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표현주의(表現主義, Expressionism)
Self-portrait, 1925/Ernst Ludwig Kirchner
20세기 초 독일에서는 불안, 긴장, 노이로제가 고조되어 있었다. 독일문화의 중심부에서
시작된 표현주의(表現主義:Expressionism) 운동은 현대를 사는 인간의 고통
과 좌절감을 드러내면서 유럽 전역으로 빠르게 확산되어 갔다.
표현주의 회화는 세계를 대하는 자아의 내면 상태에 대한 주관적 표현이다. 그것은 세계와
부조화를 이루는 자아가 갖는 긴장과 불안의 정서에 기반한다. 이러한 상태는 작품 속에서
도시의 풍경과 자연 속의 인간 등의 소재로 억압의 상황과 해방의 소망으로 연결되어 강렬
한 색채 대비와 형태 왜곡을 통해 표현되거나, 특정한 소재의 분석을 통해 내부의 구조를
표현함으로서 질서를 찾고자하는 형식으로 드러난다. 표현주의 예술가들의 정신적 출발점
은 세계 제1차 대전과 그 전쟁 와중에 생긴 주변 세계에 대한 공포를 들 수 있다.
그들은 자기 고백적으로 극단적인 주관적 감성세계를 극단적인 상황으로 표현하고 있다.
세계 제1차 대전 이전과 대전 당시의 표현주의 세대가 겼었던 내면적인 불안함을 주제뿐만
아니라 그림 기법에서도 찾을 수 있다. 또한 전쟁으로 인해 고정된 사회규범을 파괴하고
모든 형태의 억압으로 해방되고자 했으며 인습의 속박으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 내길
원했다. 시간과 거리에 대한 감각의 변화로 1900년대 지하철의 발명,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최초의 대서양 횡단 비행, 일상생활에서 전화 사용 등으로 사회는 항상 움직이고 있거
나 더 빨리 이동하고 있었다. 이같은 빠르게 변해가는 사회의 흐름속에서 사람들은 불안과
혼란스러움을 느꼈을 것이다. 빠른 과학이나 기술의 발전 등 빠르게 진행되는 학문적인
혁신으로 인간의 무능력과 무가치함을 깨닫게 되었다. 세계의 중심에 있다고 생각했던
인간에 대한 회의가 들기 시작했고, 고향 상실, 개성 포기, 세계에 대한 신뢰관계 파괴 등의
감정을 표현주의자들은 느꼈을 것이다. 1902년 프로이드가 인간의 무의식 세계에 대한
연구인 <꿈의 해석>을 출판함으로써 눈에 보이는 현실을 뛰어넘어 작가 자신의 내면적이고
사색적인 영역으로 의식을 전환시켰다. 표현주의는 비단 시각예술에 한정되지 않고 문학,
연극, 영화에서도 형성되었다.
독일 표현주의 회화에는 세 그룹이 있다. 첫 번째 공식 표현주의 그룹이었던 '다리파
(Die Brucke브뤼케:橋)'는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Ernst Ludwig Kirchner)에
의해 1905년경 드레스덴(Dresden)에서 결성되었다.
키르히너, 에리히 헤켈(Erich Heckel), 카를 슈미트-로틀루프(Karl Schmidt-Rottluff) 외
에 1906년에는 막스 페히슈타인(Max Pechstein)도 가입하고 에밀 놀데(Emil Nolde)가
참여함으로써 그룹의 규모는 더 커졌다. 그러나 에밀 놀데는 1년 동안 그룹에 가담했지만
본질적으로 고독한 기질의 그는 그룹이나 협회에 참여하기를 꺼려했다. 브뤼케 그룹의 멤버
들은 강한 사명감을 가진 청년들로서 당대의 원대한 사회적 열망에 고취되어 있었던 그들은
회화를 수단으로 인류를 위해 보다 나은 미래를 추구해 나가려고 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혁명적인 엘리트로 여겼으며 호라티우스의 '세속적인 인간에 대한 증오 Odi profanum
vulgus'를 신조로 삼아 도전적인 반부르주아적 태도를 취했다. 브뤼케라는 명칭은 슈미트-
로틀루프가 채택한 것으로 그룹을 하나로 묶는 유대를 상징한다. 나중에는 이 명칭에 좀더
심오한 의미가 부여되어 자신들의 작품이 미래의 미술로 이어지는 '다리' 역할을 할 수 있게
되기를 열망하는 그들의 신념을 나타냈다. 이 그룹은 독일 현대 회화의 출발점을 이루었고
프랑스의 포비슴과 북유럽의 뭉크에 고취되었다. 다리파의 특징은 고통스러워 보이는 선과
캐리커처처럼 왜곡된 형상, 거칠고 감정적으로 격앙된 색채였다.
다리파는 1911년 드레스덴에서 베를린으로 옮겨갔고 1913년 해체되었다.
이후 구성원들은 모두 독자적인 경향을 추구해 나갔다.
브뤼케 그룹은 종종 같은 시기 프랑스에서 일어난 야수주의 운동에 상응하는 독일의 미술
운동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야수주의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브뤼케 그룹 화가들도 모티프
를 자연에서 직접 취하고 추상에 반대했다. 그러나 프랑스 화가들이 늘 회화적 의도를 가장
주요시 했던 것에 비해 독일 화가들은 주제에 임하는 화가의 강렬한 감정을 표현하는 데
더욱 주력했다. 그들은 이런 태도를 삶의 가장 내밀한 본질로 여겼으며 이를 위해 야수주의
화가들보다 더욱 더 왜곡되고 거친 표현을 추구했다. 독일 표현주의는 본능적이고 자발적
이며 주관적인 것에 역점을 두었으며,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라틴 민족의 고전적인 절제
감각은 결여되어 있었다. 결국 브뤼케 그룹의 화가들은 야수주의 화가들에 뒤떨어지는 결과
를 낳았다.
두 번째 그룹은 1910년 베를린에서 헤르바르트 바르덴이 창간한 예술잡지 《Der Sturm
슈투름(폭풍우)》 및 같은 이름의 화랑(畵廊)에 의하여 만들어진 '슈투름그룹'으로
오스트리아의 화가 오스카 코코슈카(Oskar Kokoshka)의 자아와 외계의 상극을 새긴 심리
적 초상화로 대표된다. 바르덴은 자기 나라의 젊은 전위화가(前衛畵家)를 화랑에 결집시켰
을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의 미래파, 초기의 프랑스 큐비스트에게도 문호를 개방하였고, 잡지
에는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와 마르크
세 번째로는 칸딘스키, 마르크를 중심으로 1911년 뮌헨의 신예술가 동맹으로부터 갈라져
나와 결성한 '청기사(Der Blaue Reiter:靑騎士)'그룹이다. 독일 표현주의가
주도하는 흐름 속에서 뮌헨의 화가들은 '청기사'라는 잡지를 중심으로 그룹을 결성했다.
이들은 베를린의 전위파 미술가들이나 키르히너와 강한 대조를 이루었다. 칸딘스키가 공동
창설자로 참여했던 청기사파는 무엇보다도 색채에 기초한 운동이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
그룹과 마티스, 야수파, 들로네, 클레(Paul Klee)는 긴밀한 유사성을 갖고 있다.
이미 추상미술로 가고 있던 칸딘스키 외에 프란츠 마르크, 아우구스트 마케(August Macke)
그리고 알렉세이 폰 아블랜스키가 참여했다. 동물을 매우 좋아한 마르크는 말에서 운동의
명칭을 따올 것을 희망했으나 칸딘스키는 기사를 고집했다. 하지만 파랑이라는 단어의 선택
에는 둘 다 동의했다. 두 미술가 모두가 파랑색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이론가인 칸딘스키는
논문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을 발표하여 유물론과 리얼리즘에 지배당하고 있는 미술에
반기를 들었으며, 화가의 내적필연(內的必然)에서 우러나는 정신성, 환상성을 주장하였다.
그의 제작과 더불어 마르크, 클레 등의 형태의 분석, 종합의 시도는 '청기사파'가 지향하는
현대 추상회화의 중요한 주류의 하나로서 주목된다.
★ 에른스트 키르히너(Ernst Ludwig Kirchner:1880~1938) ★
Self-Portrait, 1914
독일 바이에른주 아샤펜베르크 출생으로 1901∼1905년 드레스덴의 공업전문대학
에서 건축을 배우면서, 그 사이 뮌헨의 미술학교에서 H.오프리스트에게 사사하여 회화를
배웠다. 드레스덴에서는 E. 헤켈과 사귀었고, K.S. 로틀루프와 F. 브라이엘(Fritz Bleyl)
등과 함께 그룹 '브뤼케'를 창설, 화려한 표현주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키르히너가 초기 목판화 작품에서 보여준 독일판 아르누보인 유겐트슈틸(Jugendstil)의
양식화된 선은 곧 가파른 각진 형태로 바뀌었는데, 이런 특성들은 그가 높이 평가한 독일
후기 고딕의 목판에서 끌어온 것으로 브뤼케 그룹의 양식적 특성이 되었다.
키르히너는 뮌헨에서 열린 전시회에서 본 후기 인상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았으며, 특히
고갱과 반 고흐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주로 뭉크의 영향을 받아 단순화된 드로잉과
과감한 대조를 보이는 색채를 사용하면서 야수주의자들의 작품과 유사한 방식을 발전
시켰다. 1907~10년까지 '야수들의 왕' 앙리 마티스와 그의 동료들이 1905년에 도달한
양식과 표면적으로는 유사한 회화양식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키르히너는 야수주의보다 더
충동적이고 직접적인 태도로 주제에 접근했으며, 회화적 가치는 그다지 고려하지 않았다.
그는 야수주의보다 더욱 주제에 몰두했는데, 도시 풍경의 인간적 파편들 속에서 섹슈얼리
티의 뉘앙스를 가지고 서커스와 뮤직홀의 생활에서 뽑아낸 감성과, 유쾌함, 슬픔을 물감
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키르히너는 1911년 베를린으로 이주했고, 1912년과 1913년에는 독일 표현주의의 가장
극단적이고 가장 성숙된 표현으로 여겨지는 거리풍경 연작을 제작했다.
그는 더 격렬해진 양식으로, 속도와 병적인 우울함과 화려함,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직전
베를린의 쿠어퓌르스텐담 거리에서 재현되었던 대도시인들의 자기 노출적 에로티시즘을
시각적으로 표현했다. 이 시기에 그는 정신적으로 위기를 맞았으며, 전쟁에 징집된 직후인
1914년 심각한 육체적 정신적 쇠약 상태를 겪었다. 요양소에서 얼마 동안 머문 후 1917년
스위스의 다보스 근처의 산중에서 고독하게 살면서 그림을 그렸고, 독일의 정치적 사건들과
그 자신의 작품에 가해진 비난으로 인해 정신적 불안을 겪었으며, 1938년 자살하기 전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1928년부터 키르히너의 양식은 변화를 겪는데, 직접적으로 자연을 그리
던 과거 작품에 비해 더 추상적으로 변했다. 이는 일종의 그림-문자로서 그의 '상형 문자적'
형상들을 이용하여 그린 것으로, 직접적인 재현이 차지하는 부분이 감소되었다.
그는 말했다. "이 가시 세계의 내적 이미지를 비자연주의적인 형태를 통해 만들어낸 '상형
문자'는 시각적 법칙에 따라 형태를 취하게 되고, 그 형태의 경계가 넓어지기도 한다.
이 시각적 법칙은 이제까지의 미술에서는 사용된 적이 없었던 것으로, 예를 들어 반영의
법칙, 간섭과 분극화의 법칙 등이 그것이다." 이런 생각은 1912년에 칸딘스키에 의해
표명된 이론과 공통점이 있다. 그는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의 새로운 방식은 경험의 시각적
표현을 위해 일종의 추상적인 그림문자를 써 넣은 피카소의 실험적 아이디어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Street Dresden, 1908
당시 급속히 발전하고 있던 물질 문명에 반발하여 자연과 인간에로의 회귀를 주장하던
키르히너의 가치관이 잘 표현된 작품이다. 줄지어서 한 곳을 향하고 있는 사람들, 희망이
나 기쁨은 찾아볼 수 없는 표정의 사람들, 강렬한 원색과 강한 붓의 터치로 드레스덴 거리
의 무겁고 갑갑한 공기를 느끼게 하고 있다.
방 안의 누드들, 1909
모든 화가들의 스승인 세잔의 <대수욕도>를 연상시키는 작품이다.
원시 자연으로의 회귀를 갈망하던 키르히너는 여성들의 누드를 그리면서도 여성미를 그려
내기 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꾸미지 않고 표현하고자 했다. 가식이나 허영이 아닌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 것이다.
Japanese Theatre, 1909
이 작품은 키르히너가 첫 번째로 그린 무대 공연의 장면이다. 드레스덴의 알버트 극장에서
일본 배우들이 공연하고 있는 장면이다. 당시 브뤼케 작가들 사이에는 극장이나 카바레의
공연 장면이 인기있는 그림의 소재였다. 1908년 12월 키르히너는 마티스의 전시회를
보았다. 이 그림은 마티스의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Girl Under a Japanese Parasol, 1909
당시 독일을 포함한 유럽은 일본의 문화가 유행이었다. 새로운 동양 문화에 매혹되기 시작
했던 유럽의 사람들의 그림에는 일본 의상이나 부채, 양산 등이 등장하였고, 그림 자체도
일본 판화와 같은 평면적 느낌을 주는 것이 많았다. 또한 양산 아래 소녀는 키르히너의
여느 누드처럼 꾸밈없이 자연스러운 여성의 모습이다.
Panama Girls, 1910
Self-Portrait with Model, 1910/1926
키르히너는 1906년에서 1911년까지 연인 도리스와 함께 있었다. 그동안 그녀는 그의
모델이 되어 주기도 하고, 사랑을 나누어 주기도 하고, 경제적으로 궁핍한 그를 먹여 살리
기까지 했다. 그러나 키르히너는 더 이상 자신의 연인에게 의지하면서 살 수는 없다고
생각했고, 동료들과 함께 베를린으로 떠났다. 그가 사랑했던 모델 도리스를 떠나 다른
모델을 앞에 세워놓고 그림을 그리고 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을 충족시키지는 못했나
보다. 모델을 뒤켠에 몰아 놓고 오히려 화면의 반을 차지하고 있는 그의 모습 속에는
자신이 버린 옛사랑의 그리움이 남아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Portrait of a Woman, 1911
모자를 쓴 여성 누드, 1911
모자 챙의 선과 반쯤 벗고 있는 옷의 윗 선이 균형있는 조화를 만들고 있다.
축 쳐진 가슴이나 어깨의 선도 일반적으로 아름답다고 할 수 있는 여인의 모습은 아니지만
옷을 반만 벗고 있기에 생길 수 있는 어색함 조차 무색케 하는 이 여인의 당당함은 키르히너
가 가장 사랑한 이유 중 하나다.
Zirkusreiterin(Circus), 1912
Woman at the Mirror, 1912
Three Bathers, 1913
Street, Berlin, 1913
Woman in a Green Blouse, 1913
View from the Window, 1914
Two Women in the Street, 1914
톱니 같은 선들, 화려한 색감, 거칠면서도 투박해 보이는 붓 터치로 다리파 화가, 그들은
원시미술의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에 닿으려 했다. 그러나 그의 그림을 보면 자연스러운
평안과는 멀어보인다. 현대 사회에의 저항을 키치로 하고 있는 그들이었으나 그들 또한
현대 사회의 병폐인 우울과 불안, 절망을 완전히 벗어나 있는 것 같지는 않다.
Gerda, Half-Length Portrait(Frauenkopf, Gerda), 1914
거리의 여인, 1915
어두운 코트, 뾰족한 구두와 옷깃, 콧날이 무표정한 사람들의 얼굴과 함께 삭막한 느낌을
주고 있다. 그 삭막함은 당시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독일의 산업화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자연을 떠난 도시화는 인간들에게 고독감만 안겨주는 것 같다.
Circus Rider, 1914
Self-Portrait as Soldier, 1915
키르히너는 다리파 운동을 주도했던 화가로, 다리파 멤버 중에서 가장 열정적이고 재능이
있었다. 그도 동시대의 많은 화가들이 그랬던것처럼 원시미술에 열광했던 화가였다.
그와 다리파 화가들은 1909년~10년 사이 기간동안 농촌에 내려가 공동생활을 하기도
했는데, 그것은 일부러 가난한 생활을 함으로써 원시성에 접근하고자 했던 노력이었다.
1914년에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키르히너는 군인으로 참전한다.
전쟁이 그에게 남겨준 것은 어떤 정의나 진실도 아니고 신체적, 정신적 상처뿐이었다.
그의 자화상에서 군복을 입고 있는 키르히너는 여전히 화가로 나타난다.
뒤에 모델이 보인다. 키르히너는 담배를 꼬나 문 냉소적인 표정에 한쪽 손이 없는 불구로
그려졌다. 그는 이렇게 상처받고 고독한 인간의 모습으로 자신의 자화상을 그리고 있다.
전쟁은 키르히너에게만 상처를 안겨준 것은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대량 학살의 장면을
목도하고 전쟁의 피해를 입게 되었다. 1차 대전 이후 서구인들은 서구문명에 대한 비관적
인 시각을 강화하게 된다. 즉, 산업 사회의 발달이 반드시 행복한 미래를 약속하지는 않는
다는 생각이 팽배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종전 이후 서구의 전통을 부인하고 원시적인 것
을 추구하는 일련의 표현주의 미술운동들이 전과 달리 상당한 대중적 호응을 얻게 되었다.
Artillerymen, 1915
Mountain Life, The Early Years in Davos, 1917-1926
Pink Roses, 1918
Drei Kunstler: Hermann Scherer, Kirchner, Paul Camenisch, 1926
A Group of Artists: Otto Mueller, Kirchner, Heckel, Schmidt-Rottluff, 1926-27
함께 원시적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현대 사회의 병폐를 거부하고자 했던 예술가들의 모임
이다. 오토 뮐러, 키르히너, 헤켈, 슈미트 등 드레스덴에서 건축을 공부하던 이들 네 명이
1905년 처음으로 다리파를 결성했다. 새로운 문화와 이상에의 다리가 되고자 했던 그네
들이었으나 결국 자신들도 그 다리를 완전히 건너지는 못했던 것 같다.
Franzi in front of Carved Chair, 1910
★ 에밀 놀데(Emil Nolde:1867~1956) ★
Pentecost(오순절), 1909
독일의 화가이자 판화가인 에밀 놀데는 슐레스비히 출생이다.
물감의 두터운 마티에르로 음울한 느낌을 주는 인물을 주로 그렸다.
놀데는 젊은 시절 목각공예를 습득하고, 한때 베를린에서 가구와 장식 미술가로 일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1906년에 다리파에 가입해 그 다음해 탈퇴하여 자신만의 독자적
인 길을 나아갔다. 물감을 두껍게 칠하여 부조화스러운 강력한 색대비를 만드는 채색법을
사용하며 종교화를 부흥하고자 하는 시도를 하였다. 브뤼케 그룹 시절 얻은 목판화의
제작 방법은 그림에까지 감정표현 그것도 현실 사회를 넘어선 종교적 감정표현으로 이색적
인 종교적 표현주의 회화를 구현해 나갔다. 몹시 투박한 자세와 단순화된 묘사를 좁은
공간에 밀집하여 놓여져 있는 인물들은 농민들의 순박하고 열정적인 믿음을 전달해 준다.
에밀 놀데는 저서 '원시인의 예술적 표현' 에서 원시작품들의 절대적인 원초성, 가장 단순한
형식으로 환원하는 삶과 힘에 대한 강렬한 때로는 그로테스크한 표현을 적고 있다.
이처럼 인간 정서에 근본이 되는 원초적이며 순수한 표현이 바로 놀데가 추구하는 것이었다.
놀데의 작품 중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1909년부터 제작되기 시작한 약 20여 점이 넘는
종교적인 주제의 작품이다. 그의 종교화는 전통적인 기독교 도상을 과감히 탈피해 표현주의
자다운 화면을 구성하게 된다. 그는 사실적이면서도 무게 있는 그림으로 앙소르, 루오, 고갱
과 더불어 현대회화사에서 손꼽히는 종교 화가로 불리우게 된다.
1909년에 그린 <오순절五旬節>에서 그는 그리스도를 한 북부 독일의 건장한 농민과 같은
모습으로 재현하고 있다. 그를 둘러싼 사람들도 신앙의 깊은 체험을 함께 나누며 그 자리를
메우고 있다. 또한 사람들의 눈은 크고 선명히 그려지고 있다. 서구미술에서 전통적으로
눈은 마음과 정신의 상징으로서 정신성을 강조할 때는 눈을 크게 그리는데, 이 방식이 여기
에서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놀데는 1913년에서 다음해에 걸쳐 오세아니아의 여러 섬을 순례하면서 원시 토속문화를
직접 체험하게 된다. 1914년의 [무희 그림이 있는 정물]에 나오는 무희는 그 여행 때에
어디선가 원주민의 춤을 보고 급하게 화구 상자에 스케치했던 것을 뒤에 다른 정물과 조화
시키면서 다시 작품화한 것이다. 흡사 정신이상자로까지 보이는 이 열광적인 여인들은
붉은 머리와 반라의 옷차림에서 더욱 생생한 운동감이 느껴진다.
1915년부터는 어두운 색조로 바다, 육지, 구름, 광막한 풍경 등을 주로 그렸다.
Flower Garden (Girl and Washing), 1908
The Mocking of Christ, 1909
Wildly Dancing Children, 1909
Autumn Sea VII, 1910
Dance Around the Golden Calf, 1910
At the Cafe, 1911
Mask Still Life III, 1911
Candle Dancers, 1912
Child and Large Bird, 1912
Crucifixion, 1912
Legend: Saint Mary of Egypt - Death in the Desert, 1912
Excited People, 1913
Die Zinsmunze, 1915
Women and a Pierrot, 1917
Red Clouds, 1930/Watercolor
Sunflowers,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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