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미술사53 큐비즘(입체파) - 피카소

   

 서양 미술사 - 53(입체파Cubism: 자유분방한 조형의 세계, 피카소)

   

   

Self-Portrait, 1899-1900


입체파(立體派:Cubism)는 1900년부터 1914년까지 파리에서 일어났던
미술 혁신운동을 말한다. 르네상스 이후 서양 회화의 전통인 원근법과 명암법 그리고
다채로운 색채를 쓴 순간적인 현실 묘사를 지양하고, 야수파의 주정적인 표현을 폐기한
대신 시점을 복수화하여 색도 녹색과 황토색만으로 한정시켰으며, 자연의 여러가지
형태를 기본적인 기하학적 형상으로 환원, 사물의 존재성을 이차원의 타블로로 구축적
으로 재구성하고자 했다. 피카소, 브라크 등이 이 운동의 중심이었고 그밖에 몽파르
나스에서 화면에 밝은 색채와 다이나믹한 율동을 도입했던 F. 레제와 R. 들로네가
있으며, 화면의 구성원리를 추구하여 추상예술의 길을 열었던 쿠프카와 비용, 뒤샹 등이
있다. 입체파는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종말을 맞았으나, 그 성과는 그 후의 미술
디자인, 건축 등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미술사의 전환점인 유파로서 추상화를 시도,
많은 유파가 생겨나는 동기가 되었고, 오브제 미술이 시작되어 현대미술에 영향을
주었다. 그 미학은 회화에서 비롯하여 건축, 조각, 공예 등으로 퍼지면서 국제적인 운동
으로 확대되었다.

피카소가 <아비뇽의 아가씨들>을 발표함으로써 급격하게 발전한 이 운동은 일반적으로
세잔풍의 입체주의, 분석적 입체주의, 종합적 입체주의로 나누어 고찰할 수 있다.
입체파란 명칭은 1908년 마티스가 살롱 도톤에 출품한 브라크의 <에스타크 풍경>이란
연작을 평하면서 '정육면체의 집합'이라고 비평한 데서 유래되었다.
피카소와 브라크 두 사람이 중심이 되어 몇 년 동안에 점차로 명확한 모습을 갖추게 된
큐비즘의 미학은 우선 세잔의 가르침을 따라 대상을 순수하게 조형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이어서 그것을 각각의 면으로 분해한 다음 마지막으로 그것을 재구성하는 순서를 밟아
화면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의자나 테이블 같은 가구든 인간의 얼굴이든 컵
이나 책과 같은 정물이든 여러 방향에서 본 여러 가지 면을 갖고 있다. 인간의 얼굴을
가지고 말하자면 정면에서 본 얼굴도 있고 옆에서 본 얼굴도 있다. 그것들을 평면인
캔버스에 모두 함께 배치하여 순수하게 조형적 원리에 따라서 재구성한다.
즉 바로 마티스가 색을 가지고 자유롭게 구성했던 것처럼 형태를 자유롭게 구성하는 것
이다. 그 결과, 분석과 종합의 과정을 거쳐 마침내 피카소의 1921년 작품 <세 사람의
음악가>처럼 납작하게 눌린 인간상의 등장을 보기에 이른다. 그것은 이른바 새로운
조형 언어의 창조였다. 나중에 피카소는 자신의 작품을 '알 수 없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영어를 모른다. 그러나 영어로 씌어진 훌륭한 시나 문학이 있다는 것은 안다.
큐비즘도 마찬가지다.'라고 말했다.

1. 초기 큐비즘(1907-1909): 1907에서 1909년 사이를 초기 큐비즘
이라고 한다. 여기서 피카소와 브라크는 사물의 본질적인 모습을 '원, 원통, 원추'라고
정의하였던 세잔의 이론을 심화하는 작업을 하게 된다. 대상의 자연적 형태를 요약,
단순화시켰으며, 1점 원근시점이 아닌 복수시점을 이용해 사물의 본질적인 형태를
화면에 구축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그들의 회화에서는 고전적 사실주의에서의 광선,
명암, 원근, 질감, 채색법을 무시하고 3차원의 깊이, 공간, 입체감들의 전통적인 표현법
이 소멸하게 된다. 이는 화면이 평면으로 환원되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2. 분석적 큐비즘(1909-1911): 주제보다는 주제를 다루는 방법이 중요해
졌다. 브라크와 피카소는 정물처럼 환경의 간섭을 받지 않고 폐쇄된 공간속의 주제를
택하는 것이 자신들의 방법론을 더욱 분명하게 할 수있고 발전시킬 수 있다고 결정했던
것 같다. 색채의 산만함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엄격한 색채들만을 그림에 사용한다.
주제를 택한 다음 그것을 모든 측면에서 본다는 착상을 했으며, 그런 다음에는 그 모든
단면을 동시에 한 시점으로 보는 방법이었다. 분석적 단계에는 색채가 거의 브라운과
회색 계통, 검정색, 황토색 계통만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색채 제한은 화면안에서의
평면들 사이의 관계 및 구성, 구조의 문체에 강조점을 두기 위한 의도에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큐비즘은 두 개의 전제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첫번째 자연적 형태는 기하
학적인 동일체의 방향으로 단순화시키거나 세련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미술의 역사만큼 오래된 것이며, 이것을 큐비스트들은 극단적인 결론으로
까지 파고 들어갔다. 두번째 전제는 4차원의 공간과 시간이 어떤 형태로든지 회화에서
인정되어야 하며 대상의 모든 면을 동시에 볼 수 있게 한다는 것이었다.
분석적 큐비즘 시기에는 초기 큐비즘의 조형 논리가 극대화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대상이 완전히 기하학적 단위로 해체되어 다시 화면 위에서 재구성되고 있다.
이러한 분석해체, 재구성의 과정에서 색채는 녹새, 황색, 검은 색, 회색 등의 명도 낮은
것으로 요약되어 나타난다. 이는 피카소와 브라크가 구현하고자 한 것이 형태의 분석적
인 묘사라는 의도를 나타내기 위한 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3. 종합적 큐비즘(1911-1916): 다방면에 걸친 회화적 수단을 가지고 자유
롭게 작업하면 형태를 파괴하기보다는 상징에 가까운 이미지들을 만들어 내는 주관적
이고도 임의적인 방식으로 형태들을 구성하였다. 따라서 분석적이기 보다는 더욱 심화된
평면성, 단순성, 풍부해진 색채와 질감, 느슨해진 분위기의 개성적인 작품을 제작하였다.
추상적 하부 구조와 중첩된 소재는 함께 유합되어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동시에 각 요소 들은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즉 종합적 큐비즘은 추상적 요소
들을 함께 융합하여 하나의 재현적인 전체를 형성하는데 역점을 둔다.
피카소와 브라크는 자신들의 대상해체 작업이 극에 달하여 대상의 윤곽이 완전히 분해
되어 버리자 빠삐에 꼴레(종이를 풀로 붙인다는 뜻)와 콜라주를 통해 형태를 재현시킨다.
차가웠던 색채가 다시 밝아지고, 기법이 확대되어 어느 정도 대상이 회복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파피에 콜레와 꼴라쥬 마티에르(실제물을 한데 모은다는 뜻)를
통해 문자, 단어, 숫자, 실물들이 화면 위에 회화와 함께 등장하게 된다.
실제 나무의 모조를 그려 나무의 환영을 만들어내는 대신에 진짜로 나무를 그림에 도입
시킨 것이다. 단순히 사물을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 대한 깊은 통찰을
그리려 한다는 것이다.

Self Portrait:"Yo Picasso", 1901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1881~1973)는 에스파냐 말라가에서 출생
하였다. 14세 때 바르셀로나로 이주하였는데, 이때부터 미술학교에 입학하여 미술공부
를 시작하였다. 이 무렵 당시 바르셀로나에 들어와 있던 프랑스와 북유럽의 미술 운동
에서 많은 자극을 받고 특히 A. 르누아르, H. 툴루즈 로트레크, E. 뭉크 등의 화법에 매료
되어 이를 습득하는 데 힘썼다. 1897년 마드리드의 왕립미술학교에 들어가 바르셀로나
에서 최초의 개인전을 열었고, 1900년 처음으로 파리를 방문, 다음해 재차 방문하여
몽마르트르를 중심으로 자유로운 제작활동을 하고 있던 젊은 보헤미안의 무리에 투신
하였다. 당시의 그의 작품에는 위에 열거한 화가들 외에 P. 고갱, V. 고흐 등의 영향도
많이 반영되었으나, 점차 청색이 주조를 이루는 소위 '청색시대(靑色時代)'로 들어갔으며,
테마는 하층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의 생활의 참상과 고독감이 두드러졌다.
그러나 1904년 몽마르트르에 정주하면서부터 색조가 청색에서 도색(桃色)으로 바뀌는
동시에(도색시대) 과거의 에스파냐 예술, 카탈루냐 지방의 중세조각, E. 그레코, 고야
등이 지닌 독특한 단순화와 엄격성이 가미되어 갔다.
작품에는 곡예사들을 묘사하는 일이 많아졌는데, 어릿광대나 곡예사는 무대위의 모습이
아니고 그 생활의 이면을 파헤친 애수였다.

1905년 시인 G. 아폴리네르와 교유하고 다음 해에는 H. 마티스와도 교유하였다.
그러나 작풍은 P. 세잔의 형체관을 살려나가 점점 단순화되고, 1907년의 영원히 기념할
명작 《아비뇽의 아가씨들》에 이르러서는 아프리카 흑인 조각의 영향이 많이 나타나는
동시에 형태분석(形態分析)이 비로소 구체화되기 시작하였다. G. 브라크와 알게 된 것
도 이 무렵으로, 그와 함께 입체파 운동에 들어가 1909년에는 분석적 입체파, 1912년
부터 종합적 입체파 시대에 들어갔다. 이 무렵 그는 이미 20세기 회화의 최대 거장이
되었고, 종합적 입체파 수법을 1923년경까지 계속하면서 여러 가지 수법을 순차적으로
전개하였다. 활동범위도 J. 콕토와 알게 되면서 무대장치를 담당하는 등 점점 확대되어
갔다. 즉 1915년 《볼라르상(像)》과 같은 사실적인 초상을 그리고, 1920년부터는
《세 악사》 등 신고전주의를, 다시 1925년에는 제1회 쉬르레알리슴전(展)에 참가
하였다. 또한 1934년에는 에스파냐를 여행하여 투우도 등을 그렸으며, 1936년의 에스
파냐 내란 때는 인민전선을 지지하고, 다음해 프랑코 장군에 대한 적의와 증오를 시와
판화로 나타낸 연작 《프랑코의 꿈과 허언(虛言)》 및 전쟁의 비극과 잔학상을 초인적인
예리한 시각과 독자적 스타일로 그려낸 세기의 대벽화 《게르니카》를 완성하였다.
그리고 《통곡하는 여인》도 이 무렵의 작품이며, 이때부터 피카소 특유의 표현주의로
불리는 괴기한 표현법이 나타났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던 해는 에스파냐에서 지냈으나 다음해 독일군의 파리 침입 직
후 파리로 돌아와 레지스탕스 지하운동 투사들과 교유하고 1944년 종전 후는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부터 주로 남프랑스의 해안에서 생활하면서 그리스
신화 등에서 모티프를 취하여 밝고 목가적 분위기마저 자아내는 독특한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도기(陶器) 제작과 조각에도 정열을 쏟고 석판화의 제작도 많아 이
영역에서도 새로운 수법을 창조하였다. 그 후 6·25전쟁을 테마로 한 《한국에서의 학살》
(1951), 《전쟁과 평화》(1952) 등의 대작을 제작하여, 현대미술의 리더로서 거장다운
활약을 하였다.

1. Childhood and Youth:1881-1901

First Communion, 1895-96

Le Moulin de la Galette, autumn 1900

Girl with Plumed Hat, 1901

Leaning Harlequin, 1901

Child with a Dove, 1901

2. The Blue Period:1901-1904(청색 시대)

Self-portrait with Cloak, 1901

Absinthe Drinker, 1902

The Visit(Two Sisters), 1902

The Old Guitarist, 1903

피카소의 이 시기가 E. 그레코에 심취하던 때였다. 굶주리고 버림받은 사람에게는 성자
의 그늘이 있다. 왼쪽 어깨를 강조한 것은 비단 이 작품만이 아니라, 피카소의 '청색 시대'
인체는 메마를 대로 메마르고 손가락도 뼈만이 앙상하다. 이 손으로 기타를 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기타는 노인의 신체의 일부처럼 달라 붙어있다. 노인은 장님이다.
그를 둘러싼 세계와는 이미 창문을 잃었다. 그러면서도 이 밀폐된 상태의 사나이의 조형
이 무엇인가 우리에게 말하여 주고 있다.

La Vie-삶, 1903

이 작품은 1901-1904년까지의 피카소의 [청색시대]의 가장 복잡하고 큰 작품이다.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서 그려진 작품 [La Vie(인생)]은 20세기의 영향력 있는 시각
예술가의 회화, 소묘, 판화, 조각 그리고 놀랄만한 작품들 중에서도 핵심이 되는 작품중
의 하나로 남아있다. 이 시기 젊고 감수성이 예민하였던 피카소는 쇼펜하우어의 염세
주의, 세기말의 암울한 분위기에 영향을 받는데, 이로서 그의 작품이 전체적으로 청색이
감도는 어둡고 침울하고 내성적인 분위기를 띠게 된다.
이 작품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피카소의 인간에 대한 관심은 일생동안 지속된다.
피카소는 이러한 경험으로 육체적 사랑의 허무함을 담은 [인생]이라는 작품을 그린것
으로 추측된다. 구도에서 인물들이 적어도 두번 바뀐 이 작품을 위해 피카소는 4장의
스케치를 했다. 망또를 걸친 여인은 처음에는 턱수염이 난 남자였다. 남자의 경우,
원래는 피카소 자신의 자화상으로 그려졌지만 나중에 그의 친구인 카사헤마스의 얼굴로
변했다. 카사헤마스는 피카소의 동료 화가로 애인 제르맹의 변심때문에 자살한 사람이다.
남자에 기대있는 왼쪽의 여인이 제르맹으로 여겨지며 망또를 입은채 오른쪽의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은 카사헤마스의 어머니이다. 양쪽 인물들의 사이에 보이는 배경의 위쭉
에 그려진 그림은 고갱풍으로 그려졌으며, 아래쪽 여인은 고호풍으로 그려졌다.
그의 청색시대의 주요한 모티브인 남녀간의 육체적 사랑과 모성애를 통해 인생의 단면을
그려내고 있다.

The Tragedy, 1903

Portrait of Soler, 1903

La Celestina, 1904

Woman with a Crow, 1904

Woman Ironing, 1904

1901년 피카소가 파리를 떠나기 전 이 <다림질하는 여인>을 제작하여 사바르테스에게
헌정했다. 피카소는 이 시기에 있어서 화면 구성에 큰 변화가 있었다. 왼쪽 어깨를 강조
한 것이 마치 사원 실내의 건축적 구조와 같다. 이러한 이유로 이 그림은 '청색 시대'의
한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되었는데, 왼쪽 팔의 만곡이 작품의 깊이를 효과있게 하고 있다.
여인은 매우 피곤 하다. 여인의 눈은 장님과도 같이 보인다. 그러나, 여인은 이상하리
만큼 씩씩한 모습을 하고 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놀라게 한다.
피카소의 극과 극의 융합 능력을 볼 수 있는 좋은 예이다.

Boy with a Dog, 1905

3. The Rose Period:1905~1906(장미빛 시대)

Tumblers(Mother and Son), 1905

Boy with a Pipe, 1905

Acrobat and Young Harlequin(Acrobate et jeune Arlequin), 1905

Family of Saltimbanques, 1905

Harlequin's Family, 1905

The Girl with a Goat, 1906

Composition:The Peasants, 1906

La Toilette, 1906

카날 부인의 초상

얼굴의 부분들은 세밀하게 묘사하면서 신체는 큼직 큼직하게 처리한 것은 피카소가 제작
한 초상화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특징의 하나이다.
이 작품에서는 섬세하고 날카로운 표정과 거의 반원형에 가까운 신체의 선과의 대조가
독특한 효과를 자아내고 있다. 검정, 갈색, 황토색 등을 주조로 한 색조에서는 피카소에
흐르는 스페인 사람의 피를 보는 듯하다. 피카소의 뛰어난 데상력은 이미 세상에 알려진
바이나, 특히 이 작품에서는 그의 타고난 천분이 번쩍이고 있다.

Gertrude Stein(거트루트 스타인의 초상),1906

프랑스와즈 지로는 이 초상화가 티벳의 승려를 닮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분명히 표정에서 금욕적이며, 엄격함을 보여 주는 초상화이다. 그러나, 이 초상화가
누구의 초상이라는 것보다는 그 당시의 피카소의 흑인 조각 연구에 연유된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1906년 봄, 피카소는 이 작품을 그리다가는 지워 버리고, 스페인 여행에서
돌아와서는 다시 그리기 시작하면서 언젠가는 그녀를 닮겠지 하고 말했다는 것이다.
바로 이 초상화의 모델은 아메리카의 여류작가 스타인이었다. 구도나 표현의 박력에서는
피카소의 초상화 중에서도 뛰어난 작품이나, 과연 스타인 자신이 만족했느냐에 관해서는
전하는 바 없다.

4. The Beginnings of Cubism

Self Portrait, 1907

Les Demoiselles d'Avignon(아비뇽의 처녀들), 1907

큐비즘의 출발점이 된 <아비뇽의 처녀들>은 종래의 전통적인 공간 구성이나 형태
파악을 모든 점에서 부정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여기에 그려져 있는 것은 분명히 나부 군상인것은 틀림이 없지만 평소 우리가 품고
있는 나부의 관념과는 전혀 다르게 표현되어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 아름다운 신체의
이상적 표현으로서 나부상이 등장한 후 서구의 오랜 예술의 역사에서도 이처럼 관능적
매력이 없고 심하게 말해서 추한 나부상이 그려진 적은 일찍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예로부터 훌륭하게 그려진 나부상을 보는 즐거움에는 하나의 조형적으로
완성된 질서를 바라본다는 것과 더불어 이상화된 것이든 사실적인 것이든 훌륭한 육체적
매력에 매혹된다는 비밀스러운 즐거움이 뗄 수 없게 결합되어 있다. 그렇다면 피카소는
여기에서, 본래 나부상이 가지고 있는 매력의 전부는 아니더라도, 그 중 큰 요소를 일부러
잘라내 버렸다고 할 수 있다. 이 화면에 등장하는 다섯 명의 나부는 다른 점은 제쳐놓더
라도 적어도 육체의 아름다움을 과시하려는 의도만은 애초부터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묘하게도, 피카소가 처음 이 작품을 그리려고 했을 때는 등장하는 다섯 명의
나부가 오로지 육체적 매력만을 내세우는 여성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제목에서 말하는
'아비뇽'이란 한때 교황청까지 있었던 프랑스 남부의 유서 깊은 도시가 아니고 실은
피카소가 소년 시절을 보낸 바르셀로나 번화가의 거리 이름으로 선원들을 상대하는 밤
의 '처녀들'의 집이 즐비한 곳이었다. 피카소는 그녀들을 단지 조형 표현의 구실
내지는 모델로 삼으려 했던 것만이 아니라 그녀들의 직업에 특수한 의미를 두려고까지
했던 우의화였다. 처음에 피카소가 생각했던 것은 화면 중앙에 뱃사람이 한 명 있고
그 둘레를 처녀들이 둘러싸고 옆에는 꽃이나 과일이 놓여 있는 보통의 실내 정경이었다.
그리고 화면 왼쪽에서(파카소의 설명에 따르면) 손으로 해골을 받쳐 든 이상한 인물이
막 방으로 들어오려 하고 있었다. 이 구도가 의미하는 것은 명백하다. 그것은 아비뇽
거리의 처녀들과 꽃다발이나 과일바구니를 통해 현세의 쾌락을 상징하는 동시에 왼쪽의
인물이 손에 든 해골로써 이러한 쾌락도 언젠가는 죽음의 세계로 바뀌어 버린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 세상의 어떤 화려한 즐거움도 언제나 죽음의 그림자에 위협당하고
있다는 것, 풍만한 육체를 가진 미녀들도 먼지투성이의 무서운 해골의 겉 모습에 지나
지 않는다는 것, 이것이 피카소의 마음에 있던 최초의 테마였다.
젊은 피카소가 인생의 덧없음을 보여주는 이러한 테마에 이끌렸던 것은 조금 넓은 역사
의 시야에서 본다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총에 걸쳐 많은 예술가들에게 들씌워져 있던
그 세대의 분위가 같은 것이기도 했다. 처음에 피카소는 이 작품의 제목을 '철학적
매춘숙'이라고 불렀다. <아비뇽의 처녀들>이라는 이 유명한 제목은 작품이 완성되고
나서 한참 후에 피카소의 친구였던 비평가 살몽이 붙인 것이다.

'철학적 매춘숙'이 <아비뇽의 처녀들>로 바뀌었듯이, 피카소의 최초의 우의화적 구상도
제작 도중에 점차 새로운 조형적 실험으로 바뀌어 갔다. 이야기적 내용을 암시하는
뱃사람이나 꽃다발 등은 사라지고 당초의 구도상의 포인트였던 왼쪽 인물이 손에 든
해골도 사라지고 그 모습은 또 한 사람의 처녀로 바뀌었다. 단 다섯 처녀 가운데 이
왼쪽 끝의 처녀만이 어딘가 가까이 다가가기 어려운 묘한 표정으로 이곳으로 들어오려
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최초의 구상의 흔적일 것이다.
이렇게 우의적 내용이 사라짐에 따라 공간이나 형태의 표현도 달라졌다.
처음에는 분명히 깊이를 가진 실내였던 이 장면이 삼차원의 깊이를 잃고 배경은 마치
프리즘을 통해 본 듯한 평탄한 면들의 집합으로 되어 전경과의 거리가 없어졌다.
나부들의 몸은 둥근 맛도 두께도 없는 평탄한 형태로 바뀌었고, 그 중 몇 사람은 괴기
스러운 신상 같은 얼굴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오른쪽 두 사람의 도깨비 같은 얼굴
은 아마도 당시 젊은 예술가들 사이에서 관심을 모으고 있던 아프리카 흑인 조각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한다. 즉 맨 처음 구상의 우의적 의미는 거의 다 사라지고
단지 새로운 조형 표현만이 화면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것은 마티스에서 보았듯이
세기의 전환기에 예술가들을 강하게 사로잡고 있던 평면화의 의도다.
화면에 현실의 삼차원 공간의 환영을 정착시키는 대신 피카소는 마티스나 포비즘 화가
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화면의 이차원성을 강조하려고 했다. 마티스가 캔버스 위에
평면화된 인물이나 정물을 배치하고 거기에 자기가 좋아하는 색채 세계를 자유롭게
전개한 것에 비해, 피카소는 색채보다도 오히려 형태와 형태의 변모에 한층 더 관심을
기울인 화가다. 그 결과 <아비뇽의 처녀들>은 평면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변형
되었다. 이것이 이윽고 큐비즘의 혁명으로 이어지는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The Dance of the Veils(Nude with Drapes), 1907

Composition with a Skull, 1907

Flowers in a Grey Jug and Wine-Glass with Spoon, 1908

Friendship, 1908

Three Women, 1908

Woman with a Fan, 1908

Bread and Fruit Dish on a Table, 1908~09

Portrait of Manuel Pallares, 1909

Portrait of Fernarde, 1909

Brick Factory in Tortosa(오르타의 공장), 1909

Reservoir at Horta, 1909

5. Analytical Cubism

Girl with a Mandolin(Fanny Tellier), 1910

Portrait of Daniel-Henry Kahnweiler, 1910

Portrait of Ambroise Vollard, 1910

Accordionist, 1911

6. Synthetic Cubism

Glass and Bottle of Suze, 1912

Still Life with Bowl and FruitParis, winter 1912

Woman in an Armchair, 1913

Guitar, 1913

The Card-Player, 1913-1914

Pipe, Glass, Bottle of Vieux Marc, spring 1914

Still-life with Fruit-dish on a Table, 1914-15

Harlequin, 1915

7. Between the Wars

Portrait of Olga in the Armchair(안락의자의 올가의 초상), 1917

올가는 러시아 육군 대령의 딸로서 1912년에 디아기레프 발레단에 있었다.
피카소는 1917년 이탈리아 여행 중 올가를 만나서 이듬해인 1918년 7월에 결혼하였다.
피카소가 올가를 맞이한 후부터 그 생활은 규칙적이 되었고, 의복도 단정하게 변하여
그의 벗들을 놀라게 했다. 피카소는 이러한 생활을 하는 동안 어머니와 자식간의
애정 어린 작품들을 많이 그렸다. 이 작품에서도 다분히 앵그르풍의 리얼리즘이
보인다. 이 밖에도 올가를 그린 작품들이 있으나 그 표정들은 한결같이 우수에 잠겨
있다.

Harlequin with a Guitar, 1918

Pierrot, 1918

The Bathers, 1918

Still-Life, 1918

Sleeping Peasants, 1919

Three Musicians, 1921

Mother and Child, 1921-22

Deux femmes courant sur la plage(La course), 1922

The Pipes of Pan, 1923

Paul(Picasso's Son) as Harlequin, 1924

Studio with Plaster Head, 1925

Three Dancers, 1925

Woman with a Flower, 1932

Girl Before a Mirror, 1932

The Dream, 1932

"그림이란 당초부터 이미지 되어지는 것도 아니며 정착되어지는 것도 아니다.
제작을 하다보면 점점 떠오르는 상념을 좇아서 완성했다고 생각하면 또다시 앞이
나타나 그림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변화해 가는 것이다. 그림이 그것을 보는 사람을
통하여 비로소 생명력을 지니게 되는 것은 그래서 자연스럽다."
1923년 피카소는 이 해에 졸고 있는 여인을 많이 제작했다. 피카소의 말대로 정면상
과 프로필이 일체가 되어 감상자의 기분에 따라서 변화를보여 주고 있다.
<꿈>은 그것들 시리즈 중의 걸작이다. 정면상과 프로필의 이중상은 형체의 묘미와
동시에 현실과 꿈의 이면성도 암시하고 있을 것이다.

Death of the Toreador, 1933

Interior with a Girl Drawing, 1935

Portrait of Dora Maar, 1937

Weeping Woman, 1937

<우는 여인>은 <게르니카>의 습작에서 시작된다. 피카소를 매료시킨 주제로서
<게르니카> 완성 후에도 피카소는 여러 점 제작했다. 피카소는 여인들에게 많은 변화
를 주어 작품을 만들었다. '잠자는 여인' '춤추는 여인' '독서하는 여인', '거울을 보는
여인', '포옹하는 여인', '울부짖는 여인' 등 그 변화는 더 많다. 배경의 검은 색 속에서
선명하게 얼굴과 손이 부상하고 있다. 눈물을 그린 것도 사실적인 것을 피하고 추상적
이며, 기호적 눈물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튀어나오는 것을 매우 알기 쉽게 표현하고
있다. 아동화같이 소박하고 그리고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Marie-Therese Walter, 1937

Portrait of Maya(Picasso's Daughter) with a Doll, 1938

Girl with a Boat(Maya Picasso), 1938

Self-portrait

화가와 모델 1

화가와 모델 2

새를 잡아먹는 고양이

"나는 전쟁을 그린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카메라처럼 한 가지 주제만을 좇는
화가가 아닌 까닭에, 그러나 내가 그린 그림 속에 전쟁이 존재한 사실은 부정할 수
없고, 필경 후세 역사가들은 내 그림이 전쟁의 영향 아래서 변화한 것이라고 지적할
것이나, 이 또한 내 알 바가 아니다."
제 2 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45년에 피카소는 이와 같은 피카소다운 말을 남겼다.
피카소는 1930년 말, 브뤼겔이나 고야의 <전쟁의 참화>를 거쳐 이어지는 유럽의
정신적 위기에 대한 경고라도 하듯이, 전쟁의 암시적 주제를 많이 택한 것이다.
피카소에 있어서 역사는 이러한 무수한 희생에 의하여 성립되는 시간의 경과일 뿐이다.

여인과 개

Piano

8. Picasso the Legend

Guernica, 1937

1937년 스페인의 소도시인 게르니카는 나치 독일 공군기들에 의해 3시간 동안 무려
32t의 폭탄 세례를 받았다. 게르니카는 스페인 내전 당시 프랑코 장군의 우익 쿠데타에
가담해 이같은 참변을 당한것이다. 이 폭격으로 게르니카는 폐허로 변했고 독일 공군기
들은 피신하는 주민들까지 기관총으로 공격했다고 한다. 당시 프랑스에 있던 피카소는
조국에서 벌어진 학살행위를 고발하고자 2개월 만에 <게르니카>를 완성해 그 해 파리
국제 전시회에 공개했다. <게르니카>는 그 후 학정에 대한 저항과 화해의 상징이 되었
으며, 침묵하던 세계의 지식인들이 직접 스페인으로 달려가 총을 들게 했다.
그림에는 말에 올라탄 사람 아래 여러 사람들이 짓밟혀 있는 것이 보인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말은 히틀러의 나치 정권을 의미하며 말 위의 사람들은 프랑코 장군의
군부 쿠데타 세력을 의미한다고 한다. 말을 탄 사람의 한 눈은 정면을 바라보고 있지만
다른 한 눈은 옆을 보고 있다. 처음 세계는 공습을 주도한 히틀러 정권만을 비난했다.
피카소는 이중적인 인물화를 통해 게르니카 공습이 실제로는 스페인 군부의 사주에 의한
것임을 웅변했던 것이다. 이처럼 피카소는 사물을 다양한 각도에서 보여줄 때 숨겨진 진실
을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피카소는 여러 각도에서 본 사물을 모두 모아 그림으로
표현했다. 피카소의 입체화는 당시 지식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친 아인슈타인의 상대
성 이론과 부합되는 것이기도 하다. 여러 각도에서 바라 본 3차원의 공간을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모음으로써 4차원을 구현했기 때문이다. 피카소는 이러한 종합적인 입체화의
방법을 정립한 뒤 "드디어 우리는 완전한 형태를 그렸다."고 말했다 한다.

Guernica, detail, 1937

Night Fishing at Antibes, 1939

La Alborada(아침의 곡), 1942

오바드(aubade)란 말은 어떠한 사람에게 경의를 나타내기 위하여 그 집 앞에서 새벽에
연주하는 주악을 말한다. 그러나, 이 그림이 주는 인상은 <아침의 곡>이라기보다 오히려
어둡고 불길하다. 옆으로 누운 사람은 죽은 사람 같고, 만돌린을 손에 쥐고 있는 사람은
꼬박 밤을 새우고 외롭게 보인다. 1942년 피카소는 61세로서 이 해에 <옆으로 누운
나부> 연작을 발표했다. 그것은 피카소 작품에서의 얼굴의 경우와 같이 이중상으로서
구성하고 있다. 이 점이 바로 피카소의 일관된 조형의 수단으로 되어 있다.
이 작품은 후일에 제작된 걸작 < 납골당>의 선구적 작품으로서 주목된다.

The Charnel House(납골당), 1944~45

<게르니카> 이후 가장 주목할 작품이다. 1946년 2월 파리 근대 미술관에서 개최된
'예술과 혁명'전에 출품한 작품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프랑스에서 전사한 스페인
무명 전사를 추도하는 전시회이다. 납골당의 내부는 회색과 보라, 푸른색의 3색으로
요약하여 이 정적한 톤은 <게르니카>의 경우와 같이 색채의 잔소리를 극도로 억제하고
정신적 분위기를 강조하고 있다. 묶여진 팔, 어린 아기의 목, 겹겹이 쌓인 시체더미
위에 지금 새벽이 찾아오고 있다. 그들의 죽음 위에 찾아드는 아침은 자유의 커다란
아침이다.

Massacre in Korea, 1951

9. Late Works

지중해의 풍경, 1952

Jacqueline with Flowers, 1954

Jacqueline in the Studio, 1956

Las Meninas(after Velazquez, 궁녀들), 1957

벨라스케즈의 <궁녀들>은 프라도 미술관의 보물이며, '회화의 신학'으로까지 평가된다.
1952년 계획하여, 실제로 착수한 것은 1957년 이었다.
이 해에 피카소는 연작 44점을 제작하였다. 피카소는 "같은 주제에 의한 연작으로
최초의 두 점 중의 한 점, 최후의 두 점 중의 한 점을 최고의 작품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 작품은 1957년 8월 17일에 완성한 첫 번째 작품으로 검정, 흰색, 회색
만으로 처리하였으며, 벨라스케즈의 원작과는 화면의 규격이나 내용에 있어 약간의
변화를 주고 있다.

The Doves, 1957

Luncheon on the Grass. After Manet, 1961

Bust of a Woman with a Hat, 1962

The Rape of the Sabine Women, 1962-63

The Dawn, 1965

Cavalier with Pipe, 1968

Female Nude and Smoker, 1968

The Kiss, 1969

Rembrandtesque Figure and Cupid, 1969

Vieil homme assis, Mougins, 1970

Portrait of Man in a Hat, 1971

Self-portrait,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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