었는데, 1540년에
그린 <헨리 8> 왕실 초상화가로서의 홀바인의 면모를 보여줍니다.
왕은 1539 클레브(Ann of Cleves)와의 결혼식에서 입었던 의상을 입고
있다.  보석이 달린 수놓인 모직 옷과 비단 겉옷, 그리고 모피 등걸이 등의
묘사는 그가 어려서부터 익힌 섬세한 사물 묘사력을 보여준다.  
그러나 홀바인의 역량은 단순히 사실적인 묘사에서만 오는 것은 아니다.  
그가 ?인물의 자세와 표정은 언제나 초상화 주인공의 성격과 초상화의 제작
목적에 적합했다.   헨리8세는 정면으로 당당히 있고, 과장되게 넓은 어깨는
그의 과감한 정치력을 나타내기 위한 홀바인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궁정화가로 활동하다가 런던에 퍼진 전염병으로 생을 마감했다.

*Erasmus of Rotterdam,1523*

*글을 쓰고 있는 에라스무스,1523*

작품은 당시 종교개혁의 혼란함을 피해 영국으로 건너갔던 홀바인이
앙리 8세의 궁정화가로 들어갈 있게끔 추천해 준에라스무스를 그린
초상화이다.  에라스무스는 " (바젤, 스위스) 미술은 얼어붙고 있습니다"
라고 토마스 모어에게 썼다고 하는데 홀바인과는 후에 애증의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시기의 초상화들은 주로 교황이나 종교적 권위를 나타내는
그림이 주요한 흐름이었는데, 홀바인은 종교적인 색채를 완전히 벗어난
작품들만을 그렸다.  그들 대신 국왕이나 귀족 새로운 형태의 모델들이
교부가 가진 권위를 대신하게 만들었는데, 홀바인의 작품은 그의 전형적인
양식을 나타내는 작품이라고 있다.
필기를 하는 모습은 에라스무스가 인문학자임을 나타내는 도구로 사용되었으며
그의 왼손에 끼어진 반지들은 경제적 지위와 신분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또한 모델의 표정에서 나타나는 다소 신경질적인 모습은 홀바인이 그린
초상화의 특징 중의 하나이다.
진리를 말하기 전에는 열지 않을 듯이 다문 입술, 아래 사람을 내려다보는
듯한 시선, 다른 이들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취한 듯한 단정한 자세 등은 모델이
지닌 성격을 치밀하게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모델과의 관계를 염두에 두지
않고 사실적으로 인물을 드러내게 만드는 홀바인의 고집스런 기질은, 그가 그린
다른 150 점의 초상화를 통해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Sir Thomas More, 1527*

*천문학자 니콜라, 1528*

작품은 앙리 8 천문학자를 지냈던 니콜라 크라체를 그린 것이다.  
홀바인의 초상화는 대부분 왕을 비롯한 귀족들을 중심으로 그린 것들이
대부분인데, 작품도 마찬가지로 신분이 높았던 당대 학자를 그린 전형적인
작품이다.  홀바인의 작품에 나타나는 초상들은 대체로 지위나 권세가
높을수록 화면 가득히 그려진다는 점이 주목할 만한데, 작품에서도 모델은
가까운 거리에서 그린 것처럼 화면에 빈틈없이 채워져 있다.  
그림의 모델인 니콜라 크라체는 손에 천체를 재는 도구와 컴퍼스를 쥐고 있다.  
이는 모델의 직업을 나타내는 도구로 쓰였는데, 그의 다른 작품 <에라스무스의
초상> 연작들에는 인문학자인 에라스무스의 직업을 보여주는 책과 필기 도구가
그려져 있음을 있다.  천문학자의 책상답게 가위며 나침반, 무언가 적혀
있는 종이, 등이 놓여 있고, 모델의 벽에는 천문대를 나타내는 모형과
당시에 지구와 천체를 재는 도구로 쓰였음직한 도구가 또한 벽에 걸려 있다.  
도구들은 밝은 색감으로 채색되었으며, 인물과는 대조적으로 정밀한 묘사를
통해 마치 손으로 만져질 듯하다.
인물은 정면을 쳐다보지 않고 옆면을 응시하는데, 굵은 얼굴 윤곽과 두껍고
어두운 색채의 의상, 실내인데도 멋을 내기 위해 모자 등은 니콜라가
진지한 성격을 가진 소유자며, 외모에도 상당히 신경을 쓰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인물의 외양을 정확히 모사하는 것을 넘어서, 인물의 성격이나
특징을 드러낸 홀바인의 탁월한 재능을 그대로 입증하는 작품이다.

*성모와 마이어 시장의 일가,1528*

제단화의 중앙에 왕관을 성모가 아기예수를 안고 있고, 하단에 마이어
시장의 일가족의 초상화가 안정감을 주는 삼각형 구도로 그려져 있는데
전체적인 색조는 어두운 편이다.  다빈치의 영향을 받은듯 우수에 잠긴 성모와
전면의 아기를 안은 인물, 우측의 북유럽 르네상스식의 딱딱한 인물들에 비해
지극히 사실적이고 인간적인 마이어시장의 인물표현이 친근하다.

*Georg Gisze, a German merchant in London,1532*

*The Artist's Wife, Elsbeth Binzenstock

and her Two Children, Philip and Catherine,1528*

*Sir Brian Tuke,1527*

*Double Portrait of Sir Thomas Godsalve and His Son John,1528*

*Portrait of a member of the Wedigh Family, 1532*

*Robert Cheseman, 1533*

*Charles de Solier, Sieur de Morette,1534-5*

*Dierick Berck,1536*

*Portrait of Jane Seymour,1536~37*

*Anne of Cleves,1538-9*

*Edward, Prince of Wales,1538-*

*Henry VIII,1536*

*Henry VIII, after 1537*

*Portrait of Henry VIII, 1540*

*The Ambassadors,1533*

홀바인의 진정한 수작이다.  초상화의 주인공은 주영 프랑스 대사
딩테빌(Jean de Dinteville) 죠르쥬 셀브(George de
Selve)
주교이지만 인물 사이에 있는 정물들이 우리의 시선을 끈다.
제일 윗칸엔 지구본을 비롯한 당시의 첨단과학 도구들이 정연하게 놓여있는
반해, 아랫칸엔 루트와 피리종류의 악기들이 어지러이 늘어져 있다.  
그리고 루트의 끈은 끊어진 채이다.   아래 바닥의 중앙엔 없는 물체가
애매하게 있다.  눈을 오른쪽 인물의아래 부근에 바짝 가져다 대고
형상을 보면 이것은 인간의 해골이다.  홀바인은 해골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고 했을까?  해골은 전통적으로 인생의 무상을 상징하는 정물이다.
외교관의 화려한 명예, 첨단의 과학, 음악의 즐거움, 모든 무상함을
말하려 것일까?

*Christina of Denmark,1538*

*Thomas Howard, Prince of Norfolk, 1539-40*

*Portrait of Margaret Wyatt, Lady Lee. 1540*

*Portrait of Catherine Howard, 1540-41*

*Portrait of Duke Antony the Good of Lorraine,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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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09 북유럽르네상스 네덜란드 브뤼겔

피터 브뤼겔(Pieter Bruegel the Elder, 1525~1569)

16
세기 후반에 있어서 북유럽 최대의 화가로 일컬어지는 그는 농민 생활에서
취재한 소재를 예리한 사실적 수법으로 묘사한 작품을 많이 그려 농부의
브뤼겔이라고도 불리운다. 그의 그림은 17세기의 네덜란드 풍속화와 풍경화에
길을 터놓았다. 아이크 이래 북유럽 자연주의에서 출발한 그는 이탈리아
유학길에서 알프스의 풍경에 감명을 받고 스케치한 풍경화를 남겼는데
21
점이 현존한다. 53 귀국하여 안트웨르펜에서 제작생활을 하다가 63
결혼 브뤼셀로 이사하여 곳을 활동 본거지로 삼았다.

민중미술의 선구자인 피터 브뤼겔(1525~1569) 민족의 아픈 현실을
복음과 결부시킨 작품으로 표현, 절망에 빠진 국민들에게 희망을 이야기했다.
브뤼겔이 활동하던 당시의 플랑드르는 칼뱅의 영향을 받은 개신교국가였다.
그러나 가톨릭국가인 스페인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모진 탄압을 받았다.
특히 카알 5세때는 무서운 학정으로 인해 고통속에 있었다.이러한 정치적
종교적 탄압 속에서 브뤼겔은 당시의 부패한 지도자들을 풍자했다.
`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는 그림', `헤롯의 영아 학살', `최후의 심판'
`
사형장에서의 무도' 등이 그런 것들이다.한편으로는 `빙판 위의 어린이들'
`
베들레헴의 인구조사', `바벨탑' 종교적이고 낙관적인 그림을 통해 민족에게
종교적인 희망을 불어넣었다.
그가 16세기 북유럽의 가장 위대한 화가로 손꼽히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그가 `농민의 화가' 불렸던 것은 농부들의 생활을 대담하게 묘사했기 때문이다.
그는 풍부한 창의력으로 인간의 결점과 우매함을 재치있게 화폭에 담았다.
이러한 브뤼겔의 그림에 대해 지나치게 풍자적이라고 비평하는 사람도 있고
깊은 공감과 애정을 표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19세기 말엽,인상주의 회화를 연구한 비평가들은 브뤼겔의 풍경화가
가진 신선함과 아름다움에 대해 "인간에 대한 그의 비관적인 견해에도 불구하고
자연을 인간의 소행에 의해 순수성이 손상되지 않은 매우 긍정적이며 영원히
변치 않는 힘으로 보았다" 재평가했다.

플랑드르 브라반트 지방의 브레다에서 태어난 그는 북해 연안 저지대 국가의
회화에 영향을 끼쳤다.
그는 각각 `벨벳의 브뤼겔' `지옥의 브뤼겔' 알려진 그의 아들 얀과
피테르를 거쳐 18세기까지 이어진 브뤼겔 화파를 이루는 시조가 됐다.
그러나 브뤼겔만큼 숨막힐 정도의 놀라움을 주지는 못했다.
26
세때인 1551년,브뤼겔은 당시의 북유럽 화가들처럼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여행했다.그 과정에서 그는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환상적인 착상과 파티니르의
경건하고 정열적인 풍경화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그러나 그는 단순한 모방에서
그치지 않고 독특한 미술세계를 창출해 냈다

브뤼겔은 자기 고장의 현실적인 고통을 복음서와 결부시킴으로써 구원의 메시지를
끊임없이 전달했다.그 결과 플랑드르는 후에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해 오늘날의
네덜란드를 세우는 놀라운 기적을 이뤄냈다.

*거지들(The Beggars),1568*

16세기 북유럽이 종교개혁으로 인해 극도로 혼란한 사회로 치닫고 있을
플랑드르 지역은 이러한 혼란을 비껴가면서 더욱 풍속화를 발전시켜 나갔다.
브뤼겔 또한 이런 사회가 보여주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빗댄 작품들을 많이
그렸는데, 작품 <거지들> 또한 그러한 전형 중의 하나이다.
그림 오른 편에 부랑자들을 외면하며 행인이 지나가고 있다.
목발을 집고 한데 모여 있는 부랑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분명하게 드러나
있지 않지만, 그들의 행색과 흐리게 처리된 표정이며 남루한 의복들을 보면 묘한
슬픔이 배어 있다는 것을 느낄 있다. 정확한 원근법이 후면에서 앞으로
접근하게끔 배치되어 시선이 가운데로 고정되게끔 구도를 설정하고 있는 작품은
당대 플랑드르 화파들이 보여주지 못한 알레고리들이 숨어 있다.
아주 작은 크기이지만 작품은 작가 브뤼겔이 인간 사회를 향한 조소와 고뇌를
그리면서, 한편으로 그것들을 감싸안는 한없이 따뜻한 애정을 표현하고 있다.
그림이 단순히 나병 구제소에 수용되어 있던 문둥이들이 마을 축제를 구경가기
위해 출발하려는 모습을 담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또는 심오한 정치적
사회적, 도덕적 의미가 숨어 있다고 수도 있다. 어쨌든 그림에서 가장
중요하게 눈여겨 보아야 부분은 인간 육신의 고통과 부랑자들에 대한 도덕적
불감증에 대해, 브뤼겔은 강력한 메시지로 혹은 은유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장님의 우화(The Parable of the Blind Leading the Blind),1568*

작품은 브뤼겔이 만년에 그린 작품으로, 종교적·정치적으로 광적인 믿음이
팽배해 있던 사회를 향한 분노와 조소가 담겨 있는 그림이다.
그림은 신약성서에 담긴 이야기를 소재로 전개되는데마태복음 15 1절에서
9
절에 따르면 그리스도가 바리새인들에 대한 말씀을 하면서 예를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게 되면 구렁에 빠진다" 구절이 그것이다.
브뤼겔의 역동적이면서도 강렬한 표현의 깊이가 그림의 주제를 깊이 인식
시키는 힘을 부여하고 있다. 당대 인문주의자들이 책들에 인간들의 어리석음에
관한 언급이 자주 나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브뤼겔에게는 회화 이미지로 재생산하는
역할이 주어진 것이라고 있다.
그림을 보면 따뜻하고 인간미가 넘치는 인간들은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단지 장님이 장님을 어설프게 인도하면서, 뒤로 넘어지고 어디로 가야할지 좌충우돌
하는 혼란만이 화면에 가득할 뿐이다. 기이한 표정들의 장님은 막대기를 서로에게
붙잡게 하여 떨어지지 않게 하고 있지만, 벌써 앞에 동냥그릇을 사람이 넘어져
뒷사람도 넘어질 형국이다. 멀리 배경으로 비치는 교회 건물은 이들에게 아무런
구원이나 온정의 손길을 보여주지 못하는 상징물로 나타나 있다. 당시 교회가 불러
일으킨 혼란은 브뤼겔의 눈에 위선적인 신에 대한 경멸로 비쳐졌을 것이란 느낌이
강하게 표출되고 있다. 삭막한 들판 위에서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장님들의
행렬을 통해, 16세기 어두운 사회의 단면을 브뤼겔만의 알레고리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Landscape with the Fall of Icarus,1558*

*The Fight Between Carnival and Lent ,1559*

*Netherlandish Proverbs,1559*

*Children's Games,1560*

*Dulle Griet (Mad Meg),1562*

*The Triumph of Death,1562*

*The Fall of the Rebel Angels,1562*

*The Tower of Babel,1563*

무시무시하고 복잡한 작품이다.이 작품은 오만한 인간들을 난쟁이로 만들고
고된 노동을 개미들의 무의미한 몸놀림으로 묘사한다.이것이 바로 바벨탑이며
우리 모두의 가슴 속에 있는 오만의 모습이다.인간은 자신의 오만 때문에 몰락하는
불쌍한 존재다.바벨탑에 대한 그의 묘사는 단순히 성경구절을 그림으로 바꾼
있지 않다.브뤼겔은 언제나 표면만이 아닌 심층까지 탐구했다.
그만큼 그는 시각적인 의미에 많은 관심을 두었다

*The Adoration of the Kings.1564*

* The Procession to Calvary ,1564*

*The Harvesters,1565*

*Winter Landscape with a Bird Trap,1565*

*The Sermon of St John the Baptist,1566*

*The Hunters in the Snow ,1565*

<사냥꾼의 귀가> 1594, 안트워프시가 네덜란드의 총독 에른스트
대공에게 기증한 6장의 달력화 가운데 1점이다.
브뤼겔은 중세의 세밀화처럼 다달의 전통적 행사를 상징적으로 다루지 않고
자연이 성장하고 결실하고 쇠퇴하여 재생하듯 생물도 그것을 본뜬다는 주제를
그리고 있다.

*The Numbering at Bethlehem,1566*

`베들레헴의 인구조사' 겨울의 느낌을 시각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그림 중앙에서 오늘쪽을 보면 시골여인을 태운 나귀를 끌고 가는 요셉의
모습이 보인다.닭들이 위에서 먹이를 찾고 있고 멀리 어린아이들이 빙판
위에서 얼음을 지치고 있다. 그림 왼쪽을 보면 호적하러 사람들이 모여 있다.
호적하러 사람들을 위해 돼지를 잡는 이,어린아이들까지 섞인 군중에 둘러
싸여 호적을 접수하는 이,돈을 내는 여인,그리고 책을 보며 호명하는
매우 분주한 모습이다.아무도 저들이 성가족임을 눈치채지 못한다.
그리스도는 이와같이 겸손한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다.그림 중앙에 고을을
수비하던 스페인 군인들이 있다. 작가는 이것을 로마 경비대의 상징으로 그렸을
것이다.이처럼 브뤼겔은 `베들레헴의 인구조사' 베들레헴의 역사적인 장면
대신 자기 고장의 풍경을 그려 넣었다.

*Peasant Wedding,1568*

둥글고 멍청해 보이는 하객들의 얼굴과 종이왕관을 술에 취해 흡족해하는
뚱뚱하고 바보 같은 신부,음식에 현혹된 인간들의 법석을 묘사하고 있다.
불쌍한 신부는 잠깐동안 행복을 맛보는 가난한 여인이다.하객들이 게걸스럽게
먹고 있는 음식도 기껏해야 밀가루죽과 과자 정도.그것도 조잡한 나무접시에
담아 먹고 있다. 이는 가난한 사람들의 초라한 축하장면이다.음식을 먹기 전에
먼저 풍악을 울려야 하는 연주자들은 몹시 배고픈 표정으로 죽그릇을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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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08르네상스 플랑드르- 얀 반 아이크, 보쉬, 로지에 반 데르 바이덴

   

(4) 북유럽의 르네상스: 사실주의

15
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 네덜란드, 프랑스, 독일에서도 북유럽 고유의
내용을 가진 르네상스 미술이 꽃피웠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에서와는 다르게 특별히 발견된 고전이 없었던
북유럽인들은 자연과 인간의 삶으로 시선을 돌렸기에 정물화, 풍속화
풍경화 등의 장르 미술이 등장하게 되었으며, 아이크, 보쉬, 브뤼겔
뒤러 북유럽 르네상스 화가들은 당시 새롭게 변화하는 사회의 모습을
그림을 통해 보다 풍부하게 전달해 주었다.

"
모든 길은 피렌체에서 시작되었다." 라는 말처럼 르네상스는 피렌체에서
시작되어 로마와 베네치아에서 전성기를 맞았고, 북유럽 등지로 퍼져 나갔다.
피렌체 시의 부와 부를 통한 인간 혹은 가문의 힘이 교회와 교황의 힘과
대등한 상황이 되자, 인간은 그동안 교회의 권위에 의해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인간성(휴머니티) 발견하게 되었고 자연을 비롯한 실제 세계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이런 눈뜨임으로 인해 해부학이나 원근법 같은 지식이 발달하게
되었고, 유화의 발견이라는 미술사적인 업적도 남기게 되었다.
이러한 발견은 미술에 반영되어 그림속의 인간은 마치 걸어 나올 같이
표현되었고, 그림속에 표현된 자연도 실제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다.
평범한 일상 생활이나 자연을 충실히 표현하려는 자연주의적인 사실주의가
특색이며,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의 그림보다 색채가 어두운 반면 치밀한 묘사가
뛰어나다.


★★ 네덜란드의 르네상스 ★★

네덜란드의 르네상스는 정신을 그대로 이었다고 말하거나 대표적인 작가를
내세우기가 모호하다. 그러나 바로크 시대에 이르는 네덜란드 풍경화, 플랑드르
회화가 탄생하는데 전조를 마련한다. 1500-1600년대에 이르러 풍속화
정물화등이 윤곽을 드러내게 된다. 그것은 15세기의 플랑드르 회화인
아이크 형제, 플레말레의 화가에서 비롯하였으며 세속적인 풍경속에 품은
상징주의적인 종교화는 브뤼겔에 이르러 풍속화로서 자리잡고 우화, 속담을
담은 내용의 풍자등에서는 강한 사회성도 엿볼 있다.

아이크(Jan van Eyck: 1390~1441)

초기 플랑드르 사실주의 화파의 거장으로, 유채화라는 혁신적 기법을 처음
도입했다. 1422 네덜란드에서 활동을 시작, 1441 브뤼지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궁정화가이면서 부르고뉴의 비밀 외교사절로 스페인과 포르투갈
등으로 파견되기도 했는데, 후버트(Hubert) 그리다 르네상스
플랑드르의 기념비적인 회화인 <겐트 제단화> 비롯하여 새로운 회화 기법을
이용한 유명한 작품들을 상당수 남겼다.

빛과 색에 의해 시시각각으로 달리 보이는 자연의 현실성을 대기원근법을
사용해 표현한 그의 작품들에는 세밀한 디테일과 부드러운 입체감, 다양한
메타포들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당대 남유럽 이탈리아 회화의 주된 방법인
과학적인 선원근법에서 과감하게 벗어나 있는 기법으로, 사물의 정확함과
가시적으로 비추는 자연을 진실하게 표현하였다. 자연이 충실하게 비춰지는
거울을 만들려는 그의 끊임없는 정열과 노력으로 르네상스를 관통하는 회화
기법에 엄청난 영향과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게 하였다.

*최후의 심판- 박힌 예수(Diptych),142025*

제단화의 양옆에 붙어있는 문짝의 날개에 그려졌던 것으로 보이는 작품은
현재는 유실되었지만 작품 사이에 위치하였을 커다란 패널과 함께 하나의
작품을 이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
최후의 심판'에서는 화면을 3단으로 나누어 천국과 지옥, 그리고 현세를 표현
하고 있다. 아비규환의 고통받는 지옥의 풍경과는 대조적으로 천국의 모습은
예수를 중심으로 아주 평화롭고 차분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또한 등장인물들의
크기에 차별을 두어 인물들의 지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작품은 화면의 구성적인 면이나 내용상의 상징성에 있어 종교화의 정형성을
확연히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상단의 천국 부분은
아이크 본인이 그린 것이 아니라 그의 제자가 그렸을 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십자가에 박힌 그리스도'에서는 공기원근법이 등장하고 있는데
이는 멀리 보이는 사물은 무색의 빛과 공기로 인하여 본래의 색보다 엷게
보인다는 자연의 이치를 적용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공기원근법으로 인해 한정된 화면 위에서 펼쳐지는 풍경은 그의
사실적인 인물묘사가 더해져서 마치 실제 풍경의 부분을 떼어낸 듯한
실재감과 생명력을 갖게 된다.

*Madonna in the Church, 1425*

*Portrait of a Goldsmith (Man with Ring),1430*

*아르놀피니 부부(The Arnolfini Marriage),1434*

이탈리아의 상인인 죠반니 아르놀피니(Giovanni Arnolfini) 주문으로 신부
죠반나 체나미(Giovanna Canami)와의 혼인 서약식 장면을 그린 초상화로서
근대의 사실적인 초상화가 시작됨을 알리는 작품이며, 또한 그를 위대한
초상화가로서 자리매김하게 대표작이라고 있다.
죠반니 아르놀피니(Giovanni Arnolfini) 그의 부인 죠반나 체나미
(Giovanna Canami)
모두 이탈리아의 루카(Lucca)출신으로 브루주
(Bruges)
정착한 이후 가장 성공한 은행가였다.
작품에서는 플랑드르의 화가들이 즐겨 사용하던 상징적인 기법들이
등장하는데, 결혼의 신의로서 등장시킨 강아지라든가 신성한 의식으로서의
결혼식을 부각시키는 자루의 촛불이 바로 그것이다. 그림을 더욱
유명하게 만든 것은 배경에 볼록거울을 배치한 아이크의 창조성이다.
인물이 있는 방을 그림으로 묘사하는 것은 어쩔 없이 공간적인 제약을
받게 되어 있는데 아이크는 배경에 볼록거울을 놓음으로써 천장과 바닥
창문 밖의 풍경에까지 시야를 넓히고 있다. 거울의 더욱 중요한 역할은
부부 앞에 있었을 화가 자신을 넣을 있었다는 점이다.
혼인서약에 있어야 증인의 모습을 화면에 직접적으로 등장시키지 않고
벽에 걸려있는 볼록거울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데 재미있는 점은 혼인서약의
증인이 바로 아이크 자신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 아이크, 여기에 서있다,1434' 라는 거울 위의 명문
(
銘文) 통해서 거울 속의 인물이 아이크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겐트 제단화(The Ghent Altarpiece :wings open), 1432*

20개의 목판으로 구성된 제단화로서 닫혀있을 때와 열렸을 때의
부분으로 나뉘며, 아이크의 형인 후베르트가 먼저 그리기 시작하여
1432
년에 아이크에 의해서 완성되었다.
중앙 상단의 대제단화에는 금관을 그리스도를 마리아와 세례 요한이
모시고 있으며, 금관 위로 ' 분이 그리스도이시며 거룩하고 선하시며
온유하시고 전능하시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양옆과 하단 4개의 패널에는 각각 파이프 오르간을 연주하는 천사들과
그리스도의 희생을 상징하는 '어린양의 경배' 그려져 있다.
상단 날개를 이루는 '아담과 이브' 원죄보다는 신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인간으로 창조되어 그려지고 있다. 공기원근법을 사용한 웅장한 풍경을
배경으로 100 명에 이르는 등장인물들과 50 가지의 식물들이 다양한
색채로서 사실적으로 그려진 작품은, 웅대한 스케일과 도상들이
들려주는 메타포 때문에 많은 논쟁과 즐거움을 안겨주는 걸작이다.

*겐트 제단화-닫힌 모습,1432*

*롤랭의 마리아,1435*

작품의 제작 연대는 확실하게 언급되지 않고 있지만, 그림이 그려질
당시 롤랭의 나이가 50세였다는 기록과 작품의 양식, 작품속의 롤랭의
외모를 바탕으로 대략 1435년경에 그려졌을 것으로 보고 있다.
작품은 부르고뉴 공국의 고위 재상이었던 롤랭이 오텅 대성당의
추기경으로 추대된 그의 아들을 위해 주문 제작하여 성당에 봉헌한 작품
으로 알려지고 있다. 아이크는 작품에서 왼쪽으로는 롤랭과 뒤로
수도원과 그리고 포도를 수확하는 일군들을, 오른쪽에는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 수많은 교회가 밀집한 도시를 배치하고 있다.
인물과 배경을 작의적으로 이분하여 현세와 천계를 화면 안에서
보여주려 하고 있으며, 화면 중앙의 아치형 다리를 통해 이원적인 세계를
연결하려는 상징적인 의미도 함께 담아내고 있다.

*Portrait of a Man with Carnation, 1435*

*캐논 데르 팰르와 마돈나,1436*

*Suckling Madonna Enthroned, 1436*

*Small Triptych, 1437*

*Portrait of Margareta van Eyck, 1439*

*Portrait of Christ, 1440*

히에로니무스 보쉬 (Hieronimus Bosch,1450~1516)

보쉬는 현재의 네덜란드 남부지역인 헤르토겐쉬(Hertogenbosch)에서
생의 대부분을 보냈지만 아이크 전통의 리얼리즘과는 매우 다른 환상적인
그림을 남겼다. 그가 그린 인간의 타락과 지옥의 장면은 소름끼치도록
끔찍하여서 그는 '악마의 화가, 지옥의 화가' 라고 알려졌다.
그러나 그의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의 창의력은 오히려 인간에 대한
냉철한 관찰에서 나온 교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하게 된다.

*Crucifixion with a Donor, 1480-85*

*Marriage Feast at Cana*

*The Seven Deadly Sins, 1480*

*Triptych of Haywain, 1500-02*

   

*Haywain,Left Wing: Paradise, Right Wing: Hell, 1500~02*

*Haywain, Central, 1500~02*

*쾌락의 동산,1500*

폭의 제단화로 구성되어져 있는 작품은 보쉬의 가장 뛰어난
작품이면서도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먼저 왼쪽의 패널을 보면, 에덴동산에 앉아 있는 아담의 앞으로 신이
이브의 손목을 잡고서 대면을 하고 있는데, 물끄러미 보고있는 아담의 표정과
원죄적 의미가 아닌 순진무구한 이브의 표정이 재미있다.
또한 마치 천지창조의 순간을 보여주는 듯한 신비로운 풍경들과 함께 기린
코끼리, , 사슴, 돼지 등과 상상속에나 있음직한 수많은 동물들이 어우러진
평화롭고 아름다운 에덴동산을 그려내고 있다.
반면에 오른쪽의 패널에서는 아비규환의 지옥도가 펼쳐지고 있다.
이름 모를 고문도구와 고통으로 절규하는 인간들의 모습, 그리고 음산한
기운이 감도는 검붉은 색채가 화면 전반을 이루면서 천국으로 상징되는
에덴동산과 대조를 이룬다.
중앙의 패널에서는 오직 쾌락만이 존재하는 풍경을 보여주고 있는데
어떠한 근심, 걱정도 없이 인간이 향유할 있는 모든 쾌락적인 것만을
즐기는 나체의 인간군상들을 중심으로 여러 종류의 동물과 과일을 복잡하고
혼란스럽게 얽어놓고 있다. 어쩌면 인간이 구연하는천국의 풍경을 그린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에덴동산에서 보여지는 고요하고
한가로운 풍경과는 전혀 다른 무질서와 탐욕뿐인 세상을 그리고 있다.

세개의 패널은 독자적인 성격을 띠면서도 한편으로는 상호 작용을 통하여
많은 의미를 보여주고 있다. 천국에서 지옥으로 연결되는 인간의 모습을
중앙의 패널을 통하여 암시하여 주기도 하며, 아담과 이브가 만나는 순간부터
비롯되는 원죄가 결국 인간을 통하여 영원히 반복된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하고, 현실의 쾌락만을 추구하는 인간의 최후에는 오직 지옥의 심판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상징하여주고 있다.

*Triptych of Garden of Earthly Delights (central panel),1500*

   

*Triptych of Garden of Earthly Delights, left wing /right wing*

*최후의 심판*

*Triptych of Last Judgement (central panel)*

   

*Triptych of Last Judgement (left/right wing)*

*광인들의 ,1490~1500*

작품에서 '' 지상 세계를 의미한다. 위에서는 수녀인 듯한 사람이
악기를 연주하고 있고 주위의 사람들은 술에 취한 노래를 부르고 있다.
타락한 성직자들을 비롯한 모든 인간들은 쾌락만을 추구하고 있으며
삶에 대한 아무런 준비도 없이 그저 배가 흘러가는 대로 순간만을 즐기고
있음을 상징하고 있다. 그러나 보쉬는 이처럼 쾌락만을 탐닉하고 있는
인물들의 표정 이면으로 어두운 그늘을 깔아 놓고 있는데, 이것은 그들이
신의 심판이 기다리는 무섭고 두려운 곳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깃발의 위에 걸쳐있는 나뭇가지 사이로는 인간을 심판하는
신의 상징이자 죽음의 상징인 해골이 타락한 성직자와 인간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십자가를 운반하는 예수,1485~90*

*Triptych of the Adoration of the Magi. 1510*

* 안토니의 유혹(Triptych of Temptation of St Anthony), 1505-06*

*Triptych of Temptation of St Anthony (central panel)*

   

*Triptych of Temptation of St Anthony (left/right wing)*

로지에 데르 바이덴(Weyden, Rogier van der, 1399~1464)

*수태고지,1435*

바이덴의 주된 주제는 종교적인 내용을 담아내고 있는 제단화와 시기에
유행하기 시작한 초상화 등이다. 작품은 바이덴의 그러한 종교적인 작업
성향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작품으로, 성모 마리아가 천사에게서 아기
예수를 잉태했다는 사실을 고지 받음을 뜻하는 '수태고지' 연작들 하나이다.
황금빛 빌로도를 걸친 백의의 천사가 자애로운 얼굴로 성모 마리아에게 아기
예수의 잉태 사실을 알리고 있으며, 화면 오른쪽의 검은 옷을 입고 기다리던
마리아는 오른 손을 들어 천사의 수태고지를 받아 들이고 있다.
성스러운 의식의 진행은 성모 마리아의 다른 손에 들려진 성경과 경건한
표정을 통해 다시 한번 강조되고 있다.

바이덴 역시 플랑드르의 다른 화가들처럼 사물을 통한 상징성을 화면 안에
깔고 있는데, 성모 마리아의 뒤편에 위치하여 아기 예수가 탄생한 말구유를
상징하고 있는 침대의 색깔과 모양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전혀 작품의 성격과 어울릴 같지 않은 사실적인 풍경을 천사의 뒤편
창문 밖에 그려 넣어 현실생활과 종교를 연결시키려 하고 있다.
화면의 전반을 차지하는 무겁고 어두운 색채에 대비되는 천사의 흰옷을 통해
아기 예수 잉태의 신성함을 부각시키고 있는 또한 같은 맥락으로 해석할
있을 것이다.

*St Luke Drawing a Portrait of the Madonna, 1435*

*Deposition, 1435*

*Diptych, 1440*

*Sts Margaret and Apollonia, 1445-50*

*Seven Sacraments Altarpiece, 1445-50*

*Crucifixion Triptych, 1445*

*Bladelin Triptych, 1445-50*

*Bladelin Triptych (central panel)*

*브라크 가족 삼면화(central panel),145052*

*브라크 가족 삼면화 (left wing panel)*

*브라크 가족 삼면화,(right wing panel)*

패널화는 145051년에 치러졌던 요한 브라크와 그의 아내 캐더린
브라란드가 결혼할 시기이거나 아니면 요한 브라크가 죽은 1452년에 그려
졌다고 전해진다.
데르 바이덴의 작품 성향은 안젤리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안젤리코의 그것처럼 패널화가 완벽한 좌우 대칭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도
짐작 있다. 중앙 패널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세례
요한이, 오른쪽에는 막달라 마리아가 위치하고 있으며, 패널화의 날개 부분에
요한 브라크와 캐더린 브라란드가 자리하고 있는데, 등장 인물들의 시선은
모두 예수를 향한 채로 좌우 동형을 이루고 있다.

*Portrait of a Man, 1450*

*처녀와 아기,1454*

*여인의 초상, 1455*

*머리쓰개를 여인,1435*

*Francesco d'Este,1460*

*Portrait of a Woman, 1464*

*Isabella of Portugal, 1500*

*Portrait of Philip the Good,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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