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미술사13-1- 바로크 네덜란드 렘브란트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1669)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네덜란드 화가로 손꼽히는 렘브란트는 네덜란드의
레이덴에서 제분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의 희망에 따라 레이덴
대학에 들어갔으나, 수개월만에 화가를 지망하여 자퇴하였다. 그후 라이덴의
화가 J. 스와넨브르크에게 사사받았으며 이어서 암스테르담에서 P. 라스트만의
문하에 들어갔다. 1624 라이덴으로 돌아와 이듬해부터 독립하여 아틀리에를
열었다. 1632년까지 독학으로 친척, 이웃노인, 성서에서 소재를 얻어 꾸준히
그림을 그렸다. 그의 노력이 열매를 맺어 1632 암스테르담 의사조합으로부터
위촉받은 [툴르프 박사의 해부] 호평을 계기로 암스테르담에 정착하였다.
1634
명문가의 사스키아 오이렌 부르흐와 결혼하였으며 당시의 미술
세계시장 이라고 있는 암스테르담에서 첫째가는 초상화가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그의 회화가 성숙함에 따라 당시의 일반적 기호였던 평면적인
초상화 등에 만족할 없게 되어 외면적인 유사성보다는 오히려 내면적인
인간성의 깊이를 그리고자 하는 바램이 절실해졌고 종교나 신화적인 소재나
자화상류의 작품이 많아졌다.
1642
년의 명작 [야경(夜警)] 그를 세속적 명성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작품은 암스테르담 사수협회(射手協會) 주문에 의한 단체
초상화인데 렘브란트는 당시 유행하던 기념촬영적 단체 초상화에 만족해하지
않고, 특유의 명암 효과를 사용하여 대담한 극적 구성을 시도하였으나
사람들로부터 예술의 깊이를 이해받지 못하였으며, 엎친데 덮친격으로
사랑하는 아내마저 죽자 실망과 곤궁 속에 빠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의 위대한 예술이 전개되기 시작한 것은 때부터
라고 있다. 죽은 아내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 티투스의 성장과
1645
년경에 맞은 마음씨 착한 둘째 부인 헨드리케의 내조는 그의 예술을 더욱
원숙하게 하였고, 오늘날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의 대부분은 1640년대
이후에 만들어졌다. 그러나 생활은 날로 어려워졌으며, 결국 1656년에 파산
선고를 받아 살고 있던 저택도, 그의 예술적 영감을 끝없이 자극해주던 여러
가지 미술품도 모두 그의 손에서 떠나게 되었다.
1662
헨드리케가 죽고, 1668년에는 유일한 아들인 티투스마저 죽자
그도 이듬해 10 유대인 구역의 초라한 집에서 임종을 지켜보는 사람도 없이
쓸쓸히 죽었다. 그가 죽을 남긴 것이라고는 벌과 그림 도구뿐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의 위대함이 발견되기까지는 100년이 걸리지 않았다.
현존하는 렘브란트의 작품은 유화, 에칭, 소묘, 종교화, 신화화, 초상화, 풍경화
풍속화, 정물화 모든 종류에 걸쳐 있으며, 현존하는 작품은 유화 600
에칭 300 , 소묘 수백 등이 있다. 특히 종교화의 경우 매우 장엄한
효과를 살린 작품이 많으며 렘브란트만큼 많은 자화상( 100) 그린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언제나 자기에 대하여 겸허한 사람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가 설혹 유화를 점도 그리지 않았다 하더라도, 에칭의 모든 기술이
렘브란트에 의해 완성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에 사실만으로도 유럽
회화사에서 최고화가의 사람으로 꼽을 있을 것이다.
더구나, 17세기의 네덜란드 회화는 직접 또는 간접으로 그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예술은 시대를 훨씬 초월하고 있다.
종교적 소재에서도 렘브란트만큼 마리아나 그리스도의 모습을 일상의 모습에서
구한 사람은 없다. 그러면서도 그의 작품에 높은 종교적 정감과 깊은 인간
심정의 움직임이 표현되어 있는 것은 특유의 명암법에서 기인한다.
그의 작품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빛의 효과를 최대한 활용하여 색채 명암의
대조를 강조함으로써 의도하는 회화적 효과를 얻었다는 점이다.
그를 일컬어 '혼의 화가', '명암의 화가'라고 하는 것은 작품의 대상에 대해서는
사실적이지만, 빛의 효과에 대해서는 최대의 이상주의자였기 때문이다.
, 색이나 모양이 모두 자체이며, 명암을 통해 생명의 흐름을 표현했다.
'
빛의 미술가'라고도 불리우는 렘브란트의 화려한 붓놀림, 풍부한 색채, 하늘에서
쏟아지는 듯한 빛과 어두움, 강렬한 힘과 내면을 꿰뚫는 통찰력, 종교적 권능을
감지하게 하는 탁월한 빛의 처리 기법은 미술사의 영원한 신비로 남아 있다.
또한 회화사에서 렘브란트만큼 심오하게, 그리고 그만큼 불안과 고뇌를 지니고
인간과 세계, 화가와 , 순간의 언어와 영원의 표현 사이의 관계를 파헤친
화가는 없다. 인생과 작품이 인간의 본성과 일치하는 화가들이 있는데
렘브란트가 그러했다. 그는 비범한 투시력과 '명암에 대한 최고의 지성' 지닌
빛과 어둠을 훔친 화가였다.

*The Music Party, 1626*

*Jeremiah lamenting the destruction of Jerusalem,1630*

*A Scholar,1631*

*The Anatomy Lecture of Dr. Nicolaes Tulp(튈프교수의 해부학 강의),1632*

*Artemis,1634*

*Saskia as Flora, 1634

*Rembrandt and Saskia in the Scene of the Prodigal Son in the Tavern,1635*

작품의 주제에 대해서는 동안 여러 가지 해석이 내려지고 있다.
해석을 대별하면 다음의 가지로 나뉘어진다.
첫째, 렘브란트의 신혼 생활의 행복한 모습을 그린 .
둘째, 성서(聖書) 나오는 방탕아의 역할을 스스로 연기하고 있는
렘브란트와 사스키아 부부.
셋째, 자만심에 대한 경종의 우의(愚意) 담긴 . 그러나 그와 같은 해석은
어찌 됐든 작품은 렘브란트 자신과 사스키아를 모델로 다분히 우의적인
2
초상화임에는 틀림없다. 그림에서는 의기 양양한 렘브란트가
사스키아를 무릎 위에 앉히고 이쪽을 향해 술잔을 높이 들고 있다.
그리고 왼쪽 탁자 위에는 공작이 놓여 있다.
네덜란드의 도덕적 우의(寓意) 의하면 술잔은 호의호식을, 공작은 오만함을
의미한다고 한다. 렘브란트가 차고 있는 칼도 때의 신분으로서는 허용되지
않은 것이었다.

*Portrait of Saskia with a Flower, 1641*

*The Feast of Belshazzar,1635*

*Danae, 1636-47*

*Self-Portrait,1640*

*The company of Frans Banning Cock preparing to march out

known as the Nightwatch(
야경),1642*

*The Little Children Being Brought to Jesus

("The 100 Guilder Print")Completed,1647-49*

렘브란트의 예술을 이해하는 있어 빼놓을 없는 것이 그의 소묘와
동판화이다. 소묘는 그때까지만 해도 하나의 초벌 그림의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렘브란트의 그것도 범주를 벗어나는 것은 되었으나 독특한
필치는 일단 인정하더라도 그의 동판화는 고금을 통해서 알브레트 뒤러, 고야와
함께 동판화의 3 거장의 한사람으로 간주되고 있다. 동판화가 필요로 하는
정교한 기법적 훈련이 렘브란트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했고 특히 흑백의
대비의 미묘한 효과는 렘브란트의 독특한 명암법의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동판화 기법을 단순한 복사(複寫) 방법으로서 만이
아니라, 그것을 독자적인 예술 형태로 정립시킨 판화영역에 있어서의
혁신자가 아닌가 생각된다.

*엠마우스의 순례자들,1648*

렘브란트는 그리스도가 명의 제자와 함께 식사를 하는 장면이 담긴
"
엠마우스의 저녁식사"라는 테마를 즐겨 그렸다. 그가 1648년에 그린
<
엠마우스의 순례자들> 신성한 그리스도의 위엄으로 가득 있다.
레오나르도 빈치나 티치아노, 베로네제와 같은 르네상스 전성기 화가들의
회화구성이 그대로 스며있는 그림은, 도상해석을 요구하는 긴장감이 풍겨
나온다. 그림의 중심축을 이루는 그리스도가 화면 왼쪽으로 약간 벗어난
곳에 자리한 구성을 보여주는 작품은 날카로운 사실적인 표현이 돋보인다.
그리스도의 창백하고 핏기 없는 얼굴은 그가 죽음의 승리자라는 암시를
나타낸다. 예수에게 건네지는 포도주 잔은 비어있고 조각으로 잘려진 양의
머리는 <최후의 만찬>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예수의 수난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고 있다. 렘브란트는 인간성과 깊이 있는 종교적 진리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엠마우스의 순례자들> 당대의 모든 종교화의 전통을 혁신적으로
바꾸어버렸다.

*Bathsheba at Her Bath,1654*

*Jan Six,1654*

*가죽 벗긴 ,1655*

렘브란트의 후기 작품들은 빚을 갚기 위해 제작된 그림들이 상당히 많았다.
심지어 작품이 그려지기도 전에 먼저 경매가 붙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의 60
점의 자화상 몇몇 작품들이 이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이와는 다른 제재를
담은 <가죽 벗긴 > 독특한 소재와 강렬한 사실감, 함축적인 은유 등으로
이루어진 그림이다.
가죽이 꺼풀 벗겨진 소의 다리는 나무 받침대에 묶여 있다.
도축장 내부 풍경의 단면을 보여주는 듯한 어두운 공간에는 아직도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죽은 소가 매달려 있다. 약간 뒤쪽 문가에는 모자를 젊은
여인이 상체를 내밀어 안을 들여다보는 자세로 있다. 거꾸로 매달려 있는
벗겨진 소는 마치 십자가에 박힌 예수를 연상하게 만드는 구도로 짜여져
있다. 색채 또한 너무나 강렬해서 빛이 쏘여지는 짐승의 밝게 빛나는 몸통에
흐르는 핏자국과 돌출된 뼈는 어두운 외부 배경과 대비되면서 극도의
자연주의적 사실감을 획득한다. "식탁에 오르기 위해 도살되는 가축"이라는
주제는 서양 미술사에서 하나의 전통으로 자리잡은 단골 메뉴였는데, 후에
고야의 작품 <죽은 닭들> 같은 작품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렘브란트의 <가죽 벗긴 > 이러한 주제의 시조라고 만큼 당시에는
독창적인 소재였다. 작품에서 렘브란트는 비참하게 벗겨진 죽은 동물의
몸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서, 인간의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악행에 대한
고발을 냉정하게, 그리고 극적으로 뛰어나게 재현하고 있다.

*The Artist's Son Titus, 1657*

*Portrait of a Lady with an Ostrich-Feather Fan,1660*

*Portrait of the Artist at His Easel,1660*

렘브란트는 생애에 솔직하고 자기 분석적인 60 점의 자화상을 남겼다.
작품은 렘브란트의 궁핍하고 비참했던 말년 즈음인 1660년에 제작된
캔버스를 앞에 두고 있는 자화상이다.
말년에 그린 대부분의 자화상들은 소박한 위엄과 번민에 가득 인간의
솔직함이 감동적으로 드러난다. 아내와 자식, 모든 재산을 잃은 렘브란트는
자화상 속에서 아름답게 꾸며진 얼굴이 아니다. 자신의 못생기고 추한 부분을
성실하고 빈틈없이 관찰하면서도, 격한 감정을 절제된 붓끝으로 화폭에
날카롭고 침착하게 담고 있다. 렘브란트는 오른손에 붓으로 팔레트에
물감을 묻히는 중이다. 화면 오른쪽에 간신히 빛의 윤곽만으로 드러난
캔버스는 어두운 배경 속에 묻혀 있다.
모자를 렘브란트는 마치 작업중에 찾아온 누군가를 보고 있는 자세를
취했다. 분명하지 않은 윤곽선으로 묘사된 얼굴은 특징적인 부분만 강하게
부각시켜, 렘브란트의 추하고 못생긴 얼굴이 더욱 사실적으로 다가온다.
강렬한 명암 대조 효과가 사용된 가운데 무겁고 짙은 농도의 색채가
덧입혀지면서, 복잡한 인간 표정의 없는 내면이 진실하게 그림으로
드러나게 된다. 그림은 거울을 앞에 두고 거기에 비친 렘브란트 자신의
모습을 담는 구도로 설정되어 있다.

*The Syndics of the Clothmaker's Guild (The Staalmeesters),1662*

*The Jewish Bride (The Loving Couple),1666*

*Self-Portrait,16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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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12 바로크 –카라바지오, 루벤스

   

5. 바로크 미술(Baroque Art: 왕실 중심의 동적인 17세기 미술 양식)

"
바로크" "일그러진 진주"라는 뜻으로 르네상스의 단정하고 조화된 이성적인
표현에 비해, 강한 왕권과 함께 나타난 거칠고 과장된 남성 경향의 17세기
미술양식이다.

바로크 미술은 대략 1600년경부터 1750년까지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여러 카톨릭 국가에서 발전한 미술 양식을 말한다.
"
바로크" 원뜻은 지나치다라는 남용의 뜻이지만, 이상하고 비논리적인
것에서 나온 괴상하고 과장된 형태를 뜻하게 되었으며 르네상스와 비교해서
바로크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보다 빛나는 색채, 음영과 질감의 풍부한
대비 효과, 자유롭고 표현적인 붓질 등으로 비고전적, 동적, 남성적, 불규칙적인
성격과 심한 과장성의 표현이다.
20
세기에 들어와서 독일의 미술사가 H. 뵐플린은 19세기의 평가에 나타나는
양식을 르네상스 고전주의의 퇴폐현상이라고 보는 견해를 부정했다.
그의 연구는 바로크 미술은 르네상스의 타락도 아니고 진보도 아니며
르네상스와는 완전히 이질적인 양식이어서 양자는 근대미술에서의 2
정점을 형성하는 이라고 규정하였다.

바로크는 로마에서 발생하여 이탈리아 , 보헤미아, 오스트리아, 독일
에스파냐로 번져 나갔고 라틴아메리카에까지 확대되었다.
양식은 반종교개혁의 유력한 표현수단이 되어 여러 가톨릭 국가에서는
종래의 종교적 도상(圖像) 일신하고 종교미술에 신선한 입김을 불어넣었다.
동시에 바로크는 귀족들의 표현수단이기도 하여 화려·호사한 의식을 과시하고
장식하는 구실을 다하였다.
바로크는 16세기 고전적 르네상스의 조화·균정(均整완결성 등에 대하여
경탄과 현혹(眩惑) 지향하여 양감(量感광채·동감(動感) 호소하였다.
그리하여 건축에서는 거대한 양식, 곡선의 활용, 자유롭고 유연한 접합부분 등의
특색을 나타내고, 조각에서는 비상(飛翔)하는 동적인 자태와 다양한 복장 표현
등을 특색으로 하였다. 회화에서는 대각선적인 구도, 원근법, 단축법, 눈속임
효과의 활용 등이 전체적인 특색이다.
18
세기에 들어와서도 바로크는 로코코 양식 속에서 명맥을 유지하였다.
바로크는 이미 16세기에 미켈란젤로 말년의 작품이나 틴토레토의 회화에서도
엿보이는데 마니에리스모(Manierismo) 공존하면서 16세기 말엽 로마에
등장한다. 종교건축에 있어서의 C.마데르나와 G.베르니니의 작품(산피에트로
대성당의 정면부 주랑, F.보로미니의 생카를로 알레 콰트로 폰타네교회당)
조각에서 베르니니의 작품인 산피에트로대성당 고해단(告解壇) 천개(天蓋)
유물궤(遺物櫃), 나보나 광장의 분수, 종교적 공상의 세계를 그린 A.포초의
천장화(天障畵) 등이 대표적 작품이다.
바로크는 이탈리아 각지에 전파되어 토리노의 () 신도네 교회 나폴리의
카세르테궁(), 베네치아의 산타마리아 델라살루테성당과 G.티에폴로의 회화
등을 만들어냈다. 북방 바로크의 중심인 빈에는 마르티넬리, A.힐데브란트 등의
궁전·교회 건축, B.페르모저 등의 조각, 모르베르슈의 회화가 있다.
뮌헨·드레스덴·프라하도 중심지에 포함된다.
에스파냐에서는 바로크가 전통적인 추리게레스코 양식과 결합하여 마드리드의
()페르난도 구제원, 그라나다의 샤르트르회()성당 등을 꼽을 있는데
멕시코·브라질·콜롬비아·페루의 식민지에서 독자적인 장식양식을 낳았다.
벨기에에서는 P.루벤스의 회화와, 플랑드르 고딕과 건축 양식에서 있다.
명석함과 중용을 국민정신으로 하는 17세기의 프랑스도 바로크와 무관하지는
않았으나, C.비뇽, S.부에, J.블랑샤르의 회화 활동도 시험적인 영역에 머물렀다.
오늘날 바로크는 좁은 의미의 미술 양식에서 벗어나 넓은 뜻의 문화양식으로서
다른 시대와 장르에도 확대 적용되고 있으며, 고대 로마의 말기, 중세 말의 후기
고딕, 1900년대의 아르누보(art nouveau) 미술에도 적용되었다.

바로크 미술의 성격은 다음과 같이 정의될 있다.
첫째, 자연주의적 추세를 부활시킨 카라바조는 예술의 원천으로 관념보다
자연의 관찰을 강조했다.
둘째, 전성기의 르네상스 고전기와 로마 고대 풍습으로의 복귀였다.
셋째, 필수적이며 가장 지속적인 요소로 베네치아 - 특히 티치아노의 전통이다.
이러한 전통과 코렛지오의 예술에서 이탈리아 바로크의 색깔과 , 풍요로움이
비롯된다. 요인으로 1620년대에 바로크 양식은 루벤스와 로마 화가들에
의해 최초로, 놀라운 모습으로 창조되었다


카라바조(Michelangelo da Caravaggio: 1573~1610)


이탈리아 초기 바로크의 대표적인 화가이다.
그의 종교적 리얼리즘과 강한 명암의 대비를 바탕으로 인간의 격정을 힘차게
표현한 사실적 화풍은 기성의 화가로부터 반발을 받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젊은
예술가들의 열렬한 반응을 얻음으로써 새로이 전개하려고 하는 이탈리아 바로크
회화 전반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

1584
밀라노의 화가 시모네 페테르차노에게 사사하고 로마로 가서
처음에는 빈곤과 병고로 비참한 생활을 하였으나, 뒤에 추기경 몬테의
후원으로 화가로서 이름을 떨치기 시작하였다.
초기에는 정물과 초상을 치밀한 사실기법으로 묘사하여 바로크 양식을 확립
하였는데, 성모와 성자를 모델로 로마에 사는 빈민의 모습을 등장시킨 그림들을
보면 그는 빛과 그림자의 날카로운 대비를 기교적으로 구사하고, 형상을 힘차게
조소적(彫塑的)으로 묘사함으로써, 근대사실(近代寫實) 길을 개척하였다.
금색을 바탕으로 밝은 색의 조화로써 구성된 초기 작품에서 격하게 억제된
빛으로 조명된 만년의 음울한 작품에 이르기까지, 그의 예술은 언제나 빛과
형상에 대한 근본원칙을 확립하고 있다.
이탈리아적인 조형 전통을 부활시킴과 동시에 F.할스와 렘브란트 그리고 초기의
벨라스케스에 이르기까지 많은 영향을 주었고, 17세기 유럽 회화의 선구자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화풍은 제자인 에스파냐의 리베라를 통해 살바토르
로자에게 계승되었다.

*The Stigmatization of Saint Francis,1596*

*The Fortune Teller, 1596-97*

*Rest on Flight to Egypt, 1596-97*

*Bacchus,1597*

*St Catherine of Alexandria, 1598*

*Martha and Mary Magdalene, 1598*

*Judith Beheading Holofernes,1598*

유디트는 이스라엘 베틀리아에 살았던 여인이다. 앗시리아군의 사령관
홀로페르네스는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어 서반 세계를 모두 정복했다.
오직 이스라엘만이 저항을 하고 있었는데 드디어 홀로페르네스는 이스라엘로
들어가는 요충지인 베트룰리아를 포위하게 되었다. 그래서 생각다 못해 과부인
유디트가 나선다. 예쁘게 꽃단장을 하고 앗시리아군에 거짓 투항을 한다.
그리하여 술에 거나하게 취해 추태를 부리는 적장의 목을 유디트가 단칼에 베어
버린다. 여기서 홀로페르네스의 얼굴은 카라바조 자신의 얼굴을 모델로 했다고
한다.

*The Calling of Saint Matthe,1599-1600*

작품은 " 마태의 생애" 주제로 삼아 연작으로 만들어진 작품
<
마태와 천사> < 마태의 부르심> < 마태의 순교> 하나인
<
마태의 부르심>이다. 화면의 오른쪽으로 그리스도와 사도가 다가오고
있으며, 동료들과 탁자에 앉아 있는 세리 마태는 이해의 몸짓으로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키고 있다. 사도의 몸에 가려 옆얼굴만 비치는 그리스도의 손은 세리
마태로 향하고 있어서, 무언가 절박하면서도 엄숙한 메시지가 전해지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그림의 오른쪽 위에서 정확한 대각선을 그리며 쏟아지는
강한 계시의 빛이 그리스도의 머리 위를 통과하면서 인물들의 얼굴을 비추고
있는데, 빛으로 인해 어둠 속에 묻혀 있던 각각의 표정들이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음을 있다.
작품에는 카라바조가 창안해낸 "테네브리즘(Tenebrism)", 실체만을
조명하는 기법이 적용되었다. 어둠과 빛의 극적인 대비를 통해 어둠에 숨어
있던 세리 마태가 돈을 세는 장면, 사울이 찼던 칼이며 깃털 달린 모자, 그리고
인물들의 감춰진 표정들까지 드러나게 되는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실내와 외부의 경계가 모호한 공간 속에서 서치라이트처럼 비추는 빛의
효과는, 이제 십자가에 박힐 운명을 지니게 그리스도의 절박하면서도
신성한 부르심을 하나의 드라마처럼 드러내는 것이다.

*Supper at Emmaus,1600-1601*

*Amor Vincit Omnia,1601-02*

*The Inspiration of Saint Matthew,1602>

*동정녀 마리아의 임종,160506*

작품은 당대의 플랑드르 화가 루벤스가 직접 구입하기도 했던 걸작이다.
루벤스는 카라바조의 회화 양식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으며, 카라바조의 강렬한
빛의 사용과 극적인 사실감에 영향을 받아 그의 작품에 이러한 기법을 도입
하기도 했다. 그림은 성모 마리아의 죽음을 주제로 삼아 제작된 작품이지만
그림의 실제 모델은 티베르 강에서 빠져 자살을 로마 소녀였다.
회화에 나타나는 대부분의 성모상은 경건하고 신비한 존재로 부각되는 것이
상식이었던 당시에, 카라바조는 부풀어오른 몸과 발이 드러난 평범한 처녀를
성모로 설정하였다. 이는 성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분노를 일으키게
했다. 카라바조의 극적인 사실적 자연주의는 하나의 주제를 인물에 집중해서
투영하고자 강렬한 빛으로 무대를 설정하고, 뒷배경들은 레오나르도풍의
"
스푸마토 기법"처럼 멀리 희미해지거나 어둡게 처리한다. 작품에서도 죽은
성모의 육체와 바로 앞에서 슬프게 우는 여자와 사도의 표정만이 빛에 의해
드러나고, 죽음을 상징하는 어둠 속에 사람이 있을 뿐이다.
성스러운 신앙의 세계가 지배하던 16세기 사회를 완강히 거부하며 속세의
신앙을 창조적으로 재구성했다는 것을 <성모의 죽음> 통해서 다시
확인할 있다. 성모를 지켜보는 머리가 벗겨진 사도를 통해서만이 죽은자가
성모라는 것을 확인해주면서 카라바조는 위선적인 종교의 권위나 맹신에 대한
저항을 회화를 통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


루벤스는 북유럽 바로크의 주도적 인물로 회화가로서 그의 영향력은 건축가
베르니니보다 훨씬 지대했다. 그는 플랑드르 어느 매너리스트에게 훈련받았고
고전, 르네상스 미술의 전통을 두루 섭렵하고 당대의 카라바조, 카라치의 예술을
역시 흡수했다. 그는 생애에 모든 영예를 누리며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그는
소장품도 최고의 것이었으며 때로는 외교사절로 활약하며 당대를 풍미했던
인물이다. 그의 이와 같은 배경의 자신감은 왕과 같은 품위를 지닌 [자화상]
에서 반영되고 여유 있는 생활과 인품은 정신적인 면에서 휴머니즘과 평화를
주도하려는 한편 구체적 회화양식에서 풍요롭고 구성과 아름답고
화려한 관능과 호사스러운 취향에서 확인할 있다.
그는 매우 다작이어서 그의 모사품이 많은 것으로도 유명한데 아니라
다양한 화풍과 주세를 망라하고 있다. 초기작들은 대체로 고전적이고 선적인
조심스러운 경향이 있으나 역동적이고 유기적 관계의 긴장감 있는 구성은
바로크의 특징적인 면이 드러난다.
[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강한 하이라이트가 예수의 신체에 집중되고
염려하는 인물들의 표정이 유기적 관계의 구성이다. 깊고 요동하는 대각선의
처형에 지친 인물과 주위의 고뇌 등은 표현에서 분명히 바로크적이라고
하겠다. [루시퍼스의 딸들의 능욕] 그의 회화의 정수이자 찬란한 색채 효과
관능성, 긴장되고 열린 공간으로서 그의 특징이 두드러진다.
백색의 여체와 구릿빛 남자의 근육의 대비, 반항하는 격렬한 몸짓과 울부짖는
말은 곡선적이고 꾸물거리는 선들이 특징이라고 하겠다.
[
마르세이유에 도착한 마리 메디치] 그녀의 일생의 연작 하나로 환락과
풍요, 관능이 더하여 [사랑의 정원]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가 그리는 방식은
수많은 이들이 그리면 그가 명암의 균형과 최종적인 구성에 주된 리듬과
악센트를 주는 방식으로 다작이 가능했으며, 그는 자신의 생각을 빠른 속도로
스케치하여 아이디어를 담는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말년에 이르러 그는 새로운
아름다운 부인에게서 새로운 영감을 받아 신화적이고 육감적인 누드의
아름다움을 그리고 노년의 눈으로 다채로운 풍경화를 그렸다.
[
스텐성] 그의 화려한 필치가 살아 있는 자연 풍경에 주목하게 하고 명암법과
임파스토의 하늘은 멀리 터너를 예감케 하고 있다.
루벤스는 자신의 미술을 판화를 통해 성공적으로 널리 전파시켰으며, 판화의
보급에 영향을 미치고 이후 로코코의 와토, 게인즈보로, 낭만주의 들라크루아
인상주의 르노아르까지 여러 작가들에게 절대적 영향을 미친다.

*Portrait of Marchesa Brigida Spinola Doria, 1606*

*Portrait of Maria Serra Pallavicino, 1606*

*Saint Gregory with Saints Domitilla, Maurus, and Papianus,1607*

*Self-portrait with Isabella Brant,1610*

로마에서 활동중이던 루벤스가 모친의 사망으로 급거 귀국한 것이 1608
이었다. 그는 이듬해에 이사벨라 브란트와 결혼하였다.
작품은 결혼 일년 후의 것이 된다. 루벤스는 신부에 관하여 친구에게 '그녀는
선량하고 정숙한 여성'이라는 편지까지 썼으며, 부부 사이는 원만하고 다정
하였다. 그림은 아직도 신혼의 정겨운 사람의 사이를 나타내 보이는
장면임을 있다. 다시 말하자면 평화롭고, 만족스럽고, 기쁜 사람의
심정과 () 대한 희망과 즐거움을 보이는 장면이다. 루벤스는 ,
이미 이탈리아에서 수련을 끝내고 활동을 하고 있었으며, 카라바조, 티지아노
틴토레토, 베로네제 등의 화풍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그림은 어두운 색조이지만 명암과 채색법은 카라바조 ()
보이고, 대상을 파악하는 확실성 또한 정확하다.

*The Elevation of the Cross(십자가에 매달림),1611*

작품을 통해 루벤스는 북유럽 최고의 화가로서 확고한 명성을 구축하였다.
루벤스 고향에 있는 성당의 제단화로 그려진 작품은 <십자가에서 내려짐>
함께 최고의 종교화로 꼽히고 있다.
루벤스는 그림을 통해 십자가에 못박히는 순간에도 당당한 예수 그리스도의
영웅적인 모습을 통해 신앙에 대한 열정을 고무하고 있다.

*The Descent from the Cross(십자가에서 내려짐),1614*

<십자가에 매달림> 함께 루벤스의 대표적인 종교화다.
해가 지고 있어 어두워가는 배경속에서도 생명을 잃은 그리스도의 몸은 창백
하지만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다.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포즈는 매우 실감나게
그려졌으며,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로 흐르는 그림의 구도가 생명 잃고 힘없이
쓰러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상태를 느끼게 한다.

*Self-portrait with Justus Lipsius, Philip Rubens, and Jan Wowerius

known as The Four Philosophers,1611-12*

루벤스가 따르고 좋아했던 형이 사망한 것은 1611 8 이었다.
루벤스는 고전학을 배웠으며 고전학에 대한 관심이 깊었던 연유도 이에 있는
바이다. 그림은 추도의 뜻으로 그린 구상화(構想畵)이며 또한 루벤스의
고전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는 예이기도 하다.
그림에도 시대 루벤(Louven)대학 교수로 명성이 있었던 고전 학자이며
루벤스의 형의 스승이었던 쥐스타스리프시우스가 모피(毛皮) 의상으로
나타나 있고 화면 우측에 루벤스의 형이 보이고 후면에 루벤스가 있다.
화면 우측에는 리프시우스의 제자를 있다. 실내 배경으로 이들의
학문을 상징하는 고대 철학자 세네카(Seneca) 두상(頭像) 보이고 옆의
유리꽃병에는 개의 튜울립 꽃이 개는 피고 개는 봉우리로 되어 있다.
이것은 사람의 생존자와 사람의 사망을 의미한다.

*Holy Family with St Elizabeth

("Madonna of the Basket"),1615*

*Venus at a Mirror,1615*

*The Rape of the Daughters of Leucippus,1618*

X자를 형성하고 있는 독특한 구도의 그림으로서, 등장하는 인물들의 엉김으로
인해 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렇게 엉키고 있는 인물들은 생동감을 느끼게
하고 있으며, 역동적인 근육은 관능과 건강미의 표현이며 바로크 양식의 좋은
예이다. 그림의 내용은 제우스 신의 아들이 멧시나의 왕녀를 약탈하는
그리스 신화를 소재로 것이다.
그리스 아르고스의 레우키포스에게는 명의 딸이 있었다.
힐라에이가(기쁨) 포이베(화려함)였다. 그들은 쌍둥이인 륀케우스와 이다스와
각각 약혼한 상태였다. 그러나 제우스가 백조의 형상으로 레다에게 접근하여
태어난 튄다레우스와 레다의 쌍둥이 아들들인 카르토르, 폴록스가 레우키포스의
딸들을 사랑하게 된다.
신화에 따르면, 카스토르와 폴룩스는 힐라에이라오 포이베를 결혼식에서 납치
한다. 카스토르는 도망가던 이다스에게 살해되고 륀케우스는 폴룩스에 의해
죽으며, 이다스는 제우스의 번개에 맞아 죽게 된다. 폴룩스는 형의 곁에 남을
있도록 아버지인 제우스에게 함께 죽게 해달라고 청한다. 제우스는 형제의
죽음과 영원한 삶을 분할하여 그들을 하루는 저승에서 하루는 올림푸스에서
살게 한다.
<
레우키포스의 딸들의 약탈> 1618년에 완성된 루벤스 그림의 주제였다는
사실은 1777년에야 밝혀졌다. '여인 납치'라는 주제는 바로크 시대의 인기있는
주제였는데, 아마도 그림 속에서 바로크 영주들의 개인 애정문제까지 간섭하는
주제넘은 권력의 반영이었다.
전체의 사건은 명의 주요 인물들에게 집중된다. 검은 위에는 제우스의
아들 카르토스가 앉아 있다. 폴룩스는 그의 백마로부터 뛰어내렸다.
루벤스는 권투선수인 폴룩스를 갑옷과 투구로 무장하지 않는 모습으로 표현했다.
그는 나체의 레우키포스의 딸들을 붙잡고 있다. 바닥에는 포이베가 정교하게
주름이 잡힌 금빛으로 반짝이는 옷이 벗겨진 저항하고 있다. 폴룩스의 팔에는
하늘을 쳐다보며 간청하는 힐라에이라가 있다. 그녀가 두르고 있는 천의 빨간
색상은 카르토르가 어깨에 걸친 숄에도 똑같이 나타나 있어서, 그녀를 갈망하는
사람이 카르토르임을 암시한다. 그녀들의 간청에는 응답이 것이다.
검은 날개를 푸토가 카스토르의 말에 매달려 고삐를 잡아채고 카르토르는
납치에 대해 죽음으로서 속죄하게 된다.
그림은 1618 신원 미상의 주문자에 의해 제작되었다.
1716
이전에는 팔츠의 선제후 요한 빌헬름이 안트베르펜에 있는 그의 비공식
외교관을 통해 이것을 소유하고 있었다. 요한 빌헬름은 루벤스의 그림 46점이
포함된 자신의 소장품을 위해 1711 뒤셀도르프에 화랑을 설립하고 목록을
작성할 정도로 열성적인 수집가였다. 1731 대부분의 작품들이 빌헬름의
후손이 살고 있던 만하임으로 옮겨졌다. 나폴레옹 전쟁의 결과로 만하임의
그림들은 1805 뮌헨으로 옮겨져서 바이에른 미술관으로 편입된다.

*한복 입은 남자,1618*

우리나라에 표류한 하멜이 네덜란드에까지 가지고 한복이었다는 설과
유럽까지 흘러 들어간 조선 사람을 보고 그렸다는 , 그림 모델에 대해서
여러 추측을 낳고 있는 그림이다. 어쨌든 17세기 우리나라 한복의 아름다움을
느꼈던 루벤스는 낯선 이방인을 섬세하게 표현하였다.

*The Union of Earth and Water, 1618*

*Marie de Médici, Queen of France, 1622*

*Portrait of Anne of Austria, 1621-25*

*The Duke of Buckingham, 1625*

*Portrait of Susanna Fourment("Le chapeau de paille"), 1622-25*

작품은 '마리 메디치' 주제의 대작과 함께 루벤스의 걸작 중의 걸작이라고
알려져 있는 것이다. 원숙기에 해당되는 루벤스는 부인 이사벨라의 친척 관계의
여인을 모델로 하고 기타 작품에도 등장 시켰다. 작품은 한편 <밀짚 모자의
여인>이라는 명제로 불리우고 있으나 사실은 융단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초상화가 루벤스의 걸작으로 알려져 있는 이유는 모델의 여인이 작가의
이상형을 나타내는 여인이었다는 것과 여기에 루벤스의 성숙한 예술성이
투입되었다는 점이다. 젊음과 건강이 넘치는 여성상은, 밝고 맑은 눈동자와
표정풍부한 몸매를 시사하는 앞가슴 등으로 표상되고 있다.
청아한 여인상을 표현하는 루벤스의 예술은 맑은 청색의 배경과 빨간색, 검은
흰색으로 이루어진, 단순하고 화합되는 색조를 이용한 색채관으로 격조를
높이고 있다.

*The Meeting of Marie de Médicis and Henri IV at Lyon, 1622-25*

*The Capture of Juliers, 1622-25*

*Marie de Medicis as Bellona, 1622-25*

*The Fate Spinning Marie's Destiny, 1622-25*

*The Triumph of Truth, 1622-25*

*마리 메디치의 섭정 선언,162325*

작품은 프랑스의 루이 13세와 그의 어머니 마리 메디치를 찬양하기 위해
제작된 그림이다. 루벤스는 1620년대에 외교관으로서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한편으론 그림을 의뢰 받아 궁정에 장식할 화려한 그림들을 많이 그렸다.
<
마리 메디치>가의 생애를 담은 연작 작품이나 <마리 메디치의 초상>
등의 초상화는, 그림과 함께 화려한 궁정의 사치와 귀족 가문을 찬양하는
작품들이다. 거대한 캔버스에 담겨진 신비하고 장엄한 그림은 화면 왼쪽
으로 시작해, 반원을 그리며 다시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구성을 지니고 있다.
명의 선지자에 이끌려 하늘로 올라가는 사람은 밝고 희미한 윤곽으로 처리된
인물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하고 있으며, 아래에는 무시무시한 뱀들이
꿈틀거리고 있고, 그것을 보는 반라의 여인은 두려움에 놀라는 표정이다.
오른쪽으로는 마리 메디치가 옥좌에 앉아 여러 사람들에 의해 찬양을 받으며
내려다보고 있으며, 뒤에는 개선문으로 보이는 신전이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펼쳐져 있다. 앙리 4세의 신격화가 화면 오른쪽에서 시작되어 하늘로 오르다가
개선문을 통과하여, 그의 어머니 마리 메디치로 돌아와 완성되는 것이다.
고대 페르세우스의 신화를 차용한 작품은, 마리 메디치의 왼편에 메두사의
방패를 들고 있는 안드로메다를 구한 페르세우스가 왕비를 보호하고 있다.
우글거리는 뱀은 메두사의 머리에서 쏟아지던 피에서 생겨난 뱀을 상징한다.
화려하면서도 눈부신 빛의 색채들로 화면을 가득 메우고 신화와 종교적인
이미지의 힘을 빌어와 메디치가에 이입시키면서, 더욱 생동감 넘치고 장엄한
폭의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The Landing of Marie de Médicis at Marseilles, 1623-25*

마리 메디치는 앙리 4세의 왕비였다. 이탈리아 피렌체의 유명한 예술 패트런
메디치 가문 태생인 마리는 1600 프랑스로 시집왔다. 남편이 죽고 어린 아들 루이
13
세를 대신해 섭정을 펼치게 되면서, 그녀는 본격적으로 권력의 맛에 빠져들게 된다.
바람기 많았던 남편 앙리 4세는 암살되었다. 마리가 왕비로 책봉된 바로 다음날의
일이었다. 마리는 암살 음모를 알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나, 공모 여부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어쨌든 그녀는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게 되었고, 자연스레
권력의 유지, 확대를 위해 투쟁하게 되었다. 그런 그녀에게 가장 위협적인 존재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바로 자신의 아들이었다. 아들은 나이를 먹고 때가 되면 왕위를
계승할 것이고, 그러면 자신은 이상 섭정을 없게 것이다.
1614
아들 루이 13세가 마침내 성년에 이르렀으나, 마리는 1617년까지 섭정을
계속 끌고 갔다. 1617 루이 13세는 마침내 어머니의 심복인 이탈리아인 총신
코치니를 살해해 버렸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마리는 이후 차례 아들에
대한 무장 저항 음모를 꾸몄다. 그러다 1630 루이 13 편에 재상 리셜리외를
축출하려는 노력이 무위로 돌아가면서, 결국 아들로부터 유배형을 언도받게 된다.
이에 브뤼셀로 도망간 마리는 쾰른에서 죽었다. 권력도, 아들도 잃은 비참한
말로였다. 마리는 메디치 가의 딸답게 조형예술의 힘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찬양하는 대하 시리즈가 자신의 권세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계산
했음에 틀림없다. 루벤스는 당대의 최고 화가이기도 했지만, 특히 화려한 조형양식을
마리의 권력욕과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
작품은 마리가 마르세이유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루벤스는 단순한 사실을
마치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웅장한 환희의 장면으로 형상화했다. 마리가 갑판을
내려오는 순간 소문의 여신 파마가 쌍나팔을 불며 그의 머리 위를 날고, 바다의
포세이돈이 동안 마리의 행로를 지켜온 인어인 듯한 무리와 함께 수면 위로 올라와
열렬히 그녀의 도착을 환영하고 있다. 화적 상징과 절정에 이른 루벤스의 동적 화풍이
어우러지면서 잊을 없는 퍼레이드의 대단원을 빚어내고 있는 것이다.
연작이 마리의 욕망을 얼마나 충족시켜주었을까 하는 것은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연작은 마리의 생애만큼이나 파란만장한 곡절을 겪었다.
마리가 연작을 루벤스에게 의뢰한 때가 1622. 섭정이 끝나고 아들과의 불화가 점점
가파라질 때다. 1625 완성된 작품은 19세기 초엽 뤽상부르 사쪽 갤러리에서
동관으로 옮겨졌다가 1815 루브르로 보내졌다. 이때부터 산발적으로 이곳저곳 걸리게
연작은, 1900 루브르 '국가의 ' 재구성되는 여러 차례 재정리되나
리셜리외관이 개관하기 이전까지 2 년간 24 모두가 한자리에 선보여 적은
없다. 그녀가 '독을 품고' 축출하려 했던 재상 리셜리외를 기리는 리셜리외관(리셜리외는
프랑스 절대왕정의 기초를 확립한 일등공신이다) 미술관으로 온전히 환골탈태하면서
이제 리셜리외의 켠에 아기게 '마리 메디치의 일생'연작. 마리의 영혼이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 지는 없으나, 분명한 사실 가지는 역시 '권력은 짧고
예술은 길다' 것이다.

*Portrait of Isabella Brant,1625-26*

*Virgin and Child enthroned with saint,1627-28*

*Portrait of Helena Fourment, 1630*

*Helena Fourment, 1630-32*

*The Garden of Love,1630-32*

*The Little Fur (Helen Fourment, the Second Wife to the Artist),1638*

루벤스의 두번째 부인 헬레네 푸르망을 그린 것으로 그녀는 루벤스보다
37
살이나 연하였다. 수줍은 표정으로 남편 앞에서 포즈를 취한 그녀를 그린
루벤스는 작품이 판매용이 아니라 그녀를 위한 것이라고 유언으로 남겼다.
그림 여인은 화가인 남편을 사랑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고, 루벤스 역시
동일한 눈빛을 그녀에게 보냈을 것으로 상상이 된다.

*엘렌느 푸르망 부인과 자녀들,163637*

루벤스가 그린 작품들에는 가족들을 소재로 담은 그림들이 상당히 많다.
<
사랑의 정원>이나 <큰딸 클라라>, 하다 못해 성모와 어린 아이를 그린
작품에도 가족의 이미지를 부여하곤 했다. 그는 경제적, 정신적으로, 또한
예술가로서 행복한 생애를 보냈던 사람으로, 흔히 동시대 불행했던 화가
렘브란트와 비교되곤 한다.
그는 번째 부인과 사별한 젊고 아름다운 부인과 재혼을 했는데
새로운 가정 생활에 행복함을 그림으로 표현할 만큼 각별했다.
작품 <엘렌느 푸르망 부인과 자녀들> 그의 재혼한 부인과 이들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을 그린 그림이다. 루벤스의 가족 그림들은 색채가 눈부시도록
밝고 선명하면서도 화려한 것이 특징이다.
깃털이 길게 늘어진 모자를 부인은 부드러운 질감의 하얀 드레스를 입고
어린아이를 무릎에 올려놓고 있다. 희미한 윤곽으로 처리한 의자에 걸터앉은
부인과 자식의 포즈는 없이 행복하고 넉넉해 보일 만큼 편안해 보인다.
옆에 조금 자란 아이가 귀여운 표정으로 어딘가에 호기심 어린 눈길을 주고
있다. 무릎에 아이를 올려놓은 자세는 성모가 아기 예수를 안을 때의 자세와
흡사하며, 옆에 어린 세례 요한을 대동하는 구성이 그림에서 유사하게
적용되어 있다. 은은한 색채가 화면을 감싸고 있으며, 가족들의 사랑스럽고
행복한 표정들이 그림을 더욱 따뜻하고 부드럽게 만들고 있다.
루벤스는 재혼한 부인과 그의 자식들을 그리면서 경건한 종교적인 이미지를
그림 속에 함께 부여한 보인다. 그가 그린 성화들에 나타나는 강렬한
신앙에의 표출이 그것을 말해 준다.

*Bacchus,1638~40*

*Self-portrait,1638-40*

루벤스는 다양하고 막대한 양의 작품을 제작하였으나, 그의 자화상은 드물다.
작품은 스페인의 귀족풍의 모습으로 나타난 루벤스를 보여 준다.
그의 만년의 모습을 엿보게 하여 주는 걸작이다.
루벤스가 화가로서 또는 인간으로서 여성미에 대한 애착과 표현에 집착하여
결정으로 <毛皮(모피) 걸친 헬레네 푸르망> 제작했듯이, 자화상 또한
그의 최후의 자아(自我) 결산을 예술로 보여 주는 작품이다.
지난날 그의 전처 이사벨라와 함께 그려진 작품 <루벤스와 이사벨라 브란트>
신혼의 기쁨을 보이는 것이며, 이미 30년이 흘러간 과거가 되고, 그간 루벤스는
자신의 예술을 위하여 세월을 보냈다. 자화상에서도 배후와 인물의 의상이
동조의 짙은 색이 되어, 얼굴과 손만 부상되도록 채색되어 있고, 극도로 발달된
색채주의의 극치를 보이고 있다.

*Rubens, his wife Helena Fourment and their son Peter Paul,1639*

*The Judgment of Paris,1636*

*The Judgment of Paris,1639*

*St. Cecilia,1639-40*

*The Three Graces(三美神),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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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 - 바로크 프랑스 푸생

프랑스의 바로크 - 푸생(Nicolas Poussin, 1584~1665)

17
세기 중엽의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풍요롭고 강력한 국가였다.
결과 예술의 중심지는 이탈리아의 로마에서 파리로 옮겨오게 되었다.
또한 골동 취미적, 귀족적, 영웅적인 내용이 강조되고 밖의 양식은 빛을 보지
못했다. 결과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은 화가들은 우리들의 기억속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화가들은 조르즈 투르와 우이 르냉 등이다.
이들 그림의 공통점은 카라바조가 호평받았던 자연주의 강렬한 종교정신을
강조했던 것이었다. 이곳에서는 J.르메르시에·F.망사르 등이 바로크 건축을 수입
하였는데, 나라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인문주의의 전통이
뿌리 깊었으므로 바로크도 고전주의적 색채를 현저하게 띠고 있다.
사실 프랑스에서는 바로크를 <루이 14세의 양식>이라고 한정하여 부르는 일도
있는데, 이러한 의미에서 프랑스 절대왕정의 상징적 건축으로 루이 14세의 명령에
의해 건립된 베르사유궁의 대조영(大造營) 있다. 궁전의 설계는 J.H.망사르
조원(造園) 노트르, 장식은 화가 C.르브룅에 의해 이루어졌다.
회화에서는 J.칼로·르냉형제·G. 투르를 있으며, 조각에서는 F.지라르동·
A.
쿠아즈보의 고전풍에 비해 P.퓌제에게서는 격렬한 감정 표출을 있다.
한편 영국 바로크에서는 런던의 세인트 대성당을 재건한 C. , 풍자를 주로
화가 W.호거스가 주목된다.

[
베르사이유 궁전]성당 건축과 함께 궁전 건축이 중심이었는데, 베르사이유 궁전은
대표적인 예이다. 대비를 이용하여 세속적이고 현세적인 주제가 등장한 회화는
풍경화, 정물화, 세속적 인물화가 시대부터 시작되었다. 바로크 예술은 전체에
종속되는 부분들의 조화를 통한 균형을 강조하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균형이란
전성기 르네상스의 이상이었던 각각으로도 완벽한 부분들이 이루는 전체적인
균형과는 다른 것이지만 매너리즘의 종종 고의적으로 조화를 깨뜨리는 점이나
로코코의 신경질적인 단편성 보다는 오히려 르네상스에서 말하는 균형과 공통되는
점이 많다.

태양왕 루이 14세에 이르러 프랑스에서는 이러한 고전주의가 거의 완성되어
가장 활발하게 작용하게 된다. 그의 유명한 '짐은 국가이다' 에서도
있듯이 강력한 권력을 손에 쥐게 그를 찬양하는 작품들이 여기서
등장하게 된다. 또한 샤를르 르블렁은 프랑스에서 예술의 독재자로 군림하게
되는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그는 왕립 아카데미의 교장이 되어 프랑스의
모든 미술가들에게 고전주의 양식을 강요하게 된다.
바로 푸생이 가지고 있었던 이성적인 예술양식에 대한 강요를 하게 것이다.
여기서 공부하게 작가들은 예술을 분석하는 기본적인 소양교육을 동시에 받게
되는 , 여기서 '카라뱌조가 0점을 받은 것은 아무래도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프랑스의 고전주의적 바로크 양식을 확립한 화가는 니콜라 푸생이다.
그러나 그는 프랑스에서 생활하지 않고 거의 모든 생을 이탈리아의 로마에서
보냈다. 푸생은 카랏치를 통해 전해진 이유로 그는 카랏치를 바로크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그의 작품 사비니 여인들을 보게 되면 그는 문학을
소재로 작품에서 감상보다는 지성에 호소하는 방식을 취하였기 때문에
작품에서 구도나 형태만이 강조되고, 색채는 아에 뒷전에 밀리게 되었다.
영웅적인 인물들은 일반화 되었으며, 동작은 조각처럼 굳어져 있다.
이들의 묘사는 헬레니즘 시대의 조각에서 빌려온 것이 증명되는 것이다.
푸생은 형태와 색채, 사고와 감정, 진실과 아름다움 이상과 현실이 모두 조화되고
균형잡혀 있는 예술세계이다. 그는 회화가 가지고 있는 것들은 이성에 의해
반드시 설명 되어져야 한다고 믿고 있는 회화관을 가지고 있었다.

프랑스의 화가 푸셍은 노르망디의 레장드리에서 출생.
처음에 고향에서 Q.바랭에게 배우다가 1612 파리로 나가 F. G.랄르망에게
사사하였다고 하나, 시기까지의 일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21
뤽상부르궁() 장식에 필립 샹파뉴와 함께 고용되었다. 왕궁에
소장된 라파엘로의 작품을 알게 되었고 원래 이탈리아 고전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그는 더욱 로마를 동경하게 되었다. 24 로마로 가서 당시의 유행 작풍이었던
카라치파의 작품을 배우고 도메니키노의 아틀리에에서 제작하였다.
그가 지니는 명쾌 단정한 구도와 약간 차가운 듯한 색조는 시기의 수업에서
비롯된 것이다. 베네치아파에서도 영향을 받아 라파엘로 고대에 심취하였고
로마와 상상적인 고대풍경 속에서 균형과 비례가 정확한 고전적 인물을 등장시킨
독창적인 작품을 창출하였다. 28 성베드로대성당의 제단화를 그릴 무렵부터
명성이 높아져, 39 마침내 고국 프랑스의 루이13세로부터 수석화가로서
초빙되었다. 그러나 파리의 화가들과 맞지 않아, 42 다시 로마로 돌아와
죽을 때까지 곳에 머물렀다. 신화와 고대사, 성서 등에서 제재를 골라, 그것을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독특한 이상적인 풍경 속에 그렸는데, 장대하고 세련되고
정연한 화면구성과 화면의 정취는 프랑스 회화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17
세기 프랑스 최대의 화가이며 프랑스 근대회화의 시조로 일컬어진다.

*Apollo and Daphne,1625*

*Midas and Bacchus,1625*

*Mars and Venus,1627~29*

*Rinaldo and Armida,1629*

*시인의 영감,1630*

니콜라 푸생은 로마 유학을 떠나 생활하는 내내 거의 홀로 그림만을 그리면서
지냈다고 한다. 그는 관람객의 마음에 강하게 호소할 있는 명확하고
분명한 조형언어를 표현하기 위해 무척이나 많은 노력을 했으며, 감정이 아닌
인간의 이성에 호소하고자 했다.
종교화가 주를 이루었던 전대의 화풍에 과감히 벗어날 있는 이성적인 사고 덕택에
그는 프랑스 고전주의의 창시자이자 대가가 있었다.
푸생의 작품 <시인의 영감> 주제는 현재까지도 의견이 분분할 정도로 화가의
의도가 깊숙히 숨어있는 그림이다. 중앙 나무에 기대어 앉아 있는 아폴로의 신성한
영감을 부여받고 있는 오른쪽의 젊은이는 버질이고, 아폴로의 왼쪽에 있는 여인은
서사시의 뮤즈인 칼리오페라는 의견이 일반적인 통설이다.
푸생의 다른 작품들에서도 흔히 나타나는 특징인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 조각상들과의
닮은 점이 작품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황금빛이 감도는 그림의 전반적인 색채는 16세기 베네치아 학파가 즐겨 사용한
빛과 색채 기법의 영향을 이어받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Apollo and the Muses (Parnassus),1630s*

*The Rape of the Sabine Women(사비니 여인들의 납치),1633-34*

*The Adoration of the Golden Calf,1633-36*

*The Triumph of Pan,1636*

*The Nurture of Jupiter,1635-37*

*The Shepherds of Arcadia,1638*

푸생의 회화는 이탈리아의 고전 바로크 양식을 프랑스의 고전주의와 결합시키는
역할을 한다. 또한 고대 로마미술에 대한 열정적인 관심은 <사비나 여인들의 납치>
<
계단 위의 가족> 등을 비롯한 수많은 작품들로 재창조되었으며, <아르카디아의
목자들> 고대 신화에 근거하여 만든 목가적이면서도 알레고리가 숨어있는
신비스러운 그림이다.
명의 젊은 청년들과 아름다운 여인이 묘비를 둘러싸고 있다.
청년은 묘비 비문을 해독하고 있으며, 다른 청년은 묘비를 가리키는 손짓과 더불어
의미 심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인을 보고 있다. 묘비에는 라틴어로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다(Et en Arcadia Ego)"라고 적혀 있다. 말은 ", 죽음은 아르카디아에도
여전히 존재한다"라는 것을 뜻한다. 무덤을 둘러싼 인물들의 멜랑콜리한 표정들에는
비문에 적혀 있는 말이 주는 반향에 대한 호기심과 더불어 두려움 같은 것들이 담겨
있다. 작품은 하나의 명확한 이야기가 단순한 구도 속에서 전개되는 양상을 띠고
있다. 푸생이 다른 작품에 즐겨 적용시키는 다양한 기법은 상대적으로 적게 표현
되었지만, 하나의 신비로운 메시지만을 정확하게 전달하겠다는 의도가 분명히
엿보인다. 햇빛이 가득 내리는 목가적인 전원의 조용한 풍경 속에 삶과 죽음
너머에 존재하는 이상향에 대한 심오한 철학적 문제들을 유기적으로 결합시킨
작품은, 푸생의 부단한 예술적 탐구에의 결과이다.

*Venus Presenting Arms to Aeneas,1639*

*The dance to the Music of Time,1640*

*The Ashes of Phocion Collected by his Widow,1648*

*The Judgment of Solomon,1649*

*자화상,1650*

푸생은 점의 자화상을 그렸는데 그림은 비슷한 시기에 계획되어 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장은 1649 포앙델을 위하여 그려진 것으로, 현재 베를린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루브르에 있는 자화상은 화가의 친구이며 후원자였던
프레아르 샹틀루를 위해 역시 1649년에 시작하여 1650년에 완성했다.
베를린에 소장된 작품이 로맨틱하며 우아한 의상을 걸치고 있는 반면, 그림은
배경에 화실 구석에 쌓아 그의 작품들이 놓여 있으며 고전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기하학적인 엄격성을 지닌 작품은 작품의 그림틀이 겹친 선을 강조하고
있으며, 화가는 스케치북을 손에 들고 진지하면서도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다.

*Self-Portrait, 1649*

*The Assumption of the Virgin, 1650*

*Landscape with Orpheus and Eurydice,1650-1*

*여름, 니콜라 푸생,166064*

<여름> 니콜라 푸생이 1660년부터 1664 사이에 리슐리에 대공에게
증정할 목적으로 그렸던 <사계> 연작 작품 하나이다.
<
사계> 연작인 , 여름, 가을, 겨울은 모두 역사적인 주제를 뛰어나게 흡수한
풍경화로 평가받고 있다. 각각의 계절이 담은 테마는 성서를 바탕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며,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을 담고 있다.
하나인 <여름>에는 구약성서 룻기에 등장하는 룻과 보아스의 이야기가
재현되어 있다. 여름 수확이 이루어지는 시기에 룻과 보아스가 만나는 장면은
마치, 그리스도 기원이 시작되는 시기인 그리스도와 신자들이 만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푸생이 드러내고자 하는 메시지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있기
전날에 대한 묵상과 더불어, 그의 작품 <겨울/대홍수>에서 드러나듯이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적대적일 수밖에 없는가" 라는 시간을 초월한 깊은 성찰을 의미하는
것이다. 일련의 <사계> 연작들은 푸생이 드러내고자 하는 역사적 사실과 의미에
대한 회화로의 재현을 표현하고 있다.

*Autumn,1660-64*

*Winter,1660-64*

*Holy Family on the Steps,166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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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14 바로크 스페인 벨라스케스,

   

벨라스케스(Velazquez, Diego Rodriguez de Silva: 1599~1660)


에스파냐 세비야 출생. 처음 에레라에게 사사하고, 이어 마니에리스트 화가
파체코에게 사사하였다. 정신적으로도 문화도시와 스승 파체고의 영향을
받았으며 뒤에 그의 사위가 되었다. 초기의 작풍은 당시의 에스파냐 화가들과
다름없이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은 명암법으로 경건한 종교적 주제를 그렸으나
민중의 빈곤한 일상생활에도 관심이 많았다.
1622
수도 마드리드로 나가, 이듬해 펠리페 4세의 궁정화가가 되어평생 왕의
예우를 받았으며 나중에는 궁정의 요직까지 맡았다.
초기의 어두운 색조와 명암법에 의한 마지막 걸작은 《주정뱅이들-바커스의 대관(
戴冠)(1629)이고, 28년의 이탈리아 여행에서 받은 베네치아파의 영향으로
중기(中期) 밝고 선명한 색조와 경묘한 필치로 바뀌었다.
시기에 왕족·신하 그리고 궁정의 어릿광대·난쟁이 등을 그린 다수의 초상화는
그를 미술사상 초상화가의 대가로 만들었다. 불행한 사람들을 왕족들과 다름없는
담담한 필치로 묘사한 것은 인간 존재의 중요성과 본질적인 비극성까지 추구하였음을
보여준다.
초상화의 대표작으로는 《왕녀 마리아 안나》 《왕녀 마르가리타》 《교황 인노켄티우스
10
세》(50) 등이 있으며, 구도의 작품으로는 《브레다성의 항복》(37) 유명하다.
번째 이탈리아에 체류(4951)하는 동안 장기간 연찬을 거듭하여 기법상의
혁신이 완성되었다. 만년의 대작 《궁녀들(라스 메니나스)》과 《직녀(織女)들》(57)
평생의 화업(畵業) 집약한 것들이다.
거기서는 전통적인 선에 의한 윤곽과 조소적(彫塑的) 양감(量感)이라는 기법이, 투명한
색채의 터치로 분해되어, 공기의 두께에 의한 원근법의 표현으로 대치되었다.
전동(顫動)하는 빛의 파도에 씻기고 완전히 대기를 파악하는 벨라스케스의 공간과 기법은
시대를 크게 앞질러 인상파의 출현을 예고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그의 종교화·신화화는 모두 주제의 제약에 속박되지 않는 조형성 탐구라는 근대성을
지녔으며, 백색·흑색·회색의 해조(諧調) 색채가 비속화나 이상화에 치우치지 않는
독자적인 리얼리스트로서, 시대의 에스파냐 화단에서는 개성이 출중한 화가로서
평가되었다.

*The Immaculate Conception,1618*

*The Waterseller of Seville,1623*

*Philip IV in Armour, 1628*

*The Feast of Bacchus ("Los Borrachos"),1629*

*Doña Antonia de Ipeñarrieta y Galdós and her Son Luis, 1631*

*Philip IV in Brown and Silver,1631-32*

*Queen Isabel,1632*

*Philip III on Horseback, 1634-35*

*Queen Margarita on Horseback, 1634-35*

*The Count-Duke of Olivares on Horseback,1634*

*Self-Portrait,1640*

*Philip IV at Fraga,1644*

*Venus at Her Mirror ("The Rokeby Venus"),1644-48*

매혹적인 여성이 느긋하게 거울을 보며 길게 몸을 뻗는다.
손으로 머리를 괴고 거울 속의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여성의 뒤에서 우리는
그녀의 풍만한 몸으로부터 환영과 같은 거울 속의 얼굴로 조금씩 빨려 들어간다.
그림의 여주인공은 눈보다 희고 대리석보다 매끄러운 피부와 탄력 있는 근육으로
군살 없이 다듬어진 몸매를 관음증에 시달리는 남성들에게 보여주면서 자신은
심연의 자아세계로 조용히 침잠하고 있다. 어깻죽지에 작은 날개를 달고 있어 그가
큐피드임을 있는 어린 소년은 주인공의 충실한 몸종처럼 거울을 받쳐주고
미소 머금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화가는 사람을 붉은 천과 푸른 천으로 치장한 실내에 놓아둠으로써 그들이
고귀한 신분임을 암시하고 있다. 너무나 유명한 장의 누드화는 벨라스케스의
대표적인 그림들과 달리 잔잔한 성적 흥분을 바탕에 깔고 있다. 또한 관능적인
분위기가 화면 가득 담겨져 보는 이로 하여금 어쩔 모르는 사랑의 노래를
흥얼거리게 한다. 많은 미술사학자들이 그림의 여주인공을 그의 정부, 이탈리아
여인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상당히 설득력 있는 추리는 우선 그림에서 관능적인
여성을 정면으로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화가와 모델 사이에 사랑의 감정이 애틋하며
몽환적인 여성의 얼굴 표현으로 그녀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드러내지 않는다는
그리고 큐피드를 배치하여 사랑의 감정을 깊이 드러낸다는 점으로 미루어 짐작하게
만든다. 그림에서 여성의 신체 표현은 정확한 모델링을 통해 얻어지는 사생적
묘사가 돋보이는데, 포즈를 제공했을 그녀는 벨라스케스의 정부가 아니었을까?

*Innocent X,1650*

*Queen Doña Mariana of Austria, 1652-53*

*Maria Teresa of Spain ("with two watches"),1652~53*

*Las Meninas,1656*

벨라스케스는 제단화나 초현실적인 그림보다는 사실주의 화풍의 인물화, 집단
초상화에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였다. 필리페 4세의 개인 사무실에 걸려 있을 만큼
그가 아꼈던 그림은 필리페 4세와 그의 가족들의 초상을 그린 작품으로, 실내 묘사
자화상, 집단 초상화 화실의 화가 등이 하나의 그림으로 담겨져 있다.
그림이 배경이 되는 곳은 죽은 왕자의 침실이다. 펠리페 4세와 마리아 사이에
어린 마르가리타 공주는 가는 허리에 넓게 퍼진 푸른 스커트로 치장하고, 어딘가에
시선을 보내고 있다. 그녀 옆에서 하녀는 무릎을 꿇고 먹을 것을 권하고 있지만
거절당한다. 그녀들 앞에는 난쟁이가 개를 발로 건드려 보고 있으며, 하나는
그림의 정면을 묵묵하게 쳐다보고 있다. 다른 인물들은 바라보는 곳이 정확한 반면
마르가리타의 시선은 명확하지 않다. 그녀 뒤에 떨어져 벽에 걸려 있는 거울을
보면 그녀 부모의 얼굴이 비치는데, 공주는 이들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 미술사가들의
공통된 결론이다. 팔레트에 붓을 찍고 있는 화가가 전면에 캔버스와 원근법적으로
거리감이 있는 곳에 있는데, 훈장이 박혀 있는 의상이 궁정화가임을 눈에 보여준다.
수녀와 경호원으로 보이는 인물, 그림 구도에서 소실점이 모아지는 문가에도 인물이
침실 내부를 물끄러미 보고 있다. 사실적인 양감과 함께 치밀한 묘사가 차갑지만 밝은
색채 안에서 이루어지는 기법상의 요소들과 더불어 시각적으로 신비한 느낌을 주는
인물들의 표정이 함께 결합되면서, 그림은 우울하면서도 묘한 울림을 주고 있다.
벨라스케스는 단정한 공주의 모습을 은근히 강조한다. 그녀는 오른쪽 상단에서
공간으로 떨어지는 충만한 속에 잠겨 있다. 빛은 벨라스케스와 시녀들과
난쟁이들을 단지 가볍게 스쳐 지나간다. 그것은 시녀들과 함께 있는 다섯 살짜리 공주
마르가리타의 초상화 위치가 사전에 준비되어 있었다는 인상을 준다. 벨라스케스를 통해
우리는 그와 공주와 시녀들과 난쟁이들이 들여다 보고 있는 2 거울을 연상하게 된다.
그림 속의 인물들은 자신들의 초상화 제작 과정을 지켜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룹 속에 있는 벨라스케스와, 그림 거울에 비친 왕비와 돌아가려던 시종장이 그림
속에 묘사된 대형 캔버스 위에서 있는 것들을 나타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벨라스케스가 궁정 화가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보여주는 것일까?
증명된 것은 1651 벨라스케스가 여러 번에 걸친 왕의 요구 때문에 마지못해 자신의
번째 이탈리아 여행에서 마드리드로 돌아왔다는 사실과, 그리하여 1625 왕궁의
시종으로 임명되고 1659년에는 산티아고 기사단의 작위를 받아 계속해서 궁정
관직에 올랐다는 사실이다. 벨라스케스는 17세기 유럽의 가장 중요한 화가 중의
사람이었다. 그의 직접적인 후계자를 꼬집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고야가 1778
<
라스메니나스> 판화로 제작한 있으며, 마네는 그의 회화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라스메니나스> 직접적으로 재현했던 20세기 화가로는 피카소와 달리가 있다.

*Infanta Margarita,1656*

벨라스케스는 1623년부터 스페인 필립 4세의 궁정화가로 활동하면서 수많은
초상화를 제작했다. 그의 궁정 초상화들은 초기 작품에서 있었던 카라바조의
분위기가 사라지고, 티치아노로부터 영향을 받은 미묘한 색조 분석이 돋보인다.
그는 궁정 초상화에서 과장을 피하고, 왕가의 인물들을 사실적이고 기품 있게
그려냈다. 특히 벨라스케스는 필립 4세의 딸인 마르가리타를 모델로 하여 여러
작품들을 남겼는데, 작품에서 마르가리타 공주는 <시녀들, 라스 메니나스>보다
4
년여 남짓 지난 후의 모습이다. 공주의 외모와 자세는 별다른 변화가 없지만
벨라스케즈의 회화 기법은 분명한 발전을 보여주고 있다.
벨라스케스는 작품에서 사물에 비치는 반짝이는 빛을 새로이 탐구하여, 생생한
질감과 실감나는 색채를 이끌어냈다. 드레스와 검은 레이스 장식의 대담한 패턴
빨간 벨벳 의자와 드레스의 투명하고 빛나는 색채 등은 후일 인상주의 화가들이
벨라스케스에게 매료되도록 하였다. 인물의 특정적인 부분만을 살린 표현 기법
반짝이는 빛을 정확하게 포착한 생생한 터치는 그가 인상파의 선구임을
확신하게 한다.

*Las Hilanderas (The Spinners),1657*

*Prince Felipe Prospero,1659*

*Portrait of the Infanta Margarita, 1660*

*The Infanta Don Margarita de Austria, 16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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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13 바로크 이탈리아로마 베르니니

   

베르니니 (Bernini, Gian Lorenzo, 1598~1680)

이탈리아의 조각가, 건축가인 베르니니는 나폴리에서 출생하여 로마에서
활약하였다. 조각가인 아버지 피에트로의 지도로 일찍부터 기술을 연마
하였으며 아버지와의 합작도 많다. 초기의 대표작은 추기경 보르게세를 위해
만든 4개의 대리석상이며, 중에서 《플루토와 프로세르피나》와 특히
《아폴론과 다프네》(1622 전후) 유동적인 구성과 특유의 관능미가
놀랍도록 정교한 대리석 조각법으로 표현된다.
1623
년부터 우르바누스 8세를 비롯한 역대 교황의 총애를 받아 조각뿐만
아니라 건축·장식·분수 다방면에 걸쳐서 재능을 발휘하였다. 그의 예술은
인노켄티우스 10 때에 완전히 성숙하였다. 특히 16461652년에
만들어진 산타 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성당 안의 () 테레지아는 완벽한
대리석 조각법이 십분 발휘되어 산뜻한 구성 속에 베르니니 특유의 감미롭고
요염한 관능미가 넘쳐 흐르고 있다. 그의 명성은 나라 밖까지 퍼져, 1665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의 초대로 파리에서 그의 흉상(胸像) 제작하였다.
귀국 로마의 프란체스코 리파 성당에 《지복자(至福者) 알베르티나》
(1675)
만들었는데, 탁월한 기교와 아름다운 관능미의 표현에는 전혀 쇠퇴된
바가 없다. 건축가로서는 산피에트로대성당의 건축주임으로서 완성에 힘을
다하였으며, 특히 정면의 주랑(柱廊) 구성은 주목할 만하다. 로마시대의 분수
조각에도 뛰어난 작품을 남겼으며, 피아차 나보나의 분수, 트리토네의 분수 등이
유명하다.

*Aeneas, Anchises, and Ascanius,1618-19*

*Neptune and Triton, 1620*

*Apollo and Daphne,1622-25*

*Bust of Scipione Borghese,1632*

*Bust of Costanza Bonarelli,1636-37*

*Ecstasy of St. Teresa,1647-52*

베르니니는 17세기 이탈리아의 가장 탁월한 조각가이자, 교회 장식가였다.
로마에 있는 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교회의 코르나로 가족 예배실 장식은 그의
솜씨가 유감없이 발휘된 곳이다. 청동 빛줄기를 배경으로 테레사 수녀는 신의
은총이 자신의 가슴을 꿰뚫는 종교적인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 수녀의 황홀함은
펄럭이는 옷자락을 타고 흐르는 빛을 통해 생생하게 전달된다.
그의 교회 장식이 신비한 체험을 중시하는 반종교개혁에 매우 알맞는 방식
이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베르니니는 극적인 효과를 더하기 위해서
화려한 색깔의 대리석, 석회벽토, 청동과 같은 다양한 재료를 자유자재로 사용
했을 아니라 위에서 쏟아지는 자연채광도 적절히 이용하고 있는 것을
있다.

*Fountain of the Four Rivers, 1648-51, Rome*

*Tomb of Alexander VII,1672-78*

*David with the Head of Goliath, 1625*

*Self-Portrait as a Young Man, 1623*

*Pope Urban VIII,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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