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미술사 참고자료/바로크 - 이탈리아 네덜란드 스페인 프랑스

서양미술사12 바로크 –카라바지오, 루벤스

AH101 2012. 2. 17.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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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바로크 미술(Baroque Art: 왕실 중심의 동적인 17세기 미술 양식)

"
바로크" "일그러진 진주"라는 뜻으로 르네상스의 단정하고 조화된 이성적인
표현에 비해, 강한 왕권과 함께 나타난 거칠고 과장된 남성 경향의 17세기
미술양식이다.

바로크 미술은 대략 1600년경부터 1750년까지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여러 카톨릭 국가에서 발전한 미술 양식을 말한다.
"
바로크" 원뜻은 지나치다라는 남용의 뜻이지만, 이상하고 비논리적인
것에서 나온 괴상하고 과장된 형태를 뜻하게 되었으며 르네상스와 비교해서
바로크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보다 빛나는 색채, 음영과 질감의 풍부한
대비 효과, 자유롭고 표현적인 붓질 등으로 비고전적, 동적, 남성적, 불규칙적인
성격과 심한 과장성의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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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에 들어와서 독일의 미술사가 H. 뵐플린은 19세기의 평가에 나타나는
양식을 르네상스 고전주의의 퇴폐현상이라고 보는 견해를 부정했다.
그의 연구는 바로크 미술은 르네상스의 타락도 아니고 진보도 아니며
르네상스와는 완전히 이질적인 양식이어서 양자는 근대미술에서의 2
정점을 형성하는 이라고 규정하였다.

바로크는 로마에서 발생하여 이탈리아 , 보헤미아, 오스트리아, 독일
에스파냐로 번져 나갔고 라틴아메리카에까지 확대되었다.
양식은 반종교개혁의 유력한 표현수단이 되어 여러 가톨릭 국가에서는
종래의 종교적 도상(圖像) 일신하고 종교미술에 신선한 입김을 불어넣었다.
동시에 바로크는 귀족들의 표현수단이기도 하여 화려·호사한 의식을 과시하고
장식하는 구실을 다하였다.
바로크는 16세기 고전적 르네상스의 조화·균정(均整완결성 등에 대하여
경탄과 현혹(眩惑) 지향하여 양감(量感광채·동감(動感) 호소하였다.
그리하여 건축에서는 거대한 양식, 곡선의 활용, 자유롭고 유연한 접합부분 등의
특색을 나타내고, 조각에서는 비상(飛翔)하는 동적인 자태와 다양한 복장 표현
등을 특색으로 하였다. 회화에서는 대각선적인 구도, 원근법, 단축법, 눈속임
효과의 활용 등이 전체적인 특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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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에 들어와서도 바로크는 로코코 양식 속에서 명맥을 유지하였다.
바로크는 이미 16세기에 미켈란젤로 말년의 작품이나 틴토레토의 회화에서도
엿보이는데 마니에리스모(Manierismo) 공존하면서 16세기 말엽 로마에
등장한다. 종교건축에 있어서의 C.마데르나와 G.베르니니의 작품(산피에트로
대성당의 정면부 주랑, F.보로미니의 생카를로 알레 콰트로 폰타네교회당)
조각에서 베르니니의 작품인 산피에트로대성당 고해단(告解壇) 천개(天蓋)
유물궤(遺物櫃), 나보나 광장의 분수, 종교적 공상의 세계를 그린 A.포초의
천장화(天障畵) 등이 대표적 작품이다.
바로크는 이탈리아 각지에 전파되어 토리노의 () 신도네 교회 나폴리의
카세르테궁(), 베네치아의 산타마리아 델라살루테성당과 G.티에폴로의 회화
등을 만들어냈다. 북방 바로크의 중심인 빈에는 마르티넬리, A.힐데브란트 등의
궁전·교회 건축, B.페르모저 등의 조각, 모르베르슈의 회화가 있다.
뮌헨·드레스덴·프라하도 중심지에 포함된다.
에스파냐에서는 바로크가 전통적인 추리게레스코 양식과 결합하여 마드리드의
()페르난도 구제원, 그라나다의 샤르트르회()성당 등을 꼽을 있는데
멕시코·브라질·콜롬비아·페루의 식민지에서 독자적인 장식양식을 낳았다.
벨기에에서는 P.루벤스의 회화와, 플랑드르 고딕과 건축 양식에서 있다.
명석함과 중용을 국민정신으로 하는 17세기의 프랑스도 바로크와 무관하지는
않았으나, C.비뇽, S.부에, J.블랑샤르의 회화 활동도 시험적인 영역에 머물렀다.
오늘날 바로크는 좁은 의미의 미술 양식에서 벗어나 넓은 뜻의 문화양식으로서
다른 시대와 장르에도 확대 적용되고 있으며, 고대 로마의 말기, 중세 말의 후기
고딕, 1900년대의 아르누보(art nouveau) 미술에도 적용되었다.

바로크 미술의 성격은 다음과 같이 정의될 있다.
첫째, 자연주의적 추세를 부활시킨 카라바조는 예술의 원천으로 관념보다
자연의 관찰을 강조했다.
둘째, 전성기의 르네상스 고전기와 로마 고대 풍습으로의 복귀였다.
셋째, 필수적이며 가장 지속적인 요소로 베네치아 - 특히 티치아노의 전통이다.
이러한 전통과 코렛지오의 예술에서 이탈리아 바로크의 색깔과 , 풍요로움이
비롯된다. 요인으로 1620년대에 바로크 양식은 루벤스와 로마 화가들에
의해 최초로, 놀라운 모습으로 창조되었다


카라바조(Michelangelo da Caravaggio: 1573~1610)


이탈리아 초기 바로크의 대표적인 화가이다.
그의 종교적 리얼리즘과 강한 명암의 대비를 바탕으로 인간의 격정을 힘차게
표현한 사실적 화풍은 기성의 화가로부터 반발을 받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젊은
예술가들의 열렬한 반응을 얻음으로써 새로이 전개하려고 하는 이탈리아 바로크
회화 전반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

1584
밀라노의 화가 시모네 페테르차노에게 사사하고 로마로 가서
처음에는 빈곤과 병고로 비참한 생활을 하였으나, 뒤에 추기경 몬테의
후원으로 화가로서 이름을 떨치기 시작하였다.
초기에는 정물과 초상을 치밀한 사실기법으로 묘사하여 바로크 양식을 확립
하였는데, 성모와 성자를 모델로 로마에 사는 빈민의 모습을 등장시킨 그림들을
보면 그는 빛과 그림자의 날카로운 대비를 기교적으로 구사하고, 형상을 힘차게
조소적(彫塑的)으로 묘사함으로써, 근대사실(近代寫實) 길을 개척하였다.
금색을 바탕으로 밝은 색의 조화로써 구성된 초기 작품에서 격하게 억제된
빛으로 조명된 만년의 음울한 작품에 이르기까지, 그의 예술은 언제나 빛과
형상에 대한 근본원칙을 확립하고 있다.
이탈리아적인 조형 전통을 부활시킴과 동시에 F.할스와 렘브란트 그리고 초기의
벨라스케스에 이르기까지 많은 영향을 주었고, 17세기 유럽 회화의 선구자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화풍은 제자인 에스파냐의 리베라를 통해 살바토르
로자에게 계승되었다.

*The Stigmatization of Saint Francis,1596*

*The Fortune Teller, 1596-97*

*Rest on Flight to Egypt, 1596-97*

*Bacchus,1597*

*St Catherine of Alexandria, 1598*

*Martha and Mary Magdalene, 1598*

*Judith Beheading Holofernes,1598*

유디트는 이스라엘 베틀리아에 살았던 여인이다. 앗시리아군의 사령관
홀로페르네스는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어 서반 세계를 모두 정복했다.
오직 이스라엘만이 저항을 하고 있었는데 드디어 홀로페르네스는 이스라엘로
들어가는 요충지인 베트룰리아를 포위하게 되었다. 그래서 생각다 못해 과부인
유디트가 나선다. 예쁘게 꽃단장을 하고 앗시리아군에 거짓 투항을 한다.
그리하여 술에 거나하게 취해 추태를 부리는 적장의 목을 유디트가 단칼에 베어
버린다. 여기서 홀로페르네스의 얼굴은 카라바조 자신의 얼굴을 모델로 했다고
한다.

*The Calling of Saint Matthe,1599-1600*

작품은 " 마태의 생애" 주제로 삼아 연작으로 만들어진 작품
<
마태와 천사> < 마태의 부르심> < 마태의 순교> 하나인
<
마태의 부르심>이다. 화면의 오른쪽으로 그리스도와 사도가 다가오고
있으며, 동료들과 탁자에 앉아 있는 세리 마태는 이해의 몸짓으로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키고 있다. 사도의 몸에 가려 옆얼굴만 비치는 그리스도의 손은 세리
마태로 향하고 있어서, 무언가 절박하면서도 엄숙한 메시지가 전해지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그림의 오른쪽 위에서 정확한 대각선을 그리며 쏟아지는
강한 계시의 빛이 그리스도의 머리 위를 통과하면서 인물들의 얼굴을 비추고
있는데, 빛으로 인해 어둠 속에 묻혀 있던 각각의 표정들이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음을 있다.
작품에는 카라바조가 창안해낸 "테네브리즘(Tenebrism)", 실체만을
조명하는 기법이 적용되었다. 어둠과 빛의 극적인 대비를 통해 어둠에 숨어
있던 세리 마태가 돈을 세는 장면, 사울이 찼던 칼이며 깃털 달린 모자, 그리고
인물들의 감춰진 표정들까지 드러나게 되는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실내와 외부의 경계가 모호한 공간 속에서 서치라이트처럼 비추는 빛의
효과는, 이제 십자가에 박힐 운명을 지니게 그리스도의 절박하면서도
신성한 부르심을 하나의 드라마처럼 드러내는 것이다.

*Supper at Emmaus,1600-1601*

*Amor Vincit Omnia,1601-02*

*The Inspiration of Saint Matthew,1602>

*동정녀 마리아의 임종,160506*

작품은 당대의 플랑드르 화가 루벤스가 직접 구입하기도 했던 걸작이다.
루벤스는 카라바조의 회화 양식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으며, 카라바조의 강렬한
빛의 사용과 극적인 사실감에 영향을 받아 그의 작품에 이러한 기법을 도입
하기도 했다. 그림은 성모 마리아의 죽음을 주제로 삼아 제작된 작품이지만
그림의 실제 모델은 티베르 강에서 빠져 자살을 로마 소녀였다.
회화에 나타나는 대부분의 성모상은 경건하고 신비한 존재로 부각되는 것이
상식이었던 당시에, 카라바조는 부풀어오른 몸과 발이 드러난 평범한 처녀를
성모로 설정하였다. 이는 성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분노를 일으키게
했다. 카라바조의 극적인 사실적 자연주의는 하나의 주제를 인물에 집중해서
투영하고자 강렬한 빛으로 무대를 설정하고, 뒷배경들은 레오나르도풍의
"
스푸마토 기법"처럼 멀리 희미해지거나 어둡게 처리한다. 작품에서도 죽은
성모의 육체와 바로 앞에서 슬프게 우는 여자와 사도의 표정만이 빛에 의해
드러나고, 죽음을 상징하는 어둠 속에 사람이 있을 뿐이다.
성스러운 신앙의 세계가 지배하던 16세기 사회를 완강히 거부하며 속세의
신앙을 창조적으로 재구성했다는 것을 <성모의 죽음> 통해서 다시
확인할 있다. 성모를 지켜보는 머리가 벗겨진 사도를 통해서만이 죽은자가
성모라는 것을 확인해주면서 카라바조는 위선적인 종교의 권위나 맹신에 대한
저항을 회화를 통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


루벤스는 북유럽 바로크의 주도적 인물로 회화가로서 그의 영향력은 건축가
베르니니보다 훨씬 지대했다. 그는 플랑드르 어느 매너리스트에게 훈련받았고
고전, 르네상스 미술의 전통을 두루 섭렵하고 당대의 카라바조, 카라치의 예술을
역시 흡수했다. 그는 생애에 모든 영예를 누리며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그는
소장품도 최고의 것이었으며 때로는 외교사절로 활약하며 당대를 풍미했던
인물이다. 그의 이와 같은 배경의 자신감은 왕과 같은 품위를 지닌 [자화상]
에서 반영되고 여유 있는 생활과 인품은 정신적인 면에서 휴머니즘과 평화를
주도하려는 한편 구체적 회화양식에서 풍요롭고 구성과 아름답고
화려한 관능과 호사스러운 취향에서 확인할 있다.
그는 매우 다작이어서 그의 모사품이 많은 것으로도 유명한데 아니라
다양한 화풍과 주세를 망라하고 있다. 초기작들은 대체로 고전적이고 선적인
조심스러운 경향이 있으나 역동적이고 유기적 관계의 긴장감 있는 구성은
바로크의 특징적인 면이 드러난다.
[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강한 하이라이트가 예수의 신체에 집중되고
염려하는 인물들의 표정이 유기적 관계의 구성이다. 깊고 요동하는 대각선의
처형에 지친 인물과 주위의 고뇌 등은 표현에서 분명히 바로크적이라고
하겠다. [루시퍼스의 딸들의 능욕] 그의 회화의 정수이자 찬란한 색채 효과
관능성, 긴장되고 열린 공간으로서 그의 특징이 두드러진다.
백색의 여체와 구릿빛 남자의 근육의 대비, 반항하는 격렬한 몸짓과 울부짖는
말은 곡선적이고 꾸물거리는 선들이 특징이라고 하겠다.
[
마르세이유에 도착한 마리 메디치] 그녀의 일생의 연작 하나로 환락과
풍요, 관능이 더하여 [사랑의 정원]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가 그리는 방식은
수많은 이들이 그리면 그가 명암의 균형과 최종적인 구성에 주된 리듬과
악센트를 주는 방식으로 다작이 가능했으며, 그는 자신의 생각을 빠른 속도로
스케치하여 아이디어를 담는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말년에 이르러 그는 새로운
아름다운 부인에게서 새로운 영감을 받아 신화적이고 육감적인 누드의
아름다움을 그리고 노년의 눈으로 다채로운 풍경화를 그렸다.
[
스텐성] 그의 화려한 필치가 살아 있는 자연 풍경에 주목하게 하고 명암법과
임파스토의 하늘은 멀리 터너를 예감케 하고 있다.
루벤스는 자신의 미술을 판화를 통해 성공적으로 널리 전파시켰으며, 판화의
보급에 영향을 미치고 이후 로코코의 와토, 게인즈보로, 낭만주의 들라크루아
인상주의 르노아르까지 여러 작가들에게 절대적 영향을 미친다.

*Portrait of Marchesa Brigida Spinola Doria, 1606*

*Portrait of Maria Serra Pallavicino, 1606*

*Saint Gregory with Saints Domitilla, Maurus, and Papianus,1607*

*Self-portrait with Isabella Brant,1610*

로마에서 활동중이던 루벤스가 모친의 사망으로 급거 귀국한 것이 1608
이었다. 그는 이듬해에 이사벨라 브란트와 결혼하였다.
작품은 결혼 일년 후의 것이 된다. 루벤스는 신부에 관하여 친구에게 '그녀는
선량하고 정숙한 여성'이라는 편지까지 썼으며, 부부 사이는 원만하고 다정
하였다. 그림은 아직도 신혼의 정겨운 사람의 사이를 나타내 보이는
장면임을 있다. 다시 말하자면 평화롭고, 만족스럽고, 기쁜 사람의
심정과 () 대한 희망과 즐거움을 보이는 장면이다. 루벤스는 ,
이미 이탈리아에서 수련을 끝내고 활동을 하고 있었으며, 카라바조, 티지아노
틴토레토, 베로네제 등의 화풍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그림은 어두운 색조이지만 명암과 채색법은 카라바조 ()
보이고, 대상을 파악하는 확실성 또한 정확하다.

*The Elevation of the Cross(십자가에 매달림),1611*

작품을 통해 루벤스는 북유럽 최고의 화가로서 확고한 명성을 구축하였다.
루벤스 고향에 있는 성당의 제단화로 그려진 작품은 <십자가에서 내려짐>
함께 최고의 종교화로 꼽히고 있다.
루벤스는 그림을 통해 십자가에 못박히는 순간에도 당당한 예수 그리스도의
영웅적인 모습을 통해 신앙에 대한 열정을 고무하고 있다.

*The Descent from the Cross(십자가에서 내려짐),1614*

<십자가에 매달림> 함께 루벤스의 대표적인 종교화다.
해가 지고 있어 어두워가는 배경속에서도 생명을 잃은 그리스도의 몸은 창백
하지만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다.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포즈는 매우 실감나게
그려졌으며,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로 흐르는 그림의 구도가 생명 잃고 힘없이
쓰러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상태를 느끼게 한다.

*Self-portrait with Justus Lipsius, Philip Rubens, and Jan Wowerius

known as The Four Philosophers,1611-12*

루벤스가 따르고 좋아했던 형이 사망한 것은 1611 8 이었다.
루벤스는 고전학을 배웠으며 고전학에 대한 관심이 깊었던 연유도 이에 있는
바이다. 그림은 추도의 뜻으로 그린 구상화(構想畵)이며 또한 루벤스의
고전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는 예이기도 하다.
그림에도 시대 루벤(Louven)대학 교수로 명성이 있었던 고전 학자이며
루벤스의 형의 스승이었던 쥐스타스리프시우스가 모피(毛皮) 의상으로
나타나 있고 화면 우측에 루벤스의 형이 보이고 후면에 루벤스가 있다.
화면 우측에는 리프시우스의 제자를 있다. 실내 배경으로 이들의
학문을 상징하는 고대 철학자 세네카(Seneca) 두상(頭像) 보이고 옆의
유리꽃병에는 개의 튜울립 꽃이 개는 피고 개는 봉우리로 되어 있다.
이것은 사람의 생존자와 사람의 사망을 의미한다.

*Holy Family with St Elizabeth

("Madonna of the Basket"),1615*

*Venus at a Mirror,1615*

*The Rape of the Daughters of Leucippus,1618*

X자를 형성하고 있는 독특한 구도의 그림으로서, 등장하는 인물들의 엉김으로
인해 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렇게 엉키고 있는 인물들은 생동감을 느끼게
하고 있으며, 역동적인 근육은 관능과 건강미의 표현이며 바로크 양식의 좋은
예이다. 그림의 내용은 제우스 신의 아들이 멧시나의 왕녀를 약탈하는
그리스 신화를 소재로 것이다.
그리스 아르고스의 레우키포스에게는 명의 딸이 있었다.
힐라에이가(기쁨) 포이베(화려함)였다. 그들은 쌍둥이인 륀케우스와 이다스와
각각 약혼한 상태였다. 그러나 제우스가 백조의 형상으로 레다에게 접근하여
태어난 튄다레우스와 레다의 쌍둥이 아들들인 카르토르, 폴록스가 레우키포스의
딸들을 사랑하게 된다.
신화에 따르면, 카스토르와 폴룩스는 힐라에이라오 포이베를 결혼식에서 납치
한다. 카스토르는 도망가던 이다스에게 살해되고 륀케우스는 폴룩스에 의해
죽으며, 이다스는 제우스의 번개에 맞아 죽게 된다. 폴룩스는 형의 곁에 남을
있도록 아버지인 제우스에게 함께 죽게 해달라고 청한다. 제우스는 형제의
죽음과 영원한 삶을 분할하여 그들을 하루는 저승에서 하루는 올림푸스에서
살게 한다.
<
레우키포스의 딸들의 약탈> 1618년에 완성된 루벤스 그림의 주제였다는
사실은 1777년에야 밝혀졌다. '여인 납치'라는 주제는 바로크 시대의 인기있는
주제였는데, 아마도 그림 속에서 바로크 영주들의 개인 애정문제까지 간섭하는
주제넘은 권력의 반영이었다.
전체의 사건은 명의 주요 인물들에게 집중된다. 검은 위에는 제우스의
아들 카르토스가 앉아 있다. 폴룩스는 그의 백마로부터 뛰어내렸다.
루벤스는 권투선수인 폴룩스를 갑옷과 투구로 무장하지 않는 모습으로 표현했다.
그는 나체의 레우키포스의 딸들을 붙잡고 있다. 바닥에는 포이베가 정교하게
주름이 잡힌 금빛으로 반짝이는 옷이 벗겨진 저항하고 있다. 폴룩스의 팔에는
하늘을 쳐다보며 간청하는 힐라에이라가 있다. 그녀가 두르고 있는 천의 빨간
색상은 카르토르가 어깨에 걸친 숄에도 똑같이 나타나 있어서, 그녀를 갈망하는
사람이 카르토르임을 암시한다. 그녀들의 간청에는 응답이 것이다.
검은 날개를 푸토가 카스토르의 말에 매달려 고삐를 잡아채고 카르토르는
납치에 대해 죽음으로서 속죄하게 된다.
그림은 1618 신원 미상의 주문자에 의해 제작되었다.
1716
이전에는 팔츠의 선제후 요한 빌헬름이 안트베르펜에 있는 그의 비공식
외교관을 통해 이것을 소유하고 있었다. 요한 빌헬름은 루벤스의 그림 46점이
포함된 자신의 소장품을 위해 1711 뒤셀도르프에 화랑을 설립하고 목록을
작성할 정도로 열성적인 수집가였다. 1731 대부분의 작품들이 빌헬름의
후손이 살고 있던 만하임으로 옮겨졌다. 나폴레옹 전쟁의 결과로 만하임의
그림들은 1805 뮌헨으로 옮겨져서 바이에른 미술관으로 편입된다.

*한복 입은 남자,1618*

우리나라에 표류한 하멜이 네덜란드에까지 가지고 한복이었다는 설과
유럽까지 흘러 들어간 조선 사람을 보고 그렸다는 , 그림 모델에 대해서
여러 추측을 낳고 있는 그림이다. 어쨌든 17세기 우리나라 한복의 아름다움을
느꼈던 루벤스는 낯선 이방인을 섬세하게 표현하였다.

*The Union of Earth and Water, 1618*

*Marie de Médici, Queen of France, 1622*

*Portrait of Anne of Austria, 1621-25*

*The Duke of Buckingham, 1625*

*Portrait of Susanna Fourment("Le chapeau de paille"), 1622-25*

작품은 '마리 메디치' 주제의 대작과 함께 루벤스의 걸작 중의 걸작이라고
알려져 있는 것이다. 원숙기에 해당되는 루벤스는 부인 이사벨라의 친척 관계의
여인을 모델로 하고 기타 작품에도 등장 시켰다. 작품은 한편 <밀짚 모자의
여인>이라는 명제로 불리우고 있으나 사실은 융단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초상화가 루벤스의 걸작으로 알려져 있는 이유는 모델의 여인이 작가의
이상형을 나타내는 여인이었다는 것과 여기에 루벤스의 성숙한 예술성이
투입되었다는 점이다. 젊음과 건강이 넘치는 여성상은, 밝고 맑은 눈동자와
표정풍부한 몸매를 시사하는 앞가슴 등으로 표상되고 있다.
청아한 여인상을 표현하는 루벤스의 예술은 맑은 청색의 배경과 빨간색, 검은
흰색으로 이루어진, 단순하고 화합되는 색조를 이용한 색채관으로 격조를
높이고 있다.

*The Meeting of Marie de Médicis and Henri IV at Lyon, 1622-25*

*The Capture of Juliers, 1622-25*

*Marie de Medicis as Bellona, 1622-25*

*The Fate Spinning Marie's Destiny, 1622-25*

*The Triumph of Truth, 1622-25*

*마리 메디치의 섭정 선언,162325*

작품은 프랑스의 루이 13세와 그의 어머니 마리 메디치를 찬양하기 위해
제작된 그림이다. 루벤스는 1620년대에 외교관으로서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한편으론 그림을 의뢰 받아 궁정에 장식할 화려한 그림들을 많이 그렸다.
<
마리 메디치>가의 생애를 담은 연작 작품이나 <마리 메디치의 초상>
등의 초상화는, 그림과 함께 화려한 궁정의 사치와 귀족 가문을 찬양하는
작품들이다. 거대한 캔버스에 담겨진 신비하고 장엄한 그림은 화면 왼쪽
으로 시작해, 반원을 그리며 다시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구성을 지니고 있다.
명의 선지자에 이끌려 하늘로 올라가는 사람은 밝고 희미한 윤곽으로 처리된
인물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하고 있으며, 아래에는 무시무시한 뱀들이
꿈틀거리고 있고, 그것을 보는 반라의 여인은 두려움에 놀라는 표정이다.
오른쪽으로는 마리 메디치가 옥좌에 앉아 여러 사람들에 의해 찬양을 받으며
내려다보고 있으며, 뒤에는 개선문으로 보이는 신전이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펼쳐져 있다. 앙리 4세의 신격화가 화면 오른쪽에서 시작되어 하늘로 오르다가
개선문을 통과하여, 그의 어머니 마리 메디치로 돌아와 완성되는 것이다.
고대 페르세우스의 신화를 차용한 작품은, 마리 메디치의 왼편에 메두사의
방패를 들고 있는 안드로메다를 구한 페르세우스가 왕비를 보호하고 있다.
우글거리는 뱀은 메두사의 머리에서 쏟아지던 피에서 생겨난 뱀을 상징한다.
화려하면서도 눈부신 빛의 색채들로 화면을 가득 메우고 신화와 종교적인
이미지의 힘을 빌어와 메디치가에 이입시키면서, 더욱 생동감 넘치고 장엄한
폭의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The Landing of Marie de Médicis at Marseilles, 1623-25*

마리 메디치는 앙리 4세의 왕비였다. 이탈리아 피렌체의 유명한 예술 패트런
메디치 가문 태생인 마리는 1600 프랑스로 시집왔다. 남편이 죽고 어린 아들 루이
13
세를 대신해 섭정을 펼치게 되면서, 그녀는 본격적으로 권력의 맛에 빠져들게 된다.
바람기 많았던 남편 앙리 4세는 암살되었다. 마리가 왕비로 책봉된 바로 다음날의
일이었다. 마리는 암살 음모를 알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나, 공모 여부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어쨌든 그녀는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게 되었고, 자연스레
권력의 유지, 확대를 위해 투쟁하게 되었다. 그런 그녀에게 가장 위협적인 존재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바로 자신의 아들이었다. 아들은 나이를 먹고 때가 되면 왕위를
계승할 것이고, 그러면 자신은 이상 섭정을 없게 것이다.
1614
아들 루이 13세가 마침내 성년에 이르렀으나, 마리는 1617년까지 섭정을
계속 끌고 갔다. 1617 루이 13세는 마침내 어머니의 심복인 이탈리아인 총신
코치니를 살해해 버렸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마리는 이후 차례 아들에
대한 무장 저항 음모를 꾸몄다. 그러다 1630 루이 13 편에 재상 리셜리외를
축출하려는 노력이 무위로 돌아가면서, 결국 아들로부터 유배형을 언도받게 된다.
이에 브뤼셀로 도망간 마리는 쾰른에서 죽었다. 권력도, 아들도 잃은 비참한
말로였다. 마리는 메디치 가의 딸답게 조형예술의 힘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찬양하는 대하 시리즈가 자신의 권세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계산
했음에 틀림없다. 루벤스는 당대의 최고 화가이기도 했지만, 특히 화려한 조형양식을
마리의 권력욕과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
작품은 마리가 마르세이유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루벤스는 단순한 사실을
마치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웅장한 환희의 장면으로 형상화했다. 마리가 갑판을
내려오는 순간 소문의 여신 파마가 쌍나팔을 불며 그의 머리 위를 날고, 바다의
포세이돈이 동안 마리의 행로를 지켜온 인어인 듯한 무리와 함께 수면 위로 올라와
열렬히 그녀의 도착을 환영하고 있다. 화적 상징과 절정에 이른 루벤스의 동적 화풍이
어우러지면서 잊을 없는 퍼레이드의 대단원을 빚어내고 있는 것이다.
연작이 마리의 욕망을 얼마나 충족시켜주었을까 하는 것은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연작은 마리의 생애만큼이나 파란만장한 곡절을 겪었다.
마리가 연작을 루벤스에게 의뢰한 때가 1622. 섭정이 끝나고 아들과의 불화가 점점
가파라질 때다. 1625 완성된 작품은 19세기 초엽 뤽상부르 사쪽 갤러리에서
동관으로 옮겨졌다가 1815 루브르로 보내졌다. 이때부터 산발적으로 이곳저곳 걸리게
연작은, 1900 루브르 '국가의 ' 재구성되는 여러 차례 재정리되나
리셜리외관이 개관하기 이전까지 2 년간 24 모두가 한자리에 선보여 적은
없다. 그녀가 '독을 품고' 축출하려 했던 재상 리셜리외를 기리는 리셜리외관(리셜리외는
프랑스 절대왕정의 기초를 확립한 일등공신이다) 미술관으로 온전히 환골탈태하면서
이제 리셜리외의 켠에 아기게 '마리 메디치의 일생'연작. 마리의 영혼이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 지는 없으나, 분명한 사실 가지는 역시 '권력은 짧고
예술은 길다' 것이다.

*Portrait of Isabella Brant,1625-26*

*Virgin and Child enthroned with saint,1627-28*

*Portrait of Helena Fourment, 1630*

*Helena Fourment, 1630-32*

*The Garden of Love,1630-32*

*The Little Fur (Helen Fourment, the Second Wife to the Artist),1638*

루벤스의 두번째 부인 헬레네 푸르망을 그린 것으로 그녀는 루벤스보다
37
살이나 연하였다. 수줍은 표정으로 남편 앞에서 포즈를 취한 그녀를 그린
루벤스는 작품이 판매용이 아니라 그녀를 위한 것이라고 유언으로 남겼다.
그림 여인은 화가인 남편을 사랑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고, 루벤스 역시
동일한 눈빛을 그녀에게 보냈을 것으로 상상이 된다.

*엘렌느 푸르망 부인과 자녀들,163637*

루벤스가 그린 작품들에는 가족들을 소재로 담은 그림들이 상당히 많다.
<
사랑의 정원>이나 <큰딸 클라라>, 하다 못해 성모와 어린 아이를 그린
작품에도 가족의 이미지를 부여하곤 했다. 그는 경제적, 정신적으로, 또한
예술가로서 행복한 생애를 보냈던 사람으로, 흔히 동시대 불행했던 화가
렘브란트와 비교되곤 한다.
그는 번째 부인과 사별한 젊고 아름다운 부인과 재혼을 했는데
새로운 가정 생활에 행복함을 그림으로 표현할 만큼 각별했다.
작품 <엘렌느 푸르망 부인과 자녀들> 그의 재혼한 부인과 이들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을 그린 그림이다. 루벤스의 가족 그림들은 색채가 눈부시도록
밝고 선명하면서도 화려한 것이 특징이다.
깃털이 길게 늘어진 모자를 부인은 부드러운 질감의 하얀 드레스를 입고
어린아이를 무릎에 올려놓고 있다. 희미한 윤곽으로 처리한 의자에 걸터앉은
부인과 자식의 포즈는 없이 행복하고 넉넉해 보일 만큼 편안해 보인다.
옆에 조금 자란 아이가 귀여운 표정으로 어딘가에 호기심 어린 눈길을 주고
있다. 무릎에 아이를 올려놓은 자세는 성모가 아기 예수를 안을 때의 자세와
흡사하며, 옆에 어린 세례 요한을 대동하는 구성이 그림에서 유사하게
적용되어 있다. 은은한 색채가 화면을 감싸고 있으며, 가족들의 사랑스럽고
행복한 표정들이 그림을 더욱 따뜻하고 부드럽게 만들고 있다.
루벤스는 재혼한 부인과 그의 자식들을 그리면서 경건한 종교적인 이미지를
그림 속에 함께 부여한 보인다. 그가 그린 성화들에 나타나는 강렬한
신앙에의 표출이 그것을 말해 준다.

*Bacchus,1638~40*

*Self-portrait,1638-40*

루벤스는 다양하고 막대한 양의 작품을 제작하였으나, 그의 자화상은 드물다.
작품은 스페인의 귀족풍의 모습으로 나타난 루벤스를 보여 준다.
그의 만년의 모습을 엿보게 하여 주는 걸작이다.
루벤스가 화가로서 또는 인간으로서 여성미에 대한 애착과 표현에 집착하여
결정으로 <毛皮(모피) 걸친 헬레네 푸르망> 제작했듯이, 자화상 또한
그의 최후의 자아(自我) 결산을 예술로 보여 주는 작품이다.
지난날 그의 전처 이사벨라와 함께 그려진 작품 <루벤스와 이사벨라 브란트>
신혼의 기쁨을 보이는 것이며, 이미 30년이 흘러간 과거가 되고, 그간 루벤스는
자신의 예술을 위하여 세월을 보냈다. 자화상에서도 배후와 인물의 의상이
동조의 짙은 색이 되어, 얼굴과 손만 부상되도록 채색되어 있고, 극도로 발달된
색채주의의 극치를 보이고 있다.

*Rubens, his wife Helena Fourment and their son Peter Paul,1639*

*The Judgment of Paris,1636*

*The Judgment of Paris,1639*

*St. Cecilia,1639-40*

*The Three Graces(三美神),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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