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미술사73 추상표현주의: 드 쿠닝, 폴록

   

서양 미술사 - 73(추상표현주의: 쿠닝, 폴록)


윌렘 쿠닝(Willem De Kooning: 1904~1997)


네델란드 태생의 미국화가로 1904 로테르담출생. 1926년에 미국에
정착하여 당시에 미국에 이민온 그래함이나 아쉴 고르키 등과 친분을 맺고
1935~36
년에는 벽화 화가로서 연방 미술 프로젝트에 참가한다.
소년시절에는 미술장식회사 견습공으로 들어가 일하면서 미술아카데미 야학에
다녔다. 로테르담 미술학교에서 공부한 장식미술가로 활동하던 그가 불법
으로 미국땅을 밟은 때는 스물두 살이던 1926 이었다. 뉴욕의 건축사장에서
페인트공으로 일하던 그는 1930년대 스듀어스 데이비스, 아쉴 고르키과 같은
뉴욕의 아방가르드 작가들과 친해지면서 전업작가의 길을 결정한다.
불법이민 노동자였던 윌렘 쿠닝(Willem de Kooning) 이름에 (de)
덧붙여 작가 윌렘 쿠닝(Willem de Kooning)으로 변신하게 된다.
2
차대전 직후에 부상한 유럽과 미국의 추상미술이 기존원칙의 거부와 전통적
구성 방법과의 단절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면 쿠닝의 회화 또한 전통의
파괴 작업에서 시작된다고 있다.
남의 것을 빌어 어떻게 나의 것으로 만들어 가야하며, 나의 길은 남과 얼마나
달라야 하는가. 이를 위해 모방이 있고 파괴가 있으며 재구성이 있고 재창조가
있듯이, 쿠닝의 초기 20여년에 가까운 작가 생활은 이러한 과정의 연속으로
점철되어 왔다. 1938년의 <서있는 남자>에서 55 <풍경이 있는 여인>
작품에 이르기까지 나타나는 일관성 있는 진보과정은 구상에서 추상으로 변화
하는 치밀한 파괴작업으로 50년대 탄생하는 쿠닝의 최고의 추상 작품들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증명해 주고 있다.

쿠닝은 1940년까지는 인물화가이자 초상화가였다. 그리고 어떤 특별한
환경속에 놓인 그의 인물 습작들은 자코메티의 그림과 유사성이 있다.
그가 추상화를 처음 그리기 시작했을 추상의 형태들은 고르키를 통해
드러난 피카소를 연상하게 했다. 실제로 그의 작품을 보면 쿠닝의 작업이
바로 20세기 미술의 혁명이라고 불리우는 입체주의 미술의 바탕에서, 특히
피카소의 영향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쿠닝이 자신의 작품에서 피카소의 흔적을 지우기 까진 장장 15년에 가가운
세월을 필요로 했다. 전통회화에서 시작한 30년대 후반의 초기 작품은 사실적
구성회화로서 앵그르의 회화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볼륨과 콘트라스가
뚜렸하다. 시기의 작품의 대부분을 작가가 스스로 파괴시킨 탓에 흔적을
뚜렷이 찾아보기가 힘들지만, 간과해도 무관하다 있다. 40년대 중반까지
입체주의에 바탕을 두고 마티스적 색채를 빌어 인물회화가 주를 이루는데
피카소의 20년대 작품에서 보이는 생물형태학적인 무정형으로 인체의 윤곽을
설정하고 위에 마티스적인 색채를 반복 칠함으로 조금씩 3차원의 공간을
2
차원화 시켜가는 용해 작업의 시작이다.

쿠닝의 작품의 핵을 이루는 주제는 여인과 풍경으로, 특히 <여인> 시리즈는
작품의 진보과정을 연구하는 중요한 열쇠를 지니고 있다.
시리즈는 쿠닝이 미술평론가 였던 엘렌느 프라이드와 결혼한 1940년에
시작 되었으며 최초의 <여인> 시리즈 작품은 <앉아있는 여인>(1940)이었다.
이어 <여인>(1944), <핑크 레이디>(1944), <여인Ⅶ>등을 거쳐 2 동안의
작업으로 완성된 <풍경으로서의여인>(195455) 이르기까지, 여인을
둘러싼 그의 작품은 구상에서 추상으로의 변화과정을 면밀히 보여 주고 있다.

쿠닝의 여인은 뒤틀린 몸매의 흉란 얼굴을 드라마틱한 인물이며 복잡한
구성 속에 서서히 흔적을 감추어 버리는 미움받는 여인이다.
여인을 지우고 지우면서 여인의 몸이 얼굴로 확대되고 입술이 풍경으로
되면서, 추상으로 변신되어 간다.
이러한 관점에서 쿠닝의 작품은 하나하나가 다음에 이어지는 작업을 위해
거쳐가는 미완성의 작품이라 여겨지기도 한다.
그의 가장 성공적인 작품은 1950년경에 제작된 검은색 바탕의 하얀색의
드로잉이 조화를 이룬 작품들이다. 또한 1950년까지 그는 칸딘스키, 고르키
피카소 또는 그보다 앞선 어느 누구와도 다른 추상표현주의의 개성적인 측면을
전개했다. 그리고 그는 새로운 양식, 새롭고 격렬한 표현양식을 예언하는
자들의 사람으로 등장했다.
동시에 인물에 대한 그의 향수는 그로 하여금 유명한 '여인화 연작' 착수하게
했다. 이러한 작품들은 힘이 넘치고 때로는 거부감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성의
상징이나 풍요의 여신으로서, 그리고 에드바르트 뭉크의 관례에서 피를 빨고
있는 흡혈귀등으로서의 여인을 최면에 걸듯 환기시킨다. 위협적인 모습에서
부터 단순한 풍자만화, 온화한 에로티시즘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1950
년대는 <여인Ⅰ>(195253)이나 <여인Ⅵ>(1953)에서 보이듯
피카소적인 인물처리가 남아 있으면서도, 반복되는 터치작업으로 여인의 얼굴을
용해시키는 추상작업을 통해 붓처리가 난폭하면서도 강한힘이 서린 자신의
회화를 찾아가는 시기이다.
이러한 과정은 <풍경으로서의 여인>(195455) <구성>(1955)에서
모방과 영향의 탈을 벗는 피카소와 고르키의 망령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쿠닝 작업의 획기적인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이어지는 50년대 후반은 쿠닝의 황금시대라고 일컬을 있겠는데, 빨강과
노란 색조가 주를 이루는 가운데 붓작업이 뛰어난 추상회화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60년대에는 장미색과 분홍색을 섞어 두껍게 칠한
우스꽝스러운 여인들이 재등장함으로써 다시 구상으로 뒷걸음질 한다는
의혹을 불러 일으킨다. 쿠닝의 작품에 대해서 평론가들의 따가운 시각이
비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때부터이다.
<
정원의 여인>(1971) 이르러야 쿠닝은 여인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해방된 50년대 후반의 추상에서 보다 세부적으로 파고든 자신만의 작업을
만들어 내었다. 또한 그의 작업은 실체를 용해하면서 드러나는 변화의
회화이며, 과정의 복잡성으로 인해 귀결되는 미완성의 회화라는 의미를
지닌다. 쿠닝은 하나의 작품을 제작하기까지 수십번에 걸친 덧칠과 수정
작업을 고의적으로 해왔다. 완성도에 대한 커다란 집념을 지닌 그의 작품이
그에게 언제나 미완성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작업 자체가
쿠닝에게 있어 하나의 인간드라마 연출과정이었기 때문이다.
모든것을 수용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간다는 것은 그만큼 힘든 작업이기
때문이다. 또한 쿠닝의 작품을 세밀하게 관찰해 보면 놀라운 것은 작품이
마치 멀리있는 이미지를 가까이 끌어들이는 '클로즈 ' 같은 과정으로
이루어져 왔다는 것이다. 초기 구상작품에서 추상으로 발전한 해체작업과 이에
따라 부분을 확대해 보다 세밀히 비춰내는 작업은 그의 조형예술가로서의
탁월한 재능을 보여준다고 있다.

'
창작' '모방'에서 시작된다고 하지만, 쿠닝처럼 문구가 적용되는
작가는 드물지 않을 것이다. 그의 작품은 스스로가 타인에게서 비롯된
회화라고 정도로 모방과 모방을 거듭한 끝에 찾고자 했다.
때문인지 쿠닝의 작품을 처음 대할때 낯설지 않고 비교적 친숙한 이미지가
느껴졌다. 그가 영향을 받은 화가들이 많은 만큼 그의 그림을 보면 작품 하나
에서도 마치 몇가지 작품을 보듯 복합적인 면이 느껴진다. 하지만, 쿠닝의
작품 뿐만 아니라 그보다 유명한 그에게 영향을 작가들의 작품조차 이해
하기 어려운 것이 많이 있다. 그러기에 쿠닝의 작품이 모방으로 이루어
졌다고 비난할 없고,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 비교해 자신있게 지적하고
평할 수가 없다. 단지 그의 작품을 단순히 하나의 작품으로만 생각하고
작품을 감상할 이다. 그의 작품에서는 흔히 말하듯 정말 강렬한 색채와 거친
붓작업, 화면을 가르는 힘찬선이 두드러짐을 느낄 있다. 또한 그속에 담겨진
인물의 모습이 흉물스러워 보이기도 하지만, 다시볼 전혀 다르게 화면의
구성에 눈길이 가기도 한다. 남을 의식 하기보다는 자신의 독자적인 세계를
이뤄내고자 수많은 모방의 작업을 거듭하고 완성을 찾아 불태운 그의 집념이
그를 추상표현주의의 거장으로 이루어 놓지 않았나 생각한다.

*여인1, 195052*

잭슨 폴록(Paul Jackson Pollock:1912~1956)


1912
1 28 미국 와이오밍주()에서 출생하였다.
로스앤젤레스와 뉴욕에서 공부하였다. 1930년대 무렵부터 표현주의를 거쳐
추상화로 전향하였으며, 구겐하임 부인과 비평가 그린버그의 후원을 받아
격렬한 필치를 거듭하는 추상화를 창출하였다.
1947
마룻바닥에 화포(畵布) 위에 공업용 페인트를 떨어뜨리는 독자적인
기법을 개발하여 하루아침에 명성을 떨쳤다.
그것은 떨어뜨린 도료(塗料) 궤적(軌跡) 거듭하여 화면의 밀도를 높여감과
동시에 작가의 다이내믹한 제작행위를 직접 화포에 기록하는 것이었으므로
액션 페인팅(행위미술)이라 불리게 되었다.
세계화단에 영향을 끼쳤으며,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작품에 No.31 《서부로 가는 길》 《남성과 여성》 《여름철》 등이 있다.

폴록의 작업 제작 방식은 자유롭고 역동적인 행위로 캔버스에 물감을
흘렸는데, 이때 화면에는 우연적인 요소들이 가득차게 되는 것이다.
물감통으로부터 직접 바닥의 캔버스에 흘려 떨어지는 페인트는 즉시 색선이
되고 색반이 되어서 거미줄 망과도 같은 색의 장으로 변한다.
여기에서 그는 특별한 어느 부분의 강조점을 두지 않고 모든 부분을 동등
하게 강조함으로써 구심점을 없애버렸다. 그러므로 전통적 이젤 회화에
비해서 더욱 생생하고 개방적이며, 즉각적인 순수 화면이 된다.
고립된 완성도 없고 색채 대비에 따라 회화적으로 창조해야만 하는 회화
공간도 없으며 다만 둔감한 물질적 대비나 시각적 착시에 의한 화면만이 있을
뿐이다. 회화는 이제 이상 이젤 회화로써 포장될 수는 없다. 캔버스는
단순히 주어진 용기로써가 아니라 통일성이 종래의 관념에 의해 강요되지
않고서도 이루어질 있는 개방된 장으로써 취급된다. 이러한 폴록이 갖는
공간 이념에 있어서 캔버스 위의 작업은 물감 이외에 모래, 석고, 유리에 금색
철망, 바늘, 조약돌, 조개껍질 등의 사용에서는 물리적인 힘을 억제시키고
이미지와 일체화 시키고 있다. 1947년과 1951 사이에 제작된 폴록의
흘리기 수법의 그림들이 어떤 공통된 일관성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우연은 아니다. 이것은 실제로 추상표현주의의 중요한 공헌 중의 하나이며
초현실주의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길게 풀려 엉클어진 실타래와 같은
폴록의 쏟아 붇기식 그림은 현대 회화의 방향을 변화시킨 많은 요소를 제공
하였는데, 전면 균질회화-외관상 시작도 끝도 없어 보이는 그의 회화 개념-
바로 캔버스의 한계로까지의 확장, 심지어는 너머로까지의 확장을 의미한다.
이것은 관찰자와는 떨어진 상태에서 하나의 독립된 단위로 보이게 하는
르네상스 회화이념에서 최종적인 단절을 시도한 개념이었다.
색채와 선들은 비록 화면 깊숙한 원근법적 구멍을 뚫지는 않지만 제한된 깊이
내에서 앞뒤로 굽이치고 파도치며 끊임없이 움직이는 듯한 환영을 창조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폴록은 르네상스의 전통과 폴록 이전의 현대 회화의 전통으로
부터 벗어난다.

폴록이 처음 등단하던 1940년대 당시 미술계에는 이미 웬만한 회화 기법은
거의 소개되어 있었다. 19세기 인상파 화가들은 점묘법을 1차대전 직전
독일의 일부 화가들은 표현주의를 애용했다.
러시아의 화가 카시미르 말레비치는 1918 캔버스 위에 흰색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화법을 내놓았으며, 20년대에는 몬드리안이 깔끔하고
단조로운 색상의 직사각형을 이용한 회화를 선보였다.
살바도르 달리는 30년대 초반 이후 세부 터치가 매끈한 초현실주의 화법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그러나 폴록은 이처럼 많은 화법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빈틈을 발견해 새로운 화법을 개발했다.
그는 캔버스에 물감을 똑똑 떨어 뜨리거나 들이붓는 드리핑 기법을 이용해
작품을 제작했다. 드리핑 기법으로 두각을 나타낸 폴록은 4751
스타일에 전념했다. 폴록이 놀라운 개혁가였다는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루벤스나 마네같은 거장의 작품에 견줄만한 시각적
쾌감을 찾을 있는가 하는 점은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의문으로 남아 있다.
폴록은 머리뿐 아니라 눈과 가슴으로도 감탄할 있는 대형 걸작을 적어도
여섯 남겼다. 'No. 32', '라벤더 미스트', '가을의 리듬'(모두 1950 )
탁월한 구성을 자랑하는 훌륭한 작품들이다. 가운데서도 호주에서 대여해
전시중인 드리핑 회화 '푸른 기둥들' (1952) 압권이다.
폴록이 주목받는 것은 그의 작품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미국 미술을 지방적
이고 세련되지 못한 리얼리즘과 나약하고 스케일이 작은 파리 모더니즘으로
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추상표현주의 운동을 전개했다. 폴록은 현대 미술의
중심지를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기는데 누구보다도 크게 공헌한 화가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Masqued Image, 1938~41*

*Stenographic Figure, 1942*

*Male and Female, 1942*

타이틀에서 암시하듯이 그림은 성을 주제로 하고 있다. 화면에는 남성과
여성을 나타내는 두개의 기둥이 대칭적으로 그려있다.
얼굴은 왼쪽이 여성적이고, 오른쪽은 남성적이다. 그러나 몸을 보게 되면
왼쪽이 남성적이고, 오른쪽이 여성적이다. 다시 말하면 여성과 남성이 대칭적
으로 서로에게 투영되어 있다. 이른바 양성의 공존이 보여지고 있는 것이다.

*The Moon-Woman, 1942*

일반적으로 해는 남성을, 달은 여성을 상징한다. 작품 속에 달과 여자를
한꺼번에 표현함은 그의 내면 속에 여성에 대한 이미지가 얼마나 많은지를
짐작하게 한다. 크래스너를 만나고 처음으로 알게 성적 도취감이 그의
작품 속에 충만하게 반영되었다.

*Blue (Moby Dick), 1943*

호앙 미로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그림은 자동기술법으로 그려진 것이다.
바다색으로 밑바탕을 채우고 안에 파도와 물고기를 연상시키는 그림은
무의식의 상태에서 그려진 것이며 작품이 완성된 후에 파랑이라는 주제로
결정된 것이다. 깊은 바다, 심연의 차분함이 느껴지는것 같다.

*No. 8*

물감을 캔버스에 떨어뜨리는 드롭핑 기법이 두드러져 보이는 작품은
전체를 이용해서 그리는 행위로 얻는 표현이다. 폴록은 자신이 그림을
완성시키는 행위 자체를 중요시 했으며 비록 무의식적인 표현이라
지라도 그의 앞에 완성되는 그림에는 자신의 혼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했다.
가로 길이가 2미터 가까이 되는 작품들은 당시 추상화가들에게 있어서
유행과도 같았던 대작 시리즈 중에 하나 일것이다.

*The She-Wolf, 1943*

오토마티즘(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형상을 그려내는 ) 이용하여 그려진
작품은 암이리의 이미지를 무의식의 상태에서 나타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암이리에 대해 강한 폴록의 어머니를 상징화 것이라
말하고 있다. 이는 일종의 마더콤플렉스로서 어린 시절 폴록에게 영향을
끼친 그의 어머니를 보게 하고 있다.

*파시파에, 1943*

파시파에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크레타 미노스의 아내이다.
자신 외에 다른 많은 여인들과 관계를 맺은 미노스를 독극물로 죽인 여인이다.
폴록은 자신의 작품에 많은 그리스 신화를 채용했는데, 이는 다른 추상화가들
처럼 폴록 또한 신지학과 신화에 매료되어 있었다. 하지만 파시파에를 염두에
두고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라 무의식 상태에서 그림을 그렸는데, 그린
후에 그것을 읽으며 해석에 따라 타이틀을 붙인 것이다.

*Eyes in the Heat, 1946*

멀리서 바라보면 그림 속에는 눈들이 숨어 있다. 소심하고 내성적이었던
그가 그리워하던 인격에 대한 바람을 눈들로 표현한 같다.
많은 눈들이 자신을 바라보아 주길 기대하며, 그리고 눈들 앞에서
두려워 하며 자신의 감정들을 느꼈겠다. 수많은 눈들이 자신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어떤 느낌이 들것인가?

*Shimmering Substance, 1946*

수많은 붓질로서 빛이 반사되어 반짝이는 모든 찰나의 순간을 표현했다.
빛에 반짝거리는 물체라 명명했지만 그림은 반짝임 자체 뿐이다.
자신이 믿고 있는 여자와 결혼하고 조금은 밝아진 그의 정서가 화사한
물감색으로 표현된 같다.

*The Key, 1946*

작품은 그려진 캔버스에 다시 그린 것으로 추정될 만큼 발색이
좋지않다. 묵직한 맛은 없지만 명쾌한 선의 흐름이 재미있는 작품이다.
앞의 작품 파시파에 보다 다소 복잡하고 일관성이 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부드러우면서도 꽉찬 구성이 다른 작품들과는 다르게 표현되어 있다.

*The Tea Cup, 1946*

그림을 보면서 쉽게 찻잔을 연상할 수는 없다. 폴록의 정신 분열은 물체에
대한 이미지를 일반적인 이미지가 아닌 새로운 색과 형태로 분해시켜
버리곤 한다. 찻잔이나 열쇠, 의자 가장 일반적인 생활속의 소품들이
그에게 있어서는 낯설고 생소한 인상으로 남을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인상에 대한 표현이 그가 추구한 추상 표현주의이다.

*Cathedral(대성당), 1947*

제목을 보지 않고 그림을 보면 어떤 이미지인지 찾을 없겠다.
하지만 "대성당"이라 씌여 있는 제목을 보면 흩어진 물감들의 수많은 선들
속에 왠지 모를 경건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모네의 루앙 성당에서
반사되는 찬란한 햇빛이 연상되기도 한다.

*Full Fathom Five, 1947*

여기서 말하는 "길"이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걷는" 길이 아니라 길이를
측정할 쓰는 것이란다. 보통 성인의 남자가 팔을 활짝 벌리고 있을
때의 양팔 길이 정도라고 한다.(1.8 m 정도) 세로 길이 130센티미터도
되는 작품이지만 속에서 다섯 길이나 되는 길이를 담고 싶어하는 같다.
다섯 길이란 것도 무언가 완벽하게 표현하고 싶은 폴록만의 "길이"
것이다.

*Fathom Five D*

*노랑, 회색, 1948*

노랑, 회색, 검정... 안되는 색으로 완성한 작품은 동일하게 액션 페인팅으로
그려진 것이다. 과감한 선의 터치와 색이 자유로운 폴록의 감정을 대변하는
하다.

*Lavender Mist: Number 1, 1950, 1950*

폴록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차가운 대리석을 연상시키는 작품 또한 가로
길이 2미터 50 넘는 대작이다. 군데군데 별처럼 느껴지는 흰색 물감의
드로핑 또한 이채롭다.

*푸른 깃대, 1953*

과감한 붉은 색이 그림 복판을 가로지르는 작품은 비교적 따뜻한
추상이다. 푸른색이 두드러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푸른 깃대라 명명한 것은
작품을 완성하면서 느껴졌던 폴록의 정서를 표현한 것이다.

*Ocean Greyness, 1953>

폴록은 말년에 대상을 지향하는 작품 활동을 했다. 그것을 혹자는 말년의
슬픔이라 말하기도 하지만, 전통적인 회화로의 복귀로 그의 작품에 또다른
시도를 이룬 것이라 생각된다. 크고 힘있는 형상들 에게서 폴록의 에너지가
느껴진다.

* Easter and the Totem, 1953*

정신 분열을 앓고 있던 그의 불안한 정서는 신비롭고 마법적인 것을
찾고 있었다. 기독교에서 가장 희망적인 부활절과 특별한 힘을 가지고
특정 집단을 보호해주는 자연물을 함께 표현하였다.
이는 폴록의 분열된 정신 세계가 바라고 있는 희망과 보호받고 싶은 본능의
표현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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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72 추상표현주의 : 몬드리안

   

서양 미술사 - 72(추상표현주의: 몬드리안)

   

   


피에트 몬드리안(Piet Mondrian: 1872~1944)


본명은 피터 코르넬리스 몬드리안이며, 1872 암스테르담 부근의
아멜스포르트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부친은 정통적 '칼빈파'였다.
태어날 때부터 엄격한 종교적 분위기에 젖어 있었으며, 이런 분위기에서의
성장이 몬드리안 예술을 결정지은 인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숙부인 푸리츠 몬드리안에게서 그림의 초보를 배운 , 1892
암스테르담의 아카데미에 들어가 그림을 배웠다.
어려서부터 회화에 매혹되었던 그는 처음에는 자연주의적 수법으로 풍경과
정물을 그렸으나 1908 마티스에 감명을 받고 새로운 방법을 찾아 순수색
으로 전환하였다. 또한 프로푸와 알게되어 1909년에는 공동 전시회를 열었다.
1910
파리로 나와 들로네, 레제, 피카소의 영향을 받아 큐비즘으로 전향하여
대상의 추상화를 지향함으로 비구상적 경향의 연작(나무) 시도하였다.
여기서는 대상을 기본 형태에까지 환원하려는 의욕이 현저하게 엿보이고
있다. 1914 아버지의 병으로 귀국한 그는 1 세계대전으로 암스테르담에
거주하면서 1917년에는 되스부르크, 데르 레크 등과 함께 '데슈틸' 그룹을
결성하였다.

1918
재차 파리로 나와 1920 ()조형주의를 창시하여 순수추상을
지향하는 유력한 작가로 발돋움하였다.
따라서 1914-1919 동안 몬드리안의 추상적 세계로의 진입기라고
여기며 신조형주의는 점차 화면에 수직선, 수평선만 남겨 이들을 가지고
빨강, 노랑, 파랑의 원색만으로 팽팽하게 칠해진 화면을 분할토록 하는 것이다.
명백함과 표현수단 사용의 엄격한 절제라는 원칙에 지배되는 사조로
말레비치의 절대주의와 더불어 기하학적 추상의 원류를 이룬다.
이처럼 그의 독창적인 스타일은 한층 더욱 명확하게 드러났다. 1925 이념적
갈등으로 데슈틸을 떠난 몬드리안은 독자적인 신조형주의 이념 체제를 구현해
나갔다. 1931년에는 파리에서 국제적인 추상미술의 결집인 추상창조에
가담했다. 1938 영국 런던으로 건너가 니콜슨과 그의 부인 바바라
헤프위스와 나움가보, 레슬리, 마르틴과 합류하여 영국에서 추상미술의 전개에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 그러던 , 독일 나치군의 폭격이 격화되자 1940
10
3 안정된 곳을 찾아 미국 뉴욕으로 왔다.
그의 마지막 작품들은 뉴욕의 모습을 담은 것이다. 브로드웨이 부기우기
빅토리 부기우기를 제작하였는데 마지막 작품이었던 그림에선 검은색의
직각망 조직은 사라지고 빨강, 노랑, 파란색의 수많이 채색된 작은 정사각형이
자리를 대신 하였다.
1940-1944
, 작고하기까지 몬드리안 세계는 분명 20년대와 30년대의
단순하고도 엄격한 기하학적 포름의 연장은 아니었다.
수평, 수직, 삼원색, 삼비색이란 기본적 조형요소를 그대로 간직하면서도 더욱
복잡하고 더욱 경쾌한 리듬과 구조의 풍부함을 드러낸 것이었다.
엄격하고 무거운 구성과 절제의 세계에서 벗어나 어린아이 같은 천진한
감성과 생애 즐거움을 화면에 표현했다.
특히 빅토리 부기우기 작품은 연합군의 승리를 확신하는 염원으로 제작의도는
확실히 이전의 제작태도에선 상상할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연합군의 승리를 보지 못한 1944 2 1
72
세의 나이로 머레이힐 병원에서 폐렴으로 사망하였다.

몬드리안은 신조형주의의 주창자로서 가장 신조형주의의 조형원리를 구체적
으로 표현할 있었던 당사자였다. 몬드리안은 그의 작품에서 회화로서의
신조형주의를 구체화시키는 것과 함께 신조형주의에 대한 그의 견해를 피력한
글들에서 신조형주의를 단지, 회화의 혹은 건축의 디자인의 조형양식으로
국한시키는 것이 아니라 신조형주의를 삶의 인간에 대한, 혹은 사회 전반에
대한 원리로 확대시키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몬드리안의 작품은 이지적으로
냉정한 '차가운 추상' 대표작으로 불리우고 있지만 외의 신조형주의가
남긴 흔적이라던가 이념에 대해서는 접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사실 신조형주의의 본질은 그렇게 휘황찬란한 장광설보다는 그의 작품
이나 생활에서 찾아볼 있는 단어로 설명될 있다고 본다.
그것은 바로 '균형'이다. 단어를 빼고 신조형주의나 그의 작품에 대해서
논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한다.

*Molen (Mill); Mill in Sunlight, 1908*

*Avond (Evening); Red Tree, 1908*

*Amaryllis, 1910*

*Composition No. II; Composition in Line and Color, 1913*

*Ocean 5, 1915*

*Composition with Color Planes and Gray Lines 1, 1918*

*Composition with Gray and Light Brown, 1918*

*Composition A: Composition with Black, Red, Gray, Yellow, and Blue, 1920*

*Lozenge Composition with Yellow, Black, Blue, Red, and Gray, 1921*

*Composition with Large Blue Plane, Red, Black, Yellow, and Gray, 1921*

*Composition with Red, Yellow and Blue, 1921*

*Composition with Blue, Yellow, Black, and Red, 1922*

   

   

 

 

   

   

   

   

   

   

***슈뢰더 하우스, 1923

   

*Lozenge Composition with Red, Black, Blue, and Yellow, 1925*

*Fox Trot; Lozenge Composition with Three Black Lines,1929*

*Composition with Yellow Patch, 1930*

*Composition No. III Blanc-Jaune, 1935-1942*

*Rhythm of Black Lines, 1935/42*

*Composition blanc, rouge et jaune, 1936*

*Composition No. 8, 1939-42*

*Composition No. 10, 1939-1942*

*New York City, 1941-42*

*Broadway Boogie Woogie, 1942-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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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71 추상표현주의 - 칸딘스키

   

서양 미술사 - 71(추상표현주의: 칸딘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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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 ★

Improvisation 12(Rider)

20세기 초, 유럽은 산업혁명 이후 장미빛 미래를 꿈꾸며 도약을 준비한다. 1914년에 일어
난 제1차 세계대전은 유럽의 꿈을 무참히 깨뜨리고 말았다. 이 시기에 즈음하여 미술계에는
추상적인 패턴의 작품들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특히 바실리 칸딘스키는 추상화를
통한 회화의 혁명을 주도하며 20세기 미술의 새로운 장을 여는 거목으로 서 있었다.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1866-1944)는 러시아 모스크바 출신의
프랑스의 화가로 1939년 프랑스에 귀화하였다. 모스크바의 명석한 법률가이자 러시아
민속 문화를 공부하던 칸딘스키는 법학 교수가 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돌연 30세에 법학
을 포기하고 뮌헨으로 옮겨와 미술을 공부하면서 동료학생이자 자신보다 13살 어린 파울
클레(Paul Klee)와 오랜 우정을 쌓기 시작했다. 칸딘스키는 20세기 가장 혁명적인 미술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다. 그의 초기 회화는 러시아에서 내려오던 전설을 시적이고 마술
적으로 그려냈다. 그러나 1908년 42세 되던 해 뮌헨을 떠나 무르나우의 산촌 마을에
머물며 풍경을 그리면서부터 그의 미술에 중요한 전환점이 찾아온다.
자연의 이미지는 곧 격렬하게 상충하는 색채와 형태의 조각과 선들로 분해되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추상화되어 갔다. 칸딘스키는 시각적인 표현과 아울러 이론을 글로 남기기
시작했다. 칸딘스키는 많은 전위파 예술가들과 어울렸다. 1911년에는 프란츠 마르크
(Franz Marc), 아우그스트 마케(August Macke) 등의 동료들과 함께 '청기사파'를 결성
했다. 이들은 <청기사>라는 잡지를 통해 추상표현주의를 유럽에서 가장 흥미로운 운동
으로 발전시켰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칸딘스키는 러시아로 돌아가 혁명에
열렬히 참여했고 모스크바 미술 아카데미의 교수로 임명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마르크와 마케 둘 다 목숨을 잃었다. 칸딘스키의 화풍은 블라디미르 타틀린(Vladimir Tatlin:1885~1953)과 알렉산드르 로트첸코(Alexandre Rodchenko:1891~
1956)의 구성주의(구축주의:Constructivism) 운동에 크게 영향을 받아 다시 한번
극적으로 변모했다. 1922년 칸딘스키는 독일로 돌아와 클레의 초청으로 바이마르
(Weimar)와 데사우(Dessau)의 바우하우스(Bauhaus:1919~1923년 독일에
있었던 조형예술학교로 기능적이고 합목적적인 새로운 미를 추구하였다.)에서 연구
하게 된다. 그는 색채에 대한 실험을 계속했고 이즈음부터 기하학적인 양식을 보여
주었다. 1926년 바우하우스와의 관계가 끝난 후 그는 <점, 선, 면>이라는 미술이론
과 미학에서 중요한 논문을 발행했다. 만년에 파리 근교의 뇌이쉬르센(Neuilly-sur-
Seine)으로 이주한 뒤 1944년 그곳에서 사망했다.

1896년 교수직을 포기하고 뮌헨으로 이주하면서 본격적인 그림 그리기에 몰입했던 어느
날, 외출을 하고 집에 돌아온 칸딘스키는 선명함과 강렬함으로 격정적인 감동의 순간을
접했다. 바로 거꾸로 세워진 자신의 그림을 바라본 순간이었다. 무슨 그림인지 도저히
알아 볼 수 없었지만 칸딘스키는 이를 통해 추상화를 탄생시키는 영감을 얻게 되었다.
칸딘스키는 자신의 회화에 음악성을 부여했다. 20세기 초의 현대시와 미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공헌을 한 바그너의 오페라 이론으로부터 총체 예술에 대한 생각을 받아들여
공감각의 원리로 발전시켰다. 공감각이란 이미지와 음 또는 냄새와 맛과 같이 서로 다른
영역의 감각을 함께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심지어는 '색상은 건반이고 정신은 피아노,
화가는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영혼을 울리는 손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는 음악이 화음만으로 청중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것처럼 회화에서도 색채나 선만으로
대상을 표현해 내는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색조와
형태의 배치는 음악적 요소들이 함께 어우러져 영혼을 감동시키는 것이다.
그는 색의 상호작용과 기하학적인 경향을 파악하고 궁극적으로는 색채에 음악적 감정을
부여하고자 했다. 작품에 명시되어 있는 <즉흥>, <음향>과 같은 음악적 용어가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1910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던 1914년까지
칸딘스키의 작품 세계는 절정을 이루게 된다. 구상적인 작품에서 비구상으로의 전환을
꾀하면서 그는 당대의 신미술가협회와 결별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칸딘스키는
음악가 친구들과 우정을 더욱 돈독히 하며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회화를 크게 구상과 비구상으로 나누어 볼 때 구상은 구체적인 사물이나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것, 그리고 그릴 대상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것인 반면에 구체적인 대상을 그리지
않거나, 혹은 대상이 없는 그림을 그리거나 하는 화가의 주관적인 감정에 의지해서 완성
되는 회화를 추상화라고 한다. 추상화는 화가의 주관적인 예술 활동이므로 결국 그림을
이해하기보다 화가를 이해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칸딘스키는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방법에 나름대로 원칙을 두고 즉흥(Improvisation)
이나 구성(Composition), 인상(Impression) 등으로 회화를 구분하기도 했다.
특정 대상이나 자연의 모습을 화폭에서 완전히 제거한 화가였다. 이같은 실물 주제의
포기를 정당화하며 회화의 자율성을 부르짖었다. 그는 무형의 주제로부터 예술에 대한
생각을 나름대로 정립하며 공감각의 원리로 발전시켜 나갔다.
1933년 그의 작품을 퇴폐 예술이라고 낙인찍은 나치주의로 인해 독일을 떠나 파리에
정착한 이후 칸딘스키는 유럽의 추상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만년의 칸딘스키는
자유롭고 조용한 작품 제작의 시간에 또 다시 몰입한다. 기하학적인 구성을 포기하고
부드러운 곡선과 유기체의 형태를 만들어 나간 것이다. 그는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인식의 사물을 대신해 신비적이고 환상적인 이미지들을 화폭 위에 펼쳤다.
무의식으로 느껴지는 내면의 상황, 비록 형태는 없지만 그는 캔버스 위에 피인지 물감
인지 구분조차 안되는 불길한 얼룩
을 그려 넣기도 하고, 선의 움직임을 통해 격정적이고 흥분된 느낌을 살리기도 했다.
이제 그의 작품에는 더 이상 어떤 형상이나 사물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보는 이들에게 자신의 그림을 이해시키려 하기보다 상징적인 물음표를 하나씩
더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Portrait of Gabriele Munter, 1905

1902년 베를린에서 청기사 일원인 가브리엘 뮌터(1877~1962)를 만난 칸딘스키는
이미 결혼을 했던 상태였다. 하지만 예술적 동반자로 시작된 그들의 만남은 후에는 그
이상을 넘게 된다. 로뎅과 카미유 클로델처럼 그들의 결합도 서로에게 예술적 상승
효과를 가져다 주는 자극과도 같은 것이었다. 15년간을 함께 했던 이들의 동행은
쉽지 않은 시기에 개척자로 살아야 하는 서로에게 힘과 의지가 되어 주었다.

Riding Couple, 1906-07

Colorful Life, 1907

로마네스크 시대의 스테인드 글라스를 연상시키는 그림이다. 러시아의 민속예술에
영향을 받은 칸딘스키의 초기 작품들은 위와 같은 단순하고도 현란한 색채의 향현을
보여주고 있다. 크고 작은 점들의 장식성과 강렬한 원색의 대비는 작가의 대담하고
특이한 실험정신을 엿보이게 한다.

The Blue Mountain, 1908/09
대담하게 설정한 구도는 종래의 구도론을 떠나 우리에게 중량 감 마저 느끼게 한다.
좌우의 균형을 맞춘 큰 나무는 하늘을 덮듯 큰 면적으로 처리하고, 그 사이 중앙에
피라밋 형의 푸른 산이 원형으로 그려져 있는 독특한 구도이다.
아래쪽에는 원경으로 그려져 있는 푸른 산을 앞에 두고 하늘을 향하여 질주하는
군마(軍馬)의 약동적인 형태가 인상적이다.
크고 작은 수많은 점들로 그려진 이른바 색점묘법(色點描法)의 기법은 화면을 장식
적인 세계로 이끌어가는 한편, 강렬한 원색의 대비는 포비즘의 영향을 받은 듯하나,
러시아의 민속 예술의 연상과 실현으로 보아야 할 듯하다. 아무튼 끝없는 실험의
연속으로 보아야 할 작가의 태도는 대담하고 특이한 구도에서 충분히 읽을 수가
있다.

Improvisation III-Picture with a Yellow Wall, 1909

Cemetery & Vicarage in Kochel, 1909

Grungasse in Murnau, 1909

작가들이 생활 환경의 대상물이나 일상 생활에서 얻어진 체험들을 작품 모티브로 사용하는
예는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무르나우는 뮌헨의 남쪽, 알프스의 산들로
둘러 싸인 아름다운 마을이다. 무르나우에서 제작된 작품들은 자연의 외관이 눈에 띄게
주관적으로 처리되어 표현주의적인 화풍으로 대담한 전환을 시도했다.
형태의 단순화, 선명한 색상의 대비, 폭넓고 개성 있는 터치, 이미 칸딘스키는 대상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기 보다는 주관을 강하게 나타내는 것을 지향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주관적인 '안으로의 응시'는 억제하기 어려운 욕구 때문인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충동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 필연성' 때문에 생긴 것으로써 늘 검증되고
있다.

Murnau-View with Railway and Castle, 1909

Interior(My Dining Room), 1909

화려한 분홍색의 축제 같다. 당시 칸딘스키는 그의 예술적 동반자였던 가브리엘 뮌터와
독일 뮌헨 근처의 무르나우에 집 한채를 장만하면서 그린 그림이다. 그는 당시 행복하고
화려했던 자신의 감정을 과감한 색채로 표현하였다.

Church in Murnau, 1910

제목을 보지 않으면 교회라고 전혀 연상되지 않을 만큼 지극히 단순화 되고 추상화된
그림이다. 칸딘스키가 살고 있던 지방 무르나우에 있던 교회를 그린 것이다.
화려한 색채와 형태를 무시한 구성이 이채롭다. 이 작품을 그린 때는 풍경화에서 추상화
로 그의 작품 경향이 옮겨지고 있던 시기였다. 이렇게 추상화로 옮겨지는 그의 예술로
인해 그는 동맹 관계에 있던 많은 친구들을 잃게 되기도 했다.

Improvisation 19, 1911

칸딘스키는 모스크바 궁전 극장에서 바그너(Richard Wagner) 오페라 '로엔그린
(Lohengrin)'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은 바 있다. '바이올린의, 베이스의, 관악기의 깊은
울림, 나의 마음속에 나의 모든 빛깔을 보았다. 그것은 나의 눈앞에 있었다. 야성적이며,
거의 미친 것 같은 선이 눈앞에 그려졌다. 바그너가 '나의 시간'을 음악적으로 그렸다고
하는 표현을 나는 감히 사용하지 않겠다. 그러나 분명한 일은 예술이란 것은 내가 상상
하고 있었던 것보다 더 힘찬 것이며, 회화는 음악이 갖고 있는 것과 같은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일이었다.' 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칸딘스키는 예술의 이론이나, 제명에 음악과
관련이 있는 말을 잘 사용했는데 즉흥도 그 중의 하나이다.
<즉흥> 시리즈에서 칸딘스키는 내부에서 솟아나오는 감흥을 자유롭게 화면에 정착시키
려 했다.

All Saints I, 1911

Composition IV, 1911

Composition V, 1911

<즉흥Improvisation> 시리즈, <인상Impression> 시리즈와 아울러 <구성Compo-
sition> 시리즈도 칸딘스키에겐 중요한 계통적 작품군(作品群) 이다.
<즉흥Improvisation>은 내적 필연성이 무의식적·우발적·음악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상태이며, <인상Impression>은 대상을 평면적으로 용해하여 새로운 표현의 전개를,
<구성>은 1910년 최초로 발표한 이래 죽음에 이를 때까지 10점이 제작된 연작은 칸딘스키 예술의 중핵을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작품군이다.
이 작품은 칸딘스키의 추상적 표현주의가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작품이다.
무엇인가를 연상케 하며 여러 가지의 자유롭고 유기적인 형태가 떠돌아 다니기도 하고,
어떤 운동성을 나타내기도 하는 형태시(形態詩) 또는 드라마를 전개하고 있다.
칸딘스키의 조형언어가 유감없이 표현된 역작이라고 하겠다.

Cossacks, 1910/11

Improvisation 28, 1912

Black Spot I, 1912

적극적으로 추상표현주의를 전개해 나간 칸딘스키는 이 시기에 매우 중요한 작품들을
많이 제작했다. 불규칙한 선과 형태, 색채가 서로 응집하기도 하고 교감하기도 한다.
작가의 내적인 감흥이 자유롭게 펼쳐지고 있다. 그림을 보는 관객에게도 작가만큼
자유롭게 느끼고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칸딘스키는 제공하고 있다.

Last Judgement, 1912

Composition VI, 1913

Composition VII, 1913

Flood Improvisation, 1913

S

mall Pleasures, 1913

Fragment 2 for Composition VII, 1913

I

mprovisation 30(Cannons), 1913

<즉흥Improvisation> 시리즈는 1909년에 시작하여 13년 말까지의 사이에 34점의
작품을 제작하였다. 대단한 열성에 의한 작업량이다. 선과 면의 유기적이고 유동적인
교차에 있어서 전체가 가장 생생하게 잘 짜여져 있다. 색채가 다양하며 미세한 변화를
보이고 있는 것도 주목할 만 하다. 화면 여러 군데에 자유로운 곡선들은 주위의 형태들을
용해시켜 응결된 응집력을 구축하면서, 그 사이에 강하고 다양한 색으로 메워 가는 비교적
섬세한 작업의 하나이다. '대포'라는 부제가 붙어 오른쪽 아래편에 대포의 형상이 보이기
는 하나, 화면 전체의 구성상 빌려온 것인지 제 1차 세계 대전의 시대적 상황, 긴장과 불안
한 심리 상태를 나타낸 것인지 보는 사람의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다.

Improvisation 31(Sea Battle), 1913

이 시기에 칸딘스키는 음악적 제목을 즉흥, 인상, 구성 등 자신의 작품에 붙였다.
이 시기에는 즉흥 시리즈를 제작하였는데, 작품에 즉흥이라는 제목과 함께 번호를 주었다.
칸딘스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소리를 재료로 하는 음악이 가장 순수한 추상이라고 생각
했고, 미술에서도 음악과 같은 순수한 표현성이 성취되길 바랐다.

Painting with White Border, 1913

Landscape with Church, 1913

Ravine Improvisation, 1914

Fugue(푸가), 1914

'청기사'시대 말기의 대작이다. 조형 요소 중에서 가장 감각적인 것은 색채라고 할 수
있다. 보는 순간에 마음을 움직이고 갖가지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조형의 매력을 주는 것
은 뭐라고 해도 색채이다. 색채는 다른 조형 요소보다 생명적·본능적인 것이며, 천부나,
체질 또는 생활 감정에 더욱 직결되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렇듯 칸딘스키는 무대상
(無對象)의 추상에서도 색채 화가라고 불릴 만큼 색채의 구사에 노력함을 엿볼 수가 있다.
크고 작은 여러 모양의 곡선들이 색조와 복합적으로 뒤섞여 공간 속에 한데 어울려 음악적
인 리듬과 멜로디를 울리게 하는 장대한 심포니를 듣는 듯하다. 중앙에는 흰색의 내밀한
도식적인 선과 조그마한 여러 형태를 가지면서 노란 색조의 커다란 운동은 화면을 긴장과
리듬으로 이끌고 있다.

Moscow I, 1916

In Gray, 1919

Red Oval, 1920

꺼질 줄 모르는 전쟁과 미래에의 불확실한 전망은 칸딘스키의 예술에 대한 열정을
식히고 있었다. 1915년과 1921년 사이에는 다른 창작기와 비교해서 극소수의 작품
만이 제작되었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 후, 소련 정부는 예술 부문에도 변혁을 하려고
혁신적인 예술가를 적극적으로 등용했다. 1918년에 소련 정부의 미술 행정위원이 된
칸딘스키는 그 전부터 열망하고 있던 종합 예술의 실현을 기대하여, 창립 주창자로서
교육자의 능력을 발휘하여 중앙 또는 지방 미술관을 정비하는 일에 힘쓰는 한편,
모스크바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등 크게 노력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제작된 이 작품은
점차 도식화되어 가는 과정으로 훗날 독자적인 상징적 기호성이 하나 둘씩 얼굴을
내밀고 있다.

Untitled, 1920

Red Spot II, 1921

Small Worlds II, 1922

그가 붙인 제목처럼 강인함과 연약함으로 표현되는 큰 원과 작은 원, 적은 수의 선과
색이 자유롭게 배치되어 있다. 유난히 적은 수를 사용하고 무채색과 흐릿한 터치를
보여주는 이 작품은 그의 다른 작품에 비해 매우 단순하고 정적이다. 작은 세계라
명명한대로 정치적인 이유로 러시아에서 베를린으로 옮겨야 하는 작가의 서글픔과
우울한 정신 세계가 보여진다.

Untitled, 1922

Unjuried Art Show Mural B, 1922

Transverse Line, 1923

Composition VIII, 1923

구성 시리즈는 몇 년마다 한 번씩 그려진 것으로 칸딘스키의 화풍이 어떻게 변하는지 알
수 있다. 서서히 형성되는 그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다.
작품 위에 하나의 원이나 선을 올려놓은 것이나 색채를 결정하는 것은 계산이 아니라
칸딘스키의 감각에 따른 것이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작업을 작곡이라고 표현하였다.

Black and Violet, 1923

On White II, 1923

Orange, 1923

Contrasting Sounds, 1924

Y

ellow, Red, Blue, 1925

니나 부인이 분류한 원의 시대(1925년-1928년)의 초기 작품이다. 노랑을 주조로 한
바탕 위에 빨강과 파랑이 간결하게 자리잡은 위에 직선, 곡선, 원 등이 여러 가지 형태로서
각기 다른 성격을 가지면서 기하학적인 요소가 강한 왼쪽 부분과 오른쪽의 유기적이고
불규칙한 현장의 연출로 화면은 성격이 다른 형태들로 양분되고 있는 듯하다.
이렇게 대립되고 있는 것들과 총체적인 통합으로서의 노력이 강조되고 있다.
'대립과 모순-이것이 우리들의 하모니인 것이다. 이러한 하모니에 바탕을 둔 콤포지션이
색채와 뎃생의 결합임은 말할 나위도없다. 다만 그때 이들 색채와 데생은 각각 독립하면
서 게다가 내적 필연성에 따라 꺼내어지며, 그리하여 그곳에 탄생하는 공통의 생명 속에
하나의 전체를 형성한다. 즉 회화라고 부르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다.'라고 칸딘스키는
썼다.

In the Blue, 1925

Several Circles, 1926

칸딘스키는 '그 많은 기하학적 형태 중에서도 유독 원을 선택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다. '원은 첫째, 가장 겸양하는 형태이면서 어디까지나 자기 주장
도 하고 둘째, 간결한 반면 무한히 변화하며 셋째, 안정되어 있음과 동시에 불안정하기도
하고 넷째, 무수한 긴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원은 최대한으로 대립하는 것의 종합이며,
이는 구심성과 원심성을 하나의 형태로, 더욱이 균형을 유지하며, 통일되고 있다.
세 가지의 기본적인 형태(삼각형, 정방형, 원) 중에서 원은 4차원에의 가장 명료한 지표이
기도 하다.' 이렇게 원에 대한 조형 연구의 연속으로서 큰 원 안에 다수의 대(大)·소(小)
원을 그리는 시도이다. 원이 우주적 요소를 띠고 마치 위성처럼 무한 공간을 떠오르고
있다.

Softened Construction, 1927

1926년에 <점, 선, 면>을 출판하여 60세를 맞이한 칸딘스키는 바우하우스에 부교장
으로서 그로피우스를 보좌하였다. 이 작품은 마치 우리 나라 민화(民話)를 보는 듯한
도식적 요소를 느낄 수 있다. 한참 의욕적인 제작에 몰입할 때 종이와 수채와 잉크에
의해 이 시기의 특색인 원을 화면에 구성시켜 가면서 곡선적인 형태와 예각적인 직선
으로써 대조적인 형태를 공간에 떠 올려 조형적인 음악을 생각케 하는 심리적인 조화의
세계를 생성시키고 있다. 간결하고 정리된 화면은 추상을 초탈하고 생명적 형태만이
그려져 있다. 또한 화면 가득히 운무법(뿌리는 기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특이한 방법
이나, 이것은 끝없는 조형 언어의 실험적 연구로 받아 들여진다.

The Great Gate of Kiev, 1928

Fixed Flight, 1932

Succession(연속), 1935

칸딘스키는 음악을 회화에 이입하려는 노력은 계속 되었다. 이 작품은 마치 오선지 위의
음표를 보는 듯하다. 형태와 색이 만들어 내는 도형적인 형상이 수평선을 따라 리드미컬
하게 울려 퍼져 자유롭고 명확한 윤곽으로 그려져 있어 자유 분방하고 태평스러우며,
생생한 생명감을 느끼게 하는 한편 전체는 어떤 질서 속에 멋지게 통일되어 있다.

Two Green Points, 1935

Dominant Curve, 1936

Composition IX, 1936

Capricious Forms, 1937

Composition X, 1939

Sky Blue, 1940

푸른색의 공간에 여러 가지 유기적인 형태가 난무하고 있다. 첫 눈에 민족적인 요소가
대단히 진한 형태이며, 추상을 벗어나 생명의 원초적 형태 같은 것에 가까워지고 있다.
젊은 시절에 민족학 조사단에 참가하여 북쪽 지방을 여행하였을 때부터 기회가 있을 때
마다 흥미를 가진 민예품이나 이콘, 장식무늬 공예품에서 영향을 받아, 오랜 시간 형태
연구를 통하여 칸딘스키의 내부에서 자라난 형태일 것이다. 그것을 상징적인 기호로써
배열해 놓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칸딘스키는 하나의 코스모폴리탄 이었지만 이국에서
항상 고향을 그리워하며 고독한 노년을 보내며 자신의 유년시절을 회상하면서 이러한
동화적 세계에 탐닉 되었을 것이다.

Around the Circle, 1940

Tempered Elan,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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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미술사 - 70(추상표현주의: 말레비치)

   

서양 미술사 - 70(추상표현주의: 말레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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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추상표현주의( 抽象表現主義, Abstract Expressionism:1940~1950)

1940
년대 1960년대 초에 미국에서 전개된 미술의 동향을 말한다.
본래는 1919년에 O.헤르초크가 독일의 표현주의 잡지 《슈투름(폭풍)》에서
추상적인 표현주의를 구상적인 그것에 대치해서 사용한 것이다.
, 미국에서 알프레드 2세가 웰스리대학의 강의(1929)에서 '칸딘스키와
독일의 추상표현주의'라고 했고, 그가 조직한 큐비즘과 추상예술전(1936)
카탈로그에서 칸딘스키를 가리켜서 사용하였다. 이어서 R. 코츠가 H. 호프만의
전람회명(1946) 전용한 이래 미국의 화가에 적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반화된 것은 1940년대 후반1950년대에 뉴욕을 중심으로
J.
폴록, J. 뉴먼, M. 로스코, C. 스틸, W. 데쿠닝, F. 클라인 등의 활동에
의해서이다. 폴록의 푸어드(poured:그림물감을 뿌리듯이 그리는 방법)
뉴먼, 로스코 등의 컬러필드 페인팅(색채의 회화) 표면적으로는
다르지만, 공간상 '그림' '바탕' 관계가 근접되어 있다는 , 올오버(전면을
덮는), 다초점, 또는 무초점의 공간과 정신내용을 가지는 그림이라는 등에서
공통점을 찾을 있다. 이것은 후에 M.루이스의 작품에 의해 계승, 통합
되었다. 용어는 D.스미스를 중심으로 금속을 소재로 조각에도
사용된다.

독일 표현주의의 자기표현을 내세우는 예술과는 이질적인 동향에 주어진
용어는 편의적임을 부인할 수는 없으나, 미술의 중심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지고 있음을 예감한 예술을, 어떤 형태로 포괄하려고 하는 자연발생적
요구에 호응한 것이다.
한편, H. 로젠버그가 명명한 '액션 페인팅'이라는 용어도 동향에 포함되는데
특히 폴록 등과는 다른 회화공간을 가지는 데쿠닝이나 클라인 등의 작품에 가장
어울린다. 추상표현주의는 프랑켄살러, J. 존스 등의 네오다다이즘, 아트
등의 미니멀 아트를 거쳐 1970년대 후반의 신표현주의에 이르기까지 많은
영향을 끼쳤다.

새로운 미술은 시대의 사회적 변화에 따른 의식의 변천으로 새로운 가치를
지니게 된다. 유럽문화의 모방과 연장이었던 미국의 정신문화는 양차 대전중
유럽의 나치정권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화가들과 부를 이룩한 미국의 문화적
위약을 보강하기 위해 미국적 양식을 주장하는 평론가들에 힘입어 20세기
후반부터 독자적인 발전을 이룩하였다. 미국 미술은 전세계적인 영향력을
과시하기 시작함으로써 독자적인 미국적 양식을 주장함에 이르른다.
그리고 뉴딜 정책의 일환으로써 연방미술정책(Fedral Art Project) 미술을
공동체의 일상 생활과 통합시키기 위해 결성된다. 벽화작업은 공공작업을
통한 노동의 수요와 미국적인 미술의 특징을 짓는 계기를 마련한다.
멕시코의 리베라등이 추진한 벽화의 영향으로 규모의 초대형 회화의 캔버스
생기는 계기가 된다. 추상표현주의자들은 정부의 관심과 미국에 형성된
작가들의 자각이 함께 어울려 탄생한 것이다. 이들은 미국적인 주체성은 확보
하기 위해서 애를 쓰는데 고대 신화나 원형적의 의미, 또는 원시미술 특히
인디언의 제의에서 비롯한 숭고함과 비장감을 자신들의 이념을 세우는데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것은 초현실주의 영향으로 원시적 주제에 의한
오토마티즘으로 연결된다.

2
세계대전을 전후한 미국 미술, 특히 추상표현주의에 있어 회화 표현의
본질은 인간내면의 정신성에 두었으며, 표현양식으로써는 행위 추상과
색면 추상으로 나타났다. 그려지는 이미지보다도 그린다는 행위 자체를
주장하여 격렬함이나 생명감의 긴장이 강조되는 행위 추상에서 화면은
현실적인 또는 상상된 대상을 재현하고, 재설계 하고, 표현하기 위한 공간
이라기 보다는 행위하기 위한 장이 되었다. 행위 추상은 자기창조, 자기
한정, 또는 자기 초월과 관련이 있으며 행위는 넓게 뻗은 팔길이만한 충돌점
에서 빚어지는 물질화된 속도화 에너지 자체이고, 표현 행위는 부단한 정신적
긴장에 의해 논리화 되었다. 추상미술이라 하면 지역과 시대를 초월한 모든
조형예술 속에서 발견되는 기하학적 문양을 源流 있는데, 이것은
인간에 내재하는 일반적 능력으로써 이러한 문양화를 창조 능력이라고 보고
있으며, 점에 있어서 오늘날 추상미술 존재의 정당성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추상미술은 입체주의(Cubism) 초현실주의(Surrealism) 같은 하나의
경향을 주장하는 운동이 아니기 때문에 추상미술이 갖는 內的 必然性 의해
주어진다고 있다. 따라서 몬드리안(P. Mondrian) 같은 기하학적
구성적, 지적인 경향, 말레비치(K. Malevich) 같은 신비주의적, 금욕적
경향, 칸딘스키(W. Kandinsky) 같은 본능적, 표현적 경향 등은 내적 필연성
의해 주어진 각각 다른 성향인 것이다.
추상표현주의는 크게 두가지 경향이 나타난다. 차가운 추상계열의 색면추상과
뜨거운 추상의 액션 페인팅(행위미술)이다.
액션 페인팅은 잭슨 폴록과 윌리엄 쿠닝으로 대표된다.
잭슨 폴록의 회화 세계는 1948 융의 무의식에서 비롯된 신화, 상징이 주요
개념으로 작용하고 원시미술에 주목을 신화시기를 거쳐 48 이후 액션
페인팅시기에서 완숙하게 된다. 원시미술은 미국인으로서의 지각과 주체성
유럽에 대한 의식 사이의 결정적인 수단이자 요인이었다.
전후 미술의 두드러진 특징은 뉴욕을 중심 무대로 전개되고 있다는 점인데
1930
년대 미국의 예술계를 주도하던 미학적 관심은 당시의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변동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었다. 1929년의 경제 침체, 대외적으로는
나치즘의 등장과 스페인 내란, 모스크바 분쟁, 나치-소비에트 불가침 조약
그리고 2 세계대전의 유발 등이 사회적, 정신적 불안요인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이러한 시대 상황하에서의 미국 미술의 주된 양식들은 여전히
사회적 사실주의(Social Realism) 지방주의(Regionalism)였다.
그러나 사회주의 리얼리스트들의 매너리즘, 조잡한 삽화나 진부한 반복
부정직한 주제 등에 혐오감을 느낀 미국 미술가들은 때마침 물밀 밀려온
유럽 추상미술을 환호하게 되었다.
특히 R.코츠가 H.호프만(1932 이후 피카소의 드로잉과 마티스의 색채수업
예술의 사회적 목적보다 자율성 주장) 전람회명(1946) 추상표현주의를
전용한 이래 미국의 화가에 적용하게 되었고 일반화된 것은 40년대 후반
50
년대에 뉴욕을 중심으로 프란츠 클라인, 폴록, 뉴먼, 로드코, 스틸, 윌렘
쿠닝, 등의 활동에 의해서이다.
윌렘 쿠닝은 1948 흑백회화를 충격적으로 전시하여 등장한다.
쿠닝은 자유롭고 거의 광란적인 붓질로써 격정적인 모습의 형상에 집중한다.
그의 유명한 <여인 연작> 오만하고 비속한 여인을 그린다. 폴록의 회화가
고상한 추상의 고뇌라면 그는 속물적인 근성과 블랙 유머러스한 조소를 담은
형상적인 것을 담는다. 그에게서 형상은 이미 재현을 떠났으며 그는 인체에서
찾을 있는 격렬함과 폭력을 형상의 과정적인 붓질로 제시하는 것이다.
잭슨 폴록의 푸어드(poured:그림물감을 뿌리듯이 그리는 방법) 뉴먼 로스코
등의 컬러필드 페인팅(색면회화 : Color-field Painting) 표면적으로는
다르지만, 공간상 '그림' '바탕' 관계가 근접되어 있다는 , 올오버(전면을
덮는), 다초점, 또는 무초점의 공간과 정신내용을 가지는 그림이라는 등에서
공통점을 찾을 있다. 후에 M. 루이스의 작품에 의해 계승, 통합된 용어는
D.
스미스를 중심으로 금속을 소재로 조각에도 사용되었다.

한편 미술 컬렉터였던 페기 구겐하임도 도미하여 '금세기 예술'이란 화랑을
경영하였는데, 곳에서 화가 지망생들 간의 접촉이 이루어졌고, 그후 미국
회화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미국 전위미술의
중요한 산실이 되었다.
1943
년에서 1946년의 기간동안에 잭슨 폴록, 한스 호프만, 로버트 머더웰
마크 로드코, 클리포드 스틸 등의 개인전이 화랑에서 계속해서 열렸다.
유럽에서의 추상표현주의자로서는 포트리에, 뒤뷔페 등을 선구로
있다. 이들에 있어서의 마띠에르는 과거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다.
이들은 물감을 두껍게 발라 올린 화면을 긁거나 파는 것처럼 그렸다.
포트리에는 석고나 석회를 굳게 화면에 발랐으며, 뒤뷔페는 물감에 모래나
유리조각 같은 것을 섞어 두껍게 발랐다. 이들은 마띠에르란 물질성을 강조한
것이고 그린다는 것은 단순한 습관적인 테크닉이 아니라 하나의 행위라는 점을
강하게 의식했다. 마띠에르를 행위와 밀접하게 관련시킨 것이다.
이와같은 동향을 미치에르 다비에는 '앙포르멜'이라 이름 붙였는데, 이것은
추상미술의 새로운 전개가 아니라 실로 '또다른 예술(L'artautre)' 이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약동적 필촉과 거친 마띠에르의 비구상화가 오십 년대의 유럽
미술을 의미했다. 오십 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행위 마띠에르의 원초적 관계가
고정화되어 신선함을 많이 잃게 되지만. 기왕의 회화 이념을 탈피. 육십 년대
회화의 장을 열었다. 미국은 미국 나름의 독자적 세계를 개척했는데, 잭슨
폴록은 대표적 작가다. 그는 멕시코 벽화의 또는 비유럽적 프리미티브
아트라 일컬을 있는 요소를 가지고 바닥에 화폭을 놓고 주변에서부터
물감을 흘려 그리는 드롭핑 페인팅을 시도했다. ' 자신은 그렇게 함으로써
회화의 일부가 느낌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이는 회화가 화가의 자아표현
이라는 기왕의 관념을 넘어선 것이라 있으며 "액션 페인팅" 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평론가 해롤드 로젠버그는 '화폭은 현실이나 사용의 대상을
재현. 구성, 분해, 표현하는 공간이 아니고 행위를 위한 경기장 같이 보인다'
말했다. 종래의 회화와는 근본적인 이질성을 지적하여 이를 액션 페인팅이라
부른 것이다. 또한 추상표현주의에 있어서 오토마티즘(Automatism)
초현실주의에서 출발하였지만 "이성에 의한 통제가 없는 " 아닌 "의식의
조정을 거치는 자발성의 표현방법" 이라는 새로운 조형의식으로 나타난다.
로젠버그에 의하면 표현으로서의 공간을 모두 행위하는 사건이라는
하나의 시간 속에 회화를 흡수시킨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스케치나 데상의 개념을 수정하고, action으로써의 동일성을 가지며
행위의 회화는 예술과 생활사이의 모든 구별을 무너뜨리고 말았다.
새로운 회화는 마디로 행위의 흔적으로써 작품을 그린다는 행위 자체가
행위의 결과로써 무엇이 그려져 있는가의 문제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Action Painting이라고 붙여진 호칭은 추상표현주의 보다는
훨씬 본질을 파악한 용어이었으며, Action Painting 사건이라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고 그린다는 행위의 연속을 말하고 이러한 점에 있어서 제작
방법은 누구보다도 폴록의 방법이 우수한 Action Painting이라고 로젠버그는
주장하였다.

추상표현주의는 1951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미국추상회화·조각전"
계기로 강력하고 주도적인 미술운동을 전개했다.
그리하여 1951년부터 1961 사이에 운동은 미국 전역으로 세계 각국으로
파급되었다. 1940년대 1950년대에 다른 스타일의 그림을 그리던 작가들
중에서도 경향으로 화풍을 바꾼 경우가 많았다.
본래 추상표현주의자는 폴록, 뉴먼, 로드코, 스틸 이었다.
이에 대해서 호프만, 고르키, 쿠닝, 프란츠 클라인 등은 다른 경향의 작가들
이다. 왜냐하면 로젠버그가 지적했듯이 형상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60
년대에 들어와서는 뉴욕 현대 미술관에서 아쌍블라쥬 예술이라는 국제전이
개최되었는데, 아쌍블라쥬(집합, 조립) 용어는 뒤뷔페가 처음 사용했다.
명칭에서처럼 기성품, 폐품, 가공품, 기타 여러가지 물체를 긁어 모아 만들어낸
전시회이다. 그리는 대신 긁어 모은다는 행위까지 확대된 것이다.
현대 도시 문명의 생활 양식이나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특성이 반영된 것으로
누보레알리즘 흑은 아트와도 관련된 것이었다.
경향은 주관적이며 유동적인 추상예술로부터 떠나서 환경과의 새로운
결합을 시도한 것으로 해프닝과의 관련도 주목할 만하다.
잡동사니 물체로서의 작품에 관객이 끼어든 삼차원의 살아 있는 아쌍블라쥬는
해프닝에서 말하는 환경과의 새로운 결합과 유사한 것이었다.

추상표현주의 운동은 1960년을 정점으로 폴록, 클라인, 로드코, 톰린
바넷 뉴먼, 라인하트 등이 차례로 작고하면서 쇠퇴기를 맞게 된다.
그러나 남은 작가들, 쿠닝, 머더웰, 필립 거스튼, 고틀리브, 스틸, 브룩스
마카렐리 등은 그들의 이미지를 더욱 확대해 나갔으며, 프랑켄살러, J. 존스
등의 네오다다이즘, 아트 등을 거쳐 70년대 후반의 신표현주의에 이르기
까지 많은 영향을 끼쳤다.
추상표현주의에 갖는 의의는 피상적으로 미국미술의 국제화 분위기의 최초의
반영이자 미술메카로서의 상징적 첫발이다. 내용면에서는 추상이되
내용이 갖는 주제성은 몬드리안의 추상이 추구한 신지학적인 질서와 다른
철학적인 성찰이 따른다. 그것은 실존주의의 영향으로 작가의 실존적 문제의
적나라한 과정이 모두 공개되면서 고민의 흔적을 대중이 함께 공유하게 된다.
따라서 추상표현주의는 매우 지적인 미술운동이라고 있다.

(1)
기하학적 추상:

기하학적 추상의 뿌리는 세잔느의 탐구적인 정물화나 풍경화, 그리고
나아가서는 분석적 입체주의에서 찾아볼 있으나 최초의 진정한 기하학적
추상은 바탕 위의 검은 장방형으로 1913년경 카시미르 말레비치에 의해
제작되었다. 그는 이어 일련의 보다 복잡해지는 기하학적 構圖 그려
나갔으며 원이나 사각형, 경사진 장방형, 평행사변형, 그리고 사다리꼴들은
대칭적으로 그리고, 대각선 위치에다 정리 배치했다.
말레비치는 기독교적인 신비주의자였고 그가 1915년에 절대주의자라고
부른 그의 미술은 모두 외부세계의 모방으로부터 해방된 순수한 느낌에 관한
것이었다. 말레비치의 개념은 1920년대초 리시츠키를 통해 西유럽에
전달되었는데, 西유럽에서 피에트 몬드리안, 테오 반되스버그, 그리고
데스티일로부터 나온 유사한 기하학적 개념과 통합되고 바우하우스에서
회화敎科 핵심을 이루었다. 기하학적 추상은 바우하우스의 화가, 교사들에
의해 그후 미국으로 건너왔는데 리스즐로 모홀리스 나기도 1937 시카코
에서 바우하우스를 열었고 조세프 앨버스는 노스캐롤라이나주의 블랙
마운틴 예일대학에서 색채와 인식 이론을 가르쳤다.
다른 전달자인 몬드리안은 그의 인생의 마지막 5(1940~44) 뉴욕
에서 보냈으나 그의 名聲 대단하여 1930년대에 버고인 딜러같은
안되는 견실한 미국 기하학적 화가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추상표현주의는 기하학적 스타일로부터 되돌아오는 것을 의미할지라도
회화적 表面 밑에는 기하학적 구조가 깔려있다.
더욱이 추상표현 기하학적 추상과 1960년대의 '하드 에지' 변형된
캔바스, 미니얼 사이에는 수학적인 체계나 , 장방형 또는 사각형
같은 기본적 형태들을 공통적으로 사용한다는 명백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으나 밀도있게 느껴지는 원래의 정신적 내용은 일반적으로 後期작품들
에서는 찾아볼 없다. 끝으로 1980년대의 기하학파 미술가들이
있는데 그들도 컴퓨터의 최소한을 바탕으로 기하학을 형성하는 피터 헬리
같은 작가들이다.

(2)
형태적 추상:

형식의 추상은 아르프, 마송 미로의 작품에서 보는 것처럼 우연 또는
다다나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적 드로잉 방식에서 연유되었다.
이는 특히 1930년대에 유행했고 이때 이들에 의한 有機的 탐색에 피카소
칸딘스키, 브랑쿠시 마타 등이 합류했다. 변형되는 아메바같은 형태나
덩굴손 모양의 , 그리고 환각적인 색채가 애욕적, 植物性的, 그리고 꽃이나
水草 연상시키는 유형의 構圖 위해 사용되었다. 아쉴 고리키가 뉴욕에서
이러힌 요소들을 제일 먼저 사용했으나 곧이어 초기 추상표현주의 작가들이
바시오레스, 고틀리프, 스틸, 폴록, 그리고 로드코 등이 이에 참여했다.


★ 말레비치(Kazimir Malevich: 1878~1935) ★

20세기 초반, 혁명이라는 특수한 상황 아래에서 일어난 러시아 아방가르드(Avant-
Garde:전위) 예술운동은 예술의 미적 감각과 역사에 대한 의식, 그리고 작업소재와
공간을 확대, 확산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운동으로 인해 기존의 예술은
새로운 개념, 새로운 작업들에 의한 도전에 직면하고, 급진적인 변화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러시아의 아방가르드는 혁명 전후 산업사회로 탈바꿈하던 시대적 상황과 분위
기에 의해, 미술이 정신적 연대감을 매개로 산업 현장과 직결될 수 있다는 형태로 나타
났으며 프랑스의 입체주의, 이태리의 미래주의와 함께 기존 미술의 관습적 틀을 넘어서
실험적 분위기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아방가르드는 문화예술 전 장르를
통해 공동작업으로 진행시켰다는 운동적 개념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어, 서구의 실험적
태도보다 더 큰 파급 효과를 가지게 되었다. 따라서 러시아 아방가르드미술은 형식이나
내용, 색채 및 재료, 텍스츄어, 공간감, 그리고 다이나믹한 실험주의로 후에 기하학적
추상이나 미니멀리즘, 컨셉추얼 아트, 키네틱 아트를 파생시키는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
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러시아 아방가르드미술은 분류상 네오프리미티비즘
(Neoprimitivism)과 입체미래주의(Cubo-Futurism), 광선주의(Rayonism), 절대
주의(Suprematism), 구성주의(Constructivism), 생산주의(Productivism)로 나뉘
어진다. 이같은 장르적 운동은 종래 철학의 보편구조와 형식미술을 다양화시킨 촉매제
역할을 했다. 그들의 기본정신은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미학적 개념의 재정립과
새로운 역사와 만나는 「예술의 순수성」에 맞추어졌다.
요컨대, 러시아 아방가르드미술운동은 종래의 회화를 새로운 시각으로 파악하려는
실험 정신이 핵심이 되었다. 혁명이라는 특수한 상황과 맞물려, 혁명사상과 새로운 기술
을 연결하고자 하였으며, 무대예술, 환경미술, 응용미술에 이르기까지 넓은 분야로 확장
하게 되었다.

절대주의(絶對主義:Suprematism)는 최초의 순수한 기하추상회화 운동으로
1913년경 러시아에서 카지미르 말레비치(Kazimir Malevich:1878~1935)
의해 시작되었다. 말레비치는 입체파에서 끌어낸 순수한 감각을 지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기하학적인 색채평면 형태만을 묘사(기하학적 추상주의), 바탕에 검정색 정방형만
을 그린 작품을 제작하였으며 감성의 극한적인 극점으로서의 추상을 주장했다.
말레비치가 시도한 최초의 절대주의 작품은 흰 바탕 위에 연필로 검정색 4각형을 그린
드로잉이다. 여기서 그는 이전에 그가 추구하던 입체파적인 미래파 양식의 특징인 재현적
요소를 모두 제거했다. 그리고 '적절한 표현 수단이란 최대한으로 감성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이며 사물의 외형을 거부하는 것'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그는 이 작품에서 검정색 4각형은 감성을 뜻하며 흰색 바탕은 '감성을 초월한 공(空)의
세계'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그의 초기 절대주의 작품들은 대개 1913년경부터 제작되
었지만 1915년에 전시되었다. 이 해에 그는 시인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Vladimir
Mayakovsky:1893~1930)를 비롯한 몇몇 문인들의 도움으로 절대주의 성명서를 편집
했다. 4각형·원·십자형 등의 단순한 기하형태로 이루어진 초기 구성작품들에서 말레비치
는 검정색·흰색·빨간색·초록색·파란색만을 사용했다. 1916~17년에는 원의 부분이나
작은 3각형같이 좀더 복잡한 형태들을 다루었고 색채도 갈색, 분홍색, 엷은 자주색 등을
폭넓게 다루었다. 또한 복잡한 공간 관계를 엮어서 3차원적인 환상을 도입하기도 했다.
그의 실험은 1917~18년에 그린 <백색 위에 백색 White on White>에서 절정에 달했
는데 여기서 색채는 사라지고 희미한 윤곽의 4각형만이 나타나 있다. 1919년 개인전을
끝으로 그는 절대주의 운동의 종말을 고했다. 그 밖에도 이반 클리운(Ivan Kliun), 이반
푸니(Ivan Puni or Puny(Jean Pougny:1894 ~1956), 올가 로사노바(Olga Vladi-
mirovna Rosanova:1886~1918) 등과 같은 잘 알려지지 않은 절대주의 화가가 있다.
이 운동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유명한 러시아의 화가인 바실리 칸딘스키는 1920년
이후에 그린 기하학적인 형태들에서 절대주의의 영향을 보이고 있다.
러시아의 다른 추상미술 경향과 더불어 이런 기하학적 양식은 칸딘스키와 러시아의 화가
엘 리시츠키(El Lissitsky:1890~1941)에 의해 독일에 전해졌고 특히 1920년대 초
바우하우스(Bauhaus)로 이어졌다.

Self Portrait, 1908


카지미르 말레비치(Kazimir Malevich:1878~1935)는 키예프 출신의
러시아 화가로 몬드리안(Piet Mondrian:1872~1944), 칸딘스키와 더불어 추상예술의
개척자이다. 처음에는 후기 인상파의 영향을 받았으니 나중에 M.F. 라리오노프 및 러시아
전위파 시인들과 친교를 맺고, 절대주의(Suprematism)을 주창하였다.
1911년에는 '다디아의 책'이라는 그룹에 참가하여 러이아의 입체파 운동을 추진하였으며,
1912년 파리 여행 후 레제풍의 기하학적 추상화를 발표하고급속히 자기 방법을 발전히켜
<흰 바탕에 검은 네모꼴>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어 원. 십자가. 삼각형을 추가하고,
그러한 기본형태에 의한 추상예술을 이론화하여 절대주의라 이름 짓고 1915년 V. V 마야
코프스키와 함께 선언문을 작성하였다. 혁명 직후 교수직에 임명되기도 했으니, 미술 정책
의 반동적 전환으로 상페테르부르크에서 자유를 잃은 채 지냈다.
1926년에 독일로 이주해 절대주의 선언을 상세히 설명한 <비구상의 세계>를 바우하우스
를 통해 간행했다.

자연의 혼돈을 지배하는 인간의 우월성을 상징하는 절대적 기본형태로서의 직선은 그의
기하학의 중요한 바탕이 된다. 자연에서는 결코 발견되지 않는 사각형은 절대주의의 기본
요소이며 외관적 세계를 부정하며, 과거의 미술을 부정한다. 창조를 위해서는 정신적
독립을 추구해야 한다고 믿었던 그는 물질적 필요의 충족을 추구해서는 안된다고 보았다.
1917년 혁명은 환영했으나, 예술이 기계문명에 맞추어지고, 공리적 목적에 씌여진다는
것에 동조할 수 없었다. 또한, 예술가와 기술자간의 어떤 편의상의 결합도 부정하였다.
진정한 창작품은 시대를 넘어 영원성이 부여되는데 비해 과학과 기술의 발명은 일시적일
뿐이라고 그는 말했다. 의식보다 절대적으로 확실한 잠재의식(초의식)으로 보여지는 것
이 예술작품이라고 그는 보았다. 말레비치는 미술가가 수동적으로 자연 환경에 반응
하는 전통적 재현 방법을 거부하고 자연 그 자체의 실재와 같이 의미있는 새로운 실재들
을 창조하려 했으며 그 방법으로써 사각형을 기본으로 하는 기하학적 형태를 택했다.
말레비치는 '절대주의는 창작 예술에 있어서 순수감성의 절대적 우위를 말한다.'라고
그의 회화의 의도를 피력했으며 이는 곧 시작적, 물질적 현실세계를 초월하여 대상없는
정신세계를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말레비치는 절대주의 회화를 위해 사각형을 기본
요소로 선택했고, 정사각형은 가장 이상적 형태로 십자형, 장방형 등 다른 절대주의의
형태들의 안내자 역할을 한다. 말레비치의 그림에서의 흰색바탕은 푸른 하늘의 경계를
부수고 무한한 공간으로 탈출하려는 그의 의지를 나타내며 절대주의가 전개될수록
색이 정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이유로 사각형에서 채색된 선명한 색채마저 배제하게 된다.
말레비치는 몬드리안과 마찬가지로 비구상에 이르기 위해 초기에 입체주의를 받아들였
는데, 피카소의 큐비즘보다는 레제의 원통주의를 도입하였다. 서민의 생활상을 기하학
적 형태로 환원하여 보여주다가 1913년에 <흰 바탕위의 검은 사각형>이라는 단순한
기하학적 구성의 절대주의 작품을 제작한다. 이 작품은 1918년 12월 페트로그라드
에서 열린 '0,10' 전시회에 출품되었고 절대주의 선언을 발표하게 되었다.
1915년 이후 한동안 여러 색채의 크고 작은 사각형을 배열시킨 작품을 발표하여 다색
시대를 맞이한다. 이 시기의 작품들에서는 색채의 순수성, 즉 색채가 회화의 부속물이
아니라 독립된 하나의 단위로 존재한다는 점을 추구한다. 1918년 <흰 바탕의 흰
사각형>이라는 궁극적인 절대주의 작품이 등장한다. 모든 불순물을 쏟아버린 무의
세계라는 말레비치의 표현에서처럼 절대적 우위성을 극렬하게 드러냈다.

말레비치는 '자연 그 자체의 실제와 같이 의미있는' 새로운 실제를 창조하려 했다.
'예술에 있어서 순수한 감정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한 그는 몬드리안의 이성
중심과는 반대로 감성의 극한적인 극점으로서의 추상을 주장했다. 단순한 현실적 감각
세계를 거부한 것이 아닌, 순수한 감성으로서의 극점, 즉 주관주의적인 추상이며 몬드리안
보다 훨씬 앞서서 시작한 추상이었다. 몬드리안의 작품과 비교한다면 모두 기하학적 추상
형태로서 어떠한 정감이나 현실의 모습의 재현을 배제하지만, 몬드리안의 작품이 현실
세계로부터 출발하여 지적이며 합리주의적인 장기간의 숙고의 결과물인 반면, 말레비치의
작품은 직관적 통찰에 의해 현실을 단기간에 초월하여 얻어낸 절대의 세계였다.

Flower-Girl, 1903

Spring, 1905/1906

Die Hochzeit, 1907

Landschaft(Der Winter), 1909

Taking in the Harvest, 1911-1912

Morning in the Country after Snowstorm, 1912

다소 산만한 듯한 빛의 방향과 빨강, 파랑, 흰색의 강렬한 색이 인상적이다.
지난 밤의 폭풍우가 마을을 눈으로 뒤덮고, 아침 햇살의 강렬한 빛이 마을을 덮은 눈 위
에서 반사되고 있는 모습이다. 이 시기의 말레비치는 모든 물체를 분해하는 입체주의와
차가운 금속미의 미래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The Woodcutter(나뭇꾼), 1912

로봇과 같은 모습의 이 나뭇꾼은 너무나도 유명한 말레비치의 대표작이다.
그는 스스로 이 작품에 대해서 역동적 구성이라 칭하기도 하였는데 따뜻한 색의 느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날카롭게 떨어진 선과 빛의 각도가 입체주의의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다소 경건한 분위기가 밀레의 만종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Reaper on Red Background, 1912-13

러시아 민족주의의 감정을 실은 이 작품은 앞의 나뭇꾼과 같은 스타일의 그림이다.
말레비치는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고향의 농부들의 생활을 단순하고 장엄하게 그려냈다.
명암 대비와 원색으로 강조된 곡면의 입체감이 앞의 나뭇꾼보다 훨씬 단순화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Black Circle, [1913] 1923-29

Black Square, [1913] 1923-29

말레비치의 절대주의 회화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으로 처음 전시되었을 때 파란을 불러
일으켰다. 이 그림은 러시아 정교의 성상과도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
그래서 말레비치가 죽은 후 러시아 미술가 연맹에 안치되었을 때 그의 머리 위 벽에 이
그림이 걸렸다고 한다. 십자가 대신으로 말이다.

The Aviator, 1914

말레비치 특유의 명암대비 인물표현이 엿보인다. 물고기, 문자, 카드 등 다소 비행사와
는 상관없을 듯한 여러가지 물체들을 산만하게 배치되어 있다. 아직까지는 입체주의
영향이 남아 있는 듯 하다.

An Englishman in Moscow, 1914

나뭇꾼과 흡사하게 그려진 인물을 뒤에 두고 재미있는 물체들이 화폭에 배치되어 있다.
단어들, 물고기, 촛불, 총검, 교회, 칼 등이 일관성없이 나열되어 있는데, 이는 영국인의
도시에 대한 경험을 묘사한 것이라고 한다.

Soldier of the First Division, 1914

Red Square: Painterly Realism of a Peasant Woman in Two Dimensions, 1915

Black Square and Red Square, 1915

Suprematist Painting: Aeroplane Flying, 1915

당시 러시아는 혁명으로 인해 물질주의 세계관이 팽배해 있었다. 말레비치의 초기 절대주의
작품으로 물질주의적인 제목이 붙어 있다. 하지만 예술의 효용성만을 따지고, 추상적인 것
보다는 눈에 보이는 것만을 추구하는 당시의 사회 흐름에 그는 부담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앞으로 나타나게 되는 절대주의 스타일의 그림에는 <절대주의>라고 제목을 붙이고
있다.

Suprematist Composition, 1915

Suprematism, 1915

Suprematism:Self-Portrait in Two Dimensions, 1915

Suprematist Painting, 1915-16

Suprematist Painting, 1916

Supremus No. 56, 1916

Suprematism(Supremus No. 58), 1916

Suprematism, 1916-17

절대적 감각의 추구와 새로운 기호의 창조에 자신의 예술세계인 절대주의를 설명한 말레
비치는 위의 그림과 같은 스타일을 시리즈로 그렸다. 훗날 이 절대주의 감각은 바우
하우스를 통해 많은 디자이너들에게 전해졌고 아직까지도 그 감각적 흐름은 현대 디자인
의 주류가 되고 있다.

Girls in the Field, 1928

Complex Presentiment: Half-Figure in a Yellow Shirt, 1928-32

그의 초기작품에서 많이 보았던 명암대비의 물체 표현이 약간 보이지만 그동안 추구해
왔던 절대주의 스타일의 그림과는 사뭇 다른 작품이다. 그러나 감각적인 원색의 대비는
그의 디자인 경향을 느끼게 하고 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집 한 채를 바라보고 있는
외로운 사람의 뒷모습은 고독한 말년의 말레비치 자신을 연상시키고 있는것 같다.

Sportsmen, 1928-32

Red House, 1932

Running Man, 1932-34

Girl with a Comb in Her Hair, 1932/1933

Self Portrait, 1933

Portrait of the Artist's Wife,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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