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미술사 참고자료/야수파와 입체파

서양 미술사54 큐비즘(입체파) - 조르쥬 브라크

AH101 2012. 2. 16. 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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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 미술사 - 54(입체파(立體派:Cubism) - 세잔을 완성한 조르주 브라크)

   

 

Terrace of Hotel Mistral,L'Estaque [and Paris], autumn 1907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1882~1963)는 파리 근교
아르장트유 출생이다. 피카소와 함께 큐비즘을 창시하고 발전시킨 작가로서,
20세기 미술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건축장식에 종사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린시절부터 그림을 좋아했으며, 1900년 파리로 나와 아카데미 쥴리앙에 들어
간 후 포비슴의 감화를 받았다. 그러나 1907년부터는 세잔의 구축적(構築的)인
작풍에 열중하여 이를 연구하고, 비슷한 생각을 가진 피카소와 알게 되어, 협력
하여 큐비즘을 창시, 이 획기적인 사고(思考)를 분석적 큐비즘의 단계에서 종합적
큐비즘으로 전개하였다. 또한 1912년경에는 P. 클레와 그림물감에 모래를 섞는
등 새로운 기법을 개발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징집되어 부상하였으나, 소집이
해제된 1917년부터 다시 왕성한 작품 활동을 계속하였다.
피카소가 카멜레온처럼 자주 변모하는 데 비해 그는 자신의 본래 개성에 따라 차분히
큐비즘의 가능성을 탐구하였다. 초기에는 풍경을 주로 그렸고, 중기 이후는 정물·실내·
인물 등을 주제로 삼았는데, 그 구성의 밑바탕에는 항상 이성(理性)과 감각의 미묘한
조화를 최대로 중시하는 프랑스인적인 전통이 풍긴다. 조용하고 차분하게 가라앉은
색채감은 만년에 이를수록 더욱 우아한 세련미를 더하였다.

Houses at L'Estaque, 1908

세잔의 영향을 받아 그린 이 그림에서 브라크는 대상들의 색상차를 축소하여 사물의
색채적 특징보다는 형태적 특징을 강조하였는데, 그의 대상들은 마치 기하학적 도형으로
환원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그림을 보고 집들이 입방체(cube)
처럼 보인다고 했다. 큐비즘(Cubism)이란 명칭이 생긴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브라크는 세잔이 발견한 것이 입체주의였다는 사실을 알고 원시적인 방법으로 실험하다가,
세잔이 생을 마감한 곳에서부터 그의 의도를 확대·해석하여 1908년에 <에스타크의 집들>
을 그렸다. 세잔은 에스타크의 장면을 여러 점 그렸는데, 브라크는 에스타크 언덕에
있는 집들을 그리면서 세잔과는 달리 집들로만 캔버스를 가득 채움으로써 세잔이 미처
완성하지 못한 입방체 형태의 구성주의 그림을 완성했다.

브라크는 언덕의 집들을 주제로 수평선을 제거했으며, 집과 나무의 형태들을 단순화
시켜 기본적인 형태들로 제한했다. 입체주의에 대한 브라크의 이해는 '새로운 공간의
구체적인 표현으로 보이는 공간'이었으며, '사물들을 서로 떼어놓는 것'이었다.
세잔과 브라크의 그림을 비교하면, 세잔은 인상주의 예술가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빛이
사물에 반사하는 색들을 사용한 것인 데 비해, 브라크는 마티스의 야수주의 그림에 반발
하여 단색주의에 더러 회색을 사용하였다. 브라크는 세잔이 삼차원의 사물을 이차원에
재현하면서 삼차원적으로 나타내려고 한 독특한 회화방법을 시도했음을 알아챘으며,
세잔의 의도가 좀 더 과격한 방법으로 웅대하게 나타나도록 했는데 전통주의 회화의 관점
에서 보면 정도를 매우 벗어난 행위였다. 그때부터 그의 그림은 무엇을 그렸는지 알아볼
수 없게 사물들을 큐브 모양으로 부수고 또 부수어서 거의 추상으로 변해 갔다.
피카소와 함께 작업하면서 그는 더욱 분석적인 방법으로 입체주의를 진전시켰지만 피카소
와 함께 작업하지 않았더라도 혼자 능히 성취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물에 대한 이 같은 분석적 시도는 마르셀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었고, 무미건조한
분석적 입체주의에 그 특유의 재담을 보태는 방법을 생각하게 했다.
입체주의로 해서 20세기 회화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Le Viaduct de l'Estaque, 1908

Viaduct at L'Estaque, Paris, early 1908

Large Nude, Paris, spring 1908

Musical Instruments, Paris, autumn 1908

Fruit Dish, Paris, winter, 1908-09

Castle at La Roche-Guyon, La Roche-Guyon, summer 1909

Fishing Boats, 1909

Harbor in Normandy, Le Havre and Paris, May-June 1909

Bottle and Fishes, L'Estaque, autumn 1910

Violin and Candlestick, Paris, spring 1910

Violin and Pitcher, Paris, early 1910

피카소와 브라크의 대상들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심하게 해체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개발해낸 방법 자체를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인지 그들에겐 소재가 그다지
중요한 것이 못되었다. 흔히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정물이라든지 친한 친구들이 그들의
대상이 되었는데 그나마도 제목을 붙이지 않아서 그들의 그림을 구입했던 화상들이 그림
의 제목을 달아주었다. 그래서 위의 <바이올린과 주전자>처럼 그림의 소재가 곧 제목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Man with a Guitar, Ceret, summer 1911

Le Portugais(The Emigrant), Ceret [and Paris], autumn 1911-early 1912

분석적 입체주의 시대의 브라크의 작품은 피카소의 그림과 거의 구별이 안되는 동질성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1911년에 이르면 피카소와 같은 듯 하면서도 다른 브라크의
요소가 차차 엿보이기 시작한다. 이 화면에서도 보게 되는 숫자나 문자의 도입이 그것
이다. 브라크의 집안은 조부 때부터 간판을 그리는 직업으로 생계를 삼고 있었다.
그래서 브라크도 어릴 때부터 페인트를 칠하고 간판을 그리는 기법을 익히게 되었다.
1900년에 파리로 간 것도 실은 그러한 간판 그림의 기법을 더 닦기 위해서였다.
그러다가 화가의 길로 접어들면서 그 전의 그의 간판 기법이 입체주의 작품에 반영된
것이다. 이 작품의 문자와 숫자의 도입은 앞서와 같은 배경과 관련을 갖는 것으로 분석
되고 있다. 이 작품은 브라크가 마르세유의 어느 술집에서 만났던 포르투갈 출신의
기타리스트를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입체주의 이후에 기타를 비롯하여 만도린,
바이얼린 같은 악기를 많은 화가가 모티프로 즐기게 된 것은 브라크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Fruit Dish, "Quotidien du Midi", Sorgues, August-September 1912/Oil and sand on canvas

Man with a Violin, Paris, spring 1912

Fruitdish and Glass, September 1912, Pasted papers and charcoal on paper

Still Life BACH, 1912/Pasted paper and charcoal on paper

Bottle, Newspaper, Pipe, and Glass, 1913,Charcoal and various papers pasted on paper

Pedestal Table, Paris, early 1913,Oil and charcoal on canvas

Woman with a Guitar, Sorgues, autumn 1913, Oil and charcoal on canvas

Glass, Carafe and Newspapers, 1914, Pasted papers, chalk and charcoal on cardboard

Still Life on a Table: "Gillette.", Paris, early 1914, Charcoal, pasted paper, and gouache

Fruit on a Tablecloth with a Fruitdish, 1925

Still-Life:Le Jour, 1929

Black Fish, 1942

Interior with Palette,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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