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미술사 참고자료/추상표현주의

서양미술사73 추상표현주의: 드 쿠닝, 폴록

AH101 2012. 2. 16.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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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미술사 - 73(추상표현주의: 쿠닝, 폴록)


윌렘 쿠닝(Willem De Kooning: 1904~1997)


네델란드 태생의 미국화가로 1904 로테르담출생. 1926년에 미국에
정착하여 당시에 미국에 이민온 그래함이나 아쉴 고르키 등과 친분을 맺고
1935~36
년에는 벽화 화가로서 연방 미술 프로젝트에 참가한다.
소년시절에는 미술장식회사 견습공으로 들어가 일하면서 미술아카데미 야학에
다녔다. 로테르담 미술학교에서 공부한 장식미술가로 활동하던 그가 불법
으로 미국땅을 밟은 때는 스물두 살이던 1926 이었다. 뉴욕의 건축사장에서
페인트공으로 일하던 그는 1930년대 스듀어스 데이비스, 아쉴 고르키과 같은
뉴욕의 아방가르드 작가들과 친해지면서 전업작가의 길을 결정한다.
불법이민 노동자였던 윌렘 쿠닝(Willem de Kooning) 이름에 (de)
덧붙여 작가 윌렘 쿠닝(Willem de Kooning)으로 변신하게 된다.
2
차대전 직후에 부상한 유럽과 미국의 추상미술이 기존원칙의 거부와 전통적
구성 방법과의 단절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면 쿠닝의 회화 또한 전통의
파괴 작업에서 시작된다고 있다.
남의 것을 빌어 어떻게 나의 것으로 만들어 가야하며, 나의 길은 남과 얼마나
달라야 하는가. 이를 위해 모방이 있고 파괴가 있으며 재구성이 있고 재창조가
있듯이, 쿠닝의 초기 20여년에 가까운 작가 생활은 이러한 과정의 연속으로
점철되어 왔다. 1938년의 <서있는 남자>에서 55 <풍경이 있는 여인>
작품에 이르기까지 나타나는 일관성 있는 진보과정은 구상에서 추상으로 변화
하는 치밀한 파괴작업으로 50년대 탄생하는 쿠닝의 최고의 추상 작품들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증명해 주고 있다.

쿠닝은 1940년까지는 인물화가이자 초상화가였다. 그리고 어떤 특별한
환경속에 놓인 그의 인물 습작들은 자코메티의 그림과 유사성이 있다.
그가 추상화를 처음 그리기 시작했을 추상의 형태들은 고르키를 통해
드러난 피카소를 연상하게 했다. 실제로 그의 작품을 보면 쿠닝의 작업이
바로 20세기 미술의 혁명이라고 불리우는 입체주의 미술의 바탕에서, 특히
피카소의 영향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쿠닝이 자신의 작품에서 피카소의 흔적을 지우기 까진 장장 15년에 가가운
세월을 필요로 했다. 전통회화에서 시작한 30년대 후반의 초기 작품은 사실적
구성회화로서 앵그르의 회화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볼륨과 콘트라스가
뚜렸하다. 시기의 작품의 대부분을 작가가 스스로 파괴시킨 탓에 흔적을
뚜렷이 찾아보기가 힘들지만, 간과해도 무관하다 있다. 40년대 중반까지
입체주의에 바탕을 두고 마티스적 색채를 빌어 인물회화가 주를 이루는데
피카소의 20년대 작품에서 보이는 생물형태학적인 무정형으로 인체의 윤곽을
설정하고 위에 마티스적인 색채를 반복 칠함으로 조금씩 3차원의 공간을
2
차원화 시켜가는 용해 작업의 시작이다.

쿠닝의 작품의 핵을 이루는 주제는 여인과 풍경으로, 특히 <여인> 시리즈는
작품의 진보과정을 연구하는 중요한 열쇠를 지니고 있다.
시리즈는 쿠닝이 미술평론가 였던 엘렌느 프라이드와 결혼한 1940년에
시작 되었으며 최초의 <여인> 시리즈 작품은 <앉아있는 여인>(1940)이었다.
이어 <여인>(1944), <핑크 레이디>(1944), <여인Ⅶ>등을 거쳐 2 동안의
작업으로 완성된 <풍경으로서의여인>(195455) 이르기까지, 여인을
둘러싼 그의 작품은 구상에서 추상으로의 변화과정을 면밀히 보여 주고 있다.

쿠닝의 여인은 뒤틀린 몸매의 흉란 얼굴을 드라마틱한 인물이며 복잡한
구성 속에 서서히 흔적을 감추어 버리는 미움받는 여인이다.
여인을 지우고 지우면서 여인의 몸이 얼굴로 확대되고 입술이 풍경으로
되면서, 추상으로 변신되어 간다.
이러한 관점에서 쿠닝의 작품은 하나하나가 다음에 이어지는 작업을 위해
거쳐가는 미완성의 작품이라 여겨지기도 한다.
그의 가장 성공적인 작품은 1950년경에 제작된 검은색 바탕의 하얀색의
드로잉이 조화를 이룬 작품들이다. 또한 1950년까지 그는 칸딘스키, 고르키
피카소 또는 그보다 앞선 어느 누구와도 다른 추상표현주의의 개성적인 측면을
전개했다. 그리고 그는 새로운 양식, 새롭고 격렬한 표현양식을 예언하는
자들의 사람으로 등장했다.
동시에 인물에 대한 그의 향수는 그로 하여금 유명한 '여인화 연작' 착수하게
했다. 이러한 작품들은 힘이 넘치고 때로는 거부감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성의
상징이나 풍요의 여신으로서, 그리고 에드바르트 뭉크의 관례에서 피를 빨고
있는 흡혈귀등으로서의 여인을 최면에 걸듯 환기시킨다. 위협적인 모습에서
부터 단순한 풍자만화, 온화한 에로티시즘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1950
년대는 <여인Ⅰ>(195253)이나 <여인Ⅵ>(1953)에서 보이듯
피카소적인 인물처리가 남아 있으면서도, 반복되는 터치작업으로 여인의 얼굴을
용해시키는 추상작업을 통해 붓처리가 난폭하면서도 강한힘이 서린 자신의
회화를 찾아가는 시기이다.
이러한 과정은 <풍경으로서의 여인>(195455) <구성>(1955)에서
모방과 영향의 탈을 벗는 피카소와 고르키의 망령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쿠닝 작업의 획기적인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이어지는 50년대 후반은 쿠닝의 황금시대라고 일컬을 있겠는데, 빨강과
노란 색조가 주를 이루는 가운데 붓작업이 뛰어난 추상회화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60년대에는 장미색과 분홍색을 섞어 두껍게 칠한
우스꽝스러운 여인들이 재등장함으로써 다시 구상으로 뒷걸음질 한다는
의혹을 불러 일으킨다. 쿠닝의 작품에 대해서 평론가들의 따가운 시각이
비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때부터이다.
<
정원의 여인>(1971) 이르러야 쿠닝은 여인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해방된 50년대 후반의 추상에서 보다 세부적으로 파고든 자신만의 작업을
만들어 내었다. 또한 그의 작업은 실체를 용해하면서 드러나는 변화의
회화이며, 과정의 복잡성으로 인해 귀결되는 미완성의 회화라는 의미를
지닌다. 쿠닝은 하나의 작품을 제작하기까지 수십번에 걸친 덧칠과 수정
작업을 고의적으로 해왔다. 완성도에 대한 커다란 집념을 지닌 그의 작품이
그에게 언제나 미완성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작업 자체가
쿠닝에게 있어 하나의 인간드라마 연출과정이었기 때문이다.
모든것을 수용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간다는 것은 그만큼 힘든 작업이기
때문이다. 또한 쿠닝의 작품을 세밀하게 관찰해 보면 놀라운 것은 작품이
마치 멀리있는 이미지를 가까이 끌어들이는 '클로즈 ' 같은 과정으로
이루어져 왔다는 것이다. 초기 구상작품에서 추상으로 발전한 해체작업과 이에
따라 부분을 확대해 보다 세밀히 비춰내는 작업은 그의 조형예술가로서의
탁월한 재능을 보여준다고 있다.

'
창작' '모방'에서 시작된다고 하지만, 쿠닝처럼 문구가 적용되는
작가는 드물지 않을 것이다. 그의 작품은 스스로가 타인에게서 비롯된
회화라고 정도로 모방과 모방을 거듭한 끝에 찾고자 했다.
때문인지 쿠닝의 작품을 처음 대할때 낯설지 않고 비교적 친숙한 이미지가
느껴졌다. 그가 영향을 받은 화가들이 많은 만큼 그의 그림을 보면 작품 하나
에서도 마치 몇가지 작품을 보듯 복합적인 면이 느껴진다. 하지만, 쿠닝의
작품 뿐만 아니라 그보다 유명한 그에게 영향을 작가들의 작품조차 이해
하기 어려운 것이 많이 있다. 그러기에 쿠닝의 작품이 모방으로 이루어
졌다고 비난할 없고,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 비교해 자신있게 지적하고
평할 수가 없다. 단지 그의 작품을 단순히 하나의 작품으로만 생각하고
작품을 감상할 이다. 그의 작품에서는 흔히 말하듯 정말 강렬한 색채와 거친
붓작업, 화면을 가르는 힘찬선이 두드러짐을 느낄 있다. 또한 그속에 담겨진
인물의 모습이 흉물스러워 보이기도 하지만, 다시볼 전혀 다르게 화면의
구성에 눈길이 가기도 한다. 남을 의식 하기보다는 자신의 독자적인 세계를
이뤄내고자 수많은 모방의 작업을 거듭하고 완성을 찾아 불태운 그의 집념이
그를 추상표현주의의 거장으로 이루어 놓지 않았나 생각한다.

*여인1, 195052*

잭슨 폴록(Paul Jackson Pollock:1912~1956)


1912
1 28 미국 와이오밍주()에서 출생하였다.
로스앤젤레스와 뉴욕에서 공부하였다. 1930년대 무렵부터 표현주의를 거쳐
추상화로 전향하였으며, 구겐하임 부인과 비평가 그린버그의 후원을 받아
격렬한 필치를 거듭하는 추상화를 창출하였다.
1947
마룻바닥에 화포(畵布) 위에 공업용 페인트를 떨어뜨리는 독자적인
기법을 개발하여 하루아침에 명성을 떨쳤다.
그것은 떨어뜨린 도료(塗料) 궤적(軌跡) 거듭하여 화면의 밀도를 높여감과
동시에 작가의 다이내믹한 제작행위를 직접 화포에 기록하는 것이었으므로
액션 페인팅(행위미술)이라 불리게 되었다.
세계화단에 영향을 끼쳤으며,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작품에 No.31 《서부로 가는 길》 《남성과 여성》 《여름철》 등이 있다.

폴록의 작업 제작 방식은 자유롭고 역동적인 행위로 캔버스에 물감을
흘렸는데, 이때 화면에는 우연적인 요소들이 가득차게 되는 것이다.
물감통으로부터 직접 바닥의 캔버스에 흘려 떨어지는 페인트는 즉시 색선이
되고 색반이 되어서 거미줄 망과도 같은 색의 장으로 변한다.
여기에서 그는 특별한 어느 부분의 강조점을 두지 않고 모든 부분을 동등
하게 강조함으로써 구심점을 없애버렸다. 그러므로 전통적 이젤 회화에
비해서 더욱 생생하고 개방적이며, 즉각적인 순수 화면이 된다.
고립된 완성도 없고 색채 대비에 따라 회화적으로 창조해야만 하는 회화
공간도 없으며 다만 둔감한 물질적 대비나 시각적 착시에 의한 화면만이 있을
뿐이다. 회화는 이제 이상 이젤 회화로써 포장될 수는 없다. 캔버스는
단순히 주어진 용기로써가 아니라 통일성이 종래의 관념에 의해 강요되지
않고서도 이루어질 있는 개방된 장으로써 취급된다. 이러한 폴록이 갖는
공간 이념에 있어서 캔버스 위의 작업은 물감 이외에 모래, 석고, 유리에 금색
철망, 바늘, 조약돌, 조개껍질 등의 사용에서는 물리적인 힘을 억제시키고
이미지와 일체화 시키고 있다. 1947년과 1951 사이에 제작된 폴록의
흘리기 수법의 그림들이 어떤 공통된 일관성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우연은 아니다. 이것은 실제로 추상표현주의의 중요한 공헌 중의 하나이며
초현실주의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길게 풀려 엉클어진 실타래와 같은
폴록의 쏟아 붇기식 그림은 현대 회화의 방향을 변화시킨 많은 요소를 제공
하였는데, 전면 균질회화-외관상 시작도 끝도 없어 보이는 그의 회화 개념-
바로 캔버스의 한계로까지의 확장, 심지어는 너머로까지의 확장을 의미한다.
이것은 관찰자와는 떨어진 상태에서 하나의 독립된 단위로 보이게 하는
르네상스 회화이념에서 최종적인 단절을 시도한 개념이었다.
색채와 선들은 비록 화면 깊숙한 원근법적 구멍을 뚫지는 않지만 제한된 깊이
내에서 앞뒤로 굽이치고 파도치며 끊임없이 움직이는 듯한 환영을 창조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폴록은 르네상스의 전통과 폴록 이전의 현대 회화의 전통으로
부터 벗어난다.

폴록이 처음 등단하던 1940년대 당시 미술계에는 이미 웬만한 회화 기법은
거의 소개되어 있었다. 19세기 인상파 화가들은 점묘법을 1차대전 직전
독일의 일부 화가들은 표현주의를 애용했다.
러시아의 화가 카시미르 말레비치는 1918 캔버스 위에 흰색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화법을 내놓았으며, 20년대에는 몬드리안이 깔끔하고
단조로운 색상의 직사각형을 이용한 회화를 선보였다.
살바도르 달리는 30년대 초반 이후 세부 터치가 매끈한 초현실주의 화법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그러나 폴록은 이처럼 많은 화법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빈틈을 발견해 새로운 화법을 개발했다.
그는 캔버스에 물감을 똑똑 떨어 뜨리거나 들이붓는 드리핑 기법을 이용해
작품을 제작했다. 드리핑 기법으로 두각을 나타낸 폴록은 4751
스타일에 전념했다. 폴록이 놀라운 개혁가였다는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루벤스나 마네같은 거장의 작품에 견줄만한 시각적
쾌감을 찾을 있는가 하는 점은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의문으로 남아 있다.
폴록은 머리뿐 아니라 눈과 가슴으로도 감탄할 있는 대형 걸작을 적어도
여섯 남겼다. 'No. 32', '라벤더 미스트', '가을의 리듬'(모두 1950 )
탁월한 구성을 자랑하는 훌륭한 작품들이다. 가운데서도 호주에서 대여해
전시중인 드리핑 회화 '푸른 기둥들' (1952) 압권이다.
폴록이 주목받는 것은 그의 작품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미국 미술을 지방적
이고 세련되지 못한 리얼리즘과 나약하고 스케일이 작은 파리 모더니즘으로
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추상표현주의 운동을 전개했다. 폴록은 현대 미술의
중심지를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기는데 누구보다도 크게 공헌한 화가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Masqued Image, 1938~41*

*Stenographic Figure, 1942*

*Male and Female, 1942*

타이틀에서 암시하듯이 그림은 성을 주제로 하고 있다. 화면에는 남성과
여성을 나타내는 두개의 기둥이 대칭적으로 그려있다.
얼굴은 왼쪽이 여성적이고, 오른쪽은 남성적이다. 그러나 몸을 보게 되면
왼쪽이 남성적이고, 오른쪽이 여성적이다. 다시 말하면 여성과 남성이 대칭적
으로 서로에게 투영되어 있다. 이른바 양성의 공존이 보여지고 있는 것이다.

*The Moon-Woman, 1942*

일반적으로 해는 남성을, 달은 여성을 상징한다. 작품 속에 달과 여자를
한꺼번에 표현함은 그의 내면 속에 여성에 대한 이미지가 얼마나 많은지를
짐작하게 한다. 크래스너를 만나고 처음으로 알게 성적 도취감이 그의
작품 속에 충만하게 반영되었다.

*Blue (Moby Dick), 1943*

호앙 미로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그림은 자동기술법으로 그려진 것이다.
바다색으로 밑바탕을 채우고 안에 파도와 물고기를 연상시키는 그림은
무의식의 상태에서 그려진 것이며 작품이 완성된 후에 파랑이라는 주제로
결정된 것이다. 깊은 바다, 심연의 차분함이 느껴지는것 같다.

*No. 8*

물감을 캔버스에 떨어뜨리는 드롭핑 기법이 두드러져 보이는 작품은
전체를 이용해서 그리는 행위로 얻는 표현이다. 폴록은 자신이 그림을
완성시키는 행위 자체를 중요시 했으며 비록 무의식적인 표현이라
지라도 그의 앞에 완성되는 그림에는 자신의 혼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했다.
가로 길이가 2미터 가까이 되는 작품들은 당시 추상화가들에게 있어서
유행과도 같았던 대작 시리즈 중에 하나 일것이다.

*The She-Wolf, 1943*

오토마티즘(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형상을 그려내는 ) 이용하여 그려진
작품은 암이리의 이미지를 무의식의 상태에서 나타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암이리에 대해 강한 폴록의 어머니를 상징화 것이라
말하고 있다. 이는 일종의 마더콤플렉스로서 어린 시절 폴록에게 영향을
끼친 그의 어머니를 보게 하고 있다.

*파시파에, 1943*

파시파에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크레타 미노스의 아내이다.
자신 외에 다른 많은 여인들과 관계를 맺은 미노스를 독극물로 죽인 여인이다.
폴록은 자신의 작품에 많은 그리스 신화를 채용했는데, 이는 다른 추상화가들
처럼 폴록 또한 신지학과 신화에 매료되어 있었다. 하지만 파시파에를 염두에
두고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라 무의식 상태에서 그림을 그렸는데, 그린
후에 그것을 읽으며 해석에 따라 타이틀을 붙인 것이다.

*Eyes in the Heat, 1946*

멀리서 바라보면 그림 속에는 눈들이 숨어 있다. 소심하고 내성적이었던
그가 그리워하던 인격에 대한 바람을 눈들로 표현한 같다.
많은 눈들이 자신을 바라보아 주길 기대하며, 그리고 눈들 앞에서
두려워 하며 자신의 감정들을 느꼈겠다. 수많은 눈들이 자신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어떤 느낌이 들것인가?

*Shimmering Substance, 1946*

수많은 붓질로서 빛이 반사되어 반짝이는 모든 찰나의 순간을 표현했다.
빛에 반짝거리는 물체라 명명했지만 그림은 반짝임 자체 뿐이다.
자신이 믿고 있는 여자와 결혼하고 조금은 밝아진 그의 정서가 화사한
물감색으로 표현된 같다.

*The Key, 1946*

작품은 그려진 캔버스에 다시 그린 것으로 추정될 만큼 발색이
좋지않다. 묵직한 맛은 없지만 명쾌한 선의 흐름이 재미있는 작품이다.
앞의 작품 파시파에 보다 다소 복잡하고 일관성이 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부드러우면서도 꽉찬 구성이 다른 작품들과는 다르게 표현되어 있다.

*The Tea Cup, 1946*

그림을 보면서 쉽게 찻잔을 연상할 수는 없다. 폴록의 정신 분열은 물체에
대한 이미지를 일반적인 이미지가 아닌 새로운 색과 형태로 분해시켜
버리곤 한다. 찻잔이나 열쇠, 의자 가장 일반적인 생활속의 소품들이
그에게 있어서는 낯설고 생소한 인상으로 남을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인상에 대한 표현이 그가 추구한 추상 표현주의이다.

*Cathedral(대성당), 1947*

제목을 보지 않고 그림을 보면 어떤 이미지인지 찾을 없겠다.
하지만 "대성당"이라 씌여 있는 제목을 보면 흩어진 물감들의 수많은 선들
속에 왠지 모를 경건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모네의 루앙 성당에서
반사되는 찬란한 햇빛이 연상되기도 한다.

*Full Fathom Five, 1947*

여기서 말하는 "길"이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걷는" 길이 아니라 길이를
측정할 쓰는 것이란다. 보통 성인의 남자가 팔을 활짝 벌리고 있을
때의 양팔 길이 정도라고 한다.(1.8 m 정도) 세로 길이 130센티미터도
되는 작품이지만 속에서 다섯 길이나 되는 길이를 담고 싶어하는 같다.
다섯 길이란 것도 무언가 완벽하게 표현하고 싶은 폴록만의 "길이"
것이다.

*Fathom Five D*

*노랑, 회색, 1948*

노랑, 회색, 검정... 안되는 색으로 완성한 작품은 동일하게 액션 페인팅으로
그려진 것이다. 과감한 선의 터치와 색이 자유로운 폴록의 감정을 대변하는
하다.

*Lavender Mist: Number 1, 1950, 1950*

폴록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차가운 대리석을 연상시키는 작품 또한 가로
길이 2미터 50 넘는 대작이다. 군데군데 별처럼 느껴지는 흰색 물감의
드로핑 또한 이채롭다.

*푸른 깃대, 1953*

과감한 붉은 색이 그림 복판을 가로지르는 작품은 비교적 따뜻한
추상이다. 푸른색이 두드러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푸른 깃대라 명명한 것은
작품을 완성하면서 느껴졌던 폴록의 정서를 표현한 것이다.

*Ocean Greyness, 1953>

폴록은 말년에 대상을 지향하는 작품 활동을 했다. 그것을 혹자는 말년의
슬픔이라 말하기도 하지만, 전통적인 회화로의 복귀로 그의 작품에 또다른
시도를 이룬 것이라 생각된다. 크고 힘있는 형상들 에게서 폴록의 에너지가
느껴진다.

* Easter and the Totem, 1953*

정신 분열을 앓고 있던 그의 불안한 정서는 신비롭고 마법적인 것을
찾고 있었다. 기독교에서 가장 희망적인 부활절과 특별한 힘을 가지고
특정 집단을 보호해주는 자연물을 함께 표현하였다.
이는 폴록의 분열된 정신 세계가 바라고 있는 희망과 보호받고 싶은 본능의
표현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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