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미술사62 다다이즘: 피카비아 아르프 외

서양 미술사 - 62(다다이즘: 피카비아, 아르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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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비아(Francis Picabia: 1879~1953)


파리에서 출생한 스페인계 프랑스 화가로 파리의 미술학교를 졸업한
A.
시슬레풍의 인상주의로부터 시작하여, 점차 입체파의 영향을 받아들이고
다시 황금분할파에 참가하였다가 1912 오르피즘으로 이행하였다.
1 세계대전 때는 수차 미국여행을 하여 아머리 쇼에 참가 출품하였으며
M.뒤샹과 공동으로 다다이즘운동을 준비 창립하였다.
1916
바르셀로나로 옮겨 전위잡지 391》을 창간하고, 1919 다시
파리로 돌아와서는 본격적인 다다이즘운동을 전개하고이어 A.브르통의
초현실주의운동에도 참가하였으나, 갑자기 전통적 구상회화로 복귀
하였다. 2 세계대전 후는 추상회화로 돌아가 초비합리주의(超非合理主義)
제창하는 그는 모던 아트의 조류 모든 분야에 걸쳐 활약하였다.

아르프(Jean Arp: 1887~1966)


독일계 프랑스의 조각가, 화가로 1887 스트라스부르그에서 태어나
1966
바젤에서 사망했다. 바이마르 미술학교와 파리의 아카데미 쥘리앵
에서 배웠다. 1912 독일 표현파의 뮌헨 '청기사(靑騎士)' 운동에 참가
하였고, 1 세계대전 중에는 취리히에서 시작(詩作) ·삽화 ·콜라주 ·채색
릴리프 등과 같은 다채로운 작업으로 다다이즘 운동을 일으켰다.
1920
년에 다다이즘 운동과 함께 독일의 쾰른으로 옮긴 M.에른스트와
공동으로 콜라주를 제작하였다.
, 1925년에는 파리로 진출하여 초현실주의 운동에 참가하고, 1930년에
추상파 단계인 '추상 ·창조' 그룹에 들어가는 다양한 편력 끝에 독자적인 길을
찾아갔다. 동안에 회화에서 부조(浮彫) 거쳐 환조(丸彫) 다다른 그의
작풍은 극도로 단순화된 형태이기는 하지만 초현실주의와 추상주의 중간인
유기적 추상으로, 탄력이 넘치는 근원적인 인간의 생명력을 보여주었다.
때문에 추상예술 대신 구체예술(具體藝術: 아르 콩쿨레)이라는 명칭을 즐겨
썼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조각과 회화의 중간에 있는 릴리프식인 것과 순연(純然) 조각이 많다.
2 세계대전 중에는 스위스에서 활동하였고, 전후에도 많은 회화와 조각을
발표, 1954년에는 베네치아의 비엔날레상을 받았다.
그의 작품에는 하버드대학 대학원의 벽면 부조(1950) 《여자의 토르소》
(1953),
파리 유네스코 본부의 구리부조[銅浮彫:58] 등이 있고, 콜라주 ·
절지(切紙: papiers dchirs) 기법의 창안자이기도 하다.

*Collage with Squares Arranged According to the Laws of Chance, 1916-17*

*Enak's Tears*

*Coquille Crystals*

*Constellation with Five White Forms and Two Black, Variation III, 1932*

*Head and Shell (Tête et coquille), 1933*

*날개가 있는 존재,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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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61 (다다이즘: 마르셀 뒤샹)

서양 미술사 - 61(다다이즘: 마르셀 뒤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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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다다이즘(Dadaism: 제1차 ~ 2차 세계대전 사이)
- 허무주의, 기존의 조형 이론을 무시한 반문명, 비합리적 예술운동

Cover of the first edition of the publication, Dada.

Edited by Tristan Tzara, Zurich, 1917

전쟁은 인간의 가치관을 크게 변화시켰다. 인류 문명은 끊임없는 변화와 발전의
수레바퀴를 돌리며 더욱 편하고 아름답고 고귀한 위치로 전진해 왔지만 전쟁은
이 모든 것을 외면하고 파괴 해버렸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
이후 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시달렸던 지구촌 곳곳의 예술세계는 그 후유증으로
몸살을 앓아야만 했다. 급기야 전쟁이전의 인류를 찬양하고 보존하려했던 그
모든 문명의 결과와 정신은 부정하는 현상이 싹텃다. 그것이 다름아닌 '다다
(Dada)'였던 것이다.
다다이즘(Dadaism)은 1915~22년 경 스위스, 독일, 프랑스 등의
유럽과 미국에서 일어났던 허무주의, 기존의 조형 이론을 무시한 반문명, 비합리
적 예술운동을 일컫는다. 다다(Dada)는 조형예술(造形藝術) 뿐만 아니라 넓게는
문학, 음악의 영역까지 포함한다. 미술을 포함해서 제1차 세계대전을 낳게 했던
전통적인 문명을 부정하고 기성의 모든 사회적, 도덕적 속박에서 정신을 해방,
개인의 진정한 근원적 욕구에 충실하고자 했던 것이 이 운동의 근본 정신이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부정하는' 전적으로 무정부적인 이 운동의 이름을 지을 때,
프랑스어 사전을 펼치고 그들이 본 첫 번째 단어를 선택하기로 하는데, 이 단어가
바로 '다다(Dada)'였다. 다다란 본래 프랑스어(語)로 어린이들이 타고 노는
'목마(木馬)' 또는 '장난감 말'를 가리키는 말이나, 이것은 다다이즘의 본질에
뿌리를 둔 '무의미함의 의미'를 암시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다다이즘은 처음 스위스의 취리히에서 시작되었다. 1916년 2월 작가 겸 연출가
인 H. 발(Hugo Ball:1886~1927)이 취리히에 카바레 볼테르(Cabaret Voltaire)
를 개점하고 시인인 T. 차라(Tristan Tzara:1896~1963), R. 휠젠베크(Richard
Huelsenbeck:1892~1974) 등과 함께 과거의 모든 예술 형식과 가치를 부정하고
비합리성·반도덕·비심미적(非審美的)인 것을 찬미하였다. T. 차라는 '새로운 예술가
는 항의한다. 새로운 예술가는 이미 설명적, 상징적인 복제(複製)를 그리는 것이
아니다. 돌이나 나무나 쇠(鐵)로 직접 창조한다. 특급기관차(特急機關車)와 같은
새로운 예술가의 유기체(有機體)는 순간적인 감동을 싣고 모든 방향으로 향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선언하였다.
여기에 오늘날 말하는 자유분방한 오브제(Objet)가 등장하는데, 그것들
은 문자 그대로 중립(中立)을 선언하면서 스위스에 모인 망명자들의, 밖에서의 참혹
한 살육을 의식한 발언이며, 그들은 종래의 예술 작품이 외적(外的) 폭력에 대해
얼마나 무력했는가를 전쟁 체험을 통하여 느끼고 있었다고 할 것이다.
잡지 《다다》가 발간되고 우연을 이용한 추상시, 음향시가 발표되는 등 취리히
다다는 1920년까지 계속되었다. 다다는 당시 사회적인 분위기에 편승하여 유럽
전체와 미국으로 급속히 퍼져 나갔고, 결국 현대 미술의 흐름까지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독일에서는 반전운동과 코뮤니즘에 결합된 베를린 다다가 1919년에 결성
되었다. 퀼른(Cologne)에서는 아르프(Hans Arp:1886~1966), 에른스트(Max
Ernst:1891~1976), 요하네스 바르겔트(Johannes Theodor Baargeld:1892~
1927)에 의해 전람회가 개최되었다. 하노버(Hanover)에서는 쿠르트 수비터스
(Kurt Schwitters:1887~1948)가 메르츠 빌트(Merz-Bild)를 창안했다.
1920년대 초기에는 다다운동이 거의 전 유럽과 미국에까지 퍼져 1922년 파리에서
대규모의 국제전이 개최되었다. 그러나 1922년 즈음에 이 운동은 이미 쇠퇴하기
시작해, 1924년 초현실주의가 발족되면서 해체되었다.

이들 작품의 공통적인 경향은 기계같이 잘 짜맞추어진 이성에 반대하고 우연성을
강조하는 예술을 추구하였다. 우연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그들은 소위 레디
메이드(Ready-Made)의 오브제 또는 움직이는 오브제, 콜라주(Collage) 또는
앗상블라주(Assemblage)로 통하는 메르츠 빌트(Merz-Bild) 등을 시도하게 된다.
특히 다다이스트 들은 우연성을 강조하기 위해 해프닝을 즐겼는데, 사전 의도없이
시행되는 해프닝은 예술과 일상의 경계를 허물기 위한 시도로 이러한 다다이스트들
의 기이한 방법들은 다다의 강렬한 가치 부정적 관념과 함께 추상미술, 초현실주의
또는 제2차 세계대전 후 60년대 예술 등에도 강한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다다이즘은 자기모순을 가지고 있었다. 다다이스트들은 모든 것에 대한
부정을 주장했음에도 자기 자신들마저 부정할 수 없었으며, 반예술로서의 예술을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 신념의 리얼리티를 주장했기 때문이다.

Three Duchamp brothers, left to right: Marcel Duchamp, Jacques Villon(1875-1963:

Painter, Printmaker), and Raymond Duchamp-Villon(1876-1918:Sculptor) in the garden

of Jacques Villon's studio in Pateaux, France, in 1914. All three participated in

the 1913 Armory Show in New York.

콧수염이 그려진 모나리자와 변기로 만들어진 작품으로 유명한 작가 마르셀 뒤샹
(Marcel Duchamp:1887~1968)
은 1887년 프랑스 Rouen 근처 블랭빌에서
태어나, 1955년에 미국으로 귀화했다. 뒤샹은 피카소와 함께 20세기 현대 미술에
가장 큰 족적을 남긴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15살 때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여느
화가들의 시작과 비슷하게 인상파, 후기 인상파, 야수파 등 화가들의 영향을 받으며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 뒤 입체파 스타일로 그림을 그렸으나 대부분의 입체파
화가들이 정적으로 오브젝트를 표현한 것과는 다르게 뒤샹은 물체의 운동성에 관심을
가졌다. 아모리
쇼 - 1913년 그렇게 나온 그림이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이다. 그러나 이 그림은 파리의
입체파 화단의 강한 반발을 사게 되었고 결국 입체파 전시회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그 후 그는 그룹으로 활동하는 것을 피하고 대부분 개인적으로 활동을
하게 된다. 1915년 경 혼란스러운 파리를 떠나 뉴욕으로 오게 된 뒤샹은 이미 제작
된 상품을 작품으로 활용하는 '레디메이드(Ready-Made)' 예술에 대한
개념을 성립하고 본격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가게에서 파는 남성용 변기를 가져다
놓고 싸인을 한 다음에 <샘>이라는 이름으로 내놓기도 하고, 자전거 바퀴를 의자
위에 올려 놓기도 하였다. 활발한 산업도시 뉴욕에서 활동한 뒤샹의 미학은 물건이
넘쳐나는 대량생산 시대의 미학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뒤샹은 일반인의 고정
관념을 깨며 콜롬버스의 달걀처럼 누구도 생각할 수 없었던 평범한 생활품에 예술적
생명을 불어 넣는 일을 하였다. 그에 따르면 붓과 캔버스, 물감 대신 일상의 물건이
미술의 소재가 될 수 있고, 작가의 의도에 의해 그 물건들이 원래의 기능이 아닌
전혀 새로운 이미지를 갖게 된다. 작가는 그리는 행위만이 아니라 우연한 선택에
의해서도 예술행위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작품이라는 결과보다도 예술가가 선택하고 결정하는 정신 세계가 진정한
예술의 본질이라고 그가 제시한 '개념미술(Conceptual Art)'은 현대 미술의 가장
큰 이슈가 되었다. 작품을 보며 작가의 의도와 그가 제시하는 의미에 대해 파악하
면서 작품을 보게 되는 새로운 개념미술의 시작인 것이다. 당시 그의 예술적 도발은
많은 미학자와 미술비평가들 사이에서 큰 논란을 가져 왔다. 뒤샹을 선지자로 여기
며 추종하는 매니아층이 있는가 하면, 혹자들은 거세게 반발하며 그의 전시를 막았다.
결국 그는 1918년 그림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하고 체스와 도박을 하며 시간을 보내
었다. 그러나 작업실을 나온 예술가를 추종자들은 그냥 두지 않았다. 그가 도박을
하거나 거리를 방황하는 그 모든 행동들을 행위예술로 인정하게 되었으며, 그의 선택
과 결정에 대해 새로운 미술에의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예술가의 정신 세계에서
의도된 행위는 예술적 가치가 있다며 계속적으로 그에게 새로운 미술에 대한 제시를
요청한 것이다. 미국의 추상표현주의 화가 웰렘 드 쿠닝(Willem de Kooning:1904
~1997, 네덜란드 태생의 미국 화가, '액션 페인팅'의 대표적 인물)은 그의 움직임
자체에 예술적 가치를 두면서 '그는 움직이는 예술이다'라고까지 평하기도 했다.
뒤샹은 예술의 상업주의에 대해 철저히 비판하였으며, 그에게 있어서 예술이란 먹고
살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자신의 정신적 세계의 발로로서 즐거움과 기쁨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전시회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이렇게 서명
하는 일이 좋다. 서명을 하면 작품의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이지...'

Apropos of Little Sister, October 1911

Portrait of Chess Players, 1911

뒤샹이 유화를 중단하고 대형 유리판 그림을 8년간에 걸쳐 제작해 오던 것마저 중단한 후
거의 예술적 활동을 접어두고 오로지 체스 놀이에만 열중하였다는 것은 하나의 일화로서
잘 알려져 있다. 뒤샹은 체스놀이를 소재로 이전부터 관심이 많았는데, 1910년에 제작
된 작품 중 야수파적인 경향과 사실주의적인 체스놀이를 소재로 한 것이 있음을 미루어
보아도 알 수 있다. 뒤샹의 가족들이 체스놀이에 열중하고 있는 광경을 모티프로한
작품은 그의 예술 활동 중단 이후 자신의 지속적 체스놀이와 연결되면서 그의 앞날이
흥미롭게 예시되고 있다고 하겠다. 이 작품은 1년전의 사실적인 작품과 비교해 보면
급격한 변모를 보여 주며, 특히 큐비즘적인 구성이 중심이 되고 있을 뿐 아니라 색채도
극도로 제약된 큐비즘적인 요소를 짙게 보이고 있음이 특징이다. 모델은 두 형인 자크
비용과 뒤샹 비용이 서로 마주 앉아 머리를 가까이 맞대고 있으며 그 주위로는 역시
두 사람의 아이가 체스 놀이를 지켜보고 있는 광경이다. 얼굴을 맞대고 있는 두 형
사이에 체스의 말이 보인다.

Nude Descending a Staircase, No. 2, 1912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 2

Virgen y esposa(처녀), 1912

Transition of Virgin into a Bride, 1912

처녀에서 신부로의 이행

Bride(신부), 1912

뒤샹의 작품 경향은 대체로 네 개의 시대로 발전되고 있다. 초기의 습작시대, 기계의
이미지를 도입한 회화시대, 대형 유리판 그림시대, 그리고 레디메이드에 의한 오브제
시대이다. 이 작품은 기계의 이미지를 도입한 회화 시대의 것으로 1912년 손으로
그리는 회화시대의 거의 최후의 작품이기도 하다. 피카비아와 같이 뒤샹 역시 여체를
하나의 기계로 환원해서 보려고 했는데, 여기에는 인간이 만든 기계와 남자의 갈비뼈로
만든 여자를 같은 남자의 창조물로 보려는 뒤샹 특유의 관념이 작용하고 있다.
동물의 내장을 분해해 보는 듯도 하고 증류 기계와도 같이 보이는 기묘한 기계 장치의
이 작품은 <처녀>, <처녀에서 신부로의 이행>에 이은 여성의 생애의 한 과정을 운동
의 진행으로 본 마지막 과정의 작품이기도 하다.
이와 대칭되는 작품으로 <독신자> 계열이 있다. 뒤샹은 신부와 독신자를 대립된 개념
으로 상정하고 신부를 절대적인 타자로 보았으며, <독신자>가 외부에서 본 기계의
형태라면, <신부>는 기계 내부의 작용을 이미지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기계를 작동할 때의 가솔린 점화의 증류와 폭발 등, 기계 내부의 화학 변화를
이미지화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Bicycle Wheel(자전거 바퀴), 1913

이미 남이 만들어 놓은 탁자와 자전거 바퀴를 선택해서 '이것도 예술이다.'라고 예술가가
선언할 때 그것을 예술이라 인정할 수 있는가?
눈에 보이는 사물이나 풍경을 그림으로 옮기는 미술에서의 '재현' 행위를 전면 부정하고
예술가가 예술이라고 말하는 어떤 것이든 예술이 될 수 있다는 뒤샹의 반전통적인 사상은
미술에서 '레디메이드(ready-made)'란 용어와 개념으로 점점 확실하게 정착되어 갔다.
이 작품을 제작할 당시만 해도 뒤샹에게 레디메이드란 개념은 아직 생소하게 느껴졌었다.
1915년 뉴욕에 정착해서야 뒤샹은 레디메이드에 대한 이론을 치밀하게 구상할 수 있었다.
'나는 아마도 바퀴의 움직임을 즐거이 수락했던 것 같다. 감상할 오브제 주변을 도는
사람들의 습관적인 움직임에 대한 해독제로서 말이다.'
뒤샹은 후일 이 작품의 제작 의도를 위와 같이 밝혔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일상의
오브제가 예술가의 선택에 의해 특별히 주목받는 예술작품으로 변화하는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예술가의 선택 행위, 즉 아이디어이다. 손으로 만드는 수공적 기술이 아닌
선택하는 정신적 행위가 예술의 가장 본질이라는 뒤샹의 이론은 '개념미술(Conceptual
Art)'의 기초를 이루었다.

Chocolate Grinder(초콜렛 분쇄기), No. 2, 1914

<신부>(1912년)를 마지막으로 손에 의한 유화 작품을 포기한 뒤샹은 설계도와 같은
기계적인 방법을 채용하여 일련의 <초콜릿 분쇄기>를 제작하였다. 이 작품은 No. 2에
해당된다. 이보다 1년 전에 제작된 No. 1은 모두 손으로 그렸으나, No. 2에서는 원통
형의 세 개의 분쇄기 선을 손으로 그리는 대신 직접 실로 만들어 넣었다. No. 1에 비해
손의 흔적을 느낄 수 없는 기계적인 표현이 두드러진다. 손으로 직접 그리는 유화 작품
제작을 포기한 이후, 기계적인 수법으로 이행해 가는 과정을 잘 나타내 보여 주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뒤샹이 소년 시절 르왕의 한 과자점 쇼윈도에서 본 것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하는데, 우아한 루이 15세 시기의 세 개의 다리를 가진 탁상 위에 세 개의
원통형이 돌아가고 있는 이 기계에서 뒤샹은 독신자의 자위(自慰)를 느꼈다고 한다.
이 이미지는 그대로 대형 유리판 그림의 '독신자'의 한 부분으로 채용했는데, 독신자의
욕망의 드라마를 연출하고 있는 뒤샹 특유의 성적 관념을 접하게 한다.
말하자면 차가운 기계적 형태와 초콜릿의 점액이 만들어 내는 에로틱한 관념의 전개를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관념의 전개는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 이후 회화
시대에서 대형 유리판 그림으로 이어지고 있다.

Bottle Rack(병걸이), 1914/Reconstructed 1964

The Bride Stripped Bare by Her Bachelors, Even(The Large Glass), 1915-23

그녀의 총각들에 의해 발가벗겨진 신부, 바로 그것

오랜 기간에 걸쳐 제작했으나 유리판이 깨져 나중에 복구한 이 거대하고 복잡한 작품은
뒤샹 미술의 진정한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실상 이 작품을 완성한 후 뒤샹은 회화를
중단했다. 자신이 좋아했던 체스의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상징주의에 영향을 받은
그는 투명한 유리판 표면에 조각들을 배열했다. 그리고 비평가와 관람자들이 이상한
기계와 선, 형태, 오브제와 내용에 대해 나름대로 자유롭게 해석하도록 하였다.
복잡한 제목은 작품을 주 부분으로 나누어 언급한다. 아래쪽에는 금속성의 기계장치와
기구들이, 난해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위쪽에는 <신부>가 있다.

화제(畵題)부터 긴 것이 기묘하지만 작품 자체가 완전 수수께끼다.
좀 난해보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이 작품은 아주 뚜렷한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는 뒤샹이 어린시절에 겪었던 실재 상황의 반영이기도 하며 동시에, 더 나아가서는
일종의 유형들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이 대작은 중앙에서 잘라서 2개의 글라스판
으로 구성되었다. 뒤샹의 말에 따르면 실제로 보이는 부분과 투명한 유리만 보이는
부분에 서로 각각 관념적인 언어를 주고받는 것이라 한다. 이 두 개의 세계가 길항
(拮抗)하며 불가사의한 성의 운동을 전개한다는 것이다. 뒤샹은 이 작품을 미완성인
채로 방치하였다가 그 후 파손된 것을 복구하였으나 우연하게 생긴 파열이 오히려
완성하게 되었다고 그는 기뻐하였다. 목적에 종속되지 않는 동적인 기계장치를
성적의식의 심층의 상징으로 표현한 이 화면은 신화적이라고 할 수 있다.

샘(Fountain), 1917

뒤샹은 1913년 유화를 접고, 1917년 뉴욕에서 있었던 제1회 앙데팡당전시회에
<샘>이라는 제목으로 소변기를 작품으로 내놓았다. R. 뮈트(R. Mutt 위생기구상의
이름)라고 서명하여 출품하려고 했으나 거절되었다. 뒤샹은 그 전시회의 심사위원
이기도 하였다. 뒤샹은 기존의 일상적 물건에 제목을 달아줌으로 그 근본 의미가
변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 변기가 화랑에 놓임으로써 본래의 기능은 제거되고
화랑이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미적 대상이라는 새로운 사물이 된다는 것은 개념의
변화 자체가 현대 미술에서 하나의 중요한 주제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이 레디메이드의 대상에 대한 그의 전형적인 생각이다. 이것은 제시한 눈으로
보이는 물체와 그것을 뜻하는 보이지 않는 세계와의 일체로 작품을 성립시키려는
방법으로, 일용품의 실용성의 변화를 뜻하는 이 경향은 그 후 현대 미술의 특징으로
되었다.

With Hidden Noise(은밀한 소음과 함께), 1916

옥타비오 패스는 뒤샹의 작품을 두고 이렇게 말하고 있다.
'뒤샹은 시각적 세계까지 포함한 모든 예술이 불가사이의 영역에서 생겨나 소멸해
가는 것을 우리들에게 보여 주었다.' 뒤샹이 유화 작품 제작을 포기한 것도 어쩌면
유화 자체를 망막만으로 끝나는 시각의 유희란 점에 봉착한 때문인지 모른다.
뒤샹의 레디메이드에 의한 일련의 오브제 작품들은 '보이는 것'에 대한 '보이지 않는
것'의 영역에로 이입해 가는 과정의 작품들로 파악할 수가 있다.
즉, 1912년을 경계로 뒤샹은 중세 종교화에서도 보인 '보이지 않는 세계'를 미술의
세계에서 부활시킨 것이다. 노끈으로 만든 구형을 나사로 조여진 두 장의 동판
사이에 넣었다. 가운데 구형 속에는 무언가 작은 물체가 들어가 나사를 조이면
소리가 나게 되어 있다. 두 장의 동판 위에는 영어와 불어가 나열되어 있다.

에나멜을 칠한 아폴리네르, 1917

광고간판을 이용한 레디메이드 작품으로 '에나멜이 칠해진 아폴리네르(Apolinere
Enameled)'라고 광고 문안의 몇 글자만을 고치고, 오른쪽 거울에 비친 소녀의 머리
카락을 그려넣은 것이다. 작가의 창조적 행위와 의미 부여를 통해 단순한 상업 간판이
예술 작품으로 재창조된 것이다.

To Be Looked at(from the Other Side of the Glass)

with One Eye, Close to, for Almost an Hour, 1918

Reproduction of L.H.O.O.Q.(Mona Lisa with Moustache), 1919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서도 몰려든 많은 사람들 때문에 보기 힘든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 그 유명한 그림의 엽서에 연필로 콧수염과 턱수염을 그려 장난을
쳐 놓은 것이 바로 라는 그의
작품이다. 한 예술품이 가지고 있는 독창적이고도 유일무이한 어떤 분위기를 Aura
(아우라)라고 한다면, 고운 자태를 지닌 여인이었던 모나리자를 성전환 시킨 그의
짓궂은 장난은 모나리자의 절대적인 Aura의 개념을 완전히 부숴 버린 셈이었다.
그에게 있어 색과 선이 지닌 모나리자의 조형적인 아름다움은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기존의 예술계를 부숴 버리려는 반예술적인 아이디어가 중요했던 것이다.
뒤샹의 작업이 있기까지 미술을 바라보던 관람객들은 예술이 무엇인가, 아름다움
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묻지 않았고, 물을 필요도 없었다.
루브르에 줄 서 있던 관람객 누구도 모나리자라는 눈썹없는 여인의 자태를 보면서
그 작품의 가치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 작품이 다 빈치의 손끝으로 그려진 것이라
는 사실을, 이 세상에 단 한 점 밖에 없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복제된 모나리자의 엽서 위에 그어 놓은 수염 덕에 현대 미술은 작가와
관객의 아이디어 싸움으로 흘러가기 시작한 것이다. 뉴욕 다다이스트였던 뒤샹의
기발한 생각 이후, 현대 미술을 바라보던 많은 사람들이 미술가들의 해프닝 같은
작업에 깜짝깜짝 놀라며 한 세기가 흘렀다. 우스운 작품들 덕에 신선함은 느꼈지만
왠지 한 쪽 가슴이 허전하다는 것이다. 예술이라는 것이 어차피 이성이 아닌 인간의
감성을 위한 도구라고 한다면, 아이디어를 앞세운 개념예술은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
들의 시린 한 쪽 가슴을 채워주지 못했다. 2만여 년간의 창작 미술의 역사를 변기
하나로 뒤집은 뒤샹의 생각이, 매일 매일을 지겹도록 똑같은 생각으로 가득 채우며
살고 있는 우리에게 묘한 카타르시스로 다가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뿐이다.

Rotary Glass Plates(Precision Optics), 1920/Sculpture

미술을 망막적인 세계에서 해방시킨 뒤샹은, 한편으로는 시각적인 시도 역시 거듭해
보이고 있다. 뒤샹의 손에 의해 그려진 유화 작품을 포기한 이후 제작된 대형 유리판
그림과 레디메이드에 의한 오브제 작품 이외 일련의 옵티컬(optical)한 작품을 제작
하였다. 바로 이 계열의 작품들이 시각에 대한 시도의 것들이다. 이 <회전 유리판>은
하나의 축에다 다섯 개의 긴 유리판이 붙고 그 위에 나선형 일부가 그려져 있다.
모터에 의해 축이 회전하면 마치 평면에 그려진 것 같은 동심원 줄무늬가 나타나게
된다. 3차원으로 구성된 유리판이 회전하자 눈에 보이는 것은 2차원의 일이다.
폰듀스 부루덴 역시 이 점을 지적하고 여기서 뒤샹은 독자의 시각에 대한 실험이 있다
고 말하고 있다. 1925년 <회전 반구>와 1935년에 제작된 <로드레이프> 역시 이와
같은 시각적 실험에 관계되는 작품들로, 전자가 중심이 다른 여러 개의 원을 그림
반구형을 회전하면 입체적인 나선형이 운동하는 것처럼 보여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면, 후자는 중심이 다른 원을 그린 원판을 플레이어로 회전하여
입체적인 효과를 내고 있다. 이 일련의 회전형 작품 가운데서도 뒤샹 특유의 성적
관념이 유도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회전에 의한 곡선의 운동이 이 관념을
유도한다.

Why not sneeze Rose Selavy?, 1921/Reconstructed 1964

Obligation Montecarlo-Monte Carlo Bond, 1924-38

Color lithograph with photograph

Box in a Suitcase, 1935-41

이 가죽 케이스에는 뒤샹의 작품 69개의 미니어츄어가 들어있다.

Pocket Chess Set, 1943

Rotoreliefs, 1953/Sculpture

Fluttering Hearts(Stockholm), 1961

Box in a Valise, 196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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