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미술사22 낭만주의 제리코, 들라크루아

   

제리코(Jean Louis Theodore Gericault: 1791~1824)

1791
프랑스 루앙에서 출생하였다. 19세기 프랑스의 대표적인 화가로
낭만주의 회화의 창시자이다. 1808 파리에서 C.베르네의 문하에 들어갔으나
2
P.N.게랭의 제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아카데믹한 정통에 불만이
있었고, 동시대인으로서는 C.I.H.그로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으며, P.P.
루벤스에게 매료되었다. 1816 이탈리아에 가서 고대의 작품과 르네상스의
화가들을 연구하고, 미켈란젤로의 영향을 크게 받아 귀국 대작
《메두사호() 뗏목》(1819) 그려 일약 유명해졌다.
작품은 젊은 F.V.E.들라크루아를 감격하게 하였고, 들라크루아에 의한
낭만주의 확립의 위대한 도화선이 되었다. 메두사호의 구조된 선원들에게
실정을 듣고 뗏목을 만들게 하는 실감을 살린 그림은 격렬한 동세(動勢)
강한 명암과 색채효과 극적인 정경을 표현한 박진감에 있어 때까지의
회화에서는 없던 극적 요소로 가득 있다.
1820
영국으로 건너간 영국의 풍경을 수많은 석판화로 묘사하고, 말을
좋아하고 빨리 달리는 동물의 속도를 좋아하여 동작을 예리하게 묘사하였다.
작품으로서는 유화는 얼마 되지 않으나 그리스 독립전쟁·노예제 반대
시국적인 것을 주제로 소묘에 뛰어났고 석판화를 참다운 예술품으로 끌어
올린 공로자이기도 하다.
1822
런던에서 돌아와 얼마 동안 가슴을 앓다가 33세로 파리에서 죽었다.

*An Officer of the Imperial Horse Guards Charging(왕실 근위대의 장교),1812*

*전쟁터를 떠나는 부상병,1814*

*에프손의 경마,1821*

*The Raft of the Medusa,1819*

그림은 배가 침몰한 뗏목을 타고 죽음과 굶주림 속에서 바다를 표류
하다가 구조되는 선원들을 그린 작품이다.
프랑스 메두사호는 1816 세네갈 해상에서 파선을 뗏목에 사람들을
태워 바다로 내보냈는데, 결국 선원과 승객 149 15명이 기적적으로
살아남게 되는 일이 벌어진다. 무자격 선장이 운행을 탓에 일어나게
사건은 굶주림, 병마, 갈증, 악천후를 겪으며 사람들의 비상한 관심과
동정을 일으켰다. 제리코는 작품을 그리기 위해 파선의 몸체를 연구하고
실제로 목수를 시켜 뗏목을 만들게까지 했다. 또한 살아남기 위해 동료의
살을 먹은 이야기며, 죽어 가는 사람을 묘사하기 위해 제리코는
병원에서 시체와 병자의 모습을 관찰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림을 보면 흐린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고, 돛을 배는 강풍과 높은
파도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다. 터번을 남자는 사람들이 떠내려가지
않도록 붙들어매고 있으며, 뗏목 여기저기에는 시체들이 흩어져 있다.
멀리 보이는 수평선에 돛대로 보이는 물체가 나타나자 물통에 올라가 옷을
흔들며 구원의 요청하는 사람들이 보이며, 환자들도 이에 일어나려 애쓰는
장면들이 보인다. 제리코는 그림에서 메두사호의 뗏목에 사람들이
표류 끝에 구조를 받게 되는 순간의 환희를 담으려고 했다.
거대한 캔버스에 담긴 작품은 대각선이 서로 교차하는 동적인 구도를
가지고 있으며, 각각의 인물들의 동작 또한 개성적이며 다양하다.
1819
살롱을 발칵 뒤집어놨던 작품은 호평과 동시에 정치적인 입장에
따라 악평을 함께 받으면서 제리코는 우울증에 걸렸다고 한다.
<
메두사의 뗏목> 후에 들라크루아의 낭만주의 미술을 절정에 이끌게
만드는 촉매 역할을 하는 위대한 작품이다.

*Portrait of a Kleptomaniac, 1820*

*Man with Delusions of Military Command, 1819-22*

*The Woman with Gambling Mania,1822*

1824 제리코는 33살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였다. 그는 생의 마지막
시기인 1822년에서 1823 정신과 의사이자 친구인 조르주의 부탁으로
미친 사람들을 화폭에 담았다. 당시 정신 의학계에선 미친 사람들은 얼굴 모습
골상학에 있어서 특정한 유형을 보여준다고 믿었기 때문에, 환자들의 얼굴을
초상화로 남겼다.
작품은 시기에 그려진 것으로 도박에 편집증을 갖고 있는 여인을 그린
것이다. 여인은 자의식을 드러내는 대신,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다.
제리코는 초점을 잃고 멍한 눈으로 정면을 응시하는 여인의 모습에서 정상인과
다른 광인(狂人)들의 심리적 불안과 망상까지 포착하고 있다.
제리코는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들, 도박과 술로 황폐해진 삶을 추스르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차가운 시선으로 비하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따뜻한 연민의
시선으로 그려냈다.

*Madwoman*

들라크르와(Ferdinand Victor Delacroix: 1798~1863)


프랑스의 화가이며 샤랑트현() 모리스 출생이다.
명문가 외교관의 아들로 명석하며 정열적인 상상력을 타고났다.
16
세에 고전파 화가인 P.N.게랭에게 그림을 배웠고, 1816 관립미술
학교에 입학하였다. 이때부터 루브르미술관에 다니면서 P.P.루벤스
P.
베로네제 등의 그림을 모사하였고, T.제리코의 작품에 매료되어 현실묘사
에도 노력하였다. 1819 제리코가 발표한 《메두사호() 뗏목:
Raft of the Meduse
》은 그에게 낭만주의를 수립하는 결정적인 감격과
영향을 주었다. 그리하여 22 최초의 낭만주의 회화인 《단테의 작은 배》
발표하였다. 여기에서 엿볼 있는 극적인 표현은 다비드풍() 고전
주의에 대한 도전이라고 있다.
계속하여 24년에는 그리스의 독립전쟁에서 취재한 《키오스섬의 학살》을
발표하여 '회화의 학살'이라는 혹평을 받기도 하였지만, 힘찬 율동과 격정적
표현은 그의 낭만주의를 더욱 확립시켰다.
더욱이 이때 살롱의 똑같은 방안에 진열된 영국의 J.콘스터블의 풍경화의 밝은
색조에서 자극을 받고, 자기의 작품을 밝게 새로 칠하여 한층 강렬한 효과를
나타냈다. 다음해 런던에서 R.P.보닝턴, J.P.로런스 등과 사귀는 동안 더욱더
빛깔의 명도와 심도를 증가시켰다. , 자신과 낭만주의 회화의 성숙기를
맞이한 것이다.
수년 간의 작품 중에서 《사르다나파르의 죽음》(27)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31) 대작이다. 후에도 계속 진전하여 1832 모르네
백작을 수반으로 하는 외교사절단을 수행한 모로코 여행을 통해, 근동 지방의
강한 색채와 풍속에서 깊은 감동을 받고, 그의 예술에 대한 새로운 눈을 뜨는
동시에 후의 낭만주의 회화에서의 동방취미 풍속화의 기반을 닦았다.
명작 《알제리의 여인들》은 여행에서 얻은 훌륭한 성과였다.
뿐만 아니라 이때를 중심으로 초기에 있었던 외면적인 격렬한 맛이 점차
내면화되었다. 작품으로는 이상에서 말한 대표작 이외에 초상화, 성서에서
제재를 택한 , 말이나 사자 등의 동물을 그린 것도 많다.
더욱이 문학적·음악적인 정서도 풍부하여 셰익스피어, 바이런, 괴테 등의 작품을
일찍부터 가까이하였고, 음악가 F.리스트와 당시의 여성 문학가이던 G.상드와도
친하였다.

이와 같은 풍부한 재능과 환경은, 그에게 회화작품 외에도 오늘날 미술사상
(
美術史上) 귀중한 문헌으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는 뛰어난 예술론이나 일기
등을 집필하게 하였다.
그의 예술형성에 전술(前述) 화가 이외에도 16세기 베네치아파 화가인
미켈란젤로나 고야도 영향을 주었으며, 한편으로 자신의 영향은 후의
낭만주의 회화를 물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E.드가와 A.르누아르에게 직접
연결되는 점도 많다.
후반기에는 교회와 파리의 공공건축물을 위한 대벽화 장식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국회 하원의 《국왕의 방》, 국회 하원도서관, 국회 상원도서관
파리시청의 《평화의 방》, 루브르궁전의 《아폴로의 방》등을 잇달아 그렸고
만년에는 동판화와 석판화 제작에도 뛰어난 솜씨를 보였는데, 흑백의 대조가
강조되고 한층 환상적으로 표현하는 기교로써 《파우스트 석판화집》
《햄릿 석판화집》등의 걸작을 남겼다.

*앉아 있는 누드, 로즈 ,181720*

들라크루아는 나부를 주제로 많은 작품들을 그리지는 않았으나
<
앉아 있는 누드, 로즈 > 비롯한 점의 누드화를 남겼다.
작품은 25 그린 나부 습작 중에서 가장 치밀하고 정확하게
그려진 작품으로, 입체감있는 인체의 표현이 사실감있게 그려졌다.
그림의 실제 모델은 "로즈" 알려져 있다.
받침대 위에 자연스러운 포즈로 앉아있는 여인의 자세는 고전주의
경향을 탈피한 흔적이 엿보인다. 들라크루아는 실제 모델이 주는
인상이나 느낌을 건강한 육체의 아름다움을 통해서 솔직하게 표현
하였다. 배경은 당시 신고전주의자들의 작품처럼 매끈한 것이 아니라
물감의 농도를 달리해서 칠해졌는데, 고르지 않은 느낌이 독특하다.
이는 모델의 모습을 더욱 강하게 부각시키는 효과와 함께 단조로운 화면
구성을 깨고자 하는 화가의 의도로 비쳐진다.

*The Barque of Dante,1822*

*Orphan Girl at the Cemetery,1824*

*키오스 섬의 학살,1824*

작품은 1824 번째로 살롱에 입선하였는데, 당시 같은 살롱에
출품했던 앵그르의 <루이 13세의 서원> 매우 대조적인 화풍을 보여
주면서 논란을 일으켰다. 당시 프랑스 화단은 앵그르가 이끄는 고전주의
계열과 들라크루아가 이끄는 낭만주의 계열이 팽팽히 맞서고 있었다.
그림은 그리스의 키오스 섬이 터키 군의 습격을 받아 민가는 모두
태워지고, 남자는 살육 당했으며, 여자들은 약탈 당하거나 죽임을 당하게
되는 사건을 다루고 있다. 들라크루아는 잔인한 사건에 대한 경계심과
분노를 담아 그리스를 구원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그림을 완성하게
되었다. 그림 전면에는 지쳐서 누워버린 키오스 사람들을 체념과 고통
고뇌가 뒤섞인 표정으로 묘사하고 있다. 또한 여자를 납치해가려는 터키
기마병들의 잔인한 장면을 화면 왼쪽에 담아, 처참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사실감을 부여하였다. 이들 뒤로 불타오르는 민가와 전투로 피폐해진 황량한
들판이 펼쳐져 있으며, 검붉은 바다와 황혼이 지는 짙은 저녁 노을이 보여주는
우울함과 적막함이 그림의 주제를 더욱 효과적으로 받쳐주고 있다.
죽은 여인의 젖을 물고 있는 아기와 여인들의 공포 섞인 울부짖음, 눈을 뜨고
죽은 이의 멍한 표정을 묘사하면서, 들라크루아는 학살의 비참함과 공포
비인간적인 죽음을 불타오르는 듯한 강렬한 색채를 사용해 더욱 생동감 있는
주제로 재현해 내었다.

*The Death of Sardanapal,1827*

작품은 사르다나팔의 비참한 최후를 다루었으며, 환상적인 이국 정서
사랑과 비극이 어우러지는 흥미로운 그림이다.
기원전 7세기경 앗시리아의 왕인 사르다나팔은 적에게 포위되어 2
정도를 궁전에 갇혀 살게 되었다. 적들이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궁전에
쳐들어오기 전에 사르다나팔은 그의 애첩들과 애마를 모두 죽이고, 그가
가지고 있던 보물들을 군데에 모아 불태운다.
그리고 스스로도 속에 타죽게 되는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그림은 이러한 이야기를 들라크루아만의 상상력을 발휘하여 환상적으로
재현해내고 있다. 사르다나팔 왕이 기대어 누워 있는 붉은 융단 침대
주위에는 관능적인 나체의 여인들이 살해당하는 광란의 장면이 펼쳐지고
있다. 코끼리 머리 장식은 붉은 빛의 피로 물들어 있으며, 방바닥에 온갖
보물들이 어질어 있는 화면 왼쪽에는 흑인 노예가 백마를 끌고 안으로 들어
오려 하고 있다. 그림은 오른쪽 아래에서 왼쪽 위로 펼쳐지는 대각선 구도
속으로 격정과 죽음에 대한 고통을 미켈란젤로의 형식미로 표현했으며
루벤스의 영향을 받은 강렬한 색조를 통해 시각적인 자극을 불러 일으키는
효과를 내고 있다. 광란의 장면을 지켜보는 사르다나팔의 우울함과
더불어 죽음에 몸을 뒤트는 여인의 풍만한 관능미는 에로티즘과 공포를
동시에 느끼게 만들면서, 사르다나팔의 이야기를 뛰어난 환상미로
표현하고 있다.

*Liberty Leading the People,1830*

그림이 완성되었던 1830, 7 28일에는 프랑스에서 7 혁명이
일어났다. 7 혁명은 3 동안 계속 되고, 8 3일에 이르러 필립이 국왕에
즉위하였다. 이런 사건으로 인해 자유에 대한 프랑스 시민들의 열망은 증폭
었으며, 들라크루아는 이러한 열망을 화폭에 그려내려는 강렬한 열정을 품게
되면서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라는 작품을 완성하게 된다.
그림의 주제는 제목이 말해주는 그대로 "민중을 이끌어 가는 "자유의
여신" 말하고 있다. 혁명에 관한 정치적 관심에서가 아니라, 해방되어 가는
"
자유" 대한 공감이 그림에서는 사실적이며, 역동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혁명이 만드는 풍경을 전면에 담으면서도 근본적인 핵심은 "자유의 여신"
있는데, 그녀를 프랑스 삼색기를 손에 들고 전진하는 모습으로 표현한
것에서도 나타나 있다. 반쯤 흘러내린 사이로 보이는 여신의 풍만한
가슴은 관능적인 육체미라기보다는 강렬한 의지를 지닌 건강미를 먼저
생각나게 한다. 뒤편에는 귀족으로 보이는 남자가 총을 들고 결연한 자세로
뒤따르고 있으며, 어린 소년도 권총을 들고 환희의 소리를 지르는 표정에서는
혁명이 가져다주는 흥분과 희망 등을 엿볼 수가 있다. 한편 죽은 이들이 바닥에
어지럽게 널려 있고, 후면으로 피어 오르는 안개와 전체적으로 어둡고 무거운
색채를 배경으로 삼아 밝게 빛나는 여신과 강렬한 대비 효과를 일으키고 있는데
이는 혁명의 숭고함과 신성함을 더욱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하얀 양말을 신은 나부,1830*

화면의 대각선상으로 누워있는 여인은 침대 위에서 나른한 표정으로
양말만 걸친 채로 묘사되었다. 밝은 광선이 가슴으로부터 전신을 감싸고
하얀 침대 시트의 반사로 인해 모델의 모습은 강하게 부각되는데, 빨간 커튼이
만들어내는 화려하고 강렬한 배경으로, 관능적이고 아름다운 나부의 몸은
한결 돋보인다. 그림 전경을 향해 튀어나올 듯한 다리에 신겨있는 하얀
양말은 그림의 중요한 액센트가 되는데, 그것은 그림의 모델의 신분이
평범한 여인은 아닐 거라는 추측과 더불어 관능미를 불러일으킨다.
대범한 붓터치와 간결한 선처리로 표현되어 있으면서도 빨강과 짙은 녹색의
배합이 절묘하게 결합되어 뛰어난 색채 효과를 내고 있는 작품이
매끄럽게 흐르는 여인의 몸을 통해 새로운 낭만주의의 정신을 이어가려는
화가의 열정이 드러나 있다.

*Algerian Women in Their Apartments,1834*

*Self-Portrait,1837*

*Fanatics of Tangier,1837-38*

*프레드릭 쇼팽의 초상,1838*

*The Entry of the Crusaders into Constantinople,1840*

*제니 귀유의 초상, 1840*

*Pieta,1850*

*Heliodorus Driven from the Temple,1854-61*

*Arab Saddling his Horse,1855*

*Odalisque, 1857*

*The Abduction of Rebecca,1858*

*Arab Horses Fighting in a Stable,1860*

*Arabs Skirmishing in the Mountains,18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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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21 낭만주의:고야

   

8. 낭만주의 미술(Romantic Art)


19
세기, 산업혁명의 결과 급속히 도시화가 진전되면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상이 너무 인공적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당시 정열과 상상력의 자유를 제일로 여겼던 낭만주의 미술가들은 무기력한
일상을 경멸하였다. 이러한 생각이 확대됨에 따라 사람들은 자연이나 자유
야성적이고 기교하고, 이국적이고, 초월적인 것들에 관심을 쏟게 되었다.
당시 열정적인 젊은이들은 무기력한 현실과 신고전주의의 형식주의에 견딜수가
없었다. 아카데미즘과 프랑스의 구체제에 대한 반발로서 등장한 것이 낭만주의
미술이다.

낭만주의 미술은 합리주의에 반대하여 객관보다는 주관을, 지성보다는 감정을
중요시하고, 개성을 존중하여 자아의 해석을 주장하고, 격정적·정서적으로
자유를 구하여 상상하는 대로 무한한 것에 동경한다는 전반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낭만주의 예술가들은 아카데미즘 특히 나폴레옹 제정을 정점으로 대혁명
전후에 걸친 신고전주의의 딱딱하고 까다로운 규범에 거세게 반발하였다.
그리하여 그리스나 로마적인 고전을 버리고 중세와 민족적 과거, 특히 고딕
양식을 지향하게 되고, 오리엔탈리즘을 단순한 이국취미 이상으로 승화시켰으며
자기의 상상력과 숭고한 비장감, 조국애, 인간과 자연과의 융합감 등의 감정
표현, 드라크로와가 말한 '순수한 환상(幻想)' 자유분방(自由奔放)하게
발휘하고 표출시켜나갔다. 이렇게 해서 그들 특히 프랑스의 낭만파들은 이념
보다는 현실에 밀착해서 시사적인 문제나 역사적인 사건, 또는 셰익스피어나
바이런 등의 문학에서 얻은 제재에 정열을 기울여 서사적·서정적인 파토스적
세계를 즐겨 그려내게 되었다.

이와 같이 하나의 시대정신이며, 운동인 낭만주의는 미술상에서는 고전주의
대립하는 것이지만, 고전적 양식 또는 바로크 양식과 같은 독자적인 명백한
양식을 만들어낸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미술의 분야에서
각기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낭만주의 회화에서도 본질적인 것은 그려지는 , 주제보다는 그리는 방법
주체적 방법 또는 주관적 표현에 있다. 부드럽고 생생한 표현양식은 고전주의
와는 전혀 대조적으로 극히 유동적이고 약동적이며, 극적인 움직임과 안에서
우러나오는 힘의 인상을 만들어 낸다. 형식보다는 표현이 선행되고, 딱딱한
선이나 단정한 형태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생생한 것으로서의 산뜻하고 강렬한
색채를 우선시킨다. 이리하여 오로지 아름다운 것만이 아니라 추한 것까지도
그려내는 것이다.


고야 (Francisco de Goya:1746~1828)

에스파냐의 펜테토도스에서 출생했다. 1766년경 마드리드의 F.
바이에우(l7341795) 문하에 들어갔고, 98 궁정 수석화가가 되었다.
작풍은 대체로 시기로 나눌 있다.
1771년부터 1794년까지 후기 로코코의 작풍과 이후의 것이다.
후기 로코코 시대에는 프랑스 18세기의 '아연화(雅宴畵)'영향으로 왕조풍의
화려함과 환락의 덧없음을 다룬 작품이고, 융그스와 티에폴로로부터
다채로운 색채 기법을 배웠고 벨라스케스, 렘브란트, 보시 등의 영향을
받으면서 차츰 독자적인 양식을 형성하였다.
그는 일생동안 인물을 그렸는데, 초상화에서 인물화로 전환하였다.
1800
[카를로스 4세의 가족:The Family of Charles ]에서는 당시
궁정사회의 인습과 무기력, 허명(虛名) 퇴폐가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유명한 [옷을 입은 마야:Maja vestida/The Clothed Maja], [옷을 벗은
마야:Maja desnuda/The Naked Maja]에서도 에스파냐의 전통적 여성이
잠자는 비너스라는 고전적 주제에서 벗어나 강한 리얼리티로 표현되어 있다.
위험하고 관능적인 여성 표현 고야의 인간관은 차차 악마적 분위기에 싸인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경향에서 일대 전환한 동기는 청각을 잃을 정도의
중병을 앓은 체험과 나폴레옹군의 에스파냐 침입으로 일어난 민족의식이었다.
결실이 후일 인상파의 마네에게 영향을 [1808 5 3일:The 3rd
of May 1808:The Execution of the Defenders of Madrid]
연작판화
[
전쟁의 참화:Los desastres de la guerra]이다. 특히 후자에는 82장의
흑백 에칭에 살육, 광기, 허무, 폭행이 철저히 재현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종류의 판화 카로, 피라네지 등에도 열중하였다. 그러나 다른 대표적 연작
판화인 [로스 카프리초스(변덕)Los caprichos](179698, 80)
[
디스파라테스(부조리)](l815~50, 15) 보면 고야의 작품 특유의 암담한
느낌이 에스파냐의 독특한 니힐리즘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는 것을 있다.
그는 그러한 니힐리즘 시각화를 시도하여 자신의 별장인 귀머거리의
(Quinta del Sordo)'
벽면을 수수께끼 같은 [검은 그림들:Pinturas
Negras]
등의 작품으로 장식하였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고야 만년의 '검은 그림'으로 불리는 계열이다.
장르는 정물, 종교, 풍속, 풍경 다양하며 환상성이 짙다.
[
자화상], [십자가의 그리스도] 2개의 '마하' 비롯한 고야의 대부분의 대표작
(
유화 114, 데생 470)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의 유해는 그가 그린 [ 안토니오 파투아의 기적]으로 유명한 마드리드의
안토니오 플로리다에 안치되어 있다.

*The Parasol, 1776-78*

*Blind Guitarist,1778*

*오스나 공작 부인*

오스나 공작 () 16, 7세기 스페인 최고의 실력가이며 귀족이다.
9 오스나 공작 부인은 자신이 베나벤데 여백(女伯) 공작이기도 했다.
그녀는 왕비와 알바공 부인과 더불어 당시 마드리드 사교계를 삼분(三分)
인물이며, 고야 최대의 후원자의 사람이었다. 알바공 부인을 스페인
전통파를 대표하는 마야적인 여성이라 본다면 오스나공 부인은 프랑스풍을
대표하는 여성이었다.
그림은 화려한 프랑스 모드 의상으로 성장한 부인을 로코코적인 아름다운
색조와 섬세한 터치로 그린 고야의 초기 초상화 중의 하나이다.
자연스럽지 못한 느낌을 주는 자세는 냉엄하고 지배적인 위엄을 지닌 모델의
성격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Maria Teresa de Borbon y Vallabriga,1783*

*The Count of Floridablanca, 1783*

*Portrait of the Wife of Juan Agustín Ceán Bermúdez, 1785*

*Marqueza Pontejos, 1786

*Spring (or The Flower Girls),1786-7*

*Charles III in Hunting Costume, 1786-88*

*Manuel Osorio de Zuniga,1788*

가련한 소년은 고야의 후원자이었던 아루다미라 백작의 둘째
아들이다. 고야는 인간의 추악상에도 극히 민감했지만, 순수하며 깨끗한
존재에 대해서도 무조건 반응을 보였던 인정 많은 화가였다.
어린이 본래의 청순함과 가련함을 존중하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가련한 소년을 하나의 실재자로서 표현했다는 점에서도 그의 높은 심성을
엿볼 있다. 작품은 고야의 초기 초상화의 특징적인 좋은 예이기도 하다.
밝은 빨간색의 대담한 색조와 명쾌한 윤곽은 당시 신고전주의의 표현 양식의
영향이 나타난 작품이다.

*The Family of the Duke of Osuna, 1788*

*St Francis Borja at the Deathbed of an Impenitent,1788*

*Portrait of Mariana Waldstein,1792*

*Sebastián Martínez, 1792*

*Dona Tadea Arias de Enríquez, 1793-94*

*Marquesa de la Solana,1794-5*

고야는 궁정화가로 활동하면서 왕과 귀족의 초상화를 그렸다.
1780
이래로 마드리드 사회에서 그는 가장 감각적인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로 명성을 얻었다. 작품 < 솔라나> 모델로 등장하는 카르피오
백작부인인 솔라나는, 고야가 그렸던 유명한 초상화의 모델이기도 했던
알바 공작부인의 친구이기도 했다.
자애로운 성격을 지닌 그녀는 희곡을 썼던 귀족에게서 수업을 받았으며
1795
아직 젊은 나이인 37살에 죽었다.
고야는 그가 속한 계층의 초상화를 그리는 방식으로 < 솔라나> 완성했다.
거의 실물 크기에 가까울 정도로 화폭 안에는 애매모호한 배경 처리로
환상적인 분위기가 더욱 고조되고 있다.
모델의 표정은 한결 고상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그녀가 입은 의상은 옷의 질감이
만져질 만큼 세밀하게 묘사되었다. 화려한 장신구나 옷을 걸치지 않은 그녀는
분홍색 리본만이 유일한 액세서리로 자리하고 있다. 그렇지만 은은한 필치가
느껴지는 그림에서도 죽음에의 징조가 옅게 드러나는데, 이는 솔라나가
실제로 아팠을 그려졌는지, 혹은 고야의 우울한 분위기를 반영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림은 프랑스 대혁명이 한창 진행되던 1792년과 1793
사이에 고야가 청각을 잃어버리게 되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완성되었다.

*The Duchess of Alba, 1795*

*Portrait of Francisco Bayeu, 1795*

*Duchess of Alba(알바 공작 부인),1797*

*Gaspar Melchor de Jovellanos, 1798

*St Gregory, 1797*

*El sueno de la razon produce monstruos(잠자는 이성은 괴물을 깨운다),1797-98

Etching with aquatint*

19세기 전반기를 뜨겁게 달군 낭만주의는 한편으로 자유에 대한 신념을
가져온 '계몽주의의 다른 열매이기도 했다. 모순 되게 생각되지만
계몽주의는 이성과 더불어 상상력과 감정도 자유롭게 하였다.
고야의 <잠자는 이성은 괴물을 깨운다> 이러한 낭만주의의 양면성을
보여준다. 책상에 고개를 파묻고 있는 남자의 등뒤로 무지와 어리석음을
상징하는 부엉이, 박쥐들이 몰려드는 모습이 섬짓하다.

*El si pronuncian y la mano Alargan al primero que llega

(They say yes and give their hand to the first comer),1797-98*

*Cardinal Luís María de Borbón y Vallabriga, 1798-1800*

*The Countess of Chinchón, 1800*

*Charles IV and his Family, 1800*

*The Nude Maja,1800*

고야의 작품 중에 유일하게 나체의 여인을 그린 작품으로, 작품 < 벗은
마야> 같은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옷을 입은 마야> 있다.
벨라즈케스의 <거울의 비너스> 제외한다면 스페인 회화 사상 유례없는
나체화이기도 한데, 같은 포즈와 거의 똑같은 캔버스, 그리고 동일 모델을
"
나체" "옷을 입힌" 상태로 각각 그렸다는 점에서도 세계의 회화사
에서도 극히 드문 일이다.
녹색의 터어키 풍의 의자 위에 대담한 자세로 누워있는 여인의 완벽한
균형미는 빛이 쏟아져 들어와 만들어내는 진주 빛과 함께 섞여 육감적인
관능미와 이상화된 아름다움을 동시에 재현하고 있다.
이에 비해 <옷을 입은 마야> 힘이 들어간 자세와 안정되고 정적인
표정, 몸과 머리, 발의 위치가 < 벗은 마야> 미묘하게 차이가 나고
있다. 옷을 벗은 마야는 섬세하고 치밀한 묘사를 통해 조각적이고 시각적인
감성이 상당히 뛰어난 반면, <옷을 입은 마야>에서는 질감과 색채의
부드러움으로 인해 회화적인 느낌이 강하게 다가온다.
여인의 벗은 몸은 의자를 비롯한 배경과 더불어 명암의 극적인 대비효과를
일으켜 에로틱한 신비함이 더욱 빛을 발하는데, 그림의 모델이 "알바 공작
부인"이라는 설이 유력하기는 하나 아직까지 명확한 결론은 나지 않고 있다.
고야의 정열과 이상, 현실과 아름다움의 일체감이 누드화를 통해 하나의
정점을 이루고 있다.

*The Clothed Maja,1801-03*

*Countess of Chinchón,1800*

*Isabel de Porcel,1804-05*

녹회색조(錄灰色調) 단순화된 배경, 밤색머리에 엷고 숄을 몸에 감아
늘어뜨린 , 터질 듯한 관능미 넘치는 가슴, 두툼한 입술, 강한 의지의
상징인 듯한 , 풍만한 육체 고야가 남긴 가장 정열적인 여인상이라
하겠다. 생동감 넘치는 개성적인 여인상은 하나의 민족적 특성 , 스페인
여인의 상징이라 하겠다. 고야의 초상화에서 항상 얼굴에 중점을 두며
의상이나 장식물 배경 등은 간략하게 표현하는 예가 많다.
그러나 작품에서는 인물의 몸매나 복장이나 모든 면에 정성을 기울였으며
감각적인 효과나 회화적인 효과도 빈틈없이 발휘한 작품이다.

*Francisca Sabasa y Garcia, 1804-08*

*Dona Teresa Sureda,1805*

*Portrait of Antonia Zárate, 1805*

*Portrait of José Antonio, Marqués de Caballero, 1807*

*Majas on a Balcony,1808-1812*

난간 안쪽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강하게 의식하며 앉아 있는 마야들
배후에서 지켜보는 그늘 속의 사나이들, 등장 인물들은 밝은 가르든 시대와
동일하나, 그림에서는 온화하며 밝은 자연스러움은 보이지 않는다.
어둠침침한 벽과 난간의 제한되어 있는 공간 속에 4인의 남녀가 크게
클로즈업되어 있다. 청각을 상실한 후의 고야가 인간 내면에 숨어 있는
인간의 드라마의 추구자로 변해진 것을 나타낸 작품이다.
중기 이후의 일대 특징이 되는 갈색과 흑색의 주조색이 화면의 심도(深度)
나타내고 있다. 인상파 시대의 대가 마네의 작품 <발코니> 발상원
(
發想源) 작품이기도 하다.

*Dona Narcisa Baranana de Goicoechea, 1810*

*Time Les Vieilles,1810-12*

죽음에 직면한 피골이 상접한 노파가 화려한 신부 옷차림을 하고 온통
다이아몬드를 몸에 걸친 추괴(醜怪) 모습으로 해골같이 생긴 시녀가 내민
거울을 보고 있다. 거울 뒷면에는 '어떻습니까?'라고 씌어져 있다.
사람의 뒤에서는 빗자루를 치켜들고 금방 내려칠 듯한 모습으로 있는
날개 돋친 염라대왕의 사자가 습격하려는 절박한 순간을 있다.
노파가 머리에 얹은 화살표의 다이아몬드는 <카를로스 4 가족>이란
작품의 왕비의 머리에 꽂은 물건과 같다. 물건은 재상인 애인 고도이에게
증정한 것이라 한다. 노파의 빨갛게 그려진 눈을 음란한 욕망을 상징한
것으로 해석한다면, 시대상을 풍자한 고야의 비유적인 표현이라 하겠다.
작품의 회화성에 있어서도 우수한 작품이다.

*Esto es peor(This is worse),1812-13*

*The Shootings of May Third 1808,1814*

*자화상, 1815*

고야의 20점의 자화상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이다.
고야가 69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보통 사람 같으면 노쇠기에
이른 연령이지만, 그림에 나타 것을 보면 그의 위엄있는 표정과
불굴의 의지력과 왕성한 정열 같은 것을 엿볼 있다.
큼직한 얼굴, 깊이 꿰뚫는 듯한 예리한 , 굵은 목둘레와 벌어진 가슴
등에서 강인한 의지력 등을 보고 느낄 있을 것이다.
작품의 색조는 흑색. 백색, 그리고 황토색을 주조로 비교적 단조로운
작품이지만, 보는 사람을 압도하는 위엄이 있고 고야의 깊이 있는 정신적
내면 세계를 뿜어 내는 듯한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Self-portrait with Dr Arrieta,1820*

그림 아래쪽에 1819 말에 중하고 위험한 병에서, 뛰어난 의술과
정성으로 73세의 나를 구해준 아리에타에게 감사하며, 1820 고야는
그림을 그림』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고야가 [검은 그림] 작품제작을 시작한 것은 바로 무렵이었다.
의사에게 부축되어 약을 먹으려는 중환자 고야의 모습에서 사경을 헤매는 듯한
모습을 실감나게 표현한 그림이다. 고야는 이러한 중병을 차례나 겪으면서
삶과 죽음의 처절한 경험을 겪었고, 더욱더 심오한 예술관이 형성되어 갔다.
사경에서 번씩이나 회생하여 더욱더 농도 깊은 걸작을 많이 남겼다.

*Burial of the Sardine,1816*

*魔女 집회*

왕가(王家) 제외한 고야 최대의 후원자였던 오스나 부처 소유의 작품이며
아라예다 저택의 부인 거실을 위하여 그린 마녀를 테마로 6점의 그림
작품이다. 병을 앓은 후의 고야의 내적인 심리 변화는 여실히 화면에 반영되어
갔다. 현실미 있는 인간상과 비현실적인 분위기가 혼합 표현되어 가는 환상적
작품 세계는 만년의 <검은 그림> 연결성이 농후하다.
인가와 떨어져 있는 , 스산한 달밤에 마녀들이 마녀의 상징인 수산양을
둘러싸고 주일 동안의 전과(戰果) 보고 하고 있는 장면이다.
고야가 마녀 신앙에 인간적으로나, 화가로서도 깊은 흥미를 가지고 있었음을
있다. 마녀를 테마로 많은 작품이 남아 있다.

*Saturn,1821-1823*

앞서 소개된 자화상을 그린 4 고야는 빈사의 중병에 빠졌었다.
다행히 회복은 되었으나 '귀머거리 '에서 유폐 생활을 보냈다.
집에서 생활하면서 14 점의 작품을 제작했으며, 시기의 그림은
'
검은 그림'이라고 불린다. 고야는 대단히 음침하여 공포와 억압을 괴물로서
상징하는 표현주의적 작품을 2 건물 벽면에 가득차게 그렸다.
그림도 식당 벽면에 그린 작품의 하나이다. <사투르노> 하늘의
지배권을 자식들에게 빼앗기게 두려움으로 5인의 어린 자식들을 차례차례
먹어서 죽여 버렸는데, 고대 신화의 신은 토요일에 마녀들의 집회를 연다는
신이기도 하다. 공포, 절망, 분노 등을 상징하는 듯한 처절한 화면 구성은
놀랍다. 고야의 정신적.내면적 파동이 이러한 표현주의적 작품을 표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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