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미술사38 후기인상주의: 세잔

   

   

   


15. 후기인상주의(Post-Impressionism)

Self-Portrait, 1879-1882/Paul Cezanne

신인상주의와 같은 시대에 인상주의의 맥락에서 좀더 새로운 예술 세계를 지향한
또 하나의 경향으로 후기인상주의(後期印象主義, Post-Impressionism)
가 있다. 세잔, 고갱, 고흐는 후기인상주의의 3대 화가라고 부른다.
고갱과 세잔이 인상주의 그룹전에 여러번 출품하면서 그들 화업의 출발을 인상
주의에서 했기 때문에 이들을 인상주의의 후계자로서 그러나 새로운 인상주의자
로서 취급하는 것이다. 후기인상주의 명칭은 영국평론가 로저 프라이 Roper
Fry가 1910~11년 겨울에 런던 그래프론 화랑에서 기획∙개최한 전시회인 '마네
와 후기인상주의전'이란 표제에서 유래, 아주 막연한 의미에서 명명되었다.
이 전시회에서 비롯하여 인상주의의 색채에 영향을 받은 계승이자 단지 시각
효과를 넘어서 작가적 색채가 주관에서 비롯되는 각기 특징적인 주의로서 극복
의 뜻을 담는다고 하겠다.

후기인상주의는 단순한 점묘주의로서의 신인상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전개되어
보다 견고한 화면구성을 추구하였던 경향과 표현내용을 중요시하였다.
이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인상주의로부터 거리를 두고변화를 일으키는 속성을
가진 변함없는 자연의 진실을 포착할 수 있는 새로운 구성주의를 지향하며작가
의 강한 개성과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였다. 쇠라가 과학적 분석과 주관적 회화
구조를 통해 인상주의의 순간적 인상을 견고하게 만들었다면, 세잔은 자연을 통해
회화적 질서와 구성을 화면위에 재창조함으로써 동일한 결과를 얻었다.
세잔은 자연의 생생한 외형에서 느끼는 감각과 주관적인 이해를 통한 자연의 본질
적 구조를 표현하여 20세기 추상미술의 선구자적인 역할을 하였다.
쇠라나 세잔이 자연세계를 주관적 화음과 질서로 통일하여 독립된 새로운 리얼리티
를 추구였다면 고갱과 고흐는 작가의 내면세계를 표현하였다.
산업사회 이면에 감춰진 모순으로 인한 불안의식 및 정신적 가치에 대한 향수는
보이는 세계보다는 관념적 환상과 동경의 세계에 대한 갈망으로 나타났다.

인상주의가 순간적인 외관의 모습을 포착하려는 표현을 하였다면 이들은 보다
견고한 것과 본질적인 것을 추구했다는 점이 다르며, 이로써 인상주의의 극복이라
는 면에서 의의를 가진다. 이들은 인상주의의 업적, 즉 순수한 빛과 색을 새롭게
발견하고 각자의 개성 있는 화풍을 인정하는 전통을 인정하고 수용하면서, 상대적
으로 인상주의가 잃었던 견고함, 질서, 그리고 인간 내면의 심오한 깊이를 추구
하기 시작했다. 이들 세 화가의 접근 방식과 목적은 서로 달랐으나, 세 사람의
업적이 모두 20세기 미술-야수파, 표현주의, 입체파-이 발생하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Self-Portrait with Palette, 1885-1887

폴 세잔(Paul Cezanne:1839~1906)은 프랑스 엑상 프로방스의
부유한 중산층 가문에서 태어났다. 젊은 시절 은행가인 아버지의 강요로 법학과
에 등록했지만 이내 흥미를 잃고 1861년 파리로 이주했다. 세잔은 파리에서
인상주의 운동을 접했지만 과거의 회화에 대한 깊은 존경심 때문에 순수한 빛과
색채의 즐거움에 빠져들지 못했다. 초기의 넑고 순순한 붓질이 주는 생동감은
점차 절제되고 섬세한 붓질로 변했다. 몇 년의 훈련을 거치면서 세잔은 인상주의
로부터 벗어났다. 그는 회화는 빛과 색채의 인상이 아니라 엄격하고 기하학적인
입체에 대한 이성적인 구성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주제는 가족 초상과 자화상,
정물, 프로방스의 생트 빅투아르 산과 같은 특정 장소의 풍경으로 제한했다.
성숙기에 그린 크고 넓게 펼쳐진 풍경화는 그가 세웠던 "자연을 좇아 푸생을 되살
리기'라는 계획의 의미를 전달해 준다. 여기에 전제되어 있는 두 가지 선택, 즉
과거의 미술을 형식적인 모델로 삼은 것과 자연광선의 사용은 입체감과 색채를
종합시키는 세잔의 뛰어난 재능이 없었다면, 어느 화가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일반적인 특징에 불과했을 것이다. 화가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나 대중에게 외면
당했던 세잔은 죽은 후에야 20세기 미술을 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인정
받을 수 있었다.

폴 세잔은 후기인상주의자들 가운데 형태와 구성에 대한 현대적인 해석을 구축한
화가이다. 즉 인상주의의 회화를 이루고 있는 순간적 인상에 영원성을 지닌 견고
함을 첨가 시키므로써 인상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다. 이러한 목표를 위해
그는 자연의 본질적 구조를 구현하는데 있어, 대상의 외형에서 잡아 낼 수 있는
객관적 시각의 결과와 대상에 대한 작가 자신의 주관적 이해를 동시에 표현함으로
서, 20세기 추상미술이 가지고 있는 객관과 주관의 동시성을 선구적으로 보여
주었다.

Portrait of the Artist's Father, 1866

Lawyer(Uncle Dominique), 1866

Portrait of Achille Emperaire, 1867-68

이 인상적인 초상화는 세잔과 함께 엑상 프로방스의 쉬스 아틀리에서 그림을
그렸던 친구 아쉴 엥프레르를 그린 것이다. 큰 두상과 빈약한 다리, 의자에 앉아
있는 모델의 모습은 왠지 어색한데 엥프레르가 본래 난장이었기 때문인 듯하다.
나이프로 두텁게 발라 올린 물감, 화면 전반의 어두운 색조는 과거 거장들의
작품을 연구하면서 기량을 쌓아가던 습작기의 화풍을 보여주고 있다. 세잔은 이
그림에 마치 중세의 이콘화처럼, 모델의 이름을 작품 상단에 썼다.
1870년 살롱에 출품된 이 작품은 심사위원들에게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다.

Still Life with Green Pot and Pewter Jug, 1867-68

Young Girl at the Piano - Overture to Tannhauser, 1869-70

Pastorale(목가), 1870

세잔이 서른 한 살 되던 해 제작한 이 작품은 현실 너머의 남녀의 사랑을 환상적
으로 다룬 작품이다. 세잔은 1860년대 후반과 1870년대 에로틱한 주제들을
즐겨 그렸는데, 이 작품도 성적인 환상을 담은 작품들 중의 한 점이다.
마치 연극 무대와 같은 화폭에는 신비스러운 밤 풍경이 묘사되어 있다. 섬인지,
강인지 모를 물가와 낮은 언덕을 배경으로 몇몇 남성과 여성들이 자리하고 있다.
누드로 그려진 여인들은 각각 다른 자세를 취하고 있다. 뒤편으로 머리를 감으려
고 몸을 숙이고 있는 여인, 화면 왼쪽의 노골적으로 자신의 몸을 드러내는 관능적
인 포즈를 취한 여인,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경에 한 여인이 등을 보이고 돌아 누워
있다. 이러한 여인들은 전형화된 포즈를 따른 전통적인 여성 누드의 도상들이다.
한편, 그림에 등장하는 남성들 역시 각기 다른 모습으로 그려졌는데 여성에 열중
하기도 하고 무관심하기도 한 다양한 모습들이다. 특히 화면 중앙에 거만하게
턱을 괴고 누워있는 남자는 세잔 자신의 모습으로 이 환상을 객관적으로 관찰
하고 있다.

The House of Dr. Gachet in Auvers(오베르의 가셰 박사의 집), 1872-1873

이 작품은 1872년 세잔이 가족과 함께 오베르 쉬르 우아즈(Auvers sur Oise)
에 체류하던 시기에 그려진 것이다. 이 시기 세잔느의 작품은 오베르 근처의
퐁투아즈(Pontoise)에 살고 있던 피사로와 교분을 갖게 되면서, 점차 인상주의
화풍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이 그림에서 세잔느는 후경에 왼쪽으로 살짝 치우쳐
위쪽에 위치해 있는 밝은 건축물, 즉 오베르의 그 유명한 가셰 박사의 집 서쪽 면
을 그렸다. 구불구불하게 시작되는 길, 일정한 구성으로 연속적인 시점을 형성해
주고는 있으나 그물망처럼 복잡하고 흐릿하게 얽힌 나뭇가지들, 특히 회색, 연한
갈색, 황토색, 갈색, 푸른색과 벽돌색 터치 등의 어두운 색조 등은 피사로의 영향
에서 벗어나 세잔느 고유의 양식을 개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시기의 많은 작품들이 캔버스 표면에 상당히 주의를 기울여 세심히 그려진
반면, 이 작은 그림은 곳곳에 화폭의 우툴두툴함을 남겨둘 정도로 붓자국이 투박
하다. 이러한 특징은 이 작품의 제작년도를 세잔느 화업의 초기인 1872년에서
1873년 후반쯤으로 추정하게 한다.

The House of Pere Lacroix in Auvers, 1873

The Hanged Man's House, 1873

1872년 세잔은 부인 오르탕스 피케와 갓난 아들과 함께 오베르 쉬르 우아즈
(Auvers sur Oise)에 정착했다. 당시 피사로는 오베르 근처의 퐁투아즈
(Pontoise)에 살고 있었는데, 세잔은 2년 동안 오베르에 머물며 피사로와 함께
작업을 하곤 하였다. 그 무렵 그려진 이 작품은 피사로로부터 받은 영향력으로
인상주의 화풍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초기 작품들의 특징인 화면 전체를 감도는 어두운 색조, 극단적인 대조, 에로틱
한 주제들은 밝은 풍경화에 자리를 내어 주었다. 화폭에는 청명한 날씨, 밝은
햇살이 내리쬔다. 지붕에 흡수된 빛, 혹은 반사된 빛의 세밀한 감각들은 작은
붓질을 통해 전달된다. 이러한 빛의 떨림은 대상 자체의 밝은 색조를 고양시키고
있다. 그러나 인상주의자들이 추구하였던 일시적인 양상과 순간적인 장면에
대한 묘사는 찾아 볼 수 없다. 이미 화면에는 풍경의 기본적인 구조들이 조화와
리듬 속에 드러나고 있다. 탄탄한 구성, 지붕과 나무의 견고한 선과 면은 안정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세잔은 다른 인상주의 화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피사로
의 추천 덕분에 1874년 제 1회 인상주의전에 참여하였다.
이 작품은 <오베르의 풍경>, <모던 올랭피아>와 함께 인상주의전에 출품되었고
도리아 백작(le Compte Doria)은 비평가들의 악평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구입하였다. 이후 빅토르 쇼케(Chocquet)가 이 작품을 다시 구입하여 1889년
만국 박람회에 출품하였다.

A Modern Olympia(현대적 올랭피아), 1873-1874

낭만적인 주제를 선택하여 어두운 물감을 두텁게 발랐던 세잔느 초기의 작품들
은 들라크루아, 도미에, 쿠르베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초기의 화풍은
1872년경 오베르 쉬르 오아즈에서 피사로와 함께 작업하면서 점차 변화하였다.
1872∼1873년 그려진 이 작품은 세잔의 화풍 변화를 보여준다. 세잔은 이미
1866년 같은 주제로 그렸던 작품은 어둡고 무거운 작품이었던 데 반하여, 몇 년
뒤 다시 그려진 이 작품은 밝은 화면으로 바뀌었다. 밝은 화면, 선명한 색조, 형태
를 생략한 재빠른 붓터치는 이미 세잔의 화풍이 인상주의로 접어들었음을 보여
준다. 작품의 내용은 1865년 마네가 살롱에 큰 논쟁을 일으켰던 <올랭피아>를
언급하면서, 에로틱한 화가 자신의 환상을 담고 있다.
<올랭피아>의 검은 고양이는 이 작품에서 강아지의 모습으로 그려졌고, 본래
마네의 그림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신사가 호기심에 가득 찬 눈길로 올랭피아를
올려다보고 있다. 세잔 자신의 모습으로 그려진 이 신사는 사창가를 찾은 손님
으로서 올랭피아가 창녀임을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이 작품은 오베르에
머무는 동안 제작된 것으로 의사인 가셰 박사가 마네의 <올랭피아>를 칭찬하자
세잔은 단숨에 이 작품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Study: Landscape at Auvers, 1873

Self-Portrait, 1873-1876

세잔은 입체주의의 선구자로서 미술사의 지형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고
평가된다. 그는 생전에 비평가들의 냉담함과 대중들의 몰이해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작품에 대한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세잔느는 오랜 친구였던 에밀 졸라의
소설 『작품(L'oeuvre)』에서 자신을 실패한 천재로 묘사한 데 격분, 졸라와
절교를 선언할 정도로 자의식이 강한 화가였다. 여러 점의 자화상 속에서 세잔느
는 자신을 팔레트를 들고 있는 화가의 모습으로도, 단정한 파리 신사의 이미지로
도 그리지 않았다. 이 작품에서 화가는 예의 무겁고 쏘아보는 듯한 시선을 관람객
을 향해 던지고 있다. 그의 굳은 표정을 통해 긍지에 차 있으면서도, 악의에 찬
비평을 두려워하는 화가 자신의 내면의 모순된 심리를 읽을 수 있다.
텁수룩한 수염과 화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검은색 의상, 치켜 올라간
눈썹 등은 화가의 완고한 성품을 암시하는 듯하다.

Portrait of Chocquet, 1875

Temptation of St. Anthony, 1875

19세기 중반, 종교 예술의 부흥은 낭만주의의 영향이었다. 초기의 세잔 작품 역시
카라밧지오, 제리코, 도미에의 영향으로 낭만적이면서 바로크적인 성향을 갖는다.
특히 1862∼1869년에 세잔느는 엑상 프로방스의 그라네 미술관에서 카라밧지오
의 고전주의 성향의 작품들을 접하면서, 강간, 약탈, 살인, 난잡한 성적 타락과
같은 육체적 긴장이나 상상적 폭력을 주제로 한 환상적인 작품들을 주로 그린다.
세잔은 작품들을 거칠고 어두운 색채로 표현하였으며, 구성이나 붓의 사용에
있어서도 격렬하고 둔탁한 터치를 이용해 극적인 효과를 나타냈다.
세잔의 <목욕하는 여인> 연작과 유사한 구도로 나타나는 <성 앙투안느의 유혹>
은 중앙의 여인을 중심으로 세 명의 큐피트가 둘러싸 있고, 왼쪽에는 성자 앙투
안느와 악마가 자리잡고 있다. 격렬한 몸짓의 성자와 머리에 뿔이 달린 악마는
별개의 두 인물로 떨어져 있지 않으며, 전나의 여인은 물론이고 세 꼬마들마저도
배를 내민 자세는 오만 불손하게 느껴진다. 이집트에 은거해 있던 이 성자의
전설은 많은 화가들이 그렸고, 세잔도 세 점의 유채와 다섯 점의 수채를 남겼다.

Bathers at Rest (Les baigneurs au repos), 1875-1876

The Pool, 1876

Vase of Flowers, 1876

꽃이나 꽃병을 그린 세잔의 정물화는 무수히 많으나, 로코코풍의 것을 그린 그림
은 이것이 단 1점이다. 실은 이 작품은 제 2제정 시대의 판화를 그대로 유화로
옮긴 것으로 실제로 이러한 재료들을 보면서 그린 그림이 아니다. 판화를 사용
한다든지, 꽃을 조화(造化)로 바꾸어 그린다든지 하는 것은 세잔이 곧잘 하던
짓이었다. 색채를 자기 스스로 상상하여 만든 것이었으리라. 꽃병의 백색과 장식
부분의 투명한 청색계의 대조는 매우 투명한 아름다움을 자아내고 있으며, 백색
꽃병에는 녹색의 반사색(反射色)을 쓰고 있다.
채광(採光)은 왼쪽 윗부분으로 잡고 있고, 꽃병은 오른쪽으로 조그맣게 그늘을
늘어뜨리고 있다. 꽃이나 잎, 꽃병은 붓자국이 매우 섬세하며, 그것에 비하여
배경이나 책상은 붓자국이 조금밖에 나타나 있지 않다.

Chocquet Seated, 1877

물체의 형태를 여러 가지 평면으로 분할하여 모자이크와 같은 선명한 색채 효과
를 노린 점이 이 초상화의 특색이다. 화면의 배경인 여러 점의 그림이나, 장식품
등으로 보아 이 작품은 숏케의 집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이며, 제작 연대는
1880년 전후로 보이나, 그 이상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바닥과 벽이 만나는
수평선, 오른쪽 윗부분에 상하로 걸린 그림의 왼쪽 선이 의자의 선과 만나는
수직선, 이러한 두 개의 직선이 화면 구성상의 축을 이룬다.
그 외 여러 개의 직선들이 이것들과 평행하여 작은 악센트를 이루고 있다.
광선은 왼쪽에서 비쳐져 숏케의 얼굴이나, 상반신을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
으로 양분시키고 있다. 바닥이나 벽지의 붉은 무늬 등의 색채가 빛에 의하여 선명
하게 두드러지면서 빛과 실내 공기를 생성시키는 작용을 하고 있다.

Hortense Fiquet in a Striped Skirt, 1877-78

A Turn in the Road(꼬부랑 길)

1880년 전후에 세잔은 '길'을 모티브로 한 작품을 몇 점 제작하였으며, 그 중에서
도 이 작품이 가장 잘 완성된 작품이다. 대체로 퐁드와즈 근처의 풍경으로 보여
지며, 전경 중앙에서 중경으로 들어서서 오른쪽으로 구부러진 길이 원운동(圓運動)
을 형성하여, 그 내부나 왼쪽의 가느다란 나무들이 화면에 틀을 이루고 있다.
배경의 경사진 지붕이나 작은 집들이 기하학적인 형태를 이루고 있고, 그 집들의
뒤에는 작은 언덕이 좌우로 있어 화면 구성상으로는 완벽 한 구도라 하겠다.
붓의 터치도 규칙적으로 사용하고 있으나, 수년 후 제작된 풍경화에서 볼 수
있는 그러한 공간의 완벽성 같은 것은 이 작품에서는 볼 수 없고, 오히려 장식적
이며 평면적인 인상이 짙다. 그러나, 고갱은 이 시기의 세잔의 풍경화나 정물화
에서 보여 주는 평면적인 성격에 깊은 영향을 받게 된다.

과일, 냅킨, 우유병이 있는 정물, 1880

폴 세잔은 1872년에서 1873년 사이에 피사로에게 큰 영향을 받았으나, 결코
인상주의 그룹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근본적으로 매우 독자적인 화가였던 그는
인상주의를 미술관에 소장된 미술만큼이나 견고하고 확실한 것으로 만들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평생 사물의 외관에 치중하는 인상주의를 대신하여 시간을
초월한 자연의 본질, 그 원형을 찾고자 했다. 1878∼79년경 그는 물리적인
실체의 외관을 고수하는 한편, 공간 속에서 구현되는 대상의 조형적인 가치와
구조에 눈을 돌렸다. 목욕하는 이들, 남 프랑스의 시골 풍경, 정물화와 같은
특정한 모티브를 반복하여 그리면서 조형적인 실험을 지속하였다.

1880년에 그려진 이 작품에서 이미 세잔은 대상을 단순화시켜 추상적인 형태에
주목하고 있다. 몇 개의 사과와 가정에서 익숙한 가재 도구들이 탁자에 놓여 있다.
사물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 대신에 단순한 기하학적인 형태를 구축함으로써
형태 내부에 있는 구조를 표현하였다. 삐딱하게 놓여진 칼이 공간의 깊이를 암시
하고는 있으나, 근본적으로 이러한 화면은 원근법의 전통적인 재현 방식을 전복
시켰다. 쌓아 올린 사과들과 탁자 모서리를 따라가다 보면 시점은 하나가 아니라,
화면 밖으로 여러 개의 시점이 있음을 알게 된다. 이러한 다초점에 따른 형태의
탐구는 이후 브라크와 피카소로 하여금 입체주의로 나아가게 하였다.

L'Estaque(에스타크에서 본 마르세이유만의 광경), 1882-1885

이 풍경화는 세잔과 인상주의화파의 차이를 확연히 보여주고 있다.
프랑스의 리비에라 지역에서 고요하고 평범한 바다와 앞으로 높고 어울리지
않는 굴뚝이 펼쳐진 이 이름 모를 마을은 별로 매력적인 풍경이 아니다.
빛과 색채는 인상주의의 주요 주제였지만 세잔은 이미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Still Life, 1883-1887

Le vase bleu(The Blue Vase), 1885-87

세잔은 이 작품에서 활짝 핀 꽃의 형태 묘사보다는 색채의 미묘한 변화에 주의를
기울였다. 빛이 사물에 떨어지는 방식과 그에 따르는 색채의 변화라는 문제는
줄곧 세잔의 화두였다. 이 그림에서 공간은 수직과 수평이 교차하면서 조밀하게
구축되었으며, 그 속에 위치한 정물들이 각각 균형 잡힌 부피감을 점하고 있으며,
꽃병은 화면 중심에서 정확하게 중심을 잡고 있다. 꽃병의 푸른색과 배경의 미묘한
푸른색의 조응은 캔버스 전체에 통일성, 조화를 꾀하고 있다. 이 작품이 그려지기
10년 전, 오베르 쉬르 오와즈에서 많은 꽃 그림을 그렸던 화가는 이 작품에서는
새로운 모티프인 사과를 첨가하였다. 세잔은 꽃이 너무 빨리 시들어 버린다고
불평하며 한때 가셰 박사에게 꽃 그림을 포기한다고 말한 적도 있었으나, 이 그림
에 그려진 꽃은 사과와 어우러져 화면에 다채로움을 더하였다. 그렇지만 그 작품의
기본 바탕을 이루는 단순함과 절제가 르누아르의 꽃 그림에서 익숙하게 보아온
풍성함과 지나침은 찾아 볼 수 없다. 이 작품은 세잔이 죽기 2년 전, 1904년
살롱 도톤느의 일부로 개최되었던 세잔의 회고전에서 대중 앞에 첫 선을 보였다.

Mont Sainte-Victoire(생트 빅투아르 산), 1885-1887

1880년대 이후로 줄곧 세잔은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서 주제를 선택했다.
터너가 리기산을 그리고, 모네가 건초다미, 루앙 성당의 정면과 노르망디의 절벽을 그렸듯 세잔 역시 몇 가지 주제를 반복해 그렸다. 세잔의 작업실 창에서 바라본
생트 빅트아르 산의 육중하고 웅크리고 있는 듯한 윤곽선은 성숙기에서 후기까지
작품 곳곳에서 나타난다. 이는 단일 주제에 집중해 마치 체스를 두는 사람처럼
인내심을 갖고 꼼꼼하게 더 효과적인 해결책을 찾아 분석적으로 접근해가는
세잔의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생트 빅투아르 산 연작은 세잔이 인상주의 화파에서
주장하는 실제 세계에 대한 충실한 재현을 점차 단념하고, 대상에 대한 신중한
분석을 선호하여 풍경이 화면 구성연습을 위한 소재로 변해가는 정도로까지 이어
갔음을 설명해준다. 그의 그림들은 인상주의라는 안전한 경로를 거부한 세잔의
끊임없는 불만족과 탐구의지를 전해준다. 형태들은 밝고 찬란한 대기의 빛 속에서
점차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로 변해간다.

이 작품은 셍트 빅투아르 산 주제의 첫 번째 작품으로 세잔이 스스로 세웠던 계획,
곧 "자연을 좇아 푸생을 되살리기"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말해준다.
빛으로 가득한 풍경을 향해 열려 있는 원거리 시점은 17세기의 위대한 회화에
대한 암시로 볼 수 있지만, 빛과 색채는 인상주의를 연상시킨다.

Still Life with Peaches and Pears, 1888-90

세잔은 광택 나는 도자기와 천, 손질되지 않은 나무와 과일 껍질 등의 표면 질감과
선원근법의 규칙을 무시하고, 과일과 물체를 균형 잡힌 기하학적인 입체로 묘사
했다. 이것이 입체주의로 가는 길을 열어주었다.

Vessels, Basket and Fruit(The Kitchen Table), 1888-90

세잔의 정물화 중에서도 복잡한 구성과 형태의 데포르 마숑 그리고, 시점의 이동이
란 점 등으로 보아서 매우 특이한 작품이다. 탁자를 화면에 병치해 놓고 그 위에
과일이나, 갖가지 항아리들 그리고 과일 광주리, 냅킨 등을 풍성하게 배치하였다.
과일 광주리를 보는 시점과 왼쪽에 있는 항아리를 보는 시점의 차이는 이미 세잔
연구가들이 지적하였듯이 이러한 조형적 노력이 큐비즘의 이론 구성에 크게
이바지한 것으로 되어 있다. 배경의 구성도 매우 복잡하여 왼쪽에 짙은 갈색의
작은 테이블과 의자 등 벽구석까지 이르고 있다. 뒷벽 부분은 녹색·청색·보라색·
갈색 등 짙고 깊은 색들이 엉켜져 있고, 전경의 테이블과 평행하여 전경의
갖가지 빛깔들을 흡수하고 있다.

Madame Cezanne au fauteuil jaune, 1888-90

Boy in a Red Vest(Garcon au gilet rouge), 1888-1890

Boy in a Red Waistcoat, 1890-95

The Card Players, 1890-1892, The Louvre, Paris

세잔은 카드 놀이를 주제로 하여 1890년부터 1896년까지 5점의 작품을 완성
하였다. 5점의 작품들은 카드 놀이중인 사람들의 수도 작품마다 다르며 작품의
크기도 각각 달라, 세잔은 같은 주제로 일련의 조형 실험을 하였음을 짐작케 한다.
현재 반즈 재단(Foundation Barnes)에 소장되어 있는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
(1890-1892)에서는 5명의 인물이 등장하며,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의 작품
에는 4명으로, 그리고 다시 루브르 미술관의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에서는 2명
으로 줄었다. 루브르 미술관에 소장된 이 작품이 그 중 가장 완성도가 높은 작품
으로, 구도에 대한 세잔의 집착을 잘 보여준다.
황토색 계열로 차분하게 가라앉은 배경 속에 카드 놀이에 열중하고 있는 두 인물
만이 부각되었다. 두 남자는 테이블 가운데 놓여 있는 술병을 중심으로 거울에
비추인 듯 거의 완벽한 대칭을 이루고 있다. 화면 중앙으로 몰린 두 손과 카드들,
두 인물의 서로 대칭을 이루고 있는 팔, 두 개의 모자 등 엄격한 대칭 구도는
작품에 고전주의적인 기운을 불어넣었다. 화면 왼쪽의 인물이 좀 더 어둡게 칠해
졌지만 두 장의 흰 색 카드와 파이프, 흰 셔츠 깃 등으로 명암까지도 완벽한 균형
을 이루어낸다. 세잔이 임의로 색을 칠한 것이 아니라, 화면의 구성과 균형을
위해 대상 하나하나를 심사숙고했음을 알 수 있다.

Woman with Coffee Pot, 1890-95

학자들은 이 작품의 모델이 세잔의 부인인 오르탕스 피케, 혹은 자 드 부팡의
세잔의 저택의 하녀라고 추측한다. 그러나 사실상 이 작품이 누구의 초상인가는
전혀 중요치 않다. 마치 정물이나 기념비적인 동상처럼 굳은 모습으로 앉아 있는
여인은 기하학적인 형태에 있어서 커피포트와 매우 흡사하다. 이러한 기하학적
인 형태는 대상의 객관성만을 보여줄 뿐, 모델의 성품, 내면의 심리는 전혀 개의
치 않는다. "자연을 원통과 원뿔, 원추로 보아야 한다"는 세잔의 유명한 주장은
이 그림에서도 똑같이 적용되고 있다. 그림의 배경은 캔버스와 평행을 이루는
엄격한 정면성을 나타내고 문은 강조된 직각을 보여주는 기하학적인 형태로 환원
되었다. 여인의 견고한 두 팔은 커피포트처럼 원통으로 처리되었다.
세잔이 대상의 기저를 이루고 있다고 믿었던 이러한 기하학적인 구조들은 색채
로 인하여 더욱 풍부해졌다. 세잔은 작은 색면을 조밀하게 겹쳐 형태를 만들고
입체감을 형성한다. 세잔의 작품에 나타난 공간 탐구, 대상의 기하학적인 관계에
대한 연구는 1908년 브라크의 첫 번째 입체주의 작품 <레스타크의 집들>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세잔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모델 개인의 표현에 대한
고의적인 무관심은 큐비스트들의 추상회화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The House with Cracked Walls, 1892-1894

Compotier, Pitcher, and Fruit(Nature morte), 1892-1894

Portrait of Gustave Geffroy, 1895

Seated Peasant, 1895-1900

Onions and Bottle, 1895-1900

세잔은 평생 정물화라는 매체를 통해 지속적인 조형실험을 완성시켰다.
그는 스페인과 네델란드의 대가들을 본받아 일상 생활의 친숙한 정물들이 이루어
내는 미학에 깊이 매료되었다. 그러나 정작 세잔의 정물화에 큰 영향을 끼친 것
은 베르메르나 수르바랑, 고야와 같은 대가가 아니라 18세기 프랑스 화가 샤르댕
이었다. 세잔은 1869년 루브르에 소장된 샤르댕의 그림들을 보았을 것이며
깊이 감탄하였음에 틀림없다. 이 작품에서도 세잔은 샤르댕이 사용한 바 있는
화면에 대각선으로 놓인 나이프를 배치하여 화면에 깊이감을 주었다.
양파와 같이 구형으로 생긴 야채와 과일들은 그의 형태 탐구를 위한 가장 이상적
인 것이었다.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양파 이외에 다른 정물들, 유리잔과 술병
등은 여전히 오늘날 액상 프로방스의 세잔의 화실에 보존, 전시되고 있다.
같은 정물에 대한 화가의 지속적인 관심은 사물의 배치와 구성이 화가의 한결
같은 관심사라는 것을 보여준다. 부채꼴 모양의 탁자 가장자리에 늘어뜨려진
천은 세잔의 만년에 다른 많은 정물화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전형적인 모티프
이다. 이 늘어진 천은 술병이 유도하는 수직선을 상쇄시키는 수평선을 유도하고
있으며, 정확하게 질서 잡힌 화면 구성을 부드럽게 감추고 있다.
또한 탁자보는 술병이 그러하듯 텅 빈, 중성적인 배경에 상치되면서 갑작스럽게
화면에 쑥 뻗어 나와 화면에서 술병이 점하는 무게에 균형을 잡고 있다.

Mont Sainte-Victoire Seen from the Bibemus Quarry, 1897

10여년 후(1897년경) 이미지는 더욱 단순해진다. 나무줄기와 풍경의 선들이
규칙적인 격자무늬를 만들어 내기 시작한다. 자연은 기하학의 엄격한 기준을
통해 관찰되고 있지만, 대기의 빛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여전하다.
이 그림은 강렬한 오렌지색의 채석장에서 빅트아르산을 바라본 대단히 빼어난
작품의 하나이다. 중앙의 커다란 바위덩어리에는 좌우에서 접근하는 틈사이에
나무 한 그루가 서 있고 산은 실제보다 더 높게 그려져 있다.

Turning Road at Montgeroult, 1899

Apples and Oranges(Pommes et oranges), 1899

카몽드 콜렉션에서 인상파 미술관으로 오게 된 이 작품은 바로크적인 구도를
지닌 만년의 정물화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쿠션이 있는 긴 의자에 천을 늘어
뜨렸고, 몇 장의 냅킨을 깔아서 그 위에 도자기와 과일을 배치한 구도로서 물체
가 당장 굴러 떨어질 것만 같으나, 불안정감은 없으며 오히려 화면이 생동감을
보여 주고 있다. 물감은 매우 엷게 발라져 있고, 왼쪽 냅킨은 캔버스 천을 그대로
드러내 놓고 있다. 터치는 매우 자유로우며, 도자기의 경우는 거의 터치를 발견
할 수가 없도록 되어 있다. 사과나 오렌지의 경우 붉은 색에서 노란색에 이르기
까지 그 변화가 매우 아름다우며, 형태나 양감이 매우 잘 묘사되어 있다.
원숙한 경지의 아름다움이라면 이러한 작품을 말할 것이다.

Still Life with Curtain and Flowered Pitcher, 1899

Large Bathers, 1899-1906, Philadelphia Museum of Art

만년의 7년간에 그린 이 작품은 이제까지 제작된 수많은 수욕도 중에서 가장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출품 당시 젊은 화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전경,
중경, 원경 등 빈틈없는 논리적 화면 구성은 세잔이 점차적으로 가슴 속에 쌓아
왔던 고전적 정신의 결실이라 하겠다.

The Large Bathers, 1900-05, The Barnes Foundation, Merion, Pennsylvania

Bathers, 1900-1906, National Gallery, London, Venturi 721

이 여성누드화는 오랜 미술 전통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이 전통은 아르테미스가 목욕하는 광경을 다룬 르네상스의 신화 장면에서부터
시작하여 19세기 프랑스를 거쳐 앵그르와 마네로 이어진다. 세잔은 표현주의적
으로 윤곽선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입체주의에서 부피의 단순화까지도 예견하면
서 현대 회화사에서 전환기를 마련했다.

Young Italian Girl Resting on Her Elbow, 1900

Woman Seated in Blue, 1902-06

Mount Sainte-Victoire, 1904-1906

이 작품은 생트 비투아르 산 풍경에 대한 마지막 변주이다. 다른 작품들과 달리
이 작품의 색조는 다소 어둡다. 산과 그 아래 시골풍경의 기하학적인 입체감은
크고 규칙적인 색의 파편들로 해체되어 있다.

Portrait of Vallier, 1906

Le Cabanon de Jourdan, 1906

1906년 10월, 세잔은 이미 이 작품에 손을 대고 있었다. 푸른색과 오렌지색의
명쾌한 대립으로 대충 그렸으며, 길이나 나무에는 붉은 색, 녹색의 보다 약한
대립도 주어졌다. 작은 집의 문과 허술한 부분에는 하늘 색과 같은 색으로
놓여져, 총합적 큐비즘에 있어서의 색채를 연상시키기도 하고 있으나, 세잔은
다시 그 위에 다른 빛깔들을 칠할 생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화면은 힘차고 명쾌함을 보여 주고, 제작도 반은 넘어서서 남은 작업은 세분의
처리나, 약간의 끝맺음 정도로 보여진다. 그러나 결국 이 작품은 유화로서 최후의
작품이 되고 말았다. 10월 15일, 제작 도중 화가는 비를 맞고 인사 불성이 되었다.
수일 후 세잔은 약간의 회복을 보아 수채로 바리에의 초상을 시도하였으나 끝내
계속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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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51 야수파 죠르주 루오

   

   

The Art of Fauvism

Georges Rouault


★ 영혼의 자유를 지킨 화가, 조르주 루오(Georges Rouault) ★

일꾼의 제자(자화상)

루오의 54세 때 작품이다. 자화상인데 명제를 <일꾼의 제자>라고 붙인 것을 보면
자기 작품에 대한 겸허한 심정을 말해 주고 있다.
예술가 이전에 한 자연인으로서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는 듯 싶다.
14세가 되면서 스테인드글라스를 전문으로 하는 스승을 찾아가 기술을 습득하게
되었는데 이 때의 심정을 영원히 잊지 않은 것 같다.
이 작품은 이미 50 고개를 넘은 연령에도 불구하고 14세의 순진한 소년상 같은
느낌이다. 표면적인 묘사를 넘어 작가의 내면적인 세계를 그린 작품이다.
그린다는 기술에 앞서 작가의 심적 충동이 얼마나 크게 작용했는가를 보여 주고 있다.

Self Portrait III, 1926

조르주 루오(Georges Rouault:1871~1958)의 삶은 인류사에서 가장
척박한 시대인 폭력의 현대사를 관통하고 있다.
1871년 5월 27일 파리 코뮌(파리 시민과 노동자들의 봉기에 의해서 수립된 혁명적
자치정부)의 혼란 중 파리 교외지역 벨빌 지구의 한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스테인드글라스 직공생활로 10대를 보냈다. 루오 작품에서 흔히 발견되는 검은색
테두리는 이 때의 영향으로 여겨지고 있다. 1890년(20세), 국립미술학교(에꼴 데
보자르)에 입학하면서 정식 미술 학습을 받은 루오는 이 곳에서 훗날 그의 예술세계에
큰 영향을 준 상징주의 화가인 스승 귀스타브 모로(Gustave Moreau)
만났다. 또한 앙리 마티스, A. 마르케 등 야수파 화가들과도 알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그는 흔히 야수파(Fauvisme)의 일원으로 불리지만 사실 그는 당시 미술사조의 영향
과는 무관하게 작품활동을 지속했으며 서로 자유로이 자기의 재능을 계발해 나갔다.
자유로운 기질을 지닌 모로는 루오의 성향을 간파했고 자연 관찰과 진정한 개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국립미술학교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루오가 아카데미파 화가들의
반대로 로마상 수상이 무산되자, 스승 모로는 제자 루오에게 학교를 떠나 반 아카데미
파 예술가로 그림을 그려보라고 권유했다. 루오는 점차 자신만의 개성을 발견하면서
콩쿠르에서 요구하던 주제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며 자신만의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했다.

1898년 정신적 지주였던 스승 귀스타브 모로가 세상을 떠나자 루오는 정신적으로
큰 위기를 맞게 된다.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 루오는 자연 속에서 휴식하며 안정을
취했다. 파리에 돌아온 후 가톨릭 지식인인 레옹 블로와(Leon Bloy)
책에 푹 빠졌는데 특히 레옹 블로와의 정신적 독립성과 직설적 스타일에 매료되어,
모순되고 천박한 현실을 고발한 레옹 블로와의 사회관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그 자신도 새로운 예술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다. 그의 눈에는 현실이 추악했고
이는 충격적인 방식으로 표현됐다. 가면을 벗고 화려한 치장을 벗은 진실한 인간을
탐구하려는 시도는 이 때부터 진지하게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20세기 초 루오는
데생과 색채의 격렬함, 역동적인 선, 날카로우면서 강렬한 붓 터치가 특징인 자신
의 스타일을 완성했다. 사회의 어두운 단면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서커스단
의 광대나 판사, 부랑자 등 다양한 인간 군상의 숨겨진 면모를 예리하게 파헤쳤을
뿐 아니라, 창녀와 판사를 기괴하고 우스꽝스러운 형상으로 그려 사회의 부조리를
폭로했다. 당시 사람들은 등장인물의 형상을 왜곡시켜서 강렬하게 표현한 루오
작품의 난폭함에 충격을 받았다. 이 때부터 루오는 재료를 중시해, 1910년경에는
풍부한 채색이 가능한 유화물감을 사용하여, 유화의 비중이 점점 커진다.
루오는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테크닉을 찾아내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실험했다.

1917년, 파리의 유명한 미술상인 앙브로와즈 볼라르(Ambroise Vollard)
가 루오에게 그의 작품들 전체(770점)를 사겠다는 제안을 한다.
루오는 자신의 작업 리듬에 맞게 작업을 마칠 수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걸고 승낙
한다. 이후 10년 동안 루오는 볼라르가 요청한 판화작업에 열중했다. 볼라르는
<위비 영감의 재림>, <회상록>, <유성 서커스단>, <수난>, <미제레레>,
<악의 꽃> 등 수많은 저서의 삽화 제작을 주문한다. 이제 제작된 판화는 루오의
작품에서는 물론 그의 회화 작업 전개에 있어서도 결정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1917년에서 1926년까지 10년 동안 루오는 판화작업에 열중하여, 회화 작품은
많이 그리지 못했다. 이때 제작된 100여 점은 서커스 단원들, 종교적 주제, 풍경
으로 이 시기는 역동적 선과 통일성과 단순성이 특징이다.
표현적이면서 장식적인 검은색 외곽선들은 형태의 구조를 이루어 주며 비중 있는
밀도와 움직임을 표출하며 운동감과 깊이를 준다. 판화 기법으로 끊임없이 작업
하고 단계를 밟아가던 그는 작품을 완성의 경지까지 천천히 이끌어 갈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한다.

2차 세계대전 동안, 아틀리에에서 선과 형태와 색채에 대한 실험에 몰두하여 많은
중요한 작품을 완성시켰다. 1930년대에는 평온하면서도 활기찬 색조로 가득 찬
기품 있는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꽃, 풍경, 누드 등 자연의 아름
다움을 찬미하는 주제를 즐겨 그렸다. 종교적인 주제는 그리스도의 얼굴, 수난도,
성서의 풍경화가 점점 많아진다. 1945년에서 47년경에는 더 밝고 빛나는 색조로
발전한다. 재료는 두꺼워지고, 붓질은 화면위에 불규칙하게 쌓여지면서 표현 기법
에 따라 색 반죽이 형태를 잡아간다. 1940년에서 48년 사이에, 물감이 훨씬 더
두껍고 풍부해져서 작품이 실제와 같은 기복을 지니게 된다. 루오는 판화를 통해
데생과 형태를 단순화했는데, 1940년경에는 형태들이 기호나 상징적인 기하학적
구조가 되어버린다. 루오는 구상의 한계를 뛰어넘지는 않지만 자주 추상의 세계로
접근하곤 했다.

화가 루오의 인생에서 마지막 십년(1948~1958)은 폭발하는 듯한 색채와 재료에
대한 심취로 특징지어 진다. 이 최후의 시기는 그의 작품이 가장 빛을 발하고 완성
의 경지에 이른 시기다. 그림에 덜 희석된 물감이 몇 센티의 두께로 곳곳에 쌓여
있다. 폭 넓은 검은 외곽선이 기복 효과를 강화 시켜 준다.
오랜 동안 고집스럽게 색을 반죽하고, 주물러서 그 특성이 변화될 정도이다.
'사라(Sarah)'의 얼굴은 이 시기의 전형적인 예이다. 색채의 뉘앙스와 빛의 효과를
늘려가며 물감을 중첩시키는 방식은 그림에 조각적인 느낌을 더해준다.
색채와 밀도있는 화면을 통해 그의 작품이 경지에 올랐음을 알 수 있다.
회화의 재료에 대한 고집스런 탐구 작업은 루오의 특징이다. 그는 연금술사처럼
비밀에 싸인 채 끊임없이 자신의 작품들을 변형시키고 완숙의 경지에 이르게 하면
서 실험과 연구를 계속해 나간다. 회화 기법에 대한 탐구와 현실과 이상 사이의
균열된 감수성에서 우러나오는 표현은 루오의 작품에 생명과 호흡을 불어넣는다.
그에게 예술은 데생과 색채와 질감을 통한 소통의 수단인 것이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종이나 화폭에 내려놓는다. 그에게 있어서 회화는 무엇보다도
뜨거운 자기고백이다. 루오의 예술은 단순한 조형적 실현을 뛰어넘는 한 인간의
사회 참여이기도 하다.

1939년 7월 볼라르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볼라르의 후손들과 루오는
계약에 포함되어 있던 미완성 작품의 소유권을 두고 소송을 벌인다.
루오는 승소했고 작품을 받았지만 전작품을 소각시켰다. 작품을 완성시킬 수 없을
뿐 아니라 미완성된 작품은 자신의 양심과 사회에 받아들여지기 어렵다는 신념
에서다. 루오의 삶과 작품은 타협하지 않는 예술정신의 정수로 요약된다.
흔히 루오에게는 '20세기 마지막 종교화가'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말년에 이르러 심오한 종교적 성찰의 경지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정의를 갈망한
한 예술가는 종교적인 삶을 추구했지만 종교 자체를 주제로 하지 않았다.
루오가 그림의 영감을 얻은 곳은 현실세계가 아닌 숭고한 영적세계에서였기 때문
이다. 현실과 숭고한 영적 세계를 넘나들었던 루오는 자유로운 영혼을 소유한
진정한 예술가였던 것이다.

*<위비 영감의 재림:Reincarnauions du Perer Ubu>, 1928*

위비 영감의 재림은 화상 볼라르가 극작가 알프레드 자리의 희곡 '위비왕'에 자극을
받아서 쓴 여러가지 글들을 함께 펴낸 것이다. 1917년 볼라르는 루오에게 이 책
의 삽화를 부탁했고 그 조건으로 판화집 <미제레레>의 출품을 승낙했다.
이 글들은 선생이나 부자들의 용렬함이 냉소적으로 기괴하게 묘사되었다.
루오는 이 주제를 두 가지 테마로 표현하였는데 하나는 혹사 당하며 비참한 생활을
하면서도 선량한 흑인가족이며 다른 한쪽은 부와 권력을 움켜진 악독한 폭군 위비
영감의 모습이다. 앙브로와즈 볼라르는 1932년에 이 책을 출판하였다.

*<회상록:Souvenirs Intimes>, 1926*

루오가 자신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 문학가나 화가에 대해서 쓴 회상과 함께
그들의 초상을 실은 판화집이다. 서문은 앙드레 수아레스(Andre Suares)가
썼으며, 1926년에 출판되었다. 구스타브 모로, 레옹 블로와, 보들레르, 세잔,
르누아르, 도미에 등의 초상이 실려있다.

*<서커스:Cirque>, 1930*

서커스는 출판 예정이었으나 출판되지 않았던 판화 시리즈이다.
서커스라는 테마는 루오가 젊은 시절부터 관심을 두고 그려왔던 주제였다.
달리는 말의 등에서 재주를 넘는 여자 곡예사, 줄을 타는 무용수, 광대 등, 불안정
한 자세에서 균형과 안정을 찾으려는 서커스단 사람들은 루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본문은 1926년 시인이며 평론가인 앙드레 수아레스가 썼으며 발간은
원래 1931년으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현재까지 이뤄지지 못했다.

*<유성 서커스단:Cirque de l'Etoile Filante>, 1935*

17점의 다색 판화로 이루어진 <유성 서커스단>은 본문은 루오가 쓰고 목판위에
루오가 그린 그림을 조르주 오베르가 새겼다. 그리스도를 그린 옆에 무희와 어릿
광대, 창녀의 초상을 함께 그렸다. 이 모두의 공통적인 요소는 뚜렷한 윤곽선과
활기찬 자세와 생명력이다. 이는 강렬한 야수파적인 색채가 다소 밝은 부드러운
색채로 바뀌었으며 때로는 순수한 톤으로 바뀌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사람들을 즐겁게 만들기 위한 화려한 존재들과 그것과는 거리가 있는 매우 슬픈
삶 사이의 극단적인 대비를 서커스의 사람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고 루오는
말했다. 그리스도와 같은 고귀한 인물들의 이미지는 그릴 때처럼 삶에 내재한
비참함을 포착하기 위해서도 그의 현대적인 감수성을 이용했다.
'유성'이란 뜻은 출판사 이름이다.

*<수난:Passion>, 1935*

루오의 그림과 수아레스의 글을 합작하여 출판하려는 시도는 <서커스>, <미제
레레>가 있었지만 실현되지 못했다. <수난>은 수아레스의 본문과 루오의 색채
동판화 17점, 목판화 82점으로 제작되어 1939년 출판되었다. 볼라르는 이
책의 출간 후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기에 그의 마지막 출판물이 되었다.

*<악의 꽃:Les Fleurs de mal>, 1938*

악의 꽃은 시인 보들레르의 시집으로 루오에게는 이 시집을 테마로 한 판화집이
두 가지가 있다. 한 가지는 볼라르의 요청으로 제작된 동판화집이며, 또 하나는
색채 동판화 시리즈인데 1936년부터 38년에 걸쳐 제작된 30여점 중 완성된
12점이다.(이번 전시된 작품은 색채 동판화)

거울 앞의 娼婦

루오는 1902년 이후 무서운 정열로 일련의 창부들을 그리게 된다.
이 작품은 그 중에서도 유명한 작품이다. 그는 많은 나체의 창녀들을 그리고
있는데 그들의 고달픈 삶의 탓일까? 모두가 노기(怒氣)가 서린 표정들이다.
이 작품 역시 냉정한 입장에서의 사회 관찰이나 비판성은 전연 찾아볼 수 없다.
오직 노기에 찬 격렬한 고발심과 격정적인 분위기를 표출하고 있다.
이 작품이 단숨에 그린 수채화라는 데 주목해야 한다. 드가나 로트렉도 나부를
많이 그렸지만 화면에서 풍기는 냄새가 이질적으로, 루오 특유의 세계가 잘 나타
나 있다.

겨울(풍경)

제 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기 수년 전부터 루오는 많은 풍경화를 수채로 그렸는데,
그 대부분은 20×30cm의 소품들이다. 경사진 언덕과 도로, 수직(垂直)으로 된
나무들, 지극히 의도적인 구성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그린 이와 같은 구성적
의식은 후일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그 의의는 매우 큰 것이다.
등장 인물들의 모습을 주의 깊게 관찰하면, 인생의 고난과 사랑이 그림 속에서
숨쉬는 것 같고, 그리스도가 금방 그 옆에 와 있는 듯한 절박감을 갖게 한다.
깊은 인간애가 루오의 그림 속에 서식해 있고, 이 인간애는 철학적 차원을 넘어선
종교적 차원으로까지 승화되고 있다.

풍경

루오는 1911년에 지금까지 살았던 정든 곳을 떠나 교외로 이사한다.
이 시기를 고비로 여러 장의 전원풍경(田園風景)을 남겨 놓았다. 공원 또는 한적한
농촌의 풍경을 그렸는데 필치는 무척 경쾌하다. 대개의 경우 인물들을 등장시키고
있는데 자연 속의 점경인물(點景人物)이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
어딘지 모르게 쓸쓸한 분위기가 감도는 작품이며 세잔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특기할 것은 루오 특유의 암색조(暗色調)에서 밝은 화면으로 변한 점이다.

우울한 광대(道化師), 1902-03

루오가 소년 시절 스테인드글라스 공장에 다녔던 적이 있었는데 작품에서는
그때의 영향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검고 굵은 선, 많든 적든 간에 단순화된 색조
처리, 투명한 색감 등이 그 실례라고 할 수 있다. 얼굴 부분의 광채는 비현실적일
정도이다. 루오는 도화사(道化師)에게서 무슨 이야기를 듣고 있을까? 조명을
받은 듯이 보이는 안면 처리, 크게 뜨고 있는 눈, 모두가 너무도 강렬하다.
그리고 상의에 붙어 있는 백색의 리본과 이에 어울리는 색채적 효과는 이 화면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다.

교외의 그리스도

그의 작품이 창작되는 순간, 그것은 항상 기념비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왜냐하면 작품이란 작가의 온갖 노력 끝에 생산되는 것으로, 그가 항상 그와
같은 긴장의 연속 속에서 온갖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까닭이다. 이 풍경에서
느끼는 것은 세속적인 소요나 허식이 없다는 것이다. 쓸쓸한 표정을 지닌 집이
몇 채 있을 뿐, 아득히 지평선으로 이어지는 길 저편에는 달이 외롭게 떠 있으며,
길은 그 반사를 받아 환히 비치고 있다. 이것은 도화사들이 그들의 생활에서
자기 자신으로 돌아갔을 때의 고요일는지도 모를 것이다. 그런데 그 도화사들
옆에는 항상 그리스도가 함께 있다.

道化師: 빨간 코

관객들 앞에 나와서 웃음을 팔던 도화사들이 이제부터 자취를 감추게 된다.
주로 수채를 써서 그린 제 1기에 해당되는 작품들은 인간 사회에서 최고로 노동을
강요당하던 비애와 슬픔에 얽힌 군상들이다. 그러다가 제 2기에 들어서면서
내면적인 변화가 점차 심화되어 가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수채화가
아닌 유채화이다. 뿐만이 아니라 관중 앞에 나온 도화사도 아니다.
그의 억세고도 굵은 상과 그리고 강렬한 색채 및 표정 등은 전자보다 더욱 작가의
내면적인 상을 보여 주고 있다. 이와 같은 양식은 만년에 이르기까지 계속된다.

피에로

루오가 그린 피에로 작품 가운데에서도 온화한 표정의 그림이다.
어둡게 처리된 배경으로 안면이 부각되어 있다. 중후감이 넘쳐 흐르는 표정은
필경 루오 자신의 모습이리라. 언뜻 보아 무표정인 것 같으면서도 어딘지 쓸쓸한
분위기를 보여 주는데 인간의 신비감마저 감도는 듯 하다. 이와 비등한 구성은
만년까지 계속되는데 전체적인 색감, 공간의 처리 등 많은 변화를 가져온다.

성탄절의 풍경

달은 안 보이지만 야경이 틀림없다. 민가의 지붕에는 잔설(殘雪)이 희게 비치고
있으며, 보고 있노라면 왜 그런지 쓸쓸한 적막감이 찾아온다. 인물은 안 보인다.
이 화면에서 인물은 필요 없었을 것이다. 이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그의 도화사가
연상되며, 일종의 공통된 세계를 보여 주는 것 같다. 한편 지평선 저쪽으로는
청색이 보이며, 밤 하늘에 무한히 뻗어가는 인상을 더해주고 있다.

상처를 입은 道化師

루오의 예술은 강렬하면서도 구수한 민화적(民話的)인 흐름을 보여 주고 있다.
상징적이면서도 설화적(說話的)인 내용이다. 그 설화 속에는 달, 구름, 도화사의
의상과 표정들이 보면 볼수록 끝이 없이 인생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 싶다.
앞의 두 사람은 기운없이 눈을 아래로 뜨고 있으며, 키가 작은 뒷사람은 앞을
뚫어질 듯이 쳐다보고 있다. 상단 부분에 안면을 내보이는 인물은 누굴까?
분명 도화사는 아니다. 고달픈 인생항로(人生航路)를 말하는 듯 설화성이 있으면
서도 전체가 풍기는 상징적인 효과는 또다른 별개의 예술성을 말하는 듯 하다.

법정에 나온 그리스도

맑은 표정을 가진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 주위를 에워싸고 있다.
의연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남녀 각각 상기된 표정이다.
하나하나가 모두 윤곽이 다르고 인상이 다르다. 그들은 천사의 얼굴도 아니요,
사도의 얼굴도 아니다. 피고와 증인 같은 세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인상이
험상궂게 보인다. 얼굴은 모두가 열 여섯이나 되는데, 세 사람을 빼면 열 세 사람
이 남는다. 필경 그리스도를 배반한 유태인을 그린 것일까? 혹은 빌라도 법정에
선 그리스도를 조소하는 대사제(大司祭)나 군중일지도 모르겠다.

그리스도의 얼굴

루오의 그리스도는 전능하고 영광에 찬 그리스도 상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가련한 도화사, 재판 받는 피고나 가난한 사람들과 도피하는 사람의
괴로움을 함께 나누려는 고난의 길을 걷는 그리스도 상이다. 루오는 안면을 아래
로 숙인 그리스도 상을 무수히 그리고 있다. 배경이 되는 넓은 공간 속에 유독
붉은 구름이 광채를 보이고 있다. 화면 구성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 이 구름은
화면에서의 상징적 의미 또한 큰 것이다.

푸른 새

전쟁 중 연극계에서 명성을 얻은 여배우 마리아 라니가 모델이 되었다.
고개를 약간 갸우뚱한 자세로 눈을 아래로 깔고 있는 이 미녀는 루오 자신이
화면 윗부분에 표기해 둔 바와 같이 '푸른 새'를 상징적으로 그리면서 화면을
정리하고 있다. 유럽에서는 '새에게 노래를 시키려면 눈을 멀게 하라'는 습관이
있다. 그와 같은 속세적인 것에서 취재, 비록 새를 상징한 얼굴을 그렸지만
루오는 이를 자신의 예술과 비유한 것으로 해석된다. 루오는 훨씬 더 차원 높은
그의 인간상을 주제에 용해시켜 더 멀리 노래하고 있는 것일까?

소가족

대작을 별로 안 그린 루오에게는 예외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대작이다.
높이만 2m가 넘는다. 원래 이것은 규도리 부인에게서 의뢰받은 다피스리를
위한 그림이다. 매우 감동적인 표현이다. 상처 입은 가족 중의 한 사람을 두고
서로가 위로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생활의 고통을 나누려는 표정은 무한한
인간의 사랑을 말해 주는 듯, 아니 보다 더 종교적인 차원에까지 끌어 올리고
있다. 필경 루오는 이와 같은 슬픈 사연의 사람들을 등장시키고 있는데, 궁극적
으로는 그것에서 인간의 참다운 행복과 사는 보람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루오의 또 다른 대작은 1931~32년에 그려진 <무희>(216cm X 116.5cm)다.

저녁놀

루오는 1937년부터 39년까지 많은 풍경화를 그렸다. 1920년경에 그린 <교외
의 그리스도>, <성탄절 풍경> 등에 비하면 화면(색조)이 맑아졌다.
이미 그의 풍경화는 시각의 자연에서 심각(心覺)의 자연으로 변해 온 것이다.
구도나 여기 등장되는 건물, 인물들은 물론이지만 광선 처리나 화면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종교인으로서의 심각적 감정에서 솟아난 새로운 차원의 세계이다.
그리스도와 2, 3명의 인물들이 노상에 서 있을 뿐이다. 자유로운 필치, 굵은 선,
충만된 구성 등 실로 놀라운 경지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특히 녹색조(綠色調)의 하늘 처리 등은 격조 높은 그의 품위를 말해 주는 듯하다.

저녁놀 2, 1952

聖顔(성안), 1929-1939

그리스도가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는 도중 한 여성이 수건으로 땀을 닦아 준다.
이상하게도 그 수건에 그리스도의 상이 찍혀 사람들은 이것을 기적이라고 부르면
서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 때의 그리스도의 모습을 聖顔(성안)이라고
한다. 루오는 여러 장의 성안을 그렸는데, 그 중에서도 이 작품은 일본 도쿄의
요시 재단에 소장되어 있는 지극히 종교적인 걸작이다. 많은 화가들이 예수의 모습
을 그렸으나, 눈을 크게 뜨고 있는 예수의 모습은 루오의 이 작품이 처음이다.
이 작품에서는 그리스도의 고뇌와 인내의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본질
에 관해서는 중세 이래 많은 신학자들이 논해 왔다. 루오는 화가로서의 두터운
신앙심으로 성안을 그린 것이다.

聖骸布(성해포)

흑색을 주조색으로 굵은 필치, 대담한 색조 등 유니크한 작품이다.
이것은 수난의 성안(聖顔)을 그린 것으로 어느 친절한 사람(唐墨-당묵-을 선사
해 준 분)에게 사례로 건네준 작품이다. 단조롭게 처리된 이 작품은 내용에서
부터 풍기는 광채가 형용할 수 없는 품격을 지니고 있다. 신비로운 경지, 동양적
인 정감, 여기에 루오의 회화성이 있으며 그 마력이 있는 것이다.

예루살렘, 1954

The Old King, 1937

노왕(老王)의 표정은 몹시 침통하다. 이 작품에서는 왕의 권위나 위신 등은 찾아
볼 수 없다. 왕관 그리고 화려한 의상에서도 그와 같은 허영심은 없다.
마치 <수난의 그리스도> 나 <상처입은 도화사> 상과 일맥 상통하는 인간상이다.
신비롭게 가라앉은 화면 처리는 마치 중세 시대의 '글라스 회화'를 연상시켜 준다.
싸인이 없는 것을 보면 다시 가필하려는 작가의 고원(高遠)한 인간상을 물씬
느끼게 된다. 한편 이 작품은 루오 인간상의 작품 중에서 가장 작가의 정신 내부를
잘 표현한 걸작이다.

受難(수난)에서(모든 이의 惡의 지식)

유리와 같은 투명한 배경 앞에 서 있는 두 사람의 나상은 대화하는 형태로서
중후감이 넘쳐 흐르고 있다. 화면이 양분되기 쉬운 위태로움을 안고 있지만,
두 사람 모두가 다리를 벌려 그 위태로움을 덜어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하반신
이 상반신에 비교해서 짧게 표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안정감있게 대화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두 사람 모두의 바깥쪽 다리가 상반신을 받쳐 주고 있기
때문일까? 색채도 대조적인 색을 사용했음에도 품위가 한층 높아 보인다.
중량감이 넘쳐 흐르는 작품이다.

受難(수난)에서(같은 밤 함께 죽어)

그리스도 좌우로 두 사람이 그려졌는데 이 사람들은 모두 도적들이다.
한편 그리스도의 머리 위로부터는 은은하게 광선이 흐르고 있다.
핏빛으로 물든 골고다 언덕(화면 좌측) 아래로부터는 달이 떠오르고 있다.
은은한 광선은 하반신을 비추고 있다. 화면 구석구석에까지 드라마틱한 처리를
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화면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마치 액자의
테두리) 부분의 수법은 주인공들을 돋보이게 하는 데 효력을 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루오의 심원한 회화성이 있다.

受難(수난)에서(무게도 부피도 없이 그는 나간다)

루오의 작품은 섬세한 묘사가 있다. 그 보다 더 차원 높은 경지를 그리기 위함
이리라. 초기에 그는 모로의 교실에서 배웠으며 모로는 물론 렘브란트의 영향
까지 받았었다. 그래서 그의 24세 때의 작품 <그리스도의 죽음을 슬퍼하는 성녀
들> 등을 보게 되면 무서운 묘사력을 지녔던 루오이다. 루오는 단연 그 묘사에서
벗어나 대담한 필치와 색면(色面) 처리들을 자유롭게 표출하는데 이는 보다 더
차원 높은 경지를 소망했기 때문이다.

受難(수난)에서(두 궁전에 연한 이 인기(人氣)없는 길)

환상적인 수아레스의 문장에 맞추어 제작된 시리즈의 한 장면이다.
희게 입고 오른쪽 문 앞에 서 있는 것이 그리스도로, 왼쪽 건물 끝에 우뚝 서
있는 망루대 같은 수직으로 된 건물 부분과 조화를 이루면서 어울린다.
그 위 하늘에는 역시 달이 떠 있다. 테두리를 그려 넣은 것도 특수한 사고에서
나온 것이다. 아무도 없는 중앙의 길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지평선 너머로
우리를 유린해 가는 듯 어딘지 모르게 쓸쓸하기만 하다. 우리의 심층 한 부분에
있는 고독감을 루오는 자신의 예술 세계로 승화시킨 것이다.

受難(수난)에서(풀에 샘물이 속삭이듯)

조부모도 양친도 모두가 독실한 카톨릭 신앙이 두터운 사람들이었다.
루오의 그와 같은 가정 화경과 거기에다 예술적인 충동이 섞여, 그가 그리는
그리스도는 그의 인간 내부의 전부가 성화(聖畵)의 내용과 일치되면서 유감없이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마리아를 앞에 앉히고 영적대화(靈的對話)가 오가는
것이다. 달이 어김없이 닮은 마리아 상 위(위쪽 상단)에 떠 있으며 좌우의 균형을
이루어 주고 있다. 루오의 작품 앞에서는 그저 머리가 숙여진다.

受難(수난)에서(여기서 이 세상은 없어지고 새 세계가 탄생했다)

화면에 골고다 언덕은 가운데, 그리고 좌우로 십자가가 그려 있을 뿐 언뜻 보아
적적하고 음산하고 무섭다. 십자가는 하늘을 향해서 치솟아 있을 뿐, 모든 지상
의 역사가 이미 종말을 고하는 듯한 느낌조차 든다.

그리스도 안에 모여, 1945

受難(수난)에서(너희들은 이 세상의 어려움을 아느냐?)

앙드레 수아레스의 종교 시집 '수난'(1939년)의 삽화 12매 가운데 10매를 뽑아
동판화를 새로이 유화로 제작한 것이다. 슬픈 사연에 잠긴 여인들과 대화하는
장면을 그렸는데 박진감에 넘쳐 흐른다. 멀리 달이 떠 있으며 엄숙한 분위기
표현에 성공한 작품이다. 루오의 작품이 모두 그러하듯이 단조롭게 보이지만,
내용에서 풍겨 나오는 이야기는 보다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쟉 보노무

쟉 보노무는 농민을 가리키는 속칭(俗稱)이다. 백의와 푸른 하의, 그리고 붉은 띠를
두른 이 사나이는 뒤에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 상반신을 약간 숙인 채로 달이
떠 있는 밤에 어디론가 걸어 가고 있다. 모든 인간들의 보이지 않는 운명적이며
숙명적인 상(像)을 그는 이 그림을 통해서 대변해 주고 있다.
그리고 더욱 그가 강조하는 것은 인간의 고독감이다. 멀리 지평선 위로 외딴 집
이 한 채 서 있다. 집의 흰 벽면은 인물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으며, 붉은 띠와
지붕이 또한 색채적인 조화를 형성하면서 한층 화면을 돋보이게 하고 있다.

피난

루오가 처음부터 시도한 시리즈 <피난> 가운데에서도 대표적인 그림이다.
루오는 그의 '독백록'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피난하는 사람들, 그 모습들은 우리 세대의 모든 사람들의 상(像)이다.
사람들은 병마와 권태와 빈곤에서 벗어나려고 애쓴다. 그리고, 겨우 벗어나려고
하면 다시 재난이 닥쳐오며 급기야는 죽음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지만 벗어날
수 없다. 아무 의욕이나 희망을 갖지 않은 피난자들은 얼굴을 숙이고 힘없이
걸어야 한다. 뒤를 돌이켜볼 여유도 없이, 그리고 많은 예언자들이 약속한 행복
따위는 잊은 채 거닐고 있다." 저녁놀은 어느덧 불길한 핏빛으로 물들었으며
희망의 별은 까마득하다.

그리스도교적 夜景

루오가 그린 수많은 풍경화 중에서 가장 우주적인 작품으로 보여진다.
구도는 아래 부분에서 윗부분으로 장대하게 울려 퍼졌고, 수 개의 원(圓)과 반원
(半圓)의 포름이 화면 중심부에 위치해 루오 특유의 안정감을 나타내고 있다.
내면 세계를 표출 시키는 그의 회화 언어가 그러하듯 이 그림에 등장한 배, 바다,
달, 섬, 집, 수목 등은 달빛을 받은 달밤의 자연 현상을 시각 체험대로 재현시킨
것이 아니고, 그 실체를 보는 루오의 내면적인 세계, 즉 심각적(心覺的) 진실을
그린 것으로 해석된다. 신약성서에 나오는 티베리야스 호(湖)에서의 그리스도와
제자(그림 아래 부분)가 모티브인데, 신비스러운 빛과 검은 그림자 및 무한히
크고 넓은 화면이 어떤 영겁의 세계, 영원한 정신 세계를 표상하고 있다.

우리들의 쟌느

제 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면서 나치스 군대가 프랑스로 진주(進駐)했었다.
남달리 프랑스를 사랑하던 루오의 심정은 국민들의 추앙받는 성녀(聖女) 쟌
다르크를 의식하게 되었으며, 그래서 이 작품을 그리게 되었을 것이다.
조국의 영웅이라기 보다 수난받는 인간상으로 그렸다. 배경은 이 시기에 꾸준히
그린 그리스도가 등장하는 풍경화와 같다. 주인공은 숨김 없이 인간으로서의
고뇌와 조국애의 강렬한 의지를 보여 주고 있다. 작가란 때로는 그 시대의
증인이며 대변자가 된다. 그리고 그 시대를 고발하기도 한다. 그 아름다운
조국애는 누구의 것도 아닌 바로 우리의 것이리라.

풍경(세 사람이 있는)

루오는 만년에 이르자 화포에 바른 유채 물감을 나이프로 깎아 내고 다시 바르는
기법을 버린다. 따라서 화면은 울룩불룩하고 터치 자국이 더욱 생생하게 나타난다.
중기 작품의 특색인 문지른 듯한 색의 투명감은 없어지고 '용암(熔岩)과 같은
중후한 색채 덩어리(P. 크르테온)'가 조형의 수단으로 화한다.
색채는 선명하고 밝으며 따라서 건강하다. 이와 같은 분명하고 자신감에 넘치는
조형 의지는 그의 기나긴 고난 끝에 얻어낸 예술 경지와 독실한 신앙심에서 비롯
된 것으로 보인다. 이 그림에서는 작열하는 태양 아래 세 인물을 그림 전면에
배치하고 파뿌리 모양의 성당을 그림 원경 중앙에 앉혀 하늘 나라와 인간 사회를
상징적으로 대조, 경건한 분위기가 감돌게 했다. 루오는 이 해에 볼라르 가(家)와
의 소송으로 되찾은 그림 가운데 315점을 불태웠다.

트리오, 1943

피에로의 얼굴에 찍힌 점 하나. 타인의 즐거움을 위해 자신의 고통과 슬픔을
감추고 찍은 바보 같은 점에서 성자의 모습이 아스라히 잡힌다.
이 작품은 3명의 삐에로를 그린 것이지만 종교화적인 엄숙함을 지니고 있다.
루오에게 있어서 삐에로와 곡예사들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루오는 그들을 인간사를 벗어난 자유의 상징인 동시에 수난을 당하는 그리스도의
또 다른 모습을 지녔다고 보았다. 창부의 모습이 개성을 담은 개인이라기보다는
영혼까지 파멸되어 가는 인간사의 대표로 그려졌다면 그와는 반대로 삐에로는
옷을 통해 그 직업을 확실히 추측할 수 있기는 하지만, 루오의 그림 속에서는
대체로 삐에로의 묘기나 역할, 그리고 소도구 등은 가능한 배제되고, 인간적인
갈등이나 슬픔 고민을 안고 있는 한 인간으로서의 모습이 부각되며, 그것마저도
초월한 성자로서의 모습까지도 느껴지게 한다.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세 명의
삐에로는 형형한 눈으로 세상과 삶을 응시하여 그 허무는 직관하고 통찰하는
인물들로 그려지고 있다.

푸른색 배경의 삐에로들, 1943

루오는 소외되고 잊혀진 변두리 인생들 중에서도 삐에로의 곡예사들의 모습에서
고단한 인생을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끝없는 동정과 애정을 드러내고 있는 이
작품에서 푸른색 배경위에 등장하고 있는 두 인물은 삐에로들로 이들은 항상
타인의 웃음을 사기 위해 몸을 우스꽝스럽게 움직여야 하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 장면 속의 두 삐에로는 고요한 푸른색 배경에 정적인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다. 푸른 색은 전통적인 서양 종교화에서 정신성과 초월성을 상징하며, 루오는
전통적인 색의 상징성을 이어받아 푸른색을 정신적 의미로써 사용하고 있다.
푸른 배경 속에 놓여진 고요한 두 명의 삐에로는 낮고 천한 일을 고단하게 수행
하는 가운데서도 정신적 고귀함을 잃지 않는 듯이 보이며, 이것이 바로 루오가
세상을 살면서 얻고자하는, 그림 속에서 표현하고자 했던 가치이다.

베로니카, 1945

전승에 의하면 성녀 베로니카는 예수께서 갈바리아 산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예수님의 흘러 내리는 피땀을 닦아준 예루살렘의 어느 부인이다.
그녀는 자신의 옷으로 성면을 씻었는데 나중에 살펴보니 거기에 주님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그 여인은 베로니카로 알려졌는데, "베로"는 라틴
어로 "베라(참, 진실한)"이고, "이카"는 "참모습"이란 뜻이 된다.
루오의 베로니카는 단순한 선표와 면으로 이루어진 종교적 초상화이지만, 이 작품
속에서 드러나는 여인의 얼굴은 초월성과 지상의 아름다움, 종교적 엄숙함과
여인의 따스함을 모두 지니고 있다. 그가 그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이 고통
속에서 세상을 초월하는 자의 고독함을 표현하고 있다면, 그의 베로니카는 세상을
향한 넓은 자비와 따사로움이 잘 표현되어 있다.

무지개 곡마단의 소녀 마술사, 1948-49

곡마단의 소녀 마술사는 옅은 미소를 띄고 관객을 바라본다.
전체적인 화려한 색감은 소녀 마술사가 펼치는 루오의 종교적 인물들에서 보여
지는 전형적인 얼굴을 하고 있다. 더군다나 전통적인 종교화에서 아치형의 건축
구조물 안에 있는 예수나 마리아, 성인 등의 인물이 등장하는 문법을 그대로
따르고 있음으로 인해, 이 소녀의 복장이 아니라면 마술사가 아닌 종교적 인물로
생각될 정도이다. 루오가 그려내는 현실을 살면서 현실을 초월하는 인물들은
루오가 표현하고자 하는 종교적인 주제들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아가 바로 이들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의 참모습을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수난), 1953-56

루오는 "보는 사람이 감동을 받아서 예수님을 믿게 될 만큼 감동적인 예수님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 자신의 유일한 소원이라고 말하곤 했다.
따라서 그가 그리는 예수의 얼굴은 극도로 간단한 선묘로 이루어져 있지만,
조용히 감긴 눈과 긴 코, 그리고 의지로 다물어져 있는 입매만으로도 극한의
초월성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구도의 얼굴은 예수 그리스도의 알굴 뿐 아니라,
가난한 삶 속에서 고귀함을 실현하는 삶을 살아가는 현실적인 인물들의 얼굴
에도 적용되어 있다. 루오가 그려내는 인간의 고귀함은 고통 한가운데서 그
고통을 감내하는 가운데 얻어지는 것이고, 그러한 고귀함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다.

사라, 1956

루오의 마지막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반죽처럼 걸쭉한 물감이 두꺼운 층을
이루고 있으며, 이는 색채의 뉘앙스와 빛의 효과를 늘려가며 실험하던 말년의
제작기법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림 속 얼굴에서 느껴지는 질감은 그림에 조각적
인 느낌을 가져다 준다.

"As proud as if she were still alive of hier noble descent", 1937

Tete d'une jeune fille, 1939

Couverture II pour Verve 4, 1938

Madame Carmencita

Le Christ et Mammon

Clown et Enfant(서커스), 1930

Ballerine(서커스), 1932

Enfant de la Balle(유성 서커스단), 1935

Parade(유성 서커스단), 1934

"Ecce homo"

Fille de Cirque

Christ in the Neighborhood, 1935

Christ among the poor, 1935

Automne(가을), 1938

Christ on the Cross, 1938

Seated nude, 1938

The Conversation, 1938

Dr. Paille and Prof. Poutre, 1938

The flying fish, 1928

Les Visages

루오는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인간의 비참한 모습과 그리스도의 자비를
대조적으로 나타내는 화집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A. 수아레스의 성시(聖詩)를 근거로 그린 <미제레레Miserere:
비애>
연작(連作)을 탄생시킨 것이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자적인
것으로 그의 예술이 확립되고, 20세기의 유일한 종교화가로 전개되기 시작한
것은 이 시기부터이다. 인간 군상들이 그리스도의 자비와 은총을 갈구하며
궁극적으로 고통에서 벗어나 구원으로 나아가려는 갈망을 읽을 수 있다.
또한 육체적 결함과 고통이 정신적 가치와 위상에는 손상을 주지 않음은 물론
이고 오히려 그것이 더 인간을 위대하게 하고 견고하게 함을 일깨워 준다.
수아레스는 "예술가란 사랑을 가장 아름다운 형태로 만들어 고통 받는 이에게
나누어주는 사람"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런 면에서 둘은 서로 잘 통했으리라.
가장 높은 단계의 영성은 가장 밑바닥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라는 그의 예술철학
이 바로 그의 독창적 예술을 낳았고 그만의 개성과 천재성을 구축하는 토양이
되었다. 그의 종교화는 종교적 틀에서 벗어난 세속적 종교화다.
그래서 사회에서 손가락질 당하고 외면된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미제레레'라는 명칭은 4세기 라틴어 번역본 '불가타 성경'의 시편 50편 구절인
"미제레레 메이, 데우스(miserere mei, Deus:주여 불쌍히 여기소서)"에서
기원한다. 루오는 이 판화집의 본문을 따로 만들지 않고 직접 지은 시구나 성서
구절에서 뽑아 제목만 붙였다. 미제레레 연작은 첫 구상에서 출판까지 27년이
걸릴 만큼 우여곡절도 많았다. 처음 구상은 <미제레레와 전쟁>이라는 제목에
50점으로 구성된 동판화 작품집으로 루오는 100점이 넘는 밑그림을 바탕으로
1921년부터 동판화 제작을 시작해 1926년 58점을 최종 완성했다.
1927년 58점의 동판화가 인쇄되었지만, 2차 세계대전과 출판업자의 갑작스런
사고사(1939년)에다 미완성 작품에 대한 소유권 소송이 겹치며 출판이 지연
되었던 것이다. 결국 1948년 파리의 한 출판사에서 <미제레레> 판화집이 간행
되며 세기의 명작은 빛을 보게 되었다.
<미제레레> 연작은 루오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깊은 애정을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기도 하다. 세계대전이 끝난 뒤 2번의 전쟁에 지친 프랑스 국민들
에게 전쟁의 비참함을 바라보는 날카로운 시선과 인간에 대한 성찰이 깊은 울림
을 일으켰던 것이다. 많은 화가들이 현실을 외면하고 추상의 세계로 도피할 때도
그는 현실세계 속 인간으로 이어진 끈을 놓지 않았고, 후세에 '정의로운 화가'로
기억될 수 있었다.(이번 전시에는 작품 58점 모두 전시되고 있다.)

Miserere, 1923

하느님,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Les ruines elle-meme onto peri, 1926

폐허조차도 사라져 버렸다.

Are we not all convicts?, 1926

우리 모두 죄인이 아닙니까?

Solitaire, en cette vie d'embuches et de malices, 1922

The condemned man was led away, 1922
유죄선고를 받은 자는 떠나버리고...

En tant d'ordres divers, le beau metier d'ensemencer une terre hostile/
In so many different domains, the noble task of sowing in a hostile land, 1922
여러 분야와 마찬가지로, 가장 좋은 직업은 척박한 땅에 씨 뿌리는 것.

Homo homini lupus, 1926

Squelette, 1927

De profundis/From depths of soul, I cry to you, O Lord,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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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40 후기인상주의: 고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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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

*Self-Portrait with Felt Hat, Winter 1887-88*

1853 3 30 프로트 준데르트에서 출생하였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1880
화가가 되기로 결심할 때까지 화상점원, 목사 여러 직업에 종사하였다.
마침내 브뤼셀·헤이그·앙베르 등지에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는데, 언제나 노동자·
농민 하층민 모습과 주변 생활과 풍경을 담았다. 초기 걸작 《감자 먹는 사람들》
(1885)
무렵의 작품이다. 1886 화상점원으로 일하고 있는 동생 테오를 찾아
파리에 나온 고흐는 코르몽의 화숙(畵塾)에서 베르나르와 툴루즈 로트레크를 알게
되었다. 인상파의 밝은 그림과 일본의 우키요에[浮世繪] 판화에 접함으로써 그때까지
렘브란트와 밀레풍() 어두운 화풍에서 밝은 화풍으로 바뀌었으며, 정열적인
작품활동을 하였다. 자화상이 급격히 많아진 것도 무렵부터였다.
그러나 파리라는 대도시의 생활에 싫증을 느껴 1888 2 보다 밝은 태양을 찾아
프랑스 아를로 이주하였다. 아를로 이주한 뒤부터 죽을 때까지의 2 반이야말로
고흐 예술의 참다운 개화기였다. 그는 그곳의 밝은 태양에 감격하였으며 《아를의 도개
(跳開橋), 《해바라기》와 같은 걸작을 제작했다.

한편 새로운 예술촌 건설을 꿈꾸고 고갱과 베르나르에게 그곳으로 것을 끈질기게
권유하였다. 그리하여 고갱과의 공동생활이 시작되었으나 성격차이가 심하여 순조롭지
못하였다. 그해 12 고흐는 정신병 발작을 일으켜 고갱과 다툰 끝에 면도칼로 자신의
귀를 잘라버렸다. 고흐의 생활은 발작과 입원의 연속이었으며, 발작이 없을 때에
그동안의 공백을 메우기라도 하려는 마구 그려댔다. 발작과 그림 제작에 지쳐
파리 근교 오베르에 있는 의사 가셰에게 찾아간 것은 1890 5월이었다.
한때 건강회복으로 발작의 불안에서 벗어나는 하였으나 다시 쇠약해져 끝내 권총
자살을 하였다. 그의 유작은 매우 많다. 지금은 세계가 그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지만
그의 정열적인 작풍이 생전에는 끝내 인정받지 못하였다. 그가 위대한 화가라는 인상을
처음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것은 1903년의 유작전 이후였다. 따라서 그는 20세기
야수파 화가들의 최초의 지표가 되었다. 그의 작품은 네덜란드에 가장 많이 있는
40 가까운 자화상 이외에도 《빈센트의 방》《별이 빛나는 밤》《밤의 카페》
《삼()나무와 별이 있는 길》 등이 유명하다.

*Still Life of Shoes, 1886*

고흐는 농촌의 풍경과 농민들의 생활을 애정을 가지고 그린 작품들이 많다.
작품처럼 낡은 신발을 정물의 소재로 다루었던 화가는 고흐 이전에는 밀레가
있을 뿐이다. 밀레의 서민 감정에 공감을 느꼈던지 그런 영향을 받은 흔적은
고흐의 많은 작품에서 찾아볼 있다. 작품도 밀레의 신발을 그린 데생에 자극
받아서 그린 것이 틀림없으리라. 켤레의 신발은 농부의 생활과 힘겨운
수고의 전부를 이야기해 주고도 남음이 있다. 그는 파리에 나와서도 세련되고 밝은
도시적인 풍물을 그리면서, 고향에 대한 향수처럼 이런 신발들을 그려 네덜란드와
파리 양쪽에 살고 있는 그의 마음의 갈등 같은 것을 대변하여 주고 있다. 색채가
밝아지고 필치가 잘게 되면서 격렬하여 지고, 배경의 밝은 빛과 어두운 신발이
강한 대비를 이룬다.

*몽마르트르의 술집,1886*

1886 가을 고흐가 파리의 몽마르트르에 도착한 년만에 그려진 몽마르트
술집은, 당시 빈센트가 몽마르트르를 소재로그린 많은 풍경들 중에서도 매우 뛰어
작품이다. 특히 구도와 화법은 이미 향후의 그의 걸작으로 꼽히는 <오베르
쉬르 우아즈 교회> <낮잠> 등을 비롯한 작품들이 보여주게 빈센트 고유의 화법을
그대로 예시하고 있다. 자신의 일상 주변을 소재로 , 근경도 원경도 아닌 시점,
풍경과 인물에 대한 즉각적인, 하지만 과장되지 않은 인상, 그리고 강렬한 터치는
인상주의와 동시에 사실주의를 추구한 빈센트 고유의 화법을 부족함 없이 드러내
보이고 있다.

*자화상, 1887*

고흐는 1885년부터 그가 자살한 1890년까지 37점의 자화상을 남겼다.
이렇게 많은 자화상을 남긴 것은 모델을 구하기 힘들었던 고흐의 궁핍한 형편 때문
이기도 했지만, 자화상이 고흐 자신을 확인하는 특별한 의미였기 때문이다.
한결 같은 포즈로 거울을 응시한 그려진 고흐의 자화상들은 그가 그림을 통해
자신의 내면과 마주하였음을 보여준다.
자화상들을 시기별로 살펴보면, 고흐의 주최할 없는 열정, 평탄치 못한 고단했던
그의 삶의 궤적을 좇을 있다. 작품은 파리 시대를 마감할 즈음인 1887년경에
그려졌다. 어두운 배경 속에 노란 황금빛으로 빛나는 고흐의 얼굴이 유난히 돋보인다.
매끈하고 섬세하게 채색된 전통적인 인물화와 달리 방향성 있는 짧은 붓질이 전면을
메우고 있다. 머리카락과 수염의 묘사에서 보여지는 짧은 붓질의 독특한 질감과 노란
색과 초록색, 붉은색, 푸른색 등의 원색의 병치는 인물의 불안정한 심리적 상태에 대한
무언의 메시지이다. 고흐의 자화상은 이렇듯 작가의 심리 상태가 표출되는 표현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다.

*탕기 아저씨,1887*

*The Italian Woman, 1887*

1887 겨울에 그려진 그림 역시 <탕기 아저씨> 마찬가지로 파리 시기를
마감하고 자신의 작품 세계를 확립하기 시작한 과도기의 성격을 보여준다.
작품의 모델이 이탈리아 여인은 카페 탐부랭(Le Tambourin) 주인인
아고스티나 세가토리(Agostina Segarori)이다. 그녀는 그림을 좋아하여 자신의
카페에서 일본 판화전을 열기도 하였다. 들라크루아로부터 야수파에 이르기까지
이국적인 여성의 주제는 화가의 도피하고 싶은 욕구를 대변하였다.
여인의 얼굴은 본래의 얼굴 대신에 화가의 주관적인 색채가 가해져, 마치 마스크
보는 강렬한 인상을 준다. 고흐는 작품에서 <탕기 아저씨>에서 보여주
었던 일본 판화 대신 배경 전면에 노란색을 대담하게 칠하였다. 단조로아 보일
있는 화면은 오른쪽으로 각이 장식과 의자 등받이가 보여주는 시각적 균형
덕분에 리듬감을 얻었다. 원피스의 빨간색과 초록색을 비롯한 다양한 색깔들이
노란색 배경 덕분에 더욱 화려하게 느껴진다. 또한 화면에 띠를 두른 빨간색과
초록색 줄무늬의 보색 대비 역시 원피스와 여인의 얼굴에 나타난 강렬한 색채들과
훌륭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Self-Portrait as an Artist, 1887-88*

*해바라기가 있는 정물,1887*

고흐는 네덜란드에서 파리로, 파리에서 아를르로 조금이라도 태양에 가까이
접근하려고 따라간 셈이다. 그의 이러한 태양에 대한 집념은 해바라기를 닮은 것이라
있다. 해바라기의 형상이나 색채, 그리고 해를 향한 성질은 고흐의 내면적
원형이라 있고, 또한 자신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었다.
미묘한 톤의 파란색을 배경으로, 강렬한 변화의 노랑으로 모습을 드러낸 <해바라기>
고흐가 동생에게 말했듯이,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풍부한 변화로 인해 태양에
대한, 또한 생명에 대한 찬가를 부르고 있는 같다. 그는 자신의 강렬한 생명력을
해바라기를 통해 것이다. 1886년부터 그리기 시작한 해바라기는 처음에는 송이
시작했다가 파리에 머물던 시기인 1887년에는 송이로 수가 늘어난다.
흥미로운 것은 파리 시기에 그려진 해바라기들이 꽃병에 꽂혀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잘려진 바닥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바닥에 흩어져 있는 해바라기들의 모습은 절규
하는 고흐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1888 여름 아를르에서 고흐는 고갱을
기다리며 점의 해바라기를 동시에 작업한다. 그리고 하나를 추가해, 점의 대형
해바라기 그림을 고갱이 머물 방에 걸어 놓는다.
<다섯 송이 해바라기> 2 대전 화재로 소실되고, 현재는 점만 남아
있다. 1889 1 고흐는 새로 점의 해바라기를 그리는데, 점을 같은
11 브뤼셀에서 열린 20 전에 출품해 호평을 받았다.

*Entrance to the Public Garden in Arles, 1888*

*The Harvest, June 1888*

*La Mousme, July 1888*

*집배원 룰랭, 1888*

고흐는 아를에서 약간은 사람들의 몰이해와 조롱 속에서 둘러싸이기도 했지만, 제작의
틈바구니에서 한가롭게 밤의 카페에서 차츰 가까이 있는 친구들을 만들어
갔다. '금빛을 장식한 푸른 제복을 입고, 수염을 길러 마치 소크라테스처럼 보이는 우편
배달부' 루랭은 중에서도 가장 가깝게 영속적(永續的) 우정을 갖게 되었다.
특히 루랭의 가족 전체와 친분이 두터워, 아들 아르망의 초상도 그렸고 부인도 그렸다.

*Portrait of an Old Peasant, August 1888*

고흐는 누에넹 시대에 많은 농부를 주제로 하는 작품을 남겼으나, 유감스럽게도
아를 시대에는 농부 사람만을 그렸다. 그가 농부들의 생활에 대한 흥미를
잃은 것은 아니었으나, 농부와 개별적으로 가까이 지낼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작품의 노농부는 파시앙스 에스카리에라는 이름의 카마르
출신의 농부로서, 고흐는 번에 걸쳐 그의 초상을 그렸다. 다른 하나는 반신상
으로 손은 그리지 않았다. 적어도 아를 시대의 그는 생의 공감자로서 농부를 응시
하는 태도가 아니라 색채나 빛에 대한 조형적 흥미의 대상으로서 더욱 인간적 흥미
북돋우어 갔다. 작품에 있어서도 상부의 강렬한 노란색과 빨간색, 하부의
대비적인 푸른 , 억센 필치 등의 조형적 시도로써 농부를 그리고 있음을 분명
하게 느낄 수가 있다.

*Drawbridge with Carriage(아를의 도개교), March 1888*

고흐가 아를에서 발견한 중에서 가장 그의 집념을 불러일으킨 모티브 중의
하나가 도개교이다. 아를에서 부크에 이르는 운하에 놓여 있는 다리는
네덜란드에서 흔히 있는 이런 다리에 대한 향수를 그의 마음속에 불러
일으킨 것이다. 네덜란드에 비하면 밝은 광선에 맑고 푸른 하늘과 물에 둘러싸인
굵고 가는 선의 결구(結構) 이루어진 단순한 모양의 다리의 조형은 그의 표현
의도에 알맞게 들어맞았던 것이다.

*아를르의 무도회장,1888*

고흐가 파리를 떠나 아를르에 도착한 것은 1888 2월이었다.
남프랑스의 강렬한 햇살에 감명을 받은 고흐는 곳에서 그의 가장 알려진
작품 점을 그렸다. 그가 아를르에 체류한 얼마 안되어서 고흐는
고갱에게 함께 작업을 하자고 초대했고, 고흐는 고갱에게 완전히 매료되었다.
작품은 당시 고갱에게 받은 영향 또한 고갱을 통해 알게 고갱의 제자인
에밀 베르나르의 영향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고갱은 종합주의적인 스타일로
그려진 베르나르의 걸작 <브아 다무르의 마들렌느> 고흐에게 보여준
있었다. 사실주의적인 묘사를 피하고 있는 작품에서 시골 농부 여인들의
형태는 다소 눈에 거슬리는 검은 선으로 둘러쳐져 있고 생경한 초록색 배경
에서 검은 선들은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베르나르의 그림을 복제하여 가지고 있던 고흐는, 작품 속에서 몇몇 기술
적인 요소들을 빌려와 작품에 시도한 듯하다. 형태를 분명하게 구획 짓는
윤곽선, 인상주의자들의 분절된 터치와는 반대로 두껍고 납작하게 발라진 색채,
화면 전체에 고르지 않게 그려진 여인들의 실루엣 등은 분명히 베르나르의 그림
연상시키는 조형 요소들이다. 작품은 고흐가 추상으로 향하는 언저리
에서 보여준 실험적인 작품 점이라고 있다. 그러나 인물의 얼굴
모습이 캐리커쳐에 버금가게 일그러져 있을 정도로 그림에 역시 고흐 특유의
기질이 예외 없이 녹아들어 있다. 같은 시기 쇠라와 로트렉 역시 이런 종류의
주제, 댄스홀과 같은 대중의 문화를 화폭에 담았다.

*아를르의 고흐의 , 1888*

강렬한 푸름과 노랑으로 화면을 2등분하여 밝은 태양을 만끽하는 평화스러운
시골 마을의 인상을 설득력 있게 나타내고 있는 이작품은 그의 조형적인 의도가
뚜렷이 느껴진다. 고흐는 1888 5월에 아를의 가까운 라마르티느 광장에
있는 노란 집을 빌려 조금씩 손을 대고 가구를 넣어서 9월부터 옮겨 살았다.
고갱을 맞이하여 그의 불행한 비극을 일으킨 것도 집이었다. 바깥은 노랑,
속은 흰색으로 되어 방과 작은 개를 갖춘 조그만 집을 빌린 5월에
바로 이사들지 못한 것은 동생 테오가 가구에 너무 비용이 들까 걱정했기 때문
이었다.

*밤의 카페, 1888*

위안을 찾아다니는 올빼미족, 떠돌이, 예술가들의 장소인 카페를 비스듬하게
놓인 당구대가 채우고 있다. 상의를 입은 카페의 주인은 인공조명에 의해
강조된 밝은 색채들 사이에서 시각적으로 단절되어 있다. 고흐의 이와 같은 작품들
이후의 표현주의 발전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밤의 카페 테라스, 1888*

가스등의 진한 노란색과 밤하늘의 파란색은 차양과 카페 벽의 초록색으로 인해
서로를 돋보이게 하고 있다. 밤의 카페 테라스를 묘사한 그림은 노랑과 파랑,
그리고 색의 혼합색인 녹색이 중심을 이루는 그림이다. 원근법의 구조를 따른
화면은 혼합색의 강렬한 대비를 더욱 강조하며, 그림에 깊이를 부여하고 있다.
하지만 밤하늘의 별은 소실점 끝에 자리잡지 않고, 놀랍게도 앞으로 도출되어
있다. 오래 전부터 카페는 예술가들의 집합 장소였고, 말의 잔치가 벌어지는
토론장이었으며, 압셍트 주를 마시는 주정꾼들의 타락과 은밀한 장소이기도 했다.
이런 카페가 본격적으로 묘사되며 회화의 주제로 자리잡은 것은 인상주의 시기에
들어와서다. 이전에는 생각지도 않았던 일상적 삶의 공간들이 회화의 대상이
것이다. <밤의 카페 테라스> 그리며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낸다. "밤의 정경이나 밤의 효과를 현장에서 그려내는 , 걸음
나아가서 자체를 그리는 , 이것이 현재 내가 갖는 흥미의 중심이다."
고흐의 밤의 풍경에 대한 열정은 인상파적인 흥미에서 로드렉이나 드가가
밤의 광선에 열을 올린 것과는 다른 의미를 지닌다. 타는 듯한 정신의 낮을 향했
고흐의 눈이, 마음속의 보다 어두운 부분, 정신의 그늘진 부분을 향하게
것이다. 그에게 " 그리는가?" 라는 문제는 바로 " 사는가?" 문제였던
이다.

* 강의 별이 빛나는 ,1888*

고흐가 태어나기 , 같은 같은 날에 세상을 떠난 형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은 빈센트 고흐. 그는 죽은 형의 무덤을 찾을 때마다 이름과 존재 사이의
혼란과 혼란의 중심에 있는 죽음의 공포를 겪어야만 했다. 아를르에 도착한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타라스콩이나 루안에 가려면 기차를
타야 하는 것처럼, 별까지 가기 위해서는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죽으면 기차를
없듯, 살아 있는 동안에는 별에 없다" 말을 한다.
1888
2 아를르에 도착한 고흐는 밤의 아름다움을 그리려고 번이나 마음
먹었으나, 정작 그가 겨우 밤의 테마에 착수한 것은 9월이 되고서였다.
아를르의 밤이 가장 아름다운 때는 9월이었고 고흐는 촛불을 그의 모자 위에
세우고 경치를 그린다. 사람의 연인을 전경에 두고 국화꽃이 활짝 피듯, 푸른
하늘에는 반짝거리는 별들이 가득하며, 강물에 비친 그림자가 길게 리듬을 그리는
폭의 야상곡은 고흐의 정서를 나타낸다. 고흐는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 하나하나
고유의 색깔이 있다고 보았으며, 별이 있음으로 해서 밤은 단순한 어둠이 아니라
오히려 황홀한 빛의 향연장이라고 본다. 강렬한 색채와 강한 터치는 물론이고,
거의 모든 회화상의 규칙을 무시한 파격적인 그림이지만, 당시 고흐 스스로 "명암과
색채를 다루는 것이 불가능하다" 라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색채의 조화를 잃지
않았다.

*The Old Mill, 1888*

*Sower with Setting Sun, 1888*

*Gauguin's Chair with Books and Candle, December 1888*

고흐의 ' 자른 사건' 고흐는 그대로 병원으로 옮겨졌고, 고갱은 아를을 떠나 파리
돌아가 남프랑스의 아틀리에의 꿈은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겨우 동안 지속된
공동생활의 추억으로는 사람이 그린 점의 훌륭한 작품만이 남아 있다.
그동안 고갱은 여러번이나 고흐의 모습을 그렸지만, 묘하게도 고흐는 고갱의 모습을
번도 그리지 않았다. 그러나 ' 자른 사건' 일어나기 며칠 , 사람의 헤어짐
가까웠음을 예감한 고흐는 <고갱의 의자>라는 이상한 작품을 그렸다.
그것은 아를에서 고갱이 애용하던 팔걸이의자 하나를 동그마니 화면에 그려 놓은 아주
평범해 보이는 작품인데, 의자 위에는 고갱이 좋아하던 소설책과 켜진 양초 자루
놓여 있고 어두운 녹색과 어두운 빨간 색의 색조가 거의 귀기라고 불러도 좋을 만한
불길한 박력을 화면에 부여하고 있다. 나중에 고흐는 자신이 비평가인 오리에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어두운 색조와 양초로 고갱의 부재를 표현하려 했던 것이라고 한다.
결국 화면의 진짜 주제는 거기에 그려져 있지 않지만 본래 거기에 있어야 고갱이
,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고흐가 그린 고갱의 유일한 초상이었다고 있다.

*La Berceuse(Augustine Roulin), January/March 1889*

우편 배달부 루랭의 부인을 그린 작품이다. 빨강, 노랑, 초록 고호의 기본적인 색채
관계를 나타내는 보다 전형적인 작품이다.

*Joseph-Etienne Roulin, 1889*

*

Self-Portrait with Bandaged Ear(귀를 자른 자화상), 1889*

고갱과의 빈번한 성격적 충돌에 의하여 결정적인 우정의 파탄을 가져오고, 격분에
못이겨 자기 자신의 귀를 면도칼로 잘라 버린 비극이 1888 크리스마스 일어났고,
바로 병원에 입원하였다. 1889 1 7 퇴원을 고흐는 무렵 2점의 자화상을
그렸는데 모두 귀에 붕대를 감은 모습이다. 점의 자화상은 입에 파이프를 물고
있고, 빨간 바탕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들라크루아나 바그너, 베를리오즈의 마음속
에도 광기는 존재하지 않았을까'라고 고흐 자신은 말하고 있다.
비극에 대하여 많은 의학자나 평론가, 학자들이 연구하였으나 과로에 의한 신경
과민, 환청, 피해 망상 여러 가지 정신 병리학적 진단을 내리고 있다. 그러나 차츰
진정을 회복하여 명석한 자기 마음의 지향을 나타내어 갔다.

*Self-portrait with a Pipe, December 1888-May 1889*

* 레미의 정신병원, 1889*

Tree and Man(in front of the Asylum of Saint-Paul, St. Remy)

고흐가 파리를 떠나 남프랑스의 아를르를 찾은 것은 1888 2 눈이 내리던
겨울이었다. 파리에 2 남짓 머물며 200 점의 그림을 그린 후였다.
아를르에 도착한 고흐는 호텔 식당인 카렐 호텔에 머물며 견디기 힘든 겨울을
넘기고, 꽃피는 봄이 되자 아를르의 전원으로 나가 과수원 등의 풍경을 일본풍
테크닉과 구도를 이용해 그렸다. 5월이 되자 유명한 노란 이층으로 세를
얻어들어 고흐는 화가들의 공동체를 꿈꾸게 되었고, 동생 테오의 도움을 받아
고갱을 아를르로 부른다. 고갱이 아를로 내려와 고흐와 함께 생활을 1889
말의 달은 12 23 고갱과의 논쟁이 끝난 직후 그를 살해하려 했다가 실패
하고 대신 자신의 귀을 자르고, 자른 귀를 신문지에 창녀 라셀에게 사건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소설보다 소설 같은 실제 사건으로 붉은 머리의 광인으로
불리게 고흐는 아를르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끝에 마침내 마을에서 쫓겨나,
5
월에 아를르에서 수십 킬로 떨어진 레미의 정신병원에 수용된다.
거듭되는 착란과 망상은 발작으로 이어졌고, 당시에 그려진 그림들은 모두 비극
드라마들을 증언하고 있다. 레미의 정신병원 역시 당시의 비극을 증언
하는 그림들 중의 하나다. 고흐는 다음 파리로 올라와 인근의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사는 가셰 박사를 찾아간다. 그리고 달여 만에 목숨을 끓고 만다.
착란 상태에서 번씩 독성이 강한 물감을 마시는 바람에 그림을 그릴 없게
고흐였지만, 1889 가을과 겨울 고흐는 레미 정신병원의 실내와 정원을
그릴 있었다. 단순한 위안이나 탈출구가 아니라, 당시 그림은 삶과 죽음, 혹은
이성과 광기의 경계선에서 존재 전체를 지탱해 주는 최후의 보루 같은 것이었다.
그림 왼쪽에 길게 가지를 늘어뜨린 소나무는 이미 단순한 나무가 아니었고, 뒤의
건물들과 위의 하늘도 눈에 보이는 사물이 아니었다. 모든 사물은 두터운 외관
벗어버리고, 생명의 가장 원초적인 힘으로 충만해 있다. 나무와 집과 하늘,
그리고 땅과 인간마저 하나의 움직임 속으로 끌어들이는 힘은, 종종 모든 것의
차이를 무화시키는 무서운 힘으로 약동하며 이성을 마비시킨다.

*The Courtyard of the Hospital in Arles, 1889*

*Field with Poppies, 1889

*Olive Trees with the Alpilles in the Background, 1889*

*Olive Trees with Yellow Sky and Sun, 1889*

*별이 빛나는 , 1889*

1889 6 프로방스 인근의 레미 요양원에 있던 고흐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며, 인근의 숲과 전원으로 나가 많은 풍경화를 그린다.
곳에서 그의 그림은 아를르 시대에 비하여 한층 침잠된 색채를 쓰고, 필치는 보다
동적이며, 곡선의 자유로운 발전에 의해서 일종의 묵시록 같은 환상을 만들어 낸다.
고흐가 몽상적이거나 환상적이라는 것은 아를르 시대까지의 작품에서는 표면
적인 흔적을 찾아볼 없었다. 레미에 와서 그의 작업은 본질적인 서정성을
보이며, 몽상가로서의 고흐를 낳게 한다. 그림의 종탑의 모양으로 보아 프로
방스 지방의 작은 마을보다도 조국 네덜란드를 닮은 듯한 마을을 그려 보이고
있다. 북쪽 조국을 그린 그림은 북부 출신인 고갱이 남프랑스의 아를르에서
고흐와 함께 작업할 그렸던 그림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몽상인 것이다.
고흐는 테오에게 그림에 대한 편지를 썼다. "마침내 나는 올리브 나무가 있는
풍경과 별이 빛나는 하늘을 소재로 새로운 습작을 그렸다. 요즘 고갱과 베르나르의
최근의 작품들을 보지는 못했지만, 네게 말한 나의 습작들이 그들의 그림과 비슷
느낌을 것이라고 어느 정도 확신한다."
별들이 소용돌이를 이루고, 모든 것이 구심적인 운동과 통일된 움직임을 나타내는
장대한 밤의 그림은, 자연과 사물의 내면에 닿는 듯한 서정성과 신비감을 나타내
있다.

*자화상, 1889*

고흐는 앙베르 시절 때부터 40 점의 자화상을 그렸고, 안에서 심도 깊은 닮음을
추구해 왔다. 고흐에게 자화상은 자기 자신과의 대면에 사로잡힌 예술가의 고유한
이미지에 대한 일련의 유채였으며 때에 따라 의도적으로 자기의 특징을 바꿔 가며
강조하기도 한다. 누이 윌에게 "동일한 인물이 아주 다른 형태로 나타날 있다"
말한 것처럼, 스스로를 캔버스 앞에 화가로, 낭만적인 북유럽 사람으로, 짧은
머리를 일본인처럼 그리면서 인물화에 대한 관심과 열정을 표출하고 있다.
1888
겨울부터 1890 자살에 이르기까지 고흐는 간혹 회복을 보이기도 했으나,
격심한 고통 속에 살아가는 만성적인 환자였다. 1889 7월에 레미 요양소에서
6
주를 번째 발작에서 회복된 고흐는 점의 초상화를 그렸다.
번째 그림은 요양소 측에서 그의 작업을 중지시키지 못하도록 설득하기 위한
이었고, 번째 그린 작품은 확고한 결심과 동시에 자기 반성을 표명하는 것이었다.
그림에서 거칠고 붉은 수염, 움푹 파인 , 창백한 입술, 모든 것이 화가의 진짜
얼굴이다. 그의 얼굴은 충분히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소용돌이치는 배경의
선은 형체를 와해시키며, 정신적으로 고통받고 있는 인물이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
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고흐의 자세와 옷차림은 차분하고 고요한 안정을
드러내지만, 혼란스러운 배경은 안정이 위태로운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La chambre de Van Gogh a Arles(Van Gogh's Room at Arles), September 1889*

얼른 보기에 아무런 이상할 것도 없는 평범한 침실이다. 아무것도 깔려 있지 않은
맨바닥, 튼튼하지만 허름한 침대, 아무 꾸밈도 없는 투박한 의자 , 물이 담긴
플라스크와 세면 도구가 놓인 테이블, 옆의 벽에 걸린 수건, 조금 열린 창과
옆에 걸린 거울, 침대 머리맡에 놓인 양복걸이, 그리고 아무 장식도 없는 벌거숭이
방에 약간의 흥취를 더해 주는 벽의 그림. 이런 식으로 구석부터 차례차례 헤아려
보아도 이상 것이 없을 만큼 간소한 방안이다. 작품은 1888 아를에서
그린 원본을 토대로 1889 점의 복사본을 제작하는데, 하나이다.
1888
고흐가 <아를의 침실> 그릴 무렵 고흐는 고갱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른 프랑스 남부의 밝은 태양을 그리며 아를로 왔을 고흐는 원대한 계획
품고 있었다. 아니, 계획이라기보다 오히려 꿈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파리의 화가 친구들을 아를로 불러 모아 공동생활을 하면서 함께 작품 활동을
하려는 생각이었다. 꿈과 같은 계획을 진지하게 생각한 고흐는 아를에 도착하자
아틀리에를 구해 '남프랑스의 아틀리에'라고 이름 짓고는 파리에 사는 친구들에게
공동생활에 참여할 것을 권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고흐의 열렬한 권유에도
불구하고 그의 부름에 응해 아를로 친구는 고갱 사람뿐이었다.
고갱은 고흐가 파리에 있을 때부터 깊이 존경하던 친구였을 뿐더러 만약 고갱마저
오지 않았으면 '남프랑스의 아틀리에' 꿈은 덧없이 사라져 버리는 셈이었므로, 고흐
얼마나 친구가 오기를 고대했을지 쉽게 상상할 있다.
더구나 그려진 제재는 사람이 함께 '남프랑스의 아틀리에' 고흐 자신의 침실
이다. 고흐의 마음속에는 이제부터 시작될 새로운 생활의 터전을 고갱에게 알려 주려
생각으로 <아를의 침실> 그렸을 것이다.

*Trees in the Asylum Garden, 1889*

*Wheat Field, 1889*

*Wheat Field with Cypresses, 1889*

*낮잠, 1890*

작품 <낮잠> 1858년부터 제작된 밀레의 <일터로 떠나는 아침>, <낮잠>,
<
일과의 >, <밤샘> 등으로 이루어진 <하루의 일과> 연작 , <낮잠>
고흐가 모사한 것이다. 브라반트 지방에서 고흐는 농촌 생활의 모든 것을
연구했다. 쿠에스메스에서 광부들의 비참한 생활을 함께 했듯이, 농부들을
그린다는 것은 "그들처럼 느끼고 생각하면서 그들 명이 되기라도
생활하는 "이라고 생각했다. 고흐는 대지에 뿌리내린 인간들에게 도덕적이고
보편적인 가치를 부여하면서, 바르비종화파의 거장들과 밀레의 교훈적인 작품을
모델로 삼았다. 그는 일하고 있는 농부들을 그리기를 원했고, 근대 미술의 핵심은
바로 그런 소재에 있다고 본다. 그의 그림 속에서는 삽질하는 사람들, 뿌리는
사람들, 수확하는 사람들이 각각 삽질하고, 씨를 뿌리고, 수확하고 있을 뿐이다.
고흐는 달콤하고 낭만적인 성격의 그림들을 경멸했고, 그의 자연주의는 밀레의
전형적인 인물들보다 훨씬 거칠게 나타난다. 작품에서 하늘의 진한 푸른색과
황색의 밀밭이 자아내는 대비는 밀레의 그림에서는 찾아 없는 요소이고,
노적가리와 우마차도 밀레가 묘사한 것보다 훨씬 뚜렷한 색채를 띠고 있다.
그림의 밀밭은 불타오르는 듯한 느낌을 주며, 햇빛에 일렁이는 밀밭과 푸른 하늘은
면으로만 존재할 공간으로서 존재하지 않고 있다.

*Morning, Leaving for Work(Le matin, le depart au travail), 1890

일터로 떠나는 아침

*The White House at Night(La maison blanche au nuit), 1890*

*Irises, 1890*

*Village Street in Auvers, May 1890*

*Road with Cypress and Star, May 1890*

"창에는 오렌지색의 불빛이 비치는 낡은 여인숙, 높이 뻗어 오른 그루의 측백나무가
똑바로 검게 있다. 길에는 하얀 말에 끌리는 노란 수레 대와 앞을 산보하는
나그네. 굉장히 로맨틱하지만, 이것이 프로방스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고흐는 오베르에서 고갱에게 작품에 대하여 이렇게 상세히 쓰고 있지만, 편지는
미완성인 나중에 유품 중에서 발견되었다. 그의 측백나무를 그린 작품 특히 유명
것으로서 , 측백나무, 보리밭, 마차, 오두막집 , 생레미 시대의 요소를 대부분
여기에 갖추어 넣었다. 그는 다른 편지에서 측백나무를 '이집트의 오벨리스크처럼 아름
답다.' 하고 있다. 검은 맛의 초록을 표현하기 위하여 그는 마음을 쏟았다.
더구나 그것을 밤의 효과 속에서 그리기는 용이하지 않았을 것이다.
작품은 '흙에서 타오르는 검은 불꽃'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L'eglise d'Auvers-sur-Oise(The Church at Auvers-sur-Oise), June 1890

1890 6월에 고흐는 누이 윌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
나는 마을 교회를 다룬 커다란 그림을 완성했어. 건물은 코발트 블루로 단조롭게
처리된 하늘을 배경으로 보랏빛이 나고, 반투명한 창문들은 군청색 자국처럼 보이지.
지붕은 보랏빛인데 부분적으로 오렌지색을 띠고 있는 그림이야. 전면에 꽃이 약간
푸르스름하고, 장밋빛으로 반짝이는 모래가 보이고, 색채는 좀더 표현적이고 화려해."
뤽상부르 미술관에 있는 밀레의 <그레빌의 교회> 참조했던 작품은 고흐가 후기에
그린 90 점의 그림들 가장 특징적인 작품 하나이다.
화면의 뒤에 보여지는 교회의 생기있는 실루엣은 신비스러운 열정을 내부에 담은 ,
강렬한 푸른색으로 빛나는 하늘로 인해 윤곽이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다.
실루엣은 번째 면의 생생한 작은 터치들로 강조되면서 화폭의 모든 에너지를 극도
고양시키고 있다. 왼편에 급급하게 크로키된 듯한 농촌 여인은 우연성의 상징을 드러
내고, 버팀벽에서 종탑에 이르기까지의 데생은 구불구불한 반향을 남기고 있다.
1951
국가 수집품으로 파리 인상파 미술관에 소장된 앙드레 말로는 작품에
"광기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남자가 지탱하고 있던 믿음은
다수의 열정과 동일한 것이다" 라며 경의를 표한다.

* 소녀,1890*

* 가셰 박사, 1890*

1890 5 21 고흐는 파리에서 3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오베르 쉬르 와즈에 도착
했다. 인상파 화가들의 후원자였던 가셰 박사는 고흐를 자신의 집으로 맞이해,
그의 의사이자 친구가 되었고, 자진해서 그의 모델이 된다. 화가라는 직업을 두고
고흐가 가장 열광했던 것은 스스로 말한 바와 같이 현대적인 초상화였다.
고흐는 세기 후의 사람들에게 유령처럼 보이는 초상화를 그려보고 싶다며, 색채로서
초상화를 탐구한다. 고흐가 오베르에서 초상화를 그릴 가셰는 예순 살이었다.
그는 유사 요법 전문가였고, 고흐는 의사가 손에 "폭스글로브"라는 약초를 들고 있는
모습을 그린다. 갈색 , 노란 , 연한 색채 등으로 모자를 정확하게 묘사하고, 역동적
붓질로 생기를 불어넣고 있으며 다갈색의 머리카락, 군청색 고양된 색을 통해
가셰의 열정적인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단조롭게 채색된 캔버스의 파란색 바탕은
<
오베르 쉬르 우아즈 교회> 마찬가지로 달라붙어 있는 같이 보이고 있다.

*코르드빌의 초가, 1890*

1890 오베르에 머물고 있던 고흐는, 풍경화를 비롯해 가깝게 교류하던 사람들의
초상화에 이르기까지 2 동안 수십 점의 그림을 그렸다. 견고한 구성과 힘있는
고흐 특유의 기법이 드러나 있는 작품은 오베르 시기의 작품들 중에서도 수작
으로 손꼽힌다. 고흐는 오베르에 도착하자마자 테오에게 5 21일자 편지에서
"
곳은 무척 아름답다. 지금은 보기 드문 초가집들이 눈길을 끄는구나"라고 오베르
첫인상을 적고 있다. 그가 이채롭다고 했던 낡은 초가집을 담고 있는 그림은
오베르 시기의 주요한 특징을 모두 담고 있다. 요동치는 붓질, 주로 올리브빛을
녹색과 파란색을 사용하면서 부분적으로 검은색으로 윤곽을 지은 등은 시기의
대표적인 특징이다. 작품의 제목인 <코르드빌의 초가> 후에 가셰 박사의 아들에
의해 바뀐 것으로, 본래 제목은 <몽셀의 초가> 전해진다. 코르드빌은 오베르에
위치한 시골 농가들이 모여 있었던 마을 이름이다.

*Wheat Field Under Threatening Skies(까마귀가 나는 밀밭), 1890*

암스테르담의 고흐 미술관에 전시된 작품은 고흐의 극적이면서도 불안한 삶을
예고하고 있다. 그해 7 고흐는 여기에 보이는 밀밭 언저리에서 자살했다.
자살하기 전까지 고흐는 창작에 대한 열의에 불타 맹렬한 속도로 작업을 해나갔는데,
이것이 그의 불안한 정신상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최소한의 붓질로 거칠게 그린 왜곡된
풍경과 불길한 검정까마귀가 고흐를 자살로 이끌었던 강한 심리적 혼란을 암시하고
있다. 물감은 섞거나 타지 않았으며 각각의 붓질은 신중하고 매우 분명하다.
밝은 노란색 밀과 갈색 토양, 흐릿하고 어두운 푸른색의 하늘빛이 대비를 이루고 있다.
이것은 거친 선들에 의해 더욱 두드러지고, 고전적인 조화, 정교한 색조가 없어지면서
더더욱 강조된다. 단순한 밀밭은 완전히 변형되어 작가의 불안한 정신상태를 반영하고
있고, 외부 세계의 현실은 모호하게 재현되어 있을 따름이다.
유사한 주제를 다룬 초기 작품들과 달리 여기에서 밀밭은 햇빛에 대한 인상을 담고 있지
않다. 극적이고 어두운 분위기는 불길하게 주변을 선회하는 까마귀와 따로 있는 듯한
격렬한 붓질에 의해 강조된다. 하늘에 보이는 소용돌이는 고흐의 환상적인 풍경
연상시킨다. 작품에서 고흐는 결코 자신의 기술적인 미숙함을 숨기지 않았다.
전통적인 기준에 따라 그의 작품을 평가하려 든다면, 밭을 관통하는 길에 나타나는 급격
원근법 많은 심각한 실수들를 지적할 있을 것이다.
이렇듯 고흐는 원근법 같은 가장 자명한 법칙까지 무시하고 강렬한 표현에만 집중했다.
또한 덧칠한 붓질은 뚜렷하게 분리되어 있어 하나씩 있을 정도이다.
이러한 회화 양식은 20세기 미술, 특히 표현주의 운동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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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39 후기인상주의: 고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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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lf-portrait with Palette, 1894


★ 폴 고갱(Paul Gauguin: 1848~1903) ★


폴 고갱(Paul Gauguin:1848~1903)은 1848년 2월 혁명의
여파로 소란하던 파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공화주의자 저널리스트로서
당시 열심히 문필을 휘들렀지만 3년 후 나폴레옹 3세가 쿠데타로 등장하자
고국을 버리고 가족과 함께 남미로 향했는데 도중에 배 위에서 세상을 떠났다.
고갱은 그대로 4년 동안 페루의 리마에 머물렀으며 소년 시절의 이 이국 생활이
나중에 남태평양의 섬에 대한 동경을 키웠는지도 모른다.
1865년, 열일곱 살 때 고갱은 하급 선원이 되었고 대서양 항로의 무역선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몇 년 후 선원을 그만두고 파리의 금융회사 베르당 상회에서
일하게 되었다. 취직하고 2년 후 그는 거리에서 알게 된 덴마크 여인 소피와
결혼하고 차례차례 다섯 아이를 낳았다. 그대로 계속 되었더라면 그의 생애는
안정 되고 평범한 시민의 생애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겉으로는 차분한
회사원이었던 고갱의 마음속에 언제부터인가 '회화의 악마'가 살고 있었다.
1883년 그는 마침내 회사를 그만두고 화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때 이후로 그의 생활은 모두 예술에 바쳐지게 되었다. 선배인 인상파 화가들
의 작품마저 사람들이 아직 거들떠보지 않던 시대에 그것보다 더욱 새로운
고갱의 그림이 팔릴 리가 없었다. 그의 생활은 금세 가난해졌고, 아내는 화가
나서 네덜란드로 가버렸다. 그가 브르타뉴의 시골로 옮겨가고 마침내 타히티
까지 건너가려 한 것도 생활에 쫓겨서 가능한 한 생활비가 싼 곳을 찾기 위한 것
이기도 했다. 그리고 1891년 이후 타히티에서 2년 정도 살다가 1893년 일단
고국으로 돌아오지만 다시 타히티로 갔고, 유럽의 문명 세계로부터 멀리 떨어진
그것에서 마침내 예술의 역사를 크게 바꾸게 된 뛰어난 명작을 차례차례 만들어
갔다. 폴 고갱은 후기인상주의 화가 중 고흐와 함께 인간의 내면세계에 관심을
기울인 화가였다. 그는 잘 알려진 대로 늦은 나이에 거의 독학으로 화가의 길로
들어서 영국의 소설가 섬머셋 모옴이 그의 삶을 소재로 [달과 6펜스]라는 소설을
엮어 낼 만큼 파란만장한 인생을 영위한 작가이다. 고갱은 인간의 내면 중 종교적
인 것, 장식적인 것을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 기법면에서는 인상주의의 극복이라
는 의미에서 원색의 면에 검은 테두리를 쌓아 구획주의를 추구했다.
또한 대담한 변형과 왜곡, 강렬한 원색의 사용 등으로 장식적 효과를 냈으며,
이로서 화면의 평면화를 시도한다.

모험과 순수성을 추구한 고갱은 인상주의자들과 전혀 다른 관점에서 파리를
보았다. 고갱에게 파리는 탈출하고픈 숨막히는 감옥이었다. 1885년 고갱은
브르타뉴의 외딴 마을에서 자신의 첫 번째 주요 작품을 그렸다. 그는 인상주의자
들의 매혹적인 광신과 부드러운 색채를 거부하고 단순한 형태와 강렬한 색채를
사용하여 "묘사보다는 암시"를 의도했다. 1888년 고갱은 고흐와 아를에 머물렀
지만 이 불행한 이 두 후기인상주의 화가들의 우정은 금방 끝나버렸다.
고갱은 브르타뉴의 퐁다벵(Pont-Aven)으로 돌아갔고, 다시 그곳에서 보다 순수
하고 직접적인 것을 찾아서 타히티로 떠났다. 타히티에서 고갱은 근대 사회로부터
완전히 단절되었다. 근대 사회에는 더 이상 상상력의 여지가 없다고 믿었던 것
이다. 그는 남태평양의 한 섬인 타히티로 옮겨가면서 기독교와 원시적 토속 신앙의
결합이라는 특이한 예술 세계를 구축한다. 타히티에 전기가 들어오자 고갱은
마르케사스 섬으로 피신했고 그곳에서 주술사와 선교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임종을
맞이했다.

Nude Study, or Suzanne Sewing, 1880

고갱은 일요화가(日曜畵家)로서 코로나 쿠르베의 영향에 의한 그림을 그리다가
1874년 피사로와 만나 차츰 당시의 파리 화단에 물결치고 있던 인상파(印象派)
의 화론(畵論)에 공감하여 갔다. 이 작품은 1881년 제6회 인상파전(印象派展)
에 출품되었는데 그때 유이스만스의 격찬을 받아 하나의 일요화가에 지나지
않던 고갱의 이름을 크게 높이는데 성공한 그림이다. 유이스만스는 '조금 부풀은
듯한 허벅지에 이어져 있는 하복부나 그늘진 으슥하게 된 둥근 유방 아래의 잔
주름, 다소 메마른 무릎의 관절이나, 손목의 볼록한 부분 등은 얼마나 많은 진실
이 담겨져 있는 것이겠느냐'라고 했지만 확실히 여기에는 알몸 그 자체에 접근
하려는 일종의 생생한 욕구가 느껴진다. 그림의 모델은 고갱 집의 가정부로서
젊을 때엔 들라크루아의 모델을 한 적도 있었다.

캔버스 앞의 自畵像, 1884

고갱이 안정된 직업을 버리고 화가로서의 길을 택하여 전적으로 화업에 투신함
으로써 생활의 형편은 절망적이었다. 1884년 11월 그는 가족과 함께 부인 메트의
고장인 코펜하겐으로 옮겼으나 사태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이 작품은 코펜
하겐에 체재하고 있을 때 그린 것이다. 메트가 불어 레슨(佛語講習)을 하기 위하여
거실을 쓰고 있었으므로 그는 지붕밑 다락방을 아틀리에로 쓰면서 틈틈히 제작
에 몰두했다. 그가 회화라는 것은 외계의 재현이 아니라 내적 세계를 조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슈프네케르란 사람에게 써 보낸 것은 1885년
5월의 일이었으나, 이 작품은 그러한 그의 정신과 회화관을 생생하게 나타내고
있다. 어둡게 침잠된 색조 속에 화가는 자기 자신의 내면을 응시(凝視)하고 있다.
고흐나 고갱이 함께 많은 자화상을 남기고 있는 것은 대상의 응시(凝視)가 자기
응시에 밀접하게 연결된다는 그들 공통의 지향에 원인한 것이었다.

Still Life with Profile of Laval, 1886

Blue Trees, 1888

The Vision After the Sermon(Jacob Wrestling with the Angel), 1888

(설교후의 환영 혹은 야곱과 천사와의 싸움)

고갱이 브르타뉴 시기에 제작한 이 작품은 *<종합주의>(모든 것을 터치로 그리고
마침내 점으로 분해하려고 한 인상파의 분할주의에 대해, 형태를 하나의 큰 덩어리
로 파악하려한 고갱의 수법)라고 알려진 양식을 잘 보여주는 본보기이다.
이 작품은 당시 고갱이 살고 있던 프랑스의 브르타뉴 지방을 무대로 그곳 사람들이
설교 때 들은 '구약성서'속의 야곱과 천사의 싸움의 환영을 본다는 주제의 작품이다.
브르타뉴 지방의 민속의상을 입은 여자들이라는 현실적인 요소와 성서 속의 이야기
인 투쟁의 정경이라는 비현실적 요소가 수난의 핏빛을 연상시키는 강렬한 빨간 배경
에 의해 하나로 연결되어, 보는 사람에게 단지 색의 배합이나 구도의 교묘함에서
느껴지는 것과는 다른 이상한 신비적 인상을 준다. <황색 그리스도>, <이아 오라
나 마리아> 등과 함께 고갱의 종교적 환상 회화에 속하는 작품이다.

*종합주의(Synthetisme) - 19세기 말 프랑스의 회화운동, 또는 그
양식의 하나. 1889년 파리의 카페 보르피니에서 <인상주의 및 종합주의> 전람회
를 E.H.P.고갱 등이 개최한 것이 그 최초의 운동이다. 고갱은 인상주의가 해체한
색채의 단편(斷片)을 강력한 윤곽선으로 둘러싸인 넓은 공간으로 종합하고, 화가의
주체성에 바탕을 둔 형태나 색채를 회복하려 하였다. 이를 이은 나비파는 종합주의
를 명확한 슬로건으로 내걸고 예술작품은 눈(감각기관)의 소산이 아니라 마음(상상
력)의 소산이어야 함을 주장하였다. 대상(對象)의 데포르마시옹과 평탄한 색면의
장식적인 구성이 특징인 종합주의는 아르누보를 거쳐 반인상주의적인 20세기
회화의 저류(底流)를 이루고 있다.

The Swineherd, Brittany, 1888

Les Miserables, 1888

Van Gogh Painting Sunflowers, 1888

Portrait of Madeline Bernard(The Sister of the Artist Emile Bernard), 1888

La Belle Angele, 1889

이 작품은 1888년 고갱이 브르타뉴 지방의 퐁다벵에 체류할 때 교분을 가졌던
젊은 부인의 초상이다. 브르타뉴의 퐁다벵에 머물렀던 동안 사트르라는 부부
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던 고갱은 감사의 뜻으로 부인 앙젤(Mme. Satre)의 초상
을 선물하였다. 그러나 이 작품을 받은 사트르 부부는 탐탁해 하지 않았고 결국
그림은 고갱에게 되돌아왔다. 후에 드가는 이 작품의 조형적 가치를 알아보고 이
그림을 450프랑에 구입하였다. 그림 속의 그림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독특한
이 그림은 고갱이 생애 마지막 3년 동안 이루어 놓았던 모든 조형적 특징들을
집약하여 보여준다. 꽃무늬가 그려진 배경을 뒤로 후광처럼 보이는 원 속에 마치
여인이 갇혀 있는 듯 보인다. 후광 뿐만 아니라 그녀의 이름 역시 중세의 이콘화
에서처럼 화면 하단에 쓰여 있다. 후광처럼 보이는 원 그리고 원시 조각을 중심
으로 상, 하 수평으로 나뉘어진 화면, 공간은 이렇게 잘라지고 구획 지어졌다.
그러나 다른 한편 원과 원시 조각 두 모티프는 화면을 분할하는 동시에 장식적인
배경 속에 자연스럽게 융화되고 있다. 구획 지어진 원과 캔버스의 사각형이 이루어
내는 시각적인 조응, 장식적인 배경과 모티프의 자연스러운 융합, 이 모든 요소들
은 공간의 깊이감을 차단시키고 장식성과 평면성을 강조하고 있다.
초상화임에도 불구하고 사실적인 재현보다는 감정적이고 정신적인 가치를 중요시
한 고갱의 회화 세계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Schuffnecker's Studio(The Schuffnecker Family), 1889

<슈프네케르 가족>으로도 알려져 있는 이 작품에서 고갱은 친구이자 화가였던
에밀 슈프네케르의 아틀리에와 가족을 그리고 있다. 에밀 슈프네케르 역시 고갱과
마찬가지로 증권 거래소를 그만 두고 어렵게 생계를 이어가며 그림을 그렸다.
1888년 12월 고갱은 반 고흐와 함께 지낸 두 달간의 아를 생활을 정리하고 파리
로 돌아왔다. 고갱은 파리에 돌아와 친구 에밀의 집에서 신세를 지고 있었는데,
이 작품은 그 무렵에 그려진 것이다. 고갱은 캔버스가 자리한 화가의 아틀리에를
배경으로 하여 에밀의 부인과 두 딸을 화폭에 담았다. 고갱은 노란 색 바닥과
푸른 색 벽면, 두 딸의 옷에서 사실적인 색상이 아니라 자신의 주관적인 감정이
담겨진 강렬한 색채를 사용하였다. 이 작품에서 고갱이 선택한 생생한 색채들은
그가 남프랑스 아를에서 탐구했던 것을 반영하는 것이다. 화가 앞에 놓여진 이젤,
그리고 화면 오른쪽 벽에 붙여진 그림들을 통해 이곳이 아틀리에임을 알려준다.

1888년 8월 고갱은 브르타뉴에서 파리에 있는 에밀 슈프네케르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써보냈다. "한 가지 조언을 하고 싶어. 너무 충실하게 자연을 모사
해서는 안돼. 예술이란 하나의 추상이야. 자연을 앞에 두고 꿈을 꿈으로써 자연
으로부터 추상을 끌어내게. 그리고 결과보다도 창조 행위 쪽에 한층 생각을
모으게. 바로 그것이 조물주가 했던 것과 같은 방식이며, 즉 창조에 의해 신의
세계에까지 올라가는 단 하나의 길이라네..."

The Yellow Christ(황색 그리스도), 1889

이 작품은 고갱이 타히티에 건너가기 이전의 최고 걸작으로 지목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그려진 그리스도 상은 퐁다벵에 가까운 트레마로의 교회당에 있었던
것이다. 원경에 보이는 것은 퐁다벵 마을과 생마르그리트의 언덕일 것이다.
세 사람의 부르타뉴 여인도, 십자가도, 붉은 색 나무들도, 모두 하나의 상징적
풍경의 요소로 화하고 있다. 야성이 가득하고 자만에 부푼 그가 이 작품에 임하면
서 경건한 마음으로, 견고하게 화면을 구축한 느낌이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
비친 어떤 화재(畵材)도 그가 나타내려는 의도대로 변형되고 추상화 되어 버린다.
옥타브 미르보는 여기에 그려진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 그리스도의 우울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그 얼굴에는 무서운 슬픔이 있다.' 라고 말하고 있다.
이 무렵의 그의 심정이 바로 그랬으리라 짐작된다.

Self-portrait with Halo, 1889

아를에서 고흐를 떠나 1889년 4월에 세번째로 퐁다벵으로 갔다가, 10월에
루 뿌르두로 가서 하숙집 식당의 찬장 위쪽 거울 판에 이 그림을 그렸다.
반대쪽에는 친구 마이엘 데 팜의 초상이 그려져 있다. 사과와 뱀, 머리 위의
노랑빛 관 등을 추측하면 고갱이 여기에서 자기를 구세주(救世主)로 견주어
나타내고 있는 것이 분명 하다. 배경의 강한 빨강과 앞쪽의 강한 노랑으로
화면을 이등분하여 상태티즘(Synthetisme:종합주의)의 지도자상으로 부각
하여 평면적으로 밀어버렸다. 그러나 밝고 빛나는 색채에도 불구하고 그림이
주는 인상은 어둡고 시니크한 괴로움이 감돌고 있는 것은, 그를 둘러싸고 있는
동료들 속에서 이 야만인의 고독을 방영하고 있는 것이리라.
바로 직후에 타히티의 원시림에 자기를 던져, 그 야성을 불태울 거친 이지(理智)
의 힘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Self-Portrait with the Yellow Christ, 1889-90

고갱은 1889년 <황색 그리스도>라는 작품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경건하게 그려야 할 그리스도가 마치 브르타뉴의 농부처럼 그려졌다는 이유였다.
이후 고갱은 자신의 자화상에 <황색 그리스도>를 배경으로 그려 넣었는데,
좌우가 바뀐 것으로 미루어보아 거울에 비친 <황색 그리스도>를 그린 것이다.
화면 오른쪽 위로 보이는 도기 항아리는 고갱이 직접 만든 것으로서, 그 또한
자신의 얼굴 모습을 형상화 한 것이다. 항아리의 괴기스러운 형상과 그리스도의
얼굴, 모두 다른 모습이지만 그 속에서 고갱의 자화상을 연상할 만큼 세 이미지
는 미묘하게 얽혀 있다.

Portrait of a Woman, with Still Life by Cezanne, 1890

M. Loulou, 1890

The Loss of Virginity, 1890-91

Vahine no te tiare (Woman with a Flower), 1891

Faaturuma(몽상), 1891

Femmes de Tahiti OR Sur la plage(Tahitian Women OR On the Beach), 1891

이미 브르타뉴 지방에서 원시성과 야만성을 발견한 고갱은 마침내 1891년
그토록 동경하던 원시적인 삶을 찾아 타히티로 떠났다. 그에게 타히티는 원시적
인 종교성, 그 끝없는 탐구에 대한 최후의 답안으로 여겨졌다. 고갱은 타히티에서
나른한 여인들의 자태, 우수에 찬 시선 등에 매료되었다. <타히티 여인들> 혹은
<해변에서>로 알려진 이 작품은 해변가에 앉아 있는 두 여인의 모습을 아주
가깝게 묘사하였는데, 대담한 구도와 과감한 색채가 돋보인다. 화면은 전면의
여인들이 앉아 있는 공간과 뒷 배경을 구획 짓는 수평띠에 의하여 평면성이 강조
되고 있다. 이러한 구성은 브르타뉴 시기 고갱이 즐겨 썼던 도식적인 구성으로서
화면을 가로지르는 수평선이 화면의 깊이감을 약화시켰다. 한편, 이러한 명확한
구도 속에서도 여인들의 자세는 시각적인 균형을 최대한 고려하여 그려졌다.
왼편에 앉아 있는 여인의 옆 얼굴과 앞으로 내민 오른팔, 그리고 오른편 여인의
뭉툭한 발바닥과 툭 불거져 나온 무릎의 선 등이 이루어내는 시각적인 조응은
작가의 치밀한 조형 의식이 뒷받침된 것이다.

Ia Orana Maria(Hail Mary:이아 오라나 마리아), 1891

이 작품을 보았을 때 처음 받는 인상은 화려함과 풍성함, 그리고 다채로운 충실감
이다. 캔버스 가득 빨강과 노랑과 녹색, 그밖에 여러 가지 색채가 화려한 색의
교향악을 울리고 있다. 오른쪽 앞에서 아이를 어깨에 태운 채 비스듬하게 선
여자, 왼쪽 조금 뒤에서 두 손을 모으고 예배 드리는 듯한 몸짓을 보이는 웃옷을
벗은 두 여자 등 아이를 포함한 이 네 사람이 화면의 주요 등장인물이라는 것은
한눈에 보아도 분명한데, 그 인물들은 물론이고 주위 풍경이, 바로 앞에 큼직하게
그려진 바나나에서 배경의 수목, 꽃, 풀들, 나무 사이로 보이는 오두막에 이르기
까지 각각 명확한 형태와 강한 색채로 빛나고 있어서 한없이 충실한 느낌을 준다.
여기에서 고갱은 화면의 모든 부분을 어떤 색과 형태로 다 메우지 않으면 성이
차지 않는 것 같다. 같은 야외 풍경이라 해도 인상파의 모네나 피사로의 세계와는
너무도 다르다.

이 작품의 의미는 제목대로 남태평양 타히티 섬의 정경을 그리면서 고갱은 거기에
기독교적 의미를 넣었다. 사실 고갱은 1892년 3월 11일자로 타히티에서 파리에
있는 친구 다니엘 드 몽프레드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노란 날개를 단 천사가 두 사람의 타히티 여자에게 마리아와
예수를 가리키는 것을 그린 거야. 마리아도 예수도 역시 타히티 사람이지.
그들은 모두 벗은 몸 위에 팔레오를 두르고 있어. 팔레오란 꽃무늬가 있는 천을
말하는데, 그것을 적당하게 허리께에 두르는 거야. 배경은 매우 어두운 산과
꽃이 핀 식물로 채워져 있어. 길은 짙은 보라, 전경은 에메랄드 그린이고 왼쪽
앞에 바나나가 있어. 나는 비교적 이 작품이 마음에 들어..."
요컨대 고갱은 분명히 의식적으로 타히티 사람 마리아와 예수를 그렸다.
그것도 정확하게 기독교의 도상학을 바탕으로 한 종교화이다. 고갱은 현실에서
눈앞에 있는 세계를 종교적 환상의 배경으로 이용했다. 고갱의 이 경향은
이미 1880년대 후반부터 그의 작품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가장 잘 아려진 예로
<설교 후의 환영>, <황색 그리스도>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종교적 환상
회화들은 주제의 내용에서 이미 인상파와 정면으로 대립할 뿐더러 조형 표현
에서도 인상파의 수법과는 정반대 방향을 보여준다. 고갱의 이 작품은 종교적인
환상이라는 주제의 본질과 종합주의라는 조형 미학, 타히티 섬의 영향으로 복잡
하고 다양한 색채의 배합, 그 풍요한 색채 세계에 수많은 이국적 풍물의 등장,
새로운 인간상의 발견 등이 모두 담겨져 있는 말 그대로 종합적인 작품이다.

<이아 오라나 마리아>에서 성모의 모델이 된 것은 고갱이 타히티에 건너와서
얼마 지나지 않아 함께 살게 되었던 '테후라'라는 처녀다. 테후라는 이 작품만이
아니라 <해변의 타히티 여자>를 비롯하여 <몽상>, <아레오이스의 여왕>,
<귀신이 보고 있다> 등 많은 중요한 작품의 모델이 되었다. 고갱은 테후라의
모습을 통해 마오리족 사이에 살아 있는 당당한 원시적 생명력을 전하려는 것
같다. 원래 이 작품의 구도는 1889년 만국박람회 때 고갱이 사들였다고 생각
되는 인도네시아 자바의 보로부두르 유적의 부조 사진을 바탕으로하고 있다.
합장한 두 여자의 포즈가 어딘가 어색한 것도 실은 그 때문이다. 또 고갱은
보로부두르의 부조에서 부처가 서 있는 장소에 테후라를 세우고 더구나 그녀를
성모로 바꾸어 놓았다. 이 그림에서는 분명히 테후라가 주인공이며, 고갱은
테후라를 성모로 그림으로써 화면에 정신적 차원을 더함과 동시에 기독교의
전통에 거의 이교적인 새로운 생명력을 부어 넣으려 했다.

The Meal(The Bananas:식사), 1891

장르화의 분위기와 정물화가 절묘하게 조화된 이 작품은 고갱이 타히티를 처음
방문하였던 1891년 그려진 것이다. 고갱은 이 작품에서 검소한 식탁 앞의 부동
자세의 아이들을 그렸다. 정밀하지만 단순한 구성으로 열대 원시림 속에서 찾고
자 했던 원시적인 생활 방식에 경의를 표하고 있다. 고갱이 타히티의 첫 방문 때
접했던 원주민들의 조용하고 엄숙한 생활 자세는 그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고
한다. 견고한 대상의 입체감, 테두리의 분명한 윤곽선, 하얀 식탁보 등은 세잔의
정물화를 연상시킨다. 화면을 가로지르는 식탁은 정물이 놓여 있는 식탁 전면,
그리고 인물들이 앉아 있는 뒤편 공간으로 공간을 단순하게 이분화하고 있다.
<타히티 여인들>에서처럼 화면을 가로지르는 수평선이 공간을 구획 짓는
이러한 구도는 브르타뉴 시기부터 고갱이 즐겨 썼던 도식적인 구성이다.

Aha oe feii?(Are You Jealous?당신 질투하나요?), 1892

타히티란 한 원시적인 낙원에 사는 한가로운 주민의 생활을 단면적(斷面的)으로
잘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다. 대담한 구도에 두 인물의 누움과 앉음의 배치, 양광
(陽光)과 음영(陰影)의 배치에서 뭔가 비밀스러운 회화(會話)를 누구나 상상 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고갱은 이국적이고 원시적인 것에 대한 열정을 젊고 아름다운
폴리네시아 여성의 따뜻한 피부색을 통해 표현했다. 이를 통해 점점 비인간화
되고 억압적으로 변모해 가는 근대 세계와는 거리가 먼 일종의 잃어버린 낙원의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Fatata te Miti(Near the Sea), 1892

고갱이 남태평양에 머무는 동안 그린 작품들은 자연과 도덕적인 순수성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바닷가 풍경은 '묘사'와 '암시'를 결합시키고
있다. 대담하고 독특한 자연의 색채, 원주민의 그을린 몸, 무성한 식물은 당시
유럽인들의 눈에 낯선 것들이었다.

Nafea faa ipoipo? (When will you Marry?), 1892

타히티에서 그린 고갱의 작품에는 재미있는 제목이 많다.
<언제 결혼하니?>, <어머, 질투하고 있니?>, <왜, 골이 나 있니> 등, 그 외에도
대화의 단편을 제목으로 하고 있는 것이 많다. 일체의 인공적(人工的)인 여벌문화
가 없는 타히티의 생활에는 그 일상의 한 장면 장면이 상징적인 의미성(意味性)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1892년 7월에 그는 부인 메트에게 '나는 많은 일을
하고 있소. 지금에 와서야 이 토지와 그 향기를 알게 되었소, 나는 타히티 사람들
은 어디까지나 수수께끼의 모습으로 그리고 있긴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마오리족
(族), 바로 그것이오. 이런 것을 알기 위하여 나는 일 년이 걸려 버렸소.'라고 쓰고
있다. 그러한 그의 이해가 이 그림 속에 확실히 나타나고 있다. 두여인의 동(動)
과 정(靜)의 자세의 대조(對照)에 하반신(下半身)이 겹쳐있는 그 미묘한 뉘앙스가
인상적이다.

Arearea(Joyousness:기쁨), 1892

이 작품은 고갱이 처음으로 타히티에 체류하는 동안 그린 세 점의 걸작 가운데
하나이다. 타히티의 신화를 통해 고갱은 보는 사람의 상상력이 흡사 음악처럼
작용할 수 있는 장식적인 미술을 창조하고자 했다. 그림의 중앙에 그려진 땅은
공간을 따뜻한 색상으로 채우면서 서정적인 형태를 만들어 내고 있는데, 이는
실재하는 모양과 색이 아니라 상상력으로 그려진 것이다. 고갱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색이나 선으로 똑같이 표현하려 하지 않고, 그 선과 색의 배열 사이에
있는 신비한 친화력을 드러내고자 했다. 왼쪽 위에 부드럽고 연한 색을 발라
표현한 신상은 달의 여신 히나를 그린 것이고, 중앙에 위치한 인물이 연주하고
있는 피리는 타히티에 머물면서 고갱이 느꼈던 밤의 고요함을 표현한 것이다.
부자연스럽게 자리한 왼쪽의 붉은 개는 고갱이 의도적으로 묘사한 것이며, 다른
많은 작품에도 등장하고 있다. 의미가 불분명한 이 개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반감을 표했고, 한 비평가는 이 개를 악의 요정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 작품을 통해 고갱은 티치아노나 조르조네와 같은 거장들이 발전시켜 왔으며,
동시대의 화가들 역시 매달리고 있었던 유럽의 낭만적인 전원화 전통을 확대
시키고 있다.

Market Day, 1892

Matamoe, 1892

Spirit of the Dead Watching(귀신이 보고 있다), 1892

Woman Holding a Fruit, 1893

Merahi metua no Teha'amana (Ancestors of Teha'amana), 1893

Portrait of the Artist with the Idol, 1893

Portrait de l'artiste (Self-portrait), 1893-94

1895년 고갱이 파리 생활을 청산하고 타히티로 떠나기 1년여 전 그린 작품으로,
프랑스에서 그린 최후의 자화상으로 남아 있다. 이 작품 역시 고갱의 다른 자화상
처럼 3/4 정면 자세를 취하고 있다. 앞서 그려진 세 점의 자화상 - <후광이 있는
자화상>(워싱턴 내셔널 갤러리 소장),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오르세
미술관 소장), <팔레트를 든 자화상>(파시데나 미술관 소장) - 보다 훨씬 어두운
색조로 그려진 이 작품에는 당시 고갱의 힘겨웠던 삶이 깔려 있다. 1893년 코펜
하겐의 친정집에서 아이들과 함께 기거하고 있던 고갱의 부인, 메테는 파리로
돌아와 다시 함께 생활하자는 고갱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으로
외로워하던 고갱은 다시 안나라는 여인과 동거하였으나, 1894년 그녀마저 그의
집을 털어 달아났다. 게다가 다리의 부상으로 육체적인 고통까지 겪었던 고갱은
결국 파리 생활에 염증을 느껴 다시 타히티로 돌아가게 된다.
<황색의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에서도 자신의 그림을
배경 속에 집어넣었다. 자화상 뒤로 보이는 그림은 1892년에 그려진 <마나오
투파파우>로서, 거울에 비친 모습으로 그려졌다.

Mahana no atua(Day of the Gods), 1894

Breton Peasant Women, 1894

1886년 7월 고갱은 문명에 대한 회의를 품고 파리를 떠나 프랑스 서부 부르타뉴
지방의 퐁타벵에 체류한다. 페루의 리마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고갱은 줄곧 문명
에 대하여 회의하였다. 그는 자신의 예술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이상향, 자연의
순수함을 찾아 퐁다벵으로 향한 것이다. 이 그림은 1894년에 그려진 작품으로
경제적 궁핍과 악화된 건강 등으로 고갱의 일생 중 가장 힘든 때 그려진 작품이다.
1891년 원시의 야만성을 찾아 타히티로 떠났던 고갱이 다시 브르타뉴를 찾았을
때, 그는 퐁다벵 근처의 여인숙에 맡겨 두었던 그림들도 되찾지 못하고 경제적으로
도, 심리적으로도 위축된 상태에 있었다. 전면에 우뚝 서 있는 두 여인들은 부르타
뉴 지방의 민속 의상을 입고 있긴 하지만, 황토색의 투박한 얼굴 생김새, 크고 검은
발의 모습 등이 오히려 타히티 여인에 가깝다. 오른쪽의 숲 역시 타히티의 열대림
을 연상시킨다. 프랑스에 돌아와서도 타히티의 순수한 자연을 그리워했던 고갱의
안타까움, 타히티의 강렬한 영향력이 묻어난다.

Te arii vahine (The Noble Woman), 1896

Nevermore, 1897

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 1897

단순화된 형태, 종합적이고 기하학에 가까운 윤곽, 강한 명암대조가 모든 관습이
사라진 소박하고 신비로운 세계를 암시하고 있다.

The White Horse, 1898

타히티에서 머물다 1893년 8월 프랑스로 간 고갱은 파리와 브르타유 지방을
오간다. 그 해 11월 뒤랑뤼엘 화랑에서 대양주 작품 전시회를 갖고, 1895년
9월 다시 타히티에 정착한다. 1897년 고갱이 가장 아끼던 딸 알린의 죽음은
그가 자살을 기도할 만큼 심신을 극도로 황폐하게 만들었고, 그 다음 해에
그려진 이 작품은 늪의 수면이나 나무의 검푸른 가지가 전체적으로 어둡고
침체된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 짙푸른 웅덩이와 그 물을 마시고 있는 하얀
말, 어두운 색조의 나뭇가지와 늪 가에 피어 있는 하얀 꽃, 무표정하게 말에
앉아 사라져 가는 섬의 여인 등은 이상한 구도와 침묵을 만들고 있다.
오랫동안 이해되지 못했던 이 작품은 고갱의 타히티에 관한 많은 그림들과 더불어
배경과 색채의 조화로 나타나는 효과가 최상의 결합을 이루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고갱의 독창적인 작품이면서도 고대의 전형적 양식인 파르테논 신전의
백마의 모습을 차용하고 있으며, 나무는 브르타뉴 시절의 그림들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던 일본 판화가 안도 히로시게의 영향을 드러내고 있다.

Two Tahitian Women, 1899

Riders on the Beach, 1902

이 작품은 고갱 최후의 거주지인, 역시 히바 오아 섬의 아투아나 해안에서 그려진
그림이다. 개개의 포름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그것들을 서로 결합시키는 긴밀한
공간 감각(空間感覺)은 드가를 상기시킨다. 고갱은 선배 드가를 일생 동안 찬미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만년의 이 작품에 있어서 그는 다시 드가에 새삼
스럽게 더 접근한 느낌이다. 그러나 동시에 화면의 대부분을 메운 모래밭의
분홍색은 고갱 특유의 것으로서, 포비즘(Faubism)에 발전하는 방향을 나타내고
있다. 이 작품을 그릴 무렵 고갱은 관헌(官憲)과의 분쟁과 병의 악화 때문에 매우
곤경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화면의 생기있는 표현은 조금도 그런 어두운 그림자
가 없다. 그리고 시력이 아주 나빠졌는데도 최후까지 작가로서의 힘을 잃지 않고
제작할 수 있었던 점을 충분히 알 수 있다.

Barbarous Tales(미개한 이야기), 1902

만년의 고갱은 이 섬의 여러 가지 전설에 귀를 기울이고 흥미를 느낀다.
또 그것을 자기 나름대로의 이야기로, 때로는 신비하게, 또 때로는 상징적인 성격
으로 화면을 이루어 나간 것이 많다. 이 작품에서도 불상(佛像)과 같은 모습으로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젊은 남자와 그 한쪽에 가까이 붙어 앉은 젊은 여인, 그들을
둘러싼 나무들과 꽃들, 이것도 고갱이 히바오아 섬에서 듣고, 보고, 느낀 이야기의
한 장면일 것이다. 그 배후의 기이한 인물은 고갱의 퐁 타방 시대의 야코브 마이
에르 데 항이다. 곱사등이며 조그맣게 생긴 사내로서 항상 20파운드나 되는 성서
를 들고 다니는 이 남자를 여기에 그림으로써 고갱은 스스로의 과거와 현재를 한꺼
번에 그리려 했던 것 같다. 그의 과거에 힘들고 괴로웠던 나날이 만년의 그가 본
섬의 일상성에 결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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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41 후기인상주의: 툴루즈 로트렉

   

★ 뚤루즈 로트렉(Henri de Toulouse rautrec: 1864~1901) ★

앙리 드 뚤루즈 로트렉은 프랑스의 알비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의 친구였던 화가 R.프랭스토에게서 처음으로 그림을 배운 뒤 1882년
부터는 파리에서 코르몽(본명 F.A.Piwstre)의 지도를 받으면서 개성있는 소묘화가
로서의 독자적인 자질을 키워나갔다. 로트렉은 전통적인 의미의 화단에서 부각된
화가가 아니었다. 그의 기이한 행동과 스캔들, 또 환락가의 풍경을 소재로 해 그려냈던
그는 '퇴폐화가'라는 비난의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현대의 광고 전단지와
다양한 디자인의 포스터가 발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화가가 로트렉이다.
어떤 유파나 예술 사조를 따르지는 않았지만, 그는 인간의 삶을 예술로 녹여 내려는
의지가 확고한 화가였다.

로트렉은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12세에 당한 비운의 추락사고로 그의 키는 일생
152cm에 그쳤다. 곱추를 연상시키는 치명적인 신체적 장애를 치료하면서 그림을
배운 뒤 그는 스물 두살이 되던 해 집을 떠난다. 이 무렵 고흐, 고갱 등과 알게 되었고
드가의 예술에 끌리기도 하였다. 파리의 환락가 몽마르트르에 아틀리에를 차리고,
그 후 13년 동안 술집·매음굴·뮤직홀 등의 정경을 소재로 삼아 정력적으로 작품 제작을
하였다. 처음에 풍자적인 화풍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유화와 더불어 석판화도
차차 높은 평가를 받았다. 89년부터는 앙데팡당전(展)에 출품하였고 최초의 개인전은
93년에 파리에서 열었다. 그의 소묘는 날카롭고 박력 있는 표현으로 근대 소묘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런 소묘의 힘에 바탕을 둔 유화는 어두우면서도 신선하고
아름다운 색조와 독자적인 작풍으로인생에 대한 그의 통찰과 깊은 우수를 공감하게
한다. 태양을 찾아 헤맸던 친구 고흐와 달리 앉은뱅이 로트렉은 항상 앉은 채로 자신의
주위를 둘러볼 수밖에 없었다. 로트렉은 자신의 시야에 들어온 도시의 일상을 그렸다.
타락과 퇴폐, 그리고 이에 대한 폭로, 그래서 로트렉의 작품은 우아하고 경건한 세계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풍자의 세계를 조명한다. 그의 예술 세계에서는
고흐나 고갱처럼 현실 세계에 대한 갈등과 좌절 또한 없다.
그는 현실을 소화해 내기 위해 내면적인 갈등과 방황을 일삼았던 작가가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을 세상에 내던짐으로써, 있는 그대로의 비극을 사랑함으로써 자신의 내면
을 예술 세계로 정화시킨 화가였다.

몽마르트의 물랭루즈는 로트렉의 전속 작업장이나 다름없었다. 파리의 뒷골목을 배회
하는 매춘부와 공연 예술가, 광대 등을 그는 우울한 화폭에 담아 냈다. 물론 그의 삶이
그 환락의 뒷골목에 도취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어둡고 그늘진 사회의 일면을 냉철하고
이성적인 눈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로트렉의 눈길은 어디까지나 방관자적인 입장에서의
비판이었다. 신흥 부르주아 세력에서 밀려난 그의 시선은 언제나 서글픈 눈길로 세상을
바라보게 했다. 인기 배우들의 허식과 무지, 술집 손님들의 성격을 그는 예리한 눈으로
꿰뚫어 보았다. 로트렉에게 중요한 것은 '이상'이 아니라 '진실'이었다.
그 진실을 행하기 위해 그는 어둠의 시대를 날카롭게 조명했다. 단순한 풍속화가의 차원
을 넘어서 그는 화가로서 시대의 증인이 되고자 했다. 그는 어떤 유파에도 부합하지 않으
며 개성있고, 독창적인 자신의 예술 세계를 구축해 나가며 당대의 사회상을 정확하게
묘사해 냈다. 살아 있는 삶, 인간의 모습이 그에겐 작품의 주된 소재였다.
하지만 로트렉의 작품은 날카로운 풍자만을 대변하지는 않는다. 그는 풍자의 비극을 넘어
있는 그대로의 진실까지도 포용한다. 로트렉은 인간을 누구보다도 사랑한 화가였다.
뒷골목의 추악함까지도 사랑할 줄 아는 화가 로트렉은 비극을 초월한 영원의 생명력을
작품에 부여했다.

로트렉은 시대에 부합된 예술사의 주의 주장에 무관심한 작가였다. 또한 예술에 대한
논의나 비평을 누구보다도 싫어했다. 따라서 그의 작품은 조형적인 예술 형식의 창조
를 위해 대상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상을 진지하게 표현해 내기 위해 조형적인
형식미를 창출해냈다. 현실에 대해 냉철한 직관력을 갖고 있었던 로트렉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에 주력했다. 관찰된 대상은 예술이라는 장르를 핑계삼아 어떤 식으로
든 미화되거나 이상화되지 않았다. 그의 작품 소재가 일상적인 것이기는 했지만 그는
구체적인 대상들을 작품화했다. 특히 기법이나 양식적인 면에서 로트렉은 천재적인
소묘가였다. 물론 그의 데생은 기존의 그것과는 개념이 다르다. 대상이 지닌 본래의 선
을 그는 과감하게 과장하거나 생략함으로써 독특한 개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움직이는 대상을 신속하게 화면안에 고정시키는 재능 또한 천부적이었다.
이 같은 재능을 뒷받침 해주는 그의 힘은 정확하고 개성적인 선에 있다.
실루엣으로 표현된 인물의 개성을 표현하는 것까지도 그는 면이 아니라 윤곽선에 의해
드러냈다. 그의 색채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이다. 그는 기존의 어떤 유파들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고유의 색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채색석판화로 만들어진 로트렉의 포스터
작품은 그의 작품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흔히 '거리의 예술'로 불리고 있는 현대 포스터의 기원을 바로 로트렉에게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로트렉에 의해 포스터는 새로운 예술의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그는 채색석판화에 대한 관심으로 포스터를 제작했으며 결국 그에 의해서 예술 작품
으로 인정을 받게 된다. 밤의 환락가를 그리는 '퇴폐적인 화가'라는 불명예가 늘상
수식어처럼 따라다녔지만 로트렉은 석판화와 디자인의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작품을
탄생시키며 각광받은 화가였다.

30대 이후 알코올중독으로 정신착란을 일으켜 99년에는 3개월 동안 병원에 입원하였다.
입원 중에는 물론 퇴원 후에도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그림 그리기를 계속하였으나, 끝내
말로메의 별장에서 요양을 하던 중 37세로 생애를 마쳤다. 그의 어머니는 아틀리에에
남겨진 아들의 작품을 전부 챙겨 고향인 알비시(市)에 기증하였고, 1922년 알비시에
로트렉미술관이 개관되었다.

Self-Portrait of Toulouse Lautrec, 1882/83

시대에 어떤 유파나 예술 사조를 따르지는 않았지만, 인간의 삶을 예술로 녹여 내려는
의지가 확고한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Henri de Toulouse Lautrec: 1864~1901)
이란 화가가 있었다. 로트렉은 전통적인 의미의 화단에서 부각된 화가는 아니었다.
그의 기이한 행동과 스캔들, 또 환락가의 풍경을 소재로 해 그려냈던 그는 '퇴폐화가'
라는 비난의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그는 미술가로서 길지않은 기간 동안
인상주의로부터 이탈한 사실이 표현주의로 가는 촉진제 역할을 했고, 다른 한편으로
이미지, 문자, 색채의 효과적인 결합이 광고라는 새로운 미술장르를 낳게 했다.

로트렉은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12세에 당한 비운의 추락사고로 그의 키는 일생
152cm에 그쳤다. 곱추를 연상시키는 치명적인 신체적 장애를 치료하면서 그림을 배운
뒤 그는 스물 두살이 되던 해 집을 떠나 파리의 환락가 몽마르트르에 아틀리에를 차리
고, 그 후 13년 동안 술집, 매음굴, 뮤직홀 등의 정경을 소재로 삼아 정력적으로 작품
제작을 하였다. 처음에 풍자적인 화풍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유화와 더불어
석판화도 차차 높은 평가를 받았다. 1889년부터는 앙데팡당전(展)에 출품하였고 최초의
개인전은 1893년에 파리에서 열었다. 그의 소묘는 날카롭고 박력 있는 표현으로 근대
소묘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런 소묘의 힘에 바탕을 둔 유화는 어두우면서
도 신선하고 아름다운 색조와 독자적인 작풍으로 인생에 대한 그의 통찰과 깊은 우수를
공감하게 한다. 태양을 찾아 헤맸던 친구 고흐와 달리 앉은뱅이 로트렉은 항상 앉은
채로 자신의 주위를 둘러볼 수밖에 없었다. 로트렉은 자신의 시야에 들어온 도시의
일상을 그렸다. 타락과 퇴폐, 그리고 이에 대한 폭로, 그래서 로트렉의 작품은 우아
하고 경건한 세계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풍자의 세계를 조명한다.
그의 예술 세계에서는 고흐나 고갱처럼 현실 세계에 대한 갈등과 좌절 또한 없다.
그는 현실을 소화해 내기 위해 내면적인 갈등과 방황을 일삼았던 작가가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을 세상에 내던짐으로써, 있는 그대로의 비극을 사랑함으로써 자신의 내면을
예술 세계로 정화시킨 화가였다.

긴 의자에 앉은 여자

1882년 한때 로트렉은 보나르의 문하에 들어가서 철저히 아카데믹한 교육을 받았는데,
그 무렵 그의 화풍을 잘 전해 주는 작품의 하나이다. 긴 의자의 중심에 앉은 검정
스타킹의 나부, 오른쪽 다리를 왼쪽 다리 밑으로 넣고 오른손은 왼쪽 무릎에 놓고
왼손의 인지는 가볍게 입에 대는 변화나 하얀 피부를 돋보이게 하는 검정 스타킹의
색 대비와 함께 포즈에서 약간 인위적인 느낌이 들고 습작적인 냄새가 짙은 작품이다.
이 작품을 통해 로트렉의 인물에 대한 관심과 수업기의 철저한 작품을 볼 수 있다.

A Laborer at Celeyran, 1882

Portrait of Comtesse Adele-Zoe de Toulouse-Lautrec(The Artist's Mother), 1883

간소한 아침 식사를 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그린 것인데 화면 전체에 퍼져 있는 투명한
색조의 분위기는 마네나 인상파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17세의 로트렉이 소묘의 충분한 정확성을 유감없이 나타내고 얇은듯 한 터치의 중복에
인물 처리는 부드러운 양감을 조성하고 있다. 하루를 시작하는 창밖에 아침 안개를
떨어내는 앞집의 벽을 통한 배경 처리는 항상 따뜻한 애정과 신화를 잃지 않는 어머니
의 사랑처럼 깔려 있다.

고흐의 초상

코르몽의 기름 냄새 풍기는 화실 생활에서 개성이 강한 고호와 로트렉이 신뢰와 우정을
나누며 자신들의 작품에 열의를 보일 때가 22세 되던 1886년 가을무렵이다.
4년 후 브류셀에서 2인전을 갖기도 한 두 사람의 우정은 흔치 않은 경우였지만 강한
자아의 세계로 몰입하는 그들 사이의 우정은 시간적으로 그렇게 길지는 않았다.
파리의 바라든지 카페 한쪽 구석에 자리한 고흐의 개성있는 옆얼굴을 짧은 시간에
그릴 수 있는 파스텔을 이용한 재치를 보였다.
반 고흐의 까칠까칠하고 긴장된 표정을 일련의 사선으로 그린 진귀한 수법에 관심을
보인 반 고흐가 아우 테오에게 사도록 권유한 기념작이기도 하다.

"A Montrouge" - Rosa La Rouge, 1886-87

젊은 아가씨의 초상, 1886-1887

로트렉 백작 부인, 1887

녹청색을 주조로 한 실내, 46세의 로트렉의 어머니는 호탕한 남편과 결혼 생활이 결코
행복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혼자만의 시간이 많았기도 했지만 독서는
그녀의 생활에서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여 단순한 취미 이상의 것을 독서에서 추구
하였다. 인상파 기법이 요소요소에 나타나는 이 작품은 화면 전체의 좌측에 쏠린
듯한 인물의 위치에서나 잘린 책 부분은 보는 이로 하여금 창으로부터 비친 역광을
무시한 얼굴 처리처럼 아쉬움이 있기도 하다.

페르낭도 서커스의 여자 곡마사, 1888

1880년 초 프랭스토를 따라 페르난도 서커스장에 구경갔던 로트렉은 곧바로 서커스에
열중하게 되었다. 서커스장은 당시 인상파 화가와 당대의 삽화가들에게 한창 인기
였다. 로트렉이 그린 최초의 야심적인 대형 작품인 위 작품을 보며 벨기에의 화가 테오
반 리셀베르는 이렇게 말했다.
"이 작은 난쟁이는 결코 형편없다고 할 수 없다. ...한 번도 전시회를 갖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는 아주 재미있는 것들을 그린다. 페르난도 서커스장, 창녀 및 기타 등등."
이 작품에서 로트렉은 인물들이 구석에 잘려 나가는 화면 구성으로 원형 서커스장을
묘사했다. 중앙에 전속력으로 달리는 얼룩얼룩한 말의 등위에 여자 곡마사가 앉아 있고,
연기주임의 긴 채찍이 말에 살짝 닿아 있다. 연초록색 옷을 입은 여자 곡마사의 모델은
쉬잔 발라동이다. 물랭 루즈의 창설자인 조제프 올레는 이 그림을 복도에 걸어두기 위해
구입했다. 이 그림은 서커스를 주제로 제작될 연작들의 시작을 의미했으며 로트렉은 이
분야에서 모두가 인정하는 대가가 되었다.

Portrait of Suzanne Valadon, 1888

Lili Grenier in a Kimono, 1888

물랭 드 라 갈레트에서,1889

앞에 놓인 포개진 접시들이 쓰러질 듯 뒤뚱거리는 소란한 홀의 정경이다.
물랭 루즈에 빼앗기기 전에는 물랭 드 라 갈레트는 파리장의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던
댄스홀이며, 소재를 찾는 화가들이 자주 드나들게 되었다.
동적인 군중들의 처리에 비해 앞의 인물들은 많이 정리되어 표정의 대조를 볼 수 있다.

물랭 루즈의 춤, 1890

춤추는 무희와 그 무희에 빠져 있는 신사들의 모습을 로트렉은 물랭 루즈의 한 구석에
앉아서 조용히 응시하고 있다. 화려한 조명 아래에서 술과 쾌락에 취한 사람들 속에는
어떤 도덕이나 위선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본능을 쫓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 고독 또한 인간의 한 모습으로 그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Desire Dihau Reading a Newspaper in the Garden, 1890

Portrait of Honorine Platzer(Woman with Gloves), 1891

Girl in a Fur, Mademoiselle Jeanne Fontaine, 1891

Moulin Rouge-La Goulue(물랭 루주의 포스터), 1891/석판화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중앙에서 옆얼굴을 보이면서 한쪽 다리를 번쩍 들고 춤추는 무용수
의 거꾸로 핀 꽃과 같은 치마의 흰색이다. 빨강, 파랑, 노랑, 검정 등 화려한 색채를
뿌려 놓은 화면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이곳만은 대담하게도 종이 색깔 그대로이고
아무 색도 쓰이지 않았다. 그러나 주위가 어둡기 때문에, 물결치듯 힘차게 나부끼는
그 윤곽선은 그것과 대조적으로 검은 색으로만 이루어진 그림자 그림처럼 배경을 차지
하고 있는 많은 관객의 눈앞에 화려하게 펼쳐진 치마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커다란 깃털 장식이 달린 모자를 쓴 부인이나 실크해트를 쓴 신사들로 이루어진 이
뒷줄의 관중은 얼른 보기에 한 줄로 나란히 뒤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른쪽의
몇 사람이 앞으로 나와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실은 무용수 주위를 빙 둘러싸고
있으며 우리도 물론 그 관객 속의 한 사람이다. 앞쪽에는 실크해트를 쓴 남자 무용수가
마치 술 취한 사람처럼 등을 비틀고 손을 흔들면서 춤추는 모습이 역광을 받아 실루엣
으로 떠오른다. 그리고 하면 왼쪽에는 또 다른 무용수의 노란색 치맛자락이 크게 펄럭
거리고 있다. 이 화면에서 알 수 있는 한, 관객에 둘러싸인 무대에는 적어도 세 사람의
무용수가 힘차고 신나게 춤을 추고 있다. 그런데 1891년의 파리에 살던 사람이라면 여기
에서 4인 1조의 화려한 무용이 펼쳐지고 있다는 것을 금세 알아챘을 것이다.
그리고 중앙의 다리를 든 무용수가 '라 굴뤼(먹보)'라는 별명을 가진 당대 제일의 인기
인이고, 또 앞쪽의 술 취한 듯한 남자는 놀랄 만큼 유연한 신체 때문에 '뼈 없는 발랑탱'
이라고 불리던 유명한 무용수라는 것을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했을 것이다. 이 두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물랭 루주'의 카드릴(네 사람이 한 조가 되어 추는 춤)은 당시 파리에서
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그 이름대로, 네 개의 큰 날개에 붉은 색 조명을 달고 밤새 돌아가는 풍차를 간판으로
내건 물랭 루주는 19세기 말 파리의 이른바 밤의 세계의 상징이었다.
샤를 지들러로부터 물랭 루즈의 포스터 디자인을 의뢰받은 로트렉은 발랭탱 드 데조세로
알려진 에티엔 르노댕이라는 기묘한 인물과 함께 춤을 추는 라 굴뤼를 그렸다.
곧 파리 전역에 퍼진 로트렉의 포스터는 인상적인 색채와 날카로운 실루엣으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일본 판화의 영향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이 작품을 통해 로트렉은 대중
의 눈에 깊이 각인되었다. 수집가들은 벽에 붙은 포스터를 떼어 가지려고 혈안이 되었다.
수집가들이 이 작품처럼 높게 평가한 포스터는 이전에 없었다. 포스터 작가 또는 석판
화가로서의 로트렉의 화려한 데뷔를 장식하기에 알맞은 기념비적인 작품이었다.

Justine Dieuhl, 1891

Louis Pascal, 1891

A La Mie(아 라 미에),1891

빽빽이 들어 찬 주변의 줄무늬와 터치는 언뜻 두 사람과 어질어진 테이블 위의 병이나
컵들이 서로 다른 두 사람의 시선처럼 초점을 잃고 있다.
어떤 희망을 놓쳐 버린 카페의 우수라고나 할까. 친구인 모리스 기베르와 술집 여자를
모델로 한 뒷골목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표정이다.
세기말의 특이한 권태감을 나타낸 작품으로 로트렉 개인의 인간에 대한 심리 추구일
뿐만 아니라, 시대의 분위기를 잘 전해주는 작품이며, 후에 젊은 화가들에게 상당한
감명을 준 작품이다. 길고 짧은 선의 활달함이 언뜻 평면 처리된 전체 화면을 커버하
고 있다.

The Beginning of the Quadrille at the Moulin Rouge, 1892

Ambassadeurs: Aristide Bruant(대사: 아리스띠드 브뤼앙), 1892

채색 석판화 포스터
아리스티드 브뤼앙(1851-1925)은 당시 몽마르트르의 인기 가수인 동시에 작사와 작곡도
잘했다. 1885년에 카바레 밀리통을 개장했으며 이 무렵부터 로트렉과 친했는데, 당시
갓스물이 된 로트렉을 처음으로 창녀의 세계로 유인한 것도 그였으며 말하자면 악우
(惡友)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로트렉은 그를 위해 꽤 많은 데생과 유화를 남겼는데, 화가
로트렉의 그리고 또한 가수 브뤼앙의 진미를 가장 잘 나타낸 것은 이작품을 포함 한 4점의
석판 포스터일 것이다. 그것들은 차양이 넓은 모자에 다크 블루의 망토 게다가 주홍색
머플러를 각각 평탄한 색면으로 분할하고 단순 명쾌한 화면 구성으로 완성한 작품이다.

Queen of Joy, 1892

At the Moulin Rouge: Two Women Waltzing, 1892

La Goulue Arriving at the Moulin Rouge with Two Women

두 여인과 함께 물랭 루즈에 도착한 라 굴뤼, 1892

이 그림은 라 몸 프로마주와 여동생의 팔짱을 끼고 물랭 루즈로 들어서는 라 굴뤼의
모습을 담고 있다. 본명이 루이즈 베버인 라 굴뤼는 프랑스와 독일의 접경 지역인
알사스 지방 출신이었다. 그녀는 물랭 드 라 갈레트에서 일하기 전에는 세탁부 생활과
페르난도 서커스 단원 생활을 했다. 라 굴뤼는 물랭 드 라 갈레트에서 르누아르를
만나기도 했다. 그녀는 '자연주의 카드리유'라 불리는 자신만의 독특한 춤을 유행시켰다.
캉캉 춤에 근원을 두고 있는 이 춤은 다리를 머리 위에 두어야 하며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다리를 최대한 벌리며 끝을 맺었다. 브뤼앙의 카바레 근처에 있는 엘리제 몽마르트
르에서 라 굴뤼를 알게 된 로트렉은 그녀가 활동을 그만둘 때까지 8년 동안 가까이에서
그녀를 지켜 보았다. 퇴락의 길을 걷게 되면서 그녀는 가건물의 서커스장에나 출연하게
되는데, 1895년 로트렉은 오늘날 널리 알려진 두 점의 패널화로 이 가건물을 장식해 주었
다. "당신 그림에서 내 엉덩이를 보니 정말 아름답군요,"라고 속삭여 주던 여인, 라 굴뤼.
이 여인의 매력에 사로잡힌 로트렉은 라 굴뤼의 모습을 담은 유화, 포스터, 석판화를 열
점 가량 제작했으며, 오늘날 그 중 대다수의 작품이 로트렉의 대표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물랭 루즈에서,1892

물랭 루즈의 한구석에서 대화하는 몇 사람을 그려 놓았다.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왼쪽 끝에 있는 붉은 수염을 기른 노인은 비평가 에두 아르 뒤자
르댕이고 그 오른쪽은 스페인의 댄서 라마카로나, 이어서 사진 작가인 세스코, 실업가이
며 로트렉의 친구였던 모리스 기베르 이다. 그 뒤쪽에서 붉은 머리를 손질하면서 돌아서
있는 여인은 라 굴뤼, 그 왼쪽에 둘이서 나란히 걷는 사람이 로트렉과 그의 사촌 동생
타비에드 셀레이랑인데, 사촌이 키가 크기 때문에 키가 작은 로트렉과의 배치가 아주
유머러스하다. 오른쪽 끝의 '녹색과 황색의 칸델라'라는 평을 받는 네리 양의 얼굴은
특수한 조명 효과 때문에 가면을 보는 것 같은 특이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르누아르가 물랭 드 라 가레트의 무희들과 파리의 여러 중하층계급의 유흥장소를 그린 지
불과 몇 년 되지 않아 툴루즈 로트렉은 매우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인상주의 그림에서
보이던 빛나는 삶의 기쁨은 사라지고 대신 인공조명 아래 여성의 창백한 피부에서 보듯
억지스럽고 불안장하며 숨겨진 그 무엇을 드러내게 된다. 이 작품에는 마네의 후기 작품
에서 보이던 귀족적인 우울한 정서와 함께 도미에와 드가의 드로잉에서 받은 영향이 로트
렉의 독특한 암시와 결합되어 나타난다.

Dancing Jane Avril(춤추는 잔 아브릴), 1892

준비된 유화용 두꺼운 종이 위에 간결한 선으로 다리를 들어올려 보이는 동적 움직임이
한결 시각의 변화를 가져온다. 검정선으로 그린 후에 밝은 흰색으로 양감을 처리하고
중간 톤으로 애조를 띤 한 색조로 주변을 감쌌다.
뒷면의 정겨운 표정의 여인들은 장소의 분위기를 확인해 주는 듯.
주변 여인들 중에서도 세련된 취미와 섬세한 감정을 가졌고 보기 드물게 예술을 이해한
잔 아브릴. 이탈리아 귀족과 창녀 사이에 태어난 쇠잔한 인생을 안은 그녀의 많은 고뇌
를 공감했던 로트렉은 기회만 있으면 화폭에 담았다.

Portrait of Madame de Gortzikoff, 1893

Jane Avril, 1893

Le Divan Japonais, 1893/석판화

In Bed, 1893

물랭가의 살롱에서, 1894

툴루즈 로트렉의 영향으로 파리 물랭가 매음굴의 붉은색 소파는 19세기 후반 회화의
전형적인 요소가 되었다. 이 작품은 같은 장소를 배경으로 한 모파상의 소설을
떠올리게 한다. 매춘부들이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가구로 치장되고 조명을 환하게 밝힌
방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로트렉은 이 여성들을 과장하거나 우스꽝스럽게 풍자하
기보다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개인들의 삶은 겉으로 드러났다가 잠시 밝게 빛날
뿐 곧 사라진다. 화가는 이 여성들의 불안하고 나른하고 지루해하거나 지친 분위기를
얼굴과 옷, 자세, 몸짓 등을 통해 암시하고 있다.

Rue des Moulins: The Medical Inspection, 1894

La Revue Blanche, 1895/석판화

Clowness Cha-u-Kao(물랭 루즈의 챠우카오), 1895

물랭 루즈(붉은 풍차) 시리즈를 수없이 제작하던 31세 때의 로트렉은 밤의 세계에 익숙
해졌고, 여기 중국풍의 이름을 지닌 댄서 카오 양의 유채나 데생, 석판화를 다수 남겼다.
샤 위 카오의 팔을 낀 가브리엘의 옆 모습은 분장한 채 무대를 내려온 우수에 젖은
샤 위 카오를 돋보이게 한다. 뒤의 많은 군중 속에 가브리엘의 시선과는 정반대로 자신
의 자화상을 집어 넣어 화면의 더욱 연장된 느낌을 시도함을 볼 수 있다.

The Lady Clown Cha-U-Kao, 1895

Study for "Elles"(Woman in a Corset), 1896

La Toilette(화장하는 여인), 1896

상반신을 벗어버린 채 관람자에게 등을 보이고 있는 여자, 그 아름다움이나 미모를
그리는 다른 작가와는 달리 화폭에 꽉 찬, 등을 보이는 한 모델을 통하여 인간의
내면을 생각하게 한다. 로트렉의 자유롭지만 날카로운 솜씨를 보여준다.
로트렉이 여성을 모델로 한 것 중에 1890년을 경계로 화가를 위해 포즈를 취한 평범한
초상 중심인데 반해, 후반엔 여성 특유의 사생활에서 얻은 특이한 포즈들이 중심을
이루는 대조를 보인다. 지극히 평범한 포즈이지만 드가를 연상케하는 대담한 구도가
보이지 않는 얼굴에서 긴 여운을 남긴다.
이 작품은 공감과 동정심을 갖고 매춘부를 그린 초상화 연작 <그녀들>의 일부다.

At the Cafe: The Customer and the Anemic Cashier, c.1898-1899

Jane Avril Leaving the Moulin Rouge, 1899

1890년 로트렉은 '라 멜리니트(강력 폭약)'로 불리는 잔 아브릴과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아브릴은 유복한 이탈리아 이주민과 화류계 여인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로 병약해 보일
정도로 섬세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엄청난 정력의 소유자로
멜리니트라는 화약과 같은 폭발력을 지닌 여성이었다. 아브릴은 젊은 시절 우연히 사귄
한 의과 대학생의 도움으로 뷜리에 무도장의 관객들 앞에서 춤을 추었고, 스무 살에
물랭 루즈에 데뷔했다. 아브릴은 비평가들에게 '춤의 화신'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그녀는 곧 로트렉의 가장 대표적인 모델 중 하나가 되었다.
로트렉은 그녀가 춤을 추는 모습 뿐만 아니라, 모피 목도리에 아름다운 외투를 걸치고
물랭 루즈로 들어서는 모습도 그렸다. 아브릴은 교양을 갖춘 여성이었으며, 시인인 폴
포르, 레옹 디에르, 스테판 말라르메, 폴 베를렌, 소설가인 조리 카를 위스망스 등과
교제를 하였다. 1896년 입센의 "페르귄트"를 무대로 올린 연극에 출연하기도 했다.
로트렉이 죽은 후 아브릴은 연극에 전념하다가 언론인이자 데생가인 모르스 비에와 결혼
하여 화려한 부르주아의 삶을 향유했으나, 말년에는 비참한 가난 속에서 생을 마쳤다.

Private Room at the Rat Mort, 1899

The Milliner, 1900

The Opera "Messaline" at Bordeaux, 1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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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35 인상주의: 르누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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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르노와르(Renoir, Pierre-Auguste: 1841~1926) ★

프랑스 리모주 출생. 4세 때 파리로 이사하였다. 집안이 가난한 양복점
이어서 13세부터 도자기공장에 들어가 도자기에 그림 그리는 일을 하였다.
이곳에서 색채를 익힌 것이 뒤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 무렵부터 점심시간에는 루브르미술관에서 J.A.와토나 B. 부셰 등의 작품에
이끌려 화가가 될 것을 꿈꾸었다. 그러나 4년 후 기계화의 물결에 밀려 실직
겨우 부채그림이나 점포장식 등을 하였다.
1862년 글레이르의 아틀리에에 들어가 C.모네, A.시슬레, 바지위 등을 알게
되고 또 C.피사로, P.세잔, J.B.A.기요맹과도 사귀어, 훗날 인상파운동을 지향한
젊은 혁신화가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이리하여 초기에는 코모, 들라크루아, 크루베 등의 영향을 받았고,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종군한 후에는 작풍도 점차 밝아졌다.
인상파의 기치를 든 1874년 제1회 전람회에는 《판자 관람석》(1874)을
출품하였고, 계속하여 제2회와 제3회에도 참가하여 한동안 인상파 그룹의
한 사람으로서 더욱 더 눈부시게 빛나는 색채표현을 전개하였다.
대작(大作) 《물랭 드 라 갈레트 Le Moulin de la Galette》(1876)와
《샤토에서 뱃놀이를 하는 사람들》(1879)은 인상파시대의 대표작이다.
1881년 이탈리아를 여행, 라파엘로나 폼페이의 벽화에서 감동을 받고 부터는
그의 화풍도 마침내 한 전기(轉機)를 맞이하였다.
귀국 후 얼마 동안의 작품은 색감과 묘법(描法)이 크게 바뀌었다.
즉 담백한 색조로써 선과 포름을 명확하게 그려서 화면구성에 깊은 의미를 쏟은
고전적인 경향을 띤 작품들로 《목욕하는 여인들》(1884~1887) 등을
그렸다. 그 후는 완전히 인상파에서 이탈하여 재차 독자적인 풍부한 색채표현을
되찾아 원색대비에 의한 원숙한 작풍을 확립하였다. 더욱이 1890년대부터는
꽃 ·어린이 ·여성상, 특히 《나부(裸婦)》(1888) 등은 강한 의욕으로 빨강이나
주황색과 황색을 초록이나 청색 따위의 엷은 색채로 떠올리면서 부드럽고
미묘한 대상의 뉘앙스를 관능적으로 묘사하였다.
프랑스 미술의 우아한 전통을 근대에 계승한 뛰어난 색채가로서 1900년에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만년에는 지병인 류머티즘성 관절염 때문에
손가락에 연필을 매고 그리면서도 마지막까지 제작하는 기쁨을 잃지 않았다.
최후 10년 간은 조수를 써서 조각에도 손대어 《모자(母子)》(1916)와 같은
작품을 남겼다.

Self-Portrait, 1910

피에르 오구스트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1841-1919)
예로부터 도자기의 고장으로 유명한 프랑스 중부 산악 지대의 리모주에서 태어
났다. 아버지는 작은 일도 소홀히 하지 않는 성실한 태도와 손으로 하는 일에
대한 애정이라는 좋은 의미의 직인 기질을 이어받았다.
르누아르가 네 살일 때 그의 집은 파리로 이사했는데, 생활은 여전히 가난했기
때문에 르누아르는 열세 살 때부터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는 직인으로 일하게
되었다. 만년에 유명해지고 나서 그는 다시 도자기의 세계를 즐기게 되었는데,
아마도 힘들었던 소년 시절을 그립게 회상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기계에 의한 대량 생산 상품이 등장하여 그가 일하던 도자기 공장이 망하자
르누아르는 부채에 그림을 그리거나 창문의 블라인드에 페인트를 칠하는 일까지
해야 했다고 한다.

화가로서 르누아르의 수업은 1862년 스물한 살 때 파리 국립미술학교의 교사
였던 샤를 글레르의 아틀리에에서 배우게 된 때로부터 시작된다.
글레르 밑에서 공부한 2년 반의 기간은 직접적으로는 그의 양식에 아무런 성과도
가져다 주지는 않았지만, 거기에서 모네, 시슬리, 바지유 등 훗날의 인상파 동료
들을 알게 된 것은 큰 수확이었다. 아카데미의 규범에 압박감을 느끼던 그와
인상파 친구들은 야회로 나가서 시골의 자연 그대로의 색채와 광선을 그림에
담기 시작했다. 인상주의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시슬레와 모네가 시골 풍경을
즐겨 선택했던 것에 비해 르누아르는 파리로 시선을 돌려 파리인들의 일상에
주목하였다. 그는 젊은 여성과 어린이들에 대한 독특한 감각을 보여주는 훌륭한
초상화로 두각을 나타내었다.

1870년대, 인상파의 기법에 깊이 젖어 있던 시절의 르누아르는 깨끗하고 맑은
색채의 작품을 많이 남겼는데, 1880년대에 들어와 인상주의에 의문을 품게되고
마침내 후반 생의 독자적인 풍부한 양식으로 옮아간다.
이 양식의 전환에는 1881년부터 1882년에 걸쳐 알제리,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지중해의 밝은 태양과 르네상스 시대의 고전 작품을 접한 것이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곳에서 그림의 양식이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발전하기 시작했고, 이전
의 유쾌하고 자유로운 이미지 대신 루벤스의 작품처럼 여성 누드로 가득한 대규모
작품이 나타났다. 이러한 경향은 코트다쥐르로 이주한 뒤에 더욱 심화되었다.
관절염으로 휠체어에 의지해야 했던 노년의 르누아르는 손에 붓을 묶은 채 생애
말년까지, 프랑스 리비에라 지역의 찬란한 햇살 속에 빛나는 젊음과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작품들을 그렸다.

Portrait de Romaine Lacaux, 1864

마치 사진을 보는 듯 지극히 사실적인 소녀상이다. 당시의 평론가 말마따나 "더
이상 오를래야 더 오를 데가 없을 만큼 고도의 회화 수법"을 보인 작품이다.
르누아르의 섬세하고 예민한 감성이 화폭 구석구석에서 번득인다.
1863년은 르누아르가 <춤추는 에스메랄다>로 살롱에 입선한 해다. 이 성공에
힘입어 초상화 주문이 많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초기이기 때문에 그는 그 어느 때
보다도 정성껏 그리고 꼼꼼히 그림을 그렸다. 이 작품으로 말미암아 르누아르는
그 성가가 높아지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마치 에나멜과도 같은 염색(艶色)을
지니면서도 한편으로 전아(典雅)한 색조가 억제된 감성을 느끼게도 한다. 아카데
믹한 작고의 수련을 쌓은 흔적이 엿보이는 초기작이다.

르누아르가 청탁을 받고 그린 최초의 그림들 가운데 하나다. 이 여자아이의
아버지는 루느아르가 견습공 시절부터 알고 지냈던 것으로 보이는 도자기 제조업
자였다. 이 그림에서는 이 젊은 화가가 존경하던 두 화가 앵그르와 코로의 영향
을 엿볼 수 있다. 여기에서 르누아르는 이 쟝르의 관례를 존중해 로맹라코를
어린 부르주아 공주 같은 포즈로 앉혀 놓았지만, 아이의 신선미를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대가다운 면모를 발휘해 보였다. 어린 모델들에 대한
이 같은 (공감과 존중의 성격을 동시에 띤) 감응은 자신의 아이들을 포함해
아이들을 그린 그의 초상화 어디에서든지 반복해서 나타난다.

Portrait of William Sisley, 1864

Bouquet of Spring Flowers (Spring Bouquet), 1866

르누아르는 죽기 바로 직전까지 그림을 그리려 했다. 숨을 거두기 몇 시간 전
간병인에게 화구를 가져오게 한 르누아르는 정물 소재로 꽃을 준비하도록 했다.
풍요롭고 관능적인 여인들과 더불어 그가 지극히 사랑했던 소재 꽃, 르누아르의
꽃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그 밝고 화사한 인상에 지극한 행복감과 만족감을
느끼게 된다. 르누아르의 초기작 가운데 하나인 이 작품에서 우리가 얻는 즐거움
도 바로 그런 것이다. 꽃이나 소녀같이 너무 예쁜 대상만 그린다고 누가 한마디
하면 르누아르는 다음과 같이 응대하곤 했다.
"그림은 가능한 화려한 것이 좋아요. 소중하고 즐겁고 예쁜 것, 그래요, 예쁜 것
이어야 하지요." 꽃이 그런 것처럼 확실히 꽃을 그린 그림도 우리에게 아름다움의
지극한 감동을 준다. 누가 꽃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나? 꽃은 인간에게 아름다움
이 무엇인지 최초로, 또 근원적으로 가르쳐준 자연의 대표적인 사물이다.
그러나 이렇게 아름다운 꽃도 금새 시들고 만다. 그것이 꽃이 지닌 가장 큰 단점이다.
서양 미술에서 꽃이 아름다움의 상징임과 동시에 덧없음 혹은 허무의 상징인 것은
바로 꽃의 이런 숙명 탓이리라. 덧없음의 상징으로 그려진 꽃 그림 가운데는 사계절
의 꽃을 한데 모아 그린 것들이 있다. 주로 17세기에 많이 그려진 이런 꽃 그림은,
사계절의 꽃이 한자리에 모인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관객으로
하여금 인생이 짧고 유한한 것임을 깊이 절감하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짧은 인생을 보다 성실히, 아름답게 살자는 호소를 담은 그림인 것이다.
이런 서양 꽃 그림의 전통을 잘 알고 있었을 르누아르가 평생 누구보다 꽃 그림을
열심히 그린 것은, 무엇보다 인생의 아름다움과 덧없음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려는
그의 열정 때문이었다. 인생의 아름다움과 덧없음을 윤색하거나 가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이만큼 강하고 아름다운 사람은 없다.

Portrait of Bazille, 1867

Alfred Sisley and His Wife. 1868

르누아르의 다정한 벗이었던 화가 시슬리가 결혼한 무렵에 그린 초상화인데, 이
그림은 이른바 초상화의 포즈가 아니라 자연 그대로의 자유스러운 모습을 잽싸게
포착하여 다정한 부부상을 부각시켜 놓았다. 이무렵의 엄격한 사실(寫實) 기법
탓으로 부인의 스커트가 지나치리만큼 선명하게 묘사되어 있어 인물 이상의
효과를 내고 있다. 남편과 아내를 화면 가득히 채우면서 삼각형 도법(圖法)으로
짜임새 있게 구성하고 있다. 특히 르누아르는 두 인물의 얼굴의 볼륨에 신경을
쓴 흔적이 엿보인다. 초기의 사실적인 수법이 잘 드러나 있는 이 그림은 화려한
색조로 발전해 가는 과정을 잘 나타내고 있기도 하다.

La Promenade(The Walk), 1870

Still Life with Bouquet, 1871

Monet painting in his garden at Argenteuil, 1873

Torso(Buste de Femme), 1873-75

Danseuse(Dancer), 1874

La loge(The Theater Box), 1874

관람용 안경을 들고 열중하여 오페라를 보는 상류층 남자는 르누아르의 형제인
에드몽이다. 그는 니나라는 유명한 모델과 함께 있는데 그녀는 매우 생기있고
광채가 나게 표현되어 있다. 다른 작품에서처럼 르누아르는 여성의 얼굴에서
눈과 입술을 강조하고 다른 부분은 특별한 특성 없이 남겨두었다.
그녀의 줄무늬 드레스의 네크라인 쪽으로 살짝 들어간 꽃은 작가의 탁월한 감각을
보여준다.

The Parisian (La Parisienne), 1874

Portrait of Madame Henriot, 1874

Woman Reading, 1874-76

인상파 시대의 르누아르의 작품에는 자연의 묘사보다는 인물, 특히 여인을 주제로
빛의 효과를 탐닉하고 있는 명작들이 많다. 이 그림도 그러한 작품 가운데 하나로
서 젊은 시절의 르누아르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대표작이다. 르누아르는 주로
인물을 중심으로 하여 빛의 효과를 탐색하고 있는 것이 그 나름의 두드러진 특징
이라 하겠다. 작품의 모델이었던 마르고(Margot)는 몽마르트의 화류계 여자로
성긴 눈썹과 다갈색 곱슬머리, 도톰하고 육감적인 입술을 지녔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르누아르의 <춤추는 소녀>에서 모델이 되기도 했다.
<책 읽는 여인>은 창 밖에서 흘러 들어오는 부드러운 햇살을 받아, 역광 속에서
젊은 여인의 즐거운 독서의 한 순간을 포착하고 있다. 화가는 거기서 다양하고
미묘한 색조들을 발견한다. 책에서 반사된 빛은 얼굴의 그림자를 투명하게 만들고
있으며, 머리는 마치 스스로 빛을 뿜는 것처럼 빛난다. 여인이 얼굴은 빛의 반영
이 밝아 매혹적인 생명력을 느끼게 한다. 빠른 붓질로 턱의 형태가 나타나고,
괄호형의 곡선은 입술과 눈, 눈썹 등 화면의 여러 곳에서 반복된다. 붓의 터치는
어떤 곳에서는 물감을 두껍게 발라 놓기도 하고, 또 다른 곳에서는 단순하게 씻어
내리며 자연스러운 필치를 보이고 있다.

Portrait of Claude Monet, 1875

아르쟝뚜유에서 조그마한 뜨락이 있는 집을 전세 내어, 그림에 골몰하고 있을
무렵의 화우 끌로드 모네가 풍경화 제작에 열중하던 손을 멈추고 뭔가 깊이 생각
에 잠겨 있는 듯한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예술 창작에 심취된 화가의 진지한
모습을 유연한 필촉과 따뜻한 색감으로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제 2회 인상파전에
출품했던 이 작품은, 모네와의 우정을 나타냄과 동시에 인상주의가 가장 순수
하게 추구했던 시기의 화가의 한 기록으로서 퍽 값진 그림이다. 모네는 바로 이
그림 속의 팔레트와 붓으로 <아르쟝뚜유의 다리> 등 지방의 풍물을 즐겨 그려
그 나름의 빛과 색채의 향연을 베풀었다. 여인 초상이 대부분인 르누아르로서는
특이한 작품이다.

Portrait of Victor Chocquet, 1875

Nini in the Garden, 1875-1876

Study for "Nude in the Sunlight", 1875-76

비너스가 바다의 물거품에서 태어났다고 한다면, 르누아르의 이 나부는 무성한
숲 덤불을 비집고 빛나는 햇빛 속에서 태어난 현대판 비너스라고나 할까!
거친 붓자국의 뿌우연 빛깔 속에서 풍요롭고도 요염한 여체가 어슴푸레하게 부각
되었다. 제 2회 인상파 전시회에서 "모델이 마치 수포장에 걸린 것 같다"는 험담
을 들을 정도로, 풀빛으로 얼룩진 볕살의 효과는 대단하다. 얼굴, 어깨, 젖가슴 등
몸 전체에 눈이 부실 정도로 태양의 직사광선이 감싸고 있는 이 여체는, 마치 숲
속의 요정과도 같은 동화적 분위기마저 느낀다. 배경인 수풀도 역시 햇빛을 듬뿍
받아 하나로 버무려진 아름다운 색채의 효과를 내고 있다. 순간적인 색채의 소용
돌이를 잘 감득한 작품이다.

A Girl With a Watering Can, 1876

르누아르처럼 어린이들의 상냥하고 순진무구함을 잘 표현한 작가도 없다.
값비싼 옷을 잘 차려 입은 어린이의 '공식적인' 초상화에 나타나는 경직한 자세를
피해 르누아르는 어린이들이 자유롭게 웃고 놀도록 내버려 두었다.
이 작품에서 화가는 햇빛을 받은 꽃밭과 작은 금발머리의 소녀를 매력적으로
조화시키고 있다. 이 소녀는 마치 혼자서 이 만개한 멋진 정원을 가꾸었다는
듯이 녹색 물뿌리개를 자랑스레 들고 행복하게 미소 짓고 있다.

Le Moulin de la Galette, 1876

인상주의의 진정한 선언이라 할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제작한 시기는 르누
아르의 활동 시기에서도 매우 중요한 때였다. 이 시기에 그는 인상주의 동료들과
공유하고 있던 일상적인 주제, 채색된 그림자, 야외에서 그리기에 대한 생각들을
색감이 풍부한 자기 고유의 스타일로 정립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 당시의 무도회와 야외 술집의 즐거운 분위기를 잘 살린, 유쾌하고도 건강한
삶으로 흘러 넘치는 찬란한 작품이다. 르누아르는 대중적인 휴일 무도회에 즐겨
참여했다. 르누아르는 인상주의자들의 탐구를 옥외의 밝은 빛 아래의 인물에
적용하여, 풍부한 색채의 반점들과 밝은 빛으로 진동하는 작품들을 제작하였다.
그는 작품의 구성에 인물의 중요성을 부여함으로써 인상주의를 고전주의, 낭만
주의, 사실주의 등 19세기 프랑스 미술의 위대한 단계의 수준에까지 끌어올렸다.
풍경 또는 정물에만 국한하지 않고 시야와 영감의 폭을 넓혀 감으로써, 그는
프랑스 회화만이 아니라 전 세계 회화의 위대한 거장들 속에 자리잡게 된다.
1877년 제 3회 인상주의전에 출품했던 이 작품은 120호나 되는 대형 캔버스를
아틀리에에서 몽마르트의 무도장까지 매일 가지고 가서, 현장의 정경을 직접 묘사
한 것이다. 나뭇잎을 헤치고 들어오는 햇빛의 순간적인 변화와 움직임을 포착
하려 했다는 측면에서 주목을 받는 작품이다. 같은 인상주의 계열의 화가이자
소장가였던 카이유보트가 프랑스 정부에 기증해 박물관에 소장되었다.

The Swing, 1876

공원의 그늘, 산책길에서 만난 지인(知人)들의 다소곳한 대화 장면이다.
매우 흔해 빠진 일상적인 정경이, 르누아르의 애무하는 듯한 붓의 촉감으로 말미
암아, 놀라울 정도로 밝은 빛의 세계를 나타내 주고 있다.
프라고나르가 그린 <그네>처럼 그렇게 우아한 세계는 아니지만, 서민들의 충족한
생활의 숨결이 그런 대로 눈부신 광휘를 떨치면서 밝게 실현되어 있다.
나무 사이로 흘러내리고 있는 빛의 줄기가 화면의 도처에 명멸(明滅)하면서 나무
등걸과 오솔 길이 한결 아름다운 빛으로 반영되고 있고, 멈춰 서 있는 그네 역시
마치 쾌적한 리듬으로 여유롭게 움직이고 있는 듯이도 보인다.
이 그림에서도 르누아르는 자연의 묘사 못지 않게 인물의 표현에 적잖은 관심을
보이고 있음을 잘 알 수 있다.

Portrait of the Actress Jeanne Samary, 1877

밀도(密度) 짙은 눈부신 핑크 빛깔을 배경으로 깔고, 마치 이 화려한 분위기 속에
흠뻑 젖어 있는 듯이 우아한 여인이 턱밑에 손을 받치고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그 청징(淸澄)한 눈은 지적(知的)으로 빛나고 있고, 입술과 어깨 언저리에 붉은
색조가 산점(散点)하고 있고, 한편으로 여기에 짙은 녹색의 의상이 알뜰히 대비
(對比)되고 있다. 그리고 이런 뭇 빛깔들이 마치 하나로 용해된 듯도 하면서
쾌적한 색감으로 잘 나타나 있다. 이 그림의 모델은 당시 파리에서 인기 절정에
있었던 유명한 여배우이다. 그녀는 매우 쾌활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발랄하면서
도 지적(知的) 매력이 넘치는 미인이었다고 한다. 이에 매혹된 르누아르는 그녀의
전신상도 그렸다.

Madame Charpentier and Her Children Paul

(at her knee) and Georgette, 1878

1879년 살롱전에서 파란을 일으켰던 대형작이다. 아르그리트와 그녀의 딸
조르제트, 아들 폴(당시 풍습대로 여야 옷을 입혔다.)의 모습을 담았다.
푸르스트는 샤르팡티에 부인을 싫어했는데도 자신의 저서 <다시 찾은 시간>
에서 이 그림에 관해 긴 묘사를 할애한 바 있다. 그는 "티치아노의 가장 아름
다운 작품들에 비할만한 감미로운 그림"에 찬탄을 금하지 못하면서 르누아르의
이 작품은 다른 화가들의 작품에서도 볼 수 없는 "우아한 가정과 정교한 복장
에서 풍기는 시정을 완벽하게 포착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Young Women Talking, 1878

Portrait of the Actress Jeanne Samary, 1878

Gypsy Girl, 1879

The End of the Lunch, 1879

Oarsmen at Chatou, 1879

옥외의 분위기와 빛에 대한 예민한 감각, 미묘한 분위기, 대단히 세련된 색채로
이루어진, 풍부한 뉘앙스의 물 위에 반사되는 빛의 묘사 등 이 무렵 그의 인상
주의의 가장 대표적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The Canoeists' Luncheon, 1879-80

음악회에서, 1880

음악회에 출연하여 꽃다발을 받은 다음 무대 뒤 휴게실에서 잠시 쉬고 있는 장면
이다. 차분히 앉아 있는 두 소녀와 꽃다발 등 매우 우아한 테마를 극히 아름다운
색조로 나타내주고 있는 이 그림은, 퍽 극명(克明)한 묘사를 하고 있어 상당히
엄격한 사실(寫實)의 화법을 보여 주고 있다. 그의 나이 서른 살에 접어들면서
부터 르누아르는 친구들과 새로운 그룹을 만들어 새로운 화법을 채택하게 된다.
즉, 이른바 인상파 시대에 접어들게 되는데, 이 무렵에 그는 곧잘 소녀들을 모델
로 해서 그림을 그리곤 했다. 특히 발랄한 젊은 소녀들을 대상으로 하여 즐겨
그림을 그린 까닭은 소녀의 아름답고 청순하며, 또한 순진 무구함에 당시 매료
(魅了)되었기 때문이다.

Irene Cahen d'Anvers, 1880

가슴을 조이고 있듯 긴장한 눈매로 무엇인가를 열심히 응시하고 있는 가련한
소녀상은 뭔지 모를 연민(憐憫)의 정 같은 것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소녀상은
르누아르가 즐겨 다루는 소재의 하나이다. 당시 별로 많지 않았던 그의 예술의
옹근 이해자였던 은행가 루이 깡 단베르 씨의 귀여운 막내 딸이 모델이 되어
주어서 퍽 조심스레, 그리고 정성스레 이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놀란 토끼처럼
동그란 눈, 투명한 살결의 프로필은 유연한 붉은 자색의 머리칼에 감싸여 더욱
돋보인다. 길게 늘어뜨린 머리칼의 한 가닥, 한 가닥은 르노와르 특유의 흐르는
듯한 붓놀림으로, 산만한 듯하면서도 매끄럽게 다듬어졌다. 청결하고 감미로운
작품이다.

Lady Sewing, 1879

Jugglers at the Cirque Fernando(페르난도의 서커스 소녀), 1879

밝음, 발랄함, 따뜻함 등을 사랑한 르노와르는 서민들을 보는 시각(視角)에
있어서도 로트렉이나 드가처럼 날카로움이나 풍자 같은 것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그는 [놀이] 속에서 삶의 충일(充溢)함을 찾고, 일상성 그 자체를 밝고
따뜻하게 묘출한다. 언제나 흥청거리는 몽마르트르에 천막을 친 서커스 단장
페르난도 발덴베르크의 두 딸을 모델로 한 이 그림에서도, 르누아르의 그런 속성
을 쉽사리 파악할 수 있다. 따뜻하게 보이는 마루를 배경으로 하여 약간 시점(視点)
을 높이 잡아 굽어보는 듯한 묘사를 가미하면서, 두 소녀의 앳된 모습을 세련된
색채로 돋보이게 하고 있다.

Sleeping Girl(known as Girl with a cat), 1880

Roses and Jasmine in a Delft Vase, 1880-81

The Luncheon of the Boating Party, 1881

"이웃하는 모든 사물에 영향을 받는 변화무쌍한 반사광이 다가오거나, 멀어지는
인물들 위로 그려놓은 명암의 유희, 그리고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찰나의 조화,
르누아르는 바로 여기에 사로잡혔다. -스테판 말라르메"
르누아르는 파리의 현대적인 풍경에서 어느 인상주의 화가보다도 더 큰 매력과
아름다움을 찾아냈다. 그는 사물을 두고 본질로 깊이 파고 들어가는 것보다, 그
외양을 탐구하면서 일반성을 추출했다. 또한 유쾌한 기분을 충족시키는 것이면
무엇이든 환영했고, 자신이 본 것에 대한 감각과 인상, 대상의 일반적인 측면을
장엄한 생명력으로 화폭에 담았다. 작품의 전경과 배경은 차양에 의해 부분적
으로 연관되어 있다. 차양의 줄무늬를 통해 나뭇잎의 색상과 사람들의 보다
따뜻한 색조가 결합되고 있으며, 차양의 물결 같은 모서리는 인물들에게 나타난
곡선들을 자유롭게 반향하고 있다. 발코니의 원근법은 눈을 오른편 위로 끌고
가면서, 멀리 트인 풍경을 대립적으로 끌어오고 있다. 그림의 모든 것들은 아무리
작거나 우연한 것일지라도 세밀함과 풍부함으로 처리되어 있다.

센 강의 사토섬에 정박한 레스토랑 푸르네즈선의 테라스에서 점심 후의 느긋한
분위기를 묘사한 그림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바르비에르 백작의 초대
를 받아 자리를 같이 한 인상파 화가, 여배우 등 모두 르누아르의 친구들이다.
여름이 가까운 날, 밝은 태양이 센 강변에 빛나고, 휴일이 되면 사람들은 서로
어울려 뱃놀이를 한다. 그리고 점심 때가 되면 강변의 음식점에 모여 담소하면서
식사를 하는, 그런 광경을 큰 구도로 삼아 묘사한 작품으로 그의 <물랭 드 라
갈레트>와 함께 이 시대를 대표하는 대작이다. 여기에서는 태양이 직사하는 그
눈부신 빛을 연상하게 하는 것처럼 어디까지나 밝은 빛의 반사를 사람들의 얼굴
이나 옷에 비추어, 빛이 선명하고 경쾌하기 그지없다. 사람들의 집단은 각기
별개의 모습을 하고 극히 교묘하게 어우러져 있다.
앞쪽의 꽃모자를 쓰고 검은 얼룩고양이와 놀고 있는 여인과 그 언저리의 묘사는
극히 정묘하며, 적색, 황색, 녹색의 원색이 좋은 조화를 이루고 있다.

부채를 든 소녀(일본풍 파리 여인), 1881

인상파 화가들 가운데 르누아르는 같은 세대 화가들을 휩쓸었던 일본풍의 영향을
가장 적게 받은 화가였다. 그러나 그 마저도 자신의 젊은 모델(여배우 잔 사마리
로 추정)의 손에 값싼 일본 부채를 들려 줌으로써 이 작품을 그리던 당시의 유행
에 굴복했다. 예쁜 소녀를 전경(前景)으로 놓고 상반신을 그린 이 작품은 뭔가
골똘하게 생각에 잠기고 있는 듯한 귀여운 얼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유화의 윗부분은 화려한 꽃들로 가득하여 눈부시다. 르누아르는 소녀와 꽃
이라는 두 가지 주제를 하나로 구도(構圖)하고 있다. 소녀나 꽃이 지니는 속성
(屬性), 즉 아름답고 밝은 면을 강조하고 있는데, 그 나름의 화사한 색감을 십분
강조할 수 있는 좋은 화재(畵材)가 아닐 수 없다. 딴은 이 두 소재란 르누아르를
지탱해 주는 주요한 것인데, 후기에는 이 두 주제가 제각기 독립하여 르누아르
예술로서 성숙해 갔다. 소녀와 꽃을 잇는 곳에 그려진 부채는 구도상 중요한 구실
을 하고 있다. 소녀의 둥근 얼굴과 둥근 부채가 짝지어 좋은 조화를 이루고 있다.

On the Terrace, 1881

Les Parapluies(The Umbrellas), 1881-82 and 1885-86

우산과 가을 옷의 회색빛 도는 파랑색을 기본으로 전체 화면의 색채를 조화롭게
구성하고 있다. 화면 전체를 주도하는 어두운 색조는 비가 마침내 그친 데 대해
안도하는 젊은 여성들의 밝은 얼굴과 균형을 이룬다. 화가가 실제로 초점을
맞추고 있는 부분은 화면 오른쪽 하단에 있는 어린아이이며 이 부분이 화면을
경쾌하게 만들어준다.

Dance at Bougival, 1883

Dance in the Country, 1883

이 작품은 <도시에서의 춤>과 짝을 이루는 작품으로, <부지발(Bougival)의
무도회>(1883)란 작품과 함께 시골 무도회의 정경을 담은 것이다.
<도시에서의 춤>의 시점이 보다 거리를 두고 있다면, 이 작품은 보다 가까운
시점에서 시골 사람들이 누리는 건강하고 격식을 따지지 않는 즐거움을 묘사
하고 있다. 그림 속의 모델들의 신원에 대한 의견이 오랫동안 분분했었는데,
춤을 추고 있는 남자는 아마도 르누아르의 친구였던 폴이고 여자는 르누아르의
부인인 알린느일 것이라고 추측된다.

Dance in the City, 1883

<시골에서의 춤>과 짝을 이루고 있는 작품으로, <시골에서의 춤>에 비하여
인물을 다소 멀리 잡았다. <시골에서의 춤>이 식사가 끝난 뒤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흥겹게 춤을 추고 있다면, <도시에서의 춤>은 두 남녀 모두 턱시도와
드레스, 흰 장갑에 이르기까지, 격식을 갖춰 차려 입었다. 시골 사람들에 반하여
도시 생활의 다소 인공적인 측면, 격식과 체면을 갖춘 생활을 섬세하게 묘사
하였다. 이 작품은 기법상 1880년대 초반 르누아르의 발전상을 보여준다.
꼼꼼한 데생에 기초한 형태와 색채의 단순화가 예전의 작품들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르누아르는 이태리 여행 이후, 라파엘을 비롯하여 고전주의 거장들을
재발견하고 데생에 대하여 새로이 자각하였다고 술회한 바 있다.
선과 데생, 형태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1887년 작 <목욕하는 여인들>(필라델
피아 미술관 소장)에서 절정에 달한다.

By the Seashore, 1883

바닷가에서 등의자를 내놓고 앉아 있는 한 귀부인을 그린 작품이다.
이 등의자의 느낌과 배경인 바다가 별로 어울리지 않은 것 같고, 의자의 묘사도
매우 사실적이고 딱딱해 보인다. 이처럼 전경(前景)과 배경 사이에서 다소간의
괴리감(乖離感)을 안 느끼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 도리어 일종의 효과가 되어
이 부인을 고전적인 분위기에 감싸이게 하고도 있다. 이는 아마도 르누아르가
이탈리아 여행을 할 때 받았던 고전 회화의 영향 탓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는 고전 회화가 지니는 딱딱한 형식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되면서, 색종(色種)
의 단순화와 형체의 정착화에도 진일보하게 된다. 부인의 눈언저리와 머리 부분
의 필법에도 고전적인 필촉을 느낀다.

Young Girl with a Parasol(Aline Nunes), 1883

Beach Scene, Guernsey , 1883

Seated Bather, 1883-1884

잔잔하게 시냇물이 쫄쫄거리는 계곡에서 막 목욕을 끝내고 상쾌한 기분으로 바위
위에 앉아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나부 상이다. 매우 자연스러우면서도
약간 야생적인 주위 분위기가 젊고 아름다운 여인의 육체와는 좀 괴리감(乖離感)을
느끼게도 하며, 따라서 얼핏 어울리지 않는 듯이도 보이지만, 르노와르는 이 대조
(contrast)를 역(逆)으로 이용하여 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좀 거친 터치로 바위들을 그리고 있어, 어떻게 보면 심산 궁곡처럼 후진 곳에서
이 욕녀는 너무나도 아름답고 살결이 고운 육체를 드러내고 있어, 더욱 압도되는
듯한 황홀감을 갖게도 한다. 이와 같은 나부의 기법(技法)은 고전파의 영향을 받아
명쾌한 표현으로 옮아가는 시절에 익힌 것이다.

The Bathers, 1884-1887

풍만한 세 처녀가 방금 물에서 나와 다정스레 뭔가 밀어를 나누고 있는데, 우선
이 세 욕녀가 그림의 전경(前景)을 차지하면서 삼각형의 구도를 이루고 있다.
이는 전통적인 삼각형 도법(도법)을 지키기 위해 기묘한 자세를 각각 취하게 한
것 같다. 이 그림은 르누아르의 추이(推移) 시대를 대표하는 최대의 걸작으로서,
이 시대의 특색을 유감없이 나타내 주고 있다.

르누아르는 세세한 터치만으로 화면을 채우는 색채 분할을 부정하고 명확한
형태를 가진 무게를 화면에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884년에서 1887년에
걸쳐, 르누아르로서는 이상하게 긴 시간을 들여 그린 대작인 이 작품이 바로
그러한 시도였다. 보통 르누아르의 이 시기는 그 명확한 선묘 표현 때문에 '앵그르
양식의 시대'라고 불린다. 사실 이 작품에서 보이는 나부의 표현은 앵그르의
<오달리스크>나 <터키 목욕>을 연상 시킨다고 할 수 있다. 그녀들은 마치 가위
로 오려낸 듯한 윤곽선을 지니고 배후의 풍경과 명확하게 구별된다.
그 결과 분명히 나부의 육체는 명확한 형태를 얻게 되었지만 너무나 배경과 떨어져
있어서 르누아르 특유의 원만한 느낌을 주는 표정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지어낸 듯
한 차가움이 있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물론 르누아르 자신은 그 점을 깨닫고 있었
을 것이다. 그가 이 작품 하나를 위해 3년이나 세월을 보낸 것은 틀림없이 아무리
해도 거기에 만족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뒤 르누아르는 다시는 이런
딱딱한 선묘 표현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즉 앵그르 양식의 시대는 르누아르
의 회화 양식의 발전에서 하나의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인상파의
색채 분할과 결별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단계였다. 앵그르 양식으로 인상파에
작별을 고한 르누아르는 그 뒤 선묘에 의해서가 아니라 색채에 의해 대상에 살을
붙여 가는 특유의 양식을 획득한다. 그에 따라 인물은 '실제로 쓰다듬을 수 있는'
실질적인 존재감을 얻음과 동시에 같은 색채 표현에 의한 배경과도 하나로 융합
되어 조화로운 가락을 울리게 되었다. 1892년에 그려진 <피아노 앞의 소녀들>
은 그 최초의 성과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Vase of Chrysanthemums, 1885

Girl with a Hoop(Marie Goujon), 1885

Young Girl Reading, 1886

Girls Putting Flowers in their Hats, 1890

Jeunes filles au piano(Girls at the Piano), 1892

자매인 듯한 두 소녀가 피아노 앞에 사이 좋게 붙어 있다. 흰 드레스를 입고 파란
허리띠를 매고 금발머리에 같은 파란색 리본을 맨 동생인 듯한 소녀는 의자에 앉아
한 손으로 악보대 위의 악보를 잡고 다른 한 손을 건반에 놓고 열심히 연습하고
있다. 목둘레에 흰 레이스 장식이 있는 붉은 옷을 입은 언니인 듯한 소녀는 그 옆
에 서서 한쪽 팔꿈치를 피아노에 걸치고 또 한 손으로는 동생이 앉은 의자의 등받이
를 잡은 채 동생의 연습하는 모양을 다정하게 지켜보고 있다. 그 언니의 느긋한
태도와, 입술을 반쯤 벌리고 진지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연습하는 동생의 표정이
보여주는 대조는 서로 다른 소리로 이루어지는 화음처럼 미묘하게 잘 어울리는
가락을 연주한다. 이러한 음악적인 효과는 이 화면 곳곳에서 발견된다. 피아노
받침대에 소용돌이 모양의 장식 무늬가 붙어 있다거나 악보대 옆 부분에 당초무늬
모양의 놋쇠 촛대가 달려 있는 것을 보면 이 피아노는 호사스럽다고는 할 수 없어
도 상당히 훌륭한 것으로, 소녀들의 옷차림과 더불어 부유한 중류 계급의 가정임을
짐작하게 한다. 피아노 위에 놓인 꽃병이나 초록색 커튼 뒤로 보이는 실내 가구 등
도 그 분위기에 잘 어울린다.

이 그림 앞에 섰을 때 우리는 곧 이 평화롭고 따뜻한 분위기 속으로 끌려 들어간다.
우리는 이 흐뭇한 정경을 멀리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가까운 거리에서 보고 있다. 귀를 기울이면 가만가만 두드리는 부드러운 피아노의
음색은 물론이고 소녀들의 고운 숨결까지 들려올 듯하다.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은
르누아르가 두 소녀라는 주요 모티프를 화면 가득 클로즈업해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르누아르의 작품이 우리에게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은 첫째, 이런한
클로즈업 구도가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인물을 등장시키는
군상 구도를 제외하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의 인물을 그릴 경우, 르누아르가 거의
언제나 모델의 모습을 상반신 또는 기껏해야 무릎 아래 정도에서 잘라 버리는 것
은 매우 암시적이다. 이러한 구도는 당연히 화가와 모델을 금방 손이 닿는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것으로 만든다. 일찍이 르누아르는 "내가 좋아하는 그림은 풍경이라면
그 속을 산책하고 싶어지는 그림, 나부라면 그 가슴과 허리를 쓰다듬고 싶어지는
그림이다."고 말했다고 하는데, 사실 그는 벨라스케스나 베르메르처럼 단지 대상을
바라보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그것은 그가 소년 시절에 도자기에 그림을
그려 넣는 직인이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도자기를 다루는 직인은
눈과 더불어 손의 감각이 예민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인상파 시대의 작품
을 제외하면 그가 그린 나부들은 언제나 도자기의 표면처럼 미묘한 광채를 지니고
있다. 이 작품에서도 소녀들의 드러난 팔뚝, 특히 비스듬한 언니의 두 손이나 피아
노를 치는 동생의 오른손 등, 빛의 반사를 받는 부분은 촉촉이 젖어 그윽하게 빛나
는 듯한 아름다움을 보인다. 르누아르는 소녀들의 이 팔을 그리면서 틀림없이
도자기 흙을 주무르는 장인과 같은 즐거움을 맛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따뜻하고 퐁요로운 인상은 무엇보다도 그 색체에서 온다.
여기에서는 화면 중앙에 앉아 있는 소녀의 옷과 그녀 앞에 놓인 악보의 깔끔한 흰색
을 빼면 거의 모든 부분이 녹색과 빨강과 노랑이라는 풍부하고 따뜻한 색조로
이루어져 있다. 두 소녀의 뒤쪽으로 우선 눈에 띄는 것은 반쯤 젖혀진 두터운
비로드 커튼인데, 이 커튼은 짙은 녹색을 기조로 하면서 빨강 및 노랑의 반사를
보인다. 그 커튼 뒤로 보이는 실내의 벽이나 가구는 빨강을 주조로 하며 이 빨강은
서 있는 언니의 옷으로 이어지고 또한 동생이 앉아 있는 의자의 쿠션이나 오른쪽
아래 구석의 악보가 놓인 가구에까지 이어진다. 갈색으로 그려진 피아노도 불그스
름한 기미가 있는 따뜻한 색채로 그려졌고, 또 마지막으로 그 피아노 위의 빨간 꽃
이 녹색 커튼을 배경으로 하여 강한 악센트를 더한다. 말할것도 없이 빨강과 녹색
은 보색 관계에 있어서 서로 가장 잘 어울리는 색이며, 화면 전체가 이 두 색을 기조
로 하고 있는 것은 이 장면의 따뜻하고 싱싱한 분위기를 반영한다고 하겠다.
게다가 화려한 금관 악기와 같은 노랑 색의 울림이 더해지고 곳곳에 맑은 파랑의
장식음이 연주되어 전체적으로 풍부한 색채의 하모니를 퍼뜨리고 있다.
더구나 조금씩이지만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파랑이, 예컨대 노란색 꽃무늬가
있는 꽃병의 파란 바탕이라든가 동생의 금발머리를 묶은 파란 리본이라든가 금색
으로 칠해진 의자 등받이와 파란 벨트라는 식으로 언제나 노랑 색과 짝을 이루어
등장하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파랑과 노랑의 산뜻한 조화가 화면을 다잡아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회화 표현 면에서 <피아노 앞의 소녀들>의 풍요하고 다채로운 세계를
가져온 것은 르누아르가 빨강을 주조로 하는 특유의 빛나는 양식을 확립한 1880년
대 후반이다. 1880년대 후반에 시작된 그의 풍요한 양식은 이 인상파 운동에 대한
참여와 탈퇴를 통해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인상주의의 체험은 르누아르에게 큰
의미를 지닌다. <피아노 앞의 소녀들>에서 보이듯 보색 효과를 이용한다거나 형태
의 윤곽선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터치를 구사하는 것은 인상파 시대에 체득
되었다. 그러나 1870년대의 대표적인 <물랭 드 라 갈레트>나 <그네>에서 볼 수
있듯이, 밝은 태양이 비치는 야외 풍경이라는 인상파 특유의 주제를 다룰 때에도
르누아르는 한결같이 거기에 인물을 배치하기를 좋아했다. 물론 인상파 시대에는
모네나 시슬리처럼 인물이 전혀 없는 풍경화도 그렸지만, 고운 피부 밑에 따뜻한
생명의 흐름이 고동치는 여성미를 각별히 사랑했던 르누아르는 나중에 스스로도
고백했듯이 본질적으로 인물화가였다. 그리고 그 점이 그가 언젠가는 인상주의와
결별해야 했던 근본적인 이유였고, 그의 본질과 인상주의 기법 사이의 모순이었다.
인상주의의 색채 분할은 모든 것을 빛의 반짝임을 환워하므로써 그리는 대상의
실질적인 무게와 형태를 희생시켜 버린다. 거기에서는 인물도 하늘의 구름이나
들판의 햇빛처럼 빛의 아지랑이에 싸여 고유의 존재를 잃어버린다.
모네의 <양산을 쓴 여자>는, 말하자면 인상파 기법에 의한 인물 표현의 최대한의
한계였다. 색채 분할을 더욱 밀고 나아가면 모네의 인물은 빛의 물결에 빠져
녹아 버릴 것이다. 사실 <양산을 쓴 여자> 이후로 모네는 거의 인물을 그리지
않게 되었다. 르누아르도 만약 모네와 같은 길을 택했다면 '막다른 골목'에 부딪
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1870년대 후반 르누아르의 작품에는 그러한 방향을
암시하는 작품이 몇 점이나 있다. 그러나 르누아르는 결국 그 길을 택할 수 없었
다. 모네가 시각의 영광에 모든 것을 걸었던 데 대해 르누아르는 줄곧 '실제로 손
으로 쓰다듬을 수 있을 것 같은' 육체 표현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Yvonne & Christine Lerolle Playing the Piano, 1897

A Seating Bather, 1903-1906

르누아르의 나부상은 후기에 접어들수록 그 육체의 질감 표현에 있어 풍만함을 보여
준다. 이 원숙한 욕녀상을 르누아르 예술의 진수(眞髓)를 보여 주고 있다.
젊고 건강해 보이는 나부의 자연스러운 포즈가 화면 가득히 클로즈업되어 빨강, 노랑,
녹색 등의 생생하고 순박한 색감을 미묘하게 살리고 있다.
부드러운 필촉이 신선한 색조로 다스려져서, 보드랍고 탄력 있는 여체를 회화적으로
완성시켜, 순수한 감각의 희열을 맛보게 한다. 대비(對比)되는 빛깔의 효과에 의해서
육체의 그 어떤 부분도 싱싱하고 발랄하고 탐스러운 풍윤한 감촉을 지니게 하고
있는데, 그런데도 결코 저속한 관능 같은 것을 느끼게 하지 않는, 프랑스적인 감각성
의 극치를 보여 주고 있다.

Tilla Durieux, 1914

Bathers(Les baigneuses), 1918

The Great Bathers(The Nymphs), 19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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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37 신인상주의:쇠라, 시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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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신인상주의(Neo Impressionnism: 新印象主義)


인상주의를 과학적 방법으로 추진하고자 운동이다.
G.
쇠라가 P.시냐크의 도움을 받아 창시하였으며, 쇠라가 죽은 뒤에는
시냐크가 대변자가 되었다. 빛의 분석은 인상주의의 수법을 계승하면서도
인상파의 본능적 ·직감적인 제작 태도가 빛에만 지나치게 얽매인 나머지
형태를 확산 시킨다는 점에 불만을 느끼고, 여기에 엄밀한 이론과 과학성을
부여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색채를 원색으로 환원하여 무수한 점으로
화면을 구성함으로써 통일성을 유지하였다. , 그림물감을 팔레트나 캔버스
위에서 혼합하지 않고 망막(網膜) 위의 시각혼합으로 필요한 색채를 얻는
방법이다. 예를 들면, 청색과 황색의 작은 점들을 수없이 배열해 나가면
(
점묘법) 시각적으로는 녹색으로 보이는 따위이다. 또한 형태나 구도에서 '황금
분할(黃金分割)'(분할묘사법) 등을 자주 사용함으로써 고전적인 회화에서처럼
안정성을 찾으려 하였다.

이와 같은 특징을 대표할 만한 작품이 쇠라의 《그랑드 자트섬의 일요일
오후》(1886) 시냐크의 《펠릭스페네옹의 초상》(90)이다.
신인상주의는 뤼스, H.크로스, D.피에, C.앙그랑, 리셀베르크 등의 동조자를
얻는 한편, 고흐, 고갱, 피사로 등에게도 한때 영향을 주었다.
또한 조형이론의 존중과 거기에서 찾아볼 있는 지성주의 구도나 형태의
기하학성 여러 특색은 20세기의 큐비즘과 오르피즘, 추상회화 등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회화운동의 이론을 체계화한 시냐크의 저서
《들라크루아에서 신인상주의 까지》(1899) 있다.

쇠라 (Georges Seurat:1859~1891)


신인상주의 미술을 대표하는 프랑스의 화가이다. 파리 출생이며, 1878
파리의 관립미술학교에 입학하여 앵그르의 제자 H.레만의 지도를 받다가
다음해 지원병으로 입대하여 브레스트의 해안에서 병역을 마쳤다.
파리로 돌아와서는 고전 작품을 연구하고 소묘에 힘을 쏟는 한편, 셔브뢸
헬름홀츠 등의 색채학과 광학이론을 연구하여, 1881년경 들라크루아의 작품의
색채대비와 보색관계를 해명한 글을 발표하여 세인의 관심을 모았다.
이러한 이론을 창작에 적용하여 점묘(點描)화법에 의한 최초의 대작
《아니에르에서의 물놀이 Une Baignade, Asnires(18831884) 완성
하였는데, 작품은 1884 살롱에 출품하여 낙선하였으나 앙데팡당전()
출품하여 반향을 일으켰다. 일을 인연으로 평생 화우(畵友) P.시냐크와
사귀게 되었다. 1885 《그랑드 자트섬의 일요일 오후》를 제작하여 다음
해에 열린 인상파 최후의 전람회에 발표하였다. 이것은 전작(前作) 수법을
한층 발전시켜 순수색의 분할과 그것의 색채대비에 의하여 신인상주의의
확립을 보여준 작품이었다.
밖에 《포즈를 취한 여인들 Les Poseuses(1888) 《기묘한 Le
Chahut
(18891890) 《화장하는 여인》(1890) 등의 작품이 있다.
모두 인상파의 색채원리를 과학적으로 체계화하고 인상파가 무시한 화면의
조형질서를 다시 구축한 점에서 매우 의의가 있으며, P.세잔과 더불어 20세기
회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전염성 후두염으로 32세의 젊은 나이에 파리에서
요절하였다.

인상주의적인 요소를 강하게 지니면서도 쇠라는 방법적인 면에서 동료 화가들과
다른 면을 추구했다. 쇠라는 신인상파 화가로 그의 눈에 들어오는 풍경의 순간을
화폭에 고정시키고자 했다. 선과 선색과 색의 조화를 누구보다도 많이 연구했던
화가다. 쇠라는 색채를 분할하여 작은 색점으로 그림을 만드는 새로운 화법을
창조해 냈다. 인상파 화가들이 빛을 표현해 내기 위해 즉흥적이고 직관에 의한
표현에 주력했다면, 쇠라는 이를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해석하는 점묘법을 이용
했다. 물론 쇠라에게서 빛의 화려함을 표현하는 인상주의의 기본 경향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쇠라를 인정한 화가들은 그의 뒤를 추종하게 되었고
이후 많은 점묘화가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푸른 옷의 농촌 아이,1882*

32살의 짧은 생애를 살다간 쇠라는 신인상주의의 선구자이며, 인상주의를
다시 프랑스의 뿌리 깊은 고전주의로 회귀시킨 화가이기도 하다.
1882
년작 <푸른 옷의 꼬마 농부> 초기의 풍경화에서 걸작 <서커스>
이르는 쇠라의 조형적 실험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데생은 이미 과감하게 생략되어서 소년의 얼굴 모습은 알아볼 없다.
소년의 푸른 옷과 녹색 배경에는 굵은 터치가 가해졌다. 아직 작은 점은
아니지만, 동일 계열의 덩어리들이 형태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회화
기법은 1884 <아니에르 강변의 미역 감는 사람들>에서 시작되는 본격적인
점묘법(Pointillism) 예견하는 것이다. 초기 작품에서 이렇게 투박하게
시작된 점들은 <서커스> 이르면 작은 색점으로 캔버스 표면에 흩어지게
된다.

*Bathing at Asniers,1884*

세잔느가 인상파 화가들의 수법과 질서에 대한 욕구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를 모색했던 반면, 쇠라는 인상주의 회화의 수법을 기반으로 해서 색채가
시각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과학 이론을 연구하며순수한 색채를 규칙적인 작은
점들로 찍으면서 작품을 모자이크처럼 구축해 왔다. 쇠라는 세잔느가 시도했던
것보다 더욱 형태를 단순화 시켜 수직과 수평을 강조했으며, 이러한 그의 화법은
자연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에서 점차 벗어나 흥미롭고 풍부한 구성을 화폭에
담아 내게 된다. 작품은 1884 살롱에 출품했으나 낙선하고 후에 '앙데
팡당' 전시회에 출품한 최초의 대작이며, 작품 전반에 걸쳐 여름날의 열기에
취해서 몽롱해진 느낌을 전해준다. 쇠라는 그림을 구상하면서 현장에 직접
나가서 예비 스케치를 했다. 그리고 과학적인 이론에 근거해 안정감 있는
구도를 창조했다. 많은 인물들이 놀고있는 화면이 주는 인상은 매우 질서
정연하다. 점묘법을 통해 빛나는 같은 밝은 교외의 풍경을 쇠라는
고요하게 붙잡아 놓고 있다.

*Sunday Afternoon on the Island of La Grande Jatte,1886*

쇠라는 미학에 관심을 가졌던 수학자 샤를 앙리의 영향을 받아 , 기하학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앙리는 음악에 관철되는 성격을 색과 선에 접목시켜 동일한
법칙을 규정하려고 시도했다. 쇠라의 주제는 인상주의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도시 생활을 즐겨 다뤘지만, 한편으로 상징주의자들이 애호하던 신비감과
분위기를 안에 부여했다. <아스니에르 강에서의 해수욕>으로 당시 젊은
화가들에게 중심적 인물로 부상한 쇠라는 바로 번째 대작인 작품에
착수했다. 모티브는 전작과 마찬가지로 밝은 야외에서의 인물들의 모습이지만
등장 인물의 수가 많아지고 땅의 부분에서는 빛이 닿는 부분과 그늘진 부분의
대비로 구도를 한층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작품이 제작될 동안 쇠라는
매일같이 아침부터 그랑자트 섬에 나가 여러 포즈를 현장에서 스케치하고
오후에는 모습들을 새롭게 조형적으로 만들어 화면에 배치하곤 했다.
쇠라는 1884 5월부터 작업에 착수해서 1985 3월까지 대강의 윤곽을
잡은 , 1985 10월에 다시 작업에 들어가 1986 5월에 이르러서야
작품을 완성하게 된다. 순색의 작은 반점의 병치로 더욱 완벽한 분할 묘법을
보여주는 작품은 정감적인 인상파를 극복하고, 고유의 과학적 인상파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의미에서 1886 8 인상파전에 반항을
일으켰다. 작품은 도시 사람들이 한가로운 일요일 오후를 강변의 공원에서
보내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인물의 수가 많아 매우 복잡하게 보이지만
정면, 측면, 뒷모습까지 다양하게 표현돼 있는 인물들은 마치 고대 이집트 벽화
처럼 엄숙하고 조용하며 운동감 없이 멈춰 있다. 바닥에 늘어져 있는 그림자도
자연의 빛으로 생겼다기보다 인공적으로 그렸다는 느낌을 주는데, 그림 안의
모든 수평, 수직선들은 수학 공식처럼 정확하고 이상적인 구도를 만들기 위한
것이다.

*Les Poseuses,1886-88*

*The Siene at La Grande Jatte,1888*

강변이나, 해안의 풍경을 즐겨 다루는 것은 인상파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쇠라의 작품 가운데서도 강변과 해안 풍경이 적지 않다.
<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에서 보는 시각에서 쪽으로 더욱 나간
장면이고, 화면의 중심은 강에 있는 돛배와 카누에 있다.
원경의 해안의 수평선과 근경의 둑이 보여 주는 사선은 쇠라의 풍경화에서는
자주 나타나는 구도인데, 수평과 수직, 그리고 사선을 통한 긴밀한 화면의
밀도를 엿볼 있다. 점묘는 더욱 세분화되어 마치 상감(象嵌) 하듯 색채를
조탁(彫琢) 넣었다. 화창한 봄날의 신록과 빛나는 , 그리고 돛의
조화는 풍부한 계절감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Port en Bessin, Sunday,1888*

쇠라의 다른 풍경들에 비해 포르 베셍의 일련의 해안 풍경은 복잡하고
그만큼 구성적 풍부함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눈에 뜨인다.
선창의 건물과 방파제 그리고 마스트가 만드는 직선의 구성에 의해 화면은
극도의 짜임새를 기하고 있는데, 위쪽의 펄럭이는 깃발의 다양한 곡선이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물에 비친 난간 구조물들의 그림자는 오후 한때의
항구의 정적을 더욱 실감 시켜주며, 물빛과 푸른 하늘에 피어오르는 구름의
투명함이 청징(淸澄) 세계의 결정(結晶)같은 고요함을 시사한다.
수직과 수평의 단정한 조화와 세밀한 점묘가 더욱 완벽성을 지향하고 있다.

*La Parade,1888*

<그랑 자트 > 자연광선에 이어 여기서는 인공조명이 등장된다.
가스등과 아세틸렌등은 유랑곡예단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파라드(La parade) 손님을 끌기 위한 간단한 코메디를 말한다.
쇠라가 보여주는 엄격하고 질서정연한 구도에 의해서 완성되는 조형적
구성은 견고한 현대 회화의 미래를 예고한다.
작품은 아마도 인체주의까지 예고하는 유일한 19세기 회화일 것이다.

*The Eiffel Tower,1889*

에펠탑은 1889 파리 만국 박람회 세워졌는데, 작품은 바로
해에 제작되었다. 그러니까 에펠탑을 소재로 작품들 중에서는 가장
일찍 그려진 작품이라고 있을 같다.
에펠탑은 건립 직전부터 세워지고 뒤로 굉장한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쇠라는 에펠탑으로 상징되는 근대 문명의 개화에 찬성하고 있으며
그것이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된 것이다. 에펠탑이 지니고 있는 구조적인
특성으로서의 수직과 수평, 그리고 사선은 쇠라의 풍경화에서 찾을 있는
기본적인 것이기도 한데, 쇠라의 구성적 특성을 떠올려 에펠탑의
작품화는 극히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것이라 생각된다.

*Young Woman Powdering Herself,1888-90*

쇠라의 애인 마드레느 노브로크를 그린 작품인데, 후기의 양식성이 농후하게
나타나 있다. 인물의 객관적인 묘사와 인물과 배경 전체를 에워싸는 분위기에
깃들어 있는 문양적(紋樣的) 패턴이 기묘하게 어우러져 일종의 음악적인 톤을
형성해 주고 있다. 점은 <샤이 >이나, <서커스>에서도 발견되는
공통성이다. 여인의 모습과 화장대의 모양, 그리고 배경의 곡선적 패턴이
상승하는 무드를 타고 있는데, 쇠라는 상승적 무드를 즐거움으로 대치
시키고 있다. 즐거움은 다른 실내 작품에서와 같이 유머를 곁들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화면 왼쪽 위에 그려진 꽃이 있는 곳에는 원래 쇠라 자신의
얼굴이 그려졌다가 지워 버렸다.

*Le Chahut(샤위 ),1889-90*

'샤위춤'이란 파리의 명물로 널리 보급된 '프렌치 캉캉춤' 말한다.
쇠라는 1888 이후 서어커스라든가, 호객하는 악사들이라는 일종의
도회지적인 주제로 일관했으며, 인공 광선의 조명에 비쳐진 흥행장의 군상을
모티프로 다루었다. 쇠라의 점묘가 장식적인 경향이 강해짐에 따라 작품에는
윤곽의 선이 살아나게 되었다. 곡선으로 이루어진 화면의 패턴은 미끄러지듯
리드미컬한 구도를 이루며 움직이는 인물들의 이미지를 정적으로 표현한 것은
쇠라 회화의 대표적인 특징이다.
밤의 유흥가를 모티브로 <파라드>와는 매우 다른 표현을 보여 주고 있다.
가로, 세로의 직선의 분할에 의한 화면 구성과 거기서 일어나는 정적인
무거움과는 대조적으로, 여기서는 곡선을 주로 채용한 화면의 패턴이 매우
리드미컬한 구도를 이루고 있다.
인물들의 표정과 그림 전체의 디자인에 깔려 있는 유머는 확실히 쇠라의 새로운
특징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런 특징은 아마도 당대의 종합주의, 아르누보 등이
추구한 종합성과 평면성, 그리고 양식화의 일반적 경향의, 극히 자연스런 반영이
아닌가 싶다. 환락가의 장면은 특히 세기 말의 중요한 소재이기도 하였는데
쇠라 역시 그런 시대적인 분위기에 어느 정도 공감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The Circus,1890-91*

쇠라의 마지막 작품이자 대표작이기도 하다. <샤위 >에서 보여준 바와
같이 직선적인 요소는 많이 후퇴하고 대신 원과 나선과 타원 곡선적인
요소가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다. 동시에 전보다 윤곽선도 뚜렷해진 것이
특색이다. 쇠라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서커스 메드라노에 열심히
다녔는데, 지금까지의 정지된 이미지와는 상반된 동적인 것에 대한 동경을
엿볼 있다. 그것은 수평과 수직 그리고 사선에 의한 밸런스를 유지한
균형감각을 추구했던 지금까지의 의도를 곡선적인 것으로 전환시키려는
의욕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시도는 그의 죽음으로 인해 중단되어
버렸다. 앙데팡당전( 작품이 출품된) 끝나기도 전에 그는 죽었다.

시냐크(Paul Signac: 1863~1935)


J.P.
기요맹의 제자이며 파리 출생. C.모네의 작품을 보고 감동하여 화가가
뜻을 세워 1883 20 아카데미 리브르 드방에 들어가 인상파의
화풍을 익혔다. 1884 1 앙데팡당전에 처음 출품하고 그때 출품된
G.
쇠라의 작품에 공감하여 그와 친교를 맺고부터는 색채의 동시대비의 이론과
기법을 연구하여 성과를 1886년의 인상파 최후의 전람회에 쇠라와 함께
발표함으로써, 신인상주의의 기치를 선명하였다. 그의 작풍은 과학적 점묘주의
에서 나중에는 쇠라의 점묘보다 점을 이용한 모자이크풍의 묘사법으로 변화
했는데, 풍경화가로서 각국의 바다 풍경, 특히 프랑스 각지 해항(海港) 풍경
그림에 특색 있는 작품이 많다.

앙데팡당전의 창설자의 사람이며, 1908년부터 종신토록 앙데팡당전의
회장을 지내면서 청년 화가들을 격려하였고, 신인상주의의 바이블이라고
일컬어지는 《들라크루아로부터 신인상주의까지 De Delacroix au
Neo-impressionnisme
(1899) 등의 저서를 남기는 생애를
신인상파 지도자로서 정열적으로 활약하였다.
주요작품에 《마르세유항의 풍경》(1905) 등이 있다.

*The Dining Room,1887*

점묘 기법을 이용한 작품으로 빛에 의한 뚜렷한 대비가 인물들에게서
나타난다. 저녁 식사후의 모습의 차분한 분위기다.

*Portrait of M.Felix Feneon in 1890,1890*

*Women at the Well,1892*

신인상주의 그룹의 이론가이기도 했던 시냑은 1899 『라 브루 블랑쉬』
지에 발표된 "으젠느 들라크루아에서부터 신인상주의에 이르기까지" 라는
탁월한 연구를 통해, 동시적인 콘트라스트(대비) 법칙을 기반으로 터치의
체계적인 분할이 나타나는 분할 묘법을 분석하고 있다. 조르주 쇠라가
신인상주의의 창시자라면, 시냑은 쇠라의 절친한 친구이자 지지자로서
신인상주의를 주도해 갔다. 1893 9 앙데팡당 전시회에 <우물가의
프로방스 여인들, 희미한 속의 게시판을 위한 무대 장치>라는 제목으로
출품됐던 작품은, 시냑의 분할 묘법 이론을 가장 표현한 작품 하나
이다. 그림에서 각각의 점은 과학적 이론에 따라 칠해졌고, 차분한 색조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그림은 오늘날도 날카로운 매력과 과격주의로 인해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키고 있으나, 당시에는 비평가들과 "시스템"이라는
생각을 비웃은 고갱에 의해서도 이해되지 못했다. 시냐크는 좀더 자유로운
스타일로 그들을 반박했으며, 후에 마티스와 같은 야수파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소나무,1892~93*

소나무 그루가 있는 평화로운 풍경을 대담한 붓의 터치로
표현하였다. 소나무와 뒤쪽의 산으로 원근감이 드러난 작품이다.

*Red Buoy,1895*

바다와 항해를 좋아했던 시냐크는 1892년에 정착한 트로페즈의
알려지지 않은 작은 항구에 매료되었다. 항구 주변의 높은 집들과 다채로운
색의 작은 범선들은 시냑의 작품에 지속적인 영감을 주는 원천이 되었다.
1895
년에 그려진 작품은 분할 묘법을 이용하면서도 신인상주의의
강제적인 이론들과는 거리를 두며 새로운 스타일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작품에서 시냐크는 작은 점을 이용한 터치를 포기하고 방형의 모자이크
같은 터치를 확대시켜자발성과 표현성을 강조하며 색채의 조화를 추구하고
있다. 흰색에 의해서 한층 돋보이는 푸른색과 오렌지색의 보색 대비를 통해
터치의 다양성을 취하고, 동시에 속의 붉은 부표를 드러내고 있다.
항구의 모습은 자잘한 붓터치와 강렬한 색채로 생동감을 느끼게 하고 있다.
당시 『르뷔 블랑쉬』의 편집장이었던 나타송은 작품을 두고 "시냑은 빛나고
떨리는 채색법에 도달했고, 화면을 가득 채우는 구성은 놀랄 만큼 능숙하고
침착하며, 경탄을 자아내게 한다" 찬사를 보냈다.

*항구,1899*

*The Papal Palace, Avignon,1900*

*마르세이유항의 입구*

*석양의 조각배*

*로셀 항구, 1921*

시냐크는 1884 앙데팡당전의 창립 멤버로서 참가한 이래, 1886
쇠라, 카미유 피사로 뤼시앙 피사로와 함께 신인상주의의 탄생을 알리는
마지막 인상주의자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한다.
점의 초상화를 제외하고는 시냐크는 거의 전적으로 풍경화에만 전념했는데
풍경화에 그는 쇠라의 분할 묘법을 적용시키고 있다.
시냐크는 이를 거의 모자이크의 요소를 연상케 하는 커다란 터치로 확대시키고
있다. 또한 그는 『으젠느 들라크루아에서 신인상주의까지』라는 이론서를
펴내 쇠라 미학의 후계자로 공인되었다. 하지만 실제 작품에서는 쇠라의
냉철하고 이지적인 구성보다 자유로운 구성과 따뜻한 색채를 썼다.
쇠라의 바다 풍경이 인적 없는 엄숙한 새벽의 상쾌함을 표출해 냈다면, 시냐크의
그림은 직접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 경우에도 보다 세속적인 활기를 느끼게 한다.
시냐크의 작품에는 바다나 항구가 자주 등장한다. 그는 화가인 동시에 뛰어난
뱃사람이기도 해서 배를 타고 많은 신선한 스케치를 얻었고 겨울철에는 그렇게
해서 얻은 스케치와 함께 아틀리에에서 대작 구상에 몰두했다.
그의 말년의 걸작 하나인 < 로셀 항구> 초기 분할 묘법과는 달리 훨씬
격정적이며 드라마틱하다. 장식적인 아라베스크와 형태의 단순함을 지향하는
취향은 여전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초기의 그림들과는 많이 다르게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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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34 인상주의: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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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가(Edgar Degas: 1834~1917) ★

Self-Portrait, approx. 1863

19세기의 전형적인 초상화 양식에는 몸체와 두부(頭部)를 비스듬히 돌려 정면을
향하는 다소곳한 모습들이 자주 보이며, 드가 자신의 모습을 그린 이 초상화 역시
전통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다. 20세 무렵에 그린 19세기 서구의 전형적인 옷차림
새로 책상 위에 한 쪽 팔을 얹은 채 다른 한 손에는 밑그림 제작용 석묵(흑연)을
가볍게 쥔 모습이다. 이 작품을 제작하던 무렵 약관의 그는 이탈리아를 여행하고
르네상스 회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이미 고전주의 작가들의
작품에 심취하여 그들의 작품을 차례로 모사한 바 있는 까닭에서인지 그리스-로마
의 양식을 답습함으로써 극히 정적이며 차가운 느낌을 주는 고전주의 회화의 경향
이 이 작품에서 뚜렷이 엿보인다.

에드가 드가(Edgar Degas:1834~1917)는 프랑스 파리, 부유한
은행가 집안의 장남으로 처음에는 가업을 계승하기 위하여 법률을 배웠으나,
화가를 지망하여 1855년 미술학교에 들어갔다. 앵그르의 제자로서 1856년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르네상스 작품에 심취하였다. 이 무렵부터 거의 10년간
은 화가로서의 본격적인 수업기로 오로지 고전 연구에 힘을 기울였다.
1865년 살롱에 《오를레앙시(市)의 불행》을 출품하였다. 그 후 자연주의 문학
이나 E.마네의 작품에 이끌려, 근대생활을 대상으로 하는 작품을 제작했는데,
1874년부터 1886년까지 인상파전에 7회나 출품·협력하였으나 그 후로는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드가는 풍경화에는 거의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사진이나 우아한 일본 판화 등
당시 파리에서 막 인기를 얻기 시작한 새로운 표현 방식에 흥미를 느꼈다.
그는 파리의 근대적인 생활에서 주제를 찾게 되자 더욱 재능을 발휘하여 정확한
소묘 능력 위에 신선하고 화려한 색채감이 넘치는 근대적 감각을 표현하였다.
인물 동작을 잡아 순간적인 포즈를 교묘하게 묘사하여 새로운 각도에서 부분적
으로 부각시키는 수법을 강조해왔다. 경마나 무희, 욕탕에 들어가거나 나오려는
여성의 한 순간의 동작을 즐겨 그렸다. 이러한 그의 눈과 기량은 파스텔이나
판화에도 많은 수작을 남겼을 뿐 아니라, 만년에 시력이 극도로 떨어진 뒤에
손댄 조각에까지 더없는 걸작을 만들어냈다. 선천적으로 자의식(自意識)이 강한
성격 때문에 독신으로 보냈고, 그의 인간 혐오증은 늙어갈수록 더하여 고독한
가운데 파리에서 생애를 마쳤다.

Portrait of Hilaire de Gas, Grandfather of the Artist, 1857

Portrait of Marguerite de Gas, the Artist's Sister, 1858-1860.

The Duke and Duchess Morbilli, approx. 1865

The Bellelli Family, 1859-60

르네상스 회화에 자극을 받은 드가는 자신의 이탈리아 친척들을 차분하면서도
품위 있게 묘사했다. 자연스러운 구성과 전통적인 기법이 결합된 이 작품은 지나
치게 엄격하지 않으면서도 진지해 보인다. 이 작품의 특징은 섬세한 묘사의 고전적
화풍을 따르고는 있지만, 이제까지의 전통적인 구도법에서 벗어난 특이한 점을
보인다. 화면의 오른편에 보이는 드가의 고모부인 벨렐리씨는 의자에 앉아 등을
돌린 뒷모습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리고 얼굴은 측면만을 보이며, 드가의
고모와 두 사촌 누이 동생들은 시선의 방향을 제각기 달리 하고 있다.
이것은 드가가 의도적으로 설정한 것으로서 당시의 보수적인 화풍으로서는 상상치
도 못할 파격적이며 대담한 구성을 보이는 것이다. 경직된 정면향의 자세보다는
이처럼 자연스러운 순간을 포착함은 현실의 실제감을 더욱 더 강조하며 생동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원래 드가의 회화적 특질은 강한 명암 대비, 활달한 윤곽
선묘, 특이한 시각에서 포착한 대담한 구도, 현실감 넘치는 소재의 선택 등인데,
이 작품에서 그는 의도적인 대담한 구성법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A Woman Seated beside a Vase of Flowers, 1865

탁자의 곁에 팔을 기대 앉은 여인과 꽃들은 구도상 서로 양분되어 대칭을 이루고
있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많은 꽃송이가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한데 비해,
여인의 모습은 화면의 한쪽에 치우쳐져 있다. 전통적인 관점에서 파악한다면
당연히 인물이 주제가 되고, 꽃은 부제가 될 터인데 드가는 이를 역이용하고
있다. 불균형의 면적비에 비해, 전혀 한쪽에 치우침이 없어 보이는 짜임새는 드가
만이 지닌 대담한 구도 설정의 재치일 것이다. 현란한 색채 및 갖가지 크기의 꽃
이 한데 어울림이 부분적으로는 산만해 보이지만, 그 산만함이 오히려 여인의
모습과 표정에 시선을 끌게 한다. 또한 인물의 뒷배경을 창문 밖 멀리의 풍경이
내다보이게 함으로써 가득한 화면의 공간감을 확대시켜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Racehorses in Front of the Grandstand, 1866-68

회화 뿐만 아니라 조각, 소묘 등에도 능했던 드가는 인상주의 그룹에 속하면서도
나름대로 자신만의 독특한 화법을 정립했던 화가였다. 인상주의가 빛과 색의
자유를 추구했다면, 드가는 공간 혹은 구도의 자유를 추구했다. <관람석 앞의
경주마>는 독특한 구도와 자연스러운 생동감으로 드가의 특징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훌륭한 작품이다. 비록 제작은 아틀리에에서 기억에 비추어 했지만, 작품
들을 보면 마치 옥외의 밝은 빛 아래서 직접 그린 듯한 실감을 준다. 그림은 경마
를 시작하기 전 기수들의 흥분된 서성거림을 정돈없이 화폭에 담고 있다.
상부는 하늘로 차 있으며, 중앙은 필드로 비어 있고, 관중은 왼편 한쪽에 쏠려
있으며, 그리고 정작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기수들은 양편 가장자리에 배치되어,
마치 그림의 주제가 필드를 가득 메운 그림자들인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경마의 주제는 1862년부터 드가의 작품 속에 등장한다. 그러나 1870년경에
이르러서야 드가는 이 주제를 본격적으로 되풀이하여 다루기 시작했다.

Portrait of a Young Woman, 1867

이 여인상은 드가가 그린 여인의 초상화중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이지적인 느낌마저 주는 이 여인의 인상은 자신 속에 깊이 빠져든 채 무엇인가에
골몰하고 있는 느낌을 주며, 용모에 흐르는 차분한 기품은 보는 이의 시선을
자극한다. 그러한 느낌의 요인은 어딘가를 향해 차분한 듯 하면서도 날카로움을
보이는 눈매, 오똑 솟은 콧날, 굳게 다문 입술, 모든 소리를 귀담아 듣고 있는 듯
곧게 세워진 귀, 학처럼 긴 몸 등 여인의 용모를 이루는 요소들이 짜임새 있게
조형화된데서 비롯한다고 볼 것이다. 그것들과 더불어 가다듬어 틀어 올린
단정한 머리의 차림새가 여인의 청순미를 일층 고조시키고 있다. 르누아르처럼
여인의 아름다움을 예찬한 적이 없는 드가는 유독 이 작품에서만은 여인의
아름다움을 서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Mlle Fiocre in the Ballet "The Source", 1867-68

Portrait of James Tissot, 1867-68

1860년대의 드가는 일본의 '우끼요에(浮世畵:풍속화 판화)'의 영향으로 그의
회화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지금까지 고전적인 좌우 균형을 이룬 안정감
있는 구도법에 익숙해 있던 드가는, 의도적으로 균형을 깨뜨린 것과 같은 불안정
한 느낌의 '우끼요에'의 구도에서 새로운 회화 표현의 세계를 발견한 것이다.
전통적인 화법에서의 시각 위치는 주로 관점자의 눈높이인데 반해, 드가가 이
작품에서 시도한 구도는 위에서 아래를 향해 내려다보는 구도이다. 이로 인해
원근감과 공간감이 확대되는 것이다. 이 작품의 윗부분 벽면에 가로로 걸린 것은
일본의 풍속화이며, 이러한 풍속화는 유럽의 많은 화가들이 이국 정서에 이끌려
자신들의 작품 속에 화제로서 끌어 올리곤 하였던 것이다. 드가도 예외 없이
그것을 이 작품 속에 그리고 있는 것이다.

The Rape, approx. 1868-69

The Orchestra of the Opera, approx. 1870

관현악단의 바순 연주자인 데지레 디오가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을 그린 초상화
이다. 드가는 오케스트라의 전형적인 배치를 전환하고 실재하는 음악가들과
누군지 분명치 않은 친구들이 등장하는 다인물 초상화로 재구성하면서 이 작품
에 절충주의적 요소를 가미했다. 표현과정에서 희극적인 형태의 악기들과 기묘
하게 뒤틀린 얼굴들, 악기의 현에 에워싸이고 인위적으로 잘려지기도 한 초상화
의 단편들을 특히 강조했다. 전통적인 화법으로는 중점이 되는 소재를 강조하기
위해 작위적으로 부수적인 요소를 끌어들인데 반해, 드가는 어떤 상황의 극적인
한 순간을 포착하여 이를 실감 있게 재현하고 있다. 드가의 그러한 면이 비로소
인상주의 회화와 동질성을 갖는다. 이 작품은 주악석의 악사들에 초점을 두어
한참 연주의 절정에 달한 악사들의 진지한 모습을 담고 있다. 구도는 예의
'우끼요에'의 영향 탓인지 전경은 의자의 등걸이 면과 칸막이 선을 대각시켜 중앙
부에 편중된 인물과 악기들의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춤추는 무희들을, 그 부분만
을 그린 까닭은 그곳이 극장의 내부라는 것을 암시하고자 함이며 또한 무희들에게
각광(脚光; foot-light)을 비춤은 환상적인 화려한 분위기를 조성키 위함이다.
이 작품의 내용적인 면에서 분석해 보면 사실처럼 보이지만, 실제의 있어서는
드가의 관찰과 상상이 융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Dance Class, approx. 1871

1871년 즈음부터 드가는 오페라 극장을 자주 찾아다니면서 무용연습에 열중
하고 있거나 휴식을 취하는, 또는 무대공연에 열중인 발레리나들의 다양한 포즈
를 그리기 시작한다. 이 작품은 발레리나들을 그린 그의 많은 그림들 중 거의
초창기에 해당되는 작품으로, 자칫 답답하고 한정된 공간으로 보여질 수 있는
무용 연습실에 변화와 깊이를 주기 위해 예전 화가들이 통속적으로 사용하던
커다란 전신거울과 열려진 문을 그려 넣었다. 또한 안정된 구도와 더불어 벽면과
바닥 색이 화면에 차분히 안착되어져, 지금 막 무용선생의 지도를 받으며 연습을
시작하려는 듯한 발레리나의 모습과 연습실의 전반을 이루는 엄숙하고 차분한
분위기를 이끌고 있다.

The Star, 1871-81, Pastel

The Dance Examination/Pastel

파스텔의 유연한 질감과 화려한 색채를 알맞게 표현한 이 작품은 인물의 특징,
파악의 방법이 자못 날카로움을 보인다. 예의 작품들과는 달리 화면을 가득 메운
무희들이 자신의 발 동작을 살펴보는 모습이거나, 긴 양말을 고쳐 신은 모습이며,
보호자인 듯한 여인이 이를 지켜보고 있는 장면이다. 드가는 이 작품에서 인체의
동세, 그리고 신체의 각 부분의 특징을 강조하여 날카로운 선묘를 구사하고 있다.
사각(斜角)을 이루는 지면의 불안정한 느낌을 보완키 위해 수직으로 곧 추선
인물을 두어 대각(對角)을 이루게 하며, 그 결과 V자 모양의 구도를 이룬다.
시험의 차례를 기다리며 준비 중인 무희들의 새하얀 의상은 유연한 여체의 탄력
을 뒷바침이나 하듯 유난히도 밝게 빛나 보인다.

Portrait in a New Orleans Cotton Office, 1873

Ecole de Danse, 1873

대개의 인상주의 화가들이 순간적으로 변화하는 색채에 관한 연구를 거듭함에
비해, 드가는 현실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인간 활동에 관심을 두었다.
이 작품에서도 드가는 특정한 부분에 관심을 두고 그를 강조함보다는 무희들이
무용연습에 열중하는 장면과 신발을 신거나 무용복을 입고 있는, 그리고 잠시
휴식을 취하는 등 극히 일상적인 한 단면을 취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드가는 그것을 화면 속에 작위적인 짜임새로 집약함보다는 그 일부분만을
표현함으로써 실제감을 더욱 돋우는 효과를 거둔다. 역광이 투사된 실내 연습장
에 발과 다리를 일직선이 되도록 곧추세워 준비 자세를 취한 무희를 필두로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무희, 계단을 내려오는 무희 등과 다른 동세의 무희들이 그려져
있어 넓은 공간, 그리고 분주한 연습장의 느낌을 잘 표현하고 있다.

La classe de Danse(The Dancing class), 1873-75

이 작품은 유명한 무용가이자 안무가인 쥘 페로가 지도하고 있는 무용수업 장면
을 그리고 있다. 20명이 넘는 인물이 넓은 연습실에 퍼져 있는 이 대작에서 그는
초기에 무용 장면을 그릴 때 즐겨 사용했던 구성에 변화를 주었다.
연습실이 북적거린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고 그는 리본을 다시 매거나 스트레칭
연습을 하거나 연습실 저쪽 끝에서 어머니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무희들과 페로
사이에 가로로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작은 개 한 마리가 물병에 비친 그림자를
놀라서 쳐다보고 있다. 엄격할 것 같은 선생님의 모습과 등을 긁고 있는 피곤에
지친 아이의 모습이 대조적이다.

The Rehearsal, 1873-78

Ballet Rehearsal on Stage, 1874

드가는 제 1회 인상파 전시회를 제외한 모든 전시회에 참여하였지만, 인상주의
작가들과 몇 가지 차이점을 갖는다. 광선에 대한 관심과 우연한 순간에 대한
공통된 관심을 제외하면, 드가는 인상주의보다는 사실주의에 더 가까운 화가였다.
인상파 화가들과 어울리면서 그가 가진 주제는 당시 사회의 여러 가지 모습에
대한 것이었고, 그런 점에서 마네의 뒤를 잇고 있으며, 이러한 경향은 다시
투루즈 로트렉에 의해 계승된다. 이 작품은 제 1회 인상주의전이 열린 해에
그려진 그림이다.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각과 화면의 중앙을 비워
두는 구도는 드가가 매료되었던 일본의 우키요에 목판화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전체적으로 인공 조명의 제한된 빛이 고동색의 색조를 배경으로 하는 인물들에게
비치고, 음영의 대비 속에 사소한 동작 하나하나가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단색톤의 그림에서 살아있는 느낌이 감도는 것은 이런 방법으로 묘사된 인물들의
독특한 움직임 때문이다. 사진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던 드가의 감각을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In a Cafe (The Absinthe Drinker), 1875-76

드가는 현실에서 보여지는 것을 조금도 그 자신의 미관 (美觀)에 따라 임의로 변형치
않고 실제의 그대로를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현실을 파악하는 그의 관조력이 냉철
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파리의 평범한 카페, 그 내부에 대리석 탁자가 놓이고 무표정
하고 초라해 보이는 여자와 다른 곳에 시선을 보내는 남자가 나란히 앉은 모습이다.
'우끼요에'의 영향이 짙은 이 작품은 제작된지 17년이나 지난 1893년에야 발표되었다.
인물의 뒤쪽에 보이는 거울과 탁자의 가장자리 선 등이 사선으로 기움에도 불구하고
인물이 차지하는 중감(重感)으로 알맞은 균형세를 이루고 있다. 압상트 술 잔을 앞에
놓고 앉은 여인은 창녀이고, 이 두 인물의 모델은 드가의 친구 데브탱과 당시 미모의
여배우인 엘렌 앙드레라고 전해진다.

The Star, 1876-77/Pastel

꿈의 날개를 펴 보이는 듯한 이 무희의 자태는 높은 시각에서 포착되고 있다.
커튼 뒤로 가리워진 남자와 무희들은 간략하게 생략된 묘사를 보이며, 주가 되는
무희 이외에는 자유 분방한 거치른 필치로 처리하고 있다. 배경의 오른쪽 저 멀리
산과 같이 펼쳐진 무대 장치는 전면의 공간감을 일층 확대시키며 무대 면과의
원근감을 강조해 주고 있다. 각광을 받고 있는 화려한 의상의 무희는 실제의
공연에 있어 주역인 듯하다. 이 작품에 관한 것으로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과
이 작품의 소장자였던 귀스타브 카이유 보트는 그가 임종하기 전 유언으로써
그의 소장 작품들을 나라에 기증키를 원하였지만, 그 당시의 보수적 성향 때문에
그것들의 대부분이 거절 당하였으나, 드가의 이 작품만은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Laundresses Carrying Linen in Town, 1876-78

1879년 제 4회 인상주의 전람회에 출품된 이 작품을 두고 어느 비평가는 '멀리서
보면 도미에의 것과 같아 보이지만 가까이 접근해서 보면 도미에보다 훨씬 우수
하다.'고 격찬했다고 한다. 극히 요약된 활달하며 간략한 선묘로써 인물을 묘사한
이외에는 장식적인 어떠한 요소조차도 포함되지 않은 드가의 작품 중 특색있는
작품이다. 두 세탁녀와 바닥면의 짙은 세피아 색을 주조로 한 색과 샛노란 벽면의
색채가 강렬한 명도 및 채도 대비를 이루고 있다. 그가 이렇듯이 대담한 공간을
구성함은 새삼스러울 것은 아니지만, 명도 높은 샛노란 색채로써 색의 대비를
이룸은 여태까지의 그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바닥과 벽면을 가르는
수평의 면과 두 인물의 높낮이도 수평의 높이를 보이지만, 무거운 듯 세탁물
바구니를 든 구부린 동세가 그러한 경직된 느낌을 완화시켜 준다.

The Rehearsal, 1877

At the Races, Amateur Jockeys, 1877-1880

시인이자 비평가였던 폴 발레리는 <드가, 춤, 데생>에서 드가가 머이브릿지
(Muybridge)의 연속 사진을 이용하여 말들의 동작을 탐구하였다고 회고한 바
있다. 당시 경마는 유럽의 중산층 사이에서 유행한 스포츠로 드가 또한 열렬한
경마팬이었다. 그 스스로 사진에 관심이 많았던 드가는 머이브릿지의 사진을
알고 있었음은 물론이고 말을 직접 관찰하기 위하여 경마장을 자주 찾았다.
그는 말의 골격과 근육에 대한 해부학적인 탐구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 결과 그가 그린 경주마들은 살아 움직이는 긴장감과 균형잡힌 우아한 자태가
절묘하게 조화되어 있다. 그는 말 자체뿐만 아니라 말을 조련하는 기수의 다양한
자세, 말과 하나 되어 움직이는 모습들까지 세밀하게 관찰하였다.
카메라로 한 순간 한 순간을 즉석에서 촬영한 듯, 화면 오른쪽에는 마차와 실크
햇을 쓴 신사가 캔버스 밖으로 잘려져 나갔다. 이러한 의도적인 구성은 경마장의
순간적인 인상을 전달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Singer with a Glove, 1878

1870년대 후반에 접어들어 드가는 카페를 자주 출입하는데, 그로부터 10년 후
에는 드가를 평소 존경하던 로트랙 역시 이 집의 단골이 되어 수많은 명작을
남기게 된다. 드가는 카페에서 노래를 열창하고 있는 여가수를 이 작품에서 표현
하고 있다. 드가의 여느 작품들과는 달리 이 작품은 가수 한 사람만을 아주
가까운 위치에서 본 것처럼 크게, 그리고 자세히 몸의 일부만을 그리고 있다.
예의 각광을 받고 열창을 하는 이 여가수는 오른 손에 검은 장갑을 끼고 있어
배경의 화려한 커튼과 극명한 명도 대비를 이룬다. 가수를 근접한 위치에서 올려
다보며 그린 이 작품과 같은 경우는 드가의 작품 중 그리 흔치 않다. 아무튼
고전주의의 영향을 받은 그가 전혀 상반된 동적이며, 현실감 넘치는 표현을
보이는 것은 아이러니한 현상이기만 하다.

Rehearsal on the Stage, 1878-79

드가의 발레에 대한 중요한 관심은 넓은 공간에서 약동하는 무희들의 군상(群像)
에 있었다. 즉 드가는 발레의 세계 그 자체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후일 차츰 무희들의 개별적인 모습 쪽에 관심을 돌리게 된다.
이 작품은 지금까지 연습실에서만 이루어지던 것에서 벗어나 실제의 무대에서
총연습에 임하는 광경을 그린 것이다. 드가는 이처럼 난무하는 무희들의 모습을
스냅사진처럼 생생하게 포착한 다음 그의 기억에 남은 인상을 아틀리에에서 제작
하곤 했다. 드가의 그 박진함은 그야말로 기억의 세계를 통해 어느 정도 초현실적
인 세계로 치닫고 있음이 분명해지는 것이다. 중심의 무희는 발끝을 모아 제자리
에 잘게 움직이는 모습을 하고 있으며, 이 작품은 처음 펜으로 그렸던 것 위에
유화구로써 채색한 것이어서 펜의 흔적이 뚜렷이 드러나 보인다.

Edmond Duranty, 1879

드가가 그린 대개의 초상화는 여느 주문에 의하여 그려진 것들이 아니다.
항시 그와 친분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드가 스스로가 그들을 그리고
있으며, 또 그것을 그들에게 선물하곤 하는 것이었다. 이 초상화에서의 주인공도
드가와 같은 시대의 비평가로서 드가와는 매우 절친한 사이였다. 뒤랑티는 '새로운
회화'라는 그의 평론을 통해 드가의 작품을 인용, 자신의 이론을 전개하였으며,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드가는 그의 미망인의 생계를 돕기 위해 뒤랑티의 유품
경매에 자신의 작품 4점을 내놓기도 했던 것으로 보아, 그들의 관계는 매우 절친
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서재 속에서 잠시 포즈를 취한 뒤랑티를 그린 이 작품은,
수많은 책들이 굵은 선과 면으로 어우러져 중심된 인물 쪽에 시선을 모으도록
하고 있으며, 얼굴에는 잘게 분할된 붓자국이 보이기도 한다.

La La at the Cirque Fernando, Paris, 1879

Seated Dancer, 1879-80/Pastel

Portrait of Mary Cassatt, 1880-84

Dancers in Pink, 1880-85

Ballet Class, 1881

육안으로도 확인 할 수 있는 작품의 거듭된 수정의 흔적은 드가가 마지막까지도
이 그림을 완성품으로 여기고 싶어하지 않았다는 증거이지만, 그럼에도 이 그림은
그의 작품 가운데 구성에서 가장 기발하고 놀라운 작품이 되었다. 신문을 읽고
있는 어머니의 위치를 전면에 비스듬히 배치하고, 화면의 왼편 상단부에는 세
사람의 무희가 몸의 균형을 잡으려 하고 있거나 준비 자세에 임하고 있다.
오른편 가장자리에는 분홍색과 초록색의 넓은 리본을 맨 무희 두 명과 특이한
두상의 발레 선생이 시야에서 숨어 있다시피 배치되어 있다.

Little Dancer Fourteen Years Old, 1881/Bronze

시력의 약화로 파스텔화를 그리기 시작했던 드가는 결국 1898년경에 시력을 거의
상실하여 평면 회화를 포기하게 된다. 대신 촉각과 감각을 이용하여 작업 할 수
있는 조각으로 전향한다. 이 작품은 말년에 그가 조각 작업에 몰두하던 시기에
제작된 것은 아니지만, 회화와 조각 모두를 아우르는 드가의 탄탄한 조형 감각을
확신케 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이 1881년 제 6회 인상파전에 출품되었을 때
비평계는 상반되는 반응을 보였다. 작가 위스망은 이 작품의 리얼리티가 사람들
을 경악시킬 만큼, 조각의 전통을 전복시켰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나, 일각
에서는 비난의 소리도 일었다. 이 조상은 위스망의 말처럼 당시로서는 매우
사실적인 작품이었다. 아직 성숙하지 않은 어린 소녀, 사춘기를 막 지난 어린
무희의 유연한 신체는 마치 살아 있는 듯 생동감이 넘친다. 오른발을 앞으로
내밀고, 머리를 약간 치켜 든 소녀의 자세에서는 긴장감마저 느껴진다. 몸체는
청동으로 주조되었으나 상체의 보디스와 발레용 슈즈는 밀랍으로 얇게 바르고
색조를 가해 진짜와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특히 발레용 스커트와 머리에 묶은
진짜 실크 리본은 이 작품의 리얼리티를 극대화시키고 있다. 모델이 누구인지
확인 할 수는 없으나, 세심한 관찰과 그 결과 얻은 사실적인 묘사는 사춘기
소녀를 훌륭하게 표현하고 있다.

The Millinery Shop, 1882-86

Women Ironing,1884-86

시간이 지나면서 드가는 점차 우아한 배경 대신에 노동자 계급의 세계로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 구부린 채 다림질을 하거나 하품을 하고 있는 여성들의 자세는
다소 거칠고 투박해 보일 수 있지만, 귀족적인 드가는 이러한 장면조차 전혀 천박
스럽지 않고 인간적 연민과 진실로 가득 찬 이미지로 만들었다.

Race Horses, 1885-1888/Pastel

Woman Combing Her Hair, 1886/Pastel

The Tub, 1886/Pastel

인상주의의 마지막 전람회인 제 8회 전에 출품된 이 작품은 당시의 많은 사람들
에게 충격을 안겨 주었다. 드가는 발레리나, 다림질하는 여인, 세탁하는 여인,
그리고 목욕하는 여인 등 주로 여성을 주제로 한 그림을 즐겨 그렸다. 한동안
발레리나를 주제로 그림을 그리던 드가는 1874년 <목욕하는 여인>을 그린
이후, 1878년부터 약 12여년 동안은 여성의 누드화 작업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누드화 작업을 주로 하던 시기의 막바지인 1886년에 제작된 이 작품은 둥그런
욕조에서 목욕하는 여인을 주제로 한 파스텔화이다.
드가의 여성 누드화는 공개적인 시각이 아닌 훔쳐보기의 기법을 쓰고 있는 특징
이 있는데, 이 작품 역시 드가 스스로도 "열쇠 구멍을 통해 보고 있는 것 같다"
라고 할 만큼 묘한 분위기와 긴장감을 표출하고 있다. 그것은 관람객의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단지 자신의 몸을 닦는 것에만 열중하고 있는 여인의 모습과,
화면을 극단적으로 양분하는 테이블의 구도, 그리고 여인을 바라보게 되는 눈높이
등에서 확연히 보여지고 있다. 또한 이전의 회화에서 보여졌던 이상화된 완벽한
아름다움을 마치 과시하는 듯한 대담한 구도의 여성 누드화가 아니라는 점이
이러한 낯설음과 엿보기의 효과를 두드러지게 하고 있다. 이 그림이 그려질 무렵
인 19세기 후반 파리의 생활 여건은 목욕을 한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은 시기였다
는 점에서, 아마도 이 작품뿐만 아니라 <목욕하는 여인> 연작들의 모델이 되었던
여자들은 직업여성이었을 것이라고 미술사학자들은 조심스럽게 내다보고 있다.
급속한 도시화와 더불어 남성중심의 문화가 활발해 지면서 자연스럽게 여성을
소비하는 풍조가 만연해 졌고, 문란한 성생활로 인한 폐해를 방지하기 위해 직업
여성들에게 청결을 의무화시켜 위생을 철저히 관리하였던 점 등이 그러한 견해를
잘 뒷받침하고 있다.

The Morning Bath, 1890/Pastel

Four Dancers, 1899

Ballet Dancers in the Wings, 1900/Past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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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33 인상주의 모네

   

★ 모네(Claud Monet: 1840~1926) ★

Self-Potrait, 1917

프랑스 파리 출생. 소년시절을 르아브르에서 보냈으며, 그곳에서 화가 부댕을
만나, 외광(外光) 묘사에 대한 초보적인 화법을 배웠다.
19세 때 파리로 가서 아카데미 스위스에 들어가, 피사로와 사귀었다.
2년간 병역을 치르고 1862년 파리로 귀환, 글레르 밑에서 A.르누아르, A.시슬레
F.바질 등과 사귀며 공부하였다. 초기에는 G.쿠르베와 E.마네의 영향을 받아
인물화를 그렸으나 점차 밝은 야외에서 풍경화를 그렸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전쟁 때 런던으로 피신, 이때 J.터너, J.컨스터블 등의
영국 풍경화파의 작품들에 접했다. 이것은 명쾌한 색채표현이란 점에서 커다란
기술적 향상을 그에게 가져다주었다. 1872년 귀국, 파리 근교의 아르장퇴유에
살면서 센 강변의 밝은 풍경을 그려, 인상파양식을 개척하였다.
1874년 파리에서 '화가·조각가·판화가·무명예술가 협회전'을 개최하고, 여기에
12점의 작품을 출품하였는데, 출품된 작품 《인상·일출(日出)》이란 작품
제명에서 인상파란 이름이 모네를 중심으로 한 화가집단에 붙여졌다.
이후 1886년까지 8회 계속된 인상파전에 5회에 걸쳐 많은 작품을 출품하여
대표적 지도자로서의 위치를 굳혔다.
한편 1878년에는 센강변의 베퇴유, 1883년에는 지베르니로 주거를 옮겨
작품을 제작하였고, 만년에는 저택 내 넓은 연못에 떠 있는 연꽃을 그리는 데
몰두하였다. 작품은 외광을 받은 자연의 표정을 따라 밝은색을 효과적으로
구사하고, 팔레트 위에서 물감을 섞지 않는 대신 '색조의 분할'이나 '원색의
병치(倂置)'를 이행하는 등, 인상파 기법의 한 전형을 개척하였다.
자연을 감싼 미묘한 대기의 뉘앙스나 빛을 받고 변화하는 풍경의 순간적 양상을
묘사하려는 그의 작화(作畵)의도는 《루앙대성당》 《수련(睡蓮)》 등에서
보듯이 동일 주제를 아침·낮·저녁으로 시간에 따라 연작한 태도에서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이밖에 《소풍 The Picnic》 《강 The River》 등의 작품도
유명하며 만년에는 눈병을 앓다가 86세에 세상을 떠났다.

클라우드 모네는 회화에서 광학적(optical) 요소를 가장 깊게 탐구하고 평생
추구한 작가이다. 즉 그의 관심은 빛이었다. 우리가 색을 인지하고 사물의
형태를 이해하는데 광선은 절대적이다. 이제껏 광선은 그러나 좀 더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방식으로 이용 되었는데, 색 자체에 그다지 큰 영향을 주는 요소이기
보다는 그저 분위기를 바꾸어주는 것으로 인식되었는데, 이러한 경향을 대표
하는 것이 17세기 바로크 작품들이었다. 작가들은 인공 조명을 상당히
극적으로 사용함으로 화면에 빛과 그림자의 대비를 심화시키고 그로 인해
관객에게 생략된 부분에 대한 상상력을 증가시키기도 하고 보여지는 화면
안의 내용에 더 깊은 자극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모네의 관심은 달랐다. 그는 색채의 고유색이 실제 우리의 일상에서
거의 인지되지 못함을 깨달았다. 즉 우리 눈에 보이는 색들은 광선의 조건하
에서 수시로 변화하고 그것의 완전한 고유 색상은 실제 색상환에서 존재할 뿐인
것이다. 그렇다면 일상적으로 눈에 보이는 형태와 색은 순간적으로 파악되는
일시적인 것일 수 밖에 없고, 그러한 순간에 그것을 잡아내는 작업은 또 다른
'구체적 보기'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사물과 자연의 관계를, 그리고
실재하는 우리의 시선과 인지 방식에 초점을 맞추려는 시도이다.
이제 미술에서 어떻게 볼 것인가는 상당히 중요해지고, 그것이 광학이라는
과학에 의해 지지 받는다. 모네는 많은 수의 작품을 야외에서 제작하는데 그
효과가 과거 제작된 많은 작품들과는 상당히 달라진다.
예를 들어 바르비죵(Barbizon)파 작가들이나 코로(Corot), 보댕
(Eugene Boudin), 종킨(J-B Jongkind)등이 야외에서 많은 수의 작품을
그렸지만, 모네의 풍경화와 밀레의 풍경화를 비교해보면 후자의 광선이
인공적으로 작가에 의해 더해졌으며 화면을 황금빛으로 물들이지만 결코
화면을 밝게 만들지 못함을 알 수 있다.
'En Plein Air'(야외에서 직접 그리기) 방식은 과거에도 존재했지만, 19세기
후반에 이르면 더욱 활발해져서 이제 많은 작가들은 이젤을 들고 야외로 나갔고
자연과의 직접적인 교류가 회화에서 확립된다.
모네의 화면이 보여주는 순간적 붓질과 빠른 속도감으로 전개된 구성은 그가
모두 직접 야외에서 (en plein air) 그린 것이 아니라 대강의 스케치를 마치고
스튜디오에 돌아와 완성한 것인데, 모네는 이 효과를 잘 드러내기 위해 의식적
으로 빠르고 즉흥적인 것처럼 보이도록 붓질과 화면을 어느 정도 조절했다는
것이다. 그의 화면을 x-ray투사로 들여다보면 많은 층의 물감들이 덧칠해져
있는데 이런 덧칠의 효과도 작가가 의도적으로 구성한 것이다.
모네의 작업은 오랜 시간을 거치고 많은 붓 터치를 거쳐 완성되었으며 순간적
인상의 포착이라는 목표는 의도적이고 계산된 작업을 통해서 얻어졌다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어쨌든, 모네의 화면은 화려한 색감과 시각적 사실성에
가까워진 모던회화의 한 단면을 자세히 보여준다. 말기에 찾아온 시력의
상실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회화 작업에 몰두한 그는 20세기 회화의 서두를
이미 장식했다.

Farm Courtyard in Normandy(노르망디 농가의 안뜰), 1863

이 작품은 모네가 <인상, 해돋이>을 그리기 약 10년 전에 그린 풍경으로
어두운 색채를 주조로 하여 아직 사실주의적 재현을 지향하던 젊은 시절의
모네의 화풍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그림이다.
대표적인 인상주의 화가로 알려져 있는 모네, 르누아르, 바질과 같은
화가들도 1870년 이전까지는 쿠르베나 코로와 같은 사실주의 화가들의
영향을 받아 사실주의적인 미학을 추구했었다.
1864년 5월 모네는 파리를 떠나 바지유와 함께 노르망디 지방을 여행하며
작업을 하였다. 그들은 루앙, 생타드레스 등을 거쳐 옹플레르에 머물면서
작업하였다. 모네는 특히 근처의 생시메옹 농장을 즐겨 찾곤 했는데
이 작품은 그 무렵에 그려진 것이다. 전원의 목가적인 풍경이 안정된 구도
위에 전체적으로 차분한 색채를 통해 사실적으로 재현되었다.
풍경의 소재는 일상적인 현실이며 현실 공간은 균형을 이루고 있고, 그 속에
있는 물체들의 윤곽은 분명하고 견고한 형상으로 표현되어 있어, 아직
<인상, 해돋이>에서 볼 수 있는 모네를 짐작하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라앉은 색채속에 유난히 밝은 빛을 받고 있는 농가의 벽들은
분명 10년 후의 <인상, 해돋이>의 빛과 색을 예시하는 듯하다.

The Picnic(Study), Pushkin Museum, Moscow

이 작품은 1863년 마네로 하여금 세간의 비난의 대상이 되도록 만든 <풀밭
위의 점심>과 비슷한 주제를 재현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모네 역시 마네의 사실주의를 이어받아 야외의 밝은 빛 아래에서
인물에 접근하고 있다. 처음부터 1866년 살롱전의 출품을 계획하고 구상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인지, 이 작품의 인물들은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와는
달리 한결같이 산뜻하고 우아하게 차려입었다. 이 작품을 위해 친구인 바질과
화가인 쿠르베가 모델을 서주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아마도 오른편에 앉아
있는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가 쿠르베인 듯 보인다.
스케치 작업은 야외에서 이루어졌으나, 채색 작업과 많은 섬세한 부분들이
화실에서 이루어진 이 작품에는 여전히 어두운 색조와 그림자가 눈에 띈다.
밝은 빛과 그 속에 어우러진 풍경에 관심을 가지긴 하였지만, 넓은 색면으로
견고하게 잡은 형태감, 개략적인 붓질과 강한 콘트라스트 등에서 아직까지
모네의 초기 화풍이 돋보인다. 살롱에 출품하기 전, 쿠르베의 비평을 들은
모네는 이 작품을 살롱에 출품하지 않았다. 이 후 이 그림은 밀린 집세
대신에 집주인에게 맡겨지고, 지하실의 열악한 보관 상태는 그림을 손상
시켰다. 결국 파손된 그림의 오른쪽과 왼쪽 일부가 잘려져 나갔고, 현재
오르세 미술관에는 이 중앙 패널과 왼쪽 부분화만이 소장되어 있다.
모스크바 미술관에 푸슈킨 박물관에 소장된 이 작품의 습작으로 잘려 나가기
전의 본래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카미유, 녹색의 의상, 1866

야심적인 대작 <풀밭 위의 점심>의 완성을 한때 단념했던 모네가 이에 대신하여
불과 나흘 동안에 완성하여 1866년 살롱에 출품한 그림이다.
카미유를 모델로 하여 그린 첫 작품으로 이 작품을 준비하면서 그들은 사랑에
빠지기 시작하였다. 모델은 짙은 녹색 무늬의 의상에 모피(毛皮)가 붙은 검은
코트를 걸치고 모자의 리본을 오른손으로 쥐며 상체를 약간 화가 쪽으로 돌린
포즈가 특이하다. 마치 걷고 있는 한 순간을 포착한 듯한 이 그림은 쿠르베의
<아틀리에>에 나오는 인물 자세와 비슷하다. 이 그림에 보이는 철저한 사실
(寫實)과 중후한 색조에는 쿠르베의 영향이 적지 않음을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다른 풍경화와 함께 살롱에 받아들여져 비록 좋지 않은 벽면에 걸려
지기는 했지만, 많은 비평가들로부터 특유의 수법을 주목받기도 했다.

Terrace at St. Adresse(생 타드레스의 테라스), 1866

모네는 태양광 속의 풍경과 인물을 묘사하기 위해 부분적으로 색채 분할법을
사용하고 있다. 테라스, 바다, 하늘 등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눈 뒤 깃대를 이용해
합치되는 구도가 이색적이다. 꽃과 파도 등의 눈부신 묘사는 인상주의의 전통적
인 기법을 대변한다. 펄럭이는 깃발 아래로 햇빛에 흠뻑 젖은 이 그림에는 모네의
가족들이 등장한다. 그의 부친(앉아있는 남자)과 마리 잔 르카드르 아주머니
(중앙) 그리고 먼 사촌인 잔 마르그리트 르카드르가 신원을 알 수 없는 남자와
함께 서 있다. 3단으로 나뉘어진 화면 구도, 빛과 색의 강력한 대조, 그의 초기
관심사인 광선에 의한 극명한 화면 분할과 밝은 색의 사용이 화면을 효과적으로
구성한다. 구도 또한 그렇게 단계적이고 명확한 것이 장점이고 화면 안에 충만한
빛의 느낌도 아주 강하다. 형상들이 강렬한 햇살 때문에 둥그스름하게 보이지
않고 평탄하게 보이는 해안의 느낌을 포착하고 있다.

Women in the Garden, 1866~67
<정원의 여인들>에는 네 명의 여인들이 등장하는데, 이들 네 명의 모델은 한 사람
이다. 바로, 카미유. 이 그림을 그린 해 늦여름 모네는 빚쟁이에게 빼앗길 운명에 놓인
그림 2백 점을 찢어버린 후 집에서 도피했다. 하지만 여인들의 하늘하늘한 흰 치마폭
위에서 살랑거리는 햇살의 화사함을 보면서 당시 모네가 처한 경제적 어려움은 상상
조차 하기 힘들다. 당장 끼니 걱정에 한숨이 나오는 상황에서 모네는 어떻게 이토록
행복한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까. 타고난 재주라고? 글쎄다, 그건 전적으로 카미유만이
줄 수 있는 깊은 사랑과 신뢰감 때문이 아닐까. 필자가 여자이기에 우기는 것이 결코
아니다. 카미유는 모델 줄신이면서 후덕하기까지 했던 아내였다. 지인에게 보낸 모네
의 편지는 그 무렵을 이렇게 회상한다. "저는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합니다. 시골에 머물
기로 결정했습니다. 지금 작업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백내장으로 시력을 잃어가면서
도 붓을 놓지 못하던 모네의 말년 걸작 <수련> 연작을 보노라면 창작에 대한 불타는
화가의 열정과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무명 시절 겪은 모네의 설움은 눈이 시릴
만큼 아름다운 그림들과 만년에 얻은 부의 영광으로 고스란히 보상받았다.

생 타드레스 해변, 1867

1860년대 말경 모네는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그것은 빛과 색을 그곳에서
잡아 이것을 기록하는 일이었다. 그 때문에 야외에 나가 그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엉켜있는 구름 그리고 수면에서의 빛의 반사를 무시하고 실루엣으로
처리한 요트 등의 표현법과 색조 분할이 엿보이는 색채 표현법이 돋보인다.

Women in the Garden, 1866~67

모네는 이 작품이 그려지기 전 해인 1866년 여름날 파리 근교의 쉘부르에서
'정원의 여인들'을 구상하게 되고, 이듬해 작품이 완성되는 겨울까지 옹플레르의
자기 집 정원에서 작업을 하였다.
'풀밭 위의 점심식사'를 제작할 당시에 접했던 야외의 밝은 빛에 대한 매력으로
모네는 이 대형 작품 제작 시 캔버스 상단의 채색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집의
정원에 캔버스가 들어갈 수 있도록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캔버스를 설치 한 후
작품제작을 하였다. 이 작품은 그 제작에 있어서 몇 개의 애피소드가 있는데
가끔씩 방문했던 그의 동료이자 친구였던 쿠르베가 나뭇잎의 채색을 위해서
가장 자연스러우면서도 어울리는 빛을 끊임없이 기다리는 모네를 보곤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는 것, 또한 작품 안의 모든 인물들의 포즈와 배치를
그의 아내인 카미유가 일일이 옷을 갈아입으면서 섰다는 것 등이다.
모네는 이 작품 속의 풍경과 인물, 의상 등의 표현에 있어 강한 햇빛을 받아
생기는 색의 변화 및 명암의 극렬한 대비에 충실하고자 했다. 특히 카미유가
입고 있는 의상을 보면 그러한 그의 노력이 확연히 드러나고 있는데, 의상의
원색과 빛에 의해 생긴 어둠의 표현 그리고 어렴풋이 보이는 반사광의 특징적인
색감들이 바로 그것이다.

The Cart;Snow-Covered Road at Honfieur, with Saint-Simeon Farm, c.1867

he Bank of the Seine, Bennecourt, 1868

모네의 실험적인 작품 제작 의식이 돋보인다. 물이라는 존재는 모네를 비롯한
인상파 화가들을 끊임없이 따라다녔던 과제였다.
모네는 물의 공허함을 표현하기 위해 물이 지닌 고유색의 관념을 해방시키고
빛에 의해 반사든되는 주위의 색감을 받아들였다.

Madame audibert, 1868

이 작품은 모네의 초창기 작품들을 사주었던 르아브르의 미술 애호가
고디베르가 자신의 부인을 위해 주문한 초상화이다. 1868년 당시 모네 가족은
아들 장의 출생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경제 형편으로 매우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그러한 어려운 시기에 고디베르와 같은 고객은 든든한 후원자였다.
1866년 살롱에 출품한 <카미유의 초상(모네의 부인)>의 구도처럼 고디베르
부인은 옆으로 서서 길게 드레스 자락을 늘어뜨리고 있다.
모네는 이 그림에서 초상화라는 전통적인 장르를 받아들였으나, 과거의
고전적인 초상화들과는 다르게 장식과 치장을 제한하고 오히려 대담한 색면으로
형태감을 표현하고 있다. 견고한 형태감, 단순한 색면, 얼굴의 세부 묘사보다는
의상의 광택, 질감을 뛰어나게 살린 이 초상화는 마네의 화풍을 연상시킨다.

Grenouillere, 1869

라 그르누이에르는 세느 강변의 유명한 행락지로서 모파상이 소설 무대로도
자주 등장한다. 빛이 희롱하는 물의 표현에 적잖은 관심을 지니고 있었던
모네는, 그보다 먼저 이 놀이터를 찾아와 제작에 전념하고 있었던 르누아르와
1869년의 한 여름을 함께 보냈다. 이 작품은 그 무렵에 그렸던 현존하는 3점
가운데의 하나다. 화면 오른 쪽에 보트를 빌려주는 곳이 보이며, 여기서 다리를
건너 몇몇 사람들이 중앙의 작은 섬 그늘에 묘여 있다. 이 그림의 명암은 모두가
색채의 선명한 대비가 되어 빛을 반사하는 수면과 그늘의 인상을 명쾌하게 표현
하고 있다. 특히 리듬이 있는 재빠른 필촉은 물의 반사와 사람들의 움직임을 발랄
하게 포착하여 여름 휴일의 분위기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Flowers and Fruits, 1869

La Porte D'Amount, Etretat, 1869

The Thames at Westminster(Westminster Bridge), 1871

웨스트민스터 사원 아래쪽의 템즈강

The Tea Set, 1872

Regatta at Argenteuil(아르장퇴유의 요트 경주), 1872

모네는 보불전쟁 기간에 영국과 네덜란드를 여행한 뒤 1872년 종전과 더불어
아르장퇴유로 이주했다. 여기서 5년간을 가족과 함께 지내는 동안 모네의 집은
인상파 화가들의 집합장소가 되었다. 그 무렵 센느 강과 그 주변의 환경들은
화가의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그는 센 강에서 요트를 타는 사람들, 또는 센 강
주변의 산책로 등을 화폭에 담으면서, 강과 햇빛의 미묘한 변화를 포착하였다.
이 작품은 그가 센 강을 따라 내려가면서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만들었던 선상
화실에서 그려졌다. 이 작품에서 그의 관심은 수면 위에 반사된 요트의 흰 돛에
집중되어 있다. 수면에 비친 이미지들은 실제의 돛들과 구별하기 위하여 분명하게
분절된 붓질을 가하였다. 화면 전체를 지배하는 생생하고 경쾌한 분위기는 그려진
이 그림을 이 시기의 가장 대담한 작품들 중의 하나로 주목하게 한다.
르누아르나 시슬리, 그리고 나중에는 마네도 이곳에 찾아들어 함께 그림을
그렸다. 'Argenteuil'은 모네 작품의 주요 모티브가 된 곳으로 71년부터 78년
까지 작업했다. 도시 근교의 상업화 되어가고 레져의 중심지로 자리잡는 이 곳
에서 작가는 주로 다리, 철길, 기차, 공장의 굴뚝, 보트, 강, 그리고 넓은 하늘
등을 많이 그렸다. 아르장퇴이유은 발전하는, 모더니티를 얻어 가는 고장의
상징으로 보였다. 이 그림에서는 기교적 원숙미를 엿볼 수 있다. 흔들리는 수면과
물에 비친 돛의 이미지를 전달하기 위해 붓질과 색채를 분할하는 기법을 썼다.

Impression, Sunrise, 1873

인상파란 이름 얻게 된 계기를 제공한 작품으로 아주 유명하다.
부둣가에 해가 떠오르는 상황을 표현했는데, 어스름한 가운데 흐릿한 부두의
모습은 마치 미완성처럼 보이지만, 눈에 보이는 대로 표현한 순간의 인상을
가장 솔직하게 묘사했다는 점은 아주 새롭다.
흐릿한 풍경과 사물처럼 붓 자국은 상당히 거칠고 일관되지 못하며 설명적이지
않다. 이제 회화에서 '어떻게 볼 것인가'는 단순히 주제의 선택에서, 광학과
망막의 문제로 변화한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 사고 대상으로의 진행에서
분리되고, 이미지화 한다.

Poppies at Argenteuil(개양귀비 꽃), 1873

광활한 초원에 핀 무수한 개양귀비의 빨간 색채의 향연을 그린, 목가적이고
전원적인 서정이 감도는 그림이다. 모네의 초기작에 해당되는 34세 때의 작품
으로, <해돋이, 인상>과 함께 1874년 제 1회 인상주의 전에 걸린 작품이다.
모네는 이 그림에서 선연한 빛을 집요하게 추구하면서, 색채의 독자적 주장을
회화적 차원으로 표현하고 있다. 화면을 상하로 양분시킨 늘어선 나무들의
검푸름과 경쾌한 터치로 처리된 개양귀비의 빨간 반점, 푸른 하늘과 솜털 구름,
그리고 화면 중앙의 멀리 보이는 건물, 포즈를 취한 여인의 옷과 양산의 수색이
빛을 담뿍 받았으면서도 독립된 색채를 띠고 있다. 장대한 공간감과 더불어
색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듯한 초여름의 향연이다. 후일 <양산을 쓴 여인>
연작을 예고하고 있기도 한 이 그림은 야외 사생화, 데생의 무시, 풍경의 우위성,
미완성으로 끝난 것 같은 터치 등으로 인상주의의 모든 특징을 한눈에 읽을 수
있다. 모네의 그림은 밝고 부드러운 색조 속에도 다른 인상파 화가들에게는 없는
일종의 비극적인 울림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주제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화가의
생활이나 마음의 직접적인 반응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연에 대하여 비인간적
일 정도로 철저하게 자신을 의지하는 태도, 특히 흘러가는 시간의 지배에 대한
거의 절대적인 복종의 자세에서 오고 있다. 이 그림처럼 필촉의 분할이나 빛의
효과를 과도하게 의식하지 않고, 빠른 필촉으로 그린 작품에서는 특히 그런 느낌
이 강하다.

The Riverside Path at Argenteuil, 1873

1873년, 제1회 인상주의전이 열리기 바로 전 해에 그려진 이 작품은 인상주의
전 개최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모네가 관전인 살롱전에 더 이상 연연하지 않고
독립된 세계를 개척해 나가겠다는 결심을 굳힌 시기의 작품이다.
따라서 아르장퇴유 시기만이 아니라 그의 이전 작품 세계와 앞으로 전개될 대담
한 미학을 동시에 보여준다. 동양화를 연상시킬 정도로 공간을 비워놓은 이 작품
에는 풍경의 모든 요소가 들어 있다. 하늘과 구름, 강물과 강물에 드리워진 풍경,
포플라 나무들, 언덕과 멀리 보이는 성당이 있는 마을. 마치 눈부신 햇살이 개개
의 사물들을 구별하는 차이를 무화시키 듯 모든 사물들은 전체적인 조화를 위해
고유의 특성들을 잃어버렸다. 빛과 색이 데생을 압도하는 순간의 재현은 인상주의
중요한 미학을 엿보게 한다. 이러한 순간적이고 덧없는 자연에 대한 끊임없는
관찰과 연구는 이후 <포플러>, <루앙 성당>, <수련> 등의 연작을 통해서 발전
된다. 33살에 그려진 이 작품은 이후 추상회화를 연상시킬 만큼 혁신적인 모네의
예술적 모험을 예고하고 있다.

The Railway Bridge At Argenteuil(아르장퇴이유 철교), 1873

1860년대 이후 파리는 급속도로 근대화의 면모를 갖추어가고 있었다.
도로와 철도가 활발하게 건설되었다. 철도가 등장하자 센느 강 유역의 아르장
퇴이유와 파리는 쉽게 오갈 수 있게 되었다. 1872년부터 아르장퇴유에서 작업
한 모네 역시 주변에 보이는 다리와 철도 등을 종종 화폭에 담았다.
마치 카메라의 렌즈에 잡힌 순간처럼, 화면에는 철교를 지나는 기차가 비스듬하게
가로질러 배치되었다. 기차가 뿜고 가는 증기는 대기 속에 아스라이 스며들고,
철도의 교각 아래에는 물에 비친 다리의 이미지가 흔들리고 있다. 실재의 다리는
육중하고 견고하지만, 수면에 비친 다리는 물의 반사광 속에서 추상적인 이미지로
변화하였다. 모네는 근대성의 새로운 상징으로 떠오른 철도 그 자체에 매료된 것
이 아니라 흘러가는 구름과 그 속에 흩어지는 증기, 그리고 일렁이는 수면과 반사
된 이미지들에 매료된 것이다. 시시각각 변해 가는 물의 일렁임, 대기의 떨림,
수면에 반사하는 햇볕의 미묘한 변화 등 그 순간성에 대한 집요한 탐구는 모네를
인상주의의 대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The Luncheon(Monet's Garden At Argenteuil), 1873

정원에 점심식사가 차려진 이 집은 모네가 아르장퇴유에 정착하여 살던 곳이다.
식탁 왼 편으로 블록 쌓기에 정신이 팔려 있는 아이는 모네가 1867년 얻은
맏아들 장이다. 햇볕이 쏟아져 내리는 한 낮, 갖은 꽃들의 어울림으로 화사한
정원은 모네 가족의 행복한 순간을 느끼게 한다. 나무 그늘에 차려진 식탁에는
나뭇잎 사이로 쏟아져 들어오는 어른거리는 햇살과 나뭇잎이 만들어내는 그림자
가 경쾌하게 대조를 이룬다. 이미 식사가 끝난 듯, 화면 중앙의 식탁에는 냅킨이
헝클어져 있고 점심식사의 주인공은 찾아 볼 수 없다. 나뭇가지에 걸린 밀집
모자와 벤치에 남겨진 양산은 중심 인물이 빠진 공간의 미묘하고 신비한 분위기
에 가세하고 있다. 모네는 식탁보와 헝클어진 냅킨, 찬 잔과 포트, 과일과 투명한
유리잔 등 일상의 식탁에서 볼 수 있는 세세한 정물들을 놓치지 않고 섬세하게
그려 넣었다. 하늘도 보이지 않고 수평선이나, 길이 끝나는 곳도 보이지 않는
답답한 공간은 관람자의 시선을 저택 정면에 붙들어 두는데, 이러한 공간과 구도
는 화면에 묘사된 일상생활의 내밀한 정경을 부각시키고 있다.

Camille Monet at the Window, 1873

Camille Monet in the Garden, 1873

The Bridge at Argenteuil(아르장퇴유의 다리), 1874

Madam Monet and Child, 1875

Woman with a Parasol(양산을 쓴 여인), 1875
첫아들 장과 함께 모델이 된 <양산을 든 여인>이 제작된 지 4년 후, 둘째 아들 미셸을
낳고 시름시름 앓던 카미유는 자궁암으로 죽는다. 그녀 나이 서른두 살 때의 일이다.
그림이 안 팔려 등잔에 불을 켤 기름도 없이 살던 시절의 아내가 죽어가지만, 모네는
돈이 없어 병을 고쳐줄 수도 없었다. 카미유의 죽음은 모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고,
슬픔이었다. 나중에 모네는 저당 잡혀있던 카미유의 메달을 되찾아 함께 묻어주었다.

La Japonaise(Camille Monet in Japanese Costume), 1876

당시 인상파 화가들 사이에서 널리 퍼졌던 자포니즘(japonisme)의 영향을 받은
것을 잘 보여주는 그림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풍의 치장이나 스타일에 대한
관심은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선 상당히 보편화되어 있었고 (마네의 에밀 졸라의 초상
참고) 개인적, 예술적 관심이 회화에 적극적으로 표현된 예라고 할 수 있다.
카미유는 붉은 색의 기모노를 입고 춤 추는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초록색 벽을
장식한 부채가 매우 역동적인 느낌을 줘 고달픈 생활고나 가정적인 문제 등의 어려움
은 철저하게 감춰진 그림이다. 사실 이 작품이 그려질 무렵 카미유의 몸에는 병이 진행
되고 있었다. 그림 속 그녀의 얼굴을 보면 다른 그림에 비해 누렇게 뜬 듯하고 웃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상품광고에서 흔히 보는 모델들의 미소와 다를 바 없다.
아내에 대한 사랑스러움이 하나도 보이질 않는다. 즉, 그녀를 그려야 할 필연성이 전혀
느껴지질 않는다. 모네는 생활고에 허덕이다 보니 예술성보다 돈이 되는 그림을 그려
야겠다고 생각한 나머지 카미유에게 화려한 일본 옷을 입히고 병들어 누렇게 뜬 얼굴
이지만 억지 웃음을 지우게 했던 것이며 카미유는 이를 저항 없이 따랐던 그들의 처절
했던 상황이 스며있다.

Gare St.-Lazare(생 라자르역), 1877

파리에 있는 생 라자르 역의 플랫포옴으로 이제 막 들어오는 기차가 연기를 뿜어
낸다. 역사 위로 펼쳐진 하늘과 대기중의 구름, 수증기 등이 서로 섞이며 반투명
한 기운들의 혼란스런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시킨 것이 이 작품의 묘미 일 것이다.
분명한 경계가 포착되지 않는 하늘과 그 안의 여러 가지 기운들이 '인상'의 의미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분주한 기차의 움직임들이 파리의 역동성을 더욱 강조하면서
모네의 도시와 산업화에 대한 관심이 다시 한번 드러난다. 생 라자르역의 그림은
이외에도 7점이 더 있다.

Chrysanthemums(국화), 1878

모네가 가셰 박사, 그리고 화가이자 수집가인 친구 뮈레에게 쓴 편지들이 출간
되면서, 모네와 그의 작품을 사랑했던 수집가들에 대한 관계가 널리 알려졌다.
당시 경제적 궁핍으로 고통받았던 모네는 친구 뮈레를 비롯하여 마네, 르누아르
에게도 도움을 받았으며, 때로는 수집가들에게 헐값에 그림을 넘기기도 하였다.
깊이 없는 띠 모양 장식의 구성이 독창적인 이 작품은 모네의 작품 중 보기 드물
게 실내의 꽃을 그린 작품이다. 화상 뒤랑 뤼엘은 이 작품을 절대 200프랑 이하
로는 팔지 않으려 했으나, 빚에 쪼들렸던 모네는 1878년 12월 이 작품을 가셰
박사에게 헐값에 팔았다. 200프랑에 훨씬 못 미치는 50 프랑, 혹은 100프랑
정도에 팔렸는데, 세간에 말이 많았다고 한다. 모네가 이 시기에 그렸던 꽃 정물화
들은 평범한 소재를 택한 것으로서, 분명히 더 광범위한 고객을 끌기 위한 목적에
서 그려진 것이다. 1879년 아내 카미유가 죽은 이후, 모네는 생활고를 극복하기
위하여 정물화를 더 많이 그리게 되었다. 당시 풍경화보다는 정물화가 고가에
팔렸기 때문이다. 가셰 박사는 그다지 모네와 가까운 관계가 아니었지만, 이 작품
을 1951년 프랑스 국립미술관에 기증하면서, 모네와 자신과의 관계를 기념하고
자 하였다.

Rue Montargueil with Flags, 1878

(몽토르게유 가, 1878년 6월 30일의 축제)

이 작품은 1878년 6월 30일 파리 만국박람회의 개최된 날, 파리 거리의 축제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당시 파리는 보불전쟁 이후, 처음 맞는
국경일에 기쁨과 흥분으로 들떠 있었다. 1920년 모네는 그 날을 기억하면서,
인파로 가득 찬 거리를 걷다가 그림을 그릴 만한 발코니를 발견하고 바로 그 곳
을 빌렸다고 회상하였다. 모네는 역사적인 날을 기념하는 이 걸작에서 장중한
구성이나 돋보이는 영웅을 내세우지 않았다. 근대사회의 새로운 주인공인 시민
들의 모습으로 근대적인 역사화를 만들어냈다. 거리에 펄럭이는 삼색기는 모네가
꾸준하게 추구하였던 순간적인 움직임, 그 끊임없는 약동을 표현하기에 적합한
소재였다. 푸른색, 흰색, 붉은색의 경쾌한 병치, 짧게 끊어진 붓질들은 바람에
휘날리는 깃발의 순간적인 느낌을 잘 표현하고 있다.

Springtime At Giverny, 1880

해바라기, 1881

모네는 만년에 이르러 풀과 꽃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그런데 1880년 이전에 독립된 꽃의 정물과가 적은 것은 퍽 기이한 노릇이라고
말하는 평론가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모네는 야외에서 화가(畵架)를 세워 제작
하는 것을 신조로 삼고 있었던 화가였으므로, 아틀리에 안에서 차분히 앉아서
제작을 해야 하는 이런 장르에 종사하는 시간이 많지 못했던 것 같다.
모네는 변하기 쉬운 자연 현상과 기후에 집착하고 있었다. 하지만 첫 부인
카미유가 죽은 다음, 특히 1880년부터 82년에 걸쳐 이상하리만큼 꽃과 과일
등 정물화에 골몰했다. 아내를 잃은 슬픔을 달래기 위해 그는 아틀리에에서
감정의 응어리를 정물화에 쏟아 놓은 것이다.

Tulip Fields in Holland, 1886

The Artist's Garden at Giverny(지베르니, 모네의 정원), 1900

모네가 지베르니에 정착한 것은 1883년이다. 센 강의 지류인 엡트 천이 지나
가고 있는 북프랑스의 작은 마을은 이후 모네의 평생의 거처가 된다.
지베르니 정착 후 모네는 곧바로 드문드문 정원에 꽃과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그는 울타리를 제거하고 잔디와 정원수를 심었으며, 풍부하고 화려한 색채의
꽃밭을 만들었다. 이 작업의 규모가 커져서 정원사의 도움 없이는 관리할 수
없게 되었을 때에도, 모네는 수석 정원사에게 매일 지시를 내리며 정원사들을
가까이서 감독했다. 이 정원에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던 모네는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정원을 보여주며 기쁨을 느꼈다. 현재 이곳은 복구 공사를 거쳐
지베르니 미술관으로 지정되어, 많은 이들이 미술 순례에 오르는 명소가 되어
있다. 화가의 눈썰미로 조성된 지베르니 정원은 약 500여 점에 이르는 작품의
소재인 동시에, 그 자체로도 하나의 예술 작품이다.
이 그림에서 꽉 찬 느낌을 주는 그의 화원을 볼 수 있다. 정원은 자갈 길이 꽃밭
을 가로지르도록 설계되어 있었지만, 모네는 여기에도 꽃들을 채워 형식에
사로잡힌 설계를 부드럽게 바꿔야 한다고 고집했다. 연자주색 아이리스가 핀
이 장려하고 풍성한 강둑은 초록색 창문이 달린 분홍색 집으로 이어져 있고,
집은 잎새에 가려 언뜻 눈에 띨 뿐이다. 정원에는 군데군데 햇빛이 내리쬐고
자갈 길이 드리어진 나무 그림자가 연자주색 아이리스 사이에 푸른 얼룩을
만들어 놓고 있다. 모네는 북프랑스에서 그림을 그리던 초기부터 정원에 남다른
애착을 보였고, 그의 작품에서 정원은 항상 주된 묘사의 대상이었다.
모네에게 있어 정원은 쉼터나 집을 장식하는 부차적인 요소라기보다, 그 곳에서
미세한 자연의 섭리를 찾아냄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있는 별도의 공간이
었던 것이다.

The Garden in Flower, 1900

Haystack at Giverny, 1886

Woman with Parasol(오른쪽에서 본 양산을 쓴 여인), 1886

<오른쪽에서 본 양산을 든 여인>은 10여 년 전 그린 <양산을 든 여인>과 구도, 포즈,
기법 등에서 너무나도 흡사하다. 이 작품의 모델은 훗날 모네의 두 번째 아내가 된
알리스의 딸 쉬잔이다. 에프트 강둑 위, 드높은 하늘과 뭉게구름을 배경으로 젊은 쉬잔이
미풍에 스카프를 휘날리며 서 있다. 한번 맺은 부부의 연이란 얼마나 질기던가.
비록 사별은 했지만, 쉬잔의 모습에서 죽은 카미유를 떠올리며 모네는 몹시도 마음 아팠
나 보다. 쉬잔의 얼굴은 이목구비도 선명하지 않을 뿐더러, 카미유와 마찬가지로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 화가를 바라보지 않고 먼 곳을 응시하고 있다.

(P.S: 알리스 오슈데는 전쟁 등으로 인해 경제 사정이 나빠져 가세가 기울게 되고,
남편마저 사망하자 그녀는 모네의 집에 얹혀 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세 사람이 한
지붕 아래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이런 저런 말들과 복잡한 일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부유한 집안에서 충분한 교육까지 받아 지적이고 교양있는 알리스 오슈데란 이름의 이
여인 앞에서 카미유는 병든 자신과 비교하며 아픈 감정의 상처를 겪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알리스는 카미유를 정성껏 간호해 주었고, 그녀의 임종까지 잘 지켜주었다.
그리고 홀로 된 모네를 잘 돌보아 주며 그가 그림을 포기하지 않도록 도와주었다.
그 뒤 1892년 알리스와 모네는 결혼하였다.)

Young Girls in a Boat, 1887

Poplars at Giverny, 1888

Poplars on the Epte, 1891

모네의 포플라 연작(連作)에는 재미있는 사연이 있다. 어느 날 쥬베르니 근처
의 리메츠를 산책하면서, 에프트 강변에 줄지어 자란 포플라에 매료되었다.
그런데 한 포플라 나무에 붉은 천이 감겨졌고, 이 나무들이 경매에 붙여져 곧
근처의 제재소로 실려 갈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마네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포플라 나무의 경매 연기를 신청했는데 각하되었고, 그래서 입찰 희망자
를 찾아가 낙찰 가격보다 많은 돈을 줄테니 그림을 다 그릴 때까지 참아 달라고
간청했다. 포플라 연작은 이래서 탄생했다. 쭉쭉 솟아 오른 몸뚱이, 무성한 잎새,
이곳 햇빛이 닿으면 여러 색깔로 변한다. 그뿐이랴, 에푸트 강에 투영된 그림자
또한 일품이었지." 라고. 이 작품은 포플라 연작 중 초기의 것이며, 모네는 20점
이 넘는 연작 중에서 6점을 골라 1892년 3월 뤼엘 화랑에서 전시회를 가졌다.

Rouen Cathedral, Full Sunlight(루앙 대성당의 한낮), 1894

1890년대 들어 모네는 일상 생활이나 파리의 대중들을 상대로 한 그림들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하면서, 대성당 같은 중세의 건물들로 주제를 돌린다.
겉보기에 단단해 보이는 건물의 형태는 빛의 용해 작용으로 해체된 후, 크고 작은
분할로 나란히 포개어지기도, 뒤엉켜지기도, 두텁게 처리되기도 하면서 사물의
보다 깊은 곳을 나타내려는 터치와 반점으로 표현된다. 모네는 그의 연작중 가장
중요한 것의 하나인 <성당> 연작을 시도하여 시시각각 루앙 성당의 정면 모습을
약 마흔 점 정도 그리게 된다. 1892년과 1893년 겨울, 모네는 성당을 마주보는
한 건물의 창 앞에 자리잡은 후 실물을 직접 대하고 작업했다. 그리고 지베르니로
돌아가 기억에 비추어서 그 연작에 다시 손을 댄다. 새벽에는 분홍색, 회색 및
진줏빛 광채를 내다가 오전중에는 푸른빛 또는 보랏빛 그림자를 드리우면서 노란
빛과 오렌지 빛으로 물들여진 찬란한 흰빛을 띤다. 정오의 작렬하는 햇살 아래서
는 눈부신 백광으로 빛나며, 황혼의 그림자에 파묻히기 전 저물어 가는 강한 햇살
을 받아 다시 뜨겁게 타오르다가 마지막으로 회색, 푸른색, 보라색 속으로 성당의
모습은 해체되어 사라진다. 모네의 이 <성당> 연작은 가까이로는 세잔느의
<목욕하는 사람> 연작을, 멀리는 후일 팝 아트의 앤디 워홀 등에게 창작 동기를
제공하면서, 같은 사물의 미묘한 차이가 자아내는 효과가 하나의 모티브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인상주의 그림이 여전히 인기있는 이유는 널리 퍼지는 빛과
빛의 특성에 대한 과학적 연구 때문이다. 인상주의는 사진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나타났는데, 감판이 빛을 받아 그 순간의 이미지를 고정시키는 사진과 인상주의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다.

The Waterlily Pond(수련 연못), 1899

1890년 이후 모네는 손수 새 스튜디오를 지었다. 정원 설계를 계속하면서 그는
제2의 공간을 꾸몄는데 이것이 바로 그가 '물위의 정원'이라 부른 연못이다.
그 위로 다리 하나가 건너고 있는 이 넓은 연못은 일본 미술에 대한 모네의 관심
을 보여준다. 모네의 그림에 일본풍이 등장한 것은 1895년 초였지만 1898년
부터 1900년 사이 내내 그는 일본풍에 역점을 두었다. 역시 그 무렵에 그린
베퇴유 풍경화들과 마찬가지로 서로 다른 구도로 잡은 이 그림들의 펀형도 정방
형에 가깝다.

London: Houses of Parliament at Sunset, 1903

1870년 안개 낀 템즈 강의 모습을 여러 개의 화폭에 담았던 모네는 1899년
부터 1901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겨울을 런던에 체류하면서, 템즈 강을 중심
으로 워털루 다리, 차링크로스 다리, 국회 의사당을 주제로 100여 점에 가까운
그림을 제작했다. 모네는 상당히 빨리 변하는 안개의 인상을 포착하기 위해,
100여 점의 그림을 동시에 그렸다. 그러나 야외에서만 작업을 하는 것으로
알려진 모네는 대부분의 작품들을 런던에 머물며 완성한 것이 아니라 지베르니
에 가지고 돌아와서 완성시켰다. 이 작품은 성 토마스 병원의 발코니에서 템즈
강 너머의 국회 의사당을 그린 것이다. 붉은색과 연한 자주색, 금색 소용돌이의
미묘한 분위기가 화면 주변의 불꽃 모양의 회오리 안에 자리잡고 있다.
캔버스 전체가 깊은 안개 속에 침잠 되어, 희미하게 빛나는 붉은색의 태양은
수면에 반사되고, 고딕풍의 건축을 마치 환각처럼 푸르스름하게 떠올려 놓고
있다. 가로, 수직, 대각의 방향으로 희미한 물감의 흔적이 만들어 낸 템즈 강은
굴절감과 동시에 흐르는 안개의 인상을 주고 있다.

Water-Lilies 1(수련-구름), 1903

Water Lilies:Clouds, 1903

Water-Lilies, 1908

Palazzo da Mula at Venice, 1908

San Giorgio Maggiore in Venice at dusk, 1908

Water-Lilies, 1914

1899년부터 2년에 걸쳐 런던에서 모네는 터너의 작품 세계를 연구했고,
1908년과 그 이듬해에 베네치아에 머물 때는 물의 도시가 자아내는 환영에
이끌리기도 했다. 이 두 도시를 여행하며 얻은 빛과 반사에 대한 통찰은 수련
연작에 지속적인 영감을 주었다. 이 연작의 초기 구도에서는 수면에 제방이나
나무가 등장하기도 하고, 때로는 연못을 가로지르는 일본풍의 다리를 그려
넣기도 했다. 그러나 1904년부터는 연못을 둘러싼 풍경과 일본식 다리의
모티브는 완전히 사라졌고, "수면상의 변화"에 대한 통찰만 깊어졌다.
흘러가는 구름, 바람, 혹은 빛의 변화가 연못을 변형시키고, 끝없이 퍼진 환영
을 암시하기 위해서 수련은 종종 화폭의 끝에서 단절되어 있다. 모네는 수면과
지면 또는 수면과 하늘 사이에 생기는 경계선들을 제거했고, 이러한 구도는
완전한 정사각형을 구성하며 거꾸로 서 있는 듯한 이미지를 창출해 내고 있다.
모네는 앙드레 마송이 "인상주의의 시스티나 예배당"이라 했던 틀뤼니 공원의
오랑쥬리 전시실에 8개의 수련 연작을 기증했다.

Water-Lilies, 1913-1917

Water-Lilies, c.1917

Water-Lilies, 1917

Self-Portrait, 1917

모네의 이 자화상은 모네의 나이 77세 때에 그린 것으로, 불편한 시력으로 홀로
은둔한 채 <수련> 연작에 몰두하던 시기였다. 모네는 1911년 두 번째 부인인
알리스를 잃었으며 이어서 1914년에는 카미유와의 사이에 두었던 장남 장마져
앞세웠다. 1910년 이후, 프랑스 내의 비평가들로부터 격찬이 쏟아졌으며,
국외에서 역시 화상 뒤랑 뤼엘과 포터 파머와 같은 수집가의 도움으로 모네는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명성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가족과 많은 친구들
을 먼저 보내고 이제 생의 막바지로 치닫고 있는 노화가의 풍모에는 어딘지 서글
픔이 베어 있다. 모네는 이 자화상을 가깝게 지내던 지인 클레망소에게 선물하였
다. 1927년 모네가 사망한 지 1년 후, 이 작품은 클레망소의 기증으로 루브르에
소장되었다. 현재는 오르세 미술관에 옮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