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미술사58 표현주의 : 파울 클레 프란츠 마르크

서양 미술사 - 58(표현주의: 파울 클레, 프란츠 마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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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가의 소묘가:자화상/Paul Klee


★ 파울 클레(Paul Klee:1879~1940) ★


파울 클레는 스위스 베른 근처 뮌헨부흐제 출생으로 현대 추상회화의 시조이다.
어려서부터 회화와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바이올린 솜씨는 전문가 수준
이었다. 21세 때 회화를 선택한 후에도 W.R. 바그너와 R. 슈트라우스, W.A. 모차르트
의 곡들에 심취, 그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1898~1901년 독일의 뮌헨에서
그림공부를 하고 세기 말의 화가 F. 슈투크에게 사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초기 제작
은 모두 어두운 환상적인 판화가 많으며 W. 블레이크, A.V. 버즐리, L.F. 고야 등의
영향이 짙다. 1911년 칸딘스키, F. 마르크, A. 마케와 사귀었고, 이듬해 1912년 '청기
사' 제 2회전에 참가하였으나, 1914년 튀니스 여행을 계기로 색채에 눈을 떠 새로운
창조 세계로 들어갔다. 1921년 바이마르의 바우하우스 교수, 후에 뒤셀도르프 미술학
교수가 되어 1933년까지 독일에 머물렀다. 당시 독일에서는 나치에 의한 예술 탄압이
한창 진행되던 시기로, 102 점에 이르는 작품을 몰수 당하자, '독일은 이르는 곳마다
시체 냄새가 난다.'라고 말하고는 스위스로 돌아가 베른에 정착했다.
그는 지병으로 60세에 사망하였는데 최소한 8,926 점의 작품을 남겼다.
스위스 베른에는 이탈리아 건축가 Renzo Piano가 설계한 클레박물관이 2005년 6월
에 오픈해 4천여 점의 클레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클레는 가장 뛰어난 몽상가들 중 한 사람으로, 즉 우주 변화의 비밀을 깨달은 미술가로
예찬되고 있다. 그의 작품은 회화적 환영에 대한 그의 놀랄 만한 지식을 보여준다.
환상적인 클레의 미술은 겉보기에 현실을 마술적으로 변형시킴으로써 일어나는 시적인
주문(呪文)을 전달하고 있다. 표현주의를 '개인적인 감정의 직접적인 시각화'라고 본다
면, 클레는 아마 여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색채와 형태 및 공간의 새로
운 언어를 창조해 의미를 강하게 전달하는 은밀한 상징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클레는 또한 뛰어난 음악가였으며, 그래서 그의 작품 체계는 상당 부분이 음악적 형식
으로 이루어져 있다. 클레에게 미술은 지구가 우주의 모습을 예증하고 있듯이 창조의
상징이었다. 그는 평범한 현실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의 그림들을
보고나서야 비로소 알 수 있는 자신만의 독특한 현실을 창조했다.
그는 사물의 현재 상태가 단지 순간적이고 우연적인 배열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으
며, 그래서 과거의 세계나 생성중에 있는 세계를 전달하려고 했다. 미술 작품이 사람을
즐겁게 하는 장식품 이상의 것일 수 있다면, 또한 통찰력을 주고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라면, 클레가 가장 창조적인 시기로 손꼽히는 미술사의 한 부분에서 가장 존경받는
미술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클레는 선을 사용하여 사물의 형태를 그렸으며, 상징주의 또는 표현주의 기능을 발휘
하기도 하였다. 또한 말년에는 선을 이용하여 기호적 문양을 만들어 작품을 제작하기도
했다. 인상파 화가들에게 받은 영향으로 색채와 음악의 관련성을 제시하기도 했다.
마티스가 화려한 색채의 마술사라면 클레는 선을 자유롭게 이용한 선의 작가라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을 감상할 때는 그가 표현하고 있는 선들을 눈으로 협소하게 쫓아가지
말고, 그림 전체를 한눈에 넣고 선의 움직임을 한 번에 느끼야 한다. 춤처럼, 음악처럼
흔들리는 선의 흐름을 보면 그의 그림을 느낄 수 있게 된다. 클레에게 있어 회화는 음악
과 미술을 결합시켜 시각적 예술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의 예술은 음악이고 문학이며
자연을 향한 영혼의 울림이었다.

1914

Red and White Domes, 1916

Once Emerged from the Gray of Night, 1918

Hermitage(속세를 떠난 사람의 집), 1918

클레의 39세 때 작품인데, 이 해 독일은 패전하고 클레도 3년간의 군대 생활에서
풀려나 베른으로 귀환한다. 제1차 세계 대전을 체험한 후에 그려진 일련의 풍 경화는
그 환상성에 있어서 새로운 시기를 이루고 있는데 태양, 건물, 새, 나무, 고기 등 육지,
바다를 막론하고 우주 공간에 존재하는 모든 유기체들이 현실 세계의 서열과 질서를
벗어나 동등하게 그려져 있다. '우주의 그림책'을 연상케 하는 이 그림에서, 그는 '인간'
이라는 것이 우주의 대질서 속에서는 '다른 생물체와 똑같이 하나의 미미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표출한 예술적 철학적 사유의 산물을 표상했는데, 선묘(線描)와
색채가 일체화되어 독자적인 환상의 세계가 형성되었고, 그 외에 선명한 색채라는 점
에 주목해야 할 작품이다.

Southern(Tunisian) Gardens, 1919

Villa R, 1919

클레의 풍경화 가운데서 걸작으로 꼽히는 40세 때 작품이다. 화면 중앙의 구축적인
건물, 빨간 길이 강물처럼 그려져 있고 노란 해와 푸른 달이 중천에 떠 있다.
이 그림에서 관심을 모으는 것은 초록색으로 된 'R'자인데, 이 'R'자는 그저 글자로써
넣은 것이 아니라 태양과 건물 등 화면에 등장된 모든 제재와 동질의 요소로, 또한
하나의 기호로서 화면 구성에 참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클레는 30대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유채화를 그리기 시작했는데, 그의 선은 더욱 단순화 된 문자 기호로 변해
갔다. 이 작품은 실제로 존재하는 풍경이 아니라 클레의 환상 속에 있는 풍경이다.

Temple Gardens, 1920

공기의 精의 使者, 1920

클레는 동화에 등장하는 테마를 클레는 즐겨 채택했다. 이 그림은 색동옷을 입은 듯한
남녀 모양의 새를, 색종이에 쵸크로 바탕을 칠하고 그 위에 수채와 유채를 병용하여
그린 것인데, <속세를 떠난 사람의 집>에서 보여준 우주 질서 속의 등가(等價)의식이
내면 세계를 이루고 있다. 세계 대전을 체험한 클레는 초기 동판화에서의 풍자적이며
그로테스크한 이미지에서 독자적이며 유머러스한 표정으로 바뀌었는데, 이 작품에서도
그러한 유머와 독자적인 색채 및 포름을 엿볼 수 있다. 날개를 파닥 거리는 이 그림이
시사하는 이미지는 그의 만년의 작품 <천사>로 변형되어 더욱 독특한 이미지를 풍기면
서 파닥인다.

Runner at the Goal, 1921

Tale a la Hoffmann, 1921

Senecio, 1922

Red Balloon(Roter Ballon), 1922

Puppet Theater(인형극), 1923

이 그림은 클레가 바이마르의 자기 집에서 펠릭스를 위해 만든 인형극의 무대를 모티브
로 삼은 작품이다. 오른쪽의 탑, 왼쪽의 태양, 도로와 연못과 같은 이미지는 인형극의
배경이라고 보여지는데, 그것들이 어린이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클레의 기성 이미지란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의 기성 관념 속에는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상념의 나래'가 서식
하고 있어, '기성 관념'과 '어린이의 꿈'이 거의 동질의 것이라는 데 클레의 천재성을 유추
할 수 있다. 클레는 어린이와 정신병 환자에게 깊은 관심을 표명했는데, 치졸하고 소박
한 것에 대한 흥미보다 순수성에 대한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의 '기성 관념' 역시
순수성에 뿌리를 박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Ancient Sound, Abstract on Black, 1925

이 무렵 그는 화면이 바둑판처럼 분할되고 갖가지 색으로 칠해진 소위 '클레의 매직 스퀘
어'를 많이 그렸다. '매직 스퀘어'는 마법진(魔法陳)으로 번역되는데, 가로, 세로 비스듬
히 어느 방향으로 가산하여도 동일한 수치가 되는 숫자의 격자적(格子的) 배열을 뜻한
다. 클레의 작품과 숫자의 마법진 사이에는 특별한 관계가 없고, 다만 색면의 격자 모양
의 배치로 어떤 마술적 효과를 기대한 구성이라고 생각된다. 클레는 철저한 등가치 사상
의 소유자였다. 이 '매직 스퀘어'도 등(等)가치와 일맥 상통하며, 당시 발표된 센베르크
의 '12음계의 이론'과도 공통점이 있다.

The Mask with the Little Flag, 1925

노란 새가 있는 풍경

이 그림은 종이 위에 유채와 수채를 병용해서 그린 것이다. 클레는 '회화도 하나의 꿈이
다.'라고 말했는 데, 밤을 생각케 하는 어두운 공간 속에 양식화된 환상의 식물이 꿈의
판타지를 노래하고, 일곱 마리의 노란 새가 화면의 이곳 저곳에서 주자(奏者)들을 응시
하고 있다. 특히 오른쪽 위의 한 마리의 새는 구름에 거꾸로 매달려 공간의 상하 관계를
뒤집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공간의 상하층을 전도시킴으로써 이 그림에서 느낄 수 있는
환상성을 더욱 두드러지게 했다. 클레의 1기에 해당하는 1921년까지의 그의 작품의
특징은 환상 원근적 공간 다층색채로 분류되는데, 이 작품은 '환상 세계'에 속하는 것
으로 볼 수 있다.

Fish Magic(물고기의 마술), 1925

클레는 새와 함께 물고기를 자주 그렸다. 그는 이탈리아 여행 때 일부러 나폴리의 수족관
에 들렀고, 그때의 인상을 일기로 썼다. 이 그림은 <노란 새가 있는 풍경 >과 흡사하여
환상의 해저와 같은 정경을 연상시킨다. 공중에 떠 있는 고기 떼라고 말해도 무방한데
꽃과 네모 반듯한 상자(?) 속의 시계, 화면 이곳 저 곳에서 헤엄치는 고기 등이 아래쪽
의 인물과 동등한 존재로 그려져 있다. 여러 종류의 재질을 써서 독자적인 '우주의 물고
기'를 그린 것으로 일종의 환상적인 박물지 (博物誌)라고 말할 수 있다. 자로 그은 듯한
날카로운 선, 인물 윤곽선의 가는 선, 다양한 고기 빛깔 등이 인상적이다.

The Golden Fish, 1925

Around the Fish, 1926

<물고기의 마술>과 같은 계열의 작품이다. 클레가 어류에 쏟은 관심은 그의 오브제
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강한데, 그는 고기를 고기라는 이유만으로 그로테스크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라고 믿었고, 이는 그의 일기에도 나타나 있다. 이 그림에서 중앙에
그려진 한 마리의 큰 물고기는 왜곡의 변형을 가하지 않았는데도 기묘한 인상을 풍기며,
고기와 양식화된 기호(記號)들을 동질의 것으로 표현하여 그의 우주 사상을 표백했다.
그림 오른쪽 위쪽에 십자가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 물고기는 그릇 속에 담겨진 곧
사람에게 먹히게 되는 생선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Cat and Bird, 1928

Conqueror, 1930

Ad Parnassum, 1932

삼각형의 피라밋, 둥근 태양, 수평으로 이동하는 구름, 원통의 문, 모자이크로 된
벽면 등 일체화된 환상적인 화면이 점묘(點描)로 이루어지고 있다. 클레는 50세를
전후해서 점묘에 의한 작품을 많이 제작했는데 후기 인상파에 대해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은 그가 이런 그림을 그린 것은, 후기 인상파처럼 외광을 회화라는 인공의
세계에 이식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회화를 색채의 다층 구조로써 만들어 내는
구축 의지(構築 意志)의 발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그림에는 색채의 아라베
스크한 감동과 자로 그은 것 같은 날카로운 선이 반영되어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The Future Man, 1933

우주인 같기도 하고, 조인(鳥人)이라고 해도 무방한 미래의 인간이 앞으로 행진하고
있다. 팔과 다리를 빼고는 건빵 모양이 겹겹이 쌓인 평면에 인간의 형체를 오려 붙인
것 같은 화면인데, 마티에르의 효과가 아주 야릇한 게 특색이다. 클레는 이미지 형성
에서 변신을 본질적인 요소로 채용했었는데, 이 그림에서 변신 외에 이미지와 재질을
긴밀하게 결합시킨 수법을 써서 통일된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 냈다.
1920년에 그린 < 공기의 정의 사자>와 비교하면 여러 면에서 공통점이 있고다.
1만 점에 가까운 작품을 제작했으면서도 지루한 반복이 없는 클레의 경이를 실감케
하는 좋은 본보기이다.

Southern Gardens, 1936

Legend of the Nile

Insula Dulcamara, 1938

Embrace, 1939

Captive

Refuge

가엾은 천사, 1938

클레가 천사를 주제로 그린 작품은 총 50점에 가까운 데 60% 이상이 죽음을 앞둔
2년 동안에 그려졌다. 천사는 르네상스 이전부터 많은 화가들에 의해 헤아릴 수
없이 그려졌다. 이들은 신과 인간과의 중개로서의 천사상을 그렸었다.
그러나 클레는 그 전통에 의거하면서도 신과 인간의 중개자라는 성격은 거의 없고,
인간과 인간이 아닌 어떤 것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 같은 모습의 천사로 대중을
이루었다. 어떤 경우에는 매우 그로테스크하고 어떤 경우에는 매우 코믹하다.
이 그림에서는 그로테스크와 유머가 함께 서식하고 날개를 펴고 비상하려 하나, 머리
가 무거워 뜻대로 되지 않는 느낌이다. 클레의 시니컬한 일면을 보여준 작품이다.

아름다운 정원사

만년에 이르러 클레의 그림에 '가엾다'든가 '아름답다'라는 감상적인 어휘가 등장하는데,
이 작품은 그 중의 하나이다. 이 그림에도 <가엾은 천사>에서처럼 눈알 부분이 뻥
뚫린 구멍처럼 그려져 괴기한 느낌을 주는데, 이런 유의 작품은 이 외에도 몇 점이 있다.
<아름다운 정원사>라는 제목과는 달리 죽음의 그림자 같은 음울한 분위기가 감돌며,
망양(茫洋)의 배경과 오른편에 나뭇잎 비슷한 포름 이외에는 정원 같은 이미지가 전혀
보이지 않는 이해할 수 없는 분위기를 감돌게 하는 작품이다. 시시각각으로 다가 오는
죽음 앞에 이른 클레가 '인생을 벌초하는 정원사'를 상상하면서 그린 듯하다.

Park of Idols(우상의 공원), 1939

Death and Fire, 1940

Woman in Peasant Dress, 1940

無題, 또는 정물, 1940

클레의 유작이다. 가지각색의 물병, 왼편에는 천사가 그려져 있고, 오른편 아래쪽의
노란 원형 속에는 상형 문자처럼 단순화된 꽃이 핑크와 블루로 그려져 있다.
왼편 위쪽에도 꽃 비슷한 것이 있는데, 어두운 배경 위쪽에 떠 있는 노란 태양(또는 달)
이 이 화면의 환상성을 더해 주고 있다. 클레의 만년인 39년에서 40년 사이에 그려진
많은 작품 중에서도 빛깔의 다채로움과 치밀한 색조 및 치밀하면서도 어수선한 분위기
등 색다른 데가 많은 작품이다. '선의 화가' 클레의 최후의 작품이 이렇게 다채롭고
구성이 치밀한 것은 그가 추구한 예술 정신으로 미루어 본다면 오히려 당연하다.
석고 같은 천사는 눈을 감고 있으며, 아래 쪽에는 십자가를 닮은 기호가 그려져 있다.
정물 속에 공존하는 죽음의 천사, 그래서 이 유작에선 클레의 집요한 유머와 코믹한
체취를 느낄 수 있다.


★ 프란츠 마르크(Franz Marc:1880~1916) ★

Portrait of Franz Marc, 1910/August Macke


독일 뮌헨 출생. 화가의 아들로 태어나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였으나 20세에 화가가
되려고 뮌헨미술학교에서 공부하였다. 초기에는 인상파와 독일의 새로운 양식인
'유겐트슈틸'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1907년 2번째 파리 여행에서 고흐에게 감명
받아 동물을 통해 강렬한 자연신비주의를 표현한 이듬해 연작인 《렝그리스의 말》의
첫 작품을 그렸으며, 평생 이 테마에 집착하였다. 1909년 마르크는 '신예술가동맹'이라
는 표현주의 미술가들의 단체에 가입했다. 이곳에서 그는 아우구스트 마케(August
Macke:1887~1914)를 만났으며, 선명한 색채를 넓은 면에 대담하게 사용하는 마케
의 특이한 기법에 영향을 받아 마르크도 비슷한 기법을 실험하게 되었다.
마르크는 1910년 바실리 칸딘스키를 만나 그와 함께 <청기사>라는 정기간행물을 편집
했는데, 칸딘스키는 이듬해 신예술가동맹에서 탈퇴하여 새로운 단체를 만들고, 이 잡지
의 이름을 따서 단체 이름을 '청기사'라고 지었다.
오랫동안 동양철학과 종교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마르크는 미술이란 자연의 객관적 모습
을 정확하게 진짜처럼 복사하는 대신 자연 형태의 정신적 본질을 드러내야 한다는
칸딘스키의 신비주의적 견해에 열렬히 호응했다. 마르크는 칸딘스키의 영향을 받아
정신적 본질은 추상미술을 통해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그는 모든 곳에 퍼져 있는 자연의 정신적 힘에 대한 인간의 자각능력을 문명이 파괴했다
고 믿었다. 그 결과 그는 원시적 인간과 어린이 및 정신질환자들의 미술에 열렬한 관심
을 품게 되었다. 그 자신은 주로 동물그림을 습작했는데, 인간이 아닌 생명의 형태야말
로 활기 찬 자연의 힘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르크는 신인상주의·포비슴, 큐비즘의 영향을 다이내믹한 색채 감각으로 흡수하면서
자신의 작풍을 발전시켜 《붉은 말》과 《푸른 말》을 그렸다. 이러한 동물은 표현주의
라기보다는 오히려 고갱적인 상징주의에 가깝다. 프란츠 마르크는 뮌헨 태생의 도시인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시골의 자연을 동경한 나머지 상막한 도시를 멀리하고 동물을
기르는 생활을 즐겼다. 그는 그의 동물들의 모습과 생태를 직접 관찰, 꼼꼼하게 그렸다.
그가 그리는 동물은 단순한 사실적 표현이 아니라, 자연의 한 상징적인 주제였다.
다시 말해 동물은 그에게 있어서 인간의 상실해 가고 있는 순수한 존재의 한 상징으로
그려졌던 것이다. 1912년에 그린 <붉은 사슴>에는 흰 구름이 오가는 푸른 산꼭대기
에서 평화롭게 뛰놀고 있는 두 마리의 붉은 사슴을 그린 것이다. 구름과 산, 사슬과
초목 모두 같은 비중의 우아하고 부드러운 리듬으로 표현되면서 화면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대자연의 조화라는 관점에서 구성되었다. 마르크의 이런 자연에 대한
경외심과 친밀감은 한해 전에 그린 <작은 푸른 말>에서도 볼 수 있다. 초록의 들판에
서 각자 몸을 다듬고 있는 세 마리의 푸른 말들이 서로 한 덩어리로, 흡사 뭉게구름
같이 엉켜 있다. 이 말들이 가지고 있는 푸른색은 붉은 사슴과 마찬가지로 비현실적인
상징적인 색채이다. 1912년 파리에서 R. 들로네와 만난 후 그의 영향을 받아 그의
포름은 한층 결정도(結晶度)를 높여 작품이 점점 더 역동성을 띠게 되었다.
그는 동물의 다양한 삶의 형태인 사나운 힘과 겁많은 연약함을 표현하기 위해, 들로네
가 화려하게 채색한 입체파적 구성에서 보여준 것과 같이 절단된 공간과 형태를 이용
하기 시작했다. H. 루소의 영향과 더불어 신화적, 우주적인 형상으로 승화되었으며
그의 마지막 주요 작품에서 순수추상적 경향을 볼 수 있다.
마르크는 이것을 더 심화시키지 못한 채 미완성 대작 《티롤》(1913∼1914)을 남겨
놓고 1916년 제1차 세계대전에 출전 베르됭에서 전사하였다.

Indersdorf, 1904

Deer at Dusk, 1909

Cats on a Red Cloth, 1909-10

Horse in a Landscape, 1910

Grazing Horses I, 1910

The Little Blue Horses, 1911

그의 이론에 따르면, 푸른 말은 순수함의 상징임과 더불어 남성성과 엄격성, 지성
따위를 나타내는 존재가 된다. 자연안에는 남성성도 있고 여성성도 있다.
자연은 그 본질을 이렇게 순수한 동물이나 순수한 색체를 통해 우리에게 묵시적으로
드러낸다. 다만 인간이 부정직하고 불순한 까닭에 그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
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마르크의 그림은 이 혼탁한 세상을 밝히는 순수의 빛
이며, 선지자의 비전 같은 것이다.

Dog Lying in the Snow, 1910/11

The Yellow Cow, 1911

Blue Horse I(Blaues Pferd I), 1911

Deer in the Snow, 1911

Monkey Frieze, 1911

The Bull, 1911

Blue Black Fox, 1911

Tiger, 1912

Deer in a Monastery Garden, 1912

1912년 파리에 갔다가 프리즘처럼 색체를 분할한 들로네의 추상회화와 연속 필름의
이미지같은 미래파의 회화에 매료된 마르크는 색면을 나누는 실험에 들어갔다.
1913년부터 동물과 자연의 순수함에도 회의를 품게 되어 결국 색면 실험은 자연과
동물의 완전성을 해체하는 수단이 되어버렸다. 이렇듯 래체의 양상이 과격해지면서
마침내 추상회화의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었지만, 전쟁에서 전사하는 바람에 그의
실험은 미완성으로 끝나고 말았다.

Cows, Yellow, Red, Green, 1912

Red and Blue Horse, 1912

The Monkey, 1912

Deer in a Monastery Garden, 1912

Three Cats, 1913

Foxes, 1913

The Fate of the Animals, 1913

The Unfortunate Land of Tyrol, 1913

Fighting Forms,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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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57 표현주의 오스카 코코슈카

서양 미술사 - 57(표현주의: 오스카 코코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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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스카 코코슈카(Oskar Kokoschka:1886~1980) ★

오스트리아 푀힐라른에서 출생하여 빈미술공예학교에서 공부하였다.
1908년 표현주의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심리적 초상화에 뛰어난 재능이 있었다.
1915년 제1차 세계대전에 종군하였으나 부상으로 귀환하였다. 1919년에는
드레스덴미술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그 후 유럽 각지를 여행하여 1935∼1938년
프라하에 체류하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런던으로 망명하여 대독일 항쟁을
하였다. 판화·풍경화(주로 도시의 경치)·우의화(寓意畵)를 바로크적인 표현으로
묘사하였으며, 만년에는 P. 보나르의 영향을 받아 화면의 색조가 밝아졌다.
코코슈카는 화단의 테러, 미친 코코슈카로 불리며 1908년 데뷔부터 폭력적인 성,
남녀관계의 심리, 인간 영혼의 비극적 상태의 죽음을 주제로 작업했다.
그는 미술 뿐만 아니라 연극에서도 다양한 실험을 시도하였다. 극작가로서도 뛰어나
1907년 발표한 《살인자, 여인들의 희망》은 표현주의적 기법으로 대단한 반응을
일으켰다. 이 밖에 희곡으로 《히오프 Hiob》(1917),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Orpheus und Eurydike》(1923), 시집으로 《꿈꾸는 소년들 Die trumenden
Knaben》(1918)이 있다.

초기에 코코슈카는 활기 차고 유동적인 선과 분위기를 표현하는 색채를 사용하여
풍경화를 주로 그렸다. 이 기법은 그후 그가 그린 모든 그림의 토대를 이루었다.
언뜻 보기에 코코슈카의 풍경화는 그 밝은 색채와 혼란스러운 여러 색의 터치로 인해
사라질 듯한 형태 묘사, 그리고 빛에 대한 집착 때문에 인상파의 원칙을 따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의 시각은 인상파 화가들과는 달랐다. 인상파 화가들은 비록 혁명적
방식을 택하기는 했지만 눈에 들어오는 것만 표현하려고 애썼으나 반면에 코코슈카는
색채를 통해 어떤 장면을 바라보는 관찰자의 내적 정서를 표현하려고 애썼다.
코코슈카의 후기 표현양식은 초기 작품에 비해 차분하고 밝으며 더욱 위풍당당하다.
일부 비평가들은 그의 초기 작품에서 볼 수 있었던 흥분과 긴장감이 후기 작품에는 없다는
점을 아쉬워했지만, 미술사가인 한스 마리아 빙글러는 후기의 매우 원숙한 양식적 발전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이렇게 평가했다. "코코슈카는 뛰어난 초기 작품을 통해 약속한
것을 노년의 원숙한 작품에서 이행했다. 이것이 장차 역사의 판결을 결정해줄 것이다.
노년의 원숙한 작품에서 코코슈카는 모든 통찰과 경험의 결산을 그리고 있다.
정신의 내적 실체를 회화 언어로 바꾸는 그의 능력은 세월이 지남에 따라 더욱 커졌다."

Self-portrait Fiesole

Die Windsbraut(Bride of the Wind), 1914

그림 속에 담고자 하는 감정을 강렬하게 표현하는 데 신경을 곤두세웠다.
이 그림에는 코코슈카의 사랑 이야기가 담겨 있다. 1911년 그는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의 미망인이며 그보다 7세 연상인 알마 말러를 만났다. 그는 알마와 사랑에
빠졌고, 3년 동안 그들은 요란한 연애를 했다. 한참 뒤 코코슈카는 이때가 "내 생애에서
가장 혼란한 시기였다"고 회상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오스트리아군에 입대
했을 때에야 알마와 관계를 끊을 수 있었다. 알마는 코코슈카와 헤어진 뒤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와 결혼했다. 코코슈카는 알마와 헤어진 뒤에도 알마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했다고 한다. 그림 속의 두 사람은 코코슈카와 알마이다. 알마는 코코슈카의 품속에서
잠을 자고 있지만, 코코슈카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이 그림은 남녀 관계의 불안정한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그림은 폭풍이라도 몰아치는 듯 심하게 소용
돌이치고 있다.

Lovers with a Cat

The Dreaming Youths - Bearers of Dreams, 1907, 1917/Lithograph

코코슈카의 시집으로 《꿈꾸는 소년들 Die trumenden Knaben》(1918)의 삽화이다.

The Dreaming Youths - Boatmen calling, 1907, 1917/Lithograph

The Dreaming Youths - Eros, 1907, 1917/Lithograph

The Dreaming Youths - The girl Li and I, 1907, 1917/Lithograph

The Dreaming Youths - The Ship, 1907, 1917/Lithograph

Market in Tunis, 1928-1929

Landscape in Scotland - Findhorn River, 1929

Polperro, 1939-1940

The Red Egg

1937년 나치는 '퇴폐 미술'이라는 이유로 독일에 있던 코코슈카의 모든 그림을 미술관에서 제거
했다. 코코슈카는 단지 자신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이런 행위가 문화와 인류의 미래에 불길한
전조가 되었기 때문에 나치의 행위에 분개했다. 같은 해 빈에서 코코슈카의 대규모 전시회가
열렸지만 호평을 받지 못했다. 1938년 영국의 총리 네빌 체임벌린과 아돌프 히틀러가 뮌헨
협약을 맺은 뒤, 그는 올다 팔코프스카(부인)와 함께 런던으로 피신했다.
런던에서 코코슈카는 매우 궁핍하게 생활했으며 유화 물감을 살 돈이 없어 주로 수채화를 그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수많은 대작을 완성했다. <빨간 달걀 The Red Egg>, <합병-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Anschluss-Alice in Wonderland>, <로렐라이Loreley>, <프랑스 공화국
마키단Marianne-Maquis>, <우리는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는가What We Are Fighting For>
등의 그림들은 모두 반파시스트 선언이었다. 이 그림들은 인류의 고통에 대한 그의 비통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지만, 편협한 이데올로기적 견해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다.
이 연작 그림은 제2차 세계대전의 고통을 초래한 장본인인 파시스트뿐만 아니라 모든 권력을
고발하고 있다.

Loreley(로렐라이), 1941-2

안슐루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1942

코코슈카는 이 신랄한 우의화에서 채색과 힘찬 붓놀림을 통해 영국 정치 풍자화의 전통과
바로크 회화 전통에서 물려 받은 영향을 다시 한번 결합시켜 놓는다.
이 작품에서는 오스트리아가 히틀러에 의해 강제 합병된 뒤 코코슈카의 고향이 물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파멸되었음을 꼬집고 있다.

Marianne-Maquis, 1942

이 그림은 파리에 있는 카페 소호에서 영국의 전쟁 지도자 윈스턴 처칠 수상과 몽고메리
장군이 차를 마시고 있다. 중앙에는 프랑스 레지스탕스 Marianne-Maquis이다.

Dos desnudos(Los amantes)

The Duomo, Florence, 1948

Triptych - Apocalypse, 1950

1950년 코코슈카는 신화를 주제로 한 최초의 대규모 3부작 <프로메테우스 이야기Prometheus
Saga>를 제작했다.

Triptych - Hades and Persephone, 1950

Triptych - Prometheus,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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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56 표현주의 : 에른스트 키르히너 에밀놀데

서양 미술사 - 56(표현주의: 에른스트 키르히너, 에밀 놀데)

   


23. 표현주의(表現主義, Expressionism)

Self-portrait, 1925/Ernst Ludwig Kirchner

20세기 초 독일에서는 불안, 긴장, 노이로제가 고조되어 있었다. 독일문화의 중심부에서
시작된 표현주의(表現主義:Expressionism) 운동은 현대를 사는 인간의 고통
과 좌절감을 드러내면서 유럽 전역으로 빠르게 확산되어 갔다.
표현주의 회화는 세계를 대하는 자아의 내면 상태에 대한 주관적 표현이다. 그것은 세계와
부조화를 이루는 자아가 갖는 긴장과 불안의 정서에 기반한다. 이러한 상태는 작품 속에서
도시의 풍경과 자연 속의 인간 등의 소재로 억압의 상황과 해방의 소망으로 연결되어 강렬
한 색채 대비와 형태 왜곡을 통해 표현되거나, 특정한 소재의 분석을 통해 내부의 구조를
표현함으로서 질서를 찾고자하는 형식으로 드러난다. 표현주의 예술가들의 정신적 출발점
은 세계 제1차 대전과 그 전쟁 와중에 생긴 주변 세계에 대한 공포를 들 수 있다.
그들은 자기 고백적으로 극단적인 주관적 감성세계를 극단적인 상황으로 표현하고 있다.
세계 제1차 대전 이전과 대전 당시의 표현주의 세대가 겼었던 내면적인 불안함을 주제뿐만
아니라 그림 기법에서도 찾을 수 있다. 또한 전쟁으로 인해 고정된 사회규범을 파괴하고
모든 형태의 억압으로 해방되고자 했으며 인습의 속박으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 내길
원했다. 시간과 거리에 대한 감각의 변화로 1900년대 지하철의 발명,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최초의 대서양 횡단 비행, 일상생활에서 전화 사용 등으로 사회는 항상 움직이고 있거
나 더 빨리 이동하고 있었다. 이같은 빠르게 변해가는 사회의 흐름속에서 사람들은 불안과
혼란스러움을 느꼈을 것이다. 빠른 과학이나 기술의 발전 등 빠르게 진행되는 학문적인
혁신으로 인간의 무능력과 무가치함을 깨닫게 되었다. 세계의 중심에 있다고 생각했던
인간에 대한 회의가 들기 시작했고, 고향 상실, 개성 포기, 세계에 대한 신뢰관계 파괴 등의
감정을 표현주의자들은 느꼈을 것이다. 1902년 프로이드가 인간의 무의식 세계에 대한
연구인 <꿈의 해석>을 출판함으로써 눈에 보이는 현실을 뛰어넘어 작가 자신의 내면적이고
사색적인 영역으로 의식을 전환시켰다. 표현주의는 비단 시각예술에 한정되지 않고 문학,
연극, 영화에서도 형성되었다.

독일 표현주의 회화에는 세 그룹이 있다. 첫 번째 공식 표현주의 그룹이었던 '다리파
(Die Brucke브뤼케:橋)'
는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Ernst Ludwig Kirchner)에
의해 1905년경 드레스덴(Dresden)에서 결성되었다.
키르히너, 에리히 헤켈(Erich Heckel), 카를 슈미트-로틀루프(Karl Schmidt-Rottluff) 외
에 1906년에는 막스 페히슈타인(Max Pechstein)도 가입하고 에밀 놀데(Emil Nolde)가
참여함으로써 그룹의 규모는 더 커졌다. 그러나 에밀 놀데는 1년 동안 그룹에 가담했지만
본질적으로 고독한 기질의 그는 그룹이나 협회에 참여하기를 꺼려했다. 브뤼케 그룹의 멤버
들은 강한 사명감을 가진 청년들로서 당대의 원대한 사회적 열망에 고취되어 있었던 그들은
회화를 수단으로 인류를 위해 보다 나은 미래를 추구해 나가려고 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혁명적인 엘리트로 여겼으며 호라티우스의 '세속적인 인간에 대한 증오 Odi profanum
vulgus'를 신조로 삼아 도전적인 반부르주아적 태도를 취했다. 브뤼케라는 명칭은 슈미트-
로틀루프가 채택한 것으로 그룹을 하나로 묶는 유대를 상징한다. 나중에는 이 명칭에 좀더
심오한 의미가 부여되어 자신들의 작품이 미래의 미술로 이어지는 '다리' 역할을 할 수 있게
되기를 열망하는 그들의 신념을 나타냈다. 이 그룹은 독일 현대 회화의 출발점을 이루었고
프랑스의 포비슴과 북유럽의 뭉크에 고취되었다. 다리파의 특징은 고통스러워 보이는 선과
캐리커처처럼 왜곡된 형상, 거칠고 감정적으로 격앙된 색채였다.
다리파는 1911년 드레스덴에서 베를린으로 옮겨갔고 1913년 해체되었다.
이후 구성원들은 모두 독자적인 경향을 추구해 나갔다.

브뤼케 그룹은 종종 같은 시기 프랑스에서 일어난 야수주의 운동에 상응하는 독일의 미술
운동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야수주의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브뤼케 그룹 화가들도 모티프
를 자연에서 직접 취하고 추상에 반대했다. 그러나 프랑스 화가들이 늘 회화적 의도를 가장
주요시 했던 것에 비해 독일 화가들은 주제에 임하는 화가의 강렬한 감정을 표현하는 데
더욱 주력했다. 그들은 이런 태도를 삶의 가장 내밀한 본질로 여겼으며 이를 위해 야수주의
화가들보다 더욱 더 왜곡되고 거친 표현을 추구했다. 독일 표현주의는 본능적이고 자발적
이며 주관적인 것에 역점을 두었으며,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라틴 민족의 고전적인 절제
감각은 결여되어 있었다. 결국 브뤼케 그룹의 화가들은 야수주의 화가들에 뒤떨어지는 결과
를 낳았다.

두 번째 그룹은 1910년 베를린에서 헤르바르트 바르덴이 창간한 예술잡지 《Der Sturm
슈투름(폭풍우)》 및 같은 이름의 화랑(畵廊)에 의하여 만들어진 '슈투름그룹'으로
오스트리아의 화가 오스카 코코슈카(Oskar Kokoshka)의 자아와 외계의 상극을 새긴 심리
적 초상화로 대표된다. 바르덴은 자기 나라의 젊은 전위화가(前衛畵家)를 화랑에 결집시켰
을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의 미래파, 초기의 프랑스 큐비스트에게도 문호를 개방하였고, 잡지
에는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와 마르크

세 번째로는 칸딘스키, 마르크를 중심으로 1911년 뮌헨의 신예술가 동맹으로부터 갈라져
나와 결성한 '청기사(Der Blaue Reiter:靑騎士)'그룹이다. 독일 표현주의가
주도하는 흐름 속에서 뮌헨의 화가들은 '청기사'라는 잡지를 중심으로 그룹을 결성했다.
이들은 베를린의 전위파 미술가들이나 키르히너와 강한 대조를 이루었다. 칸딘스키가 공동
창설자로 참여했던 청기사파는 무엇보다도 색채에 기초한 운동이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
그룹과 마티스, 야수파, 들로네, 클레(Paul Klee)는 긴밀한 유사성을 갖고 있다.
이미 추상미술로 가고 있던 칸딘스키 외에 프란츠 마르크, 아우구스트 마케(August Macke)
그리고 알렉세이 폰 아블랜스키가 참여했다. 동물을 매우 좋아한 마르크는 말에서 운동의
명칭을 따올 것을 희망했으나 칸딘스키는 기사를 고집했다. 하지만 파랑이라는 단어의 선택
에는 둘 다 동의했다. 두 미술가 모두가 파랑색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이론가인 칸딘스키는
논문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을 발표하여 유물론과 리얼리즘에 지배당하고 있는 미술에
반기를 들었으며, 화가의 내적필연(內的必然)에서 우러나는 정신성, 환상성을 주장하였다.
그의 제작과 더불어 마르크, 클레 등의 형태의 분석, 종합의 시도는 '청기사파'가 지향하는
현대 추상회화의 중요한 주류의 하나로서 주목된다.


★ 에른스트 키르히너(Ernst Ludwig Kirchner:1880~1938) ★

Self-Portrait, 1914

독일 바이에른주 아샤펜베르크 출생으로 1901∼1905년 드레스덴의 공업전문대학
에서 건축을 배우면서, 그 사이 뮌헨의 미술학교에서 H.오프리스트에게 사사하여 회화를
배웠다. 드레스덴에서는 E. 헤켈과 사귀었고, K.S. 로틀루프와 F. 브라이엘(Fritz Bleyl)
등과 함께 그룹 '브뤼케'를 창설, 화려한 표현주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키르히너가 초기 목판화 작품에서 보여준 독일판 아르누보인 유겐트슈틸(Jugendstil)의
양식화된 선은 곧 가파른 각진 형태로 바뀌었는데, 이런 특성들은 그가 높이 평가한 독일
후기 고딕의 목판에서 끌어온 것으로 브뤼케 그룹의 양식적 특성이 되었다.
키르히너는 뮌헨에서 열린 전시회에서 본 후기 인상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았으며, 특히
고갱과 반 고흐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주로 뭉크의 영향을 받아 단순화된 드로잉과
과감한 대조를 보이는 색채를 사용하면서 야수주의자들의 작품과 유사한 방식을 발전
시켰다. 1907~10년까지 '야수들의 왕' 앙리 마티스와 그의 동료들이 1905년에 도달한
양식과 표면적으로는 유사한 회화양식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키르히너는 야수주의보다 더
충동적이고 직접적인 태도로 주제에 접근했으며, 회화적 가치는 그다지 고려하지 않았다.
그는 야수주의보다 더욱 주제에 몰두했는데, 도시 풍경의 인간적 파편들 속에서 섹슈얼리
티의 뉘앙스를 가지고 서커스와 뮤직홀의 생활에서 뽑아낸 감성과, 유쾌함, 슬픔을 물감
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키르히너는 1911년 베를린으로 이주했고, 1912년과 1913년에는 독일 표현주의의 가장
극단적이고 가장 성숙된 표현으로 여겨지는 거리풍경 연작을 제작했다.
그는 더 격렬해진 양식으로, 속도와 병적인 우울함과 화려함,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직전
베를린의 쿠어퓌르스텐담 거리에서 재현되었던 대도시인들의 자기 노출적 에로티시즘을
시각적으로 표현했다. 이 시기에 그는 정신적으로 위기를 맞았으며, 전쟁에 징집된 직후인
1914년 심각한 육체적 정신적 쇠약 상태를 겪었다. 요양소에서 얼마 동안 머문 후 1917년
스위스의 다보스 근처의 산중에서 고독하게 살면서 그림을 그렸고, 독일의 정치적 사건들과
그 자신의 작품에 가해진 비난으로 인해 정신적 불안을 겪었으며, 1938년 자살하기 전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1928년부터 키르히너의 양식은 변화를 겪는데, 직접적으로 자연을 그리
던 과거 작품에 비해 더 추상적으로 변했다. 이는 일종의 그림-문자로서 그의 '상형 문자적'
형상들을 이용하여 그린 것으로, 직접적인 재현이 차지하는 부분이 감소되었다.
그는 말했다. "이 가시 세계의 내적 이미지를 비자연주의적인 형태를 통해 만들어낸 '상형
문자'는 시각적 법칙에 따라 형태를 취하게 되고, 그 형태의 경계가 넓어지기도 한다.
이 시각적 법칙은 이제까지의 미술에서는 사용된 적이 없었던 것으로, 예를 들어 반영의
법칙, 간섭과 분극화의 법칙 등이 그것이다." 이런 생각은 1912년에 칸딘스키에 의해
표명된 이론과 공통점이 있다. 그는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의 새로운 방식은 경험의 시각적
표현을 위해 일종의 추상적인 그림문자를 써 넣은 피카소의 실험적 아이디어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Street Dresden, 1908

당시 급속히 발전하고 있던 물질 문명에 반발하여 자연과 인간에로의 회귀를 주장하던
키르히너의 가치관이 잘 표현된 작품이다. 줄지어서 한 곳을 향하고 있는 사람들, 희망이
나 기쁨은 찾아볼 수 없는 표정의 사람들, 강렬한 원색과 강한 붓의 터치로 드레스덴 거리
의 무겁고 갑갑한 공기를 느끼게 하고 있다.

방 안의 누드들, 1909

모든 화가들의 스승인 세잔의 <대수욕도>를 연상시키는 작품이다.
원시 자연으로의 회귀를 갈망하던 키르히너는 여성들의 누드를 그리면서도 여성미를 그려
내기 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꾸미지 않고 표현하고자 했다. 가식이나 허영이 아닌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 것이다.

Japanese Theatre, 1909

이 작품은 키르히너가 첫 번째로 그린 무대 공연의 장면이다. 드레스덴의 알버트 극장에서
일본 배우들이 공연하고 있는 장면이다. 당시 브뤼케 작가들 사이에는 극장이나 카바레의
공연 장면이 인기있는 그림의 소재였다. 1908년 12월 키르히너는 마티스의 전시회를
보았다. 이 그림은 마티스의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Girl Under a Japanese Parasol, 1909

당시 독일을 포함한 유럽은 일본의 문화가 유행이었다. 새로운 동양 문화에 매혹되기 시작
했던 유럽의 사람들의 그림에는 일본 의상이나 부채, 양산 등이 등장하였고, 그림 자체도
일본 판화와 같은 평면적 느낌을 주는 것이 많았다. 또한 양산 아래 소녀는 키르히너의
여느 누드처럼 꾸밈없이 자연스러운 여성의 모습이다.

Panama Girls, 1910

Self-Portrait with Model, 1910/1926

키르히너는 1906년에서 1911년까지 연인 도리스와 함께 있었다. 그동안 그녀는 그의
모델이 되어 주기도 하고, 사랑을 나누어 주기도 하고, 경제적으로 궁핍한 그를 먹여 살리
기까지 했다. 그러나 키르히너는 더 이상 자신의 연인에게 의지하면서 살 수는 없다고
생각했고, 동료들과 함께 베를린으로 떠났다. 그가 사랑했던 모델 도리스를 떠나 다른
모델을 앞에 세워놓고 그림을 그리고 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을 충족시키지는 못했나
보다. 모델을 뒤켠에 몰아 놓고 오히려 화면의 반을 차지하고 있는 그의 모습 속에는
자신이 버린 옛사랑의 그리움이 남아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Portrait of a Woman, 1911

모자를 쓴 여성 누드, 1911

모자 챙의 선과 반쯤 벗고 있는 옷의 윗 선이 균형있는 조화를 만들고 있다.
축 쳐진 가슴이나 어깨의 선도 일반적으로 아름답다고 할 수 있는 여인의 모습은 아니지만
옷을 반만 벗고 있기에 생길 수 있는 어색함 조차 무색케 하는 이 여인의 당당함은 키르히너
가 가장 사랑한 이유 중 하나다.

Zirkusreiterin(Circus), 1912

Woman at the Mirror, 1912

Three Bathers, 1913

Street, Berlin, 1913

Woman in a Green Blouse, 1913

View from the Window, 1914

Two Women in the Street, 1914

톱니 같은 선들, 화려한 색감, 거칠면서도 투박해 보이는 붓 터치로 다리파 화가, 그들은
원시미술의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에 닿으려 했다. 그러나 그의 그림을 보면 자연스러운
평안과는 멀어보인다. 현대 사회에의 저항을 키치로 하고 있는 그들이었으나 그들 또한
현대 사회의 병폐인 우울과 불안, 절망을 완전히 벗어나 있는 것 같지는 않다.

Gerda, Half-Length Portrait(Frauenkopf, Gerda), 1914

거리의 여인, 1915

어두운 코트, 뾰족한 구두와 옷깃, 콧날이 무표정한 사람들의 얼굴과 함께 삭막한 느낌을
주고 있다. 그 삭막함은 당시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독일의 산업화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자연을 떠난 도시화는 인간들에게 고독감만 안겨주는 것 같다.

Circus Rider, 1914

Self-Portrait as Soldier, 1915

키르히너는 다리파 운동을 주도했던 화가로, 다리파 멤버 중에서 가장 열정적이고 재능이
있었다. 그도 동시대의 많은 화가들이 그랬던것처럼 원시미술에 열광했던 화가였다.
그와 다리파 화가들은 1909년~10년 사이 기간동안 농촌에 내려가 공동생활을 하기도
했는데, 그것은 일부러 가난한 생활을 함으로써 원시성에 접근하고자 했던 노력이었다.
1914년에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키르히너는 군인으로 참전한다.
전쟁이 그에게 남겨준 것은 어떤 정의나 진실도 아니고 신체적, 정신적 상처뿐이었다.
그의 자화상에서 군복을 입고 있는 키르히너는 여전히 화가로 나타난다.
뒤에 모델이 보인다. 키르히너는 담배를 꼬나 문 냉소적인 표정에 한쪽 손이 없는 불구로
그려졌다. 그는 이렇게 상처받고 고독한 인간의 모습으로 자신의 자화상을 그리고 있다.
전쟁은 키르히너에게만 상처를 안겨준 것은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대량 학살의 장면을
목도하고 전쟁의 피해를 입게 되었다. 1차 대전 이후 서구인들은 서구문명에 대한 비관적
인 시각을 강화하게 된다. 즉, 산업 사회의 발달이 반드시 행복한 미래를 약속하지는 않는
다는 생각이 팽배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종전 이후 서구의 전통을 부인하고 원시적인 것
을 추구하는 일련의 표현주의 미술운동들이 전과 달리 상당한 대중적 호응을 얻게 되었다.

Artillerymen, 1915

Mountain Life, The Early Years in Davos, 1917-1926

Pink Roses, 1918

Drei Kunstler: Hermann Scherer, Kirchner, Paul Camenisch, 1926

A Group of Artists: Otto Mueller, Kirchner, Heckel, Schmidt-Rottluff, 1926-27

함께 원시적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현대 사회의 병폐를 거부하고자 했던 예술가들의 모임
이다. 오토 뮐러, 키르히너, 헤켈, 슈미트 등 드레스덴에서 건축을 공부하던 이들 네 명이
1905년 처음으로 다리파를 결성했다. 새로운 문화와 이상에의 다리가 되고자 했던 그네
들이었으나 결국 자신들도 그 다리를 완전히 건너지는 못했던 것 같다.

Franzi in front of Carved Chair, 1910

★ 에밀 놀데(Emil Nolde:1867~1956) ★

Pentecost(오순절), 1909

독일의 화가이자 판화가인 에밀 놀데는 슐레스비히 출생이다.
물감의 두터운 마티에르로 음울한 느낌을 주는 인물을 주로 그렸다.
놀데는 젊은 시절 목각공예를 습득하고, 한때 베를린에서 가구와 장식 미술가로 일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1906년에 다리파에 가입해 그 다음해 탈퇴하여 자신만의 독자적
인 길을 나아갔다. 물감을 두껍게 칠하여 부조화스러운 강력한 색대비를 만드는 채색법을
사용하며 종교화를 부흥하고자 하는 시도를 하였다. 브뤼케 그룹 시절 얻은 목판화의
제작 방법은 그림에까지 감정표현 그것도 현실 사회를 넘어선 종교적 감정표현으로 이색적
인 종교적 표현주의 회화를 구현해 나갔다. 몹시 투박한 자세와 단순화된 묘사를 좁은
공간에 밀집하여 놓여져 있는 인물들은 농민들의 순박하고 열정적인 믿음을 전달해 준다.
에밀 놀데는 저서 '원시인의 예술적 표현' 에서 원시작품들의 절대적인 원초성, 가장 단순한
형식으로 환원하는 삶과 힘에 대한 강렬한 때로는 그로테스크한 표현을 적고 있다.
이처럼 인간 정서에 근본이 되는 원초적이며 순수한 표현이 바로 놀데가 추구하는 것이었다.
놀데의 작품 중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1909년부터 제작되기 시작한 약 20여 점이 넘는
종교적인 주제의 작품이다. 그의 종교화는 전통적인 기독교 도상을 과감히 탈피해 표현주의
자다운 화면을 구성하게 된다. 그는 사실적이면서도 무게 있는 그림으로 앙소르, 루오, 고갱
과 더불어 현대회화사에서 손꼽히는 종교 화가로 불리우게 된다.
1909년에 그린 <오순절五旬節>에서 그는 그리스도를 한 북부 독일의 건장한 농민과 같은
모습으로 재현하고 있다. 그를 둘러싼 사람들도 신앙의 깊은 체험을 함께 나누며 그 자리를
메우고 있다. 또한 사람들의 눈은 크고 선명히 그려지고 있다. 서구미술에서 전통적으로
눈은 마음과 정신의 상징으로서 정신성을 강조할 때는 눈을 크게 그리는데, 이 방식이 여기
에서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놀데는 1913년에서 다음해에 걸쳐 오세아니아의 여러 섬을 순례하면서 원시 토속문화를
직접 체험하게 된다. 1914년의 [무희 그림이 있는 정물]에 나오는 무희는 그 여행 때에
어디선가 원주민의 춤을 보고 급하게 화구 상자에 스케치했던 것을 뒤에 다른 정물과 조화
시키면서 다시 작품화한 것이다. 흡사 정신이상자로까지 보이는 이 열광적인 여인들은
붉은 머리와 반라의 옷차림에서 더욱 생생한 운동감이 느껴진다.
1915년부터는 어두운 색조로 바다, 육지, 구름, 광막한 풍경 등을 주로 그렸다.

Flower Garden (Girl and Washing), 1908

The Mocking of Christ, 1909

Wildly Dancing Children, 1909

Autumn Sea VII, 1910

Dance Around the Golden Calf, 1910

At the Cafe, 1911

Mask Still Life III, 1911

Candle Dancers, 1912

Child and Large Bird, 1912

Crucifixion, 1912

Legend: Saint Mary of Egypt - Death in the Desert, 1912

Excited People, 1913

Die Zinsmunze, 1915

Women and a Pierrot, 1917

Red Clouds, 1930/Watercolor

Sunflowers,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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