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미술사 참고자료/후기인상주의

서양미술사39 후기인상주의: 고갱

AH101 2012. 2. 16.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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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lf-portrait with Palette, 1894


★ 폴 고갱(Paul Gauguin: 1848~1903) ★


폴 고갱(Paul Gauguin:1848~1903)은 1848년 2월 혁명의
여파로 소란하던 파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공화주의자 저널리스트로서
당시 열심히 문필을 휘들렀지만 3년 후 나폴레옹 3세가 쿠데타로 등장하자
고국을 버리고 가족과 함께 남미로 향했는데 도중에 배 위에서 세상을 떠났다.
고갱은 그대로 4년 동안 페루의 리마에 머물렀으며 소년 시절의 이 이국 생활이
나중에 남태평양의 섬에 대한 동경을 키웠는지도 모른다.
1865년, 열일곱 살 때 고갱은 하급 선원이 되었고 대서양 항로의 무역선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몇 년 후 선원을 그만두고 파리의 금융회사 베르당 상회에서
일하게 되었다. 취직하고 2년 후 그는 거리에서 알게 된 덴마크 여인 소피와
결혼하고 차례차례 다섯 아이를 낳았다. 그대로 계속 되었더라면 그의 생애는
안정 되고 평범한 시민의 생애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겉으로는 차분한
회사원이었던 고갱의 마음속에 언제부터인가 '회화의 악마'가 살고 있었다.
1883년 그는 마침내 회사를 그만두고 화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때 이후로 그의 생활은 모두 예술에 바쳐지게 되었다. 선배인 인상파 화가들
의 작품마저 사람들이 아직 거들떠보지 않던 시대에 그것보다 더욱 새로운
고갱의 그림이 팔릴 리가 없었다. 그의 생활은 금세 가난해졌고, 아내는 화가
나서 네덜란드로 가버렸다. 그가 브르타뉴의 시골로 옮겨가고 마침내 타히티
까지 건너가려 한 것도 생활에 쫓겨서 가능한 한 생활비가 싼 곳을 찾기 위한 것
이기도 했다. 그리고 1891년 이후 타히티에서 2년 정도 살다가 1893년 일단
고국으로 돌아오지만 다시 타히티로 갔고, 유럽의 문명 세계로부터 멀리 떨어진
그것에서 마침내 예술의 역사를 크게 바꾸게 된 뛰어난 명작을 차례차례 만들어
갔다. 폴 고갱은 후기인상주의 화가 중 고흐와 함께 인간의 내면세계에 관심을
기울인 화가였다. 그는 잘 알려진 대로 늦은 나이에 거의 독학으로 화가의 길로
들어서 영국의 소설가 섬머셋 모옴이 그의 삶을 소재로 [달과 6펜스]라는 소설을
엮어 낼 만큼 파란만장한 인생을 영위한 작가이다. 고갱은 인간의 내면 중 종교적
인 것, 장식적인 것을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 기법면에서는 인상주의의 극복이라
는 의미에서 원색의 면에 검은 테두리를 쌓아 구획주의를 추구했다.
또한 대담한 변형과 왜곡, 강렬한 원색의 사용 등으로 장식적 효과를 냈으며,
이로서 화면의 평면화를 시도한다.

모험과 순수성을 추구한 고갱은 인상주의자들과 전혀 다른 관점에서 파리를
보았다. 고갱에게 파리는 탈출하고픈 숨막히는 감옥이었다. 1885년 고갱은
브르타뉴의 외딴 마을에서 자신의 첫 번째 주요 작품을 그렸다. 그는 인상주의자
들의 매혹적인 광신과 부드러운 색채를 거부하고 단순한 형태와 강렬한 색채를
사용하여 "묘사보다는 암시"를 의도했다. 1888년 고갱은 고흐와 아를에 머물렀
지만 이 불행한 이 두 후기인상주의 화가들의 우정은 금방 끝나버렸다.
고갱은 브르타뉴의 퐁다벵(Pont-Aven)으로 돌아갔고, 다시 그곳에서 보다 순수
하고 직접적인 것을 찾아서 타히티로 떠났다. 타히티에서 고갱은 근대 사회로부터
완전히 단절되었다. 근대 사회에는 더 이상 상상력의 여지가 없다고 믿었던 것
이다. 그는 남태평양의 한 섬인 타히티로 옮겨가면서 기독교와 원시적 토속 신앙의
결합이라는 특이한 예술 세계를 구축한다. 타히티에 전기가 들어오자 고갱은
마르케사스 섬으로 피신했고 그곳에서 주술사와 선교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임종을
맞이했다.

Nude Study, or Suzanne Sewing, 1880

고갱은 일요화가(日曜畵家)로서 코로나 쿠르베의 영향에 의한 그림을 그리다가
1874년 피사로와 만나 차츰 당시의 파리 화단에 물결치고 있던 인상파(印象派)
의 화론(畵論)에 공감하여 갔다. 이 작품은 1881년 제6회 인상파전(印象派展)
에 출품되었는데 그때 유이스만스의 격찬을 받아 하나의 일요화가에 지나지
않던 고갱의 이름을 크게 높이는데 성공한 그림이다. 유이스만스는 '조금 부풀은
듯한 허벅지에 이어져 있는 하복부나 그늘진 으슥하게 된 둥근 유방 아래의 잔
주름, 다소 메마른 무릎의 관절이나, 손목의 볼록한 부분 등은 얼마나 많은 진실
이 담겨져 있는 것이겠느냐'라고 했지만 확실히 여기에는 알몸 그 자체에 접근
하려는 일종의 생생한 욕구가 느껴진다. 그림의 모델은 고갱 집의 가정부로서
젊을 때엔 들라크루아의 모델을 한 적도 있었다.

캔버스 앞의 自畵像, 1884

고갱이 안정된 직업을 버리고 화가로서의 길을 택하여 전적으로 화업에 투신함
으로써 생활의 형편은 절망적이었다. 1884년 11월 그는 가족과 함께 부인 메트의
고장인 코펜하겐으로 옮겼으나 사태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이 작품은 코펜
하겐에 체재하고 있을 때 그린 것이다. 메트가 불어 레슨(佛語講習)을 하기 위하여
거실을 쓰고 있었으므로 그는 지붕밑 다락방을 아틀리에로 쓰면서 틈틈히 제작
에 몰두했다. 그가 회화라는 것은 외계의 재현이 아니라 내적 세계를 조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슈프네케르란 사람에게 써 보낸 것은 1885년
5월의 일이었으나, 이 작품은 그러한 그의 정신과 회화관을 생생하게 나타내고
있다. 어둡게 침잠된 색조 속에 화가는 자기 자신의 내면을 응시(凝視)하고 있다.
고흐나 고갱이 함께 많은 자화상을 남기고 있는 것은 대상의 응시(凝視)가 자기
응시에 밀접하게 연결된다는 그들 공통의 지향에 원인한 것이었다.

Still Life with Profile of Laval, 1886

Blue Trees, 1888

The Vision After the Sermon(Jacob Wrestling with the Angel), 1888

(설교후의 환영 혹은 야곱과 천사와의 싸움)

고갱이 브르타뉴 시기에 제작한 이 작품은 *<종합주의>(모든 것을 터치로 그리고
마침내 점으로 분해하려고 한 인상파의 분할주의에 대해, 형태를 하나의 큰 덩어리
로 파악하려한 고갱의 수법)라고 알려진 양식을 잘 보여주는 본보기이다.
이 작품은 당시 고갱이 살고 있던 프랑스의 브르타뉴 지방을 무대로 그곳 사람들이
설교 때 들은 '구약성서'속의 야곱과 천사의 싸움의 환영을 본다는 주제의 작품이다.
브르타뉴 지방의 민속의상을 입은 여자들이라는 현실적인 요소와 성서 속의 이야기
인 투쟁의 정경이라는 비현실적 요소가 수난의 핏빛을 연상시키는 강렬한 빨간 배경
에 의해 하나로 연결되어, 보는 사람에게 단지 색의 배합이나 구도의 교묘함에서
느껴지는 것과는 다른 이상한 신비적 인상을 준다. <황색 그리스도>, <이아 오라
나 마리아> 등과 함께 고갱의 종교적 환상 회화에 속하는 작품이다.

*종합주의(Synthetisme) - 19세기 말 프랑스의 회화운동, 또는 그
양식의 하나. 1889년 파리의 카페 보르피니에서 <인상주의 및 종합주의> 전람회
를 E.H.P.고갱 등이 개최한 것이 그 최초의 운동이다. 고갱은 인상주의가 해체한
색채의 단편(斷片)을 강력한 윤곽선으로 둘러싸인 넓은 공간으로 종합하고, 화가의
주체성에 바탕을 둔 형태나 색채를 회복하려 하였다. 이를 이은 나비파는 종합주의
를 명확한 슬로건으로 내걸고 예술작품은 눈(감각기관)의 소산이 아니라 마음(상상
력)의 소산이어야 함을 주장하였다. 대상(對象)의 데포르마시옹과 평탄한 색면의
장식적인 구성이 특징인 종합주의는 아르누보를 거쳐 반인상주의적인 20세기
회화의 저류(底流)를 이루고 있다.

The Swineherd, Brittany, 1888

Les Miserables, 1888

Van Gogh Painting Sunflowers, 1888

Portrait of Madeline Bernard(The Sister of the Artist Emile Bernard), 1888

La Belle Angele, 1889

이 작품은 1888년 고갱이 브르타뉴 지방의 퐁다벵에 체류할 때 교분을 가졌던
젊은 부인의 초상이다. 브르타뉴의 퐁다벵에 머물렀던 동안 사트르라는 부부
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던 고갱은 감사의 뜻으로 부인 앙젤(Mme. Satre)의 초상
을 선물하였다. 그러나 이 작품을 받은 사트르 부부는 탐탁해 하지 않았고 결국
그림은 고갱에게 되돌아왔다. 후에 드가는 이 작품의 조형적 가치를 알아보고 이
그림을 450프랑에 구입하였다. 그림 속의 그림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독특한
이 그림은 고갱이 생애 마지막 3년 동안 이루어 놓았던 모든 조형적 특징들을
집약하여 보여준다. 꽃무늬가 그려진 배경을 뒤로 후광처럼 보이는 원 속에 마치
여인이 갇혀 있는 듯 보인다. 후광 뿐만 아니라 그녀의 이름 역시 중세의 이콘화
에서처럼 화면 하단에 쓰여 있다. 후광처럼 보이는 원 그리고 원시 조각을 중심
으로 상, 하 수평으로 나뉘어진 화면, 공간은 이렇게 잘라지고 구획 지어졌다.
그러나 다른 한편 원과 원시 조각 두 모티프는 화면을 분할하는 동시에 장식적인
배경 속에 자연스럽게 융화되고 있다. 구획 지어진 원과 캔버스의 사각형이 이루어
내는 시각적인 조응, 장식적인 배경과 모티프의 자연스러운 융합, 이 모든 요소들
은 공간의 깊이감을 차단시키고 장식성과 평면성을 강조하고 있다.
초상화임에도 불구하고 사실적인 재현보다는 감정적이고 정신적인 가치를 중요시
한 고갱의 회화 세계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Schuffnecker's Studio(The Schuffnecker Family), 1889

<슈프네케르 가족>으로도 알려져 있는 이 작품에서 고갱은 친구이자 화가였던
에밀 슈프네케르의 아틀리에와 가족을 그리고 있다. 에밀 슈프네케르 역시 고갱과
마찬가지로 증권 거래소를 그만 두고 어렵게 생계를 이어가며 그림을 그렸다.
1888년 12월 고갱은 반 고흐와 함께 지낸 두 달간의 아를 생활을 정리하고 파리
로 돌아왔다. 고갱은 파리에 돌아와 친구 에밀의 집에서 신세를 지고 있었는데,
이 작품은 그 무렵에 그려진 것이다. 고갱은 캔버스가 자리한 화가의 아틀리에를
배경으로 하여 에밀의 부인과 두 딸을 화폭에 담았다. 고갱은 노란 색 바닥과
푸른 색 벽면, 두 딸의 옷에서 사실적인 색상이 아니라 자신의 주관적인 감정이
담겨진 강렬한 색채를 사용하였다. 이 작품에서 고갱이 선택한 생생한 색채들은
그가 남프랑스 아를에서 탐구했던 것을 반영하는 것이다. 화가 앞에 놓여진 이젤,
그리고 화면 오른쪽 벽에 붙여진 그림들을 통해 이곳이 아틀리에임을 알려준다.

1888년 8월 고갱은 브르타뉴에서 파리에 있는 에밀 슈프네케르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써보냈다. "한 가지 조언을 하고 싶어. 너무 충실하게 자연을 모사
해서는 안돼. 예술이란 하나의 추상이야. 자연을 앞에 두고 꿈을 꿈으로써 자연
으로부터 추상을 끌어내게. 그리고 결과보다도 창조 행위 쪽에 한층 생각을
모으게. 바로 그것이 조물주가 했던 것과 같은 방식이며, 즉 창조에 의해 신의
세계에까지 올라가는 단 하나의 길이라네..."

The Yellow Christ(황색 그리스도), 1889

이 작품은 고갱이 타히티에 건너가기 이전의 최고 걸작으로 지목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그려진 그리스도 상은 퐁다벵에 가까운 트레마로의 교회당에 있었던
것이다. 원경에 보이는 것은 퐁다벵 마을과 생마르그리트의 언덕일 것이다.
세 사람의 부르타뉴 여인도, 십자가도, 붉은 색 나무들도, 모두 하나의 상징적
풍경의 요소로 화하고 있다. 야성이 가득하고 자만에 부푼 그가 이 작품에 임하면
서 경건한 마음으로, 견고하게 화면을 구축한 느낌이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
비친 어떤 화재(畵材)도 그가 나타내려는 의도대로 변형되고 추상화 되어 버린다.
옥타브 미르보는 여기에 그려진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 그리스도의 우울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그 얼굴에는 무서운 슬픔이 있다.' 라고 말하고 있다.
이 무렵의 그의 심정이 바로 그랬으리라 짐작된다.

Self-portrait with Halo, 1889

아를에서 고흐를 떠나 1889년 4월에 세번째로 퐁다벵으로 갔다가, 10월에
루 뿌르두로 가서 하숙집 식당의 찬장 위쪽 거울 판에 이 그림을 그렸다.
반대쪽에는 친구 마이엘 데 팜의 초상이 그려져 있다. 사과와 뱀, 머리 위의
노랑빛 관 등을 추측하면 고갱이 여기에서 자기를 구세주(救世主)로 견주어
나타내고 있는 것이 분명 하다. 배경의 강한 빨강과 앞쪽의 강한 노랑으로
화면을 이등분하여 상태티즘(Synthetisme:종합주의)의 지도자상으로 부각
하여 평면적으로 밀어버렸다. 그러나 밝고 빛나는 색채에도 불구하고 그림이
주는 인상은 어둡고 시니크한 괴로움이 감돌고 있는 것은, 그를 둘러싸고 있는
동료들 속에서 이 야만인의 고독을 방영하고 있는 것이리라.
바로 직후에 타히티의 원시림에 자기를 던져, 그 야성을 불태울 거친 이지(理智)
의 힘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Self-Portrait with the Yellow Christ, 1889-90

고갱은 1889년 <황색 그리스도>라는 작품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경건하게 그려야 할 그리스도가 마치 브르타뉴의 농부처럼 그려졌다는 이유였다.
이후 고갱은 자신의 자화상에 <황색 그리스도>를 배경으로 그려 넣었는데,
좌우가 바뀐 것으로 미루어보아 거울에 비친 <황색 그리스도>를 그린 것이다.
화면 오른쪽 위로 보이는 도기 항아리는 고갱이 직접 만든 것으로서, 그 또한
자신의 얼굴 모습을 형상화 한 것이다. 항아리의 괴기스러운 형상과 그리스도의
얼굴, 모두 다른 모습이지만 그 속에서 고갱의 자화상을 연상할 만큼 세 이미지
는 미묘하게 얽혀 있다.

Portrait of a Woman, with Still Life by Cezanne, 1890

M. Loulou, 1890

The Loss of Virginity, 1890-91

Vahine no te tiare (Woman with a Flower), 1891

Faaturuma(몽상), 1891

Femmes de Tahiti OR Sur la plage(Tahitian Women OR On the Beach), 1891

이미 브르타뉴 지방에서 원시성과 야만성을 발견한 고갱은 마침내 1891년
그토록 동경하던 원시적인 삶을 찾아 타히티로 떠났다. 그에게 타히티는 원시적
인 종교성, 그 끝없는 탐구에 대한 최후의 답안으로 여겨졌다. 고갱은 타히티에서
나른한 여인들의 자태, 우수에 찬 시선 등에 매료되었다. <타히티 여인들> 혹은
<해변에서>로 알려진 이 작품은 해변가에 앉아 있는 두 여인의 모습을 아주
가깝게 묘사하였는데, 대담한 구도와 과감한 색채가 돋보인다. 화면은 전면의
여인들이 앉아 있는 공간과 뒷 배경을 구획 짓는 수평띠에 의하여 평면성이 강조
되고 있다. 이러한 구성은 브르타뉴 시기 고갱이 즐겨 썼던 도식적인 구성으로서
화면을 가로지르는 수평선이 화면의 깊이감을 약화시켰다. 한편, 이러한 명확한
구도 속에서도 여인들의 자세는 시각적인 균형을 최대한 고려하여 그려졌다.
왼편에 앉아 있는 여인의 옆 얼굴과 앞으로 내민 오른팔, 그리고 오른편 여인의
뭉툭한 발바닥과 툭 불거져 나온 무릎의 선 등이 이루어내는 시각적인 조응은
작가의 치밀한 조형 의식이 뒷받침된 것이다.

Ia Orana Maria(Hail Mary:이아 오라나 마리아), 1891

이 작품을 보았을 때 처음 받는 인상은 화려함과 풍성함, 그리고 다채로운 충실감
이다. 캔버스 가득 빨강과 노랑과 녹색, 그밖에 여러 가지 색채가 화려한 색의
교향악을 울리고 있다. 오른쪽 앞에서 아이를 어깨에 태운 채 비스듬하게 선
여자, 왼쪽 조금 뒤에서 두 손을 모으고 예배 드리는 듯한 몸짓을 보이는 웃옷을
벗은 두 여자 등 아이를 포함한 이 네 사람이 화면의 주요 등장인물이라는 것은
한눈에 보아도 분명한데, 그 인물들은 물론이고 주위 풍경이, 바로 앞에 큼직하게
그려진 바나나에서 배경의 수목, 꽃, 풀들, 나무 사이로 보이는 오두막에 이르기
까지 각각 명확한 형태와 강한 색채로 빛나고 있어서 한없이 충실한 느낌을 준다.
여기에서 고갱은 화면의 모든 부분을 어떤 색과 형태로 다 메우지 않으면 성이
차지 않는 것 같다. 같은 야외 풍경이라 해도 인상파의 모네나 피사로의 세계와는
너무도 다르다.

이 작품의 의미는 제목대로 남태평양 타히티 섬의 정경을 그리면서 고갱은 거기에
기독교적 의미를 넣었다. 사실 고갱은 1892년 3월 11일자로 타히티에서 파리에
있는 친구 다니엘 드 몽프레드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노란 날개를 단 천사가 두 사람의 타히티 여자에게 마리아와
예수를 가리키는 것을 그린 거야. 마리아도 예수도 역시 타히티 사람이지.
그들은 모두 벗은 몸 위에 팔레오를 두르고 있어. 팔레오란 꽃무늬가 있는 천을
말하는데, 그것을 적당하게 허리께에 두르는 거야. 배경은 매우 어두운 산과
꽃이 핀 식물로 채워져 있어. 길은 짙은 보라, 전경은 에메랄드 그린이고 왼쪽
앞에 바나나가 있어. 나는 비교적 이 작품이 마음에 들어..."
요컨대 고갱은 분명히 의식적으로 타히티 사람 마리아와 예수를 그렸다.
그것도 정확하게 기독교의 도상학을 바탕으로 한 종교화이다. 고갱은 현실에서
눈앞에 있는 세계를 종교적 환상의 배경으로 이용했다. 고갱의 이 경향은
이미 1880년대 후반부터 그의 작품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가장 잘 아려진 예로
<설교 후의 환영>, <황색 그리스도>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종교적 환상
회화들은 주제의 내용에서 이미 인상파와 정면으로 대립할 뿐더러 조형 표현
에서도 인상파의 수법과는 정반대 방향을 보여준다. 고갱의 이 작품은 종교적인
환상이라는 주제의 본질과 종합주의라는 조형 미학, 타히티 섬의 영향으로 복잡
하고 다양한 색채의 배합, 그 풍요한 색채 세계에 수많은 이국적 풍물의 등장,
새로운 인간상의 발견 등이 모두 담겨져 있는 말 그대로 종합적인 작품이다.

<이아 오라나 마리아>에서 성모의 모델이 된 것은 고갱이 타히티에 건너와서
얼마 지나지 않아 함께 살게 되었던 '테후라'라는 처녀다. 테후라는 이 작품만이
아니라 <해변의 타히티 여자>를 비롯하여 <몽상>, <아레오이스의 여왕>,
<귀신이 보고 있다> 등 많은 중요한 작품의 모델이 되었다. 고갱은 테후라의
모습을 통해 마오리족 사이에 살아 있는 당당한 원시적 생명력을 전하려는 것
같다. 원래 이 작품의 구도는 1889년 만국박람회 때 고갱이 사들였다고 생각
되는 인도네시아 자바의 보로부두르 유적의 부조 사진을 바탕으로하고 있다.
합장한 두 여자의 포즈가 어딘가 어색한 것도 실은 그 때문이다. 또 고갱은
보로부두르의 부조에서 부처가 서 있는 장소에 테후라를 세우고 더구나 그녀를
성모로 바꾸어 놓았다. 이 그림에서는 분명히 테후라가 주인공이며, 고갱은
테후라를 성모로 그림으로써 화면에 정신적 차원을 더함과 동시에 기독교의
전통에 거의 이교적인 새로운 생명력을 부어 넣으려 했다.

The Meal(The Bananas:식사), 1891

장르화의 분위기와 정물화가 절묘하게 조화된 이 작품은 고갱이 타히티를 처음
방문하였던 1891년 그려진 것이다. 고갱은 이 작품에서 검소한 식탁 앞의 부동
자세의 아이들을 그렸다. 정밀하지만 단순한 구성으로 열대 원시림 속에서 찾고
자 했던 원시적인 생활 방식에 경의를 표하고 있다. 고갱이 타히티의 첫 방문 때
접했던 원주민들의 조용하고 엄숙한 생활 자세는 그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고
한다. 견고한 대상의 입체감, 테두리의 분명한 윤곽선, 하얀 식탁보 등은 세잔의
정물화를 연상시킨다. 화면을 가로지르는 식탁은 정물이 놓여 있는 식탁 전면,
그리고 인물들이 앉아 있는 뒤편 공간으로 공간을 단순하게 이분화하고 있다.
<타히티 여인들>에서처럼 화면을 가로지르는 수평선이 공간을 구획 짓는
이러한 구도는 브르타뉴 시기부터 고갱이 즐겨 썼던 도식적인 구성이다.

Aha oe feii?(Are You Jealous?당신 질투하나요?), 1892

타히티란 한 원시적인 낙원에 사는 한가로운 주민의 생활을 단면적(斷面的)으로
잘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다. 대담한 구도에 두 인물의 누움과 앉음의 배치, 양광
(陽光)과 음영(陰影)의 배치에서 뭔가 비밀스러운 회화(會話)를 누구나 상상 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고갱은 이국적이고 원시적인 것에 대한 열정을 젊고 아름다운
폴리네시아 여성의 따뜻한 피부색을 통해 표현했다. 이를 통해 점점 비인간화
되고 억압적으로 변모해 가는 근대 세계와는 거리가 먼 일종의 잃어버린 낙원의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Fatata te Miti(Near the Sea), 1892

고갱이 남태평양에 머무는 동안 그린 작품들은 자연과 도덕적인 순수성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바닷가 풍경은 '묘사'와 '암시'를 결합시키고
있다. 대담하고 독특한 자연의 색채, 원주민의 그을린 몸, 무성한 식물은 당시
유럽인들의 눈에 낯선 것들이었다.

Nafea faa ipoipo? (When will you Marry?), 1892

타히티에서 그린 고갱의 작품에는 재미있는 제목이 많다.
<언제 결혼하니?>, <어머, 질투하고 있니?>, <왜, 골이 나 있니> 등, 그 외에도
대화의 단편을 제목으로 하고 있는 것이 많다. 일체의 인공적(人工的)인 여벌문화
가 없는 타히티의 생활에는 그 일상의 한 장면 장면이 상징적인 의미성(意味性)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1892년 7월에 그는 부인 메트에게 '나는 많은 일을
하고 있소. 지금에 와서야 이 토지와 그 향기를 알게 되었소, 나는 타히티 사람들
은 어디까지나 수수께끼의 모습으로 그리고 있긴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마오리족
(族), 바로 그것이오. 이런 것을 알기 위하여 나는 일 년이 걸려 버렸소.'라고 쓰고
있다. 그러한 그의 이해가 이 그림 속에 확실히 나타나고 있다. 두여인의 동(動)
과 정(靜)의 자세의 대조(對照)에 하반신(下半身)이 겹쳐있는 그 미묘한 뉘앙스가
인상적이다.

Arearea(Joyousness:기쁨), 1892

이 작품은 고갱이 처음으로 타히티에 체류하는 동안 그린 세 점의 걸작 가운데
하나이다. 타히티의 신화를 통해 고갱은 보는 사람의 상상력이 흡사 음악처럼
작용할 수 있는 장식적인 미술을 창조하고자 했다. 그림의 중앙에 그려진 땅은
공간을 따뜻한 색상으로 채우면서 서정적인 형태를 만들어 내고 있는데, 이는
실재하는 모양과 색이 아니라 상상력으로 그려진 것이다. 고갱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색이나 선으로 똑같이 표현하려 하지 않고, 그 선과 색의 배열 사이에
있는 신비한 친화력을 드러내고자 했다. 왼쪽 위에 부드럽고 연한 색을 발라
표현한 신상은 달의 여신 히나를 그린 것이고, 중앙에 위치한 인물이 연주하고
있는 피리는 타히티에 머물면서 고갱이 느꼈던 밤의 고요함을 표현한 것이다.
부자연스럽게 자리한 왼쪽의 붉은 개는 고갱이 의도적으로 묘사한 것이며, 다른
많은 작품에도 등장하고 있다. 의미가 불분명한 이 개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반감을 표했고, 한 비평가는 이 개를 악의 요정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 작품을 통해 고갱은 티치아노나 조르조네와 같은 거장들이 발전시켜 왔으며,
동시대의 화가들 역시 매달리고 있었던 유럽의 낭만적인 전원화 전통을 확대
시키고 있다.

Market Day, 1892

Matamoe, 1892

Spirit of the Dead Watching(귀신이 보고 있다), 1892

Woman Holding a Fruit, 1893

Merahi metua no Teha'amana (Ancestors of Teha'amana), 1893

Portrait of the Artist with the Idol, 1893

Portrait de l'artiste (Self-portrait), 1893-94

1895년 고갱이 파리 생활을 청산하고 타히티로 떠나기 1년여 전 그린 작품으로,
프랑스에서 그린 최후의 자화상으로 남아 있다. 이 작품 역시 고갱의 다른 자화상
처럼 3/4 정면 자세를 취하고 있다. 앞서 그려진 세 점의 자화상 - <후광이 있는
자화상>(워싱턴 내셔널 갤러리 소장),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오르세
미술관 소장), <팔레트를 든 자화상>(파시데나 미술관 소장) - 보다 훨씬 어두운
색조로 그려진 이 작품에는 당시 고갱의 힘겨웠던 삶이 깔려 있다. 1893년 코펜
하겐의 친정집에서 아이들과 함께 기거하고 있던 고갱의 부인, 메테는 파리로
돌아와 다시 함께 생활하자는 고갱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으로
외로워하던 고갱은 다시 안나라는 여인과 동거하였으나, 1894년 그녀마저 그의
집을 털어 달아났다. 게다가 다리의 부상으로 육체적인 고통까지 겪었던 고갱은
결국 파리 생활에 염증을 느껴 다시 타히티로 돌아가게 된다.
<황색의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에서도 자신의 그림을
배경 속에 집어넣었다. 자화상 뒤로 보이는 그림은 1892년에 그려진 <마나오
투파파우>로서, 거울에 비친 모습으로 그려졌다.

Mahana no atua(Day of the Gods), 1894

Breton Peasant Women, 1894

1886년 7월 고갱은 문명에 대한 회의를 품고 파리를 떠나 프랑스 서부 부르타뉴
지방의 퐁타벵에 체류한다. 페루의 리마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고갱은 줄곧 문명
에 대하여 회의하였다. 그는 자신의 예술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이상향, 자연의
순수함을 찾아 퐁다벵으로 향한 것이다. 이 그림은 1894년에 그려진 작품으로
경제적 궁핍과 악화된 건강 등으로 고갱의 일생 중 가장 힘든 때 그려진 작품이다.
1891년 원시의 야만성을 찾아 타히티로 떠났던 고갱이 다시 브르타뉴를 찾았을
때, 그는 퐁다벵 근처의 여인숙에 맡겨 두었던 그림들도 되찾지 못하고 경제적으로
도, 심리적으로도 위축된 상태에 있었다. 전면에 우뚝 서 있는 두 여인들은 부르타
뉴 지방의 민속 의상을 입고 있긴 하지만, 황토색의 투박한 얼굴 생김새, 크고 검은
발의 모습 등이 오히려 타히티 여인에 가깝다. 오른쪽의 숲 역시 타히티의 열대림
을 연상시킨다. 프랑스에 돌아와서도 타히티의 순수한 자연을 그리워했던 고갱의
안타까움, 타히티의 강렬한 영향력이 묻어난다.

Te arii vahine (The Noble Woman), 1896

Nevermore, 1897

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 1897

단순화된 형태, 종합적이고 기하학에 가까운 윤곽, 강한 명암대조가 모든 관습이
사라진 소박하고 신비로운 세계를 암시하고 있다.

The White Horse, 1898

타히티에서 머물다 1893년 8월 프랑스로 간 고갱은 파리와 브르타유 지방을
오간다. 그 해 11월 뒤랑뤼엘 화랑에서 대양주 작품 전시회를 갖고, 1895년
9월 다시 타히티에 정착한다. 1897년 고갱이 가장 아끼던 딸 알린의 죽음은
그가 자살을 기도할 만큼 심신을 극도로 황폐하게 만들었고, 그 다음 해에
그려진 이 작품은 늪의 수면이나 나무의 검푸른 가지가 전체적으로 어둡고
침체된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 짙푸른 웅덩이와 그 물을 마시고 있는 하얀
말, 어두운 색조의 나뭇가지와 늪 가에 피어 있는 하얀 꽃, 무표정하게 말에
앉아 사라져 가는 섬의 여인 등은 이상한 구도와 침묵을 만들고 있다.
오랫동안 이해되지 못했던 이 작품은 고갱의 타히티에 관한 많은 그림들과 더불어
배경과 색채의 조화로 나타나는 효과가 최상의 결합을 이루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고갱의 독창적인 작품이면서도 고대의 전형적 양식인 파르테논 신전의
백마의 모습을 차용하고 있으며, 나무는 브르타뉴 시절의 그림들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던 일본 판화가 안도 히로시게의 영향을 드러내고 있다.

Two Tahitian Women, 1899

Riders on the Beach, 1902

이 작품은 고갱 최후의 거주지인, 역시 히바 오아 섬의 아투아나 해안에서 그려진
그림이다. 개개의 포름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그것들을 서로 결합시키는 긴밀한
공간 감각(空間感覺)은 드가를 상기시킨다. 고갱은 선배 드가를 일생 동안 찬미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만년의 이 작품에 있어서 그는 다시 드가에 새삼
스럽게 더 접근한 느낌이다. 그러나 동시에 화면의 대부분을 메운 모래밭의
분홍색은 고갱 특유의 것으로서, 포비즘(Faubism)에 발전하는 방향을 나타내고
있다. 이 작품을 그릴 무렵 고갱은 관헌(官憲)과의 분쟁과 병의 악화 때문에 매우
곤경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화면의 생기있는 표현은 조금도 그런 어두운 그림자
가 없다. 그리고 시력이 아주 나빠졌는데도 최후까지 작가로서의 힘을 잃지 않고
제작할 수 있었던 점을 충분히 알 수 있다.

Barbarous Tales(미개한 이야기), 1902

만년의 고갱은 이 섬의 여러 가지 전설에 귀를 기울이고 흥미를 느낀다.
또 그것을 자기 나름대로의 이야기로, 때로는 신비하게, 또 때로는 상징적인 성격
으로 화면을 이루어 나간 것이 많다. 이 작품에서도 불상(佛像)과 같은 모습으로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젊은 남자와 그 한쪽에 가까이 붙어 앉은 젊은 여인, 그들을
둘러싼 나무들과 꽃들, 이것도 고갱이 히바오아 섬에서 듣고, 보고, 느낀 이야기의
한 장면일 것이다. 그 배후의 기이한 인물은 고갱의 퐁 타방 시대의 야코브 마이
에르 데 항이다. 곱사등이며 조그맣게 생긴 사내로서 항상 20파운드나 되는 성서
를 들고 다니는 이 남자를 여기에 그림으로써 고갱은 스스로의 과거와 현재를 한꺼
번에 그리려 했던 것 같다. 그의 과거에 힘들고 괴로웠던 나날이 만년의 그가 본
섬의 일상성에 결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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