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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13-1- 바로크 네덜란드 렘브란트

AH101 2012. 2. 17.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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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1669)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네덜란드 화가로 손꼽히는 렘브란트는 네덜란드의
레이덴에서 제분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의 희망에 따라 레이덴
대학에 들어갔으나, 수개월만에 화가를 지망하여 자퇴하였다. 그후 라이덴의
화가 J. 스와넨브르크에게 사사받았으며 이어서 암스테르담에서 P. 라스트만의
문하에 들어갔다. 1624 라이덴으로 돌아와 이듬해부터 독립하여 아틀리에를
열었다. 1632년까지 독학으로 친척, 이웃노인, 성서에서 소재를 얻어 꾸준히
그림을 그렸다. 그의 노력이 열매를 맺어 1632 암스테르담 의사조합으로부터
위촉받은 [툴르프 박사의 해부] 호평을 계기로 암스테르담에 정착하였다.
1634
명문가의 사스키아 오이렌 부르흐와 결혼하였으며 당시의 미술
세계시장 이라고 있는 암스테르담에서 첫째가는 초상화가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그의 회화가 성숙함에 따라 당시의 일반적 기호였던 평면적인
초상화 등에 만족할 없게 되어 외면적인 유사성보다는 오히려 내면적인
인간성의 깊이를 그리고자 하는 바램이 절실해졌고 종교나 신화적인 소재나
자화상류의 작품이 많아졌다.
1642
년의 명작 [야경(夜警)] 그를 세속적 명성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작품은 암스테르담 사수협회(射手協會) 주문에 의한 단체
초상화인데 렘브란트는 당시 유행하던 기념촬영적 단체 초상화에 만족해하지
않고, 특유의 명암 효과를 사용하여 대담한 극적 구성을 시도하였으나
사람들로부터 예술의 깊이를 이해받지 못하였으며, 엎친데 덮친격으로
사랑하는 아내마저 죽자 실망과 곤궁 속에 빠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의 위대한 예술이 전개되기 시작한 것은 때부터
라고 있다. 죽은 아내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 티투스의 성장과
1645
년경에 맞은 마음씨 착한 둘째 부인 헨드리케의 내조는 그의 예술을 더욱
원숙하게 하였고, 오늘날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의 대부분은 1640년대
이후에 만들어졌다. 그러나 생활은 날로 어려워졌으며, 결국 1656년에 파산
선고를 받아 살고 있던 저택도, 그의 예술적 영감을 끝없이 자극해주던 여러
가지 미술품도 모두 그의 손에서 떠나게 되었다.
1662
헨드리케가 죽고, 1668년에는 유일한 아들인 티투스마저 죽자
그도 이듬해 10 유대인 구역의 초라한 집에서 임종을 지켜보는 사람도 없이
쓸쓸히 죽었다. 그가 죽을 남긴 것이라고는 벌과 그림 도구뿐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의 위대함이 발견되기까지는 100년이 걸리지 않았다.
현존하는 렘브란트의 작품은 유화, 에칭, 소묘, 종교화, 신화화, 초상화, 풍경화
풍속화, 정물화 모든 종류에 걸쳐 있으며, 현존하는 작품은 유화 600
에칭 300 , 소묘 수백 등이 있다. 특히 종교화의 경우 매우 장엄한
효과를 살린 작품이 많으며 렘브란트만큼 많은 자화상( 100) 그린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언제나 자기에 대하여 겸허한 사람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가 설혹 유화를 점도 그리지 않았다 하더라도, 에칭의 모든 기술이
렘브란트에 의해 완성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에 사실만으로도 유럽
회화사에서 최고화가의 사람으로 꼽을 있을 것이다.
더구나, 17세기의 네덜란드 회화는 직접 또는 간접으로 그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예술은 시대를 훨씬 초월하고 있다.
종교적 소재에서도 렘브란트만큼 마리아나 그리스도의 모습을 일상의 모습에서
구한 사람은 없다. 그러면서도 그의 작품에 높은 종교적 정감과 깊은 인간
심정의 움직임이 표현되어 있는 것은 특유의 명암법에서 기인한다.
그의 작품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빛의 효과를 최대한 활용하여 색채 명암의
대조를 강조함으로써 의도하는 회화적 효과를 얻었다는 점이다.
그를 일컬어 '혼의 화가', '명암의 화가'라고 하는 것은 작품의 대상에 대해서는
사실적이지만, 빛의 효과에 대해서는 최대의 이상주의자였기 때문이다.
, 색이나 모양이 모두 자체이며, 명암을 통해 생명의 흐름을 표현했다.
'
빛의 미술가'라고도 불리우는 렘브란트의 화려한 붓놀림, 풍부한 색채, 하늘에서
쏟아지는 듯한 빛과 어두움, 강렬한 힘과 내면을 꿰뚫는 통찰력, 종교적 권능을
감지하게 하는 탁월한 빛의 처리 기법은 미술사의 영원한 신비로 남아 있다.
또한 회화사에서 렘브란트만큼 심오하게, 그리고 그만큼 불안과 고뇌를 지니고
인간과 세계, 화가와 , 순간의 언어와 영원의 표현 사이의 관계를 파헤친
화가는 없다. 인생과 작품이 인간의 본성과 일치하는 화가들이 있는데
렘브란트가 그러했다. 그는 비범한 투시력과 '명암에 대한 최고의 지성' 지닌
빛과 어둠을 훔친 화가였다.

*The Music Party, 1626*

*Jeremiah lamenting the destruction of Jerusalem,1630*

*A Scholar,1631*

*The Anatomy Lecture of Dr. Nicolaes Tulp(튈프교수의 해부학 강의),1632*

*Artemis,1634*

*Saskia as Flora, 1634

*Rembrandt and Saskia in the Scene of the Prodigal Son in the Tavern,1635*

작품의 주제에 대해서는 동안 여러 가지 해석이 내려지고 있다.
해석을 대별하면 다음의 가지로 나뉘어진다.
첫째, 렘브란트의 신혼 생활의 행복한 모습을 그린 .
둘째, 성서(聖書) 나오는 방탕아의 역할을 스스로 연기하고 있는
렘브란트와 사스키아 부부.
셋째, 자만심에 대한 경종의 우의(愚意) 담긴 . 그러나 그와 같은 해석은
어찌 됐든 작품은 렘브란트 자신과 사스키아를 모델로 다분히 우의적인
2
초상화임에는 틀림없다. 그림에서는 의기 양양한 렘브란트가
사스키아를 무릎 위에 앉히고 이쪽을 향해 술잔을 높이 들고 있다.
그리고 왼쪽 탁자 위에는 공작이 놓여 있다.
네덜란드의 도덕적 우의(寓意) 의하면 술잔은 호의호식을, 공작은 오만함을
의미한다고 한다. 렘브란트가 차고 있는 칼도 때의 신분으로서는 허용되지
않은 것이었다.

*Portrait of Saskia with a Flower, 1641*

*The Feast of Belshazzar,1635*

*Danae, 1636-47*

*Self-Portrait,1640*

*The company of Frans Banning Cock preparing to march out

known as the Nightwatch(
야경),1642*

*The Little Children Being Brought to Jesus

("The 100 Guilder Print")Completed,1647-49*

렘브란트의 예술을 이해하는 있어 빼놓을 없는 것이 그의 소묘와
동판화이다. 소묘는 그때까지만 해도 하나의 초벌 그림의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렘브란트의 그것도 범주를 벗어나는 것은 되었으나 독특한
필치는 일단 인정하더라도 그의 동판화는 고금을 통해서 알브레트 뒤러, 고야와
함께 동판화의 3 거장의 한사람으로 간주되고 있다. 동판화가 필요로 하는
정교한 기법적 훈련이 렘브란트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했고 특히 흑백의
대비의 미묘한 효과는 렘브란트의 독특한 명암법의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동판화 기법을 단순한 복사(複寫) 방법으로서 만이
아니라, 그것을 독자적인 예술 형태로 정립시킨 판화영역에 있어서의
혁신자가 아닌가 생각된다.

*엠마우스의 순례자들,1648*

렘브란트는 그리스도가 명의 제자와 함께 식사를 하는 장면이 담긴
"
엠마우스의 저녁식사"라는 테마를 즐겨 그렸다. 그가 1648년에 그린
<
엠마우스의 순례자들> 신성한 그리스도의 위엄으로 가득 있다.
레오나르도 빈치나 티치아노, 베로네제와 같은 르네상스 전성기 화가들의
회화구성이 그대로 스며있는 그림은, 도상해석을 요구하는 긴장감이 풍겨
나온다. 그림의 중심축을 이루는 그리스도가 화면 왼쪽으로 약간 벗어난
곳에 자리한 구성을 보여주는 작품은 날카로운 사실적인 표현이 돋보인다.
그리스도의 창백하고 핏기 없는 얼굴은 그가 죽음의 승리자라는 암시를
나타낸다. 예수에게 건네지는 포도주 잔은 비어있고 조각으로 잘려진 양의
머리는 <최후의 만찬>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예수의 수난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고 있다. 렘브란트는 인간성과 깊이 있는 종교적 진리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엠마우스의 순례자들> 당대의 모든 종교화의 전통을 혁신적으로
바꾸어버렸다.

*Bathsheba at Her Bath,1654*

*Jan Six,1654*

*가죽 벗긴 ,1655*

렘브란트의 후기 작품들은 빚을 갚기 위해 제작된 그림들이 상당히 많았다.
심지어 작품이 그려지기도 전에 먼저 경매가 붙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의 60
점의 자화상 몇몇 작품들이 이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이와는 다른 제재를
담은 <가죽 벗긴 > 독특한 소재와 강렬한 사실감, 함축적인 은유 등으로
이루어진 그림이다.
가죽이 꺼풀 벗겨진 소의 다리는 나무 받침대에 묶여 있다.
도축장 내부 풍경의 단면을 보여주는 듯한 어두운 공간에는 아직도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죽은 소가 매달려 있다. 약간 뒤쪽 문가에는 모자를 젊은
여인이 상체를 내밀어 안을 들여다보는 자세로 있다. 거꾸로 매달려 있는
벗겨진 소는 마치 십자가에 박힌 예수를 연상하게 만드는 구도로 짜여져
있다. 색채 또한 너무나 강렬해서 빛이 쏘여지는 짐승의 밝게 빛나는 몸통에
흐르는 핏자국과 돌출된 뼈는 어두운 외부 배경과 대비되면서 극도의
자연주의적 사실감을 획득한다. "식탁에 오르기 위해 도살되는 가축"이라는
주제는 서양 미술사에서 하나의 전통으로 자리잡은 단골 메뉴였는데, 후에
고야의 작품 <죽은 닭들> 같은 작품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렘브란트의 <가죽 벗긴 > 이러한 주제의 시조라고 만큼 당시에는
독창적인 소재였다. 작품에서 렘브란트는 비참하게 벗겨진 죽은 동물의
몸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서, 인간의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악행에 대한
고발을 냉정하게, 그리고 극적으로 뛰어나게 재현하고 있다.

*The Artist's Son Titus, 1657*

*Portrait of a Lady with an Ostrich-Feather Fan,1660*

*Portrait of the Artist at His Easel,1660*

렘브란트는 생애에 솔직하고 자기 분석적인 60 점의 자화상을 남겼다.
작품은 렘브란트의 궁핍하고 비참했던 말년 즈음인 1660년에 제작된
캔버스를 앞에 두고 있는 자화상이다.
말년에 그린 대부분의 자화상들은 소박한 위엄과 번민에 가득 인간의
솔직함이 감동적으로 드러난다. 아내와 자식, 모든 재산을 잃은 렘브란트는
자화상 속에서 아름답게 꾸며진 얼굴이 아니다. 자신의 못생기고 추한 부분을
성실하고 빈틈없이 관찰하면서도, 격한 감정을 절제된 붓끝으로 화폭에
날카롭고 침착하게 담고 있다. 렘브란트는 오른손에 붓으로 팔레트에
물감을 묻히는 중이다. 화면 오른쪽에 간신히 빛의 윤곽만으로 드러난
캔버스는 어두운 배경 속에 묻혀 있다.
모자를 렘브란트는 마치 작업중에 찾아온 누군가를 보고 있는 자세를
취했다. 분명하지 않은 윤곽선으로 묘사된 얼굴은 특징적인 부분만 강하게
부각시켜, 렘브란트의 추하고 못생긴 얼굴이 더욱 사실적으로 다가온다.
강렬한 명암 대조 효과가 사용된 가운데 무겁고 짙은 농도의 색채가
덧입혀지면서, 복잡한 인간 표정의 없는 내면이 진실하게 그림으로
드러나게 된다. 그림은 거울을 앞에 두고 거기에 비친 렘브란트 자신의
모습을 담는 구도로 설정되어 있다.

*The Syndics of the Clothmaker's Guild (The Staalmeesters),1662*

*The Jewish Bride (The Loving Couple),1666*

*Self-Portrait,16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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