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미술사 참고자료/후기인상주의

서양미술사33 인상주의 모네

AH101 2012. 2. 16. 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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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네(Claud Monet: 1840~1926) ★

Self-Potrait, 1917

프랑스 파리 출생. 소년시절을 르아브르에서 보냈으며, 그곳에서 화가 부댕을
만나, 외광(外光) 묘사에 대한 초보적인 화법을 배웠다.
19세 때 파리로 가서 아카데미 스위스에 들어가, 피사로와 사귀었다.
2년간 병역을 치르고 1862년 파리로 귀환, 글레르 밑에서 A.르누아르, A.시슬레
F.바질 등과 사귀며 공부하였다. 초기에는 G.쿠르베와 E.마네의 영향을 받아
인물화를 그렸으나 점차 밝은 야외에서 풍경화를 그렸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전쟁 때 런던으로 피신, 이때 J.터너, J.컨스터블 등의
영국 풍경화파의 작품들에 접했다. 이것은 명쾌한 색채표현이란 점에서 커다란
기술적 향상을 그에게 가져다주었다. 1872년 귀국, 파리 근교의 아르장퇴유에
살면서 센 강변의 밝은 풍경을 그려, 인상파양식을 개척하였다.
1874년 파리에서 '화가·조각가·판화가·무명예술가 협회전'을 개최하고, 여기에
12점의 작품을 출품하였는데, 출품된 작품 《인상·일출(日出)》이란 작품
제명에서 인상파란 이름이 모네를 중심으로 한 화가집단에 붙여졌다.
이후 1886년까지 8회 계속된 인상파전에 5회에 걸쳐 많은 작품을 출품하여
대표적 지도자로서의 위치를 굳혔다.
한편 1878년에는 센강변의 베퇴유, 1883년에는 지베르니로 주거를 옮겨
작품을 제작하였고, 만년에는 저택 내 넓은 연못에 떠 있는 연꽃을 그리는 데
몰두하였다. 작품은 외광을 받은 자연의 표정을 따라 밝은색을 효과적으로
구사하고, 팔레트 위에서 물감을 섞지 않는 대신 '색조의 분할'이나 '원색의
병치(倂置)'를 이행하는 등, 인상파 기법의 한 전형을 개척하였다.
자연을 감싼 미묘한 대기의 뉘앙스나 빛을 받고 변화하는 풍경의 순간적 양상을
묘사하려는 그의 작화(作畵)의도는 《루앙대성당》 《수련(睡蓮)》 등에서
보듯이 동일 주제를 아침·낮·저녁으로 시간에 따라 연작한 태도에서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이밖에 《소풍 The Picnic》 《강 The River》 등의 작품도
유명하며 만년에는 눈병을 앓다가 86세에 세상을 떠났다.

클라우드 모네는 회화에서 광학적(optical) 요소를 가장 깊게 탐구하고 평생
추구한 작가이다. 즉 그의 관심은 빛이었다. 우리가 색을 인지하고 사물의
형태를 이해하는데 광선은 절대적이다. 이제껏 광선은 그러나 좀 더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방식으로 이용 되었는데, 색 자체에 그다지 큰 영향을 주는 요소이기
보다는 그저 분위기를 바꾸어주는 것으로 인식되었는데, 이러한 경향을 대표
하는 것이 17세기 바로크 작품들이었다. 작가들은 인공 조명을 상당히
극적으로 사용함으로 화면에 빛과 그림자의 대비를 심화시키고 그로 인해
관객에게 생략된 부분에 대한 상상력을 증가시키기도 하고 보여지는 화면
안의 내용에 더 깊은 자극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모네의 관심은 달랐다. 그는 색채의 고유색이 실제 우리의 일상에서
거의 인지되지 못함을 깨달았다. 즉 우리 눈에 보이는 색들은 광선의 조건하
에서 수시로 변화하고 그것의 완전한 고유 색상은 실제 색상환에서 존재할 뿐인
것이다. 그렇다면 일상적으로 눈에 보이는 형태와 색은 순간적으로 파악되는
일시적인 것일 수 밖에 없고, 그러한 순간에 그것을 잡아내는 작업은 또 다른
'구체적 보기'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사물과 자연의 관계를, 그리고
실재하는 우리의 시선과 인지 방식에 초점을 맞추려는 시도이다.
이제 미술에서 어떻게 볼 것인가는 상당히 중요해지고, 그것이 광학이라는
과학에 의해 지지 받는다. 모네는 많은 수의 작품을 야외에서 제작하는데 그
효과가 과거 제작된 많은 작품들과는 상당히 달라진다.
예를 들어 바르비죵(Barbizon)파 작가들이나 코로(Corot), 보댕
(Eugene Boudin), 종킨(J-B Jongkind)등이 야외에서 많은 수의 작품을
그렸지만, 모네의 풍경화와 밀레의 풍경화를 비교해보면 후자의 광선이
인공적으로 작가에 의해 더해졌으며 화면을 황금빛으로 물들이지만 결코
화면을 밝게 만들지 못함을 알 수 있다.
'En Plein Air'(야외에서 직접 그리기) 방식은 과거에도 존재했지만, 19세기
후반에 이르면 더욱 활발해져서 이제 많은 작가들은 이젤을 들고 야외로 나갔고
자연과의 직접적인 교류가 회화에서 확립된다.
모네의 화면이 보여주는 순간적 붓질과 빠른 속도감으로 전개된 구성은 그가
모두 직접 야외에서 (en plein air) 그린 것이 아니라 대강의 스케치를 마치고
스튜디오에 돌아와 완성한 것인데, 모네는 이 효과를 잘 드러내기 위해 의식적
으로 빠르고 즉흥적인 것처럼 보이도록 붓질과 화면을 어느 정도 조절했다는
것이다. 그의 화면을 x-ray투사로 들여다보면 많은 층의 물감들이 덧칠해져
있는데 이런 덧칠의 효과도 작가가 의도적으로 구성한 것이다.
모네의 작업은 오랜 시간을 거치고 많은 붓 터치를 거쳐 완성되었으며 순간적
인상의 포착이라는 목표는 의도적이고 계산된 작업을 통해서 얻어졌다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어쨌든, 모네의 화면은 화려한 색감과 시각적 사실성에
가까워진 모던회화의 한 단면을 자세히 보여준다. 말기에 찾아온 시력의
상실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회화 작업에 몰두한 그는 20세기 회화의 서두를
이미 장식했다.

Farm Courtyard in Normandy(노르망디 농가의 안뜰), 1863

이 작품은 모네가 <인상, 해돋이>을 그리기 약 10년 전에 그린 풍경으로
어두운 색채를 주조로 하여 아직 사실주의적 재현을 지향하던 젊은 시절의
모네의 화풍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그림이다.
대표적인 인상주의 화가로 알려져 있는 모네, 르누아르, 바질과 같은
화가들도 1870년 이전까지는 쿠르베나 코로와 같은 사실주의 화가들의
영향을 받아 사실주의적인 미학을 추구했었다.
1864년 5월 모네는 파리를 떠나 바지유와 함께 노르망디 지방을 여행하며
작업을 하였다. 그들은 루앙, 생타드레스 등을 거쳐 옹플레르에 머물면서
작업하였다. 모네는 특히 근처의 생시메옹 농장을 즐겨 찾곤 했는데
이 작품은 그 무렵에 그려진 것이다. 전원의 목가적인 풍경이 안정된 구도
위에 전체적으로 차분한 색채를 통해 사실적으로 재현되었다.
풍경의 소재는 일상적인 현실이며 현실 공간은 균형을 이루고 있고, 그 속에
있는 물체들의 윤곽은 분명하고 견고한 형상으로 표현되어 있어, 아직
<인상, 해돋이>에서 볼 수 있는 모네를 짐작하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라앉은 색채속에 유난히 밝은 빛을 받고 있는 농가의 벽들은
분명 10년 후의 <인상, 해돋이>의 빛과 색을 예시하는 듯하다.

The Picnic(Study), Pushkin Museum, Moscow

이 작품은 1863년 마네로 하여금 세간의 비난의 대상이 되도록 만든 <풀밭
위의 점심>과 비슷한 주제를 재현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모네 역시 마네의 사실주의를 이어받아 야외의 밝은 빛 아래에서
인물에 접근하고 있다. 처음부터 1866년 살롱전의 출품을 계획하고 구상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인지, 이 작품의 인물들은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와는
달리 한결같이 산뜻하고 우아하게 차려입었다. 이 작품을 위해 친구인 바질과
화가인 쿠르베가 모델을 서주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아마도 오른편에 앉아
있는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가 쿠르베인 듯 보인다.
스케치 작업은 야외에서 이루어졌으나, 채색 작업과 많은 섬세한 부분들이
화실에서 이루어진 이 작품에는 여전히 어두운 색조와 그림자가 눈에 띈다.
밝은 빛과 그 속에 어우러진 풍경에 관심을 가지긴 하였지만, 넓은 색면으로
견고하게 잡은 형태감, 개략적인 붓질과 강한 콘트라스트 등에서 아직까지
모네의 초기 화풍이 돋보인다. 살롱에 출품하기 전, 쿠르베의 비평을 들은
모네는 이 작품을 살롱에 출품하지 않았다. 이 후 이 그림은 밀린 집세
대신에 집주인에게 맡겨지고, 지하실의 열악한 보관 상태는 그림을 손상
시켰다. 결국 파손된 그림의 오른쪽과 왼쪽 일부가 잘려져 나갔고, 현재
오르세 미술관에는 이 중앙 패널과 왼쪽 부분화만이 소장되어 있다.
모스크바 미술관에 푸슈킨 박물관에 소장된 이 작품의 습작으로 잘려 나가기
전의 본래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카미유, 녹색의 의상, 1866

야심적인 대작 <풀밭 위의 점심>의 완성을 한때 단념했던 모네가 이에 대신하여
불과 나흘 동안에 완성하여 1866년 살롱에 출품한 그림이다.
카미유를 모델로 하여 그린 첫 작품으로 이 작품을 준비하면서 그들은 사랑에
빠지기 시작하였다. 모델은 짙은 녹색 무늬의 의상에 모피(毛皮)가 붙은 검은
코트를 걸치고 모자의 리본을 오른손으로 쥐며 상체를 약간 화가 쪽으로 돌린
포즈가 특이하다. 마치 걷고 있는 한 순간을 포착한 듯한 이 그림은 쿠르베의
<아틀리에>에 나오는 인물 자세와 비슷하다. 이 그림에 보이는 철저한 사실
(寫實)과 중후한 색조에는 쿠르베의 영향이 적지 않음을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다른 풍경화와 함께 살롱에 받아들여져 비록 좋지 않은 벽면에 걸려
지기는 했지만, 많은 비평가들로부터 특유의 수법을 주목받기도 했다.

Terrace at St. Adresse(생 타드레스의 테라스), 1866

모네는 태양광 속의 풍경과 인물을 묘사하기 위해 부분적으로 색채 분할법을
사용하고 있다. 테라스, 바다, 하늘 등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눈 뒤 깃대를 이용해
합치되는 구도가 이색적이다. 꽃과 파도 등의 눈부신 묘사는 인상주의의 전통적
인 기법을 대변한다. 펄럭이는 깃발 아래로 햇빛에 흠뻑 젖은 이 그림에는 모네의
가족들이 등장한다. 그의 부친(앉아있는 남자)과 마리 잔 르카드르 아주머니
(중앙) 그리고 먼 사촌인 잔 마르그리트 르카드르가 신원을 알 수 없는 남자와
함께 서 있다. 3단으로 나뉘어진 화면 구도, 빛과 색의 강력한 대조, 그의 초기
관심사인 광선에 의한 극명한 화면 분할과 밝은 색의 사용이 화면을 효과적으로
구성한다. 구도 또한 그렇게 단계적이고 명확한 것이 장점이고 화면 안에 충만한
빛의 느낌도 아주 강하다. 형상들이 강렬한 햇살 때문에 둥그스름하게 보이지
않고 평탄하게 보이는 해안의 느낌을 포착하고 있다.

Women in the Garden, 1866~67
<정원의 여인들>에는 네 명의 여인들이 등장하는데, 이들 네 명의 모델은 한 사람
이다. 바로, 카미유. 이 그림을 그린 해 늦여름 모네는 빚쟁이에게 빼앗길 운명에 놓인
그림 2백 점을 찢어버린 후 집에서 도피했다. 하지만 여인들의 하늘하늘한 흰 치마폭
위에서 살랑거리는 햇살의 화사함을 보면서 당시 모네가 처한 경제적 어려움은 상상
조차 하기 힘들다. 당장 끼니 걱정에 한숨이 나오는 상황에서 모네는 어떻게 이토록
행복한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까. 타고난 재주라고? 글쎄다, 그건 전적으로 카미유만이
줄 수 있는 깊은 사랑과 신뢰감 때문이 아닐까. 필자가 여자이기에 우기는 것이 결코
아니다. 카미유는 모델 줄신이면서 후덕하기까지 했던 아내였다. 지인에게 보낸 모네
의 편지는 그 무렵을 이렇게 회상한다. "저는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합니다. 시골에 머물
기로 결정했습니다. 지금 작업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백내장으로 시력을 잃어가면서
도 붓을 놓지 못하던 모네의 말년 걸작 <수련> 연작을 보노라면 창작에 대한 불타는
화가의 열정과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무명 시절 겪은 모네의 설움은 눈이 시릴
만큼 아름다운 그림들과 만년에 얻은 부의 영광으로 고스란히 보상받았다.

생 타드레스 해변, 1867

1860년대 말경 모네는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그것은 빛과 색을 그곳에서
잡아 이것을 기록하는 일이었다. 그 때문에 야외에 나가 그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엉켜있는 구름 그리고 수면에서의 빛의 반사를 무시하고 실루엣으로
처리한 요트 등의 표현법과 색조 분할이 엿보이는 색채 표현법이 돋보인다.

Women in the Garden, 1866~67

모네는 이 작품이 그려지기 전 해인 1866년 여름날 파리 근교의 쉘부르에서
'정원의 여인들'을 구상하게 되고, 이듬해 작품이 완성되는 겨울까지 옹플레르의
자기 집 정원에서 작업을 하였다.
'풀밭 위의 점심식사'를 제작할 당시에 접했던 야외의 밝은 빛에 대한 매력으로
모네는 이 대형 작품 제작 시 캔버스 상단의 채색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집의
정원에 캔버스가 들어갈 수 있도록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캔버스를 설치 한 후
작품제작을 하였다. 이 작품은 그 제작에 있어서 몇 개의 애피소드가 있는데
가끔씩 방문했던 그의 동료이자 친구였던 쿠르베가 나뭇잎의 채색을 위해서
가장 자연스러우면서도 어울리는 빛을 끊임없이 기다리는 모네를 보곤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는 것, 또한 작품 안의 모든 인물들의 포즈와 배치를
그의 아내인 카미유가 일일이 옷을 갈아입으면서 섰다는 것 등이다.
모네는 이 작품 속의 풍경과 인물, 의상 등의 표현에 있어 강한 햇빛을 받아
생기는 색의 변화 및 명암의 극렬한 대비에 충실하고자 했다. 특히 카미유가
입고 있는 의상을 보면 그러한 그의 노력이 확연히 드러나고 있는데, 의상의
원색과 빛에 의해 생긴 어둠의 표현 그리고 어렴풋이 보이는 반사광의 특징적인
색감들이 바로 그것이다.

The Cart;Snow-Covered Road at Honfieur, with Saint-Simeon Farm, c.1867

he Bank of the Seine, Bennecourt, 1868

모네의 실험적인 작품 제작 의식이 돋보인다. 물이라는 존재는 모네를 비롯한
인상파 화가들을 끊임없이 따라다녔던 과제였다.
모네는 물의 공허함을 표현하기 위해 물이 지닌 고유색의 관념을 해방시키고
빛에 의해 반사든되는 주위의 색감을 받아들였다.

Madame audibert, 1868

이 작품은 모네의 초창기 작품들을 사주었던 르아브르의 미술 애호가
고디베르가 자신의 부인을 위해 주문한 초상화이다. 1868년 당시 모네 가족은
아들 장의 출생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경제 형편으로 매우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그러한 어려운 시기에 고디베르와 같은 고객은 든든한 후원자였다.
1866년 살롱에 출품한 <카미유의 초상(모네의 부인)>의 구도처럼 고디베르
부인은 옆으로 서서 길게 드레스 자락을 늘어뜨리고 있다.
모네는 이 그림에서 초상화라는 전통적인 장르를 받아들였으나, 과거의
고전적인 초상화들과는 다르게 장식과 치장을 제한하고 오히려 대담한 색면으로
형태감을 표현하고 있다. 견고한 형태감, 단순한 색면, 얼굴의 세부 묘사보다는
의상의 광택, 질감을 뛰어나게 살린 이 초상화는 마네의 화풍을 연상시킨다.

Grenouillere, 1869

라 그르누이에르는 세느 강변의 유명한 행락지로서 모파상이 소설 무대로도
자주 등장한다. 빛이 희롱하는 물의 표현에 적잖은 관심을 지니고 있었던
모네는, 그보다 먼저 이 놀이터를 찾아와 제작에 전념하고 있었던 르누아르와
1869년의 한 여름을 함께 보냈다. 이 작품은 그 무렵에 그렸던 현존하는 3점
가운데의 하나다. 화면 오른 쪽에 보트를 빌려주는 곳이 보이며, 여기서 다리를
건너 몇몇 사람들이 중앙의 작은 섬 그늘에 묘여 있다. 이 그림의 명암은 모두가
색채의 선명한 대비가 되어 빛을 반사하는 수면과 그늘의 인상을 명쾌하게 표현
하고 있다. 특히 리듬이 있는 재빠른 필촉은 물의 반사와 사람들의 움직임을 발랄
하게 포착하여 여름 휴일의 분위기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Flowers and Fruits, 1869

La Porte D'Amount, Etretat, 1869

The Thames at Westminster(Westminster Bridge), 1871

웨스트민스터 사원 아래쪽의 템즈강

The Tea Set, 1872

Regatta at Argenteuil(아르장퇴유의 요트 경주), 1872

모네는 보불전쟁 기간에 영국과 네덜란드를 여행한 뒤 1872년 종전과 더불어
아르장퇴유로 이주했다. 여기서 5년간을 가족과 함께 지내는 동안 모네의 집은
인상파 화가들의 집합장소가 되었다. 그 무렵 센느 강과 그 주변의 환경들은
화가의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그는 센 강에서 요트를 타는 사람들, 또는 센 강
주변의 산책로 등을 화폭에 담으면서, 강과 햇빛의 미묘한 변화를 포착하였다.
이 작품은 그가 센 강을 따라 내려가면서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만들었던 선상
화실에서 그려졌다. 이 작품에서 그의 관심은 수면 위에 반사된 요트의 흰 돛에
집중되어 있다. 수면에 비친 이미지들은 실제의 돛들과 구별하기 위하여 분명하게
분절된 붓질을 가하였다. 화면 전체를 지배하는 생생하고 경쾌한 분위기는 그려진
이 그림을 이 시기의 가장 대담한 작품들 중의 하나로 주목하게 한다.
르누아르나 시슬리, 그리고 나중에는 마네도 이곳에 찾아들어 함께 그림을
그렸다. 'Argenteuil'은 모네 작품의 주요 모티브가 된 곳으로 71년부터 78년
까지 작업했다. 도시 근교의 상업화 되어가고 레져의 중심지로 자리잡는 이 곳
에서 작가는 주로 다리, 철길, 기차, 공장의 굴뚝, 보트, 강, 그리고 넓은 하늘
등을 많이 그렸다. 아르장퇴이유은 발전하는, 모더니티를 얻어 가는 고장의
상징으로 보였다. 이 그림에서는 기교적 원숙미를 엿볼 수 있다. 흔들리는 수면과
물에 비친 돛의 이미지를 전달하기 위해 붓질과 색채를 분할하는 기법을 썼다.

Impression, Sunrise, 1873

인상파란 이름 얻게 된 계기를 제공한 작품으로 아주 유명하다.
부둣가에 해가 떠오르는 상황을 표현했는데, 어스름한 가운데 흐릿한 부두의
모습은 마치 미완성처럼 보이지만, 눈에 보이는 대로 표현한 순간의 인상을
가장 솔직하게 묘사했다는 점은 아주 새롭다.
흐릿한 풍경과 사물처럼 붓 자국은 상당히 거칠고 일관되지 못하며 설명적이지
않다. 이제 회화에서 '어떻게 볼 것인가'는 단순히 주제의 선택에서, 광학과
망막의 문제로 변화한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 사고 대상으로의 진행에서
분리되고, 이미지화 한다.

Poppies at Argenteuil(개양귀비 꽃), 1873

광활한 초원에 핀 무수한 개양귀비의 빨간 색채의 향연을 그린, 목가적이고
전원적인 서정이 감도는 그림이다. 모네의 초기작에 해당되는 34세 때의 작품
으로, <해돋이, 인상>과 함께 1874년 제 1회 인상주의 전에 걸린 작품이다.
모네는 이 그림에서 선연한 빛을 집요하게 추구하면서, 색채의 독자적 주장을
회화적 차원으로 표현하고 있다. 화면을 상하로 양분시킨 늘어선 나무들의
검푸름과 경쾌한 터치로 처리된 개양귀비의 빨간 반점, 푸른 하늘과 솜털 구름,
그리고 화면 중앙의 멀리 보이는 건물, 포즈를 취한 여인의 옷과 양산의 수색이
빛을 담뿍 받았으면서도 독립된 색채를 띠고 있다. 장대한 공간감과 더불어
색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듯한 초여름의 향연이다. 후일 <양산을 쓴 여인>
연작을 예고하고 있기도 한 이 그림은 야외 사생화, 데생의 무시, 풍경의 우위성,
미완성으로 끝난 것 같은 터치 등으로 인상주의의 모든 특징을 한눈에 읽을 수
있다. 모네의 그림은 밝고 부드러운 색조 속에도 다른 인상파 화가들에게는 없는
일종의 비극적인 울림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주제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화가의
생활이나 마음의 직접적인 반응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연에 대하여 비인간적
일 정도로 철저하게 자신을 의지하는 태도, 특히 흘러가는 시간의 지배에 대한
거의 절대적인 복종의 자세에서 오고 있다. 이 그림처럼 필촉의 분할이나 빛의
효과를 과도하게 의식하지 않고, 빠른 필촉으로 그린 작품에서는 특히 그런 느낌
이 강하다.

The Riverside Path at Argenteuil, 1873

1873년, 제1회 인상주의전이 열리기 바로 전 해에 그려진 이 작품은 인상주의
전 개최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모네가 관전인 살롱전에 더 이상 연연하지 않고
독립된 세계를 개척해 나가겠다는 결심을 굳힌 시기의 작품이다.
따라서 아르장퇴유 시기만이 아니라 그의 이전 작품 세계와 앞으로 전개될 대담
한 미학을 동시에 보여준다. 동양화를 연상시킬 정도로 공간을 비워놓은 이 작품
에는 풍경의 모든 요소가 들어 있다. 하늘과 구름, 강물과 강물에 드리워진 풍경,
포플라 나무들, 언덕과 멀리 보이는 성당이 있는 마을. 마치 눈부신 햇살이 개개
의 사물들을 구별하는 차이를 무화시키 듯 모든 사물들은 전체적인 조화를 위해
고유의 특성들을 잃어버렸다. 빛과 색이 데생을 압도하는 순간의 재현은 인상주의
중요한 미학을 엿보게 한다. 이러한 순간적이고 덧없는 자연에 대한 끊임없는
관찰과 연구는 이후 <포플러>, <루앙 성당>, <수련> 등의 연작을 통해서 발전
된다. 33살에 그려진 이 작품은 이후 추상회화를 연상시킬 만큼 혁신적인 모네의
예술적 모험을 예고하고 있다.

The Railway Bridge At Argenteuil(아르장퇴이유 철교), 1873

1860년대 이후 파리는 급속도로 근대화의 면모를 갖추어가고 있었다.
도로와 철도가 활발하게 건설되었다. 철도가 등장하자 센느 강 유역의 아르장
퇴이유와 파리는 쉽게 오갈 수 있게 되었다. 1872년부터 아르장퇴유에서 작업
한 모네 역시 주변에 보이는 다리와 철도 등을 종종 화폭에 담았다.
마치 카메라의 렌즈에 잡힌 순간처럼, 화면에는 철교를 지나는 기차가 비스듬하게
가로질러 배치되었다. 기차가 뿜고 가는 증기는 대기 속에 아스라이 스며들고,
철도의 교각 아래에는 물에 비친 다리의 이미지가 흔들리고 있다. 실재의 다리는
육중하고 견고하지만, 수면에 비친 다리는 물의 반사광 속에서 추상적인 이미지로
변화하였다. 모네는 근대성의 새로운 상징으로 떠오른 철도 그 자체에 매료된 것
이 아니라 흘러가는 구름과 그 속에 흩어지는 증기, 그리고 일렁이는 수면과 반사
된 이미지들에 매료된 것이다. 시시각각 변해 가는 물의 일렁임, 대기의 떨림,
수면에 반사하는 햇볕의 미묘한 변화 등 그 순간성에 대한 집요한 탐구는 모네를
인상주의의 대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The Luncheon(Monet's Garden At Argenteuil), 1873

정원에 점심식사가 차려진 이 집은 모네가 아르장퇴유에 정착하여 살던 곳이다.
식탁 왼 편으로 블록 쌓기에 정신이 팔려 있는 아이는 모네가 1867년 얻은
맏아들 장이다. 햇볕이 쏟아져 내리는 한 낮, 갖은 꽃들의 어울림으로 화사한
정원은 모네 가족의 행복한 순간을 느끼게 한다. 나무 그늘에 차려진 식탁에는
나뭇잎 사이로 쏟아져 들어오는 어른거리는 햇살과 나뭇잎이 만들어내는 그림자
가 경쾌하게 대조를 이룬다. 이미 식사가 끝난 듯, 화면 중앙의 식탁에는 냅킨이
헝클어져 있고 점심식사의 주인공은 찾아 볼 수 없다. 나뭇가지에 걸린 밀집
모자와 벤치에 남겨진 양산은 중심 인물이 빠진 공간의 미묘하고 신비한 분위기
에 가세하고 있다. 모네는 식탁보와 헝클어진 냅킨, 찬 잔과 포트, 과일과 투명한
유리잔 등 일상의 식탁에서 볼 수 있는 세세한 정물들을 놓치지 않고 섬세하게
그려 넣었다. 하늘도 보이지 않고 수평선이나, 길이 끝나는 곳도 보이지 않는
답답한 공간은 관람자의 시선을 저택 정면에 붙들어 두는데, 이러한 공간과 구도
는 화면에 묘사된 일상생활의 내밀한 정경을 부각시키고 있다.

Camille Monet at the Window, 1873

Camille Monet in the Garden, 1873

The Bridge at Argenteuil(아르장퇴유의 다리), 1874

Madam Monet and Child, 1875

Woman with a Parasol(양산을 쓴 여인), 1875
첫아들 장과 함께 모델이 된 <양산을 든 여인>이 제작된 지 4년 후, 둘째 아들 미셸을
낳고 시름시름 앓던 카미유는 자궁암으로 죽는다. 그녀 나이 서른두 살 때의 일이다.
그림이 안 팔려 등잔에 불을 켤 기름도 없이 살던 시절의 아내가 죽어가지만, 모네는
돈이 없어 병을 고쳐줄 수도 없었다. 카미유의 죽음은 모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고,
슬픔이었다. 나중에 모네는 저당 잡혀있던 카미유의 메달을 되찾아 함께 묻어주었다.

La Japonaise(Camille Monet in Japanese Costume), 1876

당시 인상파 화가들 사이에서 널리 퍼졌던 자포니즘(japonisme)의 영향을 받은
것을 잘 보여주는 그림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풍의 치장이나 스타일에 대한
관심은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선 상당히 보편화되어 있었고 (마네의 에밀 졸라의 초상
참고) 개인적, 예술적 관심이 회화에 적극적으로 표현된 예라고 할 수 있다.
카미유는 붉은 색의 기모노를 입고 춤 추는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초록색 벽을
장식한 부채가 매우 역동적인 느낌을 줘 고달픈 생활고나 가정적인 문제 등의 어려움
은 철저하게 감춰진 그림이다. 사실 이 작품이 그려질 무렵 카미유의 몸에는 병이 진행
되고 있었다. 그림 속 그녀의 얼굴을 보면 다른 그림에 비해 누렇게 뜬 듯하고 웃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상품광고에서 흔히 보는 모델들의 미소와 다를 바 없다.
아내에 대한 사랑스러움이 하나도 보이질 않는다. 즉, 그녀를 그려야 할 필연성이 전혀
느껴지질 않는다. 모네는 생활고에 허덕이다 보니 예술성보다 돈이 되는 그림을 그려
야겠다고 생각한 나머지 카미유에게 화려한 일본 옷을 입히고 병들어 누렇게 뜬 얼굴
이지만 억지 웃음을 지우게 했던 것이며 카미유는 이를 저항 없이 따랐던 그들의 처절
했던 상황이 스며있다.

Gare St.-Lazare(생 라자르역), 1877

파리에 있는 생 라자르 역의 플랫포옴으로 이제 막 들어오는 기차가 연기를 뿜어
낸다. 역사 위로 펼쳐진 하늘과 대기중의 구름, 수증기 등이 서로 섞이며 반투명
한 기운들의 혼란스런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시킨 것이 이 작품의 묘미 일 것이다.
분명한 경계가 포착되지 않는 하늘과 그 안의 여러 가지 기운들이 '인상'의 의미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분주한 기차의 움직임들이 파리의 역동성을 더욱 강조하면서
모네의 도시와 산업화에 대한 관심이 다시 한번 드러난다. 생 라자르역의 그림은
이외에도 7점이 더 있다.

Chrysanthemums(국화), 1878

모네가 가셰 박사, 그리고 화가이자 수집가인 친구 뮈레에게 쓴 편지들이 출간
되면서, 모네와 그의 작품을 사랑했던 수집가들에 대한 관계가 널리 알려졌다.
당시 경제적 궁핍으로 고통받았던 모네는 친구 뮈레를 비롯하여 마네, 르누아르
에게도 도움을 받았으며, 때로는 수집가들에게 헐값에 그림을 넘기기도 하였다.
깊이 없는 띠 모양 장식의 구성이 독창적인 이 작품은 모네의 작품 중 보기 드물
게 실내의 꽃을 그린 작품이다. 화상 뒤랑 뤼엘은 이 작품을 절대 200프랑 이하
로는 팔지 않으려 했으나, 빚에 쪼들렸던 모네는 1878년 12월 이 작품을 가셰
박사에게 헐값에 팔았다. 200프랑에 훨씬 못 미치는 50 프랑, 혹은 100프랑
정도에 팔렸는데, 세간에 말이 많았다고 한다. 모네가 이 시기에 그렸던 꽃 정물화
들은 평범한 소재를 택한 것으로서, 분명히 더 광범위한 고객을 끌기 위한 목적에
서 그려진 것이다. 1879년 아내 카미유가 죽은 이후, 모네는 생활고를 극복하기
위하여 정물화를 더 많이 그리게 되었다. 당시 풍경화보다는 정물화가 고가에
팔렸기 때문이다. 가셰 박사는 그다지 모네와 가까운 관계가 아니었지만, 이 작품
을 1951년 프랑스 국립미술관에 기증하면서, 모네와 자신과의 관계를 기념하고
자 하였다.

Rue Montargueil with Flags, 1878

(몽토르게유 가, 1878년 6월 30일의 축제)

이 작품은 1878년 6월 30일 파리 만국박람회의 개최된 날, 파리 거리의 축제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당시 파리는 보불전쟁 이후, 처음 맞는
국경일에 기쁨과 흥분으로 들떠 있었다. 1920년 모네는 그 날을 기억하면서,
인파로 가득 찬 거리를 걷다가 그림을 그릴 만한 발코니를 발견하고 바로 그 곳
을 빌렸다고 회상하였다. 모네는 역사적인 날을 기념하는 이 걸작에서 장중한
구성이나 돋보이는 영웅을 내세우지 않았다. 근대사회의 새로운 주인공인 시민
들의 모습으로 근대적인 역사화를 만들어냈다. 거리에 펄럭이는 삼색기는 모네가
꾸준하게 추구하였던 순간적인 움직임, 그 끊임없는 약동을 표현하기에 적합한
소재였다. 푸른색, 흰색, 붉은색의 경쾌한 병치, 짧게 끊어진 붓질들은 바람에
휘날리는 깃발의 순간적인 느낌을 잘 표현하고 있다.

Springtime At Giverny, 1880

해바라기, 1881

모네는 만년에 이르러 풀과 꽃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그런데 1880년 이전에 독립된 꽃의 정물과가 적은 것은 퍽 기이한 노릇이라고
말하는 평론가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모네는 야외에서 화가(畵架)를 세워 제작
하는 것을 신조로 삼고 있었던 화가였으므로, 아틀리에 안에서 차분히 앉아서
제작을 해야 하는 이런 장르에 종사하는 시간이 많지 못했던 것 같다.
모네는 변하기 쉬운 자연 현상과 기후에 집착하고 있었다. 하지만 첫 부인
카미유가 죽은 다음, 특히 1880년부터 82년에 걸쳐 이상하리만큼 꽃과 과일
등 정물화에 골몰했다. 아내를 잃은 슬픔을 달래기 위해 그는 아틀리에에서
감정의 응어리를 정물화에 쏟아 놓은 것이다.

Tulip Fields in Holland, 1886

The Artist's Garden at Giverny(지베르니, 모네의 정원), 1900

모네가 지베르니에 정착한 것은 1883년이다. 센 강의 지류인 엡트 천이 지나
가고 있는 북프랑스의 작은 마을은 이후 모네의 평생의 거처가 된다.
지베르니 정착 후 모네는 곧바로 드문드문 정원에 꽃과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그는 울타리를 제거하고 잔디와 정원수를 심었으며, 풍부하고 화려한 색채의
꽃밭을 만들었다. 이 작업의 규모가 커져서 정원사의 도움 없이는 관리할 수
없게 되었을 때에도, 모네는 수석 정원사에게 매일 지시를 내리며 정원사들을
가까이서 감독했다. 이 정원에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던 모네는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정원을 보여주며 기쁨을 느꼈다. 현재 이곳은 복구 공사를 거쳐
지베르니 미술관으로 지정되어, 많은 이들이 미술 순례에 오르는 명소가 되어
있다. 화가의 눈썰미로 조성된 지베르니 정원은 약 500여 점에 이르는 작품의
소재인 동시에, 그 자체로도 하나의 예술 작품이다.
이 그림에서 꽉 찬 느낌을 주는 그의 화원을 볼 수 있다. 정원은 자갈 길이 꽃밭
을 가로지르도록 설계되어 있었지만, 모네는 여기에도 꽃들을 채워 형식에
사로잡힌 설계를 부드럽게 바꿔야 한다고 고집했다. 연자주색 아이리스가 핀
이 장려하고 풍성한 강둑은 초록색 창문이 달린 분홍색 집으로 이어져 있고,
집은 잎새에 가려 언뜻 눈에 띨 뿐이다. 정원에는 군데군데 햇빛이 내리쬐고
자갈 길이 드리어진 나무 그림자가 연자주색 아이리스 사이에 푸른 얼룩을
만들어 놓고 있다. 모네는 북프랑스에서 그림을 그리던 초기부터 정원에 남다른
애착을 보였고, 그의 작품에서 정원은 항상 주된 묘사의 대상이었다.
모네에게 있어 정원은 쉼터나 집을 장식하는 부차적인 요소라기보다, 그 곳에서
미세한 자연의 섭리를 찾아냄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있는 별도의 공간이
었던 것이다.

The Garden in Flower, 1900

Haystack at Giverny, 1886

Woman with Parasol(오른쪽에서 본 양산을 쓴 여인), 1886

<오른쪽에서 본 양산을 든 여인>은 10여 년 전 그린 <양산을 든 여인>과 구도, 포즈,
기법 등에서 너무나도 흡사하다. 이 작품의 모델은 훗날 모네의 두 번째 아내가 된
알리스의 딸 쉬잔이다. 에프트 강둑 위, 드높은 하늘과 뭉게구름을 배경으로 젊은 쉬잔이
미풍에 스카프를 휘날리며 서 있다. 한번 맺은 부부의 연이란 얼마나 질기던가.
비록 사별은 했지만, 쉬잔의 모습에서 죽은 카미유를 떠올리며 모네는 몹시도 마음 아팠
나 보다. 쉬잔의 얼굴은 이목구비도 선명하지 않을 뿐더러, 카미유와 마찬가지로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 화가를 바라보지 않고 먼 곳을 응시하고 있다.

(P.S: 알리스 오슈데는 전쟁 등으로 인해 경제 사정이 나빠져 가세가 기울게 되고,
남편마저 사망하자 그녀는 모네의 집에 얹혀 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세 사람이 한
지붕 아래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이런 저런 말들과 복잡한 일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부유한 집안에서 충분한 교육까지 받아 지적이고 교양있는 알리스 오슈데란 이름의 이
여인 앞에서 카미유는 병든 자신과 비교하며 아픈 감정의 상처를 겪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알리스는 카미유를 정성껏 간호해 주었고, 그녀의 임종까지 잘 지켜주었다.
그리고 홀로 된 모네를 잘 돌보아 주며 그가 그림을 포기하지 않도록 도와주었다.
그 뒤 1892년 알리스와 모네는 결혼하였다.)

Young Girls in a Boat, 1887

Poplars at Giverny, 1888

Poplars on the Epte, 1891

모네의 포플라 연작(連作)에는 재미있는 사연이 있다. 어느 날 쥬베르니 근처
의 리메츠를 산책하면서, 에프트 강변에 줄지어 자란 포플라에 매료되었다.
그런데 한 포플라 나무에 붉은 천이 감겨졌고, 이 나무들이 경매에 붙여져 곧
근처의 제재소로 실려 갈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마네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포플라 나무의 경매 연기를 신청했는데 각하되었고, 그래서 입찰 희망자
를 찾아가 낙찰 가격보다 많은 돈을 줄테니 그림을 다 그릴 때까지 참아 달라고
간청했다. 포플라 연작은 이래서 탄생했다. 쭉쭉 솟아 오른 몸뚱이, 무성한 잎새,
이곳 햇빛이 닿으면 여러 색깔로 변한다. 그뿐이랴, 에푸트 강에 투영된 그림자
또한 일품이었지." 라고. 이 작품은 포플라 연작 중 초기의 것이며, 모네는 20점
이 넘는 연작 중에서 6점을 골라 1892년 3월 뤼엘 화랑에서 전시회를 가졌다.

Rouen Cathedral, Full Sunlight(루앙 대성당의 한낮), 1894

1890년대 들어 모네는 일상 생활이나 파리의 대중들을 상대로 한 그림들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하면서, 대성당 같은 중세의 건물들로 주제를 돌린다.
겉보기에 단단해 보이는 건물의 형태는 빛의 용해 작용으로 해체된 후, 크고 작은
분할로 나란히 포개어지기도, 뒤엉켜지기도, 두텁게 처리되기도 하면서 사물의
보다 깊은 곳을 나타내려는 터치와 반점으로 표현된다. 모네는 그의 연작중 가장
중요한 것의 하나인 <성당> 연작을 시도하여 시시각각 루앙 성당의 정면 모습을
약 마흔 점 정도 그리게 된다. 1892년과 1893년 겨울, 모네는 성당을 마주보는
한 건물의 창 앞에 자리잡은 후 실물을 직접 대하고 작업했다. 그리고 지베르니로
돌아가 기억에 비추어서 그 연작에 다시 손을 댄다. 새벽에는 분홍색, 회색 및
진줏빛 광채를 내다가 오전중에는 푸른빛 또는 보랏빛 그림자를 드리우면서 노란
빛과 오렌지 빛으로 물들여진 찬란한 흰빛을 띤다. 정오의 작렬하는 햇살 아래서
는 눈부신 백광으로 빛나며, 황혼의 그림자에 파묻히기 전 저물어 가는 강한 햇살
을 받아 다시 뜨겁게 타오르다가 마지막으로 회색, 푸른색, 보라색 속으로 성당의
모습은 해체되어 사라진다. 모네의 이 <성당> 연작은 가까이로는 세잔느의
<목욕하는 사람> 연작을, 멀리는 후일 팝 아트의 앤디 워홀 등에게 창작 동기를
제공하면서, 같은 사물의 미묘한 차이가 자아내는 효과가 하나의 모티브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인상주의 그림이 여전히 인기있는 이유는 널리 퍼지는 빛과
빛의 특성에 대한 과학적 연구 때문이다. 인상주의는 사진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나타났는데, 감판이 빛을 받아 그 순간의 이미지를 고정시키는 사진과 인상주의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다.

The Waterlily Pond(수련 연못), 1899

1890년 이후 모네는 손수 새 스튜디오를 지었다. 정원 설계를 계속하면서 그는
제2의 공간을 꾸몄는데 이것이 바로 그가 '물위의 정원'이라 부른 연못이다.
그 위로 다리 하나가 건너고 있는 이 넓은 연못은 일본 미술에 대한 모네의 관심
을 보여준다. 모네의 그림에 일본풍이 등장한 것은 1895년 초였지만 1898년
부터 1900년 사이 내내 그는 일본풍에 역점을 두었다. 역시 그 무렵에 그린
베퇴유 풍경화들과 마찬가지로 서로 다른 구도로 잡은 이 그림들의 펀형도 정방
형에 가깝다.

London: Houses of Parliament at Sunset, 1903

1870년 안개 낀 템즈 강의 모습을 여러 개의 화폭에 담았던 모네는 1899년
부터 1901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겨울을 런던에 체류하면서, 템즈 강을 중심
으로 워털루 다리, 차링크로스 다리, 국회 의사당을 주제로 100여 점에 가까운
그림을 제작했다. 모네는 상당히 빨리 변하는 안개의 인상을 포착하기 위해,
100여 점의 그림을 동시에 그렸다. 그러나 야외에서만 작업을 하는 것으로
알려진 모네는 대부분의 작품들을 런던에 머물며 완성한 것이 아니라 지베르니
에 가지고 돌아와서 완성시켰다. 이 작품은 성 토마스 병원의 발코니에서 템즈
강 너머의 국회 의사당을 그린 것이다. 붉은색과 연한 자주색, 금색 소용돌이의
미묘한 분위기가 화면 주변의 불꽃 모양의 회오리 안에 자리잡고 있다.
캔버스 전체가 깊은 안개 속에 침잠 되어, 희미하게 빛나는 붉은색의 태양은
수면에 반사되고, 고딕풍의 건축을 마치 환각처럼 푸르스름하게 떠올려 놓고
있다. 가로, 수직, 대각의 방향으로 희미한 물감의 흔적이 만들어 낸 템즈 강은
굴절감과 동시에 흐르는 안개의 인상을 주고 있다.

Water-Lilies 1(수련-구름), 1903

Water Lilies:Clouds, 1903

Water-Lilies, 1908

Palazzo da Mula at Venice, 1908

San Giorgio Maggiore in Venice at dusk, 1908

Water-Lilies, 1914

1899년부터 2년에 걸쳐 런던에서 모네는 터너의 작품 세계를 연구했고,
1908년과 그 이듬해에 베네치아에 머물 때는 물의 도시가 자아내는 환영에
이끌리기도 했다. 이 두 도시를 여행하며 얻은 빛과 반사에 대한 통찰은 수련
연작에 지속적인 영감을 주었다. 이 연작의 초기 구도에서는 수면에 제방이나
나무가 등장하기도 하고, 때로는 연못을 가로지르는 일본풍의 다리를 그려
넣기도 했다. 그러나 1904년부터는 연못을 둘러싼 풍경과 일본식 다리의
모티브는 완전히 사라졌고, "수면상의 변화"에 대한 통찰만 깊어졌다.
흘러가는 구름, 바람, 혹은 빛의 변화가 연못을 변형시키고, 끝없이 퍼진 환영
을 암시하기 위해서 수련은 종종 화폭의 끝에서 단절되어 있다. 모네는 수면과
지면 또는 수면과 하늘 사이에 생기는 경계선들을 제거했고, 이러한 구도는
완전한 정사각형을 구성하며 거꾸로 서 있는 듯한 이미지를 창출해 내고 있다.
모네는 앙드레 마송이 "인상주의의 시스티나 예배당"이라 했던 틀뤼니 공원의
오랑쥬리 전시실에 8개의 수련 연작을 기증했다.

Water-Lilies, 1913-1917

Water-Lilies, c.1917

Water-Lilies, 1917

Self-Portrait, 1917

모네의 이 자화상은 모네의 나이 77세 때에 그린 것으로, 불편한 시력으로 홀로
은둔한 채 <수련> 연작에 몰두하던 시기였다. 모네는 1911년 두 번째 부인인
알리스를 잃었으며 이어서 1914년에는 카미유와의 사이에 두었던 장남 장마져
앞세웠다. 1910년 이후, 프랑스 내의 비평가들로부터 격찬이 쏟아졌으며,
국외에서 역시 화상 뒤랑 뤼엘과 포터 파머와 같은 수집가의 도움으로 모네는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명성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가족과 많은 친구들
을 먼저 보내고 이제 생의 막바지로 치닫고 있는 노화가의 풍모에는 어딘지 서글
픔이 베어 있다. 모네는 이 자화상을 가깝게 지내던 지인 클레망소에게 선물하였
다. 1927년 모네가 사망한 지 1년 후, 이 작품은 클레망소의 기증으로 루브르에
소장되었다. 현재는 오르세 미술관에 옮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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