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미술사 참고자료/후기인상주의

서양미술사35 인상주의: 르누아르

AH101 2012. 2. 16. 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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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르노와르(Renoir, Pierre-Auguste: 1841~1926) ★

프랑스 리모주 출생. 4세 때 파리로 이사하였다. 집안이 가난한 양복점
이어서 13세부터 도자기공장에 들어가 도자기에 그림 그리는 일을 하였다.
이곳에서 색채를 익힌 것이 뒤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 무렵부터 점심시간에는 루브르미술관에서 J.A.와토나 B. 부셰 등의 작품에
이끌려 화가가 될 것을 꿈꾸었다. 그러나 4년 후 기계화의 물결에 밀려 실직
겨우 부채그림이나 점포장식 등을 하였다.
1862년 글레이르의 아틀리에에 들어가 C.모네, A.시슬레, 바지위 등을 알게
되고 또 C.피사로, P.세잔, J.B.A.기요맹과도 사귀어, 훗날 인상파운동을 지향한
젊은 혁신화가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이리하여 초기에는 코모, 들라크루아, 크루베 등의 영향을 받았고,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종군한 후에는 작풍도 점차 밝아졌다.
인상파의 기치를 든 1874년 제1회 전람회에는 《판자 관람석》(1874)을
출품하였고, 계속하여 제2회와 제3회에도 참가하여 한동안 인상파 그룹의
한 사람으로서 더욱 더 눈부시게 빛나는 색채표현을 전개하였다.
대작(大作) 《물랭 드 라 갈레트 Le Moulin de la Galette》(1876)와
《샤토에서 뱃놀이를 하는 사람들》(1879)은 인상파시대의 대표작이다.
1881년 이탈리아를 여행, 라파엘로나 폼페이의 벽화에서 감동을 받고 부터는
그의 화풍도 마침내 한 전기(轉機)를 맞이하였다.
귀국 후 얼마 동안의 작품은 색감과 묘법(描法)이 크게 바뀌었다.
즉 담백한 색조로써 선과 포름을 명확하게 그려서 화면구성에 깊은 의미를 쏟은
고전적인 경향을 띤 작품들로 《목욕하는 여인들》(1884~1887) 등을
그렸다. 그 후는 완전히 인상파에서 이탈하여 재차 독자적인 풍부한 색채표현을
되찾아 원색대비에 의한 원숙한 작풍을 확립하였다. 더욱이 1890년대부터는
꽃 ·어린이 ·여성상, 특히 《나부(裸婦)》(1888) 등은 강한 의욕으로 빨강이나
주황색과 황색을 초록이나 청색 따위의 엷은 색채로 떠올리면서 부드럽고
미묘한 대상의 뉘앙스를 관능적으로 묘사하였다.
프랑스 미술의 우아한 전통을 근대에 계승한 뛰어난 색채가로서 1900년에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만년에는 지병인 류머티즘성 관절염 때문에
손가락에 연필을 매고 그리면서도 마지막까지 제작하는 기쁨을 잃지 않았다.
최후 10년 간은 조수를 써서 조각에도 손대어 《모자(母子)》(1916)와 같은
작품을 남겼다.

Self-Portrait, 1910

피에르 오구스트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1841-1919)
예로부터 도자기의 고장으로 유명한 프랑스 중부 산악 지대의 리모주에서 태어
났다. 아버지는 작은 일도 소홀히 하지 않는 성실한 태도와 손으로 하는 일에
대한 애정이라는 좋은 의미의 직인 기질을 이어받았다.
르누아르가 네 살일 때 그의 집은 파리로 이사했는데, 생활은 여전히 가난했기
때문에 르누아르는 열세 살 때부터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는 직인으로 일하게
되었다. 만년에 유명해지고 나서 그는 다시 도자기의 세계를 즐기게 되었는데,
아마도 힘들었던 소년 시절을 그립게 회상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기계에 의한 대량 생산 상품이 등장하여 그가 일하던 도자기 공장이 망하자
르누아르는 부채에 그림을 그리거나 창문의 블라인드에 페인트를 칠하는 일까지
해야 했다고 한다.

화가로서 르누아르의 수업은 1862년 스물한 살 때 파리 국립미술학교의 교사
였던 샤를 글레르의 아틀리에에서 배우게 된 때로부터 시작된다.
글레르 밑에서 공부한 2년 반의 기간은 직접적으로는 그의 양식에 아무런 성과도
가져다 주지는 않았지만, 거기에서 모네, 시슬리, 바지유 등 훗날의 인상파 동료
들을 알게 된 것은 큰 수확이었다. 아카데미의 규범에 압박감을 느끼던 그와
인상파 친구들은 야회로 나가서 시골의 자연 그대로의 색채와 광선을 그림에
담기 시작했다. 인상주의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시슬레와 모네가 시골 풍경을
즐겨 선택했던 것에 비해 르누아르는 파리로 시선을 돌려 파리인들의 일상에
주목하였다. 그는 젊은 여성과 어린이들에 대한 독특한 감각을 보여주는 훌륭한
초상화로 두각을 나타내었다.

1870년대, 인상파의 기법에 깊이 젖어 있던 시절의 르누아르는 깨끗하고 맑은
색채의 작품을 많이 남겼는데, 1880년대에 들어와 인상주의에 의문을 품게되고
마침내 후반 생의 독자적인 풍부한 양식으로 옮아간다.
이 양식의 전환에는 1881년부터 1882년에 걸쳐 알제리,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지중해의 밝은 태양과 르네상스 시대의 고전 작품을 접한 것이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곳에서 그림의 양식이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발전하기 시작했고, 이전
의 유쾌하고 자유로운 이미지 대신 루벤스의 작품처럼 여성 누드로 가득한 대규모
작품이 나타났다. 이러한 경향은 코트다쥐르로 이주한 뒤에 더욱 심화되었다.
관절염으로 휠체어에 의지해야 했던 노년의 르누아르는 손에 붓을 묶은 채 생애
말년까지, 프랑스 리비에라 지역의 찬란한 햇살 속에 빛나는 젊음과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작품들을 그렸다.

Portrait de Romaine Lacaux, 1864

마치 사진을 보는 듯 지극히 사실적인 소녀상이다. 당시의 평론가 말마따나 "더
이상 오를래야 더 오를 데가 없을 만큼 고도의 회화 수법"을 보인 작품이다.
르누아르의 섬세하고 예민한 감성이 화폭 구석구석에서 번득인다.
1863년은 르누아르가 <춤추는 에스메랄다>로 살롱에 입선한 해다. 이 성공에
힘입어 초상화 주문이 많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초기이기 때문에 그는 그 어느 때
보다도 정성껏 그리고 꼼꼼히 그림을 그렸다. 이 작품으로 말미암아 르누아르는
그 성가가 높아지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마치 에나멜과도 같은 염색(艶色)을
지니면서도 한편으로 전아(典雅)한 색조가 억제된 감성을 느끼게도 한다. 아카데
믹한 작고의 수련을 쌓은 흔적이 엿보이는 초기작이다.

르누아르가 청탁을 받고 그린 최초의 그림들 가운데 하나다. 이 여자아이의
아버지는 루느아르가 견습공 시절부터 알고 지냈던 것으로 보이는 도자기 제조업
자였다. 이 그림에서는 이 젊은 화가가 존경하던 두 화가 앵그르와 코로의 영향
을 엿볼 수 있다. 여기에서 르누아르는 이 쟝르의 관례를 존중해 로맹라코를
어린 부르주아 공주 같은 포즈로 앉혀 놓았지만, 아이의 신선미를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대가다운 면모를 발휘해 보였다. 어린 모델들에 대한
이 같은 (공감과 존중의 성격을 동시에 띤) 감응은 자신의 아이들을 포함해
아이들을 그린 그의 초상화 어디에서든지 반복해서 나타난다.

Portrait of William Sisley, 1864

Bouquet of Spring Flowers (Spring Bouquet), 1866

르누아르는 죽기 바로 직전까지 그림을 그리려 했다. 숨을 거두기 몇 시간 전
간병인에게 화구를 가져오게 한 르누아르는 정물 소재로 꽃을 준비하도록 했다.
풍요롭고 관능적인 여인들과 더불어 그가 지극히 사랑했던 소재 꽃, 르누아르의
꽃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그 밝고 화사한 인상에 지극한 행복감과 만족감을
느끼게 된다. 르누아르의 초기작 가운데 하나인 이 작품에서 우리가 얻는 즐거움
도 바로 그런 것이다. 꽃이나 소녀같이 너무 예쁜 대상만 그린다고 누가 한마디
하면 르누아르는 다음과 같이 응대하곤 했다.
"그림은 가능한 화려한 것이 좋아요. 소중하고 즐겁고 예쁜 것, 그래요, 예쁜 것
이어야 하지요." 꽃이 그런 것처럼 확실히 꽃을 그린 그림도 우리에게 아름다움의
지극한 감동을 준다. 누가 꽃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나? 꽃은 인간에게 아름다움
이 무엇인지 최초로, 또 근원적으로 가르쳐준 자연의 대표적인 사물이다.
그러나 이렇게 아름다운 꽃도 금새 시들고 만다. 그것이 꽃이 지닌 가장 큰 단점이다.
서양 미술에서 꽃이 아름다움의 상징임과 동시에 덧없음 혹은 허무의 상징인 것은
바로 꽃의 이런 숙명 탓이리라. 덧없음의 상징으로 그려진 꽃 그림 가운데는 사계절
의 꽃을 한데 모아 그린 것들이 있다. 주로 17세기에 많이 그려진 이런 꽃 그림은,
사계절의 꽃이 한자리에 모인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관객으로
하여금 인생이 짧고 유한한 것임을 깊이 절감하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짧은 인생을 보다 성실히, 아름답게 살자는 호소를 담은 그림인 것이다.
이런 서양 꽃 그림의 전통을 잘 알고 있었을 르누아르가 평생 누구보다 꽃 그림을
열심히 그린 것은, 무엇보다 인생의 아름다움과 덧없음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려는
그의 열정 때문이었다. 인생의 아름다움과 덧없음을 윤색하거나 가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이만큼 강하고 아름다운 사람은 없다.

Portrait of Bazille, 1867

Alfred Sisley and His Wife. 1868

르누아르의 다정한 벗이었던 화가 시슬리가 결혼한 무렵에 그린 초상화인데, 이
그림은 이른바 초상화의 포즈가 아니라 자연 그대로의 자유스러운 모습을 잽싸게
포착하여 다정한 부부상을 부각시켜 놓았다. 이무렵의 엄격한 사실(寫實) 기법
탓으로 부인의 스커트가 지나치리만큼 선명하게 묘사되어 있어 인물 이상의
효과를 내고 있다. 남편과 아내를 화면 가득히 채우면서 삼각형 도법(圖法)으로
짜임새 있게 구성하고 있다. 특히 르누아르는 두 인물의 얼굴의 볼륨에 신경을
쓴 흔적이 엿보인다. 초기의 사실적인 수법이 잘 드러나 있는 이 그림은 화려한
색조로 발전해 가는 과정을 잘 나타내고 있기도 하다.

La Promenade(The Walk), 1870

Still Life with Bouquet, 1871

Monet painting in his garden at Argenteuil, 1873

Torso(Buste de Femme), 1873-75

Danseuse(Dancer), 1874

La loge(The Theater Box), 1874

관람용 안경을 들고 열중하여 오페라를 보는 상류층 남자는 르누아르의 형제인
에드몽이다. 그는 니나라는 유명한 모델과 함께 있는데 그녀는 매우 생기있고
광채가 나게 표현되어 있다. 다른 작품에서처럼 르누아르는 여성의 얼굴에서
눈과 입술을 강조하고 다른 부분은 특별한 특성 없이 남겨두었다.
그녀의 줄무늬 드레스의 네크라인 쪽으로 살짝 들어간 꽃은 작가의 탁월한 감각을
보여준다.

The Parisian (La Parisienne), 1874

Portrait of Madame Henriot, 1874

Woman Reading, 1874-76

인상파 시대의 르누아르의 작품에는 자연의 묘사보다는 인물, 특히 여인을 주제로
빛의 효과를 탐닉하고 있는 명작들이 많다. 이 그림도 그러한 작품 가운데 하나로
서 젊은 시절의 르누아르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대표작이다. 르누아르는 주로
인물을 중심으로 하여 빛의 효과를 탐색하고 있는 것이 그 나름의 두드러진 특징
이라 하겠다. 작품의 모델이었던 마르고(Margot)는 몽마르트의 화류계 여자로
성긴 눈썹과 다갈색 곱슬머리, 도톰하고 육감적인 입술을 지녔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르누아르의 <춤추는 소녀>에서 모델이 되기도 했다.
<책 읽는 여인>은 창 밖에서 흘러 들어오는 부드러운 햇살을 받아, 역광 속에서
젊은 여인의 즐거운 독서의 한 순간을 포착하고 있다. 화가는 거기서 다양하고
미묘한 색조들을 발견한다. 책에서 반사된 빛은 얼굴의 그림자를 투명하게 만들고
있으며, 머리는 마치 스스로 빛을 뿜는 것처럼 빛난다. 여인이 얼굴은 빛의 반영
이 밝아 매혹적인 생명력을 느끼게 한다. 빠른 붓질로 턱의 형태가 나타나고,
괄호형의 곡선은 입술과 눈, 눈썹 등 화면의 여러 곳에서 반복된다. 붓의 터치는
어떤 곳에서는 물감을 두껍게 발라 놓기도 하고, 또 다른 곳에서는 단순하게 씻어
내리며 자연스러운 필치를 보이고 있다.

Portrait of Claude Monet, 1875

아르쟝뚜유에서 조그마한 뜨락이 있는 집을 전세 내어, 그림에 골몰하고 있을
무렵의 화우 끌로드 모네가 풍경화 제작에 열중하던 손을 멈추고 뭔가 깊이 생각
에 잠겨 있는 듯한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예술 창작에 심취된 화가의 진지한
모습을 유연한 필촉과 따뜻한 색감으로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제 2회 인상파전에
출품했던 이 작품은, 모네와의 우정을 나타냄과 동시에 인상주의가 가장 순수
하게 추구했던 시기의 화가의 한 기록으로서 퍽 값진 그림이다. 모네는 바로 이
그림 속의 팔레트와 붓으로 <아르쟝뚜유의 다리> 등 지방의 풍물을 즐겨 그려
그 나름의 빛과 색채의 향연을 베풀었다. 여인 초상이 대부분인 르누아르로서는
특이한 작품이다.

Portrait of Victor Chocquet, 1875

Nini in the Garden, 1875-1876

Study for "Nude in the Sunlight", 1875-76

비너스가 바다의 물거품에서 태어났다고 한다면, 르누아르의 이 나부는 무성한
숲 덤불을 비집고 빛나는 햇빛 속에서 태어난 현대판 비너스라고나 할까!
거친 붓자국의 뿌우연 빛깔 속에서 풍요롭고도 요염한 여체가 어슴푸레하게 부각
되었다. 제 2회 인상파 전시회에서 "모델이 마치 수포장에 걸린 것 같다"는 험담
을 들을 정도로, 풀빛으로 얼룩진 볕살의 효과는 대단하다. 얼굴, 어깨, 젖가슴 등
몸 전체에 눈이 부실 정도로 태양의 직사광선이 감싸고 있는 이 여체는, 마치 숲
속의 요정과도 같은 동화적 분위기마저 느낀다. 배경인 수풀도 역시 햇빛을 듬뿍
받아 하나로 버무려진 아름다운 색채의 효과를 내고 있다. 순간적인 색채의 소용
돌이를 잘 감득한 작품이다.

A Girl With a Watering Can, 1876

르누아르처럼 어린이들의 상냥하고 순진무구함을 잘 표현한 작가도 없다.
값비싼 옷을 잘 차려 입은 어린이의 '공식적인' 초상화에 나타나는 경직한 자세를
피해 르누아르는 어린이들이 자유롭게 웃고 놀도록 내버려 두었다.
이 작품에서 화가는 햇빛을 받은 꽃밭과 작은 금발머리의 소녀를 매력적으로
조화시키고 있다. 이 소녀는 마치 혼자서 이 만개한 멋진 정원을 가꾸었다는
듯이 녹색 물뿌리개를 자랑스레 들고 행복하게 미소 짓고 있다.

Le Moulin de la Galette, 1876

인상주의의 진정한 선언이라 할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제작한 시기는 르누
아르의 활동 시기에서도 매우 중요한 때였다. 이 시기에 그는 인상주의 동료들과
공유하고 있던 일상적인 주제, 채색된 그림자, 야외에서 그리기에 대한 생각들을
색감이 풍부한 자기 고유의 스타일로 정립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 당시의 무도회와 야외 술집의 즐거운 분위기를 잘 살린, 유쾌하고도 건강한
삶으로 흘러 넘치는 찬란한 작품이다. 르누아르는 대중적인 휴일 무도회에 즐겨
참여했다. 르누아르는 인상주의자들의 탐구를 옥외의 밝은 빛 아래의 인물에
적용하여, 풍부한 색채의 반점들과 밝은 빛으로 진동하는 작품들을 제작하였다.
그는 작품의 구성에 인물의 중요성을 부여함으로써 인상주의를 고전주의, 낭만
주의, 사실주의 등 19세기 프랑스 미술의 위대한 단계의 수준에까지 끌어올렸다.
풍경 또는 정물에만 국한하지 않고 시야와 영감의 폭을 넓혀 감으로써, 그는
프랑스 회화만이 아니라 전 세계 회화의 위대한 거장들 속에 자리잡게 된다.
1877년 제 3회 인상주의전에 출품했던 이 작품은 120호나 되는 대형 캔버스를
아틀리에에서 몽마르트의 무도장까지 매일 가지고 가서, 현장의 정경을 직접 묘사
한 것이다. 나뭇잎을 헤치고 들어오는 햇빛의 순간적인 변화와 움직임을 포착
하려 했다는 측면에서 주목을 받는 작품이다. 같은 인상주의 계열의 화가이자
소장가였던 카이유보트가 프랑스 정부에 기증해 박물관에 소장되었다.

The Swing, 1876

공원의 그늘, 산책길에서 만난 지인(知人)들의 다소곳한 대화 장면이다.
매우 흔해 빠진 일상적인 정경이, 르누아르의 애무하는 듯한 붓의 촉감으로 말미
암아, 놀라울 정도로 밝은 빛의 세계를 나타내 주고 있다.
프라고나르가 그린 <그네>처럼 그렇게 우아한 세계는 아니지만, 서민들의 충족한
생활의 숨결이 그런 대로 눈부신 광휘를 떨치면서 밝게 실현되어 있다.
나무 사이로 흘러내리고 있는 빛의 줄기가 화면의 도처에 명멸(明滅)하면서 나무
등걸과 오솔 길이 한결 아름다운 빛으로 반영되고 있고, 멈춰 서 있는 그네 역시
마치 쾌적한 리듬으로 여유롭게 움직이고 있는 듯이도 보인다.
이 그림에서도 르누아르는 자연의 묘사 못지 않게 인물의 표현에 적잖은 관심을
보이고 있음을 잘 알 수 있다.

Portrait of the Actress Jeanne Samary, 1877

밀도(密度) 짙은 눈부신 핑크 빛깔을 배경으로 깔고, 마치 이 화려한 분위기 속에
흠뻑 젖어 있는 듯이 우아한 여인이 턱밑에 손을 받치고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그 청징(淸澄)한 눈은 지적(知的)으로 빛나고 있고, 입술과 어깨 언저리에 붉은
색조가 산점(散点)하고 있고, 한편으로 여기에 짙은 녹색의 의상이 알뜰히 대비
(對比)되고 있다. 그리고 이런 뭇 빛깔들이 마치 하나로 용해된 듯도 하면서
쾌적한 색감으로 잘 나타나 있다. 이 그림의 모델은 당시 파리에서 인기 절정에
있었던 유명한 여배우이다. 그녀는 매우 쾌활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발랄하면서
도 지적(知的) 매력이 넘치는 미인이었다고 한다. 이에 매혹된 르누아르는 그녀의
전신상도 그렸다.

Madame Charpentier and Her Children Paul

(at her knee) and Georgette, 1878

1879년 살롱전에서 파란을 일으켰던 대형작이다. 아르그리트와 그녀의 딸
조르제트, 아들 폴(당시 풍습대로 여야 옷을 입혔다.)의 모습을 담았다.
푸르스트는 샤르팡티에 부인을 싫어했는데도 자신의 저서 <다시 찾은 시간>
에서 이 그림에 관해 긴 묘사를 할애한 바 있다. 그는 "티치아노의 가장 아름
다운 작품들에 비할만한 감미로운 그림"에 찬탄을 금하지 못하면서 르누아르의
이 작품은 다른 화가들의 작품에서도 볼 수 없는 "우아한 가정과 정교한 복장
에서 풍기는 시정을 완벽하게 포착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Young Women Talking, 1878

Portrait of the Actress Jeanne Samary, 1878

Gypsy Girl, 1879

The End of the Lunch, 1879

Oarsmen at Chatou, 1879

옥외의 분위기와 빛에 대한 예민한 감각, 미묘한 분위기, 대단히 세련된 색채로
이루어진, 풍부한 뉘앙스의 물 위에 반사되는 빛의 묘사 등 이 무렵 그의 인상
주의의 가장 대표적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The Canoeists' Luncheon, 1879-80

음악회에서, 1880

음악회에 출연하여 꽃다발을 받은 다음 무대 뒤 휴게실에서 잠시 쉬고 있는 장면
이다. 차분히 앉아 있는 두 소녀와 꽃다발 등 매우 우아한 테마를 극히 아름다운
색조로 나타내주고 있는 이 그림은, 퍽 극명(克明)한 묘사를 하고 있어 상당히
엄격한 사실(寫實)의 화법을 보여 주고 있다. 그의 나이 서른 살에 접어들면서
부터 르누아르는 친구들과 새로운 그룹을 만들어 새로운 화법을 채택하게 된다.
즉, 이른바 인상파 시대에 접어들게 되는데, 이 무렵에 그는 곧잘 소녀들을 모델
로 해서 그림을 그리곤 했다. 특히 발랄한 젊은 소녀들을 대상으로 하여 즐겨
그림을 그린 까닭은 소녀의 아름답고 청순하며, 또한 순진 무구함에 당시 매료
(魅了)되었기 때문이다.

Irene Cahen d'Anvers, 1880

가슴을 조이고 있듯 긴장한 눈매로 무엇인가를 열심히 응시하고 있는 가련한
소녀상은 뭔지 모를 연민(憐憫)의 정 같은 것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소녀상은
르누아르가 즐겨 다루는 소재의 하나이다. 당시 별로 많지 않았던 그의 예술의
옹근 이해자였던 은행가 루이 깡 단베르 씨의 귀여운 막내 딸이 모델이 되어
주어서 퍽 조심스레, 그리고 정성스레 이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놀란 토끼처럼
동그란 눈, 투명한 살결의 프로필은 유연한 붉은 자색의 머리칼에 감싸여 더욱
돋보인다. 길게 늘어뜨린 머리칼의 한 가닥, 한 가닥은 르노와르 특유의 흐르는
듯한 붓놀림으로, 산만한 듯하면서도 매끄럽게 다듬어졌다. 청결하고 감미로운
작품이다.

Lady Sewing, 1879

Jugglers at the Cirque Fernando(페르난도의 서커스 소녀), 1879

밝음, 발랄함, 따뜻함 등을 사랑한 르노와르는 서민들을 보는 시각(視角)에
있어서도 로트렉이나 드가처럼 날카로움이나 풍자 같은 것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그는 [놀이] 속에서 삶의 충일(充溢)함을 찾고, 일상성 그 자체를 밝고
따뜻하게 묘출한다. 언제나 흥청거리는 몽마르트르에 천막을 친 서커스 단장
페르난도 발덴베르크의 두 딸을 모델로 한 이 그림에서도, 르누아르의 그런 속성
을 쉽사리 파악할 수 있다. 따뜻하게 보이는 마루를 배경으로 하여 약간 시점(視点)
을 높이 잡아 굽어보는 듯한 묘사를 가미하면서, 두 소녀의 앳된 모습을 세련된
색채로 돋보이게 하고 있다.

Sleeping Girl(known as Girl with a cat), 1880

Roses and Jasmine in a Delft Vase, 1880-81

The Luncheon of the Boating Party, 1881

"이웃하는 모든 사물에 영향을 받는 변화무쌍한 반사광이 다가오거나, 멀어지는
인물들 위로 그려놓은 명암의 유희, 그리고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찰나의 조화,
르누아르는 바로 여기에 사로잡혔다. -스테판 말라르메"
르누아르는 파리의 현대적인 풍경에서 어느 인상주의 화가보다도 더 큰 매력과
아름다움을 찾아냈다. 그는 사물을 두고 본질로 깊이 파고 들어가는 것보다, 그
외양을 탐구하면서 일반성을 추출했다. 또한 유쾌한 기분을 충족시키는 것이면
무엇이든 환영했고, 자신이 본 것에 대한 감각과 인상, 대상의 일반적인 측면을
장엄한 생명력으로 화폭에 담았다. 작품의 전경과 배경은 차양에 의해 부분적
으로 연관되어 있다. 차양의 줄무늬를 통해 나뭇잎의 색상과 사람들의 보다
따뜻한 색조가 결합되고 있으며, 차양의 물결 같은 모서리는 인물들에게 나타난
곡선들을 자유롭게 반향하고 있다. 발코니의 원근법은 눈을 오른편 위로 끌고
가면서, 멀리 트인 풍경을 대립적으로 끌어오고 있다. 그림의 모든 것들은 아무리
작거나 우연한 것일지라도 세밀함과 풍부함으로 처리되어 있다.

센 강의 사토섬에 정박한 레스토랑 푸르네즈선의 테라스에서 점심 후의 느긋한
분위기를 묘사한 그림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바르비에르 백작의 초대
를 받아 자리를 같이 한 인상파 화가, 여배우 등 모두 르누아르의 친구들이다.
여름이 가까운 날, 밝은 태양이 센 강변에 빛나고, 휴일이 되면 사람들은 서로
어울려 뱃놀이를 한다. 그리고 점심 때가 되면 강변의 음식점에 모여 담소하면서
식사를 하는, 그런 광경을 큰 구도로 삼아 묘사한 작품으로 그의 <물랭 드 라
갈레트>와 함께 이 시대를 대표하는 대작이다. 여기에서는 태양이 직사하는 그
눈부신 빛을 연상하게 하는 것처럼 어디까지나 밝은 빛의 반사를 사람들의 얼굴
이나 옷에 비추어, 빛이 선명하고 경쾌하기 그지없다. 사람들의 집단은 각기
별개의 모습을 하고 극히 교묘하게 어우러져 있다.
앞쪽의 꽃모자를 쓰고 검은 얼룩고양이와 놀고 있는 여인과 그 언저리의 묘사는
극히 정묘하며, 적색, 황색, 녹색의 원색이 좋은 조화를 이루고 있다.

부채를 든 소녀(일본풍 파리 여인), 1881

인상파 화가들 가운데 르누아르는 같은 세대 화가들을 휩쓸었던 일본풍의 영향을
가장 적게 받은 화가였다. 그러나 그 마저도 자신의 젊은 모델(여배우 잔 사마리
로 추정)의 손에 값싼 일본 부채를 들려 줌으로써 이 작품을 그리던 당시의 유행
에 굴복했다. 예쁜 소녀를 전경(前景)으로 놓고 상반신을 그린 이 작품은 뭔가
골똘하게 생각에 잠기고 있는 듯한 귀여운 얼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유화의 윗부분은 화려한 꽃들로 가득하여 눈부시다. 르누아르는 소녀와 꽃
이라는 두 가지 주제를 하나로 구도(構圖)하고 있다. 소녀나 꽃이 지니는 속성
(屬性), 즉 아름답고 밝은 면을 강조하고 있는데, 그 나름의 화사한 색감을 십분
강조할 수 있는 좋은 화재(畵材)가 아닐 수 없다. 딴은 이 두 소재란 르누아르를
지탱해 주는 주요한 것인데, 후기에는 이 두 주제가 제각기 독립하여 르누아르
예술로서 성숙해 갔다. 소녀와 꽃을 잇는 곳에 그려진 부채는 구도상 중요한 구실
을 하고 있다. 소녀의 둥근 얼굴과 둥근 부채가 짝지어 좋은 조화를 이루고 있다.

On the Terrace, 1881

Les Parapluies(The Umbrellas), 1881-82 and 1885-86

우산과 가을 옷의 회색빛 도는 파랑색을 기본으로 전체 화면의 색채를 조화롭게
구성하고 있다. 화면 전체를 주도하는 어두운 색조는 비가 마침내 그친 데 대해
안도하는 젊은 여성들의 밝은 얼굴과 균형을 이룬다. 화가가 실제로 초점을
맞추고 있는 부분은 화면 오른쪽 하단에 있는 어린아이이며 이 부분이 화면을
경쾌하게 만들어준다.

Dance at Bougival, 1883

Dance in the Country, 1883

이 작품은 <도시에서의 춤>과 짝을 이루는 작품으로, <부지발(Bougival)의
무도회>(1883)란 작품과 함께 시골 무도회의 정경을 담은 것이다.
<도시에서의 춤>의 시점이 보다 거리를 두고 있다면, 이 작품은 보다 가까운
시점에서 시골 사람들이 누리는 건강하고 격식을 따지지 않는 즐거움을 묘사
하고 있다. 그림 속의 모델들의 신원에 대한 의견이 오랫동안 분분했었는데,
춤을 추고 있는 남자는 아마도 르누아르의 친구였던 폴이고 여자는 르누아르의
부인인 알린느일 것이라고 추측된다.

Dance in the City, 1883

<시골에서의 춤>과 짝을 이루고 있는 작품으로, <시골에서의 춤>에 비하여
인물을 다소 멀리 잡았다. <시골에서의 춤>이 식사가 끝난 뒤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흥겹게 춤을 추고 있다면, <도시에서의 춤>은 두 남녀 모두 턱시도와
드레스, 흰 장갑에 이르기까지, 격식을 갖춰 차려 입었다. 시골 사람들에 반하여
도시 생활의 다소 인공적인 측면, 격식과 체면을 갖춘 생활을 섬세하게 묘사
하였다. 이 작품은 기법상 1880년대 초반 르누아르의 발전상을 보여준다.
꼼꼼한 데생에 기초한 형태와 색채의 단순화가 예전의 작품들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르누아르는 이태리 여행 이후, 라파엘을 비롯하여 고전주의 거장들을
재발견하고 데생에 대하여 새로이 자각하였다고 술회한 바 있다.
선과 데생, 형태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1887년 작 <목욕하는 여인들>(필라델
피아 미술관 소장)에서 절정에 달한다.

By the Seashore, 1883

바닷가에서 등의자를 내놓고 앉아 있는 한 귀부인을 그린 작품이다.
이 등의자의 느낌과 배경인 바다가 별로 어울리지 않은 것 같고, 의자의 묘사도
매우 사실적이고 딱딱해 보인다. 이처럼 전경(前景)과 배경 사이에서 다소간의
괴리감(乖離感)을 안 느끼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 도리어 일종의 효과가 되어
이 부인을 고전적인 분위기에 감싸이게 하고도 있다. 이는 아마도 르누아르가
이탈리아 여행을 할 때 받았던 고전 회화의 영향 탓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는 고전 회화가 지니는 딱딱한 형식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되면서, 색종(色種)
의 단순화와 형체의 정착화에도 진일보하게 된다. 부인의 눈언저리와 머리 부분
의 필법에도 고전적인 필촉을 느낀다.

Young Girl with a Parasol(Aline Nunes), 1883

Beach Scene, Guernsey , 1883

Seated Bather, 1883-1884

잔잔하게 시냇물이 쫄쫄거리는 계곡에서 막 목욕을 끝내고 상쾌한 기분으로 바위
위에 앉아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나부 상이다. 매우 자연스러우면서도
약간 야생적인 주위 분위기가 젊고 아름다운 여인의 육체와는 좀 괴리감(乖離感)을
느끼게도 하며, 따라서 얼핏 어울리지 않는 듯이도 보이지만, 르노와르는 이 대조
(contrast)를 역(逆)으로 이용하여 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좀 거친 터치로 바위들을 그리고 있어, 어떻게 보면 심산 궁곡처럼 후진 곳에서
이 욕녀는 너무나도 아름답고 살결이 고운 육체를 드러내고 있어, 더욱 압도되는
듯한 황홀감을 갖게도 한다. 이와 같은 나부의 기법(技法)은 고전파의 영향을 받아
명쾌한 표현으로 옮아가는 시절에 익힌 것이다.

The Bathers, 1884-1887

풍만한 세 처녀가 방금 물에서 나와 다정스레 뭔가 밀어를 나누고 있는데, 우선
이 세 욕녀가 그림의 전경(前景)을 차지하면서 삼각형의 구도를 이루고 있다.
이는 전통적인 삼각형 도법(도법)을 지키기 위해 기묘한 자세를 각각 취하게 한
것 같다. 이 그림은 르누아르의 추이(推移) 시대를 대표하는 최대의 걸작으로서,
이 시대의 특색을 유감없이 나타내 주고 있다.

르누아르는 세세한 터치만으로 화면을 채우는 색채 분할을 부정하고 명확한
형태를 가진 무게를 화면에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884년에서 1887년에
걸쳐, 르누아르로서는 이상하게 긴 시간을 들여 그린 대작인 이 작품이 바로
그러한 시도였다. 보통 르누아르의 이 시기는 그 명확한 선묘 표현 때문에 '앵그르
양식의 시대'라고 불린다. 사실 이 작품에서 보이는 나부의 표현은 앵그르의
<오달리스크>나 <터키 목욕>을 연상 시킨다고 할 수 있다. 그녀들은 마치 가위
로 오려낸 듯한 윤곽선을 지니고 배후의 풍경과 명확하게 구별된다.
그 결과 분명히 나부의 육체는 명확한 형태를 얻게 되었지만 너무나 배경과 떨어져
있어서 르누아르 특유의 원만한 느낌을 주는 표정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지어낸 듯
한 차가움이 있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물론 르누아르 자신은 그 점을 깨닫고 있었
을 것이다. 그가 이 작품 하나를 위해 3년이나 세월을 보낸 것은 틀림없이 아무리
해도 거기에 만족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뒤 르누아르는 다시는 이런
딱딱한 선묘 표현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즉 앵그르 양식의 시대는 르누아르
의 회화 양식의 발전에서 하나의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인상파의
색채 분할과 결별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단계였다. 앵그르 양식으로 인상파에
작별을 고한 르누아르는 그 뒤 선묘에 의해서가 아니라 색채에 의해 대상에 살을
붙여 가는 특유의 양식을 획득한다. 그에 따라 인물은 '실제로 쓰다듬을 수 있는'
실질적인 존재감을 얻음과 동시에 같은 색채 표현에 의한 배경과도 하나로 융합
되어 조화로운 가락을 울리게 되었다. 1892년에 그려진 <피아노 앞의 소녀들>
은 그 최초의 성과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Vase of Chrysanthemums, 1885

Girl with a Hoop(Marie Goujon), 1885

Young Girl Reading, 1886

Girls Putting Flowers in their Hats, 1890

Jeunes filles au piano(Girls at the Piano), 1892

자매인 듯한 두 소녀가 피아노 앞에 사이 좋게 붙어 있다. 흰 드레스를 입고 파란
허리띠를 매고 금발머리에 같은 파란색 리본을 맨 동생인 듯한 소녀는 의자에 앉아
한 손으로 악보대 위의 악보를 잡고 다른 한 손을 건반에 놓고 열심히 연습하고
있다. 목둘레에 흰 레이스 장식이 있는 붉은 옷을 입은 언니인 듯한 소녀는 그 옆
에 서서 한쪽 팔꿈치를 피아노에 걸치고 또 한 손으로는 동생이 앉은 의자의 등받이
를 잡은 채 동생의 연습하는 모양을 다정하게 지켜보고 있다. 그 언니의 느긋한
태도와, 입술을 반쯤 벌리고 진지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연습하는 동생의 표정이
보여주는 대조는 서로 다른 소리로 이루어지는 화음처럼 미묘하게 잘 어울리는
가락을 연주한다. 이러한 음악적인 효과는 이 화면 곳곳에서 발견된다. 피아노
받침대에 소용돌이 모양의 장식 무늬가 붙어 있다거나 악보대 옆 부분에 당초무늬
모양의 놋쇠 촛대가 달려 있는 것을 보면 이 피아노는 호사스럽다고는 할 수 없어
도 상당히 훌륭한 것으로, 소녀들의 옷차림과 더불어 부유한 중류 계급의 가정임을
짐작하게 한다. 피아노 위에 놓인 꽃병이나 초록색 커튼 뒤로 보이는 실내 가구 등
도 그 분위기에 잘 어울린다.

이 그림 앞에 섰을 때 우리는 곧 이 평화롭고 따뜻한 분위기 속으로 끌려 들어간다.
우리는 이 흐뭇한 정경을 멀리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가까운 거리에서 보고 있다. 귀를 기울이면 가만가만 두드리는 부드러운 피아노의
음색은 물론이고 소녀들의 고운 숨결까지 들려올 듯하다.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은
르누아르가 두 소녀라는 주요 모티프를 화면 가득 클로즈업해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르누아르의 작품이 우리에게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은 첫째, 이런한
클로즈업 구도가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인물을 등장시키는
군상 구도를 제외하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의 인물을 그릴 경우, 르누아르가 거의
언제나 모델의 모습을 상반신 또는 기껏해야 무릎 아래 정도에서 잘라 버리는 것
은 매우 암시적이다. 이러한 구도는 당연히 화가와 모델을 금방 손이 닿는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것으로 만든다. 일찍이 르누아르는 "내가 좋아하는 그림은 풍경이라면
그 속을 산책하고 싶어지는 그림, 나부라면 그 가슴과 허리를 쓰다듬고 싶어지는
그림이다."고 말했다고 하는데, 사실 그는 벨라스케스나 베르메르처럼 단지 대상을
바라보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그것은 그가 소년 시절에 도자기에 그림을
그려 넣는 직인이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도자기를 다루는 직인은
눈과 더불어 손의 감각이 예민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인상파 시대의 작품
을 제외하면 그가 그린 나부들은 언제나 도자기의 표면처럼 미묘한 광채를 지니고
있다. 이 작품에서도 소녀들의 드러난 팔뚝, 특히 비스듬한 언니의 두 손이나 피아
노를 치는 동생의 오른손 등, 빛의 반사를 받는 부분은 촉촉이 젖어 그윽하게 빛나
는 듯한 아름다움을 보인다. 르누아르는 소녀들의 이 팔을 그리면서 틀림없이
도자기 흙을 주무르는 장인과 같은 즐거움을 맛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따뜻하고 퐁요로운 인상은 무엇보다도 그 색체에서 온다.
여기에서는 화면 중앙에 앉아 있는 소녀의 옷과 그녀 앞에 놓인 악보의 깔끔한 흰색
을 빼면 거의 모든 부분이 녹색과 빨강과 노랑이라는 풍부하고 따뜻한 색조로
이루어져 있다. 두 소녀의 뒤쪽으로 우선 눈에 띄는 것은 반쯤 젖혀진 두터운
비로드 커튼인데, 이 커튼은 짙은 녹색을 기조로 하면서 빨강 및 노랑의 반사를
보인다. 그 커튼 뒤로 보이는 실내의 벽이나 가구는 빨강을 주조로 하며 이 빨강은
서 있는 언니의 옷으로 이어지고 또한 동생이 앉아 있는 의자의 쿠션이나 오른쪽
아래 구석의 악보가 놓인 가구에까지 이어진다. 갈색으로 그려진 피아노도 불그스
름한 기미가 있는 따뜻한 색채로 그려졌고, 또 마지막으로 그 피아노 위의 빨간 꽃
이 녹색 커튼을 배경으로 하여 강한 악센트를 더한다. 말할것도 없이 빨강과 녹색
은 보색 관계에 있어서 서로 가장 잘 어울리는 색이며, 화면 전체가 이 두 색을 기조
로 하고 있는 것은 이 장면의 따뜻하고 싱싱한 분위기를 반영한다고 하겠다.
게다가 화려한 금관 악기와 같은 노랑 색의 울림이 더해지고 곳곳에 맑은 파랑의
장식음이 연주되어 전체적으로 풍부한 색채의 하모니를 퍼뜨리고 있다.
더구나 조금씩이지만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파랑이, 예컨대 노란색 꽃무늬가
있는 꽃병의 파란 바탕이라든가 동생의 금발머리를 묶은 파란 리본이라든가 금색
으로 칠해진 의자 등받이와 파란 벨트라는 식으로 언제나 노랑 색과 짝을 이루어
등장하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파랑과 노랑의 산뜻한 조화가 화면을 다잡아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회화 표현 면에서 <피아노 앞의 소녀들>의 풍요하고 다채로운 세계를
가져온 것은 르누아르가 빨강을 주조로 하는 특유의 빛나는 양식을 확립한 1880년
대 후반이다. 1880년대 후반에 시작된 그의 풍요한 양식은 이 인상파 운동에 대한
참여와 탈퇴를 통해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인상주의의 체험은 르누아르에게 큰
의미를 지닌다. <피아노 앞의 소녀들>에서 보이듯 보색 효과를 이용한다거나 형태
의 윤곽선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터치를 구사하는 것은 인상파 시대에 체득
되었다. 그러나 1870년대의 대표적인 <물랭 드 라 갈레트>나 <그네>에서 볼 수
있듯이, 밝은 태양이 비치는 야외 풍경이라는 인상파 특유의 주제를 다룰 때에도
르누아르는 한결같이 거기에 인물을 배치하기를 좋아했다. 물론 인상파 시대에는
모네나 시슬리처럼 인물이 전혀 없는 풍경화도 그렸지만, 고운 피부 밑에 따뜻한
생명의 흐름이 고동치는 여성미를 각별히 사랑했던 르누아르는 나중에 스스로도
고백했듯이 본질적으로 인물화가였다. 그리고 그 점이 그가 언젠가는 인상주의와
결별해야 했던 근본적인 이유였고, 그의 본질과 인상주의 기법 사이의 모순이었다.
인상주의의 색채 분할은 모든 것을 빛의 반짝임을 환워하므로써 그리는 대상의
실질적인 무게와 형태를 희생시켜 버린다. 거기에서는 인물도 하늘의 구름이나
들판의 햇빛처럼 빛의 아지랑이에 싸여 고유의 존재를 잃어버린다.
모네의 <양산을 쓴 여자>는, 말하자면 인상파 기법에 의한 인물 표현의 최대한의
한계였다. 색채 분할을 더욱 밀고 나아가면 모네의 인물은 빛의 물결에 빠져
녹아 버릴 것이다. 사실 <양산을 쓴 여자> 이후로 모네는 거의 인물을 그리지
않게 되었다. 르누아르도 만약 모네와 같은 길을 택했다면 '막다른 골목'에 부딪
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1870년대 후반 르누아르의 작품에는 그러한 방향을
암시하는 작품이 몇 점이나 있다. 그러나 르누아르는 결국 그 길을 택할 수 없었
다. 모네가 시각의 영광에 모든 것을 걸었던 데 대해 르누아르는 줄곧 '실제로 손
으로 쓰다듬을 수 있을 것 같은' 육체 표현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Yvonne & Christine Lerolle Playing the Piano, 1897

A Seating Bather, 1903-1906

르누아르의 나부상은 후기에 접어들수록 그 육체의 질감 표현에 있어 풍만함을 보여
준다. 이 원숙한 욕녀상을 르누아르 예술의 진수(眞髓)를 보여 주고 있다.
젊고 건강해 보이는 나부의 자연스러운 포즈가 화면 가득히 클로즈업되어 빨강, 노랑,
녹색 등의 생생하고 순박한 색감을 미묘하게 살리고 있다.
부드러운 필촉이 신선한 색조로 다스려져서, 보드랍고 탄력 있는 여체를 회화적으로
완성시켜, 순수한 감각의 희열을 맛보게 한다. 대비(對比)되는 빛깔의 효과에 의해서
육체의 그 어떤 부분도 싱싱하고 발랄하고 탐스러운 풍윤한 감촉을 지니게 하고
있는데, 그런데도 결코 저속한 관능 같은 것을 느끼게 하지 않는, 프랑스적인 감각성
의 극치를 보여 주고 있다.

Tilla Durieux, 1914

Bathers(Les baigneuses), 1918

The Great Bathers(The Nymphs), 19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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