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미술사55 큐비즘(입체파) 페르낭레제, 들로네, 그리

서양 미술사 - 55(입체파: 레제, 들로네, 그리)

   


레제(Fernand Legar: 1881~1955)


프랑스 아르장탕 출생. 처음에는 캉의 건축사무소에서 견습생으로 근무하였다.
그러나 1903 파리의 미술학교에 들어가, 제롬과 페리에에게 사사하는 한편
루브르나 아카데미 쥘리앙에 다니면서 공부하였다.
초기에는 인상파와 신인상파의 감화를 받았고, 마티스에게 영향을 받기도
하였으나, 1907년경 세잔의 작품을 계기로 화면 구성이나 공간 표현을
연구하게 되었다.

1910
피카소와 브라크, 아폴리네르, 들로네 등과 사귀어 입체파(큐비즘)
운동에 참가하여, 대표자의 사람이 되었다. 특히 들로네와 같이 정물화다운
제재(題材)보다 자연과 인간생활의 구도를 즐겨 다루면서 단순한 명암이나
명쾌한 색채로써 대상을 간명하게 나타냈고, 원통형 등의 기하학적 형태를
좋아하였다. 기계문명의 다이나미즘과 명확성에 이끌려 그것을 반영한
다이내믹 입체파라는 경지를 이루었다. 1 세계대전에 종군하여 부상을
입었으나, 전쟁의 체험을 통하여 기계와 인간의 공동작업이라는
시대의 주제에 눈을 명쾌한 포름과 순색(純色) 평도(平塗) 기계적인
표현으로 나아갔다. 코르뷔지에와 몬드리안 등과 사귀어 추상주의에도
관심을 보였으며, 회화와 건축, 인쇄 ·영화 ·연극 등의 관련에도 관심을 보였다.
현대 사회생활의 요구를 반영하고 생활의 실감을 존중하는 제작을 의도하였다.

유채화 ·소묘 ·판화에서 벽화 ·모자이크 ·스테인드글라스 ·태피스트리 등에도
손을 대어 폭넓은 활동력을 발휘하였다. 1920년대에는 전위영화 《발레
메커닉》(1924) 무대장치와 영화 ·발레 관계 일에 종사하였고, 2
세계대전 중인 1940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곡예》나 《자전거 타기》
등을 제작하였다. 1945 다시 파리로 돌아와 1946 아시교회의 정면을
모자이크로 장식하였고, 오댕쿠르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 도자기나 태피스트리
광범위한 일에 종사하여 간명하고 힘센 평면적인 표현을 통하여 기계시대의
새로운 인간상을 추구하였다. 1960 프랑스 남부 코트다쥐르의 비오에
레제미술관이 개관되었다.

*The City, 1919*

*The Discs in the City*

*Leisure Homage to Louis David*

*Still Life with a Beer Mug, 1921*

*The Four Cyclists*

*The Builders, 1950*

레제는 하나의 건물을 세우는 사람들을 관찰하여 여러 각도에서 그리고
있다. 작품은 커다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조립되는 견고한 철골과
선명한 색채, 일하는 사람들의 활력이 넘치는 대작이다. 레제는 작품을
통해 문명과 인간의 조화, 형과 색의 선명한 대비 등을 강조하고 있다.

*The Parade*

*Three Women*

*Two Women Holding Flowers*

들로네(Robert Delaunay: 1885~1941)


프랑스 파리 출생. 주로 역사화를 그린 고전주의 화가 J.E.들로네의 아들이다.
처음에 신인상파의 그림에 관심을 가지고 색채 연구에 열중하였고 입체파
운동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만족하지 못하고 미래파의 동향 등에 촉발되어
1912
년경부터 순수한 프리즘색에 의한 율동적인 추상 구성을 발전시켜서
오르피즘의 창시자가 되었다.

당시의 대표작 《에펠탑》(1911) 연작에서 《창()(1912) 이르는
발전 과정은 구상으로부터 비구상으로의 이행, 색채 자체에 의한 율동적인
공간 표현을 달성한 것으로서 추상 회화의 역사에 중요한 의의를 남긴
것이었다. 또한 색채론과 독일미학에도 조예가 깊어 V.칸딘스키, F.마르크
P.
클레 등의 '청기사(靑騎士)' 그룹전() 초대 출품하는 국외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주었다.
들로네는 1909년경의 에펠탑 연작에서 분석적 큐비즘의 영향을 보여주지만
피카소나 브라크와는 달리 색채를 지양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후에 그려진 <>시리즈와 <, >연작에서는 비구상 계열의
순수 색채 회화를 보여준다. (그래서 아뽈리네르는 들로네와 같은 시기에
이와 비슷한 작품을 보여준 쿠프카나 피키비아 등의 작품 경향을 일컬어
<
오르피즘>이라 부른다. ) 오르피즘은 음악의 오르페우스에서 따온 말로
(
자신의 싯구에도 있다) 이들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순수한 색채의 율동성과
색채의 프리즘 효과를 나타내주는 말이다. 오르피즘은 그래서 오르페우스적
입체주의, 혹은 순수색채적 큐비즘이라 불려지게 된다.
부인 소니아(18851979) 러시아인으로 1905 파리에 와서 1910년에
그와 결혼하였다. 그녀 역시 오르피슴의 대표자로서 화사한 화면을 제작하였다.

*나무가 있는 에펠탑*

"빛은 모든 것을 왜곡시키고, 모든 것을 분해한다. 이상 기하학은 존재하지
않는다. 유럽이 무너지고 있다." 적어도 30점의 작품이 포함된 연작의
대상인 에펠탑은 로베르 들로네 작품의 중요한 주제였다.
그가 1909년에 소냐 터크와의 약혼을 기념하는 뜻에서 처음 탑을 그린
것이 분명하며 다음 년간, 그리고 다시 1920년에 기술의 경이를 다양한
모습으로 계속해서 화폭에 담았다.
당시의 많은 문인과 미술가에게 그랬던 것처럼 들로네에게도 역시 탑은
근대성의 상징이 되었다. 라디오 수신탑으로서의 용량에 있어서, 에펠탑은
경계를 무너뜨려 유럽을 하나의 지구촌으로 변모시키면서 들로네가 마음속에
그렸던 국제적인 대화를 현실로 보여 주었다. 에펠탑에 대한 들로네의 첫번째
처리 방식은 제한된 색채와 단순한 블록 형태로 죠르쥬 브라크 새잔느의
영향을 보여준다. 다이나믹한 <나무가 있는 에펠탑> 표현 방식은
들로네 작품형식에 있어서 극적인 변화을 알려주고 있다.
들로네는 아마도 미래주의의 영향을 받아 시간과 공간을 관통하는 시각의
움직임을 암시하고 동시주의적인 조망을 표현하면서 여러 시점에서 탑을
한번에 보여주고 있다. 그는 시간의 요소를 도입함으로써 그가 내적인
지각에 대한 핵심이라고 믿었던 충분한 지각의 경험을 포착함으로써 몇몇
인상들을 종합할 있었다. 그가 파리를 떠난 , 기억에 의존하여
그림을 완성했다는 점은 중요하다. 그는 기억을 통해서 과거, 현재, 미래가
유동적인 의식의 연속 고리에 의해서 통합된다고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의
주장에 영향을 받았다. 들로네는 에펠탑이 놓여 있는 거대한 공간의 혜택을
취하면서 구조물의 궤도 따라 하늘로, 다시 밑으로 움직이는 시선의
움직임을 추적한다. 시선이 전경의 나무로부터 멀리 탑의 꼭대기로 움직이고
건물의 전면을 가로질러 굽어있는 나무 가지를 따라 구름 기둥의 아래쪽으로
이동함에 따라서, 에펠탑은 자동적인 삼차원 대상물로의 위치와 전체적으로
그림 표면에 나타난 도안의 요소라는 본분 사이로 옮겨 가면서 전경과 배경
사이에서 앞뒤로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러한 시각적 효과는 고도의 추상으로
그를 이끈 <> 시리즈로부터 들로네의 후기 작품에서 명백해졌다.
<
나무가 있는 에펠탑> 들로네의 화법상 해체 단계가 시작되었음을
알리고 있다. 그의 초기 작품에서 보였던 견고한 형태가 분해되어 조각나기
시작하지만, 입체주의 미술가들의 연구 대상들과는 달리 여기서 에펠탑은
여전히 주변 공간으로부터 구별할 있는 형태로 남아 있다.
작품은 들로네가 대상물로 흩어진 구성 요소들의 만화경으로 조각내면서
견고한 형태에 침투시켜 그것을 부수기 위해 빛을 이용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에펠탑, 1910*

*도시 2, 1910*

*Champ de Mars: The Red Tower, 1911/23*

*파리시, 1912*

단형, 1913*

* 개의 창문 연작의 습작, 1913*

*Homage to Bleriot, 1914*

*에펠탑, 1926*

*끝없는 리듬, 1934*

*공기. 그리고 , 1937*

후앙 그리(Juan Gris: 1887~1927)


피카소와 브라크 외에 이들의 큐비즘 미학을 이들보다 오히려 대중에게
전달했던 작가로서 후앙 그리가 있다. 그는 1912 경에 분석적 큐비즘
경향의 작품을 보여주고, 큐비즘 운동이 약해지기 시작한 1914 경에
종합적 큐비즘 경향의 작품을 보여준다.
종합적 큐비즘의 원리들이 그것의 가장 순수하고 논리적인 귀결에 이르게
것도 바로 그의 예술에서였다. 피카소를 비유컨데 미켈란젤로적인 재능을
가지고 전통적 가치를 전복시켜 버린 혁명가라 한다면, 그리고 브라크를
운동의 장인이자 시인이라 한다면 그리는 운동의 대변인이요, 운동의
정신을 구현시킨 사람이었다고 있다.

피카소와 브라크가 그보다 앞서 2 동안 진전시켰던 보다 선적(線的)이고
추상적인 유형의 회화를 대단히 개성적으로 변장시켜 가지고 그가 사람의
성숙한 큐비스트 예술가로 나타났던 것이 고작 1912년이었다.
그러나 앞의 두사람의 작품에서는 큐비즘이라는 새로운 테크닉이 형태와
주변의 공간이 상호 침투하면서 맞물려 잇는 보다 유동적이고 암시적인
유형의 회화에 이르렀던데 비해, 그리의 예술은 처음부터 당장 뭔가 훨씬
설명적이고 표제음악적인 결정체로 응결 되어있다. 그의 정물화에 등장하는
오브제는 각각 가로축과 세로축을 따라 이등분되어 있으며, 거기에서
나오는 단편들은 상이한 각도의 시선에 따라 세밀하게 검증되고 있다.
그런 다음 오브제는 다시 접합되어, 피카소나 브라크 작품에 나오는
어떠한 이미지보다도 체계적인 분석을 거친, 그러면서도 문학적인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는 피카소와 브라크가 순전히 종합적인
큐비스트 언어를 개발하고 있던 무렵 여전히 분석적인 방식으로 작업을
계속해 나갔다. 다시 말해서 그는 여전히 그의 소재에 대한 선입관과
자연주의적 이미지를 가지고 시작하고 있었는데, 이것들을 그는 의식적으로
'
동시적 시선' 원리에 따라 분석하고 추상화 시켰다. 그의 회화에 그려진
대상들은 지나치게 자연주의적이며 물질 세계의 원형에 지나치게 가깝다는
것을 그도 느꼈던 것이다. 피카소와 브라크의 초기 큐비스트 회화에
나타나는 오브제들과 비교해 보더라도 그리의 주제는 훨씬 문학적이고
특정한 소재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 그의 주제는 그것이 무엇인가
얼른 확인할 있는 모델들로부터 유래하고 있다는 느낌을 종종 받을 때가
있다. 그리의 종합적 큐비즘적인 태도는 1913 이후에야 완성되었던
유화를 위한 예비적 탐구라 있는, 그의 이른바 '수학적 드로잉'
씨앗이 뿌려져 있었다. , 삼각자, 측경기와 같은 기하학 제도 기구의
도움으로 완성되었다는 것이 확연히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일관된 어떤
수학적, 원근법적 체계에 하나도 따라가지 않는다. 다만 그의 드로잉은
큐비스트 회화의 절차를 체계화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단순한 기하학적 관계 설정을 통해 작업하면서 그가
순전히 추상적인 조형언어로도 조화로운 콤포지션을 성취할 있는
가능성을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Three Lamps, 1910-11*

*Bottles and Knife, 1911-12*

*Still-life with Oil Lamp, 1911-1912*

*Portrait of Picasso, 1912*

*Still Life with Flowers, 1912*

*Glass of Beer and Playing Cards, 1913*

*Landscape with Houses at Ceret, 1913*

*Guitar on a Chair, 1913*

*The Siphon, 1913*

*Violin and Checkerboard, 1913*

*Pears and Grapes on a Table, 1913*

*Untitled (Violin and Ink Bottle on a Table), 1913*

*Violin and Guitar, 1913*

*Bottle and Glass on a Table, 1913-1914*

*The Bottle of Banyuls, 1914*

*A Man in a Cafe, 1914*

*Musician's Table, 1914*

*The Pot of Geraniums, 1915*

*Portrait of Josette, 1916*

평면들을 확인하기 위한 방법들은 선과 뿐만 아니라 구조와 묘사된
물체들의 형태들이다. 하나가 그것의 모양을 가지고 있고, 각각의 것이
하나의 같은 평면, 완벽하게 확인되어 있고 정해져 있는 공간안에 존재한다.

*Still Life with Fruit Dish and Mandolin, 1919*

*The Mountain "Le Canigou", 1921*

*The Open Window, 1921*

*The Painter's Window, 1925*

*Guitar and Music Paper, 19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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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미술사54 큐비즘(입체파) - 조르쥬 브라크

   

 서양 미술사 - 54(입체파(立體派:Cubism) - 세잔을 완성한 조르주 브라크)

   

 

Terrace of Hotel Mistral,L'Estaque [and Paris], autumn 1907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1882~1963)는 파리 근교
아르장트유 출생이다. 피카소와 함께 큐비즘을 창시하고 발전시킨 작가로서,
20세기 미술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건축장식에 종사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린시절부터 그림을 좋아했으며, 1900년 파리로 나와 아카데미 쥴리앙에 들어
간 후 포비슴의 감화를 받았다. 그러나 1907년부터는 세잔의 구축적(構築的)인
작풍에 열중하여 이를 연구하고, 비슷한 생각을 가진 피카소와 알게 되어, 협력
하여 큐비즘을 창시, 이 획기적인 사고(思考)를 분석적 큐비즘의 단계에서 종합적
큐비즘으로 전개하였다. 또한 1912년경에는 P. 클레와 그림물감에 모래를 섞는
등 새로운 기법을 개발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징집되어 부상하였으나, 소집이
해제된 1917년부터 다시 왕성한 작품 활동을 계속하였다.
피카소가 카멜레온처럼 자주 변모하는 데 비해 그는 자신의 본래 개성에 따라 차분히
큐비즘의 가능성을 탐구하였다. 초기에는 풍경을 주로 그렸고, 중기 이후는 정물·실내·
인물 등을 주제로 삼았는데, 그 구성의 밑바탕에는 항상 이성(理性)과 감각의 미묘한
조화를 최대로 중시하는 프랑스인적인 전통이 풍긴다. 조용하고 차분하게 가라앉은
색채감은 만년에 이를수록 더욱 우아한 세련미를 더하였다.

Houses at L'Estaque, 1908

세잔의 영향을 받아 그린 이 그림에서 브라크는 대상들의 색상차를 축소하여 사물의
색채적 특징보다는 형태적 특징을 강조하였는데, 그의 대상들은 마치 기하학적 도형으로
환원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그림을 보고 집들이 입방체(cube)
처럼 보인다고 했다. 큐비즘(Cubism)이란 명칭이 생긴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브라크는 세잔이 발견한 것이 입체주의였다는 사실을 알고 원시적인 방법으로 실험하다가,
세잔이 생을 마감한 곳에서부터 그의 의도를 확대·해석하여 1908년에 <에스타크의 집들>
을 그렸다. 세잔은 에스타크의 장면을 여러 점 그렸는데, 브라크는 에스타크 언덕에
있는 집들을 그리면서 세잔과는 달리 집들로만 캔버스를 가득 채움으로써 세잔이 미처
완성하지 못한 입방체 형태의 구성주의 그림을 완성했다.

브라크는 언덕의 집들을 주제로 수평선을 제거했으며, 집과 나무의 형태들을 단순화
시켜 기본적인 형태들로 제한했다. 입체주의에 대한 브라크의 이해는 '새로운 공간의
구체적인 표현으로 보이는 공간'이었으며, '사물들을 서로 떼어놓는 것'이었다.
세잔과 브라크의 그림을 비교하면, 세잔은 인상주의 예술가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빛이
사물에 반사하는 색들을 사용한 것인 데 비해, 브라크는 마티스의 야수주의 그림에 반발
하여 단색주의에 더러 회색을 사용하였다. 브라크는 세잔이 삼차원의 사물을 이차원에
재현하면서 삼차원적으로 나타내려고 한 독특한 회화방법을 시도했음을 알아챘으며,
세잔의 의도가 좀 더 과격한 방법으로 웅대하게 나타나도록 했는데 전통주의 회화의 관점
에서 보면 정도를 매우 벗어난 행위였다. 그때부터 그의 그림은 무엇을 그렸는지 알아볼
수 없게 사물들을 큐브 모양으로 부수고 또 부수어서 거의 추상으로 변해 갔다.
피카소와 함께 작업하면서 그는 더욱 분석적인 방법으로 입체주의를 진전시켰지만 피카소
와 함께 작업하지 않았더라도 혼자 능히 성취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물에 대한 이 같은 분석적 시도는 마르셀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었고, 무미건조한
분석적 입체주의에 그 특유의 재담을 보태는 방법을 생각하게 했다.
입체주의로 해서 20세기 회화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Le Viaduct de l'Estaque, 1908

Viaduct at L'Estaque, Paris, early 1908

Large Nude, Paris, spring 1908

Musical Instruments, Paris, autumn 1908

Fruit Dish, Paris, winter, 1908-09

Castle at La Roche-Guyon, La Roche-Guyon, summer 1909

Fishing Boats, 1909

Harbor in Normandy, Le Havre and Paris, May-June 1909

Bottle and Fishes, L'Estaque, autumn 1910

Violin and Candlestick, Paris, spring 1910

Violin and Pitcher, Paris, early 1910

피카소와 브라크의 대상들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심하게 해체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개발해낸 방법 자체를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인지 그들에겐 소재가 그다지
중요한 것이 못되었다. 흔히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정물이라든지 친한 친구들이 그들의
대상이 되었는데 그나마도 제목을 붙이지 않아서 그들의 그림을 구입했던 화상들이 그림
의 제목을 달아주었다. 그래서 위의 <바이올린과 주전자>처럼 그림의 소재가 곧 제목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Man with a Guitar, Ceret, summer 1911

Le Portugais(The Emigrant), Ceret [and Paris], autumn 1911-early 1912

분석적 입체주의 시대의 브라크의 작품은 피카소의 그림과 거의 구별이 안되는 동질성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1911년에 이르면 피카소와 같은 듯 하면서도 다른 브라크의
요소가 차차 엿보이기 시작한다. 이 화면에서도 보게 되는 숫자나 문자의 도입이 그것
이다. 브라크의 집안은 조부 때부터 간판을 그리는 직업으로 생계를 삼고 있었다.
그래서 브라크도 어릴 때부터 페인트를 칠하고 간판을 그리는 기법을 익히게 되었다.
1900년에 파리로 간 것도 실은 그러한 간판 그림의 기법을 더 닦기 위해서였다.
그러다가 화가의 길로 접어들면서 그 전의 그의 간판 기법이 입체주의 작품에 반영된
것이다. 이 작품의 문자와 숫자의 도입은 앞서와 같은 배경과 관련을 갖는 것으로 분석
되고 있다. 이 작품은 브라크가 마르세유의 어느 술집에서 만났던 포르투갈 출신의
기타리스트를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입체주의 이후에 기타를 비롯하여 만도린,
바이얼린 같은 악기를 많은 화가가 모티프로 즐기게 된 것은 브라크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Fruit Dish, "Quotidien du Midi", Sorgues, August-September 1912/Oil and sand on canvas

Man with a Violin, Paris, spring 1912

Fruitdish and Glass, September 1912, Pasted papers and charcoal on paper

Still Life BACH, 1912/Pasted paper and charcoal on paper

Bottle, Newspaper, Pipe, and Glass, 1913,Charcoal and various papers pasted on paper

Pedestal Table, Paris, early 1913,Oil and charcoal on canvas

Woman with a Guitar, Sorgues, autumn 1913, Oil and charcoal on canvas

Glass, Carafe and Newspapers, 1914, Pasted papers, chalk and charcoal on cardboard

Still Life on a Table: "Gillette.", Paris, early 1914, Charcoal, pasted paper, and gouache

Fruit on a Tablecloth with a Fruitdish, 1925

Still-Life:Le Jour, 1929

Black Fish, 1942

Interior with Palette,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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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53 큐비즘(입체파) - 피카소

   

 서양 미술사 - 53(입체파Cubism: 자유분방한 조형의 세계, 피카소)

   

   

Self-Portrait, 1899-1900


입체파(立體派:Cubism)는 1900년부터 1914년까지 파리에서 일어났던
미술 혁신운동을 말한다. 르네상스 이후 서양 회화의 전통인 원근법과 명암법 그리고
다채로운 색채를 쓴 순간적인 현실 묘사를 지양하고, 야수파의 주정적인 표현을 폐기한
대신 시점을 복수화하여 색도 녹색과 황토색만으로 한정시켰으며, 자연의 여러가지
형태를 기본적인 기하학적 형상으로 환원, 사물의 존재성을 이차원의 타블로로 구축적
으로 재구성하고자 했다. 피카소, 브라크 등이 이 운동의 중심이었고 그밖에 몽파르
나스에서 화면에 밝은 색채와 다이나믹한 율동을 도입했던 F. 레제와 R. 들로네가
있으며, 화면의 구성원리를 추구하여 추상예술의 길을 열었던 쿠프카와 비용, 뒤샹 등이
있다. 입체파는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종말을 맞았으나, 그 성과는 그 후의 미술
디자인, 건축 등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미술사의 전환점인 유파로서 추상화를 시도,
많은 유파가 생겨나는 동기가 되었고, 오브제 미술이 시작되어 현대미술에 영향을
주었다. 그 미학은 회화에서 비롯하여 건축, 조각, 공예 등으로 퍼지면서 국제적인 운동
으로 확대되었다.

피카소가 <아비뇽의 아가씨들>을 발표함으로써 급격하게 발전한 이 운동은 일반적으로
세잔풍의 입체주의, 분석적 입체주의, 종합적 입체주의로 나누어 고찰할 수 있다.
입체파란 명칭은 1908년 마티스가 살롱 도톤에 출품한 브라크의 <에스타크 풍경>이란
연작을 평하면서 '정육면체의 집합'이라고 비평한 데서 유래되었다.
피카소와 브라크 두 사람이 중심이 되어 몇 년 동안에 점차로 명확한 모습을 갖추게 된
큐비즘의 미학은 우선 세잔의 가르침을 따라 대상을 순수하게 조형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이어서 그것을 각각의 면으로 분해한 다음 마지막으로 그것을 재구성하는 순서를 밟아
화면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의자나 테이블 같은 가구든 인간의 얼굴이든 컵
이나 책과 같은 정물이든 여러 방향에서 본 여러 가지 면을 갖고 있다. 인간의 얼굴을
가지고 말하자면 정면에서 본 얼굴도 있고 옆에서 본 얼굴도 있다. 그것들을 평면인
캔버스에 모두 함께 배치하여 순수하게 조형적 원리에 따라서 재구성한다.
즉 바로 마티스가 색을 가지고 자유롭게 구성했던 것처럼 형태를 자유롭게 구성하는 것
이다. 그 결과, 분석과 종합의 과정을 거쳐 마침내 피카소의 1921년 작품 <세 사람의
음악가>처럼 납작하게 눌린 인간상의 등장을 보기에 이른다. 그것은 이른바 새로운
조형 언어의 창조였다. 나중에 피카소는 자신의 작품을 '알 수 없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영어를 모른다. 그러나 영어로 씌어진 훌륭한 시나 문학이 있다는 것은 안다.
큐비즘도 마찬가지다.'라고 말했다.

1. 초기 큐비즘(1907-1909): 1907에서 1909년 사이를 초기 큐비즘
이라고 한다. 여기서 피카소와 브라크는 사물의 본질적인 모습을 '원, 원통, 원추'라고
정의하였던 세잔의 이론을 심화하는 작업을 하게 된다. 대상의 자연적 형태를 요약,
단순화시켰으며, 1점 원근시점이 아닌 복수시점을 이용해 사물의 본질적인 형태를
화면에 구축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그들의 회화에서는 고전적 사실주의에서의 광선,
명암, 원근, 질감, 채색법을 무시하고 3차원의 깊이, 공간, 입체감들의 전통적인 표현법
이 소멸하게 된다. 이는 화면이 평면으로 환원되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2. 분석적 큐비즘(1909-1911): 주제보다는 주제를 다루는 방법이 중요해
졌다. 브라크와 피카소는 정물처럼 환경의 간섭을 받지 않고 폐쇄된 공간속의 주제를
택하는 것이 자신들의 방법론을 더욱 분명하게 할 수있고 발전시킬 수 있다고 결정했던
것 같다. 색채의 산만함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엄격한 색채들만을 그림에 사용한다.
주제를 택한 다음 그것을 모든 측면에서 본다는 착상을 했으며, 그런 다음에는 그 모든
단면을 동시에 한 시점으로 보는 방법이었다. 분석적 단계에는 색채가 거의 브라운과
회색 계통, 검정색, 황토색 계통만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색채 제한은 화면안에서의
평면들 사이의 관계 및 구성, 구조의 문체에 강조점을 두기 위한 의도에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큐비즘은 두 개의 전제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첫번째 자연적 형태는 기하
학적인 동일체의 방향으로 단순화시키거나 세련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미술의 역사만큼 오래된 것이며, 이것을 큐비스트들은 극단적인 결론으로
까지 파고 들어갔다. 두번째 전제는 4차원의 공간과 시간이 어떤 형태로든지 회화에서
인정되어야 하며 대상의 모든 면을 동시에 볼 수 있게 한다는 것이었다.
분석적 큐비즘 시기에는 초기 큐비즘의 조형 논리가 극대화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대상이 완전히 기하학적 단위로 해체되어 다시 화면 위에서 재구성되고 있다.
이러한 분석해체, 재구성의 과정에서 색채는 녹새, 황색, 검은 색, 회색 등의 명도 낮은
것으로 요약되어 나타난다. 이는 피카소와 브라크가 구현하고자 한 것이 형태의 분석적
인 묘사라는 의도를 나타내기 위한 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3. 종합적 큐비즘(1911-1916): 다방면에 걸친 회화적 수단을 가지고 자유
롭게 작업하면 형태를 파괴하기보다는 상징에 가까운 이미지들을 만들어 내는 주관적
이고도 임의적인 방식으로 형태들을 구성하였다. 따라서 분석적이기 보다는 더욱 심화된
평면성, 단순성, 풍부해진 색채와 질감, 느슨해진 분위기의 개성적인 작품을 제작하였다.
추상적 하부 구조와 중첩된 소재는 함께 유합되어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동시에 각 요소 들은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즉 종합적 큐비즘은 추상적 요소
들을 함께 융합하여 하나의 재현적인 전체를 형성하는데 역점을 둔다.
피카소와 브라크는 자신들의 대상해체 작업이 극에 달하여 대상의 윤곽이 완전히 분해
되어 버리자 빠삐에 꼴레(종이를 풀로 붙인다는 뜻)와 콜라주를 통해 형태를 재현시킨다.
차가웠던 색채가 다시 밝아지고, 기법이 확대되어 어느 정도 대상이 회복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파피에 콜레와 꼴라쥬 마티에르(실제물을 한데 모은다는 뜻)를
통해 문자, 단어, 숫자, 실물들이 화면 위에 회화와 함께 등장하게 된다.
실제 나무의 모조를 그려 나무의 환영을 만들어내는 대신에 진짜로 나무를 그림에 도입
시킨 것이다. 단순히 사물을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 대한 깊은 통찰을
그리려 한다는 것이다.

Self Portrait:"Yo Picasso", 1901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1881~1973)는 에스파냐 말라가에서 출생
하였다. 14세 때 바르셀로나로 이주하였는데, 이때부터 미술학교에 입학하여 미술공부
를 시작하였다. 이 무렵 당시 바르셀로나에 들어와 있던 프랑스와 북유럽의 미술 운동
에서 많은 자극을 받고 특히 A. 르누아르, H. 툴루즈 로트레크, E. 뭉크 등의 화법에 매료
되어 이를 습득하는 데 힘썼다. 1897년 마드리드의 왕립미술학교에 들어가 바르셀로나
에서 최초의 개인전을 열었고, 1900년 처음으로 파리를 방문, 다음해 재차 방문하여
몽마르트르를 중심으로 자유로운 제작활동을 하고 있던 젊은 보헤미안의 무리에 투신
하였다. 당시의 그의 작품에는 위에 열거한 화가들 외에 P. 고갱, V. 고흐 등의 영향도
많이 반영되었으나, 점차 청색이 주조를 이루는 소위 '청색시대(靑色時代)'로 들어갔으며,
테마는 하층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의 생활의 참상과 고독감이 두드러졌다.
그러나 1904년 몽마르트르에 정주하면서부터 색조가 청색에서 도색(桃色)으로 바뀌는
동시에(도색시대) 과거의 에스파냐 예술, 카탈루냐 지방의 중세조각, E. 그레코, 고야
등이 지닌 독특한 단순화와 엄격성이 가미되어 갔다.
작품에는 곡예사들을 묘사하는 일이 많아졌는데, 어릿광대나 곡예사는 무대위의 모습이
아니고 그 생활의 이면을 파헤친 애수였다.

1905년 시인 G. 아폴리네르와 교유하고 다음 해에는 H. 마티스와도 교유하였다.
그러나 작풍은 P. 세잔의 형체관을 살려나가 점점 단순화되고, 1907년의 영원히 기념할
명작 《아비뇽의 아가씨들》에 이르러서는 아프리카 흑인 조각의 영향이 많이 나타나는
동시에 형태분석(形態分析)이 비로소 구체화되기 시작하였다. G. 브라크와 알게 된 것
도 이 무렵으로, 그와 함께 입체파 운동에 들어가 1909년에는 분석적 입체파, 1912년
부터 종합적 입체파 시대에 들어갔다. 이 무렵 그는 이미 20세기 회화의 최대 거장이
되었고, 종합적 입체파 수법을 1923년경까지 계속하면서 여러 가지 수법을 순차적으로
전개하였다. 활동범위도 J. 콕토와 알게 되면서 무대장치를 담당하는 등 점점 확대되어
갔다. 즉 1915년 《볼라르상(像)》과 같은 사실적인 초상을 그리고, 1920년부터는
《세 악사》 등 신고전주의를, 다시 1925년에는 제1회 쉬르레알리슴전(展)에 참가
하였다. 또한 1934년에는 에스파냐를 여행하여 투우도 등을 그렸으며, 1936년의 에스
파냐 내란 때는 인민전선을 지지하고, 다음해 프랑코 장군에 대한 적의와 증오를 시와
판화로 나타낸 연작 《프랑코의 꿈과 허언(虛言)》 및 전쟁의 비극과 잔학상을 초인적인
예리한 시각과 독자적 스타일로 그려낸 세기의 대벽화 《게르니카》를 완성하였다.
그리고 《통곡하는 여인》도 이 무렵의 작품이며, 이때부터 피카소 특유의 표현주의로
불리는 괴기한 표현법이 나타났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던 해는 에스파냐에서 지냈으나 다음해 독일군의 파리 침입 직
후 파리로 돌아와 레지스탕스 지하운동 투사들과 교유하고 1944년 종전 후는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부터 주로 남프랑스의 해안에서 생활하면서 그리스
신화 등에서 모티프를 취하여 밝고 목가적 분위기마저 자아내는 독특한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도기(陶器) 제작과 조각에도 정열을 쏟고 석판화의 제작도 많아 이
영역에서도 새로운 수법을 창조하였다. 그 후 6·25전쟁을 테마로 한 《한국에서의 학살》
(1951), 《전쟁과 평화》(1952) 등의 대작을 제작하여, 현대미술의 리더로서 거장다운
활약을 하였다.

1. Childhood and Youth:1881-1901

First Communion, 1895-96

Le Moulin de la Galette, autumn 1900

Girl with Plumed Hat, 1901

Leaning Harlequin, 1901

Child with a Dove, 1901

2. The Blue Period:1901-1904(청색 시대)

Self-portrait with Cloak, 1901

Absinthe Drinker, 1902

The Visit(Two Sisters), 1902

The Old Guitarist, 1903

피카소의 이 시기가 E. 그레코에 심취하던 때였다. 굶주리고 버림받은 사람에게는 성자
의 그늘이 있다. 왼쪽 어깨를 강조한 것은 비단 이 작품만이 아니라, 피카소의 '청색 시대'
인체는 메마를 대로 메마르고 손가락도 뼈만이 앙상하다. 이 손으로 기타를 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기타는 노인의 신체의 일부처럼 달라 붙어있다. 노인은 장님이다.
그를 둘러싼 세계와는 이미 창문을 잃었다. 그러면서도 이 밀폐된 상태의 사나이의 조형
이 무엇인가 우리에게 말하여 주고 있다.

La Vie-삶, 1903

이 작품은 1901-1904년까지의 피카소의 [청색시대]의 가장 복잡하고 큰 작품이다.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서 그려진 작품 [La Vie(인생)]은 20세기의 영향력 있는 시각
예술가의 회화, 소묘, 판화, 조각 그리고 놀랄만한 작품들 중에서도 핵심이 되는 작품중
의 하나로 남아있다. 이 시기 젊고 감수성이 예민하였던 피카소는 쇼펜하우어의 염세
주의, 세기말의 암울한 분위기에 영향을 받는데, 이로서 그의 작품이 전체적으로 청색이
감도는 어둡고 침울하고 내성적인 분위기를 띠게 된다.
이 작품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피카소의 인간에 대한 관심은 일생동안 지속된다.
피카소는 이러한 경험으로 육체적 사랑의 허무함을 담은 [인생]이라는 작품을 그린것
으로 추측된다. 구도에서 인물들이 적어도 두번 바뀐 이 작품을 위해 피카소는 4장의
스케치를 했다. 망또를 걸친 여인은 처음에는 턱수염이 난 남자였다. 남자의 경우,
원래는 피카소 자신의 자화상으로 그려졌지만 나중에 그의 친구인 카사헤마스의 얼굴로
변했다. 카사헤마스는 피카소의 동료 화가로 애인 제르맹의 변심때문에 자살한 사람이다.
남자에 기대있는 왼쪽의 여인이 제르맹으로 여겨지며 망또를 입은채 오른쪽의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은 카사헤마스의 어머니이다. 양쪽 인물들의 사이에 보이는 배경의 위쭉
에 그려진 그림은 고갱풍으로 그려졌으며, 아래쪽 여인은 고호풍으로 그려졌다.
그의 청색시대의 주요한 모티브인 남녀간의 육체적 사랑과 모성애를 통해 인생의 단면을
그려내고 있다.

The Tragedy, 1903

Portrait of Soler, 1903

La Celestina, 1904

Woman with a Crow, 1904

Woman Ironing, 1904

1901년 피카소가 파리를 떠나기 전 이 <다림질하는 여인>을 제작하여 사바르테스에게
헌정했다. 피카소는 이 시기에 있어서 화면 구성에 큰 변화가 있었다. 왼쪽 어깨를 강조
한 것이 마치 사원 실내의 건축적 구조와 같다. 이러한 이유로 이 그림은 '청색 시대'의
한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되었는데, 왼쪽 팔의 만곡이 작품의 깊이를 효과있게 하고 있다.
여인은 매우 피곤 하다. 여인의 눈은 장님과도 같이 보인다. 그러나, 여인은 이상하리
만큼 씩씩한 모습을 하고 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놀라게 한다.
피카소의 극과 극의 융합 능력을 볼 수 있는 좋은 예이다.

Boy with a Dog, 1905

3. The Rose Period:1905~1906(장미빛 시대)

Tumblers(Mother and Son), 1905

Boy with a Pipe, 1905

Acrobat and Young Harlequin(Acrobate et jeune Arlequin), 1905

Family of Saltimbanques, 1905

Harlequin's Family, 1905

The Girl with a Goat, 1906

Composition:The Peasants, 1906

La Toilette, 1906

카날 부인의 초상

얼굴의 부분들은 세밀하게 묘사하면서 신체는 큼직 큼직하게 처리한 것은 피카소가 제작
한 초상화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특징의 하나이다.
이 작품에서는 섬세하고 날카로운 표정과 거의 반원형에 가까운 신체의 선과의 대조가
독특한 효과를 자아내고 있다. 검정, 갈색, 황토색 등을 주조로 한 색조에서는 피카소에
흐르는 스페인 사람의 피를 보는 듯하다. 피카소의 뛰어난 데상력은 이미 세상에 알려진
바이나, 특히 이 작품에서는 그의 타고난 천분이 번쩍이고 있다.

Gertrude Stein(거트루트 스타인의 초상),1906

프랑스와즈 지로는 이 초상화가 티벳의 승려를 닮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분명히 표정에서 금욕적이며, 엄격함을 보여 주는 초상화이다. 그러나, 이 초상화가
누구의 초상이라는 것보다는 그 당시의 피카소의 흑인 조각 연구에 연유된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1906년 봄, 피카소는 이 작품을 그리다가는 지워 버리고, 스페인 여행에서
돌아와서는 다시 그리기 시작하면서 언젠가는 그녀를 닮겠지 하고 말했다는 것이다.
바로 이 초상화의 모델은 아메리카의 여류작가 스타인이었다. 구도나 표현의 박력에서는
피카소의 초상화 중에서도 뛰어난 작품이나, 과연 스타인 자신이 만족했느냐에 관해서는
전하는 바 없다.

4. The Beginnings of Cubism

Self Portrait, 1907

Les Demoiselles d'Avignon(아비뇽의 처녀들), 1907

큐비즘의 출발점이 된 <아비뇽의 처녀들>은 종래의 전통적인 공간 구성이나 형태
파악을 모든 점에서 부정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여기에 그려져 있는 것은 분명히 나부 군상인것은 틀림이 없지만 평소 우리가 품고
있는 나부의 관념과는 전혀 다르게 표현되어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 아름다운 신체의
이상적 표현으로서 나부상이 등장한 후 서구의 오랜 예술의 역사에서도 이처럼 관능적
매력이 없고 심하게 말해서 추한 나부상이 그려진 적은 일찍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예로부터 훌륭하게 그려진 나부상을 보는 즐거움에는 하나의 조형적으로
완성된 질서를 바라본다는 것과 더불어 이상화된 것이든 사실적인 것이든 훌륭한 육체적
매력에 매혹된다는 비밀스러운 즐거움이 뗄 수 없게 결합되어 있다. 그렇다면 피카소는
여기에서, 본래 나부상이 가지고 있는 매력의 전부는 아니더라도, 그 중 큰 요소를 일부러
잘라내 버렸다고 할 수 있다. 이 화면에 등장하는 다섯 명의 나부는 다른 점은 제쳐놓더
라도 적어도 육체의 아름다움을 과시하려는 의도만은 애초부터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묘하게도, 피카소가 처음 이 작품을 그리려고 했을 때는 등장하는 다섯 명의
나부가 오로지 육체적 매력만을 내세우는 여성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제목에서 말하는
'아비뇽'이란 한때 교황청까지 있었던 프랑스 남부의 유서 깊은 도시가 아니고 실은
피카소가 소년 시절을 보낸 바르셀로나 번화가의 거리 이름으로 선원들을 상대하는 밤
의 '처녀들'의 집이 즐비한 곳이었다. 피카소는 그녀들을 단지 조형 표현의 구실
내지는 모델로 삼으려 했던 것만이 아니라 그녀들의 직업에 특수한 의미를 두려고까지
했던 우의화였다. 처음에 피카소가 생각했던 것은 화면 중앙에 뱃사람이 한 명 있고
그 둘레를 처녀들이 둘러싸고 옆에는 꽃이나 과일이 놓여 있는 보통의 실내 정경이었다.
그리고 화면 왼쪽에서(파카소의 설명에 따르면) 손으로 해골을 받쳐 든 이상한 인물이
막 방으로 들어오려 하고 있었다. 이 구도가 의미하는 것은 명백하다. 그것은 아비뇽
거리의 처녀들과 꽃다발이나 과일바구니를 통해 현세의 쾌락을 상징하는 동시에 왼쪽의
인물이 손에 든 해골로써 이러한 쾌락도 언젠가는 죽음의 세계로 바뀌어 버린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 세상의 어떤 화려한 즐거움도 언제나 죽음의 그림자에 위협당하고
있다는 것, 풍만한 육체를 가진 미녀들도 먼지투성이의 무서운 해골의 겉 모습에 지나
지 않는다는 것, 이것이 피카소의 마음에 있던 최초의 테마였다.
젊은 피카소가 인생의 덧없음을 보여주는 이러한 테마에 이끌렸던 것은 조금 넓은 역사
의 시야에서 본다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총에 걸쳐 많은 예술가들에게 들씌워져 있던
그 세대의 분위가 같은 것이기도 했다. 처음에 피카소는 이 작품의 제목을 '철학적
매춘숙'이라고 불렀다. <아비뇽의 처녀들>이라는 이 유명한 제목은 작품이 완성되고
나서 한참 후에 피카소의 친구였던 비평가 살몽이 붙인 것이다.

'철학적 매춘숙'이 <아비뇽의 처녀들>로 바뀌었듯이, 피카소의 최초의 우의화적 구상도
제작 도중에 점차 새로운 조형적 실험으로 바뀌어 갔다. 이야기적 내용을 암시하는
뱃사람이나 꽃다발 등은 사라지고 당초의 구도상의 포인트였던 왼쪽 인물이 손에 든
해골도 사라지고 그 모습은 또 한 사람의 처녀로 바뀌었다. 단 다섯 처녀 가운데 이
왼쪽 끝의 처녀만이 어딘가 가까이 다가가기 어려운 묘한 표정으로 이곳으로 들어오려
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최초의 구상의 흔적일 것이다.
이렇게 우의적 내용이 사라짐에 따라 공간이나 형태의 표현도 달라졌다.
처음에는 분명히 깊이를 가진 실내였던 이 장면이 삼차원의 깊이를 잃고 배경은 마치
프리즘을 통해 본 듯한 평탄한 면들의 집합으로 되어 전경과의 거리가 없어졌다.
나부들의 몸은 둥근 맛도 두께도 없는 평탄한 형태로 바뀌었고, 그 중 몇 사람은 괴기
스러운 신상 같은 얼굴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오른쪽 두 사람의 도깨비 같은 얼굴
은 아마도 당시 젊은 예술가들 사이에서 관심을 모으고 있던 아프리카 흑인 조각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한다. 즉 맨 처음 구상의 우의적 의미는 거의 다 사라지고
단지 새로운 조형 표현만이 화면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것은 마티스에서 보았듯이
세기의 전환기에 예술가들을 강하게 사로잡고 있던 평면화의 의도다.
화면에 현실의 삼차원 공간의 환영을 정착시키는 대신 피카소는 마티스나 포비즘 화가
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화면의 이차원성을 강조하려고 했다. 마티스가 캔버스 위에
평면화된 인물이나 정물을 배치하고 거기에 자기가 좋아하는 색채 세계를 자유롭게
전개한 것에 비해, 피카소는 색채보다도 오히려 형태와 형태의 변모에 한층 더 관심을
기울인 화가다. 그 결과 <아비뇽의 처녀들>은 평면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변형
되었다. 이것이 이윽고 큐비즘의 혁명으로 이어지는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The Dance of the Veils(Nude with Drapes), 1907

Composition with a Skull, 1907

Flowers in a Grey Jug and Wine-Glass with Spoon, 1908

Friendship, 1908

Three Women, 1908

Woman with a Fan, 1908

Bread and Fruit Dish on a Table, 1908~09

Portrait of Manuel Pallares, 1909

Portrait of Fernarde, 1909

Brick Factory in Tortosa(오르타의 공장), 1909

Reservoir at Horta, 1909

5. Analytical Cubism

Girl with a Mandolin(Fanny Tellier), 1910

Portrait of Daniel-Henry Kahnweiler, 1910

Portrait of Ambroise Vollard, 1910

Accordionist, 1911

6. Synthetic Cubism

Glass and Bottle of Suze, 1912

Still Life with Bowl and FruitParis, winter 1912

Woman in an Armchair, 1913

Guitar, 1913

The Card-Player, 1913-1914

Pipe, Glass, Bottle of Vieux Marc, spring 1914

Still-life with Fruit-dish on a Table, 1914-15

Harlequin, 1915

7. Between the Wars

Portrait of Olga in the Armchair(안락의자의 올가의 초상), 1917

올가는 러시아 육군 대령의 딸로서 1912년에 디아기레프 발레단에 있었다.
피카소는 1917년 이탈리아 여행 중 올가를 만나서 이듬해인 1918년 7월에 결혼하였다.
피카소가 올가를 맞이한 후부터 그 생활은 규칙적이 되었고, 의복도 단정하게 변하여
그의 벗들을 놀라게 했다. 피카소는 이러한 생활을 하는 동안 어머니와 자식간의
애정 어린 작품들을 많이 그렸다. 이 작품에서도 다분히 앵그르풍의 리얼리즘이
보인다. 이 밖에도 올가를 그린 작품들이 있으나 그 표정들은 한결같이 우수에 잠겨
있다.

Harlequin with a Guitar, 1918

Pierrot, 1918

The Bathers, 1918

Still-Life, 1918

Sleeping Peasants, 1919

Three Musicians, 1921

Mother and Child, 1921-22

Deux femmes courant sur la plage(La course), 1922

The Pipes of Pan, 1923

Paul(Picasso's Son) as Harlequin, 1924

Studio with Plaster Head, 1925

Three Dancers, 1925

Woman with a Flower, 1932

Girl Before a Mirror, 1932

The Dream, 1932

"그림이란 당초부터 이미지 되어지는 것도 아니며 정착되어지는 것도 아니다.
제작을 하다보면 점점 떠오르는 상념을 좇아서 완성했다고 생각하면 또다시 앞이
나타나 그림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변화해 가는 것이다. 그림이 그것을 보는 사람을
통하여 비로소 생명력을 지니게 되는 것은 그래서 자연스럽다."
1923년 피카소는 이 해에 졸고 있는 여인을 많이 제작했다. 피카소의 말대로 정면상
과 프로필이 일체가 되어 감상자의 기분에 따라서 변화를보여 주고 있다.
<꿈>은 그것들 시리즈 중의 걸작이다. 정면상과 프로필의 이중상은 형체의 묘미와
동시에 현실과 꿈의 이면성도 암시하고 있을 것이다.

Death of the Toreador, 1933

Interior with a Girl Drawing, 1935

Portrait of Dora Maar, 1937

Weeping Woman, 1937

<우는 여인>은 <게르니카>의 습작에서 시작된다. 피카소를 매료시킨 주제로서
<게르니카> 완성 후에도 피카소는 여러 점 제작했다. 피카소는 여인들에게 많은 변화
를 주어 작품을 만들었다. '잠자는 여인' '춤추는 여인' '독서하는 여인', '거울을 보는
여인', '포옹하는 여인', '울부짖는 여인' 등 그 변화는 더 많다. 배경의 검은 색 속에서
선명하게 얼굴과 손이 부상하고 있다. 눈물을 그린 것도 사실적인 것을 피하고 추상적
이며, 기호적 눈물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튀어나오는 것을 매우 알기 쉽게 표현하고
있다. 아동화같이 소박하고 그리고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Marie-Therese Walter, 1937

Portrait of Maya(Picasso's Daughter) with a Doll, 1938

Girl with a Boat(Maya Picasso), 1938

Self-portrait

화가와 모델 1

화가와 모델 2

새를 잡아먹는 고양이

"나는 전쟁을 그린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카메라처럼 한 가지 주제만을 좇는
화가가 아닌 까닭에, 그러나 내가 그린 그림 속에 전쟁이 존재한 사실은 부정할 수
없고, 필경 후세 역사가들은 내 그림이 전쟁의 영향 아래서 변화한 것이라고 지적할
것이나, 이 또한 내 알 바가 아니다."
제 2 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45년에 피카소는 이와 같은 피카소다운 말을 남겼다.
피카소는 1930년 말, 브뤼겔이나 고야의 <전쟁의 참화>를 거쳐 이어지는 유럽의
정신적 위기에 대한 경고라도 하듯이, 전쟁의 암시적 주제를 많이 택한 것이다.
피카소에 있어서 역사는 이러한 무수한 희생에 의하여 성립되는 시간의 경과일 뿐이다.

여인과 개

Piano

8. Picasso the Legend

Guernica, 1937

1937년 스페인의 소도시인 게르니카는 나치 독일 공군기들에 의해 3시간 동안 무려
32t의 폭탄 세례를 받았다. 게르니카는 스페인 내전 당시 프랑코 장군의 우익 쿠데타에
가담해 이같은 참변을 당한것이다. 이 폭격으로 게르니카는 폐허로 변했고 독일 공군기
들은 피신하는 주민들까지 기관총으로 공격했다고 한다. 당시 프랑스에 있던 피카소는
조국에서 벌어진 학살행위를 고발하고자 2개월 만에 <게르니카>를 완성해 그 해 파리
국제 전시회에 공개했다. <게르니카>는 그 후 학정에 대한 저항과 화해의 상징이 되었
으며, 침묵하던 세계의 지식인들이 직접 스페인으로 달려가 총을 들게 했다.
그림에는 말에 올라탄 사람 아래 여러 사람들이 짓밟혀 있는 것이 보인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말은 히틀러의 나치 정권을 의미하며 말 위의 사람들은 프랑코 장군의
군부 쿠데타 세력을 의미한다고 한다. 말을 탄 사람의 한 눈은 정면을 바라보고 있지만
다른 한 눈은 옆을 보고 있다. 처음 세계는 공습을 주도한 히틀러 정권만을 비난했다.
피카소는 이중적인 인물화를 통해 게르니카 공습이 실제로는 스페인 군부의 사주에 의한
것임을 웅변했던 것이다. 이처럼 피카소는 사물을 다양한 각도에서 보여줄 때 숨겨진 진실
을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피카소는 여러 각도에서 본 사물을 모두 모아 그림으로
표현했다. 피카소의 입체화는 당시 지식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친 아인슈타인의 상대
성 이론과 부합되는 것이기도 하다. 여러 각도에서 바라 본 3차원의 공간을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모음으로써 4차원을 구현했기 때문이다. 피카소는 이러한 종합적인 입체화의
방법을 정립한 뒤 "드디어 우리는 완전한 형태를 그렸다."고 말했다 한다.

Guernica, detail, 1937

Night Fishing at Antibes, 1939

La Alborada(아침의 곡), 1942

오바드(aubade)란 말은 어떠한 사람에게 경의를 나타내기 위하여 그 집 앞에서 새벽에
연주하는 주악을 말한다. 그러나, 이 그림이 주는 인상은 <아침의 곡>이라기보다 오히려
어둡고 불길하다. 옆으로 누운 사람은 죽은 사람 같고, 만돌린을 손에 쥐고 있는 사람은
꼬박 밤을 새우고 외롭게 보인다. 1942년 피카소는 61세로서 이 해에 <옆으로 누운
나부> 연작을 발표했다. 그것은 피카소 작품에서의 얼굴의 경우와 같이 이중상으로서
구성하고 있다. 이 점이 바로 피카소의 일관된 조형의 수단으로 되어 있다.
이 작품은 후일에 제작된 걸작 < 납골당>의 선구적 작품으로서 주목된다.

The Charnel House(납골당), 1944~45

<게르니카> 이후 가장 주목할 작품이다. 1946년 2월 파리 근대 미술관에서 개최된
'예술과 혁명'전에 출품한 작품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프랑스에서 전사한 스페인
무명 전사를 추도하는 전시회이다. 납골당의 내부는 회색과 보라, 푸른색의 3색으로
요약하여 이 정적한 톤은 <게르니카>의 경우와 같이 색채의 잔소리를 극도로 억제하고
정신적 분위기를 강조하고 있다. 묶여진 팔, 어린 아기의 목, 겹겹이 쌓인 시체더미
위에 지금 새벽이 찾아오고 있다. 그들의 죽음 위에 찾아드는 아침은 자유의 커다란
아침이다.

Massacre in Korea, 1951

9. Late Works

지중해의 풍경, 1952

Jacqueline with Flowers, 1954

Jacqueline in the Studio, 1956

Las Meninas(after Velazquez, 궁녀들), 1957

벨라스케즈의 <궁녀들>은 프라도 미술관의 보물이며, '회화의 신학'으로까지 평가된다.
1952년 계획하여, 실제로 착수한 것은 1957년 이었다.
이 해에 피카소는 연작 44점을 제작하였다. 피카소는 "같은 주제에 의한 연작으로
최초의 두 점 중의 한 점, 최후의 두 점 중의 한 점을 최고의 작품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 작품은 1957년 8월 17일에 완성한 첫 번째 작품으로 검정, 흰색, 회색
만으로 처리하였으며, 벨라스케즈의 원작과는 화면의 규격이나 내용에 있어 약간의
변화를 주고 있다.

The Doves, 1957

Luncheon on the Grass. After Manet, 1961

Bust of a Woman with a Hat, 1962

The Rape of the Sabine Women, 1962-63

The Dawn, 1965

Cavalier with Pipe, 1968

Female Nude and Smoker, 1968

The Kiss, 1969

Rembrandtesque Figure and Cupid, 1969

Vieil homme assis, Mougins, 1970

Portrait of Man in a Hat, 1971

Self-portrait,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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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52 야수파 모리스 블라맹크, 앙드레 드랭

   

   

 

Restaurant de la Machine at Bougival, 1905/Maurice de Vlaminck



★ 모리스 블라맹크(Maurice de Vlaminck:1876~1958) ★



프랑스의 대표적인 포비슴화가로 파리 출생이다. 부모는 음악가로 아들의 교육에는 관심
이 없었다. 그는 자유방임적 가정 환경에서 자라나 12세 경부터 독학으로 그림 공부를
하고, 악단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거나 기계공 등으로 일하면서 자신의 생계를 이어갔다.
이듬해 고흐의 회고전을 보고 정열적인 작풍에 깊이 감탄하여 강렬한 원색과 분방한
필치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블라맹크는 야수주의 작가중에서 가장 야수적인 정열을 소유한 작가였다.
빨강과 녹색의 대비를 통해 강렬한 느낌을 주는 풍경화를 많이 그렸다.
블라맹크는 자전거 경주 또는 프로 레슬러와의 시합 등 당당한 체구와 성격에 어울리는
활동적인 경력을 소유한 사람이었으며 5권의 소설을 쓴 문학 작가이기도 했다.
정규 교육이라고는 받은적이 없는, 화가를 지망하였으며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
한 것은 1900년 A. 드랭과 알게 되어 센 강가의 성관(城館)에 공동 아틀리에를 가지게
되었을 때부터였다. 그는 그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순수한 색채를 튜브에서 직접 짜서 그림을 완성하고 싶다. 여태까지 나는 나의
파괴적인 본능을 실감하고, 이를 생생하고 자유로운 세계를 재창조하는데 사용할 수
있었다." 그는 다른 야수주의 작가들이 귀스타브 모로의 화실에서 공부한데 비해, 모든
전통적인 기법과 소재를 거부하면서 내적 표현의 매체로 색채의 자율적 가치를 강조한다.
그는 "예술은 본능이다." 라고 단언하면서 자신의 내적 충동을 과감하게 분출시켰다.
회화에 의해서 무엇보다도 자기를 표현하고자 하였다. 회화라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생명 표현의 한 수단으로 나타났다. 색채의 불협화음과 과장되고 기괴한 분위기의 작품
을 주로 제작하였는데, 그것은 그의 속에 흐르는 개인적인 분방한 성격 때문이었다.
또한 아카데믹한 권위를 무시하고자 한 반항적인 의지에서 유래하는 것이었다.
1904~07년까지는 튜브에서 짜내는 물감을 그대로 캔버스에 칠하는 기법으로 색채를 구사
하였다. 1906년에 그린 [빨간 나무가 있는 풍경]과 [서커스]는 그의 성격을 잘 나타내
고 있다. 그의 직관적인 정열이 낳은 강렬한 원색의 힘찬 선은 진정 야수주의적인 태도
라고 할 수 있겠다. 1907년 세잔의 작품과 만난 이후 그의 작품은 강렬한 원색의 빛이
사라지고, 흐린 청색 또는 다갈색을 주조로 한 구성적인 방향으로 전환된다.
1910년 이후 그의 작품에는 힘이 있고 일반적으로 세느강 풍경이나 일-드-프랑스 지방의
경치를 소재로 한다. 대전 후 블라맹크의 사실주의는 점차 강화되고 독일 표현주의와
네덜란드 자연주의적인 화풍에 근접해 갔다. 세상과의 교류도 없이 폭풍이 휘몰고 간
후 황량한 풍경을 탐색으로 표현한 그림을 그리며 여생을 마쳤다.

The Bay from L'Estaque, 1886

The Factory, 1904/04

Woman with a Hat, 1905

Picking up Deadwood, 1906

Landscape with Red Trees(빨간 나무가 있는 풍경), 1906

블라맹크는 야수파 화가들 중에서도 가장 야수적이라 할 수 있다.
당당한 체구와 그에 걸맞는, 넘치는 정열은 그로 하여금 격정적인 터치와 색채를 낳게
하였던 것이다. "예술의 본질은 본능이다."라고 단언한 그의 작품은 내장의 영위와도
같아 생리적인 강렬함을 가지고 있다. 이 작품도 그의 직관, 정열의 모든 것을 그
강한 색채, 굳건한 생리적인 선에 의하여 나타내고 있다.
나무 사이에 집들이 보인다. 인상파 화가들이 잘 그리던 풍경 구도이나 인상파 사람들
의 화면에서 볼 수 있는 멀리 바라다 보는 듯한 느낌의 집들, 혹은 광활한 개방감 등은
찾아볼 수 없고, 충격적일만큼 강렬한 나무의 표현, 강하고 밝은 색채 처리, 특히 빨간
색의 효과로 박력이 넘쳐 흐른다. 강한 색채에 모든 것을 걸어 자극이 강한 포브의
표현을 전개한 블라맹크 대표작의 하나이다.

The Circus, 1906

Barges on the Seine near Le Pecq, 1906

샤티옹의 다리, 1906

샤티옹 출생의 드랭과 함께 샤티옹파를 형성한 블라맹크는 그곳에서 자전거 경기에 열중
하기도 하고, 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린 연주 등을 하면서 그림을 그렸다.
세느강을 오르내리는 배, 강가의 풍경이나 근교의 전원 풍경 등을 즐겨 그렸다.
"이런 모든 것들의 색채는 우리를 매료 시켰다... 그 곳이 샤티옹이었다."
이 그림은 그 중의 하나로 수작으로 뽑히는 작품이다. 특기할 것은 여기에서 고흐의
뚜렷한 영향을 강하게 의식하게 된다는 점이다. 1901년 베루네엠 주느 화랑에서 고흐전
을 보고 "그날, 나는 아버지보다 반 고흐를 사랑하였다."라고 할 만큼 강한 인상을 받았
는데, 그의 작품 속에서 고흐의 영향을 뚜렷하게 인식할 수 있게 되는 것은 1905년 고흐
회고전을 보고 난 뒤 부터였다.
이 그림은 주제나 색조에서 특히 터치에서 고흐의 영향이 분명하긴 하지만, 순수화된
색조나, 평면화된 화면 처리는 현실에서 승화된 포브의 비젼으로 나타내고 있다.
포브의 창시자를 자인하는 블라맹크는 포비즘을 형성하는 세 그룹 중 샤티옹파의 핵심
멤버였으며, 샤티옹을 무대로 한 좋은 작품을 많이 남겼고 이 그림도 그 중의 하나이다.

Tugboat on the Seine, Chatou, 1906

The Blue House, 1906

Andre Derain, 1906

The River Seine at Chatou, 1906

Le Havre: Le Grand Quai, 1906-09

Still Life with Oranges, 1907

The Locks at Bougival, 1908

River, 1910

Landscape with Trees, House and Lake, 1912

The Red Roofs(Landscape), 1912~14

Italian Village

빨간 작약, 1930

블라맹크의 작품은 제작 연대가 확실치 못한 것이 많다. 이 화가의 경우 그 연대의 추정
은 카탈로그를 보더라도 여러 이설이 있어서 결정하기가 힘들다.
1907년을 고비로 격하고 정열적인 포비즘에서 차차 냉정한 세잔적인 균형있는 구성에 중점
을 두게 되는데, 1914년까지는 그런 대로 기하학적인 형태의 단순화를 추구하여 뼈대가
튼튼한 일을 계속하였지만, 원래 이지적인 방법이 체질적으로 맞지 않은 그는 무겁고 울적한
감정을 폭발시키면서 묘사적 세계에 찾아들게 된다.
흑과 백의 콘트라스트를 살려 눈 경치를 그리기도 하고, 명쾌한 색채의 콘트라스트를 의식
하면서 꽃의 정물을 그리기도 하지만, 그 선명하고 강렬하였던 블라맹크의 화면에도 1920년
후반에서부터 고독감과 비극적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하면서 환희가 없어졌다.
검정 색이 점점 중요한 색조가 되었고 세잔의 영향이 두드러지게 되었으며, 그의 작품에서
는 가장 야수파적인 과거의 불타는 듯한 선명한 원색이 사라졌다.

The Remorquer, 1905/Color Lithograph after a Painting, 1958

블라맹크는 죽기 얼마 전 파리 Atelier Mourlot의 인쇄업자 Charles Sorlier와 함께
자신의 작품들 중 선별하여 석판화집을 발행하였다.

Chatou, with Red Tree, 1906/Color Lithograph after a Painting, 1958

Sunset in the Forest of Senoches, 1938/Color Lithograph after a Painting, 1958

The Harvest, 1945/Color Lithograph after a Painting,1958

Still Life with jugs, 1945/Color Lithograph after a Painting, 1958

Still life with whiskey bottle, 1945/Color Lithograph after a Painting, 1958

Allainville under Snow, 1946/Color Lithograph after a Painting, 1958

The Logny Road, 1953/Color Lithograph after a Painting, 1958

Anenomes, 1955/Color Lithograph after a Painting, 1958

China Asters, 1955/Color Lithograph after a Painting, 1958

Delphiums, 1955/Color Lithograph after a Painting, 1958

The Road, 1957/Color Lithograph after a Painting, 1958



★ 앙드레 드랭(Andre Derain:1880~1954) ★

The Artist in his Studio, 1920-21

프랑스의 화가이며 파리 교외인 샤토(Chatou) 출생이다. 일찍이 회화와 기계에 취미를
느껴 공과대학 입학준비를 하다가 방향을 바꾸어 회화를 전공하였다.
처음에는 샤토에 살고 있던 M. 블라맹크와 친교를 맺고 같은 아틀리에에서 제작하였다.
1905년 H. 마티스와 알게 되어 그 해의 살롱 도톤에 출품, 가장 대담한 포비즘의 화가
로서 주목되었으나, 2∼3년 후에는 격정적 색채를 버리고 침정(沈靜)한 색조로 바꿨으
며, 세잔과 흑인 조각의 단순화된 형태와 긴밀한 구성에 마음이 이끌린 것이 큐비즘
(Cubism:立體派) 탄생의 계기가 되었다.
이지적인 그의 기질이, 포브[野獸]의 분방한 원색의 범람에서 궁극적으로 형태의 엄격
함, 화면질서나 구성을 바라는 원래의 방향으로 전환했다고 할 수 있다.
그 후에도 이탈리아 근세 초기의 회화나 고딕 예술, 프랑스 옛 대가의 화풍 등에 심취
하면서 독자적인 탐구를 계속하여, 전통을 현대로 계승시킨 신고전주의자로서의 위치를
확립하였다. 은근한 어두운 계통의 색채를 기조로 뚜렷한 명암과 오묘한 세부적인 잔
손질로 화폭에 뛰어난 내면성과 청신한 현대감각을 담았다.
드랭은 실내 장식가로서 상당한 능력을 갖고 있었으며 극장의 무대장식을 많이 제작했
는데, 특히 러시아 발레단을 위해 제작한 무대장식이 유명하다.
또한 책의 삽화도 많이 그렸다.

드랭은 마티스와 블라맹크의 중간 역할을 하면서 그들과 포비즘의 탄생에 큰 힘이 되기
도 하였다. 특히 야수파 중에서도 가장 세련된 색채 체계를 표현했으며, 또한 세잔,
마네, 코로의 경향에 경도되어 격정적 색채는 버리고 황갈색을 주조로 한 고전적 색채
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그의 주위는 항상 쓸쓸한 편으로 고독한 생활을 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엔(1941년) 베를린에서 개인전을 가져 친독파로 몰려 불행한 생을 보내
다가 파리에서 사망하였다.

Bal des soldats a Suresnes, 1903

마티스의 초상, 1905

Boats, 1905

Boats at Collioure's Harbor, 1905

Collioure, 1905

Boats at Collioure, 1905

Suburb of Collioure, 1905

The Turning Road, L'Estaque, 1906

The Pool of London, 1906

St. Paul's Cathedral from the Thames, 1906

Blackfriars Bridge, 1906

Donna in Camicia, 1906

The Houses of Parliament, 1906

The Thames, 1906

Charing Cross Bridge, London, 1906

Bathers, 1907

Trees on the Banks of the Seine, 1912

Portrait of Iturrino, 1914

Harlequin and Pierrot, 1924

Portrait of Madame Guillaume, 1928

La Clairiere, ou le dejeuner dur l'herbe, 1938

The Painter and his Family,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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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50 야수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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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야수파(野獸派, Fauvisme)

Self-Portrait, 1906/Henri Matisse

야수파(Fauvism) 20세기가 시작되고 나서 현대미술의 번째 장을 미술
운동이다. 1899 앙리 마티스를 중심으로 일기 시작한 운동은 화가의 주관이 강조
되며, 색채의 해방이라는 슬로건에 맞게 자유분방한 붓터치와 색채의 자율성을 추구하여,
강렬한 원색의 과감한 사용을 통해 외부 세계에 대한 감성을 표현하였다.
입체파가 형태의 자율성을 주장하였다면 야수파는 임의의 선택에 의한 색채를 통해 작가
감정을 표출하면서 화면 전체의 장식적 효과를 나타내고 추상으로 나가는 본격적인
시도로서, 색채의 추상성을 선도하고 있다.

주정적(主情的) 경향을 대표하는 야수파 운동은 엄밀한 의미에서 강령과 이념을
가지고 출발한 유파라기보다 인상파나 신인상파의 타성적인 화풍에 반기를 젊은
작가들의 일시적인 만남에서 형성되었다. 통설로는 당시 미술평론가 루이 복셀이
1905
살롱 도톤(Salon d'Automne) 출품되었던 마르케의 15세기풍의 청동
조각을 보고 "마치 야수(포브) 우리에 갇혀 있는 듯한 도나텔로(르네상스 초기의
이탈리아 조각가) 같다"라고 평한 데서 포비슴(Fauvism)이라는 명칭이 생겼다 한다.
그러나 마티스 부인과 복셀 등의 증언이 모두 달라 유래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1905 《일뤼스트라시옹》지() 11 호에 당시 살롱 도톤의 회장을 야수의
조교사에 비유한 풍자화가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이해 가을에는 '포브'라는
명칭이 사용되었음을 있다.

운동의 동인은 국립미술학교 구스타브 모로의 문하생이었던 앙리 마티스, 알베르
마르케, 조르주 루오, 앙리 망갱 등과 보나-엘의 교실에 있었던 라울 뒤피, 그리고
모리스 블라맹크, 앙드레 드랭, 키스 동겐, 장퓌이 에밀 프리에즈 이었으며
큐비즘 창시자의 사람인 조르주 브라크도 1907 살롱 도톤에서 이들과 관계를
가졌다. 이들 가운데 마티스가 지도적 역할을 했으며, 새로운 회화를 지향하는 같은
세대의 공감을 얻었다. 특히 1901 베르넴 화랑에서 개최된 고흐전과 모로의
자유로운 회화 교육은 야수파 운동의 계기가 되었다. 이들의 제작 태도에는
마티스와 마르케가 같은 모델, 같은 모티프를 동시에 그린 것과 같은 공통점이 많았다.
야수파의 자연발생적인 집단의 형성과 그들의 주정적인 체질은 같은 시대에 나타난
입체파의 주지적인 경향과 대립하였다. 마티스는 1908 《그랑드 레뷔》지에
야수파의 논리적 주장을 펴고 있었으나 때는 이미 집단이 해체된 뒤였다.

1905
년부터 1908년까지의 작품을 보면, 이들은 아카데미즘에 대항하며 인상파 이후
새로운 시각과 기법을 추진하기 위해 순색(純色) 구사하고 빨강·노랑·초록·파랑
등의 원색을 굵은 필촉을 사용하여 병렬적으로 화면에 펼쳐 대담한 개성의 해방을 시도
하였다. 새로운 색의 결합에 대한 기본적인 의도 때문에 이를테면 공기·수목 등에 붉은
색을 사용하는 전통적인 사실주의의 색채 체계를 완전히 파괴했으며 명암·양감 등도
파기하였다. 격렬한 정신의 표현과 강렬한 색채는 고흐의 작품에서 강한 영향을 받았
으나 그림이 대상으로부터 독립된 색과 형에 의한 하나의 조형질서임을 확인시킨 점에서
고갱과 나비파의 회화관에 연결되어 있다. 순수한 색채의 고양(高揚) 기초를
야수파 운동은 결국 외계질서를 그대로 화면에 재현하려는 것이 아니라, 화폭을 자기
해방의 장소로 생각한 색과 형의 자율적인 세계를 창조하려 등에서 20세기
최초의 예술적 혁명이었다. 명확한 이론이나 목표를 갖지 않으면서도 포괄적이고 오히
개성적인 자아 표출에 공통점을 가지는 야수파 운동은 1905년부터 1907년에 이루
어졌고 1908 경부터 이들은 각자의 방향을 독자적으로 전개시켜 나갔다.

Self-Portrait, 1918

1869 프랑스 동북쪽에 있는 카토 칸브레지 지방의 중류층 가정에서 태어난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1869~1954)
뒤늦게 예술가로서 출발한다.
그는 파리에서 동안 법률을 공부한 법률 사무실의 서기가 된다. 그러던 그는
1890
맹장 수술을 받고 요양생활을 하는데, 회복의 따분함을 잊게 하기 위해
어머니가 선물한 물감 상자가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되었다.
마티스가 미술 학교에서 구스타브 모로를 알게 되고, 모로의 도움으로 1895 화가로서
꿈을 이루게 된다. 1905 인상주의가 잃어버린 구성의 단단함을 그림에 복귀시키
려던 세잔의 영향과 고갱, 고흐의 영향을 받는다. 마티스는 시냑의 분할주의 영향을
계기로 야수파로 가는 정점을 맞이하게 되어 색채가 선으로부터 인위적으로 분리되면서
그림은 상이한 두개의 구성이 중첩된 것처럼 보이게 된다.
1907
년과 1909 사이의 회화 수업에서 그는 학생들에게 색채를 선택하는데 있어서
대상과 그림과의 관계를 생각하기 보다는 '그림 안에서의 색채 간의 관계' 주목해
한다고 권유했다.

야수주의 시기는 마티스 생애에서 아주 잠깐에 불과하지만, 시기의 주관적이고
자율적인 색채의 확립은 야수주의 시기 이후 장식적이고 단순화 되어가는 색채의 길로
접어들도록 해주었다. 1907 이후 마티스의 그림은 야수주의 시기의 거친 터치와
명암이 사라지고 끊임없는 새로운 화법의 실험 결과로 마티스는 마침내 '회화에 있어서
필요치 않은 요소는 해로운 '이라는 신념 아래 단순성을 향해 나아가는데, 이것은
마티스의 야수파적 실험이 야기한 '방법의 순수성' 더욱 단순화된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한편 마티스의 조각은 그의 그림을 통해 있듯이 초기부터 회화와의 연관성을 보여
주며, 시기에 많이 제작된다. 마티스가 처음 조각에 손을 때의 의도는 회화를
위한 보완 정도로 생각했으나 점차 보다 많은 시간과 노력을 조각을 위해서 할애하게
되었다. 마티스는 자기가 만든 소품의 조각상을 회화에 등장시키며 회화에 등장한 소상
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아름다운 장식의 구실을 하고 있다. 그러한 예로 1907년에 제작된
청동 조각상 <잠자는 나부> <푸른 나부>(1906) 변조한 작품으로 <조각과 페르시아
꽃병 >(1908)이라는 작품과, <금붕어가 있는 실내> (1912)에서 등장하며, 1908년에
제작된 청동 조각상 < 흑인 여자> <과일과 청동>(1910) 에서 자연스럽게 장식의
구실을 하고 있다. 알제리와 모로코 여행을 그린 작품들의 주제와 형식을 표현한 오달
리스크와 그가 점차 관심을 갖게 되는 도자기, 직품, 벽지 등의 반복적인 디자인에서
나타난다.

마티스 말년의 가장 주목할 만한 작업은 색종이 꼴라주일 것이다.
직접 색을 오리는 방법은 가위로 소묘를 하는것을 가능하게 하였으며, 선과 색채, 윤곽
선과 표면을 하나로 결합시켰다. 죽기 십년 전부터 백내장 장애로 인해 이젤 위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던 마티스는 대신에 가위를, 튜브 대신에 색종이를
사용해 콜라주의 회화 요소로서 평면적 성격을 부활시켰다.
1947
년과 1951 사이, 방스(Vence)성당의 건축설계와 실내장식은 마티스 예술의
귀결점이라 불리우는 것으로 십자가, 제단,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십자가 안치소, 법의
방스 성당의 모든 것은 마티스에 의해 디자인되었다. 방스 성당은 마티스에게
생애의 완성을 의미하였다.

The Dinner Table, 1897

*자화상, 1901*

1899년에 스승 모로가 죽고, 다음 해에 미술 학교를 그만 두고 카리에르의
화숙 (畵塾) 다니면서, 그림을 그리면서 드랑과 비에트와 가까워진다.
그리고 화상 보라르로부터 세잔의 작품 < 浴女> 사서 간직한 것도 이때이다.
그가 31살이 되던 해의 작품으로, 정기(精氣) 넘치는 자화상이다.
명쾌한 필치와 색채의 미묘한 뉘앙스, 명암의 적절한 배분 종래의 고전에서 배운
화법에서 차츰 탈피하고, 단순하고 명쾌한 색면에 의하여 화면을 구성하는
마티스의 조형적 의지가 향하고 있는 방향을 납득할 있게 하고 있다.
얼굴의 처리는 코를 중심으로 좌우로 나눠 명암의 표현 의도에서가 아니라, 색채
자체의 가치를 발현한 하다. 상체의 하얀 셔츠 위에 여러 가지색 터치를 것은
색채 자체의 언어를 암시한 것으로 보인다.

*사치 평온 쾌락*

1900 이후 마티스는 지중해안의 밝은 광선에 강하게 끌리고 있었다.
신인상파의 지도자 시냑이 있는 트로페와, 스페인의 국경 지대에 가까운
지중해안의 마을 코리우르에 드랑과 함께 체재한 마티스는 그의 화면 색채에
있어 눈부시게 명쾌한 혁명을 가져오는 계가가 이루어졌다. 많은 포비즘의
회화는 인상파적인 전통을 이어 받아 현실 세계의 환희를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다. 작품은 1904 트로페에서의 스케치를 바탕으로하여 제작한
신인상파의 점묘 화법을 활용한 것으로, 그의 작품 발전에 있어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는 유명한 수작이다. 풍경에 인물을 배치한 구도는 시냑이나 크로스의
작품, 세잔의 <水浴圖>, 혹은 샤반느의 <행복한 나라> 등에서 영향을
받았으리라고 지적되고 있다.

*A Glimpse of Notre Dame in the Late Afternoon, 1902*

Carmelina, 1903

Open Window, Collioure, 1905

Woman with Hat, 1905

*Portrait of Andre Derain, 1905*

마티스가 드랑을 최초로 알게 것은 국립 미술 학교를 그만두고 그가 서른
살이 되던 (1899) 아카데미 카리에르에 나가면서였다.
1905
여름을 스페인의 국경지대의 지중해안에 있는 어촌 코리우르에서
함께 지내면서 포비즘의 꽃을 피우고 많은 작품을 제작했다.
그들은 거기서 서로의 초상도 그렸는데, 마티스는 작품에서 드랑을 젊고
생기 넘치는 동료로 표현하였다. 초상에서 그는 그늘 부분에도 어두운
색을 넣지 않고 동일 색가(色價) 대립되는 색을 놓아사물의 명암이 아닌
색과 색의 관계를 형성하는 색채적 구성으로서의 색면으로 표현했다.
배경의 색도 이등분되어, 그것은 주황, 노랑, 빨강의 주제가 가지고 있는
색과의 대비적 효과로서의 보색 관계를 형성하려는 것이다.

*Green Stripe (Madame Matisse), 1905*

마티스는 1905 <모자를 여인> <> 살롱 도똔느에 출품하고
이어서 작품은 전시 기간 중에 그렸다. 출품했던 작품들은 색채의
향연이라고 있을 만큼, 자발적이고 다채로운 초기의 포비즘적 경향인데
이로써 당시 포비스트들이 살롱에 첫인정을 받는 기회도 주어졌다.
그러나 작품은, 상당히 억제된 수법으로 화면을 구축적으로 완성하고 있다.
강렬하고 화려한 색채를 교묘한 밸런스에 의하여 구사한 작품에 있어서
마티스는 그가 단지 감각적인 색채가 아니라, 색채에 의하여 건실한 화면을
구성하는 화가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색채의 단순하고 평탄한 색면에
얼굴은 중앙의 녹색 가르마를 중심으로 양쪽을 구분하고, 경쾌한 터치에
의하여 단숨에 완성한 듯한 생생함을 지니고 있다.
그림이 완성되었을 비평가는 물론이고 부인까지도 불쾌함을 느꼈던
작품이며, 마티스는 심리적인 주관으로 색을 표현하고 있다.
그림을 사람들이 마티스에게 '부인을 아름답게 그리지 않았나?'라고
묻자 그는 '나는 작품을 통해서 아름다운 부인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림을 그렸을뿐이라고' 말했다.

*Le bonheur de vivre (The Joy of Life),1905~06*

작품은 마티스가 완성한 그림 가운데 통찰력과 영향력이 가장 뛰어난
작품이었다. 원래의 구상은 전해 1905 여름 콜리우르에서
자연을 연구하던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듯하다.
공간 구성으로는 대각선보다 전면을 강조하고 있으며, 공간 비율은 훨씬
대담하고도 자유롭게 다루어졌고, 분위기를 자아내기 위해서 모자이크와
스타카토식으로 조각난 붓질에 주력하기보다는 평면적인 색면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마티스의 예술은 양식과 주제의 조화를 이룩했고, 그에 따라
장식적인 양식의 대작을 만들 있는 미술가로서의 독자적인 지위를
확립했다. 거기에는 벌써 건축적 조형에의 열망이 비치고 있다.
그때까지 시도했던 작품 가운데서 비교할 없으리만큼 컸던 화폭(세로
1.7m,
가로 2.3m) 구도는 균형과 명쾌한 기법의 본보기였다.
그리고 농밀한 색채는 억제되어 전통적이고 목가적이라는 거룩한 주제에
대한 예술가의 정서적 반응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것은 지성에 의해 누그러진
정서이기도 하다. 작품은 구도는 단순하면서도 윤택하고, 차분한
분위기는 그의 스승 귀스타브 모로의 고뇌에 차고 불확실한 환상들을
바로잡아 주는 듯하다. 한편 일련의 통일된 몸짓으로 그에 앞서 여러 동안
그의 작품 속에 도사리고 있던 내적인 긴장과 갈등을 풀어준다.
역설적이게도 여기서 핵심이 되는 것은 작품이 보기 드문 크기였다는데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삶의 기쁨을 계기로 작품의 크기만으로도 인물의
장식적인 자태를 표현할 가능성이 열렸다.

*The Red Madras Headress (Mme Matisse: Madras Rouge), 1907*

The Blue Nude(Souvenir of Biskra), 1907

Le luxe (I), 1907

*The Girl with Green Eyes, 1908*

1908 이후의 마티스 작품은 필요없는 세부 묘사를 완전히 벗어나서
볼륨이나 명암의 표현에 마음을 쓰지 않는 단순한 수단에 의한 표현에
정진한다. 화려한 , 호화로운 것을 추구하려고 , 마티스는 멈출 줄을
모르는 관능(官能) 기쁨에 빠진다. 그것이 틀림없는 하모니에 이를 때까지
계속된다. 지극히 관능적이고, 동시에 조금의 틈도 없는 구성이 마티스라는
화가의 특성을 이루게 된다.
작품도 그러한 그의 특성을 나타내는 작품으로, 인물을 중심으로
얼굴과 배경을 형성하고 있는 위쪽 화면과 아래의 화면이 양분되고
아래쪽은 오른쪽과 왼쪽을 나누어 호방한 색으로 처리하고 있다.
얼핏 보면 조형 요소를 무시한 앞에 있는 인물의 주제와 배경이 서로
맞싸우는 시끄러운 화면 같으나, 그의 '장식' '표현'이라는 2 요소의
결합을 나타내어 주고 있다.

*Harmony in Red/La desserte, 1908*

1907년에서 8년에 걸쳐 마티스는 여러 가지 평면적이고 장식적인
스타일을 시도하면서, <빨간 조화> 작품에서 포브의 스타일에
최종적인 고별을 했다. 그것은 3 차원의 실내 공간을 표현한 것임에도
화면의 거리감은 부정되고 벽고 탁자도 실내의 바닥도, 모두 동일의 평면
위에 놓여 있다. 탁자 위에만 있어야 식탁보의 무늬가 그대로 벽지의
무늬로 연속되고, 색채도 음영이나 명암은 거부한 색종이를 발라 놓은
단순한 평면으로 되어 있다. 이런 일은 19세기적인 미학으로 보면
하나의 혼란으로 보이겠지만, 평면적인 이론에서 말한다면 훌륭하게
통일된 명쾌한 화면이라고 있다.
작품은 처음에 <초록의 조화>였으나, <파라의 조화> 변경되고
다음 해에 다시 <빨간 조화> 되었다.

Greta Moll, 1908

Bathers by a River, 1909, 1913, and 1916

* Dance (I), 1909*

마티스의 작품 속에서 색채는 춤을 춘다. 마치 무한한 생명을 갈구하는
힘찬 몸짓으로 춤을 추고 있는 사람들. 그림은 모스크바에 있는 저택의
계단을 장식하기 위해 그려진 것으로 활기 있는 생명감이 넘치는 대작이다.
그의 <음악>이라는 작품과 함께 러시아의 무역상인 시츄키의 의뢰에 의하여
그려졌다. 모스크바에 있는 저택의 계단을 장식하기 위하여 그려진
으로서, 활기 있는 리듬과 생명감이 넘치는 대작이다. 극도로 단순화된 푸른
하늘과 언덕의 초록으로 색면 대비를 이룬 배경 속에 다섯 명의 춤추는
댄서들이 손을 마주 잡은 형태는, 생명적인 무한을 갈망하는 암시적 무희로서
화면에는 유동하는 활기로 있다. 그것들은 마치 아라베스크 무늬로 화면
전체를 꿰뚫는 어떤 생명적 통일의 리듬을 시각화하고 있다.
색채는 단지 세가지로, 격렬함과 풍부함을 가지고 있어, 마티스 자신이 '나의
파랑과 빨강과 녹색의 조화는 충분히 스펙트르와 등가(等價) 것을 만들어
낸다.'라고 말할 정도이다.

Still Life with Blue Tablecloth, 1909

*Music, 1910*

위의 그림 <> 함께 원래 벽화로 제작된 그림들은 상당히 스케일이
작품이다. 얼핏 보았을 이것들은 아주 쉬운 그림처럼 보인다.
주제도, 기법도 너무 단순해 보인다. 그런데 단순한 그림들이 우리를
춤과 음악이 시작된 옛날로 데려가 주는 같지 않는가?
혹은 춤과 음악이라는 본능적이고 순수한 행위를 다시금 일깨워 주는
같지 않는가? 우리를 어떤 단일하고 근원적인 경험으로 인도한다는 점에서
마티스의 <> <음악> 원시주의적이다.

*Conversation, 1910*

잠옷차림의 마티스와 실내복을 입고 있는 아내가 마주보고 있는 장면을 그린
일종의 자화상이다. 여기서 지배적인 것으로 보이는 남편은 높은 위치에
그리고 뻗은 그림밖으로 까지 솟아 있는 반면, 낮은 위치의 아내는
의자안에 자루같은 가운에 휩싸여서 매우 수동적으로 보인다.
밖에 있는 배경과도 일치해 남편은 나무와 아내는 연못과 매치된다.
곧게 뻗은 나무에 비해 3개의 연못은 모두 잘린채 보인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난간의 곡선이 no라고 얘기하고 있다.
마치 부부가 서로에게 no라고 하듯이. 결국 대화이지만, 서로가 거부하고
있는 대화이다. 매우 강하며 익살스러우며 진지한 그림이다.

*The Red Studio, 1911*

마티스의 화실 풍경이다. 온통 빨간색인 것은 순전히 회화적인 효과를 위한
것이다. 앞서 <붉은 조화> 생각날 것이다.
거기서와 마찬가지로 그림에서도 어디까지가 벽인지 바닥인지 얼핏 봐서는
수가 없다. 물론 방의 3차원적 구조와 식탁의 존재를 암시하는 어렴풋한
선이 있어서 방의 구조를 알아보는 것이 어렵진 않다. 벽에는 온통 마티스의
그림이 있다. 조각도 더러 보인다. 마티스는 자신의 그림에 나오는 것과 비슷한
인물들을 조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아래의 조각을 보라. 마티스의 화실 오른쪽
구석에 있는 청동 조각처럼 보이지 않는가?
식탁위엔 도자화도 보인다. 이런 모든 대상들이 마치 하나의 붉은 평면 위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마티스는 이런 순수한 공간의 유희를 즐기고 있는 것이다.

*The Painter's Family, 1911*

*마닐라 쇼올을 걸친 마티스 부인, 1911*

마티스는 1906년경부터 번에 걸친 아프리카 여행에서 아라베스크
무늬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고, 차츰 그의 내면 속에 근동취미(近東趣味)
엑조티시즘을 크게 자극하였고, 그것이 색채의 단순화를 통하여 장식성을
달성하게 된다. 작품도 그러한 장식적인 무늬의 호화로운 쇼올을 화면
중앙에 클로즈업시키고, 단순한 배경 처리를 했다. 누구에게나 주어져 있는
색채가 마티스의 손에서는 놀랄 만큼 맑은 해조를 가진 울림으로 변해
버리는 것이다. 그는 색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
색채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그것이 무엇보다도 표현에 쓸모 있게 되는
것이다. 나는 아무런 선입견을 갖지 않고 색을 캔버스에 놓아 간다.'
마티스 부인의 그림자가 위에 얼마나 맑은 청색으로 놓이고 있으며
그것으로 인하여 화면을 얼마나 투명하게, 화려하게 하고 있는지
있는 작품이다.

*Seated Riffian (Le Rifain assis), 1913*

*검은 배경의 독서하는 여인(Reader on a Black Background), 1914*

1914년경부터 마티스가 종종 써오던 검정색이, 작품에 와서 가장
풍부하게 검정색의 가치를 발휘하고 있다. 화면 전체를 검정색으로
채우고, 여기 저기에 필요로 하는 형태와 색을 알맞게 배분하여 정말
격조 있는 회화적 효과를 이루는데 성공하고 있다.
중앙에 초록, 보라, 노랑색들이 검정과 흰색이라는 무채색과 절묘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왼편 아래쪽에 독서하는 여인의 아름다운 주홍색을
중심으로 금빛 노랑과 분홍색은, 대담하게 평면화된 담백한 형체와 함께
호화로우면서도 우아한 맛을 준다. 완전히 평면화된 화면이면서도 거울에
비친 여인의 모습이 그려져 공간의 깊이를 느끼게 마티스의 회화적인
기량에 다시 놀라게 되는 작품이다. 추상적인 공간 구성과 설득력
있는 구상적 주제와 멋진 화합이다.

The Music Lesson(La lecon de musique), 1917

My Room at the Beau-Rivage, 1918

Plaster Torso and Bouquet of Flowers, 1919

*Woman Before an Aquarium, 1921~23*

*Odalisque with Red Culottes, 1921*

앙리에트 다리카레르가 오달리스크를 위한 모델이었다. 책임감이나
결과를 생각하지 않는, 욕망의 대상일 뿐인 여인의 이미지는 일종의
신비감을 불러 일으킨다.

*Odalisque with Magnolias, 1923/24*

*모르풍의 가리개와 젊은 여인들. 1922*

작품은 호화스러운 장식의 극치이다. 그의 화가노트에서 말한 '균형과
순수함과 조용함의 예술' 마티스는 작품에서 달성한 듯한 느낌이다.
부자집 실내를 야하지도 않고 부담감도 주지 않는 안정되고 편안한
분위기로 만들고 있다. 화려한 실내의 분위기에 맞추어 부드러운 흰색
드레스를 입은 여인의 느슨한 화제는 서로의 행복한 로맨스라도
이야기하는 듯하다. 배경에 있는 모르풍의 가리개는 마티스가
1912
년에서 13년에 걸쳐 체재한 모로코의 항구 도시 탄지르에서 사온
것이 아닌지. 마티스는 탄지르의 화려한 색채와 이국 정서에 1세기
전의 들라크로아처럼 매혹 되었다. 그의 오달리스크를 주제로 작품과
함께 작품에서도 모로코 체험의 여운을 나타내고 있다.

*Decorative Figure on an Ornamental Ground, 1926*

작품은 니이스에서 지중해적인 밝은 광선과 색에 도취하여 그린
'
평안과 우아의 예술' 위한 그의 작풍(作風) 이루는 그림이다.
여인의 몸매는 직각이 서로 교차하는 직선을 중심으로, 견고하고 힘찬
형태로 그리고,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화면은, 그가 좋아하는 장식적 요소를
가득 채워 호화스럽고 사치한 조용함이 있는 기념적인 아름다움을 이루어
놓았다. 작품에 있어 그는 확실히 새로운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힘과 장대(壯大)함의 세계에 새로운 창이 활짝 열린 것처럼 눈부신 광경을
이룬다. 바닥에 놓인 카페트의 비스듬히 그어진 직선의 연속은, 벽에 장식된
꽃무늬와 아라베스크의 선과 충돌되는 듯하지만, 대조가 한층 마티스가
노리는 장식적 효과를 더해 주고, 더욱 힘있는 화면 효과를 이루게 하고 있다.

Odalisques, 1928

Large Reclining Nude / The Pink Nude, 1935

*Femme au manteau violet (Woman in a Purple Coat), 1937*

화면이 강한 생명력에 넘치는 리듬으로 가득 있다. 역시 작품에서도
마티스가 만년에 집념적으로 다루던 조형 요소와 제재가 모두 총합되어 있다.
그것은 꽃과 화려한 미녀, 그리고 오달리스크 즐겨 택해 제재들을
직선과 곡선, 점들을 익히 써온 아름다운 색들에 의하여 그림속에 총합적
으로 다루어, 창조적인 작품을 만들어 놓았다. 마티스가 간직하고 있던
생명에의 외경심을 경건한 자세로 찬탄한 것이 그의 만년의 작품에 간결하게
또는 힘차게 표현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은 감동적이다.
작품에 있어서도 여인의 육체를 흐르는 생명적인 율동감 그리고 지금
피면서 꽂힌 듯한 싱싱한 꽃들, 그것을 받치고 있는 리드미컬한 형의 꽃병
등이 화면에서 생기 발랄하게 생명의 찬가를 부르는 , 싱그럽고 향기롭다.

*Two Dancers (Study for Rouge et Noir), 1938*

*La Musique,1939*

작품은 마티스의 작품 중에서 가장 음악적 대위법(對位法)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제목을 <음악>이라고 했고, 화면에 악보와
기타를 그려 넣은 것은, 연주하며 그것을 즐기는 음악적 주제를 취하기 위한
설정이기는 하지만, 마티스가 작품에서 의도하고 있는 것은 화면에서
연주하고 있는 음악적 설명이 아니라, 초록, 파랑, 빨강, 노랑, 검정색에 의한
그리고 유동적인 곡선 형태와 딱딱한 직선 형태와의 대립을 통한 대비적인
하모니를 화면에 연출하여선명한 음색을 통한 불협화음의 음악적 분위기를
실현하려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화면에는 가냘픔과 연약함이 전연 없다.
더구나 푸른 옷의 기타를 여인의 데포르마숑은 그녀를 의자에서 일으켜 지금
춤을 추게 하려는 , 다리는 춤추는 다리 모양으로 공중에 떠서
움직이는 듯하다. 건강미가 화면에 가득하다.

*루마니아풍의 블라우스, 1940*

얼핏 보면 왼편으로 쏠려 불안한 느낌을 주는 포즈를 그린 같으나, 그러한
포즈가 화면에 긴장감을 조성하고 있다. 아마 의자에 걸터앉은 자세를 그리면서
의자의 등받이를 생략함으로써 느껴지는 불안감일 것이다.
오히려 풍선 같은 블라우스의 부풀음과 함께, 불안감은 유머러스한 맛을 주기도
한다. 블라우스에 그려진 무늬의 인상은마치 여인의 청순한 심성과도 같이 여리고
깨끗하다. 작품은 마티스의 부인상 하나의 정점을 이루는 것으로, 작가는
그림에 압도적인 단순.명쾌를 주입하고, 통일감있는 장식적 평면성을 강조하고
있다. 색조에 있어서도 많은 여러 가지의 색을 쓰면서도 단순하게 느껴지도록
배려했고, 블라우스의 부풀은 어깨나 소매를 처리하는 선은 아주 경쾌한 맛을 준다.
작품을 경지에 가져오기 위하여 마티스는 15점의 습작을 거쳤다.

*The Lute, 1943*

*Icarus (Jazz),1943~44*

서커스나 환상적인 주제들과 관련된 <재즈> 위한 삽화들은 이후의 종이
오려 붙이기 작업들의 구성과 주제에 영향을 준다.
작업은 마티스가 "주제보다는 모리스 드니의 경구인 회화란 분명한 질서로
배열된 색채들로 덮혀진 하나의 평면"이라는 주장에 충실함을 보여주고 있다.
마티스는 작업들에서 장식적인 것의 의미와 그림의 자율성의 이상을
엄격하게 완성하고 있다.

*Circus*

*Destiny*

*The Knife Thrower*

Polynesia, The Sea, 1946

*Two Girls in a Yellow and Red Interior (Deux fillettes, fond jaune et rouge), 1947*

*Interior with an Egyptian Curtain, 1948*

편의 섬세하고 웅장한 교향곡을 듣는, 여러 악기들이 아름답게 노래하고
있는 것과도 같은 작품이다. 투명하여 속에서 빛이 비쳐 나오는 같은
검정색의 바탕에서 꽃불과도 같은 무늬들이 소용돌이치고, 창문에는 가득히
정원을 메운 남불(南佛) 소철나무가 힘껏 생명을 다하여 약동하고 있다.
그러한 평면적인 화면 아래에 원근법이 알맞게 표현된 탁자가 그려져
공간의 깊이를 느끼도록 함으로써 입체와 평면이 서로 도와 단조로움을 면하게
하고 있다. 마티스가 즐겨 써오던 검정색이 작품에서도 아주 효과적으로
성공하고 있다. 테이블 위의 석류 접시 아래의 검정, 오른쪽 커튼의 바탕색
으로서의 검정, 창문 아래위의 벽색으로서의 검정은 모두 동일색이지만, 거기에
놓여진 주변의 유채색에 따라 각각 다른 검정으로 느끼게 작용하고 있다.

*붉은 室內, 1948*

말년에 와서 마티스는 화면 전체의 색을 가지 색으로 통일하여 칠하고
거기에 데생을 하듯 사물의 형태를 그려 넣어 필요한 변화를 주는 수법을
쓰는 작품들을 많이 남기고 있다.
작품도 바로 앞에 소개한 작품 <이집트풍의 커튼이 있는 실내> 같은 해의
작품으로, 검정색의 효과를 빨강으로 바꾸었다.
빨강이 주조가 실내 풍경으로, 테이블이나 의자, 벽이 모두 타는 듯한 빨강
속에 삼켜져 버리고, 마티스의 관능과 정서의 순수한 표현으로 화하고 있다.
뒤쪽 왼편에는 그림 같은 창이 그려져 있고, 오른편에는 자신의 작품
<
파인애플> 창보다 약간 크게 걸려 있다.
그는 종종 자기의 작품을 화면에 등장시켜 새로운 작품 속에서 색다른 어울림을
나타내고 있다. 말년의 그의 작품은 모두 이처럼 커다란 자유 속에서 해방된
조형을 즐긴 흔적을 남기고 있다.

*Blue Nude (IV) Nu bleu (IV), 1952*

슬픔, 1952

마티스의 만년의 작업 중에 그의 색채적 천재성을 자유 분방한 감각과
함께 발휘하게 하여준 것이 <색종이 그림> 시리즈다.
그는 이전부터 유화 제작의 준비 단계에서 포름이나 색을 연구하기 위하여
색종이를 잘라 붙여 보는 일을 해왔으나, 1941년에 병을 앓으면서 침대
위에서 대신 가위를 들고 많은 걸작을 남기게 되었다.
처음에 그는 <재즈> 시리즈의 서커스의 정경을 나타낸 20점의 잘라 붙인
색종이 그림을 만들었는데, 작품은 작업의 절정을 이루는 기념비적
대작이라 있다. 어떤 의미로는 유화보다 순수하게 울려퍼지는 색과
형태의 교환(交歡) 느끼게 하는 이런 방식이 마티스의 이념에 더욱 밀접
하게 맞았는지 모른다.
작품은 농후한 설화를 아라베스크적 색과 형의 드라마로 꾸민 실로 감탄할
걸작이라고 해야 것이다.

*The Snail (L'escargot), 1953*

Portrait of Henri Matisse 1933 May 20

Photographer: Carl Van Vechten

병마로 쇠약해진 노년의 마티스. 하지만 그는 화가로서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기법으로 자신의 예술에 활기를 더했다.
새로운 기법이 바로 종이를 오려 붙이는 기법이었다. 종이 오려 붙이기
기법이란 캔버스에 물감을 칠해서 그림을 그리는 대신 채색된종이로 형태를
만들어서 붙이는 기법을 말한다.

1.
우선 종이에 원하는 색을 칠한다. 마티스는 밝고 선명하고 강렬한
원색을 주로 사용했으므로 종이에도 밝은 채도의 색을 평평하게 칠했다.
물론 미리 어떤 형태의 그림을 그릴 것인가를 생각했을 것이다.
당시 마티스는 '과슈'라고 하는 물감으로 채색했는데, 과슈는 수채화의
일종으로 색조가 선명하고 유화와 같은 윤기가 없어 부드러운 느낌을 주었다.
주로 원색을 사용했던 마티스는 과슈로 강렬하고 선명한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표현해 냈다.

2.
흰종이에 원하는 색을 칠한 후에는 가위로형태를 오린다.
마티스는 이렇게 직접 가위로 형태를 오려 붙이는 작업을 "가위로 하는 소묘"
라고 표현했다. 기법은 그가 1943 재즈라는 책에 삽입할 삽화를
제작하기 위해 사용했지만 기법을 처음으로 사용한 것은 <>이라는
작품을 제작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마티스는 <> 제작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색채 효과를 시험할 목적으로 종이 오려 붙이기 기법을 처음으로 시작
했으나 기법?1943 이후에서야 일반화되어 자체가 독창적인 작품을
창조하는데 사용되었다.

3.
정교한 실루엣으로 그린 형태에 풀을 칠한 후에 붙인다.
비교적 간단한 작업은 작품이 완성된 후에도 즉흥적이라는 특징을 갖게
되는데, 이러한 즉흥성은 사전에 치밀하게 고려된 형태와 색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종이 오려붙이기 기법은 야수차가 지향하던 빛나고 신선한 색채감으로
이어지게 된다. 결국 이것을 통해 마티스는 평면적이고 체계적인 회화 양식
이라는 예술적 이상을 완성해 나갔다.

마티스는 '가위는 연필보다 한층 감각적' 이라고 말하면서 색종이 그림 작업을
계속 했다. 그는 생에 대한 종교적 감정을 나타내기 위해 이와 같은 대작을
제작했는데, 작품은 그랜드 오르간 음악에서 느낄 있는 울림을 자아낸다.
1940
년대부터 계속해 그의 색종이 그림은 기존의 오브제를 화면에 도입한
꼴라쥬와는 다른 단색 과슈를 칠한 종이에서 스스로의 이미지를 오려내어
그것을 풀로 붙여 구성하는 형식이다. 당초 <달팽이> '현실에 뿌리박은
추상적 패널'이라고 이름 붙여 있었다. 색종이의 배열이 휘도는 모양으로
움직여 나가게 하여 달팽이의 껍질을 연상케 하고, 운동은 연속적이 아니라
쉬었다가 움직이고 움직이다가 쉬는 영원한 반복을 상징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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