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미술사 참고자료/추상표현주의

서양 미술사 - 70(추상표현주의: 말레비치)

AH101 2012. 2. 16. 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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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미술사 - 70(추상표현주의: 말레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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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추상표현주의( 抽象表現主義, Abstract Expressionism:1940~1950)

1940
년대 1960년대 초에 미국에서 전개된 미술의 동향을 말한다.
본래는 1919년에 O.헤르초크가 독일의 표현주의 잡지 《슈투름(폭풍)》에서
추상적인 표현주의를 구상적인 그것에 대치해서 사용한 것이다.
, 미국에서 알프레드 2세가 웰스리대학의 강의(1929)에서 '칸딘스키와
독일의 추상표현주의'라고 했고, 그가 조직한 큐비즘과 추상예술전(1936)
카탈로그에서 칸딘스키를 가리켜서 사용하였다. 이어서 R. 코츠가 H. 호프만의
전람회명(1946) 전용한 이래 미국의 화가에 적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반화된 것은 1940년대 후반1950년대에 뉴욕을 중심으로
J.
폴록, J. 뉴먼, M. 로스코, C. 스틸, W. 데쿠닝, F. 클라인 등의 활동에
의해서이다. 폴록의 푸어드(poured:그림물감을 뿌리듯이 그리는 방법)
뉴먼, 로스코 등의 컬러필드 페인팅(색채의 회화) 표면적으로는
다르지만, 공간상 '그림' '바탕' 관계가 근접되어 있다는 , 올오버(전면을
덮는), 다초점, 또는 무초점의 공간과 정신내용을 가지는 그림이라는 등에서
공통점을 찾을 있다. 이것은 후에 M.루이스의 작품에 의해 계승, 통합
되었다. 용어는 D.스미스를 중심으로 금속을 소재로 조각에도
사용된다.

독일 표현주의의 자기표현을 내세우는 예술과는 이질적인 동향에 주어진
용어는 편의적임을 부인할 수는 없으나, 미술의 중심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지고 있음을 예감한 예술을, 어떤 형태로 포괄하려고 하는 자연발생적
요구에 호응한 것이다.
한편, H. 로젠버그가 명명한 '액션 페인팅'이라는 용어도 동향에 포함되는데
특히 폴록 등과는 다른 회화공간을 가지는 데쿠닝이나 클라인 등의 작품에 가장
어울린다. 추상표현주의는 프랑켄살러, J. 존스 등의 네오다다이즘, 아트
등의 미니멀 아트를 거쳐 1970년대 후반의 신표현주의에 이르기까지 많은
영향을 끼쳤다.

새로운 미술은 시대의 사회적 변화에 따른 의식의 변천으로 새로운 가치를
지니게 된다. 유럽문화의 모방과 연장이었던 미국의 정신문화는 양차 대전중
유럽의 나치정권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화가들과 부를 이룩한 미국의 문화적
위약을 보강하기 위해 미국적 양식을 주장하는 평론가들에 힘입어 20세기
후반부터 독자적인 발전을 이룩하였다. 미국 미술은 전세계적인 영향력을
과시하기 시작함으로써 독자적인 미국적 양식을 주장함에 이르른다.
그리고 뉴딜 정책의 일환으로써 연방미술정책(Fedral Art Project) 미술을
공동체의 일상 생활과 통합시키기 위해 결성된다. 벽화작업은 공공작업을
통한 노동의 수요와 미국적인 미술의 특징을 짓는 계기를 마련한다.
멕시코의 리베라등이 추진한 벽화의 영향으로 규모의 초대형 회화의 캔버스
생기는 계기가 된다. 추상표현주의자들은 정부의 관심과 미국에 형성된
작가들의 자각이 함께 어울려 탄생한 것이다. 이들은 미국적인 주체성은 확보
하기 위해서 애를 쓰는데 고대 신화나 원형적의 의미, 또는 원시미술 특히
인디언의 제의에서 비롯한 숭고함과 비장감을 자신들의 이념을 세우는데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것은 초현실주의 영향으로 원시적 주제에 의한
오토마티즘으로 연결된다.

2
세계대전을 전후한 미국 미술, 특히 추상표현주의에 있어 회화 표현의
본질은 인간내면의 정신성에 두었으며, 표현양식으로써는 행위 추상과
색면 추상으로 나타났다. 그려지는 이미지보다도 그린다는 행위 자체를
주장하여 격렬함이나 생명감의 긴장이 강조되는 행위 추상에서 화면은
현실적인 또는 상상된 대상을 재현하고, 재설계 하고, 표현하기 위한 공간
이라기 보다는 행위하기 위한 장이 되었다. 행위 추상은 자기창조, 자기
한정, 또는 자기 초월과 관련이 있으며 행위는 넓게 뻗은 팔길이만한 충돌점
에서 빚어지는 물질화된 속도화 에너지 자체이고, 표현 행위는 부단한 정신적
긴장에 의해 논리화 되었다. 추상미술이라 하면 지역과 시대를 초월한 모든
조형예술 속에서 발견되는 기하학적 문양을 源流 있는데, 이것은
인간에 내재하는 일반적 능력으로써 이러한 문양화를 창조 능력이라고 보고
있으며, 점에 있어서 오늘날 추상미술 존재의 정당성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추상미술은 입체주의(Cubism) 초현실주의(Surrealism) 같은 하나의
경향을 주장하는 운동이 아니기 때문에 추상미술이 갖는 內的 必然性 의해
주어진다고 있다. 따라서 몬드리안(P. Mondrian) 같은 기하학적
구성적, 지적인 경향, 말레비치(K. Malevich) 같은 신비주의적, 금욕적
경향, 칸딘스키(W. Kandinsky) 같은 본능적, 표현적 경향 등은 내적 필연성
의해 주어진 각각 다른 성향인 것이다.
추상표현주의는 크게 두가지 경향이 나타난다. 차가운 추상계열의 색면추상과
뜨거운 추상의 액션 페인팅(행위미술)이다.
액션 페인팅은 잭슨 폴록과 윌리엄 쿠닝으로 대표된다.
잭슨 폴록의 회화 세계는 1948 융의 무의식에서 비롯된 신화, 상징이 주요
개념으로 작용하고 원시미술에 주목을 신화시기를 거쳐 48 이후 액션
페인팅시기에서 완숙하게 된다. 원시미술은 미국인으로서의 지각과 주체성
유럽에 대한 의식 사이의 결정적인 수단이자 요인이었다.
전후 미술의 두드러진 특징은 뉴욕을 중심 무대로 전개되고 있다는 점인데
1930
년대 미국의 예술계를 주도하던 미학적 관심은 당시의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변동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었다. 1929년의 경제 침체, 대외적으로는
나치즘의 등장과 스페인 내란, 모스크바 분쟁, 나치-소비에트 불가침 조약
그리고 2 세계대전의 유발 등이 사회적, 정신적 불안요인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이러한 시대 상황하에서의 미국 미술의 주된 양식들은 여전히
사회적 사실주의(Social Realism) 지방주의(Regionalism)였다.
그러나 사회주의 리얼리스트들의 매너리즘, 조잡한 삽화나 진부한 반복
부정직한 주제 등에 혐오감을 느낀 미국 미술가들은 때마침 물밀 밀려온
유럽 추상미술을 환호하게 되었다.
특히 R.코츠가 H.호프만(1932 이후 피카소의 드로잉과 마티스의 색채수업
예술의 사회적 목적보다 자율성 주장) 전람회명(1946) 추상표현주의를
전용한 이래 미국의 화가에 적용하게 되었고 일반화된 것은 40년대 후반
50
년대에 뉴욕을 중심으로 프란츠 클라인, 폴록, 뉴먼, 로드코, 스틸, 윌렘
쿠닝, 등의 활동에 의해서이다.
윌렘 쿠닝은 1948 흑백회화를 충격적으로 전시하여 등장한다.
쿠닝은 자유롭고 거의 광란적인 붓질로써 격정적인 모습의 형상에 집중한다.
그의 유명한 <여인 연작> 오만하고 비속한 여인을 그린다. 폴록의 회화가
고상한 추상의 고뇌라면 그는 속물적인 근성과 블랙 유머러스한 조소를 담은
형상적인 것을 담는다. 그에게서 형상은 이미 재현을 떠났으며 그는 인체에서
찾을 있는 격렬함과 폭력을 형상의 과정적인 붓질로 제시하는 것이다.
잭슨 폴록의 푸어드(poured:그림물감을 뿌리듯이 그리는 방법) 뉴먼 로스코
등의 컬러필드 페인팅(색면회화 : Color-field Painting) 표면적으로는
다르지만, 공간상 '그림' '바탕' 관계가 근접되어 있다는 , 올오버(전면을
덮는), 다초점, 또는 무초점의 공간과 정신내용을 가지는 그림이라는 등에서
공통점을 찾을 있다. 후에 M. 루이스의 작품에 의해 계승, 통합된 용어는
D.
스미스를 중심으로 금속을 소재로 조각에도 사용되었다.

한편 미술 컬렉터였던 페기 구겐하임도 도미하여 '금세기 예술'이란 화랑을
경영하였는데, 곳에서 화가 지망생들 간의 접촉이 이루어졌고, 그후 미국
회화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미국 전위미술의
중요한 산실이 되었다.
1943
년에서 1946년의 기간동안에 잭슨 폴록, 한스 호프만, 로버트 머더웰
마크 로드코, 클리포드 스틸 등의 개인전이 화랑에서 계속해서 열렸다.
유럽에서의 추상표현주의자로서는 포트리에, 뒤뷔페 등을 선구로
있다. 이들에 있어서의 마띠에르는 과거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다.
이들은 물감을 두껍게 발라 올린 화면을 긁거나 파는 것처럼 그렸다.
포트리에는 석고나 석회를 굳게 화면에 발랐으며, 뒤뷔페는 물감에 모래나
유리조각 같은 것을 섞어 두껍게 발랐다. 이들은 마띠에르란 물질성을 강조한
것이고 그린다는 것은 단순한 습관적인 테크닉이 아니라 하나의 행위라는 점을
강하게 의식했다. 마띠에르를 행위와 밀접하게 관련시킨 것이다.
이와같은 동향을 미치에르 다비에는 '앙포르멜'이라 이름 붙였는데, 이것은
추상미술의 새로운 전개가 아니라 실로 '또다른 예술(L'artautre)' 이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약동적 필촉과 거친 마띠에르의 비구상화가 오십 년대의 유럽
미술을 의미했다. 오십 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행위 마띠에르의 원초적 관계가
고정화되어 신선함을 많이 잃게 되지만. 기왕의 회화 이념을 탈피. 육십 년대
회화의 장을 열었다. 미국은 미국 나름의 독자적 세계를 개척했는데, 잭슨
폴록은 대표적 작가다. 그는 멕시코 벽화의 또는 비유럽적 프리미티브
아트라 일컬을 있는 요소를 가지고 바닥에 화폭을 놓고 주변에서부터
물감을 흘려 그리는 드롭핑 페인팅을 시도했다. ' 자신은 그렇게 함으로써
회화의 일부가 느낌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이는 회화가 화가의 자아표현
이라는 기왕의 관념을 넘어선 것이라 있으며 "액션 페인팅" 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평론가 해롤드 로젠버그는 '화폭은 현실이나 사용의 대상을
재현. 구성, 분해, 표현하는 공간이 아니고 행위를 위한 경기장 같이 보인다'
말했다. 종래의 회화와는 근본적인 이질성을 지적하여 이를 액션 페인팅이라
부른 것이다. 또한 추상표현주의에 있어서 오토마티즘(Automatism)
초현실주의에서 출발하였지만 "이성에 의한 통제가 없는 " 아닌 "의식의
조정을 거치는 자발성의 표현방법" 이라는 새로운 조형의식으로 나타난다.
로젠버그에 의하면 표현으로서의 공간을 모두 행위하는 사건이라는
하나의 시간 속에 회화를 흡수시킨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스케치나 데상의 개념을 수정하고, action으로써의 동일성을 가지며
행위의 회화는 예술과 생활사이의 모든 구별을 무너뜨리고 말았다.
새로운 회화는 마디로 행위의 흔적으로써 작품을 그린다는 행위 자체가
행위의 결과로써 무엇이 그려져 있는가의 문제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Action Painting이라고 붙여진 호칭은 추상표현주의 보다는
훨씬 본질을 파악한 용어이었으며, Action Painting 사건이라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고 그린다는 행위의 연속을 말하고 이러한 점에 있어서 제작
방법은 누구보다도 폴록의 방법이 우수한 Action Painting이라고 로젠버그는
주장하였다.

추상표현주의는 1951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미국추상회화·조각전"
계기로 강력하고 주도적인 미술운동을 전개했다.
그리하여 1951년부터 1961 사이에 운동은 미국 전역으로 세계 각국으로
파급되었다. 1940년대 1950년대에 다른 스타일의 그림을 그리던 작가들
중에서도 경향으로 화풍을 바꾼 경우가 많았다.
본래 추상표현주의자는 폴록, 뉴먼, 로드코, 스틸 이었다.
이에 대해서 호프만, 고르키, 쿠닝, 프란츠 클라인 등은 다른 경향의 작가들
이다. 왜냐하면 로젠버그가 지적했듯이 형상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60
년대에 들어와서는 뉴욕 현대 미술관에서 아쌍블라쥬 예술이라는 국제전이
개최되었는데, 아쌍블라쥬(집합, 조립) 용어는 뒤뷔페가 처음 사용했다.
명칭에서처럼 기성품, 폐품, 가공품, 기타 여러가지 물체를 긁어 모아 만들어낸
전시회이다. 그리는 대신 긁어 모은다는 행위까지 확대된 것이다.
현대 도시 문명의 생활 양식이나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특성이 반영된 것으로
누보레알리즘 흑은 아트와도 관련된 것이었다.
경향은 주관적이며 유동적인 추상예술로부터 떠나서 환경과의 새로운
결합을 시도한 것으로 해프닝과의 관련도 주목할 만하다.
잡동사니 물체로서의 작품에 관객이 끼어든 삼차원의 살아 있는 아쌍블라쥬는
해프닝에서 말하는 환경과의 새로운 결합과 유사한 것이었다.

추상표현주의 운동은 1960년을 정점으로 폴록, 클라인, 로드코, 톰린
바넷 뉴먼, 라인하트 등이 차례로 작고하면서 쇠퇴기를 맞게 된다.
그러나 남은 작가들, 쿠닝, 머더웰, 필립 거스튼, 고틀리브, 스틸, 브룩스
마카렐리 등은 그들의 이미지를 더욱 확대해 나갔으며, 프랑켄살러, J. 존스
등의 네오다다이즘, 아트 등을 거쳐 70년대 후반의 신표현주의에 이르기
까지 많은 영향을 끼쳤다.
추상표현주의에 갖는 의의는 피상적으로 미국미술의 국제화 분위기의 최초의
반영이자 미술메카로서의 상징적 첫발이다. 내용면에서는 추상이되
내용이 갖는 주제성은 몬드리안의 추상이 추구한 신지학적인 질서와 다른
철학적인 성찰이 따른다. 그것은 실존주의의 영향으로 작가의 실존적 문제의
적나라한 과정이 모두 공개되면서 고민의 흔적을 대중이 함께 공유하게 된다.
따라서 추상표현주의는 매우 지적인 미술운동이라고 있다.

(1)
기하학적 추상:

기하학적 추상의 뿌리는 세잔느의 탐구적인 정물화나 풍경화, 그리고
나아가서는 분석적 입체주의에서 찾아볼 있으나 최초의 진정한 기하학적
추상은 바탕 위의 검은 장방형으로 1913년경 카시미르 말레비치에 의해
제작되었다. 그는 이어 일련의 보다 복잡해지는 기하학적 構圖 그려
나갔으며 원이나 사각형, 경사진 장방형, 평행사변형, 그리고 사다리꼴들은
대칭적으로 그리고, 대각선 위치에다 정리 배치했다.
말레비치는 기독교적인 신비주의자였고 그가 1915년에 절대주의자라고
부른 그의 미술은 모두 외부세계의 모방으로부터 해방된 순수한 느낌에 관한
것이었다. 말레비치의 개념은 1920년대초 리시츠키를 통해 西유럽에
전달되었는데, 西유럽에서 피에트 몬드리안, 테오 반되스버그, 그리고
데스티일로부터 나온 유사한 기하학적 개념과 통합되고 바우하우스에서
회화敎科 핵심을 이루었다. 기하학적 추상은 바우하우스의 화가, 교사들에
의해 그후 미국으로 건너왔는데 리스즐로 모홀리스 나기도 1937 시카코
에서 바우하우스를 열었고 조세프 앨버스는 노스캐롤라이나주의 블랙
마운틴 예일대학에서 색채와 인식 이론을 가르쳤다.
다른 전달자인 몬드리안은 그의 인생의 마지막 5(1940~44) 뉴욕
에서 보냈으나 그의 名聲 대단하여 1930년대에 버고인 딜러같은
안되는 견실한 미국 기하학적 화가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추상표현주의는 기하학적 스타일로부터 되돌아오는 것을 의미할지라도
회화적 表面 밑에는 기하학적 구조가 깔려있다.
더욱이 추상표현 기하학적 추상과 1960년대의 '하드 에지' 변형된
캔바스, 미니얼 사이에는 수학적인 체계나 , 장방형 또는 사각형
같은 기본적 형태들을 공통적으로 사용한다는 명백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으나 밀도있게 느껴지는 원래의 정신적 내용은 일반적으로 後期작품들
에서는 찾아볼 없다. 끝으로 1980년대의 기하학파 미술가들이
있는데 그들도 컴퓨터의 최소한을 바탕으로 기하학을 형성하는 피터 헬리
같은 작가들이다.

(2)
형태적 추상:

형식의 추상은 아르프, 마송 미로의 작품에서 보는 것처럼 우연 또는
다다나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적 드로잉 방식에서 연유되었다.
이는 특히 1930년대에 유행했고 이때 이들에 의한 有機的 탐색에 피카소
칸딘스키, 브랑쿠시 마타 등이 합류했다. 변형되는 아메바같은 형태나
덩굴손 모양의 , 그리고 환각적인 색채가 애욕적, 植物性的, 그리고 꽃이나
水草 연상시키는 유형의 構圖 위해 사용되었다. 아쉴 고리키가 뉴욕에서
이러힌 요소들을 제일 먼저 사용했으나 곧이어 초기 추상표현주의 작가들이
바시오레스, 고틀리프, 스틸, 폴록, 그리고 로드코 등이 이에 참여했다.


★ 말레비치(Kazimir Malevich: 1878~1935) ★

20세기 초반, 혁명이라는 특수한 상황 아래에서 일어난 러시아 아방가르드(Avant-
Garde:전위) 예술운동은 예술의 미적 감각과 역사에 대한 의식, 그리고 작업소재와
공간을 확대, 확산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운동으로 인해 기존의 예술은
새로운 개념, 새로운 작업들에 의한 도전에 직면하고, 급진적인 변화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러시아의 아방가르드는 혁명 전후 산업사회로 탈바꿈하던 시대적 상황과 분위
기에 의해, 미술이 정신적 연대감을 매개로 산업 현장과 직결될 수 있다는 형태로 나타
났으며 프랑스의 입체주의, 이태리의 미래주의와 함께 기존 미술의 관습적 틀을 넘어서
실험적 분위기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아방가르드는 문화예술 전 장르를
통해 공동작업으로 진행시켰다는 운동적 개념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어, 서구의 실험적
태도보다 더 큰 파급 효과를 가지게 되었다. 따라서 러시아 아방가르드미술은 형식이나
내용, 색채 및 재료, 텍스츄어, 공간감, 그리고 다이나믹한 실험주의로 후에 기하학적
추상이나 미니멀리즘, 컨셉추얼 아트, 키네틱 아트를 파생시키는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
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러시아 아방가르드미술은 분류상 네오프리미티비즘
(Neoprimitivism)과 입체미래주의(Cubo-Futurism), 광선주의(Rayonism), 절대
주의(Suprematism), 구성주의(Constructivism), 생산주의(Productivism)로 나뉘
어진다. 이같은 장르적 운동은 종래 철학의 보편구조와 형식미술을 다양화시킨 촉매제
역할을 했다. 그들의 기본정신은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미학적 개념의 재정립과
새로운 역사와 만나는 「예술의 순수성」에 맞추어졌다.
요컨대, 러시아 아방가르드미술운동은 종래의 회화를 새로운 시각으로 파악하려는
실험 정신이 핵심이 되었다. 혁명이라는 특수한 상황과 맞물려, 혁명사상과 새로운 기술
을 연결하고자 하였으며, 무대예술, 환경미술, 응용미술에 이르기까지 넓은 분야로 확장
하게 되었다.

절대주의(絶對主義:Suprematism)는 최초의 순수한 기하추상회화 운동으로
1913년경 러시아에서 카지미르 말레비치(Kazimir Malevich:1878~1935)
의해 시작되었다. 말레비치는 입체파에서 끌어낸 순수한 감각을 지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기하학적인 색채평면 형태만을 묘사(기하학적 추상주의), 바탕에 검정색 정방형만
을 그린 작품을 제작하였으며 감성의 극한적인 극점으로서의 추상을 주장했다.
말레비치가 시도한 최초의 절대주의 작품은 흰 바탕 위에 연필로 검정색 4각형을 그린
드로잉이다. 여기서 그는 이전에 그가 추구하던 입체파적인 미래파 양식의 특징인 재현적
요소를 모두 제거했다. 그리고 '적절한 표현 수단이란 최대한으로 감성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이며 사물의 외형을 거부하는 것'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그는 이 작품에서 검정색 4각형은 감성을 뜻하며 흰색 바탕은 '감성을 초월한 공(空)의
세계'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그의 초기 절대주의 작품들은 대개 1913년경부터 제작되
었지만 1915년에 전시되었다. 이 해에 그는 시인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Vladimir
Mayakovsky:1893~1930)를 비롯한 몇몇 문인들의 도움으로 절대주의 성명서를 편집
했다. 4각형·원·십자형 등의 단순한 기하형태로 이루어진 초기 구성작품들에서 말레비치
는 검정색·흰색·빨간색·초록색·파란색만을 사용했다. 1916~17년에는 원의 부분이나
작은 3각형같이 좀더 복잡한 형태들을 다루었고 색채도 갈색, 분홍색, 엷은 자주색 등을
폭넓게 다루었다. 또한 복잡한 공간 관계를 엮어서 3차원적인 환상을 도입하기도 했다.
그의 실험은 1917~18년에 그린 <백색 위에 백색 White on White>에서 절정에 달했
는데 여기서 색채는 사라지고 희미한 윤곽의 4각형만이 나타나 있다. 1919년 개인전을
끝으로 그는 절대주의 운동의 종말을 고했다. 그 밖에도 이반 클리운(Ivan Kliun), 이반
푸니(Ivan Puni or Puny(Jean Pougny:1894 ~1956), 올가 로사노바(Olga Vladi-
mirovna Rosanova:1886~1918) 등과 같은 잘 알려지지 않은 절대주의 화가가 있다.
이 운동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유명한 러시아의 화가인 바실리 칸딘스키는 1920년
이후에 그린 기하학적인 형태들에서 절대주의의 영향을 보이고 있다.
러시아의 다른 추상미술 경향과 더불어 이런 기하학적 양식은 칸딘스키와 러시아의 화가
엘 리시츠키(El Lissitsky:1890~1941)에 의해 독일에 전해졌고 특히 1920년대 초
바우하우스(Bauhaus)로 이어졌다.

Self Portrait, 1908


카지미르 말레비치(Kazimir Malevich:1878~1935)는 키예프 출신의
러시아 화가로 몬드리안(Piet Mondrian:1872~1944), 칸딘스키와 더불어 추상예술의
개척자이다. 처음에는 후기 인상파의 영향을 받았으니 나중에 M.F. 라리오노프 및 러시아
전위파 시인들과 친교를 맺고, 절대주의(Suprematism)을 주창하였다.
1911년에는 '다디아의 책'이라는 그룹에 참가하여 러이아의 입체파 운동을 추진하였으며,
1912년 파리 여행 후 레제풍의 기하학적 추상화를 발표하고급속히 자기 방법을 발전히켜
<흰 바탕에 검은 네모꼴>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어 원. 십자가. 삼각형을 추가하고,
그러한 기본형태에 의한 추상예술을 이론화하여 절대주의라 이름 짓고 1915년 V. V 마야
코프스키와 함께 선언문을 작성하였다. 혁명 직후 교수직에 임명되기도 했으니, 미술 정책
의 반동적 전환으로 상페테르부르크에서 자유를 잃은 채 지냈다.
1926년에 독일로 이주해 절대주의 선언을 상세히 설명한 <비구상의 세계>를 바우하우스
를 통해 간행했다.

자연의 혼돈을 지배하는 인간의 우월성을 상징하는 절대적 기본형태로서의 직선은 그의
기하학의 중요한 바탕이 된다. 자연에서는 결코 발견되지 않는 사각형은 절대주의의 기본
요소이며 외관적 세계를 부정하며, 과거의 미술을 부정한다. 창조를 위해서는 정신적
독립을 추구해야 한다고 믿었던 그는 물질적 필요의 충족을 추구해서는 안된다고 보았다.
1917년 혁명은 환영했으나, 예술이 기계문명에 맞추어지고, 공리적 목적에 씌여진다는
것에 동조할 수 없었다. 또한, 예술가와 기술자간의 어떤 편의상의 결합도 부정하였다.
진정한 창작품은 시대를 넘어 영원성이 부여되는데 비해 과학과 기술의 발명은 일시적일
뿐이라고 그는 말했다. 의식보다 절대적으로 확실한 잠재의식(초의식)으로 보여지는 것
이 예술작품이라고 그는 보았다. 말레비치는 미술가가 수동적으로 자연 환경에 반응
하는 전통적 재현 방법을 거부하고 자연 그 자체의 실재와 같이 의미있는 새로운 실재들
을 창조하려 했으며 그 방법으로써 사각형을 기본으로 하는 기하학적 형태를 택했다.
말레비치는 '절대주의는 창작 예술에 있어서 순수감성의 절대적 우위를 말한다.'라고
그의 회화의 의도를 피력했으며 이는 곧 시작적, 물질적 현실세계를 초월하여 대상없는
정신세계를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말레비치는 절대주의 회화를 위해 사각형을 기본
요소로 선택했고, 정사각형은 가장 이상적 형태로 십자형, 장방형 등 다른 절대주의의
형태들의 안내자 역할을 한다. 말레비치의 그림에서의 흰색바탕은 푸른 하늘의 경계를
부수고 무한한 공간으로 탈출하려는 그의 의지를 나타내며 절대주의가 전개될수록
색이 정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이유로 사각형에서 채색된 선명한 색채마저 배제하게 된다.
말레비치는 몬드리안과 마찬가지로 비구상에 이르기 위해 초기에 입체주의를 받아들였
는데, 피카소의 큐비즘보다는 레제의 원통주의를 도입하였다. 서민의 생활상을 기하학
적 형태로 환원하여 보여주다가 1913년에 <흰 바탕위의 검은 사각형>이라는 단순한
기하학적 구성의 절대주의 작품을 제작한다. 이 작품은 1918년 12월 페트로그라드
에서 열린 '0,10' 전시회에 출품되었고 절대주의 선언을 발표하게 되었다.
1915년 이후 한동안 여러 색채의 크고 작은 사각형을 배열시킨 작품을 발표하여 다색
시대를 맞이한다. 이 시기의 작품들에서는 색채의 순수성, 즉 색채가 회화의 부속물이
아니라 독립된 하나의 단위로 존재한다는 점을 추구한다. 1918년 <흰 바탕의 흰
사각형>이라는 궁극적인 절대주의 작품이 등장한다. 모든 불순물을 쏟아버린 무의
세계라는 말레비치의 표현에서처럼 절대적 우위성을 극렬하게 드러냈다.

말레비치는 '자연 그 자체의 실제와 같이 의미있는' 새로운 실제를 창조하려 했다.
'예술에 있어서 순수한 감정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한 그는 몬드리안의 이성
중심과는 반대로 감성의 극한적인 극점으로서의 추상을 주장했다. 단순한 현실적 감각
세계를 거부한 것이 아닌, 순수한 감성으로서의 극점, 즉 주관주의적인 추상이며 몬드리안
보다 훨씬 앞서서 시작한 추상이었다. 몬드리안의 작품과 비교한다면 모두 기하학적 추상
형태로서 어떠한 정감이나 현실의 모습의 재현을 배제하지만, 몬드리안의 작품이 현실
세계로부터 출발하여 지적이며 합리주의적인 장기간의 숙고의 결과물인 반면, 말레비치의
작품은 직관적 통찰에 의해 현실을 단기간에 초월하여 얻어낸 절대의 세계였다.

Flower-Girl, 1903

Spring, 1905/1906

Die Hochzeit, 1907

Landschaft(Der Winter), 1909

Taking in the Harvest, 1911-1912

Morning in the Country after Snowstorm, 1912

다소 산만한 듯한 빛의 방향과 빨강, 파랑, 흰색의 강렬한 색이 인상적이다.
지난 밤의 폭풍우가 마을을 눈으로 뒤덮고, 아침 햇살의 강렬한 빛이 마을을 덮은 눈 위
에서 반사되고 있는 모습이다. 이 시기의 말레비치는 모든 물체를 분해하는 입체주의와
차가운 금속미의 미래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The Woodcutter(나뭇꾼), 1912

로봇과 같은 모습의 이 나뭇꾼은 너무나도 유명한 말레비치의 대표작이다.
그는 스스로 이 작품에 대해서 역동적 구성이라 칭하기도 하였는데 따뜻한 색의 느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날카롭게 떨어진 선과 빛의 각도가 입체주의의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다소 경건한 분위기가 밀레의 만종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Reaper on Red Background, 1912-13

러시아 민족주의의 감정을 실은 이 작품은 앞의 나뭇꾼과 같은 스타일의 그림이다.
말레비치는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고향의 농부들의 생활을 단순하고 장엄하게 그려냈다.
명암 대비와 원색으로 강조된 곡면의 입체감이 앞의 나뭇꾼보다 훨씬 단순화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Black Circle, [1913] 1923-29

Black Square, [1913] 1923-29

말레비치의 절대주의 회화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으로 처음 전시되었을 때 파란을 불러
일으켰다. 이 그림은 러시아 정교의 성상과도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
그래서 말레비치가 죽은 후 러시아 미술가 연맹에 안치되었을 때 그의 머리 위 벽에 이
그림이 걸렸다고 한다. 십자가 대신으로 말이다.

The Aviator, 1914

말레비치 특유의 명암대비 인물표현이 엿보인다. 물고기, 문자, 카드 등 다소 비행사와
는 상관없을 듯한 여러가지 물체들을 산만하게 배치되어 있다. 아직까지는 입체주의
영향이 남아 있는 듯 하다.

An Englishman in Moscow, 1914

나뭇꾼과 흡사하게 그려진 인물을 뒤에 두고 재미있는 물체들이 화폭에 배치되어 있다.
단어들, 물고기, 촛불, 총검, 교회, 칼 등이 일관성없이 나열되어 있는데, 이는 영국인의
도시에 대한 경험을 묘사한 것이라고 한다.

Soldier of the First Division, 1914

Red Square: Painterly Realism of a Peasant Woman in Two Dimensions, 1915

Black Square and Red Square, 1915

Suprematist Painting: Aeroplane Flying, 1915

당시 러시아는 혁명으로 인해 물질주의 세계관이 팽배해 있었다. 말레비치의 초기 절대주의
작품으로 물질주의적인 제목이 붙어 있다. 하지만 예술의 효용성만을 따지고, 추상적인 것
보다는 눈에 보이는 것만을 추구하는 당시의 사회 흐름에 그는 부담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앞으로 나타나게 되는 절대주의 스타일의 그림에는 <절대주의>라고 제목을 붙이고
있다.

Suprematist Composition, 1915

Suprematism, 1915

Suprematism:Self-Portrait in Two Dimensions, 1915

Suprematist Painting, 1915-16

Suprematist Painting, 1916

Supremus No. 56, 1916

Suprematism(Supremus No. 58), 1916

Suprematism, 1916-17

절대적 감각의 추구와 새로운 기호의 창조에 자신의 예술세계인 절대주의를 설명한 말레
비치는 위의 그림과 같은 스타일을 시리즈로 그렸다. 훗날 이 절대주의 감각은 바우
하우스를 통해 많은 디자이너들에게 전해졌고 아직까지도 그 감각적 흐름은 현대 디자인
의 주류가 되고 있다.

Girls in the Field, 1928

Complex Presentiment: Half-Figure in a Yellow Shirt, 1928-32

그의 초기작품에서 많이 보았던 명암대비의 물체 표현이 약간 보이지만 그동안 추구해
왔던 절대주의 스타일의 그림과는 사뭇 다른 작품이다. 그러나 감각적인 원색의 대비는
그의 디자인 경향을 느끼게 하고 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집 한 채를 바라보고 있는
외로운 사람의 뒷모습은 고독한 말년의 말레비치 자신을 연상시키고 있는것 같다.

Sportsmen, 1928-32

Red House, 1932

Running Man, 1932-34

Girl with a Comb in Her Hair, 1932/1933

Self Portrait, 1933

Portrait of the Artist's Wife,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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