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미술사 참고자료/후기인상주의

서양미술사32 인상주의 마네

AH101 2012. 2. 16. 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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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과의 단절 : 19C ~ 20C

서양미술에서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는 다른 어느 시대보다도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 시기였다.
인류의 진보와 과학기술에 대한 신념은 유럽의 근대사회를 규정짓는 이념
체계로 18세기 후반의 계몽주의 철학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 기반아래 진보사관, 합리주의, 개인중심의 사고방식을 중심으로
하는 근대주의, 모더니즘은 이후 오랫동안 서양의 근대사회를 지배하는
가치관이 되었다. 시기에 들어오면서 유럽에서는 근대 사회로의 전환을
시사하는 여러가지 변화들, 남녀 평등 사상, 개인과 사회의 새로운 관계 설정
기존의 사회 체제의 붕괴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과정에서 문학
철학, 과학등 여러 분야에서의 선구적인 발전이 있었다.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스테판 말라르메St phane Mallarm , 뒤르켐Emile Durkheim, 아놀드
쉔버그Arnold Schoenberg 같은 선구자들은 기존체제와 권위에 반발
하였고, 전통문화와 과학예술이 더이상 새로운 시대를 대체할 없음을 예견
하면서, 새시대에 부응하는 미지의 영역을 개척하고자 했다.
이러한 시도는 모더니즘의 시원始原 되었다.

예술분야에서도 근대사회나 문화를 특징짓는 다양한 활동과 창조적인 사고가
뚜렷하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존의 아카데미적인 미술경향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사고를 한것은 철학적 배경외에도 미술 시장의 변화와 사진의 발달이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작품을 구입하던 고정적 수요층인 정부와 교회
혹은 귀족으로부터 화상과 개인소장가라는 근대적 개념의 미술 제도권이
형성된 것이다. 또한 사진의 대량 생산으로 일반인들에게는 그림보다 사진이
사실적으로 인식되었고 기존의 사실적인 회화는 설자리를 잃었다.
이제 화가들은 더욱 창조력을 발휘하여 사진의 영역 너머에 있는 진리를 표현
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이것은 화가들을 점점 시각적 사실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13.
인상주의(印象主義, Impressionism)


인상주의 운동의 시작은 마네를 중심으로 청년 화가들이 토론과 연구를
통하여 인상파 활동이 탄생되었다.
1874
나다르 사진관에서 전람회인 '화가, 조각가, 판화가, 무명
예술가협회' 1회전을 열었다. 이때 출품된 모네의 작품 <인상 해돋이>라는
풍경화의 제명을 따서 르루아라는 미술기자가 '인상파 전람회'라고 다분히
조롱섞인 기사를 <샤리바리지> 실은 것이 '인상파'라는 이름의 기원이 되었다.

인상주의는 빛의 변화에 따른 순간적인 형태의 변화, 색의 변화를 포착하려는
미술양식을 말한다. 본대로 그린다는 인상주의 정신은 빛에 따라 순간적으로
변화하는 깊이없는 사물의 인상을 그린 것이다.
태양광선의 미묘한 조화를 쫓기 위해 이들은 야외에서 그림을 그렸으며 그래서
야외주의(플레네리즘 혹은 외광주의) 만든다. 튜브형 물감과 접히는 이젤의
발명은 그들의 야외작업을 가능케 해주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태양광선은 빠른
필치와 붓놀림을 요구하고 빠레뜨에서 색을 섞기 보다는 직접화폭에서 시각적인
착시효과를 노리며 순색을 이용한 색채분할법(필촉분할법) 사용하는
망막적인 효과를 노린다.

인상주의자들은 사실주의의 외계에 대한 충실성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더욱 충실해야 대상으로 삼은 것이 빛이다.
빛을 통한 자연은 결코 고정된 것이 아니었고 형태도 일정치 않았다.
인상주의자들의 본대로 그린다는 인상주의 정신은 빛에 따라 순간적으로
변화하는 깊이 없는 사물의 인상을 그린 것이다.
이와 같은 인상주의가 출현하는데는 사진기의 출현에 따른 재현적인 사실적
묘사가 회화에서는 이상 의미가 없게 되었음을 입증해준다. 그래서 관심을
갖는 것이 시각 세계이고 시각 세계의 민주성은 근본적으로 <시각의
근본적인 혁신> 핵심이 된다.

변화한 시각 방식을 받쳐줄 색채학의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발달은 독특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인상주의 화가들에게는 과거의 주제, 개념 대신에
모티브라는 새로운개념이 생겨나고 결과 국수주의적인 과묵한 주제가 아닌
새로운 변화된 세계를 들떠있는 파리의 풍물이 주된 노래가 된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주제를 태양광선으로 이야기 있다면 변화하는 주제를
담아내기 위한 연작형식이 유행한다. 인상주의자들은 외적세계에 찾아낸
어떠한 편견, 선입관에서 완전히 개방된 순수한 상태에 있는 시각적 진실을
추구하였다.

서양미술에서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는 다른 어느 시대보다도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 시기였다.
19
세기 후반 주로 1860~90년대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인상주의는
자연을 하나의 색채현상으로 보고 빛과 함께 시시각각으로 움직이는 색채의
미묘한 변화 속에서 자연을 묘사하는데 있었다. 당시의 실증주의와 사실주의의
흐름을 따라 대상을 어디까지나 눈에 보이는대로 재현하려는 운동이 일부
청년작가들 사이에 일어나 옥외로 나가서 태양의 직사광산 아래 진동하는 자연의
순간적 양상을 묘사하는 일이 시도되었다.

마네(Edouard Manet: 1832-1883)

프랑스 파리 출생의 화가로 전통과 혁신의 중개역활을 인상주의의
개척자로 불린다. 유복한 법관의 아들로 태어나 처음엔 아버지의 반대로
견습선원으로 있다가, 1850 겨우 퀴튀르의 아틀리에에 들어갈 있었다.
그러나 아카데믹한 교습에 반발하고 루브르 박물관의 고전회화를 모사하면서
할스나 벨라스케스 네덜란드 화가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그후 살롱에 여러번 출품했으나 그의 작품은 이미 그만의 독특한 화풍을 확립한
후여서 그시대에 비해 대단히 이색적이며 혁신적인 작품으로 여러차례 낙선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그의 작품이 살롱에서 비난을 받으며 오히려 세간의 주목을
끌어 그의 표현기법이 오히려 신선하고, 참신한 이미지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후 피사로, 모네 , 시슬레 청년화가들 사이에서 후에 인상주의의 길을
여는데 기둥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아카데미즘의 공인을 기다리며 적극
참여하지는 않았다. 만년에는 류마티즘으로 고생하며 신체적 피로가 적은
파스텔화에 전념하기도 하였다. 세련된 도회적 감각의 소유자로 이전의 어두운
화면에 밝음과 활기있는 현실성을 예민하게 포착함으로서 전통과 혁신을
연결하는 중개 역할을 훌륭히 해낸 화가였다.
근대회화의 기틀을 마련하는 새로운 양식의 작가로서 회화의 평면성을 추구
일상의 주제를 채택하여 새로운 회화언어를 추구(무엇을 그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그리느냐의 문제)

*뛸르리의 음악회,1862*

뛸르리 궁전의 정원에서 벌어진 호젓한 음악감상 모임에서 마네의 친구들인
파리의 신사, 숙녀들이 정겹게 모여있는 광경을 그린 작품은 야외에서
풍경이나 인물을 직접 대상으로 그려본 하나의 시험작이라고 있는데
자연의 볕살을 표현하기 위해 무척 고심한 흔적이 엿보인다.
왼쪽에 짝안경을 쓰고있는 이의 뒤쪽에 있는 이가 마네 자신이다.

*거리의 여가수,1862*

파리의 거리를 걷고 있던 마네는 카페에서 나오는 거리의 여가수를 보았다.
순간 예술적 가능성을 포착한 마네는 그녀에게 다가가 모델이 되어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그녀가 너무도 완강하게 거절을 하는 바람에 하는 없이
다른 모델을 통해 그가 보았던 포즈를 만들어 냈다. 마네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소재에서도 얼마든지 예술적인 미를 발견할 있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걸작은 당시의 아카데믹한 인습에 대한 반항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The Spanish Ballet(스페인 발레), 1862*

보들레르가 마네에게 말했다. '마드리드 왕립 극장 무용단의 인기가 대단한데,
한번 구경해봐.' 마네는 1862 8 12일부터 11 2일까지 무려 80 동안
롱런한 '세빌리아의 ' 공연을 보고 감동, 장면을 화폭에 담기 위해 특별히
교섭, 공연이 없는 3 동안 단원들이 포즈를 취해 주기로 약속받았다.
마네는 친구의 넓은 아틀리에를 빌려 스케치했다. 늦게 그림을 유채로
완성시켰다. 마네의 열성도 대단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마네를 위해 사흘씩이나
포즈를 취해 성의도 무던하다. 친해지기 쉬운 정경을 사실적인 수법으로 그렸는
간결, 자유로운 필촉의 리듬이 발레의 리듬과 어울린 작품이라고 말할
있다.

*스페인 무희 롤라 발랑스,1862*

작품은 <스페인 발레> 등장했던 롤라 멜레아라는 무용수를 그린 것이다.
그녀는 마드리드 왕립극장의 마리아노 캄푸르비 무용단의 수석 무용수였으며
세칭 롤라 발랑스라고도 불렸다. 마네는 여인을 통해 당시 스페인 사람의
전통적인 모습을 표현하려 했으며, 고야의 <알바 공작 부인> 본떠 작품을
제작했다. 스페인 여인에게서 착상을 얻은 보들레르는 마네를 위해
사행시를 지었고, 그의 유명한 시집 『악의 꽃』에 수록하게 된다.
여인의 스커트는 빨간색, 검은색, 노란색, 녹색 등의 원색으로 대담하게 채색
되었으나, 이와 대조적으로 팔과 다리는 상아색으로 부드럽게 칠해졌다.
상아색은 어둡게 처리된 배경과 스커트의 현란함으로 인해 보는 위치에 따라
신비감과 미묘함을 주고 있다. 1861 살롱전에서 <스페인 가수> 수상의
영예를 안았던 마네는, 계속 스페인 풍이 유행하자 1862 그림을 살롱전에
출품했다. 하지만 형태나 음영을 중요시했던 전통적인 채색법에 어긋난다며
평론가들에게 "잡탕 "이라는 혹평을 받았고, 결국 낙선되고 만다.

*Mlle Victorine in the Costume of an Espada, 1862*

*Bull-Fighting Scene(투우), 1865-66*

*풀밭위의 점심식사,1863*

작품은 당시로서는 상상할 없는 충격적인 연출로 인해 1863 낙선작
전시회에 출품되자 거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맹렬한 비난과 항의가 쏟아졌다.
정작 마네 자신은 겉으로만 근엄한 척하며 규범 속에 묶여 사는 당시 사회
전반의 상황을 꼬집는 한편, 나무가 우거진 풀밭 사이로 들어오는 빛의 강렬한
인상을 표현하고자 했던 신념으로,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에는 전혀 아랑곳
하지 않았다. 기존의 회화가 정확한 데생과 완벽한 색의 재현에 충실한 것에
반해 여기에서는 명암의 강렬한 대비와 빛에 의해서 사물의 형태가 만들어
지고 화면의 구도가 형성되고 있다. 빛을 받는 나부의 여인, 벗어 놓은
옷가지와 과일바구니, 그리고 뒷부분의 웅크린 여인과 주위의 밝음이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면서 우거진 나무로 만들어진 어두움과 대치하고 있다.
어두운 부분에서의 사물의 형태는 간결하게 처리되고 있고, 반면에 빛을 받는
얼굴이나 , 정물 등은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어, 그가 빛을 주제로서 표현
하려 했던 의도를 엿볼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등장 인물들의 포즈와
구성이 마네의 창작이 아니라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디가 제작한 동판화 작품
'
팔리스의 심판'에서 따왔다는 것이다.

*올랭피아,1863*

순백의 침대 위에 누운 채로 화면 밖에서 자신을 보고 있는 관람객을 응시하고
있는 듯한 작품 역시 발표와 동시에 '풀밭 위의 점심식사'보다 더한 비난과
사회적인 물의를 야기하였다.
당시의 사회에서 여인의 누드란 신화에서나 등장하는 여신의 이상화를 위한
것에 국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완전한 나체인 도발적인 자태의 창녀처럼
묘사되어진 작품으로 마네는 당시의 전통과 도덕적인 관념을 깨트리고 있는
반사회적인 작가로 취급받기까지 하였다.
친구인 아스튀르크의 시에서 제목을 따온 작품 속에는, 정면을 응시하며
가로로 길게 누워 있는 올랭피아와 그녀에게로 배달되어진 듯한 꽃다발을 들고
있는 흑인 여자, 그리고 침대 귀퉁이에 앉아 있는 검은 고양이가 흑백의 강렬한
대비를 이루면서 자리하고 있다. 배달된 꽃다발을 전해주기 위해 눈치를 살피는
흑인 여자의 표정과 마치 귀찮은 듯이 꽃을 외면하고 있는 올랭피아의 표정이
묘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Course De Chevaux A Longchamp,1864*

*The Fifer,1866*

강력한 색채 대비로 화면에 독특한 효과를 주는 방법을 이용했으며 손과 부분을
빼고는 그림자가 전혀 없는 평면적인 묘사로, 인물의 실재감을 표출시킨, 마네의
재주의 자부심을 읽을 있는 대표작의 하나, 검정, 빨강 안되는 색면이
각기 다른 음을 내는 듯한, 이른바 음악적 효과를 겨냥한 점에 주목해야 한다.
배면처리도 원근법이나 수평 감각을 배제, 종이를 바른 '없어진 배경' 이러한
단순함이 오히려 실재감을 강조한 효과로 나타나고 있다. 대상을 이와 같은 '공기로
감싸는' 수법은 그가 1865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을 방문, 벨라스케즈의
작품을 모사하면서 배웠다는 사실이 마네의 편지에서 밝혀졌다.
<
피리 부는 소년> 1866 살롱에서 거부되자 소설가 에밀 졸라가 자청해서
변호에 나섰다. 모델은 마네와 보들레르의 친구 근위대 사령관이 데려온 근위군의
소년병이다.

*Still Life with Melon and Peaches,1866*

*Woman with Parrot,1866

*The Universal Exhibition, 1867(1867년의 파리 만국박람회), 1867*

건물, 인물, 거리, 동물 등의 고유색(固有色) 한낮의 햇볕을 받아 검푸르게 변한
색채의 매치(match) 취급하여 색채 상호간의 탄력성 있는 관계를 회화적 차원에서
소화시킨 작품이다. 그림 오른쪽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아들 레옹 코에라이고, 높이
있는 기구는 사진작가 나다르가 타고 파리 상공을 공중 촬영한 기구인데, 파리
만국 박람회를 구경하는 여유있는 시민들의 동세(動勢) 아름다운 풍광을 그린,
이른바 '현실적인 일상성'이란 마네의 묘화 태도(描畵態度) 나타낸 작품이다.
나폴레옹 3세가 1867년에 마련한 만국 박람회를 능가한 ()박람회를 대작으로
그린 마네의 시대 감각을 그림에서도 엿볼 있다.

*The Execution of the Emperor Maximilian(막시밀리언의 사형집행), 1867*

*발코니,1868*

머리에 꽃장식을 하고 양산을 여인이 마네의 부인이고, 옆이 부인의
음악친구이며 인상파 화가인 베르뜨 모리조, 남자는 화가인 기르메, 어둠속에
있는 소년은 아들로 전해진 레옹 코에라이다.
작품속의 사람의 시선이 각각 다른 방향을 보고, 표정도 다르며 대화조차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구도이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대부분이 기이한 작품이라고 생각한 그림이다.

*Portrait of Emile Zola,1868*

*The Reading(독서), 1869*

마네 부인이 그의 아파트에서, 책을 읽어 주는 아들의 목소리에 만족해하고 있는
행복한 정경이다. 살갗이 비치는 하얀 , 커튼, 의자의 커버 백색을 주조로
그림으로 화면 전체에 전개되는 백색의 다양한 반영(反映) 잔잔한 물결처럼
화사하고 음악적이다. 마네는 여인과 10 이상 동거 생활을 하면서 부모와
친구들이 눈치를 채지 못할 정도로 극비에 붙였고, 부친이 사망한 3 후에야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그림에서 책을 읽고 있는 아들 레옹 코에라는
마네가 죽은 후에도 표면적으로는 동생으로 행세, 진짜 마네의 아들인지, 부인의
동생인지, 남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의부 자식인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마네는 1858년에서 80년까지 부인을 여러 그렸는데, 작품도 중의
하나이다.

*불로뉴 항의 달빛,1869*

한때 선원이 되려고 했던 마네는 견습 선원의 자격으로 브라질 등지로 나가는
외항선을 타기도 했다. 작품에서 마네는 자신이 동경하였던 바다와 항구를
소재로 삼았다. 마네는 1869 여름, 불로뉴항에 머물면서 그림을 그렸는데
항구의 호텔 방에서 창문을 통해 풍경을 직접 그렸다.
밤에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대상의 세부가 어둠 속에 묻히기 때문에 모험에
가까운 일이었다. 마네는 빛과 어두움에 대한 시각적인 탐구를 위하여 이러한
모험을 주저하지 않았다. 마네가 달밤에 포착하고자 것은 형태나 양감
원근법이 아닌 달빛이 자아내는 효과였다. 만월이 비추는 부둣가는 밤이 깊지
않은 새벽녘이나 저녁 무렵처럼 밝게 빛나고 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쌓여
있는 선박들과 인물들, 그리고 달빛을 환하게 받은 지면, 음영의 대조가 강렬
하기까지 하다. 과감하게 생략된 데생과 어두운 색과 밝은 색의 분명한 대조
결과 그림은 평면적으로, 미완성된 듯한 분위기를 띠고 있다.
이러한 특징들은 과거 미술과의 단절을 뜻하는 것이다. 종래의 화가들이 중간
색조를 꼼꼼하게 단계별로 칠하면서 명암을 표현하고, 3차원적인 형태감을
중시하였던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회화 기법이다.
순간적인 빛의 효과를 포착하는 초점을 그림은 모네의 <해돋이, 인상>
앞서 빛과 자연 대상을 진지하게 탐구한 작품이다.
작품은 항구와 , 빛이라는 모티프 뿐만 아니라 순간적인 느낌을 잡아
내고자 시도 등을 함께 공유하고 있다. 1 인상주의전이 1874년에
열렸던 것을 생각할 , 1869년에 그려진 작품은 인상주의의 선구적인
작품으로 있다.

*The Luncheon in the Studio, 1869*

좋아하는 모티브를 자유롭게 그려 넣은 마네의 고심작이다.
그림의 왼쪽 테이블 위에 있는 투구, 장검, 검은 고양이, 그리고 뒤의 화분,
마네 부인이 들고 있는 물병과 식탁 위의 여러 가지 메뉴가 인물 못지 않게
흥미를 끈다. 마네는 검은 고양이를 그리기 위해 16번이나 습작을 그렸을
정도이다. 노랑, 검정, 하얀 색과 엷은 푸르름이 놀랄 정도로 훌륭한 하모니를
이루고, 부드러운 음영(陰影) 화면 전체를 뒤덮어 아틀리에의 격조를 높이는
한편, 방안 공기를 아늑하고 차분하게 그리고 친밀감이 감돌도록 표출시켰다.
마네는 1868 여름 불로뉴에서의 스케치를 토대로 파리에서 그림을 완성
시켰는데, 전면의 소년은 그의 아들로 전해지는 레옹 코에라, 뒤가 부인,
식탁에 앉은 사람은 친구인 오귀스트 르스랭이다.

*에바 곤잘레스의 초상, 1870

모델 에바는 파리 명문의 딸이다. 여인은 나중에 유명한 판화가 게라르와 결혼,
규수 화가로 활약한다. 당시 프랑스 문예가협회 회장이었던 소설가 엠마뮤엘
곤잘레스의 딸인 그림은 에바가 '40 이상 포즈를 취했다.' 불평한 난산
난산 작품인데, 은백색의 복장, 백장미, 깨끗한 살결, 그림 속의 하얀
백색에 의한 바리에이션이 아름다우며, 이러한 백색의 반복을 검은 머리, 검은
눈동자, 조여 검은 등으로 화면을 짜임새 있게 조화시켰다. 1869 3월에
시작하여 다음해 살롱 마감일인 3 12일에야 완성시킨 작품은 살롱에서 악의
혹평을 받았으며, 이후 에바에게 기증되었다.

*Berthe Morisot Holding a Bunch of Violets,1872*

*생라자르역(The Railway),1872-73

*해변에서,1873*

마네는 1873 살롱전에 <비어 > 출품해, 네덜란드 화풍을 제대로 옮긴
작품이라 하여 보수적인 평론가들에게서 호평을 받았다.
<
비어 > 조각가 에밀 벨로의 초상화로서, 1872 네덜란드에서 프란스
할스의 <술고래> 대한 마네의 경애심을 담고 있었다. <해변에서> 역시 그림
속의 모래알에서 찾아볼 있듯이, 할스의 예술적 감각에 대한 정취를 감지할
있다. 마네의 풍경화는 풍경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언제나 거기에
인물을 배치하고 있다. 으젠느 부댕이나 모네가 그린 해변과 비교해
마네의 <해변에서> 화면 대부분을 인물들이 차지하고 있다.
작품은 1873 7 마네가 가족과 함께 베르크쉬르메르에서 3주간
체류하는 동안 그린 그림으로, 해변에서 책을 읽고 있는 부인 쉬잔과 남동생
유진을 담고 있다. 수평선은 그림의 윗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하늘을
배경으로 선박의 닻이 드문드문 점을 그리고 있다. 마네는 모래와 하늘뿐인
회색빛 세계에 붉은 선을 가미하면서 북해의 해변을 밝은 분위기로 바꿔 놓고
있다.

*아르장퇴유, 1874*

외광 표현(外光 表現) 시도한 작품으로, 1875년의 살롱에 출품했으나 세느강
물빛이 너무 푸르고 원근법이 무시되었다는 악평을 받았다.
새로운, 밝은 회화의 창시자로 추앙받던 마네는 1874 여름 아르장퇴유에 있는
모네의 작업실을 찾아 모네와 함께 옥외 제작(屋外製作) 했는데, 그림은
때의 작품 중의 하나이다. 차분한 필촉으로 세분화된 분할(分割), 색채와
반짝임 등을 빠짐없이 포착하려고 노력 흔적이 보인다. 마네는 1874
봄에 열린 1 인상파전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뜻을 같이하는 화우들, 특히
모네의 열성적인 제작 태도에 이끌려 그림을 정성껏 그려 살롱의 심판을 받고
했던 것이다. 마네는 평론가가 물이 푸르게 보이는 때가 있으면 푸르게
그려도 좋다는 평을 받고 자신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Claude Monet Working on his Boat in Argenteuil, 1874*

*Boating, 1874*

<아르장퇴유> 함께 1874년에 옥외 제작한 작품이다. 그러나 작품은
<
아르장퇴유>처럼 섬세한 분할, 색채와 빛의 반짝 임보다는 외기(外氣) 감각을
색조로써 표현하려고 그림이다. , 백색을 주조로 , 흑색에 악센트를
시원스러움이 트인 잔잔한 수면과 해조를 이루고 있다. 또한 그림에서 빼놓
없는 것은 재미있는 구도인데, 배의 후미(後尾)만을 남긴 대담한 절단이나,
중앙에 흰옷의 남자를 앉히고 좌우에는 저쪽을 응시하는 여인과 돛대의 토막만
으로 균형을 잡은 등이 인상적이다. 사람만의 세계, 그것도 방해꾼이 없는
끝없는 바다 위에서의 만남을 통하여 마네는 헤아릴 없는 사랑과 행복감을 회화
차원에서 만끽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Portrait of Mme. Manet on a Blue Sofa, 1874*

푸른 椅子 앉은 마네 부인, Pastel

파스텔화() 지닌 표현력에 마네가 어느 정도 정통해 있었는가를 전해 주는
작품이다. 백색, 회색, 청색, 남색의 보드라운 뉘앙스와 상호간의 메아리가 무지개
처럼 아름다워, 마네 부인을 선녀처럼 만들었다. 작품은 양식적(樣式的) 견지
에서 1878년도에 제작했다는 주장과 마네 부인의 모자, 의상 등으로 미루어 보아
1874
경에 그렸다는 주장이 맞서 있는데 어느 쪽이 맞는 것인지 아직 분명치
않다. 그림을 최초로 입수한 사람은 드가인데, 드가는 1870년대 초반부터
파스텔화를 그리기 시작했고 물감의 효과와 매력을 여러 차례 설명, 파스텔화를
그리도록 권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스테판 말라르메,1876*

마네가 스테판 말라르메를 처음 만난 때는 1873년이었다.
당시 마네는 <비어 > 살롱전에서 상당한 호평을 받으면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이름 없는 시인이었던 말라르메는 마네의 재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의 그림에서 분노나 당혹감을 느낄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예술에 요구되는 순수한 방식에 따라 당대의 총체적 시각을 보이고
있다." 마네는 그에게 감사했으며, 때부터 사람은 두터운 우정으로
맺어지게 되었다. 마네의 임종을 맞았을 , 그의 부인 쉬잔은 말라르메에게
"
당신은 그의 가장 좋은 친구였고, 역시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했습니다" 라는
편지를 보냈다.

*나나(Nana),1877*

파리의 상류층 사회의 퇴페풍조를 전하는 작품으로, 속옷바람의 육욕적인
여인이 거울 앞에 서서 루즈를 바르고 있다. 의자에는 야회복 차림의 중년
신사가 화장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여인의 생명력이 응축된 튀어나온
엉덩이와 엉덩이를 탐욕스럽게 바라보는 사나이와의 대조가 해학적이다.

*만취한 여인,1877*

마네는 만취한 여인을 처절하리만큼 외로운 상으로 부각시키는데
천재적인 재능을 나타내 보였다. 마네는 당시의 파리 시민들의 생활상을
그리기 위해 카페, 비어홀 등에 자주 출입했고, 술집에서 창녀, 취녀, 취남
무희, 악사, 여종업원 등을 그렸으며, 시대감정을 나타내는 이러한 걸작들
중에서도 작품은 대표작으로 꼽히고 있다.

*맥주잔을 들고 있는 여급,1878*

마네의 후반기 작품으로 웨이트레스와 전면의 손님의 생생한 묘사를
중심으로 빛과 흐름에 따라가는 색채를 풍부하게 만들었다.
그는 구성의 면밀함보다 빛에 의한 강조를 통해 시원한 화면을 연출해
내고 있다.

*가슴을 내놓은 블론드 아가씨,1878*

귀스타브 제프로아가 "살아있지만 언젠가는 죽어야만 하는 육체의 아름다운
상징이라고도 있는 꽃과 과실을 연상케 하는 그림"이라고 표현한
작품은 마네의 그림 가운데서도 특히 유명한 작품의 하나로서, 그가 곧잘 쓰는
크림빛이 아닌 불그스레한 피부의 아가씨는 한결 고혹적이다.

*Le Journal Illustre,1878-79*

*In the Conservatory,1879*

*Le Journal Illustre, 1878-79*

*로슈포르의 탈출,188081*

19세기 후반에 일어났던 사건을 다룬 작품은 후일 마네가 전해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그린 것이다. 소재를 제공한 로슈포르는 19세기 후반부터
20
세기 초까지 프랑스에서 활동한 언론인이자 정치가였다.
나폴레옹의 2제정을 반대했던 로슈포르는 파리 코뮌 시기에 코뮌을 지지
했다는 이유로 1872 누벨 칼레도니아로 유배되었다. 그는 투옥된 2년이
지난 1874 섬을 탈출하였다. 이후 스위스에 숨어 지내던 로슈포르는
1880
년에 사면을 받고 귀국하였다. 작품의 소재가 실재 사건을 토대로
것은 틀림없지만 사건에 대한 정확한 정보나 혹은 암시적인 비판, 시사성을
찾을 없다. 이는 마네가 정치인의 극적인 일화에 어떠한 중요성도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극적인 탈출을 감행한 로슈포르가 누구인지, 함께
탈출을 돕고 있는 인물들은 누구인지, 그러한 것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물결치는 파도가 화폭의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그림의 주된 모티프는
탈출자가 아니라 일렁이는 파도이다. 바다를 강조함으로써 작은 배는 더욱
위태롭게 부각되어서 탈출자의 고독이 강조되고 있다. 모든 인상주의자들에게
있어 바다는 가장 중요한 묘사 대상이었다. 모네가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종킨트로부터 처음 그림을 배운 것도 바로 프랑스 북부의 해안이었다.
19
세기 후반, 바다는 단순한 자연 공간이 아니라 해수욕 붐과도 관련된
현대적이고 도시적인 삶이 이루어지던 공간이기도 했다.
인상주의자들에게 바다는 눈부신 빛의 공간이자 동시에 해수욕이나 해변
산책을 있는 여가를 즐기는 도시 공간이기도 했다.
1880
년대 초에 그려진 마네의 그림은 인상주의의 터치가 눈에 띠긴 하지만
그림의 분위기에 있어서는 인상주의와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마네의 바다는 좌절된 꿈의 공간이었다. 어린 시절 선원이 되기 위해 번이나
시험에 응했지만 실패했고 사이 견습 선원으로 일을 하기도 했던 마네에게
바다는 남다른 공간이었던 것이다.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바다가 인상주의자
들의 바다보다 어둡고 해변의 사람들도 우울한 분위기를 띄고 있는 것은 아마도
이러한 연유인지도 모른다.

*Lady with a Fur,1880*

*The Model for the Folies Bergere Bar, 1881*

*Irma Brunner,Woman in a Black Hat,1880-82*

*폴리베르제르의 술집,1882*

마네의 말년을 장식하는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중앙의 우울한 표정을 지닌
젊은 여인과 옆에서 뒷모습을 보이고 있는 여인, 실크 모자를 남자 등의
배치가 재미있다. 우울에 젖어 있는 여인과 서로 공유하기를 꺼리는 배경의
화려함은 마네의 근대적이고 도시적인 세련된 감각을 드러낸다.

*Roses in a Champagne Glass, 1882*

*Madame Michel-Levy, 1882*

*The House at Rueil, 18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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