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미술사47 분리파:클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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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Virgin, 1913

Poster for the 1st Secession exhibition, 1898

19. 분리파(分離派, Secession)

19
세기말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일단의 예술가들이 관학적인 미술
아카데미로부터 이탈하여 근대운동을 시작하기 위해 결성한 예술가
집단이다. 기존의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예술가 협회 등의 기구속에서는
작품 발표의 장이 주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미술가들이 관영화된
전람회와는 별도로 자기들의 전람회를 기획하고 조직하기 위해서 창립한
새로운 예술가 집단이다.
분리파의 어원은 `분리하다` 뜻의 라틴어 동사 `secedo` 어원으로
하며, 아카데미즘이나 주도의 전시회로부터의 분리를 의미한다.
따라서 과거의 전통에서 분리되어 자유로운 표현 활동을 목표로 했으며
목적은 미술과 삶의 상호교류를 추구하고 고루한 사상을 답습하지 않는
작품의 제작이었다. 예술과 생활의 연결을 추구하고 완전한 인간에 있어서
어떤 의미가 있는 예술, 과거에서 빌려온 것을 생각하기 보다는 새로운
예술을 창출하는 것이다.

최초의 분리파는 1892 슈툭, 트뤼브너, 우데가 주도한 뮌헨 분리파로서
1회전에는 뵈클린, 코로, 밀레, 쿠르베 외국 화가들의 그림을 전시하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이었다. 이후 1897년에는 클림트를 회장으로 하는
비엔나 분리파(빈분리파) 탄생하였고, 월간지 <성스러운 > 출간하였다.
한편 1899년에는 뭉크의 작품 전시 거부를 계기로 리버만의 지도하에
베를린 분리파가 창설되었다. 인상주의 작품들이 주류를 이루었던 베를린
분리파는 놀데와 펙슈타인 표현주의 화가의 출품 거부가 원인이 되었다.
베를린 분리파는 1910 재분열되어 신분리파가 조직되었고, 드레스덴의
다리파와 뮌헨 신미술가 협회의 화가들이 참가하여 전성기를 맞았다.

분리파에는 특정한 예술이념이나 양식은 없었지만, 예술 경향과 국적을
초월하여 전위미술에도 관대히 문호를 개방했다는 점이 공통되는 이념이라고
있다. 당초 인상주의와 아르누보의 영향을 받은 회화 운동으로서
출발한 분리파는 오히려 현대 건축과 공예의 영역에서 성과를 찾을 있다.
분리파는 영국의 미술과 공예운동, 독일의 유겐트슈틸 등과 더불어 근대
공예와 건축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Gustav Klimt, 1912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

황금빛의 화려한 화면과 장식성. 클림트의 작품을 대하는 사람들은
화폭에 담겨진 화려함에 금새 매혹되고 만다. 세기말과 세기초, 낡은
전통과 새로운 도전이 혼재된 시기에 클림트는 벌거벗은 여성들을
구속과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킨 화가였다. 일상의 단조로움을 파괴하고자
비엔나 분리파의 선구자를 자처하며 시대정신을 대변했던 화가였다.
후기 상징주의 회화의 대표 화가가 뭉크라면 구스타프 클림트는 전혀 다른
양상을 대표하는 화가이다.
상징주의는 모더니즘의 선구이자 1 세계대전으로 파괴된 유럽 문명의
마지막 꽃이었다. 그리고 클림트의 상징주의적인 요소는 같은 시대적인
흐름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

1862
7 14, 오스트리아 빈의 근교였던 바움가르텐에서 태어난
클림트는 극심한 빈곤에 허덕이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의 데생 솜씨를 눈여겨 보았던 친척의 도움으로
그는 미술의 길에 들어선다. 클림트는 스물 한살이 되던 해부터 화가로서의
명성을 구축해 나갔지만, 상징주의적인 요소를 보여주기 시작한 것은
서른 살이 무렵이었다. 때부터 그의 작품은 강렬한 느낌을 자아내며
관객들을 사로잡기 시작한다. 1891년부터 1910년까지의 10 동안
그의 작품은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며, 구상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이 동시에
존재하게 된다. 작품에서 보이는 부분 부분의 양상이 때로는 환상적이고
때로는 평면적인 면으로 혼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후 1897 비엔나
분리파가 형성되고 그가 회장으로 임명되면서 그는 국제적인 평판을 얻으며
화가로서의 명성을 떨친다.

클림트의 작품에는 유난히 많은 여성이 등장한다. 그리고 클림트에 의해
표현된 여성상은 '요부' 동시에 '어머니'라는 대조적인 상징성을 동시에
부여한다. 이는 클림트가 개인적으로 갖고 있었던 어머니에 대한 고착
현상과 여성을 통한 시대정신의 표출이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당시 프랑스에선 최초의 여자중등학교가 등장했고, 독일에서도 여성 교육
기관이 생기는 여성의 지위가 향상되어 가는 분위기였다.
여성들은 가부장적인 서양 문명의 오랜 관습을 서서히 벗어 던지기 시작했다.
일터에서 자아를 발견하고, 스스로의 권리를 찾기 위해 투쟁을 불사하는
여인들. 클림트는 여성들이 발휘하게 엄청난 힘을 미리 예견하면서, 작품
속에서 남성의 파경을 그렸던 것이다.

클림트는 외설과 퇴폐적인 요소로 당대의 전통 화단에서 많은 비난을 받았다.
특히 대학의 천장화가 많은 논란이 되었지만, 그는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독자적인 노선을 그려 나갔다.
이후 보수적인 미술 집단이었던 '쿤스틀러하우스 Kunstler-haus(미술가의
)' 회원이었던 클림트는 동안 화가들에 의해 제작되어져 왔던 작품들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1898년에 비엔나 분리파를
주도적으로 이끌기 시작했다. 분리파의 목적은 미술과 삶의 상호작용을
이룩하는 것에 있었다. 대중들에게 어떤 의미를 주고, 낡고 판에 박힌 사상에
의존하지 않는 작품을 제작하기 위한 것이었다.
1894
클림트에게는 대학교의 강당 천장을 장식할 작품을 의뢰 받았다.
하지만 벽화가 제작되자 그의 작품에 대한 비난은 끊이지 않았다.
그는 오직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결과 <철학>이라는 작품을 공개했을
클림트에 대한 동조자와 반대자들의 논쟁은 매우 격렬하게 이루어졌다.
곳곳에 등장하는 나체의 인물들은 커다란 충격이었고, 그의 그림들은
추악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이성의 위대한 힘을 찬양하고자 했던 본래의
의도와는 달리 작품 속의 인간들은 혼돈에 휩싸인 뒤엉켜 있었다.
사건으로 클림트는 복고주의적인 반동에 부딪치며 소외를 당했다.
하지만 <법학> 통해 클림트는 그의 분노를 마음껏 터뜨렸다.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는 남자의 모습은 고통스러운 죽음을 암시한다.
세기말적인 음산한 분위기는 이후 <의학>에서도 이어지며 에로틱한
복수의 여신은 섬뜩할 정도로 관객들의 심장을 자극했다.

황금색의 화려한 색채와 섬세한 구성. 클림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이같은
장식성은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클림트가 미술교육을 받았던 응용미술
학교의 자연스러운 영향도 있었지만, 이는 당시의 유행하던 미술사조인
아르누보와 맥락을 같이 한다.
또한 클림트의 작품에서는 자연스러운 공간성의 파괴를 목격하게 된다.
장식성을 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클림트는 상징주의적인 요소를 배제하지
않았다. 클림트는 1918 그가 후원하고 제자로 삼았던 에곤 쉴레와
같은 해에 눈을 감았다.

*요셉 펨바우어,1890*

*Portrait of a Lady(Frau Heymann?), 여인의 초상,1894*

*Music I, 1895*

*지혜의 여신 팔라스,1898*

*Nude Veritas, 1899*

*유디트 I(Judith I), 1901*

클림트 회화의 특징이라고 하면 인간의 사랑과 , 죽음에 대한 주제를
다양하면서도 화려한 무늬로 이루어진 장식 모자이크로 표현했다는데 있다.
그는 19세기말 "유겐트 스틸 Jugent Stil"이라고 불리는 "아르누보" 양식을
창출하면서 "빈분리파" 거장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
유디트 > 8 뒤인 1909 <유디트 > 나란히 유디트를 주제로
그린 클림트의 대표적인 회화 작품이다.
그림에는 적장 호로페르네스의 목을 껴안고 격정과 황홀 상태에 있는
유디트의 기묘한 표정과 관능이 나타나 있다. 유디트는 상당한 미모를
지닌 여성으로 표현되었으며, 동시에 세례 요한의 목을 자른 살로메의
이미지와도 겹쳐져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반쯤 벌어진 입술에서 보이는 , 오른쪽 눈은 감았지만 왼쪽 눈은 약간
채로 현실이 아닌 이상의 세계를 보는 듯하고, 금박 장식의 아래 왼쪽
젖가슴은 노출되어 있지만 오른쪽 젖가슴은 투명한 의복 위로 살짝 비쳐지게
표현되어 더욱 관능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오른쪽 아래에는 적장의 머리가 반쯤 보이는데, 죽음을 뜻하는 검푸른 얼굴
빛깔과 감은 눈은 여러 가지 의미를 던져준다.
, 그림의 구도는 모두 비상칭적인 배치를 하면서 유디트가 만들어내는
관능과 장식적인 공간을 더욱 수수께끼같은 알레고리로 표현하고 있다.

*베토벤 벽장식(Beethoven Frieze),1902*

적대적 힘이라는 소제목을 가지고 있는 작품은 예술가인 베토벤을
신처럼 숭배하고자 제작된 작품 하나이다. 신전, 조각상, 회화, 부조
등이 제작되었고 대부분 성서나 신화 속에서 주제를 차용했다.

*에밀 플로게의 초상(Portrait of Emilie Floge),1902*

클림트에 있어 여성은 일종의 구원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여인에게 안주
하지 못하고 정신적인 사랑과 육체적인 유희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많은
여성들을 만났다. 클림트의 작품 세계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여성으로
미치 침머만, 에밀 플로게,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가 있다.
평생을 동반자로 함께 했던 에밀 플로게는 클림트가 죽는 순간까지 찾았던
사람이었다. 또한 클림트의 많은 작품에 주인공이 되었고, 클림트는 그녀의
사진을 찍는 것도 즐겨했다고 한다. 그들은 서로 사랑했으며 상호간의 정신적
지주로서 항상 곁에 머물렀고 관계의 선을 절대로 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달콤한 사랑의 말도 오가지 않았으며 때론 사업의 동지로서 때론 여행의 동반자
로서 만족했다는 것이다. 여느 에로틱한 작품과는 다르게 작품에서 에밀
플로게의 모습은 다소 정숙해 보인다.

*소원 I,1903*

작품이 탄생하게 배경에는 '미치 침머만'이라는 여성이 있었다.
그녀는 한때 클림트의 모델이었으며 클림트와의 사이에서 명의 아이를
낳았다. 비록 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사생아였지만 아이에 대한 클림트의
애정은 각별했다고 한다. '희망'이라는 작품이 탄생할 당시 미치는 그의
두번째 아들을 잉태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시기 클림트의 작품속에는
임산부의 모습이 자주 출현한다. 처녀들의 어떤 모습보다도 임산부가 옆으로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고 극찬하기도 했다. 그러나 탄생의 기쁨이
가시기도 전에 죽음을 맞은 아이를 생각하면서 희망은 절망이 되고 기쁨과
환희가 존재하는 화폭에는 해골과 가오리를 연상시키는 괴상한 것들로
채워지게 되었다.

* I, 1904~07*

*물뱀 II,1904~07*

*나무아래 장미가 있는 풍경,1905*

클림트가 꽃을 테마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대략 1905년부터
시작하며, 그가 죽기 전인 1917년까지 계속 이어진다.
1905
년에 완성한 작품 <해바라기가 있는 농가의 >이라던가, 1907년에
<
양귀비가 있는 초원>, 1910년에 그린 풍경화 <공원>, 1912년에 완성한
<
사과나무 1>, 1916년에 마찬가지로 바트 가스타인 휴양소에서 그린
<
사과나무 2> 등으로 이어지며, 여기에 있는 <나무아래 장미가 있는 풍경>
1905, 클림트가 풍경과 꽃을 주제로 그리기 시작한 해에 완성된
그림이다. 클림트가 그린 풍경화의 대부분은 묘하게도 캔버스 크기가
110 × 110cm
정해져 있다. 하지만, 화려한 장식회화를 자랑하던
빈분리파였던 그는 여체의 아름다운 몸과 사랑을 담은 그림을 주로 그렸으며
그림들의 캔버스의 크기는 다양하다. 풍경을 주제로 그린 대부분의
그림들은 작품을 포함해서 화폭의 공간은 전부 무수한 색채의 얼룩점으로
덮혀 있다. 무한한 공간의 확장과 수많은 붓의 터치가 만들어낸 공간은 그가
풍경을 보면서 느끼는 시간과의 합일을 재현하려는 이미지로 읽을 있다.
, 19세기 인상파의 기법이 연상될 만큼 점묘화법으로 그려진 수많은
장미들은 무한공간과 시간을 의미하며, 휴양소에서 그려진 편안한 휴식의
느낌을 클림트는 화폭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각각의 장미들이 집합해서
겹쳐지고 어울리면서 거대한 장미나무 숲을 이루는 풍경은생명감 넘치는
자연의 교향곡을 연주하는 공간을 부여한다.
클림트는 화랑에서 열렸던 < 고흐 회고전>에서 풍경과 꽃에 대한
강렬한 인상을 얻은 풍경화를 그렸다고 전해진다.

*3대의 여자(The Three Ages of Woman),1905*

잠든 아이와 아이를 안고 있는 젊은 여인. 그녀는 꿈을 꾸듯 눈을
있다. 젊음, 희망, 밝음의 이미지를 품고 있음에도 전혀 사실적이거나
현실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약간의 간격을 두고 서있는 늙은 여인은 검게
그을린 피부와 마른 몸에 어울리지 않는 불룩 나온 배를 하고 뭔가 고통스러운
한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있다. 사신이 바로 앞에 있는 것처럼......
클림트가 인간이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는 삶의 과정들을 그림에 담아낸
작품은 만성적인 정신질환에 시달리던 누이와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한 ,
특히 여성의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의 과정으로서 그려진 것이라고 한다.

*프리자 리들러의 초상,1906*

*히게이아(Hygeia),1907*

오스트리아 교육부의 주도로 제작된 대학의 천장화 시리즈는 의학, 철학,
신학, 법학이었고, 클림트는 신학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그렸다.
"
의학" 부분그림인 작품은 에로틱한 복수의 여신 "헤게이아"이다.
여신 위에는 죽음의 신이 많은 여인들 사이에서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있다. 때문에 생명을 살리는 의학을 무시했다는 의료진들의 엄청난
반발을 사기도 했던 작품이다.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 I(Portrait of Adele Bloch-Bauer I), 1907*

청년기 작품과는 달리 후기의 그림들은 장식성이 점점 풍부해져 갔다.
때부터 그의 화면에서는 심지어 공간까지도 장식들로 가득차게 된다.
금빛 조각들이 풍부하게 사용되어 철인으로 눌러 박기도 하였다.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는 부유한 금융인의 딸로서 매우 매혹적인 여인이었다고
한다. 위의 그림만 보아도 아름다움을 상상할 있을 하다.
클림트를 위해서 기꺼이 누드모델을 서줄만큼 그를 신봉했으며 오랜동안
육체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유디트' '키스' 탄생시킨 주인공이기도 하다.

작품은 현재(2006 9) 회화 사상 가장 비싼 값에 팔려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이 되었다. 미국 뉴욕 맨해튼의 '노이에 갤러리' 블로흐바우어의
후손으로부터 그림을 구입했다고 한다. '노이에 갤러리' 세계적 화장품 메이커
에스테 로더 그룹을 세운 에스테 로더(2004 사망) 아들 레너드 로더와
로널드 로더가 설립한 갤러리다.
1
3,500 달러에 매매된 작품은 2004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1 416
달러에 낙찰된 파블로 피카소의 <파이프를 소년(1905)> 보유해 최고가
기록을 경신한 것이다.

*입맞춤, 190708*

작품은 클림트의 수많은 그림 가운데서 특히 알려진 유명한 그림인데
이유는 "키스"라는 독특한 제재를 다루고 있다는 점과 특이한 화면구도
에서 나타나고 있다. 작품 <키스> 1903년에 매킨토시 부처가 베엔젠돌프
음악당을 위해서 그린 벽화 <바람의 오페라> <바다의 오페라>에서 깊은
영감을 받은 결과 그렸다고 한다. 입맞춤하는 남녀는 꽃밭 속에서 서로
껴안은채 멈추어 있으며, 꽃밭은 남녀를 감싸는 지상낙원의 공간처럼
보이고 있다. 하지만 머리를 꽃으로 장식한 사람을 감싸는 어두운 색채로
이루어진 공간은 허무와 무거움, 절대적인 고독감을 연상시키고 있다.
남자는 직사각형의 모자이크 무늬의 의상을 입고 있으며, 여자는 원형에
붉고 검은 색의 점들이 무수하게 찍힌 장식이 화려한 금색 옷을 입고 있다.
남녀의 키스라는 지극히 평범한 소재는 그림에서도 특별히 눈에 만한
느낌을 부여하지는 않지만, 사람의 행위보다는 그들이 입고 있는 의상과
교차되는 색채가 만들어내는 배경에 더욱 주목하게 된다.
클림트는 장식적인 묘사를 위주로 하는 회화에 집착한 나머지, 형식에서는
혁신적인 성과를 올렸지만 빈약한 내용을 답습하게 되면서, 그의 회화는
한계에 부딪히게 되었다.

*Elisabeth Bachofen-Echt*

*The Sunflower,1906-07*

*소원 II,1907~08*

Danae,1907~08*

클림트의 회화에서 중요한 주제는 관능이다. 외설스러움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지만, 클림트의 그림에서 에로스는 반복되는 주제이다.
<
다나에>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제우스에게 겁탈 당한 여인이다.
주피터를 상징하는 쏟아지는 황금 빗줄기를 받아들이려고 몸을 도사리고 있다.
그녀를 작가는 화려한 장식에 둘러 쌓이게 하고 뽀얀 나신을 속에 묻어 겁탈
당한 여인의 슬픔과 원초적인 아름다움을 극적으로 병치시키고 있다.
이는 당시 인문학이 관심을 기울인 인간 내면세계에 대한 관점- 본능적 충동
(
이드) 의존하는 새로운 인간상에 대해 보내는 작가의 지지로 보인다.
<
다나에> 잠재적 성욕을 내포하는 여인들을 포착하고 있다.
여성의 육체를 표현하는 있어서 물결모양의 육체와 구불구불한 긴머리는
노골적인 관능성을 드러내는 당시 회화의 특징이었다

*유디트 II, 1909*

클림트의 작품 <유디트 > 1901년에 완성된 <유디트 >
같은 주제를 담은 그림이다. <유디트 > 좀더 장식적인 화려함과
유디트의 아름다운 모습에 집중했다면, 그림의 색채와 인물은 전형적인
아르누보풍으로 표현되었다.
유디트란 구약성서 외전(外典) 하나인 "유디트서()" 나오는 용감한
부인의 이름인데, 시간이 흘러 후세에 와서는 민족 존망의 위기에 목숨을
내던지고 위기에 빠진 민족을 구하는 여성의 대명사로 뜻이 변하게 되었다.
그녀는 베트리아를 포위하고 있던 앗시리아의 장군 호로페르네스의 진영에
자진해서 들어가 적장이 방심한 틈을 타서 목을 잘라 동포를 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유디트서" 실제 사실이라기보다는 소설적 상상의
산물일 것이라고 하는데, 기원전 160-100 전에 씌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클림트의 그림은 유디트를 주제로 삼고 있지만, 입고 있는
의상이나 색채는 당시 빈분리파가 주도한 "유겐트 스틸", "아르누보"
양식이 적용되어 있다. 숨이 끊어진 호로페르네스의 잘려진 머리는 눈을
감은 모습이 반정도만 드러나고 있으며, 유디트의 표정과 손이 취하는
포즈는 격렬한 행위를 끝내고 아직 격정에 휩싸인 듯한 자세로 묘사되어
있다. 사랑과 죽음이 극적으로 교차되는 이미지가 생생하게 묘사된 뛰어난
작품이다.

*마다 프리마베시,1912*

*위게니아 프리마베시,1913~14*

*정원 오솔길의 ,1916*

*죽음과 ,1916*

당시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유럽은 말세적 비관주의가 휩쓸고 있었다.
1908
년에는 8만명 이상의 생명을 앗아간 지진이 일어났고, 2 뒤에는
헬리혜성이 나타나 많은 이들을 공포로 몰아 갔으며 1912년에는 호화여객선
타이타닉 호가 침몰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느껴졌던
죽음에 대한 공포를 클림트는 죽음의 신에 직면한 사람들로 표현하고 있다.

*Adam and Eve ,Unfinished,1917-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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