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미술사20 신고전주의:제라르, 장 그로, 폴 푸르동

   

   

   



제라르(Baron Francois Gerard: 1770~1837)


제라르는 다비드의 제자이며, 다비드를 본받아 많은 역사화와 신화에
관한 그림을 그렸다. 1796 "Jean-Baptiste Isabey and his
Daughter, 1795"
작품으로 살롱에 출품해 인정을 받았으며, 시대의
뛰어난 초상화가로서 명성을 날렸다.

*Jean-Baptiste Isabey and his Daughter,1795 *

*프쉬케와 에로스, 1798*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쉬케는 아름다움으로 유명한 소녀로
사랑의 에로스는 프쉬케에게 영원한 사랑을 약속했다.
작품은 1798 관전에 출품되었으나 평이 좋지 않았다.
그의 기법이나 표현이 차갑고 인물은 도자기와 같은 무기력한
느낌을 주고 있다는 이유였다.  여기에서 그는 실망하고 초상화 제작
으로 전환하였다.  그후 그는 1제정과 왕정 복고시대를 거치는 동안
공식 초상화가로서 유명해졌다.

*Portrait of Catherine Worlée, Princesse de Talleyrand-Périgord, 1804-05*

*레카미에 부인의 초상,1805*

1800 다비드가 그린 레카미에 부인의 초상화의 인물과 동일인이다.  
작품은 레카미에 부인이 다비드가 그린 자기 초상화가 마음에 안들어
2
년후에 제라르에게 다시 부탁한 초상화이다.

*La Comtesse Regnault de Saint-Jean d'Angely"

*Caroline Murat and her Children 1808 "

*Constance Ossolinska Lubienska,1814*

그로(Baron Antoine-Jean Gros: 1771~1835)

*Bonaparte on the Arcole Bridge on 17 November 1796*

*Napolean at Jaffa,1804*

자파의 페스트 환자를 위문하는 나폴레옹

*Napolean on the Battlefield of Eylau on 9 February 1807, 1808*

나폴레옹 1세는 1807 2 9 러시아의 쾨니히스베르크 근교에서
러시아와 프러시아 연합군을 격파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같은 해에 그는 역사적인 사실을 길이 기념하기 위해 공모를 통해
그림을 그리게 했다.  공모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에일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다음날 전쟁터를 시찰하는 황제는 끔찍한 광경에
연민을 느낀다.  그는 부상당한 러시아 병사들을 간호하게 하여
그들은 황제의 인간미에 감격한다.  프랑스군은 멀리에서 야영을 하고
있고 황제는 열병하러 간다.   주제는 참혹한 전투의 흔적과
주동이 되었던 황제의 인간미를 동시에 표현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응모한 25명의 화가 중에서 당시 37세였던 그로의 작품이
수상하게되고 작품은 1808 관전에 전시되었다.  작가는 사실적이고
적절하게 황제를 중심으로 수행 막료들을 묘사했고 여러 인물의
성격을 분석하여 개성을 부여하였다.

프루동(Pierre Paul Prud'hon: 1758~1823)

*Rutger Jan Schimmelpenninck with his Wife and Children, 1801-02*

*The Empress Josephine,1805*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시대를 거치는 동안, 프루동의 회화작품에
조세핀 황후는 상당한 호의를 보였으며, 이후에 마리-루이즈의
지대한 관심을 받기도 했던 대중적 화가, 피에르- 푸르동은
레오나르도 빈치와 코레지오의 주된 회화기법이었던 스푸마토
인물이나 사물의 윤곽선을 흐리게 처리해서 안개처럼 뿌옇게
흩어지는 착시현상과 명암대조를 극단적으로 부각시켜 하나의 주제만
명확히 나타내는 기법을 쫓았다.  그래서 그는 자기 작품에 장막을
씌어 안개처럼 흐린 상태에서 감상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작품 <조세핀 황후> 영국 낭만주의 스타일의 영향을 받아
개방적인 분위기와 더불어 인물의 우울한 매력을 동시에 발산시키고
있다.  마티니크와 보아내 장군의 미망인 사이에서 태어난 조세핀
타셰 파졔리는 1796 보나파르트와 결혼을 했다.
그녀는 나폴레옹 황제를 상속인으로 지정하지 않아 1809년에는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이혼을 해야 했다.  나폴레옹이 황제로 즉위를 하고
법전을 공포함과 동시에 1제정 시대를 열게 1804 다음
프루동은 말메종에 위치한 조세핀 황후 소유인 안뜰에서 포즈를
취한 그녀를 담아 <조세핀 황후> 작품을 완성하게 되었다.

*Venus Bathing, 1810*

*The King of Rome,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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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19 신고전주의: 앵그르

   

앵그르 (Jean Auguiste Dominique Ingres 1780~1867)

Selfportrait, 1858


David
신고전주의의 실현자라면 Ingres 완성자라고 있다.
앵그르는 프랑스 남서부 몽토방 출생으로 무명 조각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1797
파리로 가서 다비드의 사사를 받게 된다. 앵그르가 화단에 입문하던
무렵의 프랑스 회화는 고대 그리스 로마의 미술을 가장 이상적인 아름다움으로
삼는 고전주의가 성행했다.
이같은 시대적인 배경과 맞물려 앵그르는 신고전주의 화풍을 자연스럽게
이어받았고, 다비드의 뒤를 잇는 신고전주의의 대표 화가로 불리우게 된다.
앵그르가 그린 고전적인 주제들은 다비드의 도상학에 의존하고 있다.
그럼에도 완벽한 뎃생력과 감성을 갖춘 화가로서 다비드에게 결여되어 있는
'
우아함' 표현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여인들의 초상이나 나체를 통해
드러나는 명쾌한 형태와 우아한 자태는 그만이 가질 있었던 독특한 표현의
영역이었다. 앵그르의 예술에 우리가 감동하는 것은, 정확한 소묘를 바탕으로
비례와 균형, 조화라는 고전적인 원칙들이 우아한 형태로 캔버스에 담겨
짐으로써, 고전파의 완성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특히 소묘부분에서 앵그르는
미술의 역사상 최고의 화가로 손꼽힌다. 소묘가 채색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
했던 그는 섬세한 , 풍부한 양감과 균형 잡힌 인체 구도의 신고전주의의
전통을 충실히 계승해 나간다. 그는 다비드가 갖고 있던 정치성을 지워버리고
철저한 미의 구현에 매진하게 된다. 바로크 선상에서 이어진 푸생적 미의
계승자로서 루벤스 정신의 계승인 낭만주의에 맞선 마지막 고전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앵그르의 작품 주제에 있어서는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를
넘나들고 있다. 그가 지닌 고전주의적인 성향의 이면에는 서로 다른 공간의
연결과 조합, 투명하고 분리된 빛의 광선을 이용한 풍부한 리듬감 낭만주의
적인 요소가 다분하다. 따라서 신고전주의자들로부터 적지 않게 비난과 눈총도
받아야 했고 많은 비평가들은 그를 낭만주의나, 혹은 신고전주의자로 단정하기
어려운 일면을 토로하기도 한다.
"
() 공부하게. 그러면 자네는 훌륭한 화가가 것이야."
청년 드가에게 앵그르는 이렇게 충고해 주었다고 한다. 앵그르의 이러한
회화적 정신은 우선 드가에 의해 계승되었고, 인상파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들라크르와가 색채에 의해서였다면, 앵그르는 형태에 의해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룬 사람이었다. 형태에 대한 앵그르의 기본 정신은 다음과 같은
본인의 진술에 나타나 있다. "진실에 의해서 아름다움의 비밀을 발견하지
않으면 된다. 고전은 창작된 것이 아니라 아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
모델에 대해서는 크기의 관계를 살펴보라. 거기에는 전체의 성격이 있다.
또는 형태는 단순하면 할수록 아름다운 힘이 있는 것이다, 여러분이 그것을
분할하면 할수록 그만큼 아름다움에 약해진다. 사람들은 성격을
잡아내지 못하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하나의 형태 대신에 개의 작은
형태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많은 화가들이 그의 견해에 반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의 완벽한 기교를 부러워하고 그의 권위를 존중했다.
역사화는 앵그르의 평생의 염원이었다. 초상화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지만 어쨌거나, 그는 사실상 최후의 위대한 초상화가였다.
그만큼 내면적인 깊이와 외면의 정확성을 통일한 사람은 없었다.
그의 제자들은 외관의 정확성에만 매달렸고 낭만주의자들의 그림은 화가의
사적인 감정이 이입되어 관심과 감동을 주는 반면 엄밀한 의미의 초상화는
아닌 것이다. 앵그르의 초상화는 외적 정확성 뿐만 아니라 모델의 내면적
깊이를 끌어내어 조합한다는 있었다. 이때문에 그를 신고전주의의
완성자라 부르면서도 낭만주의와의 절충주의라 부르기도 하는 것이다.

그는 44세가 되던 유학을 끝내고, 파리로 돌아온다.
이탈리아에서의 유학생활은 그에게 자신의 예술 세계를 성숙되게 하는
중요한 토양이 된다. 그가 프랑스의 다른 고전파 화가들과 다른 평가받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당시의 고전주의 회화 양식은 형식에 너무 지나친
나머지 인간적인 감성이 싸늘히 식어 있었지만, 앵그르에게는 현실에 대한
집착 뿐만 아니라 속에서 발견되는 아름다움 또한 놓치지 않는 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앵그르는 들라크르와의 그림에 나타난 극적인 명암과 소란한
움직임의 화풍을 경멸하면서도 실제로 그가 지닌 고전주의적인 성향의
이면에는 서로 다른 공간의 연결과 조합, 투명하고 분리된 빛의 광선을
이용한 풍부한 리듬감 낭만주의적인 요소가 다분했다.
또한 아름다움을 위해 인체를 다소 왜곡시키는데(그랑드 오달리스크)
역시 신고전주의의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신고전주의자들을 지지하던 비평가들로부터 적지 않게 비난과
눈총을 받있다. 스승이었던 다비드와 확연하게 다른 작풍 때문에 '고딕풍'
이라던가 잃은 중국인 같다는 혹평을 받기도 했다.
생기있고 발랄한 감성이 담겨져 있는 앵그르의 작품은 화단의 주목을 끌기
시작한다. 그는 누구 보다도 자신의 재능을 믿었고, 화가의 길에 대한 확신이
있었지만 무명의 지방 화가로 출발했던 그가 소위 '뜨기"까지는 매우 더딘
시간이 필요했다.

앵그르의 영향을 받은 후대의 화가들로는 Matisse Picasso부터 Pop-Art
극사실주의자들까지 열거할 있다. 중요한 영향으로 그가 지닌 역량, 근대성
그리고 현실성 등을 내세울 있다.
또한 가장 가까운 동시대에 영향을 받은 화가로는 여러 화가의 이름을 들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Bouguereau까지 연결시킬 있다.
예술로 승화된 아름다움에 대한 그의 욕구는 항상 작품의 주된 모티브였다.
그의 눈은 늘상 아름다움을 꿈꾸고 있었고 87세의 생애를 마감하기까지
아름다움에 대한 그의 예찬은 예술혼으로 끊임없이 불타올랐다.
그는 미술사에서 르느와르나 피카소 다수의 거장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나
정작 자신은 낭만주의적인 회화적 본능과 고전주의의 아카데믹한 원칙
사이에서 갈등하는 가운데 생애를 마감했다.

*Marie-Francoise Beauregard, Madame Riviere,1806

*Mademoiselle Caroline Riviere,1806*

그림은 1806 살롱전에 출품되었던 작품으로, 리비에르 가족 중에
카톨린느의 초상을 그린 작품이다. 앵그르는 리비에르 일가와 매우
친분 관계가 있어서, 리비에르와 그의 부인을 비롯해 카롤린느의 초상화를
그려 주기도 했다. 15세의 카롤린느는 작품이 완성된 얼마 후에 짧은 생을
마쳤다고 전해진다.
전체적으로 음영이 거의 사용되지 않은 밝은 분위기로 그려진 그림은
젊고 화사한 처녀의 아름다움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다.
곱게 빗어 넘긴 머리와 하얀 피부를 지닌 카롤린느의 목은 길게 뻗어
하얗게 받쳐입은 드레스에 더욱 어울리는 모습이다. 당시 상류사회
여인들의 멋스런 장식인 장갑이나 하얀 목도리를 허리부터 팔에 걸친
모습, 전면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카롤린느의 시선 등은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두껍지 않은 명쾌한 색채를 바탕으로 화면 구석구석
세밀한 필치로 묘사했기 때문에, 젊은 여인의 미적인 감각은 더욱 이상화
되고 있다. 카롤린느의 뒤로 펼쳐지는 강과 교회 , 낮은 나무 더미와
약간은 흐린 하늘의 풍경은 현실적인 느낌보다는 여인의 신비한 느낌을 더욱
강화시키는 효과로 사용된 듯하다.
한편 카롤린느의 초상화가 있는 자세로 그려진 반면, 리비에르와 그의
부인을 그린 초상화는 평온하고 안정된 구도를 지닌 앉은 자세로 그려져
있다. 이는 앵그르가 리비에르 가족간의 관계를 유기적으로 관찰해서
인물들을 배치했음을 있다.

*옥좌의 나폴레옹, 1806*

*Madame Antonia Devaucay de Nittis,1807*

*Bather of Valpincon(발팽송의 목욕하는 여인),1808*

그림은 앵그르가 로마로 유학을 떠난 2년이 지나 완성한 작품이다.
앵그르의 회화 기술은 로마에서 기초가 다져지고 신고전주의 화풍의 골격이
완성되는데, 세밀한 고전적 묘사로 이루어진 작품은 르네상스 회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정도이다.
그림은 욕실에 걸터앉은 젊은 전라 여인의 뒷모습을 그리고 있다.
등쪽에 밝은 광선을 비추어, 머리에 수건을 쓰고 있는 여인의 육체를
아름답게 이상화시키고 있다. 걸터앉은 침대에 잡힌 세밀한 주름들, 그리고
은밀한 목욕탕 내부를 가리기 위한 벨벳의 커튼이 만들어내는 주름들과 짙은
색채 등은 여인에게 쏟아지는 환한 빛과 대조를 이루면서 더욱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또한 형태의 입체적 표현, 치도 어긋나지 않은 세밀한 소묘
매끄러운 기교 등이 완벽한 구도 속에서 나타나고 있다.
앵그르는 전라의 여인을 그리는 일생을 바쳤는데, 초기 작품인 그림은
그의 회화 작업의 방향이 이미 확고해졌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머리에 두른 수건은 흡사 터번을 연상케하며, 침대보에 수놓아진 문양이나
커튼, 욕탕의 분위기는 터키의 풍속을 미리 염두에 두고 작업한 것이라는
느낌을 받게 한다. 그가 말년에 <터키탕>이라는 작품을 남겼던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있다.

*Alix-Genevieve de Seytres-Caumont, Comtesse de Tournon,1812*

*La Grand Odalisque,1814*

작품은 1819 살롱전에 출품되어 같은 유파인 신고전주의 화가들의
혹독한 평가를 받았는데, <오달리스크> 그려진 인물의 왜곡된 인체
묘사가 원인이었다. 해부학적인 정확한 소묘의 추구는 르네상스 시대의
빈치 이래 계속 이어져 왔는데, 앵그르의 인체는 매너리즘 화풍을 연상할
만큼 길게 늘어진 척추와 좁은 어깨, 커다란 골반과 작은 발로 묘사된 기형적인
것이었다. 후에 그림은 현대적 양식에 고전적 전통이 결합된 그림이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
오달리스크"라는 말은 터키 궁의 궁녀를 뜻하는 용어로, 앵그르는 20 년이
지난 후에도 <노예가 있는 오달리스크> 작품을 만들 정도로 "오달리스크"
대해 상당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머리에 터번을 두르고 비스듬히 누워 있는 여인의 주변에는 매트리스에 깔린
두터운 갈색 모피, 무겁게 늘어진 짙은 청색 커튼, 화려한 빛깔의 담뱃대
수증기를 뿜어내는 실내용 스토브, 황금색 담요 등이 둘러싸여 있다.
후궁들의 방을 뜻하는 하렘은 엄중한 감시와 금기의 장소로서 외부로부터
닫힌 공간인데, 공간에서 벗은 몸을 틀어 정면을 응시하는 여인의
유혹적인 표정은 밀실로부터 개방된 바깥 세상과 관계를 맺기 위한 신비
하면서도 관능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당시는 프랑스가 근동 지방으로
세력을 뻗어나가는 시기였으며, 앵그르는 그림을 통해 터키 풍물에 대한
관심과 취미를 반영하는 소도구들을 적절하게 사용하고 있다.

*Mme.De Senonnes,1814*

*Raphael and the Fornarina,1814*

*Lady Harriet Mary Montagu and Lady Catherine Caroline Montagu,1815*

*Portrait of Count Guriev,1821*

*Teresa Nogarola, Countess Apponyi,1823*

*Francoise Poncelle, Madame Leblanc,1823*

*Louis-Francois Bertin,1833*

초상화는 당시 데바 신문사 사장인 베르탱을 그린 것이다.
그림 속의 인물은 억세고 정력적인 중년남자의 실체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약간 흩어진 머리털이 부드럽게 물결치고, 넓은 이마로 비치는 밝은
빛은 코를 중심으로 뚜렷한 명암을 가르게 하며, 고집스럽게 입을 다문
정면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자신감과 위엄이 엿보인다.
이처럼 억세게 표현된 얼굴에 비해 검은 색의 옷은 몸을 더욱 풍만하게 보이게
하고, 무릎 위에 올려놓은 손과 검은 옷안에 받쳐입은 하얀 색의 정갈한
셔츠가 만들어내는 전체적인 분위기는 온화한 느낌을 발산한다. 이는 배경에
아무 것도 배치시키지를 않고, 어두운 분위기에 약간의 빛이 스며들게 채색한
효과 때문이다. 일종의 초사진(Super-Photograph)으로 보여질 만큼
초상화는 꾸밈없이 인물의 진실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습작으로 그려졌던 연필 소묘화에는 명쾌하고 확실한
인물의 특징만이 묘사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유채 초상화에서는 강조와
비례의 미묘한 변화에 의해서 강렬하면서도 개성적인 모습으로 재현되었다.
이와 같은 내면적인 울림과 외적인 정확한 묘사는 앵그르만이 표현할
있었던 재능이었다. 당시 카메라가 등장하면서 화가들이 외적으로 정확한
묘사에만 치중해야 했던 불안감은 앵그르가 보여주었던 내면의 감동이라는
부분이 결여되었기 때문이었다.

*Odalisque and Slave,1839*

*Roger and Angelica(Angelica Saved by Ruggiero), 1839*

*Louise de Broglie, Countesse d'Haussonville(도오송빌 백작 부인의 초상),1845*

*Hortense Reiset, Madame Reiset,1846*

*Betty de Rothschild, Baronne de Rothschild,1848*

*샤를르 7 대관식의 다르크,185154*

종교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다르크가 본격적으로 역사적 고찰을
받게 1840년대에, 위대한 프랑스 인들의 생애를 담은 『플루타르크
프랑세』라는 책에 앵그르는 다르크의 스케치화를 그려 넣은 적이 있었다.
19
세기 프랑스에 새롭게 대두하기 시작한 신고딕 양식의 교회와 같은
건축상의 치밀한 묘사와 경건하면서도 감각적인 크리스트교의 영광을 재현
하려는 목적으로, 앵그르는 오를레앙의 처녀 다르크를 통해 낭만적인 환상과
꿈을 표현하고 있다. 전설적인 여인인 다르크가 그림 중앙에 우뚝 있고
뒤에는 수도사와 신도들이 경배의 몸짓을 하고 있다. 샤를르 7세의 영광
스러운 대관식 광경을 그린 것이지만, 대관식을 주제로 삼지 않고 다르크의
영웅적인 모습을 전면에 부각시키는 효과가 앞서 있다. 딱딱한 금속 갑옷의
질감은 차가우면서도 단단한 이미지를 부여하고, 손에 들고 있는 깃발과 머리
뒤에 입혀진 후광은 다르크의 이미지를 현실적인 여인의 모습이 아닌
이상화된 신비한 존재로 표현하고 있다. 위에 놓여진 촛대며 여러 성물들
몸에 부착된 도끼며, , 철갑 마스크, 장갑 등의 세밀한 묘사는 실제로 만져질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어둡고 차가운 색채감으로 전반적인 분위기는
가라앉아 있으며, 정적인 느낌이 강하다. 한편 그림 왼쪽 끝에 무관으로 묘사된
인물은 앵그르의 자화상이라고 전해진다.

*Caroline Maille, Madame Gonse,1852*

*Josephine-Eleonore-Marie-Pauline de Galard de Brassac de Bearn, Princesse de Broglie,1853*

*Marie-Clothilde-Ines de Foucauld, Madame Moitessier,1856*

*The Source(),1856*

앵그르의 작품들에는 여체(女體) 그린 작품들이 많다.
특히 앵그르는 여체의 부드럽고 아름다운 선을 정밀하면서도 이상화된
모습으로 재현하는 몰두하였다. <> 비롯하여 <터키탕>이나
<
오달리스크> <노예가 있는 오달리스크> <안젤리크를 구하는 로제> 등에
이르는 그의 많은 작품들이 이러한 그의 회화 세계를 투영한다.
<
> 앵그르의 만년에 그려진 작품이다. 장식적인 아름다움과 새로운
관능미, 그리고 이를 구현하기 위한 정확한 데생은 앵그르가 고전주의의
중심적인 화가라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요소들이다.
물가에서 항아리를 지고 있는 풍만한 나신의 젊은 여인은 샘의 정령이다.
일부러 쏟아버리려는 듯한 자세로 들고 있는 물병에서는 자연의 근원을
뜻하는 맑은 물이 떨어지고 있다. 엷은 빛을 받으며 아름답게 빛나는 여인의
표정과 몸은, 그의 초기 작품과는 달리 건조하고 차가운 느낌을 발한다.
이러한 특징은 앵그르 노년에 그의 작업을 도와 주었던 그의 제자,
발즈와 알렉상드르 데코프가 작품을 손보았을 것이라는 조심스러운
의견을 제기하게 한다. 작품이 처음 그려지기 시작한 것은 1820
앵그르가 40 피렌체에서였으며, 완성된 것은 1856 파리였다.
, 36년이라는 상당한 시간 간격은 이러한 주장을 더욱 뒷받침해 주고 있다.
<
>에서 보여주는 젊은 여인의 포즈는 그의 다른 작품 <비너스의 탄생>
에서도 반복해서 취해졌다.

*Venus Anadyomene*

*Delphine Ramel, Madame Ingres,1859*

*Le Bain Turc(터키 욕탕),1862*

젊은 시절에 앵그르는 <목욕하는 여인> 그린 이후로 욕탕과 여자에
관한 끊임없는 흥미와 관심을 보여왔는데, 그의 만년에는 <터키탕>이라는
대작을 완성하게 되었다. 터키 욕탕의 구상은 현실이 아닌 공상적인,
가상의 공간을 설정해서 그린 것이다.
많은 전라의 여인들을 화면 배경에 모으고, 그림 앞에는 다섯 명의 여인을
배치시키고 있다. 많은 전라의 여자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관능성을 주된
테마로 삼고 있는 작품은, 보통의 네모난 캔버스가 아닌 원형으로 제작
되었다는 것이 또한 특징이라고 있다.
활동적이고 생기 넘치는 육체적 감각미를 불러일으키게 하는 요소는
그의 다른 작품에서는 찾아볼 없는 특징적인 부분이다.
앵그르가 고전파 회화를 추구하면서도 근대적 감각에 도전하고 있는
기념비적인 그림에는, 수많은 전라의 여자들이 각자가 취할 있는 모든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다. 여자의 누드가 만들어낼 있는 모든 포즈를
연구하던 앵그르의 작업들이 그림으로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앞쪽에 손을 머리 뒤로 올린 여자의 포즈가 가장 주의 깊게 묘사되어
있으며, 원근법에 따라 멀리 있는 여인들의 나부는 하나의 덩어리처럼 형태만
묘사되었다. 그리고 왼쪽 욕탕 속에 있는 여자도 앵그르가 그림의 구도를 위해
나중에 삽입한 것이다. 그림은 <오달리스크> 더불어 19세기 유럽에
유행했던 "동방 문화로의 경도" 나타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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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18 신고전주의: 다비드

   


19세기 근대 미술 -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 : 전통과 혁신의 시대
자유주의 사상과 왕권의 붕괴로 개성과 주관의 다양한 회화 양식이 나타남


프랑스 혁명과 공화국정부의 수립등 정치, 사회의 혼란과 뒤이어 기계혁명을
이루어낸 산업혁명은 새로운 세계관과 가치관을 갖게되는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나폴레옹 치하 그리스, 로마미술의 우아함과 찬란함을 모범으로 삼은
신고전주의 경향이나, 바로크,로코코양식의 대를 이어 상상적인 주제의 표현을
근대양식으로 발전시킨 낭만주의 경향은 서로 공존하게 되었다.
또한 증기선, 철도, 공장 등은 풍부한 상품을 생산할 있게 하였지만, 동시에
기계로 인하여 많은 산업 노동자들은 저임금을 받으며 빈민가에 모이게
하였다. 근대 산업의 발흥은 실로 많은 신앙, 관습, 조직을 파기하였고, 새로운
긴장과 갈등을 조장하게 되었다. 새로운 사상과 새로운 생활방식은 미술가들
에게 사실적인 일상적 표현을 하게 만든 사회적 배경이 되었다.
시기는 짧은 기간안에 다양한 양식이 펼쳐짐으로서 과거와는 다른 현상을
띠고 있다. 고대, 비잔틴, 중세, 르네상스, 바로크등은 100여년 혹은 1,000
여년에 걸쳐 개념으로 대변 되었지만, 19세기에 들어와서는 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 여러 양식이 세기 안에 공존하게 되었다.


7.  
신고전주의( Neo-Classical Art )

신고전주의 미술은 18세기 중반에서 19세기 전반 유럽세계를 풍미한 예술
양식으로서, 매너리즘에 빠진 바로크·로코코의 인습에 반발하여 고대 그리스
로마 양식으로의 복귀경향을 보여준다.
신고전주의는 합리주의 미학을 바탕으로 고대 예술의 특징인 형태의 이성적인
단순화를 선호하였는데, 이러한 명징성과 질서·이성은 계몽의 시대인 당시의
문화 양상과도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고대에 관한 관심은 이미 18세기 초부터 보이지만 특히 헤라크라네움과
폼페이의 발굴, 그리스 소아시아 조사 여행과 더불어 고대문명에 대한 흥미가
고취되었으며 이러한 고고학적 연구성과에 힘입어 대표적인 이론서들이
출간되기에 이르었다. 오늘날에도 신고전주의의 선언서로 인식되는
빙켈만의 "그리스 미술 모방론" 고전주의 미술에 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
일으켜 이후 고전 고대 미술 작품에 대한 다각적 연구, 역사적·비평적 고찰이
활발하게 전개되는 계기가 되었다.

신고전주의 양식은 18세기 중후반 유럽 등지에서 순수하고 단순한 형태로
발전, 1) 19세기 아카데미즘 예술의 기본 원리로서 오래 이어졌으나
영감(inspiration) 상실, 기계적인 모방과 무의미한 복제로 나가면서
고대나 이국에 대한 뜨거운 동경과 관능적인 경향으로 기울어짐에 따라
2)
낭만주의 예술의 선구자로서의 구실도 하게 되었다.

또한 고대적인 모티브를 많이 사용하고 고고학적 정확성을 중시하며 합리주의적
미학에 바탕을 둔다.  신고전주의 예술은 형식의 정연한 통일과 조화, 표현의
명확성, 형식과 내용의 균형을 중요하게 여기며, 특히 미술에서는 엄격하고
균형잡힌 구도와 명확한 윤곽, 입체적인 형태의 완성등이 우선시 된다.
고대에 대한 관심은 18세기 중반에 이루어진 폼페이와 헤리클라네움 파에스툼
등의 고대건축의 발굴과 동방여행에 의한 그리스 문화의 재발견등이 계기가
되었으며 프랑스 혁명 전후 고대에 대한 동경이 사회 전반을 풍미하였다.  
프랑스에서의 신고전주의 운동은 로코코 양식의 번잡스러움에 대한 일종의
반발, 루이 14 시기의 그랜드 매너에 대한 향수, 푸생의 고전주의에 대한
회귀 등이 복합적으로 나타났다.  그러면서 강한 도덕적 합의도 함께 이루어
졌다.  또한 사회의 제반 혁명적 변화나 시민사회의 속에 '고대 로마적'
덕성을 세워보고자 하는 욕구등이 운동과 관련되어 있다.

루이 15세와 16세의 통치기간에 이르는 시기가 주요 연대로서, 전대의
태양왕의 철저한 섭정이후 혼란이 한꺼번에 몰아닥친 시기이다.  
따라서 혁명의 기운과 전대의 화려한 정치 성향의 귀족의식이 싹트는 시민
계급의 성장의 정치적 위기, 한편 현대를 예고하는계몽주의 사상의 성장이
혼재하고 있다.   따라서 감정과 개개인의 자유, 애국심들이 얽힌 감정의
출구가 필요했다.   예술계에서 신고전주의는 새로운 사회와 새로운 인간은
그들의 이상에의 갈망을 행동과 사상으로 만들어야 했다.
여기서 미술에 나타난 주조는 신고전주의의 경우 "고전미" 흐름의 주요
성격에 보이는 것이다.   혁명정부의 새단장은 고전주의의 복귀로 성격을
드러낸다.  특히 고고학적 발굴이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아름다움은
"
고귀한 단순과 고요한 위대" 칭송받으며 1775 빙켈만의 「그리이스
미술모방론」이란 저서에서 이상미가 재평가 받는다.
결과 고대에의 관심을 팽배하였고, 고대의 특징 , 명석한 판단에 따른
절제되고 철저한 정확성은 혁명정부가 바라던 이상을 적확하게 구현시키기에
알맞았다.  로코코시대가 취한 과도한 사치와 화려는 혁명정부의 번째 숙청
과제였기 때문이다.   순수하되 명확하고 강직한 , 균형과 조화, 안정과
형식미의 존중은 고전주의를 계승하는 신고전주의가 취한 특징이다.  
오히려 완강하고 절제된 선과 색으로 고전적이라고 있겠다.  
바로크 시대 연장선상에서 Poussain적인 회화의 계승으로 있으며
주제에 드러나 확실한 정치적 의지에 근거한 의도적인 소재, 철저하고
절제된 선묘는 더욱 심화된 고전미를 나타낸다.
한편 공간의 압축화, 실제 사건의 주제화 등은 신고전주의의 특징이자 마지막
고전주의자인 Ingres(앵그르) 드러나는 동방취미, 왜곡된 표현은 시대에
부합하는 취미 변화의 반영이자 '낭만정신' 깔린 기저를 드러내는 단적인
예로써 새로운 미의식의 예고라 있겠다.

신고전주의 미술은 19세기 중반 '라파엘로 전파'(Pre-Raphaelite Brother-
hood)
이어진다.   근대사회의 출현과 더불어 시작된 신고전주의 미술은
이와같이 발생에 있어 당시의 역사적·사상적·학문적 배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으며 , 유럽 전역에 걸쳐 빠른 속도로 퍼져나가 19세기 이후 미술 전개에
하나의 배경을 이루게 것이다.


다비드 (Jacques Louis David 1748~1825)


프랑스의 화가. 파리 출생. 19세기 프랑스 화단에 군림하였던 고전주의
미술의 대표자이다.  1774 당시의 화가 지망생들이 동경하던 로마상을
획득하고, 이듬해부터 1780년까지 로마에 머무르면서 고전미술을 연구
하였다.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Oath of the Horatii(1784)
스타일은 그의 고전연구의 성과를 나타내는 명작으로, 당시 점차 높아지기
시작한 애국사상의 뛰어난 표현으로서 일약 유명해졌다.  
프랑스 혁명 당시 자코뱅 당원으로서 혁신측에 가담하여, 로베스피에르가
실각하자 투옥되었다.  그러나 후에 나폴레옹에게 중용되어, 예술적·정치적으로
미술계 최대의 권력자가 되어 화단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앵그르, 그로
제라르를 비롯하여 19세기 중엽에 활약한 고전파 화가들은 모두 그의 밑에서
나왔다.  역사적 주제를 그린 작품은 18세기 로코코 미술의 우아·섬려한 것에
비해, 고대조각이 지니는 조화와 질서를 존중하고 장대한 구도 속에서 세련된
선에 의하여 고대조각 그대로와 같은 형태미를 만들어내었다.  
그러나 이것들은 형식적으로는 다듬어진 대구상화(大構想畵)이긴 하지만
다소 생동감이 결핍되어 있다.  이와는 달리 초상화에서는 고전적인 형식미
속에서 사실적인 묘사력을 충분히 살려 참신한 느낌이 약동하고 있다.  
나폴레옹 실각 추방되어 1816 브뤼셀로 망명하였고,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였다. 뚜렷한 정치 성향을 지닌 작가로서 나폴레옹의 선전작가이자
신고전주의의 실제적인 구체적 실현을 이룬 예술가이다.

'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브루터스와 그의 죽은 아들' 등은 고대에서 빌어온
주제로서 정의 실현을 위한 애국심을 강조하고 있다.
표현된 공간은 고대의 확장된 공간미를 넘어선 오히려 압축된 공간의
사용으로 연극적이고 극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면서 고전미와 더불어 현대적인
요소로의 전환이 드러나고 있다.   '마라의 죽음' 등에서 나타난 실제 사건의
주제화는 은유와 비유를 통한 고대 신화를 한층 대범하게 표현하고 있다.  
단순한 배경은 죽음의 비장미를 강화시키면서 죽음을 영욱적이고
숙엄한 주제로 끌어 올리고 있다.  이러한 것은 자유스러운 분위기에서 비롯된
주제만큼은 엄격을 거부하고 '존재하는 모든 다양성의 수용'(로잘린 크라우스)
보이는 예라 하겠다.   '룩상부르 공원' 그가 수감생활 중에 그린 유일한
풍경화로 정치가 내제한 이전의 회화세계와 다른 면모를 보인다.
있는 실재의 공원의 모습은 안정적인 자연의 일면을 서정적으로 그린다.  
고전적인 안정감과 덧붙임 없는 재현은 고전주의와 근대성의 새로운 이상적
만남이라고 있겠다.  그는 제국이 망하고 추방 되어서도 신고전주의의
이상을 포기하지 않고 제자들로 이어서 정신을 잇고 있다.

*Portrait of Marie-Françoise Buron, 1769*

*Count Potocki,1780-81*

*Portrait of Jacques-François Desmaisons, 1782*

*구걸하는 발리자리우스,1782*

발리자리우스는 6세기경, 로마의 재건에 공을 세웠으나, 동료들의 모함
으로 장님이 되어 추방되었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치하의 장군이었다.  
18
세기 귀족들의 사치와 방종에 대한 혐오감이 확산되면서 계몽주의 지식인
들은 시민으로서의 도덕적인 의무를 충실하게 따랐던 로마 공화정시대의
영웅들과 자신들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비록 발리자리우스처럼
비극적인 종말을 맞게 되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고전미술의 장엄함이야말로
애국적 희생이라는 정신적인 숭고함을 발현시키기에 가장 적당한 양식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Andromache Mourning Hector,1783*

*Alphonse Leroy,1783*

*The Oath of the Horatii(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1784*

그림은 플루타르크 영웅전에 나오는 애국심과 사랑의 갈등이 담긴 로마사
중의 이야기를 담은 것이다.  고대 로마와 알바 군대는 서로 전쟁을 해야하는
처지에서 각각의 대표를 뽑아 승부를 결정하는 방법을 취했다.  
로마에서는 호라티우스의 3형제가 뽑혀 알바 군대의 쿠라티어스가의 아들과
대결을 하게 된다.  호라티우스가의 여동생 카밀라는 쿠라티어스가의 남자와
약혼을 상태였는데, 결국 호라티우스가는 전쟁에서 알바의 쿠라티어스가의
3
형제를 죽이고 개선했다.   이에 약혼자를 잃게 카밀라가 오빠들에게 항의를
하자, 큰오빠는 카밀라를 죽여 버리고, 아버지는 나라를 위해 잘한 일이라며
아들을 칭찬하게 된다.
그림에서는 칼을 들고 있는 아버지 앞에서 호라티우스 3형제가 일렬로 서서
엄숙한 맹세를 하고 있다.  아버지 뒤에서는 검은 옷을 입은 며느리가 자식들을
감싸안고 있으며, 여자는 실신한 기대어 누워 있고, 하얀 옷을 입은
카밀라는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생각하며 팔을 늘어뜨린 슬퍼하고 있다.
로마 양식의 건물에 반원의 아치형 기둥 앞의 형제와 아버지의 모습은 강한
색채와 근육, 시선이 집중되는 구도 때문에 역동적으로 보이는 반면, 여인들은
연하고 밝은 색감을 사용해서 늘어져 서로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전형적인 신고전주의 풍으로 그려진 작품은 사실감, 힘찬 형식의 단순성
영웅적인 주제 강조 등으로 이후 미술사에 위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The Death of Socrates,1787*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들려는 순간, 그의 제자는 "사부님이 부당하게 돌아
가셔서 슬프다" 눈물을 흘린다.  소크라테스는 여기서 생의 마지막 농담을
던진다.  "그대는 내가 부당하게 죽지 않고 정당하게 죽기를 바라는가?"
초연하게 죽음을 맞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에서 우리는 숭고의 예술적 표현을
있다.  왼쪽 침대의 아랫부분에 침울한 표정으로 명상에 빠져있는 사람이
바로 풀라톤이다.  그리고 주변의 인물들을 보면, 친구들에게 마지막 작별의
말을 하는 소크라테의 말은 아마 숭고의 다른 표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청중의 마음속에 일으키는 파토스(감정, 정서, 공감) 우리는
그를 둘러싼 주변인불들의 표정과 제스처에서 읽을 있다.
"
, 이제 우리가 가야할 시간이 왔노라.  나는 죽기 위해, 그대들은 살기 위해.  
우리 누구에게 나은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지, 우리 모두에게 알려져
있지 않도다.  오직 신만이 아실 ..."
다비드는 소크라테스의 자기 희생과 박애 정신을 통해 프랑스의 새로운
시대정신을 갈망한 것으로 보인다.   소크라테스의 얼굴은 철저한 고증에 의한
재현이라 한다.  그리스 로마 시대의 조각상을 모델로 그려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모든 인물들은 엄격한 해부학을 토대로 그려져 있다.

*Monsieur Lavoisier and his Wife,1788*

*Paris and Helen,1788*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와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나의 정사는 호메로스의
시편에 나오는 유명한 이야기다.  
파리스가 헬레나를 납치함으로써 트로이 전쟁이 촉발됐고 사람의 이야기는
화가들에게 좋은 소재가 되었다.  
다비드의 '파리스와 헬레나' 사람이 처음 연인으로 맺어지는 밤을 묘사하고
있다.  파리스는 벌거벗은 몸이지만 쓰는 모자를 쓰고 있다.  
헬레나는 옷을 입고 있지만 몽롱한 분위기를 풍기며 파리스를 유혹한다.  
이는 파리스가 잠자고 있는 사이 헬레나가 그의 침실로 들어온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파리스도 헬레나의 유혹을 받아들일 아니라 뜨겁게 유혹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The Lictors Bring to Brutus the Bodies of His Sons Paris,1789*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던 1789년에 그려진 작품은 특별히 정치적인 선전을
계산하고 제작한 것은 아니지만, 혁명 정신에 입각한 도덕적인 의식을 계몽
하려는 회화로 읽혀질 있는 작품이다.
타르퀸 왕의 부패를 뿌리뽑기 위해 로마에 공화정을 세웠던 브루투스는
아들들이 자신이 세운 공화국에 반기를 들었다는 이유를 들어 사형선고를
내렸다.   그림은 브루투스의 관리들이 처형된 브루투스의 아들들의 시체를
가져오고 가족들이 이에 슬픔에 빠져 있는 장면을 묘사했다.  
자식들을 죽이라고 명한 브루투스는 화면 왼쪽에 그늘에 가려져 있다.   팔을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모습은 죄의식에 대한 도덕적 의무감 때문에
괴로워하는 브루투스의 감정을 드러내 주고 있다.  특히, 브루투스가 머리
쪽으로 손을 가져간 포즈는 감정보다는 머리의 이성이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 그림은 다비드가 1784년에 제작한 다른 작품인 <호라티우스의
맹세> 매우 흡사한 구도를 지니고 있다.  고대 로마풍의 건축양식 그림의
주제가 펼쳐지는 왼쪽 , 슬픔과 비탄에 잠긴 여인들을, 오른쪽에 배치시킨
구도 그리고 빛과 색채의 정확한 표현으로 입체감 있는 인물과 사물의 재현
영웅주의의 찬양 등이 작품의 유사성을 말해준다.

*Anne-Marie-Louise Thélusson, Comtesse de Sorcy, 1790*

*Death of Marat,1793*

다비드의 작품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회화에서 열광적인 인기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 희생과 명예로운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정치적 선전
도구로 발전하였고, 그림이 완성된 10년이 못되어 1789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하게 된다.
그림을 주문한 왕과 왕비가 단두대에서 처형되고, 다비드의 혁명 동지였던
마라는 목욕탕에서 샤를로트 코르테라는 여인에게 암살을 당했다.  
그림은 다비드가 마라를 추모하며 그렸던 작품이다.  무엇을 쓰고 있던 중에
살해당한 모습으로 손에는 펜이 그대로 들려 있고, 다른 손에는 코르테가
면회를 요청할 가지고 청원서가 피묻은 쥐여 있다.  가슴을 난자 당해
피가 흐르는 마라의 시체와 음울한 색채의 벽은 살인의 비극성을 폭로하며,
혁명을 완수하려다가 죽은 영웅적인 자세가 연상될 만큼 비장한 구도를 지니고
있다.  나무 궤짝에는 "마라에게 바친다(A Marat David)" 라는 글이 비문처럼
새겨져 있으며, 가슴과 손에 상처, 길게 늘어진 , 그리고 아무런 장식이
없는 마라의 방은 혁명가의 순수한 모습을 상징하는 도구처럼 사용되었다.  
그것은 마치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라파엘로의 <십자가에서 내려진
그리스도>에서 보여지는 순교자의 고통과 아픔, 희생을 연상하게 한다.  
작품에서 다비드는 화려하고 사치스런 로코코풍을 벗어나 강하고 남성적인
영웅을 선택하면서 마라를 통해 시민적인 헌신과 자기 희생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재현시키고 있다.

*Self-portrait,1794*

자신의 예술을 혁명의 도구 인식했던 다비드, 문화적 영웅으로 떠받들어주는
분위기에 도취되어,  그는 46세라는 중년의 나이였음에도 뺨의 종양으로 인해
혀가 굳고, 얼굴이 틀어졌음에도 자신을 20 초반의 멋쟁이 청년으로 그려
놓았다.

*Monsieur Seriziat,1795*

*Portrait of Gaspar Mayer, 1795*

*The Sabine Women,1796-99*

작품의 배경은 고대 로마의 건국에 대한 전설이다.  로마를 건국한 왕이
사비니의 여인들을 납치하고, 사비니의 군대가 로마로 쳐들어 오지만
싸움을 말리는 이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사비니의 여인들이다.  
여인들은 사비니의 군대에 있는 아버지와 오빠를 향해 부부의 연을 맺고 있는
로마의 병사들과 다투지 것을 애원한다.
비극적인 주제는 다비드가 프랑스 혁명을 통한 동족 상잔의 비극을 상징적
으로 표현해 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Madame de Verninac,1799*

*Madame Recamier,1800*

신고전주의의 위대한 초상화가였던 다비드의 뛰어난 재능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걸작이다.  초상화의 주문자는 파리 은행가의 아내였던 1800
당시 23세였던 레카미에 부인으로, 미모와 지성으로 당시 파리 사교계에서
이름을 떨쳤다.   의자에 앉아 있는 레카미에 부인은 마치 대리석 조각처럼
부동의 자세로 앉아 있다.  낮은 의자, 의자의 형태와 합치된 여인의 자세
그리고 왼쪽으로 보이는 길고 가는 스탠드 , 모델의 자세와 모든 소품들이
엄격하고 고요한 신고전주의 양식에 부합되고 있다.
정면을 향해 시선을 향한 섬세하고도 부드러운 부인의 얼굴은 앵그르의 흐르는
유려한 선을 연상시킨다.  보통 대작에서는 보기드문 반짝거리는 붓터치
섬세하고 정확한 기법 등이 다소 건조한 고전 양식에도 불구하고 인물을
따뜻하게 그려내고 있다.  수직과 수평의 구도가 사물들에 의해서 연속적으로
반복되는 구조가 독특한 그림은, 그의 다른 작품들 <포토키 백작>, <라보아
지에의 초상> 더불어 다비드 회화의 주요한 특징과 화법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손꼽힌다.  정작 주문자였던 레카미에 부인은 작품에 불만을 느껴
2
제라르에게 다시 초상화를 주문하였다고 한다.

*Napoleon Crossing the Saint Bernard,1800-01*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이상화 시킨 영웅의 초상 가운데 하나다.  
실제 그의 모습은 키도 작고 그다지 볼품이 없었다고 한다.
또한 그림처럼 백마의 갈기를 휘날리며 군대와 함께 험한 알프스의
베르나르산을 넘지는 않았다 한다.  나폴레옹은 말이 아니라 노새를 타고
산을 넘었으며, 부대가 먼저 넘어가고 며칠뒤 따로 안전하게 넘어갔다.  
따라서 초상화는 철저한 허구이다.  다비드는 사람들이 기대하는 영웅의
이상적인 이미지를 형상화 것일 뿐이다.   그림은 예술이 정치적 선전
수단으로 얼마나 대단한 기능을 있는지를 증거한 사례이기도 하다.

    

*Consecration of the Emperor Napoleon I and Coronation of the Empress Josephine in the

Cathedral of Notre-Dame de Paris on 2 Dec 1804(
나폴레옹 황제와 조세핀 황후의 대관식),1806~07*

1804 12 황제의 공식 화가로 임명된 다비드는 점의 커다란 캔버스에
대관식의 의식을 기념하는 작품을 맡게 된다.
작품들 작품만이 실제로 그려졌는데, 다른 작품은 현재 베르사이유
궁전의 미술관에 있다.  대관식 의식은 파리의 노트르담(Notre-Dame)
성당에서 거행되었다.   다비드는 대관식을 상세하게 묘사하였다.  
나폴레옹은 로마 교황에게 황제의 관을 받아 스스로 썼다고 하는데, 다비드는
장면 대신, 이미 황제의 관을 나폴레옹이 조세핀에게 왕비의 관을
씌어주는 장면을 그렸다.  거대한 집단 초상화로 구상된 작품은 100
이상의 실재 인물들이 묘사되어 있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 나폴레옹 황제와
사이가 나빴던 영국 대사는 그림에서 제외되었다.  또한 화면 정면 별실로
만들어진 장소에는 행사에 불참한 나폴레옹 어머니와 가족들이 보인다.  
다비드가 나폴레옹 부탁으로 그림에 참석시킨 것이다.   다비드는 스케치
단계에서는 인물들을 일직선상으로 세웠으나, 완성작에서는 왼쪽에 있던
군인 명을 오른쪽에 배치, 인물들이 중심 사건을 둘러싸도록 구성하였다.  
이러한 공간 구성은 깊이감을 돋보이게 하고, 관객이 실제로 의식 속에
참여하는 듯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다비드의 정교한 붓질, 뛰어난 색채
감각은 의식에 참여한 사람들이 두른 모피와 보석들을 화려하게 재현시켰다.
다비드는 1780년대 그의 대표 작품들이 보여주었던 신고전주의 양식에서
점차 벗어났다.   작품은 점차 드라마틱하고 화려한 실내 묘사에 치중하게
되는 그의 작품 세계의 변화를 보여준다.

*Datail of Above*

*Portrait of Pope Pius VII,1805*

*Countess Daru,1810*

*Count Francais de Nantes,1811*

*Napoleon in His Study,1812*

기록을 보면 나폴레옹은 만성적인 위통과 배뇨장애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쪽에 오는 통증을 가라 앉히려고 조끼 단추를 풀고 배를
문지르는 습관이 있었는데, 누가 오면 매무새를 바로 하고 그냥 단추
사이에 손을 넣는 자세를 취했다 한다.  나폴레옹의 전형적인 포즈가
그림에서 이룬 자의 내면에 숨은 고통이 감지된다.
군주가 목숨을 잃거나 나라를 빼앗기는 것은 눈에 보이는 전쟁보다는
음모에 의한 경우가 많다고 마키아벨리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Portrait of Charlotte David 1813"*

*General Gerard,1816*

*Portrait of the Comtesse Vilain XIIII and her Daughter, 1816*

*Cupid and Psyche,1817*

*Mars Disarmed by Venus and the Three Graces,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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