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미술사 참고자료/후기인상주의

서양미술사37 신인상주의:쇠라, 시냐크

AH101 2012. 2. 16. 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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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신인상주의(Neo Impressionnism: 新印象主義)


인상주의를 과학적 방법으로 추진하고자 운동이다.
G.
쇠라가 P.시냐크의 도움을 받아 창시하였으며, 쇠라가 죽은 뒤에는
시냐크가 대변자가 되었다. 빛의 분석은 인상주의의 수법을 계승하면서도
인상파의 본능적 ·직감적인 제작 태도가 빛에만 지나치게 얽매인 나머지
형태를 확산 시킨다는 점에 불만을 느끼고, 여기에 엄밀한 이론과 과학성을
부여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색채를 원색으로 환원하여 무수한 점으로
화면을 구성함으로써 통일성을 유지하였다. , 그림물감을 팔레트나 캔버스
위에서 혼합하지 않고 망막(網膜) 위의 시각혼합으로 필요한 색채를 얻는
방법이다. 예를 들면, 청색과 황색의 작은 점들을 수없이 배열해 나가면
(
점묘법) 시각적으로는 녹색으로 보이는 따위이다. 또한 형태나 구도에서 '황금
분할(黃金分割)'(분할묘사법) 등을 자주 사용함으로써 고전적인 회화에서처럼
안정성을 찾으려 하였다.

이와 같은 특징을 대표할 만한 작품이 쇠라의 《그랑드 자트섬의 일요일
오후》(1886) 시냐크의 《펠릭스페네옹의 초상》(90)이다.
신인상주의는 뤼스, H.크로스, D.피에, C.앙그랑, 리셀베르크 등의 동조자를
얻는 한편, 고흐, 고갱, 피사로 등에게도 한때 영향을 주었다.
또한 조형이론의 존중과 거기에서 찾아볼 있는 지성주의 구도나 형태의
기하학성 여러 특색은 20세기의 큐비즘과 오르피즘, 추상회화 등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회화운동의 이론을 체계화한 시냐크의 저서
《들라크루아에서 신인상주의 까지》(1899) 있다.

쇠라 (Georges Seurat:1859~1891)


신인상주의 미술을 대표하는 프랑스의 화가이다. 파리 출생이며, 1878
파리의 관립미술학교에 입학하여 앵그르의 제자 H.레만의 지도를 받다가
다음해 지원병으로 입대하여 브레스트의 해안에서 병역을 마쳤다.
파리로 돌아와서는 고전 작품을 연구하고 소묘에 힘을 쏟는 한편, 셔브뢸
헬름홀츠 등의 색채학과 광학이론을 연구하여, 1881년경 들라크루아의 작품의
색채대비와 보색관계를 해명한 글을 발표하여 세인의 관심을 모았다.
이러한 이론을 창작에 적용하여 점묘(點描)화법에 의한 최초의 대작
《아니에르에서의 물놀이 Une Baignade, Asnires(18831884) 완성
하였는데, 작품은 1884 살롱에 출품하여 낙선하였으나 앙데팡당전()
출품하여 반향을 일으켰다. 일을 인연으로 평생 화우(畵友) P.시냐크와
사귀게 되었다. 1885 《그랑드 자트섬의 일요일 오후》를 제작하여 다음
해에 열린 인상파 최후의 전람회에 발표하였다. 이것은 전작(前作) 수법을
한층 발전시켜 순수색의 분할과 그것의 색채대비에 의하여 신인상주의의
확립을 보여준 작품이었다.
밖에 《포즈를 취한 여인들 Les Poseuses(1888) 《기묘한 Le
Chahut
(18891890) 《화장하는 여인》(1890) 등의 작품이 있다.
모두 인상파의 색채원리를 과학적으로 체계화하고 인상파가 무시한 화면의
조형질서를 다시 구축한 점에서 매우 의의가 있으며, P.세잔과 더불어 20세기
회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전염성 후두염으로 32세의 젊은 나이에 파리에서
요절하였다.

인상주의적인 요소를 강하게 지니면서도 쇠라는 방법적인 면에서 동료 화가들과
다른 면을 추구했다. 쇠라는 신인상파 화가로 그의 눈에 들어오는 풍경의 순간을
화폭에 고정시키고자 했다. 선과 선색과 색의 조화를 누구보다도 많이 연구했던
화가다. 쇠라는 색채를 분할하여 작은 색점으로 그림을 만드는 새로운 화법을
창조해 냈다. 인상파 화가들이 빛을 표현해 내기 위해 즉흥적이고 직관에 의한
표현에 주력했다면, 쇠라는 이를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해석하는 점묘법을 이용
했다. 물론 쇠라에게서 빛의 화려함을 표현하는 인상주의의 기본 경향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쇠라를 인정한 화가들은 그의 뒤를 추종하게 되었고
이후 많은 점묘화가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푸른 옷의 농촌 아이,1882*

32살의 짧은 생애를 살다간 쇠라는 신인상주의의 선구자이며, 인상주의를
다시 프랑스의 뿌리 깊은 고전주의로 회귀시킨 화가이기도 하다.
1882
년작 <푸른 옷의 꼬마 농부> 초기의 풍경화에서 걸작 <서커스>
이르는 쇠라의 조형적 실험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데생은 이미 과감하게 생략되어서 소년의 얼굴 모습은 알아볼 없다.
소년의 푸른 옷과 녹색 배경에는 굵은 터치가 가해졌다. 아직 작은 점은
아니지만, 동일 계열의 덩어리들이 형태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회화
기법은 1884 <아니에르 강변의 미역 감는 사람들>에서 시작되는 본격적인
점묘법(Pointillism) 예견하는 것이다. 초기 작품에서 이렇게 투박하게
시작된 점들은 <서커스> 이르면 작은 색점으로 캔버스 표면에 흩어지게
된다.

*Bathing at Asniers,1884*

세잔느가 인상파 화가들의 수법과 질서에 대한 욕구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를 모색했던 반면, 쇠라는 인상주의 회화의 수법을 기반으로 해서 색채가
시각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과학 이론을 연구하며순수한 색채를 규칙적인 작은
점들로 찍으면서 작품을 모자이크처럼 구축해 왔다. 쇠라는 세잔느가 시도했던
것보다 더욱 형태를 단순화 시켜 수직과 수평을 강조했으며, 이러한 그의 화법은
자연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에서 점차 벗어나 흥미롭고 풍부한 구성을 화폭에
담아 내게 된다. 작품은 1884 살롱에 출품했으나 낙선하고 후에 '앙데
팡당' 전시회에 출품한 최초의 대작이며, 작품 전반에 걸쳐 여름날의 열기에
취해서 몽롱해진 느낌을 전해준다. 쇠라는 그림을 구상하면서 현장에 직접
나가서 예비 스케치를 했다. 그리고 과학적인 이론에 근거해 안정감 있는
구도를 창조했다. 많은 인물들이 놀고있는 화면이 주는 인상은 매우 질서
정연하다. 점묘법을 통해 빛나는 같은 밝은 교외의 풍경을 쇠라는
고요하게 붙잡아 놓고 있다.

*Sunday Afternoon on the Island of La Grande Jatte,1886*

쇠라는 미학에 관심을 가졌던 수학자 샤를 앙리의 영향을 받아 , 기하학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앙리는 음악에 관철되는 성격을 색과 선에 접목시켜 동일한
법칙을 규정하려고 시도했다. 쇠라의 주제는 인상주의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도시 생활을 즐겨 다뤘지만, 한편으로 상징주의자들이 애호하던 신비감과
분위기를 안에 부여했다. <아스니에르 강에서의 해수욕>으로 당시 젊은
화가들에게 중심적 인물로 부상한 쇠라는 바로 번째 대작인 작품에
착수했다. 모티브는 전작과 마찬가지로 밝은 야외에서의 인물들의 모습이지만
등장 인물의 수가 많아지고 땅의 부분에서는 빛이 닿는 부분과 그늘진 부분의
대비로 구도를 한층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작품이 제작될 동안 쇠라는
매일같이 아침부터 그랑자트 섬에 나가 여러 포즈를 현장에서 스케치하고
오후에는 모습들을 새롭게 조형적으로 만들어 화면에 배치하곤 했다.
쇠라는 1884 5월부터 작업에 착수해서 1985 3월까지 대강의 윤곽을
잡은 , 1985 10월에 다시 작업에 들어가 1986 5월에 이르러서야
작품을 완성하게 된다. 순색의 작은 반점의 병치로 더욱 완벽한 분할 묘법을
보여주는 작품은 정감적인 인상파를 극복하고, 고유의 과학적 인상파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의미에서 1886 8 인상파전에 반항을
일으켰다. 작품은 도시 사람들이 한가로운 일요일 오후를 강변의 공원에서
보내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인물의 수가 많아 매우 복잡하게 보이지만
정면, 측면, 뒷모습까지 다양하게 표현돼 있는 인물들은 마치 고대 이집트 벽화
처럼 엄숙하고 조용하며 운동감 없이 멈춰 있다. 바닥에 늘어져 있는 그림자도
자연의 빛으로 생겼다기보다 인공적으로 그렸다는 느낌을 주는데, 그림 안의
모든 수평, 수직선들은 수학 공식처럼 정확하고 이상적인 구도를 만들기 위한
것이다.

*Les Poseuses,1886-88*

*The Siene at La Grande Jatte,1888*

강변이나, 해안의 풍경을 즐겨 다루는 것은 인상파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쇠라의 작품 가운데서도 강변과 해안 풍경이 적지 않다.
<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에서 보는 시각에서 쪽으로 더욱 나간
장면이고, 화면의 중심은 강에 있는 돛배와 카누에 있다.
원경의 해안의 수평선과 근경의 둑이 보여 주는 사선은 쇠라의 풍경화에서는
자주 나타나는 구도인데, 수평과 수직, 그리고 사선을 통한 긴밀한 화면의
밀도를 엿볼 있다. 점묘는 더욱 세분화되어 마치 상감(象嵌) 하듯 색채를
조탁(彫琢) 넣었다. 화창한 봄날의 신록과 빛나는 , 그리고 돛의
조화는 풍부한 계절감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Port en Bessin, Sunday,1888*

쇠라의 다른 풍경들에 비해 포르 베셍의 일련의 해안 풍경은 복잡하고
그만큼 구성적 풍부함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눈에 뜨인다.
선창의 건물과 방파제 그리고 마스트가 만드는 직선의 구성에 의해 화면은
극도의 짜임새를 기하고 있는데, 위쪽의 펄럭이는 깃발의 다양한 곡선이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물에 비친 난간 구조물들의 그림자는 오후 한때의
항구의 정적을 더욱 실감 시켜주며, 물빛과 푸른 하늘에 피어오르는 구름의
투명함이 청징(淸澄) 세계의 결정(結晶)같은 고요함을 시사한다.
수직과 수평의 단정한 조화와 세밀한 점묘가 더욱 완벽성을 지향하고 있다.

*La Parade,1888*

<그랑 자트 > 자연광선에 이어 여기서는 인공조명이 등장된다.
가스등과 아세틸렌등은 유랑곡예단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파라드(La parade) 손님을 끌기 위한 간단한 코메디를 말한다.
쇠라가 보여주는 엄격하고 질서정연한 구도에 의해서 완성되는 조형적
구성은 견고한 현대 회화의 미래를 예고한다.
작품은 아마도 인체주의까지 예고하는 유일한 19세기 회화일 것이다.

*The Eiffel Tower,1889*

에펠탑은 1889 파리 만국 박람회 세워졌는데, 작품은 바로
해에 제작되었다. 그러니까 에펠탑을 소재로 작품들 중에서는 가장
일찍 그려진 작품이라고 있을 같다.
에펠탑은 건립 직전부터 세워지고 뒤로 굉장한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쇠라는 에펠탑으로 상징되는 근대 문명의 개화에 찬성하고 있으며
그것이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된 것이다. 에펠탑이 지니고 있는 구조적인
특성으로서의 수직과 수평, 그리고 사선은 쇠라의 풍경화에서 찾을 있는
기본적인 것이기도 한데, 쇠라의 구성적 특성을 떠올려 에펠탑의
작품화는 극히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것이라 생각된다.

*Young Woman Powdering Herself,1888-90*

쇠라의 애인 마드레느 노브로크를 그린 작품인데, 후기의 양식성이 농후하게
나타나 있다. 인물의 객관적인 묘사와 인물과 배경 전체를 에워싸는 분위기에
깃들어 있는 문양적(紋樣的) 패턴이 기묘하게 어우러져 일종의 음악적인 톤을
형성해 주고 있다. 점은 <샤이 >이나, <서커스>에서도 발견되는
공통성이다. 여인의 모습과 화장대의 모양, 그리고 배경의 곡선적 패턴이
상승하는 무드를 타고 있는데, 쇠라는 상승적 무드를 즐거움으로 대치
시키고 있다. 즐거움은 다른 실내 작품에서와 같이 유머를 곁들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화면 왼쪽 위에 그려진 꽃이 있는 곳에는 원래 쇠라 자신의
얼굴이 그려졌다가 지워 버렸다.

*Le Chahut(샤위 ),1889-90*

'샤위춤'이란 파리의 명물로 널리 보급된 '프렌치 캉캉춤' 말한다.
쇠라는 1888 이후 서어커스라든가, 호객하는 악사들이라는 일종의
도회지적인 주제로 일관했으며, 인공 광선의 조명에 비쳐진 흥행장의 군상을
모티프로 다루었다. 쇠라의 점묘가 장식적인 경향이 강해짐에 따라 작품에는
윤곽의 선이 살아나게 되었다. 곡선으로 이루어진 화면의 패턴은 미끄러지듯
리드미컬한 구도를 이루며 움직이는 인물들의 이미지를 정적으로 표현한 것은
쇠라 회화의 대표적인 특징이다.
밤의 유흥가를 모티브로 <파라드>와는 매우 다른 표현을 보여 주고 있다.
가로, 세로의 직선의 분할에 의한 화면 구성과 거기서 일어나는 정적인
무거움과는 대조적으로, 여기서는 곡선을 주로 채용한 화면의 패턴이 매우
리드미컬한 구도를 이루고 있다.
인물들의 표정과 그림 전체의 디자인에 깔려 있는 유머는 확실히 쇠라의 새로운
특징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런 특징은 아마도 당대의 종합주의, 아르누보 등이
추구한 종합성과 평면성, 그리고 양식화의 일반적 경향의, 극히 자연스런 반영이
아닌가 싶다. 환락가의 장면은 특히 세기 말의 중요한 소재이기도 하였는데
쇠라 역시 그런 시대적인 분위기에 어느 정도 공감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The Circus,1890-91*

쇠라의 마지막 작품이자 대표작이기도 하다. <샤위 >에서 보여준 바와
같이 직선적인 요소는 많이 후퇴하고 대신 원과 나선과 타원 곡선적인
요소가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다. 동시에 전보다 윤곽선도 뚜렷해진 것이
특색이다. 쇠라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서커스 메드라노에 열심히
다녔는데, 지금까지의 정지된 이미지와는 상반된 동적인 것에 대한 동경을
엿볼 있다. 그것은 수평과 수직 그리고 사선에 의한 밸런스를 유지한
균형감각을 추구했던 지금까지의 의도를 곡선적인 것으로 전환시키려는
의욕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시도는 그의 죽음으로 인해 중단되어
버렸다. 앙데팡당전( 작품이 출품된) 끝나기도 전에 그는 죽었다.

시냐크(Paul Signac: 1863~1935)


J.P.
기요맹의 제자이며 파리 출생. C.모네의 작품을 보고 감동하여 화가가
뜻을 세워 1883 20 아카데미 리브르 드방에 들어가 인상파의
화풍을 익혔다. 1884 1 앙데팡당전에 처음 출품하고 그때 출품된
G.
쇠라의 작품에 공감하여 그와 친교를 맺고부터는 색채의 동시대비의 이론과
기법을 연구하여 성과를 1886년의 인상파 최후의 전람회에 쇠라와 함께
발표함으로써, 신인상주의의 기치를 선명하였다. 그의 작풍은 과학적 점묘주의
에서 나중에는 쇠라의 점묘보다 점을 이용한 모자이크풍의 묘사법으로 변화
했는데, 풍경화가로서 각국의 바다 풍경, 특히 프랑스 각지 해항(海港) 풍경
그림에 특색 있는 작품이 많다.

앙데팡당전의 창설자의 사람이며, 1908년부터 종신토록 앙데팡당전의
회장을 지내면서 청년 화가들을 격려하였고, 신인상주의의 바이블이라고
일컬어지는 《들라크루아로부터 신인상주의까지 De Delacroix au
Neo-impressionnisme
(1899) 등의 저서를 남기는 생애를
신인상파 지도자로서 정열적으로 활약하였다.
주요작품에 《마르세유항의 풍경》(1905) 등이 있다.

*The Dining Room,1887*

점묘 기법을 이용한 작품으로 빛에 의한 뚜렷한 대비가 인물들에게서
나타난다. 저녁 식사후의 모습의 차분한 분위기다.

*Portrait of M.Felix Feneon in 1890,1890*

*Women at the Well,1892*

신인상주의 그룹의 이론가이기도 했던 시냑은 1899 『라 브루 블랑쉬』
지에 발표된 "으젠느 들라크루아에서부터 신인상주의에 이르기까지" 라는
탁월한 연구를 통해, 동시적인 콘트라스트(대비) 법칙을 기반으로 터치의
체계적인 분할이 나타나는 분할 묘법을 분석하고 있다. 조르주 쇠라가
신인상주의의 창시자라면, 시냑은 쇠라의 절친한 친구이자 지지자로서
신인상주의를 주도해 갔다. 1893 9 앙데팡당 전시회에 <우물가의
프로방스 여인들, 희미한 속의 게시판을 위한 무대 장치>라는 제목으로
출품됐던 작품은, 시냑의 분할 묘법 이론을 가장 표현한 작품 하나
이다. 그림에서 각각의 점은 과학적 이론에 따라 칠해졌고, 차분한 색조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그림은 오늘날도 날카로운 매력과 과격주의로 인해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키고 있으나, 당시에는 비평가들과 "시스템"이라는
생각을 비웃은 고갱에 의해서도 이해되지 못했다. 시냐크는 좀더 자유로운
스타일로 그들을 반박했으며, 후에 마티스와 같은 야수파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소나무,1892~93*

소나무 그루가 있는 평화로운 풍경을 대담한 붓의 터치로
표현하였다. 소나무와 뒤쪽의 산으로 원근감이 드러난 작품이다.

*Red Buoy,1895*

바다와 항해를 좋아했던 시냐크는 1892년에 정착한 트로페즈의
알려지지 않은 작은 항구에 매료되었다. 항구 주변의 높은 집들과 다채로운
색의 작은 범선들은 시냑의 작품에 지속적인 영감을 주는 원천이 되었다.
1895
년에 그려진 작품은 분할 묘법을 이용하면서도 신인상주의의
강제적인 이론들과는 거리를 두며 새로운 스타일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작품에서 시냐크는 작은 점을 이용한 터치를 포기하고 방형의 모자이크
같은 터치를 확대시켜자발성과 표현성을 강조하며 색채의 조화를 추구하고
있다. 흰색에 의해서 한층 돋보이는 푸른색과 오렌지색의 보색 대비를 통해
터치의 다양성을 취하고, 동시에 속의 붉은 부표를 드러내고 있다.
항구의 모습은 자잘한 붓터치와 강렬한 색채로 생동감을 느끼게 하고 있다.
당시 『르뷔 블랑쉬』의 편집장이었던 나타송은 작품을 두고 "시냑은 빛나고
떨리는 채색법에 도달했고, 화면을 가득 채우는 구성은 놀랄 만큼 능숙하고
침착하며, 경탄을 자아내게 한다" 찬사를 보냈다.

*항구,1899*

*The Papal Palace, Avignon,1900*

*마르세이유항의 입구*

*석양의 조각배*

*로셀 항구, 1921*

시냐크는 1884 앙데팡당전의 창립 멤버로서 참가한 이래, 1886
쇠라, 카미유 피사로 뤼시앙 피사로와 함께 신인상주의의 탄생을 알리는
마지막 인상주의자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한다.
점의 초상화를 제외하고는 시냐크는 거의 전적으로 풍경화에만 전념했는데
풍경화에 그는 쇠라의 분할 묘법을 적용시키고 있다.
시냐크는 이를 거의 모자이크의 요소를 연상케 하는 커다란 터치로 확대시키고
있다. 또한 그는 『으젠느 들라크루아에서 신인상주의까지』라는 이론서를
펴내 쇠라 미학의 후계자로 공인되었다. 하지만 실제 작품에서는 쇠라의
냉철하고 이지적인 구성보다 자유로운 구성과 따뜻한 색채를 썼다.
쇠라의 바다 풍경이 인적 없는 엄숙한 새벽의 상쾌함을 표출해 냈다면, 시냐크의
그림은 직접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 경우에도 보다 세속적인 활기를 느끼게 한다.
시냐크의 작품에는 바다나 항구가 자주 등장한다. 그는 화가인 동시에 뛰어난
뱃사람이기도 해서 배를 타고 많은 신선한 스케치를 얻었고 겨울철에는 그렇게
해서 얻은 스케치와 함께 아틀리에에서 대작 구상에 몰두했다.
그의 말년의 걸작 하나인 < 로셀 항구> 초기 분할 묘법과는 달리 훨씬
격정적이며 드라마틱하다. 장식적인 아라베스크와 형태의 단순함을 지향하는
취향은 여전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초기의 그림들과는 많이 다르게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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