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미술사47 분리파:클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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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Virgin, 1913

Poster for the 1st Secession exhibition, 1898

19. 분리파(分離派, Secession)

19
세기말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일단의 예술가들이 관학적인 미술
아카데미로부터 이탈하여 근대운동을 시작하기 위해 결성한 예술가
집단이다. 기존의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예술가 협회 등의 기구속에서는
작품 발표의 장이 주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미술가들이 관영화된
전람회와는 별도로 자기들의 전람회를 기획하고 조직하기 위해서 창립한
새로운 예술가 집단이다.
분리파의 어원은 `분리하다` 뜻의 라틴어 동사 `secedo` 어원으로
하며, 아카데미즘이나 주도의 전시회로부터의 분리를 의미한다.
따라서 과거의 전통에서 분리되어 자유로운 표현 활동을 목표로 했으며
목적은 미술과 삶의 상호교류를 추구하고 고루한 사상을 답습하지 않는
작품의 제작이었다. 예술과 생활의 연결을 추구하고 완전한 인간에 있어서
어떤 의미가 있는 예술, 과거에서 빌려온 것을 생각하기 보다는 새로운
예술을 창출하는 것이다.

최초의 분리파는 1892 슈툭, 트뤼브너, 우데가 주도한 뮌헨 분리파로서
1회전에는 뵈클린, 코로, 밀레, 쿠르베 외국 화가들의 그림을 전시하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이었다. 이후 1897년에는 클림트를 회장으로 하는
비엔나 분리파(빈분리파) 탄생하였고, 월간지 <성스러운 > 출간하였다.
한편 1899년에는 뭉크의 작품 전시 거부를 계기로 리버만의 지도하에
베를린 분리파가 창설되었다. 인상주의 작품들이 주류를 이루었던 베를린
분리파는 놀데와 펙슈타인 표현주의 화가의 출품 거부가 원인이 되었다.
베를린 분리파는 1910 재분열되어 신분리파가 조직되었고, 드레스덴의
다리파와 뮌헨 신미술가 협회의 화가들이 참가하여 전성기를 맞았다.

분리파에는 특정한 예술이념이나 양식은 없었지만, 예술 경향과 국적을
초월하여 전위미술에도 관대히 문호를 개방했다는 점이 공통되는 이념이라고
있다. 당초 인상주의와 아르누보의 영향을 받은 회화 운동으로서
출발한 분리파는 오히려 현대 건축과 공예의 영역에서 성과를 찾을 있다.
분리파는 영국의 미술과 공예운동, 독일의 유겐트슈틸 등과 더불어 근대
공예와 건축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Gustav Klimt, 1912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

황금빛의 화려한 화면과 장식성. 클림트의 작품을 대하는 사람들은
화폭에 담겨진 화려함에 금새 매혹되고 만다. 세기말과 세기초, 낡은
전통과 새로운 도전이 혼재된 시기에 클림트는 벌거벗은 여성들을
구속과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킨 화가였다. 일상의 단조로움을 파괴하고자
비엔나 분리파의 선구자를 자처하며 시대정신을 대변했던 화가였다.
후기 상징주의 회화의 대표 화가가 뭉크라면 구스타프 클림트는 전혀 다른
양상을 대표하는 화가이다.
상징주의는 모더니즘의 선구이자 1 세계대전으로 파괴된 유럽 문명의
마지막 꽃이었다. 그리고 클림트의 상징주의적인 요소는 같은 시대적인
흐름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

1862
7 14, 오스트리아 빈의 근교였던 바움가르텐에서 태어난
클림트는 극심한 빈곤에 허덕이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의 데생 솜씨를 눈여겨 보았던 친척의 도움으로
그는 미술의 길에 들어선다. 클림트는 스물 한살이 되던 해부터 화가로서의
명성을 구축해 나갔지만, 상징주의적인 요소를 보여주기 시작한 것은
서른 살이 무렵이었다. 때부터 그의 작품은 강렬한 느낌을 자아내며
관객들을 사로잡기 시작한다. 1891년부터 1910년까지의 10 동안
그의 작품은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며, 구상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이 동시에
존재하게 된다. 작품에서 보이는 부분 부분의 양상이 때로는 환상적이고
때로는 평면적인 면으로 혼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후 1897 비엔나
분리파가 형성되고 그가 회장으로 임명되면서 그는 국제적인 평판을 얻으며
화가로서의 명성을 떨친다.

클림트의 작품에는 유난히 많은 여성이 등장한다. 그리고 클림트에 의해
표현된 여성상은 '요부' 동시에 '어머니'라는 대조적인 상징성을 동시에
부여한다. 이는 클림트가 개인적으로 갖고 있었던 어머니에 대한 고착
현상과 여성을 통한 시대정신의 표출이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당시 프랑스에선 최초의 여자중등학교가 등장했고, 독일에서도 여성 교육
기관이 생기는 여성의 지위가 향상되어 가는 분위기였다.
여성들은 가부장적인 서양 문명의 오랜 관습을 서서히 벗어 던지기 시작했다.
일터에서 자아를 발견하고, 스스로의 권리를 찾기 위해 투쟁을 불사하는
여인들. 클림트는 여성들이 발휘하게 엄청난 힘을 미리 예견하면서, 작품
속에서 남성의 파경을 그렸던 것이다.

클림트는 외설과 퇴폐적인 요소로 당대의 전통 화단에서 많은 비난을 받았다.
특히 대학의 천장화가 많은 논란이 되었지만, 그는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독자적인 노선을 그려 나갔다.
이후 보수적인 미술 집단이었던 '쿤스틀러하우스 Kunstler-haus(미술가의
)' 회원이었던 클림트는 동안 화가들에 의해 제작되어져 왔던 작품들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1898년에 비엔나 분리파를
주도적으로 이끌기 시작했다. 분리파의 목적은 미술과 삶의 상호작용을
이룩하는 것에 있었다. 대중들에게 어떤 의미를 주고, 낡고 판에 박힌 사상에
의존하지 않는 작품을 제작하기 위한 것이었다.
1894
클림트에게는 대학교의 강당 천장을 장식할 작품을 의뢰 받았다.
하지만 벽화가 제작되자 그의 작품에 대한 비난은 끊이지 않았다.
그는 오직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결과 <철학>이라는 작품을 공개했을
클림트에 대한 동조자와 반대자들의 논쟁은 매우 격렬하게 이루어졌다.
곳곳에 등장하는 나체의 인물들은 커다란 충격이었고, 그의 그림들은
추악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이성의 위대한 힘을 찬양하고자 했던 본래의
의도와는 달리 작품 속의 인간들은 혼돈에 휩싸인 뒤엉켜 있었다.
사건으로 클림트는 복고주의적인 반동에 부딪치며 소외를 당했다.
하지만 <법학> 통해 클림트는 그의 분노를 마음껏 터뜨렸다.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는 남자의 모습은 고통스러운 죽음을 암시한다.
세기말적인 음산한 분위기는 이후 <의학>에서도 이어지며 에로틱한
복수의 여신은 섬뜩할 정도로 관객들의 심장을 자극했다.

황금색의 화려한 색채와 섬세한 구성. 클림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이같은
장식성은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클림트가 미술교육을 받았던 응용미술
학교의 자연스러운 영향도 있었지만, 이는 당시의 유행하던 미술사조인
아르누보와 맥락을 같이 한다.
또한 클림트의 작품에서는 자연스러운 공간성의 파괴를 목격하게 된다.
장식성을 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클림트는 상징주의적인 요소를 배제하지
않았다. 클림트는 1918 그가 후원하고 제자로 삼았던 에곤 쉴레와
같은 해에 눈을 감았다.

*요셉 펨바우어,1890*

*Portrait of a Lady(Frau Heymann?), 여인의 초상,1894*

*Music I, 1895*

*지혜의 여신 팔라스,1898*

*Nude Veritas, 1899*

*유디트 I(Judith I), 1901*

클림트 회화의 특징이라고 하면 인간의 사랑과 , 죽음에 대한 주제를
다양하면서도 화려한 무늬로 이루어진 장식 모자이크로 표현했다는데 있다.
그는 19세기말 "유겐트 스틸 Jugent Stil"이라고 불리는 "아르누보" 양식을
창출하면서 "빈분리파" 거장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
유디트 > 8 뒤인 1909 <유디트 > 나란히 유디트를 주제로
그린 클림트의 대표적인 회화 작품이다.
그림에는 적장 호로페르네스의 목을 껴안고 격정과 황홀 상태에 있는
유디트의 기묘한 표정과 관능이 나타나 있다. 유디트는 상당한 미모를
지닌 여성으로 표현되었으며, 동시에 세례 요한의 목을 자른 살로메의
이미지와도 겹쳐져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반쯤 벌어진 입술에서 보이는 , 오른쪽 눈은 감았지만 왼쪽 눈은 약간
채로 현실이 아닌 이상의 세계를 보는 듯하고, 금박 장식의 아래 왼쪽
젖가슴은 노출되어 있지만 오른쪽 젖가슴은 투명한 의복 위로 살짝 비쳐지게
표현되어 더욱 관능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오른쪽 아래에는 적장의 머리가 반쯤 보이는데, 죽음을 뜻하는 검푸른 얼굴
빛깔과 감은 눈은 여러 가지 의미를 던져준다.
, 그림의 구도는 모두 비상칭적인 배치를 하면서 유디트가 만들어내는
관능과 장식적인 공간을 더욱 수수께끼같은 알레고리로 표현하고 있다.

*베토벤 벽장식(Beethoven Frieze),1902*

적대적 힘이라는 소제목을 가지고 있는 작품은 예술가인 베토벤을
신처럼 숭배하고자 제작된 작품 하나이다. 신전, 조각상, 회화, 부조
등이 제작되었고 대부분 성서나 신화 속에서 주제를 차용했다.

*에밀 플로게의 초상(Portrait of Emilie Floge),1902*

클림트에 있어 여성은 일종의 구원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여인에게 안주
하지 못하고 정신적인 사랑과 육체적인 유희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많은
여성들을 만났다. 클림트의 작품 세계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여성으로
미치 침머만, 에밀 플로게,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가 있다.
평생을 동반자로 함께 했던 에밀 플로게는 클림트가 죽는 순간까지 찾았던
사람이었다. 또한 클림트의 많은 작품에 주인공이 되었고, 클림트는 그녀의
사진을 찍는 것도 즐겨했다고 한다. 그들은 서로 사랑했으며 상호간의 정신적
지주로서 항상 곁에 머물렀고 관계의 선을 절대로 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달콤한 사랑의 말도 오가지 않았으며 때론 사업의 동지로서 때론 여행의 동반자
로서 만족했다는 것이다. 여느 에로틱한 작품과는 다르게 작품에서 에밀
플로게의 모습은 다소 정숙해 보인다.

*소원 I,1903*

작품이 탄생하게 배경에는 '미치 침머만'이라는 여성이 있었다.
그녀는 한때 클림트의 모델이었으며 클림트와의 사이에서 명의 아이를
낳았다. 비록 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사생아였지만 아이에 대한 클림트의
애정은 각별했다고 한다. '희망'이라는 작품이 탄생할 당시 미치는 그의
두번째 아들을 잉태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시기 클림트의 작품속에는
임산부의 모습이 자주 출현한다. 처녀들의 어떤 모습보다도 임산부가 옆으로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고 극찬하기도 했다. 그러나 탄생의 기쁨이
가시기도 전에 죽음을 맞은 아이를 생각하면서 희망은 절망이 되고 기쁨과
환희가 존재하는 화폭에는 해골과 가오리를 연상시키는 괴상한 것들로
채워지게 되었다.

* I, 1904~07*

*물뱀 II,1904~07*

*나무아래 장미가 있는 풍경,1905*

클림트가 꽃을 테마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대략 1905년부터
시작하며, 그가 죽기 전인 1917년까지 계속 이어진다.
1905
년에 완성한 작품 <해바라기가 있는 농가의 >이라던가, 1907년에
<
양귀비가 있는 초원>, 1910년에 그린 풍경화 <공원>, 1912년에 완성한
<
사과나무 1>, 1916년에 마찬가지로 바트 가스타인 휴양소에서 그린
<
사과나무 2> 등으로 이어지며, 여기에 있는 <나무아래 장미가 있는 풍경>
1905, 클림트가 풍경과 꽃을 주제로 그리기 시작한 해에 완성된
그림이다. 클림트가 그린 풍경화의 대부분은 묘하게도 캔버스 크기가
110 × 110cm
정해져 있다. 하지만, 화려한 장식회화를 자랑하던
빈분리파였던 그는 여체의 아름다운 몸과 사랑을 담은 그림을 주로 그렸으며
그림들의 캔버스의 크기는 다양하다. 풍경을 주제로 그린 대부분의
그림들은 작품을 포함해서 화폭의 공간은 전부 무수한 색채의 얼룩점으로
덮혀 있다. 무한한 공간의 확장과 수많은 붓의 터치가 만들어낸 공간은 그가
풍경을 보면서 느끼는 시간과의 합일을 재현하려는 이미지로 읽을 있다.
, 19세기 인상파의 기법이 연상될 만큼 점묘화법으로 그려진 수많은
장미들은 무한공간과 시간을 의미하며, 휴양소에서 그려진 편안한 휴식의
느낌을 클림트는 화폭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각각의 장미들이 집합해서
겹쳐지고 어울리면서 거대한 장미나무 숲을 이루는 풍경은생명감 넘치는
자연의 교향곡을 연주하는 공간을 부여한다.
클림트는 화랑에서 열렸던 < 고흐 회고전>에서 풍경과 꽃에 대한
강렬한 인상을 얻은 풍경화를 그렸다고 전해진다.

*3대의 여자(The Three Ages of Woman),1905*

잠든 아이와 아이를 안고 있는 젊은 여인. 그녀는 꿈을 꾸듯 눈을
있다. 젊음, 희망, 밝음의 이미지를 품고 있음에도 전혀 사실적이거나
현실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약간의 간격을 두고 서있는 늙은 여인은 검게
그을린 피부와 마른 몸에 어울리지 않는 불룩 나온 배를 하고 뭔가 고통스러운
한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있다. 사신이 바로 앞에 있는 것처럼......
클림트가 인간이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는 삶의 과정들을 그림에 담아낸
작품은 만성적인 정신질환에 시달리던 누이와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한 ,
특히 여성의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의 과정으로서 그려진 것이라고 한다.

*프리자 리들러의 초상,1906*

*히게이아(Hygeia),1907*

오스트리아 교육부의 주도로 제작된 대학의 천장화 시리즈는 의학, 철학,
신학, 법학이었고, 클림트는 신학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그렸다.
"
의학" 부분그림인 작품은 에로틱한 복수의 여신 "헤게이아"이다.
여신 위에는 죽음의 신이 많은 여인들 사이에서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있다. 때문에 생명을 살리는 의학을 무시했다는 의료진들의 엄청난
반발을 사기도 했던 작품이다.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 I(Portrait of Adele Bloch-Bauer I), 1907*

청년기 작품과는 달리 후기의 그림들은 장식성이 점점 풍부해져 갔다.
때부터 그의 화면에서는 심지어 공간까지도 장식들로 가득차게 된다.
금빛 조각들이 풍부하게 사용되어 철인으로 눌러 박기도 하였다.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는 부유한 금융인의 딸로서 매우 매혹적인 여인이었다고
한다. 위의 그림만 보아도 아름다움을 상상할 있을 하다.
클림트를 위해서 기꺼이 누드모델을 서줄만큼 그를 신봉했으며 오랜동안
육체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유디트' '키스' 탄생시킨 주인공이기도 하다.

작품은 현재(2006 9) 회화 사상 가장 비싼 값에 팔려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이 되었다. 미국 뉴욕 맨해튼의 '노이에 갤러리' 블로흐바우어의
후손으로부터 그림을 구입했다고 한다. '노이에 갤러리' 세계적 화장품 메이커
에스테 로더 그룹을 세운 에스테 로더(2004 사망) 아들 레너드 로더와
로널드 로더가 설립한 갤러리다.
1
3,500 달러에 매매된 작품은 2004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1 416
달러에 낙찰된 파블로 피카소의 <파이프를 소년(1905)> 보유해 최고가
기록을 경신한 것이다.

*입맞춤, 190708*

작품은 클림트의 수많은 그림 가운데서 특히 알려진 유명한 그림인데
이유는 "키스"라는 독특한 제재를 다루고 있다는 점과 특이한 화면구도
에서 나타나고 있다. 작품 <키스> 1903년에 매킨토시 부처가 베엔젠돌프
음악당을 위해서 그린 벽화 <바람의 오페라> <바다의 오페라>에서 깊은
영감을 받은 결과 그렸다고 한다. 입맞춤하는 남녀는 꽃밭 속에서 서로
껴안은채 멈추어 있으며, 꽃밭은 남녀를 감싸는 지상낙원의 공간처럼
보이고 있다. 하지만 머리를 꽃으로 장식한 사람을 감싸는 어두운 색채로
이루어진 공간은 허무와 무거움, 절대적인 고독감을 연상시키고 있다.
남자는 직사각형의 모자이크 무늬의 의상을 입고 있으며, 여자는 원형에
붉고 검은 색의 점들이 무수하게 찍힌 장식이 화려한 금색 옷을 입고 있다.
남녀의 키스라는 지극히 평범한 소재는 그림에서도 특별히 눈에 만한
느낌을 부여하지는 않지만, 사람의 행위보다는 그들이 입고 있는 의상과
교차되는 색채가 만들어내는 배경에 더욱 주목하게 된다.
클림트는 장식적인 묘사를 위주로 하는 회화에 집착한 나머지, 형식에서는
혁신적인 성과를 올렸지만 빈약한 내용을 답습하게 되면서, 그의 회화는
한계에 부딪히게 되었다.

*Elisabeth Bachofen-Echt*

*The Sunflower,1906-07*

*소원 II,1907~08*

Danae,1907~08*

클림트의 회화에서 중요한 주제는 관능이다. 외설스러움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지만, 클림트의 그림에서 에로스는 반복되는 주제이다.
<
다나에>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제우스에게 겁탈 당한 여인이다.
주피터를 상징하는 쏟아지는 황금 빗줄기를 받아들이려고 몸을 도사리고 있다.
그녀를 작가는 화려한 장식에 둘러 쌓이게 하고 뽀얀 나신을 속에 묻어 겁탈
당한 여인의 슬픔과 원초적인 아름다움을 극적으로 병치시키고 있다.
이는 당시 인문학이 관심을 기울인 인간 내면세계에 대한 관점- 본능적 충동
(
이드) 의존하는 새로운 인간상에 대해 보내는 작가의 지지로 보인다.
<
다나에> 잠재적 성욕을 내포하는 여인들을 포착하고 있다.
여성의 육체를 표현하는 있어서 물결모양의 육체와 구불구불한 긴머리는
노골적인 관능성을 드러내는 당시 회화의 특징이었다

*유디트 II, 1909*

클림트의 작품 <유디트 > 1901년에 완성된 <유디트 >
같은 주제를 담은 그림이다. <유디트 > 좀더 장식적인 화려함과
유디트의 아름다운 모습에 집중했다면, 그림의 색채와 인물은 전형적인
아르누보풍으로 표현되었다.
유디트란 구약성서 외전(外典) 하나인 "유디트서()" 나오는 용감한
부인의 이름인데, 시간이 흘러 후세에 와서는 민족 존망의 위기에 목숨을
내던지고 위기에 빠진 민족을 구하는 여성의 대명사로 뜻이 변하게 되었다.
그녀는 베트리아를 포위하고 있던 앗시리아의 장군 호로페르네스의 진영에
자진해서 들어가 적장이 방심한 틈을 타서 목을 잘라 동포를 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유디트서" 실제 사실이라기보다는 소설적 상상의
산물일 것이라고 하는데, 기원전 160-100 전에 씌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클림트의 그림은 유디트를 주제로 삼고 있지만, 입고 있는
의상이나 색채는 당시 빈분리파가 주도한 "유겐트 스틸", "아르누보"
양식이 적용되어 있다. 숨이 끊어진 호로페르네스의 잘려진 머리는 눈을
감은 모습이 반정도만 드러나고 있으며, 유디트의 표정과 손이 취하는
포즈는 격렬한 행위를 끝내고 아직 격정에 휩싸인 듯한 자세로 묘사되어
있다. 사랑과 죽음이 극적으로 교차되는 이미지가 생생하게 묘사된 뛰어난
작품이다.

*마다 프리마베시,1912*

*위게니아 프리마베시,1913~14*

*정원 오솔길의 ,1916*

*죽음과 ,1916*

당시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유럽은 말세적 비관주의가 휩쓸고 있었다.
1908
년에는 8만명 이상의 생명을 앗아간 지진이 일어났고, 2 뒤에는
헬리혜성이 나타나 많은 이들을 공포로 몰아 갔으며 1912년에는 호화여객선
타이타닉 호가 침몰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느껴졌던
죽음에 대한 공포를 클림트는 죽음의 신에 직면한 사람들로 표현하고 있다.

*Adam and Eve ,Unfinished,1917-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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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46 분리파:에곤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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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lf-Portrait, 1912


에곤 실레(Egon Schiele: 1890~1918)

에로틱한 구상작품으로 알려진 오스트리아의 표현주의(Expressionnism)
에곤 실레(Egon Schiele:1890~1918) 세기말 오스트리아의 , 합스
부르크 왕가가 몰락하기 직전 화려함과 불안감이 뒤섞인 도시를 무대로 활동했던
화가이다. 1890 도나우 강변의 툴른에서 태어났다. 1906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했으며, 그곳에서 대스승이자 친구와도 같았던 구스타프 클림트를 만나 깊은
영향을 받는다. 1908 클로스터노이부르크에서 열린 전시회에 처음으로 참가했고,
1909
년에는 보수적인 분위기의 아카데미를 떠나 '새로운 예술가 그룹
(Neukunstgruppe)'
결성했다.
이후 표현주의적 성격을 그의 회화 양식은 성숙기에 접어들었는데, 특히
1911
년에 클림트의 소개로 만난 모델 발리 노이칠과 함께 인상적인 작품을
많이 제작했다. 사춘기 소년과 소녀에 강한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모델로
작품을 제작하던 실레는 1912 미성년자 유괴와 외설적인 그림을 그렸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24 동안 감옥 생활을 했다.
1915
갤러리 아르노에서 번째 개인전을 개최한 , 모델 발리와의 동거
생활을 끝내고 에디트 하름스와 정식으로 결혼했다.
에디트는 실레의 에로틱한 유화와 드로잉, 수채화에서 거의 강박적으로 되풀이
되는 주제가 되었다. 이후 꾸준히 작품을 제작하여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예술가로서 확고한 지위를 얻게 1918 49 분리파 전시회에 참가
하여 국제적인 명성까지 얻었으나 에스파냐 유행성 독감에 걸려 아내
에디트가 죽어가자 그의 미술에서 삶과 죽음의 갈등이 전면으로 부각되었다.
아내가 죽은지 사흘 실레 역시 독감에 감염되어 아내의 뒤를 따라 스물여덟
이라는 짧은 생애를 마감한다.

에곤 실레는 필사적이고 격렬한 에로티시즘과 삶에 대한 병적인 욕망을 그림에
표현해 20세기 유럽에서 가장 극적인 미술을 선보였다. 초기에는 클림트와
유사했던 실레의 화풍은 분리파를 선도한 클림트의 눈부신 색채와 세련된
우아함과는 대립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오스카르 코코수카와의 교류와 국제
표현주의와의 관계에서 영향을 받아 실레는 긴장감이 느꺼지는 예리한 솜씨에
의존하면서 고딕미술에서 주제와 요소를 차용해왔다. 시대의 불안과 실레 자신의
내면적인 고독, 욕망, 혼란이 뒤섞인 작품들은 현대를 사는 우리의 삶을 투영함
으로써 영원한 공감대를 얻고 있다.

*Gerti Schiele,1909*

*Eduard Kosmack,1910*

*Scornful Woman,1910*

*Self-Portrait Pulling Cheek,1910*

*Self-Portrait Standing,1910*

*Female Nude,1910*

*Seated Girl,1911*

*Bildnis Trude Engel, 1911*

*Semi-Nude Girl, Reclining,1911*

*The Cardinal and Nun, 1912*

*Agony,1912*

*Fighter,1913*

*The Truth Unveiled,1913*

*Self-Portrait with Raised Right Elbow,1914*

*Standing Male Nude with Red Loincloth,1914*

*Self-Portrait as St. Sebastian

(Poster for Arnot Gallery exhibition),1914/15*

*Seated Couple (Egon and Edith Schiele),1915*

*Two Women,1915*

*Death and the Maiden,1915/16*

사랑과 죽음은 실레의 작품에서 극적으로 얽혀서 나타난다.
그러나 1915 주제는 그의 삶에서 현실적인 문제가 되었다. 그해 화가는
제국군으로 징병되기 바로 직전 사랑하는 에디트 하름스와 서둘러 결혼했다.
하지만 다행히 실레는 후방부대에서 복무했다.

*Embrace (Lovers II),1917*

*Mother and Two Children,1917*

*Reclining Woman with Green Stockings,1917*

*Liegender weiblicher Akt(누워있는 여성 누드), 1917*

실레의 에로티시즘은 음란한 인상까지 풍기는 매우 관능적인 여성들을 통해
표현된다. 중에서 가장 격찬을 받은 작품은 화가의 짧고 고통스러웠던
생애 유일하게 평화로웠던 시기에 그려졌다. 전쟁이 거의 끝나갈 무렵인
1917
년에 실레는 빈에서 예술을 소생시키려는 다양한 운동들을 주창했다.

*The Family,1918*

*Portrait of the Artist's Wife, Seated,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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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45 아르누보-알폰스 무하

   

18. 아르누보( Art Nouveau)

Self Portrait, 1907/Alphonse Mucha


아르누보(Art Nouveau) 1890~1910년에 유럽과 미국에서 유행한
장식예술 양식이다. 길고 구불구불하며 유기적인 선을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며, 주로
건축물, 실내장식, 보석세공, 유리 디자인, 포스터, 삽화 등에 쓰였으며 19세기 예술과
디자인의 대부분을 주도했던 모방적 역사주의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양식을 창조하려는
계획적인 시도였다. 유럽의 전통적 예술에 반발하는 당시 미술계의 풍조를 배경으로
중세적인 수공예 정신의 복귀를 선언했던 모리스의 미술과 공예운동, 빅토리아 시대의
인습에 반항하고 초기 르네상스의 우아함과 색채를 재생하려했던 라파엘전파등이
기원이라 있다. 19세기 후반에 유행처럼 번졌던 아카데믹하고 절충주의적인
'
역사주의' 대한 반발로 나타난 아르누보 운동은 과거의 전통 양식들을 모방하거나
변형하는 수준에서 벗어나 하나의 새로운 양식을 창출하고자 했다. 그리스·로마 ·고딕
양식에서 구하던 것을 자연에서 모티브를 빌려 새로운 표현을 시도하였으며, 또한 넓은
의미로는 상징주의의 양상으로 보아 평면적 형태와 다이나믹한 표면의 선을 통하여
감각적 반응을 불러일으켜 감정을 환기시켰다.

이것은 영국에서 처음 발달했으며 유럽 대륙으로 확산되었는데, 독일에서는 '유겐트
슈틸(Jugendstil)', 프랑스에서는 '기마르 양식(Style Guimard)', 오스트리아에서는
'
제체시온슈틸(secessionstil)', 이탈리아에서는 '스틸레플로레알레' 또는 '스틸레 리베
르티', 스페인에서는 '모데르니스모' 또는 '모데르니스타'라고 부른다.
아르누보란 아르누보 작품을 많이 전시한 파리의 화랑에서 만들어진 용어이다.
영국에서는 양식이 19세기 초엽 시인이자 예술가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유연한 데생
에서 시작된 선형주의(線形主義) 전통에서 생겨났다. 그러나 이것의 직접 효시는 유기
체선(有機體線) 우수한 표현미에 많이 의존했던 삽화가 오브리 비어즐리(Aubrey
Vincent Beardsley)
심미주의, 그리고 응용미술에서 생동감 있는 양식의 중요성을
확립한 윌리엄 모리스의 미술공예운동이다. 유럽 대륙에서는 화가 고갱과 앙리
툴루즈 로트레크가 표상적인 선을 이용한 실험작품들로 아르 누보에 영향을 주었다.
또한 운동은 우키요에[浮世繪]라고 하는 일본 판화의 선형적인 도안이 유행하면서
영향을 받기도 했다.

아르누보의 뚜렷한 장식적 특징은 파동적·비대칭적인 곡선이며, 이것은 흔히 꽃줄기와
봉오리, 포도 덩굴손, 곤충의 날개 미묘하고 구불구불한 자연물의 모양을 하고 있다.
선은 고상하고 우아하며, 매우 율동적이어서 채찍과 같은 힘이 가득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래픽 미술에서 선은 형상·조직·공간·색조 모든 회화 요소들을 자체의
장식효과에 종속시킨다. 건축물과 조형미술에서 모든 3차원(입체) 형태는 구조와 장식의
융합물을 창조하면서 유기적·선형적인 리듬에 휘말리게 된다. 특히 건축물에서 이러한
장식과 구조의 종합을 있으며, 예를 들면 철물·유리·세라믹·벽돌 재료들을
자유롭게 조합하여 기둥과 대들보가 두꺼운 덩굴줄기처럼 덩굴손을 펼치는 모양이 되고,
유리창은 빛과 공기의 소통뿐만 아니라 유기적인 전체구조에서 모양의 부산물이 된다.
이러한 방법은 합리적이고 명확한 구조라는 전통적인 건축물의 가치기준과 완전히 상반된
것이다. 상당히 많은 예술가와 디자이너들이 아르 누보 양식의 작품을 만들었다.

유명한 작가들을 들어보면, 특히 오스트리아의 제체시온슈틸에 영향을 주었고 기하학적
선을 전문적으로 사용했던 스코틀랜드의 건축가이며 디자이너인 찰스 레니 매킨토시,
매우 유연하고 섬세한 구조 양식으로 프랑스의 저명한 건축가 헥토르 기마르(파리의 지하
철역 설계,1900)에게 영향을 주었던 벨기에의 건축가 헨리 벨데와 빅토르 오르타
(
브뤼셀의 P.E. 얀손가() 가옥 설계, 1892~1893), 미국의 유리공예가 루이스 컴퍼트
티퍼니, 프랑스의 가구 철공예 디자이너 루이 마조렐, 체코슬로바키아의 그래픽 디자인
예술가 알폰스 무하, 프랑스의 유리공예 보석 디자이너 르네 랄리크, 전통 구조를 가진
건물을 식물 모양의 아르누보 철세공으로 장식했던 미국의 건축가 루이스 헨리 설리번
(
시카고 공회당 설계, 1888), 선을 초월하여 건물들을 구근 모양의 곡선적이고 밝은 색조
유기적 작품으로 변형시켜 아르누보 운동의 가장 독창적인 예술가로 지목되는 스페인
건축가이자 조각가 안토니오 가우디 등이 있다.
1910
이후에 아르누보는 퇴조하여 결국 특징적인 장식양식으로는 쓰이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아르누보는 20세기 디자인의 미적 통일성으로의 이행과정에서 커다란 중요성을
갖는다.

The Flower, 1897

알폰스 무하(Alphonse Mucha: 1860~1939) 1860년에 지금의 체코
공화국인 모라비아(Moravia)에서 태어났다. 훌륭한 역사 화가가 되겠다는 꿈을 가졌던
그는, 부유한 귀족의 후원을 받아 프라하와 뮌헨의 아카데미에서 전통 종교 벽화와
역사화를 공부했다. 하지만, 1888년에 그는 파리라는 매혹적인 예술 도시의 유혹을
떨치지 못하고 뮌헨을 떠나게 된다. 파리의 쥴리앙 아카데미를 다니던 후원자의 지원이
끊기자, 그는 잡지와 책의 삽화, 달력의 그림을 그리는 부업을 시작한다.
1894
년의 어느 무하와 인쇄업자 둘만 있던 인쇄소에 급한 주문 하나가 들어온다.
르네상스 극장(Theatre de la Renaissance) 주연배우이자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여배우 한명인 사라 베르나르(Sarah Bernhardt) 연극 지스몽다(Gismonda)
포스터를 하루만에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그릴 사람이 없어 무하가 그리게 석판화
포스터를, 인쇄업자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라 베르나르는 진부하지 않은 그의
그림을 좋아하게 되고, 만족스럽게 전속 계약을 하게 된다. 이렇게 우연한 기회를 발판삼아
알폰스 무하는 약진하게 된다. 사라 베르나르의 장신구, 의상, 무대 디자인, 포스터를 모두
맡아 하게 되면서 광범위하게 대중과 마주하게 되고, 시대의 예술적 갈증과 변화 요구에
맞아 떨어지게 되자, 당연히 그의 인기는 높아지게 되었다. 사라 베르나르의 전속 디자이
너로 일하는 것과 동시에, 무하는 샹프누아(Champe- nois) 인쇄소와 계약을 맺고, 대중
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간다. 예술은 감상하는 사람들과 가까워질수록 좋다는 그의 생각에
따라, 다양한 그래픽디자인, 달력, 일러스트레이션, 극장과 전시회 포스터, 샴페인, 비스켓류
등의 여러 상품의 광고가 대중속에 뿌려지면서, 그의 작품은 더욱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게
된다. 1900 전후에 그의 이름은 명성 자체가 되었다.

1906
년에 무하는 미국으로 간다. 무하의 그림에 매혹된 사람들과 친분관계를 가지는
동시에 뉴욕과 시카고에서 강의를 하면서, 전시회도 가진다. 그러던 무하는 다시
한번 행운의 여신으로부터 선물을 받게된다. 찰스 크레인(Charles R. Crane)이라는
미국의 부유한 기업가와 만남으로써 오랜 바램을 실현할 있게 것이다.
크레인은 개인적으로 동유럽 정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자신의 민족 슬라브(Slav)
역사를 그리고 싶다는 무하의 오랜 바램을 듣고 금전적 지원을 해주기로 결심한다.
그는 무하를 가족과 함께 체코에 다시 정착하도록 도와주고, 20폭의 기념비적인 슬라브
서사시(Slav Epic) 그릴 있도록 해준다. 무하는 1910년경부터 1939 사망하기
까지, 자신의 민족애와 슬라브 역사에의 동경을 담은 슬라브 서사시와 다른 훌륭한
역사화들을 그리며 말년을 보냈다.

아르누보는 순수예술 뿐만 아니라 각종 실용적인 디자인과 상업적인 분야까지도 포괄
했던 화려한 장식적 양식이다. 무하는 아르 누보의 그런 '포괄적인 디자인'으로의 요구
발맞추어 가장 성실하게 활동했던 화가로 일컬어진다. 그는 화가이자 그래픽 아티스
트였으며, 건축, 보석 디자인과 인테리어 장식, 조각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의 포스터, 장식판넬, 달력, 행사용 인쇄물, 잡지 표지, 삽화들은 인기를 끌었다.
매력적이고 장식적인 모티브와, 흘러 넘치는 풍부한 짜임과, 간결한 선처리, 그리고
꽃과 잎새, 무늬와 기호들 속에 수려하게 짜여넣어진 매혹적인 여인의 형상은 모든
사람을 사로잡았다. 그의 모국인 체코의 디자인과 파리의 스타일, 비잔틴과 켈트의
전통 장식 그리고 당시 유럽에 반향을 불러 일으켰던 일본의 회화 우키요에(에도
시대의 풍속화) 화풍 모두의 영향을 받은 '무하 스타일' 시대에 가장 널리 퍼진
회화 모티브로서, 한때는 아르누보 스타일 전체와 동일시 되기도 했다.

Gismonda, 1894/Poster

Theatre de la Renaissance
위한 포스터는 르메르시에즈 인쇄소의 디자인도 거절
했던 사라 베르나르가 크리스마스 이브날 잠깐 살펴보자마자 뮈샤에게 맡겨 버렸다고
한다. 문제의 공연은 Sardou Gismonda 1895 1 4일에 시작할 예정이었다.
이제까지 완전한 무명이었던 화가에 의해 제작된 포스터는 과장되게 화려한 대상과
근엄한 분위기로 주목을 받았다. 무하에게 이는 비약적인 돌파구였다.

Luchon, 1895/Poster

Job 1, 1896/Poster, Job 담배회사 포스터

작품은 모든 평론가들에게 무하의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히는 것이다.
원형의 모티프와 세련된 구성에서 부터 굵고 조화로운 서체와 색상의 사용까지 모든것이
함께 탁월한 우아함과 아름다움과 호소력으로 다가온다.

Biscuits Lefevre-Utile, 1896/Color lithograph

Zordiac, 1896

파리의 미술 저널 플륌(La Plume)지를 위한 대형 달력 디자인에서 무하는 그의 장식
적인 재능을 십분 발휘했다. 비잔틴, 무어, 스키타이식의 장식적 요소가 작품 구석구석
가득 채워져 있다. 머리 장식의 이국적인 화려함은 그녀의 초연하고 당당한 태도와
함께 우화적인 황도십이궁의 그림에 어떤 신비한 종교 여사제의 풍모를 더한다.
작품은 무하의 가장 뛰어난 디자인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원래는 샹프누아(Champenois) 인쇄소 안에 걸어 두려고 그린 달력이었는데, 플륌지
편집장이 보고 반하여 바로 구입하여 대중에게 퍼트렸다. 그래서 그림은 한동안
프륌 달력이라고 알려졌었다.

Spring, 1896/Panel

Summer, 1896/Panel

Autumn, 1896/Panel

Winter, 1896/Panel

Cycle Perfecta, 1897/Poster

자전거 회사의 주문으로 제작된 포스터는 보다 작품의 일부분이라는 인상을
주며, 보는 사람에게 직접 다가온다. 무하의 광고에 대한 개념이 얼마나 현대적인지
있다. 그런 이유로 무하는 당시의 관습대로 확트인 시골에서 자전거를 타는
처녀를 그리지 않았다. 그대신에 자전거에 몸을 기댄 처녀의 바람에 흔들리는 머리채
이동 수단의 역동성을 표현해 내었다.

Monaco, Monte-Carlo, 1897/Lithograph

파리.리옹.마르세이유 철도 관광회사 포스터

초기 관광 광고의 테마는 지중해에서 깨어나는 봄이다. 무성히 열린 지중해의 식물
계절의 매력을 체험 땅을 덮은 하얗고 드레스를 입은 우아한 소녀로써 상징화
하고 있다. 눈덮인 들판에서 화환의 폭죽이 터진다. 포스터는 원래 파리-리옹-
마르세이유 철도회사를 위해 제작되었지만, 그래픽 아트 수집가들을 위해 광고 문구를
없애고 판매되기도 했다.

Nestles Food for Infants, 1897

The Byzantine Heads-Blonde, 1897

금발머리와 갈색머리라는 타이틀을 가진 메달 형태의 작품들은 무하의 가장 인상적인
작품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세밀하게 포착된 표정과 색상의 풍부한 표현과 더불어
사라진 비잔틴 문화의 광휘를 다시 불러오는 것만 같은 화려하고 환상적인 머리장식이
무척 매혹적이다. 작품들은 엄청난 성공을 가져와 수없이 재판 인쇄되고, 수많은
그림엽서를 장식했으며, 많은 복사본이 나돌았다. 작품을 양각으로 도드라져 보이게
하는 가죽장식과 도료를 입힌 금속장식, 얼굴 외곽선을 강조한 모티프들이 보인다.

The Fruits, 1897

Savonnerie de Bagnolet, 1897

Lorenzaccio, 1898/Poster

알프레드 뮈쎄의 연극의 초연에서 사라 베르나르는 로렌짜치오라는 남성 주역을
맡았다. 대형 인물상의 의미심장한 힘에 온전히 기대어 구성된 포스터는 어두운
르네상스 복색을 차려입고, 알렉산더 공작의 살인에 대한 깊은 생각에 빠진 주인공을
그리고 있다.

F. Champenois Imprimeur-Edeteur-Reverie, 1898

작품의 주제는 사진첩을 넘기다가 잠깐 멈춘듯이 보이는 젊은 여인의 모습으로
형상화 된다. 가슴의 사치스러운 장신구는 교묘하게 쇼올의 부분으로 보이도록
처리했다. 꿈을 꾸는듯한 여인의 모티프와 아라베스크풍의 화환의 잔가지들, 더불어
역동적으로 형상화된 꽃차례... 모든것이 융합하여 하나의 장식적 단위로 화한다.
동시대의 비평가는 여인의 미소를 극찬하였다.

Hamlet, 1898

Medee, 1898

카튈 망테스의 비극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 중의 하나이다.
메데(Medee) 공포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복수 때문에 자신이 죽인 자식의 시체
옆에서 있다. 배경에는 불길한 날의 여명이 밝아온다. 붉은 빛과 보라빛 색조의
사용으로 분위기는 극대화된다. 그리스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모자이크, 오래되어
보이는 서체와 종려잎 무늬 등의 장식적인 요소들이 극의 고전적인 배경을 암시한다.

Dance, 1898/Decorative panel

La Samaritaine, 1899

Moet & Chandon, Cremant Imperial, 1899/Poster

Lefevir-Utile Biscuits-Flirt, 1899

Moet et Chandon-La Champagne White Star, 1899

Heidsiech & Co., 1901

Carraige Dealers, 1902/Poster

Lefevre-Utile-Sarah Bernhardt, 1904

Fuchsia Necklace, 1905

Designed by Mucha, made by the jeweler Georges Fouquet opal, cabochon saphire,

brilliants, gold mount Petit Palais, Paris

Princess-Hyacinta, 1911

무하가 모국에서 제작한 하나의 포스터인 작품은 Princezna-Hyacinta라는 발레
무언극의 광고였다. Ladislav Novak 원작에 Oskar Nedbal 음악을 담당한 극이었다.
줄거리에 맞게 무하는 동화같은 화려함을 창조해 내었다. 꽃으로 장식된 왕관,
신비로운 상징들로 장식된 동심원들, 배겅의 별무늬 등은 무하가 파리에서 자신의
창조욕을 최고로 발휘했을 만들어 내었던 모티프 레퍼토리의 기본 요소들에서
변화를 추구했음을 나타낸다.

Jaroslava(Mucha's Daughter),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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